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6 너랑 나, 이러는 거 알면 둘 다 끝이야
기욱은 한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려 했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책상에 엎드려 삼십 분 정도 자는 둥 마는 둥 한 기욱은 입술을 깨물며 연구실을 나와 신경외과 의국으로 향했다. 큰 중환자는 없었지만, 서진은 밤새 병동을 뛰어다니거나 응급실 환자의 상태를 수시로 살피러 내려가느라 바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아침 출근조가 오기까지 한 시간이 좀 넘게 남아 있었다. 창밖으로는 드문드문 해가 올라왔다. 기욱은 비교적 한가한 의국을 둘러보더니 늦은 아침까지 열심히 휴대폰을 만지느라 깨어 있는 레지던트 한 명에게 말을 걸었다.
“강서진은?”
“아, 최 교수님이 좀 쉬라고 해서 아까 마실 거 뽑으러 간다고 내려갔어요. 로비에 없으면 당직실에 있을걸요. 이야, 오늘 새벽에 진짜 힘들었으니까요.”
바로 옆에 있는 레지던트는 당직실까지 가서 자는 것도 힘들어 가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고 있지만, 한 시간만 있으면 오프인 그는 곧 있을 퇴근 시간이 즐거운 듯 눈이 살아 있었다.
“하아, 알았어. 고생해.”
기욱은 곧장 자판기가 있는 곳으로 갔다. 말이 그렇지 병원 내 자판기가 한두 곳이 아니라 서진이 정확히 어디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지 알 방법은 없었다. 무엇보다 기욱이 서진을 찾을 동안 서진이 계속 커피를 마시고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운이 좋은 것은 기욱이 두 번 만에 서진을 찾아냈고, 서진은 커피를 마시며 한가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기욱이 서진을 찾은 곳은 지하에 커피숍과 의료진 라커룸에 가는 길목에 있는 노란색 자판기였다. 서진을 발견한 기욱이 성큼성큼 서진에게 다가왔다.
“뭐예요, 무슨 일인데요?”
서진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기욱에 깜짝 놀랐다. 기욱은 서진의 손에 있는 캔커피를 빼앗으며 서진을 벽 쪽으로 몰았다.
“누구야.”
“뭐, 뭐가요?”
“너 인계 누구한테 받았어.”
기욱이 서진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서진의 숨이 점점 빨라졌다. 대체 기욱이 어떻게 알고 저런 질문을 하는 거지? 시헌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서진은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서진은 최대한 기욱의 눈을 보며 말했다.
“시헌이요.”
“강서진.”
“왜… 잠깐 뭐 하는……!”
기욱의 손에 있던 캔커피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시멘트 바닥에 떨어졌다. 정확하게는 기욱이 일부러 떨어트렸다는 쪽이 맞았다. 캔커피 안에 남아 있던 커피가 바닥을 찔끔찔끔 적셨다. 기욱은 고개를 숙이려는 서진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서진과 기욱의 시선이 맞았다. 기욱은 흔들림 없는 서진의 눈동자를 보며 어이가 없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하, 너…….”
“…….”
“거짓말. 많이 늘었다?”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이 상황에서 우민이 자신에게 인계해 줬다는 사실을 기욱에게 말한다면 우민과의 관계는 이걸로 끝이나 다름이 없었다. 보통 교수씩이나 되는 인물이 직접 해 줄 정도라면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변명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턱을 누르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서진은 있는 힘껏 양손으로 기욱을 밀어냈다.
“시헌이라구요. 이제 시헌이랑 그런 사이 아녜요. 대체 언제까지 사람을 의심해야 만족할…….”
“박시헌 아닌 거 아니까 내가 온 거 아니야!!”
위압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기욱의 태도에 서진의 몸이 떨렸다. 슬슬 누군가 지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서진은 기욱과의 이 상황 자체를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조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어딘가 보이지 않는 창고로 가 대화를 하면 안 되는 걸까? 기욱이 서진의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 악, 소리가 나올 것처럼 아팠지만, 서진은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도대체 시헌이가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안 걸까? 우민에 대해서도 아는 걸까? 기욱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알 길이 없는 서진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 그게.”
“…….”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누구한테 받든.”
서진은 금방이라도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새겨져 온 박기욱에 대한 공포는 이제 서윤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 서진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용기를 내 꺼낸 말을 들은 기욱이 서진의 팔을 내려놓았다. 기욱에게 붙잡힌 손목을 만지작거림과 동시에 기욱이 서진의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이미 벽 쪽으로 잔뜩 밀린 서진은 기욱이 한 걸음 더 다가옴으로써 사실상 갈 곳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기욱은 감지 못한 앞머리를 살짝 쓸어 넘기며 서진을 노려봤다. 다가오는 기욱의 손이 서진의 뺨을 스쳤다.
“강서진.”
“…….”
“어떤 년이야.”
“뭐라고…….”
“아. 년이 아니라 놈이야? 나 몰래 박시헌이랑 몇 년을 뒹굴고도 만족 못 하니까 이제 병원 내에서 바람을 피우시겠다?”
“다, 당신 진짜 미쳤……!!”
서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다급하게 복도 주변을 둘러봤다. 기욱은 그것조차 자신에게서 한눈을 파는 것 같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눈치였다. 바람이라니. 진짜 바람을 피우는 사람은 서진이 아니지 않은가. 서진은 단 한 번도 박기욱과 모종의 관계 그 이상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연인도,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을 하지 않는 섹스 파트너 또한 아니었다. 시헌과의 마지막이 최악이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시헌은 옛 연인이라는 수식어라도 붙었다. 서진이 느끼기에 헤어진 시헌보다 기욱이 더 최악이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인계 누구한테 받았냐고!”
기욱은 전혀 주변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몇몇 사람들이 기욱과 서진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지나갔다. 복도 건너편에서 꽤 나이가 든 것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무슨 일 있나?”
서진과 기욱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서진보다는, 기욱에게 조금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기욱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서진과 거리를 벌린 뒤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드문드문 흰머리가 나 있는 중년의 남성은 정년퇴직을 앞둔 기욱과 같은 신경외과 고찬일 교수였다. 사실상 신경외과 최연장 교수인 고 교수는 기욱과 우민이 인턴이었던 시절부터 병원의 교수로 있던 사람으로 스승이나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다. 서진도 몇 번인가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서진에게 고 교수는 말을 섞어 본 적 없는 교수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던데…….”
“별일 아닙니다. 그냥 좀, 문제가 생겼을 뿐입니다.”
“서진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보지?”
고 교수의 입에서 나온 서진의 이름에 기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실 이는 당사자인 서진도 마찬가지였다. 서진은 고 교수와 얼굴을 몇 번 보고 지나갈 때 한두 번 인사를 한 것이 전부지, 말을 나눠 본 적이라고는 인사말 외에는 없는 사이였다. 자신의 얼굴을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판국에 이름까지 알고 있다니 영문을 알지 못하는 건 서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기욱이 먼저 물었다.
“교수님, 서진이랑 무슨 관계십니까?”
“허허, 이놈 보게. 파릇파릇한 인턴이 다 늙어 가는 교수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래? 우리 과에서 강서진이가 강 선생 남동생인 거 모르는 사람도 있었어? 자네가 그렇게 챙긴다고 소문이 자자해서 몇 번 말 붙인 게 다야. 새벽에 인계 얘길 하길래 내가 해 주겠다고 했는데. 듣자 하니 사고를 좀 쳤다더군. 하하, 근데 인턴이란 게 다 그런 거지 않나.”
“…….”
고 교수의 말을 따라가지 못한 서진과 기욱이 입을 꾹 다물었다. 틀어진 퍼즐이 제자리를 찾은 건 분명했다. 물론, 강제로 구겨 넣어 맞춘 그림 같은 찝찝함은 지울 수 없지만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정년퇴직을 앞둔 고 교수는 이전에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할 때가 종종 있었고. 기욱은 서진의 인계도 그 행동의 연장선이라고 믿고 싶었다. 기욱이 서진을 흘끗대며 물었다.
“너, 인계받은 사람이고 교수님이야?”
여기서 아니라고 말해 봤자 도와준 사람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 다였다. 고 교수가 도대체 어떻게 말을 맞춰 주는 건지는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그런데요.”
“하,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해야 했을 거 아냐.”
“저도, 교수님한테 인계받았다고 소문내고 다니고 싶진 않았다구요.”
반쯤 포기한 기욱을 본 서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우민도 교수이니 마지막 말은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서진의 중얼거림을 들은 기욱은 기가 찼다. 덕분에 이쪽은 화가 날 대로 났는데 말이다. 고 교수의 밑에서 레지던트부터 시작한 기욱은 서진보다 훨씬 고 교수를 오래 봐 왔다. 기욱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 교수와 서진이 그렇고 그런 관계일 리는 없다고 확신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 알았어. 나중에 얘기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기욱도 하던 일을 완전히 끝내고 나온 것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했다. 기욱이 완전히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남겨진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이 남았다. 서진은 기욱의 인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고 교수에게 다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뭔진 모르겠지만 고 교수가 자신을 도와줬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했다.
“그…, 감사합니다.”
“뭘, 그 정도로. 우리 박 교수가 말야, 레지던트 때부터 한 교수랑은 아주 원수였거든.”
고 교수가 낮게 웃으며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서진은 고 교수를 따라 지하를 올라왔다. 서진은 우민과 기욱이 같은 교수라는 것은 알면서도 정작 두 사람의 사이가 어떤지는 알지 못했다. 우민이 기욱을 싫어하고, 서로 성격이 맞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마 자네가 한 교수랑 어울리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은데. 맞나?”
“아마도요. 어쨌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 오늘 일은 다른 선생님들한테는 말씀하지 않아 주셨으면…….”
“무슨 일 말인가?”
신경외과 병동 근처에 다 와 가는 고 교수가 서진을 보며 웃었다. 고 교수는 서진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럼 난 일이 있어서, 이만.”
고 교수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볼일을 보러 향했고, 서진은 멀어지는 고 교수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뭔가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덕분에 일이 커지지 않은 서진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 * *
“서진아! 너 퇴근이라면서?”
“아. 누나! 이제 막 내려가서 옷 갈아입으려고. 얼굴 못 보고 갈 줄 알았는데.”
수술실에 들어간 서윤이 언제 나올지 알지 못하는 터라 서진은 서윤의 얼굴을 보고 가는 것을 반포기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예상치 못한 서윤의 등장이 서진은 반갑기만 했다. 가운은 없고, 대신 수술복 차림의 서윤은 서진과 함께 라커룸으로 내려갔다. 남자 라커룸 앞에 선 서진은 J대 마크가 그대로 박혀 있는 가운을 만지작거렸다.
“왜 안 들어가? 옷 갈아입고 와.”
“아니. 그냥 누나랑 이렇게 있는 게 꿈 같아서.”
깨 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서진은 시헌을 생각나게 하는 그 말을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우리 서진이 많이 컸네. 누나 뒤 졸졸 쫓아다니던 게 벌써 몇 년 전이야!”
그런 서진의 생각을 알기는 알까? 서윤이 서진의 볼을 꼬집으며 장난을 쳤다.
“아, 진짜. 쪽팔리니까 그러지 좀 마.”
“얘는, 우리 사이에 쪽팔리고 말고가 어딨어? 얼른 옷 갈아입고 와.”
“알았다고.”
서진은 서윤의 등에 떠밀려 라커룸으로 들어가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혹시 옷을 갈아입는 중에 서윤이 올라가 버리면 어쩌지 중간중간 라커룸 너머를 흘끗거렸다. 다행히 서윤은 벽에 기대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서진이 밖으로 나오자 서윤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벽에서 몸을 뗐다.
“맞다. 서진아, 오빠도 곧 있으면 집에 간다는데 둘이 같이 가면 되겠다.”
“아니, 난 그냥 지하철 타고 갈게.”
“사람 많잖아. 오피스텔에서 내려 달라고 그러고 편하게 가.”
“차 막히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
“너 집에 못 들어간 지 며칠 됐다면서? 어제도 날 꼬박 새고. 누나가 그거 다 모를 줄 알아?”
“지하철에서 한숨 자면 된다니까…….”
“기다려 봐.”
도무지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류하는 서진에도 불구하고 서윤은 곧장 기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수화음이 이어지고 기욱이 서윤의 전화를 받았다.
“어, 오빠 난데. 지하. 아냐, 난 잠깐 내려온 거라 다시 올라가야 돼. 서진이랑 있어. 어. 알았어.”
전화를 끊은 서윤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오빠가 올라오래. 연구실 어디 있는지 알지?”
로비로 올라온 서윤이 반대편 엘리베이터를 손가락질했다. 기왕이면 기욱 몰래 퇴근하고 싶었는데, 서윤이 전화까지 해 버렸으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알긴 아는데……. 하아.”
“그럼, 서진아 누나가 연락할게.”
“잠깐만 누, 누나!”
서진은 멀어지는 서윤에게 뛰어갔다. 서윤이 몸을 돌리며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일 집에 와? 바, 밥이라도 먹자.”
“아. 누나 당직 끝나고 내일 어디 놀러 가기로 해서…….”
“둘이서?”
“오빠 말고. 형님이랑.”
“누구…… 아. 박 교수님? 그…… NP에?”
기욱의 누나인 박하연을 말하는 것이었다. 서진도 PK를 돌면서 보긴 했는데, 여자라 그런가? 박기욱이랑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대하기 껄끄러웠다.
“응. 전부터 같이 가기로 약속해서. 미안해. 밥은 다음에 먹자.”
“아냐. 놀러 가는 건데. 재밌게 놀다 와.”
“알았어. 서진이도 오빠한테 꼭 올라가고, 조심해서 들어가.”
“하하, 응.”
기욱을 보러 가라는 말만 빼면 딱 좋은 인사말일 텐데 말이다. 서진은 애써 씁쓸해지는 표정을 숨기며 멀어지는 서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홀로 로비에 남겨진 서진은 기욱의 연구실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기욱의 번호였다.
서진은 진동이 오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릴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참 만에 마지못해 전화를 받으려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기욱은 서진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아….”
막 병원 밖을 나온 서진은 라커룸 안쪽에 지갑을 두고 온 사실을 기억해 냈다. 빨리 병원을 뜨고 싶은데 오늘따라 운이 도와주질 않는 모양이었다. 라커룸 안쪽에 그대로 있는 지갑을 꺼내 주머니에 구겨 넣은 서진이 다급하게 남자 탈의실을 나왔다.
“강서진.”
“아, 놀래라.”
갑작스럽게 서진의 앞에 나타난 기욱에 서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란 것치고 서진의 말투나 표정은 꽤 담담했다. 서진은 오늘의 운은 자신이 아닌 기욱에게 따르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서진에게 있어서는 재수가 없는 것이고, 기욱에게는 운이 좋은 것이었다. 기욱은 서진의 손이 들어가 있는 겉옷 주머니를 손가락질했다. 정확하게는 서진이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을 말하는 것이었다.
“서윤이가 올라오라고 했잖아.”
서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막 올라가려고 했다고 거짓말을 해도 됐지만, 왜인지 그날 인계 사건 이후 기욱에게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 꺼려졌다.
“전화 똑바로 안 받지?”
“받으려고 했어요. 먼저 끊었잖아요.”
“그걸……. 따라와.”
기욱이 지하주차장 쪽으로 서진을 이끌었다. 서진은 기욱의 차에 탔다. 차를 타고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이제 와서 지하철을 타고 가겠다며 싸워 봤자 득이 될 것 또한 없었다. 서윤의 말대로 서진은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해 피곤함에 절은 상태였다. 기욱이 운전을 하는 방향이 자신의 오피스텔이 아니라는 것쯤은 병원을 빠져나올 때부터 알고 있었다. 이젠 그냥 뭐든 상관없었다.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목적지를 모르는 채로 짐짝처럼 실려 가니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속도를 늦춘 기욱이 조수석에 앉아 있는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너 지난번에 실기 봤다면서.”
“보라면서요.”
운전면허에 관한 이야기였다. 떨어져도 그만, 붙어도 그만이긴 하지만 왠지 시험을 안 보면 기욱이 잔소리를 할 것 같아 시간을 내 보고 온 것이 다였다. 최근 들어 시험이 어려워졌다며 겁을 주던 동기들의 말과 달리 서진은 어렵지 않게 면허를 취득했다. 사실 합격 통보를 보고도 정말 이렇게 막 운전해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기욱이 갓길에 잠시 차를 댔다. 기욱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어디 가게요?”
“운전해.”
“됐어요, 저 피곤해요.”
사실상 초보 운전자나 다름이 없는 서진은 첫 차로 억이 훌쩍 넘는 차를 모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졸음운전은 더 위험했다. 나름 머리를 써 핑계를 댄 것이지만, 기욱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기욱은 차창 너머로 보이는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보며 말했다.
“커피라도 사 줘?”
이렇게까지 구는 기욱은 성가시다. 서진은 기욱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신을 운전석에 앉히고 싶어 하는 것을 눈치챘다. 서진이 마지못해 안전벨트를 풀었다.
“아메리카노 따듯한 거 라지 사이즈로 시럽 넣어서요.”
“그래.”
나름 까다롭게 주문을 한다고 했지만, 평소에 커피라고는 캔커피나 주는 대로 마시는 게 전부인 서진이 복잡한 음료의 주문법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차 밖으로 나간 기욱이 커피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서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운전석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핸들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정면으로 들어 도로를 바라봤다. 매번 조수석이나 뒷좌석에만 앉아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운전석에 앉아 보니 마치 다른 차처럼 감회가 새로웠다. 운전이라고는 면허를 딸 때 탔던 차가 전부니 사실상 기욱의 차가 서진의 처음이나 다름이 없었다. 커피를 챙겨 온 기욱이 조수석 쪽으로 탔다. 서진은 기욱이 주는 커피를 그 자리에서 반쯤 마셨다. 당장 커피를 마신다고 잠이 확 깨지는 않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정신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안전벨트를 맨 서진이 조심스럽게 도로로 끼어들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도로에 들어가는 건 좋은데, 서진은 운전만 할 줄 알지 길은 모른다. 하물며 자신의 집에 가는 방향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근데 어디로 가요?”
“네비 따라가.”
기욱이 내비게이션을 찍었다. 다시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긴 해야 하지만, 여기서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도착지가 서진의 오피스텔도, 서윤과 기욱이 사는 아파트도 아닌 것은 자명했지만 사고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운전하는 서진은 도착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잘하네.”
“됐어요. 비꼬지 마세요.”
서진은 자신의 뒤쪽에 있는 차들이 답답해 죽어 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속도를 올리고 싶어도 기욱의 차가 워낙 비싸서 사고를 낼까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고라는 것이 원한다고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서진은 처음보다는 조금씩 운전에 익숙해졌다.
“누나요, 내일 놀러 간다던데.”
“아, 박하연이랑?”
“알고 있었어요?”
“당연하지.”
기욱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였다. 결혼반지만큼 화려한 건 아니었지만, 딱히 반지의 값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서진은 사거리 건널목 앞에서 차를 멈췄다. 운전은 좀 익숙해졌지만, 내비게이션을 보는 데 익숙하지 않아 몇 번이나 길을 잘못 들었다. 기욱은 서진이 계속해서 이상한 곳으로 향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서진은 답답한 마음에 미적지근해진 커피를 홀짝였다.
“그런 거 알면 미리 말 좀 해 줘요.”
“내가 왜?”
“…….”
“됐어요.”
서진은 짜증을 내며 차를 출발시켰다. 잔뜩 토라진 표정의 서진에 기욱은 마시던 커피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서진이 덮었던 담요를 가슴 아래까지 덮었다. 자긴 익숙하지 않은 운전에 내비게이션까지 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옆에서 팔자 편하게 담요에 커피까지 마시고 있는 기욱을 보니 왠지 얄미웠다.
“나도 어제 알았어. 둘이 죽이 잘 맞나 보더라.”
사실은 기욱도 서윤과 하연이 이렇게 친하게 지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쁠 건 없는데 뭔가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들었다. 기욱은 내비를 보고도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몰라 머뭇대는 서진에 안쪽 골목을 손가락질했다. 골목으로 들어가자 중간에 편의점이 눈에 띄었다.
“술 한잔할까?”
“싫다고 하면 안 마실 거 아니잖아요.”
“잘 아네. 차 잠깐 세워 봐.”
서진이 편의점 앞에 차를 멈췄다. 안전벨트를 푼 기욱이 내리라는 듯 손짓을 했지만,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서진은 골목으로 들어오면서 봤던 익숙한 지하철역 이름을 떠올렸다. 인계역. 내비게이션을 쭉 따라갈 때는 설마 했는데 서진이 있는 곳은 병원에서 몇 정거장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지하철역으로 두 정거장 정도, 그럴 리는 없지만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은 서진은 차에서 내리는 것을 거부했다.
“그냥 알아서 사 와요.”
“아이스크림 사 올까?”
“알아서 하라구요.”
서진은 서둘러 기욱을 쫓아냈다. 5분이 좀 지났을 무렵 기욱은 양손에 술과 안주로 먹을 과자들을 잔뜩 챙긴 뒤 운전석 쪽의 문을 두드렸다. 비키라는 뜻이었다. 서진은 안전벨트를 푼 뒤 조수석으로 몸을 옮겼다. 기욱은 커다란 편의점 봉지를 뒤로 넘겼다. 뒤쪽으로 유리병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아이스크림 먹을 거면 먹어.”
“그놈의 아이스크림.”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서진은 갑자기 아이스크림 타령을 하는 기욱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기욱은 막대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며 골목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기욱이 차를 댄 곳은 처음 보는 아파트 단지였다. 누가 사는 건가? 지하주차장에 차를 댄 기욱이 내리라며 손짓했다. 서진은 머뭇거리며 봉지를 챙겨 차에서 내렸다.
딱 봐도 지어진 지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지하주차장은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곳곳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 엘리베이터와 연결된 자동문은 수리를 포기한 듯 완전히 열려 있었으며 보안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기욱이 신혼집으로 사는 아파트며 서진의 오피스텔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듯한 단지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서진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돈 많은 기욱과는 딱히 인연이 없어 보이는 아파트인 건 맞았다.
술을 마시자고 하는 걸 보니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건 아닌 것 같고 말이다. 서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기욱이 버튼을 누르는 10층까지 올라가는 내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가장 안쪽에 있는 도어락이 기욱의 손에 의해 열릴 때까지 서진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서진은 기욱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서진의 오피스텔보다 조금 넓은 아파트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활짝 열린 큰방 한가운데 있는 침대와 원래부터 있는 붙박이 장롱과 거실의 소파 그리고 3단 서랍이 전부였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거실은 휑하다 못해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기욱은 태연하게 바닥에 봉지를 내려놓았다.
“비밀번호 4875야. 인계역까지 걸어서 5분 걸려. 현주역까지 두 정거장 정도니까 가끔 와서 자고 가. 1004호. 강서윤도 몰라.”
“911…… 뭐요?”
아파트가 병원 근처라는 사실보다 빠르게 지나가는 비밀번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안쪽 방으로 들어간 기욱이 비어 있는 서랍을 열어 휴대폰 하나를 꺼냈다. 기욱이 서진에게 내민 것은 비교적 구식 휴대폰이었다.
“구일일사 사팔칠오. 휴대폰 전화번호라고. 니 거니까 받아.”
기욱은 반강제로 서진에게 구식 휴대폰을 건네줬다. 초등학교 떼나 썼던 휴대폰을 본 서진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요즘 시대에 이런 폴더폰은 또 어디서 구해 왔는지. 서진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기욱이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워하는 이유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런 거 그냥 연락하면 되잖아요.”
“강서진. 착각하지 마. 너랑 나랑 이러는 거 걸리면 둘 다 끝이야.”
“하, 본인이 위험하다는 자각이 있긴 있었나 보네요?”
서진은 될 대로 되라며 휴대폰을 잠바를 벗어 놓은 소파 위에 같이 던졌다. 기욱이 서진의 앞으로 편의점 비닐봉지를 내려놓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편하게 앉아 넥타이를 반쯤 푼 기욱은 서진에게 앉으라며 손짓을 했다. 서진이 쭈뼛대며 기욱의 앞에 앉았다. 기욱은 흐트러진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뭔가, 이대로는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최근 들어서 생겼어.”
나이를 먹는다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외관적으로 늙어 보인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도 봐야 할 주변 눈치와 지켜야 하는 것들, 책임져야 하는 것들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자초한 일이라고는 해도 처남인 서진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는 건 곤란했다. 기욱의 대답을 들은 서진이 입꼬리를 올리며 기욱을 비웃었다. 뒷일 생각하지 않고 지르고 보는 게 서진이 아는 기욱의 성격이었는데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욱이 주는 어떻게 개통했는지도 모르는 휴대폰을 감사하게 받을 생각 따위는 죽어도 없었다.
“더 좋은 방법을 알려 줄까요?”
“뭐가.”
봉지에서 술과 안주들을 꺼내 펼쳐 놓던 기욱의 손이 잠깐 멈췄다.
“지금이라면 되돌릴 수 있어요.”
“…뭐?”
“그만하면 된다구요, 당신이랑 나랑 이런 짓.”
기욱의 손에 의해 허공에 반쯤 들려 있던 소주병이 툭, 하고 나무 바닥 위로 떨어졌다. 다행히 소주병이 깨지거나 하진 않았다. 아직도 서윤이 행복하길 바라는 건 맞다. 맞는데, 기욱이 나이를 먹으면서 조심스러워진 것과 마찬가지로 서진도 언제까지 감정만 앞서는 중학생은 아니었다. 서윤이 기욱과 이혼을 하게 되면 분명 괴로워하겠지만, 그걸 감당하는 것 이상으로 서진은 기욱과의 관계에 신물이 나고 지쳤다. 우민과 술을 마셨을 때 술기운이지만 다른 과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도 그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꼭 기분 좋은 날 이렇게 초를 쳐야 사람 속이 시원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것도 없잖아요.”
“기분 나쁘다면?”
“말꼬리 잡지 말고, 그만하자구요.”
갑작스러운 통보에 기욱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언젠가 한 번쯤 말은 꺼내 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서진도 이렇게 뜬금없이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다. 딱히, 기욱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야지 하고 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이 순간이 아니라면 기욱에게 그만하자는 말을 할 수 있을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있었다.
“너, 내가 강서윤이랑…….”
“마음대로 해요. 솔직히 누나 우는 거 힘들긴 한데, 이제 그거 감당 못 할 정도로 어린 애도 아니구요.”
그게 중요했다. 중, 고등학교 시절 과거의 서진은 힘이 없었지만,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현재의 서진은 아무리 힘들어도 서윤을 감당할 능력이 있었다. 능력이라고 하기보다 진심으로 성인이 된 자에 대해 주어진 권한이었다.
“너 나 없을 때 술 마셨어?”
“내가 술을 왜 마셔요? 전 제정신…….”
“못 들은 걸로 해 줄 테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그 입 닥쳐.”
“그만…….”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하면 강서윤 불러서 눈앞에서 범해 줄 테니까.”
“…….”
그런 건 강간이나 다름이 없지 않나.
입을 다문 서진의 눈동자가 그렇게 대신 말을 하고 있었지만, 기욱은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도 결국 박기욱은 박기욱이었다. 기욱에게 그만하자는 말을 꺼낸 순간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서진은 기욱의 기분이 좋은 날인 것에 대해 새삼 고맙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서진은 어떻게든 모른 척 화제를 전환했다.
“그, 그래서 여긴 대체 뭔데요?”
“비밀장소. 가끔 와서 자고 가.”
기욱은 소파 위에 있는 서진의 잠바를 힐끗댔다.
“지갑 줘 봐.”
눈치를 본 서진이 잠바 안에 있는 가죽 지갑을 꺼내 기욱에게 건넸다. 몇 년째 바뀌지 않는 서진의 지갑을 멋대로 본 기욱이 지갑 가장 안쪽에 있는 신용카드 하나를 꺼냈다. 서진도 여러 개의 카드 안쪽에 박아 놓고 잊어버리고 있었던 카드 중의 하나였다.
“아직도 가지고 있네.”
최소 몇 년 만에 기욱의 손에 의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신용카드는 다름 아니라 과거 기욱이 서진에게 줬던 신용카드였다. 못해도 삼 년은 더 전의 이야기였다. 삼 년 동안 지갑 한 번 바꾸지 않은 서진도 서진이었다. 기욱의 카드가 지갑에 있다는 것은 머리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서진은 기욱의 카드를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러니까 아르바이트 같은 걸 왜 해.”
그걸 또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기욱의 기억력에 서진은 속으로 빈정 어린 박수를 보냈다. 기욱은 서진의 지갑에서 잠자고 있는 옛날 카드를 뺀 뒤 자신의 지갑에 있는 새 신용카드를 넣어 줬다. 서진이 가지고 있던 기욱의 신용카드는 기간 만료로 정지된 지 1년도 더 넘었다. 그걸 여태까지 모르고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서진이 기욱의 신용카드를 한 번도 긁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하긴, 한 번이라도 긁었다면 바로 문자가 오는 기욱이 모를 이유가 없었다.
“택시 타고 다녀.”
서진은 기욱이 지갑에 넣어 준 신용카드를 다시 꺼내 바라봤다. 어렸을 때와 다른 게 있다면 지금의 서진은 정말로 기욱의 용돈이 필요한 나이가 아니었다. 그때도 기욱의 용돈이 굳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서진은 카드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시헌이가.”
“내 앞에서 박시헌 얘기…….”
“좀 들어요. 시헌이가 예전에 형 카드로 300만 원 넘게 긁은 거 기억해요?”
“전부 해서 537만 원이었어.”
술을 마시라고 신용카드를 준 사람이 기욱 본인이라 뭐라고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시헌이 선배 후배 다 불러 작정하고 마셨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똑똑하게 기억을 했다. 기욱의 입에서 막상 저 금액을 들으니 서진도 많이 쓰긴 썼다고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도 그렇게 쓸 거예요. 그럴 생각이면 마음대로 해요.”
서진 나름대로 반항이라는 걸 눈치챈 기욱이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서진의 앞으로 밀었다.
“1억까지는 봐줄게.”
“하루에 1억요?”
과자 봉지를 뜯던 기욱은 아슬아슬하게 도를 넘는 서진의 뻔뻔함에 점점 기가 찼다. 어렸을 때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누굴 닮아 가는지 배우는 거라고는 절묘하게 사람의 성질을 긁어 대는 기술만 늘었다.
“너 그거 다 쓸 수는 있어?”
“집이라도 사면 되죠.”
“요즘 누가 집을 1억에 사. 그냥 써. 얼마 받지도 않는 월급. 돈이라도 쓰지 말고, 아니면 모으든가. 한두 살 먹은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튕겨?”
기욱은 서진이 이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성가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그런 기욱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기욱의 카드가 들은 지갑을 빠르게 잠바 주머니에 넣었다.
“진짜로 쓸 거예요.”
“쓰라고 주는 거잖아.”
서진은 그 뒤에도 몇 번이나 진짜 써도 되냐고 기욱에게 허락을 받았다. 말은 그리해도 쓸 거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던 과거와는 전혀 다른 태도임은 분명했다. 당시만 해도 서진은 기욱이 주는 것은 전부 다 나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욱과 밥을 먹거나 섹스를 한 뒤에 얻는 것들은 아무리 호의라고 해도 서진의 자존심을 좀 갉아먹는 것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 뒤에 기욱과 섹스를 하든 뒹굴든 갈 데까지 간 마당에 죄책감은 없었다. 나이를 먹는 것과 익숙해지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서진은 기욱과의 관계를 그만두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었다. 서진의 앞에 놓인 종이컵에 자신의 종이컵 끝을 멋대로 부딪친 기욱은 종이컵에 있는 술을 혼자 비웠다.
서진과 몰래 사용할 괜찮은 장소를 물색하는 데만 신경을 써 그런지 확실히 방이 전체적으로 휑한 기분이 들었다.
“쓸 만한 가구 있으면 사다 두던가.”
한발 늦게 기욱이 따라 준 소주를 마신 서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욱은 몸을 앞으로 해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기욱의 다른 손이 서진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 아파트, 오래된 것처럼 보여도 방음이 괜찮아.”
마치 일부러 그런 아파트를 골랐다고 홍보하는 것처럼 태연한 태도에 서진은 눈을 질끔 감았다. 시야가 사라지자 입술 안쪽으로 기욱의 입술이 닿으며 혀가 들어오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한동안 서진의 입안을 괴롭히던 기욱은 입술을 떼며 서진의 허리를 잡아당겨 제 앞에 앉혔다.
“놔, 놔요…….”
“반항하지 마.”
다리를 벌려 그사이에 서진을 앉힌 기욱은 서진의 등 뒤에서 서진을 안은 채 편의점 봉지에서 꺼낸 소주병들을 가운데로 모았다. 기욱이 사 온 소주는 10병이 조금 안 됐다. 그중 한 병은 서진과 기욱이 한 잔씩 나눠 먹어 반병 정도가 남아 있었다. 아예 소파 밑을 등받이로 써 편하게 앉은 기욱에 서진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이래서야 커다란 인형 신세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전 인형이 아녜요.”
“알아.”
그렇게 말하는 기욱은 서진이 어떤 의미의 인형으로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안주를 입에 넣은 기욱은 앞에 놓인 소주를 바라보며 서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한 시간.”
“한 시간요?”
“그래, 한 시간 안 내가 사 온 소주 다 마시면 오늘 밤은 넘어가 줄게. 아까 했던 말까지 포함해서 전부 못 들은 걸로 해 줄 테니까.”
기욱의 묘한 제안에 서진이 인상을 구겼다. 서진은 술을 못 마시는 편도, 잘 마시는 편도 아니었다. 그래도 의대 동기 중에서는 늘 중간은 갔다. 의대생들의 중간은 꽤 높은 편이니 일반인들 기준으로는 그게 또 아주 못 마시는 건 아니었다. 소주 7병. 10병 정도였다면 고개를 저었을지도 몰랐다. 서진은 기욱에게 안긴 채로 고개를 들어 기욱을 바라봤다.
“어떻게 믿어요?”
“뭘.”
“제가 저거 다 마시면 오늘은 안 건드리겠다는 거 어떻게 믿냐구요.”
서진은 하지 않겠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한 시간 안에 소주를 6병이나 마시고 취한 자신을 기욱이 멋대로 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 또한 없었다. 서진은 자신이 술을 마셔도 기욱이 건드리지 않는다는 확실한 보증이 필요했다.
“만약에 술 취한 널 건들면 그땐 아무 조건 없이 강서윤이랑 이혼해 주지.”
기욱의 강수에 서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기욱의 입에서 나온 노골적인 이혼이라는 단어는, 서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욱이 이미 알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했다.
“하, 그럼 제가 1시간 안에 저거 다 마시고 당신한테 당했다고 거짓말하면요?”
“그렇게 하면 끝도 없어. 내기 안 하고 널 안는 게 더 빠르다는 생각은 안 하나 보지?”
“하긴.”
서진은 기욱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당장 기욱이 마음만 조금 바꾸면 서진을 안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기욱은 서진이 자신과의 섹스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 적이 없었다. 서진 또한 그런 기욱의 변화에 당황스러우면서도 살짝 놀라웠다. 어떻게 장단을 맞춰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기욱과 섹스를 하고 싶지 않은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신 정말 안 건드리는 거예요?”
“다 마시고 말해.”
기욱은 자신과 서진이 마시다가 만 소주를 앞쪽에 있는 종이컵에 가득 따라 부었다. 서진을 안은 채로 팔에 차인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정확히 시계가 11시 3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2시 32분까지야.”
기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진이 종이컵에 담긴 소주를 들이켰다. 목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씁쓸한 향에 서진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물은 마셔도 되죠?”
“한 병까지는.”
기욱이 혹시나 하고 사 온 1.2L짜리 물병을 툭 건드렸다.
* * *
“으윽….”
“…진, 강서진.”
“……후윽.”
“기권?”
“마실 수 있어.”
“있어는 반말이고.”
“…됐으니까. 따라저요.”
서진의 발음이 꼬이기 시작했다. 기욱은 한숨을 쉬며 남아 있는 소주를 탈탈 털어 서진의 앞에 놓인 종이컵에 들이부었다. 기욱이 따르기 무섭게 마시던 처음의 서진과 달리 시간이 지난 서진은 종이컵에 담긴 소주를 마시는 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서진이 소주가 담긴 종이컵과 눈싸움을 하는 사이 기욱은 남아 있는 소주병의 개수를 체크했다.
처음에 마신 반병을 제외하고도 서진은 혼자 5병을 마셨다. 지금 따른 소주를 제외하고 딱 두 병이 더 남아 있었다. 시계는 12시 10분을 좀 넘기고 있었다.
“생각보다…….”
서진과 술을 마신 적이 몇 번 있었던 기욱은 서진이 술을 못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서진의 속도는 기욱이 생각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었다. 물론, 무리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이는 건 맞았다. 기욱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서진은 기욱이 한 컵 가득 따라 준 종이컵을 또다시 비웠다.
“으윽… 무, 물…….”
“위험하잖아.”
기욱은 머리를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는 서진의 허리를 빠르게 안았다. 서진은 기욱을 노려보더니 팔을 뻗어 비어 있는 물병을 입에 가져다 댔다. 텅 빈 물병에서 떨어지는 것이라고는 한두 방울이 전부였다. 이만하면 꽤 오래, 그리고 잘 버틴 셈이었다. 물 없이 소주만 한 병을 마신 서진은 갈증이나 미칠 것만 같았다.
“물은 딱 한 통까지만 하기로 약속했잖아.”
“나도 알아! ……여. 따라요 빨리.”
서진도 남아 있는 시간과 비어 있는 병의 개수를 확인했다. 왠지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최대한 조금씩 나눠 마시는 것보다 한 번에 빨리 마시고 끝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서진은 기욱이 머뭇대는 사이 소주를 가져와 종이컵 끝까지 따랐다,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소주를 본 기욱이 한숨을 쉬었다.
“고집부리지 말고 나눠 마셔,”
“흥, 댔거든요.”
술에 취한 서진은 기욱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종이컵을 든 서진이 소주를 물 마시듯 벌컥벌컥 마셨다.
“너 진짜…….”
탁, 하고 비어 있는 종이컵을 내려놓은 서진을 본 기욱이 기가 막히다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잠깐 해롱거리며 자세를 못 잡는가 싶던 서진의 몸이 옆으로 확 기울었다. 다행히 기욱이 재빨리 서진을 제 품 쪽으로 안았다. 기욱은 손끝으로 서진의 뺨을 툭툭 건드렸지만, 서진의 눈은 반쯤 풀린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더 마실… 수….”
잠깐 정신을 차린 서진이 소주 쪽으로 손을 뻗다 말고 앞으로 몸이 축 처졌다. 마실 수 있기는 얼어 죽을. 완전히 맛이 가 버린 서진을 본 기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서진의 앞에는 소주 한 병 반 정도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혼자서, 삼십 분을 좀 넘겨서 5병 이상을 마신 거면 잘 마신 축에는 속했다. 기욱은 뻣뻣하게 굳은 서진의 입을 벌려 키스를 했다. 기욱이 서진의 팔을 움직이자 서진은 자연스럽게 기욱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 상태로 안쪽 방에 있는 침대에 서진을 내려놓았다.
술에 취해 침대 위를 뒹굴고 있는 서진을 본 기욱은 단추를 푼 셔츠를 바닥으로 내려놓으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기욱이 마신 술이라고는 처음에 마신 반 잔이 전부였지만, 서진 때문에 괜히 기욱도 술에 취한 것처럼 몸이 뜨거웠다.
기욱은 제 밑에서 몸을 쪼그리며 세상모르게 자는 서진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서진은 기욱의 생각 이상으로 많이 취해 사실상 필름이 끊겨 있었다.
“이래서야 억지로 하는 거랑 차이가 없잖아.”
그렇다고 해서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술을 다 마시지 못한 것에 대한 약속이기도 했고, 술에 취해 반항이 적은 서진은 그거 나름대로 기욱을 좀 흥분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 * *
“으, 응… 하윽… 흐으읏…!”
침대 위 시트를 꽉 쥔 서진이 참지 못한 신음을 흘렸다. 술에 잔뜩 취해 톤이 올라간 서진의 신음은 기욱이 느끼기에 굉장히 야했다. 기욱은 서진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린 뒤 서진의 안을 정신없이 탐했다.
“아아. 읏, 강서진….”
“흐윽, 으응… 어으윽…!”
기욱이 움직임을 크게 할 때마다 서진의 몸이 앞뒤로 정신없이 흔들렸다. 서진은 그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입 근처로는 아까 마셨던 소주가 올라와 침과 섞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욱은 서진의 입가를 손으로 닦아 주면서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서진을 취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술 내기는 홧김에 한 것이지만, 기욱은 꽤 만족하는 중이었다. 서진의 엉덩이를 가볍게 툭 건드리자 한층 예민해진 서진이 목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신음을 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귀엽기는.”
“으, 응… 이제… 윽… 내일 출근…….”
조금씩 정신이 든 서진이 중간중간 한마디씩 했다. 본인이 기욱과 섹스를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술 내기를 했다가 어떻게 됐는지를 기억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기욱이 몸을 숙이자 서진의 갈데없는 팔이 기욱의 등 위로 올라왔다.
“강서진.”
“후… 으응… 아응….”
서진은 계속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 의미가 싫다는 건지 아니면 그만해 달라는 것인지는 말을 하지 않아 알 수가 없었다. 벌어진 다리 아래쪽으로 기욱의 살결이 거침없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저 잔인할 정도로 실감이 나는 움직임이었다. 아프지도, 그렇다고 무턱대고 마냥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기욱은 다른 모양이었지만.
“허으윽…! 어흑…!”
“윽….”
서진의 발목 대신 이젠 양손으로 허리를 붙잡은 기욱의 움직임이 절정에 달하더니 서진의 안에 그대로 사정을 했다. 안쪽으로 차오르는 정액의 느낌과 나올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박혀 있는 페니스에 서진의 허리가 움찔거리며 들렸다.
기욱은 서진의 안에 페니스를 넣은 채로 입술을 천천히 덮었다. 땀에 젖은 서진의 머리카락이 축 가라앉아 있었다. 어렸을 때랑 비교해도 현재의 서진 외모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어느 쪽이 더 취향이냐고 묻는다면 기욱은 어린애 티가 풀풀 나는―실제로도 어렸지만―이전과 달리 지금이 훨씬 나았다.
서진은 자신에게 질리기를 바라고 있는 모양이지만, 분명한 건 기욱은 아무리 봐도 서진이 질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질리기는커녕 안으면 안을수록 어딘가 부족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뿐이었다. 기욱은 서진을 제 무릎 위로 올린 채 허리를 붙잡아 몸을 크게 움직였다. 잔뜩 취해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서진은 본능적으로 기욱의 목에 팔을 둘러 매달렸다.
“허윽, 윽… 하으윽… 흐, 하응….”
“후….”
다 큰 성인 남성을 들어 올려 움직이는 체위는 버겁긴 했지만, 막상 해 보니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위아래로 움직이는 기욱 탓에 서진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결국, 체력적으로 지친 기욱이 중간 무렵에 서진을 침대 쪽으로 내려놓았다.
“흐… 흐으….”
기욱의 페니스가 빠져나오자 오므리지 못한 서진의 다리 사이로 정액이 뚝뚝 떨어져 침대 시트 위를 적셨다.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다리 사이로 이끌었다. 커다란 엄지가 서진의 이빨 사이를 밀고 들어갔다. 고개를 숙인 서진의 입이 벌어지자 기욱은 이번엔 자신의 페니스 끝을 밀어 넣었다. 서진은 이빨 대신 혀로 기욱의 페니스를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한두 번 하는 거 아니잖아.”
“우읍….”
잠깐 머뭇대던 서진이 양손으로 기욱의 페니스를 쥐며 입안에 넣었다. 술에 잔뜩 취한 서진은 몸에 남아 있는 기억에 의존해 기욱에게 펠라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한 서진의 펠라에 기욱은 만족한다는 듯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술에 의해 의식이 날아가고, 본능만 남은 서진은 기욱이 느끼기엔 인형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기욱은 자신이 서진을 안았을 때 인형이 어쩌고 했던 서진을 비웃듯 중얼거렸다.
“아니긴 무슨.”
그런 중얼거림을 듣지도 못한 서진은 기욱에게 펠라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밑에서 느껴지는 분주한 혀 놀림에 기욱은 차분하게 서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쩌면 운명이라는 건 있는지도 모르겠다. 기욱은 그만하자고 했던 서진의 말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모르는 척해 주겠다고 한 거지 잊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잊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아마 한동안 꽤 신경을 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강서윤이면 될 줄 알았다. 어린 시절의 서진에게 서윤은 전부였으니까. 지금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서진은 성장을 하는 중이었고, 작게나마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그만한 권한이 있다는 것과도 같았다. 강서윤만으로는 한계라는 뜻이었다.
“…하, 하하. 그렇다. 이거지?”
“우윽… 읏….”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윽… 모르겠….”
기욱은 서진을 완전히 무릎 위쪽으로 올렸다. 기욱은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진을 바라볼 뿐이었지만, 기욱의 시선에 괜한 눈치가 보인 서진은 한참 만에 다리를 벌리더니 저 스스로 기욱의 페니스 끝을 밀어 넣었다. 기욱이 허리를 조금 들썩이자 페니스가 완전히 서진의 안에 자리를 잡은 것이 느껴졌다.
“으읏… 하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의 위에서 힘겹게 허리를 흔드는 서진을 본 기욱은 이내 속으로 안심했다. 어쩌면 강서윤은 이미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고, 설령 강서윤이 없어도 그동안 있었던 시간은 기욱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었다.
서진에게 각인된 박기욱은 서윤에 대한 감정을 뛰어넘는 두려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허리를 흔들다 지친 서진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기욱은 페니스를 빼고 옆쪽으로 몸을 옮기려는 서진의 다리를 붙잡았다.
“누가 멋대로 빼도 좋다고 그랬어?”
“읏….”
거진 본능만 남고, 의식은 날아가다시피 한 서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페니스가 들어가자 서진이 입술 끝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기욱의 허리 놀림이 점점 빨라질 때마다 서진의 몸은 위아래도 거침없이 흔들렸다.
기욱은 서진이 지쳐 신음도 내지 못할 지경에 이를 때까지 서진을 범했다.
* * *
솨아악, 물소리가 들리자 서진은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린 서진은 익숙하지 않은 아파트의 구조에 깜짝 놀라 이불을 걷으며 몸을 일으켰다. 알몸인 자신의 상태와 미칠 듯이 올라오는 숙취에 이마를 짚었다.
“제길.”
허벅지 사이로 굳어 있는 정액을 본 서진은 급한 대로 이불을 끌어당겨 무릎을 덮은 뒤 이마를 짚었다. 가구라고는 침대와 기본적인 것이 전부인 텅 빈 아파트, 서진은 이곳이 모텔 대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 너머 거실 건너편 화장실에서 들리는 물소리는 필시 기욱의 샤워 소리일 것이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거실에는 기욱이 한쪽으로 정리해 둔 소주병과 거의 먹지 않은 포장이 뜯긴 안주들이 그대로 있었다.
“…….”
다리를 살짝 움직일 때마다 눌어붙은 정액이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젯밤 기억들이 새록새록 나기 시작했다. 마지막 술병을 두고 의식을 잃은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만약 그 술을 전부 다 마셨다면 기욱은 정말 자신을 건드리지 않았을까?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쓸데없는 고민만 들었다. 고개를 돌려 안개가 드문드문 낀 아침 창밖을 바라보던 서진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
“어어어…!! 병원!!”
방에는 시계가 없고, 휴대폰과 시계는 거실 어딘가에 있어 정확히 몇 시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서진은 본능적으로 지각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서진은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침대에서 발을 내디뎠다.
“아윽…!”
발등에서부터 허리까지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서진은 한 발도 내딛지 못한 채 흘러내린 침대 시트에 발이 걸려 앞으로 쓰러졌다. 간신히 넘어지는 것만큼은 피했으나, 그래도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다를 것이 없었다.
“너 뭐 해?”
마침 샤워를 하고 온 기욱이 서진이 넘어지면서 났던 소리에 큰방으로 들어왔다. 서진을 본 기욱이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서진은 기욱의 손 대신 침대 옆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지. 지각…… 지금 몇 시…… 휴대폰은?”
“이거?”
거실로 나간 기욱이 소파 위에 있는 휴대폰을 서진에게 던졌다. 아침 5시 42분. 출근은 6시까지이지만 인턴들은 대게 아침 정리와 미팅 준비를 위해 5시 반까지는 출근을 했다. 배터리가 얼마 없는 휴대폰을 열기 무섭게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서진은 당황하며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너 지금 어디야?
목소리는 알 수 없지만, 서진은 그가 당직인 레지던트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 어… 그게……
서진이 기욱의 눈치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숨을 쉰 기욱이 서진의 휴대폰을 멋대로 빼앗아 귀에 가져다 댔다. 그사이 머뭇거리는 서진을 향해 답답하다는 듯 상대 쪽에서 언성을 높였다.
― 너 미쳤어? 어디냐고.
― 강서진, 30분 안에 가.
― 누구세요?
― 누구?
갑자기 바뀐 목소리에 적응을 못 하는 그의 태도에 기욱이 가볍게 웃었다. 잠시 뒤 목소리의 주인을 깨달은 레지던트가 당황하며 말을 바꿨다.
― 바, 박 교수님이십니까?
― 그래. 어제 서진이 붙잡고 밤새 술 좀 마셨어. 더 자라고 내가 내버려 뒀는데. 미리 연락할 걸 그랬네.
― 아, 하하하. 그럴 수 있죠. 어차피 6시까지만 오면 됩니다.
― 금방 갈 거야. 이따 봐.
― 네. 교수님도요.
기욱은 레지던트의 인사를 반쯤 무시한 채 전화를 끊은 휴대폰을 서진에게 던졌다. 서진은 휴대폰을 받으며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아직도 엉덩이 안쪽이 아팠다. 서진은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긴 뒤 정확히 어떻게 섹스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젠 뭐 하도 많이 당해 그게 그거겠거니 하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오늘은 조금 상황이 달랐다. 얼마나 거칠게 했으면 아침부터 몸이 남아나지 않는단 말인가. 이렇게 두세 번만 더 했다가는 정말 죽어 나갈지도 몰랐다.
“전화. 뭐래요?”
“30분 안에 간다고 말했어. 씻어.”
“하아, 알았어요.”
기욱도 기욱이지만 병원에 있을 다른 인턴들과 선생님들의 눈치가 보였던 서진은 비틀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기욱과 지하주차장에 내려온 서진은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자리를 잡았다. 기욱이 서진보다 먼저 조수석에 앉아 버린 탓이었다. 밤에 운전해 본 것 때문인지 운전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역시 어색한 건 마찬가지였다. 잠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기욱은 아슬아슬하게 신호에 걸려 운전을 멈추며 신호를 보느라 정신이 없는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이라면 그만둘 수 있다고 말한 거. 진심이야?”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운전대를 붙잡은 서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욱의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음에도 서진은 끝까지 기욱에게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운전에 익숙하지 않아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너 그때 술 마시지 않고 한 말인 거 알고 있어.”
“먼저 넘어가 주겠다고 한 건 그쪽이잖아요. 기억 안 나요.”
모르는 척 넘어가 주겠다고 말했으니 아예 기억 속에서 없앨 작정인 서진의 모습에 기욱이 입꼬리를 올렸다. 나이를 먹어서 느는 거라고는 뻔뻔해지는 것 말고는 달리 없는 모양이었다.
“화난 거 아니니까 기억하려고 노력해 보는 건 어때?”
“진심이에요. 혹시라도 누나가 임신이라도 한다면……. 하아, 역시 기억 안 나는 걸로 할게요.”
서진은 괜한 말을 했다며 병원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다. 그래, 만약 서윤이 임신을 하거나 둘 사이에 애라도 생겨 버린다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애가 안 생기는 건지 피임을 잘하는 건지까지는 서진도 알 방법이 없었다. 그 뒤에도 기욱이 몇 번이나 서진에게 그날 밤에 대해 말을 꺼냈지만, 서진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 * *
“EM?”
“네네, 이미 그쪽 교수님들이랑 이야기 다 했어요.”
서진은 오랜만에 H대 동기 중 한 명인 재혁과 학교 근처 안줏집에서 술을 마셨다. 말린 오징어를 씹은 서진이 앞에 놓인 소주를 빠르게 비웠다. 기욱과 그런 식으로 내기하고 난 뒤라 그런지 괜히 마시는 속도만 과하게 빨라진 기분이 들었다. 재혁은 서진이 신경질적으로 달리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았다. 같은 인턴인 재혁은 벌써 지망 과를 정한 모양이었다. 서진은 턱을 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빠르네.”
“어차피 뭐든 정해야 할 거 빨리하는 게 좋잖아요. 아침, 형 J대 인턴은 할 만해요? 거기 OS 완전 초주검이라고 소문 다 났잖아요.”
“나 OS는 아직. 아, 박시헌이 저번 달인가에 갔었을걸?”
“할 만하대요?”
“너도 걔 알잖아. 새벽에 몰래 요령 좋게 도망쳐서 자고 일하고 그러나 봐. 워낙 일이 힘들고 손이 부족하니까 거기 선생님들도 걔 그러고 일한 거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줬다더라. 그것도 박시헌이니까 하는 거지. 그 자식 안과 돌면서 응급실 지원까지 나가더라.”
“헐. 응급실은 왜요?”
“몰라, 응급실 교수인지 외과 교수인지와 안면 텄나 보지.”
서진은 생각나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임정혁. 서진은 별로 정혁과 직접 말을 나눠 본 적은 많이 없지만, 시헌은 제법 정혁과 친한 모양이었다.
“이러다가 시헌이 형도 EM 가는 거 아녜요? 그럴 거면 그냥 편하게 자대 오지. 시헌이 형이랑 일하면 편할 거 같지 않아요?”
“나도 몰라 인마. 걔랑 완전 다 떨어져서 한 번도 만난 적 없어.”
서진과 시헌의 인턴 과정은 마치 기욱이 손이라도 댄 것처럼 완전 정반대로 시작해서 반대로 끝이 나는 식이었다. 재혁이 서진의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아, 맞다. 레지 들어간 선배들이 가끔 형이랑 시헌이 형 이야기하는 거 알아요? 아깝다고.”
“나랑 시헌이가 J대 갈 거 몰랐던 사람 없잖아.”
“저희야 그렇죠. 근데 선배님들은 또 아니니까요.”
“야야, 남들이 보면 나랑 시헌이 빼면 우리 학번 시체인 줄 알겠다? 너네 다 잘난 거 알거든?”
서진과 시헌이 재수를 했을 당시 수능은 당대 최고 난도로 덕분에 H대 역시 역대 최고 점수를 기록했었다. 재혁과 서진의 학번을 앞뒤로 비교해 봐도 당시 학번의 입학 점수가 가장 높았다. 눈앞에 있는 재혁만 해도 중, 고등학교 때부터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으며 수능 때도 딱 한 개를 틀려 만점을 놓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서진과 시헌을 빼더라도 서진의 학번 대부분이 재혁과 같은 아이들투성이였다. 정작 재혁은 그런 서진의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름 중, 고등학교 때 여기저기서 공부 잘한다는 소리 듣고, 수능도 잘 봐 H대에 들어왔지만 전부 우물 안 개구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진짜 잘난 사람이 그런 말 하면 못써요.”
“난 아냐. 박시헌이나 그렇지.”
“형은 노력파인 거 솔직히 조금 인정. 그래서 형도 신경외과 확정인 거예요? 시헌이 형은 진짜 EM인가?”
“박시헌? 안 물어봤는데. 연락해 보든가. 니네 그렇게 사이 나쁜 거 아니잖아.”
“씨, 우리 사이좋거든요? 근데 시헌이 형 진짜 바쁘긴 한가 봐요. 한번 볼래요?”
“뭘?”
“시헌이 형한테 보낸 연락이요.”
재혁이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시헌과 주고받은 톡을 서진에게 보여 줬다.
[11일]
「형 뭐 해요? 난 이제 첫 끼 먹는 중 ㅠㅠ」 오후 7:55
「바빴어」 오후 11:23
「헐 ㅋㅋ지금 답장 하는거바 ㅋㅋ퇴근 안 했어요?」 오후 11:24
[12일]
「아니 새벽에 읽었음. 답장이라도 좀 해요 ㅡㅡ」 오전 5:20
「자러 가는 중」 오전 5:33
「자러 간다구요?? 당직?」 오전 5:34
「어제 저녁부터」 오전 5:35
「계속 일함」 오전 5:36
「근데 형 무슨 과 갈지 정했어요?」 오전 5:37
「몰라 잘ㄲㅓㄴ까 톡ㅂ내지마 ㅡㅡ 디짐」 오전 5:40
그 밑으로 톡이 몇 개 더 있었지만 대충 그 내용이 그 내용이었다. 재혁이 뭐 하냐고 묻고, 시헌은 한참 뒤에서야 바쁘다며 짧게 답장을 보내는 식이었다. 참으로 시헌다운 답장에 오랜만에 미소를 띤 서진이 재혁의 휴대폰을 돌려줬다. 확실히 시헌이 평소와 달리 예민해져 있다는 것이 말투에서부터 느껴졌다.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겠네.”
“말도 못 붙이는 게 아니라 진짜 톡 못 하겠어요!!”
“야, 그러는 넌 뭔데 시헌이한테 톡을 그렇게 보내? 한가하냐?”
“하하, 인턴도 한 두세 달 하다 보니까 이게 또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시헌이 형이 열심히 하는 거예요!!”
“너 J대 와 봐라. 요령 피울 수 있나 없나.”
“J대가 분위기가 좀……. 그렇죠?”
“장난 없어. 나 첫날에 ABGA 똑바로 못 했다고 쫓겨났었다.”
“어!! 그거 나도 못 했는데. 난 그때 선생님들이 처음엔 다 그럴 수 있다면서 봐줬어요. 그거 가지고 쫓아내는 건 그렇지 않아요?”
서진이 소주 한 병과 안주를 조금 더 시켰다. 재혁에게 소주를 따른 서진이 잔을 부딪치며 언성을 높였다.
“그치? 근데 박시헌이 나 비웃더라.”
“큭큭, 시헌이 형이라면 그럴 수 있죠.”
“뭐냐 그 태도는? 너도 내가 우… 습냐?”
서진은 알바생이 가져온 소주를 뜯으며 재혁을 노려봤다. 어느 정도 술을 마신 재혁이 서진이 따라 주는 술을 거부하며 물을 마셨다. 서진과 술을 마시는 게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재혁은 못 본 사이 서진이 술을 마시는 속도가 좀 많이 빨라졌다고 느꼈다.
“형 술 취했죠?”
“안 취했어. 어쩔 건데?”
“아, 알았어요. 안 취하셨어요. 그래서 형은 신경외과 확정?”
“몰라!! 그만 좀 말해!!”
또다시 소주 따라 비운 서진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옆쪽에 있던 여자와 남자들이 갑자기 언성이 올라간 서진을 흘끗댔다. 재혁은 별일 아니라며 건너편 테이블 사람들을 향해 양해를 구했다. 그 모습을 본 서진도 제가 심했다는 자각을 한 모양인지 목소리를 낮췄다.
“조금 더 고민 중이야.”
“하긴, 아직 6개월이나 더 남았으니까요. 근데 진짜 신경외과는 안 갈 거예요?”
“한 번만 더 말하면 나 집에 간다?”
“아, 알았어요.”
재혁이 진정하라며 서진을 다독였다. 서진은 시끄러운 안줏집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막상 인턴으로 일하기 시작한 이후 서진은 일을 하면 할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의감이 들었다. 과연 이 길이 맞긴 맞는 걸까? 당장 눈앞에 있는 재혁을 붙잡고 말해 봤자 소용없는 고민이라 생각한 서진은 벌어진 입 사이로 소주를 밀어 넣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그래, 가라 가.”
어느 정도 술을 마신 서진이 재혁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재혁이 화장실에 간 사이 혼자 남겨진 서진은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담배를 피우러 가기에는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귀찮았다. 결국, 담배 케이스만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서진에게로 옆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 한 명이 몸을 슬쩍 돌렸다. 원통형으로 되어 있는 가게는 테이블당 거리가 좁아 가게가 꽉 차게 앉으면 거의 등을 맞대고 앉는 수준이었다.
“저기요.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여섯인데요.”
“아, 그렇구나. 하하, 병원 얘기하시는 거 같아서 의사인 줄 알고 나이가 좀 있는 줄 알았어요.”
“그냥 인턴인데요.”
“인턴도 의사는 의사잖아요. 대단하네요. 혹시 번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전 스물다섯인데…….”
그녀의 친구들이 서로 힘내라는 듯 눈치를 주고 있었다. 재혁은 화장실에서 뭘 하는 건지 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서진은 얼마 남지 않은 소주를 소주잔이 아닌 맥주가 얼마 남지 않은 맥주잔에 따라 마신 뒤 잔을 내려놓았다. 왁자지껄한 가게에 서진과 여자 일행들 사이로만 굳은 침묵이 일었다. 딱 봐도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막 사회에 나온 사회 초년생 같은 그녀는 굳이 서진에게 번호를 얻는 것이 아니더라도 가게에 눈독을 들이는 남자들이 여럿 있었다. 설마 그런 그녀가 다른 남자들이 아닌 자신에게 번호를 물어 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서진은 반쯤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번호는 드릴 수 있는데요.”
“…….”
“그쪽이랑 연락하는 거 알면 싫어할 사람이 있어서요. 집착이 심하다고 해야 하나? 사람이 좀 그래요.”
“아…. 여, 여친 있으시구나. 죄송해요!”
얼굴이 빨갛게 변한 여자가 재빨리 서진에게서 등을 돌렸다. 친구들이 괜찮다며 그녀를 달래는 모습을 본 서진은 또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여친 있다고 말한 적 없는데…….”
서진의 목소리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남자들의 함성 소리에 금방 묻혔다. 누군가와 사귀는 건 고사하고 감정을 나눌 기회조차 없는 서진은 슬슬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기욱을 감당할 만한 사람을 만나자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남동생인 시헌도 감당하지 못하는 박기욱을 대체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왜 하필!!”
서진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며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왜, 왜 하필 그 순간 우민의 얼굴이 떠오른단 말인가. 재혁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서진의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재혁인 줄 알고 휴대폰을 꺼냈으나 서진의 휴대폰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와 있지 않았다. 혹시 몰라 잠바 안쪽 주머니에 넣어 두고 잊어버리고 있었던 기욱이 준 휴대폰에서 오는 전화였다. 기욱과 연락을 하기 위해 따로 만든 휴대폰이니―서진도 누구 명의로 개통되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관심도 없고― 전화가 올 사람은 기욱 외에 없었다. 서진은 휴대폰에 유일하게 저장된 기욱의 이름을 확인한 뒤 툴툴대며 전화를 받았다.
― 왜요?
― 너 어디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 술집이니까 시끄럽죠.
― 술 마셨어?
― 아까 술집이라고 했잖아요.
― 누가 마셔도 좋다고 그랬어?
― ……끊어요.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를 주고받던 서진이 일방적으로 말을 잘랐다. 제가 통화를 하고도 이게 무슨 콩트인가 싶었다. 기욱이 전화를 끊으려는 서진을 달랬다.
― 알았어, 누구랑 마시는데?
― 재혁이랑요.
― 또 누구?
― 재혁이랑 마신다니까요?
술에 조금 취한 서진은 똑바로 대답했음에도 계속해서 캐물어 오는 기욱이 성가셨다. 휴대폰 너머 기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강재혁이랑 둘이 마신다고? 규건이 사촌?
― 걔 형님 과에 사촌 있다고 그랬으니까 맞겠죠.
― 전화 바꿔 봐.
“지가 보호자야 뭐야.”
서진은 짜증을 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재혁은 화장실이 아닌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재혁에게 담배 냄새가 훅 하고 났다. 서진은 자기 혼자만 담배를 피우고 온 재혁이 못마땅했다. 서진이 타이밍 좋게 들어온 재혁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어, 형 누구예요?”
“우리 매형. 너랑 있다니까 전화 좀 바꿔 달라신다.”
“형 매형이면……. 헐. 박 교수님이요? 왜지?”
“내가 어떻게 알아. 받아 좀.”
서진이 휴대폰을 흔들자 재혁이 서진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슬슬 일어나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들었다. 재혁과 기욱이 통화를 하는 사이 서진은 남아 있는 소주의 술들을 털어 마셨다.
“네네, 아……. 서진이 형이 좀 많이 마시긴 했는데……. 택시 타고 잘 들여보내겠습니다. 그럼요, 내일 또 출근해야 하잖아요. 네. 끊겠습니다.”
중간에 재혁의 말을 들은 서진이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며 소리를 질렀지만, 재혁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재혁이 전화를 끊은 뒤 휴대폰을 서진에게 돌려줬다. 재혁은 갈 준비를 하는 서진을 보며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와, 박 교수님 대박. 형 걱정된다고 연락한 거야? 우리 누나도 어디서 박 교수님 같은 남자 안 데려오나 몰라.”
“…꿈 깨라.”
서진은 긴말을 하지 않았다. 재혁은 단순히 서진의 자랑인 줄 알고 넘어갔지만, 서진이 말하는 꿈은 정반대의 꿈이었다. 서진이 느끼기에는 재혁의 누나가 훨씬 부러웠다.
“맞다. 형 얼마 나왔어요?”
“됐어. 내가 계산했어.”
서진은 영수증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기욱의 카드를 지갑에서 넣었다. 통화까지 해 술 마신 사실을 숨길 필요도 없으니 돈을 쓰는 데 부담은 없었다. 시간은 11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2차를 가도 되지만, 서진도 재혁도 종일 일을 하고 난 뒤라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다. 골목으로 나온 서진이 먼저 택시를 붙잡았다. 서진이 뒷좌석에 타자 재혁이 조수석 쪽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제가 같이 가 줄까요?”
“그냥 가! 내가 애야? 확 그냥!”
“아, 알았어요. 그럼 형 연락할 테니까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래. 너도 고생해라.”
재혁이 문을 닫자 뒷좌석 시트에 몸을 기댄 서진이 오피스텔 주소를 불렀다. 다리를 타고 가야 돼서 택시비가 살짝 나오겠지만, 그것도 역시 제 돈이 아니라는 생각에 큰 부담은 없었다. 남의 돈 쓰는 게 이렇게 편할 줄이야. 진작 작정하고 쓸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진은 기욱에게 받은 2G 폰을 만지작거리며 휴대폰을 열었다. 그사이 미처 확인하지 못한 문자가 한 건 더 와 있었다. 아마도 재혁과 통화를 끊고 난 직후에 온 문자 같았다.
「1004호로 와.」 오후 11:02
기욱은 종종 와서 자고 가라고 말을 했지만, 서진은 편한 제집을 두고 굳이 아무것도 없는 아파트에서 자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피곤하다면 차라리 병원 당직실에서 자면 될 일이었다.
「누나는요?」 오후 11:12
「당직 중」 오후 11:13
「우라ㅣ누ㄴ나ㅇㅑ근ㅈ좀ㅈ작ㅅ켜요 ㅡㅡ」 오후 11:14
술에 취한 서진은 오타를 교정할 틈도 없이 기욱에게 문자를 보냈다. 서진은 그제야 다리 중간까지 왔다는 것을 깨닫고 택시 기사에게 행선지를 바꿨다.
“그러면 한참 돌아가야 하는데 괜찮으세요?”
“네네, 괜찮아요.”
택시비가 얼마가 나오든 서진은 관심이 없었다. 아파트 근처에 도착한 서진이 기욱의 카드로 택시비를 계산한 뒤 택시에서 내렸다. 단지 앞에서 찾아갈 수 있다며 자신 있게 내린 건 좋았지만, 술에 취해서 그런가? 아파트가 다 똑같아 보였다. 아파트가 다 똑같이 생긴 건 맞는데 바로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거랑 걸어서 들어오는 거랑은 또 달랐다. 심지어 오래된 아파트라 동호수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
“강서진!”
조명이 간당간당한 가로등 밑에서 담배를 피우던 기욱이 서진을 발견하고 손을 살짝 들었다. 서진이 기욱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뭐 해요?”
기욱이 담배 연기를 옆으로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보면 모르나.
“담배 피우잖아.”
“그건 저도 알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뭐 하냐구요.”
기욱의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은 서진이 인상을 구겼다. 서진은 아파트 안에 있어야 할 기욱이 밖에서 뭐 하냐는 뜻으로 말을 한 것이었다.
“됐어요.”
술에 취하긴 한 듯 제 풀에 지친 서진이 입술을 내밀며 기욱의 옆에 서 담배를 피웠다. 서진은 담배를 피우며 아파트 단지를 두리번거렸다. 경비실이라고는 단지 입구에 들어갈 때 있는 곳이 전부며, 그곳에 있는 경비는 있는 둥 마는 둥 했다. 드문드문 있는 CCTV는 사각지대투성이에 아파트 안에는 엘리베이터와 1층 계단에 있는 CCTV가 전부였다. 담배를 끄고 기욱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서진은 엘리베이터 구석에 박혀 있는 CCTV를 종이로 가려 놓은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런 아파트는 또 어떻게 알고 구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CCTV가 적고 치안이 좋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남의 눈에 띄기 쉽지 않다는 장점이 있었다.
“왜?”
“아니요.”
기욱을 보며 밀회도 이런 밀회가 없다고 생각한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기욱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모르는 집 문에 머리를 박으려는 서진의 팔을 재빨리 붙잡았다. 서진은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기욱에게 붙잡힌 팔을 허공으로 휘적거리고 있었다.
“놔요.”
“몸도 못 가누는 게 무슨. 너 얼마나 마셨어?”
“조금.”
“조금이 얼만데.”
“한 네 병?”
“많이 마셨네.”
기욱은 그때 이후 서진의 주량이 소주 5병 근처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다. 서진은 그런 기욱의 확신이 자존심이 상했다.
“그땐 갑자기 확 마셔서 그런 거구요!!”
또 다시 다른 집 문 도어락을 열려 하는 서진의 말은 신빙성이 전혀 없었다.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긴 뒤 1004호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리자마자 서진은 신발을 벗어 던진 뒤 좀비처럼 침대로 들어가 쓰러졌다.
“강서진 너…….”
서진의 신발이 현관문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기욱은 서진의 신발을 안쪽으로 정리한 뒤 큰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밑에는 서진이 벗어 던진 겉옷이 있었다.
“가지가지 하네.”
침대에 쓰러진 서진은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자고 있었다. 서진의 겉옷을 정리한 기욱이 침대 옆에 슬쩍 앉았다. 기욱이 앉자 침대가 풀썩 하고 가라앉았지만, 옆에 누운 서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기욱은 서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일하고 난 뒤라 더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제길.”
기욱은 서진의 밑에 깔린 이불을 위로 덮어 주었다. 강서진이 자신이 있을 때 이렇게 금방 잠이 든 적이 있었던가. 서진과 통화를 할 때만 해도 할 생각으로 왔던 기욱은 곤히 잠들어 있는 서진을 건드리기도 뭐해 적당히 옷을 갈아입은 뒤 서진의 옆에 누웠다.
* * *
“…워. 더워.”
유난히 두꺼운 이불에 짓눌린 서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척였다. 몸을 움직이며 정신을 차린 서진은 누군가 자신의 등을 안고 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고 자는 곰 인형처럼 서진을 안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기욱이었다. 기욱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기욱의 팔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진은 고개를 슬쩍 들어 눈을 감고 있는 기욱을 향해 말했다.
“깨어 있으면 손 좀 놔요.”
“크읍, 하하. 발버둥치는 게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기욱이 손을 놓자 그제야 서진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밤에 있었던 일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 서진은 잔뜩 눌린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베란다 밖은 드문드문 해가 뜨고 있었다.
“어제……. 잤어요?”
“잤지.”
“…….”
“오자마자.”
침대에서 발을 내린 기욱이 반쯤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곧이어 새벽 네 시 사십 분에 맞춰 둔 알람이 울렸다. 서진 덕분에 딱 알맞게 일어난 셈이었다. 서진은 잠들기 전 그대로인 옷을 만지작거렸다.
“섹스했냐고 묻는 거잖아요.”
“옷 다 입고 잤으면서.”
“입고 했을 수도 있지.”
“다음번에 옷 입고 해 줄까? 오자마자 잠든 걸 어떻게 하라고?”
“술 취한 사람이랑 하는 거 좋아잖아요.”
“술 먹고 나랑 못 해서 아쉬워?”
“누가…!! 됐어요!”
서진은 기욱이 일어난 침대에 누워 이불을 얼굴까지 덮었다. 출근해야 하는 기욱과 달리 서진은 며칠 만에 오프였다. 괜히 재혁과 술을 마신 것이 아니었다. 잠이라면 제집이 훨씬 편했지만, 사실상 몇 시간밖에 못 자고 일어난 서진은 집에 갈 기운조차 없었다. 기욱은 이불을 덮고 있는 서진에게 다가갔다.
“씻고 출근할 거니까 알아서 쉬다가 가.”
“……해요.”
“뭐라고?”
대답하지 않을 줄 알고 거실로 나가려던 기욱이 이불 속에서 웅얼거리는 서진의 말을 듣고 다시 되돌아왔다. 서진은 여전히 이불에서 얼굴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잠시 뒤 이불 안에서 서진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당직 좀 그만 시키라구요!!”
“알았어.”
기욱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은 뒤 욕실로 향했다. 서진은 기욱이 나간 것도 모른 채 잠들었다. 잠이 든 서진이 자연스럽게 잠에서 깬 것은 해가 중천에 뜬 오후 무렵이었다. 하품하며 머리까지 덮여 있던 이불을 걷은 서진은 익숙하지 않게 텅 비어 있는 아파트를 둘러보며 눈을 비볐다. 인턴 일을 시작하고 이렇게 푹 잔 게 얼마 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기지개를 켠 서진은 거실에 있는 겉옷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오전 11시 10분, 한 시간 전쯤에 서윤에게서 전화가 와 있었다. 서윤에게 전화를 걸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서윤이 전화를 받았다.
“아, 그게……. 어제 술 마셨거든. 재혁이랑. 어어, 걔 맞아. 에이, 걔가 뭐 하러 J대를 와? H대서 지금 소아과 돌고 있다고 그랬을걸? 어…….”
서윤과 태연하게 통화를 하던 서진은 어디냐는 말에 잠시 말끝을 흐렸다. 이내 소파에 앉은 서진은 TV조차 없는 벽을 보며 통화를 지속했다.
“재혁이네 원룸이야.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어, 누나 오프였어? 한 삼십 분 정도? 금방 갈게!”
서진의 기억 한구석에는 아침에 출근하고 사라진 기욱이 떠올랐다. 기욱은 출근, 서윤은 오프. 모처럼 기욱의 방해를 받지 않고 서윤과 있을 수 있는 날이라는 뜻이었다. 서진은 씻는 둥 마는 둥 빠르게 샤워를 한 뒤 어제 입었던 옷을 챙겨 입은 후 아파트를 나왔다.
“누나!!”
“서진아, 빨리 왔네?”
서진이 벨을 누르기 무섭게 두꺼운 철문이 열리며 서윤이 나왔다. 깔끔한 신혼집 내부를 둘러본 서진은 거실에 있는 고가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윤은 막바지 화장을 하고 있었다.
“뭘 화장까지 하고 그래. 누가 본다고.”
“대충만 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 서진이랑 얼마 만에 외출인데 이쁘게 보여야지.”
“하하.”
건너편 화장대에서 들려오는 서윤의 대답에 서진은 낮게 웃었다. 서진은 서윤이 화장을 하는 동안 거실의 통유리로 바깥을 내려다봤다. 안개가 조금 껴 있긴 했지만, 한강이 훤히 보이는 뷰였다. 얼마짜리 집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욱이 자신에게 사 줬던 오피스텔이나 CCTV조차 고장 난 아파트를 합친 것보다 비싼 집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언제까지고 반지하의 밑바닥에서 살 거라 생각했던 예전과 비교하면 감히 쉽게 와 닿지도 않은 현실이었다. 사랑하고 아니고의 문제를 떠나 이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포기하라고 한다면 누군들 쉽게 할 수 있을까? 사랑을 차지하고 있는 요소의 절반은 돈이었다. 서진은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을 종종 하고는 했다.
“서진아? 거기서 뭐 해?”
“아냐. 나가자.”
서진은 화장을 다 하고 나온 서윤과 함께 복도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서윤은 1층 대신 주차장이 있는 B2 버튼을 눌렀다.
“맞다. 너 저번에 오빠 차 운전했다면서?”
“아, 응.”
“아침에 오빠 잠깐 봤는데 차 없이 왔다고 하더라고.”
“그래?”
기욱은 1004호에서 곧장 병원으로 출근했다. 제집인 아파트에서 병원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1004호에서 병원까지는 지하철로 한두 정거장, 택시로는 기본요금에서 몇백 원 추가되는 정도였다. 기욱이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서진은 알지 못했다. 서윤은 엘리베이터가 B2에서 멈추자 기욱의 차 키를 흔들었다. 서윤의 의도를 눈치챈 서진이 당황했다.
“누나, 나 초보 운전이야. 사고 나면 진짜 큰일 나.”
“에이. 우리 오빠 그 정도로 화낼 사람 아니라는 거 알잖아. 그리고 오빠 말로는 운전 잘한다던데?”
“그래도…… 멋대로 운전하는 건 좀…….”
“오늘 오후에 서진이랑 놀러 갈 거라니까 타라던데?”
“잠깐만, 매형이 그랬다고?”
“응. 싫으면 그냥 택시 타고 갈까?”
“아, 아냐. 그냥 내가 운전할게.”
다행히 기욱의 차는 엘리베이터를 나온 곳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서진은 시동을 켜는 사이 서윤이 했던 말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서윤은 기욱이 1004호 아파트에서 자고 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사실을 제외하고도 기욱이 차를 가지고 가지 않으려면 자신과 서윤이 다 오프이고 오후에 나갈 거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사실 둘 다 오프가 맞으면 놀러 나갈 건 뻔한 사실이긴 하지만 왠지 한 방 먹은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래저래 하고 나니 한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일단 어디 가서 점심 먹을까?”
“가고 싶은 데 있어?”
“뭐, 일단 나가 보자.”
생각해 둔 곳은 있지만 그 전에 운전을 똑바로 해서 아파트 단지를 나오는 것부터 고비였다. 서진은 조심스럽게 주차된 차를 빼냈다. 초보 운전은 벌써부터 지쳤다.
서진과 서윤은 번화가의 한 백화점에 도착했다. 어렵게 주차를 마친 서진과 서윤이 주차장에서 내렸다. 주말은 아니었지만, 번화가답게 사람은 많았다. 서진과 서윤은 백화점의 푸드코트에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빈자리가 많았기 때문에 들어가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서윤과 서진은 가게의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서진이 과는 정했어?”
“아직, 생각 중이야. 솔직히 누나랑 일하고 싶긴 한데…….”
어렸을 때부터 서진의 꿈은 서윤과 같이 일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만 해도 이렇게 같은 병원, 같은 공간에서 일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막연하게 꿈을 꾸던 시절이 현실이 되고 나니 기대에 부풀기는커녕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사실은 서윤과 같이 일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던 그 시절이 진짜고, 이렇게 서로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지금이 꿈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목 아래로 넘어가는 물이 차다는 게 느껴지니 꿈이 아님은 분명했다.
신경외과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중학교 시절 서진의 꿈이 막연하게 서윤과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면, 의대에 들어간 이후 서진은 의사는 서윤이 속해 있는 신경외과가 아니면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신경외과의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을 거란 것도, 앞으로의 기욱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무엇 하나 자신할 수 있는 것이 없는지도 몰랐다.
서진은 다 마신 물 컵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사실은…… 외과에 관심이 있어.”
응급의학과에 갈지, 외과에 갈지 정확하게 정한 것은 아니지만 신경외과보다는 그쪽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서진은 가장 자신과 같이 일하는 걸 기대하고 있을 서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서진이 서윤과 함께 일하는 것을 기대한 만큼, 서윤 또한 뒤를 쫓아오는 서진에 대해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맞는 거야. 같이 일하지 못하는 건 서운하긴 하지만, 당장 J대 병원을 떠날 생각은 없잖아? 그럼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거니까 가끔 시간 맞으면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잖아?”
“그…, 미안.”
“어머, 서진이가 미안해할 게 어디 있어.”
서윤이 서진을 달랬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전 카페를 들렀다. 서진은 커피를 먹고 싶지 않아 입구 근처에서 서윤을 기다렸다. 멀리서 커피를 받아 온 서윤과 낯선 사람이 몸을 부딪쳤다.
“누나…!”
“어, 서진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젊은 여자 두 명이었다. 기욱이 사 준 서윤의 가방 위에는 묽은 커피 얼룩이 남아 있었다. 가방의 브랜드를 알아본 여자 한 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변상을…….”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서윤은 여자들을 배려하듯 손으로 가방의 얼룩을 가리며 가방 안에서 물티슈를 꺼내 적당히 닦았다. 서윤을 대신해 여자들을 보낸 서진이 서윤에게 돌아왔다. 가방 브랜드에 대한 것은 잘 모르지만, 싼 가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서진은 적당히 얼룩을 닦은 뒤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오는 서윤을 보며 가볍게 숨을 골랐다. 돈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별로 변한 것이 없는 서윤의 모습에 조금은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누나 그…… 내가 외과에 관심이 있다는 거 말야.”
“응? 왜?”
“매형에게는 비밀로 해 줘. 아직 확정도 아니고,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할게.”
서진은 자신이 다른 과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기욱이 분명 화를 낼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서진이 신경외과에서 일하는 걸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서윤보다는 기욱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서진은 그렇게 서윤과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