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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5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58/83)

Chapter. 55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번거롭게 하기는.”

규건을 통해 병동을 확인한 기욱은 전화를 끊은 뒤 안쪽 병동으로 들어가 문을 열었다. 마침 앉아 책을 보고 있던 중년의 남성이 난데없이 들어온 기욱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누구십니까?”

기욱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지간해서 사람의 얼굴은 잘 잊지 않는 편이었다. 기욱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서정수라는 것을 확신했다. 기욱은 침대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와 앉았다. 경계하는 그의 모습에 기욱은 가슴에 있는 신분증을 떼어 건넸다.

“신경외과 교수 박기욱입니다. 그쪽이 교통사고 낸 상대 차주 말입니다.”

“아…….”

그가 말을 잇지 못하며 기욱에게 신분증을 돌려줬다. 다행히 어느 정도의 의심은 푼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병원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그는 자신이 병원 근처에서 교통사고를 낸 상대 역시 병원 교수라는 것을 한 다리 건너 들은 적이 있었다. 정작 병원 교수라는 상대 차량 차주는 나타나지 않아 어떤 사람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생각보다 젊고, 준수하게 생긴 기욱에 그는 한동안 기욱을 가만히 바라봤다. 다행히 오늘의 기욱은 시간이 제법 많았다.

“차량은? 꽤 심하게 파손됐다고 들었습니다만.”

“폐차했습니다. 보험 처리하긴 했는데……. 수리해도 답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폐차했습니다.”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차라 아깝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욱은 포기와 마음 정리가 빠른 편이었다. 남자는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기욱을 훑어봤다. 기욱은 규모가 큰 대학병원 교수치고는 젊은 편이었지만, 그런 것과는 어딘가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는 기욱이 단순히 자신의 상태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하나 물어봐도 되나?”

“제가 대답해 드릴 수 있는 범위라면 말입니다.”

“만약,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알게 됐을 때. 그쪽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뜬금없는 그의 질문에 기욱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영문을 모르는 기욱을 향해 한 번 더 말했다.

“예를 들면이라고 하는 걸세. 지금 있는 병원을 전부 뒤집어엎을 정도로 큰 사건이라든지.”

“J대 병원이 그리 쉽게 무너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만.”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라는 걸 알고 있나?”

기욱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깨친 유리창의 법칙은 1982년 3월, 미국의 범죄학자인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공동으로 발표한 깨진 유리창의 글에서 처음 소개된 사회 무질서 이론이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내버려 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퍼지기 시작한다는 내용으로, 하나의 작은 실수가 큰 실수를 가져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J대 병원이 유리창이라고 말하고 싶으신 겁이니까?”

“예를 들면일 뿐이잖나. 지금 있는 병원을 뒤집어엎고도 남을 정도, 아니면 그 이상의 일이라면.”

“그래서 배에 칼을 맞으신 채로 운전해 병원까지 오셨다고?”

“그거랑 이건 별개. 뭐랄까 사연이 좀 있어서 말일세.”

그가 노련한 말투로 기욱의 말을 돌렸다. 그는 기욱의 생각보다 상대의 페이스를 읽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처음 병원에 왔을 때는 의식이고 뭐고 없는 사람이었으니 제대로 된 대화를 하는 것은 사실상 지금이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기욱은 침대 앞으로 몸을 살짝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제가 한 가지 생각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걸리는, 미심쩍은 부분.”

그건,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한 일이었다. 눈앞에 있는 서정수를 죽이려고 의사 코스프레를 했던 사내는 끝내 찾지 못했다.

“그날 교통사고.”

기욱이 교통사고에 대해 되짚어 보게 된 것은 신혼여행에서의 일이었다. 오랜만에 일에서 손을 떼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법이었다. 그중에 한 가지 떠올랐던 기억이 있었다.

“만약에 당신의 차가 그대로 직진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쪽의 차 속도는 절대 병원 내에서 나올 수가 없는 속도였다는 거 알고는 있었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그곳은 병원 중간에 있는 지점으로 대부분 차가 이미 병원에 들어온 순간부터 속도를 줄여 이동하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여기저기 꼬인 차들이 꽤 많이 있었던 상태였다. 그렇다는 것은 그의 차는 어딘가에서 속도를 올린 뒤 돌진을 했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기욱과 그의 교통사고는 당시 일어났던 사회 문제로 인해 경찰 쪽에서 흐지부지 넘어갔었다. 당사자인 기욱도 결혼식 문제로 정신이 없었고,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건 서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기욱은 의자에서 완전히 일어나 그쪽으로 몸을 더욱 숙여 눈을 마주쳤다.

“당신의 차 끝 길 건너편에 있었던 사람.”

어딘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듯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려 왔다. 그날은 병원 내에서 제법 큰 행사가 있어 외부 관계자와 병원 고위 관계자들은 물론 병원장까지 나와 있던 날이었다. 신경외과에서는 다른 과장님이 참석해 기욱은 굳이 갈 필요는 없었다. 사고가 난 기욱의 차와 그의 차 건너편에서 현장을 보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남 병원장님.”

물론, 그는 사고가 나기 무섭게 주변 경비에 둘러싸여 빠른 속도로 자리를 피했다. 기욱은 한숨을 쉬며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처음 그에게 보여 줬던 신분증을 차분히 가슴 쪽에 바로 걸었다.

“뭐, 진짜로 당신이 그 사람을 노렸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러는 그쪽 집안은.”

“……?”

“제법 유명한 의사 집안 아닌가?”

“집안에 잘난 의사들이 많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교수님이. 너무 겸손하신 것 같은데.”

그가 낮게 웃으며 기욱을 띄워 줬다. 기욱의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몰래 출근을 했다고 하지만, 슬슬 다른 의사들 사이에서 기욱이 출근했다는 소식이 퍼진 모양이었다. 일단 급하면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부르는 법이었다. 기욱은 진동이 멎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살짝 열려 있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날씨가 너무나 좋았다. 한동안 그와 눈을 마주친 기욱이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나도.”

“…….”

“예전엔 내가 좀 잘난 줄 알았어.”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왜 그에게 하는 걸까. 기욱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환자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보통의 사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운에서 손을 뺀 기욱이 귀밑으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가볍게 만졌다.

남부러울 것 없는 부모님에, 돈이며, 명예, 하물며 사람 관계에서도 딱히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한때는 그러니까 뭐든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 적도 종종 있었다. 그런 기억들을 되돌아보는 것 자체가 나이를 좀 먹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이런 얘길 왜 하는 거야?”

기욱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를 보며 한심하다며 중얼거렸다. 그는 그런 기욱의 중얼거림에도 불구하고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기욱은 습관처럼 휴대폰을 열었다. 규건에게 도와 달라는 연락과 부재중 전화 몇 통이 와 있었다. 어지간하면 SOS를 치지 않는 규건이 부재중까지 남기는 걸 보니 손이 부족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럼 이만.”

“잠깐만.”

등을 돌린 기욱에게로 뭔가가 날아왔다. 기욱은 반사적으로 허공에 뜬 뭔가를 붙잡았다. 작은 플라스틱 인형에 달린 검은색-

“USB?”

문구점에서 흔하게 파는 USB에 기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잘못 던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가지고 가라며 기욱을 향해 손을 저었다.

“이게 뭡니까?”

“차, 폐차시킨 것에 대한 사과.”

그가 윙크하며 기욱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기욱은 정체 모를 USB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쉬시죠.”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병동을 나온 기욱은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기 무섭게 중환자실로 뛰어갔고, USB에 대해서는 오래가지 않아 신경을 끌 수밖에 없었다.

* * *

“다음에 술 한잔하자.”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

서진은 멀어지는 친구와 인사를 한 뒤 등을 돌렸다. PK를 돌면서 J대 병원에서 만난 친구였다. 친구와 헤어진 뒤 등을 돌린 서진은 마침 서윤에게서 오는 전화를 받았다.

“응, 누나. 나 J대, 역 근처야. 아, 출근이야? 그럼 병원으로 갈까? 5분 정도 걸려 건너편. 알았어.”

이어폰을 낀 서진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건널목을 건넜다. 건너편, 병원의 입구 끝에 코드를 입은 서윤의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서진은 빠르게 서윤에게로 뛰어갔다.

“누나!”

“서진아! 금방 왔네!”

“응.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누나는 시간 괜찮아?”

“여유롭게 나왔어.”

서윤이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다. 서윤의 시선을 따라간 서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뒤쪽 담벼락에 몸을 돌려 담배를 피우고 있는 기욱이 있었다. 담배를 끄고 다가오는 기욱에 서진은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서윤의 눈치를 본 서진이 어쩔 수 없이 기욱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서윤이 자연스럽게 기욱의 옆에 서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누나가 요즘 바빠서, 우리 서진이 얼굴 보기 힘드네.”

“앞으로 병원에서 계속 볼 건데 뭘 그래.”

“얘는.”

서윤이 수줍게 웃으며 서진을 쿡쿡 찔렀다. 병원 로비로 들어간 세 사람은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기욱이 주는 커피를 받은 서윤이 한 손으로 기욱의 허리를 살짝 안으며 포옹을 했다.

“그럼, 오빠 내일 아침에 보자.”

“그래. 수고해.”

기욱은 담담하게 서윤과 거리를 벌렸다. 이미 기욱이 오기 전에 서윤과 어느 정도 인사를 한 서진은 두 사람의 대화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서윤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혼자 지하로 내려가는 모습을 본 서진이 그제야 제 옆에 가만히 서 있는 기욱을 발견하고는 눈을 깜박였다. 기욱은 멀어지는 서윤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왜 안 가요?”

“퇴근이라고.”

기욱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서진을 내려다봤다. 마침 로비를 지나가던 의사 한 명이 기욱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이며 빠르게 지나갔다.

“아, 그러세요.”

서윤을 보낸 서진은 더는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기욱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는 서진의 손목을 붙잡았다. 서진은 얼어붙은 듯 기욱에게 붙잡힌 손을 내려다봤다.

“친구. 누구야.”

“실습 돌다가 친해진 애요.”

“이름, 어디 학교야?”

서진이 기욱에게 붙잡힌 손을 내려놓았다. 이 나이 먹고 누군가에게 일일이 캐물음을 당하는 것은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님은 분명했다. 애당초 우리가 서로의 관계에 관해 관심을 가질 만한 사이였던가. 서진은 친구에 대해 할 말은 없지만, 기욱이 듣고 싶어 할 만한 말은 해 줄 수 있었다.

“걔 여친 있어요.”

“누가 그거 물어봤어?”

“당신이 나한테 궁금한 거 그거밖에 없잖아요. 그냥 친구 사이라고요.”

“너랑 박시헌도 그냥 친구 사이였지.”

“거기서 박시헌 얘기가 왜 나와요?”

날이 선 서진의 물음에 기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진이 보기에 시헌은, 이미 상처를 받을 대로 받은 사람이었다. 거기다 대고 얼마나 더 후벼 파야 적성이 풀리는 걸까. 기욱은 서진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어깨동무하듯 감싸 안는 기욱의 행동에 서진의 몸이 잠시 떨렸다. 서진의 등을 떠민 기욱이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어디 좀 가자.”

“싫어요.”

“강서진, 좋은 말 할 때 듣지?”

병원 로비를 나오기 무섭게 기욱이 서진을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외부인은 외부인일 뿐이었다. 서진은 기욱이 발을 밟고 있는 아스팔트 바닥을 내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딘데요.”

“가 보면 알아.”

뭐가 그리 급한 것인지.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기며 서둘러 병원을 나왔다. 기욱이 서진을 데리고 간 곳은 병원 건너편 번화가의 제법 큰 휴대폰 대리점이었다. 최신 핸드폰 행사를 하는 모양인지 넓은 대리점 안에는 사람들이 꽤 들어와 있었다. 서진은 대리점 안의 히터에 몸을 녹이며 기욱을 향해 말을 걸었다.

“휴대폰 바꾸게요?”

“아니, 너.”

“네?”

서진이 못 알아들었는지 되물었다. 기욱은 비어 있는 의자에 강제로 서진의 등을 떠밀어 앉혔다.

“내가 아니라 네가 바꿀 거라고. 신분증 있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지금 휴대폰도 괜찮아요. 고장 난 데도 없고…….”

멀쩡한 휴대폰을 왜 바꾼단 말인가. 서진은 의자에 앉은 채 어쩔 줄 모르는 서진을 보더니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그럼 번호라도 바꿔.”

“번호를 왜 바꿔요?”

서진은 기욱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휴대폰을 바꾸라고 했다가, 싫다고 하니 번호를 바꾸라니 정신이 나간 것도 정도가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여직원이 당황스러운 듯 어쩔 줄 모른 채 있었다. 기욱은 그녀를 향해 가볍게 웃더니 서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지난번에 휴대폰 바꾸고 싶다고 그랬잖아. 하는 김에 폰 번호도 같이 바꿔.”

“그러니까…!! 전 그런 말 한 적 없……!!”

기욱과 정면으로 눈이 맞았다.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서진은 가슴에 손을 얹고 휴대폰을 바꾸고 싶다는 말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기욱의 말은 거짓이었고, 기욱은 서진에게 눈치껏 맞추라며 거짓을 강요하고 있었다. 서진은 입술을 낮게 깨물었다. 순식간에 대리점 안의 따듯한 공기가 독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어깨의 손이 내려간 기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애원하듯 조용히 말했다. 다행히 여직원은 다른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나가요 제발.”

“잘못한 건 아는 모양이네.”

서진은 그제야 기욱이 어떤 것에 대해 간섭하려 하는지 눈치를 챘다. 아무리 기욱이 집착이 강하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선 적은 거의 없었다. 휴대폰이니 친구 관계는 지극히 사적인 일이지 않나. 서진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기욱은 발을 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기욱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말은 즉, 기욱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아, 알았어요. 바꾸면 되잖아요.”

한다면 한다는 기욱의 성격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지금 이 자리를 뛰쳐나가면 당장은 휴대폰 번호를 바꾸는 걸 모면할지도 모르지만,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서진은 뒷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여직원이 전화를 끊자 정말로 눈치가 보였던 서진이 어쩔 수 없이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서진은 결국 기욱의 등에 떠밀려 휴대폰을 바꿨다. 아무거나 상관없다는 서진에 기욱은 멋대로 가장 최신 휴대폰을 골라 줬다. 그 자리에서 기깃값을 전부 결제한 뒤 서진의 손에 들린 휴대폰은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개통은 한두 시간 안에 될 거라고 했다.

“마음에 들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서진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이런 거 필요하다고 한 적 없어요.”

서진의 냉정한 말에도 기욱은 눈 하나 끔벅하지 않았다. 서진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거라고는 기대한 적도 없었고, 애당초 그런 소리 들으려고 휴대폰을 사 준 것 또한 아니었다. 기욱은 서진의 옛 휴대폰을 자신의 주머니에서 꺼냈다. 안 그래도 원래 휴대폰을 두고 왔나 하며 주머니를 뒤지고 있던 서진은 기욱의 손에 들린 자신의 휴대폰을 보며 깜짝 놀랐다. 서진이 기욱의 손에 있는 예전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줘요.”

“…….”

“달라구요.”

기욱은 걸음을 멈춘 채 손을 뻗는 서진의 팔을 잡아 누르며 정지가 된 서진의 휴대폰 비밀번호를 멋대로 풀어 연락처를 뒤졌다. 모르는 이름도 있었지만, 모르는 이름에 관해 묻기도 전에 먼저 눈에 띄는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네가 한 교수 번호는 어떻게 알아?”

서진의 휴대폰에 우민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기욱에게서 휴대폰을 빼앗는 것을 반쯤 포기한 서진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기욱이 서진을 골목 쪽으로 끌어당기며 커다란 손으로 턱을 잡아 올렸다. 기욱은 신혼여행 당시, 서진이 매시간 보고를 하라는 자신의 말을 듣기 싫어 병원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 줬다. 그러고 보니 그때 서진이 병원에 남도록 도와준 사람도 다른 사람이 아닌 한우민 교수였다. 서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우민이 기욱이 우연히 잡아 준 오피스텔 자취방 같은 층 건너편에 산다는 사실을 안다면 기욱은 당장이라도 오피스텔 방을 비우라고 할 것이 분명했다. 기욱에게 당할 모종의 집착들보다 그로 인해 이사해야 한다는 것이 더 싫었다. 물론, 또다시 그 귀찮음을 감수할 마음도 없거니와 왜인지 우민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시헌과 사귀는 것을 숨길 때도 이 정도로 숨이 차지는 않았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서진이 기욱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PK 돌 때, 한 교수님이 자기 휴대폰 잃어버렸다고 하루만 빌려 달라 해서 빌려줬었어요.”

“……그 선배가 네 휴대폰을 빌려 갔다고?”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거짓말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은 전부 거짓말이다. 기욱을 속이려면 보통내기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진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서진의 턱을 쥐던 기욱의 손이 아래로 내려왔다.

“못 믿겠으면 물어봐요. 나중에 커피 사 준다고 연락하라고 했어요.”

이것도 거짓말이지만. 기욱이 진짜로 물어본들 서진은 우민이 적당히 말을 맞춰 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헌과 기욱, 두 형제 사이를 오가면서 배운 거라고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방법이 전부였다.

“지우지?”

“제가 그런 거까지 허락받아야 해요?”

“커피는 얻어먹었어?”

“아……, 네.”

거짓말을 하려는 사람과,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어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 미치겠는 사람의 미묘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그럼 지워. 어차피 볼 일 없잖아.”

“…….”

일방적이다 못해 강압적인 기욱의 명령에 서진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른 번호는 지워도 괜찮다. 그러나 우민의 번호만큼은 지우고 싶지 않았다. 서진은 머릿속으로 우민의 번호를 떠올려 봤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저장된 번호를 일일이 외우고 다니는 사람은 드물었다. 서진이 생각을 하는 동안 기욱의 손가락은 이미 우민의 번호를 포함한 이름 모를 몇 개의 번호를 지우고 난 뒤였다.

“전화번호 정리해서 넘겨줄 테니까 그것만 저장해. 이상한 사람이랑 연락하지 말고.”

서진은 휴대폰과 자신을 번갈아 내려다보는 기욱이 사랑을 모르는 연인이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 교수님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병원에서 일하면 다 정상인 줄 알아? 특히 그 인간은……. 아니다. 됐다.”

기욱은 우민이 게이라는 사실을 굳이 서진에게 알려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기욱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휴대폰을 서진의 품에 던지며 서진을 데리고 다시 정상적인 골목으로 나왔다. 전화번호부의 절반 이상이 날아가 있는 것을 본 서진이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애처럼 굴어요?”

“강서진,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짜증 나.”

당연히 우민의 번호는 없었다. 서진은 기욱의 눈치를 보며 남아 있는 번호를 새 휴대폰으로 옮겼다. 두 사람은 몇 걸음 안 걸어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기욱이 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차피 집에 가서 잘 텐데 커피는 왜 마시는지 알 수는 없었다. 서진은 아메리카노를 가장 큰 크기로 시켜 마시고 있는 기욱의 앞에서 작은 크기의 밀크티를 빨대로 쪽쪽 빨아 마셨다.

갑자기 올라오는 밀크티에 혀를 덴 듯 서진이 깜짝 놀랐다. 입 근처에는 연갈색의 밀크티가 방울방울 묻어 있었다.

“냅킨…….”

기욱이 근처에 있는 냅킨을 건네기도 전에 서진의 손이 빠르게 냅킨을 낚아채 입가를 닦았다. 입술을 닦은 냅킨을 반 접어 내려놓은 서진이 허공에 뜬 기욱의 손을 보며 영문을 몰랐다. 기욱은 남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면허.”

“면허가 뭐요?”

“시간 비잖아. 따.”

국시는 며칠 전에 끝났다. 졸업과 인턴을 앞둔 서진에게 있어서는 오랜만에 비는 시간이었다. 기욱은 그 사실을 알면서 면허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하아, 생각해 볼게요.”

서진은 차 욕심이 없는 데다, 아직은 살면서 차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기욱의 심기를 더 거스르고 싶진 않았다. 어느 정도 커피를 마신 기욱이 먼저 일어났다. 기욱은 앉아 있는 서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거야? 밖에서, 말 같지도 않은 에스코트를 하는 기욱에 서진은 기가 막혔다. 기욱은 이상한 생각을 하는 서진을 보더니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휴대폰. 쓸모없잖아.”

이전 휴대폰이 쓸모없다는 건 비단 서진에게만 해당하는 사실은 아닐 것이었다. 서진은 이미 기욱의 눈치를 한껏 보며 요령껏 문자며 어플, 혹시 몰라 걸림돌이 될 만한 건 전부 지워 버린 후였다. 미련이 없는 서진은 기욱의 손에 옛날 휴대폰을 힘껏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숍을 나와 대로변으로 나온 기욱은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아 탔다.

당연하게도 목적지는 기욱의 아파트도, 서진의 오피스텔도 아니었다. 어딘가 한 번쯤 들어 본 호텔의 이름에 기욱과 함께 뒷좌석에 앉은 서진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인근의 모텔이 아닌 게 어디냐며 위안으로 삼는 서진은 자신의 모습이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은 기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 호텔까지 가는 동안 차가 막히자 기욱의 손이 자연스럽게 서진의 두꺼운 코트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뭐 하는…! 미쳤어요?”

“가만히 있어.”

“읏, 하지 말라구요!”

“아무것도 안 했어.”

“했잖아요!”

은근슬쩍 허벅지와 안쪽을 만져대는 기욱에 서진은 입술을 깨물며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기욱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기욱과 서진의 보이지 않는 실랑이가 이어지는 동안 택시의 속도가 정상을 찾았다. 한참 잘 달리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쾅 소리와 함께 요란한 비명이 났다.

“악…!”

“뭐야?”

기욱은 본능적으로 서진을 품에 안았다. 택시가 한 바퀴 돌더니 옆에 있는 소형차와 부딪히며 유리창을 깼다. 서진의 등 쪽으로 깨진 유리 파편들이 튀었다. 비명과 함께 차 밖으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수가 없군…….”

절대 사고가 날 리 없다던 병원 안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차를 폐차한 지 1년도 채 되기 전에 대낮에 연쇄추돌사고에 휘말리다니, 기욱은 자신과 자동차 사이에 마가 낀 건 아닌가 싶은 의심까지 들었다. 날씨가 추워 두꺼운 패딩을 입고 온 서진과 달리 기욱의 옷은 그저 그런 코트 차림이었다. 서진보다 조금 일찍 정신을 차린 기욱이 가장 먼저 서진을 살폈다.

“윽…, 뭐가 어떻게 된…….”

“강서진 가만히 있어.”

“네?”

서진의 패딩 뒤에 어디에서 날아와 꽂혔는지 모를 손바닥만 한 유리 조각이 박혀 있었다. 서진은 여전히 소음 때문에 정신이 혼란스러운 모양인지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다치지 않은 사람들이 차를 돌아다니며 다친 사람들을 확인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너, 괜찮아?”

“뭔데요?”

“아니다. 잠깐만.”

서진은 자신의 옷 뒤에 손바닥만 한 유리 파편이 꽂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기욱은 조심스럽게 소매 끝을 이용해 등에 박힌 파편을 빼냈다. 피 대신 패딩에 있던 깃털들이 파편과 함께 흩어져 나왔다. 재수가 없는 건지 운이 좋은 건지. 기욱은 서진의 등에 있던 유리를 발밑으로 내려놓았다. 정신을 차린 택시기사가 안전벨트를 풀며 등을 돌렸다. 다행히 앞좌석은 에어백이 잘 터진 모양인지 택시기사의 얼굴에는 약간의 화상 흔적만 있을 뿐 겉으로 보이는 큰 상처는 없었다. 오히려 어느 쪽이 기적이냐고 묻는다면, 에어백도 없이 뒷좌석에서 크게 다치지 않은 서진과 기욱 쪽이 훨씬 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괜찮아요?”

“예, 뭐. 그럭저럭.”

기욱이 품에 있는 서진을 내려다봤다. 서진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다는 의미로 기욱을 밀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 옆으로 승용차 한 대가 딱 붙어 있었다. 기욱은 택시 문을 억지로 밀어냈다. 아아, 정말이지. 도중까지 완벽했는데 말이다. 기욱은 모처럼 예약한 호텔 방과 서진과의 섹스를 전부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를 긁적였다.

밖으로 나온 기욱의 시선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위쪽에 달린 교통 표지판이었다. 서현대교 근교. 조금만 더 나가서 사고가 났다면 모른 척 환자 코스프레라도 할 생각이었지만 기욱이 온 다리 저편에는 J대 병원이 있었으며 다리 건너편에는 H대 병원이 있었다.

“여보세요? 여기 서현대교 근처인데…….”

토요일 오후, 엄청난 차량 정체와 함께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휴대폰을 붙잡고 신고를 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욱은 주머니 속에서 전화가 온 것처럼 징징 울려대는 휴대폰을 열었다. 거의 실시간으로 톡이 올라오고 있었다.

「대미친 서현대교에서 10중 TA났다는데 ㅋㅋ??」 오후 3:23

「Ah…」 오후 3:24

「나 바ㅇ금 교수ㄴㅣㅁ저나 옴」 오후 3:25

「ㅋㅋ수고해라 난 지방임」 오후 3:25

아직 규건이나 다른 교수들한테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아마 곧 오지 않을까 추정할 뿐이었다. 기욱은 혀를 차며 마지막으로 톡을 올린 녀석을 지목했다.

「이성진 2시간 준다 올라와.」 오후 3:26

기욱의 톡이 올라가기 무섭게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미친 속도로 톡들이 올라왔다.

「…교수님??」

「그러니까 누가 입털래ㅋㅋ 최교수님이 OFF인 애들 열외없이 다 튀어 오라 그랬음」

「선배님들 인턴은요?」

「물어볼 걸 물어보냐 ㅡㅡ」

「ㅋㅋㅋㅋ저새끼 말턴이라 그래 ㅋㅋ」

「몰라 걍 다쳐와 ER 지원 가야되니까 바쁨 수고」

기욱은 더 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휴대폰을 대충 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옆 차 문을 두드렸다. 유리창은 깨지지 않은 모양인지 이내 차 안에서 차창이 내려갔다. 차 안에는 젊은 남자 셋이 타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예. 그쪽은요? 꽤 강하게 부딪힌 거 같은데.”

남자가 기욱의 소매에 흐르는 피를 보며 기겁을 했다. 어쩐지 팔이 쓰라리더니만. 살짝 긁힌 것 같은 상처에 기욱은 팔을 뒤로하며 차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어 사람들의 상태를 살폈다. 팔을 싸매고 있는 운전석의 남자를 빼고 비교적 큰 상처는 없어 보였다. 달리 할 말이 없었던 기욱은 차에서 얼굴을 뺐다. 마침 서진이 택시에서 나오려고 낑낑대고 있었다. 기욱은 몸이 반쯤 빠져나온 서진을 붙잡았다.

“나오지 말라니까.”

“걱정돼서…… 윽. 그렇죠.”

서진이 비틀거리며 차 밖으로 나왔다. 그제야 서진과 함께 밖을 둘러본 기욱은 이마를 짚었다. 기욱은 뉴스 기사를 검색하고 있는 서진의 팔꿈치를 건드렸다.

“서윤이한테 연락 좀 해 놔. 괜찮다고.”

“아, 네.”

서진이 서윤한테 연락하기 위해 등을 돌리는 사이 기욱은 타이밍 좋게 오는 전화를 받았다.

― 기욱이냐? 너 뉴스는 봤지?

고찬일, 현 신경외과 과장이자 곧 정년퇴직을 앞둔 교수님이었다. 현재 교수로 있는 기욱과 우민이 그 밑에서 일을 배웠으니, 사실상 최고참 교수나 다름이 없었다.

“예, 아닙니다. 하하, 괜찮습니다.”

고 교수는 기욱이 사고 현장에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기욱은 고 교수에게 대충 상황을 전해 들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멀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있는 헬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 교수님, 단순 교통사고가 아닌 모양입니다.

― 뭐? 우린 전해 들은 거 없는데?

― 헬기요.

― 이런.

건너편에서 시끄럽게 사이렌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소방차며 구급차가 눈에 들어왔다.

― 임 교수가 현장 나갔네. 자네가 현장에 있으면 데리고 들어오는 게 빠를 것 같은데. 트리아지 해서 환자 있으면 일러줘.

임정혁. 기욱은 그럴 줄 알았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흐트러진 도미노처럼 막혀 있는 차를 뚫고 들어온 소방차에서 가장 먼저 뛰어내린 것은 정혁이었다.

― 예. 그렇게 하죠. 서윤이는요?

― 강 선생, 옆에 있는데. 괜찮다고 통화했담서?

― 하하, 네. 그럼 끊겠습니다.

“야! 박기욱 너 뭐야!!”

응급 키트를 어깨에 멘 정혁이 기욱을 발견하고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기욱은 찢어진 코드 소매를 걷으며 정혁에게로 향했다. 서진이 그런 기욱의 옷을 살짝 붙잡았다.

“저도 갈래요.”

“넌 있어.”

기욱이 서진의 어깨를 밀었다. 정혁은 한발 늦게 서진을 발견했지만, 인사를 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야!! 박기욱!!!”

정혁이 빨리 뛰어오라며 기욱을 재촉했다. 기욱이 서진을 두고 서둘러 정혁에게 뛰어갔다.

“소방차는 어떻게 타고 오신 겁니까?”

“소방서에 있었으니까. 그러는 넌 무슨 코난이냐?”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시죠.”

“H대에 김 교수라고 있는데, 통화했거든. 대부분 H대에서 보기로 했어. 그쪽 널널하대.”

“H대에서요? 별일이네요.”

“내 말이.”

정혁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평소라면 꿈도 못 꿀 일이지만, 그래도 최악은 아닌 듯싶었다.

“그럼 교수님은요?”

“헬기 쪽 환자들.”

소방차며 구급차가 들어갈 수 없어 다리 중간까지 뛰어가는 중이었다. 정혁과 기욱의 옆으로 소화기를 맨 소방대원이 따라붙었다.

“그쪽이 진짜 아닙니까?”

“게네 몇 달 전까지 정치 추문으로 정신없었잖아. 괜히 또 일 만들고 싶지 않다, 이거지. 참고로 방송국 헬기래. 그래도 전부 다 H대에는 못 보내. 알지? 비켜요!!”

정혁이 헬기 주변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밀어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헬기 근처에서 스파크가 튀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박기욱!!”

정혁이 헬기 근처에 떨어진 환자 한 명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뛰어갔다. 피투성이가 된 남자는 HSK 방송국이라 적힌 재킷을 입고 있었다. 슬슬 구급차와 사람들이 오는 중이었다. 얼굴을 심하게 다친 남자의 입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정혁이 기욱에게 라텍스 장갑과 후두경을 건넸다.

“인투베이션 할 수 있어?”

“잠깐만요. 블리딩이 너무 심해서…….”

잠시 고생하는가 싶던 기욱이 삽관을 마쳤다. 자리를 바꿀까 싶던 정혁은 빠른 손으로 앰부백을 끼웠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나름 잘하는 기욱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하게 삽관을 했다. 조금은 머뭇댈 법도 한데 말이다.

“환자 옮기…….”

“앰부백 뻑뻑한데요.”

뭔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에 기욱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도 튜브 위치가 안 좋은가 보지.”

어느새 두 사람 앞까지 구급대원들이 다가왔다. 기욱은 정혁이 환자를 볼 수 있도록 몸을 살짝 뒤로 빼 줬다.

“턱이 탈골됐잖아. 그게 튜브를 누르고 있는 거고!”

“빌어먹을!”

기욱이 다급하게 앰부백을 뺀 뒤 응급처치를 했다. 마침 다가온 익숙한 얼굴의 간호사에 더 할 일이 없을 거라 판단한 기욱이 양손을 들며 천천히 자리를 비켰다. 헬기 쪽에서 불길이 올라오고 있었다. 지직거리는 스파크음과 함께 헬기 안이 완전히 불길로 휩싸였다.

“아아아악!!”

안에 사람이 있는 듯 들려오는 비명에 깜짝 놀란 구급대원 두 명이 다급하게 소화기를 뿌려 진화를 했다. 환자를 간신히 구급차에 보내고 돌아온 정혁이 무슨 일이냐며 기욱을 바라봤다.

“교수님, 병원 화상팀에 연락해 두시죠.”

“넌 어째 있는 데마다 대박이냐.”

소화기가 사그라지고 정혁이 헬기 안으로 몸을 반쯤 집어넣었다. 멀리서 이 상황을 보고 있는 서진과 눈이 마주친 기욱이 이마를 짚으며 정혁의 뒤를 따랐다.

“내가 할 소리라고 그거.”

뭐 하나 되는 일이 없는 날이었다.

<『너를 위한 랩소디』 8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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