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3 그런 네가 싫어 (56/83)

Chapter. 53 그런 네가 싫어

“…진.”

“…….”

“강서진!”

“하아, 하… 윽…!”

서진은 눈을 떴다. 등 뒤로 식은땀이 잔뜩 흘러 있었다. 히터가 끊어진 차 안은 싸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시헌의 손이 서진의 이마 근처를 움직였다. 손가락이 이마에 닿는 듯싶었으나, 정신을 차린 서진을 의식한 모양인지 손을 내려놓았다. 선팅이 되었음에도 날이 밝아 햇빛이 차 안으로 넘어 들어왔다. 몸을 살짝 일으킨 서진은 아직도 현실 감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러니까 꿈인가? 기욱과의 두 번째 섹스, 사실상 서진의 기억 속에 있는 첫 섹스나 다름이 없으니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엄연한 현실이었지만 이제 와 왜 그런 과거의 꿈을 꿨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생생할 정도로 잔인한 꿈에 서진은 혼란스러웠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서진을 본 시헌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꿈인데 그래?”

“누나. 세미나.”

“어?”

“그러니까……. 하아.”

생각이 나는 대로 말을 내뱉은 서진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게 현실이다. 시헌은 차 안에 있던 물을 서진에게 건넸다. 미지근하긴 했지만 오래된 물은 아니었다. 서진은 시헌이 내민 물을 마셨다. 시헌은 서진을 혼란스럽게 한 꿈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졌다. 시헌은 원래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하지 않을 뿐 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무슨 꿈인데?”

정신이 없는 서진은 시헌이 똑같은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으며 다시 대답했다.

“너희 형이랑, 처음 섹스했을 때.”

“그걸 꿈으로 꿨다고?”

“그런 거 같아.”

남은 물을 전부 마신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괜히 말했나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 둘러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서진은 물이 없는 페트병을 양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운전석에서 안전벨트를 푼 시헌이 서진 쪽으로 다가왔다.

서진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차는 정차되어 있었으나,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헌이 왜 집에 가지 않고 중간에 정차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시헌은 고개를 돌리며 창밖을 보는 서진의 손을 붙잡았다. 난데없이 붙잡힌 손에 서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좁은 차 안, 두 사람의 거리는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였다. 손을 놓은 시헌은 서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다행히 키스할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 이르지만, 저녁 먹을래?”

둘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서진은 시헌의 팔에 있는 시계를 흘끗 쳐다봤다. 굳이 시계를 보지 않더라도 밖은 지독할 정도로 날이 좋았다. 차 안에서 아무리 잠을 많이 잤다고 해도 저녁밥을 먹을 때까지 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진은 고개를 앞뒤로 흔들어 시헌의 이마에 탁, 하고 부딪혔다. 그 반동으로 시헌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저녁이 아니라 점심이겠지.”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뭘?”

시헌과 단둘이 여유롭게 이야기를 해 본 것이 얼마 만이더라.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로 흐른 시간에 서진은 헛웃음이 나왔다. 시헌은 시동을 걸며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조금 더 나가 도로를 확인한 서진은 차가 J대 근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병원 근처로 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시헌은 병원 근처 사거리에서 일부러 신호에 걸렸다. 서진은 그제야 왜 시헌이 집이 아닌 병원에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오피스텔 주소.”

“…….”

“몰라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하아. 그러면 사람을 깨워야 할 거 아냐.”

서진이 오피스텔로 이사를 한 건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난 뒤의 일이었다. 막상 시헌과 헤어지고 난 서진은 몰려드는 일들에 마음의 정리를 할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바빴다. 시헌은 서진이 오피스텔로 이사했다는 것만 알 뿐 정확한 집 주소를 알지 못했다. 서진이 알려 준 적 없으니 주소를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역으로 집 주소도 모를 정도로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는 것은 마냥 당연하지만은 않았다.

“깨웠어.”

“박시헌, 거짓말…….”

“진짜야.”

속도를 늦춘 차 안에서 침묵이 흘렀다. 서진은 자신을 깨웠다는 시헌에게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도 안 될뿐더러, 시헌은 거짓말을 하지 않을 때는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운전하는 도중에도 꿋꿋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헌에 서진은 혹여 사고가 날까 걱정해 알겠다며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안 일어나길래, 죽은 줄 알았어.”

“이게 진짜!”

“하하, 농담이야. 아닌 거 아니까 언젠가 일어나겠지, 하고 기다린 거야. 주소 불러 줘.”

서진은 못 이기는 척 오피스텔의 주소를 불렀다. 갓길에 차를 댄 시헌이 서진이 부른 오피스텔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었다. 서진의 오피스텔은 시헌이 생각했던 것보다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H대와 J대 중간쯤에 있는 곳으로 기욱이 실습을 다니는 서진을 배려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차가 다시 도로 위에 올라가 제 속도를 내자 서진은 익숙하지 않은 시헌의 차 안을 두리번거렸다. 공항에서 올 때야 정신이 없어 그냥 탔는데, 아무리 봐도 새 차 느낌이 물씬 풍겼다.

“차 샀나 보네.”

“응. 아빠가. 형 결혼한다고 차 새로 해 줬어.”

기욱의 결혼이랑 시헌의 차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가 싶었지만, 아무렴 시헌의 집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 아무리 외제 차라고 해도 기욱의 차는 서진이 중학교 시절부터 타고 다녔던 것으로 꽤 오래 탄 차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서진은 바뀐 새 차만큼이나 시헌이 낯설었다.

시헌은 빠르거나,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안정감 있게 운전을 했다. 얼마나 운전을 잘하는지 시헌의 차를 탈 때면 차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만큼 차가 좋은 차인 것도 있지만. 언제나 도로 위 최고 속력을 밟는 기욱과 비교할 때 시헌의 운전은 확실히 그 차이가 뚜렷했다.

시헌과 기욱은 같으면서도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 한 손으로 운전대를 만지작거리던 시헌이 거울 너머로 서진을 흘끗댔다. 서진은 의자를 바로 해 앉은 뒤 담요를 덮고 있었다.

“오피스텔, 형이 잡아 준 거야?”

“어.”

신경이 쓰여 해 본 질문이지만, 그 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대화하기도 전에 서진의 오피스텔에 도착하는 것이 훨씬 빨랐기 때문이었다. 주차장에서 내린 서진은 집으로 가기 위해 현관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유리문을 지날 때마다 비밀번호를 눌러야 한다는 사실이 어색했던 처음과 달리 이제는 완전히 새집에 익숙해졌다. 시헌은 그런 서진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서진의 집은 복도 안쪽에서 제법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묘하게 뒤에서 걷는 시헌이 거슬렸던 서진은 걸음을 멈췄다. 사실 시헌은 서진의 집이 몇 동 몇 호인지를 알지 못해 멈춘 곳이 집 앞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서진은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른 뒤 문을 열기 위해 현관문 손잡이를 붙잡았다.

“나가 있어.”

“집 정도는 보여 줄 수 있잖아.”

“싫어.”

그렇게 말한 서진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시헌은 서진이 들어가기 전 문고리를 살짝 잡았다. 덕분에 문은 잠금이 되지 않았다. 정작 서진은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시헌은 문틈 사이로 깔끔하게 정리된 오피스텔 내부를 둘러봤다. 이내 안쪽 방에서 옷을 가져온 서진과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시헌의 눈이 맞았다. 윗옷을 반쯤 벗었던 서진이 깜짝 놀라 옷을 내리며 현관으로 다가오려 했다.

“매정하긴.”

“너…!”

“서진아, 내려가 있을게!”

시헌은 문틈으로 소리를 친 뒤 후다닥 엘리베이터가 있는 안쪽 복도로 숨었다. 당황한 서진이 문을 열고 복도를 둘러봤지만, 시헌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서진은 문을 완전히 닫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게 진짜! 왜 쫓아온 거야!”

정말이지 어렸을 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 * *

서진의 오피스텔을 나온 시헌은 오피스텔 입구 근처에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기욱이 잡은 오피스텔이다. 기욱의 성격상 아무 곳이나 선택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서진의 오피스텔은 시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서진은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원래부터 그런 걸 일일이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었다. 겸손이라고 하기보다 기욱에게 이런 수고는 감사를 받을 이유조차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박기욱이라는 사람은 보면 볼수록 제 형이지만 동시에 무서운 사람이었다.

담배가, 오늘따라 유독 썼다. 하늘을 보자 비행기가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기욱과 서윤도 하늘 어딘가에 있겠지, 하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후, 연신 줄담배를 피운 시헌은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문 뒤 불을 붙이기 위해 라이터를 담배 끝에 가져다 댔다. 동시에 오피스텔로 들어오는 남자―우민과 눈이 마주쳤다.

“…….”

“…….”

사복 차림이지만 어디서 묘하게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에 시헌은 불붙인 담배를 입에서 떼어 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분명 보긴 봤는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우민도 처지는 비슷한 듯 시헌의 인사를 받고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라고 물어보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으며 우민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헌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우민을 힐끗댔다. 병원 관계자인가? 뭐, 아니면 말고. 시헌은 다급하게 타들어 가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내려올 거로 생각했던 서진은 좀처럼 집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시 올라가 보려 해도 비밀번호를 모르고, 그렇다고 전화를 하기에는 너무 모호했다. 시헌은 결국 초조한 기분을 담배로 달래며 서진을 기다렸다.

한참 만에 서진이 밖으로 나왔다. 멍하니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시헌은 서진이 어깨 위에 손을 올릴 때까지 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온 서진을 본 시헌은 남은 담배를 마저 피웠다. 서진은 말없이 남은 담배를 피우는 시헌을 슬쩍 봤다.

“또 뭐가 불만인데?”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런 표정으로 아무 말 않았다고 하지 마.”

“돗자리 깔아도 되겠어.”

“오래 봤잖아.”

서진이 말하는 오래라는 것이 첫 만남인 초등학교 때부터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사귀었을 때를 말하는 것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사귀었던 때든, 초등학교 때든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 수밖에 없는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시헌은 짧아진 담배의 재를 털었다.

“그냥, 좀 늦는구나 싶어서.”

“아, 누구랑 잠깐 이야기 좀 하느라.”

“누구?”

반사적으로 대답한 서진은 반사적으로 들어오는 당연한 질문에 눈을 깜박였다. 옷을 갈아입고 복도를 나온 서진은 우민과 마주쳤다. 별로 대단한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시헌이 우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모르는 서진은 섣불리 우민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서진은 시헌에게 우민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을 더듬었다.

“옆집에…….”

“옆집에?”

“응. 같은 병원에서 일하더라고.”

“의사야?”

“의사래.”

“레지? 무슨 과인데?”

담배를 끈 시헌의 질문에 서진은 눈을 깜박였다. 시헌이 원래부터 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서진은 이번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박시헌.”

“…….”

“거기까지만 해.”

사귀는 것도 아니니 질투를 할 이유도, 사생활에 대해 일일이 캐물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기분이 상한 서진의 표정에 시헌은 괜한 질문이었다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 지나쳤어.”

서진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시헌의 차를 찾았다. 아직 시헌의 바뀐 차가 익숙하지 않았다. 딱히 시헌의 말에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너. 어디 살아?”

유리창에 팔꿈치를 기대며 밖을 보고 있던 서진이 문득 생각났다며 말을 했다. 시헌은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까지 기욱의 집에서 같이 살았다. 전에야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고는 하지만, 신혼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의 집에 시헌이 끼어 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욱과 서윤이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시헌 또한 집을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정확히 어떻게 됐는지는 알지 못했다. 서진의 집 주소를 모르는 시헌이나, 시헌이 어떻게 집을 나왔는지조차 모르는 서진이나 다를 건 하나 없었다. 고작 1년밖에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시간의 괴리가 벌어지는 기분이었다.

“나 병원 아파트.”

“뭐? 네가 거길 왜 가? J대 병원?”

“응.”

어쩐지 차가 J대 병원 근처에 있더만은. 서진은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우연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시헌의 말이 틀리지 않은 듯 어느새 차는 병원이 눈에 보이는 곳까지 도착했다.

“너 대체……. 어떻게 들어간 거야?”

병원에서 불과 5분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아파트 단지는 지방에서 올라오거나 거처가 애매한 병원 관계자들이 주로 사는 곳이었다.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을 짓는 서진을 본 시헌은 담담하게 주차장에 차를 댔다.

“아빠한테 말했어. 대신 학교 졸업하고 전문의까지는 어지간하면 J대에서 하래.”

“아, 맞아. 너희 부모님. 그랬지.”

서진은 잠시 잊고 있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이사장 아들내미가 병원에서 관리하는 아파트 방 하나 구하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헌은 안전벨트를 풀며 말을 이어 갔다.

“사실은 부모님은 여기 사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기왕이면 본가에 오라고 얘기도 했는데.”

“……했는데?”

“그냥, 좀 불편하다고 해야 하나. 워낙 오래 나와서 살았으니까. 그런 거야. 동생도 있고.”

시헌은 동생이라는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박운오. 제법 어렸을 때는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등 친하게 진했지만, 나이가 들어 갈수록 멀어진 거리에 이제 시헌과 운오는 같은 성을 쓰는 타인이나 다름없었다. 동생이라는 말에 서진 또한 깜짝 놀랐다.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시헌은 기욱을 제외한 형제에 대해 말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서진이 시헌의 동생―운오와 큰누나인―하연을 처음 본 것도 서윤의 결혼식 준비를 도와주면서였다. 그나마도 하연과 서윤은 꽤 친한 모양인지 이래저래 같이 끼어 대화했지만, 운오와는 거의 주고받은 말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박운오, 달갑진 않지만, 서진이 운오에 대해 떠오르는 게 있다면 그건 한 가지뿐이었다.

“그 녀석. J대에서 일하는 게 꿈인 녀석이니까. 누구처럼 말야.”

“난 누나 때문에 그런 거고. 어디 학교인데?”

“아마도 J대. 지금 3학년인가 그래. 들어와서 기다려도 되는데.”

시헌의 집은 계단을 올라 복도 바로 옆에 있는 집이었다. 심지어 그 집이라는 것도 단지 가장 입구에 있는 동이었다. 잘만 뛰어간다면 정말 병원에서 5분이나 걸릴까 할 정도로 가까웠다. 할 거면 최대한 멀리 살지 뭐 급한 게 있다고 병원에 딱 달라붙은 곳으로 이사를 하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지원하는 아파트라고는 하지만 지어진 지 좀 오래된 터라 낡은 흔적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조만간 리모델링을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당장 시헌과 관련된 일은 아니었다. 시헌은 현관으로 들어가 문 너머 복도에 서 있는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들어와서 기다려도 되는데.”

“됐어. 밖에서 담배나 피우고 있을게.”

“금방 나갈게.”

“천천히 나와.”

아파트를 나온 서진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금방 나온다던 시헌은 정말 금방 나왔다. 서진은 마침 다 피운 담배를 끄며 남은 담배 케이스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시헌의 차림을 본 서진은 헛웃음이 나왔다. 시헌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겨울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 옷을 입는 스타일이 서진이 기억하는 20대 후반 기욱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역시 키뿐이었다. 그러나 시헌 또한 키보다 몸이 좋은 편이라 결코 안 어울린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뭘 그렇게 봐?”

“그냥.”

습관처럼 기욱과 다르다는 말을 하고 다니는 서진은 인제 와서 시헌의 앞에 대고 박기욱과 닮았다고 말할 자신은 없었다. 차로 갈 거라는 서진의 예상과 달리 시헌은 양손을 주머니에 구겨 넣은 채 차를 지나쳤다. 서진은 시헌의 뒤를 쫓아 차를 지나가면서도 시헌이 차를 타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차 안 타?”

“술 마실 거면 택시가 편해.”

“술 마신다고 한 적 없는데.”

“마실 거면서.”

서진은 뜬금없이 시헌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녁 약속에서 왜 갑자기 술 약속이 된단 말인가. 그야 저녁과 술은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연시되는 요소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시헌은 서진에게 저녁을 먹자고 했지, 술을 먹자고 말하진 않았다. 어째서인지 시헌에게 저녁에는 술이 포함되는 모양이었다.

“안 마신다고 했잖아.”

“마셔.”

“내가 왜 너랑 술을 마셔야…….”

“형 없잖아. 오늘 정도는 마셔도 돼.”

“하아, 몰라. 알아서 해.”

설마 하늘 위에 떠 있는 사람이 갑자기 뛰어내리기라도 하겠는가. 안 마신다고 버텨 봤자 가게에 들어간 순간 시헌은 끈질기게 마시라며 술잔을 들이밀 것이 뻔했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대학로로 향했다. 택시에서 내려 시헌을 쫓아 한참을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서진은 시헌이 도대체 뭘 먹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시헌을 따라 도착한 곳은 목조 건물로 되어 있는 일식당이었다. 다행히 저녁 시간 직전이라 자리가 남아 있었다. 들어오라는 알바생의 말에 시헌은 발을 땅에 붙인 채 입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서진은 안으로 발을 떼지 못하는 시헌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사실은.”

“…….”

“너랑 사귀었을 때 데려오고 싶었던 곳이야.”

“너…….”

앞에 선 여자 알바생이 시헌의 말을 듣고 흠칫 놀라 둘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느낀 서진이 어색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기욱이 자기 사람 외에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 것과 비슷하게, 시헌은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경향이 강했다. 가끔 이런 식으로 너무 눈치를 안 봐서 곤란할 때가 종종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뒤늦게 서진이 곤란해한다는 것을 깨달은 시헌은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뺀 뒤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냥 한 소리야.”

“…….”

“여기, 맛있어.”

“두, 두 분 안내 도와드릴게요.”

그제야 발을 떼는 시헌에 알바생이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맛있다는 시헌의 말은 틀리지 않은 듯 랍스터 정식은 꽤 서진의 입맛에 잘 맞았다. 대학로에 식당치고는 가격이 좀 비싼 감이 있지만, 기욱에게 반강제로 끌려가 한 사람 앞으로 십여만 원이 넘는 호텔 일식당 정식 세트보다야 훨씬 쌌다. 조금 부담스럽지만, 사치 한번 한다 생각하고 쓴다면 부담이 갈 만한 금액은 아니었다. 솔직히 서진은 시헌이 이런 아는 사람들만 알고 있을 법한 가게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시헌은 지나가는 알바생을 붙잡아 소주를 한 병 시켰다. 빠르게 소주의 뚜껑을 딴 시헌이 서진의 앞으로 잔을 내밀었다. 주문하는 것을 제외하고 가게에 들어와 시헌이 처음 서진에게 한 말이었다.

“한잔해.”

“안 먹는다고,”

마음대로 하라며 시헌을 쫓아오긴 했지만, 술을 눈앞에 둔 서진은 도무지 마실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걱정이 앞섰다. 오늘 같은 날 술을 마시면 자제를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기욱이 서윤과 해외에 나가 있는 사이 괜한 사고를 쳐 오해를 사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런 서진의 마음을 읽은 건지 아닌 건지 시헌은 제 소주잔 가득 술을 따라 마셨다.

“형한테는 비밀로 할게. 나 생각해서 마셔.”

시헌이 서진의 앞에 놓인 잔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넘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따라진 투명한 소주를 본 서진은 될 대로 되라며 잔을 들었다. 어색하게 웃은 서진이 시헌의 소주잔에 잔을 부딪쳤다.

“하하, 정말이지.”

“…….”

“무슨 말이 그래.”

변명도 그런 변명이 없다며. 서진은 시헌이 따라 준 소주를 들이켰다. 서진도, 시헌도 원래부터 술을 못하는 편이 아닌 터라 한 잔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았다. 한번 마시기 시작한 서진은 시헌이 따라 주는 술을 거부감 없이 마셨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소주 세 병을 비웠다. 일반 식당에서 빠른 속도로 소주를 세 병이나 비운 두 사람에 알바생이 눈을 크게 떴다. 사실 술은 예의상 파는 거지만 가게 특성상 술이 많이 나가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시헌은 빈 소주병을 흔들며 병을 아래로 내려놓았다. 분위기상 여기서 더 마시는 것보다 2차를 가는 것이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소주 대신 물을 마셨다.

잊을 만하면 나오는 주제에 서진은 간신히 한 모금 남아 있는 소주를 들이켜며 잔을 내려놓았다. 서진도 2차를 가기 전까지 술을 더 마실 생각은 없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온 두 사람은 바로 건너편 건물에 있는 술집에 들어갔다. 조금 이르긴 했지만, 술집이 문을 열지 않을 정도의 시간은 아니었다.

서진과 시헌은 이제 막 연 가게의 가장 안쪽 구석으로 들어가 안주와 술을 시켰다. 시헌은 안주보다 먼저 나온 술을 따라 마셨다.

“서윤 누나랑. 이해해.”

“거짓말인 거 알아.”

이해는 무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서윤에 대한 집착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서진도 알고 있었다. 서진은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그러니까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었다. 시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비정상이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았다.

“정확히는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난 네 그런 점이 싫어.”

“나도 잘한 거 없으니까.”

만약 그때 기욱에게 대들었다면 지금 이렇게까지는 오지 않았을까? 시헌은 서진과 얼굴을 마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러기엔 이미 자신도, 서진도 너무 멀리 와 버리고 말았다. 서진은 시헌의 기분을 아주 모르지 않았다.

“나라도 그랬을 거야.”

서진은 눈앞에 놓인 술을 마시며 마침 나온 안주를 집어 먹었다. 수년 동안 박기욱 밑에서 살며, 사실상 그를 보고 자라 온 시헌이 기욱에게 반항을 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시헌은 술보다 현실이 더 씁쓸한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하아, 그냥 마시자.”

소주잔을 옆으로 밀어낸 시헌이 하이볼 글라스에 소주와 맥주를 아무렇게나 섞은 뒤 그 자리에서 반쯤 마셨다.

2차에서 술을 마신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가게 안은 한참 오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고, 시헌과 서진의 테이블 위에는 소주와 맥주병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바닥으로 내려놓은 것도 몇 병 됐다. 중간부터 술을 마시는 것을 자제한 시헌과 달리 서진은 술이 남은 병을 뒤지고 있었다. 시헌은 서진의 손에 의해 넘어갈 뻔한 술병을 붙잡았다. 서진은 반이 조금 안 되게 남아 있는 소주를 하이볼 글라스에 따라 마셨다. 시헌은 아무리 봐도 서진이 취한 것 같다고 느꼈다. 서진은 취해도 겉으로는 티가 잘 안 나는 편이었다.

“너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냐?”

“머? 나 많이 안 먹었거든? 너보다 생일도 빨라.”

“뭐?”

술 많이 먹은 거 아니냐니까 왜 갑자기 생일 얘기가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이 먹었다는 소리로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나이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서진은 테이블에 팔을 괴며 시헌을 바라봤다.

“내가 너보다 키도 커 인마. 중학교 때는 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큭큭, 너 그때랑 키 별 차이 안 나는 거 알지?”

“하아, 서진아 취했어. 그만 마셔.”

시헌은 얼마 남지 않은 소주를 따르려는 서진의 손목을 붙잡았다. 서진은 잠시 눈을 끔벅이더니 손에 힘을 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차피 병에는 처음부터 술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진은 테이블에 있는 술병들을 뒤졌지만, 정말로 다 마신 모양인지 모든 술병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비어 있었다. 새 술을 시키려던 서진은 괜히 시헌의 눈치가 보여 입술을 내밀었다.

“나 안 치했어.”

“취했잖아. 발음도 똑바로 못하는 게.”

“나 바름 똑바로 해. 소주 말고 맥주 마시께. 응?”

서진이 시헌을 졸랐다. 술에 취해 애교까지 있는 서진을 차마 이길 수 없었던 시헌은 망고 맛 맥주를 시켰다. 20대 층을 겨냥한 맥주로 술이라고 하기보다는 사실상 알코올이 조금 들어간 음료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야, 그건 맥주가 아니자나.”

“이것도 맥주야. 먹기 싫으면 말던가.”

“아냐. 마실게.”

아쉬운 사람은 시헌이 아닌 서진이었다. 서진은 시헌이 따라 주는 맥주를 받기 무섭게 반쯤 비웠다. 도수는 낮았지만, 나름 달달한 게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따지고 보면 먼저 술을 먹자고 한 건 시헌인데. 마치 자신이 술을 먹기 싫어하는 시헌을 졸라 술을 마신 것 같은 상황이 되고 말았다. 아무렴 알코올은 그런 감정을 무뎌지게 만드는 데 탁월한 효과를 지녔다. 머리로는 알지만, 감정이 복받쳐 따라오지 않았다. 서진은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시헌아.”

“왜?”

“나 슬퍼.”

“…….”

“막상, 둘이 나가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하아, 아직도 잘 모르겠어. 실감이 안 나.”

“형이랑 그만할 생각…….”

“그만해.”

서진은 괜히 말했다며 시헌의 말을 잘랐다. 분명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어째서인지 이런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시헌과 서진의 사이에는 박기욱이라는 높은 담이 하나 놓여 있었다. 서로에게 처진 벽이 너무 높아 이젠 넘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누구의 잘못인지 모르겠어.”

“나도, 그래.”

어쩌면 누구의 잘못도 아닐지도 몰랐다. 시헌은 한숨을 쉬며 발밑에 있는 소주를 비어 있는 서진의 잔에 따랐다. 사실은 서진이 찾아 마실까 봐 일부러 밑에 숨겨 둔 술이었다. 술에 취한 서진은 그 사실까지는 인식하지 못한 모양인지 시헌이 따라 준 술이 담긴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아깐 마시지 말라믄서.”

“이 상황에서 어떻게 안 마셔?”

“맞아. 그러니까 마실 거야.”

서진은 사약이라도 받는 사람처럼 양손으로 잔을 쥔 채 술을 마셨다. 몇 병 정도 술을 더 마신 시헌은 얼마 남지 않은 안주를 마저 먹었다. 시헌은 물을 집으려다 옆에 있는 병을 친 서진의 팔을 급하게 붙잡았다. 병이 옆으로 넘어졌지만, 다행히 깨지거나 하진 않았다.

“괜찮아?”

“어. 응. 갠찮아.”

“슬슬 일어날까?”

서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가게에 손님은 많았지만, 본능적으로 시간이 꽤 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서진은 잠시 벗어 뒀던 잠바를 입기 위해 낑낑댔다. 서진이 잠바와 씨름을 하는 사이 시헌은 영수증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술값을 계산했다. 마침 옷을 다 입은 서진이 시헌에게 다가왔다. 시헌에게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낯선 일행의 앞을 막는 중이었다.

알바생이 주는 카드를 지갑에 넣을 여유도 없이 주머니에 구겨 넣은 시헌이 서진에게 팔짱을 껴 몸을 옆으로 끌었다.

“하아, 죄송합니다.”

“아. 예.”

남자들이 지나가고, 시헌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서진을 내려다봤다. 서진은 술에 취해 똑바로 걷는 것이 힘들었다. 밖으로 나오자 날씨가 찼다. 거의 겨울이나 다름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서진은 패딩의 지퍼를 끝까지 올린 뒤 모자를 뒤집어썼다. 코트를 입은 시헌의 목 위는 서진이 보기엔 추워 보였다. 시헌은 또다시 몇 걸음 못 가 비틀거리는 서진의 팔을 잡아당길 수밖에 없었다. 걷는 것을 반포기한 서진이 시헌에게 몸을 기댔다. 이렇게 어깨를 기대고 걷는 것이 얼마 만인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오늘만이야.”

“알았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시헌이 모를 리 없었다. 서진을 데려다주고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던 시헌과 달리 서진은 얼마 가지 못해 걸음을 멈췄다. 뜬금없이 길 한복판에서 멈춘 서진에 시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단거.”

“뭐?”

“단거 먹고 싶다고.”

짙은 파란색 패딩 모자를 벗은 서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침 몇 걸음 안 가 편의점이 있었다. 시헌은 편의점을 손가락질했다. 조금 취했냐 덜 취했냐의 차이일 뿐 시헌 또한 술에 취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시헌은 서진보다 술이 셌다. 단지 그뿐인 이야기였다.

“아이스크림?”

“야, 넌 이 날씨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서진은 아이스크림을 말하는 시헌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당장 시헌은 단거라는 말에 아이스크림 외에 다른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거 먹고 싶다면서.”

“사탕이라든지 다른 것도 많잖아. 왜 하필 아이스크림인데.”

“……그럼 사탕?”

“생각나는 대로 막 말하지 말라고.”

어떻게 안 건지. 서진의 말대로 시헌은 생각이 나는 대로 말을 하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말고 단거는 사탕. 어쨌든 사탕이면 되지 않을까, 싶은 시헌의 생각과 달리 서진은 시헌에게 어깨를 기댄 채 고개를 저었다.

“사탕 말고.”

“도대체 왜 얘기한 거야?”

“근데 단거.”

“……야.”

시헌이 어이가 없다는 듯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듯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뭔가 달고 맛있는 음료수?”

“편의점 가서 음료수 사 먹어.”

“완전 음료수 말고.”

“완전하지 않은 음료수도 있어? 하아, 정확히 뭐가 먹고 싶은 건데?”

시헌은 서진을 근처의 벤치에 앉힌 뒤 차분히 물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칵테일 같은 거.”

“음료수가 아니라 술이잖아.”

“논 알코올로?”

“그건 음료수고.”

“…아씨! 칵테일 마시고 싶다고! 단거!”

서진이 짜증을 내며 벤치에서 일어나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헌은 제멋대로 움직이는 서진의 뒤를 쫓았다. 똑바로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멋대로 움직이기까지 하니 성가시기 그지없었다. 시헌은 서진의 손목을 붙잡았다.

“칵테일 먹고 싶다니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해. 너 집에 안 들어가도 괜찮아?”

“음…….”

서진은 소매를 걷어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25분, 지금 역에 간다면 막차를 타고 집에 갈 수 있지만, 굳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마땅히 느끼지 못했다. 애당초 술은 2차와 3차가 기본이 아니던가. 시헌을 향해 몸을 돌린 서진이 대답했다.

“상관없어.”

“하아, 알았어. 바라도 찾아보자.”

시헌은 이 이상 서진이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술에 취한 서진은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시헌은 서진과 함께 적당한 바를 찾아다녔다. 사실 대로변으로 나가면 널린 게 바(BAR)이지만, 이미 안쪽까지 들어와 버린 마당에 번화가까지 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나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이나 둘 다 엇비슷했다. 가다 보면 하나쯤 나오겠지 싶었던 시헌의 예상과 달리 그렇다 할 가게가 나오지 않았다. 가게는커녕 어째 점점 번화가에서 멀어져 음침한 곳으로 가는 기분이 들었다.

“서진아. 꼭 마셔야 돼? 그냥 다른 거…….”

“어.”

빌어먹을. 타이밍하고는. 마침 골목을 나오기 무섭게 정면에 보이는 바에 시헌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런 구석진 골목에 바가 있다는 것도 놀랐지만, 바 주변에는 꽤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점이 아닌 터라 상가 대부분이 문을 닫았지만, 바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봤을 때 아주 장사가 안되는 곳은 아닌 모양이었다. 서진은 시헌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안 간다고 해도 갈 거면서.”

“잘 아네.”

서진은 신이 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익숙한 팝송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게 안은 시헌의 생각보다 훨씬 넓었으며 일반 테이블은 만석이었다. 앉을 자리가 있긴 한 건가 하고 고민을 한 것도 잠시뿐 서진은 귀신같이 계산기 앞에 앉아 버렸다. 하필이면 한 자리밖에 없었던 터라 시헌은 서진의 뒤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 앉을 생각도 없지만. 바 안의 따듯한 온도에 술기운이 올라온 시헌은 숨이 턱 막혔다. 강한 히터 바람과 천장을 가득 메운 뿌연 연기에 답답할 지경이었다. 시헌은 서진의 어깨 위에 손을 턱 하고 올렸다. 깜짝 놀란 서진이 신경질을 냈다.

“왜!”

“나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마시고 있어.”

“알아써.”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하고 가볍게 생각한 시헌은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찬 공기를 쐬니 조금은 살 것 같았다. 바가 있는 건물과 상가 건물 틈 사이에서 담배를 피우는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시헌 또한 자연스럽게 담배를 입에 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대로변에서 피우는 것보다 안에서 피우는 것이 낫지 않은가. 시헌은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내뱉으며 숨을 골랐다. 담배 향과 찬 공기가 폐로 섞여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골목에는 시헌이 오기 전부터 담배를 피우던 무리가 있었다. 빠르게 담배를 한 대 피운 시헌은 담배 케이스를 확인했다. 딱 한 개비가 남아 있었다. 애매하게 남은 돗대에 시헌은 어쩔 수 없다며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바람 때문에 불이 잘 붙지 않아 손을 가린 뒤 불을 붙인 시헌과 안쪽에 있는 남자의 눈이 맞았다.

20대 초반? 중반? 나이는 시헌과 엇비슷해 보였다. 시헌과 눈이 마주친 남자는 시헌을 향해 눈웃음을 치며 다가왔다. 남자는 담담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시헌의 옆으로 팔을 뻗었다. 시헌은 졸지에 가까이 다가온 남자를 올려다보는 신세가 됐다. 차마 남자의 면전에 담배 연기를 내뱉을 수 없었던 시헌이 남자의 옆으로 조심스럽게 담배 연기를 내뱉은 뒤 남자를 바라봤다.

시헌은 담배를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뺨 근처로 다가오는 남자의 손을 살짝 쳐 냈다.

“하하, 그렇게 경계하지 말고.”

“…….”

“혼자 왔어?”

“…….”

“담배 피우는 거 매력이 있어서 그래. 내가 잘해 줄게. 어때?”

뭐지 이 새끼는? 벽에 손을 짚은 남자가 노골적으로 시헌에게 속삭였다. 시헌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담배가 타들어 갔다. 눈을 여러 번 깜박인 시헌은 그제야 조금 상황 파악이 됐다. 뭔지 모르지만, 남자가 자기에게 성적으로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여자라면 모를까 남자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대시를 받아 보는 건 또 처음이지만, 딱히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시헌은 담배를 끼웠던 손가락을 살짝 벌렸다. 시헌의 손가락에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남자의 시선 또한 시헌이 떨어트린 담배에 닿았다. 일부러 담배를 떨어트려 남자의 시선을 유도한 시헌은 남자가 한눈을 파는 사이 다른 손가락으로 남자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갑작스럽게 닿은 손가락에 남자가 깜짝 놀라 시헌을 내려다봤다.

입가를 올린 시헌은 남자와의 키 차이나 체격 차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글쎄, 난 안기는 취미는 없어서.”

“…….”

“네가 안긴다면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시헌은 남자를 보며 노골적인 웃음을 지었다. 남자가, 자신에게 안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생각 이상의 박력에 남자는 한순간 얼굴을 확 붉혔다. 이내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남자가 다급하게 시헌과의 거리를 벌리며 손을 저었다.

“아니, 나, 난 안기는 건 좀…….”

“그거 아쉽군.”

시헌은 바닥에 떨어트린 담배를 발끝으로 지졌다. 시헌과 눈이 마주친 남자는 어쩔 줄을 모르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남자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시헌은 서진에게 돌아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등 뒤에서 또 다른 남자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기.”

“…….”

술이 덜 깬 건가. 왜 이렇게 오늘따라 찾는 사람이 많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방금 도망간 남자에 비해 조금 여린 체격의 남자가 시헌을 향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새로 다가온 남자는 처음에 다가왔던 남자보다는 확실히 예쁘장한 구석이 있었다.

“난 상관없는데.”

남자를 무시하고 가려던 시헌은 인상을 찌푸리며 등을 돌렸다.

“뭐?”

“그거 알아? 여기서 담배 피우고 있었던 사람들, 당신 오기 무섭게 한 번씩 쳐다본 거.”

“…….”

“있잖아. 그 시계 얼마짜리야?”

그의 말에 시헌은 입술을 약간 깨물었다. 기욱의 시계까지는 아니지만, 시헌 또한 최근 서윤과 기욱이 결혼하면서 이래저래 덕을 본 것이 몇 개 있었다. 차를 새로 산 거라든지, 집을 나온 거라든지 혹은 이래저래 옷이나 물건들을 좀 산 것이었다. 시헌의 팔에는 언제까지 기욱이 쓰던 것만 쓸 거냐며 하연이 사 준 고급 브랜드의 시계가 있었다. 어쩐지 묘한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시헌은 의례적으로 한 번씩 쳐다보는 건가 보다 하고 무시했다. 사실, 술기운에 감각이 무뎌진 것도 한몫했다. 시헌은 그제야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는 물론이거니와 구석에 있는 다른 남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주변, 지독하리만큼 남자밖에 없었다. 시헌은 자신의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오는 남자를 무시한 채 서진을 두고 온 바의 입구를 바라봤다. 마침 남자 두 명이 팔짱을 끼며 바 계단을 내려갔다. 시헌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다.

“제길!”

달라붙은 남자를 밀어낸 시헌은 다급하게 바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을 둘러보자 서진의 옆에는 낯선 남자가 테이블에 몸을 반쯤 기대며 말을 걸고 있었다. 서진은 노골적으로 대시를 하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나 일행 있다니까?”

“에이, 없는 거 보고 왔는데. 내가 잘해 줄게.”

“뭘 잘해 줘?”

“우리 자기 술 많이 마셨구나? 진짜 내 취향…….”

성큼성큼 다가간 시헌은 서진에게 다가오는 남자의 손을 탁, 하고 쳐 냈다. 시헌은 칵테일을 혼자서 두 잔 넘게 마시고 있었다.

“어, 시헌아.”

“너 진짜…….”

언제 왔냐는 듯 당황하는 서진에 시헌은 서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뒤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술에 취해 상황 파악이 덜 된 서진은 그 와중에도 빨대에 입을 가져다 대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시헌보다 키가 크고 덩치도 좋았지만, 역으로 당당한 시헌에 남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뭘 봐?”

시헌은 꺼지라는 듯 턱을 까닥였다. 반항하지 않는 서진의 모습을 본 남자는 아쉽다며 입맛을 다신 뒤 자리를 피했다. 서진은 시헌에게 안긴 채로 눈을 살짝 위로 떴다. 시헌의 손에 힘이 들어가 옴짝달싹도 못 하고 있었다.

“야, 나 답답해.”

“…….”

“왜?”

남자가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시헌은 서진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일어나라며 팔을 잡아당겼다. 서진은 칵테일을 마시던 중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 못마땅해 버텼다.

“야, 나 아직 덜 마셨어. 더 마실 거야.”

“닥치고 일어나 좀!”

“왜!! 싫어!”

“강서진! 가자고!”

다급해진 시헌이 언성을 높였다. 서진과 시헌의 대화가 싸움 아닌 싸움으로 번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진은 무작정 나가자고 하는 시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보다 못한 다른 남자가 서진의 팔을 잡아당기는 시헌의 손목을 붙잡았다. 세상에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오지랖이 넓은 사람들이 많은지 시헌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남자의 팔을 보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조금 전, 서진에게 적극적으로 대시를 했던 남자보다는 조금 젠틀한 느낌의 청년이었다. 어딘가의 회사원 같은 포스를 내뿜는 그는 시헌의 손을 들어 올렸다. 남자에 의해 허공에 손이 들린 시헌은 인상을 찌푸리며 다른 손으로 남자의 손을 쳐 냈다. 남자가 시헌과 서진을 번갈아 보더니 한마디 했다.

“저기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관심.”

“…….”

“끄시죠. 나갈 거니까.”

시헌은 이번에야말로 실수하지 않는다며 서진의 팔을 붙잡고 카운터 쪽을 향했다. 당황하는 서진에 남자가 시헌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상대가 싫다고 하잖아요.”

“그런 거 아니라고.”

무슨 오해를 했는지 모르지만, 갈수록 태산이었다. 일일이 설명해 주는 것도 짜증이 나는 시헌은 서진의 손을 붙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눈치챈 서진이 시헌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야, 싸우지 마.”

정작 서진은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태평한 것인지, 눈치가 없는 건지. 팔을 앞으로 잡아당겨 서진의 허리를 안은 시헌이 서진의 입술을 덮쳤다.

“잠깐…, 시헌아… 으읍…!”

두 사람의 키스에 건너편에서 묘한 환호성이 들렸다. 입술을 뗀 시헌은 어깨를 들썩이며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자신의 행동이 오해라는 것을 알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그 오해가 진짜 오해지만. 아무렴 그런 사실을 이름도 모르는 남자에게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할 의무는 시헌에게 없었다. 뒤늦게 바에 사람들이 많은 걸 눈치챈 서진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시헌은 그런 서진을 차분하게 달랬다.

“서진아.”

“…….”

“나가자.”

바 내에 있는 사람들의 노골적인 시선을 느낀 서진이 시헌의 손을 붙잡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시헌은 서진이 대답하기 무섭게 미리 꺼내 주머니에 넣어 뒀던 5만 원짜리 지폐를 카운터에 대충 올린 뒤 밖으로 나왔다. 한발 늦게 알바생에게서 거스름돈 이야기가 나왔지만, 시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 *

어느새 12시가 훌쩍 넘었다. 서진은 벤치에 앉아 시헌이 사 온 게토레이에 빨대를 꽂아 마셨다. 순식간에 반을 넘게 마시고 갈증이 사라진 서진이 휴대폰을 만지는 시헌을 흘끗댔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들어간 곳은 이 근방에서 꽤 유명한 게이바였던 모양이었다. 그 골목 근처에 그런 술집이 몇 군데 더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골목임은 불 보듯 뻔했다.

“진작 알려 줬으면 좋았잖아.”

“말했어.”

“나가라는 말밖에 안 했어.”

서진은 남은 게토레이를 빨아 마시며 중얼거렸다. 둘 다 술기운이 남아 있어 정상은 아니었다. 휴대폰과 함께 손을 주머니에 넣은 시헌이 서진 쪽으로 몸을 살짝 돌렸다.

“그……, 미안해.”

“뭐가?”

“멋대로 키스한 거.”

시헌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올 줄 몰랐던 서진은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새까만 겨울 하늘을 올려다본 서진은 어딘가 허탈한 표정으로 시헌의 어깨에 먼저 머리를 기댔다. 기욱이 없어서 그런가 긴장이 풀린 기분이었다. 서진은 시헌이 키스를 했을 때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나 술 치했으니까. 오늘만 바줄게.”

“하하, 그래.”

여전히 서진의 발음은 엉망이었다. 시헌은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날 이후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이라도 해 봤는가. 어쩌면 두 사람에게 있어 오늘은 정말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날이었다.

“너 아까.”

“…어?”

“순간이지만. 박기욱 같았어.”

“동생이잖아.”

시헌은 씁쓸하게 웃으며 서진의 손에 있는 게토레이를 가져와 입에 털었다. 서진이 다 마신 탓에 몇 모금 나오지 않았다. 시헌은 서진의 게토레이 캔을 손으로 구겼다.

“너는 너야.”

“아닐지도 모르지.”

시헌의 어깨가 무섭게 내려갔다. 박기욱이라는 존재는 시헌에게 있어서 진짜 부모보다 더 부모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기욱이 어렸을 적 시헌에게 준 영향은 절대 적지 않았고, 시헌도 자신이 기욱을 닮아 간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아무리 떼어 놓으려 해도 기욱과 자신은 같은 피를 이은 형제였다. 자신과 기욱은 단순히 같은 집안에 소속되어 같은 사람을 부모로 부르는 것 이상의 비슷함이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시헌이 서진에게 끌리듯 기욱 또한 서진에게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을 종종 하고는 했다. 조금만 더 일찍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렇게까지 틀어지진 않았을까.

“슬슬 들어갈까? 집에 갈 수 있겠어?”

벤치에서 일어나 바로 옆 쓰레기통에 게토레이 캔을 버린 시헌이 서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시헌의 등 뒤로 있는 휘황찬란한 술집이며 가게의 네온사인 간판이 서진의 눈을 좀 부시게 만들었다.

“그거, 나한테 키스한 네가 할 말이야?”

“서진아.”

비틀거리며 벤치에서 일어난 서진이 시헌에게 안겼다. 그런 두 사람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흘끗흘끗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둘 다 워낙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술주정이겠거니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서진은 시헌과 살짝 거리를 벌리며 웃었다. 시헌이 아니었다면 오늘 같은 날 술을 마실 생각은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오늘만이야.”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 * *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근처 모텔에 방을 잡았다. 열쇠를 받아 방문이 열리기 무섭게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엉키며 키스를 했다. 침대까지 밀려난 서진이 침대에 주저앉으며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아래로 내던졌다.

“잠깐만……. 천천히…, 후. 서진아?”

“응?”

“아니, 원래 이렇게 적극적이었나 싶어서…….”

“상관없잖아.”

서로가 서로에게 갈 데까지 간 마당에 그런 걸 신경 쓰고 싶진 않았다. 불륜이든 바람이든, 그 이상이든 상관없었다. 무슨 일이든 처음이 어렵고 힘든 것이지 두 번 세 번 지나면 무뎌지기 마련이었다. 그 관계라는 것도 이미 잃을 것도 없는 관계가 다였다. 시헌과 섹스를 하는 것이 아주 죄책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작해야 섹스 한 번 한다 해서 시헌과 다시 사귈 거라는 생각 또한 없었다. 모르는 사람과 할 바에는 그래도 익숙한 시헌과 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시헌과 키스를 하며 그런 생각을 한 서진은 자신도 어이가 없어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서진과 마찬가지로 코트를 벗어 침대 아래로 던진 시헌이 중얼거렸다.

“나도 몰라 이제.”

시헌의 허리를 안은 서진의 손이 시헌의 벨트를 풀어 헤졌다. 시헌은 서진의 옷을 완전히 벗겨 냈다. 서진과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처음 하는 섹스는, 서진과 했던 첫 섹스만큼이나 흥분이 됐다. 어쩌면 이거야말로 진짜 불륜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손으로 서진의 허벅지를 벌린 시헌은 몸을 숙여 서진의 페니스를 입안에 머금었다.

“읏, 그냥 하……!”

“가만히… 후우, 있어.”

시헌은 서진의 입안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다른 손으로는 서진의 허벅지를 누른 뒤 페니스를 입에 머금었다. 여전히 서진의 페니스는 덩치와 비교하면 마냥 큰 편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서진 또한 키가 지나치게 큰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체격이 좋은 것 또한 아니었다. 술은 사람의 사고를 무뎌지게 만들었다.

“하아, 후….”

어느 정도 서진이 흥분한 것을 느낀 시헌이 입술을 뗐다. 애매한 자극에 얼굴을 붉힌 서진이 시헌을 향해 팔을 뻗었고, 시헌이 몸을 숙이자 서진은 시헌의 목에 팔을 둘렀다. 키스하며 시헌의 손이 서진의 안쪽을 지분거렸다.

잔뜩 흥분한 탓인지 시헌의 손가락은 어렵지 않게 서진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시헌은 침대 옆 선반에 올려진 일회용 물품들을 흘끗댔다. 그중에는 사용하라고 있는 콘돔도 있었다. 시헌과 마찬가지로 선반 쪽으로 고개를 돌린 서진은 시헌의 뺨에 손을 올렸다. 정확히 시헌이 뭘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분위기상 감은 왔다.

“후우, 됐어.”

“하지만…….”

“사귈 때는 하지도 않았던 주제에.”

그때는 제발 좀 콘돔을 쓰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안 했던 인간이 이제 와서 무슨 콘돔 타령인지 헛웃음만 나왔다. 잠시 움찔대던 시헌은 손가락을 빼며 손으로 자신의 페니스를 세웠다. 서진의 손이 허벅지를 잡아 옆으로 벌리고 있었다. 시헌은 조심스럽게 서진의 안으로 페니스를 넣었다. 끝이 조금 들어가는가 싶더니 어렵지 않게 안까지 들어갔다.

“흐읏… 윽….”

“아파…?”

“아니, 읏… 몰라….”

1년도 더 됐나, 당연하지 않은 섹스에 서진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을 차린 서진은 몸을 살짝 일으킨 뒤 시헌의 위로 올라탔다. 배 위에 손을 올리자 근육이 가득한 시헌의 몸이 그대로 느껴졌다. 서진은 시헌의 페니스를 넣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기분 탓인가 왠지 예전보다 시헌의 몸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읏, 너… 운동해?”

“아…, 응. 후, PT 시작했어.”

서진과 헤어지고 난 뒤부터였던 것 같았다. 시헌은 무언가에 홀리듯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태권도를 다시 다니기에는 시간이 애매했고, 체력 관리 좀 할 겸 헬스를 했다. 원래부터 운동하던 사람이라 적응을 하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섹스 도중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흣, 으응… 하….”

“후우….”

시헌의 위에 올라탄 서진이 천천히 허리를 흔들었다. 이래서야 누가 쌓인 것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서진은 다른 손으로 자신의 페니스를 쥐고 흔들었다.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시헌의 페니스가 서진을 정신없이 자극했다.

“하으, 학, 으으응… 흐… 읏…!!”

“윽, 너…!”

먼저 사정을 한 서진의 정액이 시헌의 목과 뺨 근처로 튀었다. 시헌이 잠깐 당황하며 손등으로 정액을 닦아 냈다. 정작 서진은 사정을 한 뒤 나른함으로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팔을 뒤로 한 상태로 몸을 지탱한 서진이 호흡을 하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서진이 숨을 쉴 때마다 안을 조였다 푸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자기 멋대로 사정을 하고 잔뜩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진이 시헌은 어이가 없었다. 시헌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서진의 위로 올라탔다. 잠시 빠져나왔던 페니스가 서진의 위에 올라타기 무섭게 밀고 들어왔다.

“흐, 윽… 쪼, 쫌만 있다가… 시헌… 하악!”

“후우, 읏….”

시헌은 서진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서진의 허리 옆으로 손을 지탱한 시헌의 페니스가 거침없이 움직였다. 잠시 손을 뻗어 시헌을 제지하려 했던 서진 또한 자연스럽게 손이 페니스 근처로 갈 수밖에 없었다. 서진의 배 근처를 쓰다듬던 시헌의 손이 서진의 유두 근처를 손톱으로 살살 긁었다. 온갖 자극과 술기운에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 흐으, 읏… 하응….”

“후으… 서진아….”

강서진, 이렇게 품에 안으며 이름을 불러 본 것이 얼마 만이던가. 시헌은 이 순간이 정말 꿈 같았다. 술에 취했다는 사실조차 믿고 싶지 않았던 시헌은 조금이라도 서진을 오래 보기 위해 술을 깨려 노력했다. 시헌은 서진의 입술을 천천히 덮었다. 시헌의 움직임이 빨라지자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신음 또한 점점 높아져 갔다.

“으응, 으… 으흐, 하… 읏!”

“하아, …윽…!!”

움직임이 극에 달하던 시헌이 이내 서진의 안에서 사정했다. 안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한 질척거리는 느낌에 서진은 한동안 몸을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잠시 쉬는 건가 싶은 서진의 예상과 달리 시헌은 사정을 한 채로 페니스를 빼내지 않았다. 이대로 빼낸다면, 정말 끝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조금이라도 쉬었다가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던 서진이 반쯤 감긴 눈을 간신히 뜨며 시헌을 바라봤다.

“서진아. 미안해.”

“흐으, 너 그게 무슨… 아흑…!!”

서진의 허리를 안은 시헌이 더욱 깊숙하게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이미 들어갈 만큼 들어갔지만, 그것보다는 서진이 느끼는 지점을 강하게 자극한 것이 한몫했다. 갑작스러운 거친 움직임에 서진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절제력을 잃은 시헌은 서진의 말 같은 건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으읏, 몰라….”

“하, 후우… 뭐라고?”

“알아서 윽, 하라고…!!”

거친 섹스라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서진은 될 대로 되라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의 섹스는 새벽이 끝나 갈 무렵에서야 끝이 났다.

* * *

“…….”

이른 아침, 정신을 차린 시헌은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침대를 가볍게 두드렸다. 침대가 가벼웠다. 이불로 몸을 돌돌 만 채 몸을 옆으로 돌린 시헌이 벌떡 일어났다.

“서진아?”

모텔 방 안이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혹시나 하고 침대 밑으로 얼굴을 내밀었지만, 침대 밑에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옷가지들뿐이었다. 눈을 비빈 시헌은 코트를 주워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냈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휴대폰에는 밤새 이런저런 연락이 와 있었다.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서진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너 안 일어나서 나 먼저가」

이상한 일이었다. 시헌은 잠귀가 밝은 편이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쉽게 잠에 깼다. 그런 자신이 서진이 갈 때까지 깨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할뿐더러, 점심이 다 되기 직전까지 잤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시헌을 이렇게 풀어지게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왕이면 아침밥도 먹고, 데려다주고 싶었는데 말이다.

이제는 사귀는 처지도 아니니 어찌 보면 사치스러운 바람일지도 몰랐다. 시헌은 한숨을 쉬며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제길.”

전화를 받지 않은 서진에 달리 선택지가 없었던 시헌은 결국 답장을 보냈다. 서진이 시헌의 연락에 답장한 것은 그날 저녁이 다 되어 갈 무렵에서였다.

* * *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했어.”

수술을 마친 우민이 수술 가운과 장갑을 벗으며 밖으로 나왔다. 마침 볼일이 있어 복도를 지나가던 진호가 우민을 보고 고개를 숙이며 지나갔다. 잠시 뒤 습관처럼 휴대폰을 만지자 진호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교수님, 오늘 PK 새로 왔는데 확인하셨어요?」 오전 9:23

“이 자식이…….”

쓸데없는 이야기였다. 도대체 언제 문자를 보낸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정중하게 적힌 연락에 우민은 할 말을 잃었다. 할 거면 하다못해 얼굴 봤을 때 하던지 말이다. 우민은 뒤늦게 복도로 몸을 돌렸으나 진호는 사라지고 난 뒤였다. 회복실로 들어간 우민은 한숨을 쉬며 진호의 연락에 답장을 보냈다.

「ㄴ」 오전 9:26

사실 이것도 보낼까 말까 하다가 진호의 성의를 봐서 보내 준 것이었다. PK든 인턴이든 매번 바뀌는 데다가 자신의 밑에서 일할 거라는 보장도 없는 녀석들을 일일이 챙겨 줘야 할 의무는 더더욱 없었다. 1년 차로 들어오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봐도 될 문제가 아니던가.

“…아, 그래도 그 녀석은 좀 신경 쓰이네.”

누나가 강 선생이라고 그랬나? H대를 다니면서 굳이 귀찮게 J대에 따로 실습 신청을 해서 들어온 걸 보면 서진도 어지간히 누나가 좋은 모양이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J대를 들어갔어야지. 성적도 좋은 것이. 뭐, 그렇게 생각한 우민 자신도 H대 출신으로 J대 병원에서 레지던트까지 마치고 교수를 하는 터라 달리 할 말은 없었다.

뜻밖에 J대 병원에는 우민처럼 H대 출신들이 여럿 있었다. 국내 톱 대학교인 것과 병원 운영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렇다고 H대 병원이 수준 미달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규모가 크면 클수록 학연은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무리에 속하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속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꼭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 해서 무리에 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민은 박기욱은 싫지만, 기욱의 아버지인 병원 이사장은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그가 병원을 운영하는 방침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기분이 아닐 수가 없었다. 우민은 적당히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아 마우스를 잡았다. 우민은 프로그램을 끈 뒤 멋대로 다른 계정으로 로그인을 시도했다.

“야, 미쳤냐. 뭘 멋대로 로그아웃하는데. 안 비켜?”

“……어. 안녕.”

의자를 옆으로 돌린 우민이 수술복 차림의 여자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병원 내 마취과 교수이자 우민과 동기인 이민영이었다. 민영은 우민이 컴퓨터를 멋대로 만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팔짱을 낀 채 인상을 구기며 한쪽 기둥에 걸려 있는 디지털시계를 흘끗댔다.

이미 우민과 같이 수술을 들어갔던 마취과 레지던트로부터 수술이 예정보다 30분 정도 일찍 끝났다는 사실을 듣고 난 뒤였다. 우민의 이런 수술 방식 때문에 레지던트 사이에서 우민의 수술은 암묵적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수술 1위였다. 어차피 일찍 끝날 걸 아니까. 민영은 실력도 좋으면서 왜 이렇게 스케줄을 널찍하게 잡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찍 끝냈으면 처나갈 것이지 왜 여기서 지랄이세요.”

우민은 불청객 취급이 한두 번이 아닌 듯, 컴퓨터 하단에 있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뒤 성의 없이 대답했다.

“10분만.”

“하아, 그냥 빨리 나가서 보호자한테 말해라. 귀찮게 노가리 까지 말고. 이해가 안 된다.”

민영은 질린다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여유로운 것도 정도가 있었다. 정교수가 된 우민은 정말 딱 받을 수 있는, 그리고 교수로서 해야 하는 적정 수술만을 집도했다. 특별하게 응급 수술이 잡히지 않는 이상 그 이상으로 하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잠시 마우스를 놓은 우민은 그런 민영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일이란 거 다 그런 거야. 하긴 넌 평생 모르겠지만.”

“이게 처맞으려고 환장했나! 이래서 외과의들은 안 돼.”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데? 야, 윤 선배 봐라. 이번에 또 애들 도주했단다. 작년에도 두 명이나 튀었다며? 매년 연례행사 치르듯이 그게 뭐냐? 그 선배, 진짜 돈 밝히는 거 알고 있었는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개인병원을 차리라고. K대면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병원에서 뭐 하는 짓이야 그게.”

“그래서 넌 돈 안 밝혀서 그러는 거냐?”

“적어도 윤 선배보다야 낫지. 저번에 술 한잔하는데 나보고 우리 과에서는 튄 사람 없냐고 묻길래 나 교수 되고 나서 한 명도 없다고 했더니 어떻게 했냐고 물어보더라. 그 돈 밝히는 버릇부터 고치라니까 죽어도 안 듣는데 얼어 죽을. 그 인간이 나랑 같은 외과의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너 좀 바뀐 거 같다?”

“바뀌긴. 야! 나도 레지 때 존나게 힘들었어!! 그러니까 최소한 내 밑으로는 그러진 말아야 할 거 아니냐! 그래도 그 뭐냐, 트라우마 팀보다 낫잖아! 그, 임 교수님?”

우민이 의자를 돌리며 떠들었다. 우민도 레지던트, 펠로우 시절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때 이야기지 지금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혁은 달랐다. 우민이 기억하는 정혁은 1년 차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일은 일대로 하는 모양인데 적자는 적자대로 나고, 다행히 병원에서는 밀어주는 분위기라 신경은 안 쓰고 있긴 하지만 그것도 말이 그렇지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우민의 입에서 임 교수―정혁의 이야기가 나오자 민영은 질린다며 고개를 저었다. 민영도 정혁 덕분에 곤욕을 치른 것이 한두 번 일은 아니었다.

“하아, 말도 마라. 그 인간 때문에 트라우마 팀이 아니라 내가 먼저 트라우마에 걸리겠다.”

“그 인간, 돈은 안 돼도 우리 병원 스타잖아. 적자긴 적자여도 임 교수님 보고 외부에서 끌어온 돈 꽤 될걸? 적자 메꿀 수 있을 정도까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뭐 얼마 들어온다고. 니가 더 났다.”

“난 소시민이고.”

민영이 보기에는 우민도 충분히 잘나가는 의사였다. 일부 H대 출신 의사들이 우민의 출신 대학을 따지며 배신자라며 떠드는 모양이었지만, 우민은 그런 것에 눈 하나 끔벅하지 않았다. 자신이 모교를 버린 게 아니라 모교가 자신을 버린 것을 배신자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코미디였다. 어쨌든 우민과 정혁을 포함한 몇몇 교수들은 외과를 지망하는 의사라면 1순위로 오고 싶어 하는 J대 병원을 만든 장본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떠오르는 별이면 임 교수님은 달님쯤 되지 않을까? 나 1년 차 때부터 계셨으니까.”

“헐. 아깐 소시민이라면서 말 바꾸는 거 봐라? 그리고 떠오르는 별은 네가 아니라 박 교수겠지. 걘 심지어 이사장 집안이잖아.”

“아씨!! 야! 말이라고 해!! 박기욱 그 새낀 나 레지 때 먼지였어. 알아?”

“먼지가 진화해서 사람이 됐나 보지. 그리고 먼지도 먼지 나름인 거야. 걘 성골이잖아. 적어도 박기욱은 너처럼 노가리는 안 까.”

“아, 진짜!! 일어난다고 좀!!”

결론은 비키라는 소리였다. 우민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스케줄을 확인하기 위해 달력에 들어갔다. 민영이 우민의 옆에서 화면을 같이 확인했다.

“도대체 뭐 보는데?”

“하아, 스케줄 본다, 스케줄.”

“그런 건 네 연구실이나 의국에 가서 보란 말야.”

민영의 말을 반쯤 무시한 우민은 맨 하단에 적힌 PK(실습생)의 이름을 확인했다.

「박시헌」

어디서인가 들어 본 이름인데. 우민은 어딘가 낯이 익은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영도 시헌의 이름을 확인했는지 화면을 손가락질했다.

“어, 얘!”

“뭐야, 너 얘 알아?”

“저번주까지 우리 과에 있던 애야. 내가 지도했거든. 너 근데 진짜 얘 누군지 몰라?”

저건 또 무슨 말이야. 우민은 마치 시헌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민영에 기가 막혔다.

“학생 주제에 뭐 대단한 놈이라고 내가 이 자식 이름을 알아야 하는데? 몰라.”

우민의 대답에 이번엔 민영이 우민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우민은 민영의 태도에 사뭇 기분이 상했다. 그게 또 완전히 생판 모르는 이름이면 상관은 없는데, 어디서인가 한 번쯤 들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우민은 계속해서 모니터에 있는 시헌의 이름을 흘끗댔다.

“누구냐니까?”

“박기욱.”

“박기욱 그 자식 얘기 좀 그만하라고!!”

참다못한 우민이 짜증을 냈다. 그놈의 박기욱! 결혼하고 해외에서 신나게 놀고 있을 녀석을 왜 계속 비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민은 나름 기욱의 레지던트 시절 선배로서 기욱에게만큼은 비교당하고 싶지 않았다.

“교수님! 좀 조용히 좀 해주세요!!”

우민의 짜증에 들려오는 것은 건너편에서 환자를 보고 있던 마취과 펠로우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마침 그녀의 옆에 있던 다른 저년차 남자 레지던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깔 있네 저거. 우민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미안하다는 듯 사과를 했다. 그러나 우민이라고 어린 펠로우 선생님에게 짜증을 들으니 기분이 좋을 린 없었다. 물론, 잘못한 건 맞는데.

“아씨, 무서워서 있겠나. 누굴 닮아서 애들이 하나같이 사나워.”

“너 진짜 얘가 누군지 몰라?”

“몰라, 모른다고!! 이 자식이 대체 누군데!!”

“교수님…!”

“아, 알았어. 내가 진짜 미안해. 조용히 할게.”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민영을 바라봤다. 이번엔 민영도 우민을 조용히 시키겠다며 그녀를 달랬다. 그사이 우민은 누군가가 두고 간 물병에 멋대로 입을 댔다.

“박시헌, 박기욱 남동생 이름이잖아.”

“푸웁…! 캑캑! 뭐? 누구? 박기욱?”

“…….”

“…….”

입가에 흐르는 물을 손등으로 닦은 우민이 탁, 하고 물병을 내려놓았다. 처음에는 농담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민영의 표정이 진짜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우민은 믿기지 않듯 눈을 깜박였다.

“진짜로?”

성이 박씨긴 한데, 세상에 박씨가 박기욱만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너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나랑 장난치는 거야?”

“아니, 박기욱 동생이 H대 다니고 우리 병원 PK로 왔다는 이야기는 듣긴 했는데……. 박씨가 한둘이었냐고.”

우민은 그제야 남은 물을 전부 마셨다. 그래서 이름이 익숙한 건가? 흐음, 그런 것치고는 뭔가 더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미 시헌을 겪은 민영은 시헌의 이야기를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 말도 마라. 얘는 진짜 더 난놈이더라. 내가 병원 들어오면서 본 PK 중에서 얘만 한 녀석을 본 적이 없었어.”

“그 정도야?”

“당장 병원에 인턴 돌려도 될걸. 역시 성골. DNA부터 틀려 그치?”

“그런 소리 좀 하지 마라. 하, 됐다. 저녁에 보자.”

우민은 더 이야기해 봐야 쓸데없을 거로 생각해 창을 닫은 뒤 의자에서 일어났다. 민영은 그런 우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 들어가.”

* * *

차륵, 창문의 블라인드를 살짝 걷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의자에 앉은 우민은 책상에 놓인 커피를 마셨다. 아침에 끓여 놓고 두고 간 커피는 찬물처럼 식어 있었다. 남은 커피를 홀짝인 우민은 한 손으로 키보드를 쳤다.

“…….”

연구실 안으로 침묵이 흘렀다. 머그잔을 내려놓은 우민은 감지 못한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며 마우스를 붙잡았다. 한동안 마우스의 달칵거리는 소리만이 연구실 안을 울렸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마우스가 멈추며 우민의 눈이 커다란 컴퓨터 화면에 고정됐다. 화면 한쪽에는 시헌의 프로필이 그대로 있었다.

“와, 진짜네.”

이미 민영에게 대충 들어 놀라울 건 없었다. 영혼 없는 중얼거림으로 시헌의 프로필을 보던 우민은 익숙하게 한 손으로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며칠 전에 사 둔 컵라면이 있었다. 한숨 자기 전에 컵라면이라도 먹고 자야 할 것 같았다.

시헌의 프로필은 평범한 학생들과 별로 다를 건 없었다. 누가 박기욱 동생 아니랄까 봐, 사진만 봐도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어째서일까? 우민의 머릿속으로는 힘들어하는 서진의 얼굴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서진은 시헌을 감싸는 듯한 행동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시헌이 아닌 다른 사람이 한 짓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잡히는 구석이 없었다.

“그 녀석 신경을 왜 써야 하는지…….”

서진에게 얼떨결에 게이라고 고백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연인을 만들고 싶은 기분은 없었다. 공과 사는 확실한 편이었으며 굳이 따져 말하자면 혼자 사는 걸 생각하고 있었던 쪽에 가까웠다. 그런 자신이 아직 병원에 인턴도 아닌 서진을 남몰래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행동하면 할수록 이해가 가지 않은 것투성이였다. 라면을 뜯은 우민은 연구실 안에 있는 정수기의 뜨거운 물을 따른 뒤 자리로 돌아왔다.

“제길.”

여전히 답답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옆 모니터에 있는 시헌의 프로필을 닫은 우민은 다른 프로그램을 열었다. 혹시나 하는 기분에 시헌의 이름을 검색했다.

“…어?”

한 바닥 이상이 뜨는 시헌의 병원 기록에 우민은 뭘 잘못 봤나 싶어 눈을 깜박였다. 우민은 라면을 먹는 것도 잊은 채 시헌의 진료 기록과 수술 기록을 보는 데 몰두했다.

* * *

“하암….”

졸린데, 잠이 오지 않았다. 시헌의 기록을 보고 이래저래 생각하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우민은 바람이나 쐴 겸 옥상으로 올라갔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그렇게 언질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드물게 한가한 모양이었다. 하긴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 했다. 무의식적으로 열려 있는 옥상 안으로 들어가려던 우민이 걸음을 멈췄다. 멀리 우민의 눈에 익숙한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서진과……. 옆에 있는 사람은 확실하진 않지만 시헌이었다. 옥상에는 시헌과 서진밖에 없는 것 같았다. 우민은 본능적으로 문 뒤쪽으로 숨었다. 콘크리트 벽에 몸을 기댄 우민은 태연하게 잠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서진아, 그러니까 내 말은…….”

“박시헌, 그만해. 그건 사고였어. 그냥 서로……. 그런 걸로 해.”

서진은 중간에 말을 잇지 못했다. 시헌과 섹스를 한 건, 그러니까 사고였다. 시헌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기욱이 해외에 가면 조금은 편해질 줄 알았건만, 어째서인지 서진은 기욱이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예민해진 기분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안개들이 자신을 둘러싸 온몸을 좀먹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서진은 다가오려는 시헌을 손으로 밀어냈다. 차마 시헌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제발…….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마…….”

“서진아 나는……. 미안해.”

얼굴을 든 서진이 입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거의 끝 무렵이었던 모양인지 두 사람은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딱히 죄를 지은 것도 아니라 더 숨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우민은 담배를 끈 뒤 문 쪽으로 나왔다. 그 사이 우민을 발견하지 못한 서진은 먼저 내려가고 없었다. 서진의 뒤를 따라가려던 시헌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우민과 어깨를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시헌은 우민의 얼굴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고개를 숙인 뒤 서진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시헌의 뒷모습을 보던 우민이 새 담배를 입에 물며 뺨을 긁적였다.

“저거야?”

기욱과 달리 키가 크지 않았던 시헌은 우민이 생각했던 것보다 위협적인 느낌은 없었다.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은 우민이 하늘을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사이였던 건지 알 수가 없다.

“뭐, 차차 알 수 있겠지.”

잠바에 묻은 담뱃재를 턴 우민이 중얼거렸다.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 * *

조금 이른 오후, 주말이라 특별한 일정은 없는 날이었다. 창밖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온몸이 축여지며 나른한 기분이었다. 그나마 주말을 지나 비가 그친다고 했다. 기욱이 해외에 가 있는 동안 우민은 한동안 병원 신세였다.

우민은 생에 한 번밖에 없는 여행을 가는 사람을 두고 싫은 소리를 할 만큼 막돼먹진 않았다. 교수가 된 이후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병원에 오래 남아 있고 싶지 않아 했을 뿐, 기본적으로 병원이라는 곳은 제집보다 익숙한 사람이었다. 연구실에 들어가기 전 우민은 습관처럼 몸으로 의국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래도 오후라고 남아 있는 레지던트들은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러 가거나 당직실에서 부족한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자기 위해 교대로 눈을 붙이고 있었다.

텅 비어 있을 거라 생각했던 우민의 예상과 달리 중앙에 있는 둥그런 테이블에 등을 지고 앉아 있는 시헌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민영의 말대로 며칠 후 시헌이 PK로 왔지만, 정작 우민은 그 며칠 사이 일이 너무 바빠 시헌의 얼굴을 제대로 보거나 말을 할 겨를도 없었다. 애당초 우민이 아니더라도 기욱의 동생인 시헌을 챙겨 주는 사람은 많았다.

시헌은 이어폰을 낀 채 휴대폰으로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슬쩍 눈을 크게 떠 화면의 영상을 살폈다. 잘 보이진 않지만, 수술 장면인 듯싶었다. 손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본 우민은 기가 찼다. 우민이 알기로 PK는 저런 수술에 관심을 가질 만한 시기가 아니었다. 보통이 아니라는 민영의 말은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민이 한 발 더 다가가자 그제야 우민을 눈치챈 시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내 우민의 얼굴을 본 시헌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우민은 됐다는 듯 손을 들었다. 시헌은 머쓱하게 앉은 채 고개를 숙여 우민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시헌은 휴대폰을 엎었다. 둘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시헌이 NS에 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정작 우민과는 병원에서 얼굴을 스쳐 가며 인사를 하는 것이 전부인 사이였다. 우민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뒷목을 긁적였다. 이런 사이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닌데, 저도 모르게 거리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몸은 괜찮냐?”

“네?”

“배 말이야.”

우민은 수술복을 입은 시헌의 배를 손가락질했다. 배를 만지작거린 시헌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아, 어떻게……. 아니. 지금은 괜찮아요.”

시헌은 우민이 자신의 병원 기록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 당황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막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미 다른 의사들을 통해 시헌이 이전에 칼에 맞고 병원에 실려 온 이야기가 퍼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냉장고에서 병으로 된 오렌지 주스를 꺼낸 우민이 시헌의 앞에 앉았다. 우민은 시헌에게 오렌지 주스를 내밀었다. 주스를 마시며 테이블 위에 팔을 괸 우민은 동영상을 종료하는 시헌을 위아래로 훑었다.

“너, 진짜 박기욱 동생이야?”

“형이요?”

“……됐다.”

우민은 다 마신 음료수를 발밑 쓰레기통에 버렸다. 몇 번인가 시헌과 얼굴을 부딪히며 생각한 건데, 우민은 아무리 봐도 시헌이 서진을 험하게 대할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 시헌이 기욱과 닮은 건 사실이지만, 시헌과 기욱은 같은 듯 다른 것 같았다.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다면 당장 할 말은 없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강서진, 건들지 마라.”

서진은 지금 다른 과를 돌고 있다. 우민의 입에서 서진의 이름이 나올 줄 생각하지 못했던 시헌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둘 사이로 미묘한 전류가 흘렀다. 한참 만에 교수인 우민을 두고 기 싸움을 할 수는 없었던 시헌이 어깨에 힘을 풀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난 분명히 경고했다.”

우민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의자를 뒤로 밀었다. 그 순간 시헌이 한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선수를 쳤다.

“서진이.”

“…….”

“건들지 마세요.”

“씨발, 너 그거 방금 내가 했던 말…!!”

노골적인 도발에 우민이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벌컥, 의국 문이 열리며 진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텅 빈 의국에서 두 사람은 가장 먼저 진호의 눈에 들어왔다. 우민이 있는 줄 몰랐던 진호는 우민을 보며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눈치가 보였던 시헌도 자리에서 마저 일어나 진호를 향해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근데 둘이 여기서 뭐 하세요?”

“…….”

“…….”

진호의 말에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이라도 좋게 생각해 줄 생각이었는데, 우민은 시헌이 기욱과는 다른 의미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헌과 마찬가지로 우민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몰라.”

우민은 짜증을 내며 의국을 나갔다. 문을 살짝 열어 우민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진호가 문을 닫은 뒤 시헌을 바라봤다.

“PK 너 우리 교수님한테 뭐 했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시헌은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시헌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 놓인 오렌지 주스를 본 진호 또한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마셨다. 누가 사 온 것인지 모르지만 마침 목이 말랐던 진호는 순식간에 주스를 비웠다.

“뭐, 한 교수님이 좀 지랄 맞긴 하시지. 아, 이거 말하면 안 된다?”

진호는 다 마신 오렌지 주스 병을 손에 쥔 채 눈치를 줬다.

“하하, 네.”

달리 할 말이 없었던 시헌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홧김에 우민에게 도발을 한 건 분명 잘못이긴 했지만, 다짜고짜 욕을 하는 걸 볼 때 한 성격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민이 성격 죽이고 일하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도대체 우민의 말은 뭐였었을까?

시헌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알 수가 없었다.

* * *

“졸려 죽겠네.”

우민은 요즘 따라 유독 자주 졸렸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건 딱 지금 같은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몸으로 비상계단의 문을 열고 복도를 돈 우민은 복도 한가운데 서 있는 서진을 발견했다. 서진이 서 있는 곳은 아무리 봐도 제 연구실 앞이었다. 서진은 우민을 보고 고개를 숙이며 어쩔 줄을 몰랐다. 찾아왔으면서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거야? 우민은 서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태연하게 연구실 문을 열었다.

“들어와.”

“…아, 네.”

쭈뼛대던 서진이 우민을 따라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우민의 연구실은 처음 들어와 본 서진이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 우민은 찬장을 열어 컵을 꺼냈다.

“뭐 마실래? 녹차, 커피? 주스도 있고.”

“커피요. 좀 피곤해서요.”

“그래, 그래.”

우민은 커피를 타 뜨거운 물을 부은 뒤 앞쪽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우민의 눈치를 살핀 서진이 우민의 앞에 앉았다. 우민은 서진의 뒤쪽에 있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10시가 넘어 있었다.

“밥은 먹었냐?”

“그……. 대충요.”

“무슨 일인데 여기까지 찾아와?”

“교수님은 약속도 안 하고 찾아왔는데 놀라지 않으시네요…….”

서진은 마치 자신이 찾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하는 우민에 속으로 깜짝 놀랐다. 민폐가 아닐까 수십 번도 고민하며 찾아온 걸, 정작 우민은 서진이 찾아온 걸 크게 신경 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서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챈 우민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를 마셨다.

“그럴 리가 있겠냐? 당연히 놀랐지. 근데 거기다 대고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너 내 번호 몰라?”

“아뇨. 아는데……. 늦은 시간에 연락드리기가 뭐해서요.”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건 민폐가 아니고? 내가 연구실로 안 돌아왔으면 어쩔 뻔했어?”

“하하. 그러면 집에 갔겠죠.”

“태연한 건 내가 아니라 너다 임마.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야? 그래서 무슨 일인데?”

우민의 직설적인 질문에 서진은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다행히 우민은 하품하면서도 서진이 대답을 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무릎 아래로 내린 손을 모아 꼬물거리던 서진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저 혹시, 병원에 좀 더 남아 있을 수 있나요?”

“상관은 없는데. 성적도 안 들어가고, NS에 있을 거라는 보장도 못 해. 한 번 돌았던 과 또 가 봤자 재미없지 않냐?”

나름 고민해서 꺼낸 말이건만, 우민은 아무렇지 않게 서진의 말을 받아쳤다. 서진도 우민이 말한 요소들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냥 단지 해외에 있는 기욱에게 몇 시간마다 자신의 일정을 일거수일투족 보고하기 싫을 뿐이었다. 그럴 바에는 기욱이 해외에 있는 동안 병원에서 실습이든 뭐든 하는 게 훨씬 나았다. 서진은 차마 그런 사실을 우민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 없었다. 우민이 아닌, 어떤 사람이라도 그럴 것이었다. 우민은 남은 커피를 마신 뒤 잔을 내려놓았다.

“너 공부는?”

“할 수 있어요.”

“짜식, 성적 좋다고 뻗대기는.”

우민은 서진이 왜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왠지 그 부탁의 원인이 지금 해외에 가 있는 기욱과 서윤 때문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차마 본인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부분이었다. 언젠가 때와 기회가 되면 말해 주겠거니 생각한 우민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한참 만에 우민이 입을 열었다.

“아, 너 EM 갈래?”

“응급의학과요?”

“어. 안 교수 알지? 뭐라더라……. 다음 달까지 PK 없어서 한가하다고 그랬어. 스케줄이 어떻게 꼬였다고 들었긴 했는데……. 어떻게든 병원에 있고 싶으면 얘기해 줄게. 근데 너 이미 응급실 한 번 갔다 왔는데 괜찮겠냐?”

“상관없어요.”

아무렴 병원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우민은 다 마신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민은 제 눈치를 보고 나갈 준비를 하는 서진을 흘끗댔다.

“시간 나면.”

“네?”

“자주 올라와서 얼굴 보고 가. 애들한테 얘기해 놓을 테니까.”

우민의 배려에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구실을 나갔다.

* * *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빈자리에 앉은 서진은 휴대폰을 열었다.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확인하지 않은 연락들이 꽤 쌓여 있었다. 그중에서는 서진이 자고 있을 무렵 새벽에 기욱에게서 온 문자도 있었다.

「강서진 연락 안 해?」 오전 3:45

저쪽이 몇 시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기욱은 진심인 것 같았다. 부재중 문자와 함께 전화도 같이 와 있었다. 차마 해외에 있는 기욱에게 전화를 걸 자신이 나지 않았던 서진은 한참이 지난 후에서야 기욱에게 답장을 보냈다.

「새벽이었잖아요. 병원 가는 중이에요.」 오전 6:10

당연히 기욱에게 바로 답장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 서진이 노래를 듣기 위해 이어폰을 낌과 동시에 답장이 왔다.

「너 오늘 실습 없잖아.」 오전 6:12

이쯤 되면 서진은 기욱이 무서워졌다. 서진이 알기로 기욱과 자신은 시차 때문에 시간이 거의 반대에 가까웠다. 뭘 하는지는 몰라도 기가 막힌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늦게 답장할걸, 하고 후회가 들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서진은 한숨을 쉬며 기욱에게 답장을 보내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서진이 답장을 보내기 직전 기욱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강서진, 너 어디라고?」 오전 6:13

기욱의 문자를 먼저 읽은 서진은 한숨을 쉬며 답장을 전부 지운 뒤 새로 썼다. 사실 새로 쓰고 할 것도 없었다.

「지하철요」 오전 6:14

「사진 찍어서 보내, 지금」 오전 6:15

도대체 기욱은 뭐 하고 있는 걸까. 대놓고 인증사진까지 요구하는 기욱에 서진은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들고 마침 불빛이 들어오는 지하철의 안내판을 찍어 기욱에게 보냈다. 두 정거장쯤 지나 역에서 내릴 무렵 기욱에게 다시 답장이 왔다.

「똑바로 찍지?」 오전 6:30

셀카라도 찍어 줄까? 아침부터 별 요구를 다 하는구나 싶었다. 차마 셀카를 찍어 보낼 자신이 없었던 서진은 휴대폰을 아래로 해 제 손목에 있는 시계와 함께 역 근처의 사진을 찍어 대충 보냈다. 병원으로 들어가 비어 있는 라커룸을 열어 가운으로 갈아입고 났을 무렵에서야 기욱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서윤인 옆에서 자고 있어.」 오전 6:47

사진에 대한 대답 대신 묻지도 않은 서윤의 안부를 이야기하는 기욱의 문자에 서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기욱이 묻지 않아도 안부를 물어볼 생각이었건만, 덕분에 수고를 던 셈이었다. 슬슬 정말로 휴대폰을 만지는 것이 눈치가 보이는 곳까지 온 서진이 마지막으로 답장을 보냈다.

「병원엔 일 있어서 온 거고, 제발 좀 자요 ㅡㅡ」 오전 6:49

이후 문자가 그게 뭐냐며 불만이 가득한 기욱의 답장이 왔지만, 서진은 끝내 답장을 보내지 않은 채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응급실로 내려가 안쪽으로 들어간 서진은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윤성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윤성은 서진을 알아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너 또 왔어?”

“네?”

“저번에 왔잖아.”

“그게……. 한우민 교수님이…….”

“알아. 아는데, 누구라고 들은 게 없어서 너일 줄 몰랐다 이거지.”

워낙 짧은 시간 안에 정해진 거라 약간의 전달에 오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윤성은 서진이든, 서진이 아니든 상관이 없는 문제라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굳이 문제를 만들자면 서진이 이미 응급실에 한 번 왔다 간 사람이라는 것 정도였다. 윤성은 서진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두 번 오면 딱히 가르쳐 줄 게 또 없는데……. 아, 야! 지섭이 어디 갔냐?”

“도지섭 걔 아까 복도에서 보호자랑 대화 중이던데요. 무슨 일 있어요?”

“아냐. 얘기 끝나고 한가해지면 나한테 좀 오라고 해.”

윤성의 말에 여자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할 일을 하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언제까지 안에 숨어 있을 수는 없었던 윤성도 슬슬 나갈 준비를 했다. 아침이라 그리 바쁘진 않았지만, 바빠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전 뭐 하면 될까요?”

“어어, 지섭이 올 동안 잠깐 나 졸졸 따라다녀. 방해만 하지 말고.”

딱 잘라 말하는 윤성에 서진은 뭐라 대꾸할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윤성을 따라다닌 지 10분이 좀 넘었을 무렵, 서진보다 서너 살이 많아 보이는 젊은 선생님이 윤성과 서진에게 다가왔다. 윤성이 말한 지섭이라는 사람이었다. 지섭은 윤성의 뒤에 있는 서진을 보더니 고개를 약간 숙여 눈치껏 인사를 했다. 윤성을 따라다니는 사람이라고 하면 학생 외에 달리 없을 텐데 먼저 인사를 하는 걸 보니 첫인상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교수님, 무슨 일이십니까?”

“어. 환자는?”

“잘 이야기했습니다. 별일 없어요.”

“그래?”

본인이 별일 없다고 하면 더 캐물을 건 없었다. 윤성은 지섭과 서진을 데리고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환자와 보호자의 시선이 보이지 않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기 무섭게 윤성이 두 사람에게 서로를 소개했다.

“인사해. 우리 과 1년 차 도지섭이야. 막내야 막내. 이쪽은 강서진이라고, 너 다른 과 인턴 돌고 있을 때 한 번 왔다 간 애라 모를 거야. NS에 박 교수 알아? 걔 와이프 동생.”

“하하. 안녕하세요.”

그렇게 자세히 소개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서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차분히 인사를 했다.

“아, 소문의……. 말 많이 들었습니다.”

“일단 우리 병원에서 PK 하고 있는데, 사정이 있어서. 그냥 데리고 써.”

“예?”

“너 바쁘잖아. 감독하면서 말턴 애들 달달 볶지 말고 잡일 좀 시켜. 서진이가 인턴 잡은 못 해도 심부름은 할 거 아니냐.”

“그럼 저야 감사하죠.”

지섭은 뜬금없는 윤성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 왔다 간 서진은 노는 손이고, 지섭이 거절해도 윤성이 누군가에게 맡길 것이 틀림없었다. 거기까지 머리가 굴러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윤성은 서진을 슬쩍 보더니 등을 토닥였다.

“그런 고로 앞으로 나 말고 지섭이 따라다녀. 네가 H대 출신이라 우리 병원 의사들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병원 오면 선후배 될 사이 아니냐. 나쁜 놈 아니니까 미리 착한 선배 하나 알아 뒀다 생각하고, 고생해라.”

어차피 서진의 선택권은 처음부터 없었다. 멋대로 인사를 한 윤성은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겨진 상황에서 지섭도 얼마 지나지 않아 윤성이 나간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저 따라서 오시면 돼요.”

서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섭의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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