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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5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2)(8권) (59/83)

Chapter. 55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2)

“졸려…….”

이른 오후,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은 채로 쓰러져 반나절을 꼬박 자다 일어난 우민은 본능적으로 정수기의 찬물을 따라 마셨다. 그 자리에서 찬물로 두 컵 이상을 마시고 난 뒤에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손목에 그대로 차인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잔뜩 눌린 머리를 긁적이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휴대폰을 만졌다. 별거 아닌 연락들이 와 있었다. 무의식중에 신경외과 단톡방에 들어가니 몇 시간 전에 올라온 대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ㅋㅋㅋ국시 발표났는데 ㅋㅋㅋ내 동생 떨어짐 ㅋㅋ이 정신나간놈을 어떻게 해야 좋음??」

「요즘 그거 떨어지는 놈도 있어? 어지간히 놀았나보네」

「얜 진짜.. 가문의 수치야… 고3때 어떻게 K대 들어갔는지 모르겠어.. 엄마 뒤집어 짐.」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내 친구 중에 삼수한 녀석 있어 ㅋㅋ국시 직전에 영국에 시각디자인 배우러 간다고 했다가 되돌아온 골때리는 새끼 ㅋㅋㅋ지금 H대 근무하면서 존나 잘지낸다 ㅋㅋㅋ」

……

「방금 엄마랑 통화했는데.. 절 보낸데요. 알아서 하라 그랬어요.. 내 동생이지만 진짜 핵노답 ㅠㅠ」

「맙소사 절 ㅋㅋㅋㅋ」

점심 무렵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간 모양이었다. 우민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 쪽으로 사람의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우민은 문을 열고 복도로 얼굴을 내밀었다. 복도에는 볼일이 있어 나갔다 온 서진이 막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던 중이었다. 서진은 갑자기 열리는 건너편 철문에 깜짝 놀랐다.

“교, 교수님? 무슨 일이세요?”

폐인이 된 꼴로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우민의 시선에 서진은 차마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우민이 건너편에 산다고 해도 실습이 끝나 J대 병원에 볼일이 없어진 서진은 우민과 마주칠 기회가 적었다.

서진은 한 달 전 기욱에 의해 일방적으로 휴대폰과 번호를 바꾸고, 기욱에 의해 우민의 번호를 삭제하고 난 뒤였다. 대부분의 동기가 자대 병원으로 실습을 나간 탓에 J대 병원에 있는 우민의 번호를 알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몇 명인가 우민의 수업을 들은 사람에게 물어봤지만, 아무에게나 번호를 알려 주지 않는다는 우민의 말은 틀리지 않은 모양인지 우민은 학생들에게 따로 번호를 알려 주고 다니진 않았다.

서진 나름대로 노력을 했음에도 실패를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우민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서진을 노려봤다.

“너 내 연락이 우습냐?”

“네?”

“내 연락이 우습냐고. 기껏 사람이 시험 잘 보라고 문자까지 보내 줬는데 무시하고, 시험 발표 났으면 났다고 말해야 할 거 아니냐.”

“그게 저…….”

“됐어. 국시는?”

우민은 바빠 보이는 서진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서진은 뺨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무사히 끝난 것 같아요.”

합격이다 불합격이다도 아니고, 무사히 끝이 났다니 참 서진다운 대답이었다. 우민의 톡에는 그거 하나 똑바로 못 해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은 놈도 있는 모양이다만.

“축하한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시험이라 주변에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던 서진은 갑작스러운 우민의 축하 말에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복도에서 집으로 넘어오는 찬 바람이 우민의 뺨을 스쳤다. 자신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서진을 본 우민은 들어가라며 손을 저었다. 우민이 집 문을 닫으려 하자 문 안쪽으로 손이 끼어 들어왔다.

“야야, 위험하잖아!!”

하마터면 문을 확 닫을 뻔했던 우민이 깜짝 놀라 문을 다시 열었다. 문에서 손을 뗀 서진이 우민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흘끗댔다. 서진은 기욱이 사 준 새 휴대폰을 양손에 쥔 채 수줍게 말했다.

“번호 좀 주세요!!”

“뭐?”

“제가 그……. 휴대폰을 바꿨는데, 번호가 다 날아가서……. 연락, 안 받으려고 했던 건 아녜요. 죄송합니다.”

“그런 거면 말을 했어야지.”

우민은 별걸 가지고 다 사과를 한다고 생각하며 서진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서진의 휴대폰은 출시된 지 한 달이 좀 넘은 새 휴대폰이었다. 고장이 나지 않아 한 휴대폰만 6년이 넘게 사용하고 있는 우민은 최신 핸드폰이 낯설었다.

“얼마냐 이거?”

“저도 잘 모르는데……. 백만 원 좀 넘을 거예요.”

“무슨 휴대폰이……. 자. 번호.”

“연락드릴게요.”

“그래.”

“아, 저기 그리고……!!”

서진이 문을 닫으려는 우민을 또다시 붙잡았다. 서로 시간이 안 맞아 못 본 만큼 할 말이 꽤 쌓인 듯싶었다. 서진은 우민의 번호를 다시 딴 것만으로도 기분이 꽤 좋았다. 기욱에게 어떻게 숨길지는 다시 생각해 보면 될 문제지만, 아예 저장하지 않고 외워 버릴 수도 있으니 방법은 많았다.

“인턴요. J대에서 할 거예요.”

“아부하지 마. 내 권한 아냐.”

우민이 J대 교수인 건 맞지만, 인턴 면접과는 거리가 멀었다. 말이 저렇지 면접을 담당하는 교수와 인사과 사람들을 모른다는 뜻은 아니었다. 우민이 아는 서진은 그렇게 할 필요조차 없는 성적이었다. 서진은 우민의 농담을 가볍게 받아쳤다.

“잘 보여야죠.”

“그럴 거면 J대를 졸업했어야지.”

“교수님도 H대 출신인 거 알거든요?”

“너…!! 그걸 어떻게 알았……!! 하아, 어쨌든 고생했다.”

아무리 합격이 확실한 시험이라고 해도, 시험은 시험이었다. 시험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우민의 격려에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술 마셔요.”

“싫어! 너랑 안 마실 거야!”

우민은 그날 밤 모텔에서 일을 똑똑히 기억했다. 우민에게 서진의 술버릇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서진과 술을 마셨다가 또 무슨 꼴을 당하려고! 우민은 획, 하고 문을 닫은 뒤 집 안으로 들어왔다. 털석, 소파에 주저앉기 무섭게 휴대폰에서 문자가 왔다. 바로 번호가 바뀐 서진에게서 온 문자였다.

「이번에는 제가 살게요.」

서진의 새초롬한 문자에 우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답장을 보냈다.

「돈도 못 버는 게 깝치는거 아니다 ㅡㅡ」

「돈 못 벌어도 술 살 돈은 있거든요? 불만이면 대출받아서라도 사면 되잖아요.」

「대출 소리하고 앉았네ㅋ 못하는 말이 없어. 나중에 시간 보고.」

답장을 보낸 우민은 소파에 몸을 옆으로 뉘인 뒤 소파 밑에 있는 이불을 가져와 덮었다. 추워서 2층에 있는 이불을 가지고 내려와 덮고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이후로 아예 소파에도 이불을 하나씩 쟁여 두고 있었다. 바로 올라가면 있는 편한 침대 두고 불편한 소파에서 뭘 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가끔 계단을 올라가는 것도 귀찮을 때가 있었다. 모처럼 할 일 없는 날이니 잠이나 한숨 더 자야겠다며 불을 전부 끈 뒤 소파로 돌아와 이불로 몸을 돌돌 말은 우민이 휴대폰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에 서진의 답장이 와 있었다.

「♥」

“이 자식 봐라.”

달랑 하트 한 개만 보내 놓은 서진의 톡에 우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민은 실눈을 뜨면서도 문자를 쳤다.

「하트 보내지 마 정들어.」

더 연락할 기운도 없고, 슬슬 휴대폰을 만지는 것도 귀찮아진 우민은 휴대폰을 소파 아래로 내려놓았다. 목까지 이불을 덮고 암막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의해 비치는 천장을 본 우민이 서진에게 온 문자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귀여운 자식.”

* * *

J대 병원 인턴을 시작하고 3개월. 병원의 막내나 다름이 없는 인턴 생활에도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한 서진은 그날따라 유독 잠이 오지 않아 병원에 있는 옥상 정원에 올라왔다. 분명 아침부터 병원을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며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한 탓에 온몸이 피로했지만, 그날은 유독 피곤하면서도 잠이 잘 오지 않은 날이었다. 슬슬 미적지근해지기 시작한 밤공기에 서진은 기지개를 켠 뒤 담배를 입에 물었다.

“뭐 해?”

“악! 깜짝아!!”

막 라이터에 불을 붙이려던 찰나 난데없이 나타난 시헌에 서진은 깜짝 놀랐다. 안 그래도 키가 작은 시헌이 더 몸을 숙여 서진을 보고 있으니 눈치채기가 힘들었다. 시헌과 거리를 벌린 서진이 불을 붙이며 담배 연기를 옆으로 내뱉었다.

“담배 피우는 거 안 보이냐?”

“이 시간에 왜 담배를 피워.”

“그러는 너는 이 시간에 뭐 하는데.”

“그냥.”

“그냥?”

“도망쳤어.”

서진은 하마터면 담배를 떨어트릴 뻔했다. 몸에 묻은 담뱃재를 턴 서진이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달각, 달각. 한동안 불붙이는 소리가 났다. 이놈의 편의점 라이터는 하루가 멀다고 고장이었다. 어떻게든 불을 붙이기 위해 고생을 하는 서진을 본 시헌이 한숨을 쉬더니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지포라이터를 서진에게 내밀었다. 서진은 시헌의 라이터를 가져와 불을 붙였다. 간신히 스파크나 이는 자신의 라이터와 달리 시헌의 라이터는 열기 무섭게 훅, 하고 불이 올라왔다.

“뭔. 라이터가 이렇게 좋아?”

“넌 편의점 라이터 쓰는 버릇 여전하네. 하나 사.”

“싫어.”

“2만 원밖에 안 해.”

“라이터에 2만 원씩이나 쓰고 싶지 않거든? 안 산다고!”

“편의점에서 라이터 산 돈 모아도 2만 원은 훨씬 넘겠다.”

시헌은 어련하겠냐며 서진에게 건넸던 라이터를 가져왔다. 사실은 서진이 오기 전부터 있었던 시헌은 담배를 그만 피우고 내려갈 생각이었다. 아무렴 이렇게 된 거 10분 일찍 내려가나 늦게 내려가나 똑같다는 생각에 시헌 또한 서진의 옆에 서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서진은 자신의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시헌을 흘끗댔다.

“진짜 튀었어? 혼나면 어떻게 해?”

서진은 다른 사람도 아닌 시헌이 이 새벽에 일하기 싫다며 도망을 쳤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시헌은 신경 쓰지 말라며 허공에 뜬 담배 연기를 손으로 내쫓았다.

“괜찮아. 중간에 사라지면. 다들 어딘가 숨어서 자는 거로 착각하더라고. 신경도 안 써.”

인턴이 된 지 3개월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서진과 시헌이 도는 과는 아직 너무 달랐다. 겹치는 과가 생기려면 6개월은 좀 지나야 할 것 같았다. 시헌이 비교적 힘든 과를 들어가는 데 비해 서진은 아직은 그런대로 할 만한 상태였다. 시헌은 다 피운 담배를 근처 쓰레기통에 버리며 한숨을 쉬었다.

“OS가 그렇게 힘들어?”

“월요일부터 72시간째 근무 중인데. 어디 숨어 있다가 나타나면 선배님들이 깜짝 놀라.”

“왜?”

“모르지. 튄 거 아닌가 걱정했나 보지. 하여튼 가 보면 알아. 저번 달에는 2명이나 도망갔대.”

그런 말을 하는 시헌은 꽤 담담해 보였다. 서진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응급실을 내려다봤다. 중학교 때였나? 시헌이 싸우는 바람에 늦은 시간에 병원에 왔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땐 병원 건물이 얼마나 커 보이던지, 설마 이 새벽에 병원 옥상에서 한가하게 담배를 피우며 응급실을 내려다볼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막연히 의사가 될 거야, 하고 떠들었던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말이다.

“넌 할 만하냐?”

“음, 뭐라고 해야 하지? 생각했던 거보다.”

“…했던 거보다?”

“훨씬 쉽다고 해야 하나?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기분이 들긴 해. 가끔.”

여유로운 시헌의 모습을 보아하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평소에도 인기척이 드물어 찾기 힘든 시헌이 작정하고 도망 다니면 시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시헌과 거의 정반대 과부터 시작하고 있는 서진은 내과부터 시작해서 저번주부터 흉부외과 인턴이 된 상태였다. 시헌이 담배를 끈 서진에게 되물었다.

“너는?”

“나 이번 주에만 간호사한테 욕먹고 3번 쫓겨났어. 다른 과 선생님들한테는 멍청하다는 소리까지 들었어.”

“…너 멍청해?”

“이게, 죽을래? 아니라고!!”

그야 레지던트나 오래 일한 간호사들에 비해 아직 부족한 건 맞지만, 서진은 같은 인턴 처지인 시헌에게 저런 말을 들으니 살짝 억울했다. 가운 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만지작거리던 서진은 고장 난 편의점 라이터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또 시헌에게 라이터를 빌리자니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아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아니, 별건 아닌데. 내가 내과랑 마취과 이런 데부터 시작해서 외과는 지금이 처음이란 말야? 근데…….”

서진은 시헌에게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날, 흉부외과에서 응급실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 거야.”

“그거 그냥 하면 되지 않아?”

“아니, ABGA(동맥혈검사)를 첫날에 어떻게 하냐고!! 넌 했어?”

“응.”

3개월이나 된 지금에서야 외과계를 처음 도는 서진과 달리 첫날부터 쭉 외과계를 집중적으로 돌고 있는 시헌은 당황하는 서진을 이해하지 못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와, 너 진짜…….”

“그거 잘못했다고 죽는 거 아니잖아.”

“그거야 그렇긴 한데…….”

서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래서야 같은 인턴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처음부터 외과계를 돈 자와 아닌 자의 차이인 것 같기도 하고.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시헌도 하나 남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시헌이 지포라이터로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이는 동안 담배 끝을 물고 건너편 병동을 보고 있던 서진의 입에 물린 담배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야? 강서진, 멀쩡한 담배를 왜 버려?”

“야, 박시헌.”

“어?”

“저거 사람이지?”

서진이 건너편 병동이 있는 건물을 손가락질했다. 병원 관계자들이 몰래 이용해 사실상 관계자용 옥상 정원이 되어 버린 곳과 달리 건너편 병동의 옥상은 아예 관리자 외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었다. 서진은 바로 아래층 복도에 켜진 불빛에 비쳐 흐릿하게 보이는 사람의 그림자에 인상을 찌푸렸다. 시헌은 다급하게 담배를 끄며 서진이 말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음. 그런 거 같은데.”

시헌이 말을 하기 무섭게 난간 쪽에 서 있던 남자의 그림자가 아래쪽으로 훅, 하고 떨어졌다.

“어어? 뭐야?”

서진이 당황하며 아래쪽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새벽이라 뭐가 보일 리는 없었다. 아래쪽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에 서진과 시헌이 눈을 마주쳤다.

* * *

모처럼 서윤과 출근 시간이 맞은 기욱은 지하주차장에 차를 댔다. 차가 완전히 주차되자 서윤은 기다렸다는 듯 운전석에 앉은 기욱에게로 다가와 입술을 맞췄다. 옆으로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선팅이 되어 있는 데다 지하주차장의 어두운 분위기상 두 사람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기욱은 길어지는 키스에 서윤을 살짝 밀어냈다.

“너무 오래 하지 말고.”

“에이, 오래 안 했거든?”

서윤이 기욱의 허리를 안으며 또다시 입술을 덮쳐 왔다. 평소보다 일찍 도착했던 터라 아직 그럭저럭 여유가 있었다. 기욱은 눈을 살짝 감으며 서윤과의 키스에 집중했다. 서윤의 키스는 능숙하진 않지만, 적극적인 편이었다. 서윤과 키스를 할 때면, 서진도 좀 적극적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거치대에 걸어 뒀던 휴대폰에서 불빛이 났다.

“서윤아 나 전화.”

모르는 번호였지만, 기욱은 서윤을 잠시 밀어내며 전화를 받았다.

― 누구십니까?

― 아, HKS 방송국 기자입니다. 혹시 박 교수님 되십니까?

서윤이 입술 모양으로 누구냐며 눈치를 줬다. 대답하기 모호했던 기욱은 손을 살짝 들어 양해를 구한 뒤 몸을 살짝 틀어 전화를 계속했다. 물론, 그리 달가운 말투는 아니었다.

― 무슨 일이십니까?

― 다른 게 아니라 오늘 새벽쯤에 병원에서 투신자살한 사람 말입니다. 이전에 J대 병원 신경외과에 입원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그때 교통사고가 난 분이 교수님이시라고…….

“잠깐만 서윤아.”

말을 조심해 대화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서윤의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 느낌에 기욱이 다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자신과 교통사고가 났던 사람이라면 ‘서정수’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자살이라니, 그건 처음 듣는 소리였다.

― 누가 투신을 해요?

― 아. 그게, 저희도 확인하고 있긴 한데. 이름이 서정수라고…….

기자의 입에서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이름이 나왔다. 기욱이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서윤도 가방을 챙겨 차 밖으로 나왔다.

― 전화 끊겠습니다.

― 자, 잠깐만. 교수니…!

기욱은 빠르게 통화를 종료한 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서윤이 기욱의 등을 살짝 안으며 다가왔다.

“오빠, 무슨 일이야?”

“하아, 별거 아냐. 잠시만.”

서윤이 챙겨 온 가방을 열어 안을 확인해 본 기욱이 뒷좌석에 걸려 있는 정장 주머니를 뒤졌다. 정장 마이에서 조금 오래된 휴대폰이 나왔다. 전화가 오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재중과 문자들이 꽤 많이 쌓여 있는 것을 본 기욱은 가차 없이 세컨드 휴대폰을 종료했다. 기욱은 일부러 정면이 아닌 한참을 돌고 돌아 연구실로 향했다. 서윤은 기욱이 자신과 오래 있으려고 일부러 돌아가는 거로 생각하며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연구실로 무사히 들어오자 기욱은 기다렸다는 듯 서윤을 불렀다.

“서윤아.”

“응? 왜?”

“오늘, 아니. 당분간 모르는 전화나 연락 오면 받지 마.”

“아까 전화 온 거랑 비슷한 거야?”

“그럴걸. 지난번에 나 교통사고 났을 때 입원했던 환자.”

가방을 내려놓은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의 두 번째 휴대전화기 번호까지 알고 있다면 서윤에게 연락이 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서윤이 기욱의 부인인 것을 떠나 같은 병원, 같은 과에 일하는 의료진으로서 기욱은 숨겨 봤자 좋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뭐, 그렇게 말하는 기욱도 정혁을 만나 보기 전까지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는 없었다.

* * *

“야야, 박기욱. 박기욱!”

저녁 무렵 응급 환자 때문에 외상센터에 들른 기욱을 발견한 정혁이 조용히 손을 까닥였다. 혼자 환자의 상태가 신경 쓰여 내려왔던 터라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환자 전담 간호사는 기욱과 이야기를 마치기 무섭게 볼일을 보러 갔다. 기욱은 성큼성큼 정혁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센터 구석에 새로 생긴 정혁의 작은 연구실이었다. 좁은 방 안에는 아직도 새 페인트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전에 쓰던 연구실은 정리했습니까?”

“미쳤냐. 그 좋은 데 방을 왜 빼? 뭐, 센터 생기고 올라갈 시간도 없어서 창고방 신세긴 하지만. 그보다 너 한참 찾았다. 전화는 왜 다 꺼 놨는데?”

“왜겠습니까?”

기욱은 빈정거리며 벽에 몸을 살짝 기대 정혁을 노려봤다. 기욱의 휴대폰이 연락이 안 돼도,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규건이나 다른 누군가를 통해 연락이 갈 테니 오늘 하루 일을 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니까 평소에 처신 좀 잘하라고 그랬잖아.”

“그런 말 하시는 거 보니 교수님은 괜찮으신가 봅니다?”

“메일함은 사망 직전이긴 해.”

“누굽니까? 제 번호 팔고 다니는 새끼가?”

“나 아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

“그게 말이다…….”

덕분에 종일 휴대폰 없이 일을 하는 기욱은 평소보다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정혁과 만나기 전까지 기욱도 대충 건너 소문을 듣기는 했다.

“진짜로 우리 병원에서 자살한 겁니까?”

“어, 어제 새벽 2시 좀 넘어서인가. 서 교수가 가장 먼저 데려오긴 했는데 워낙 상태가 심각해서 꿈적도 않더라. 덕분에 날밤 꼬박 새우고 죽겠다, 아주. 그 인간 도대체 뭐야?”

“그걸 저한테 물으면 어쩌자고…… 아.”

“왜?”

“아뇨, 아닙니다.”

기욱은 피곤함에 절어 눈을 비비는 정혁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죽기 전 USB 비슷한 걸 받은 기억이 났었다. 받은 건 기억이 나는데 그 뒤에 정신이 없어서 사실상 까먹고 있었다. 기욱은 왜 그 중요한 걸 잊어버렸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보다. 부검은요?”

“지난해. 그 뭐냐, 유가족을 찾긴 찾았는데. 하여튼 부검은 안 한댔어. 병원 CCTV도 있고. 아, 네 동생이랑 강서진이 떨어지는 거 봤다더라.”

“서진이랑 시헌이가…?”

갑작스럽게 나온 이름에 기욱이 미간을 찌푸렸다. 정혁은 언제 뒀는지 모르는 식은 커피를 전부 마시며 텀블러를 책상의 공간에 탁, 하고 내려놓았다.

“몰라. 게네 인턴이잖아. 둘이 새벽에 몰래 도망이라도 쳤나 보지. 아까 형사님 한 분이랑 이야기했는데, 특별한 건 없었대.”

“아, 그래요.”

기욱은 정혁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기욱의 귀에는 두 사람이 자살하는 장면을 봤다는 사실보다 둘이 그 시간에 옥상에 있었다는 말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침 들어오는 간호사에 정혁이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먼저 밖으로 나갔다. 잠시 서 있던 기욱도 금방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신경외과로 돌아가려던 기욱은 발길을 틀어 서진이 인턴으로 있는 흉부외과로 향했다. 기욱은 흉부외과에 도착하기 전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오 씨.”

휴대폰은 전부 연구실에 전원이 꺼진 채로 있었다. 습관처럼 서진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찾은 기욱은 인상을 찌푸렸다. 휴대폰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불편한 일일 줄이야. 결국, 온전히 흉부외과 병동에 도착한 기욱이 마침 지나가는 레지던트 하나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 인턴. 강서진이라고.”

“아, 서진이요? 걔 진작 퇴근했죠. 근데…….”

그는 기욱의 가슴 부근에 요란하게 달린 신분증을 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기욱과 서진의 관계를 병원 내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과 교수가 일반병동에까지 내려와 인턴을 찾는다는 것은 그의 경험상 좋은 일보다는 안 좋은 일일 확률이 높았다. 이제 막 2년 차인 그가 기욱의 눈치를 살폈다.

“서진이가 신경외과 선생님들에게 무슨 사고라도 쳤나요?”

“아뇨.”

“그래요? 호,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예. 수고하세요.”

서진이 퇴근했다는 사실을 안 기욱은 거침없이 등을 돌려 자리를 떴다.

* * *

모처럼 일찍 퇴근한 서진은 10시가 좀 넘었을 무렵 잠에서 깼다. 샤워하고 나온 서진은 초인종 소리에 인터폰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문을 열어 얼굴을 내밀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복도에 서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서진.”

“우악!!”

문 뒤쪽으로 나타난 우민에 서진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민의 손에는 바로 건너편 편의점에서 산 술과 안주들이 담긴 봉지가 들려 있었다. 서진이 문을 완전히 열었다.

“짜식, 그 정도로 쫄기는.”

“숨어 있었으니까 그렇죠.”

“당연히 너 놀래켜 주려고 그런 거지.”

“진짜 놀랐어요.”

“왜? 오면 안 되는 사람이 집에 찾아오기라도 할까 봐?”

“그런 건 아닌데…….”

서진은 정곡을 찌르는 말에 흠칫, 놀라며 말끝을 흐렸다. 우민이 신발을 벗고 서진의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왔다. 서진은 우민이 내려놓은 봉지 안을 눈으로 대충 훑었다. 소주에 맥주, 매화주에 안주는 편의점에 있는 안주를 종류별로 털어 온 것 같은 수준의 양이었다.

“오늘 저 일찍 끝나신 건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흉부외과에 친한 애들이 좀 있거든.”

서진은 그렇겠거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술은 왜 사 온 거예요?”

“어쭈, 이거 봐라. 너 저번에 나한테 술 마시자고 그랬잖아!”

“그런 약속을 하긴 했었죠. 근데 그건…… 이런 식으로 편의점 술 약속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편의점에서 사든, 식당에서 마시든 다 똑같은 소주 아니냐. 싫으면 말고.”

안주까지 따지면 혼자 먹기에 많은 양이지만, 시간을 두고 먹는다면 마시지 못할 것도 없었다. 우민이 술과 안주들이 담긴 봉지를 들고 등을 돌리려 하자 서진이 다급하게 우민의 팔을 붙잡았다.

“마, 마실래요!”

“우리 집 올래?”

“교수님 집이요?”

“집이라고 할 것도 없긴 하지만 말이다.”

서진은 오히려 자신의 집보다 우민의 집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민의 집이라면, 적어도 기욱이 찾아왔을 때 걸릴 확률은 더 낮았다.

“교수님만 괜찮으시다면요. 옷 챙겨 입고 올게요!!”

서진은 우민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가 빠르게 겉옷을 챙겨 입었다. 바로 건너편인 우민의 집을 들어간 서진은 마치 낯선 공간에 들어온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같은 오피스텔, 서진이 사는 방이나 우민이 사는 방이나 구조는 같았다.

오피스텔로 이사 온 지 1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새집 티가 풀풀 나는 데다 기본으로 제공되는 가구 외에 별다른 가구가 존재하지 않는 서진의 방과 달리 우민의 방에는 서진의 방에 없는 가구들이 꽤 많이 있었다. 특히 벽 한쪽을 가득 메운 서재는 도무지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책장은 거의 천장 밑까지 아슬아슬하게 올라와 있었다.

“이게 집에 들어가요?”

“당연히 맞춤 제작한 거지. 야, 말도 마라. 그거 맞춘다고 쇼를 했다.”

“하하, 뭐가 엄청 많긴 하네요.”

기욱의 방도 정신이 없다고 느낄 때가 많은데, 우민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우민의 방은 집이라고 하기보다는 침대가 있는 제2의 연구실 같은 느낌이었다.

“뭐, 이래 봬도 나름대로 교수 아니냐. 한 권 두 권 사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지. 필요한 책 있으면 말해. 보게 해 줄게.”

“주는 선택지는 없어요?”

“있겠냐!! 야! 거기 있는 책들 임마, 프리미엄은 둘째 치고 구하기 힘든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알았어요. 화낼 거까지는 없잖아요.”

“내 책은 소중해.”

아마 기욱이었다면 서진이 말하지 않아도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보기와 달리 우민은 책에 대한 애정이 높은 사람이었다. 실제로 자세히 보니 의학 관련 책이 아닌 것도 더러 있었다.

“방이 더러운 건, 이해해 줘라. 솔직히 청소하려고 해도 시간이 없다, 시간이.”

“그 사람이랑 같은 교수라는 게 믿기지는 않네요.”

바닥에서 먹자며 잔을 가져와 앉은 우민의 앞에 앉은 서진이 무의식중에 머릿속에 있던 말을 중얼거렸다. 똑같이 집에 못 가는 시간이 많아도 기욱은 하루가 멀다고 대청소를 하는데 말이다. 서진의 앞에 놓인 컵에 소주를 따르던 우민이 서진의 말에 물었다.

“그 사람?”

“아, 그러니까…… 매, 매형이요.”

서진의 목소리가 무슨 죄를 지은 사람처럼 기어들어 갔다. 사실 남들 앞에서 기욱을 매형이라 불러 본 것은 처음이었다. 우민은 안주를 뜯느라 서진의 표정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기욱이? 아, 뭐. 일단 그렇긴 하지.”

“교수님이 매형보다…….”

“야!! 훨씬 선배지!! 나 4년 차 때 걔 1년 차인가 그랬어. 뭐, 그것도 몇 년 전 이야기긴 한데. 레지던트 끝나고 나서 보니까 선배니 후배니 따지는 것도 별 의미는 없더라고. 한잔해.”

우민이 오징어포를 입에 넣으며 유리컵을 내밀었다. 언제 따라 놓은 건지 유리컵의 절반이 좀 안 되게 따라진 소주를 본 서진이 당황했다. 정작 우민은 늘 이렇게 먹는지 별다른 위화감이 없어 보였다.

“못 마실 거 같으면 나눠서 마셔.”

“아뇨. 마실 수 있어요.”

서진은 우민과 함께 잔을 부딪친 뒤 술을 마셨다. 순식간에 소주를 비운 우민이 유리컵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그래도 말야. 선배 알기를 좆같이 알라는 건 절대 아니다?”

“하하, 그럼요.”

“너도 힘들지. 고생하는 거 다 들었다. 한잔 더 해.”

우민이 서진의 빈 잔에 빠르게 술을 따랐다. 소주 한 병을 비우는 데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만 조금 빠를 뿐, 중간부터는 슬슬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우민은 소주 대신 맥주와 안주를 먹으며 편하게 다리를 풀고 앉았다. 우민의 목소리가 약간 올라가 있었다. 우민은 서진을 손가락질했다.

“근데 너.”

“네?”

“박기욱이랑은 친하냐?”

갑작스러운 우민의 질문에 서진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친하냐는 게 어디까지를 말하는지 알 수가 없는 포괄적인 질문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그걸 왜 물어보세요?”

“아니, 아니. 보통 물어볼 수도 있는 거잖아.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고 그래?”

“제가 예민했나요?”

“좀? 아니면 말고.”

우민이 소주가 따라진 머그잔 안에 맥주를 들이부었다. 서진의 잔에는 아직 술이 남아 있었다. 불편해하는 서진에 괜히 물어봤나 싶기도 하지만, 술이 좀 들어간 탓일까? 우민은 이 정도 개인적인 질문은 해도 될 만한 사이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너네 누나, 그러니까 강 선생이랑 박기욱이랑 결혼했잖아. 지난번에 네 얘기 들었을 때 누나 말고 달리 가족은 없는 모양이고. 그래서 물어본 거야. 그 자식은……. 뭔가 병적으로 자기 것에 집착하는 구석이 강한 녀석이니까.”

목으로 넘어가는 맥주가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먹던 서진이 기도에 넘어갈 뻔한 것을 간신히 넘긴 뒤 비어 있는 잔을 무릎 앞으로 내려놓았다. 우민의 말대로 기욱은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건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다. 서진의 기준에서 기욱의 집착은 과거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알다마다. 우리 과에서 그 자식 성격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아, 넌 아직 잘 모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기욱이가 그놈의 성격 못 죽여서 병원 발칵 뒤집어 놓은 게 한두 번이 아닐걸. 그거 말하면 날밤 새워. 큭큭. 나이도 어린 녀석이 눈에 뵈는 게 없다고.”

“하하, 좀 그런 게 있지.”

왠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느낌이 든 서진이 어설프게 웃었다. 서진도 병원에 있으면서 기욱이 쳤던 사고들 일부를 건너 들은 기억이 있었다. 사고라고 하기보다는 자존심 싸움 같은 느낌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너도 알다시피 걔네 집안이 보통 집안이냐. 다른 데 같았으면 쫓겨나고도 남았을걸. 그래도 인턴이나 레지가 무슨 힘이 있어? 지도 힘없는 걸 알긴 안 모양인지 공부는 무서울 정도로 하더라고.”

“그래요?”

“그 자식 진짜 장난 없었어. 약간 악에 받친 느낌?”

우민은 얼마 남지 않은 육포 안주와 함께 기욱을 씹었다. 사실상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 앞에서 씹어 대는 건 예의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서진은 오히려 우민의 욕에 속이 시원했다.

“아, 집에 꼬박꼬박 들어가는 건 좀 짜증 났어.”

교수도 아닌 주제에, 집에 가고 싶은 건 기욱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민이 느끼기에 기욱은 자신과 관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되든 알 바가 아니라는 경향이 강했다. 교수가 된 지금과 레지던트 시절의 기욱은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상황이 달랐다. 그런 이야기를 해도 벌써 한 햇수로 한 손가락이 넘어가는 옛날이야기일 뿐이었다.

“그거 당연하게 쉬는 거잖아요.”

“어쭈? 지금 편드는 거냐?”

“꼭 그런 건 아닌데…….”

“하긴, 그만큼 얻어먹었으면 편도 들어 주고 해야지. 안 그래?”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서진은 영문을 몰라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우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받아먹었다는 표현은 좀 그렇긴 했지만, 기욱이 서진에게 해 준 것을 자잘하게 센다면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서진은 가끔 우민이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말의 예리함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어? 이 집. 박기욱이 걔가 해 준 거 아냐?”

“아, 어떻게 알았어요?”

“얌마. 집이 이래 좁아 보여도 여기 동네가 직장인들이 많아서 집값이 꽤 비싸. 그리고 이 오피스텔은 신축이라 주변보다 더 비싸고. 전세금이랑 월세만 해도 너 같은 학생이 감당할 수 있는 돈이 아니라고. 강 간호사가 돈을 못 번다는 게 아니라, 그걸 감안해도 비싸다는 거지. 알지? 무슨 말 하는지?”

“하하, 네.”

우민은 서진이 기분 나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 말을 이어 갔다.

“그 자식, 재수 없어도 남아도는 게 돈이니까.”

“집값이 비싸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 사람은 그냥.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도 가끔 그래. 같은 인간으로서 자괴감 들 때가 있어. 걔 볼 때면.”

“교수님같이 잘난 사람한테 들으니 좀 의외네요.”

“뭐가? 나 이래 봬도 평범하게 살아왔어.”

우민이 새 소주를 뜯어 서진에게 따라 줬다. 술자리는 한 시간가량 정도가 더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 술이 떨어져 갈 무렵에는 술보다는 대화의 비중이 조금씩 늘었다.

“뭐야. 너 그럼 얼마 안 있으면 우리 과 오겠네?”

“그렇죠. 솔직히 좀 그런 게요. 좀 적응하겠거니 싶으면 과가 바뀌니까. 정신없긴 하더라고요.”

“인계는 누구한테 받는데?”

“어…. 저 아직 연락 안 해 봤어요. 시간 좀 남았으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서진이 마지막 남은 과자를 뜯어 먹으며 대답했다. 매번 연락해야지 해야지 해 놓고 미루던 게 벌써 이렇게 되어 버렸지만, 왜인지 별다른 걱정은 들지 않았다.

“너 이 자식, 우리 과 그렇게 만만한 데 아니다. 물렀네! 아주. 그래서 어느 세월에 전문의 딸래?”

“아직 신경외과 간다고 정한 적 없는데요.”

“나랑 술 마셨으면 끝난 거야.”

“아니, 저 진짜……. 고민 중이에요.”

“뭐?”

술기운에 서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괜히 우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 서진이 한숨을 쉬며 푸념을 늘어놓듯 말했다.

“그야 교수님 밑에서 일하는 거나, 신경외과나 선생님들도 다 좋고. 누나랑 일하는 게 꿈이기도 했으니까 나쁘진 않은데요. 그냥, 모르겠어요. 이게 맞는 건가 싶을 때가 있고……. 의사를 관두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좀 그래요.”

서진도 술에 조금 취한 상태라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우민은 서진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래. 잘 생각해서 하고 싶은 거 해 봐. 아직 안 돌은 과도 많잖아.”

“그렇죠? 말이라도 그렇게 들으니까 좋네요.”

“진심이야 임마. 난 딱히 너 필요 없다? 그보다 연락해.”

“뭐, 뭘요?”

“낮에 오지 말고 새벽. 2시 이후로 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새벽 2시에 찾아오라니 서진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그거 집에 들어가지 말라는 소리잖아요.”

“오늘이 운이 잘 맞은 거야. 앞으로 스케줄이 좀 빡빡해서 언제 집에 또 올지 몰라. 다음 주 안으로 와라.”

서진은 그제야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했다.

“인계 말씀하시는 거 맞죠? 교수님이 해 주시려고요?”

“그래, 그러니까 한잔해.”

우민이 마지막 남은 술을 반 나눠 서진에게 따랐다. 서진은 몇 번이나 괜찮다고 했지만, 우민은 그런 서진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 *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갔다. 서진은 결국 우민에게 인계를 받은 뒤 신경외과로 넘어왔다. 신경외과에서 일하면 서윤을 볼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서로 하는 일이 너무 달라 대화를 하기는커녕 각자 자기 일 하면서 얼굴 한두 번 보는 것이 다였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고 이틀이 지났을 무렵 잔뜩 짜증이 난 표정의 레지던트 한 명이 의국 안으로 들어왔다.

“강 선생님.”

“네?”

“잠깐 저랑 얘기 좀 해요.”

“뭐야? 무슨 일인데?”

“별거 아녜요.”

3년 차 선생님이 무슨 일이냐 묻자 그녀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서진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이 없는 안쪽 복도로 들어가기 무섭게 그녀가 서진을 향해 쏘아붙였다.

“1시에 입원한 환자 오더 넣으신 거 선생님이죠?”

“아, 다들 바쁘신 거 같아서. 어쩌다 보니까 제가 했는데요. 문제 있어요?”

“문제 있으면 책임지시게요?”

“그런 건 아닌데…….”

“문제는 없어요. 근데 왜 책임 못 질 일 하세요? 인계받을 때 꼭 주변 선생님들한테…… 아, 진짜. 도대체 인계 누구한테 받은 거예요?”

큰 문제는 아니지만, 환자가 잘못되거나 일이 꼬였을 경우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건 저년차인 그녀였다. 일일이 그런 일을 설명하기도 지친 그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서진을 노려봤다.

“인계요?”

“네. 누구한테 받았냐니까요?”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 서진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변에서 교수님 와이프의 동생이니 뭐니 하면서 잘 봐준다고 해도 그녀의 눈에 서진은 그냥 인턴이었다. 그녀는 그런 사소한 이유로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해 줄 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주변에서는 사람 봐 가면서 하라고 하지만 그건 자기들 사정이고. 그녀는 아래로 묶은 머리가 거의 다 풀려 산발이 되기 직전인 앞머리를 쓸어내렸다. 한참 동안 그녀의 눈을 피하던 서진은 머리를 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안 그래도 교수님을 등에 업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거기다 대고 교수한테 인계를 받았다는 등의 소리를 했다가는 미운털이 아니라 가시를 박아 쑤시는 꼴이었다. 서진은 마침 자신의 뒤로 시헌이 신경외과 인턴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박시헌이요.”

“박시헌이 누구…… 아. 시헌이?”

서진에게는 요 이틀 동안 강 선생님, 하고 딱딱하게 불러 댔던 것과 달리 시헌의 이름이 나오자 그녀의 표정이 180도 달라졌다. 어쨌든 그녀가 아는 시헌과 서진이 말하는 시헌이 일치하는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서진은 달리 떠오르는 대안이 없어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걔가 그럴 애가 아닌데…… 하아. 알았어요. 어쨌든 다음부터 부탁이니까 멋대로 하지 마세요. 네? 선생님이 사고 치면 다 제가 책임져야 한단 말이에요!”

“죄송합니다.”

“죄송한 거 알면 조심해요.”

그녀는 획, 하고 서진을 지나쳐 의국으로 들어갔다.

“하아…….”

서진은 괜한 거짓말을 한 것 같은 죄책감에 이마를 내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 * *

며칠 후 서진은 신경외과 환자의 상태를 보러 응급실로 내려갔다. 환자의 상태를 살핀 뒤 보고를 하러 올라가려던 순간 지나가는 시헌과 몸을 부딪쳤다.

“죄송……. 어? 박시헌? 너 왜 여기에……?”

“너…….”

“바빠?”

잠시 할 말이 있다는 듯한 서진의 표정에 시헌이 빠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다들 각자 자기 일 하기 바쁜 것 같은 분위기에 시헌이 앞장서 쪼르르 응급실 밖으로 나왔다. 시헌은 벽 쪽으로 선 뒤 몸을 꼿꼿하게 세워 서진을 올려다봤다. 작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기죽지 않는 당당함은 여전했다.

“바빠. 짧게 말해.”

“미안.”

오히려 서진이 그런 시헌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인계 문제로 혼이 나고 다음 날 즈음에인가 시헌에게서 “너 사고 쳤냐?” 하는 문자가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이 바빠 대답을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녀가 시헌에게도 한 소리를 한 모양이었다. 당연히 서진에게 인계를 해 준 적이 없는 시헌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잔소리에 날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적당히 인계해 줬다고 입을 맞추긴 했지만, 기분이 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너 때문에.”

“…….”

“혼났잖아.”

“진짜 미안해.”

서진은 시헌의 이름만큼은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입을 맞춰 줄 사람이 시헌 외에 떠오르지 않았다. 마침 시헌이 타이밍 좋게 서진의 전에 신경외과를 돈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

“너 인계, 누구야?”

“내가 그걸 말하기가 좀…….”

아무리 시헌이라고 해도 우민에 대해 말을 하기는 껄끄러웠다. 멀어진 시간만큼 서로의 생활에도 갭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형?”

서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침 시헌을 발견한 간호사 한 명이 언성을 높여 시헌을 불렀다.

“박 선생님!!”

시헌이 한숨을 쉬며 바깥으로 손을 흔들었다.

“하아, 가 봐.”

서진도 일이 바빴던 터라 서둘러 신경외과 병동으로 올라갔다.

* * *

서진을 보낸 시헌은 남은 일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10시가 좀 지났을 무렵 시헌을 발견한 정혁이 손을 까닥였다. 응급실과 외상센터 중간에 있는 외부 자판기에서 캔커피 두 개를 뽑았다. 정혁이 캔커피 하나를 시헌에게 건넸다.

“저 금방 들어가 봐야 하는데요.”

“나랑 있었다고 그래. 할 만큼 했잖아.”

“그거야 그렇긴 하죠.”

시헌은 정혁이 주는 캔커피를 따 그 자리에서 반쯤 마셨다. 시헌은 간단하게 빵으로 저녁을 때운 이후 네 시간째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아까 윤성이랑 통화했다. 오프날 나와 줘서 고맙다더라.”

“손만 있는 공기인데요.”

“공기라도 있는 거랑 없는 거랑 공기의 질이 틀리지. 설마 EM 인턴 애가 OS 마지막 날 그렇게 날밤 꼬박 새우고 넘어왔을 줄 누가 알았겠냐? 말은 들었지만 다른 과 넘어가기 직전까지 일 시키는 건 좀 아니지.”

“하하. 저도 아사 직전까지 갔었어요. 근데 그거 교수님이 할 말씀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야. 자진해서 오는 애들도 다 관두는 마당에. 우린 그래도 인턴은 적당히 하다 보낸다.”

“도움이 안 되니까요.”

“그렇지. 그래도 넌 꽤 부려 먹었던 거 같은데?”

“솔직히 살짝 짜증 났었습니다.”

노골적인 시헌의 말에 정혁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퍽 하면 반항하며 기어오르려고부터 하는 형인 기욱과 달리 정혁은 시헌이 꽤 편했다. 코흘리개 꼬맹이 때부터 봤으니 더 그럴 수도 있었다. 교복 입고 자기 형 찾겠다고 아빠한테 전화해서 병원 발칵 뒤집어 놨던 녀석이 같은 가운 입고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혁이 느끼기에도 새롭긴 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싶기도 하고.

“나중에 윤성이한테 술 한번 얻어먹어. 너도 얼마 없는 오프 시간 쪼개서 일하는 거 아니냐. 너 밤새워 일했다고 해서 거기서 출근 시간 미뤄 주는 거 아니잖아. 지금 무슨 과냐?”

“안과요.”

“아, 그나마 좀 낫네. 어쨌든 갈 테니까 오늘이랑 며칠만 더 고생 좀 해 줘라. 누가 괴롭히면 말해.”

“응급실 사람들 다 괜찮아요. 목말랐는데, 커피 잘 마셨습니다.”

시헌이 다 마신 커피 캔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커피 캔을 쓰레기통에 버린 뒤 시헌은 응급실로 돌아왔다. 다행히 시헌과 정혁이 나가는 걸 본 사람들은 꽤 돼서 돌아온 시헌을 두고 뭐라고 나무라지 않았다.

“환자 어딨어?”

“어, 형.”

새벽에 머리가 어지럽다면서 구급차로 실려 온 환자가 하나 있었다. 신경외과에 노티해 놓긴 했지만, 설마 기욱이 직접 내려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시헌은 살짝 당황했다.

“이쪽.”

시헌이 기욱에게 환자를 안내해 준 뒤 다른 일을 하러 갔다. 10분이 좀 지났을 무렵 시헌은 빈 컴퓨터에 앉아 밀린 오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새벽이 되자 응급실은 한가해지기는커녕 무슨 번화가의 클럽처럼 사람들이 북적거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욱이 시헌의 옆으로 다가와 키보드 근처로 손을 올렸다.

“박시헌.”

“형 아직도 안 갔어?”

“올라갈 거야. 그보다 너 우리 애들한테 혼났다며.”

오더를 마무리한 시헌에 뒤에 있는 의사가 서성거리며 비켜 줄 수 없겠냐는 듯 눈치를 보냈다. 시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한쪽으로 비켜섰다. 아무리 시헌이라고 해도 황금 같은 오프날에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일하고 있으니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의 눅눅한 공기와 낮은 천장의 조명이 시헌을 좀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형 때문이잖아.”

뒤쪽으로 성인 남성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 남자와 정신이 하나도 없는 간호사와 의사들의 외침에 응급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시선을 돌렸지만, 정작 시헌과 기욱은 서로를 바라볼 뿐 눈 하나 끔벅하지 않고 있었다. 시헌은 기욱의 침묵이 새삼 놀랍지는 않았다. 서진이 입을 다물고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릴 만한 사람이라면 기욱밖에 없었다.

“형 말고 더 있어? 강서진, 인계한 거. 적당히 하라고.”

오더를 끝냈지만, 시헌은 아직도 할 일투성이였다. 서둘러 아까 봤던 환자의 상태를 한 번 더 살피러 가려던 중 시헌이 말을 꺼낸 순간부터 쭉 입을 다물고 있던 기욱이 다급하게 시헌의 팔을 붙잡았다. 시헌의 중얼거림을 들은 기욱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

시헌은 기욱에게 붙잡힌 팔을 내려다봄과 동시에 등 뒤로 싸한 느낌이 들었다. 기욱이 시헌의 손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거꾸로 시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피곤해서 적당히 생각나는 말을 막 한 건 맞지만, 명백히 엄청난 실수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과 레지던트에게 혼이 난 시헌을 좀 놀려 주려고 내려왔던 기욱은 예상치 못한 시헌의 말에 당황스러웠지만, 이미 머리가 전부 돌아간 뒤였다.

“됐다. 알았어.”

강서진. 두 사람은 속으로 같은 이름을 생각했다. 기욱이 등을 돌리자 이번에는 시헌이 서둘러 기욱을 붙잡았다. 뭔가, 잘못됐다.

“왜?”

“못 들은 걸로 해.”

“뭘.”

“씨발, 못 들은 거로 하라고!!”

시헌의 큰 외침에 환자의 비명에도 눈 하나 끔벅 안 하던 의료진들까지도 무슨 일인지 고개를 기웃거렸다. 기욱은 시헌의 손을 가볍게 쳐 냈다.

“박시헌 목소리 낮춰.”

“못 들은 거야. 아무 말도 안 했어.”

“알아.”

시헌의 뒤쪽에 있는 의사가 시헌을 부르는 듯한 손짓을 했다. 기욱이 손가락을 뒤로해 눈치를 줬고, 시헌은 인상을 찌푸리며 기욱이 올라가는 것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시헌은 멀어지는 기욱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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