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 책임감
“…수님, 교수님!”
“어, 어?”
의국 구석에 있는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던 규건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규건을 깨운 2년 차 레지던트는 규건의 바로 옆에 있는 휴대폰을 손가락질했다. 책상 위에 올려진 규건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늘 벨 소리로 설정되었던 휴대폰이 진동 상태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눈을 비빈 규건이 하품이 나오는 입을 막으며 간신히 발신자를 확인했다.
“이런.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기욱의 전화였다. 깜짝 놀란 규건이 다급하게 통화를 받으며 의국을 나와 비상계단에 숨어 들어갔다. 간신히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댄 규건이 말했다.
― 교수님, 하하, 무슨 일이세요?
― 강서진, 거기 있어?
― 아아, 서진이요? 잘 있죠.
해외에 있는 기욱이 전화를 할 정도면 뭔가 심각한 일일 거라 생각했던 규건은 서진의 안부를 묻는 전화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해외에 가기 전에 입원했던 환자에 대해 신신당부를 했던 것을 규건이 모르지 않았다. 다행히 신혼여행에 가기 직전 기욱이 수술했던 환자들의 예후는 다들 좋은 편이었다.
― 병원에 있다고?
― 네네, 요즘 맨날 자기 실습 끝나고 맨날 병원에 남더라구요. 열정이 장난 아니라서 다들 한마디씩 해요. 응급의학과라도 갈 생각인 건가? 응급실을 가장 많이 가긴 하는데, 그래도 시간 나는 대로 올라오더라고요. 덕분에 아주 친해졌어요.
서진은 서윤과 달리 낯을 가리는 성격에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라 적응을 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말귀를 잘 알아먹어 뭔가를 이야기하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 …잠깐만, 맨날 나온다고?
― 어, 아마도요? 한 교수님한테 직접 부탁했다고 들었어요. 모르셨어요?
신경외과가 아니더라도 최근 매일 병원에서 늦은 시간에까지 얼굴을 마주쳤으니까 말이다. 규건은 왠지 말실수한 것 같은 기분이 살짝 들었다.
― 그게……. 하, 됐어. 그보다 기록 같은 거 하나?
― 일지요? 저희와는 모르겠고 EM에서는 쓸걸요? 아무렴 그냥 병원에 남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 강서진 집에 안 들어간 지 며칠째 됐어?
― 제가 집에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는 모르겠는데……. 얼굴 본 건 나흘 좀 넘었을 거예요. 근데 얘 이러고 있는 거 사모님도 알고 계세요?
― 넌 내가 알았으면 너한테 전화했겠냐? 한가할 때 가서 강서진 일지든 뭐든 적은 거 있으면 찍어서 보내. 그리고 너 여자 친구랑 여행 간다면서.
― 하하, 교수님 신혼여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아직 확정된 건 아닌데 이번 여름에 제주도 한번 갈 생각이에요.
규건이 머쓱하게 웃으며 전화를 붙잡았다. 저도 슬슬 결혼하긴 해야 하는데, 당장 이래저래 일이 바쁘다 보니 미루고 있는 신세였다.
― 서진이 사고 안 치게 똑바로 관리해. 제주도에 괜찮은 호텔 알아봐 줄 테니까.
기욱이 말하는 괜찮은 호텔이라는 게 5성급 호텔에 스위트룸 이상, 숙박 포함이라는 걸 규건이 모를 리 없었다. 규건은 기욱이 노골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할 때가 있지만, 아무렴 기욱은 일에 대한 대가는 만족할 만큼 주는 편이었다. 규건도 그런 사실에 대해 딱히 불만은 없었기에 기욱의 밑에서 일을 하는 것이었다.
― 교수님 무르기 없깁니다.
― 내가 언제.
자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도 규건이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기욱의 휴대폰 너머로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욱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기욱과 통화를 마친 규건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의국으로 돌아왔다.
“박 교수님이시죠? 무슨 일이에요?”
“어어, 그냥. 안부 전화. 아, 그보다 혹시 강서진 본 사람 있냐?”
“그 H대 PK이요? 아까 아침에 봤었는데…….”
“아침에 본 거 말고 임마! 야, 됐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일 있으면 연락해라.”
규건은 일단 서진을 좀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의국을 나왔다.
* * *
“하암….”
잠이 덜 깬 우민은 대충 옷만 갈아입은 뒤 집을 나왔다. 우민은 건너편에 굳게 닫혀 있는 서진의 집을 흘끗댔다. 벨을 눌러 볼까 말까 고민하던 우민은 됐다며 주머니에 손을 넣은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보통은 올라갈 때 우체통을 확인하는 편이지만, 병원에 더 오랜 시간 머무는 우민은 내려오면서 우체통을 확인하는 편이었다. 습관처럼 우체통을 열어 봤지만, 어제 한 번 본 터라 우체통은 텅 비어 있었다. 반면 서진의 우체통에는 며칠 전에 있던 우편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아무리 봐도 며칠 이상 집에 들어오지 않았음이 눈에 선했다.
“하아, 이 자식이…….”
우민은 뒷목을 긁적이며 오피스텔을 나섰다.
서진이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막상 출근한 우민도 자기 일이 바빠 서진을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꼬박 날밤을 새운 우민이 여유가 생긴 것은 이튿날 새벽쯤이었다. 며칠 후에 있을 큰 수술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나 습관처럼 아무도 없는 복도를 이리저리 혼자 돌아다니며 생각에 빠져 있던 우민은 병동 중앙에 비어 있는 보호자용 의자에 누워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란히 붙어 있는 의자에 누워 있는 사람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다른 것도 아니고 흰 가운을 얼굴에 덮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가운이 병원 가운이 아닌 개인 가운이라는 것이 첫 번째 행운이었으며, 두 번째 행운은 마침 그날따라 새벽에 복도에 나온 환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민은 성큼성큼 걸어가 가운 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민의 인기척을 눈치챈 서진이 가운을 살짝 걷었다. 눈앞에 보이는 우민에 잠이 덜 깬 서진이 눈을 깜박거렸다.
“너 여기서 뭐 하냐?”
우민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서진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 가운이 바닥으로 떨어졌으며, 서진은 팔을 의자에 부딪혔다.
“아윽! 교, 교수님…!”
간신히 고통을 참은 서진이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주워 듦과 동시에 의자에서 일어섰다. 떡이 진 머리카락에 며칠 사이 엉망이 된 서진의 몰골을 본 우민은 팔짱을 낀 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젊을 땐 눈에 뵈는 게 없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시기란 거 있는 법이었다. 적어도 우민이 생각했을 때 서진의 몰골은 지금 나올 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어차피 앞으로 일이 년만 있으면 싫어도 하게 될 거 뭐가 좋아 남들보다 먼저 사서 고생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좋은 거라면 또 모를까. 우민은 이런 체험에 뭐가 남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 하냐니까?”
“그냥……. 자고 있었는데요.”
“왜 당직실에서 안 자고 여기서 자?”
“그게, 어쩌다 보니까……. 전 딱히 아무 데서나 자도 상관은 없는데요.”
“이 자식이……. 야!! 그걸 말이라고 해 지금?”
참다못한 우민이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였다. 하룻밤 못 자 예민해진 건 우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민은 서진에게 그 이상의 욕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서진은 본인이 실습생이라는 것에 백번 감사해야 했다. 머리를 긁적이는 서진을 본 우민이 속으로 혀를 찼다.
“너 집에 언제 들어갔냐?”
“……금요일요.”
“너 오늘이 금요일인 건 알고 있냐?”
“……아. 맞다.”
잠이 덜 깬 것인지 서진은 여전히 넋 놓으며 우민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했다. 그런 서진을 본 우민은 어디서 태클을 걸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설마 오늘 들어갔다고 말하는 건 아닐 테니 서진이 집에 들어가지 않은 건 최소한 일주일이었다.
“저 그래도 몇 번은 갔었어요.”
“씻으러 갔겠지! 그게 샤워실이지 집이냐? 야! 너 예비 인턴 연습하냐? 할 일도 없는 게, 가운 입고 노숙자처럼 복도에서 굴러다니지 말고 집에 가.”
“언젠 병원에 있게 해 주신다고 했으면서……. 하, 어차피 차도 끊겼고, 그냥 아침에 가겠습니다.”
서진은 만사가 다 귀찮은 표정이었다. 우민이 느끼는 서진은 어딘가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원래부터 저런 건지 아니면 누굴 닮아서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서진의 뻔뻔함은 딱 기분이 상하지 않을 선까지만이었다. 미워할 수는 없지만, 괴롭혀 주고 싶은 얄미움이 있었다. 우민은 내일은 꼭 집에 들어가겠다는 서진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아침에 ER 갔다가 넘어오려고?”
“…….”
서진은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돌렸다. 서진과 우민은 서로서로 바라보며 때 아닌 기 싸움을 했다. 우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금 당장 서진을 집에 돌려보낼 마음이 가득했고, 서진은 어떻게 하면 집에 들어가지 않도록 우민을 설득할까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지금 가면 택시비 많이 나와요.”
결국, 변명이라고 한다는 게 돈 이야기밖에 없었다. 가장 흔하지만, 또 가장 할 말이 없는 변명이었다. 그러나 우민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태워다 줄게.”
“아니, 안 그러셔도…….”
“나 차 가져왔어. 태워다 줄 테니까 가자고.”
“전 복도가 편한데요.”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우민이 이마를 짚으며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고 싶은 말 마음대로 하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어디서 어떤 말을 할지 예상을 못 해 당황스러운 것은 덤이었다. 뭐,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매력은 있었다. 서진은 우민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며 신경외과 병동을 내려왔다. 우민은 서진을 라커룸 안에 집어 던졌다.
“나 올라가서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교수님 저 진짜 괜찮습니다.”
“내려왔을 때 가운 입고 있거나 도망치기만 해 봐. 확 인턴 되기도 전에 병원에 발도 못 붙이게 해 버릴 테니까.”
“하하. 그건 좀.”
H대를 다니고 있지만, 서진이 J대에서 일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는 걸 우민은 모르지 않았다. 하물며 기정사실로 희망하는 신경외과 교수가 저런 말을 하는데 기껏해야 실습생인 서진에게 힘이 있을 리 없었다. 서진은 신신당부하며 올라가는 우민을 향해 몇 번이나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을 데리고 주차장에 도착한 우민은 재빨리 조수석 문을 열어 줬다. 뒷좌석에 타려던 서진은 우민의 행동에 꼼짝없이 조수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의자 눕혀서 한숨 자.”
우민은 안전벨트를 매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서진은 조수석의 시트를 눕히기 위해 시트 밑을 두리번거렸으나 도무지 시트를 눕히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피곤함에 절은 상태로 기욱의 차에 탈 때면, 기욱은 서진이 조수석에 앉기도 전에 습관처럼 시트를 눕혀 줬었다. 재수 없으리만큼 몸에 밴 배려에 익숙해진 자신이 새삼 한심하게 느껴졌다. 시트를 눕히는 걸 포기한 서진은 대신 안전벨트를 맨 뒤 몸을 쪼그려 창문 쪽에 머리를 기댔다. 며칠 사이에 날씨가 상당히 추워진 걸까? 한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는 터라 서진이 걸치고 있는 것이라고는 얇은 점퍼가 전부였다. 우민이 히터를 틀었지만, 히터가 당장 서진의 몸을 따듯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서진은 차가 지하주차장을 전부 올라올 때까지 우민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담요는 없어요?”
“담요? 그딴 게 왜 있어?”
우민은 별걸 다 찾는다며 중얼거렸다. 서진 또한 괜한 걸 물어봤다며 속으로 후회를 했다. 기욱이 병원 담요처럼 두꺼운 담요를 상비하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럴 거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었다. 서진은 이런 사소한 행동들에 속이 탔다.
박기욱은 없는데, 그 사람의 그림자가 아직도 남아 자신을 좀먹어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욱이 생각날 때마다 드는 감정은 혐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숨 자. 도착하면 깨워 줄게.”
“그게요. 안 졸려요.”
서진은 운전을 하는 우민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다행히 서진이 담요 이야기를 하자 우민이 히터를 강하게 틀어 줘 차 안은 금방 따듯해졌다. 신호가 바뀌기 직전의 건널목 앞에 차를 멈춘 우민이 졸리지 않다는 서진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표정, 병원이었으면 머리라도 쥐어박았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서진은 때릴 수도 없고, 화를 낼 수도 없는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하나 답답해하는 우민이 조금은 재밌었다.
“……아깐 침까지 흘리면서 자던 주제에.”
“교수님이 깨우셨잖아요. 그리고 저 침 안 흘렸어요.”
“토 달지 말고. 넌 선배들한테 사랑받긴 글렀다.”
“선배들 필요 없는데요.”
“왕따당하려고?”
“교수님이 있는데 뭔 상관이에요. 누나에……. 그 사람도 있고…….”
정확히 어느 쪽이 더 유난이냐고 묻는다면 서윤보다는 기욱이었다. 그리고 우민. 서진은 병원에서 무슨 일을 당하면 우민도 자신의 편을 들어 줄 거로 생각했다. 확신은 없지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우민은 노골적으로 말하는 서진의 모습을 보며 차의 속도를 높였다.
“넌 그런 말 안할 줄 알았는데.”
“왜 그래요. 제 신조가 써먹을 수 있는 건 전부 써먹고 보자예요.”
“신조는 무슨, 너 내일 일 있어?”
“없는데요. 공부해야죠.”
“하루쯤 않는다고 죽는 거 아니잖아.”
서진은 그제야 우민의 차가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디를 가든 선택권은 없을 것 같고, 종착지를 모른 채 차에 짐짝처럼 실려 가는 건 이미 익숙했다. 우민도 서진이 차를 돌린 걸 눈치챘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고 있는 서진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너 과탑이잖아.”
“아닌데요.”
“더 괴물이 있어?”
사실 반진심으로 꺼낸 말에 너무나 당연하게 반박을 하는 서진을 본 우민이 당황했다. 아직 J대에서 인턴을 한 것도 아니건만, H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에게 인재를 데려갔다는 등의 소리를 들은 우민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서진은 우민이 진짜로 몰라서 묻는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박시헌이요.”
“아, 걔……. 기욱이 동생? 내가 잘 몰라서.”
얼굴은 봤지만 아직 우민은 시헌이 어딘가 부담스러웠다. 문득 의국에서의 일이 생각난 우민은 이해한다며 멋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박기욱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범상치 않은 미친놈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우민이 허공으로 다른 손을 저었다.
“근데 그 집안은 인간이 아니잖아. 논외로 쳐 논외로.”
“알았어요.”
“근데 너 왜 자대 안 가고 굳이 우리 병원으로 왔냐?”
“다 알면서 물린 질문 하지 마세요.”
서진이 약간 토라진 표정으로 우민을 바라봤다. 우민도 머쓱한 모양인지 갈데없는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거 까칠하기는. 그냥 대답해 주면 안 되냐?”
“J대에서 실습하면, 조금이라도 누나 더 볼 거로 생각했어요.”
“강 선생 걔 미국 연수 갔다가 PA 되고 난 다음부터 엄청 바쁘다. 가끔 걔가 우리 과 레지 놈들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PA 제도는 한국에서는 말이 많은 제도이긴 하지만, 대형병원이나 의료계에서는 암암리에 이뤄지는 일이었다. 우민도 딱히 그런 현실을 부정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서윤을 띄워 주는 우민의 말에 서진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경력이 있잖아요.”
“경력도 임마, 다 하기 나름이지.”
사실 우민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기욱도 분명 괜찮은 의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기욱만큼이나 서윤도 감과 센스가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의사였다면 지금쯤 정교수는 아니더라도 부교수는 달았음이 틀림없었다. 우민의 말에 섞인 의미를 눈치챈 서진이 약간 서글픈 표정으로 우민을 바라봤다.
“원래 의대 붙었어요. J대.”
“아, 그래? 근데 왜 안 갔대? 아까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던데…….”
“저 때문에요.”
“너?”
우민의 되물음에 서진은 뿌옇게 변한 창문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어둑어둑한 창밖을 바라봤다. 서진과 대화를 하다 보니 정작 목적지를 잃은 우민의 차는 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있었다. 서진은 처음부터 집에 가고 싶지 않았던 터라 인근을 배회하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새벽이라 차가 막히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누나가 남동생 하나 먹여 살리면서 혼자 의대 다닌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돈도 돈이지만 공부도 그렇고.”
서진은 학교에서 공부할 때마다 얼마나 이를 악물고 공부했는지 모른다. 머리가 좋니 어쩌니 떠들어도, 정작 서진은 자신의 성적이 전부 노력해서 나온 거라고 믿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뭔가가 다른 시헌과 달리 서진의 사고는 지독하리만큼 평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서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너 누나랑 둘이 산다고 그랬나? 부모님은?”
“…….”
서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제야 우민은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눈치챘다. 몇 번 얼굴 마주 보고 대화하다 보니 너무 편하게 굴었던 모양이었다.
“내 말은 그러니까…….”
“됐어요. 돌아가셨어요. 사고로. 저도 어렸을 때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뭐, 없는 집안은 아니었나 봐요. 부모님 죽고 친척들이 집안 재산 전부 들고 날랐어요. 어린 나이였던 저랑 누나는……. 안중에도 없는 건 당연했구요.”
서진은 남 일 이야기 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얼굴도, 이름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부모. 어린 시절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저주했던 그들. 그러나 서진은 당당해지기로 했다.
제 잘못이 아니다. 누구라도, 그 상황에 부닥쳤다면 그들을 저주하고, 비난했을 것이었다.
당해 본 자와 당해 보지 않은 자의 차이일 뿐, 다를 건 없었다.
주변 도로를 돌던 우민은 불이 꺼지지 않은 번화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술 한잔할까?”
“저랑 교수님이랑 둘이서요?”
“그럼 여기 너랑 나 말고 누가 또 있어?”
속도를 늦춰 번화가 안으로 들어간 우민은 눈웃음을 지으며 뒷좌석을 흘끗댔다.
“싫으면 말고. 편의점에서 대충 소주나 몇 병 사 가서 마셔야겠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멋대로 편의점 근처에 차를 대려 하는 우민에 서진은 기가 막혔다. 서진은 마신다고 한 적도 없지만, 동시에 마시지 않겠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교수님 술 드시고 싶으세요?”
“술을 마시고 싶어서 마시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냥 마시는 거지. 싫으면 마. 들어가서 잠이나 자.”
서진은 우민이 저렇게 구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왠지 진짜 차를 돌리려 하는 것 같은 상황에 서진이 다급하게 우민의 팔목을 붙잡았다.
“마실래요.”
“아깐 안 마신다며. 괜히 눈치 보지 말고 들어가 자.”
“안 마신다고 안 했어요. 마, 마실 거예요. 근데…….”
주차하는 우민을 두고 서진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급하게 나온 탓에 지갑을 병원 라커룸에 두고 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민은 안전벨트를 풀며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갑을 병원에 두고 온 것 같아요.”
“야!! 내가 너 보고 돈 내라고 할까 봐? 돈도 못 버는 게 어딜 까불어. 잔소리 말고 내려!”
먼저 일어선 우민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언제까지 안에 있을 수는 없었던 서진 또한 안전벨트를 풀고 밖으로 나왔다. 계속 차 안에만 있어서 그런가? 바깥 공기가 시원했다.
“차는 어떻게 해요?”
“대리 부르지 뭐.”
우민은 태평했다. 다행히 바로 앞에 24시간 하는 안줏집이 있었다. 고깃집도 몇 군데 눈에 띄었으나, 고기를 먹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우민과 서진은 어느 정도 사람이 있는 안줏집 안으로 들어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근데 너 술은 잘 마시냐?”
“교수님은요?”
“내가 물어봤잖아. 잘 마시냐고.”
“남들만큼은 마셔요.”
“큭큭, 남들만큼으로는 안 될 거다.”
서진은 지나가는 알바생을 붙잡아 소주 3병과 맥주 한 병, 그리고 마른안주 등을 시켰다. 우민이 먼저 서진에게 잔을 따랐고, 서진은 우민이 주는 술을 받았다. 잔을 부딪치며 두 사람은 한동안 별다른 대화 없이 술을 마셨다.
막상 서진에게 술을 마시자고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우민은 서진과 달리할 이야기가 없었다. 뭔가 차에 있을 때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은데 또 자리 만들어 놓고 보니 그렇게 어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서진은 침묵이 별로 어색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민은 나이가 있는지라 이런 식의 침묵에는 익숙했다. 우민은 종종 서진이 말수가 적고 낯을 가린다는 사실을 잊어먹을 때가 있었다. 그야 서진의 말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짧긴 했지만, 말수가 적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서진은 우민을 앞에 두고 자연스럽게 혼자 술을 따라 마시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조금씩 이른 아침 햇살이 올라오고 있었다. 서진은 엉뚱한 방향으로 술을 따라 놓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새 술병을 뜯어 남은 술잔을 채웠다. 아주 자기 돈 아니라고 술 다 버리는 거 봐. 우민은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아까운 소주와 서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너 취한 거 같은데?”
“저 안 치했는데요. 교수님 한잔 더 하시져.”
서진은 다른 손에 있는 소주병을 들고 그대로 우민의 잔에 따라 부었다.
“야야, 나 있어!”
이미 꽉 차 있는 잔 위에 부으려는 서진에 깜짝 놀란 우민이 뒤로 손사래를 치며 다급하게 소주를 비웠다.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그럭저럭 사람이 있었던 가게는 서진과 우민, 그리고 바닥을 쓸고 있는 알바생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서진은 우민의 잔이 빈 것을 보고 다시 몸을 앞으로 숙였다.
“한잔하시라니까요.”
“하, 이거 봐라. 그래, 마셔라 마셔.”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었고, 기욱이 없는 일주일 내내 당직을 섰던 우민도 쉬는 날임은 마찬가지였다. 서진이 아니었다면 병원에 있었겠지만. 당연하게 주말도 병원에 있을 생각을 하며 새벽에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는 우민도 서진과 별반 다를 바는 없었다.
그렇게 소주 몇 병을 더 마시고 계산을 하자 밖이 환해져 있었다. 아침 6시가 넘어 있었다. 대리를 부르기도 애매해진 우민이 카드를 지갑에 넣으며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얌전하게 술만 마신 건 또 오랜만이라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밖으로 나와 습관처럼 담배를 피운 우민은 반쯤 짧아진 담배를 보더니 서진에 대해 떠올렸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강서진…!
“야! 강서진, 너 어디 갔…!!”
“우으으윽…!”
우민의 앞으로 전봇대를 붙잡고 토를 하는 서진의 눈에 들어왔다. 저 자식이! 놀란 우민은 다급하게 담배를 끈 뒤 서진에게 뛰어갔다.
“야, 야. 너 괜찮냐?”
“……윽… 우으윽…!!”
“야아, 잠깐… 아, 미치겠네!”
어쩐지 주는 대로 다 받아먹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야 안주 없이, 빠르게 달리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갓 20살이 된 녀석도 아니고, 자기 주량도 모를 때까지 퍼마시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길거리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고개를 들자 건너편 골목으로 모텔촌이 보였다. 이대로 대리를 불렀다, 차에서 토를 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것이었다. 우민은 비틀거리는 서진을 부축하며 인근에 가까운 모텔로 들어갔다.
“똑바로 걸어 똑바로!!”
우민도 술을 꽤 마신 탓에 바로 걷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모텔로 들어간 우민은 반쯤 죽어 가는 서진을 보고 한숨을 쉬는 모텔 주인과 시선을 마주쳤다. 목을 조를 듯 매달리는 서진을 밀어낸 우민이 간신히 지갑에서 5만 원짜리를 대충 꺼내 건넸다. 잔돈을 주려는 모텔 주인에 우민은 고개를 저은 뒤 키만 챙겼다. 3층이라고는 하나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서진을 데리고 오는 것은 고역이었다. 결국, 문을 열지 못해 아등대는 우민을 본 주인이 우민을 대신해 문을 열어 주고 난 뒤에야 모텔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우민은 서진과 함께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침대에 드러누운 우민과 달리 서진은 꼿꼿하게 앉은 채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우민은 달밤에 체조라도 한 듯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너 괜찮냐?”
“……네. 아니, 네. 모르겠어요.”
숨을 고른 우민이 서진의 옆에 앉았다. 서진은 술에 취한 상태로 멍하니 앉아 어딘지 모를 허공을 보고 있었다.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이 부셨다. 암막 커튼을 친 우민이 냉장고에 있는 물병을 서진에게 건넸다.
“근데요. 교수님, 일은 괜찮으세요?”
“……오늘 주말이잖아.”
“교수는 좋겠어요.”
서진은 물을 마시며 투덜거렸다. 서진도, 우민도 술 냄새와 악취가 났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꼬우면 너도 교수하던가.”
“어느 세월에 해요. 큭큭, 평생 걸릴 거 같은데요.”
급하게 오느라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것도 잊은 서진이 침대 위로 발을 흔들더니 신발을 툭, 하고 침대 아래로 던졌다.
“나도 내가 이렇게 올라올 줄은 몰랐다. 고등학교 졸업했다고 누나들이랑 좋아 죽었던 게 엊그제야.”
“거짓말.”
“진짜야. 세월 빠르다? 너 계속 그렇게 까불래?”
고개를 돌린 서진이 비틀거렸다. 우민은 어쩔 수 없이 서진을 몸 쪽으로 기대게 했다. 서진은 우민에게 머리를 기댄 채 고개를 약간 들었다. 우민은 서진이 기울어지지 않게 팔로 서진을 안았다. 결코,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다.
“교수님.”
“왜?”
“진짜 제가 애 같아요?”
“애지 그럼 뭐야?”
서진은 우민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모든 사람이 서진을 애 취급하는 건 아니지만, 어린애 취급은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서진은 우민의 품에 안긴 채 말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요? 20살도 애고, 25살도 애고. 언제쯤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내 생각에.”
“생각에?”
“한 2년 차쯤 되면 철들더라.”
“에이, 그럼 병원에 늦게 들어온 사람은 어쩌라구요?”
서진은 병원 연차로 따지는 건 객관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못해도 서른은 넘어야 대화가 되지 않겠냐?”
“근데 저랑은 대화하시잖아요.”
“너랑 하는 게 대화인지 벽에다 대고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알 수가.”
서진은 우민을 슬쩍 밀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저 벽 아닌데요. 벽 아니고 강서진인데요.”
“이게 주정을……. 알았어, 알았다고!”
“벽 아니라니까.”
벽이라고 말한 게 어지간히 마음이 상한 모양인지 서진은 우민을 앞에 두고 여전히 구시렁구시렁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우민이 서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서진아. 강서진!!”
“…네, 네?”
순간, 기욱의 목소리가 떠올랐던 서진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행히 기욱과 우민은 목소리부터가 심하게 차이가 나 착각을 할 가능성은 적었다. 뒤늦게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린 서진의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우민이 그런 서진을 배려하듯 말했다.
“여기까지만 하자? 응?”
“아, 알았어요.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오늘만 특별히 그만할게요.”
일 절만 하라니까. 우민은 서진이 아직도 술 때문에 정신이 없는 것이 틀림없다며 확신했다. 그렇다고 술에 취한 서진과 되지도 않는 말싸움을 더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서진은 우민의 손을 내려놓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난 서진은 몇 걸음 가지 못해 의자 옆에 놓인 선반에 퍽, 하고 몸을 부딪쳤다.
“하아, 괜찮아?”
일어날 기운도 없었던 우민이 침대에 앉은 채로 물었다. 서진은 부딪힌 무릎을 만지작거린 채 주저앉았다. 술 때문인 건가 감각이 없었다. 딱히 상처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음, 모르겠어요. 안 아픈데. 점점 아파지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래요. 근데 죽진 않으니 괜찮아요.”
일어날 생각이 없는 서진에 우민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서진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누가 죽는 거 물어봤냐? 의사가 그렇게 엄살 부릴래? 일어나.”
서진은 우민이 내미는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그러나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서진은 다시 우민에게 서서 안기는 꼴이 되어 버렸다.
“무겁다고.”
서진을 안은 우민이 비틀거리며 간신히 자세를 잡았다. 조금 진정이 된 서진이 심호흡을 하며 우민을 살짝 밀어냈다.
“교수님 저, 화장실 좀.”
“어, 그래. 알았다.”
우민은 화장실이 급하다는 서진을 놓아줬다. 혹시 넘어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서진은 잠깐 비틀거리더니 벽을 붙잡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게 뭐라고 안심이 되는지. 우민은 서진이 들어간 것을 보고 침대 밑에 주저앉아 몸을 기댔다. 의자에 대충 걸어 뒀던 긴 코트로 팔을 뻗어 주머니 안을 뒤졌다.
주머니에서 나온 담배 케이스 안에는 싸구려 지포라이터 라이터만이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마치 제집처럼 딱 맞아 들어가 있는 지포라이터를 본 우민은 한숨이 나왔다. 우민은 코트를 걸치며 지갑과 휴대폰을 챙겼다. 모텔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잠깐 갔다 오는데, 별일이야 있겠냐는 마음으로 모텔을 나왔다. 우민은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와 담배를 샀다. 제 몫의 숙취해소제는 그 자리에 서서 음료수처럼 비운 뒤 쓰레기통에 던졌다. 모텔 방 안으로 들어온 우민이 막 담배를 물려던 순간 화장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정신을 차린 우민은 그제야 아직도 서진이 화장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민이 다급하게 화장실 문을 열었다. 화장실은 온통 물 천지였으며, 서진은 잔뜩 젖은 바닥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었다. 우민이 온 것을 눈치챈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우민은 바닥에 떨어진 호스를 주워 든 뒤 물을 끄고 안쪽에 있는 수건으로 서진의 머리를 닦아 줬다. 뭐, 이런다고 해도 이미 온몸이 다 젖어 별다른 도움은 되지 않았다.
“물에 젖은 생쥐마냥. 아주……. 너 도대체 뭐 하려고 했던 거야?”
참다못한 우민의 질문에 서진은 무릎을 만지작거렸다. 서진의 무릎에는 멍이 올라와 있었다.
“다리. 씻으려고 했는데 힘이 풀려서요.”
“세수만 하면 됐잖아!! 씻을 거면 아예 다 벗고 씻던가, 옷도 없는 게!!”
잠시나마 서진을 믿었던 스스로가 바보였다. 어딘가 맹한 구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술을 마시니 이런 식으로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우민은 서진을 일으켜 안았다. 옷 위로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벗으려 했는데……. 잘 안 돼서…….”
“잘했다. 잘해.”
서진도 잘못한 건 아는 모양인지 푹 고개를 숙였다. 우민은 수건으로 서진의 머리를 털어 주며 한숨을 쉬었다. 서진을 일으킨 것까지는 좋으나 엉망진창인 화장실에 계속 있어 봤자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일단 나가자…….”
우민이 조심스럽게 서진을 데리고 화장실을 나오려 했으나, 물기에 비틀거린 서진이 물을 틀어 버렸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호스가 우민 쪽으로 튀었다.
“야!!”
우민은 결국 폭발했다.
* * *
화장실 안쪽으로 물소리가 들렸다. 이러나저러나 답이 없었던 우민은 결국 서진을 씻기는 쪽을 선택했다. 우민에게 욕이란 욕은 다 들어 가며 화장실로 들어간 서진은 비교적 조용히 샤워하고 있었다.
우민은 차에 여벌의 옷이 있음에도 서진이 걱정된 탓에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이래저래 소동을 피우고 나니 벌써 아침 8시였다. 암막 커튼을 치고 있는 데다 방 자체가 어두운 분위기라 별로 실감은 안 나지만 말이다. 우민은 반쯤 젖은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연신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하아, 저거 술버릇 왜 그래.”
고약하진 않지만 다른 의미로 성가셨다. 화장실은 조용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소리가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서진이 샤워를 다 한 모양이었다. 우민은 화장실 문틈 사이로 몸을 닦고 있는 서진을 보더니 재빨리 모텔을 나왔다.
후다닥 차로 간 우민은 조수석 쪽에 두었던 여분의 옷을 챙겨 왔다. 병원에서 입으려고 챙겨 왔다가 못 입은 옷이었다. 옷을 챙겨 모텔로 돌아오자 마침 가운을 두른 서진이 나와 있었다. 우민은 알몸 차림에 목욕 가운을 입고 있는 서진을 향해 자신의 옷을 던졌다.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입어.”
“교수님은요?”
어차피 서진이 씻은 거 우민도 같이 씻고 싶은 기분이었다. 완전히 젖은 서진의 옷과 달리 우민의 옷은 그럭저럭 말리면 입을 만한 상태였다.
“나도 씻고 올 거야.”
우민은 입고 있던 겉옷을 벽에 건 뒤 화장실로 들어갔다. 적당히 옷을 걸어 둔 뒤 따듯한 물을 틀었다. 이미 서진이 한번 씻고 나간 터라 화장실에는 수증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물이 머리카락과 몸 아래를 적시자 우민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샤워를 했다. 정말이지 술이 다 깨는 기분이었다. 우민 또한 안쪽에 있는 샤워 가운을 대충 챙겨 입었다. 사실 옷을 입을까 하고 발을 넣어 놨는데 애매하게 젖은 게 더 기분이 찝찝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대충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밖으로 나오자 불을 켠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서진이 보였다. 우민은 일부러 불을 끈 뒤 침대 옆 삼단 선반 위에 있는 무드등의 불을 켰다. 푹, 하고 잠들어 있는 서진의 옆으로 누웠다. 다행히 이불은 남자 둘이 덮기에도 과분할 정도로 컸다. 원래 모텔 이불이 이렇게 컸나 싶을 정도였지만, 마지막으로 모텔을 와 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안 나니 비교할 만한 것도 없었다. 우민이 무드등을 끄자마자 이불을 덮은 서진이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움직이지 좀 마라.”
“…….”
그런 우민의 말에도 서진은 무슨 지렁이처럼 이불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눈을 반쯤 감은 우민은 옆에서 닿는 서진의 감촉이 묘하게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인상을 찌푸린 우민이 다급하게 무드등을 켜고 이불을 확 걷었다.
서진은 난데없이 사라진 이불에 눈을 깜박이며 팔을 안으로 굽어 몸을 안았다. 추운 모양이었다.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서진의 가운은 침대 밑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우민은 한숨을 쉬며 침대에 떨어진 가운을 주워 몸을 반쯤 일으킨 서진의 얼굴로 집어 던졌다.
“옷 입으라고 씨발!!!”
서진은 우민이 던진 가운을 만지작거릴 뿐 입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우민은 짜증을 내며 침대로 올라와 서진의 손에 있는 가운을 빼앗았다.
“팔 벌려.”
“싫어요.”
“또 뭐가 싫어?”
“어차피 벗길 거잖아요.”
우민은 가운을 든 채로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의 얼굴이 점점 우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원래부터 가까운 거리였지만, 서진이 저 말을 함으로써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빌어먹을.
“누, 누가 벗긴다고 그래!”
“교수님이.”
“……누굴 벗겨.”
“저?”
서진이 제 얼굴을 손가락질하며 대답했다. 우민은 가운으로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려놓으며 서진을 마주했다. 시헌과 사귄 적도 있다. 기욱과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섹스를 했고, 이제 와서 둘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섹스를 한다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서진은 왠지 우민이라면 자신에게 넘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가 뭔진 행동하고, 말을 꺼낸 지금 이 순간까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뭐라도 하고 나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우민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서진의 얼굴에 어깨를 붙잡고 이마를 부딪쳤다.
“악…!”
난데없는 박치기에 서진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우민은 눈 하나 끔벅하지 않은 채 들고 있던 가운을 다시 펼쳐 서진의 팔을 집어넣었다.
“내가 그럴 리 없잖아. 팔 들라고.”
“…….”
최소한 조금의 동요라도 해 주길 바랐던 서진은 너무나 태연한 우민의 반응에 자존심이 상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서진은 일부러 팔을 뒤로 해 우민이 가운을 입혀 주려는 것을 피했다.
“교수님, 게이라면서요.”
“너 진짜…….”
우민이 확, 하고 서진의 몸을 눕힌 뒤 재빠르게 올라탔다. 말리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타고 내린 물기가 서진의 뺨 위로 떨어졌다. 서진을 제압하느라 우민의 가운이 반쯤 아래로 흘러내렸다. 막상 우민은 괜찮을 것 같다고 무의식중에 덤벼든 서진이지만, 왠지 모르게 우민의 밑에 깔려 있으니 얼굴이 붉어졌다. 도대체 이건 뭘까. 적어도 시헌과 있었을 때와는 다른 감정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서진과 달리 우민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너 내가 그거밖에 안 돼 보였냐?”
“……그런 거 아녜요.”
“그럼 뭔데?”
“교수님이… 흐극, 교수님이 뭘 알아요…!!”
서진은 자신의 행동이 마치 우민을 자존심을 긁은 것 같아서 서운했다. 딱히 그런 의미로 한 행동은 아니었다. 우민이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어쩔 수는 없지만, 서진은 그저 알아주기를 원했다. 억울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순간 서진은 우민과 술을 마시면서도 못 했던 말과 울분들을 토해 냈다. 서진의 눈가로 도톰한 물방울들이 맺히더니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누나는… 흑, 누난 그 자식이랑 여행 갔지. ……라고 하는데 연락하고 싶진 않은데 정작 연락할 사람은 없고……. 누군 좋아서 병원에 남아 있었던 줄 아냐구요! 그냥…!! 더 이상 혼자는 싫어요… 흐흐흐흑….”
서진은 우민의 흘러내린 가운을 붙잡아 품에 안겨 울었다. 서윤이 해외에 갔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그땐, 시헌이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때처럼 기욱이 한국에 남은 것도 아니지만, 서진에게 박기욱이라는 존재는 어디에 있든 똑같았다. 숨이 막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병원에 있을 때도, 일이 없는 새벽에는 몰래 공부를 했다. 뭐든 현실에서 도피할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까지였다. 근 일주일을 이런 식으로 생활하니 어느 순간부터 뭘 하는 건가? 삶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우민은 중간에 잘린 말을 듣지 못했지만, 서진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알았어, 울지 마.”
우민은 우는 사람들 달래는 것이 불편했다.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애당초 자신의 앞에서 우는 사람 같은 건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우민은 말없이 우는 서진의 등을 토닥여 줬다.
* * *
서진이 잠에서 깬 것은 오후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우윽…!”
서진은 침대 밑으로 몸을 숙이며 헛구역질을 했다. 다행히 뭐가 나오거나 하진 않았다. 목이 타 미칠 것 같았다. 서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어?”
그제야 자신이 있는 곳이 모텔이라는 걸 깨달은 서진이 당황했다. 가운은 입었다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걸치고 있었다. 분명 어젯밤 우민과 함께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술집을 나온 이후의 기억이 없었다. 좁은 모텔 방 안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침대에서 발을 내디딘 서진은 침대 밑으로 들어가 있는 옷을 꺼냈다. 옷은 다 젖어 있었다.
“……?”
서진은 옷이 젖은 이유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진이 젖은 바지를 힘겹게 구겨 넣었다.
“너 뭐 하냐?”
“교, 교수님…?”
등 뒤에서 나타난 우민에 서진은 젖은 바지를 내려놓았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옷을 입으려는 서진을 본 우민은 어젯밤 자신이 차에서 가져온 옷가지들을 서진의 품에 내던졌다.
“이건……, 교수님 거예요?”
“그럼 내 것이지 니 거겠냐? 대충 입고 세탁해서 가져다줘. 어차피 옆집이잖아.”
정확하게는 건너편이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서진은 우민이 준 옷을 챙겨 입었다. 옷을 입는 서진은 어젯밤 일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우민은 피곤해서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으로 서진이 신경 쓰여 오래 자지 못한 상태였다.
“너 진짜 하나도 기억 안 나냐?”
“뭐가요?”
“어제 토하고, 씻어야 한다면서 화장실 가서 물 다 틀어 놓고 그랬잖아.”
“제가요?”
우민의 옷을 챙겨 입은 서진은 소매를 걷으며 자신의 젖은 옷가지를 챙겼다. 어쩐지 옷이 다 젖어 있었더니만. 숙취 때문에 아직도 머리가 아팠다. 서진의 머릿속은 누군가 지우개로 박박 지운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에 없었다. 우민은 영문을 몰라 하는 서진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볼을 꼬집었다.
“악!”
“네가 아주 미쳤지? 감히 날 유혹해?”
“…….”
서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정확히 우민에게 무슨 행동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우민이랑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술기운에 생각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옷이 젖었다고는 하지만 수상한 건 수상한 것이었다.
“저, 저, 저…… 교수님이랑 했어요?”
“몰라!! 알아서 생각해!!”
우민은 더 대답할 마음이 없다며 소리를 지른 뒤 입을 닫았다. 팬티를 입고 있었으니 했다고 생각이 들진 않지만, 꼭 끝까지 가야만 섹스라고 하는 법은 없었다. 기억이 나지 않으니 미칠 것 같았다. 우민과 모텔의 열쇠를 반납하고 차에 탄 서진은 집에 오는 내내 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순간까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오르는 건 없었다. 우민은 평일을 위해 병원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서진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집 안으로 들어가려 도어락을 누르는 우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교수님?”
“왜?”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서진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오피스텔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먼저 말을 걸어 놓고 도망치다니 꼴불견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온 서진은 곧장 젖은 옷가지들을 대충 세탁기에 넣어 둔 뒤 소파에 주저앉았다.
“하아…….”
서진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잘해 주는 우민이 약간 어색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런 우민이 편했다. 편했다고 해야 할까?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요즘 들어 종종 있었다. 기욱과는 다른, 시헌과 연애할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있던 서진은 자신이 입은 셔츠를 만지작거렸다. 우민의 셔츠. 그냥, 기분이 묘했다.
* * *
“그럴 거면 그냥 우리 학교 오지 그랬어.”
“그게요.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하하, H대가 아무래도 등록금이 싸잖아요.”
“하긴, 우리 학교 일반 대학도 등록금 비싸다고 자자하지. 참고로 난 학자금 이제부터 시작이다. 에휴…….”
도지섭. J대 응급의학과 1년 차, 서진은 지섭의 뒤를 쫓아다니며 이런저런 잡일을 도운 덕에 일주일 사이에 지섭과 꽤 친해졌다. 비록 직접적인 의료 행위는 못 해도 이래저래 손 맞추며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지섭도 꽤 편한 모양이었다. 처음 하루 이틀은 서진을 귀찮아하긴 했지만, 서진이 어느 정도 일에 익으니 지섭에게 언제 내려올 거냐고 연락이 오기도 했다. 좋은 선배 하나 만들라는 윤성의 말은 크게 틀리진 않았다.
“너 응급의학과는 생각 없어? 인턴 끝날 때쯤이면 3년 차인데 잘해 줄게. 아까워서 그래.”
“솔직히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그래도 아직은…….”
서진은 끝말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지섭은 서진의 등을 토닥이며 종이컵에 담긴 게토레이 음료수를 마셨다.
“가끔 내려오면 얼굴도 보고 그래.”
“저 아직 인턴도 안 했는데요.”
“부탁이니 말년에만 내려오지 마라.”
지섭이 진심이라며 혀를 찼다. 연말이 되면 늘어지는 인턴들을 도통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작년만 해도 자신도 같은 신세였지만, 막상 당하는 처지가 되고 나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대화를 하는 두 사람 곁으로 밖에 있던 윤성이 다가왔다.
“교수님, 무슨 일이세요?”
“어어. 아냐. 서진이한테 일 있어서.”
윤성의 대답에 지섭이 서진과 거리를 벌리며 눈치껏 밖에 나가 있겠다며 손짓했다. 윤성은 서진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더니 한숨을 쉬었다.
“너 집에 가.”
“네? 저 이제 막 내려왔……. 아.”
서진이 뭔가를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오늘은 누나와 기욱이 귀국하는 날이었다. 어떻게 이 사실을 까맣게 잊을 수 있었는지는 서진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까 그 뭐냐, 최 교수가 너 집에 보내 달라고 부탁하더라.”
“도 선생님한테 미안한데…….”
“미안할 게 뭐 있냐. 원래부터 혼자 하던 일인데. 고생했다. 아, 그리고 너 실습 점수 다른 과 교수님들한테도 얘기 잘해서 최대한 좋게 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굳이 말 안 해도 점수 보니까 괜찮던데. 우리 병원 지원할 거지? 맘 바뀌지 말고 인턴 할 때 보자. 조심해서 들어가고.”
“네.”
서진은 할 말을 하고 급하게 나가는 윤성의 뒷모습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 * *
간신히 늦지 않게 인천공항에 도착한 서진은 출국장 근처와 판을 두리번거렸다.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며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익숙한 얼굴이 눈에 보였다. 하필이면 기욱이 서윤의 앞에 서는 바람에 가장 먼저 얼굴을 본 게 기욱이라는 것은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다.
“누나!”
서진의 외침을 눈치챈 서윤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서진은 거의 2주 만에 보는 기욱을 향해 간단하게 눈웃음을 한 뒤 서윤을 안았다. 최소한 인사라도 해 주던가. 오랜만에 보는 사람에게 대하는 행동치고는 무례하기 그지없었으나, 그걸 말할 기회는 언제든 있었던 터라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리 서진이, 잘 있었어?”
“그럼, 누나… 윽. 좀 탄 거 같다?”
“얘는 못 하는 말이 없어.”
서윤의 뒤쪽으로 커다란 캐리어를 든 관광객이 다가왔다. 기욱은 옆으로 피하며 비틀거리는 서윤을 급하게 붙잡았다. 서윤이 비틀거리자 놀란 외국인이 죄송하다는 듯 사과를 했고, 기욱은 신경 쓰지 말라며 담담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서진은 서윤의 발목에 감긴 붕대를 보며 기욱을 노려봤다. 긴 바지를 입고 있어 크게 티가 나는 편은 아니었다.
“다리는 왜 그래?”
“아, 별거 아냐. 어제 호텔에서 삐끗하면서 넘어진 거야.”
“…….”
서진은 서윤의 발목에 있는 붕대를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기욱을 노려봤다. 따가울 정도로 매서운 시선에 기욱은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정말로 서윤이 혼자 넘어져 다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진은 기욱이 들고 있는 서윤의 캐리어를 빼앗아 대신 들었다.
“어머, 서진아 누나가 할게.”
“됐어. 힘들잖아.”
서진이 캐리어를 끌자 기욱도 서진을 따라 캐리어를 이끌며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뒷좌석에 탄 서진은 그동안 서윤과 하지 못했던 말들을 했다. 아파트에 도착해 완전히 캐리어를 올리는 데까지 도와줬다. 서진이 아파트의 가구들이 싹 바뀌어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사이, 기욱은 서윤에게 물을 따라 줬다. 오랜 비행으로 지친 모양인지 서윤은 물을 반쯤 마시다 말고 기욱에게 돌려줬다.
“잘래?”
기욱의 말을 들은 서진이 확, 고개를 돌렸다. 오후 한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자긴 뭘 잔단 말인가. 그러나 기욱은 입을 다물고 있는 서진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멋대로 대답했다.
“시차 때문에 피곤하잖아. 머리 아프면 한숨 자.”
“그렇지만…….”
서윤도 서진이 자신과 있고 싶다는 걸 눈치챈 모양인지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근 2주 만에 봐서 그런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핼쑥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서진은 진심으로 아파하는 서윤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괜찮아, 누나. 내일 올게. 병원에서 얼굴 봐도 되고. 짐 정리하고 괜찮아지면 쇼핑이라도 가자.”
“그럼 그럴까?”
“응. 한숨 자. 나도 집에 들어갈게.”
“그래, 미안해.”
“미안하긴.”
기욱은 침실의 방문을 열어 주며 서윤을 침실로 안내했다. 잠시 뒤 서윤을 침대에 눕힌 기욱이 거실로 나왔다. 서진은 굳게 닫혀 있는 시헌의 방문을 흘끗댔다. 이제는 시헌의 방이 아닌 저 방이 무슨 용도로 쓰이고 있는지 내심 궁금했다. 기욱이 시헌의 방이었던 문을 빤히 보고 있는 것을 불편해한다는 걸 눈치챈 서진이 상황을 넘어가고자 아무런 말이나 던졌다.
“시헌이는요?”
“걔 얘기가 왜 나와?”
“나올 수도 있죠. 사귀는 것도 아닌데.”
“제길, 누나네. 매형이랑 셋이서 저녁 먹고 자고 온대.”
“아, 그래요.”
기욱은 서진이 시헌의 이야기를 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사실 서진은 이제 시헌에 대해서는 어찌 되든 좋았다.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고 해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 건 아니었다. 기욱이 없었을 당시 술을 먹고 섹스를 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거기에 대해 기욱을 향한 죄책감은 없었다. 시헌에게는 살짝 미안하지만 말이다. 서윤이 자러 들어간 지금 서진은 굳이 이 집에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가 볼게요.”
서진이 가차 없이 등을 돌리자 기욱이 기다렸다는 듯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데려다줄게.”
“됐어요.”
서진은 기욱을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현관문만을 응시했다.
“강서진. 서진아.”
아아, 얼마 만에 듣는 말버릇이란 말인가. 서진은 등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기욱이 소름 끼쳤다.
“데려다준다고 했잖아.”
“…….”
“데려다준다고.”
“피곤하잖아요.”
서윤이 피곤한데 기욱이 피곤하지 않을 리 없었다. 서진은 기욱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돌렸다.
“비행기 안에서 잤어. 조용히 가지?”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을 때부터 서진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저 조금이라도 더 기욱에게 반항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서진의 머릿속엔 어떻게 하면 기욱에게 빅엿을 먹일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기다려.”
기욱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룸으로 들어갔고, 서진은 기욱이 들어가자마자 가차 없이 신발을 신고 아파트를 나왔다.
* * *
“…하아.”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기욱은 자신의 차 앞에 서 있는 서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플 정도로 서진의 팔을 잡은 기욱은 서진을 문이 열리지 않는 차 쪽으로 몰아붙였다. 서진의 등이 기욱과 함께 유리창에 딱 달라붙었다. 기욱은 서진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으면서 연락을 무시한 행위는 일부러 그랬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진짜로 서진이 혼자 집에 가 버렸다고 생각한 기욱은 차 앞에 서 있는 서진을 보고 당황했다.
“왜요.”
서진은 온몸으로 기욱을 밀어내며 입가를 올렸다. 진짜 가 버릴까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서진도 바보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막 귀국해 예민해진 기욱의 성격을 건드려 버틸 자신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기욱의 표정을 보니 아슬아슬할 정도로 성질을 긁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이런 적은 드문데 말이다.
등 뒤로 삐빅, 하는 소리가 났다. 기욱은 서진의 뒤에 있는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서진이 차에 타기도 전에 멋대로 몸을 구겨 넣어 서윤이 약간 눕혀 놓았던 의자를 원래대로 돌렸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배려였다.
“안 타고 뭐 해?”
멍하니 서 있는 서진을 본 기욱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순간 우민을 생각한 서진은 혹시라도 기욱에게 걸릴까 후다닥 기욱의 차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반대편으로 돌아 운전석에 앉은 기욱은 시동을 걸기 무섭게 지하주차장을 빠르게 올라갔다. 순식간에 주차장을 나온 기욱은 휴대폰을 보고 있는 서진을 보며 한마디 했다.
“주차장에서 기다린 건 현명했어.”
“사실은 그냥 집에 가고 싶었는데 말이죠.”
서진은 지지 않았다. 도로로 나온 기욱은 몸을 옆으로 살짝 기울여 한 손으로 서진의 턱을 붙잡아 돌렸다. 억지로 고개가 돌아간 와중에도 서진의 시선은 무릎 위에 있는 휴대폰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건가 싶어 흘끗 내려다 봤지만, 서진이 보고 있었던 것이라고는 포털 사이트 메인에 있는 뉴스기사가 전부였다.
언제까지 서진을 붙잡고 운전할 수 없었던 기욱이 손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집에 보내 줘요.”
“어디 가는지 알면서 묻지 마.”
2주 만에 본 서진은 기욱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더 얄미워진 구석이 있었다. 과거에는 앙칼지게 구는 서진을 감당할 자신이 있었지만, 요즘의 서진은 어디로 튈지 몰라 기욱을 당황스럽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서진은 그럴 줄 알았다며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조수석에는 서윤이 공항에서 오면서 덮었던 병원 담요가 그대로 있었고, 서진 또한 습관처럼 담요를 덮었다. 우민의 차와 달리 기욱의 차는 비교적 빠르게 난방이 돌았다. 서진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왜 그랬어요?”
“뭐가?”
“…….”
“불가항력이었어. 꼬마가 뛰어드는 걸 어떻게 해.”
“그러니까 그걸…!! 큰일 날 뻔했잖아요!!”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는 기욱의 태도에 서진이 결국 운전을 하는 기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주먹을 쥔 서진은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마침 모텔 지상주차장에 차를 댄 기욱이 안전벨트를 풀며 서진에게 다가왔다.
“크게 다친 거 아니잖아.”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도대체…….”
서윤의 잘못은 중요하지 않았다. 서진에게 서윤이 다친 건 전부 기욱의 탓이었다. 서진은 자신이 떼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눈앞에 있는 남자를 비난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기욱은 서진의 일방적인 트집에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기욱은 여전히 안전벨트를 매고 있는 서진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얼굴을 마주했다.
“너, 나한테 그런 말 할 처지가 아닐 텐데.”
“윽…!”
서진은 기욱의 뺨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완전히 맞지 않고 스친 탓에 별다른 아픔은 없었다. 기욱은 서진에게 맞은 뺨을 만지작거렸다. 맞았다고 해야 할까? 손톱으로 긁힌 듯한 쪽에 더 가까웠다. 스스로도 잘못 때렸다는 걸 눈치챈 서진이 또다시 손을 들자 기욱이 재빨리 손목을 붙잡아 눌렀다.
“귀국한 지 하루도 안 돼서 맞을 줄은 몰랐는데.”
“마, 맞을 만했잖아요! 아윽, 아파요…!”
“강서진.”
“…….”
“때린 만큼 책임져야 할 거야.”
손목에 풀리는 힘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강해졌다.
* * *
모텔에 들어간 기욱은 서진이 씻고 나오기 무섭게 침대로 끌어당겼다. 정확히는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는 서진을 강제로 끌어낸 것에 가까웠다.
“으, 읏…!”
침대 위에 누운 서진은 제 페니스를 무는 기욱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기욱은 계속해서 다리를 오므리는 서진이 성가셨던 모양인지 서진의 다리를 옆으로 벌렸다. 점점 올라오는 자극에 서진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서진은 신음을 참기 위해 손가락을 깨물었다.
“손 깨물지 마.”
그 모습을 본 기욱이 움직임을 멈추며 서진의 팔을 누른 뒤 위로 올라탔다. 옷을 입은 기욱의 허벅지 사이로 꼿꼿하게 선 서진의 페니스 끝이 닿으며 쓸렸다.
“흐으, 빠, 빨리해요…!”
기욱의 커다란 손이 식은땀이 가득 찬 앞머리를 찬찬히 쓸어 넘겼다. 아무리 기욱이 싫어도 강제로 하는 펠라에 흥분을 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 기욱이 주는 자극을 참고 있어 봤자 괴롭기만 할 뿐이라는 걸 서진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느끼는 중이었다. 서진의 등 뒤로 손을 넣어 몸을 약간 띄운 기욱이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게 재촉할 거 없잖아.”
“…….”
“말하지 않아도 해.”
등을 받치던 기욱의 손이 빠지며 서진의 몸이 침대 위로 폭 하고 떨어졌다. 기욱의 손가락이 서진의 귀두 끝을 살짝 튕겼다. 손끝으로 묽은 쿠퍼액이 묻어 나왔다. 혀끝을 내밀어 손가락을 살짝 핥았다. 그 모습에 서진이 깜짝 놀라 일어나려 했으나 기욱이 서진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침대 아래로 몸을 누르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누워.”
2주 만에 보는 서진을 까칠하다고 느끼는 만큼, 서진 또한 기욱이 더욱 강압적으로 변했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서진이 마지못해 침대에 누웠다. 알몸이 된 서진의 위에 올라탄 기욱은 천천히 입고 온 검은 티셔츠를 벗어 침대 아래로 내던졌다. 팔을 뻗어 작은 창문에 있는 커튼을 닫자 방 안은 완전히 밀실 같은 느낌이 났다. 지금이 낮이라는 건 기욱에게 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기욱은 한 손으로 옷을 벗으며 서진의 유두를 살살 간지럽혔다. 서진이 싫다며 손을 쳐 내자 보복이라도 하듯 손가락을 입에 물렸다.
“으읍….”
순식간에 입안으로 들어온 3개의 손가락이 서진의 혀와 입안을 거침없이 유린했다. 목 언저리에 고였던 침이 입안의 비어 있는 틈을 타고 흘러내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사이 입고 있던 바지까지 전부 벗은 기욱은 드로우즈만 걸친 채로 서진의 턱에 흐르는 침을 핥았다.
“하아, 흐… 윽…!”
기욱이 손을 빼내자 비로소 제대로 된 숨을 쉴 수 있었던 서진이 손등으로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았다. 서진은 제 입에 흐르는 침을 핥은 기욱이 못마땅했다. 기욱은 서진의 페니스를 잡고 귀두 끝을 살살 긁었다.
“읏, 으응….”
기욱의 다른 손이 서진의 양쪽 팔목을 위로 해 누르고 있었다. 기욱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반항을 하기엔 너무나 큰 사람이었다. 페니스를 주무르는 손길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잇새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간신히 참은 서진이 결국 몸을 비틀거리며 기욱의 손안에서 사정했다.
“오랜만이지? 아니면 혼자 했어?”
“시끄러워요!!”
참지 못한 서진이 기욱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기욱은 서진의 손에 묻은 것을 휴지로 닦아 냈다. 동시에 아래쪽에서 머물러 있던 기욱이 서진의 머리 위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평소 하던 펠라의 체위와 다른 행동에 서진이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기욱은 그런 서진의 입을 강제로 벌린 뒤 페니스를 입안에 머금게 했다.
“우윽, 으윽… 읍….”
기욱은 반강제로 서진의 손을 페니스 쪽으로 닿게 했다. 서진은 부풀어 오른 기욱의 페니스를 손으로 쥐고 물 수밖에 없었다.
“흐, 으… 읏… 서진아.”
시야를 가리는 위쪽으로 허리를 움직이며 참아 왔던 신음을 내뱉었다. 서윤과의 섹스도 좋지만, 근본적으로는 여자보다는 남자를 더 선호했으며 그중에서도 기욱은 이제 서진이 아니면 쉽게 만족 할 만한 섹스를 할 수가 없었다. 이번 신혼여행을 하고 오고 난 뒤로 오히려 서진에 대한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처음부터 기욱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서윤이 아니라 서진이었다.
“크읍, 캑캑…!!”
차마 기욱이 사정할 때까지 버틸 수 없었던 서진은 기욱의 페니스를 입안에서 빼내며 헛구역질했다. 기욱은 돌아간 서진의 고개를 강제로 돌려 입안을 틀어막았다. 그건, 키스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거친 행위였다. 기욱과의 입맞춤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서진의 숨은 부족해졌다. 기욱은 서진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몸에 힘이 풀리기 직전에야 서진을 놓아주었다.
“흐으, 읏…….”
애달픈 신음을 내는 서진을 무시한 기욱은 허벅지를 벌려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듯, 조금만 넣어도 아프다고 말하던 과거와 달리 안으로 들어오는 기욱의 손가락에 서진은 눈살을 살짝 찌푸릴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서진이 자신과의 섹스에 익숙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기욱은 너무나 반응이 없는 서진에 속으로 살짝 기분이 언짢아졌다. 손가락의 개수를 늘린 기욱이 다른 손으로 서진의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서윤이랑 해외에 있을 동안 다른 남자랑 구른 거 아니지?”
“누가…!! 아악!”
기욱이 서진의 입술 밑을 물어뜯었다. 갑작스럽게 뜯긴 입술에 서진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기욱은 서진의 허벅지를 누르며 더욱 깊숙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기욱에게 뜯긴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났다. 기욱은 보란 듯이 혀로 서진이 흘린 피를 닦았다.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했다. 며칠 피멍은 들겠지만, 서진이라면 알아서 변명을 지어낼 것이라 걱정은 들지 않았다. 기욱은 싸늘한 시선으로 서진이 흘린 피를 핥으며 눈을 치켜떴다. 서진의 안에 있는 기욱의 손가락이 위아래로 서진을 괴롭혔다.
“으, 윽… 어윽…!”
“만약 그랬다가는 이 정도로 안 끝나.”
기욱의 손가락이 빠져나오며 서진의 몸이 축 처졌다. 간신히 숨을 고른 서진은 휴지로 제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 주는 기욱을 노려봤다.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소리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 그….”
기욱이 대충 지혈을 한 뒤 휴지를 침대 밑 쓰레기통에 내던질 때까지 서진은 벙어리처럼 옹알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지.”
몸을 숙인 기욱이 자신의 드로우즈를 완전히 벗은 뒤 허벅지 안쪽으로 페니스를 가져다 댔다. 기욱의 페니스는 금방이라도 서진의 안을 밀고 들어올 것처럼 굴고 있었다.
“만약에라도 그랬다가는, 둘 다 죽어.”
“…….”
“너도 그리고 강서윤도.”
“그걸 말이라고…… 하으, 아으으윽!!”
서진은 기욱과 몇 번을 섹스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기욱의 페니스가 처음 안으로 들어올 때의 그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들어온 페니스가 익숙해지기까지는 꽤 오랜 움직임이 필요했다. 적어도 처음 그 순간만큼은 멀쩡한 몸을 찢고 들어오는 것 같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기욱의 페니스는 서진이 감당하기엔 여전히 너무 컸다. 서진은 몸을 뒤틀며 침대 위쪽으로 올라가기 위해 시트를 붙잡았다. 기욱의 양손이 서진의 허리를 잡아당겼고, 서진은 기욱의 페니스를 몸에 넣은 채 기욱의 체위에 맞춰 아래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기욱은 숨을 고르며 어떻게든 진정하려고 하는 서진을 비웃으며 손가락으로 등허리를 살짝 쓸어내렸다. 페니스를 넣은 서진은 온몸이 예민해진 상태라 어딜 만져도 민감하게 반응을 했다.
“허윽…, 윽….”
기욱의 밑에 깔린 서진은 앓는 신음을 냈다. 사실은 기욱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빌었다. 어딘가의 해외에서 사고로 죽어 버렸으면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기욱은 보란 듯이 돌아왔고, 서윤을 재우기 무섭게 서진을 안았다.
쉴 만큼 쉬었지만, 만족할 만한 섹스를 하지 못한 기욱은 상당히 굶주려 있는 상태였다. 기욱은 몇 번이나 체위를 바꿔 가며 서진을 안았다. 멀쩡한 상태로 들어온 서진이 실신할 때쯤에야 기욱의 움직임이 멈췄다.
“허으… 으윽… 윽….”
서진은 다리를 벌린 채 기욱의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낯부끄럽다고 생각했던 이 체위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물론, 닫혀 있는 문을 의식하거나 창문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릴 때면 깜짝깜짝 놀라는 건 여전했다. 다리를 오므리고 싶어도 기욱에 의해 반강제로 무릎 사이에 끼워진 팔에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기욱은 앞쪽으로 기울어지는 서진의 허리를 붙잡아 안았다. 빠지지 않은 기욱의 페니스와 서진의 허벅지 밑으로 마르지 않은 정액이 묻어 있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닿는 기욱의 페니스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부를 꾹꾹 누르며 압박하고 있는 정액은 서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기욱에게 안긴 서진이 힘겹게 입을 뗐다.
“…됐잖아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거리가 가까웠던 터라 기욱이 서진의 목소리를 듣기에는 충분했다. 기욱은 허리를 크게 움직여 서진의 안에 피스톤질을 했다. 갑작스럽게 움직이는 기욱의 페니스에 서진은 억,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 수밖에 없었다. 기욱은 팔에 차인 시계를 풀렸다. 빼는 것을 까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시계를 풀며 시간을 확인하자 아직 시간상으로 여유가 있었다. 기욱은 자신이 물어뜯음으로 인해 부풀어 오른 서진의 아랫입술을 핥으며 속삭였다.
“멀었어.”
서진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기욱은 여기서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기욱은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서진이라는 존재 자체를 세상에 지울 수만 있다면, 그렇게 세상에서 지운 서진을 자신만이 아는 곳에 가둬 두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기욱이라도 이런 식의 판타지다운 설정은 무리가 있었다. 어쨌든, 갈수록 서진과 섹스를 할 만한 타이밍과 시간이 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신혼여행을 가기 전을 포함하면 마지막으로 서진과 섹스를 한 게 한 달 전이었는지 두 달 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 서진이 신경외과 레지던트가 된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말이다. 기욱은 병원에서 시선을 피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그때 가서 볼 일이지 지금 생각할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의 기욱은 서진으로 인해 미친 듯이 갈증이 났고,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음은 명확했다.
“허윽, 하으윽…!! 으읏….”
“움직여. 가만히 있지 말고….”
“윽, 못… 허윽…….”
서진은 못 하겠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으나 차마 내뱉지 못했다. 못 한다. 싫다. 그러한 말들이 기욱에게 어떤 영향을 가져오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헌과 사귀었던 것이 걸린 이후로 기욱은 서진이 섹스를 거부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극도로 민감하게 굴었다. 기욱이 마음만 먹으면 보이지 않는 곳에 주먹을 휘두르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서진은 기욱의 허벅지를 잡으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허리를 들 때마다 안쪽에 막혀 있다시피 해 있던 정액들이 뚝뚝 흘러내렸다. 눈을 질끔 감은 서진이 허리를 든 채 움직이지 않자 기욱이 서진을 몸을 아래로 눌러 페니스를 박았다. 그건, 그러니까 일방적으로 쑤셔 박았다고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반 토막 나는 것 같은 기분에 서진은 눈을 크게 뜨며 신음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이내 침대에 완전히 누운 기욱이 서진의 허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피스톤질을 했다.
신음이 아닌 비명조차 지를 기운이 생기지 않았던 서진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왠지 누군가 열고 들어올 것 같은 철문이 아닌, 벽이라는 사실에 감사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서진의 입술은 이미 기욱이 뜯지 않아도 신음과 실신하는 것을 참기 위해 깨문 탓에 엉망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술을 마시고 우민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이럴 거면 차라리 우민과도 섹스해 버릴 걸 하고 후회가 들었다. 시헌이 아니어도 좋았다. 기욱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섹스를 한다면 이 지긋지긋한 섹스에 면죄부를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첫 시작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열차의 종착지는 나락이었으며, 열차에 탑승한 누구도 열차를 멈추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 * *
서진은 기욱과 얼마나 더 섹스했는지 알지 못한 채 침대에 쓰러졌다. 서진은 반쯤 정신을 잃은 뒤 깨어났다. 기욱은 서진을 품에 안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일어났어?”
“……윽.”
마약과 같은 달콤한 목소리가 현실이 되기까지는 몇 초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서진이 쓰러진 것은 불과 일 분도 채 되지 않았고, 서진의 몸은 여전히 기욱의 거친 섹스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온몸에 오한이 돋는 기분이 들었으며 안쪽이 욱신거리며 쑤셔 왔다.
서진이 깨어난 것을 확인한 기욱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서 대충 물에 적셔 온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이대로 집에 갈 텐데, 괜히 서윤에게 오해를 받아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최근 들어서는 강서진만큼이나 서윤도 기욱의 행동에 대해 예민해진 것 같았다.
기욱이 아는 서윤은 이런 일에 트집을 잡을 사람이 아니었지만, 몇몇 신경 쓰이는 행동으로 볼 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서진은 옷을 챙겨 입는 기욱을 보더니 침대에서 일어나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서진은 곧장 앞으로 휘청거렸다.
“강서진!”
시계를 차던 기욱이 깜짝 놀라 서진의 허리를 안았다. 지쳐서 그런가 놓으라는 소리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서진은 간신히 팔을 뻗어 기욱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줘요.”
“……뭐?”
“데려다줘요. 집에. 제발…….”
서진은 눈물이 흐를 것같이 울먹이며 애원했다. 기욱은 적당히 차비라도 쥐여 주고 모텔에서 편하게 자고 오라고 할 생각이었다. 등을 돌리자 침대 위와 주변은 섹스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집에 갈 기운도 없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것을 정신력 하나로 붙잡고 있었다. 서진은 기욱과의 섹스 흔적이 가득한 장소에서 기욱에게 버려진 것 같은 꼴로 자고 싶은 생각 따위는 죽어도 없었다. 기욱은 쉬다 가라는 의도인 것 같지만, 이런 곳에서 마음 편히 자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아, 알았어. 옷 입어.”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매달린 서진을 본 기욱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서진을 데려다준 기욱은 담배를 한 대 피운 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의 유리창 너머로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기욱은 거실 한쪽에 담배와 차 키, 시계, 지갑 등의 물건을 대충 던져 놓은 뒤 서윤이 자는 침실로 들어갔다. 기욱이 침대 한쪽에 걸터앉자 이불을 돌돌 말고 있던 서윤이 확, 몸을 돌렸다.
“늦게 들어왔네.”
서윤의 목소리는 이제 막 깼는지 상당히 잠겨 있었다. 기욱은 이불 위로 서윤의 몸을 토닥이며 침대에 누웠다. 서윤이 이불을 벌리자 그 안으로 기욱이 들어갔다.
“서진이 점심 먹이고, 이야기 좀 하다 왔어.”
“서진이는 잘 들어갔어? 집에 잘 안 들어갔다고 얘기가 많던데…….”
“들어가는 거 확인하고 오는 길이야.”
병원 이야기도 해야 했었는데, 서진이 답지 않은 반항을 하는 탓에 까먹고 있었다. 기욱은 차마 그 사실을 서윤에게 말하지 않은 채 머리를 긁적였다. 서윤이 조몰락거리며 기욱의 품에 안겼다. 사실은 서윤이 적극적으로 굴 때마다 기욱은 몇 번이나 눈앞에 있는 사람이 서윤이 아닌 서진이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서진에게 잘해 줘야지 하면서도 반항적인 서진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같이 짜증을 내고는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애당초 기욱과 서진은 잘 지내려야 잘 지낼 수가 없었다.
“다행이다.”
“뭐가?”
“그냥. 다. 난 나름대로 서진이한테 잘해 준다고 하는데……. 그게 힘들 때가 있어. 서진이는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겠지만, 속은 아닐 거야. 그에 비해서 오빤 남자잖아? 나 말고 누군가가 서진이를 아껴 준다는 사실에 기뻐.”
서윤이 실실 웃으며 기욱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거꾸로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거꾸로였다. 새장에 갇힌 사람은 서진이 아닌 서윤이었으며, 기욱이 원했던 것은 처음부터 변하지 않았다. 기욱은 문득 돌이킬 수 없는 건 서진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는 사실에 대해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기욱은 현실을 외면하는 방법으로 잠을 택했다.
“피곤해.”
다행히도 정말로 피곤했던 터라 기욱은 금방 잠에 빠졌다.
* * *
“안녕하십니까.”
기욱의 얼굴을 알아본 의사 하나가 기욱의 눈치를 보며 인사를 했다. 기욱이 신혼여행을 다녀온 사이에 바뀐 인턴이었다.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았음을 확인해 준 기욱은 휴대폰을 보며 병실의 이름표를 일일이 표시했다.
서정수.
기욱과 병원에서 교통사고를 냈던 환자의 이름으로 칼에 찔려 배가 반쯤 열린 상태로 입원한 남자의 이름이었다. 죽을 뻔한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기욱이 귀국하기 며칠 전 의식을 되찾았다고 들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담당 주치의가 자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하긴, 환자의 상태가 가장 안 좋았던 시기가 신혼여행 기간과 정확히 겹쳐 있으니 어떻게 보면 마냥 불평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한우민은 싫지만, 동료 의사로서 객관적으로 괜찮은 의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뭐야?”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맞지 않았다. 혹시 잘못 찾은 걸까 봐 근처 병실까지 다 뒤졌지만, 기욱이 원하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잘못 적어 왔나? 답지 않은 실수라 생각한 기욱은 간호사 데스크 쪽에 있는 컴퓨터를 빌려 다시 검색했다.
“…….”
기욱은 차트와 자신의 휴대폰 메모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기욱은 병원 벽에 걸린 시계를 슬쩍 바라봤다. 오늘이 주말인 탓에 병원은 비교적 한가했다. 사실은 꼭 출근할 필요는 없었지만, 쉴 만큼 쉬었던 터라 휴가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기욱은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뒤 정혁의 연구실로 향했다. 정혁의 연구실 문은 도어락으로 잠가져 있었다.
“흠.”
기욱은 팔짱을 낀 채 굳게 닫힌 정혁의 연구실 문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정혁이 연구실 안에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가 한 생각이지만 참으로 근거 없는 확신이었다. 기욱은 휴대폰을 열어 오래된 단톡방을 뒤졌다. 단톡방 끝 무렵에서 J대 병원 동기들이 남아 있는 단톡방을 찾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방에 있던 절반 이상이 레지던트를 마치기 무섭게 자신의 갈 길을 찾았지만, 그중 남아 있는 일부는 기욱처럼 병원 교수직을 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기욱은 동기 중에서 J대 병원 최연소 교수였고, 대부분은 여전히 펠로우직을 유지하거나 간신히 조교수에서 1년 차 부교수가 된 정도였다.
기욱은 정혁의 연구실 문 옆 벽에 기대 휴대폰을 만졌다.
「외과 임 교수님 연구실 비밀번호 아는 사람?」
「니네 병원 외과 교수 연구실 번호를 왜 여기서 찾아 ㅋㅋㅋ」
「오랜만에 올라와서 뭔가 봤더니 뜬금없네」
「아놔 급하다고 ㅡㅡ」
시간이 시간인지라 답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기욱은 괜히 물어봤나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외과에 친한 후배나 의사를 만들 걸 그랬나 싶었다. 기욱의 몇 없는 외과 동기들은 레지던트를 마치고 곧장 병원을 나왔기 때문이었다.
「기욱이 교수라며 술 한번 해야지 ㅋ」
이 자식은 언제 이야기를 하는 거야. 기욱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답장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냥 규건이나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는 게 빠르겠다 싶을 무렵 톡이 하나 더 올라왔다. J대에서 외과를 마친 여자 동기였다.
「임정혁 교수님? 아직도 계심??」
「내 생각엔 정퇴까지 할 듯. 그보다 너 연구실 번호 알아?」
「ㅋㅋ 그 교수님 연구실 비밀번호 족보처럼 내려오는 거 몰랐냐 ㅋㅋ? 지나가는 1년 차 잡고 물어도 다 알걸? 니 교수라며」
「몰라 그런 게 있어 뭔데?」
「*9182」
비밀번호를 본 기욱은 한 손으로 고맙다는 톡을 친 뒤 곧장 도어락의 번호를 눌렀다. 띠리링, 짧은 음악과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동시에 훅, 하는 찬 바람이 기욱의 뺨을 스쳤다. 정혁의 연구실은 창문을 오랫동안 열어 둔 탓인지 바깥처럼 쌀쌀했다. 창문 쪽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정혁이 기욱을 보더니 거의 다 피운 담배를 끄며 고개를 돌렸다.
“너 뭔데?”
“하아, 안녕하십니까.”
달리 할 말이 없었던 기욱은 침묵 대신 인사로 대신했다. 정혁은 담배를 서랍에 던져 넣은 뒤 창문을 닫았다. 정혁의 연구실 비밀번호가 공공재라는 동기의 말은 크게 틀린 게 없어 보였다. 정혁은 기욱이 제 연구실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것을 딱히 놀라워하진 않았다. 정혁은 낡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며 기욱을 올려다봤다.
“나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찾아왔냐.”
“그냥, 계실 것 같았습니다.”
정혁이 앉으라는 듯 손짓하자 기욱이 정혁의 앞에 바르게 앉았다. 정혁은 책상 쪽에 있는 탁상 달력을 흘끗 바라봤다. 남의 과 교수의 스케줄까지 일일이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긴 하지만, 정혁이 알기로 기욱의 휴가는 내일까지였다.
“일중독이다.”
“오늘은 그냥 들른 겁니다.”
“신혼여행은 잘 다녀왔나 보네.”
정혁은 약간 탄 기욱의 피부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기욱은 뺨을 살짝 만지며 손을 아래로 내려놓았다. 정혁은 몸을 살짝 숙여 휴대폰을 가져와 뭔가를 확인했다. 잠시 뒤 휴대폰을 엎은 정혁이 한숨을 쉬었다.
“너 서정수 환자 뒤지고 다녔냐?”
“네.”
“새끼, 뻔뻔한 거 봐라.”
“방금 연락받으셨잖습니까. 속 보이는 거짓말 할 필요는 없죠.”
기욱이 피식거리며 정혁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흘끗댔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정혁이 며칠 감지 못한 머리를 뒤로 넘기며 뒤쪽에 있는 선반을 손가락질했다.
“커피라도 한잔 타라. 선반 열면 있어.”
“…….”
“뭐 해? 환자 어딨는지 안 알려 준다? 분명히 말하는데 너 그 환자 어디 숨었는지 못 찾아. 나 작정하고 숨바꼭질하면 보통 아닌 거 몰라?”
정혁에게 밉보여서 좋아질 게 없다고 생각한 기욱은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탔다. 그 사이 소파에 앉은 정혁이 기욱이 없었던 시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빠르게 요약해 설명해 주었다. 우민이 서정수 환자를 담당하고, 재수술에 관한 이야기였다. 정혁의 이야기가 끝나 갈 무렵 기욱은 다 된 커피를 정혁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래서 신변 보호해 달라는 그의 말만 믿고 숨겨 주고 있는 겁니까? 무슨 사연인지도 모르고?”
“딱 봐도 수상하잖아. 그리고 먼저 살인이니 뭐니 하는 얘기 꺼냈던 건 박기욱 너야.”
“그거야 그렇긴 한데……. 영화 너무 많이 봤다는 등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일축하신 건 교수님이잖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그렇지! 그냥 좀……. 아씨, 몰라!! 나라고 뭐, 쉬운 결정이었는 줄 알아? 됐다. 너 붙잡고 내가 무슨 이야길 하냐. 어쨌든 환자 상태 많이 좋아졌으니까 한번 가 봐.”
“어딘지 알려 주실 겁니까?”
“어디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너희 병동에 있으니까. 한 교수가 중간에 수술했으니까 그쪽으로 바꿨어.”
“하하,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딱 그 격이군요.”
“뭐, 그렇지. 다행히 그 뒤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특별히 문제는 없어.”
정혁은 더 할 말이 없다며 손을 저었다. 병동 주소는 알려 주지 않았지만, 원하는 환자가 신경외과 병동에 있다는 사실은 기욱에게 있어서 다 알려 준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기욱은 다 마신 커피 잔을 서류들이 가득한 테이블 사이로 내려놓았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그래.”
정혁은 고개를 숙이며 일어서는 기욱을 향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