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0 비밀번호가 뭐였지?
“하아, 편의점이나 다녀올까.”
새벽 무렵, 밤새 논문 작업을 하고 있던 우민이 기지개를 켜며 주섬주섬 겉옷을 챙겼다. 담배와 캔커피 몇 개를 산 뒤 그중에 하나를 뜯어 반쯤 마셨다. 언제부터인가? 24시간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캔커피는 생활필수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새벽 도로에 주황색 택시 한 대가 다가왔다. 이쪽으로 오는가 싶더니 택시는 오피스텔 앞에서 멈췄다. 오피스텔에 사는 누군가가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가 지금 집에 오는 길인 듯싶었다.
연말은 아니었지만, 연말이 아니어도 회식이 잦은 한국에서 저런 식으로 술에 취해 택시를 타고 오는 게 딱히 놀라야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캔커피를 편의점 근처 쓰레기통에 버리고 택시를 지나쳐 가려던 우민은 택시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생하세엽.”
“하하, 예. 학생도 술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조심해서 들어가요.”
“학생 아니에요. 잘 가요.”
비틀거리며 조수석에서 내린 서진은 택시기사가 듣지도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멀어지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흔들 저었다. 우민을 보지 못한 듯 서진은 보안 시스템이 있는 유리문 앞으로 다가갔다. 우민이 조심스럽게 서진의 뒤를 밟았다.
출입 비밀번호를 누르는가 싶던 서진은 이내 비밀번호를 다 누르지 못한 채 유리문에 머리를 쾅, 하고 박았다.
“야야, 야야야!! 강서진!”
이 자식 술을 얼마나 퍼 마신 거야? 우민은 벽에 머리를 기대며 쓰러질 듯 말 듯 비틀거리는 서진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으억, 감사합니다. 제가 알아서 할 수 있……. 음. 좋은 아침입니다. 교수님? 근데 여기 병원 아닌데요.”
“아놔, 술 냄새. 야이 미친. 너 술을 얼마나 퍼 마신 거야? 괜찮냐?”
“…아뇨. 그래도 집에는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민을 밀어낸 서진이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번호조차 제대로 누르지 못하는 서진을 본 우민은 서진을 부축하며 대신 문을 열어 줬다. 우민은 서진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서진은 곧장 엘리베이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야, 바닥에 앉지 마! 일어나라고.”
“으으, 싫어요.”
“……돌아 버리겠네.”
괜히 바람을 쐬러 나온 건가 싶었다. 우민은 서진의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해 복도로 나왔다.
“너 이 자식, 내일 일 어떻게 하려고 그래?”
“어떻게든 되겠죠! 머!!”
“적당히 안 해? 얼마나 마신 거야?”
“제가 오랜만에 돈 좀 썼어요. 어딨더라. 이거.”
서진이 주섬주섬 주머니에 있는 영수증을 꺼내 들었다. 어딘가의 바에서 술을 마신 모양인데 금액이 예사롭지 않았다.
“너 이런 거 좋아하는 애였냐?”
“처음 가 본 거거든요?”
“여자 끼고 술 마신 건 자랑이고?”
“여자 아니거든요?”
“그럼?”
“모르는 남자. 이름이 뭐라 그랬더라……. 근데 그거 교수님이랑 상관없지 않아요?”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서진은 비틀거리며 문 앞에 섰다. 만약 우민이 발견하지 못했다면 여기가 자기 집인지 남의 집 대문인지도 몰랐을 확률이 높았다. 우민은 서진을 대충 재워 놓고 내일 아침에 출근하기 전쯤에 나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우민의 생각과 달리 서진은 한동안 문 앞에서 얼어붙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흑… 으흑… 흐흐흑….”
“이런 정신 나간. 너 또 왜 처우는데? 집! 들어가! 비밀번호! 눌러!”
짜증이 날 대로 난 우민이 서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문 앞에 선 서진은 눈가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으며 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흐극, 흐흐흑… 허으윽….”
“돌아 버리겠네. 너 집 비밀번호 뭐야?”
“흐허허허헝… 흐극….”
“그만 좀 처울라고! 비밀번호 뭐냐니까?”
“그게여… 흐허흑….”
“……?”
“비밀번호가 기억이 안 나요.”
맙소사. 서진이 이렇게 취한 건 처음 본 우민이 최악이라며 이마를 짚었다. 이쯤 되면 택시를 타고 제집 주소를 부른 그것만으로도 대단해야 할 지경이었다. 서진이 서럽게 우는 이유가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아서라는 걸 안 우민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집 쪽으로 끌어당겼다.
시간도 시간이었고, 술에 취한 서진에게 비밀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는 그것보다 이쪽이 훨씬 더 빨랐다.
“교, 교, 교수님 안 그러셔도 돼요. 저 그냥 집에 들어갈게요.”
“닥쳐.”
“저 진짜…….”
“닥치라고 했다. 너 교수가 말하는데 어디라 대고 계속 말대답이야? 죽고 싶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정신이 번쩍 든 서진이 곧장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우민은 강압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술에 취한 사람에게는 이런 행동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 서진을 집으로 들인 우민은 1층의 소파 한쪽에 서진을 앉힌 뒤 위층으로 올라가 이불을 가지고 내려왔다.
어차피 잘 생각이 없었던 터라 위층에서 서진을 재워도 상관은 없지만, 우민은 2층에 서진을 올려보낸다는 것 자체가 불안했다. 서진의 몸 위로 두꺼운 이불이 툭, 하고 떨어졌다.
“잠바 벗고 자. 너 출근할 때 내가 깨워 줄 테니까.”
“교수님은요?”
“난 할 일 있어.”
벽면 한쪽을 전부 차지하는 우민의 책상은 서진의 책상 세 배는 족히 넘었다. 책상 밑으로는 온갖 책들이 쌓여 있었다. 지저분한 발밑과 달리 책상 위에는 적당량의 서류와 볼펜, 그리고 두 개의 노트북과 두 개의 더블 모니터 정도가 전부였다. 일단 컴퓨터가 3개라서 그것만으로도 책상의 자리를 꽤 많이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도수가 없는 블루 라이터 필터가 있는 안경을 쓴 우민은 책상 위에 있는 스탠드와 창고에 박아 두었던 스탠드 두 개를 켠 뒤 방의 불을 껐다.
“자라. 아침에 깨워 줄 테니까.”
“신세 지네요.”
“그런 거 알면 조용히 자.”
다행히 술에 잔뜩 취한 서진은 자리를 만들어 주고 나니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 순식간에 잠이 든 서진을 본 우민은 책상에 팔을 괴며 편의점에서 사 온 두 번째 캔커피를 홀짝였다.
“보모냐.”
어리다고 생각은 했지만, 서진은 우민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렸다. 우민이 느끼는 서진은 겉은 어른이지만 속은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마치 그 사실을 숨기려 더 어른처럼 행동하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 탈 없이 자는 서진에게서 등을 돌린 채 우민은 하던 일에 집중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귀마개를 끼고 일을 하고 있던 우민은 뒤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아직 출근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강서진?”
“윽… 우윽….”
불안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진은 우민이 채 말을 걸기도 전에 이불을 걷어차며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서 들리는 다 죽어 가는 소리에 우민은 이마를 짚었다. 창백해진 안색으로 변기통을 놓지 못하는 서진의 등 뒤로 다가온 우민이 서진의 등을 토닥이며 고개를 저었다.
“너 이래서 출근할 수 있겠어?”
“모르게… 우으윽…!”
아직도 술이 덜 깬 모양인지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솔직히 우민이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왜 자신이 우민의 집에서 자고 있었던 것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민은 아무리 봐도 상태가 심각한 서진을 보며 혀를 찼다.
“내가 다른 과면 어떻게 쉬라고 말하겠는데…….”
서진이 나오지 않으면 그만큼의 일을 누군가가 해야 했다. 한 사람의 공백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다. 적어도 같은 과가 아니라면 남의 일이니까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신경외과 교수로서 우민은 서진에게 쉬라는 말이 목 끝에 걸려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진은 우민의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찮아요.”
“뭐?”
“우윽, 괜찮아요. 출근할 수 있어요.”
“당연하지 인마. 이 정도로 결근했다가는 넌 진짜 맞는 거야. 하아.”
또다시 변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서진을 본 우민은 그래도 병원에 가기 전에 어떻게든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화장실 밖으로 나온 우민은 휴대폰을 가져와 시간을 확인했다. 빡빡하긴 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어, 성오야. 나 우민인데, 이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한데 너……
서진을 화장실에 둔 우민은 통화하며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 잘한다 잘해. 걔 완전 어려 보이던데, 적당히 마시지 그랬냐. 근데 너 레지랑 따로 술 잘 안 마시지 않……. 니네 사귀냐?
― 강서진 옆집에 살 거든? 집 비밀번호도 몰라서 처우는 애를 어떻게 내버려 두냐? 됐으니까 한 번만 도와줘.
― 그냥 쉬라고 하지? 뭐 하러.
― 우리 J대 병원이다. 자기 전공의 시절은 생각하고 말해라.
― 살다 보니 별일을 다 겪네. 대신에 나중에 술 사라. 비밀번호 보내 줄게.
―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서진 덕분에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출근해야 하는 신세가 된 우민은 노트북을 덮은 뒤 외장하드만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우민은 바닥에 떨어진 서진의 겉옷을 어깨에 걸쳐 줬다.
“강서진, 일어나.”
“윽, 어디 가요?”
“병원 간다. 출근하기 전에 사람 꼴은 만들어 줘야 할 거 아냐.”
우민은 서진을 데리고 성오가 하는 병원에서 서진을 대충 눕혀 링거를 맞혔다. 정말이지 아침부터 이게 뭔 쇼를 하는 건가 싶었다.
“삼십 분 있다가 바로 병원 갈 거니까 눈 붙이고 있어.”
“감사합니다.”
“너 네가 술값으로 얼마를 썼는지 기억은 해?”
서진의 옆에 있는 침대에 올라앉은 우민은 벽에 기대 눈을 살짝 감았다. 눈을 붙여야 하는 건 서진이나 우민이나 다를 건 없었다.
“하하, 많이 쓴 거 같아요.”
“영수증 봐라. 기겁할 거다. 호스트바라도 가서 뜯기고 온 건 아닌가 싶었다.”
“그런 건 아닌데요…… 윽. 그냥 제가 먹고 싶어서 먹은 건 맞는 것 같아요. 요즘 좀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요.”
“일 많이 힘드냐?”
“일은 할 만한데……. 그냥 이것저것 다요.”
“그래도 술값은 심했다. 모르는 사람이랑 그런 비싼 술 마실 거면 차라리 나한테 가지고 와.”
“하하, 네.”
우민은 휴대폰으로 삼십 분 정도 알람을 맞춰 놓은 뒤 눈을 감았다. 서진은 언제 했는지 모를 링거 바늘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우민은 침대에 앉아 그대로 잠이 든 상태였다.
* * *
일상으로 돌아온 서진은 전화벨이 울리자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은 채 기계처럼 전화를 받았다.
― 네, 신경외과 강서진입니다. 말씀하세요.
― 어어, 서진아. 나 지섭이야. 지금 통화 가능해?
― 아, 형. 무슨 일이에요?
응급실에서 특별하게 연락이 올 만한 일이 없었던 서진은 어느새 응급의학과 3년 차가 된 지섭의 전화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치가 보여 의국 밖으로 나와 비상계단 사이에 숨은 서진이 지섭의 전화를 받았다.
“아, 네네. 아뇨. 일요일에요? 상관은 없는데, 제가 그래도 돼요? 하하, 뭐 저도 형한테 도움 많이 받았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일 끝나고 내려가겠습니다.”
서진이 지섭과 전화를 끊기 무섭게 철문이 벌컥 열리며 우민이 얼굴을 드러냈다.
“우왁! 깜짝아.”
“아, 놀라라.”
“너 거기 숨어서 뭐 하고 있었어?”
“전화요 전화.”
“흐음, 몰래 전화하는 거면……. 과연 애인?”
“그럴 리가요.”
서진은 진심으로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우민은 그런 서진에 농담이라며 등을 툭툭 건드렸다. 우민은 자연스럽게 서진을 밀며 아래층으로 유도했다.
“어디 가요?”
“너 없을 때 커피 내기해서 졌다. 자판기 커피 10개!”
“많네요.”
“혼자 들기 힘드니까 같이 들자. 네 것도 사 줄게. 따라와.”
이미 계단을 다 내려온 마당에 같이 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언제 내기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진은 우민과 함께 내려와 응급실 앞에 있는 자판기의 커피 버튼을 거침없이 눌렀다. 퉁퉁, 떨어지다가 터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의 큰 소리로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무슨 전화였어?”
“EM 3년 차 형인데요. 일요일 날 일 좀 도와 달래요. 갑자기 사람 훅 빠져서 힘들다고 하더라구요.”
“너 이 자식, 네가 남의 과 신경 쓸 때야?”
“하하. 쉬는 날인데요, 뭐. 대신 나중에 밥 한번 사 주기로 했어요. 여기서 일 더 하드해지면 인턴 애들 도망갈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하긴, 너 원래 응급의학 쪽에 관심 많았었지? 외과 붙으면 트라우마센터로 들어갈 생각 아니었어?”
“아마도 그랬겠죠. NS로도 들어갈 수 있는데……. 아직은 들어가면 민폐일 것 같아서요.”
“지금 진호랑 규건이가 거기 있나? 걔네가 동기가 아니거든.”
“그래요? 처음 들어요.”
서진은 우민과 사이좋게 커피를 나눠 품에 안은 뒤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운행하는 엘리베이터도 적고, 하필이면 또 고층에 있어서 내려오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아, 음. 뭐라고 해야 하지? 최규건이 걔는 레지로 들어올 때부터 박기욱 후배였거든. 기욱이야 J대 전임강사니까 후배들도 많이 알고 그렇잖아? 걔네 팀 애 중에 J대 아닌 애들 없을걸? 굳이 누굴 데려오고 자시고 이미 들어가기 전부터 이야기 끝나고 들어가거든. 뭐, 나쁘다는 건 아닌데.”
“그럼 한 교수님은요?”
“진호 걔는 지방 의전 출신. 걔도 사정 복잡하다. 지방대 경영학과 출신인데, 이래저래 있어서 돌아서 오게 됐다더라. 어쨌든 박기욱이나 다른 애들처럼 잘난 건 아닌 걸 본인도 알긴 아는 모양이더라.”
“하하, 제가 보기엔 다들 대단하신데요. 아, 죄송합…….”
커피를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서진이 기욱과 몸을 부딪쳤다. 서진이 안고 있던 캔커피가 바닥에 굴렀다. 기욱은 서로 커피를 나눠 안고 있는 서진과 우민을 흘끗 바라봤다. 그 시선이, 별로 기분이 좋은 시선은 아니었다.
기욱은 바닥에 굴러가는 커피를 주워 서진의 품에 올려놓았다.
“가, 감사합니다.”
“됐어.”
“야, 박기욱. 하나 가지고 가.”
우민이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기욱에게 캔커피를 던졌다. 기욱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 아슬아슬하게 캔커피를 받아 냈다. 희미하게 닫힌 문 너머로 기욱이 잘 마시겠다는 표시로 캔커피를 흔드는 것이 눈에 보였다.
“둘이 사이 안 좋은 줄 알았는데.”
“미운 정도 정이라잖아. 그리고 사람 좋다고 일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사람이 안 좋다고 해서 일을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 뭐, 박기욱 스타일이 나랑 맞다고는 말 못 하겠다. 들어가자. 들어가.”
우민이 괜한 이야기를 했다며 의국 안으로 서진의 등을 떠밀었다.
* * *
서진은 대충 옷만 갈아입은 뒤 응급실로 내려갔다. 내려오자마자 서진을 발견한 지섭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하아, 서진아. 진짜 고맙다. 과장님이 너 오케이하면 데려와도 된다고 해서 얼마나 살았는지 모른다. 내가 전화를 얼마나 돌렸는데. 다들 이 핑계 저 핑계 어휴. 나중에 내가 밥 한번 살게. 도와줄 일 있으면 뭐든 말만 해라.”
“하하, 어차피 병원에서 사는데요. 응급실 인턴 일도, 힘들긴 하지만 재미있었으니까요.”
“널 EM으로 데려왔어야 했다. 제길, 너 근데 당직 말고 근무 선 거 없지?”
“있었으면 죽을걸요.”
“그럼 다행이다. 12시간까지는 필요 없으니까 딱 8시간만 해 줘. 다음 근무 저녁이라고 했나? 그때 당직실 가서 자면 되지? 잘 시간 정도는 만들어 줄게. 일은 인턴 잡 해 주면 돼. 혹시 NS 환자 생기면 너 거쳐서 말하라고 이야기 다 해 놨어. 고맙다 진짜.”
지섭은 서진에게 적당히 인계한 뒤 자기 할 일을 하러 갔다. 사실 인계라고 해 봤자, 응급실을 마지막으로 인턴이 끝났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진은 아직 한가한 응급실에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라며 응급실과 연결된 문을 통해 본관 로비로 나왔다. 문을 열지 않은 편의점 옆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셨다. 몇 시간 만에 마시는 물에 워낙 목이 말라 커피 맛이라고는 느낄 틈조차 없었다.
“어! 혹시…….”
커피를 마시며 신경외과 단톡방에 올라온 공지를 다시 확인하고 있던 서진이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직 기억에 사라지지 않은 목소리가 서진의 기억 속 한 군데를 스쳤다.
“기욱이…!!”
“아.”
설마 싶었는데 진짜였다. 서진은 휴대폰을 가운 주머니에 넣은 뒤 재빨리 목에 걸려 있는 마스크를 눌러쓰고 목소리를 깔았다.
“사람 잘못 봤습니다.”
“에이, 목소리 들으니까 맞네. 의사라고 해서 그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야, 설마 J대 병원 레지던트였어?”
“……아니라구요.”
빌어먹을! 최악이었다. 서진은 대훈이 제약회사 영업 담당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많고 많은 병원 중에서 J대 병원 담당일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재수가 없어도 더럽게 없었다. 서진은 그를 무시하며 성큼성큼 응급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일단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면 의료진인 거나 환자 보호자가 아닌 이상은 쫓아올 방법이 없었다.
“그때 얼마나 찾은 줄 알아? 너 술 진짜 세더라. 잠깐이면 좋으니까 얘기 좀 해. 아니면 그 뭐냐, 번호 좀 줄래? 일 끝나고 연락할게.”
“놔요. 아니라고.”
“아, 왜 그래 진짜?”
서진은 문 앞에서 손을 붙잡힌 탓에 응급실로는 오도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순간 응급실 복도 문이 열리며 기욱이 얼굴을 내밀었다.
응급실에 들른 기욱은 로비와 연결된 문 너머에서 서진인 것 같은 의사가 들어오려다 마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밤새 당직을 선 서진은 퇴근이거나 아니면 집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당직실에서 자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서진이 응급실 일을 도와주러 온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기욱은 서진이 병원을 촐랑촐랑 돌아다닐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빨리 일을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밖으로 나와 보니 혹시나 했더니 역시 아니었다.
마스크를 깊게 눌러쓰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서진이었다.
“너, 여기서 퇴근 안 하고 뭐 해?”
“그게……. 응급실 일 좀 도와주기로 했어요.”
마스크 안 서진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제발, 제발. 서진은 대훈을 보며 마스크 속으로 입 모양을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서진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만큼 기욱의 표정 또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데. 옆에는?”
“제, 제약회사 직원이에요.”
“요즘 레지랑 교수도 구분 못 하는 멍청한 직원도 있어?”
서진이 아는 기욱은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 기욱이 시작부터 저렇게 나왔다는 것은 이미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 그럴 수 있죠. 드, 들어갈 거예요!”
서진은 본능적으로 대훈과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도망치듯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갑작스럽게 들어가 버리는 서진에 대훈이 서진을 불렀다.
“아! 기욱아! 잠깐만…… 아, 존나 까탈스럽네.”
“…….”
아무래도 먼저 들어가 버린 서진은 대훈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기욱은 머리를 긁적이며 짜증을 내는 대훈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귀가 맛이 간 게 아니라면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는 서진을 부르는 이름이 심상치 않았다.
기욱의 입꼬리가 아래로 쳐지며 조금씩 피가 거꾸로 솟기 시작했다. 서진은 대훈의 차림을 위아래로 훑었다. 대훈의 손에 들린 가방에서 제약회사 관련 자료들이 삐져나온 것이 보였다.
과연 서진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대훈이 제약회사 영업직이라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다른 거짓말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쪽.”
“예?”
“박기욱이랑은 무슨 사이지?”
반말에, 노골적으로 불편한 시선을 드러내는 기욱에 대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침 기욱은 가운을 입고 오지 않았던 터라 특별히 수술복 차림 외에 기욱의 병원 내 신분을 알 만한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욱의 경우 신분증을 목에 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가운을 입지 않을 때는 주머니에 구겨 넣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기욱이 대훈을 훑듯, 대훈 또한 기욱을 빠르게 훑었다. 건장한 체격에 잘생긴 외모, 팔짱을 끼며 거만하게 사람을 내려다보는 태도에 병원에 익숙한 듯한 분위기는 아무리 봐도 단순한 레지던트 정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게 있습니다.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닐 만한 건 아니라서 말입니다. 근데, 기욱이랑은 무슨 사입니까?”
대놓고 기욱의 이름을 말하는 대훈에 기욱은 더 물어볼 필요도 없겠다고 판단했다. 기욱의 머릿속은 이미 응급실 안으로 들어간 강서진을 쫓고 있었다. 감히 내 이름을 사칭하고 다녔겠다? 그것도 정체도 모를 놈한테?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닐 만한 사연이 아니라는 건 정상적인 남남 관계나 제약회사 영업직과 레지던트 사이에서는 나오기 힘든 말이었다. 즉, 딱히 숨길 생각은 없지만, 남들이 알면 귀찮은 관계라는 셈이었다.
기욱은 이미 대훈의 한마디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난 뒤였다. 그럼 더 볼 것도 없었다. 대훈은 노골적으로 필요한 대답만 듣고 입을 다무는 기욱이 불편했다.
“무슨 사이고 자시고.”
“…….”
“내가 박기욱이거든.”
“그게 무슨……. 그쪽이 박기욱이라고? 그러면 방금 들어간 기욱이는 아니, 의사는?”
대훈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모양인지 서진과 기욱의 이름을 헷갈리고 있었다. 서진이 기욱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든가, 기욱이 기욱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어느 쪽이 박기욱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너무 빨랐다. 기욱이 보기에 대훈의 고민은 고민할 가치조차 없는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내가 그런 걸 알려 줄 것처럼 보여?”
“당신……. 뭐야.”
대훈도 건장한 성인 남성의 평균치에는 속하지만, 기욱에게는 그런 것과는 다른 포스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포스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다. 매섭게 올라간 눈썹과 검은 눈동자는 누가 봐도 화가 잔뜩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보통 어린 의사 이야기 좀 했다고 낼 만한 화는 아니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대훈은 자신이 뭔가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그 실수가 도대체 어떤 파도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대훈은 서진과 했던 대화 일부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날 정말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람이 하나 있는데…….’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사귀었던 남자 친구의 형이 동생과 사귀는 걸 싫어한다는 줄 알았다. 형제가 게이라는 걸 싫어하거나 인정하지 못해서 상대에게 부탁하거나, 상대를 괴롭히는 일 같은 건 그리 놀라운 사건도 아니었다. 그러나 서진이 말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람이 눈앞에 있는 남자―기욱이 맞다면 대훈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하하, 당신 미친 거 아냐? 눈이 맛이 갔다고. 저 애, 괜찮은 거냐?”
집착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20살 무렵 커밍아웃을 하고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대훈은 별의별 일들을 겪어 왔다. 덕분에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확실했는데, 대훈의 본능이 눈앞에 있는 사람은 보통 위험한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너, 잤냐?”
* * *
대훈을 보낸 뒤 응급실 안으로 들어온 기욱은 주변을 둘러봤다. 마침 CT 오더를 입력하고, 환자에게 설명을 하는 서진을 찾을 수 있었다. 이야기하던 중 서진은 갑자기 말없이 뒤로 다가온 기욱에 깜짝 놀랐다.
기욱이 조금 늦는다고 생각은 했지만, 알아서 올라갔겠거니 생각했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다. 서진은 입을 꾹 다무는 기욱을 애써 무시하고 등을 돌린 채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고요. 한 10분 정도 걸릴 겁니다. 불편하신 거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이야기를 마치고 등을 돌리기 무섭게 기욱이 서진의 팔목을 잡았다.
“악, 잠깐… 일하는 중…….”
“어, 형 어디 가요?”
“나 잠깐 그……. 나갔다 올게. 금방 올 테니까 얘기 좀 해 줘.”
“네네, 알겠어요.”
기욱을 알아본 인턴이 급한 일이겠거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에게 팔목을 잡힌 서진은 기욱의 걸음을 따라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응급실을 나온 서진은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임상연구실 건물과 건물 사이로 들어갔다.
반지하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기욱은 계단 밑으로 서진을 끌고 들어갔다. 정확히는 서진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고 봐도 무방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 그것도 계단 밑에 있는 공간이라 근처에서는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게 났으며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그늘에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음침했다.
“강서진. 그 자식 뭐야.”
“그냥…….”
서진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물어 오는 기욱은 대게 사정을 알고 묻는 경우가 많았다. 기욱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기욱이 대훈을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했다. 괜히 술 같은 걸 마셔서. 서진은 한 손으로 떨리는 다른 팔을 붙잡으며 간신히 말했다.
“술 하, 한 번 같이 마신 게 다…… 악! 아, 아파. 아프다고…… 으읍!”
기욱은 서진의 입을 틀어막으며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위쪽으로는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빡빡하게 막힌 차들이 거북이처럼 움직이고 있어도 누구 하나 서진과 기욱이 밑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설령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두 사람을 흘끗 쳐다볼 뿐이었다.
“술, 마셨다고? 그 자식이랑?”
그러고 보니 저번 주쯤인가?? 서진이 재혁과 술을 마신다는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강재혁이 아는 사람인가? 그런 것치고는 앞뒤가 맞지 않았다. 재혁이 아는 사람이라면 서진이 남자에게 이름을 숨겨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재혁도 서진이 기욱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것을 가만히 넘어갈 리도 없었고 말이다. 기욱은 이어지는 서진의 말에서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재, 재혁이가……. 병원 다, 다시 가 봐야 한다고 그래서…… 혼자 마시다가…….”
“하, 그래서 내 이름을 팔고 다녔다? 팔 게 없어서?”
“그런 건 아닌데…… 자, 잘못했어요! 다,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한 번만 봐주세요.”
서진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시에 서진은 대훈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기 싫었고, 마땅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기욱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서진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내 이름을 팔고 다녔다고? 강서진, 그따위 변명이 나한테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기욱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연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짜증이 나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서진을 어딘가로 끌고 가 사건의 전말을 듣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 장소만 아니었어도. 서진이 입고 있는 저 옷이 병원 가운이 아닌 사복이었어도 지금 당장 서진을 끌고 나갔을지도 모른다.
서진도, 기욱도 정규 근무는 아니지만, 각자가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너, 지금. 운 좋은 줄 알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고, 뒤통수를 친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서진의 통수는 기욱에게는 많이 아팠다. 마침 서진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기욱의 눈치를 본 서진이 전화를 받았다.
“어, 아니야. 알았어! 10분……. 5분 안에 갈게.”
기욱의 눈치를 보며 서진이 시간을 단축했다. 신경외과 환자가 들어왔다는 그의 말에 기욱은 더 이상 서진을 붙잡을 수 없었다.
“저, 저 가……, 가 볼게요.”
서진은 휴대폰을 꼭 쥐며 기욱에게서 등을 돌렸다. 기욱이 서둘러 계단을 올라가는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강서진!”
“…….”
멈칫, 계단을 반쯤 오르던 서진이 계단 아래에 서 있는 기욱을 조심스럽게 내려다봤다.
“너 일 끝나고 봐.”
“…….”
“기다려.”
기욱은 진심으로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였다. 서진은 차마 그런 기욱에게 알겠다는 말조차 하지 못한 채 계단을 올랐다. 서진이 가고 난 뒤 기욱은 서진이 등을 기대고 있던 벽을 주먹으로 쳤다.
“강서진, 강서진!!!”
시헌과 사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후로 두 번째였다. 기욱은 서진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전부 해 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진은 항상 자신에게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서진이 말하는 불만이라는 게 기욱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고생하셨습니다.”
“아, 강 선생님. 오늘 감사했어요.”
“고생. 고생.”
시간이 다 되자 꾸벅, 고개를 숙이는 서진의 모습을 본 간호사와 그 소리를 들은 뒤쪽의 4년 차 레지던트가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말은 몇 번 나눠 본 적 없지만, 그가 서진이 일을 하는 동안 보이지 않게 신경을 써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서진도 알고 있었다.
신경외과 사람들도 나쁘지 않지만, 이렇게 한 번씩 내려올 때면 응급실이 천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원래라면 이대로 당직실에 들어가 잘 생각이었지만, 아침에 기욱과 있었던 일을 떠올린 서진은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진이 막 로비로 나오기 무섭게 기욱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무리 봐도 완벽한 타이밍에 서진은 기욱이 근무 시간을 다른 의사들을 통해 미리 알아냈다고 생각했다. 신경외과 시절부터 스토킹은 익숙했던 터라 딱히 놀라울 것도 없었다.
― 여보세……,
― 옷 갈아입고 내 차로 가 있어. B3―34.
서진이 채 말을 하기도 전에 기욱은 자기 할 말만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욱의 차를 타면, 박기욱을 만나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했다. 서진은 그날 술을 마신 스스로가 한심했다.
이대로 도망칠까? 비록 1년 차라고 해도 의사면허는 있고, 빚도 없다. 학벌이나 내부 학점이나 어디에 명함 내밀었을 때 꿀리는 정도도 아니었다. 서윤과 일을 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J대 병원에 지원했을 뿐 서진에게 J대 병원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실은 J대든 자대인 H대든 상관없었다. 어쩌면 의료 질이 높은 서울보다 지방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해외의 병원에 레지던트로 들어간 녀석도 있다던데, 연락해서 해외로 튈까? 라커룸으로 내려가 옷을 갈아입기 전까지 서진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다 들었다. 그러나 생각은 생각일 뿐 서진은 그런 생각들이 결코 실천할 수 없는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잠적을 하든, 지방으로 내려가든, 정말 해외로 도망을 치든 서윤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전처럼 서윤에게 목숨을 맬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서진은 아직도 서윤이라는 존재를 놓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걸지도 몰랐다. 애당초 그 마음의 준비라는 것도 가능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강서진!”
철컥, 라커룸의 문이 열리며 기욱이 서진의 라커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마침 옷을 다 갈아입고 문을 잠그고 있었던 서진은 갑자기 나타난 기욱에게 깜짝 놀랐다.
“무, 문 잠그고 있었어요…….”
도망친다고 한 것도 아닌데, 서진은 기욱이 화가 나도 단단히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침 신경외과를 돌고 있던 인턴이 기욱과 서진을 보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주변 시선을 의식한 기욱은 서진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서진은 등을 돌리는 기욱의 뒤를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기욱은 차 문을 열기 무섭게 서진을 조수석 쪽으로 내던졌다.
앞으로 돌아 운전석에 탄 기욱은 안전벨트도 매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는 서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잘… 못했어요….”
“강서진, 좋은 말 할 때 휴대폰 내놔.”
“제가, 잘못…….”
“두 번 말 하게 하지 마.”
생각했던 것보다 기욱을 더 많이 화나게 했다고 생각한 서진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시헌과 사귀었을 때만큼이나 열어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걸지도 몰랐다. 기욱이 허공으로 손을 들자 서진의 손이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기욱은 그저 안전벨트를 매고 핸들을 붙잡으려 했을 뿐이었다. 안전벨트를 맨 서진은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주섬주섬 꺼내 기욱에게 내밀었다.
기욱은 서진이 두 손으로 내민 스마트폰을 흘끗 보더니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원 꺼서 뒤쪽에 던져 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기욱에 서진은 휴대폰의 잠금화면을 풀었다. 누군가에게 도와 달라고 해 볼까? 누구한테? 서진은 계속 휴대폰을 만지고 있으면 기욱이 수상하게 볼까 봐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의 전원을 끈 후 뒷좌석으로 내던졌다.
기욱은 내비게이션을 찍지 않고 어딘가로 달리고 있었다.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서진이 생각하는 도착지와 기욱의 운전 경로는 명확해지고 있었다. 한 시간이 좀 넘게 운전을 한 기욱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기욱의 휴대폰과 연결된 차량 스피커에서 통화 목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 어, 오빠…? 아까 최 쌤이랑 통화했는데.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었어. 언제 와?
서윤의 목소리에 서진이 혹시 몰라 입을 막으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 미안한데 서윤아, 나 오늘 집에 못 들어갈 것 같다.
― 무슨 일 있어?
― 태민이 알지?
― 오빠 고등학교 동창? 로펌 다닌다고 했잖아. 왜?
― 별건 아니고, 걔가 의료 소송 하나 맡았는데. 그거 좀 봐 달라고 해서 태민이 사무실에서 밤샘하고 넘어갈 것 같다.
― 원, 별걸 다 부려 먹는다. 나 형님이랑 놀러 가기 전에 얼굴 보고 가려고 했는데. 사무실 들를까?
― 됐어, 여기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있어서 좀 그래.
― 알았어. 오빠, 내일 전화할 테니까 전화 받아야 해.
― 내가 연락 안 받은 적 없잖아. 그래, 끊어.
뚝, 기욱이 서윤과의 통화를 종료했다. 기욱이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면 질수록 서진의 두려움은 배가됐다.
“저, 저 오늘 다, 당직이에요…….”
“알아.”
“내일 들어간다고…….”
“알아서 해.”
병원 스케줄을 핑계를 댔지만, 기욱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교통 표지판에서 익숙한 이름들과 도로명들이 눈에 띄자 서진은 기욱이 가고 있는 장소에 대해서 확신했다. 서진에게 그 별장은 일종의 트라우마나 다름없는 공간이었다.
“흐윽… 자,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감정이 복받치기 시작한 서진이 결국 눈물을 흘렸다. 별장은 죽을 만큼 싫었다. 몸을 약간 돌린 서진이 운전을 하고 있는 기욱의 팔을 붙잡고 매달려도 기욱은 서진에게서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운전을 계속했다.
별장에 거의 다 와 갈 무렵 기욱의 휴대폰으로 다시 전화가 왔다. 곁눈질로 발신자를 확인한 기욱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끈 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 야! 박기욱!
기욱이 말도 하지 않고 팔아넘긴 태민의 전화였다. 딱 듣기에도 언성이 올라간 태민에게 기욱이 낮게 대답했다.
― 왜.
― 왜? 왜에? 너 미쳤냐? 나 기업 범죄 전문 변호사라고! 의료소송은 얼어 죽을. 내가 널 왜 사무실에 불러. 뇌에 총 맞았냐? 사모님이 이상한 소리 하시길래 말 맞추느라 고생했잖아!
말을 맞췄다는 걸 보니 거짓말을 받아 주긴 했다는 모양새였다. 기욱은 서윤이 태민에게 전화할 것도, 태민이 그런 서윤의 전화에 말하지 않아도 거짓말을 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입 시절 주변에서는 태민이 법대를 가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기욱은 태민만큼 변호사에 천직인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한동안 조용한 것 같더니. 너 요즘 만나는 여자 있냐?
― 야, 김태민 말조심해라.
― 내 알 바는 아니다만. 나중에 이혼소송 한답시고 변호사 알아봐 달라고 그러면 진짜 가만 안 둘 거다.
― 내 주변에 변호사가 너밖에 없는 줄 알아?
― 삼류 변호사랑 나랑 비교가 돼? 알았다. 어쨌든 사모님한테 적당히 말해 놨으니까 괜히 연락해서 일 두 번 만들지 마라. 아침에 병원에서 얼굴 보기로 했다면서? 그럼 조용히 들어가. 너 나한테 빚진 거 알지?
― 필요하면 연락해라.
기욱은 태연하게 태민과의 전화를 끊었다. 통화 내용은 들을 수 없었지만, 서진은 기욱의 말투와 통화 내용으로 봤을 때 통화를 한 상대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서진은 그런 거짓말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흐극, 집에 보내 줘요….”
기욱은 훌쩍이는 서진을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휴대폰을 거치대에 올려놓고 속도를 높였다. 혼자 우는 것도 지쳐 갈 무렵 별장의 한쪽 주차장에 차를 대기 무섭게 내린 기욱이 앞으로 돌아 조수석 쪽 차 문을 열었다. 아직 해수욕장은 오픈되지 않았지만, 바다 냄새와 서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특유의 모래향이 코끝을 스쳤다. 서진은 안전띠도 풀지 못한 채 활짝 열린 차 문밖에 서 있는 기욱에게 매달렸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 안 갈래요… 흐흐흑… 싫어….”
“그만 처울고 들어가서 얘기하라고.”
“싫…… 으읍…!”
기욱의 손이 서진의 입을 틀어막으며 의자 쪽으로 서진의 몸을 눌렀다. 기욱은 강제로 서진의 안전벨트를 푼 뒤 팔을 잡아당겨 차 밖으로 끌어냈다. 거의 차에서 끌려당겨진 서진은 제대로 일어서지 못한 채 자갈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강서진, 일어나.”
기욱이 서진의 몸을 잡고 일으키려 하자 서진은 그대로 기욱에게 매달렸다. 계절이 계절인 데다 워낙 한가한 장소라 보는 사람은 없었다. 설령 보는 사람이 있어도 상관없다. 서진은 뒤쪽에 있는 별장에 들어가는 건 기욱에게 매달리는 것보다 훨씬 싫었다.
“흑… 제발… 잘못했어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기계처럼 반복적인 말을 내뱉는 서진에 기욱은 서진의 몸을 일으키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기욱이라고 해도 밖에서 서진과 말싸움하고 싶지는 않았다.
“들어가서 얘기해. 착하지.”
기욱이 서진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소름이 끼칠 만한 낮은 목소리에 서진은 어쩔 줄을 모른 채 기욱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삐빅, 삑,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를 때마다 서진의 심장 또한 빨라졌다.
“여, 역시 안 들어…… 악!”
서진이 반항하는 것을 더 참아 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기욱은 문이 열리기 무섭게 서진을 별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을 닫고 성큼성큼 들어오는 기욱에 서진은 일어서지도 못한 채 거실 쪽으로 물러났다.
“했어요… 잘못했어요.”
“설명해.”
“제가, 아… 아무 일도 없었어요. 흑,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설명하라고!”
“흐극, 흐흑….”
미칠 것만 같았다. 이러려고 기욱의 이름을 팔아넘긴 건 아니었다. 기욱은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는 서진의 팔을 질질 끌고 안쪽 방으로 내던졌다.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은 침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서진이 기욱에게 도망치면서 깼던 무드등이 바뀐 것이 전부였다.
끝이 날 줄 모르는 섹스, 도망치려 하면 할수록 몸 안쪽에서부터 까맣게 타 들어가는 기억에 서진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곳에서 서진은 그저 기욱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인형에 지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이 일을 잊으려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상처를 받은 시헌의 표정이 이따금 떠오를 때면 서진의 가슴을 후벼 팠다. 서진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나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는 서진이 과거에 깼던 무드등의 유리 파편이 박혔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 아아악…!! 싫어. 서, 설명할게요. 설명할 테니까 제발 건들지 말아 주세요!”
“설명하라고.”
“흐, 흐흑…… 흑.”
“울지 말고 설명하라고!!”
“끅… 흐극… 재혁이랑… 술 먹기로 했을 때……. 그때, 흐끅… 만났어요.”
서진은 팔짱을 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기욱을 향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은 잠시 입을 다물며 생각에 빠졌다. 분명 오전에도 재혁이라는 이름을 담긴 했었던 기억이 났다. 기욱은 서진의 멱살을 잡아 침대 위로 던졌다. 푹, 아래로 꺼지는 침대에 서진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몸을 웅크렸다.
“너 설마. 강재혁이랑 있었던 것까지 거짓말 치는 건 아니겠지?”
“재혁이는 지, 진짜예요……. 저, 전화…… 하면…….”
“그 자식, 뭐야? 어디서 만났어?”
“바(BAR)에서……. 마, 말 걸어서 그냥……. 같이 수, 술 마셨어요. 그게 다예요!”
“잤어?”
기욱이 머리채를 잡으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아 망했다. 지금의 기욱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이었다.
“그 씨발년이랑 하, 잤냐고.”
“아, 안 잤어요! 지, 진짜 믿어 주세요!!”
처음 술을 마실 때만 해도 확 자 버릴까? 하는 생각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끽해야 일반인보다 조금 술을 잘 마시는 대훈이 서진의 주량을 이길 수는 없었다. 물론, 새벽에 우민의 집에서 그 난리를 쳤으니 서진도 취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서진은 꼴아 버린 대훈을 두고 술값을 계산한 뒤 택시에 탄 것까지는 분명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 그런 서진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기욱은 서진의 머리채를 잡고 침대에 강하게 내리쳤다. 서진의 몸이 스프링처럼 침대 시트로 꺼졌다가 올라왔다.
“옷 벗고 다리 벌려.”
“무, 무슨 말을…….”
“내가 니 말을 어떻게 믿어?”
“지, 진짜예요! 택시 여, 영수증도 있어요!”
신용카드를 사용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 기욱은 서진의 그런 설명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끝까지 다 하고 택시 타고 온 거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요!!”
“술 어디서 처마셨는데.”
“BAR……….”
“강서진! 어디냐고!!”
전국에, 서울에 바만 수십, 수백 개가 있다. 특정 장소를 말하지 않는 서진에 기욱은 열이 받을 대로 받았다. 기욱의 경험상 정확한 장소를 말하지 않고 뭉뚱그려 말하는 경우에는 높은 확률로 숨기는 것이 있다는 증거나 다름이 없었다. 예상대로 서진은 쉽사리 입을 떼지 않고 있었다.
서진은 차마 자신이 간 곳이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했고, 마음만 먹으면 술만 마시고 갈 수 있는 곳임에는 틀림이 없어도 기욱이 그 사실을 믿어 줄 리가 없었다.
일반 바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여기서 또 거짓말을 친 사실이 발각되면 그땐 정말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서진이 생각하는 기욱은 서진을 데리고 바에 가서 확인까지 하지 않으면 적성에 풀리지 않을 사람이었고, 기욱은 서진의 말에 조금이라도 수상한 구석이 있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런 쪽으로 경험이 많은 기욱은 서진의 생각보다 훨씬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너, 설마…….”
뭘 하든 기욱은 서진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정상적인 바라면 서진이 뜸을 들일 이유 따위는 없었다. 얼버무리거나,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말하기 곤란한, 정상적이지 않은 곳이라는 걸 제 입으로 떠드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게이바지?”
“그게… 아윽!”
서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욱의 손이 서진의 뺨을 후려쳤다. 서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날, 시헌과 사귀는 것을 걸려 이곳에 온 이후부터 기욱은 서진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 기욱의 폭력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기욱은 서진을 때린 손목을 털며 서진을 억지로 바로 앉혔다. 서진의 손을 치우자 뺨이 점점 붉게 물들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기욱은 자신의 뺨에 손을 대고 있는 서진의 손목을 붙잡고 흔들었다. 기욱의 손에 의해 서진의 손이 자신의 뺨을 툭툭 때렸다.
“강서진, 고개 돌려.”
“흑, 흐흑…….”
“뭘 잘했다고 처울어.”
“끅… 끄극…….”
억지로 울음을 참는 서진을 본 기욱이 서진의 팔을 아래로 내려놓았다. 맞을 만한 짓을 한 사람은 맞아도 상관없다. 중, 고등학교 시절의 패싸움부터 시작한 기욱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게이바야?”
“그, 그게…… 가려고 간 건 아니고……. 나, 나중에 알게 돼서…….”
“너.”
“…….”
“그렇게 태연하게 거짓말하는 거 박시헌한테 배웠냐?”
서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기욱이 느끼는 서진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친다. 그러나 얼마나 태연하게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느냐는 정도의 차이였다. 태생적으로 거짓말에 능숙한 기욱이나 시헌과 달리 서진은 후천적으로 배웠다고밖에 볼 수가 없었다.
서진이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시헌이 한 번에 알아차리는 것처럼, 서진의 거짓말 또한 기욱이 보기에는 수준 낮은 애들 장난일 뿐이었다.
“왜 시헌이 이름이…… 아윽…!”
기욱의 주먹이 서진의 배를 때렸다. 기욱은 침대로 쓰러진 서진의 머리채를 잡고 일으켰다.
“내일 저녁에 출근해야 하는데 얼굴에 상처 남잖아.”
“허으윽…!”
비명조차 나지 않을 정도의 주먹에 서진이 헛구역질하며 기욱 쪽으로 쓰러졌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등을 안으며 가볍게 토닥였다.
“게이바야?”
“그… 허흑, 그게…… 마, 맞아요. 근데 몰랐…… 어윽…!”
“모르고?”
“흐흑… 어으흑…….”
“강서진. 계속 그렇게 거짓말해.”
“흐흐흑…… 아, 알고 들어갔어요…!! 흑, 예전에 시헌이랑 가… 간 적 있어서… 흐윽… 잘못했어요. 아악!”
기욱을 밀어낸 서진이 양팔로 몸을 가리며 눈물을 흘렸다. 기욱에게 맞은 뺨도 아팠고, 몸도 아팠다. 그것 이상으로 기욱과 있는 공간 자체가 서진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천천히 앞으로 다가간 기욱이 서진의 머리채를 잡았다.
“잤어?”
“아, 흐흑… 아, 안 잤어요! 정말이에요!!”
비록 택시 이후의 기억은 없어도, 대훈과 끝까지 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러나 기욱은 그런 서진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 서진을 지그시 내려다볼 뿐이었다.
“너 걸레야?”
“무, 무슨 말을…… 지금…… 마, 말이 좀 심…… 흐흑, 심하잖아요!”
“옷 벗어.”
“그러니까……!!”
“강서진!!”
용서할 수 없다. 기욱은 서진의 섹스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시헌이야 우려했던 일이 터졌을 뿐이지만, 서진이 자신이 모르는 장소에서 낯선 남자랑 그런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하고 열이 받았다.
“아, 아니… 시, 싫어… 살려 줘…!”
위험했다. 그때보다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오는 기욱에 서진은 본능적으로 침대에서 내려가 문 쪽으로 뛰어갔다. 닫혀 있는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 서진은 문고리를 잡고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등 뒤로 침대에서 내려온 기욱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아…….”
이 방은 문고리의 안과 밖이 거꾸로 되어 있는 문이었다. 바깥쪽에서 잠그면, 안쪽에서는 열쇠가 없이는 나갈 수 없는 문이었다. 문고리를 잡으며 주저앉은 서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기욱의 손에는 열쇠가 들려 있었다.
“여, 열쇠…!”
서진이 손을 뻗자 기욱이 재빨리 서진의 팔을 잡은 뒤 열쇠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서진을 밖으로 나가게 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름을 팔아서, 좆도 없는 새끼한테 다리를 벌려?”
“…….”
“넌 오늘 내 손에 죽었어.”
서진의 눈가로 눈물이 떨어졌다.
아아, 제발.
신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누군가 도와 달라고.
* * *
질척거리는 소리가 나며 몸이 아래로 이끌렸다.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약에 취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천천히 눈을 뜨자 제 밑에서 거칠게 몸을 탐하는 기욱이 눈에 들어왔다. 정신이 채 들기도 전에 기욱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을 찌르고 들어왔다.
“하아아윽…!!”
“강서진, 눈 떠. 누가 눈 감아도 좋다고 그랬어?”
“허으윽, 어윽… 아아악! 그만, 하윽….”
침대를 짚은 손목이 시큰거렸다. 목이 아파서 쉰 소리가 나왔다.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기욱에게 당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진의 몸이 침대의 시트와 함께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기욱의 손이 움직이더니 서진의 엉덩이를 건드렸다.
“하으으윽… 흐흐흑, 아파, 아파….”
“너 아픈 거 좋아하잖아. 나 말고 다른 새끼랑도 이런 짓 한 거 아냐?”
“그럴 리가… 으윽… 안 했어요. 흐흑,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 게요…!! 더, 어윽… 더 못 해……!”
서진의 몸을 앞으로 돌린 기욱이 서진의 허리를 잡고 흔들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서진의 체감으로는 두 번 정도는 족히 의식이 끊겼던 것 같았다. 한 번씩 눈을 감을 때면 서진은 제발 깨어나면 모든 것이 끝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기욱은 그렇게 의식을 잃은 서진을 범하고 또 범했다. 서진의 안에 들어간 기욱의 페니스가 움찔거리더니 서진의 안에 사정했다. 서진의 몸이 축 늘어지자 기욱은 서진의 페니스를 툭툭 건드렸다.
“흐으, 으으읏…!”
“씨발년, 좋아 죽지?”
“흐윽…!”
“너, 그 자식이랑 섹스할 때도 그래? 어? 강서진!!”
“아… 안 했어요 하, 한 적… 하으윽… 없다고 말했잖아요…!! 왜, 왜 안 믿어 주는 거냐구요!!”
서진은 있는 힘을 전부 쥐어짜 기욱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을 한 건 사실이지만, 대훈과 섹스를 한 적은 없다. 몇 번이고 그렇게 말을 했지만, 기욱은 서진의 말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서진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몸안에 깊숙이 자리를 잡는 기욱의 페니스에 의한 몸을 반으로 가를 것 같은 고통뿐이었다.
“하, 거기가… 읏… 어떤 곳인지 알면서 간 주제에…!!”
“아악…!”
“그렇게 계속 거짓말하지?”
“하읏, 아으윽…… 흐으흐흑…… 살려 줘요. 흑, 으으윽….”
“박시헌도 그래…!! 강서윤은 나한테 맡겨 두고, 박시헌이랑 둘이 좋아 죽었지?”
“그런 적… 흑, 그런 적 한 번도 없어요!! 애당초 이게 다 누구 때문에!! 아아악!”
“누구 때문에? 네가, 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거야.”
“제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요!!”
기욱의 페니스가 빠진 순간 서진이 침대 아래쪽으로 몸을 내던졌다. 쿵, 하며 서진의 몸이 침대로 떨어졌다. 바닥으로 내려간들 나갈 수 없다는 걸 아는 기욱이 천천히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서진은 침대 밑으로 들어간 기욱의 코드 안에 있는 기욱의 차 키와 방의 열쇠를 꺼냈다. 기욱이 같이 주머니에 구겨 넣는 것을 봤기 때문에 두 개를 동시에 꺼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열쇠를 챙긴 서진이 거침없이 문 쪽으로 뛰어갔다.
“너…!”
이번엔 그때와 다르다! 운전도 할 수 있었고, 자신을 이렇게 험하게 대했다는 사실을 알면 아무리 서윤이라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뭘 하든 여기서 이렇게 비참하게 당하는 그것보다는 나았다. 서진은 다가오는 기욱을 보며 초조하게 열쇠를 구멍에 넣었다.
“왜…, 왜……!!”
열쇠가 돌아가지 않았다. 분명히 방 키가 맞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기욱이 성큼성큼 서진의 앞으로 다가와 서진이 들고 있는 열쇠를 빼앗아 바닥으로 내던졌다. 차랑, 쇠붙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내가, 모를 줄 알아?”
“아…….”
기욱은 서진이 열쇠를 노리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서진이 꺼내기 쉽게 일부러 서진의 앞에서 열쇠를 보여 줬고, 코트 안에 차 키를 넣는 모습까지 같이 보여 줬다. 섹스하면서 그렇게 노골적으로 바닥에 코트를 쳐다보는 서진이 열쇠를 가지고 도망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알다마다. 기욱은 그날 열쇠를 가지고 도망치던 서진을 잊지 못했다. 똑같은 짓에 두 번 당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서진은 다가오는 기욱에게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문을 두드렸다.
“싫어… 아악…! 싫어, 싫어…! 살려 줘… 잘못했어요! 제발…!!”
굳게 닫힌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욱은 문고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서진을 가볍게 비웃었다. 미련한 건 서진의 성격인 걸까? 아무리 발버둥을 친들 서진은 처음부터 기욱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기욱은 침대로 갈 것도 없이 서진의 다리를 잡아당겨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아, 싫… 아으으윽….”
기욱의 피스톤질이 계속될 때마다 닫혀 있는 문에 서진의 머리가 닿았다. 허공에 뜬 서진의 손이 문고리를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흐극, 흐흐흑…….”
나가고 싶었다. 왜 문은 닫혀서 열리지 않는 걸까? 기욱에게 당하고, 당하면서도 몇 번이나 문을 두드렸지만, 문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
“하으… 으윽….”
침대를 내려와 방바닥을 질질 기다시피 하며 계속되는 기욱의 섹스에 서진은 기욱이 내던진 열쇠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서진은 열쇠를 손에 쥐며 의식을 잃었다.
* * *
후, 별장 밖으로 나온 기욱은 정원 계단에 기대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바닷바람에 의해 조금씩 식어 가고 있었다. 연달아 줄담배를 피운 기욱은 담배를 입에 물며 별장 밖으로 나왔다.
도로에는 드문드문 차가 지나갔으며, 불빛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욱은 담배를 입에 물며 도로 한쪽을 걸었다. 이어폰을 낀 채 서윤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 또? 하아, 어쩐지 아까 전화했을 때 안 받더라.
― 병원 데려다주고, 집에 보냈어. 자고 있을걸.
― 병원에 있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는데. 서진이 건강검진이라도 시킬까?
― 병원에서 해 줬잖아.
― 병원에선 뭐래?
― 그냥, 몸살이래.
― 하긴, 예전부터 서진이가 몸이 좀 약하긴 했지. 얘 살도 거의 없잖아. 걱정이다.
서윤이 휴대폰 너머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멀리 도로변에 모텔 간판과 몇몇 개의 불빛들이 눈에 들어왔다. 길을 걸으며 담배를 피우고 있던 기욱은 담배가 얼마 없는 것을 보며 간판 불빛 쪽으로 걸음을 걸었다.
― 알았어, 조만간 정밀검사라도 받게 해 주자.
― 그치? 나이도 어린데 벌써 걱정이야. 아, 나 일하러 갈게. 아까 태민 씨랑 통화했는데. 총기 사건이라면서? 뉴스에 안 난 게 용하더라.
― 어, 그래. 나 다시 일해야 하니까 나중에 연락하자.
모텔 근처에 도착한 기욱은 서윤과의 통화를 끊으며 휴대폰에 있는 이어폰을 뺐다. 총기 사고라니. 거짓말을 해도 무슨 스케일을 그렇게 크게 잡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욱은 모텔 주변을 둘러봤지만, 담배를 살 만한 가게를 찾지 못했다. 모텔 근처니까 낡은 구멍가게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있군.”
모텔 옆쪽으로 희미하게 간판이 켜진 작은 가게가 있었다. 딱 봐도 성인용품 가게 밑에는 ‘담배’라고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불법이긴 하지만, 지금의 기욱은 담배를 살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마지막 남은 담배를 적당히 꺼 버린 뒤 기욱은 지하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빨간 조명으로 되어 있는 가게 안은 침침하다 못해 음침했다. 좁은 가게 안에는 빼곡하게 온갖 종류의 성인용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뭐, 찾으십니까?”
“아. 던힐 라이트 있습니까?”
담배라고 쓰여 있어서 들어오긴 했는데 성인용품들이 워낙 정신없이 있어서 담배가 어디 있는지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기욱을 슬쩍 보더니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갔다. 담배가 있긴 한 모양이었다. 기욱은 성인용품이 가득한 가게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팔을 걷어 시계를 보니 이제 막 열두 시가 좀 넘어 있었다. 꽤 오래 한 것 같은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기욱은 근처에 있는 적당한 물건 몇 개를 좁은 계산대 위로 마구 던졌다.
“카드 됩니까?”
“예. 뭐, 상관없습니다.”
그는 거침없이 물건을 집는 기욱을 흘끗 보더니 적당히 계산했다.
* * *
― 지금 거신 전화는 전화기가 꺼져 있어,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우민은 전화를 끈 뒤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몇 시간 전에도 이 상태였는데, 꽤 오래 전원이 꺼져 있는 듯싶었다. 몇 번인가 문자와 연락을 보내도 답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짜식, 오늘 당직이라길래 같이 갈까 했더니…….”
서진이 응급실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우민은 복도로 나와 서진의 오피스텔 대문을 흘끗댔다. 몇 번인가 벨을 누르고 기웃거려도 특별히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무렴 서진이 병원 일을 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 우민은 일찍 출근했겠구나 아니면 병원 당직실에서 알아서 잤겠거니 하고 병원에 도착했다.
“어? 강서진은?”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서진이 얘기 못 들었어요?”
“없으니까 물어보지. 너 오늘 당직 아니지 않냐?”
의국에 들어간 우민은 아침에 봤던 서진의 동기 연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태가 우민을 향해 꾸벅 한 번 더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아, 그게……. 서진이 오늘 일 끝나고 ER에 아는 선생님 부탁으로 인턴 잡 도와줬는데. 일 끝나자마자 쓰러졌대요.”
“뭐? 강서진이?”
“과로라는데요. 일 끝나고 라커룸에서 쓰러진 거 박 교수님이 강서진이랑 만나기로 했다가 안 내려와서 갔다가 발견했다고 하더라구요.”
“입원했어?”
“아뇨, 별 이상은 없어서. 박 교수님이 퇴근하시면서 책임지고 집에 데려다줬대요.”
“강서진 요즘 특별히 무리한 거 없지 않아?”
지난번에는 감기더니 이번에는 실신이라니 참 가지가지 하는구나 싶었다. 우민의 중얼거림에 연태가 뺨을 긁적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나중에 당직 하나 바꿔 준다고 하고, 교수님 명령이니까 해야죠. 게다가 사람마다 체력이 다 다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얼마나 쉰대?”
“이틀요. 내일까지 쉬고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한다고 들었어요.”
“그러냐? 하아, 너도 몸조심해라. 괜히 쓰러지지 말고.”
“하하, 저도 좀 쓰러져서 퇴근했으면 좋겠습니다.”
워낙 사교성이 좋은 탓에 우민은 1년 차인 연태의 말을 웃으며 흘려 넘겼다. 과로로 쓰러졌더라. 그렇다고 해도 온종일 폰을 꺼 놓고 있는 것은 어딘가 이상했다. 혹시 폰이 꺼져 있었다는 걸 모르고 자는 건 아닐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별생각이 다 들던 우민의 머릿속으로 방금 연태가 했던 말이 스치듯 지나갔다.
우민은 밖으로 나가는 연태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야야, 연태야!”
“예?”
“진짜로 박 교수가 책임지고 서진이 집에 데려다준 거 맞아?”
“전 강 선생님한테 그렇게 들었는데요? 서진이 집에 있는 거 아니에요?”
“그게……. 아니다. 알았어.”
우민은 가 보라며 손을 저었다. 집에 있다고? 벨을 그렇게 누르고 전화를 했는데 서진이 일어나지 못했다고? 그야, 못 들었을 수도 있지만. 우민이 기억하는 서진은 그렇게 잠귀가 어두운 사람은 아니었다. 우민은 서진의 결근이 그저 불편한 감이길 바랐다.
“아, 졸려.”
12시가 다 되어 갈 무렵 우민은 응급실 바깥에서 이마를 짚으며 눈을 비볐다. 건너편 트라우마센터에서 넘어온 진호가 우민에게 캔커피를 건넸다. 이놈의 자판기 커피는 지긋지긋했다. 지긋지긋하다, 하면서도 먹고 있는 꼴도 웃기지만 말이다.
“집에서 주무시다 오신 사람이 무슨 말이에요? 전 이 주째라고요.”
“너 트라우마센터 근무 언제까지지?”
“모르겠는데. 특별히 일 없는 이상 한동안 여기 계속 있을 것 같은데요. 왜요? 교수님이 오시게요?”
“닥쳐. 나 내 논문 준비로 바빠. 편한 병원 내버려 두고 집에 자러 가는 사람으로 보이냐?”
“하긴, 교수님 방은 예전부터 뭔가 작업실 같은 분위기였으니까요. 그런 거 보면 교수님도 천직이시네요. 아, 저 콜 왔다. 가 보겠습니다. 내일 봬요.”
진호가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우민은 다 마신 캔커피를 쓰레기통에 버린 뒤 응급실 통로를 통해 본관으로 들어갔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병원 내 번호는 아니었지만, 병원 회선이 아닌 다른 번호로 연락이 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에 우민은 의심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 예. 신경외과 교수 한우민입니다. 어디 과 누굽니까?
― 교… 수님?
서진의 목소리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우민은 앞에 있는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한 뒤 비상계단으로 몸을 돌렸다.
― 야, 너! 괜찮냐? 집이야? 집에 있는 거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서진이 요 근래 골골대긴 했어도 실신을 할 만큼 체력이 떨어졌다는 증후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본인이 그렇게 힘든데 남의 과에까지 가서 일했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온종일 휴대폰이 꺼져 있던 서진이 새벽이 넘어서 연락한 건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번호로 오는 통화였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숨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 지금 어디야?
― 그게…… 저… 흐극… 주세요…….
― 뭐라고? 야, 강서진?
― ……했어요. …제발.
끊기는 듯한 통화에 거의 다 쉬어 가는 목소리에 우민은 서진에게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뭐야? 대체? 야야, 강서진!”
뒤늦게 전화가 끊긴 걸 깨달은 우민이 다급하게 전화가 왔던 번호로 통화를 걸었다. 그러나 서진은 통화를 받자마자 종료 버튼을 눌렀고,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을 때는 서진의 원래 번호와 마찬가지로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음성 메시지만 나왔다. 정상이 아니었다.
잠시 벽에 기댄 우민은 휴대폰을 이마에 가져다 댄 채 강서진이라는 인물에 대해 차분히 생각했다. 서진과 감자탕을 먹을 때 서진의 몸 여기저기에는 어디선가 당한 듯한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PK 시절에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고, 최근 들어서도 그런 위화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서진은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이 없다. 아니, 어쩌면.
“강서진이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누군가…… 설마.”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한 명의 이름이 우민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욱의 동생. 박시헌. 서진과 시헌이 사귀었다는 그것만큼은 명확했고, 어떤 연유에서인지 두 사람은 지금 사귀는 관계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상태가 되었다.
“빌어먹을,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우민은 짜증을 내며 전원이 꺼진 서진의 휴대폰에 계속 전화를 걸었다. 서진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신경외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탄 우민은 별안간 다른 층에서 내린 뒤 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막상 외과에 온 건 좋았지만, 우민은 시헌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 한 교수님 아닙니까?”
마침 볼일이 있어 병동에 온 정혁이 우민을 먼저 알아봤다. 우민은 정혁을 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우민에게도 정혁은 H대 동문 대선배임과 동시에 H대를 나와서 J대에서 레지던트를 마친 동기나 다름이 없었다. 정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우민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정혁이 들은 걸로는 이 시간에 교수급이 되는 사람이 올 만한 일은 없었다. 하물며 우민이 올 정도면 보통은 좋지 않은 징후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 있습니까?”
“아뇨, 선배님. 사람을 좀 찾고 있습니다.”
“같은 교수끼리 선배 후배가 어디 있습니까? 그냥 편하게 말하세요.”
“교수도 교수 나름이죠.”
“그래서 찾는 사람은?”
우민이 잠시 말을 흐렸다. 그러고 보니 우민은 어디선가 외과의 박시헌이 외상센터 사람들과 친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정혁이 소송에 걸려 병원에서 잘릴 뻔한 위기를 도와준 것도 다름 아니라 박기욱이었다. 시헌과 친하지 않더라도 박시헌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은 컸다.
“혹시…… 박시헌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아, 시헌이 걔 지금 병원에 없을걸요. 뭔가 사고라도 쳤어요?”
박기욱이 신경외과 교수이긴 하지만, 신경외과와 큰 접촉이 없는 시헌이가 기욱 외에 신경외과 교수와 마찰이 있을 거라고는 별로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뇨, 개인적인 일입니다. 내일 언제 출근하는지 아십니까?”
“휴가라서요. 집안일이라고만 알고 있어요. 한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그쪽 집안이 좀 그렇잖아요?”
“하하, 전 소문만 들어서요.”
“모레쯤에 출근할 텐데. 전해 드릴 말 있으면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알아서 할게요.”
우민은 정혁에게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떴다. 다시 계단으로 들어간 우민이 서진의 휴대폰 양쪽에 전화를 걸었지만, 어느 쪽도 서진이 전화를 받는 일은 없었다.
“제길!”
우민은 주먹으로 벽을 강하게 내리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서진에게 손을 내밀 걸 하고 후회가 들었다. 우민은 시헌의 짓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