Chapter. 61 그 자식이랑 잤어?
거실에서부터 들리는 기욱의 발소리에 서진이 다급하게 휴대폰을 만졌다. 간신히 우민과의 통화 내역을 지운 서진이 2G 휴대폰을 껐다. 철컥, 바깥쪽에서부터 문이 열리자 서진은 휴대폰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
서진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에 닿았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은 기욱이 정체불명의 검은 봉지를 내려놓으며 서진을 침대 위로 던졌다. 안 그래도 일어설 기운이 없었던 서진은 힘없이 침대에 쓰러졌다. 바닥으로 몸을 숙인 기욱은 서진에게 준 2G 휴대전화를 주웠다.
“아…….”
위험하다. 기욱이 들어오기 전 우민과 통화했던 기록을 전부 지웠지만, 만약에라도 지우지 못한 기록이 남아 있거나 우민이 다시 통화를 걸면 끝이었다. 기욱의 눈치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담배를 피우며 방 안으로 들어온 기욱은 짧아진 담배를 그대로 입에 물며 서진의 2G 휴대폰의 배터리를 분리했다. 그런 뒤 한쪽 배터리를 제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강서진. 휴대폰 만졌어?”
“아, 아니요…….”
침대 옆 선반에 있는 재떨이에 담배를 끈 기욱이 서진의 빨갛게 부푼 뺨에 손을 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기욱은 처음 한 대 이후로 얼굴을 건들지는 않았다. 뺨은 아직도 부어 있었지만, 내일 아침이면 그냥 얼굴이 좀 부은 정도로 가라앉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진짜로? 거짓말하면…….”
“안 했어요. 안 했어요. 흐흑… 잘못했어요!”
아아, 정말 최악이었다. 서진은 이 순간에도 기욱에게 매달리다 다시 거짓말을 해야 하는 자신이 너무나 괴로웠다.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서진은 진실을 들키는 것이 두려웠다. 어느 쪽이든 기욱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건물 보듯 뻔한 일이었다.
“너, 그 자식이랑 잤지?”
“흐흑…, 자… 잤어요. 잤으니까 이제 제발… 아윽… 그만….”
“씨발.”
기욱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서진에게 일방적으로 욕을 뱉고 있었다. 두 번을 넘게 의식을 잃은 서진은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은 기욱을 견디다 못해 대훈과 잤다고 거짓말을 했다. 안 잤다고 말하면 말할수록 거짓말쟁이가 되는 건 서진이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행위와 질문에 서진은 이젠 뭐가 진짜고 거짓말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 기욱의 말처럼 서진은 스스로가 정말로 아무 남자에게나 다리를 벌리는 사람이라는 착각마저 들었다. 기욱은 서진의 위에 올라타 허벅지를 벌렸다. 기욱의 손가락이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서진의 안을 거칠게 비집고 들어왔다.
“그, 그만… 하윽….”
“좋아? 어? 미치지 아주? 내 이름 팔고 뭐라고 꼬셨어? 왜 남자한테 허리 흔드는 게 취미잖아 너.”
“흑, 그런 적… 흐흐흑…….”
“없어? 이렇게 좋아 죽는데? 너 강재혁이랑도 잤냐?”
“그럴 리가…!! 하윽… 아파. 아파요.”
기욱의 손가락이 안을 긁을 때마다 남아 있던 정액이 손가락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이렇게 질질 싸면서. 아니라고?”
“당신이…!! 그만, 그만…… 흐흑….”
폭력은 사람을 무뎌지게 만들었다. 좀 더 어렸을 때는 더 반항했던 것 같은데, 요즘의 서진은 기욱에게 반할 마음도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욕이라도 해 보고 싶어도, 욕을 하는 그것보다 그로 인해 기욱이 때리는 것이 더 무서웠다. 서진의 안에서 손가락을 빼낸 기욱은 문 쪽에 던져 뒀던 봉지를 가져와 엎었다. 딱딱한 상자들에 담긴 물건들을 본 서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 이게 뭐예요…….”
“너, 어차피 아무거나 상관없잖아?”
“잠깐만… 이 이런 건, 이런 건 정상이 아니에요! 시, 싫어… 아악…!!”
도대체 이런 걸 어디서 샀는지도 모르겠거니와 서진은 절대 싫다며 고개를 저었다. 침대 위를 기던 서진은 결국 침대 아래로 떨어지며 바닥을 기었다. 서진이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들고 문을 열려 하자 기욱이 한숨을 쉬며 서진이 주운 열쇠를 빼앗아 주머니에 넣었다.
“이거 안 맞는 거라고 몇 번을 말해.”
눈속임용 열쇠를 들고 발버둥을 치는 서진을 볼 때마다 기욱은 서진이 안쓰럽기는커녕 답답했다. 그렇게 했는데, 아직도 도망칠 기운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젊다는 건 역시 좋은 것이었다. 기욱은 요즘 들어 나이를 먹기는 먹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문에 기댄 서진은 침대에 앉아 상자에 있는 성인용품의 박스들을 뜯기 시작하는 기욱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침대에서 등을 돌려 몇 번이나 열리지 않을 문을 두드렸다.
“흐흑… 제발… 제발 내보내 줘…….”
차라리 기절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창문 하나 없는 방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서진의 숨을 죄여 오고 있었다. 너무 오래 있어서 그런지 이대로 질식을 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대충 상자를 바닥으로 내던진 기욱은 서진을 끌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너 오늘 못 자.”
“하윽….”
서진이 일어나지 못하게 누른 기욱은 한 손으로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 담배 연기를 옆으로 내뱉은 기욱이 불이 붙은 담배를 서진의 몸 쪽으로 내밀었다.
“내가 저번에 말했지.”
“무슨….”
“다시는 내 말에 거부할 수 없도록 해 주겠다고.”
“아…, 아아악! 하지 마. 아아, 아악!! 싫어요. 싫다고…!!”
후둑, 기욱이 옆으로 털은 담뱃재 일부가 서진의 몸에 튀었다. 반항하는 서진을 누르는 것도 한계가 있었던 기욱은 서진의 목을 손으로 쥐었다.
“컥컥… 흐흑…….”
기욱의 엄지가 정확하게 기도를 누르며 서진의 숨을 틀어막았다. 서진의 의식이 끊겨 갈 즈음 기욱은 손을 놓았고, 정신을 차린 서진은 반항은커녕 헛구역질하며 숨을 고르기 바빴다. 그리고 서진이 채 기욱에게 반항하기도 전에 기욱의 담배가 서진의 맨살에 닿았다.
“아아악…!! 아악! 흐흑…… 흐으윽….”
몸을 비틀면 비틀수록 피부에서 느껴지는 뜨거움에 서진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머리채를 누르며 밑에 깔린 이불을 입에 물렸다.
“으으읍… 으으으… 으읍….”
필사적으로 입에 물린 이불을 깨문 서진은 눈을 질끔 감았다. 뒤늦게 담배 향에 섞여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
“죽어… 흐으윽…… 으읍… 잘못했어요! 아으윽!”
최악이었다. 어쩌면, 여기서 더 내려갈 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기욱은 전부터 상의를 크게 입는 서진이 묘하게 거슬렸다. 그런 서진을 지나갈 때마다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기욱이 남긴 흉터는 앞으로 서진이 조금 더 옷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끔 할 것이 틀림없었다. 불이 꺼진 담배를 바닥으로 내던진 기욱은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그만, 하윽… 그만 아파….”
“손 내놔.”
기욱은 서진의 손을 잡아당겨 봉지 안에 있었던 물건 중 하나인 털이 달린 수갑을 꺼내 채웠다. 수갑을 살 계획 같은 건 없었다. 성인용품 자체가 계획에 없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기욱은 무작정 집어 담았던 물건 중에 세트로 붙어 있었다는 사실을 가게를 나온 뒤에 알았다. 넥타이로 묶는 것보다야 내구도는 약해도 흔적이 남지 않을 테니 이만한 것도 없었다.
“…했어요. 제가. 제가, 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아, 안 그럴 테니까…… 흐극….”
다가오는 기욱에 서진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힘으로 발버둥을 쳤지만, 그것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목을 쥐는 기욱의 손에 서진의 팔과 몸이 축 처졌다. 크게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서진의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기욱에 의해서 강제로 들린 허리에 갈 곳 없는 손이 허공을 스쳤다. 도대체 언제쯤이 되어야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을까.
* * *
“아씨….”
밤새 잠을 설친 우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병원 밖으로 나왔다. 언제나 그렇듯 오전에 출근하는 의사들이 오기 직전의 병원이 가장 싸늘했다. 새벽도, 아침도 아닌 애매한 시간대. 돌아다니는 것이라고는 밤을 꼬박 새운 간호사들과 의사들뿐이었다.
우민은 서진의 일로 밤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서진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걸까? 정말 아팠던 것이 맞을까? 오지 않는 잠에 새벽에 몇 번이나 서진의 번호로 전화를 했지만, 어느 번호나 다 휴대폰이 꺼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간호사들은 새벽부터 병동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우민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 교수님, 무슨 일 있어요?”
보다 못한 최고참 수간호사가 간호사 데스크 너머로 우민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밤새 우민이 나와서 호들갑을 떨 만한 일은 특별하게 없었다. 괜히 교수인 우민이 저러고 있으니 혹시 놓친 게 있나 걱정이 됐다.
“하하, 아닙니다. 그냥 좀……. 우울해요.”
우민은 진심으로 우울했다. 무슨 일이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또 막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어서, 억지로 잠을 자긴 했지만. 자는 게 자는 게 아니었다. 교수가 된 이후로 거의 맛보지 못했던 자괴감이었다. 딱 봐도 환자 일은 아니라고 짐작한 수간호사가 다른 간호사들에게 신경을 쓰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어! 선배, 여기서 뭐 해요?”
“넌 또 왜 올라온 거야?”
“가지러 올 것도 있고……. 아침 미팅, 저도 참가 좀 하려구요.”
“오늘? 트라우마센터에서 넘어온 환자 있었던가?”
내려오기 전 스케줄을 확인한 우민은 자잘한 경환은 있어도, 정규 수술을 바꾸면서까지 심각한 환자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우민의 말에 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구요. ER 이야기예요. 욕 좀 하려구요. 아, 이거 안 교수님이 주신 건데 드세요.”
“고맙다.”
마침 갈증이 났던 우민은 진호가 주는 박카스를 건네 마셨다. 간호사들의 눈치가 보였던 진호와 우민은 비교적 조용한 의국 안으로 들어갔다. 컴퓨터 책상 앞에 엎드려 있던 연태가 갑자기 들어오는 둘을 보고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자라, 자.”
“아…… 하하, 네.”
신경 쓰지 말라는 우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태는 담요를 덮어쓰고 엎드려 눈을 붙였다.
“너 인마, 밑에 센터 가더니 그쪽 사람들이랑 너무 친해진 것 같다? 좀 서운해지려고 하는데.”
“한번 일해 보라고 밀어 넣은 교수님이 할 말입니까?”
“그렇게 적응 잘할 줄은 내가 알았겠냐? 그보다, 너 혹시……. 아니다. 잠깐만.”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기욱의 모습을 포착한 우민은 다 마신 박카스를 근처에 내려놓은 뒤 의국 밖으로 나갔다.
“박기욱!”
기욱은 갑작스럽게 의국에서 튀어나온 우민에 놀라면서도 태연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일찍 왔네?”
출근 시간까지는 대략 한 시간 정도가 더 남아 있었다. 우민은 보기 드물게 일찍 출근한 기욱의 차림을 적당히 훑었다. 기욱은 그런 우민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진 않았다. 기욱이 입을 열기 전에 우민이 먼저 말을 꺼낸 것도 한몫했다.
“강서진.”
“…서진이가 왜 그러십니까?”
강서진이라는 말에 기욱이 조심스럽게 반응했다. 서진에 대한 변명은 끝내 놨을 것이었다. 기욱은 요즘 들어 우민의 서진에 관한 관심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교수가 된 뒤의 우민은 레지던트 시절과 달리 대체로 사교성이 좋은 편이었다. 사교성이 좋다고 해야 할까? 우민의 레지던트 시절을 잘 알고 있는 몇 없는 사람으로서는 우민이 다른 사람이 됐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빨랐다.
“강서진 지금 어디 있어?”
기욱은 우민의 말에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서진이 아프다는 사실을 우민이 모를 리는 없다. 보통 누군가 아프다고 말하면 가장 먼저 묻는 말은 몸에 대한 안부가 먼저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수상하게 여겨지고 있다고 생각한 기욱이 차분하게 말했다.
“서진이라면 지금 우리 집에 있습니다. 걱정되기도 하고……. 도저히 집에 혼자 둘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아, 네가 발견했다고 그랬지? 강 선생은? 밤새 안 보이던데 언제 출근해?”
“서윤이라면 오늘 출근 안 합니다. 누나랑 놀러 갔거든요. 연차 낸다고 꽤 예전부터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기욱은 말을 흐리며 우민이 서윤을 찾는 일에 대해 생각을 했다. 그러나 우민은 그리 만만하진 않았다. 얼굴에 변화 하나 없이 그냥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서진이는 지금 너네 집에 있는 거 맞지?”
“예. 자는 거 보고 나왔으니까요.”
기욱은 우민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서윤과의 신혼집도 집이지만, 서진을 두고 온 별장도 기욱네 집 자산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기절하듯 쓰러진 서진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온 것 또한 사실이었다. 무엇 하나 거짓이 없었다. 단지 어떤 식으로 말하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몸은 괜찮아? 하루 정도 더 쉬는 게 좋지 않겠어? 걔 어차피 다음 주에 우리 팀인데 그냥 쉬라 그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본인도 그 이상 쉬는 건 주변에 민폐라고 하더라구요. 상황 보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한 선배, 서진이에게 관심이 많으시네요.”
기욱이 조심스럽게 우민을 떠봤다. 기욱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집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우민은 그런 기욱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넌 교수가 돼서, 그게 할 말이냐?”
교수로서의 당연한 책임이라는 허울 좋은 변명에 기욱은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역시 우민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 좋게 변명을 하는 것도 일품이었다.
“죄송합니다. 질문이 경솔했네요.”
“알아들었으면 됐다. 나 잠깐, 위에 올라갔다 내려올게.”
우민은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슬슬 집에 들어갔다 온 의사들이 출근하고 있었다. 기욱의 민감한 반응 탓인지 우민은 차마 서진의 꺼진 휴대폰에 관해 물어볼 수가 없었다.
― 지금 거신 전화기는 고객님의 사정으로 전원이 꺼져 있어…….
서진의 휴대폰은 여전히 꺼진 상태였다.
* * *
기욱에게 근 새벽이 될 때까지 당하고, 정신을 잃은 서진은 늦은 오후 무렵 정신을 차렸다. 온몸 아프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바닥에는 온갖 종류의 성인용품들과 서진의 옷가지들이 굴러다녔다. 오후에 일어났다고 해도 시계도, 창문도 없는 방은 시간이라는 것 자체와는 동떨어진 공간이었다.
“흐윽…. 주세요. 잘못했어요. 열어 주세요. 제발….”
기욱이 없는 것을 확인한 서진은 아픈 몸을 이끌고 방에 있는 물건이란 물건은 전부 뒤졌지만,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도 시간을 확인할 만한 것도 나오지 않았다. 전부 기욱이 사전에 치워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으흑…….”
시간이 지날수록 기욱에게 밤새 당했다는 사실보다 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갇혀 있다는 사실이 서진을 더 미치게 했다. 잘못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이런 말만 몇 번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서진은 혹시나 기욱이 거실에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문 너머에서는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침대에 올라갈 기운도, 옷을 챙겨 입을 생각조차 나지 않았던 서진은 바닥에 떨어진 이불로 몸을 말았다.
“했어요… 잘못했어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서진은 아무도 듣지 않는 말들을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그 좁은 방 안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버텼던가? 그 시절 서진이 서윤에게 집착했던 이유를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서진에게 서윤은 세상 전부이고, 삶의 이유였다. 이제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조차도 아닌 모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멀리서 자동차 배기음과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잘못 들은 건 줄 알고 넘기려던 찰나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예민해진 서진이 몸을 일으켜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힌 문을 올려다봤다. 제발 누군가, 아무라도 좋으니까 문을 열어 줬으면 좋겠다. 서진은 바닥을 기며 닫혀 있는 문고리를 손으로 쥐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바깥쪽으로 열렸다. 문고리와 함께 끌려 나온 서진은 기욱의 무릎 근처에 몸을 부딪쳤다.
“…….”
몸의 절반이 거실로 나오자 훅, 하고 시원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머리가 어지럽고, 의식을 잃을 것만 같은 답답함은 가셨으나 그것뿐이었다. 옷이 바뀌어 있는 기욱을 서진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기욱이 채 서진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서진이 기욱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며 고개를 저었다. 목이 쉬어서 거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서진은 쉬어 가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한 글자씩 입을 열었다.
“잘, 못, 했어요.”
“뭘?”
“다, 다… 다요. 저, 전부 다. 말 안 들은 거랑 다요.”
반항하며, 싫다는 소리부터 나왔던 처음과는 확실히 달라진 서진의 반응에 기욱은 제법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은 몸을 숙여 주저앉은 서진과 눈을 맞췄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눌어붙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때마다 서진의 몸이 움찔거리며 떨렸다.
“그러니까.”
“…….”
“처음부터 이랬으면 좋았잖아.”
기욱은 스스로를 제법 공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준 만큼 되돌려 준다. 남에게 빚을 지면 어떤 식으로는 갚는다. 꼭 빚만이 아니라도 그렇다. 호의를 보이면 보인 만큼은 늘 해 줬다. 기욱의 인간관계는 호혜성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서진은 기욱의 자존심을 좀 긁어먹는 아킬레스건이 되어 가고 있었다. 서진의 말대로 기욱은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었고, 또 누구든 꼬실 수 있었다. 예전부터 그래 왔고, 어렸을 때부터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이렇게 미치도록 원하고, 또 원하는데도 불구하고 눈 하나 끔벅하지 않는 서진은 기욱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우성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그 순간부터 어쩌면 서진과 마찬가지로 기욱의 시간 또한 멈춰 버렸는지도 몰랐다.
“…요. 목말라요.”
미쳐 버릴 것만 같은 무료함과 더불어 서진을 괴롭게 만든 것은 목마름이었다. 정신을 차린 이후 아무것도 마시지 못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욱은 터벅터벅 거실 쪽으로 가 컵에 물을 따라 왔다. 서진은 기욱이 준 물을 무슨 정신으로 마셨는지도 모를 정도로 빠르게 마셨다. 서진의 입가로 마시지 못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기욱은 서진의 손에서 비어 있는 물 컵을 빼앗았다. 물 컵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가 부족하다고 말을 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기욱은 물을 더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은 충분하면 그게 당연한 권리라고 착각을 한다. 서진의 갈증은 오히려 물을 마셨을 때보다 한 컵 마셨을 때 더욱 달아오르고 있었다. 기욱은 가방 안에서 서진의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화면이 켜지자마자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창이 떴다. 혹시나 하고 서윤의 생일을 쳤지만, 서윤의 생일은 비밀번호가 아니었다. 시헌의 생일 또한 아니었다. 만약 시헌의 생일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휴대폰을 던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불행 중 다행히 서진은 그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비밀번호 뭐야?”
“kae…….”
서진이 아무렇게나 조합된 영문과 숫자를 불렀다. 서진이 말한 대로 치자 비밀번호가 풀렸다. 기욱은 비밀번호가 풀린 휴대폰 화면을 만지작거렸다. 서진은 늘 주변 사람의 생일이나 특별한 의미로 비밀번호를 설정했다. 서진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비밀번호를 그렇게 만들었을 거라고는 쉽게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슨 뜻인데?”
“아, 아무 의미도 없어요…….”
“강서진. 너…….”
“아악! 때리지 마세요. 진짜예요. 진짜 아무 의미도 없어요!! 저도 몰라요.”
“모른다는 게 뭔 소리야?”
“그냥… 흐윽, 제 병원 계정 비밀번호예요!”
무작위로 부여되는 비밀번호를 바꾸기 귀찮았던 서진은 외우기 쉽게 휴대폰 비밀번호로 설정한 것이었다. 서진은 몇 번이나 자신의 휴대폰을 쥐고 있는 기욱의 팔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하아, 알았어.”
진짜 계정 비밀번호가 맞는지는 서진의 아이디로 직접 들어가 보면 될 일이었다. 지금의 기욱은 서진이 무슨 거짓말을 해도 알아낼 만한 능력과 자신이 있었다. 강서진 따위, 무슨 짓을 하든 제 손바닥 안이었다. 기욱은 서진의 휴대폰으로 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서윤한테 전화해. 별일 없으니까 내일 저녁에 출근한다고.”
“아, 알았어요.”
“허튼소리 했다가는 가만 안 둬.”
기욱의 협박에 고개를 끄덕인 서진이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 너머에서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서윤과 짧은 통화를 했다.
“아니야. 그냥… 목이 쉬어서 그래. 괜찮아질 거야. 응. 그… 누나도 잘 놀다 오고. 알았어. 끄, 끊어.”
서윤과 통화가 끊기기 무섭게 기욱은 서진의 휴대폰을 빼앗아 전원을 껐다. 서진은 그제야 주변이 어둡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거실 한쪽에 쳐진 커다란 암막 커튼 사이에는 또 다른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한쪽 벽에 걸린 고가의 괘종시계는 이미 오후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언제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하루를 꼬박 넘게 방 안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기욱은 병원 근처에서 사 놨던 죽이 든 봉지를 내려놓았다. 사 놓은 지 시간이 꽤 지나 식었지만,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면 될 일이니 상관은 없었다.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딱 봐도 문을 닫으려는 것이 눈에 보인 서진이 기욱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시, 싫어요…! 제발… 흐흑… 두고 가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문 닫지 마세요! 싫어… 흐흑….”
“너 도망갈 거잖아.”
“안 갈게요. 안 갈게요. 흐흑, 도망 안 칠 테니까 제발요…….”
서진의 몸이 힘없이 아래로 주저앉았다. 서진의 쇄골 근처에는 지난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너무 많이 흘려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서진의 눈가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기욱은 코트 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넥타이를 꺼내 들었다.
“손 내놔.”
여전히 기욱은 서진을 믿을 수 없었다. 기욱이 뭘 하려고 하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비록 기욱이 왔다고는 하지만, 또다시 방에 들어가면 언제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장담을 수 없었다.
방 안에 갇히는 것과 도망을 칠 수 없도록 팔이 묶이는 것 중에 선택하라면 답은 정해져 있었다. 서진은 스스로 손을 붙여 기욱에게 내밀었다. 평소 손을 묶는 걸 싫어했던 서진의 태도를 볼 때 어지간히 방 안에 들어가는 게 싫은 모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기욱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서진을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끌고 데려왔다. 계단 옆 나무로 된 난간에 서진의 팔을 가져다 댄 기욱은 딱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만 서진의 팔을 묶었다. 여기라면 서진이 허튼짓을 해도 볼 수 있었다.
위쪽으로는 통유리로 되어 있는 바비큐 시설이 있었다. 시헌과 함께 갔던 곳이니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시헌과의 좋은 추억으로 가득해야 할 이곳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소한 물건 하나조차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공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구조상 서진은 거실 안쪽에 있는 기욱을 볼 수는 없었다. 기욱이 뭔가를 하고 있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만 짐작할 수 있었다. 반면 기욱은 서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기욱은 유리 테이블에 두었던 물 컵에 물을 담아 서진에게 가져왔다.
물 컵을 한쪽에 내려놓은 기욱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서진에게 입고 있던 코트를 걸쳐 주었다. 주머니 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 키 정도로 확인되는 열쇠와 지갑의 무게가 느껴졌지만, 팔이 난간에 묶여 있는 서진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서진은 이미 도망갈 의지를 절반 이상 잃은 상태였다. 도망을 친다고 해서 성공할 거라는 보장조차 없는 데다 이젠 도저히 기욱의 후환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서진은 그저 잘 만들어진 인형처럼 기욱이 내려놓은 물 컵에 담긴 물을 바라봤다.
서진이 물을 먹고 싶다는 걸 눈치챈 기욱이 서진에게 물 컵을 내밀었다.
“아.”
몸높이보다 조금 높게 묶인 서진이 손을 꼼지락거리자 기욱은 아차 싶다며 서진 향해 물 컵을 내밀었다. 서진이 손 대신 입을 가져다 대며 물을 마셨다. 서진은 그저 목이 타들어 갈 정도로 말랐고, 물을 마실 수 있다면 다른 자존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기욱은 할짝거리며 물을 마시는 서진이 강아지보다는 고양이 같다고 느꼈다. 반항할 때는 세상 무너질 것처럼 밉다가도 이렇게 얌전하게 구니 그것만큼 사랑스러운 것은 또 없었다.
“…….”
사랑이 뭐였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기욱이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 이전에 도대체 왜 서진을 보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는지조차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느 정도 마시자 애매하게 줄어든 물에 비교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기욱의 손은 그대로였다. 혀를 내밀어 물에 닿으려 노력했지만, 혀끝이 살짝 닿을 뿐 남아 있는 물을 마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기욱은 그제야 물을 마시는 걸 멈추고 눈을 뜨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진을 발견하고 물 컵을 안쪽으로 기울였다.
서진이 물을 다 마시자 기욱은 가져왔던 화상연고를 꺼냈다. 서진의 쇄골 근처에는 어젯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윽….”
검게 탄 피부에 아직도 살이 쓰라렸다.
“흉터 지겠네.”
서진은 저게 살을 지진 사람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차마 그런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서진은 기욱이 자신의 말대답을 받아 준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서진은 그것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 기욱은 서진의 말대답과 불만을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로 치부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서진의 불쾌함이나 거절의 표시는 고려의 대상조차 아니었다.
띵, 거실 안쪽에서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가 멈췄다. 기욱이 전자레인지에 데운 죽을 가지고 왔다. 수저로 죽 그릇을 한 번 뒤집은 기욱은 쯧, 하며 혀를 찼다. 아무래도 너무 많이 데운 모양이었다.
“푸, 풀어 줘요. 제가 머, 먹을 수 있어요…….”
서진은 이미 도망칠 의지가 꺾인 상태였다. 그러나 기욱은 서진의 어깨에 있는 자신의 코트를 슬쩍 보더니 말없이 죽을 계속 뒤집었다. 가짜 열쇠에도 걸려드는 서진이었다. 코트 안에는 기욱의 지갑과 차 키가 있었다. 서진이 코트를 입은 채로 도망가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냥 벌려.”
서진은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서진이 느끼는 기욱은 참으로 잔인한 사람이었다.
* * *
― 그 사람이, 원래 전직 기자 출신이래. 밀착취재 전문이었다고 하더라고. 집안은 그냥 그런데, 본인은 K대 고시 출신에 성적도 꽤 좋아. 근데 어느 날부터인가 회사 잠적하더니 사표 던졌거든. 그러고 나서 회사 차린 거야. 근데 그것도 한 삼사 년 됐나? 언젠가서부터 주변 지인이며, 회사 사람들이랑 다 연락 끊고 노숙자처럼 살았다더라고.
― 왜?
―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근데 들리는 말로는 거의 바지사장이라고 그러더라. 돈 한 푼 쓸 때마다 결재받는다더라. 실질적으로 회사 돈 쥐고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그 여자 이름이……. 아, 이건 오프레라서 내가 나중에 만나서 얘기해 줄게.
― 그러든지. 후, 끊는다. 일해야 하니까.
― 어, 그래. 나도 내일 자료 검토해야 된다. 나중에 밥 한번 사라.
태민의 전화를 끊은 기욱은 휴대폰을 옆으로 내던진 뒤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기욱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다리를 옆으로 벌린 기욱의 손이 밑에 있는 서진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흐읏… 읍….”
서진은 기욱의 통화에도 눈 하나 꿈벅 하지 않은 채 기욱의 페니스를 입에 물었다. 그저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꼿꼿하게 선 기욱의 페니스를 입에 머금으며 필사적으로 핥았다. 등 뒤로 묶인 팔이 약간 시큰거렸지만, 여기서 기욱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방 안에서 일방적으로 당하는 그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소파 뒤쪽으로 활짝 열린 방은 이미 서진에게는 들어가고 싶지 않은 장소나 다름이 없었다. 울컥, 중간에 참지 못한 기욱이 서진의 입안에 그대로 사정을 했다. 기욱이 서진의 입에서 페니스를 빼기도 전에 서진이 기욱의 정액을 목 안쪽으로 넘기는 것이 먼저였다.
“캑캑… 으읍….”
이를 악물면서 억지로 넘기려 하는 서진의 모습을 본 기욱은 손으로 서진의 턱을 들어 올렸다. 서진의 눈은 이미 반쯤 죽은 듯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서진을 소파 위로 내던진 기욱은 문이 열린 방에 들어가 바닥에 떨어진 성인용품 몇 개를 가지고 왔다. 소파 너머로 얼굴을 내민 서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너 이거 좋아하지?”
“아, 제발… 싫어…… 흐흑, 안 좋아해요.”
“거짓말하지 마. 어제도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다리 벌리고 넣어 달라고 졸랐잖아.”
“흐흑, 그런 적… 아악!”
소파에서 내려가려는 서진의 몸을 잡아 위로 올라탄 기욱은 서진의 안으로 흉측하게 생긴 모양의 딜도를 밀어 넣었다. 사실은 여성용인 모양이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덜 아문 안을 비집고 들어가는 물건에 서진은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몸을 떨었다.
“집에 돌아가면, 휴대폰 사 줄게.”
“허윽… 으… 으윽….”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서진은 기욱이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을 정신조차 없었다. 기욱은 서진이 듣고 있든 말든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너무 많이 운 탓에 눈물이 나는 것조차 쓰라렸다. 어쩌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끝까지 밀고 들어간 물건에 서진은 숨이 찬 신음을 계속해서 내뱉었다.
“하윽… 주, 죽여… 억… 차라리… 흑, 죽여 줘요!! 아윽!”
천천히 서진의 안으로 딜도를 밀어 넣던 기욱의 손이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예고도 하지 않은 채 깊숙이 찌르고 들어왔다. 버튼을 누르자 끝에서부터 요란한 소리가 나며 서진의 안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한 번만 더 그따위……!”
“아윽… 윽…!”
“말 꺼내기만 해 봐.”
서진의 등 뒤로 올라탄 기욱의 다른 손이 서진의 페니스를 꽉 쥐었다. 서진이 다른 사람들과 몸을 섞는 것 이상으로 기욱은 서진이 죽는다는 말을 하는 걸 용서할 수 없었다. 점점 거칠어지는 기욱의 손길에 서진은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된 말을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하으윽, 으윽… 허윽….”
“너도 하, 강서윤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기욱은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의 죽음을 봐 왔다. 집안의 환경 탓도 있었고, 직업의 영향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죽음은 늘 기욱의 가까이에 있었다. 죽음에는 익숙했지만, 죽음은 결코 도피처가 될 수 없었다. 그건 도피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회피였다.
죽음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면 단단히 잘못 생각한 것이다. 그 논리라면 죽은 사람의 가족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산 사람에게 죄를, 고통을 떠넘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기욱은 서진을 원했고, 그런 서진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혼자 죽는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넌 못 죽어.”
“어윽, 흐… 으윽….”
“강서진, 위로 올라와.”
“이거… 허윽, 빼 주세요… 제발… 아윽!”
“앉아.”
차라리 기욱의 위에 올라타는 게 더 나을 지경이었다. 딜도가 박힌 채로 바로 앉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하으, 으윽….”
간신히 앉자 밀려드는 고통에 말랐던 눈물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기욱은 그 상태로 서진의 허리를 잡고 흔들었다. 소파와 함께 딜도가 박힌 채로 서진의 몸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계속되는 움직임에 서진의 목 끝에서 바람이 빠진 듯 숨이 넘어가는 소리만 났다.
“하악! 으읏…!”
높은 하이톤의 음성과 함께 서진의 몸이 떨리며 축 처졌다. 기욱은 여전히 꼿꼿이 서 있는 서진의 페니스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잘 느끼네.”
“하으… 으읏….”
“그냥 갔어?”
“이건, 읏, 그게… 거짓말…….”
사정하지 않은 채 절정에 도달한 스스로의 모습에 서진의 몸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달아올랐다. 기욱은 서진의 안에 넣었던 딜도를 빼내 서진의 입안에 구겨 넣었다. 우웅거리는 진동 소리와 함께 서진의 입안을 거칠게 헤집었다.
“이렇게 느끼는 주제에.”
“……흐….”
강서진을 온전히 가질 수 없다면, 망가트릴 만큼 망가트린 뒤에 가지면 될 일이었다. 기욱이 원하는 건 강서진이라는 존재 자체일 뿐 서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심정인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당직을 다음 날로 미뤄 놓아 저녁까지 빈 시간인 서진과 달리 기욱은 아침에 다시 병원에 가야 했다. 기욱은 요 이틀 동안 서진 때문에 신경을 쓰지 못해 사실상 하루를 꼬박 새운 상태였다. 젊었을 때와 몸이 다르다는 걸 요 근래 자잘하게 실감하는 중이었다. 아무렴 여기서 하루를 더 새면 정말 위험할 것이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서진을 오피스텔에 데려다준 뒤 조금이라도 병원에 들어가 자려면 밤새 서진을 범하는 건 무리였다. 서진이 이렇게까지 순종적으로 굴 줄 몰랐던 기욱은 더 이상 서진을 건드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허윽… 으읍….”
“올라와 강서진.”
“…….”
“허리 흔들면서 끝까지 하면 그만해 줄 수도 있어.”
기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진은 기욱의 위로 올라타 다리를 벌렸다. 기욱의 페니스를 밀어 넣은 서진은 고민조차 하지 않은 채 허리를 흔들었다. 이 지긋지긋한 지옥을 끝낼 수만 있다면 서진은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 자신이 있었다.
* * *
“으, 읏… 하아….”
차에 몸을 실은 서진은 창가 쪽으로 머리를 기댄 채 색색 신음을 내뱉었다. 자동차의 배기 소리와 섞여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래쪽이 시큰거려 미칠 것만 같았다. 옷을 입은 채로 안쪽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서진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무래도 기욱은 서진이 마음 편히 자는 것조차 용서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차의 속도를 안정시킨 기욱은 아래쪽으로 손을 가져다 대는 서진의 손을 탁, 하고 쳐 냈다.
“가만히 있어.”
“으읏….”
기욱의 눈치가 보였던 서진은 엄지를 입술에 넣으며 손톱을 깨물었다. 손톱을 짧게 자르는 것이 습관화되던 탓에 사실 물고 있는 건 손톱이라고 하기보다는 엄지손가락에 가까웠다. 집으로 가는 길조차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서진이 차에 익숙해져 있을 뿐 기욱의 속도는 이미 최고를 밟고 있었다. 장난 좀 쳐 볼까? 했던 기욱의 생각과 달리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는 서진의 모습을 볼 때면 기욱의 침 또한 목 뒤로 넘어갔다.
장난치고는 정도가 심하긴 했던 모양이다. 기욱은 고속도로 한편에 있는 졸음쉼터에 차를 댔다. 시간이 시간이었던 터라 졸음쉼터에는 기욱의 차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차를 세우는 기욱에 서진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 하는…… 잠깐… 으읍….”
안전벨트를 푼 기욱이 서진의 입술을 덮치며 조수석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좁은 차 안에서 반항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기욱은 서진의 의자 뒤쪽에 손을 넣어 의자를 뒤로 밀었다. 순식간에 몸이 뉘어지며 서진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옷 위에 있는 페니스를 쥐었다.
“여기서… 싫어….”
“가만히 있어.”
서진을 누른 기욱이 서진의 바지 버클을 푼 뒤 아래로 내렸다. 기욱의 손가락이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는 로터를 꺼냈다. 차 안에는 달뜬 서진의 신음과 로터가 윙윙거리는 소리, 그리고 거침없이 지나가는 차 소리가 유리창 너머로 들려왔다.
“이렇게 느끼는 주제에.”
서진의 허벅지를 위로 든 기욱은 거침없이 서진의 안에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많은 사람과 살을 섞어 왔지만, 그 어떤 사람도 기욱을 만족하게 할 수는 없었다. 눈앞에 있는 강서진만 제외하면 말이다.
* * *
― 교수님, 요즘 집에 자주 들어가시는 거 아니에요?
택시의 뒷좌석에 앉은 우민은 전화를 받으며 택시기사에게 방향을 말해 줬다. 시간이 시간이었던 터라 차가 점점 막히기 시작했다.
― 얌먀, 들어가긴 뭘 들어가! 누가 보면 맨날 들어가는 줄 알겠다! 물건 가지러 가는 거야!
― 그런 거 오프인 애들 시키라니까요.
― 걔들은 사람 아니냐? 쉴 때 좀 쉬게 내버려 둬라. 좀.
― 꼭 교수님이 부재중일 때 사고가 나니까 그렇죠.
― 이게 재수 없는 소리 할 거면 끊어!
우민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차가 막히든 우민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 한참 뒤 운전석에서 우민을 깨우는 택시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오늘 잠은 이걸로 다 잤다 싶은 우민은 요금을 확인하지 않은 채 카드를 기사에게 건넸다.
“영수증은 됐어요.”
우민은 카드만 챙겨 주머니에 구겨 넣은 뒤 오피스텔로 올라갔다. 적당히 옷을 갈아입고, 집에서 필요한 물건들만 챙겨 나온 우민은 굳게 닫힌 서진의 오피스텔 앞에 섰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서진은 앞으로 몇 시간 뒤에 병원에서 얼굴을 보게 될 것이었다. 일이 바빠 서진에게 연락해 본다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던 우민은 서진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휴대폰이 꺼져 있을 거라고 생각됐던 우민의 예상과 달리 수화음이 갔다.
“야! 강서진! 너 어디…….”
뚝,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우민은 서진이 일부러 전화를 받았다가 놀라서 끊은 사실을 눈치챘다. 투 툭, 굳게 닫혀 있는 서진의 오피스텔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우민은 서진의 휴대폰에 전화를 건 뒤 벨을 눌렀다.
아무리 봐도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진이 집에 있으면서도 일부러 전화를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우민은 서진의 그것으로 생각하는 다른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다.
또다시 전화가 끊겼지만, 이번에는 그것과 달랐다. 집 안쪽에서 틀림없는 벨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우민은 벨을 누르면서 서진의 오피스텔 문을 거침없이 두드렸다,
“강서진!! 안에 있는 거 아니까 문 열어!!”
“…….”
“문 열 때까지 두드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우민은 기욱과 마찬가지로 오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몇 분째 이어지는 초인종 소리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말로 주변에 민폐가 될 거로 생각한 서진은 어쩔 수 없이 잠금장치를 건 뒤 문을 열었다. 안쪽에서 문이 열리기 무섭게 우민의 손이 오피스텔 집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이게……! 문 똑바로 안 열어?”
“왜, 왜요!”
두세 시간만 있으면 출근을 할 예정이었던 서진은 도대체 왜 우민이 여기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민은 문틈 사이로 보이는 서진의 얼굴과 잔뜩 쉰 듯한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너 울었냐?”
“아, 아뇨. 아파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돌아가요.”
우민의 손이 들어와 있는 탓에 서진은 문을 닫지도 못한 채 애매하게 문고리를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문 열어.”
“시, 싫어요.”
“누가 싫다 좋다 물어봤어? 너 지금 병원에서 보자 이거야?”
“…….”
“까불지 말고 당장 문 똑바로 열어. 아니면 119 불러서라도 뜯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그런 거…! 억지잖아요!”
우민은 진심이었다. 서진이 문을 열지 않으면 제집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문을 뜯을 의향도 있었다. 까짓거 문짝 하나 뜯어 봤자 얼마나 되겠는가. 우민에게는 그런 사소한 그것보다 서진이 더 걱정이었다. 아프다고 했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한눈에 봐도 없어 보이는 기운에 다 죽어 가는 목소리의 서진을 두고 차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좋아.”
“…뭐, 뭐가요.”
“너 오늘도 결근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럼 너 출근할 때까지 기다리지 뭐. 그럼 됐지?”
우민의 선언에 서진은 고개를 돌려 책상에 있는 디지털시계를 흘끗댔다. 출근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두 시간은 더 남아 있었다.
“두, 두 시간 동안요?”
“집에 들어가서 쉬지 뭐. 요 며칠 제대로 못 잤으니 덕분에 잠도 자고 좋네.”
“그럼 그사이에 도망가면 어쩔 건데요?”
“병원에서 보면 되지.”
“하아.”
서진이 졌다며 한숨을 쉬었다. 우민의 말대로 서진에게는 더 이상 결근을 할 만한 요소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결근을 한다 해도 우민이 신경외과 교수고, 서진이 레지던트로 있는 이상 서진은 작정하고 덤벼드는 우민을 피할 수 없었다. 서진은 마지못해 잠금장치를 풀었다. 서진이 잠금장치를 풀기 무섭게 우민이 문을 벌컥 열었다.
“…….”
“…….”
둘 사이로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서진의 몰골은 누가 봐도 심해 보일 정도로 맥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른 아픔이었다. 막 샤워를 하고 나온 듯 서진의 심호흡을 하며 먼저 입술을 뗐다.
“이, 이제 됐죠? 어, 얼굴 봤으니까…… 가요.”
서진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우민과 거리를 벌렸다. 서진의 몸에서는 아직도 뜨거운 연기가 나고 있었다. 서진의 몸은 얼마나 뜨겁게 샤워를 했으면 저렇게 되나 싶을 정도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우민이 서진의 집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왔다.
“가, 가라구요…!”
“강서진.”
“왜, 왜요….”
“너 맞았냐?”
“하하, 교수님.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서진은 최대한 태연하게 우민의 말에 대답했다.그제야 우민이 자신의 뺨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서진이 빠르게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우민은 오피스텔의 문을 닫은 뒤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우민이 한 걸음 들어올 때마다 서진 또한 한 걸음 물러났다. 뒷걸음질 치던 서진은 밑에 있는 수건에 의해 발이 걸려 뒤로 넘어졌다.
“너…! 괜찮아?”
깜짝 놀란 우민이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우민에게 붙잡힌 손목이 시큰거렸다. 고개를 든 순간 우민의 눈동자와 서진의 눈이 맞았다. 서진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생각된 순간 우민이 서진의 팔을 내려다봤다. 서진의 손목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너…… 손…….”
“아악!! 자, 잘못했어요!”
“뭐, 라고?”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한 번만 봐주…… 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서진이 바닥을 기며 우민과 거리를 벌렸다. 망했다. 서진은 못 볼 거라도 본 사람처럼 좁은 책상과 소파 사이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무릎을 안은 손목에는 여전히 시퍼런 멍 자국이 나 있었다. 차마 고개를 들 자신이 없었던 서진은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제발….”
“…….”
“가 주세요.”
또다시 깊은 침묵이 흘렀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긴 침묵이 이어졌다. 흘긋흘긋 고개를 들 때면 아직 가지 않은 우민과 눈이 마주쳤다. 서진은 10초가 10분 같았다.
“가요….”
“…….”
“가라구요!!”
이래서 싫었다. 우민을, 보고 싶지 않았다. 우민과 만날 때면 서진은 저도 모르게 우민을 의지하게 됐다. 힘이 들면 들수록 우민의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급하게 전화를 끊긴 했어도, 우민에게 도움을 요청할 마음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은 모르겠다. 그냥 다 모르겠다. 기욱은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했지만, 서진은 요 근래 들어 정말 살고 싶지 않은 기분뿐이었다. 우민은 구석에 숨어 있는 서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이 꼴을 보고도 그냥 가게 생겼어?”
잔뜩 화가 난 우민이 서진의 팔을 끌어당겨 구석에서 빼냈다. 그러나 우민의 그런 행동은 안 그래도 제정신이 아닌 서진에게 기름을 붓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강서진, 거기서 나오라고…!”
“아아아악!! 잘못했어요. 때리지 마세요. 제발, 때리지 마세요. 흑흑….”
“안 때릴 테니까. 그만해라.”
“흐흑… 흐흐흑… 제가 잘할게요. 다,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흑….”
서진을 구석에서 끌어낸 그것까지는 좋았지만, 지금의 서진은 도저히 우민의 말이 들릴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단 이틀이다. 아프다고 말하고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조차 만으로 치면 하루뿐이었다. 서진의 모습은 전과 후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적어도 이틀 전에 봤을 때의 서진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면 사람이 이렇게 된단 말인가? 우민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너 도대체…….”
강서진. 우민이 서진을 유독 챙기는 것은 같은 오피스텔에 살아서뿐만은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딘가 잔뜩 눌려 있는 것 같은 서진은 유독 남들보다 눈이 많이 갔다.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지만, 서진의 사연은 어느 누군가의 집안 사정과는 다른 기분이 들었다.
잘못했다. 서진은 그 말을 가장 많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서진의 잘못이라는 건 뭘까? 무슨 잘못을 했길래 서진을 이렇게까지 만들 정도로 화가 난 걸까? 우민이 알지 못하는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야, 강서진 일단 좀 일어나…… 너…!”
서진을 향해 손을 뻗던 우민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손목의 자국뿐만이 아니었다. 늘어진 반팔티 사이로 보이는 옷 안의 멍에 우민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젠 모르겠다. 우민은 이를 악물며 서진의 팔을 붙잡아 강제로 옷을 벗겼다.
“야, 너 잠깐 옷 좀 벗어 봐.”
“아악! 아아아악! 잘못했어요! 싫어, 흐흑.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예상대로 제정신이 아닌 서진은 필사적으로 우민에게 저항했다. 반항하는 서진의 팔을 잡은 뒤 무릎으로 허벅지를 누른 우민이 서진의 반팔티를 강제로 들어 올려 벗겼다.
“너… 너….”
서진의 부은 뺨은 사실 민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눈치를 채기 힘들었다. 그조차도 그저 본인이 괜찮다고 변명을 하면 수상하게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우민은 그런 쪽으로 남들보다 감이 좋을 뿐이었다.
서진의 손목 자국은 우민에게는 기억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가장 최근에도 그랬다. 그전에도 몇 번인가 그런 적이 있었다.
“이런 씨발…!!”
서진의 앞에 주저앉은 우민은 주먹을 꽉 쥐며 바닥을 향해 내리쳤다. 한두 번이 아니다. 어쩌면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서진이 누군가에게 맞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던 쪽이 누구던가. 연애 같은 건 개인사라고 생각했다. 서진도 어린애가 아니니까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넘어갔던 것도 있었다. 언젠가 서진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알고 있었으면서, 오지랖이 넓니 욕을 먹어도 조금 더 서진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스스로에 숨이 막혀 미칠 것 같았다.
“강서진, 누구야. 누가 그랬어!!”
“아악… 제발….”
폭력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서진의 몸에 난 멍은 우민도 잘 알고 있는 형식의 폭력이었다. 의사들의 폭력은 대게 눈에 보이는 그곳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우민은 누군지 몰라도 일부러 보이지 않는 곳만 골라 때렸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 틀림없었다. 유독 오른쪽 가슴 쪽으로 손을 가리는 서진을 이상하게 생각한 우민이 서진의 손을 강제로 치워 냈다.
“너, 이게 뭐야….”
“아악…! 아아악! 죄송해요! 죄송해요. 흐흐흑…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본능적으로 몸을 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민은 멍이 잔뜩 들어 있는 서진의 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멍도 멍이었지만, 서진의 쇄골 아래로 나 있는 살이 타들어 가는 흔적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건, 누군가 일부러 몸을 담배로 지졌다고밖에 볼 수가 없는 상처였다.
“제길! 누구냐고! 어떤 새끼야!”
예민하게 반응하는 서진에 우민이 깜짝 놀라 어깨에서 손을 뗐다. 서진은 우민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 듯싶었다. 누군가와 자신을 착각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 누군가를 알 수 없어서 답답할 뿐이었다. 우민을 등진 서진은 또다시 구석에 있는 가구 사이로 숨어 들어갔다. 무릎을 안으며 고개를 숙인 서진이 훌쩍였다.
“흑, 시헌아…….”
우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는 서진의 말을 잊지 못했다. 서진의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보다 그 말을 듣고 생각나는 인물이 한 명밖에 없는 것에 더 화가 치밀었다.
* * *
성큼성큼, 우민은 마침 구급차가 밖으로 나가는 트라우마센터의 정문으로 들어갔다. 사복 차림으로 들어간 우민은 문 앞에서 주머니를 뒤졌다. 병원 내 신분증이나 보호자 출입 카드가 있어야 출입할 수 있었다.
“씨발.”
재수가 없었다. 우민은 금방 집에 갔다 올 거라는 생각에 신경외과 의국에 가운에 신분증을 걸어 둔 채 놓고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돌아가서 가져와도 되지만, 그러기에 지금의 우민은 매우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가만히 서 있는 우민을 수상하게 생각한 경비가 다가왔다.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 의산데요. 제가 신분증이 없어서……. 위에 있는데 급하게 들어가 봐야 합니다.”
“가져오세요.”
“아니, 그러니까 급하게 들어가야 한다고 했잖…… 야!! 유진호!!”
마침 보호자가 들어간 탓에 활짝 열린 문틈 사이로 빠르게 지나가는 진호의 모습이 보였다. 저 자식 센터에서 일했었지. 닫힌 문 너머로 손을 흔드는 우민을 발견한 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어, 교수님?”
“진짜 교수님 맞으십니까?”
“아아, 예. 신경외과 쪽 교수님이신데. 무슨 일 있나요?”
“아뇨. 신분증이 없으신데 들여보내 달라고 하셔서요.”
경비가 가운 차림의 진호를 위아래로 훑었다. 진호는 처음 보는 경비의 얼굴에 살갑게 웃으며 말했다.
“아! 저희가 지금 엄청 급한 응급환자가 하나 들어왔는데요! 손이 부족해서. 하하, 제가 불렀습니다. 오늘 오프이신 분이라 급하게 오셔서 그럴 거예요! 오셨으면 연락하시지 그랬어요! 교수님 이쪽입니다.”
진호의 어설픈 연기에 경비가 들어가라는 식으로 손을 저었다. 문이 닫히자 진호는 우민을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교수님 대체 무, 무슨 일이예요? 신분증도 안 가져오시고 바로 센터에…….”
“박시헌.”
“네?”
“너 트라우마센터 일하면서 외과 애들이랑 친하지? 박시헌 지금 어디서 근무하고 있는지 좀 알아봐.”
“박시헌이라면. 그, 박기욱 동생요?”
“그럼 누가 있어?”
우민이 팔짱을 끼며 진호를 노려봤다. 진호는 근무 시간도 아닌데 갑자기 박시헌을 찾아달라는 우민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한편 참, 타이밍도 좋다며 뺨을 긁적였다.
“찾고 자시구요. 시헌이라면 지금 여기 있어요.”
“여기?”
“네. 아까 출근해서 일하는 거 봤는데……. 아, 저기 있네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진호가 마침 컴퓨터를 잡고 명령을 내리고 있는 시헌을 손가락질했다.
“그래서 교수님 대체 무슨 일……. 교수님!”
우민은 시헌을 보자마자 진호에게서 등을 돌려 다가갔다.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시헌이 고개를 돌렸다. 가운 차림은 아니었지만, 언젠가 얼굴을 본 기억이 있었던 시헌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약간 숙여 목례를 했다.
틀림없이 서진이 중얼거렸던 말은 시헌이었다. 성은 말하지 않았어도 시헌이라는 이름 자체가 흔하지도 않았고, 우민이 알고 서진이 아는 시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오늘뿐만이 아니었다. 우민은 처음 만났을 당시에도 서진이 시헌의 이름을 말했던 사실을 기억했다. 우민은 서진을 이렇게 만들고 뻔뻔하게 출근한 시헌이 미치도록 짜증이 났다.
“저기… 무슨 일…… 윽!”
우민의 손이 시헌의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 순간적으로 센터 내부가 정적에 흐를 정도로 엄청난 소리가 났다. 제법 힘을 줘서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민의 손길에 시헌은 고개가 살짝 틀어질 뿐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저 작은 체구로 서진을 때렸다는 사실이 우민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정적이 멈추고 깜짝 놀란 진호가 우민에게 다가왔다.
“교, 교, 교수님 왜, 왜 그러세요! 야야, 너… 우, 우리 교수님한테 뭐, 뭐 했어?”
“…….”
진호가 아는 우민은 환자들이 보는 앞에서 이유 없이 폭력을 행사할 사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우민을 봐 왔던 진호도 이렇게 우민이 화가 난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쩔 줄을 모르는 진호는 다가오는 의료진들에게 우민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 줬다. 처음에는 단순 보호자로 알고 일이 났구나 싶었던 간호사와 의사들도 우민이 병원 내 교수라는 걸 알고 고개를 저었다. 결국, 참다못한 간호사 한 명이 사태를 수습할 사람을 데리러 안으로 들어갔다.
시헌은 우민에게 맞은 뺨을 살짝 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그저 오랜 근무로 조금 피곤하다는 걸 제외하면 우민을 바라보는 시헌의 표정은 거의 변화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시헌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경외과 교수에게 이유 없이 맞을 만한 짓을 한 기억이 없었다.
“저기 교수님, 제가 무슨 짓을…… 어윽…!”
우민은 시헌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시헌의 무릎을 향해 발길질했다. 뺨을 맞고 간신히 버텼던 처음과 달리 우민의 발길질에 시헌의 몸이 거침없이 무너지며 옆에 있는 물건들을 쓰러트렸다.
“아, 교수님 제발…!! 그만, 그만해요! 대체 왜 그러시는 거냐구요!”
진호가 영문을 모르겠다며 소리를 질렀다. 우민은 일어서는 시헌을 향해 이번엔 주먹을 휘둘렀다. 또다시 넘어진 시헌과 사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의료진들이 두 사람을 말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유진호, 놔. 안 놔?”
“교수님!! 시, 시헌이가 무슨 잘못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진정 좀 해요!!”
“박 선생님, 괜찮으세요?”
“씨발, 놓으라고! 야!! 박시헌!”
진호와 급하게 들어온 덩치가 큰 경비 사내가 발버둥을 치는 우민을 붙잡아 말렸다. 우민은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서는 시헌을 노려봤다. 시헌의 입가가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 시헌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맞은 뺨 한 대는 그럴 수 있다 쳐도 이번만큼은 조금 억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헌은 덩치가 건장한 사내들에게 붙잡혀 있는 와중에도 자신을 죽일 듯 내려다보는 우민의 표정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넌, 넌… 인간도 아니야…! 네가…! 네가 어떻게……!!”
“그러니까 제가 교수님에게 대체 뭘…….”
“서진이한테…… 그러면 안 되잖아…!!”
서진이라는 말에 시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었던 우민은 몸에 힘을 풀었다. 사실, 시헌을 때린 것까지는 좋았지만,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했던 터라 더 할 말이 없었다. 우민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시헌의 입술이 떨려 왔다. 서진의 이야기가 나오자 시헌은 갑자기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죄송…… 해요.”
도무지 뭐가 미안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 * *
“후…….”
새벽 무렵, 우민은 옥상에서 연신 줄담배를 피웠다. 서진은 정상적으로 출근했다. 겉으로 보기에 약간의 흔적들은 남아 있지만, 대부분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탓에 서진의 상처를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우민은 차마 아무렇지 않게 출근한 서진에게 말을 걸 자신이 없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서진을 피해 다니는 꼴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씨발.”
담배가 없었다. 분명 몇 시간 전에 산 걸로 기억하는데, 벌써 없다는 게 말이 되지가 않았다. 담뱃값이 올랐다더니 이젠 담배 개수 가지고도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다. 끼긱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우민이 고개를 돌리자 기욱이 우민에게 다가왔다. 마침 우민의 담배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챈 기욱은 자신의 담배를 슬쩍 꺼냈다. 새거나 다름없는 담배를 본 우민이 중얼거렸다.
“암 걸려 뒤지라는 거냐.”
“어차피 빌려 피우실 거면서.”
우민은 일부러 담배 3개비를 꺼냈다. 어느 쪽이든 한 개비로는 만족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기욱은 말없이 담배를 피우는 우민의 옆에 가만히 섰다. 시헌이 우민에게 맞았다는 소문은 신경외과와 외과, 트라우마센터와 응급실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병원 내에서 퍼졌다. 그도 그럴 게 박시헌은 박기욱만큼이나 이사장 집안으로 병원에서 꽤 유명했다. 그런 시헌이 다른 사람도 아닌 교수에게 환자들이 보는 앞에서 맞았으면 말 다 한 셈이었다.
기욱도 시헌이 우민에게 맞았다는 사실을 듣고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욱이 알기로 시헌과 우민은 서로 친하게 지낼 만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제 동생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너 강서진이랑……. 잠깐 얘기 좀 하자.”
우민이 주변을 둘러봤다. 옥상에는 우민을 제외하고도 담배를 피우거나 몰래 나와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의사들도 있었다. 우민은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자며 눈치를 줬다. 두 사람은 비교적 인적이 드문 옥상의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진이라는 이름에 기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담배를 물지 않고서는 태연한 반응을 유지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기욱도 우민과 살짝 거리를 벌려 담배를 피웠다. 우민이 기욱에게 빌린 두 번째 담배의 연기를 허공에 내뱉었다.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했다. 특히 기욱은 서진의 하나뿐인 가족인 누나의 남편이지 않은가. 그런 관계가 아니었어도 말하기 부담스러웠을 텐데. 그 동생이라니. 참 얽혀도 지독하게 얽혀 있었다.
“너 둘이 사귀고 있는 거 알아?”
우민도 확실하진 않다.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우민은 서진과 시헌이 높은 확률로 사귀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서진 쪽에서 얼마나 시헌에게 마음이 있는지는 몰라도, 우민이 보기엔 서진을 그렇게 만든 시헌이 미친놈이었다. 옆으로 담배 연기를 내뱉은 기욱이 애써 올라가는 입꼬리를 낮추며 모르는 척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기욱의 질문은 반쯤 진심이었다. 시헌과 서진은 헤어졌다. 우민은 아직도 둘이 사귀고 있는 줄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기욱이 궁금한 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냐였다. 세 번째 담배를 피우려던 우민의 손이 멈췄다. 서진의 옷 안에 난 멍들과 담뱃불로 지진 그 상처를 생각하면 있던 입맛도 싹 가실 지경이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기계처럼 반복하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서진을 생각하면 시헌을 한 대라도 더 때리고 오지 않는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 전에 하나만 묻자.”
“뭔데요?”
“강서진, 진짜 너네 집에 있었던 거 맞아? 어디 나갔다가 오거나 수상한 거 없었어?”
우민의 질문에 기욱은 담배를 끈 뒤 가운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기욱은 이전부터 알게 모르게 서진에게 관심을 가지는 우민이 거슬렸다. 차마 선배 교수라서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도 한몫했지만, 기회가 되면 떠볼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기욱은 우민이 뭔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 아래에 우민의 장단에 맞추기로 했다.
“저야 그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병원에 있었으니까요.”
“하긴, 그랬지.”
우민은 괜한 걱정을 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이 병원에 있는 모습을 우민도 두 눈으로 똑똑히 봤기에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우민은 몇 번이나 기욱에게 이야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일단은 외부인인 자신보다야 기욱이 나을지도 몰랐다. 기욱은 서진을 잘 챙기기도 했으니까. 그런데도 우민은 기욱에게 말을 하는 것이 어딘가 찝찝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기욱에게 말하는 것이 가장 맞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기욱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뭐가 위험한지 우민도 끝까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됐습니다. 말씀하시기 힘드시다면…….”
“아니, 됐어. 강서진. 몸 봤어.”
“몸이요?”
“그래, 그건 사람이 아니면 못 할 짓이야. 박시헌이 강서진한테 집착하는 거 알고는 있었어?”
입을 다문 기욱이 상황 파악에 나섰다. 서진의 몸을 봤다고 하고, 시헌을 때린 우민. 기욱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과정은 모르겠지만, 우민이 서진의 몸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시헌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처음 듣는데요…….”
“장난 아니야. 제길,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관심을 가질걸…….”
우민은 몇 번이나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서진의 몸에 난 상처 이상으로 그걸 막지 못한 스스로가 후회스러웠다.
“하아, 알았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기욱의 말이 우민은 조금이나마 안심이 됐다. 박기욱이 싫은 건 여전하지만, 기욱은 자신의 사람들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잘해 준다는 걸 우민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배님.”
“왜?”
“선배님, 한동안 만나시는 사람 없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내 연애사랑 서진이랑 무슨 상관……. 너. 지금 나랑 강서진 관계 의심하냐?”
기욱이 우민의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하긴, 병원에 꽤 오래 있었던 사람치고 우민이 게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의심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민은 괜한 걱정이라며 허공으로 손을 저었다.
“만약에 내가 강서진이랑 사귀었으면.”
“…….”
“박시헌 그 자식 한두 대로 안 끝나.”
이번에 때린 것도 사실 기욱의 동생이니까 참아 준 것도 있었다. 우민이 기욱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좋든 싫든 오랜 시간 같이 일한 기욱 또한 우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누구에게나 살갑게 굴고, 후배 레지던트들과 의사들과 말장난까지 하는 우민이지만, 과거의 우민은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만한 정도가 아니라 과마다 있는 기피 대상 TOP3 안에 우민의 이름이 꼭 들어갈 정도로 예민하고, 자기중심의 싸가지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우민이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바뀌었다는 사실은 기욱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허나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뀐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민과 같이 일해 왔던 기욱은 여전히 우민을 그때 그 시절과 똑같이 보고 있었다.
기욱이 보기에 한우민이라는 사람은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재수 없지만, 우민은 기욱이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박기욱은 사람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았다. 우민은 내려가려는 기욱을 붙잡아 불렀다.
“너 주말에 대전 내려가지?”
“아, 예. 일이 있어서요.”
“강서진, 데리고 가.”
“그래도 됩니까?”
“강서진, 이번 주 우리 팀이잖아. 내가 허락할 테니까 데리고 가. 둘이 얘기 잘 좀 해 봐.”
우민의 제안에 기욱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직접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도대체 강서진은 어디까지 파야 끝이 나올까? 이번 기회에 정리가 됐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너를 위한 랩소디』 9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