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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8 신경외과 (62/83)

Chapter. 58 신경외과

이틀 후 기욱은 시간을 내 정혁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연구실 비밀번호야 늘 똑같았지만, 갑작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기욱이라는 사실에 정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야! 너 내 연구실 비밀번호 어떻게 알았어?”

“족보처럼 돌아다닌다면서요. 그보다, 할 이야기 있습니다.”

“난 요즘 너랑 할 이야기 없다. 갑자기 찾아와서 이게 미쳤나?”

정혁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언성을 높였다. 요 최근 정혁은 기욱과 얽힐 만한 일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얽히고 싶어도 본인한테 일어나는 일을 감당하는 그것만으로도 벅차서 다른 과 사정 같은 건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교수님 사정 들었습니다.”

“하, 병원에서 내 사정 모르는 녀석도 있냐?”

정혁은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며 대답을 했다. 평소의 정혁이라면 말하지 않고 찾아오는 기욱에게 신경질을 내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요 최근의 정혁은 달랐다.

두 명의 비슷한 환자, 당시 우민은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 사람은 살았지만, 한 사람은 죽었다. 문제는 정혁이 살린 사람이 꽤 유명한 지역구 국회의원이라는 것이었다. 정혁은 그가 국회의원인지 정치인인지 모르고 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언론에서는 살릴 수 있었던 일반인을 죽이고 정치인을 선택했다며 하루가 멀다 하고 정혁과 병원을 깎아내리기 바빴다.

사회단체를 통해서 의료 소송까지 걸리고 나니 머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내가 살린 국회의원이 돈은 많긴 한가 보더라. 변호사 비용이랑 소송 비용에 다른 병원까지 알아봐 주겠단다.”

“잘됐네요. 매번 그만두면 갈 곳 많다면서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구시더니. 정말 오늘만 사시게 되셔서.”

“씨발, 너도 나 놀리러 왔냐?”

“진짜 그만두실 겁니까?”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제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와 드리겠습니다.”

정혁이 기욱이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자리를 옮겨 기욱의 앞에 다리를 꼬며 앉았다. 얄밉긴 했지만, 정혁은 기욱이 싫은 건 아니었다.

“너,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 텐데.”

과도 다르고, 하물며 최근 들어서는 병원의 아킬레스건 취급받고 있는 정혁이 기욱을 도와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쉽게 들지 않았다. 기욱과 얽힌 일이라고는 제대로 된 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도 한몫했다.

“어려운 부탁 아닙니다.”

“그거야 네 기준이고, 어렵지 않은 부탁이 뭔데?”

“이번에 강서진 외과 지원한 거 알고 계십니까?”

“아, 어. 나도 들었어.”

솔직히 신경외과에 지원할 줄 알았던 정혁은 서진이 외과에 지원했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아무렴 자기가 하겠다는 걸 뭐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외과, 떨어트려 주세요. 이게 제 조건입니다.”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었냐?”

“그럴 리가요.”

기욱이 낮게 웃었다. 정혁은 마침 들어오려는 레지던트를 향해 5분만 있다 나가겠다며 손을 저었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 정혁이 땀에 눌어붙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혁은 기욱이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조건으로 서진을 떨어트려 달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해야 하나? 상식적으로 어딘가 말이 되지 않았다. 적어도 보통 청탁을 하려면 그 반대이지 않은가? 뭐, 3D 업종 중의 하나인 외과에 붙여 달라며 청탁을 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말이다. 성적만 놓고 본다면 서진은 면접을 볼 것도 없이 무조건 합격이었다. 성적뿐 아니라 외과 사람들과도 안면이 있으니 면접 같은 건 형식적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기욱은 특별히 서진에 대한 집착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정혁의 기억 한편으로 과거 기욱에게는 제발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던 서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박기욱이 평범하게 결혼 생활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정혁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니길 속으로 바랐다.

“너 강서진에 그렇게 집착하는 거, 좀 수상한 거 알고는 있지?”

“…….”

“이 자식 숨길 생각도 없는 거 봐라.”

노골적인 기욱의 표정에 정혁이 기가 막힌다며 중얼거렸다. 정혁은 앉아 있는 기욱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은 서진이었다.

“오랫동안 고생해서 지으신 센터 1년도 못 채우시고 떠나시는 건 아깝지 않으십니까?”

“내가 그거 때문에…… 하아.”

정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솔직히 다른 곳에 가도 상관은 없지만, 외상센터만큼은 당장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나보고 강서진을 팔라고 하는 건…….”

서진이 무슨 마음으로 외과를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신경외과에 가는 것을 원할 것 같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강서진이라는 사람을 모른다면 해 줄 수 있는 부탁일지도 몰라도 그러기에 정혁은 이미 서진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양심과 양심의 문제였다.

“당장은 대답 못 해. 시간 좀 줘.”

“저도 오래는 못 기다려 드립니다.”

“알았어. 최대한 빨리 결정하고 연락 줄게.”

정혁의 대답에 기욱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센터를 나왔다.

* * *

기욱은 모처럼 서윤과 함께 퇴근하고 있었다. 거치대에 두었던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휴대폰 화면에 정혁의 이름이 노골적으로 찍혀 있었다. 기욱은 갓길에 차를 댄 뒤 정혁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 통화할 수 있냐?

― 말씀하세요.

― 너 그거 정말 가능한 거지?

정혁의 물음에 기욱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은 짧은 통화를 마친 뒤 휴대폰을 거치대에 다시 걸어 놓았다.

“임 교수님이야?”

“요즘 말 많으시잖아.”

“하긴, 그거 좀 그렇긴 하지? 근데 오빠, 임 교수님이랑 그렇게 안 친하지 않았어?”

“술 한잔한 적 없을 뿐이지 뭐. 그보다 다른 데 갈까?”

기욱이 멀리 보이는 고층 호텔을 흘끗댔다. 정혁이 오케이를 한 지금, 기욱은 제법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하연이 했던 말도 있고, 이래저래 신경을 써서 나쁠 건 없었다. 기욱의 의도를 알아차린 서윤이 안전띠를 풀며 운전석에 있는 기욱의 목에 매달렸다.

“흐음, 오빠 오늘 감당할 수 있겠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안전벨트 매.”

“알았어.”

서윤이 웃음을 참으며 안전벨트를 바로 맸다.

* * *

이른 오전, 서진은 병원의 관계자와 실랑이를 하는 중이었다. 어지간해서 언성이 올라가지 않는 서진이 노골적으로 소리를 높이며 짜증을 냈다.

“그러니까요. 전 그렇게 넣은 적이 없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잖아요. 다른 사람이랑 바뀐 거 아니냐구요!”

“저희는 전산에 들어오는 대로 작업해요. 본인이 잘못 넣으신 걸 왜 저희한테 따지세요? 어쨌든 본인 실수를 여기서 따지시면 곤란해요.”

“하아, 알겠습니다.”

서진은 더 이야기해 봤자 답이 없을 그것으로 생각하며 응급실로 돌아왔다. 서진이 돌아오자 3년 차인 지섭이 다가왔다. 실습생 시절 도와준 인연으로 인턴이 된 서진은 지섭과 제법 많이 친해진 상태였다. 덕분에 지섭은 인턴인 서진의 편의를 많이 봐주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안 된대요.”

“너 진짜 2지망으로 우리 과 쓴 거 맞아? 니가 잘못 쓴 거 아니야?”

“아니, 잘못 쓸 걸 잘못 써야죠. 진짜 맞아요.”

“뭐, 안 된다는데 어쩔 수 없지. 그러면 뭐 하냐 결국 2지망인데. 차라리 1지망이 응급의학과로 바뀌었어야 하는 건데 아깝다.”

“아, 형. 왜 그러세요.”

“뭐야, 너 우리 과가 별로라 이거냐? 이 자식 역시 응급의학과 2지망 썼다는 거 거짓말…….”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서진이 그만하자며 지섭의 말을 잘랐다. 지섭의 말대로 1지망이 바뀌지 않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지섭도, 주변 사람들도 서진이 외과에서 떨어질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서진은 기우겠거니 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영 뒷맛이 좋지 않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모처럼 한가한 응급실에서 서진은 의자에 앉아 가운 주머니에 있는 2G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연락해 말아? 한참을 고민하던 사진은 결국 전송 버튼을 눌렀다.

「2지망 바꾼 거 그쪽이 그랬어요?」 오후 7:23

문자를 보낸 지 오 분도 채 되지 않아서 기욱에게 답장이 왔다.

「뭘 바꿔?」 오후 7:25

시치미를 떼는 건지 정말 모르는지 문자로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기욱에게 전화를 걸기에는 일을 방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한가하다고 해도 여유롭게 통화를 할 만한 여유가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서진은 결국 조용히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일을 계속했다.

당직을 하고, 아침이 되었을 무렵 퇴근을 위해 라커룸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있던 도중 시헌에게 전화가 왔다. 저장이 되어 있지 않아도, 서진의 비밀번호가 예전부터 한결같았듯 시헌의 휴대폰 번호도 예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았다. 서진은 바지를 후다닥 입고 시헌에게서 오는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

― 강서진, 너 외과 지원했다면서?

뭐가 그리 급했던 건지 시헌은 서진이 전화를 받기 무섭게 자기 할 말을 했다. 서진은 시헌에게 외과를 넣었다는 말을 따로 하지 않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시헌이 서진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사실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왜인지 한발 늦게 포인트가 어긋난 부분을 문제 삼는 시헌에 서진은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 형은 뭐래?

― 좀 싸우긴 했는데, 그 뒤로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리고 2지망. 멋대로 신경외과로 바뀌었더라.

― 형이 한 거야?

― 그것도 몰라. 전산 문제라고 하면서 내가 잘못한 게 틀림없다는데……. 거기서 더 무슨 말을 해? 솔직히 너희 형이 그랬다고 해도 믿을 수가 없다.

서진이 본 기욱은 평범한 교수였다. 물론, 집안을 생각한다면 평범하진 않을지도 몰라도 기욱이 이런 일 때문에 이사장한테까지 전화를 했을 거라고는 쉽게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서진은 시헌에게 괜한 말을 했다며 혀를 찼다.

― 외과 면접 임 교수님이야.

― 원래 아니었어?

― 어, 다른 교수님이었는데……. 나도 잘은 몰라. 어쨌든 그……. 붙어.

전화를 끊기 전 시헌이 휴대폰 너머로 중얼거렸다. 작은 중얼거림이지만, 분명하게 들린 그 목소리에 서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럴 때마다 시헌이랑 헤어진 게 잘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회의감이 들었다.

서진은 지하철역 인근 카페에서 커피를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 * *

사복 차림의 서진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무섭게 복도를 돌아 기욱의 연구실로 향했다. 문 너머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한 서진은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른 뒤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안쪽에 있던 규건은 난데없이 열린 문에 깜짝 놀랐다.

“뭐야? 가, 강서진?”

규건은 서진의 차림을 위아래로 훑었다. 레지던트 발표가 끝나고, 지금은 병원에 없어야 할 서진이 사복 차림을 하면서까지 병원에 찾아온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서진은 규건을 보자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지만, 잔뜩 화가 나 있다는 표정만큼은 지울 수 없었다.

“하아, 미안하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아, 예. 알겠습니다.”

서진이 화를 내는 대상이 기욱이라는 걸 눈치챈 규건이 요령껏 자리를 피했다. 규건이 연구실을 나가기 무섭게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온 서진은 성큼성큼 기욱의 앞으로 다가갔다.

“대체 왜, 왜 그랬어요!!!”

서진의 목소리는 복도 너머까지 다 들릴 정도로 컸다. 레지던트 발표를 본 서진은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음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아직도 심장이 가파르게 뛰며 숨이 찼다. 미칠 것만 같았다.

임 교수님, 정혁이 있었던 면접은 순조로웠다. 상대적으로 경쟁률이 높은 과에 지원한 것도 아니다. 다들 기피하고 있는 과에서 이런 식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서진은 기욱이 손을 썼다고밖에 생각할 방법이 없었다. 물증은 없었지만, 심증이 기욱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진의 손을 쳐 낸 기욱은 들고 있던 볼펜으로 커다란 책상을 툭툭 건드렸다.

“처음에는 성적으로 떨어트릴 생각이었는데.”

“지금…….”

“너 공부 열심히 했더라?”

“이, 이건 거 말도 안 돼요! 부당하다구요! 당신은 면접에도 어, 없었잖아요. 임 교수님에게 항의할 거예요!! 그, 그건 떨어질 만한 면접이 아니었다구요!”

“해.”

서진의 협박 아닌 협박에 기욱은 어깨를 들썩이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기욱은 정혁이 마음을 바꿀 리가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서진이 착각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진짜 항의할…….”

“너 떨어트린 사람이 네가 말하는 임 교수야.”

기욱의 말에 서진의 몸에 힘이 풀렸다. 기욱은 병원장에게 누군가의 주치의를 맡아 달라고 부탁을 받았다. 정혁이 서진을 떨어트리는 것을 수락하자마자 기욱은 병원장에게 정혁을 병원에서 자르지 말라는 청탁을 넣는 조건으로 주치의를 담당해 주겠다고 했다.

잠깐 병원장의 고민이 있긴 했지만, 정혁을 자르는 것은 앞으로 있을 센터의 방향성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기도 했기에 남 병원장을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문제였다.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거래였다. 물론, 기욱은 서진에게 그런 사실을 설명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기욱이 원하는 결과는 서진이 외과에서 떨어지고 신경외과에 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욱은 어쩔 줄 모르는 서진의 팔을 붙잡아 몸 쪽으로 잡아당겼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래도 이건……. 이, 이건 아니잖아요!”

“아닌지 맞는지 판단은 내가 해.”

서진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다른 과를 지망하면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착각 자체가 잘못된 발상이었다. 서진은 필사적으로 기욱의 손을 뿌리쳤다. 기욱은 그런 서진을 붙잡을 생각이 없는 듯 가볍게 양손을 펴 보이며 웃었다.

“넌 나한테 벗어날 수 없어.”

“…….”

“잘해.”

기욱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서진은 도망치듯 기욱의 연구실을 나왔다. 마침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규건과 서진의 몸이 부딪혔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서진이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아, 강서진!”

“네?”

“박 교수님한테 들었다. 2지망이라도 신경외과 온 거 축하한다. 잘해 보자.”

“하하,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서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규건에게 알겠다고 하는 것 외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욱에 의해 반강제로 신경외과에 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서진은 이 와중에도 J대 병원을 그만둘 자신도, 1년을 재수할 의지조차 없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을 택한 서진은 두꺼운 철문을 닫기 무섭게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악!!”

박기욱. 얼마나 사람을 괴롭혀야 속이 시원할까.

* * *

서진은 계속해서 울리는 벨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이 인터폰을 확인하자 인터폰 너머로 우민의 얼굴이 보였다. 이대로 없는 척해 버릴까? 하고 생각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교수님을 소박맞히는 건 양심상 찔릴 수밖에 없었다. 서진은 어쩔 수 없이 문을 살짝 열었다.

우민은 문이 열리기 무섭게 뒤쪽에 숨겨 두었던 치킨 봉지를 내밀었다. 치킨 봉지 옆으로는 편의점에서 사 온 소주와 맥주들이 담긴 봉지도 보였다. 서진은 문을 닫으려고 힘을 썼다.

“야야! 문은 왜 닫는데!”

우민이 문 사이로 선을 끼워 넣으며 소리를 질렀다.

“저 내일 출근인데 술 안 마십니다.”

어느 정신 나간 놈이 레지던트 1년 차 첫 출근 전날에 술을 퍼마신단 말인가. 원해서 들어가는 신경외과는 아니지만, 서진은 첫 출근부터 씨발민페가 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렇게 술을 권유하는 사람이 바로 서진이 내일부터 근무를 서게 될 신경외과 교수라는 점이었다.

교수가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술 마시라고 강요 안 할게. 어?”

우민이 서진의 앞으로 치킨을 내밀었다. 막 나온 치킨 냄새가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한 서진을 괴롭혔다. 서진은 어쩔 수 없다며 문고리에서 손에 힘을 풀었다.

“치킨 때문에 봐드리는 겁니다.”

“짜식, 교수가 치킨 배달까지 해야겠냐고.”

그렇게 툴툴대는 우민이었지만, 서진과 한잔하고 싶어 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바닥에 앉은 우민은 서진이 가져온 잔에 소주를 따랐다.

“저 술 안 마신다니까요.”

“알았어. 그럼 맥주 마셔.”

“맥주는 술 아니에요?”

“맥주가 무슨 술이냐? 보리차지.”

우민이 서진의 앞에 놓인 잔에 맥주를 가득 채웠다. 서진은 맥주 정도는 괜찮겠지라며 우민이 따라 준 맥주를 마셨다. 치킨에는 또 소주보다는 맥주이기도 했고 말이다. 정작 서진은 맥주보다는 앞에 놓인 치킨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넌 꼭 내가 뭐 사 줄 때마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먹더라. 원래 그렇게 먹는 거냐, 아니면 내가 타이밍이 좋은 거냐?”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에요.”

“그치? 너 완전 입 까다로울 것 같으니까.”

서진은 반쯤 마신 맥주를 한 번에 마신 뒤 탁, 하고 바닥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치킨도 치킨이지만 정작 서진은 며칠 동안 필요한 걸 제외하면 집 500m 밖으로 나간 기억이 별로 없었다. 다른 애들처럼 특별히 갚아야 할 학자금이나 대출금도 없고,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기욱이 대 주니 1년 동안 인턴을 하며 번 돈은 오롯이 서진의 몫이었다. 배부른 소리지만 돈 있는데 할 일 없는 백수란 건 참 슬픈 일이구나 싶었다.

“저요. 사실 며칠째 못 자는 중이에요.”

서진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당장 내일부터 레지던트라는 사실도 현실감이 너무 없어 와 닿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인턴이었던 것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도 전부 엊그제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정말 신경외과에 가는 게 과연 맞는 건가? 이불 속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을 넘게 고민했지만 그렇다 할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짜식, 긴장되냐? 그런 거치고는 애들이 하는 말 들어 보니까 너 신경외과 오기 싫어했다면서?”

“그, 그런 건 아니고……. 막 그렇게 싫은 건 아닌데. 솔직히 좋다고도 말 못 하겠어요.”

서진은 차마 우민에게 2지망이 멋대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기욱이 손을 댔는지도 모르겠고, 설령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이제 와서 뭔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요. 저 막 왕따 같은 건 안 당하겠죠?”

“하, 갑자기 무슨 미친 소릴 하는 거야?”

서진의 말에 닭다리를 뜯던 우민이 기가 막힌다며 먹고 있던 치킨을 내려놓았다. 왕따라니, 중학생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까요. 딱히 걱정하는 건 아닌데……. 저 2지망이었잖아요. 그래서 괜히 왕따당하는 건 아닌가.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네가 2지망이었는지 3지망이었는지 아무도 몰라 임마.”

“3지망은 없는데요.”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별 말 같지도 않은 걸 가지고 고민해. 야, 왕따시키는 놈 있으면 데려와. 그리고 1, 2년 차 때는 그런 짓 할 시간도 없거든? 열심히만 해. 농땡이 부리지 말고.”

“그런 성격은 아니에요.”

서진은 맥주 컵을 양손으로 쥐며 홀짝였다. 왠지 엄청 우울할 때 우민을 만나서 그런가? 조금은 우울한 기분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가져왔던 술을 어느 정도 마시고, 치킨을 다 먹어 갈 즈음 우민의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교수님, 전화했어요.”

“어, 그래. 병원인가 보다. 미안, 나 잠깐 전화 좀.”

우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으며 복도로 나갔다. 금방 돌아올 그것으로 보였던 우민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복도로 나가기도 귀찮았던 서진은 그 상태로 바닥에 누웠다. 불을 끄는 것도, 이제는 소파에 올라가는 것도 귀찮았다. 높은 복층 오피스텔의 천장을 바라보며 서진은 소파 위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적당히 얼굴을 가렸다.

담요로 얼굴을 가렸지만, 조명은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잠이 오긴 올까? 담요를 덮으며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서진은 우민이 들어오면 알아서 깨워 주겠거니 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서진은 아침까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서진이 다시 잠에서 깬 것은 아침에 맞춰 둔 휴대폰의 알람 소리 때문이었다. 바닥을 기며 휴대폰 알람을 끄고, 시간을 확인한 서진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담요를 치우며 눈을 비볐다.

바닥에는 어제 먹다 남은 치킨들과 술이 그대로 있었다. 우민은 돌아오지 않았고, 서진은 우민을 기다리다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알람은 여유롭게 맞춰 뒀던 터라 준비에는 여유가 있었다. 서진은 적당히 바닥에 있는 치킨과 굴러다니는 빈 술병을 치운 뒤 출근 준비를 했다.

* * *

“아,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평소와 똑같지만 평소 같지 않은 날이었다. 뻣뻣하게 인사를 하는 그는 딱 봐도 새 레지던트였다. 그의 옆에 있는 사람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게 긴장할 거 없잖아. 어차피 계속 얼굴 보고 살 텐데.”

“하하, 그러게요. 감사합니다.”

“야, 박기욱.”

“좋은 아침입니다.”

그사이 새로 온 어린 레지던트와 친해져 있는 우민이 기욱을 보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기욱이 우민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직 수술복 차림이 아닌 우민은 오랜만에 가운 안쪽에 정장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우민은 옆에 있는 다른 레지던트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기욱도 그런 우민을 건들 생각은 크게 없었다. 간이 미팅 전에 차트라도 볼까 하고 등을 돌리려던 찰나 떠들고 있는 우민의 흰 셔츠 사이에서 익숙한 넥타이가 눈에 들어왔다.

“선배, 그 넥타이…….”

“어? 넥타이?”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침 밤새 당직을 하고 일어난 규건이 기욱에게 다가왔다. 규건과 대화를 하는 내내 기욱은 우민이 한 넥타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민이 한 넥타이는, 과거 기욱이 서진의 집에 두고 갔던 넥타이와 닮아 있었다.

* * *

좁은 회의실 안으로 몇 명의 의사들이 모여 있었다. 기욱과 우민, 그리고 두 사람을 불러낸 장본인이자 최고참 교수인 고찬일 교수였다.

“시간 없으니 짧게 말하지. 강서진, 우리 팀에 넣겠네.”

“교수님, 저희 인원 한 명 빕니다. 강서진 제 팀에 넣기로 한 거로 압니다만?”

일방적인 고 교수의 선언에 기욱이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서진은 무조건 자신의 팀이어야 한다. 어떻게 신경외과까지 데려왔는데 다른 팀에 넘겨주는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령 그게 정년퇴임을 앞두고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모르는 시한부 교수 밑에서 일하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기욱은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펠로우 한 명 더 뽑았잖아. 윤대한이 걔 k대에서 제법 괜찮았다고 하니까 데리고 가. 1년 차보다 훨씬 좋을 거 아닌가?”

고 교수의 말에 기욱의 입술이 떨렸다. 확실히 1년 차인 레지던트가 들어오는 것과 전공의 과정을 마친 펠로우가 들어오는 것은 엄청난 차이였다. 기욱이 알기로 새로 들어온 펠로우는 고 교수 밑에서 일하다가 우민의 팀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런 그를 양보하는 대신 서진을 데려가겠다고 하는 고 교수를 기욱은 이해할 수 없었다.

“교수님, 얼마 남지 않으셨는데 그냥 편하게 하시죠. 고생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허허, 이럴 때일수록 늙은 사람이 고생해야지. 자네들은 앞으로 일할 날이 많지 않나?”

“그럼 다른 레지던트를 데려가십시오. 왜 하필이면 강서진입니까?”

“박 교수, 정말 몰라서 묻나?”

고 교수의 말에 기욱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 늙은이가. 딱 봐도 내막을 알고 있다는 눈치에 기욱이 인상을 구겼다. 고 교수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양보할 수 없었다.

“서진이, 힘들게 들어왔는데 몇 달만이라도 편하게 일하게 해 줘야지.”

“불편하게 할 생각 없습니다.”

“그건 자네 생각이지 않나? 강 선생이 서진이 동생인 이상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다 자네 같다고 생각하지 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서진이 인계를 해 주셨습니까?”

“자네랑 말싸움할 생각 없네. 강서진 우리 팀에 넣을 테니 대한이 데리고 가.”

고 교수는 단호했다.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기욱이 이마를 짚었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이런 식으로 방해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답답해하는 기욱과 두 사람의 대화의 딱 절반만을 따라간 우민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뭔가?”

“강서진, 저희 팀에 자리 만들겠습니다. 그렇게 데려가고 싶어 하면 저도 발언권 정도는 있지 않겠습니까?”

“자네 팀 인력은 충분하잖아.”

“충분하고 말고가 어딨습니까? 일은 어디에나 있잖아요.”

우민이 고 교수의 말을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분명, 인턴 시절 서진에게 인계해 준 것은 우민이다. 그러나 기욱은 어째서인지 고 교수가 서진의 인계를 담당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고, 고 교수도 그 사실에 대해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있었다. 우민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둘 모두에게 서진을 맡길 바에는 자신의 팀에 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결국, 좁은 회의실 안에서 세 사람이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막 출근한 1년 차 레지던트를 하나를 두고 이렇게 서로 싸우는 장면은 좀처럼 목격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사태를 보다 못한 규건이 끼어들었다.

회의 시간의 한계도 있고, 어떻게든 결론을 내는 편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싸우지 마시고, 서진이보고 선택하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언제까지 이 이야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교수님들.”

다른 의사들의 눈치도 보였던 세 사람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규건은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생각하며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회의가 끝난 뒤 어쩌다 보니 총대를 메 버린 규건은 서진을 따로 불러내 회의실 이야기를 간단하게 해 주었다.

요약하자면 자신을 두고 싸웠다는 뜻인데, 서진은 규건의 말을 귀로 듣고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기욱이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특별하게 인연이 없는 고 교수님이 먼저 이야기를 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규건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0년을 넘게 병원에서 일하고 있지만, 교수님들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새로 들어온 레지던트를 탐내는 것은 처음 보는 진풍경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 어디 들어갈래?”

“네?”

“교수님들끼리 계속 싸우게 할 수는 없잖아. 들어가고 싶은데 들어가라고 말했으니까 가고 싶은 데 골라.”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가 선택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아무 데나 상관이 없기도 하고…….”

서진은 누구 스타일 맞춰 가면서 일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별로 상관은 없었다. 기욱의 팀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기욱의 집착이 쉽게 사라질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우민의 팀을 말하자니 기욱이 너무 의심할 것 같아 무서웠다. 서진이라고 무조건 어디가 좋다고 선택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도 아니고 이게 뭐냐 진짜. 하아, 알았다. 당분간은 뭐, 너도 적응하느라 정신없을 테니까 일단 적당히 일하고. 자세한 건 내가 알아보고 알려 줄게. 그러면 됐지?”

“네, 감사합니다.”

괜히 독박을 쓴 것 같은 기분이 든 규건이 서진을 보내며 귀찮게 됐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 * *

정규 수술을 마치고 잠시 연구실에 들른 기욱은 차트를 보던 중 펜대를 허공으로 돌렸다. 마침 기욱의 연구실에 있던 서윤은 일을 하다 말고 멍하니 앉아 펜만 돌리는 기욱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오빠, 왜 그래?”

“그냥. 하아.”

한쪽 책상에 팔을 괸 기욱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산 넘어 산이다. 서진을 신경외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고 교수가 발목을 잡았다. 기욱은 도대체 서진의 어떤 부분이 고 교수의 관심을 끌어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예전부터 독특한 성격이긴 했지만, 이렇게 뒤통수를 여러 번 맞으니 아무리 은사여도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최근 들어 실망감만 들고 있었다. 거기에 무슨 심보인지 가만히 있던 우민까지 끼어들어 버려 일이 생각보다 크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고 교수에게 서진을 넘겨주는 것도 싫지만, 서진이 우민의 팀에 들어가는 건 더 싫었다.

“강서진 때문에.”

“아, 아침에 회의한 거? 분위기 엄청 살벌했다면서? 근데 꼭 그렇게 무리해서 데려올 필요는 없지 않아?”

“네 동생인데 당연하잖아.”

“그거야 그렇긴 한데……. 내가 아까 서진이랑 이야기를 좀 했거든? 근데 오빠가 잘해 주는 것도 좋고, 같이 일하는 것도 좋은데, 괜히 자기가 특혜 받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대. 이번에 들어온 레지던트 중에서 누구 팀에 들어갈지로 싸운 거 서진이밖에 없다면서? 그야, 내가 서진이 같아도 부담스러울 것 같긴 해.”

“서진이가 그랬다고?”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은 펜을 내려놓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다 자네 같다고 생각하지 말게.’

아침에 했던 고 교수의 말이 기욱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확실히 굳이 같은 팀이 아니더라도 서진이 신경외과에만 있어 준다면 크게 지장은 없었다. 너무 무리해서 붙잡으려 했던 것은 아닐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서윤은 기욱의 옆으로 다가와 목에 팔을 둘렀다.

“오빠, 너무 서진이한테 매달리는 거 아냐? 잘해 주는 것도 좋은데. 가끔 오빠가 서진이한테 하는 거 볼 때면 좀……. 무서워.”

서윤의 팔을 붙잡은 기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기욱이 아는 서윤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 쪽이든 서윤이 이 이상 서진과의 관계에 의심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아쉽긴 해도 물러날 때는 물러나야 하는 법이었다.

“하아, 알았어.”

“응?”

“고 교수님이랑 잘 이야기해 볼 테니까. 너무 그러지 마. 그리고 서윤아, 너 그때 휴가 내고 동창들이랑 놀러 간다고 했었나?”

기욱은 서윤의 허리를 안으며 자연스럽게 무릎 위로 서윤을 앉혔다. 기욱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서윤이 누군가와 놀러 갈 계획을 잡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강원도라 그랬었나?”

“응. 강원도. 그거 한 달 전부터 얘기했었지. 아마?”

기욱은 서윤의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살살 핥으며 속삭였다.

“질투 나니까 가지 마.”

“에이, 오빠 갑자기 왜 이래?”

“대신에 나랑 따로 시간 내서 여행 가자. 어때?”

기욱의 손이 서윤의 옷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기욱의 달콤한 목소리에 서윤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럴까? 아, 알았어.”

서윤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욱은 서윤의 입술을 천천히 덮었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 * *

첫 주 근무를 무사히 마친 서진은 샤워하고 있었다. 샤워가 끝나 갈 무렵 화장실 너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싸한 느낌을 받았다. 잘못 들었나? 서진은 물을 끄고, 적당히 몸을 닦았다.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자 벌컥, 하고 욕실의 문이 열렸다.

“…….”

박기욱이었다. 멋대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온 거로도 부족해 방을 뒤지고 있는 기욱에 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강서진, 너 뭐야.”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기욱이 확, 하고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힘에서 기욱이 어딘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요즘 들어 기욱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화가 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너 넥타이.”

“네, 넥타이요? 무슨 넥타이요?”

“내 거. 넥타이 어디 있냐고.”

갑자기 무슨 넥타이 타령이란 말인가? 서진은 기욱이 잔뜩 화를 내고 넥타이를 찾으러 왔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진은 안쪽 붙박이 장롱을 손가락질했다. 뭔진 몰라도 기욱이 두고 간 넥타이라면 장롱에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서진은 기욱이 두고 간 물건이나 옷은 전부 장롱에 처박아 두기 때문이었다. 기욱은 장롱 문을 열기 전에 서진을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서진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한 교수가 오늘 하고 온 넥타이.”

“…….”

“내 거야.”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보다 한 교수님이 무슨 넥타이를 했는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서진은 우민의 넥타이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젠 하다 하다 별걸 가지고 다 트집을 잡는구나 싶었다. 기욱은 발버둥을 치는 서진의 팔목을 누르며 얼굴을 마주했다. 기욱의 시선에 서진의 등으로 오한이 들었다.

“너, 그 인간 집에 들인 건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가 뭐 하러…….”

넥타이가 뭔진 몰라도 기욱의 감은 보통이 아니었다. 기욱은 옆쪽에 있는 붙박이장을 흘끗댔다.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아 장롱 문을 열게 했다. 장롱 한쪽에는 몇 개 없는 넥타이들이 걸려 있었는데, 기욱의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 그럴 리가 없……. 아, 아니에요!! 오해라구요!”

서진은 다급하게 장롱 안을 뒤졌다. 기욱의 넥타이라면 분명 장롱에 넣어 뒀다. 그럴 터인데, 어째서인지 기욱의 넥타이는 없었다.

“지, 진짜 몰라요! 넥타이 같은 거 모른다구요!”

서진이 바닥으로 주저앉으며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언제 두고 갔는지 모를 넥타이를 가지고 이제 와서 시비를 거는 것도 웃기거니와 그걸로 화가 나 있는 기욱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욱은 벌벌 떠는 서진의 팔을 잡아 강제로 일으켰다.

“강서진 일어나.”

“자, 잘못… 했어요…. 정말 그, 그 뒤로 한 교수님이랑은 여, 연락 안 해요!”

서진의 눈가로 눈물이 고였다. 기욱은 서진을 거실로 이끈 뒤 위층 대신 소파로 내던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복층 오피스텔을 사 주는 게 아닌데. 서진과 섹스를 할 때마다 위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 넥타이는 핑계였다. 그러나 이걸 기회로 우민과 확실하게 인연을 끊을 수 있다면 잘된 것이었다. 기욱은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우민이 서진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욱은 넥타이를 바닥으로 내던지며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저, 저 내일 출근…… 으읍…!”

기욱이 서진의 입을 막으며 상처가 다 나은 목덜미를 핥았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의 물기가 목 아래로 흘러내려 서진의 몸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서진을 소파에 눕힌 기욱은 말려 올라간 서진의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서진이 기욱의 손을 피하며 소파 뒤쪽으로 물러났다.

“강서진.”

“흐극….”

“옷 벗어.”

기욱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복도 너머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혹시 우민은 아닐까 조심스러웠던 서진은 발소리가 거의 사라질 때까지 미동초자 하지 않았다.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기며 이마를 가져다 댔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버, 벗을게요……. 벗을 테니까…… 제발, 흐극 때리지 마세요.”

기욱의 몸이 닿을 때마다 서진은 과거의 기억들이, 지옥 같던 순간들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또다시 그렇게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욱의 손을 놓은 서진이 천천히 옷을 벗었다. 기욱은 팔짱을 낀 채 옷을 벗고 있는 서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입고 있던 옷이라고는 반소매 티에 트레이닝 바지밖에 없어 옷을 벗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진은 마지막 남은 속옷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고 있었다.

“다 벗으라고.”

기욱의 재촉에 서진은 브리프 위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기욱과 섹스를 한 게, 한두 번이 아님에도 혼자 옷을 벗는 것은 역시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제멋대로 구는 편이 훨씬 더 나을지도 몰랐다. 서진은 이를 악물며 허벅지 아래로 걸린 브리프를 완전히 벗었다. 기욱은 서진이 입고 있던 것을 전부 벗기 무섭게 서진의 위에 올라탔다. 기욱은 서진의 손으로 다리를 잡아 벌리게 했다.

“좀 더 벌려. 똑바로.”

“읏….”

반항할 수가 없었다. 언제는 똑바로 반항한 적이 있었느냐마는,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고개를 돌리자 굳게 닫힌 도어락이 보였다. 문 너머에 있을 복도를 생각하니 현기증이 났다. 기욱은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서진의 턱을 잡아 강제로 돌려 입을 맞췄다.

“흐읍… 읍… 읏….”

이만큼 했으면 적응이 될 법도 한데, 여전히 서진의 키스는 기욱이 느끼기에 한없이 서툴렀다. 그 서툰 점이 좋은 거지만. 분명 비슷한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의 키스일 텐데도 불구하고 기욱이 느끼는 서진과의 키스와 서윤과의 키스는 엄연히 달랐다. 어느 쪽이 기욱을 달아오르게 만드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서진이 반항하면 할수록 기욱은 더욱 서진을 옭아맬 뿐이었다.

“하윽, 읏….”

“손 놓지 마.”

“이, 이렇게… 하윽… 찾아오는 거 그만해요….”

“내가 사 준 집인데 내가 찾아오는 게 무슨 문제지?”

“그런 말이… 윽, 아니잖아요! 하윽…! 누나한테…….”

“강서진. 강서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말한 건 너야.”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어.”

서진이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기욱은 당장 서윤과 헤어질 생각은 없었다. 연인끼리 헤어지는 것과 결혼 후 이혼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서진도 서진이지만, 박하연이 끼어 있다면 문제가 복잡할지도 몰랐다. 서진을 안을 때를 제외한 기욱의 인생은 대부분 연기였다. 굳이 서진의 누나가 아니더라도 기욱은 집안의 등에 떠밀려 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었다.

부모님의 등에 떠밀려 만나는 여자나, 서윤이나 기욱에게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오직, 강서진만 있으면 만족했다. 기욱에게 서진은 손안에 있으면서도 쥐려고 하면 흩어지는 모래 알갱이와도 같았다. 그런데도 하나라도 더 잡아 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반항할 수 없게 해 주겠다는 기욱의 말은 결코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평소와 다르게 옷을 벗지 않은 기욱은 계속해서 서진의 페니스를 괴롭혔다. 기욱의 커다란 손이 서진의 페니스를 쥐고 흔들며 다른 손으로는 안쪽 깊숙이 느끼는 곳을 찔렀다.

“허윽…! 흐윽… 그… 흐윽….”

소파 위 서진의 몸이 기욱이 손가락과 손을 움직일 때마다 비틀거리며 흔들렸다. 이렇게 야한 몸으로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기욱의 손에서 처음 한두 번의 사정은 참을 만했지만, 세 번이 넘어가는 순간부터 서진은 미칠 것만 같았다.

“하윽, 윽… 줘… 요. 차라리…… 흐윽… 빨리… 끝내 줘요….”

어차피 마지막은 똑같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시간을 끄는 그것보다 빨리 기욱이 제 안에서 사정이든 뭐든 하고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뻣뻣하게 서 있는 페니스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들던 기욱이 서진의 허벅지를 건드렸다. 살이 닿는 마찰에 서진이 깜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손 놓지 말라고 했을 텐데?”

“흐극… 제발… 제발요… 하으으윽!!”

일방적으로 당하는 섹스보다, 이런 식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훨씬 더 괴로웠다. 서진은 기욱이 왜 이렇게 집요하게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욱은 서진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며 속삭였다.

“넣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그럴 리가 없다. 기욱과 섹스가 한두 번도 아니고, 기욱이 서진의 몸에 대해 잘 알 듯 서진은 어떻게 해야 기욱이 움직일지를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몸으로 배웠다는 쪽이 더 가까웠다.

“그건…….”

“강요는 안 해.”

거짓말이다. 기욱의 저 말이 얼마나 모순된 말인지 과거에는 몰랐다. 몰아붙일 만큼 몰아넣은 뒤에 하는 말은 강요가 아닐 수가 없었다. 기욱이 또다시 서진의 귀두 끝을 살살 긁었다. 이젠 뭐가 쾌락이고 고통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흐윽… 읏, 흐으윽… 하윽…!”

기욱의 손에 묻어 있는 서진의 정액이 다시 서진의 페니스를 축축하게 만들었다. 이 상태라면 내일 출근을 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간신히 숨을 고른 서진이 기욱의 허벅지를 붙잡고 바지를 내렸다. 기욱의 페니스를 손에 쥔 서진이 페니스를 입에 물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흣, 으읏…… 윽.”

서진은 기욱을 만족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펠라를 했다. 기욱은 오늘따라 유독 열심히 하는 서진의 머리채를 잡아 넘긴 뒤 눈을 맞췄다.

“흐… 으읏….”

“너, 한 교수랑 아무 일 없는 거 맞겠지?”

서진은 기욱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은 기욱이 왜 이렇게 우민과 자신의 관계에 민감하게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서진은 기욱의 본능은 대게 잘 맞는 감이 있다고 확신했다. 빌어먹게도, 서진은 우민이 다가오는 것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사소한 것이라도 우민이 올 때면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다 한들 이렇게 당하는 이유가 그런 의심 때문이라면 솔직히 좀 억울하긴 했다. 차라리 우민과 섹스를 하고 난 뒤라면 덜 억울할 텐데 말이다.

입가에 묻은 쿠퍼액이 침과 함께 아래로 흘러내렸다. 기욱은 신경질적으로 서진의 머리채를 놓았다. 소파 위로 몸이 떨어진 것도 잠시뿐 기욱은 서진의 허벅지를 잡아당겨 꼿꼿하게 선 제 페니스를 맞췄다.

“어흑…!”

기욱과의 섹스는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익숙할 수도 없었다. 고통과 쾌락이 동반하는 상황에서 서진은 그저 기욱의 열기에 몸을 맡기는 인형에 지나지 않았다. 신음을 내지를 여유도 없이 서진의 몸이 소파와 함께 앞뒤로 흔들렸다. 잠시 허리를 움직이는가 싶던 기욱이 서진을 허벅지 위로 올린 뒤 강제로 다리를 벌리게 했다.

“하윽, 어흑… 이, 이 자세는…… 흐윽… 제발….”

“후, 강서진 이제 와서 뭘 그래. 아무도 안 봐.”

서진은 문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 하는 섹스를 싫어했다. 싫어하기보다 문이 열릴 것 같은 본능적인 두려움이 있는 모양이었다. 서진의 두려움을 알고 있는 기욱은 일부러 서진의 몸을 문 쪽으로 향하게 했다.

“흐, 읏… 허윽….”

“읏, 강서진…!!”

서진의 허리를 잡은 기욱이 서진의 안에서 사정을 했다. 페니스가 박힌 채로 기욱의 희멀건 정액이 엉덩이를 축축하게 적셨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바닥으로 엎드린 서진의 뒤를 박았다. 기욱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윽… 으윽….”

바닥을 긁을 수 없어 허공을 맴돌던 서진의 손은 바닥에 굴러다니던 담요를 붙잡으며 간신히 버텼다. 기욱은 서진이 실신하기 직전까지 범하고 또 범했다.

* * *

“우윽…!”

이른 아침, 서진은 화장실의 세면대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계속했다. 요 최근 들어서 계속 이랬다. 특별하게 몸이 안 좋은 것도 아닌데 속이 느글거렸다. 그도 그럴 게 밤새 기욱에게 당하고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병원에 출근했으니 어쩌면 토를 하는 것도 당연할지도 몰랐다. 사실 헛구역질한다고 해서 뭐가 나오는 건 아녔다.

찬물로 정신없이 세수하는 서진에 뒤쪽에 있던 레지던트 동기가 혀를 찼다.

“너 진짜 괜찮냐? 몸 안 좋은 거 아냐?”

“그런 거 아냐.”

“야야, 벌써 그만둘 생각이라면 그만둬라. 내가 들어 보니까 저번주는 시작에 불과하다더라. 아아, 슬슬 괜히 온 건가 싶기도 하다.”

“나보다 네가 먼저 그만두는 거 아냐?”

“난 안 그만둬!! 내 말은, 그 뭐야……. 무리하지 말라고. 솔직히 별로 도움은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동기잖아?”

“말이라도 고맙다.”

서진은 숨을 고르며 동기 레지던트와 함께 복도로 나왔다. 저녁 무렵, 간신히 시간이 난 규건이 서진에게 다가왔다. 지난번 정해지지 않은 서진의 팀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돌아가면서요? 그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

“너도 아무 데나 상관없다고 그러고, 교수님들은 무조건 자기 팀에 넣겠다고 하니까 뭐 별수 있겠냐? 솔직히 한 명 붙잡고 배우는 게 가장 좋긴 한데……. 세 분 다 좋은 사람이니까 상관은 없긴 한데. 너 적응할 수 있겠어?”

“적응이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래도 떠돌이는 역시…….”

“오래 안 갈 거야. 한번 돌아 보고 가장 스타일 맞는 교수님 있으면 따로 언질 좀 주라. 내가 잘 이야기해 줄 테니까. 자세한 건 또 정해지면 따로 알려 줄게.”

“저 때문에 죄송해요.”

“됐다. 내 신세가 그렇지 뭐. 갈 테니까 고생해라.”

규건이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규건이 가고 난 뒤 홀로 남겨진 서진은 복도에 있는 유리창에 머리를 기댔다.

‘넥타이.’

파란색 수술복 차림인 서진은 목 근처를 만지작거렸다. 도대체 넥타이가 어쨌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서진은 벽에서 등을 떼며 목덜미를 붙잡았다. 당직이긴 한데 밤새 할 일이 산더미처럼 있었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우민이랑 거리를 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시작이었다던 동기의 말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 서진과 동기들은 거의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고,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하물며 이 팀 저 팀 왔다 갔다 하는 서진은 남들의 두 배로 정신이 없었다. 멀리 서진을 발견한 우민이 오랜만이라며 손을 흔들었다.

“어? 강서진…….”

“…….”

우민을 본 서진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처음 한두 번은 그럴 수 있다 쳤지만, 그 뒤에도 서진은 우민을 노골적으로 피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우연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우민은 한 번, 두 번 쌓기기 시작하자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했다.

“아놔.”

“교수님 왜 그러세요?”

새벽에 당직을 서고 있는 진호를 로비로 불러낸 우민은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벽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매번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을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며칠간 우민은 좀 이상했다.

“아니, 야. 내가 뭐 잘못했냐?”

“아뇨. 교수님 잘하고 계시잖아요.”

“그게 아니라! 강서진 말이야. 강서진. 너 못 봤어? 노골적으로 나 무시하는 거? 내가 뭘 잘못했는데? 걔 무슨 일 있냐?”

“없을 텐데요. 그보다 기분 탓 아니에요? 전 그냥 평소랑 똑같던데요. 아, 성격이 좀 뭐라고 해야 하지? 딱딱한 구석은 있긴 하지만요.”

처음에는 낯을 가리는 건가 싶었지만, 할 말은 꼬박꼬박 다 하고 다니는 걸 봐서 무조건 낯을 가리는 성격은 아닌 듯싶었다. 사실 당분간 여기저기 옮겨 다닌다는 말을 들었을 때 걱정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진호의 걱정과 달리 서진은 적응 기간이라는 게 필요 없을 정도로 눈치가 빠르고 빠릿빠릿했다.

서진을 겪고 나니 다른 레지던트들이 답답할 지경이면 할 말 다 한 셈이었다. 덕분에 처음 전임 교수들만끼리의 기 싸움이 이제는 밑에 있는 선임 레지던트들에게까지 튈 지경이었다.

똑똑한 녀석은 데리고 있어서 득을 보면 봤지, 손해를 보는 일은 거의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진호는 서진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가면 올라갔지 내려갈 만한 일은 크게 없었다. 우민은 남은 커피를 전부 마신 뒤 빈 쓰레기통에 커피 캔을 집어 던졌다. 쓰레기통에 든 것이 없어서 그런지 유독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보다. 서진이가 교수님한테 서운하게 굴면 그건 교수님 잘못 아니에요?”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거야 교수님이랑 서진이가 알죠.”

“하, 그 자식! 까탈스럽기는. 야, 강서진 오늘 당직이지?”

“그럴걸요. 아까 ER 내려가는 거 봤어요. 지금쯤 올라왔으려나? 그럴걸요.”

“알았다.”

“적당히 해요 적당히! 뭔진 몰라도 울리지 마시구요!”

진호가 멀어지는 우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민은 서진이 있다고 들은 응급실로 들어가 주변을 둘러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떤 환자인지 물어보고 올 걸 하고 후회가 들었다. 우민은 마침 라면을 먹고 있는 응급실 과장 윤성에게 다가갔다.

“어,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이세요?”

우민을 알아본 윤성이 라면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숙였다. 몇 시간 만에 첫 끼라 차마 라면을 내려놓는 아까운 짓은 할 수가 없었다.

“우리 교수님이 내려오실 만한 환자 없는데…….”

“아뇨, 제가 볼일이 있어서 들른 겁니다. 혹시 강서진 왔다 갔습니까?”

“아아, 서진이요?”

순식간에 라면 국물을 반쯤 마신 윤성이 건너편 침대를 손가락질했다. 마침 인턴과 이야기를 마치고 응급실을 나가려는 서진이 있었다. 우민은 가운 주머니에서 아침에 먹으려고 아껴 뒀던 딸기 맛 에너지바 하나를 데스크에 올려놓았다.

“감사합니다. 고생하세요.”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주신다면야. 잘 먹을게요.”

윤성은 빠르게 에너지바를 가져와 뜯었다. 우민은 응급실을 나가는 서진의 뒤를 쫓았다.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으로 도망치려는 서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우민은 비상계단의 문을 열고 계단 안으로 들어갔다.

“강서진!!”

“윽…….”

싸늘한 공기가 감도는 비상계단 안으로 서진을 부르는 우민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우민을 따돌릴 계획이 무산된 서진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너 거기 가만히 서 있어.”

“…….”

“도망가기만 해 봐.”

우민은 2층의 문을 열려고 하는 서진에게 엄포를 놓은 뒤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아무리 서진이라 해도 노골적으로 자신을 지목하는 우민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우민은 서진이 도망갈 수 없도록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저, 저기 교수님?”

“야. 너 왜 계속 나 피해 다녀.”

“피, 피해 다닌 건…… 아닌데요…….”

서진은 우민의 눈을 피해 바닥을 바라봤다. 우민이 얼굴을 들이밀며 서진을 노려봤다.

“내가 그렇게 눈치 없는 놈인 줄 알아? 왜 피해 다니냐고. 하다못해 뭘 잘못했는지 정도는 알려 줘야 할 거 아니야.”

“교수님은 잘못하신 거 없는데요. 그냥 제가…….”

제 잘못이라고. 서진은 왠지 그렇게 말을 했다가 우민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니가 뭐? 말 똑바로 해라.”

만약 자신을 피하는 것이 서진이 아닌 다른 레지던트라면 우민은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교수를 피해 다니는 그 레지던트가 정신이 나간 것이었다. 그러나 서진은 틀렸다. 어떻게 틀린지 정확히 짚을 수는 없어도, 그래도 우민은 서진이 자신을 피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진도 나름 티 안 나게 도망쳐 보려고 했지만 같은 과인 데다가 어째서인지 서진은 철새 신세에서 교수님들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탓에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하며 말을 전하거나 저년차가 들을 만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리를 같이하게 되는 일까지 있었다. 당연히 우민과 부딪히지 않으려 해도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서진은 우민의 목에 여유롭게 걸려 있는 넥타이를 흘끗댔다. 오후에 볼일이 있어 늦게 병원에 들어온 탓에 가운만 걸치고 있을 뿐 우민은 거의 사복 차림이나 다를 게 없었다. 익숙한 디자인의 넥타이에 서진은 기욱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 넥타이요…….”

“너 넥타이 안 매고 있잖아. 아, 내 거?”

서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민이 목에 늘어진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실크로 된 넥타이가 제법 감촉이 좋았다.

“아, 이거. 저번에 너희 집 놀러 갔을 때 봤는데. 괜찮은 거 같아서 나도 하나 샀어. 말해야 했나?”

조금 비싸긴 해도 생각했던 그것보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요즘 정장을 입을 때마다 한동안 메고 다니는 넥타이였다.

“너 좋은 넥타이 가지고 있더라? 원, 국내에서는 품절된 거라고 해서 해외배송까지 했잖아.”

“해외배송이요? 사, 샀어요? 넥타이요?”

“그럼 사지 주워? 근데 갑자기 왜 넥타이…… 너 설마!”

뭔가 짐작을 한 듯 우민이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서진이 자신을 피해 다니기 시작한 시기가 묘하게 새 넥타이를 하고 다닌 시기와 맞물리는 기분이 들었다.

“넥타이 따라 했다고 삐진 거냐?”

“그, 그게……. 다, 다음부터는 말 좀 해 주세요.”

서진은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운을 주먹으로 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게 아니지만, 달리 우민에게 사정을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민은 그런 서진을 보며 어이가 없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너무 황당해서 화조차 나지 않았다. 우민이 서진의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어트렸다.

“이게 진짜…! 하아. 알았다. 미안하다. 미안해.”

“…아, 알면 됐어요.”

사실 서진은 우민이 황당해하는 그것보다 머리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넥타이를 샀다는 우민의 말은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하긴, 우민이 넥타이를 훔쳐 갔다는 것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는 소린 기욱이 두고 갔다는 넥타이는 대체 뭐란 말인가?

서진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정말이지. 별걸 가지고 다 오해를 한다. 아, 전화 왔네. 어. 아니 근처야. 알았어.”

진호에게서 온 전화였다. 우민은 금방 간다며 전화를 끊은 뒤 서진을 향해 나중에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저렇게 친근하게 구는 우민을 더 이상 무시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우민이 완전히 아래층으로 사라진 것을 본 서진은 가운 주머니에 있는 2G 휴대폰을 꺼내 기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욱은 연구실에 있든지 자든지 할 것이었지만, 병원에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나 기욱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간이 시간이었던 터라 서진은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닫았다.

그럼 기욱이 찾던 넥타이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 * *

넥타이에 대한 서진의 궁금증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당직을 마치고, 반나절을 꼬박 잠들어 있던 서진은 본능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강서진입니다. 말씀하세요…….”

서진은 죽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동 응답기처럼 나오는 서진의 목소리를 들은 기욱이 휴대폰 너머로 한숨을 내쉬었다.

― 강서진, 정신 차려.

― 어, 그게……

기욱의 목소리를 들은 서진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진은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아아, 퇴근하고 자고 있었지. 서진은 갑작스럽게 온 기욱의 전화에 허탈해졌는지 도로 침대에 누웠다.

― 왜요?

― 왜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집 근처 다 와 가니까 옷 갈아입고 기다려.

― …….

― 강서윤이랑 같이 갈 거야. 점심 먹으러 가게.

― 누나랑… 윽. 아, 알았어요.

서진은 전화를 끊은 뒤 한숨을 쉬었다. 오전 11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비틀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간 서진이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기 무섭게 벨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서윤과 기욱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서진이 현관문을 열었다.

“서진아!”

“누나, 안 올라와도 되는…… 데…….”

서진은 반갑게 인사를 하는 서윤보다 눈앞에 있는 기욱의 넥타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우민이 하고 있던 넥타이와 똑같은 붉은색 넥타이. 아아, 빌어먹을. 서진은 서윤을 향해 웃으며 뒤로 욕설을 내뱉었다.

“서진아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 양말만 신고 나올게.”

“응, 알았어.”

서진은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장롱의 문을 열었다. 장롱에는 서진의 비싸지 않은 넥타이들이 걸려 있었다.

“하하, 뭐야 이게…!”

서진은 기욱의 넥타이를 빨래 돌려 걸어 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결국, 기욱은 넥타이를 가져갔으면서도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서진아! 안 나와?”

“금방 나갈게!!”

서진은 다급하게 양말을 챙겨 신고 밖으로 나갔다.

* * *

주차장에 주차한 기욱은 간판을 확인한 뒤, 차를 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가게는 작았지만, 주변을 구성하고 있는 실내장식들은 한눈에 봐도 호화로운 것들투성이였다. 기욱은 스시집 안쪽에 있는 남 병원장의 옆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늦었군.”

“수술이 생각보다 늦게 끝나서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강서진인가? 자네가 그렇게 억지로 밀어 넣은 것치고는 적응을 꽤 잘하는 모양이더군.”

“그 이야긴 원장님과 관계없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날카롭게 굴 것도 없지 않나.”

“강서진, 신경 쓰지 마시죠.”

기욱은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서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요즘 들어 더욱 그랬다. 서진을 잘 아는 사람이 서진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짜증 나지만, 서진을 모르는 사람들이 서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는 그것의 배로 열 받았다.

기욱이 생각하기에 남 병원장은 서진과는 관련이 없어야 할 사람이었다. 관련이 있는 것은 자신 하나만으로 족했다.

“자네도 먹을 텐가?”

“생각 없습니다. 집에서 와이프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하하, 좋을 때긴 하지. 1년 됐나?”

“2년입니다.”

기욱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남 병원장은 기욱에게 반쯤 접힌 메모지 하나를 건넸다. 기욱은 말없이 남 병원장이 준 메모지를 받았다. 강남의 한복판에 있는 펜션의 주소였다.

“참, 그리고 자네가 부탁했던 임 교수 고소 건도 잘 마무리됐네. 임 교수가 살린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니 말일세. 그 친구도 운이 참 좋았어.”

“마치 산 사람이 정치인이라 다행이라고 말씀하시는 투로 들립니다만.”

“의학적 선택이 뭐 별거 있나. 조금이라도 가능성 있는 사람을 살리는 거 아닌가? 일반 환자와 이름이 알려진 정치인 중에 누가 더 가능성이 있는지를 따지는 건 일도 아닐세. 설마 자네 입에서 임 교수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자네 임 교수 라인이었나?”

“하, 그 인간이 언제 그런 거 신경 쓰면서 일하셨던 분입니까?”

사실 기욱도 남 병원장의 말을 아주 완벽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만약 둘 중 한 명이 국회의원이라는 걸 안다면 기욱도 별반 다를 것 없는 행동을 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정혁은 틀렸다. 주변에서 아무리 비난해도 기욱은 그 상황에서 가능성이 있었던 사람이 국회의원이었을 뿐이라고 확신했다.

기욱은 정혁이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정혁을 비하할 정도로 수준 떨어진 인간은 아니었다.

“가기 전에 그 번호로 연락하고, 시간 잡아서 가는 게 좋을 걸세.”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일어날 테니 식사 맛있게 하시죠.”

“아, 그러고 보니. 박 교수, 조만간 센터장 수여식이라도 해 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게나.”

“오픈도 안 했는데 수여식부터 하는 건 너무 화려하지 않습니까?”

“보여 주기 행사라는 거 알면서 왜 그러나.”

“마음대로 하십시오.”

기욱은 남 병원장이 건네준 메모지를 챙겨 차로 돌아왔다. 서진을 신경외과에 밀어 넣고, 어떻게 받기는 받았는데 연락을 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제길,”

약속은 약속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기욱은 메모지를 휴대폰에 찍은 뒤에 차를 운전해 도로로 나왔다.

* * *

“서진아! 서진아!”

서윤이 일을 보고 있는 서진을 향해 잠깐 와 보라며 손을 까닥였다. 잠깐 정도는 시간이 났던 서진은 서윤에게 다가갔다. 서윤은 서진의 팔을 이끌고 탕비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번 주 금요일 날…….”

서진의 눈치를 보며 서윤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서윤의 말이 끝나 갈 무렵 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나보고 부산까지 운전하라고?”

서윤이 부탁한 것은 다름 아닌 기욱의 운전이었다. 주말에 부산에서 세미나가 있는데, 같이 가기로 한 서윤과 운전을 담당하기로 한 규건이 일이 있어 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서윤이야 상관은 없지만, 기욱을 대신해 운전할 사람이 당장 필요했다. 서진은 서윤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윤이 말하는 선택지 중에서 기욱이 운전을 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오빠, 요즘 계속 당직이잖아. 졸음운전은 위험한 거 몰라?”

“졸음운전만큼이나 초보 운전도 위험해.”

“어차피 새벽에 출발할 거니까 괜찮아.”

“KTX 타면 되잖아. 뭐 하러…….”

“서진아, 누나가 이렇게 부탁할게. 응?”

서윤의 간고한 부탁에 서진은 별다른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부산까지 운전하고 가는 것도 불안하지만, 기욱과 같이 가야 한다는 사실이 서진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아, 알았어. 근데 누나.”

“응?”

“매형한테는 말했어? 내가 운전할 거라는 거.”

“오늘 말해 놓을게. 고마워 서진아!”

“됐어. 매형 때문에 가는 거 아니니까. 한 번만이야.”

서진은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기뻐하는 서윤이 서진은 마냥 씁쓸하기만 했다. 설령 거짓이라 해도 이런 서윤의 행복을 깨 버리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일까? 싶은 생각이 요즘 들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정답은 없었다. 오랜 집착만큼 괴로운 것도 없었다. 떨쳐 내려 하면 할수록 고민을 하게 만드는 애증이었다.

* * *

새벽 무렵 서진은 택시를 타고 병원 근처에서 내렸다. 1층 주차장에 차를 대 놓는다고 들었는데, 주변이 어두워서 그런지 어느 것이 기욱의 차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안쪽에서 빵, 하고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운전석 창문을 내리며 담배를 물고 있는 기욱이 보였다. 서진은 기욱의 차 앞으로 다가가 운전석의 문을 열었다.

“비켜요.”

“피곤해 보이는데 운전할 수 있겠어?”

“택시 타고 오는 길에 커피 마셨으니까 괜찮아요.”

기욱이 조수석 쪽으로 몸을 옮기자 서진은 운전석의 창문을 올린 뒤 안전벨트를 맸다. 기욱의 차는 여전히 불편했다. 정확하게는 운전석이 익숙하지 않았다. 면허는 땄다. 기욱 덕분에 장롱이 될 것 같지는 않아도 서진은 차를 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원래부터 차 욕심이 없었던 것도 있고, 출퇴근 시간마다 꽉꽉 막혀 있는 차들 사이에 끼고 싶지는 않은 것도 한몫했다. 뭘 하든 제시간에 오는 지하철이 훨씬 편했다.

서윤이 알려 준 부산의 호텔을 내비게이션으로 찍은 뒤 서진은 익숙하게 병원을 빠져나왔다. 원래부터 공간 감각이 좋은 건지 서진의 운전 실력은 하면 할수록 늘어 있는 것이 타고 있는 기욱에게도 느껴졌다.

서진은 운전하는 자신을 아무 말 없이 쳐다보는 기욱이 부담스러웠다.

“잠이나 자요. 한동안 병원에 있었다면서요.”

“너 사고 내나 안 내나 감시하고 있잖아.”

“그쪽이랑 같이 죽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요. 죽으면 혼자 죽든가.”

“매정하네.”

“됐으니까 자라구요. 더 말 안 할 거예요.”

서진은 입을 다물며 속력을 높였다. 아무리 봐도 초보 운전의 솜씨가 아니었지만, 기욱은 서진의 운전에 대해 더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서진의 말대로 한동안 병원에서 당직을 섰던 기욱은 뒷좌석에 있는 담요를 가져와 얼굴에 덮기 무섭게 잠이 들었다.

기욱이 잠든 차 안으로 침묵이 맴돌았다. 기욱에게 이끌려 부산을 내려갈 때만 해도 담요를 덮고 편하게 잠이 들었던 것은 자신의 몫이었다. 그게 설마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애당초 서진은 자신이 운전하게 될 거라는 그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하아.”

차 안이 쌀쌀했던 서진은 약하게 히터를 틀었다. 정말이지 복잡한 밤이었다. 밤새 달린 서진은 아침 해가 뉘엿뉘엿 뜰 때쯤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주차장에 차를 댄 서진은 세상모르고 자는 기욱의 몸을 흔들었다.

“어디쯤 왔어?”

기욱은 담요로 얼굴을 가린 채 중얼댔다. 아직 잠에서 덜 깬 것이 틀림없었다.

“어디긴 어디예요. 호텔이지. 일어나요.”

비틀거리며 일어난 기욱은 눈을 비볐다. 집도 아닌 곳에서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이 든 것은 오랜만이었다. 서진은 기욱의 생각보다 훨씬 운전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머리를 긁적인 기욱이 하품을 했다.

“세미나, 몇 시부터예요?”

“저녁. 사실은 서윤이랑 좀 쉴 생각이었는데. 하, 어쩔 수 없지.”

기욱은 안전벨트를 푼 뒤 뻐근한 몸을 움직였다. 서진은 내릴 준비를 하는 기욱의 팔을 붙잡았다.

“왜?”

“운전한 거는, 누나 때문에 한 거예요.”

“알아.”

“건드릴 생각이라면 방 따로 잡을 거고요.”

서진은 진심이었다. 고등학생이나 이제 막 20대가 된 학생도 아니었다. 비록 병원에서는 말단의 레지던트지만, 그렇다 해도 돈을 받고 일하는 직장인이었다. 호텔의 다른 방에서 묵어도 되고, 그게 아니면 근처의 모텔에서 자는 것도 가능했다.

사실 규건이 못 오게 되고, 서윤이 대신할 사람을 알아봐 준다고 했을 때만 해도 기욱은 서윤이 서진을 설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서진이 자신과 내려가는 걸 싫어한다는 것쯤도 알고 있었다. 기욱은 제 팔을 붙잡은 서진의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알았어.”

“진짜로…….”

“강서진.”

“…….”

“난 약속 지켜.”

처음부터 서진을 생각하고 왔던 것이 아니므로 서진을 건드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

“올라갈 때 사고나 내지 마.”

“안 낸다고 했잖아요.”

서진은 기욱과 함께 주차장에서 내렸다. 기욱의 앞으로 예약이 되어 있는 방이 하나 있었다. 방에 들어간 기욱은 어깨에 대충 걸치고 있던 정장 마이를 의자 한쪽에 던져 놓은 뒤 곧장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무작정 눕고 보는 기욱에 서진은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피곤하긴 했나 보네요.”

“지금도 피곤해.”

기욱은 이불을 덮으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레지던트인 서진이야 출장이라는 명목으로 반나절이나 하루쯤 시간을 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만큼 다른 사람들이 고생은 해도 서진을 대신할 사람이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축복받은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실상 책임자나 다름없는 기욱을 대신할 사람은 없었다. 같은 교수라고 해도 커버를 쳐 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권리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었다.

“너도 한숨 자.”

“안 졸려요.”

“할 거 없잖아. 괜히 집에 갈 때 졸지 말고.”

“하긴, 그렇네요.”

기욱은 언제나 맞는 말만 한다. 이런 면은 시헌과 다를 게 없었다. 이젠 솔직히 누가 누구를 닮았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서진은 기욱이 자고 있는 옆쪽 베드에 몸을 뉘었다. 밤새 운전을 했던 탓에 서진도 얼마 가지 못해 잠이 들 수밖에 없었다.

비록 원해서 기욱과 내려온 것은 아니지만, 서진은 덕분에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잘 수 있었다. 이불 속에서 뒹굴뒹굴하며 12시가 좀 지났을 무렵 일어났다. 정확하게는 욕실에서 기욱이 샤워를 하는 소리에 깼다는 표현이 맞았다. 먼저 씻고 나온 기욱이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말리며 서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굼벵이처럼 이불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서진의 이불을 확, 하고 걷어 냈다.

“자는 척하지 말고 일어나.”

“……왜요.”

이불이 사라짐과 동시에 호텔 방의 미지근 공기와 기욱의 몸에서 나는 따듯한 공기가 섞여 들어왔다.

“너도 씻어.”

“세미나는 저녁이라면서요. 그냥 호텔 방에 있을래요.”

“뭉그적대지 말고 일어나. 일하러 온 거지 놀러 온 거 아니니까.”

일이라는 말에 서진은 괜히 찔렸다. 기욱의 말대로 지금 병원에 있는 누군가는 부산에 내려온 서진을 대신해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고 있었다. 서진은 괜히 미안한 기분에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알았어요, 씻으면 되잖아요.”

욕실 천장에는 물기와 뜨거운 물의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기욱이 샤워를 한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닫히지 않은 문 너머로 드라이기 소리가 들렸다. 서진은 욕실 문을 완전히 닫은 뒤 샤워를 했다.

서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마침 밖에 나갔다 돌아온 기욱이 침대 쪽으로 뭔가를 내던졌다. 드라이가 된 정장이었다. 서진은 정장 같은 건 가지고 온 적이 없었다. 사복 차림이었던 기욱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다른 정장을 입고 있었다. 기욱의 차 뒷좌석에 언제나 정장이 걸려 있는 것을 생각하면 기욱이 정장을 가져와 갈아입은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기욱이 던진 정장이 누구의 것이냐였다.

“이게 뭐예요?”

아무리 봐도 제 정장 같은데, 서진은 정장을 따로 챙긴 기억이 없었다.

“나 20살 때 입었던 거.”

기욱의 20살 때라니, 몇 년 전 이야기를 하는지 너무 아득해서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긴, 처음 만났을 때가 20대 초반이었으니 기욱에게도 20살 때의 시절이 있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은 할 수 있었다. 당시의 기욱은 어린 서진이 느끼기에는 너무나 아득하고도 먼 사람이었다. 서진은 자신이 그때의 기욱과 같은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왜일까? 기욱과 있으면 서진은 늘 고등학교 시절에서 발전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기욱이 가져온 정장을 살폈다.

“진짜 20살 때 입었던 거 맞아요?”

“몇 번 안 입었으니까.”

못해도 10년도 전의 옷이라고 하기에는 관리가 너무 잘되어 있었다. 몇 번이라고 해야 할까? 대학 입학 시절 딱 한 번 입고 장롱에 처박아 둔 옷이나 다름이 없었다. 서진과 같이 간다고 하길래 생각이 나서 가져온 그것뿐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입고 그냥 가져가.”

“안 입으면……. 하아, 입을게요.”

기욱이 준 정장도 정장이지만, 운전만 생각해 별다른 옷을 챙겨 오지 않았던 서진의 복장은 아무리 봐도 세미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매일 봐 온 서진에게는 그저 그런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교수는 교수였다. 서진은 대충 머리를 말린 뒤 기욱이 준 정장을 챙겨 입었다.

체격 차이가 있어 조금 크긴 했지만, 옷은 그럭저럭 괜찮게 잘 맞았다. 10여 년 전 옷치고 정장은 특별하게 촌스럽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냥 평범한 정장이었다. 기욱은 서진에게 들고 있던 왁스를 던졌다.

“저 머리 만지는 법은 잘 몰라서…….”

서진은 동그란 왁스를 만지작거리며 기욱을 올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서진이 머리를 올린 적은 거의 없었다. 기욱이 서진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쭈뼛쭈뼛 서진이 기욱에게 다가가자 답답한 모양인지 서진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앉아 봐.”

“아, 네.”

머리를 만져 주는 기욱의 손길에 서진은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안 건드린다는 것도 그렇고, 참으로 이상한 날이었다.

“오늘만이야.”

“알아요.”

서진은 기욱이 많이 참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기욱의 뜻밖의 배려에 서진은 참으로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머리를 마친 서진은 갈 곳이 있다는 기욱과 함께 호텔을 나왔다.

“왜, 떡볶이?”

호텔을 나와 기욱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간 서진은 난데없는 분식집에 당황스러웠다. 호텔 식당에서 식사는 아니더라도, 기욱이라면 분식집이 아니라 비싼 곳을 가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기욱은 자연스럽게 막 나온 떡볶이와 순대를 먹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머리가 닿을 만한 낮은 천장에 점심시간도, 저녁 시간도 아닌 가게의 손님이라고는 기욱과 서진밖에 없었다.

“안 먹어?”

“아뇨, 먹을 건데요. 도대체 왜 떡볶이인 건데요?”

“먹고 싶으니까.”

기욱의 간단한 이유에 서진은 입안으로 떡볶이를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옷 입기 전에 나와서 먹고 들어가던지. 아무리 봐도 정장 차림으로 떡볶잇집에 들어가는 것은 어딘가 포인트가 어긋나 있어도 많이 어긋나 있었다. 떡볶이를 먹고 싶다는 기욱의 말은 틀리지 않았던 모양인지 기욱은 시킨 떡볶이와 순대를 거의 혼자 다 먹었다. 거의 입맛이 없는 서진은 낮은 나무 테이블에 팔을 괴며 기욱을 바라봤다. 저 차림을 하고도 참 잘 먹는구나 싶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왜 저예요?”

“무슨 소리야?”

“당신은, 하아…….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잖아요.”

뭐든 할 수 있다 뿐인가? 남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진은 늘 마음 한구석에 가지고 있었던 말을 어렵게 내뱉었다. 그런 기욱이 선택한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었다. 서진은 자신의 어디가 그렇게 기욱을 미치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특별히 기욱에게 뭔가를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생각해 본 적 없어.”

“한 번쯤은 있을 거 아니야.”

“밥 먹는데 이런 이야기 하고 싶어?”

“이게 밥이에요?”

“하아, 눈.”

기욱은 얼마 남지 않은 떡볶이를 입에 넣으며 말을 한 번 끊었다. 서진의 말대로 한 번 정도는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이 왜 이렇게 서진을 미치도록 원하는지 말이다. 20살 때 입었던 자신의 양복을 입고 있는 서진을 보니 기욱 또한 옛날 생각이 났다.

“눈이요?”

“그래, 네 눈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서진은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말하지만, 그건 본인 생각일 뿐이다. 기욱이 느끼는 서진은 평범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그럴지도 몰라도 서진의 시선은 공허하면서도 무언가 어긋나 있는 욕망을 갈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 시절 자신과 여자의 섹스 장면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서진에게 끌렸던 것은 단순한 끌림이 아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집착이 단순히 시선과 눈동자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조차 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달라진 건, 나이를 먹긴 먹었다는 점이었다. 이전부터 집착이 있었긴 해도 과거의 집착과 지금의 집착은 조금 방향이 달랐다. 과거의 집착이 원하는 것에 대한 갈망이었다면 현재의 집착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애증이었다. 새로운 것을 찾기보다 가지고 있는 것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다른 점 중의 하나였다.

그 끝이 어떻든, 기욱은 서진을 버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강서진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다.

“바람피우기만 해 봐.”

“연인도 아니면서.”

“바람피우는 게 꼭 연인들 사이에서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거든.”

기욱은 포크를 내려놓으며 물을 마셨다. 비록 떡볶이지만, 기욱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녁 무렵, 세미나를 무사히 마친 뒤 서진은 다시 기욱의 차를 운전해 서울로 돌아왔다.

하룻밤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한 시간을 보냈지만, 기욱과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섹스를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서진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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