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7 위험한 다리 (61/83)

Chapter. 57 위험한 다리

우웅, 책상을 긁는 듯한 진동 소리와 함께 기상나팔에 가까운 벨 소리가 울렸다. 혹시 모를 콜 때문에 침대에 누워 자지 않고 있었던 서진이 벌떡 고개를 들었다.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 간신히 붙잡은 서진은 당직실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네? 아, 알겠습니다.”

늦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복도에는 의료진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낮은 천장의 조명이 눈을 더욱 침침하게 만드는 기분이 들었다. 당직실로 돌아가 담요 대신 덮고 있던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챙겨 입었다.

“불 좀 꺼 줘….”

2층에서 반쯤 죽어 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진은 탁, 하고 당직실의 불을 끈 뒤 복도로 나왔다. 띵,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아래층과 달리 비교적 사람의 인기척이 드문 연구동 복도에 도착했다. 인기척이 없다 뿐인가? 필요한 만큼 불이 켜져 있는 복도는 귀신이 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허무한 공간이었다.

물론, 서진은 귀신도 신도 믿지 않는다. 억울하게 죽어서 세상을 떠나지 못해 망령이 된 사람이라든지 신이라든지 하는 것을 믿기에는 눈앞에 있는 죽음들이 너무 많았다. 살거나 죽거나, 둘 중의 한 가지 선택지에서 죽고 난 이후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최악이나 다름이 없었다.

터벅터벅, 딱딱한 병원 신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안쪽 복도로 들어간 서진은 도어락이 설치된 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었다.

신경외과 교수 [박기욱]

문 옆에 걸린 이름표만 보고도 서진은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이젠 그 이름을 보는 그것조차 지긋지긋했다. 어쩌면 서진은 신경외과가 싫은 것이 아니라, 기욱이라는 인물 자체에 질린 걸지도 몰랐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짓을 계속해야 할지 모르는 자신에게 회의감이 들었다. 언제까지 서 있을 수는 없었던 서진은 마지못해 도어락을 위로 밀어 비밀번호를 누르고 벌컥, 문을 열었다.

“왜 불렀어요?”

“언제 들어오나 보고 있었어. 소리 들렸거든.”

“귀 좋으시네요.”

서진은 연구실의 문을 닫고 싶지 않았다. 문을 닫았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책상에 앉아 있던 기욱이 서진의 뒤로 살짝 열린 문을 손가락질했다.

“문. 내가 닫을까? 아니면 그냥 닫을래?”

협박에 가까운 기욱의 말투에 서진은 억지로 문을 닫았다. 삐빅, 도어락이 자동으로 돌아가며 문이 잠겼다. 문을 잠그면서까지 할 이야기가 뭔지 서진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서윤과 점심을 먹은 이후 특별하게 기욱과 얽힌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 들어 기욱과 얽히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 노력하고 있는 탓도 있었다.

“앉아.”

“금방 갈 거예요. 그보다 다른 과 선생님까지 통해서 불러낸 이유가 뭐예요?”

서진은 지금 신경외과가 아니었다. 서진의 말에 기욱이 마우스를 놓고 앞쪽에 있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기욱의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서진은 표정 변화가 없는 기욱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어 낼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른 스스로가 기특하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얼마나 이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살았으면 이런 것까지 보이나 싶었다.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으니까 앉지?”

서진이 인상을 구기며 기욱의 앞에 앉았다. 다리를 꼬며 팔짱을 낀 기욱이 의자 뒤로 몸을 기대며 숨을 골랐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눈치였다.

“너 레지던트. 어디 썼어?”

“그런 거, 신경외과인 게 뻔하잖…….”

“강서진, 다 알고 묻는 거니까 괜한 소리 하지 말지?”

기욱의 말에 서진이 다급하게 눈을 굴렸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서진은 1지망으로 외과를, 2지망으로 응급의학과를 썼다. 사실 굳이 2지망까지 가지 않더라도 서진의 학점과 인턴 성적, 그리고 몇몇 외과 교수들과 안면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특별한 외압이 없지 않은 이상 1지망에서 떨어지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제 막 인턴이 끝나 가는 일개 레지던트를 대상으로 병원에 외압을 넣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물며 외과에는 이미 인턴 시절부터 확정이나 다름없는 시헌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외과에 지망하는 서진을 기욱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일 건 없잖아요.”

“뭐라고?”

“꼭 신경외과여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예요!!”

“박시헌이 외과라는 거 알고 하는 소리지?”

“아, 알아요. 근데 시헌이 때문에 지원한 거 아니에요! 믿어 줄 거라고는 생각 안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 놓고 다시 사귈 수 있을 거 같아요?”

그 일은, 서진에게도 그리고 시헌에게도 상처나 다름이 없었다. 상처를 해결하는 방법은 서로가 서로에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그것밖에 없었다. 서진이 시헌에 대한 마음을 접었듯이 서진은 시헌도 그럴 거라고 확신했다. 서진의 반항에 짜증이 난 듯 기욱이 성큼성큼 서진의 앞에 섰다.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기욱에 서진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 왔다.

그때와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서진은 기욱에게 반항했다. 시헌과 몰래 사귀었던 그날 이후, 어쩌면 처음이나 다름이 없는 반항이었다.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안쪽 방으로 이끌었다. 안쪽 방에는 기욱의 간이침대가 놓여 있었다. 갑작스러운 기욱의 행동에 서진은 비명을 지를 틈도, 반항할 틈도 없이 기욱에게 이끌려 갔다.

“자, 잠깐만…! 여긴 벼, 병원…….”

서진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여태껏 기욱과의 섹스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해 왔다. 그런데도 기욱은 단 한 번도 서진을 병원 안에서 건드린 적은 없었다. 기욱은 몸을 일으키려는 서진의 어깨를 힘으로 누르며 강제로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겨 냈다.

“이건… 아, 아니잖아요… 으읍…!”

“네가 외과에 박시헌이 있어서 간다고 생각 안 해. 누구야.”

“대체 누굴 말하는 거예요!”

“박시헌 말고 어떤 새끼냐고. 왜 말 못 해?”

“당신 진짜 미친 거 아닌……! 아윽… 아파.”

서진의 몸을 돌린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 위로 눌렀다. 안 그래도 좁은 침대에 이것저것 두꺼운 책이며 물건들이 쌓여 있어 더욱 움직이기 힘들었다. 서진은 기욱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외과에 특별히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발상이 되면 누군가와 눈이 맞아서 외과에 간다고 생각하는 걸까?

“도,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내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제발….”

병원 밖에서까지는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병원 안에서 이러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거추장스러운 가운을 집어 던진 기욱이 서진의 한쪽 다리를 강제로 벌렸다. 답지 않게 반항하는 서진에 기욱이 짜증을 냈다.

“한 번만 더 발악하면.”

“……그만….”

“그 입부터 틀어막고 할 테니까 알아서 해.”

“으읏….”

기욱은 진심이었다. 서진은 한 번도 진심인 기욱을 이겨 본 적이 없었다. 허벅지 사이로 들어오는 손가락이 서진의 안을 거침없이 짓밟았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평소보다 천천히 손가락을 밀어 넣는 기욱에 서진은 낮은 침대의 위에 깔린 이불을 붙잡고 본능적으로 움찔거리는 몸을 참았다.

기욱은 서진의 어디를, 어떻게 건드려야 느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욱의 손길에 서진은 싫다는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몸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한참 동안 안을 괴롭히던 기욱이 서진의 몸을 무릎 위로 올려 짓밟았다. 서진은 끝내 기욱의 손에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으… 윽, 제발….”

그만하라는 단어는 그날 이후 금기어나 다름이 없었다. 서진은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채 기욱에게 사정하듯 매달렸다. 사정 후 나른함 같은 건 오래가고 싶어도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리를 벌린 기욱이 서진의 머리채를 아래쪽으로 잡아당겼다. 다리 사이에 반강제로 얼굴을 가져다 댄 서진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잡을 곳 없는 서진의 손이 기욱의 허벅지를 붙잡고 있었다.

“한두 번 해 본 거 아니잖아.”

“그…….”

외과를 1지망으로 썼다는 사실을 기욱이 알면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막상 잔뜩 열이 오른 기욱을 눈앞에 둔 서진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기욱에 의해 붙잡힌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힘이 무거웠다. 서진은 기욱이 할 때까지 시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서진은 눈을 질끔 감으며 기욱이 입고 있던 바지의 버클과 벨트를 천천히 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발기하는 기욱의 페니스가 서진은 얄밉기만 했다. 기욱의 페니스는 서진의 작은 입안으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 서진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컥컥댔지만, 기욱의 움직임에는 배려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기욱이 서진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고 움직임이 거칠어지면 질수록 서진은 코끝에서부터 느껴지는 시큼한 향과 맛에 죽을 것만 같았다.

“우윽… 윽….”

“강서진. 똑바로 다 삼켜. 후….”

정액을 토해 내기도 전에 기욱이 서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목 뒤로 강제로 넘어가는 정액에 서진의 숨이 턱 하고 막혀 왔다. 눈가에 흐르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입술 근처에 닿아 짭짤한 맛을 만들어 냈다. 솔직히 정액 때문인지 제 눈물이 무슨 맛인지조차 정확하게 느낄 수는 없었다. 숨을 고른 서진은 제 얼굴에 손을 대는 기욱의 손을 밀어냈다.

“도대체…!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구요…!!”

“왜 그러냐고? 그러는 넌 대체 왜 그러는 거지?”

“뭐, 뭐가요!!”

“강서윤이랑, 일하는 거 네 꿈이었잖아. 신경외과에 있으면 네 편의를 봐줄 사람은 내가 아니라도 많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하고 보자. 그게 빽이든 돈이든 상관없었다. 빽이 있다는 것도, 돈이 있다는 것도 기욱에게 있어서는 능력의 문제였다. 주변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도 충분한 능력인 셈이다. 기욱은 오히려 그 고생을 하면서도 마지막에 선택하는 것이 외과라는 서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언제나 그게 문제예요!!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냐구요! 하하, 그랬으면 이 지경까지는 안 왔겠지. 제길…!”

서진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기욱과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당시의 서진은 어렸다. 서진도 어렸지만, 기욱도 어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의 잘못과 잘못된 관계로 이 지경까지 오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미친 게… 윽…! 틀림없어.”

“그래서? 지금 나보고 강서윤이랑 이혼이라도 하라고?”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데요!! 그냥 날 내버려 둔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예요?”

“강서진.”

기욱이 서진의 앞으로 몸을 당기며 눈을 맞췄다. 흔들림 없는 검은 눈동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목소리는 수십 번, 수백 번을 들었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서윤과는 헤어질 수 있다. 그러나 기욱은 서진을 놓는 그것만큼은 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서윤과 결혼한 것도 강서진을 묶어 두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서진이 원한다면 서윤과 이혼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진과의 관계를 끊을 생각 따위는 죽어도 없었다.

“도대체 나, 난 당신한테 뭐냐구요!! 우리는 도대체…….”

서진의 눈가로 참아 왔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아, 우리는 대체 무슨 관계였던 걸까? 연인도 아니고, 불륜이라고 하기에는 지독하게 얽혀 있는 슬픈 관계였다. 서진은 한 번이라도 좋으니 기욱이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해답을 내려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욱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너……. 제길. 이런 타이밍에.”

바깥에서 기욱의 그것으로 생각하는 휴대폰의 벨 소리가 울렸다. 기욱은 다급하게 옷을 바로 입은 뒤 전화를 받았다. 1분 정도의 통화가 이어질 무렵 서진 또한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챙긴 뒤 기욱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마침 기욱이 통화를 끝낸 뒤였다. 그러나 상황을 보아하니 금방이라도 내려갈 것 같은 분위기였다.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이미 원서 냈어요. 그런다고 맘 바뀔 줄 알아요?”

“가만 안 둔다고, 경고했어. 빌어먹을!”

서진은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기욱이 상당히 다급하다는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할 수 있었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기욱은 연구실에 있는 서진을 돌아볼 틈도 없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기욱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서진은 간신히 복도로 나왔다.

기욱 덕분에 날밤을 꼬박 새운 꼴이 되어 버렸다. 좁은 창문 너머로는 우중충한 새벽의 아침 햇살이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다행히 그사이 연락이 온 것은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복도에서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서진은 한참 동안 벽을 붙잡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다.

“어! 강서진, 너 여기서 뭐 해?”

우민이었다. 멀리서 서진의 모습을 본 우민이 깜짝 놀라 다가왔다. 장소도 장소였지만, 우민은 벽에 몸을 반쯤 기댄 채 움직이지 않고 있는 서진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아, 윽. 한 교수님?”

“어, 난데. 너 괜찮냐?”

우민이 서진을 부축하며 서진의 이마에 있는 열을 쟀다. 딱히 열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서진의 안색은 누가 봐도 걱정할 만큼 창백했다. 우민의 부축을 밀어내며 걸음을 내딛던 서진은 얼마 가지 못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야야, 너 진짜 왜 그래? 아침부터 도대체 무슨 일이야……. 잠깐만, 내가 전화 좀…….”

속이 매스꺼웠다. 단순히 토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다. 서진은 전화하려는 우민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서진을 본 우민은 전화가 연결되기 전에 통화를 끊었다.

“우윽…! 윽….”

간신히 우민의 전화를 끊게 한 데 성공한 서진은 이내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헛구역질을 계속했다. 밤새워 먹은 게 없으니 나올 건 없었지만, 서진의 입가로 넘어가지 못했던 정액이 섞여 흘러내렸다.

“하아, 하…….”

“괜찮아?”

“그냥 좀 무리해서 그런 것 같아요. 괜찮아요.”

“사람 부를 정도는 아니라 이거지?”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은 괜히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우민은 서진의 입가에 묻은 것들과 특유의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본능적으로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뭔진 모르지만 일어나. 아직 시간 있으니까 도와줄게. 너 무슨 과지?”

“저 EM인데요.”

“아, 거긴 좀. 그래도 말턴이니까 봐주지 않을까?”

“하하, 그랬으면 좋겠네요.”

서진은 우민의 팔을 붙잡으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걱정하실 필요 없을 거예요.”

“아, 그래요? 그러면 그렇게 전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데스크 쪽에 있는 레지던트와 대화를 마친 서진이 고개를 숙이며 등을 돌렸다. 동시에 이제 막 나온 우민과 서진이 마주쳤다.

“너 여기서 뭐 해?”

“아, 오전에 환자 때문에……. 별거 아니에요.”

“그래? 몸은 좀 어떻고?”

“덕분에요. 괜찮아졌어요.”

서진은 새벽에 있었던 일을 말하는 듯한 뉘앙스에 적당히 말을 흘렸다. 실제로 이것저것 스트레스가 얽혀 현기증이 났을 뿐 일을 못 할 지경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민은 그런 서진에게 적당히 하라며 어깨를 토닥였다. 서진이 내려가고 우민이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어? 저거 네 것이냐?”

눈높이보다 조금 높게 올라간 데스크 쪽으로 낯익은 휴대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우민이 팔을 뻗어 휴대폰을 가져왔다. 조금 전까지 서진과 대화를 하던 레지던트가 고개를 저었다.

“저 아닌데요?”

밑으로 몰래 톡을 하고 있던 그가 다급하게 우민의 눈치를 보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우민은 예전에 썼던 휴대폰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근데 그거 강 선생님 거 같은데요.”

“서진이?”

“아까 메모한답시고 주머니에서 이것저것 꺼냈으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강 선생 말고 딱히 왔다 간 사람도 없구요.”

“근데 요즘도 2G폰 쓰는 사람이 있었나? 이야, 오랜만이긴 하네.”

“취향인가 보죠. 왜 임 교수님도 아직 쓰고 계시잖아요.”

“그 사람은 유명하잖아.”

“적당히 내버려 둬요. 잃어버린 거 알면 금방 찾으러 오겠죠. 아니면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부탁해 놓던지.”

“나 연구실 올라갈 거야.”

우민이 서진의 것이라 추측되는 2G폰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진이 기욱뿐만 아니라 다른 신경외과 교수들과도 안면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우민과 기욱이라는 건 좀 언벨런스하긴 하지만, 신경외과가 아닌 외과를 택했다는 소문이 도는 서진을 신경 써 줘야 할 의무는 크게 없었다.

“알았어요. 그럼 휴대폰 찾을 거면 교수님 연구실로 가라고 전할게요.”

“크, 역시! 김 선생, 말이 잘 통해서 좋아.”

“잔소리 말고 얼른 가시라구요.”

그는 우민을 향해 성가시다며 손을 저었다.

* * *

“강 선생님! 여기 좀 도와주세요!!”

“네네! 잠시만요! 아, 선생님. A1에 로라 하나 해 주세요.”

“오더 들어온 거 없는데요?”

“아까 그 뭐지……. 아, 여자 레지던트 선생님이. 금방 넣어 주신대요.”

“강 선생님!!!”

멀리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진이 다급하게 뛰어갔다. 말턴이고 자시고, 마지막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응급실은 전쟁터나 다름이 없었다. 오늘만 CPR만 3번째였다. 현기증은 새벽이 아니라 지금 날 것만 같았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오늘따라 외상센터가 상대적으로 인원이 많았다는 점이었다. 기욱에 관한 건 잊어버릴 만큼 정신없이 일하던 서진은 등 뒤의 땀이 채 식기도 전에 다른 환자들의 상태를 확인하러 돌아다녔다.

“학생, 이러면 곤란해요.”

“놔…, 씨발. 안 놔? 니네가 뭔데 날 붙잡아? 어?”

“……이게 뭐야.”

서진은 딱 봐도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20대 여자 환자에 인상을 찌푸렸다. 소독해 놓고 임시로 붙여 놓은 거즈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제 막 인턴으로 들어와 응급실이 처음인 후배 인턴은 반항하는 여자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서진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이 없나 둘러보자 서진의 옆에서 도와주러 온 간호사가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끼어들었다.

“참고로 손 남는 사람 없어요. 강 선생님, 봉합 정도는 혼자 하실 줄 아는 거 다 아니까 엄살 부리지 마세요.”

“윽……. 제가 언제…… 알았어요.”

“형! 좀 도와줘요. 제발.”

“니네 내가 누군 줄 알아? 너 뭐야. 교수야?”

“하하, 아닌데요.”

“교수 데려와! 어디서 말단 인턴 같은 애들을 데려오고 난리야? 씨발, 이러니까 안 되는 거야. 어?”

“학생, 술 많이 취하신 거 같은데. 이거 꿰매야 집에 가요. 네?”

서진은 멋대로 떠드는 여자를 반쯤 무시하며 상처를 살폈다. 이미 신경외과 레지던트가 잠깐 다녀가면서 큰 문제가 없다고 확인을 받은 상황이었다. 서진이 찢어진 여자의 이마에 손을 대자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크게 휘둘렀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근처에 있던 트레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진의 옆에 선 간호사는 그럴 줄 알았다며 이마를 짚었고, 이제 막 들어온 인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씨발, 어디다 대고 가르쳐. 니가 날 가르쳐?”

“하아.”

“형, 괜찮아요? 피 나는데…….”

“몰라.”

서진은 저를 걱정하는 인턴의 말에 대답할 기운조차 없었다. 서진은 어디다 베였는지도 모르는 팔에 흐르는 피를 보며 혀를 찼다. 정말이지 되는 일이 없는 밤이다. 참다못한 간호사 선생님이 등을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선생님 불러올 테니까. 이 선생님, 거기 정리랑 강 선생님 상태 좀 봐 주세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 박 교수님…….”

“제가 할 테니까 정리해서 다시 좀 가져다주시죠.”

“아, 네. 그럴게요.”

“어어, 같이 가요!”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생각됐던 인턴이 간호사를 쫓아갔다. 서진은 지혈한 뒤 고개를 들어 기욱을 바라봤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기욱이 내려와 있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은 뭐야? 교수야?”

“응급실에서 소란 피우시는 건 자제해 주시죠. 특히 의료진 폭행은 조용히 못 넘어갑니다.”

“때린 적 없거든? 저건 지가 잘못해서 그런 거고! 그쪽 교수야? 어?”

윙윙거리는 주변 소음과 기계 소리에 섞여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욱은 같이 내려온 규건을 올려 보낸 뒤 커튼을 반쯤 치고 여자 쪽으로 몸을 살짝 숙였다.

“나이도 어린 게.”

“…….”

“싸가지 없이 말 까지 말고, 해 준다고 할 때 가만히 있지.”

기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간호사와 인턴이 다시 돌아왔다. 기욱은 여전히 앉아 있는 서진의 몸을 손으로 살짝 밀어냈다. 비키라는 뜻이었다. 기욱의 눈치를 본 서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여자는 불만스러운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아까처럼 시끄럽게 떠들지 않았다.

“강서진.”

“……네?”

“뭐 해?”

“아, 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깔끔하게 꿰맨 기욱에 서진은 재빨리 가위를 들고 실을 잘랐다. 기욱은 제 할 일만 한 뒤 손을 털고 일어섰다. 뒷정리는 오롯이 서진의 몫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기욱은 뒤를 돌고 있는 서진의 등을 살짝 밀었다.

“너.”

“…….”

“나한테 빚진 거야.”

서진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는 편이 더 맞는 것 같았다. 여자의 뒷정리를 하고 서진은 그제야 허락을 받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여자의 처치를 같이했던 신규 인턴과 함께 응급실 밖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마셨다.

수 시간 만에 마시는 물이라는 느낌보다 바깥 공기가 더 반가웠다.

“아까 NS에 박 교수님 맞죠?”

“너 알아?”

“아, 학교 다닐 때 수업 들었었어요. 포스가 이야, 장난 아니네요.”

“그래? 난 잘 모르겠던데.”

“뭘 몰라요?”

“그냥,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요즘 들어 더 잘 모르겠다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됐다. 그런 게 있어. 괜한 말을 했다. 들어가자 들어가.”

서진은 앞으로 1년 동안 고생할 인턴을 강제로 떠밀며 응급실로 들어갔다. 각자 제 할 일을 하러 가고, 서진도 다른 일을 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서진에게 다가왔다. 응급실 교수나 의사들은 아니었지만, 워낙 많은 의사가 내려오고 올라가고 하니 이젠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자네가 강 선생인가?”

“어, 그런데요. 그… 무슨 일이세요?”

서진은 한 모금 남은 캔커피를 다급하게 뒤로 숨기며 눈앞에 있는 중년의 남자 의자의 신분증을 흘끗댔다. 그의 이름보다 외과 과장이라는 타이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C2 환자 담당이 자네였다던데. 어디 갔지?”

“아, 그 환자라면 아까 퇴원했습니다.”

“처치는 누가 했지? 자네가 했나?”

“아뇨. 그게……. 하도 난동을 피우셔서, 신경외과에 박 교수님이 도와주고 가셨습니다. 하하.”

멋쩍게 웃는 서진과 달리 그의 표정은 제법 진지해 보였다. 고작해야 머리 몇 바늘 꿰매는 거다. 특별하게 문제도 없는 일에 왜 이렇게 매달리는지 서진은 알 수가 없었다.

“자네가 말하는 박 교수가 내가 아는 박기욱 교수가 맞는 건가?”

“아, 네.”

“알았다. 가 봐.”

그가 서진을 향해 손을 저었다. 명백히 따지면 서진은 응급실 인턴이고, 자리를 비켜 줘야 하는 건 그였지만 그는 인턴인 서진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서진은 이런 취급에 익숙했으므로 그가 자리를 비키기 전까지 다른 일을 찾으러 떠났다. 서진이 거리를 벌리자 근처에 있던 간호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뭐야? 왜 내려온 거야?”

“나도 몰라. 별꼴이야.”

아무래도 J대 병원 외과 과장은 별로 대우가 좋은 편은 아닌 모양이었다.

* * *

“하아…….”

이 짓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날밤을 꼬박 새운 서진은 라커룸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잠바까지 챙겨 입은 뒤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커를 반쯤 나온 서진이 다급하게 라커룸으로 돌아가 라커 안을 쥐 잡듯이 뒤졌다. 덕분에 졸지에 엉망인 라커 청소까지 했으니 할 말 다 한 셈이었다.

라커와 가방을 이 잡듯 뒤지고, 당직실까지 다녀왔지만, 소용이 없었다. 기욱이 준 2G 휴대전화가 없었다. 막상 그 휴대폰으로 기욱과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건 아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늘 가운 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것이었다. 어째서 그게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서진은 아차 하며 이마를 짚었다.

사실 잃어버려도 그만이지만, 뒤에 있을 기욱의 뒷감당과 혹시 하는 생각 때문에 쉽사리 포기할 수가 없었다. 서진은 근무했던 장소들을 하나씩 되짚으며 우선 가장 오랜 시간 있었던 응급실로 내려갔다.

“저, 선생님 혹시 휴대폰 못 봐…….”

“분실물 없어요! 강 쌤, 퇴근할 거면 하시고 아니면 방해하지 마세요!”

한 번 정리가 됐나 싶었던 응급실은 그사이 또 난장판으로 변해 있었다. 거의 방해물, 짐짝 취급에 가까운 대우에 서진은 한숨을 쉬며 응급실을 나왔다. 분실물 상자를 뒤져도 그렇다 할 만한 게 없었던 탓도 있었다. 밖으로 나와 담배를 문 서진의 머릿속으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 신경외과.”

거기서 분명 메모장을 찾느라 가운 주머니에 있는 것들을 잔뜩 꺼냈던 기억이 났다. 서진은 담배를 빠르게 피운 뒤 신경외과로 올라갔다. 운이 좋게도 아침에 본 레지던트가 그 자리에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 저. 아침에 왔던 인턴인데요. 혹시 휴대폰…….”

“아아. 그거 아직도 안 가져갔어요?”

“네?”

“아뇨. 한 교수님 아직도 연구실에 계실지 모르겠네. 2G폰 말하는 거 맞죠?”

그의 말에 서진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아침에 두고 가신 거 한 교수님이 연구실에 둔다고 했으니까 가 보세요. 혹시 비밀번호 모르면 다시 내려오든지 아니면 여기 번호로 전화 줘요.”

그가 자신의 번호를 포스트잇에 대충 적어 서진에게 건넸다. 서진은 고맙다며 고개를 숙인 뒤 우민의 연구실로 향했다. 마침 복도에서 연구실을 나오는 우민과 마주칠 수 있었다.

“어, 서진아.”

“교수님. 그, 제 휴대폰…….”

“아아, 어. 잠깐만 내가 금방 가져다줄게.”

우민이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 서진의 휴대폰을 건네줬다. 마침 아래층으로 내려갈 계획이었는데 하마터면 엇갈릴 뻔했던 게 운이 좋았다.

“금방 올 줄 알았는데 ER이 바쁘긴 바쁜가 봐. 휴대폰 사라진 줄도 모르고 일할 정도면.”

“하하, 그러게요.”

“박기욱!”

“박기욱이 왜…… 아.”

우민이 손을 흔드는 모습에 서진이 등을 돌렸다. 기욱이었다. 서진은 다급하게 우민에게서 받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기욱이 그 모습을 봤는지 안 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 고생해라. 난 내려간다.”

“아,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서진은 자리를 뜨는 우민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우민이 먼저 내려가고 복도에는 기욱과 서진 두 사람만 남았다. 서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꼭 쥐며 기욱에게 도망갈 타이밍만을 보고 있었다. 기욱이 등을 돌리는 서진의 팔을 붙잡아 몸을 돌렸다.

“너랑 한 교수.”

“…….”

“위험한 거 알지?”

주머니에서 손을 뺀 서진이 있는 힘껏 기욱의 몸을 밀어내며 고개를 숙였다. 기욱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던 게 아니다. 한 교수, 우민과 있었을 때의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서진은 최대한 숨을 고르며 태연한 척 대답했다.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래, 같은 짓을 두 번 할 정도로 멍청한 녀석은 아니지. 가.”

기욱이 손을 흔들며 서진을 보냈다. 서진은 마침 올라오는 엘리베이터에 도망치듯 몸을 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우민에게 받은 휴대폰을 열었다. 하루 사이 온 연락은 딱히 없었지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기욱에게서 문자가 왔다.

「화요일. 1004호. 늦지 않게 와.」

서진은 기욱에게 받은 문자와 자신의 다음 주 스케줄을 확인했다. 저녁 퇴근의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아무리 봐도 기욱이 자신의 스케줄을 알고 일부러 보냈다고밖에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서진은 기욱의 문자에 답장을 보내지 않은 채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언제는 기욱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나. 서진은 일단 이 피곤함과 두통을 어떻게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요즘 들어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 * *

“강 선생님, 퇴근하세요.”

“아, 네. 고생하셨어요.”

서진의 인사에 여기저기 고생했다는 인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응급실을 나온 서진은 어느새 어두워진 바깥 풍경을 보며 또다시 라커에 머리를 박았다.

‘시간 너무 빠르잖아!!’

요즘 들어 서진은 하루가 한 시간 같았다. 화요일 저녁, 기욱의 문자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을 뿐 서진이 그 일에 대해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닥치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결국 서진의 요 며칠간의 행동들은 마주치기 싫은 것들을 피하는 현실 도피에 지나지 않았다.

몇 시까지 오라고 말한 적은 없어도, 대놓고 화요일이라고 쓰여 있는 데다가 서진은 다음 날 오프였다. 기욱이 그 사실을 모르고 문자를 보냈을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서진은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그 순간까지도 아파트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솔직히 기욱과는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서진은 병원을 나와 지하철 입구 근처에서 연신 줄담배를 피워 댔다. 가득 차 있던 담배가 동떨어져 갈 무렵 빵빵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끝까지 열린 창문 안쪽으로 팔을 내밀고 있는 우민이 있었다.

“야! 담배 작작 펴 인마! 암 걸리겠다!”

“저 어제오늘 합쳐서 처음 피는 거라고요.”

“됐으니까 타. 집 가는 거지? 태워다 줄게.”

“아니, 괜찮…….”

“타라고.”

우민이 뒤차를 보며 눈치를 줬다. 서진은 급하게 담배를 끄며 조수석에 앉았다. 우민은 서진이 차 문을 닫기 무섭게 출발했다.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든 서진은 안전띠를 맨 뒤 기욱에게 받은 2G 휴대전화의 전원을 꺼 버렸다.

“휴대폰은 왜 끄는 거야?”

슬쩍 서진의 휴대폰을 본 우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진은 원래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며 대답했다.

“제 휴대폰은 아닌데, 사정이 있어요. 맡아 두고 있다고 해야 할까. 말하기 복잡하기지만 그런 거예요.”

“소중한 거야?”

“하하,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 빌어먹을 휴대폰을 과연 소중하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는 말이다. 차가 평소보다 더뎠다. 퇴근 시간과 미묘하게 겹친 것도 있지만, 집으로 가는 방향이 공사 중인 탓도 한몫했다.

“하필이면 이 시간에 공사하냐 진짜.”

“하하, 그러게요. 빨리 집에 들어가서 자고 싶은데……. 하암.”

서진의 하품에 우민이 뒷좌석 쪽으로 팔을 뻗었다. 뭔가를 집으려는 모양인데 운전대를 잡고 있어 쉽게 잡히지 않았다. 서진이 우민이 고전하고 있는 뒷좌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뭐 찾으세요?”

“됐어. 내가 할게.”

신호를 틈타 확, 몸을 돌린 우민이 서진에게 뭔가를 던졌다. 파란색의 익숙한 담요가 서진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병원 담요였다.

“그거라도 얼굴에 덮고 자고 있어!!”

“교수님, 병원 담요 훔쳐 오시면 안 되는데요.”

“뭔 소릴 하는 거야! 산 거라고!!”

우민이 핸들을 잡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서진은 우민이 샀다고 하는 담요를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병원 담요가 따듯한 감은 있었다. 왠지 그 전에 차 안에 담요도 없냐는 자신의 말을 신경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헌처럼 노골적으로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닌 무신경하면서도 신경을 쓰는 듯한 우민의 행동에 서진은 기분이 좀 좋아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생각 이상으로 막히는 차에 서진은 담요로 얼굴을 가리기 무섭게 잠이 들었다.

피곤한 것도 있었고, 어떻게든 기욱에 대한 불안을 잊어야겠다는 생각도 서진이 빠르게 잠에 빠지는 데 한몫했다.

* * *

“하아, 드디어 도착이군.”

오늘처럼 차가 막혔던 적은 또 없었던 우민은 집 근처까지 오는 데 기를 다 쓴 뒤였다. 그도 그럴 게 삼십 분이면 올 거리를 한 시간을 넘게 왔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물며 말 상대라도 시킬까 하고 태웠던 서진도 담요로 얼굴을 덮자마자 색색 잠을 자고 있었다. 졸린 건 서진뿐만이 아닌데 말이다.

혹시라도 서진이 깰까 노래도 틀지 못했던 우민은 차를 주차한 뒤 서진의 얼굴을 가린 담요를 살짝 걷었다. 서진은 담요 밑에서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자고 있었다. 우민이 서진의 몸을 흔들자 서진이 흠짓,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집이에요?”

“그래, 도착했다 인마. 어떻게 세상모르고 자냐.”

“그게……. 요즘 눈만 감으면 자서……. 왠지 교수님이 쓰레기장에서도 잘 수 있다고 한 말을 이해할 것 같아요.”

“그걸 이제야 깨닫냐? 한심하긴. 내가 괜히 그런 말 한 게 아니라니까? 일어나. 올라가자. 집에 들어가서 자라. 나도 피곤하다.”

“하암, 네.”

서진이 졸린 눈을 비비며 차에서 내렸다. 서진의 덮었던 담요를 뒷좌석으로 내던지며 정리를 하던 우민은 조수석 발밑으로 떨어진 서진의 2G폰을 주운 뒤, 차 밖으로 나왔다.

“그만 좀 흘리고 다녀라.”

“네? 아, 감사해요.”

서진이 우민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받은 뒤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잠이 덜 깬 서진은 엘리베이터를 오르는 내내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았다. 간신히 오피스텔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곧장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간 서진은 신발을 벗은 뒤 현관에 들어온 불에 의지해 1층의 소파에 누웠다. 온몸이 찌뿌둥하고 나른했다.

“으어….”

며칠 만에 오는 집을 떠나서 내일 하루는 푹 잘 수 있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남들은 말턴 때 적당히 한다던데 서진은 오히려 거꾸로였다. 응급실은 적당히 하려야 할 수가 없는 곳이었다. 사실 처음 인턴 스케줄을 볼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차라리 힘든 거면 초창기에 힘든 게 훨씬 좋았다. 지금쯤 편하게 뒹굴고 있을 시헌을 생각하니 약간은 배가 아프기도 했다. 서진은 전원이 꺼진 기욱의 휴대폰을 켜 볼까 말까 고민하다가 이내 휴대폰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만약 진짜 기욱이 신경을 쓰고 있었다면 2G폰이 아닌 자신의 휴대폰으로 어떤 식으로든 연락이 왔을 테니까 말이다. 저번주 내내 집에 와서 잠만 자고 씻고 나간 탓에 서진은 침대에 올라가서 제대로 자 본 기억이 없었다. 덕분에 소파에는 침대에 있어야 할 이불이 굴러다녔고, 서진은 익숙하게 소파 밑에 있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서진은 우민의 차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불을 덮고,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다.

* * *

딩동, 딩동. 새벽에 요란한 벨 소리가 들렸다. 몇 번이나 소파 위에서 이불을 돌돌 말며 귀를 막던 서진은 정체불명의 벨 소리가 자신의 집 벨 소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으억…!”

좁은 소파 위를 뒹굴던 서진이 이불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어둠 속을 더듬던 서진은 불빛이 들어오는 휴대폰을 간신히 집었다. 전화가 오고 있었다. 눈이 부셨던 터라 누구한테 전화가 왔는지도 모른 채 전화를 받았다.

― 강서진.

그제야 서진은 발신자를 확인했다. 빌어먹을, 박기욱이었다. 차라리 못 들은 척, 못 본 척할 걸 하고 후회가 들었다. 어떻게 입을 열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릴까 하던 찰나 휴대폰 너머로 기욱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 듣고 있는 거 다 알아. 좋은 말 할 때 문 열어.

서진은 휴대폰 불빛에 의존해 더듬더듬 거실의 불을 켠 뒤 현관의 문을 열었다. 서진이 문을 조금 열기 무섭게 기욱이 확, 하고 바깥에서 문을 잡아당겼다. 훅, 하고 찬바람이 들어왔다. 기욱이 성큼성큼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왔고, 서진은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이불을 두르고 있던 탓에 서진은 얼마 가지 못해 제 이불에 걸려 넘어졌다.

“그, 그게…….”

“문자.”

“봐, 봤는데…… 깜박해…….”

서진의 몸이 떨려 왔다. 기욱이 화를 낼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새벽에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서진의 팔을 잡아 강제로 일으킨 기욱은 순식간에 서진의 뺨을 후려쳤다. 갑작스럽게 맞은 뺨에 서진의 몸이 기울어지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을 할 수도, 차마 기욱에게 변명할 여지조차 없었다.

“강서진, 씨발. 강서진! 너 뭐야.”

“…했어요. 잘못했어요….”

“도대체 뭐야? 어?”

그날의 기억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기욱은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매달리는 서진을 내려다보며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박시헌, 기욱은 아직도 시헌과 서진이 함께 있으면 화가 치밀었다. 짜증이 나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너 뭐냐고. 도대체 뭐가 문제야!!”

짜증이 나기는 기욱도 마찬가지였다.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요 근래 들어 기욱은 늘 서진의 생각뿐이었다. 강서진을 생각하지 않고서야 그런 곳에 몰래 집을 살 리도 없었고, 휴대폰을 만들어 줄 이유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서진은 늘 도망가고,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연구실에서 있었던 일을 제외하면 서진의 스케줄을 배려해 따로 불렀다. 해 줄 만큼 해 줬다고 생각한 기욱은 서진의 어디가 불만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착각하지 마. 강서진. 강서윤이랑 내가 이혼한다고 해서 내가 널 놓을 것 같아?”

기욱은 서진이 뭔가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서진이 원하지 않는 서윤은 기욱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강서진이 서윤을 원해야만 비로소 성립되는 관계였다.

“자, 잘못… 했어요.”

“하, 자기가 잘못한 건 알긴 아나 보지?”

맞는 건 싫었다. 폭력은 서진의 감정을 좀 무뎌지게 만들었다. 서진의 머리채를 붙잡아 고개를 들게 한 기욱이 입꼬리를 올렸다.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기욱은 서진을 원했다. 서진은 이유를 알고 싶어 했지만, 기욱에게 이유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원하기 때문에 가질 뿐이었다. 그리고 서진이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기욱의 소유욕도 배가되어 돌아왔다.

“너.”

“…….”

“다시는 내 말에 거부할 수 없도록 해 주지.”

“지금 무슨 말을…… 휴대폰…!”

기욱이 발밑에 있는 2G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휴대폰은 꺼져 있었지만, 꺼진 그것보다 일부러 껐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기욱은 화면이 들어온 휴대폰의 배터리가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 보란 듯이 휴대폰을 서진 쪽으로 돌렸다.

배터리가 없었다면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이건 변명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그건…….”

“니가.”

“…어흑…!”

“감히 나한테 거짓말을 해?”

서진의 뺨을 후려치던 기욱이 바닥으로 쓰러진 서진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기욱은 열이 받을 대로 받은 상황이었다.

“강서진 일어나.”

“…흐윽… 윽….”

“일어나라고!!”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일으켰다. 기욱은 서진의 몸을 계단 쪽으로 밀었다. 위층으로 올라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고 있었던 서진이 기욱에게 매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저, 정말 피곤해서…… 그러니까……!”

“일어나.”

“시, 싫어요! 부탁이니까 흐극… 허윽…!”

기욱이 서진의 뺨을 한 번 더 후려쳤다. 처음이 어렵다고 했던가? 그날 이후, 기욱은 서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데 거침이 없어졌다. 기욱은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는 서진을 싸늘하게 내려다봤다. 진작 이렇게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단 말인가.

“그러니까 왜 손을 쓰게 만들어.”

“흐극, 제발…… 때리지 마세요.! 제발….”

“어차피 할 거 위층이든 아래층이든 알 바는 아닌데.”

기욱이 바로 전에까지 서진이 자고 있던 소파를 흘끗댔다. 기욱의 의도를 눈치챈 서진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밑에는 기욱이 지키고 있었다. 한 걸음씩 발을 떼 서진이 간신히 위층으로 올라가기 무섭게 기욱이 서진의 몸을 침대 쪽으로 떠밀었다. 기욱은 신경질적으로 입고 있던 정장 마이를 벗어 던진 후 넥타이를 풀었다.

“손 내놔.”

“자, 잠깐 뭐 하려고…!! 시, 싫…… 아니. 하, 하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싫다. 기욱과 섹스하는 것 자체가 서진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그런데도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말을 했을 때의 기욱을 서진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한 손에 넥타이를 쥔 기욱은 서진이 입고 있던 옷을 강제로 벗겨 냈다.

“시, 싫어… 제발… 마, 말 들을 테니까요!”

“늦었어.”

기욱이 서진의 팔을 앞으로 잡아 누른 뒤 넥타이로 묶었다. 피가 통하지 않은 공포보다 손이 묶일 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푼 기욱이 빨갛게 부푼 서진의 뺨을 손등으로 툭툭 건드렸다. 힘을 강하게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욱이 뺨을 건드릴 때마다 서진의 고개가 힘없이 돌아갔다.

“했어요, 잘못했어요….”

“오라 그럴 때 왔어야지.”

머리를 쓰다듬은 손이 소름이 끼쳤다. 이렇게 당하고 싶진 않았다. 서진은 본능적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고, 기욱이 그런 서진을 잡아당겨 침대로 끌어안았다.

“도망치지 말라고 했잖아.”

“…겠어요. 모르겠다구요! 당신이 왜 이렇게… 흐윽, 저한테 집착하는지 모르게…….”

기욱에 의해 강제로 침대에 눕혀진 서진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기욱의 눈동자는 광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선 서진의 몸에 힘이 풀렸다. 기욱은 반항을 그만둔 서진의 뜨거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서진이 왜 이렇게 어리석은지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입술에서 목덜미, 쇄골.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입술과 함께 기욱의 손이 서진의 바지를 벗겨 안쪽으로 들어갔다. 단지 곁에 있으면 충분했다. 강서진의 기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기욱이 원하는 상대는 강서진이 아니면 안 됐다.

한참 동안 서진의 온몸을 유린하던 기욱이 서진의 허리를 들어 올려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갑작스럽게, 그렇다 할 만한 신호조차 주지 않고 들어온 기욱의 페니스에 서진의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하윽… 어윽, 윽…!”

“강서진! 가만히 안 있어?”

기욱은 넥타이로 묶인 서진의 팔을 잡고 허리를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서진을 안고 싶은 기분이었다. 막 일어나서 정신이 없는 서진은 계속되는 움직임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건너편에 있는 우민에게 소란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우민이 같은 오피스텔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으읍… 으읏… 흐윽….”

“강서진, 읏…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굴어 봐!”

울컥, 사정한 기욱은 서진의 안에서 페니스를 빼내는가 싶더니 자세를 바꿔 다시 밀어 넣었다. 한 번으로는 속이 풀리지 않았다. 서진과 섹스를 하는 것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서진은 모른다. 병원에서, 얼마나 참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었다.

그렇게 작았던 아이가 다 커서 꼴에 가운이랍시고 입고 나타나 피곤함에 절은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쉬며 대답을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자리에서 범하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가장 먼저 생각이 나는 건 서진의 얼굴이었다.

이렇게 원하고, 또 미친 듯이 원하는데. 강서진은 한 번도 제 손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기욱은 서진이 해 달라고 하면 뭐든 할 자신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쌓인 시간이 너무 길었다.

“흐윽… 윽… 흐흐흑….”

“강서진, 일어나. 기절하긴 아직 일러.”

“허윽…!”

기욱은 서진을 위로 올린 뒤 페니스를 밀어 넣은 후 서진의 허리를 잡아 흔들었다. 침대의 스프링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며 서진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기욱이 움직일 때마다 서진의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한참 동안 서진의 허리를 잡고 흔든 기욱이 서진의 몸을 앞쪽으로 돌렸다.

“으흑, 어흑…!! 자, 잘못… 흐윽… 했어요…읍….”

서진의 묶인 팔을 잡아당긴 기욱이 입술을 덮었다. 그러고 보니 요 최근 섹스를 하며 키스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기욱은 서진의 입술을 탐하며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페니스가 박힌 채로 툭툭 건드릴 때마다 움찔거리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꽤 일품이었다.

기욱이 느끼는 서진은 어렸을 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서진을 원했다. 기욱은 서진의 허리를 깊숙이 누르며 귓가에 속삭였다.

“한 번만 더 반항해 봐.”

거절할 수 없게 만들어 주겠다는 기욱의 말은 진심이었다.

* * *

서진이 정신을 차린 것은 아래층에 있던 휴대폰의 알람 소리 덕분이었다. 눈을 뜨자 온몸 안 아픈 구석이 없었다. 팔에는 넥타이가 묶인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본능적으로 만진 목덜미와 허벅지 안쪽에는 노골적으로 자국이 나 있었다.

오늘은 그렇다 쳐도 당장 내일모레 출근인데 흔적을 남기면 어쩌란 말인가. 갈수록 심해지는 기욱의 행동에 서진은 괴롭기만 했다.

“하윽….”

목이 아팠다. 기욱은 거의 날밤 꼬박 서진을 안았다. 몇 번인가 실신하고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렸을 무렵 창가에서 아침 햇살이 올라오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으니 틀림없었다. 언제까지 시끄럽게 울려 대는 알람을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서진은 비틀거리며 한 발 한 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걸을 때마다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느낌에 몇 번이나 바닥에 주저앉았는지 모른다. 힘겹게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다행히 기욱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대로 출근을 한 모양이었다. 서진은 몸을 숙여 휴대폰의 알람을 껐다. 벌써 오전 10시가 좀 넘어 있었다.

위층의 정리는 둘째 치고, 아래층의 정리가 끝나 갈 무렵 딩동 벨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서진이 다급하게 인터폰을 확인했다. 인터폰 너머로 우민의 얼굴이 보였다. 서진이 인터폰 너머 우민에게 말을 걸었다.

「무, 무슨 일이예요?」

「문 열어 문.」

아직 정리가 덜 된 위층이 신경 쓰였지만, 서진은 문을 열기 위해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팔목에 노골적으로 남은 자국에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돌아간 서진은 다급하게 소파에 올려 뒀던 패딩을 입어 손목을 가린 뒤 문을 열었다.

“이게 씨, 문 여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하하, 그럴 수 있죠.”

“지금 일어났냐?”

“그게…….”

“짜식, 딱 보니 꼬락서니가 엉망인 게 지금 일어났네. 잠바는 왜 입고 있는 거야?”

“방 좀 치우려고…….”

“됐고, 밥이나 먹으러 나가자.”

“전 괜찮은데.”

“가자고. 이게 교수님이 가자는데 어디에다가 말대답이야? 얼른 나와.”

우민이 서진을 재촉했다. 잠바까지 챙겨 입고 있었던 서진은 도무지 적당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고, 결국 우민에게 이끌려 복도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민은 서진과 비슷하게 트레이닝복에 편한 옷차림이었다.

“근데 어디서 밥을 먹게요?”

“요 앞에. 내가 오프 때마다 자주 가는 감자탕집이 있어. 너한테 소개해 주려고 했는데 계속 깜박했거든. 소주랑 먹으면 진짜 기가 막히거든.”

“아침부터요?”

“한 병 정도는 괜찮아! 짜식! 엄살은!”

우민이 허공으로 손을 들자 서진이 깜짝 놀랐다. 그냥 가볍게 등을 때리려 했던 것뿐인데 유독 민감하게 움찔거리며 몸을 웅크리는 서진에 우민은 서진의 등을 치지 못한 채 손을 내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둘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서진은 혹시 우민이 눈치채면 어쩌나 은근슬쩍 입고 있는 패딩의 소매를 끝까지 내렸다.

“짜식, 왜 이렇게 쫄고 그래?”

“가, 갑자기 때리려 하면 누구라도 쫀다구요!”

“알았다. 알았어. 때리려 했던 내가 잘못했다. 폭력은 안 되지. 그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우민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양손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그, 그쵸. 폭력은…….”

서진은 눈을 아래로 깔며 말을 흐렸다. 기욱도 우민의 절반만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랬다면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까 하고.

우민이 말 한 감자탕집은 바로 건너편 블록의 안쪽 골목에 있었다. 서진도 지나가면서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들어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24시간 감자탕집이었는데, 시간이 시간이었던 터라 가게는 상대적으로 한가했다.

“감자탕 먹어. 선택하지 말고.”

“아, 네.”

“이모! 여기 감자탕 두 개랑 소주 두 병 줘요!”

“아깐 한 병이라면서요!”

“한 병 맞지. 너랑 나랑 각자 한 병. 엄살 부리지 말라고. 까짓거 집에 가서 더 자도 되잖아.”

“그거야 그렇긴 한데…….”

서진이 마음대로 하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침부터 술이라니 참 가지가지 하는구나 싶었다. 밤새 울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서진은 술보다는 감자탕을 먹는 데 더 정신이 없었다. 순식간에 밥을 말아 정신없이 먹는 서진의 모습을 본 우민은 혼자 술을 따라 마셨다.

“야야, 천천히 먹어라. 누가 보면 며칠 굶은 줄 알겠다.”

“하하, 네.”

서진이 숨을 고르며 우민이 따라 주는 소주를 마셨다. 서진보다 조금 빨리 술을 마신 우민이 서진의 몰골을 위아래로 훑었다. 집에 갈 때도 꾀죄죄한 꼴이긴 했지만, 밤새 자다 일어난 사람치고는 어딘가 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었다.

“너 울었냐?”

“그게……. 지, 집안일이에요.”

“박기욱이랑 강 간호사? 무슨 일인데?”

“그러니까……. 그, 그런 게 있어요.”

서진은 이래서 우민과 밥을 먹으러 오고 싶지 않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서진의 목에 있는 흔적과 물을 마실 때 흘러내린 소매에 남아 있는 자국을 본 우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서진의 몰골이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은 역시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는 장면이었다. 우민은 서진 쪽에 놓인 소주병을 제 쪽으로 이끌어 소주잔 대신 물 잔에 남아 있는 소주를 확 부었다.

“넌 마시지 마라.”

“안 그러셔도 되는데…….”

우민은 다 마신 컵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물을 넘겼다.

“내가 말야, 연애라고는 별 짓거리를 다 해 봐서, 어지간하면 남의 연애사에 관심 끄자는 주의거든?”

“그, 그래서요?”

“근데 너 그거 좀 위험하다.”

“무슨 말 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모르긴 뭘 몰라. 너 그런 쪽으로 취미 있어? 있으면 내가 아무 말 안 할게.”

우민의 단호한 말에 서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취미라고 말해 버릴까? 그렇게 생각하고 말이 목 끝까지 올라오던 순간 우민이 서진의 뺨을 손가락질했다.

“그런 취미 있는 놈도 뺨은 안 때려.”

“이건 그러니까……. 교수님이랑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넌 맨날 사람이 말하면 상관없다는 식으로만 말하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진짜 관심이 없으면 그런 소리도 안 해 인마. 한두 살 먹은 것도 아니면서 왜 몰라?”

우민의 핀잔에 서진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우민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건 좋으나 그 관심이 어디까지 관심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게 저……. 죄송해요.”

“네가 왜 미안해해? 누구야?”

“마, 말할 수 없어요. 그냥, 제가 알아서 할게요.”

서진이 기욱과의 관계를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기욱과의 관계를 말하는 순간, 어린 시절 잘못된 집착으로 인해 이 지경까지 만들었던 서윤의 집착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하는 순간 서진은 자신이 과거 서윤을 위해 했던 일들이 전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됐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그것이 전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알아서 한다는 소리 하지 말고. 늦기 전에 말해.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도와줄 테니까.”

“하하, 네.”

서진은 도와주겠다는 우민의 말만으로도 고마웠다. 괜히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우민은 금방이라도 울려 하는 서진을 달랬다.

“아침부터 울지 말고, 밥 먹어 밥.”

정말이지 왜 이렇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민의 재촉에 남아 있는 감자탕을 먹었지만, 솔직히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 * *

이른 오후, J대 병원 외상센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중간에 선 정혁은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가 정혁의 몸을 툭, 하고 건드리자 그제야 정혁이 정신을 차렸다.

“…교수님! 임 교수님! 선택하셔야 해요!”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두 명의 환자에 정혁은 이마를 내짚었다. 순서가 잡히지 않았다. 10초가 한 시간만 같았다. 삐― 머릿속을 울리는 기계음에 정혁이 숨을 골랐다.

“유 교수, 이 환자 맡아.”

“저 장담 못 해요.”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잖아!!”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상태가 비슷한 두 명의 중환자, 정혁은 어쩔 수 없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환자 쪽을 선택해 수술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쪽은 맡긴다!!”

“알았어요.”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의사에게 뒤를 맡긴 정혁이 다른 환자에 집중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는 날이었다.

* * *

저녁, 밥 생각이 없는 기욱은 담배 대신 어디서 났는지 모를 막대사탕을 입에 문 채 복도 한쪽에 기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기욱을 찾고 있던 규건이 기욱에게 다가왔다.

“박 교수님, 드릴 말씀이…….”

“잠깐만. 나 중요해.”

기욱이 규건에게 양해를 구한 뒤 통화를 계속했다. 어지간하면 용건부터 묻는 기욱이 통화를 우선시하는 경우는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기욱의 통화 상대를 짐작한 규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욱의 앞에 가만히 섰다.

― 그래서 아버님에게 연락드린 거 아닙니까.

― 다 끝난 일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 제 말은……. 제가 얼마나 신경 쓴 케이스인지 알면서 그러시는 겁니까? 갑자기 그렇게 팀을 바꾸는 게 어디 있습니까?

― 위에서 결정한 거라고 몇 번을 말해?

― 납득할 수 없습니다. 하다못해 이쪽 의견도 들어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계속 그런 식으로 구시면 저도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 내가 그 버릇 고치라고 몇 번을……. 하아, 됐다. 그래, 남 병원장이랑 독대 정도면 충분하냐? 남 병원장보고 시간 내라고 할 테니까 알아서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알아서 해. 알겠어?

― 감사합니다.

결국, 시간을 내주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기욱이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대략적인 통화 내용을 들은 규건이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이사장님까지 가신 거군요.”

“수술 준비만 몇 개월이야. 감히 내 걸 가로채?”

“하긴, 그거 생각하면 좀 억울하긴 하죠.”

“그보다 무슨 일인데?”

“아아, ER에서 환자 하나 봐 달라고 했는데. 저 혼자서는 안 될 것 같아서요. 좀 도와주세요.”

“그래. 가자.”

어떤 환자인지는 가면서 들으면 될 일이었다. 기욱은 규건의 뒤를 따라 응급실로 내려갔다.

* * *

J 대학교 병원장실, 이미 기욱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남 병원장은 기욱의 등장이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아버님과 통화 좀 한 모양인데. 그렇게 서운해하지 말게.”

남 병원장이 마주 앉은 기욱을 달래며 기욱의 앞에 놓인 차를 마시라는 듯 손짓했다. 기욱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천천히 내려놓았다. 사건은 일주일 전쯤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욱의 팀이 담당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희귀 케이스의 수술이 갑자기 예고도 없이 다른 팀으로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제멋대로 환자에게 허락까지 받아 주치의를 변경까지 했다고 하니 뒤통수를 맞아도 그렇게 제대로 맞은 적은 또 드물었다.

“자네도 고 교수 실력 잘 알잖아. 그 밑에서 일했었고. 그러니까 후배로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 주게.”

남 병원장의 설득에 기욱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기욱을 대신해 수술을 담당하기로 한 팀이 기욱이 레지던트 시절 밑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신경외과 내 최고참 교수였다. 실력을 떠나 기욱에게 있어서는 스승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거기까지는 그냥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기욱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일이 일어난 원인이었다. 특별히 수술 진행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최근 들어 병원에서 사고를 친 적도 없는 자신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었다.

“자네 말야, 지난번에 ER에서 환자 하나 봐 준 적 있다면서.”

“보고 있는 환자가 너무 많아서 말입니다. 누굴 말씀하시는 것인지 정확히 하시죠.”

기욱의 머릿속으로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환자가 빠르게 지나갔지만, 병원장이 신경을 쓸 만한 그렇다 할 환자는 떠오르지 않았다.

“자네도 기억할 걸세. 응급실에서 술 먹고 다쳤던 여자인데. 듣자 하니 외과 과장이 내려오기 전에 자네가 손댔다고 하더군.”

“아, 그……. 별로 좋은 환자는 아니었지만, 대충은 기억합니다.”

외과 과장이 왔다 갔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서진을 위해서 도와준 것일 뿐 여자를 위한 마음 따위는 없었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고, 오히려 멀리서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던 중 시끄럽게 구는 여자의 목소리가 듣기 싫을 지경이었다. 실제로 기욱은 당시 여자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하고 짜증을 낸 그것밖에 기억이 없었다.

나이도 어려 보이던데, 도대체 뭐 하는 여자길래 병원장의 귀까지 들어가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기욱은 여자가 별로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철부지 공주님 스타일에 가까웠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하하, 자네 보기보다 성격이 급하군. 까놓고 말하겠네. 이번에 멋대로 팀을 바꾼 건 자네 팀에 따로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런 거야.”

“말 바로 하시죠. 우리 팀이 아니라 저한테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지 않습니까? 누군데요?”

“거절하지 않는 건가?”

“들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기욱의 대답에 남 병원장이 조심스럽게 병원 내 환자에 관해 이야기했다. 요점만 말하자면 그 사람의 주치의를 담당해 달라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야기가 끝나 갈 무렵 기욱은 한 가지 의문을 지을 수가 없었다.

“병원장님이 말씀하시는 그분이, 제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습니까? 외과 과장님이 주치의로 있는 사람이라면 그분밖에 떠오르지 않는데요.”

현직 대통령. 결국, 돌려 말했지만, 대통령의 주치의를 해 달라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 기욱은 대통령에게 신경 외과적 질환이 있다는 소문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현 VIP의 주치의는 정 교수가 맞아. 부탁하고 싶은 건 VIP의 지인을 말하는 걸세.”

“국회의원? 정치인입니까?”

“그런 건 아닐세. 평범한 일반인이긴 하다만. 그 부분은 가 보면 알 거라고 말해 두고 싶군.”

정치에 딱히 관심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굴러 들어온 연줄을 찰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기욱은 일반인이라는 말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저 인간이 말하는 일반인이라는 기준을 도통 짐작할 수가 없는 것도 한몫했다.

“거절하겠습니다. 당사자도 아니고, 괜히 위험한 다리 건너고 싶진 않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그 제안을 수락한다 해도 저한테 득이 되는 건 없을 것 같군요. 고 교수님이 수술을 포기하거나 팀이 한 번 더 바뀐다든지 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은 말입니다.”

“허허, 이 사람 보게. 그런 짓을 한 번 하지 어떻게 두 번이나 하나. 나도 맨입으로 부탁하는 거 아닐세. 이번에 새로 신설하는 뇌혈관센터.”

노골적인 남 병원장의 말에 기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기욱은 다 식어 가는 녹차를 마셨다.

“센터장은 고 교수님인 거로 이야기 끝났다고 들었습니다만.”

“난 센터장이라고 이야기한 적은 없네만?”

“제길. 어쨌든 그 건에 대해서는 할 말 없습니다.”

혈관센터가 지어질 당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담당이 고 교수로 확정이 된 이후부터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무리 기욱이라 해도 그 정도 상도덕은 있었다. 허나 마음 한구석으로 탐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에 가까웠다.

“고 교수가 생각보다 일찍 정년퇴임을 한다더군. 아마 완공되기 전에 그만둘 걸세. 그래서 센터장 자리도 공석이야.”

“전 그런 전달받은 적 없습니다만.”

“아직, 이야기한 지 며칠 되지 않았네. 책임지고 자리 잡을 때까지는 해 주겠다는데 그 뒤에 후임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

노골적인 남 병원장의 말에 기욱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고 교수가 은사인 것도 있지만, 동시에 센터장을 맡게 내버려 둔 것은 그가 얼마 가지 못해 정년퇴임을 할 예정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곧 떠날 사람에 비교해 기욱은 아직 시간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부원장이 후임으로 한 교수를 이야기하더군. 그 친구도 일하는 것도 깔끔하고, 사고를 친 전적도 거의 없으니까.”

“한우민 선배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신경외과 교수 중에 한 교수가 우민밖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부원장이 후임으로 추천할 만한 한 교수는 우민밖에 없었다. 기욱은 고찬일 교수님이 센터장을 맡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어도 그 후임으로 자신이 아닌 우민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넨 예전부터 한 교수랑 사이가 안 좋았지.”

“성격이 안 맞은 것뿐입니다.”

성격만이라면 다행이었다. 기욱은 우민의 밑에서 레지던트로 일할 때부터 우민과 자주 충돌이 있었다. 나이 먹고 싸울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서로서로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쯤은 불 보듯 뻔했다.

“고 교수님은 후임으로 누굴 추천하셨습니까?”

“아직.”

“아직?”

“아직 아무도 아닐세. 그 양반, 보통내기가 아닌 건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껄껄 웃으면서 넘어가는 게 일품이더군.”

고찬일 교수가 퇴직하면 차기 센터장은 기욱이나 우민 둘 중에 한 명이 될 것은 뻔했다. 거기서 누군가의 편을 들어 주면 힘이 쏠리게 되는 건 당연했다.

“솔직히 좀 기분이 나쁘긴 하군요. 그래서 그 조건으로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일반인의 주치의를 담당해 달라고.”

“해 주겠다고만 한다면 내 자네를 후임으로 밀어 보도록 하지.”

“생각할 시간 좀 주십시오.”

“오래는 안 되네. 삼 일 뒤에 뵙도록 하지.”

남 병원장의 대답에 기욱은 고개를 숙이며 병원장실을 나왔다. 밖으로 나온 기욱은 감지 못한 머리를 긁적이며 혀를 찼다. 센터장은 하고 싶은데, 귀찮은 일에 얽힐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기욱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기욱은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생각 없이 두 대 정도 피웠을 무렵 옥상 문이 열리며 가운을 걸친 하연이 밖으로 나왔다. 하연은 기욱의 옆에 서며 손을 내밀었다.

“뭔데.”

“담배 내놔.”

“가지고 다녀라. 좀.”

“이 나이 먹고 미쳤냐? 애들한테 잘못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피우질 말든가.”

“담배 한 대 하자고 부른 건 너잖아.”

하연이 기욱이 꺼내 든 담배를 빼앗다시피 해 가져온 뒤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는 안 가지고 다니면서 라이터는 또 있는 모양이었다. 기욱은 담배를 피우는 하연에게 병원장과 만난 이야기를 요약해서 설명했다.

물론, 어딘가 찝찝할 것 같은 VIP에 관한 이야기는 빼놓았다. 그걸 굳이 하연에게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병신.”

“아니, 동생한테 병신이 뭐냐고.”

“한마디로 줄 서라는 거잖아. 너 부원장이랑 병원장이랑 신경 싸움 하고 있는 것도 몰랐냐? 좀 됐어.”

“누나는?”

“나 뭐. 아빠 정정하신데 뭐 하러? 내가 그 인간들한테 줄 서는 게 아니라 그 인간들이 나한테 줄을 서는 게 맞는 거야. 참고로 너 내 자리 빼앗을 생각이면 가만 안 둔다.”

하연이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로 기욱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손가락질했다.

“장남이라 해서 적당히 하거나 봐주는 거 없어.”

“언젠 뭐 적당히 했냐. 어쨌든 난 네가 어느 쪽에 붙든 상관없어. 이긴 놈이 내 편이지.”

“대단하다 박하연.”

“아 참, 너 요즘 올케랑은 잘되냐?”

“서윤이?”

뜬금없이 나온 서윤에 기욱이 몸을 돌렸다. 하연은 담배를 끈 뒤 구두 끝으로 담뱃불을 지졌다.

“서윤이한테 잘해 줘라.”

“그걸 왜 니가 신경 써?”

“좋은 말 할 때 잘하라고. 난 경고했다.”

하연이 등을 돌리며 손을 흔들고 옥상을 내려갔다. 서윤과 하연이 잘 맞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것과는 묘하게 다른 기분이 들었다. 찝찝한 기분에 담배를 한 대 더 피운 기욱은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하.”

문득, 기욱은 엄청난 생각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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