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9 자극적인 너
병원으로 돌아온 서진은 기욱과 부산에 내려갔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말 만큼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신경외과 1년 차 레지던트라는 건 말 그대로 하루가 한 시간 같을 정도로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갔다.
서진은 이 팀 저 팀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을 하게 됐지만, 그것도 전부 적응이 된 터라 상관은 없었다. 일은 힘들어도 사람들이 괜찮으니 그럭저럭 참고 할 수 있었다. 저녁 무렵, 서진과 동갑내기의 간호사가 서진에게 다가왔다. 최근 일 때문에 간호사 몇 명과 연락을 하게 됐는데 같은 나이인 터라 서진은 그녀와 종종 연락을 주고받고는 했다.
서진은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강 선생님……. 호, 혹시 괜찮다면 저랑 사귈래요? 제가 그……. 선생님한테 관심이 있어서.”
“…….”
생각지도 못한, 그리고 거의 돌직구에 가까운 그녀의 말에 서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보낸 연락에 전부 대답을 해 주긴 했어도 서진은 한 번도 그녀와 그 이상의 감정이 오고 갈 만한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일방적인 착각인지, 아니면 서진의 감이 무뎌진 것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기욱 때문인지 서진은 이제 여자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손을 놓은 지 오래였다.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일이라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쉽사리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계속 그녀를 서 있게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서진이 대답했다.
“시간을 주세요.”
거절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정말 뺨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야, 강서진 너 고백받았다면서?”
“……아.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알고 자시고. 소문 다 났다 인마. 근데 이 선생님이 너 좋아하는 거 몰랐냐? 요즘 계속 연락했잖아.”
“그게……. 진짜 몰랐어요.”
선배 레지던트의 말에 서진은 뺨을 긁적이며 눈을 돌렸다. 연락을 주고받는 간호사들은 그녀 말고도 몇 명이 더 됐기 때문에 딱히 그녀가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서진은 이 이상 소문이 나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았다.
기욱이 오늘 병원에 없는 것은 정말 운이 좋다고밖에 생각할 길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을 전부 마치고 저녁 무렵 서진은 다시 간호사 데스크로 돌아갔다. 시간을 달라고 하긴 했는데 기욱이 돌아오기 전에 거절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 한참 전에 퇴근하셨죠.”
“그래요?”
“오늘 모닝 근무였으니까요.”
“아…….”
그녀는 이미 집에 가고 없단다. 서진은 본능적으로 간호사들의 근무 시간을 잊어버렸다며 혀를 찼다. 어떻게 문자를 해? 전화할까? 고민하던 서진은 휴대폰을 보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전화나 문자로 거절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서진은 반쯤 쳤던 문자를 지우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 와중에도 그녀와 사귄다는 사실은 선택지조차 없는 스스로가 참 비참해졌다. 20살의 강서진이었다면 과연 이랬을까? 서진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여자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으면서도 왜인지 호감이라든지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싹이 트지 않았다.
딱 한 사람 최근 들어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우민을 제외하면 말이다. 서진은 자신에게 고백한 여자보다 수술실 뒷정리하거나, 혹은 외래 진료를 하면서 보는 우민이 몇 배는 더 신경이 쓰였다.
“강 선생!”
멀리 복도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서진을 보고 손을 까닥였다. 말은 하지 않아도 손이 필요하니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그녀에게 받은 고백에 답장을 보내는 건 오늘은 무리일 것 같았다.
다음 날, 서진은 고백을 받은 시간과 비슷한 시간에 그녀를 만나러 찾아갔다. 한 시간밖에 자지 못한 탓인지 서진의 눈 밑으로는 눈 그늘이 진하게 내려와 있었다.
“미연이 오늘 오프예요.”
“아……. 알겠어요.”
오늘은 또 오프란다. 먼저 연락을 보내기 뭐했던 서진은 고맙다는 말을 남기며 등을 돌렸다. 되는 일이 없었다. 내일은 꼭 좋은 말로 거절해야지. 서진은 고백을 받아들일 멘트가 아닌 완벽하고, 뒤탈 없는 거절 멘트를 생각해 두고 있었다. 그건 그거대로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서진이 열심히 생각한 거절 멘트는 끝내 사용할 수 없었다. 새벽 무렵, 울리는 전화를 본능적으로 받은 서진은 전화를 받으면서도 휴대폰에서 나오는 불빛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지금요?”
당직 콜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서진은 이층침대의 일 층에서 머리를 부딪칠 뻔한 신세를 간신히 면하며 당직실을 나왔다.
“알았어요. 금방 갈게요.”
휴대폰 너머로 바로 올라오라며 신신당부를 하는 기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은 신발을 질질 끌며 도착한 기욱의 연구실 문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비밀번호를 입력한 서진은 기욱에게 트집이 잡힐 만한 일을 했었나? 하고 당직실에서 잠들기 전까지 했었던 일들에 대해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아.”
그녀한테 받은 고백, 아직 거절을 못 했다. 오프날 이후 그녀를 봤지만, 서진이 워낙 정신이 없는 데다 거의 병동이 아닌 다른 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 탓에 얼굴을 마주 보고 따로 대화할 시간이 없었던 탓도 있었다. 그녀 또한 서진과 마찬가지로 바쁜 것은 똑같았다.
고백을 받은 그 순간부터 사귈 생각 따위는 없었던 서진은 설마 그 사실을 가지고 트집을 잡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여자의 고백을 성가시다고 했던 시헌의 말을 서진은 지금에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시헌과 헤어지고 난 뒤에서부터 서진은 더 시헌을 닮아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서진은 도어락이 열린 문을 열며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빨리 오라고 했지.”
“바로 올라왔어요.”
기욱이 서진의 뒤에 있는 문 쪽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문을 닫고 들어오라는 지시였다. 도대체 뭐가 이렇게 불만인 걸까? 이 새벽에 연구실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서진은 기욱의 연구실 문을 닫았다. 책상에서 일어난 기욱이 서진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을 텐데.”
역시나. 서진은 자신을 똑바로 내려다보는 기욱의 시선에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기욱은 서진의 팔을 붙잡으며 침대가 있는 쪽으로 서진의 몸을 알게 모르게 밀었다.
“이거 놔, 놔요…….”
“할 말 없어? 강서진.”
“사귈 생각 없어요.”
털썩, 뒤로 밀려나다 못한 서진은 결국 침대 위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서진을 침대에 앉힌 기욱은 팔짱을 끼며 서진을 내려다봤다.
“사귀는 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시간, 많았을 텐데?”
기욱은 서진이 여자와 사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20살 무렵이었다면 모를까, 기욱은 서진이 여자에게 관심을 끄게 만들도록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모른다. 거의 일방적인 협박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여자는 서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전부터 서진을 좋아했다. 간호사들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그녀가 서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전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기욱도 우연히 그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고백한 것이 저번주. 그러나 그녀가 서진에게 고백했다는 소문만 들릴 뿐 서진이 그녀를 찼다는 소문은 들은 것이 없었다. 서진은 기욱이 고백을 거절하는 타이밍까지 신경을 쓰고 있다는 생각에 기가 찼다.
“이, 일이 바빠서요……. 해야지 해야지 하고 미루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내가 바람피우지 말라고 말했지.”
“그게 어, 어떻게 바람이 되는 건데요!!”
어이가 없어도 단단히 없었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저 고백을 거절할 타이밍을 잡지 못해 어물쩍대고 있는 걸 두고 바람이라니 미친 것도 정도가 있었다. 그러나 기욱은 서진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 서진의 팔을 잡아 강제로 입고 있던 윗옷을 벗겨 냈다.
“나, 나 당직 중…… 이러지 마세요…!”
지난번에 연구실에서 당할 뻔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서진은 당직이라는 핑계로 기욱을 밀어내려 했지만, 작정하고 덤벼드는 기욱의 힘은 여전히 강했다. 순식간에 윗옷을 벗긴 기욱은 시끄러운 소리를 하는 서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하는 게 좋을걸.”
기욱의 커다란 손이 서진의 목을 쥐었다. 힘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목을 비틀어 버릴 것만 같은 위압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서진은 있는 힘껏 양손으로 달라붙는 기욱을 밀어냈다. 갑작스러운 서진의 행동에 기욱의 몸이 살짝 뒤로 밀려났다. 메마른 서진의 눈가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눈물이 나기보다 억울했다.
“이래서…!!”
“…….”
“흑, 이래서…! 오기 싫었다구요!!”
서진의 말에는 목적어가 빠져 있었다. 신경외과를, 기욱의 연구실을. 무슨 말을 넣어도 전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일하면서도 한 번씩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기욱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서진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정작 1년 차인 서진은 거의 수술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서윤과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꿈꿨던, 서윤과 함께 일을 하고 싶다는 희망과 실제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싫어?”
“…다, 당신이…… 싫어요.”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은 없지만. 서진은 기욱이 미치도록 싫었다. 기욱이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욱의 면전에 대고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한 건 사실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 사람이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박기욱이라는 인간에게는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나이를 먹어 서진이 처음 기욱이 만났을 당시의 연령대까지 되었지만, 서진은 아직도 당시의 기욱을, 지금의 기욱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진의 반항에 기욱이 다시 몸을 숙여 서진을 눕혔다. 싫다라. 서진에게 그 말은 지긋지긋하게 들어 왔다. 너 같은 거, 죽어 버려 등등 너무 많은 말을 들어 와서 그런지 기욱은 서진의 욕은 오히려 기분이 나쁘다고 하기보다는 정겨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기욱은 여전히 서진을 이해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원하는데, 그걸 싫다고 말하는 서진이 역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욱은 입고 있던 수술복을 벗어 뒤쪽으로 내던졌다.
“내가 말한 적 있었나?”
“뭐, 뭘요…!”
“병원에서 일하는 너 되게 꼴린다고,”
“씨발, 그걸 지금 말이라고…… 으읍…!”
서진의 입을 틀어막은 기욱은 서진의 바지를 내려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마치 자신의 그것처럼 익숙하게 페니스를 주무르는 기욱의 손길에 서진은 눈을 질끔 감았다.
병원에서까지 이런 일을 당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좁은 연구실 안으로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들어찼다. 서진의 몸을 짓밟던 기욱이 서진의 안에 페니스를 넣고 짐승처럼 서진을 범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진이 그만하라는 식으로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칠 때면 기욱은 양손으로 서진의 허리를 잡아 더욱 거칠게 서진을 범했다.
기욱의 그런 행동은 반항하면 더 하겠다는 식의 협박에 가까웠다. 왜일까? 평소에는 한 시간, 삼십 분, 십 분이 멀다고 울리는 휴대폰이 오늘은 미치도록 조용했다. 기욱의 연구실에서 일방적으로 당하는 지금 만큼 누군가의 전화를 이렇게 원한 적은 없었다.
“하으… 으윽… 으읍….”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낼 생각도 없었고, 서진은 기욱이 강제로 벗긴 자신의 수술복을 입에 물며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았다. 살이 맞닿는 소리와 함께 기욱은 거침없이 서진의 안을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서진을 범하는 기욱의 움직임에는 일말의 배려 따위는 없었다.
갈 곳 없는 손이 허공을 맴돌다 기욱의 목을 둘렀다. 기욱의 혀가 서진의 입안을 질척하게 유린했다. 조금은 괜찮아지는가 싶으면 기욱은 또다시 서진의 안을 찌르고 들어왔다.
“하윽, 어윽… 으읏… 읍….”
온몸의 근육들이 날이 선 기분이었다. 몇 번을 해도 그랬다. 서진이 절정에 달하는 것도, 사정하는 것도 전부 기욱의 움직임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숨소리가 점점 빨라져 뇌의 산소가 부족해질 지경에 이를 때까지 기욱은 멈추지 않았다. 안 그래도 병원 일만으로도 벅찼던 서진은 기욱의 섹스를, 페이스를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으윽… 읏….”
“내일… 후.”
“흑, 어읏… 으응….”
“내일까지야.”
서진의 등 뒤에서 기욱이 뭔가 중얼거렸다. 내일까지? 뭐가?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어도 마음이 따라 주지 않았다. 울컥, 서진의 안에서 기욱이 사정을 했다. 기욱의 페니스가 움찔거리며 서진의 안에 정액을 뱉어 낼 때마다 서진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몸에 힘이 풀린 서진이 앞으로 쓰러지자 기욱이 서진을 강제로 돌렸다.
“…만… 흐윽… 그만해요. 내일 이, 이야기할 테니까…….”
“후, 널 병원에 두는 게 잘하는 짓인지.”
“흑, 자… 잘못했어요…….”
서진이 팔로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흘렸다. 기욱의 페니스가 나오자 울컥, 하고 서진의 안에서 나온 정액이 허벅지와 엉덩이 쪽으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기욱은 만족하지 않는 듯 서진의 다리를 옆으로 벌렸다. 기욱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서진의 팔을 옆으로 치웠다. 서진이 얼굴을 가리지 못하도록 양팔을 누른 기욱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서진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널 병원에 둔 게 잘한 건지 회의감이 들거든.”
“으윽… 끄윽….”
“차라리 의대를 보내지 말 걸 그랬나.”
일은 일이다. 서진이 같은 공간에, 눈에 닿는 거리에 있어도 그 역시 일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기욱은 서진을 눈에 닿는 곳에 두고 싶었다. 서진이 잠시라도 다른 사람과 즐겁게 대화를 하는 장면을 목격하면 머리에서 피가 거꾸로 솟았다.
과거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랑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도 이 정도로 열이 받지는 않았다. 여자든 남자는 상관없었다. 자신 외에 누군가가 강서진이라는 사람의 몸에 닿는 그것조차 짜증이 났다.
병원이 아닌 다른 곳에 서진을 두면 좀 나을까? 신경외과가 아니라 다른 과였으면 좀 더 나았을까? 그런 생각을 최근 들어 몇 번인가 하게 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기욱은 자신이 모르는 장소에서, 자신이 모르는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친해진다고 생각하니 그건 그거대로 열이 받았다.
서진은 기욱이 화가 난 이유가 고백을 늦게 거절해서라고 알고 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서진이 잘 모를 뿐 서진을 노리는 여자들은 꽤 있었다.
그게 꼭 병원일 필요는 없었다. 주변의 관심을 받고 자란 만큼 기욱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이젠 나이가 있는 터라 함부로 기욱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20대 후반의 좋을 시절의 서진은 이야기가 달랐다.
서진을 데리고 어딘가를 나갈 때면 느껴지는 시선들을 기욱은 알고 있었다. 서진이 눈치채지 못할 뿐 작정하고 마음을 먹으면 서진 또한 어린 시절의 기욱처럼 사람 여럿 꼬시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본인이 그럴 성격과 강단이 되지 않는 것뿐이었다.
눈에 닿는 곳에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모르는 곳에 보내자니 그것도 싫었다. 참으로 어린아이 같은 모순이었다.
“어윽…!! 으윽…!”
기욱은 양손으로 서진의 허리를 잡아당겨 페니스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 작은 입으로 저주의 말을 퍼부어도 좋다. 욕을 하고 비난해도 상관없었다. 기욱은 서진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길 바랐다. 기욱에게 서진은 오아시스 같은 존재이면서 끝없이 원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한 번만 더… 후우, 거슬리게 해 봐.”
곁에 두면 조금은 덜 원하게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보면 볼수록, 서진에 대해 알아 갈수록 기욱은 미칠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서진은 그녀가 출근하자마자 그녀에게 사귈 수 없다며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 * *
서진은 마스크를 올리며 코를 훌쩍였다. 서진과 레지던트 동기인 강연태가 그런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취, 에취!”
“감기야?”
“어, 그런가 봐.”
“이 시기에? 너 몸 관리 괜찮은 거냐?”
“괜찮아. 약 먹었어.”
약발이 돌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자 간호사에게 고백을 받은 날 이후 기욱은 시간이 맞을 때마다 서진을 불러냈다. 끝까지 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었지만 병원에서 기욱과 몸을 섞는다는 것 자체가 서진으로서는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기욱의 집착은 병원에서 일하지 않을 때보다, 일할 때 더 심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난 집에 간다. 고생해라.”
“하아, 난 이제 시작인데. 부러운 자식. 몸조심하고 들어가서 쉬어. 아. 내일 올 때 나 햄버거 좀 사 와라. 안 그래도 먹고 싶더라.”
“햄버거 심부름을 왜 나한테 시키는데……. 그냥 배달시켜 먹으라고.”
“아니, 말고. 지난번에 여친이랑 갔었는데 거기 배달 안 된다고 하더라고. 내가 특별히 네 거까지 사 줄 테니까 돈 청구해.”
“사 준다고 말한 적 없거든?”
“짜식, 사 올 거면서. 들어가라.”
원 제멋대로인 녀석이었다. 연태에게 등을 돌리기 무섭게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두 번의 진동이 각자 따로따로 나눠서 울렸다. 연태에게서 온 연락과 2G폰에서 울리는 진동, 기욱의 연락이었다.
연태가 보내는 톡은 어차피 햄버거에 관련된 내용이니 읽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 서진은 라커룸으로 들어와 2G폰을 열어 기욱에게 온 문자를 확인했다.
「1004호로 와」 오후 10:12
「안 가면……」
서진은 문자를 반쯤 치다가 마침 들어오는 의사에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서진은 며칠 전 서윤과 했던 연락들을 확인했다. 일정대로라면 서윤은 이제 막 출근을 해 일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사실 기욱이 문자를 보낸 순간부터 서윤의 스케줄은 안 봐도 뻔했다. 이렇게 시간이 비는 날에는 정말 특별한 용무가 없는 이상 기욱에게 연락이 왔다.
차라리 안 쉬고 일을 하고 싶었다. 서진은 쉬는 날이, 퇴근이 퇴근 같지 않았다. 병원 아니면 집, 그것도 아니면 기욱과의 섹스라니 지겨운 것도 정도가 있었다. 아직은 버틸 만한 건 사실이지만, 연태의 말대로 슬슬 체력이 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그냥,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틸 뿐이었다. 서진이 연애를 하지 않는 건 어쩌면 꼭 기욱 때문에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고 있는 지금, 서진은 누군가에게 잘해 줄 자신이 없었다.
병원 밖으로 나온 서진은 담배를 한 대 피운 뒤 기욱에게 답장을 보냈다.
「알았어요.」 오후 10:24
언제쯤이면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요즘 들어서는 그런 생각뿐이었다. 서진은 마침 오는 택시를 붙잡아 탔다. 날은 서늘했지만, 서진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뒤 모자를 썼다. 그 뒤에 편한 후드의 모자까지 눌러쓰고 나니 딱 봐도 방구석 폐인 꼴 같았다. 평소에도 이러고 다니는 건 아니긴 하지만, 몸이 으슬으슬한 터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솔직히 어떻게 일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조금은 차가 막히길 바랐지만, 택시는 그 많은 신호를 한 번도 걸리지 않고 빠른 속도로 아파트 앞으로 도착했다. 서진은 주머니에 있는 작은 지갑에서 기욱의 카드를 꺼냈다.
“카드로 계산할게요. 영수증은 괜찮아요,”
계산된 카드만을 챙긴 서진은 택시에서 내렸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부조리에 익숙해지고, 그만큼 뻔뻔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만 해도 기욱이 주는 돈이, 카드가 서진은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기욱이 주는 카드가 기간이 다 되어 정지될 때까지 쓰지 않았다.
“그때 더 쓸걸.”
오히려 요즘은 그때 너무 자존심을 세웠나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택시비로 기욱의 카드를 쓴 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차피 도망을 갈 것도 아니고, 서진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뒤 몇 개비 남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오래된 아파트라 그런지 확실히 써늘한 감이 있었다.
“그래도 어디를 가나 외제차는 있네.”
기욱과 부산을 내려갔다 온 이후부터였을까? 서진은 차에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라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즘은 조금씩이나마 시간이 날 때마다 차에 관련된 걸 휴대폰으로 검색해 보고는 했다. 어렸을 때부터 차 좋아하는 녀석들에 비교하면 아직 병아리 수준이지만, 관심이 무섭긴 한 모양인지 보이는 차종들이 하나씩 늘고 있는 모습에 조금 뿌듯했다.
“…에취!”
한 개 더 피우고 가려 했는데, 왠지 모르게 싸한 기분에 서진은 급하게 담배를 끄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단순히 감기겠거니 생각한 서진은 건조해진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 * *
“흐, 하으윽…!”
더웠다. 덥다고 하기보다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서진이 아파트에 들어오기 무섭게 기욱은 서진을 덮쳤다. 이렇고 저렇고 이야기할 틈도 없었다. 오늘의 기욱은 유독 끈질겨서 서진을 좀 힘들게 만들었다.
“하아, 하, 하으, 읏….”
“너….”
기욱의 페니스를 넣은 채 무릎 위에 올라탄 서진의 숨이 평소보다 아주 빨랐다. 움직임을 멈춰도 색색거리는 숨이 멈출 줄을 몰랐다. 기욱이 몸을 조금 움직이자 느끼는 곳을 찌른 듯 서진의 몸이 흔들렸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기욱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서진의 옷가지 위에 굴러다니는 병원 마스크를 흘끗댔다.
그러고 보니 서진은 마지막까지 병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장소가 장소다 보니 굳이 몸이 좋지 않아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기욱은 서진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욱도 벗기 귀찮을 때는 마스크를 쓰고 일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응, 으읏… 응, 하… 으읏….”
“너 괜찮아?”
“흐… 그만… 흐으….”
서진은 정신이 없어 보였다. 기욱이 조심스럽게 서진의 안에서 페니스를 빼냈다. 안을 가득 메우던 페니스가 빠지자 서진의 몸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기욱은 서진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안아 침대에 눕혔다.
“몸 안 좋으면 미리 말하라고.”
“하아, 하… 했어요. 했는데…….”
몇 번이나 적당히 하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들은 척도 하지 않은 게 누구더라. 서진은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해 서진의 팔이 축 아래로 쳐지며 의식을 잃었다. 기욱은 힘없이 쓰러지는 서진을 똑바로 눕히며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힘이 없어서야 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 * *
다음 날 날이 완전히 밝기 전 새벽쯤 서진은 기욱의 차를 타고 오피스텔에 갈 수 있었다. 어떻게 집에 들어갔는지도 모른 채 2층에 있는 침대에 올라가자마자 잠자리에 들었던 기억밖에 없었다. 오후 무렵 나른한 몸을 이끌고 일어나니 병원 진단서를 끊어 오라는 기욱의 문자 하나만 와 있었다.
병원을 갈 기운도 없었지만, 병가 처리를 하긴 해야 할 것 같아서 서진은 지친 몸을 이끌고 적당히 오피스텔 건너편에 있는 병원을 찾았다.
“강서진 환자분! 들어오세요!”
“하아.”
봄에 감기라니, 서진은 이게 다 기욱 때문이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병원은 한가했다.
“마스크 내려 주셔야 해요.”
서진의 병원 마스크를 본 간호사가 한마디 했다. 굳이 감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마스크를 쓰는 데 익숙해져 있던 서진은 제가 마스크를 계속 쓰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있었다. 서진이 간호사의 말을 듣고 마스크를 내렸다.
예상했던 대로 감기몸살이었다. 하긴, 한동안 계속 몸이 안 좋은데 쉬지도 못하고 일을 했으니 몸살이 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기욱까지 달달 볶으니 이만하면 오래 버틴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의사가 서진의 목에 걸려 있는 마스크를 슬쩍 보며 말을 걸었다.
“무슨 일 하세요?”
“네? 아아, 그게 저…….”
서진은 눈치를 보며 진료실 안을 둘러봤다. 아무래도 의사도 한가했던 모양이었는지 진료에는 여유가 있었다.
“저?”
“네, 저……. 저도 의사예요.”
서진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목이 쉰 탓인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서진은 아직 어디 가서 직업을 말하는 게 약간 어색했다. 의사라고 해도 병원에서는 인턴 다음으로 막내 취급을 받는 데다가 기욱이나 우민, 규건 등 감히 따라갈 수도 없을 것같이 잘난 사람들만 보다 보니 어디 가서 의사라고 말하는 게 약간은 멋쩍었다.
“아, 그래요? 무슨 과?”
“NS 1년 차예요.”
“하하, 힘든 과 선택했네요.”
“장난 아니에요.”
“그렇죠. 뭐. 저도 레지던트 때 죽는 줄 알았어요. 어느 학교 출신?”
“H대요.”
“어, 나도 H대인데 학번이 어떻게 돼요?”
왜인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보조를 하는 간호사는 서진에게 친근하게 말을 거는 그의 행동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타이밍이 좋은 건지 병원에는 정말 손님이 없었다. 서진이 학번을 말하자 그가 멋쩍게 웃었다.
“아, 역시 차이가 나긴 나네요. 하하. 그러면 자대 다니겠네요?”
“아뇨. 누나가 J대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어서, 학교는 H대긴 한데 PK랑 인턴도 전부 J대에서 했어요.”
“그럼 NS도? 아, 그러면 한 교수도 알겠네요? H대 출신인데 J대 붙박이라 아직도 교수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한우민 교수님이요?”
레지던트인 서진이 교수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중에 ‘한’씨는 몇 명 있었지만, 서진이 가장 먼저 기억이 나는 건 역시 우민뿐이었다. 정확하게 나오는 이름에 그가 반가운 이름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맞아요. 우민이 걔도 이 근처 살아서. 가끔 병원 놀러 오고 그랬는데, 요즘은 통 바쁜 모양인지 연락이 없긴 하더라구요. 잘 지내면 안부 좀 전해 줘요. 언제 한번 연락할 테니까 술 한잔하자고.”
“그럴게요.”
“몸조심하시고, 하루 이틀 정도는 더 쉬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 있어요?”
“아마, 안 될걸요.”
“약 이틀 치 챙겨 줄 테니까 먹고, 아니다 싶으면 병원에서 약 타 먹어요. J대에도 아는 후배 있으니까 이야기해 둘게요.”
“하하, 그렇게까지 안 챙겨 주셔도 되는데…….”
“이런 데서 후배 뵙는데 선배로서 그 정도는 해 줘야죠. 그 고생 하면서 학교 졸업했는데.”
“감사해요.”
“그래도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 출근해요.”
“그 정도 허락은 받았어요.”
이야기가 끝날 무렵 다른 환자가 들어왔다. 서진은 꾸벅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왔다. 생각 없이 들어간 병원이 우민의 동기가 하는 곳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우민의 동기들은 하나같이 다 오지랖이 넓은 건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아 보이자 서진은 다시 마스크를 눌러쓰고 아래층에 있는 약국으로 향했다.
약을 먹고, 2층에 있는 침대까지 올라갈 기운도 없었던 서진은 결국 장롱에서 겨울 담요를 꺼내 소파에 누웠다. 복층 오피스텔은 좋지만, 이럴 때만큼은 복층이라는 것이 성가셨다. 아무래도 서진에게 맞는 것은 복층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게 레지던트 일을 시작하면서 침대에서 편하게 자는 횟수보다 소파에서 자는 횟수가 훨씬 더 많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간 걱정하지 않고 자야겠다고 다짐을 한 서진은 담요를 머리까지 덮고 잠이 들었다.
삐빅, 삑.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옆집인가 싶었는데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서진은 습관처럼 머리맡에 두고 자던 휴대폰을 들어 담요 속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일곱 시가 좀 넘어 있었다. 아무리 들어도 기욱의 발걸음은 아니라고 생각한 서진이 담요를 살짝 내려 몸을 돌렸다. 서윤이었다.
“원, 오빠한테 아프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래도 올라가서 자.”
“윽, 누나… 야?”
“얘도 참, 밥은 먹었어? 병원은 갔고?”
“약 먹었어.”
“병원 가고 밥 먹었냐니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 응.”
서진은 소파에 바로 앉아 담요로 몸을 덮으며 서윤을 바라봤다. 서진이 걱정됐던 모양인지 서윤은 기욱에게 부탁해 한 시간 정도 조기 퇴근을 한 상태였다. 약도 먹고, 병원도 가긴 했지만, 서진은 여전히 정신이 몽롱했다. 서윤은 바닥에 떨어진 병원의 약 봉투를 주웠다. 병원을 가긴 갔다 온 모양이었다.
“밥은?”
대답할 기운이 없었던 서진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서진의 얼굴에는 아직도 마스크가 그대로 쓰여 있었다. 마스크 빼고 자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서윤이 테이블 위로 죽이 들어 있는 봉지를 내려놓았다.
“그럴 줄 알고 죽 사 왔어.”
“…는데.”
“뭐라고?”
“안 사와도 되는데. 매형은?”
“오빠? 오빠는 병원에 있지.”
당연히 기욱과 왔을 것이라 생각한 서진은 뒤늦게 서윤 혼자서 찾아왔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여기서 한 번 더 기욱에게 당하면 이번엔 정말 병원에 실려 갈 것만 같았다. 서윤은 입고 있는 코트를 안쪽 방의 옷장에 넣어 둔 뒤 소매를 걷으며 거실로 나왔다.
“위로 올라가. 누나가 죽이랑 물 가져다줄게. 누나 오늘 자고 갈 거니까 푹 쉬어.”
“매형은?”‘
“얘도 참, 오빠를 왜 네가 신경 써? 얘기하고 온 거야.”
서진은 그제야 기욱에 대한 관심이 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더 이상 물었다가는 오해를 받을 것 같은 기분에 서진은 서윤의 부축을 받으며 위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누웠다. 아무리 소파에서 자는 게 익숙하다고 해도 역시 잠은 침대만 한 게 없었다. 잠시 뒤 서윤이 죽과 물을 가지고 올라왔다.
“정말이지. 몸 안 좋으면 미리미리 말하라고. 걱정했잖아.”
“그게……. 미안.”
“내가 미안하지. 기욱 오빠도 있고, 나도 같이 있는데 서진이가 고생하는 거 모르고 있었으니까.”
“하하, 일할 때는 동생 취급도 안 해 주면서 무슨 소리야.”
사람이 좋은 것과 일을 하는 건 틀렸다. 서진은 왜 서윤과 기욱이 그렇게 오래 큰 병원에서 버티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최근 들어서야 알게 됐다. 기욱은 기욱 나름의, 서윤은 서윤 나름의 프로 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같은 공간에서 일한다고 해도 서진은 1년 차 레지던트 이상의 대우는 받아 본 기억이 없었다. 사실 일은 일로서 대해 주는 편이 서진에게도 마음은 편했다.
“에취…. 아.”
이놈의 기침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서진은 서윤의 앞에 앉아 말없이 죽을 먹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은 탓인지 죽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술술 넘어갔다. 몸살감기일 뿐 소화 불량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더 먹을래?”
“아니, 됐어. 근데 누나는 저녁 먹었어?”
“난 아까 병원에서 먹고 나왔어. 한숨 자.”
“근데 누나 어디서 자려고?”
“알아서 잘게요. 왜 이렇게 치근덕대?”
“그치만…….”
몸이 아파서 그런 걸까? 아니면 기욱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안심이 돼서 그런 건가? 서진은 오늘따라 무척이나 서윤에게 앵기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서진에게는 서윤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때만 해도 서윤과 따로 산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서진은 다 먹은 그릇을 한쪽으로 치워 내려가려는 서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몸살이 심하긴 한 모양인지 서진의 얼굴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누나.”
“왜?”
“같이 자. 침대 커.”
“소파도 괜찮아.”
“싫어.”
“서진아.”
“내가 싫어.”
서진은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서진은 왠지 앙탈을 부리는 스스로가 시헌 같다고 생각했다. 서윤은 서진이 붙잡은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이미 엉망으로 헝클어트린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단 이것 좀 두고 올게.”
“올라와야 돼?”
“알았어. 우리 서진이, 아프긴 한 모양이네. 이렇게 누나 찾는 거 보면.”
서진은 서윤과 있으면 제 나이를 실감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렇다. 몸은 자랐지만, 서진의 시간은 언제나 시헌과 사이좋게 떠들던 중학교 시절에서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서윤이 부스럭거리며 서진의 방을 적당히 치우고 있었다.
늘 정적이 감돌던 집 안에, 사람이 있는 듯한 소리는 서진의 마음을 좀 편하게 만들었다. 서진은 서윤이 돌아다니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금방 잠에 빠졌다.
* * *
강남의 한 고급 펜션 주차장에 차를 댄 기욱은 굳게 닫힌 유리문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일단 주소는 맞게 찾아오긴 한 것 같았다. 기욱이 경비실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자 안쪽에서 먼저 제법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기욱에게 걸어왔다. 기욱의 머리 위로 천장의 CCTV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주변을 서성이는 기욱을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도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보통 아파트 경비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젊은 편에 속했다.
“하아, 603호 손님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가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와 통화를 하는 상대가 집주인이라는 것쯤을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네네, 하하. 아닙니다. 사모님. 예. J대 병원이요? 알겠습니다.”
굉장히 정중하게 전화를 받은 그가 전화를 끊은 뒤 기욱에게 다가왔다.
“의사 선생님 맞으십니까?”
“예.”
“신분증 맡기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병원 신분증도 같이 보여 주세요.”
“하아.”
경비의 깐깐한 요청에 기욱은 이게 대기업 회사인지 아니면 일반 개인 주택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주민등록증은 지갑에 있었지만, 병원 신분증은 차 안에 있었다. 기욱은 결국 차로 돌아가 병원 신분증을 챙겨 나왔다.
기욱의 병원 신분증을 본 그가 처음과는 다르게 누그러진 말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워낙 사생활에 민감하게 생각하시는 사람들만 살다 보니 이해해 주세요. 손님이라고 해 놓고 사칭하는 때도 있고. 병원 교수님이시군요.”
“하하, 예. 이해합니다.”
사실은 별로 이해가 가진 않지만. 기욱은 그를 따라서 로비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자 미리 층에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손님용 엘리베이터와 거주자용 엘리베이터가 아예 따로 나뉘어 있었는데, 손님용 엘리베이터는 미리 말한 층 외에 다른 층은 운행 자체를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지인이라고 할 때부터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이쯤 되면 재벌 관계자인가 싶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아니면 어디 잘나가는 연예인이라든지. 뭐, 어느 쪽이든 일분일초라도 빨리 이 답답한 공간을 나가고 싶어 하는 기욱과는 상관이 없었다.
주치의라고 해 봤자 정기적으로 상태만 보는 거고, 그조차도 신경 외과적 문제가 없으면 기욱의 알 바는 아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바로 집과 연결된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아, 어서 오세요. 신발은 이쪽에 있습니다.”
이 정도 넓이의 집이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 이상했다. 기욱의 집도 하연과 기욱이 어렸을 때만 해도 집안일을 해 주는 가정부가 있었다. 본가에는 안 간 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주말마다 청소해 주고 가는 가정부가 있는 거로 알고 있었다. 기욱은 안내를 받으며 넓은 거실로 들어갔다. 밖에서부터 전망이 좋은 곳일 거라 짐작은 했는데, 확실히 벽면이 전부 통유리로 되어 있는 것이 보기는 좋았다.
이름도 모른다. 그저 부탁을 받아서 온 기욱은 도대체 자신을 콕 찍어서 부탁한 사람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귀찮은 일에 발을 들여놓은 건 아닌가 걱정은 됐지만, 아무렴 거기가 늪인지 아니면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인지는 끝까지 모르는 일이었다.
거실로 나온 기욱은 오래가지 않아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거실 한쪽에 있는 넓은 소파에서 일어난 여자는 기욱이 아는 얼굴의 여자였다. 잘 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머, 오랜만이에요.”
갈색 머리카락의 여자. 이름은 몰라도 그 재수 없는 얼굴만큼은 분명하게 기억했다. 기욱은 소파에서 일어나 노골적으로 다가오는 그녀와 거리를 벌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십니까?”
“기억 못 하는 거예요? 서운한데.”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을 짓는 그녀가 기욱은 짜증이 났다. 역시 오는 게 아니었다고, 기욱의 불편한 직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태연하게 모르는 척을 하고 있어도 기욱은 여자를 알고 있었다. 한눈에 본 순간 그녀가 서진이 마지막 인턴으로 있었던 응급실에서 난동을 부리던 여자라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안 좋은 일로 기억에 남는 사람의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고 싶진 않았다.
서진만 아니었으면 도와줄 의리도, 생각도 없었던 여자였으니까 말이다. 이름도 모르고. 기욱은 20대 중반의 그녀가 무슨 연예인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예인이면 분명 무슨 식으로든 호들갑이 있었을 것이었다.
그녀는 기욱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기욱의 등을 떠밀며 소파에 앉혔다. 기욱은 마지못해 소파에 앉았다.
“엄마 금방 나올 거예요. 그보다 나 진짜 기억 못 해요?”
“워낙 보는 환자가 많아서. 입원하신 적 있습니까?”
“입원은 안 하고, 응급실에 갔었는데. 봐요. 그때 머리 꿰매 주셨잖아요.”
그녀가 앞머리를 살짝 걷어 거의 흉터가 남아 있지 않은 이마를 보여 주며 웃었다. 기욱은 눈앞에 있는 여자 같은 스타일을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자시고, 한참 학교에 다녔을 무렵 기욱이 끼고 놀았던 여자 중에서는 무슨 재벌의 딸이라든지 잘나가는 집안의 여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 그런 집 자식들은 겉치레가 강한 편이었다. 저런 타입은 그래, 기욱의 경험으로는 정상적인 가정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정식 루트로 낳은 자식이 아닌 혼외자인 경우가 가장 많았다.
여자는 생각보다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기욱에게 실망한 듯 테이블에 올려진 물 잔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우리 엄마 금방 올 거예요. 근데 그거 알아요? 그쪽 부른 사람 나거든요.”
“CT상으로는 특별히 뇌에 문제가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맞다 그쪽 의사랬지. 저 되게 멀쩡해요. 그냥, 선생님 얼굴 보고 싶어서 불러 봤어요. 사과도 할 겸.”
“사과받을 만한 짓을 한 기억이 없는데.”
“흐음, 그럼 답례? 어쨌든요. 이참에 친하게 지내요. 나한테 그렇게 대한 사람 그쪽이 처음이란 말이에요. 내 이름은 이연수구요. 그냥 연수라고 해도 돼요. 우리 엄마 성인데, 우리 아빠 성은 최씨예요. 누군지는 비밀.”
생각 이상으로 여자는 말이 많은 타입이었다. 어머니의 성을 따르고, 넓은 집에 여자 단둘이. 기욱은 딱 봐도 수상쩍은 뭔가가 있음을 짐작했다. 남의 집안 가정사에는 얽히는 게 아닌데. 아무래도 골치가 아픈 일에 얽혔다는 생각은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 방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을 한 중년의 여자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한 실장, 나 물 좀.”
“예. 사모님.”
여자는 관심 없다. 딱 봐도 저쪽이 진짜라고 생각한 기욱이 소파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녀가 손을 들으며 기욱을 말렸다.
“괜찮아요. 딸이 보고 싶다고 해서 부른 거니까 편하게 있어요. 이지민이라고 합니다. 소문대로 J대 신경외과에는 젊은 교수님들이 많군요.”
“하하, 말씀은 감사합니다. 병원장님이 꼭 한번 찾아뵈라고 하셔서 말입니다.”
“남 병원장한테는 신세 많이 졌죠.”
“명함입니다. 불편하신 곳이나 문제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해 주세요. 제 담당이 아니라도 신경 써 드리겠습니다.”
기욱이 여자 쪽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그녀가 기욱이 준 명함을 조용히 받아 확인했다. 정말이지 이런 분위기는 불편했다.
“박기욱, 그러고 보니 의료계에는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꽤 많다죠?”
“어느 성도 다 많을 겁니다. 의사가 워낙 많아야죠.”
“겸손도 하셔라.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고마워요. 앞으로 자주 놀러 오세요. 저보다는 제 딸이 뵙고 싶어 했던 모양이니까요. 덕분에 흉터 안 남았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그거야 뭐……. 누구나 다 하니까요.”
여자의 말에 연수가 은근슬쩍 기욱의 옆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기욱의 손등을 만지던 연수가 기욱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여자 또한 기욱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슬쩍 보더니 말을 걸었다.
“결혼하셨나 보군요.”
“예. 이 년, 삼 년 차입니다.”
“한창 좋을 때네요. 애는?”
“와이프도 의료진이라서요.”
하연처럼 애를 키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기욱은 당장 아이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신경을 써야 할 것이 느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노키즈족은 아니었다. 단지 언제나 그렇듯 지금은 아닐 뿐인 일이었다. 서윤이도 당장은 애를 낳는 것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크게 문제가 되는 일은 아니었다.
“사람 일이라는 게 또 모르는 겁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그이가 연수를 낳은 그것보다 그이가 다른 여자랑 결혼하는 게 더 빨랐거든요.”
“엄마,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보다 와인이나 술 좋아해요? 엄마가 말했잖아요. 자주 놀러 와요! 우리 집은 눈치 볼 것도 없으니까요. 병원에서 힘든 거 있으면 내가 엄마한테 다 말해 줄게요. 나라면 이런 싸구려 반지보다 훨씬 좋은 반지 해 줄 수 있는데. 아까워라.”
기욱은 슬슬 머리가 아파졌다. 과거였다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뒀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상황이 틀렸다. 이런 일에 얽히고 싶지도 않았고. 당시 30시간 이상 근무를 하느라 예민해져 있던 서진과 마찬가지로 기욱도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라 예민해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욱이 기억하는 한 연수에게 짜증을 냈던 그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욱은 왜 연수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덤으로 쓸데없이 부담스러웠다.
그녀가 싸구려라고 말하는 반지는 일억이 좀 안 되는 반지였다. 평소에도 결혼반지를 끼고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결혼반지만큼 상대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없었기에 불편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자리에는 꼭 반지를 끼고 나갔다. 기욱은 결혼반지를 끼고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눈 하나 끔벅하지 않는 여자가 보통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센터장은 마음에 드셨나요?”
“예. 덕분에요.”
여자의 말에 기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원래라면 적당히 이야기하다 일을 핑계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듯싶었다. 기욱은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연수의 손목을 살짝 붙잡아 소파 아래쪽으로 내렸다. 갑작스럽게 손을 붙잡은 기욱에 연수가 깜짝 놀랐다. 기욱은 가식적으로 낮은 미소를 지으며 앞쪽에 있는 얼음이 들은 물을 마셨다.
“와인은 별로 안 좋아합니다. 아무래도 일이 일이다 보니 험하게 자라서 말이죠. 일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의 술이라면 괜찮습니다.”
“어머, 그래요? 그거 잘됐네요.”
기욱은 본능적으로 쓸데없이 사이가 틀어지면 골치가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욱은 적당히 십 분 정도 떠들다가 일을 핑계로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와 찬 공기에서 담배를 문 기욱은 펜션을 올려다보며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반강제로 기욱의 휴대폰에 번호를 저장한 연수의 연락이었다.
“귀찮게.”
담배를 끈 기욱은 한 손으로 적당히 답장을 보냈다. 서진과 알게 되고, 서윤을 만난 이후부터 일 외에 사적으로 여자와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된 기욱은 연수의 연락이 진심으로 귀찮았다.
* * *
“…래서. 강서진, 이리 와 봐.”
“네?”
대충 이야기를 마친 기욱이 서진의 가운 주머니에 뭔가를 구겨 넣었다. 누가 볼 틈도 없이 서진의 등을 떠밀며 가 보라는 식으로 손짓을 했다. 대충 만져 보니 종이 쪼가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서진이 오후 무렵 기욱에게 받은 종이를 확인할 수 있는 여유가 된 것은 늦은 저녁이 다 될 무렵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을 놓치고 대신 몇 시간 전에 식은 피자를 먹을 때쯤이었다.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나중에 배고프다고 하지 마라. 안 줄 거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의사 한 명이 손을 흔들었다.
“금방 갔다 올 거예요.”
서진은 화장실로 들어가 아침에 기욱에게 받은 종이를 꺼냈다. 종이와 함께 가운 안에서 처음 보는 사탕이 나왔다. 주머니 안에 사탕을 넣고 다니는 취미는 없었다. 서진은 아침에 종이와 함께 사탕을 넣어 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왜 사탕인지는 모르겠지만. 으득으득 기욱이 준 사탕을 무슨 과자처럼 씹은 서진은 기욱이 준 쪽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하아.”
일 끝나고 올라오라는 내용의 쪽지였다. 이럴 거면 2G 휴대폰은 왜 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연락해도 되고, 굳이 유치하게 사탕이랑 쪽지를 넣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서진은 쪽지를 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의국으로 돌아왔다.
잠깐 나갔다 왔을 뿐인데 2판이나 되는 피자 중 한 판하고 절반이 사라졌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한 조각도 못 먹을 것이라 생각한 서진이 다급하게 피자 한 조각을 가져와 입에 넣었다. 식은 피자라고 해도 오랜만에 먹는 피자라 맛은 있었다.
서진은 피자든 뭐든 배를 채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의국을 나올 때만 해도 없었던 기욱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서진이 쪽지를 확인하러 화장실에 간 사이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급하게 피자를 먹던 서진의 목이 탔다.
“저 음료수 좀…….”
“어, 여기 있어요!”
누군가 서진에게 종이컵에 담긴 콜라를 건넸다. 워낙 정신이 없었던 탓에 손을 놓쳐 콜라가 서진의 수술복 쪽으로 튀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씨. 야!!”
“죄송합니다.”
한참 예민한 3년 차 여자 레지던트가 서진과 콜라를 건네준 인턴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종이컵에서 엎어진 콜라가 바닥에 흐르고 있었다.
“뭐 해? 빨리 닦아.”
“너 옷은 괜찮냐?”
“하하, 마르겠죠. 뭐.”
“나 여벌 받아 놓은 거 있는데 하나 줄까? 너 L 입냐?”
“M인데 L도 괜찮을걸요? 주시면 감사해요. 안에 입은 게 없어서 그런지 찝찝하긴 하네요.”
서진은 새 종이컵에 콜라를 따라 마셨다. 파란색 수술복 위로 묽은 콜라의 얼룩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운을 입지 않고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수술복이야 갈아입으면 그만이지만, 가운은 클리닝을 맡겨야 하므로 여간 귀찮은 것투성이였다.
2판을 시킨 피자는 서진이 화장실에 다녀오고 난 뒤 5분도 채 되지 않아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부터는 두 판이 아니라 세 판을 시켜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대화들이 오고 갔다. 생각보다 콜라를 많이 흘린 서진이 입고 있던 셔츠를 탈탈 털었다.
서진이 셔츠를 털 때마다 옷이 살짝씩 올라가며 맨살이 그대로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선배 레지던트가 헛기침하며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너 내 라커 알지? 거기에 옷 있을 거야. 다음부터 조심 좀 하고.”
“고마워요. 저 내려갔다 올게요.”
서진이 꾸벅 인사를 하며 의국을 나갔다. 그는 서진이 나간 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강서진, 쟨 살도 안 찌나 봐. 난 의대 졸업하자마자 살만 쪘는데.”
“넌 운동 좀 해. 인마.”
“1년 차라 그래. 한 3년 지나면 나처럼 될 거야.”
“연태도 1년 차인데?”
“아니, 왜 절 걸고넘어져요! 전 살찐 게 아니라 덩치가 있는 거거든요? 그리고 서진이 쟤는 진짜 살 좀 쪄야 해요. 저건 막대기잖아요.”
“난 배 나온 남자보다야 막대기가 나은데. 아까 보니까 복근도 있던데? 큭큭.”
“아, 너무해요.”
금방 다른 대화로 넘어갔지만, 서진을 두고 한 레지던트들의 대화를 들은 기욱은 반 조각 정도 남은 피자를 두고 벌떡 일어났다. 난데없이 피자를 먹다 말고 일어나는 기욱을 규건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교수님 어디 가세요?”
“일 있으면 연락해.”
“피자 제가 먹어도 돼요?”
“먹든가.”
밖으로 나온 기욱은 한가한 병동의 복도를 둘러봤다. 너무 늦게 나온 걸까? 서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기욱은 비상계단을 이용해 라커룸으로 내려갔다. 시간이 늦어 라커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욱은 성큼성큼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
마침 윗옷을 벗은 서진은 갑자기 나타난 기욱에게 깜짝 놀랐다.
“뭐, 뭐예요?”
기욱이 한 걸음씩 서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뒤로 물러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갈 곳을 잃은 서진은 옷을 입지도 못한 채 기욱을 올려다봤다.
“새, 새벽에 오라고 그랬잖아요! 으읍….”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순간 기욱이 서진의 입술을 덮었다. 아무리 CCTV가 없는 장소라고 해도 라커룸은 의료진이라면 누구나 다 들락날락하는 공간이었다. 그런 공간에서 키스라니 정신이 나간 것도 정도가 있었다. 깜짝 놀란 서진이 기욱을 밀어내려 하자 옆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큭큭, 그런 거 아니라니까? 말도 마라.”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서진의 심장이 빨라졌다. 기욱은 서진의 혀를 천천히 감아올렸다. 사람이 있든 말든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통화하고 있던 남자가 뭔가를 챙기고 라커룸을 나왔다. 단둘밖에 없는 라커룸 안으로 침묵이 흘렀다.
“하아, 하… 미친 거 아닌……!!”
간신히 숨을 고르며 바닥에 주저앉는 신세만은 피한 서진이 기욱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러나 이미 서진에게 몇 번인가 맞아 본 적이 있는 기욱은 재빨리 서진의 손목을 붙잡아 말렸다. 서진이 때리는 것쯤이야 몇 대든 맞아 줄 수 있지만, 상황상 일일이 변명을 해야 할 일이 발생할 것이 틀림없었다. 변명하고 다니는 것과 서진의 속이 시원할 때까지 맞아 주는 것 어느 쪽을 선택하고 싶냐고 한다면 기욱은 당연히 전자였다,
그도 그럴 게 지금의 기욱은 기껏해야 키스한 것뿐이고, 스스로가 별로 큰 잘못을 했다고 느끼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서진의 손을 강제로 내려놓은 기욱은 서진이 입으려 했던 바닥에 떨어진 L사이즈 수술복 상의를 들고 서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팔 벌려.”
“혼자 입을 수 있어요. 그보다 왜 쫓아왔는데요!!”
“배 보여 주면서 유혹하고 다니는데 안 내려오게 생겼어? 너 앞으로 안에 옷 하나 더 입어.”
“옷에 콜라 좀 묻어서 털은 걸 유혹이라고 하면 제가 다른 사람들이랑 일하는 건 어떻게 참아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세요. 그리고 더워서 싫어요!”
“맞는 말이야.”
“뭐가 또 맞아요?”
“네가 다른 사람들이랑 떠드는 것도 요즘은 짜증 나. 마음 같아서는 병원이고 뭐고 가둬 버리고 싶을 지경이야.”
“당신은 진짜 미쳤어요!! 이, 이런 거……! 만약에라도 소문나면 전 병원 그만둘 거예요!”
“많이 참고 있어. 그리고 강서진,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해 봐.”
“윽.”
기욱이 서진의 팔목을 강하게 잡았다. 기욱은 기욱 나름대로 소문이 나지 않을 정도로 조절을 하는 것이었다. 분명한 건 기욱은 이것도 많이 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서진이 옷에 콜라를 흘리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들추는 일만 하지 않았어도 기욱이 쫓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기욱은 이 모든 게 다, 하나부터 열까지 서진의 잘못이었다. 나름대로 배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왜 서진은 알아주지 못할까? 기욱은 요즘 들어 그런 서진이 역으로 답답하기만 했다. 더 이상 라커룸에 있을 수는 없었던 기욱이 서진의 턱을 들어 올리며 시선을 맞췄다.
“이따 봐.”
기욱이 먼저 라커룸을 나왔고, 기욱이 나간 것을 확인한 서진은 한참에서야 기욱이 손에 쥐여 준 L사이즈 수술복을 입었다.
“토할 것 같아….”
몸살감기에서 나아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몸살이 올 것만 같았다.
* * *
“하악! 윽… 으응… 하읏… 드, 들어…… 가서….”
“강서진, 입 안 다물어?”
새벽 무렵, 서진은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기욱의 연구실에 들어갔다. 먼저 와 있던 기욱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진을 범했다. 처음에는 연구실 안쪽의 침대에서 하는가 싶더니 최근 들어서는 침대까지도 못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다. 기욱은 서진의 손을 책상 위에 강제로 붙이게 했다. 기욱이 움직일 때마다 서진의 몸이 책상 쪽으로 달라붙으며 책상이 흔들렸다. 아예 작정이라도 한 걸까? 기욱의 책상에는 아무런 서류나 노트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흐윽… 우윽…!”
서진이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기욱이 서진을 불러내는 타이밍 또한 점점 짧아져만 갔다. 사실 연구실뿐만이 아니었다. 요즘 들어 서진은 기욱이 서윤만 없으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단둘이 시간을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런 기욱을 느낄 때면 서진은 일부러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며 기욱을 피해 다니지만, 교수와 레지던트의 입장 차이라는 게 있는지라 기욱을 피해 다른 일을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서진을 책상 위로 올린 기욱이 다리를 벌린 뒤 서진의 안을 정신없이 탐했다. 서진이 느끼는 만큼, 기욱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서진이 힘들어한다는 것, 서진을 원하는 빈도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 정도를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단지, 서진과의 섹스는 마치 중독성 강한 마약처럼 하면 할수록 질리기는커녕 끊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기욱이 서진을 원하면 원할수록 역으로 서진의 모습은 시들어 가는 장미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초췌해져 가고 있었다.
“흐… 아읏… 으윽….”
“후, 그만할까.”
사정 직전에 페니스를 빼낸 기욱의 중얼거림을 들은 서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들에게 욕을 먹는 것도, 진상 환자에게 컴플레인이 걸려 한 소리 듣는 것 이상으로 서진은 기욱과의 섹스가 가장 지치고 힘들었다.
기욱과의 삼십 분은 30시간 동안 병원에서 근무를 서는 것보다 훨씬 더 기력이 빨리는 일이었다. 만약 둘 중에 택할 수 있다면 서진은 거침없이 30시간이 됐든 48시간이 됐든 병원에서 일을 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었다.
학창 시절 서진의 도피처가 공부였다면, 지금 서진의 도피처는 그저 물 흐르는 대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페니스를 빼낸 기욱은 땀이 찬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서진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럽게 책상에서 내려온 서진은 기욱의 밑으로 무릎을 꿇은 신세가 되었다.
기욱의 약간 벌어진 다리 사이로 아직 꼿꼿하게 서 있는 페니스가 서진의 뺨과 입술 근처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잔인하게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서진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이대로 기욱에게 계속 당하는 것과 기욱을 만족시키는 것 둘 중 한 가지를 택하라는 암묵적인 시선에 서진은 기욱의 허벅지를 붙잡으며 페니스로 입을 가져다 댔다.
“우윽…….”
몇 번을 해도 속이 거꾸로 뒤집힐 것 같은 역겨운 향기가 서진의 코를 시큰하게 적셨다. 그러나 서진은 펠라를 하는 것 이상으로 기욱에게 다리를 벌리고 당하는 것은 사양이었다. 이미 당할 만큼 당해서 여기서 더 한다면 지난번처럼 실신할 것 같았다.
“윽, 어흑… 으읍….”
“흐, 읏. 많이 늘었네.”
처음 서진에게 펠라를 시키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의 서진은 귀엽다 못해 깨물어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색한 것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서진도 그렇게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의 서진이 이런 식으로 하나씩 배워 가며 남자를 알아 가는 걸 볼 때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기욱은 서진의 안에 못 한 사정을 하기 위해 서진의 머리채를 쥐고 거침없이 흔들었다. 몇 시간 전에 먹은 피자가 같이 넘어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윽… 캑캑…!”
“다 삼켜.”
“흐… 윽….”
몸을 숙인 기욱이 서진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넘겼다. 입술 근처와 입안에 엉망으로 묻은 정액이 강제로 목 뒤로 넘어가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연구실의 천장이 평소보다 훨씬 더 높아 보였다. 기욱은 LED 불빛을 보며 멍하니 있는 서진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안쪽의 침대가 있는 방이었다.
“그, 그만…… 그만해 주세요…….”
안으로 들어가면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했다. 입안에서는 아직도 텁텁하고 질척한 맛이 가시지를 않고 있었다.
그만하고 싶었다. 기욱도, 지긋지긋한 섹스고 뭐고 다. 서진이 눈물을 흘리며 기욱에게 부탁했지만, 기욱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서진을 좁은 침대 위로 내던졌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탐하는 기욱과 그런 기욱에게 안겨 풀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서진의 마음은 이미 무너져 내려가는 중이었다.
* * *
새벽 무렵 기욱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비틀거리며 연구실을 나온 서진은 곧장 샤워했다. 이런 꼴로 밖으로 나가거나 누군가를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다. 사용하는 사람이 없는 새벽의 샤워실 안쪽은 서진이 틀어 놓은 뜨거운 샤워 호스 연기로 금방 물안개가 찼다.
기욱과 섹스를 하고 난 후의 서진은 꼭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화상을 입을 것같이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야만 적성이 풀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서진의 몸에서는 아직도 뜨거운 열기가 풀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진은 수건으로 물기를 말리고 있었다.
“어, 너 일찍 왔다? 이 시간에 샤워해?”
“……아, 안녕하세요.”
우민의 등장에 서진이 머리를 말리던 수건에서 손을 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막 샤워를 하고 나온 데다 워낙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탓인지 서진의 근처만 온도가 달랐다.
“교수님은 무슨 일이세요?”
“나도 좀 씻으려고. 며칠 동안 집에 못 들어가니까 죽겠다 아주. 뭐, 잠도 깰 겸. 그러는 넌 당직 퇴근하지 않았었냐?”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막차도 끊기고, 집에 들어가기 애매해져서요. 그냥 병원에서 잤어요.”
“크, 내 레지던트 시절이 생각난다. 박기욱한테 들었다. 아주 아파서 정신을 못 차렸다면서? 몸은 좀 괜찮냐?”
“네. 덕분에요.”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아, 너 성오랑 병원에서 수다 떨다 왔다면서? 그 자식 하여튼 오지랖 넓은 건 알아줘야 해.”
“교수님보다 나은 거 같은데요.”
“내가 뭘! 어쨌든 덕분에 통화 좀 했다. 너 괜찮냐고 물어보고, 혹시 병가 낼 일 있으면 다른 데 가지 말고 자기한테 오라 그러더라. 뻥튀기 아주 제대로 해서 일주일은 쉴 수 있게 해 주겠단다. 짜식, 한창 아픈 줄도 모르고 일해야 하는 어린애한테 벌써 뭘 가르치는지 원…….”
우민이 서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 서진이 정말 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저런 말을 할 이유조차 없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서진의 귀에는 우민의 말이 힘들면 눈감아 줄 테니 쉬고 오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감사해요. 전 머리 말리러 가 볼게요.”
“그래, 나중에 보자.”
우민은 손을 흔들며 수건을 챙겨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일을 마치고, 서진은 번화가의 지하철역 한쪽에 몸을 기대 막대 사탕을 입에 물고 있었다. 서진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꺼낸 서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동은 반대편 주머니에서 오고 있었다. 헷갈리게. 서진은 기욱이 준 휴대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를 확인할 것도 없는 전화였다.
― 왜요? 일 안 해요?
― 그냥 전화해 봤어.
그냥이라니. 서진과 기욱 사이에 그냥은 없었다. 연인도 아니고, 서진은 이런 식으로 기욱이 치덕댈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서진은 입에서 빼낸 막대사탕을 허공에 살살 돌렸다.
― 용건 없으면 전화하지 마세요.
― 어디야? 시끄러운데?
귀도 좋아. 서진은 건너편 가게와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버스킹 음악 소리에 혀를 찼다. 그래도 거리가 좀 있어 들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 서원역이요. 왜요?
― 집에 안 들어가고 뭐 해.
― 동기……. 재혁이랑 술 한잔하고 들어갈 거예요.
괜히 동기라고 말했다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 싫었던 서진은 곧장 재혁의 이름을 말했다. 기욱은 서진이 술자리에 나가는 것을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서진의 동기인 재혁은 기욱의 밑에서 일하는 규건의 사촌으로 서진이 술을 마셔도 기욱이 비교적 조용히 넘어가는 몇 없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 적당히 마셔. 많이 마신 것 같으면 그냥 집 가지 말고 1004호나 병원 와서 자.
― 제가 애예요? 안 어울리게 이런 걱정 하지 마세요.
― 하아, 나 가 봐야 해.
기욱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기욱의 목소리가 끊기자 서진은 탁, 하고 휴대폰을 덮었다.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여자와 서진의 눈이 맞았다. 그녀와 그녀의 친구는 서진의 오래된 휴대폰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구식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서진은 다급하게 2G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곧 있으면 막차가 끊길 시간이 다 됐지만, 역에서는 사람이 실타래처럼 계속 나왔고,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사람보다 역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일하면서 담배를 피울 시간이 없다 보니 서진은 담배보다 몰래 입안에 숨기고 있을 수 있는 사탕을 선호하게 되었다. 물론, 일할 때 먹는 사탕은 막대 사탕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서진은 등을 기대고 있는 나무를 흘끗 바라봤다.
십여 년 전에도 번화가였던 이곳에는 예전과 다를 것 없는 똑같은 나무가 서 있었다. 약속 시각까지는 아직 삼십 분 정도 남아 있었다. 근처의 가게에 들어가도 되지만, 워낙 날씨가 좋아 그냥 이렇게 서 있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거의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 탓에, 밤이라 해도 실내는 지긋지긋했다. 뺨을 스치는 밤공기가 먹먹했던 서진의 가슴을 치고 있었다.
말없이 밤하늘을 보며 사탕을 빨고 있던 서진의 옆으로 말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같이 가요.”
“저희 대학생인데요.”
“아, 제가 그…… 집에 들어가 봐야 하거든요.”
“그러지 말구요. 술 마실 줄 알아요? 이 친구 H대 의대 다니거든요? 그쪽한테 관심 있대요.”
딱 봐도 이제 막 20대 초반이 된 남자들이 여자 두 명을 둘러싸며 떠들고 있었다. 옷차림이나 화장을 보면 20대 초반처럼 보일지 몰라도 서진은 그녀들이 아직 학생이라는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래 뭐라 해야 할까? 서진은 저런 아이들을 알고 있었다.
장현정. 다른 사람은 속여도 어린 시절 오랫동안 현정을 봐 온 서진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뭔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더니 이 풍경.
중학교 때 봤던 그 풍경과 닮아 있었다. 현정과 미아에게 찝쩍대고, 시헌이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난리를 쳤다가 결국 늦은 시간에 병원까지 가게 된 적이 있었다.
‘아아, 그땐 모든 게 다 커 보였지.’
지금은 제집처럼 들락날락하는 J대 병원의 응급실도, 이제는 냄새가 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한 병원 특유의 향도 어린 시절의 서진에겐 모든 것이 낯설고 커 보였다. 시간이라는 건 참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득, 서진은 막대 사탕을 입안에서 쪼갠 뒤 사탕이 빠진 막대를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고 여전히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남자들 앞으로 다가갔다.
“에이, 뚫릴 수 있는 데 알아봐 줄게. 이 친구 여친도 고등학생이거든.”
“그러니까 저희 차 끊기기 전에 가 봐야 해요…….”
“현정아, 네 거기서 뭐 해?”
서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자연스럽게 여학생들 앞으로 다가갔다.
“뭐야?”
난데없는 서진의 등장에 남자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서진을 경계했다. 서진은 지하철역 출구 번호를 슬쩍 확인했다. 2번 출구였다.
“10번 출구에 있겠다고 했잖아. 한참 찾았잖아.”
“아, 하하. 미안해. 내가 출구 헷갈렸나 봐.”
여학생 중 눈치가 빠른 하나가 어색하지만, 서진의 말을 받아쳤다. 둘이서 발을 밟으며 눈치를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야, 니 뭔데?”
“오빤데.”
“지랄, 갑자기 오빠가 어디서 나타나. 끼어들지 말고 갈 길 가지?”
“하아, 괜히 쪽팔리게 학교 망신 주지 말고 그냥 가라.”
서진은 싸움을 잘하지 못한다. 시헌처럼 태권도를 오래 다닌 적도 없고, 학창 시절 기욱처럼 주먹질하며 사람을 때리고 다닌 적도 없었다. 사람을 때리는 건 못한다. 체격이 좋은 편도 아니고 힘이 강하지도 않았다. 서진과 폭력은 거리가 멀었지만, 단 하나 서진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건 시헌과 기욱을 곁에서 봐 오며 자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사람이 모든 사람과 주먹다짐하면서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시헌은 주먹질을 하기 전 재치가 있었고, 기욱에게는 무슨 짓을 하든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오빠는 아닌데, 어린애한테 되지도 않는 학교 자랑하면서 꼬시는 거 쪽팔리지도 않냐?”
“아놔, 진짜라고…!!”
“몇 학번이냐?”
“…….”
“내가 졸업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아는 애들 많다. 몇 학번, 이름 뭐냐고.”
“씨발, 뭐야…… 16인데요.”
“아, 그래?”
서진은 휴대폰을 이리저리 뒤졌다. 잠시 뒤 번호를 하나 찾아낸 서진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지윤아.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해. 너 아직도 학생회 하고 있어? 아, 다른 건 아니고, 응. 야, 16. 너 학번 뭐냐?”
“뭐야…… 야. 어떻게 된 거야?”
아무래도 진짜 16학번 친구가 하나 있는 모양이었다. 시선이 집중되며 어쩔 줄을 모르는 체하는 남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미안한데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서진은 전화를 끊은 뒤 휴대폰과 함께 양손을 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남학생을 위아래로 훑었다.
“학교 다니면서 공부만 해 대서 뇌 대가리에 글자밖에 안 보이지?”
“지, 진짜 선배님…… 이십니까?”
“왜? 내가 학교 사칭하는 걸로 보여? 어린애들이 싫다잖아. 너 같은 애들이 어린애들 건드리고 사고 치니까 의사들이 좇같다는 소리 듣고 다니는 거야. 너 PK 전부터 자대에서 교수님이랑 선후배들한테 소문나고 싶냐?”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서진은 일부러 큰 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주변에서 사태를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이 몰리자 학생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서진의 휴대폰으로 계속해서 진동이 울렸다. 후, 숨을 고른 서진은 남학생들을 향해 가라는 듯 손을 저었다.
“한 번만 더 이딴 짓 하다가 내 눈에 띄어라.”
“죄, 죄송합니다!”
거의 90도에 가깝게 고개를 숙인 남학생이 친구들을 데리고 다급하게 자리를 떴다. 서진은 남학생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어깨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서진이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에서는 여전히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하아.”
주먹질까지는 안 가서 다행이다.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리는 건 참 힘들었다. 그래도 참 신기한 건 도망을 치는 저 남학생들이 결코 커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분명 어렸을 때는 엄청 커 보였는데 말이다. 사람이라는 건, 시간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들이 멀어진 것을 눈치채자 여학생 두 명 중 하나가 서진을 향해 인사를 했다.
“괜찮아요?”
“아, 네. 진짜 감사해요.”
뚝,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 소리가 드디어 멎었다. 부재중 전화가 두 건이 와 있었다. 서진은 다시 울리는 전화를 무시한 채 시간을 확인했다. 거의 11시가 넘어 있었다.
“막차 끊길 것 같은데 조심해서 들어가요. 다음에는 너무 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네. 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여학생 두 명이 꾸벅 인사를 하고 서둘러 막차를 타기 위해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다. 여학생들이 무사히 내려간 것을 확인한 서진은 마침 자리가 빈 벤치에 앉아 전화를 받았다. 3번의 무시 끝에 받는 전화였다.
― 야, 강서진. 너 어디야?
서진이 전화를 받은 상대는 다름 아닌 시헌이었다. 진짜로 지윤이라는 후배를 알고 있긴 하지만, 그 친구는 작년으로 학생회를 그만둔 상태였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시헌이라면 전화를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하, 미안. 별거 아니야.
― 이상한 짓 하지 좀 마.
― 이상한 짓은 너도 했으면서.
― 내가 뭘……. 부럽다. 밖이야?
서진의 휴대폰 너머에서 들리는 잡음과 노랫소리를 들은 시헌이 휴대폰을 붙잡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결국, 서진은 신경외과에. 시헌은 외과에 가게 되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힘이 든 모양이었다.
― 요즘 이 주에 한 번 집에 들어가.
― 잘 들어가네.
― 아니, 어딜 봐서.
― 난 세금 낼 때 집에 들어간다.
― 하하, 장난 아니구나.
― 너도 왔어야 하는 건데. 나만 죽어나는 기분이잖아.
시헌도 서진이 외과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긴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사귀는 것도 아닌 이제는 물어봐도 될 일과 물어보지 말아야 할 일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다.
― 어쨌든, 난 일하러 갈 테니까 고생해라.
― 그래. 너도 고생해.
시헌과의 통화를 종료한 서진의 휴대폰으로 연락이 하나 와 있었다. 본의 아니게 학생들을 도와주고 나니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슬슬 재혁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었지만, 재혁은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ㅠㅠㅠㅠ형 우리 교수님한테 단체로 귀환 명령받음 ㅠㅠ」 오후 11:23
불과 오 분 전에 온 연락이었다. 서진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재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진이 전화를 걸자마자 재혁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 아, 형! 진짜 미안해! 내가 다음에 술 살게…….
택시를 타고 절반까지 나왔던 재혁은 곧장 방향을 틀어 H대 병원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응급실이 난장판이라 손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 교수가 짜증이 난 모양인지 퇴근한 녀석들을 전부 불러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 너, 다음이 언제 될 줄 알고…….
― 내가 다음 달 스케줄 나오면 바로 보내 줄 테니까 형 나랑 맞춰 보자. 술이든 양주든 맘대로 마셔!
― 교수님 명령이라는데 어쩔 수 없지. 알았다. 들어가면 또 밤새 고생할 텐데 힘내라.
서진도, 자대 병원인 H대에서 근무하는 재혁도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힘없는 말단 레지던트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규건과의 약속이 파토 난 서진은 전화를 끊은 뒤 지독하게 까만 하늘을 올려다봤다.
막차를 타기에는 너무 늦었다. 모처럼 기욱과 스케줄이 어긋난 휴일인데 밤늦게 나와 이렇게 혼자 쓸쓸하게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집에 가서 잠이나 더 자든지 공부나 할 걸 하고 후회도 들었다.
그러나 서진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음에도 실내나 커피숍에서 재혁을 기다리지 않은 이유는 역시 실내가 싫어서였다. 실내라고 해야 할까? 그냥 익숙한 공간이 싫었다.
언제까지 앉아 있을 수는 없었던 서진은 소리가 나지 않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무작정 번화가의 거리를 걸었다.
지하철역 근처에 온 건 분명 오랜만이지만, 중학교 시절 이후 한 번도 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보통 시헌의 차를 타고 들어가 안쪽에 차를 대니 지하철역 근처에 갈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서진은 한참 동안 골목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한 시간쯤 돌아다니니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은 회의감이 들었다. 그냥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가서 잘까? 하던 순간 너무 안쪽 골목까지 들어와 버린 서진의 눈에 익숙한 가게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 옆 건물과 건물 사이로 남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서진은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바(BAR)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시헌과 마지막으로 술을 마셨을 때 갔던 그곳이었다. 그때도 어떻게 찾았는지 모르고 들어갔고, 지금도 별로 다를 건 없었다. 일 년 정도 만인가? 그 사이에 내부 실내장식은 조금 바뀌었지만, 사람이 많은 건 여전했다. 비어 있는 자리라고는 단체석과 4인석뿐이었다.
혼자서 4인석을 차지하는 눈에 띄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혼자 오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앉을 수 있는 일자형 테이블의 빈 곳에 자리를 잡았다. 서진이 앉자 어린 바텐더가 서진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서진은 한 페이지짜리 메뉴판을 보자마자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양주는 못 마시겠네.”
딱히 가격의 문제는 아니었다. 기욱의 카드도 있고, 어느 정도 모아 둔 돈도 있었다. 모아 뒀다고 해야 할까? 정말 쓸데가 없어서 쌓인 돈을 들였다. 그 돈으로 차를 살까 고민도 해 봤는데, 매일 피곤함에 절어 돌아가는데 차를 사 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일주일에 한 번이나 간신히 탈 만한 차에 천만 원이 넘는 돈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곳까지 와서 맥주는 좀 그렇고. 아마 시헌과 술을 마시러 왔을 때도 칵테일을 마셨던 것 같았다. 문제는 무슨 칵테일을 먹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주문 안 해요?”
“네?”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20대 후반의 남자, 많이 쳐 주면 30대 초반까지도 봐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약간 양아치 느낌이 나긴 하지만 나빠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그의 관심에 서진이 어색하게 메뉴판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서진이 손에 쥐고 있는 메뉴판을 손가락질했다.
“하하, 죄송해요, 들어와서 계속 메뉴판만 보길래 문제가 있나 해서 물어본 거예요.”
“뭘 시켜야 할지 몰라서요. 제가 이런 데는 많이 안 와 봐서…….”
“이런 데라고 하면 게이바?”
“아니, 그건 딱히 어찌 되든 상관없는데.”
딱 잘라 말하는 서진의 말에 남자가 살짝 당황했다. 이런 곳에 오는 사람들은 딱 세 부류다. 잘못 들어온 사람, 남자 연인과 온 사람, 상대를 찾으러 온 사람. 게이바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후자의 두 부류를 제외하면 전자의 사람들은 대게 처음 들어와서 어쩔 줄을 몰라 하거나, 뒤늦게 정체를 알고 후다닥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노골적으로 상대를 찾으러 온 그는 서진이 신기했다. 딱히 상대를 찾으러 온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게이바라는 사실을 모르고 온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약간 서진에게 관심이 생긴 남자가 의자를 옆으로 당기며 서진이 보고 있는 메뉴판을 같이 봤다.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어요?”
“맥주는 별로고. 양주도 괜찮긴 한데. 일단 칵테일이요. 근데 종류가 많아서…….”
“흠, 어떤 취향인데요?”
“맛있는 거면 다 상관없어요. 요즘 단거에 미쳐 살 거든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였다. 기욱 의한 스트레스, 일에 대한 압박감 등을 견디기 위해서 서진이 선택한 것은 바로 당이었다. 서진은 요즘 중학교 때보다 더 많은 초콜릿과 사탕들을 먹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었다. 일단은 단걸 먹고 싶었다.
“그럼 이건 어때요? 준벅(June Bug)이라는 칵테일인데. 6월의 벌레라는 뜻을 지킨 칵테일이거든요.”
“지금 5월인데요.”
“하하, 월 같은 건 아무래도 좋잖아요. 이걸로 할래요?”
“달리 아는 게 없으니까요.”
서진은 그가 시키는 대로 칵테일을 시켰다. 조명 때문인지는 몰라도 푸르스름한 색이 꼭 멜론 음료수 같았다. 마침 차가운 걸 먹고 싶었던 서진은 생각보다 쭉쭉 들어가는 시원한 칵테일에 만족하고 있었다.
“잘 마시네요. 아, 전 강대훈이라고 하구요. 제약회사 다니고 있어요.”
“어디 제약이요?”
“UK 제약이요. 아, 일반인들은 잘 모를 텐데…….”
“어딘지 알아요. 뭐, 일단은. 막 많이는 모르고.”
서진은 괜히 말했나 싶어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UK 제약이라면 응급실에서 일하면서 몇 번인가 약품에 대놓고 본 적이 있었다.
“어, 우리 회사 일반인들은 잘 모를 텐데. 이쪽 일 하시는 사람?”
“그게……. 하아.”
서진은 순식간에 다 마신 칵테일을 두고 테이블에 얼굴을 묻었다. 역시 모르는 척할 걸 하고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은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똑같은 칵테일을 한잔 더 시켰다. 적게라도 알코올이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남자가 추천해 준 준벅이라는 칵테일은 단것을 좋아하는 서진의 생각 이상으로 훨씬 잘 맞았다. 서진은 테이블에 얼굴을 대며 고개를 돌렸다.
“의사예요.”
“아하, 약사인 줄 알았어요.”
“약대를 갈 걸 그랬나 봐요.”
“네?”
“아니, 혼잣말.”
서윤의 뒤를 쫓는 게 꼭 의대만 있었던 건 아닌데 말이다. 장래를 생각하면 개고생을 하는 의사보다 약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중얼거림도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후회일 뿐이었다. 그는 의사라는 서진의 대답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처음 서진의 나이를 그렇게 높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의사들은 대게 평균 연령대가 높으니까. 그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서진의 나이가 가늠되지 않았다.
“저기, 몇 살?”
“어. 내 나이가 몇 살이더라……. 스물여덟이네요.”
병원에서는 어딜 가나 막내 취급이라 솔직히 스물여덟 먹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스무 살이 멀었던 게 엊그제인데 스스로가 벌써 서른을 바라보고 있다니? 현실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는 스물여덟이라는 서진의 말에 속으로 안심을 했다.
“제가 한 살 더 많네요. 그럼 편하게 말해도 되지?”
“이미 말 까고 계시잖아요. 맘대로 하세요.”
순식간에 같은 칵테일을 두 잔째 마신 서진은 슬슬 용기가 났는지 다른 칵테일도 마구잡이로 시키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그렇게 막 시켜도 돼?”
“나 돈 많은데요.”
“아니, 돈 잘 버는 건……. 직업이라 알겠는데. 그렇게 막 먹으면 훅 가서 그렇지. 도수 쌘 것도 있어.”
“술 잘 마시거든요. 뭐, 동기들이랑 모이면 딱 중간이긴 한데. 그래도 그쪽보단 잘 마실걸요.”
서진이 막 나온 정체불명의 칵테일 하나를 잡아 순식간에 비우며 남자를 손가락질했다. 음, 이건 맛이 없군. 실패였다.
“하하, 재밌네. 넌 여기 어떻게 온 거야?”
“동기가……. 교수님이 부르셨다고 해서. 덕분에 난 소박이고. 집에 들어가긴 싫은데. 술은 마시고 싶고. 지나가다가 그냥.”
서진은 딱히 술에 취하지는 않았다. 그냥, 정말로 머릿속이 복잡해 정리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신경 안 쓰고 술을 퍼마셔도 되는 사람이 재혁이었는데, 그런 재혁이 못 온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 내 이름은 강대훈인데. 그쪽 이름이?”
“…물어봤는데.”
“어?”
“그쪽 이름 안 물어봤는데요.”
“아니, 꼭 물어봐야 알려 줄 필요는 없잖아. 그냥 내가 말하고 싶어서 말한 것뿐이야. 이름이?”
서진은 조금 쓴맛이 나는 칵테일 하나를 쭉쭉 빨며 대훈을 바라봤다. 뭔가 준수하게 생기긴 했는데, 딱히 서진의 취향은 아니었다. 취향이라고 해도 이 나이 먹을 때까지 서진이 아는 남자라고는 시헌과 기욱이 다였다. 관심이 있는 거라고 한다면 오지랖이 넓은 우민 정도가 다였다.
“그쪽요. 다른 사람들한테 끈질기다는 소리 안 들어요?”
“그러는 넌 예의 없다는 소리 들어 본 적 없고?”
“까탈스럽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 봤죠. 여자 같다고.”
서진의 말에 대훈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서진은 그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애당초 이런 곳 목적이 다 그렇고 그런 거니까 대훈이 그런 목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접근한다고 해도 놀라울 건 없었다.
“너 재밌네. 사귀는 사람 있어?”
“헤어졌어요, 사 년인가 사귀었는데. 뭐, 날 정말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람이 하나 있는데. 나랑 걔랑 사귀는 게 별로 마음에 안 들었나 봐요.”
“왜?”
서진이 반쯤 남은 칵테일 잔을 손목으로 가볍게 돌렸다. 노란색 액체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남은 칵테일을 비운 서진은 잔을 내려놓고 테이블에 팔을 괴며 고개를 돌렸다.
“왜냐구요? 그거야 당연하죠.”
“…….”
“남동생이니까요.”
“하하, 너 생긴 거랑 달리 간 크다.”
서진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어릴 때니까요.”
시헌과 사귈 때는 정말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좋게 헤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서진은 시헌과 사귀었던 시간까지 거짓으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서진은 몸을 앞으로 해 메뉴판을 가져온 뒤 적당한 양주 하나를 손가락질했다.
“저기요.”
“네?”
“이거 하나 주세요. 잔 두 개랑.”
“아, 네.”
“대체 얼마짜릴 시킨 거야?”
“남는 게 돈이라고 했잖아요. 말 상대해 준 답례로 같이 마셔 줄게요.”
로얄 샬루트 21년산, 서진도 처음 먹는 가격의 위스키였다. 서진의 주문에 건너편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던 사람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무리 봐도 서진은 이런 걸 시킬 만한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의사니까요. 나 돈 쓸데없다고 했잖아요.”
“기왕이면, 술이랑 함께 다른 것도 했으면 좋겠는데.”
서진이 따라 주는 잔을 받은 대훈이 은근슬쩍 운을 띄었다. 서진은 위스키 대신 조금 남아 있는 칵테일을 마저 마시며 잔을 내려놓았다. 서진 혼자 종류별로 여섯 개는 넘게 마신 상황이었다.
까짓거 시헌이랑도 몰래 사귄 적이 있는데, 만날 일도 없는 사람이랑 원나잇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까? 그럴 리가 없었다. 까짓거 걸리지만 않으면 되지 않겠는가. 서진은 그를 향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이 술 나랑 다 마셔 주면 생각해 볼게요.”
“좋아. 근데 이름 정도는 알려 줘야 하지 않겠어?”
그놈의 이름, 왜 이렇게 집착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서진은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술을 뗐다.
“박기욱. 박기욱이요.”
“이름 멋지네.”
술이 좀 들어간 서진은 대훈과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