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2 하나뿐인 선택 (55/83)

Chapter. 52 하나뿐인 선택

부산에 도착한 기욱은 목적지를 향해 속도를 올렸다. 막 고속도로를 나와 도로를 달리던 기욱은 속도를 낮추며 한 손으로 뺨을 긁적였다. 기욱의 뺨에는 여자에게 차이고 난 뒤 맞은 것처럼 커다란 손자국이 나 있었으며 의자를 바로 세운 서진은 의자 위에 발을 올려 롱코트를 뒤집어쓴 뒤 머리를 창밖에 기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코트 안으로 훌쩍이는 서진의 소리가 들렸다.

“뭔 손이 이렇게 매워.”

건널목 근처에서 일부러 신호에 걸린 기욱은 차 안에 있는 작은 거울로 뺨을 살폈다. 아직도 화끈거리는 게 이래선 교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도 쉽게 지워질 것 같지도 않았다. 기가 막히게 자국을 내 놨네. 뺨을 맞아 본 적은 여럿 있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자국을 낸 것은 서진이 처음이었다.

“너 이거 어떻게 할 거야.”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기욱이 계속해서 코트 안에 있는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참다못해 코트를 걷어 냈지만, 서진은 코트를 걷어 내자 소리를 지르며 반항을 한 뒤 코트를 눌러썼다. 코트 사이로 울먹이는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흐극…, 누가! 누가… 흐어엉…….”

“하아, 착각했다고 했잖아.”

“흑, 대체 누구랑 착각했는데…!!”

기욱이 서진의 품에서 기절하듯 잠이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 안에서 알람이 울렸다. 기욱 때문에 옴짝달싹도 못 하고 있던 서진은 기욱을 깨우기 위해 몸을 흔들었다. 다행히 알람은 꺼졌지만, 잠이 덜 깬 기욱이 차 안에서 서진을 덮치려 했던 것이었다.

기욱에 의한 스킨십은 한두 번이 아녔으니 그렇다 쳐도, 차 안에서 이런 식의 스킨십은 서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외설적이었다.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무엇보다 허벅지 안쪽 그 밑을 만지작거리는 기욱의 손길은 소름이 돋기 그지없었다.

“뭘 그거 가지고 울고 그래.”

“흑…… 흐극….”

“할 수도 있는 거잖아.”

“흐윽, 누구랑….”

“누구랑 뭐?”

“누구랑 헷갈렸냐구요!!”

서진이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이 와중에도 그게 궁금해? 서진의 기분을 파악한 기욱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슬아슬하겠지만 그래도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기욱은 갓길에 차를 댄 뒤 몸을 살짝 틀어 코트를 눌러쓴 서진을 내려다봤다. 서진은 숨결과 코트 너머 인기척으로 기욱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기욱은 서진의 위로 낮게 목소리를 깔아 대답했다.

“여자.”

코트가 아래로 걷히며 서진의 손이 허공에 들렸다. 한 번 당하지 두 번은 안 당한다고, 기욱이 재빠르게 서진의 손을 붙잡았다. 예상대로 서진의 눈가는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서진이 울 거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기욱은 이런 일로 우는 서진이 안쓰럽기보다는 귀여웠다.

하, 진짜 스무 살 맞아? 아니, 이젠 스물한 살인가? 어쨌든. 자신의 20대 초반과 서진은 너무나 달랐다. 요즘 애들이 더한다더니 서진을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기욱의 눈에 서진은 처음 만났을 때와 나이라는 숫자 외에 달라진 것이 거의 없어 보였다.

서진은 본인이 여자 취급당했다는 것에 기분이 나빠지기보다 기욱이 말하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에 대해 불쾌해하고 있었다. 기욱이 보기에 서진은 아직도 애였다.

“당신…….”

기욱의 웃음의 의미를 눈치챈 서진은 토끼처럼 빨개진 눈으로 기욱을 노려봤다. 뒤늦게 서진의 화가 끝까지 차올랐다는 것을 깨달은 기욱이 서진을 달래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서진의 다른 손이 기욱의 반대편 뺨을 때렸다.

* * *

간신히 울음을 그친 서진은 기욱과 함께 차를 댄 뒤 목적지 호텔의 로비로 올라왔다. 부산까지 온 마당에 미아가 되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울며 겨자 먹기로 기욱의 옆에 다가갔다. 로비에서 혼자 기욱을 기다리는 동안 생각해 보니, 서진은 왜 기욱이 부산에 내려오는지를 알지 못했다. 사실 그날 밥을 먹으면서 열심히 이야기한 걸 서진이 듣지 못했다는 쪽에 가까웠다. 서진은 양쪽 뺨을 만지작거리는 기욱을 슬쩍 바라봤다.

어쩐지 좀 늦다 했는데, 기욱의 차림이 사복에서 말끔한 정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쯤 되니 단순히 여행 때문에 온 건 아니라는 생각이 확실히 지배적이었다.

“부산엔 왜 온 건데요?”

“논문 발표.”

서진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넥타이를 바로 매는 기욱을 보며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교수도 아니면서?”

“내 거일 리가 없잖아.”

틀린 말은 아닌데 묘하게 비꼬는 듯한 서진의 말투에 기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왜 왔어요?”

“교수님이 내려오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해. 덕분에 며칠 쉬니까.”

결국, 일 때문에 내려왔다는 뜻이었다. 넓은 연회장 로비 한쪽으로 영문으로 쓰여 있는 현수막들이 있었다. 기욱과 마찬가지로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이라든지 혹은 이제 막 호텔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안면이 있는 건지 형식적으로 인사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기욱과 그들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살짝 숙여 목례를 주고받았다. 소매를 바로 하고 정장에 묻은 먼지를 터는 기욱을 본 서진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럴 거면 저는 필요 없잖아요.”

제가 들어 봤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할 테고, 애당초 입장이 가능한지도 불분명했다. 어쨌든 애들 놀이도 아니니 서진은 졸지에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되어 버린 기분이 들었다.

“수능 끝나고 좀 쉬라고.”

“저번에도 놀러 갔잖아요.”

“난 더 놀았어.”

서진은 기욱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기욱이 어떻게 놀았든 관심은 없지만, 사실 서진은 그냥 집에서 잠이나 자는 게 가장 큰 행복이자 삶의 낙이었다. 왜인지 요즘 따라 무척 졸린 것도 있었다. 지난번에 놀러 갔을 때 남은 잔상이 서진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입을 다무는 서진에 기욱이 한마디 더 했다.

“그걸로는 부족하잖아.”

“놀게 해 줄 거예요?”

“놀라고.”

기욱은 제가 말하고도 무슨 콩트인지 알 수가 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는 기욱을 향해 일부러 놀리듯 말했다.

“여행 가고 싶은데요.”

“부산도 여행이야.”

“해외여행.”

기욱이 기어코 한숨을 쉬었다. 서진이 일부러 그러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었다.

“그건 안 돼.”

“왜 안 되는데요.”

“위험해.”

“부모도 아닌 주제에.”

“하, 갈 돈은 있어?”

“아깐 놀게 해 준다면서.”

“둘이 가자고 하면 싫다고 할 거잖아.”

“당연하죠. 놀게 해 준다고 했잖아요.”

“적당히 뜯어먹어.”

“내가 달라 그랬나, 자기가 준다고 해 놓고. 그러니까 뺨이나 맞죠.”

“이게 진짜…….”

기욱은 서진이 자신을 작정하고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멀리 기욱을 알아본 교수님이 손을 흔들었다. 교수님의 주변으로 병원 내 몇몇 의사들이 같이 오고 있었다. 기욱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먼저 부산에 내려와 있던 펠로우 의사―우민이 기욱의 뺨을 툭툭 건드리며 눈치를 줬다.

“야, 박기욱 너…….”

“자네 뺨은 또 왜 그런가?”

비슷하게 눈치를 챈 교수님이 기욱의 양쪽 뺨을 보며 말했다. 결국, 처음 기욱에게 말을 건 우민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았다.

“그게 저…… 죄송합니다. 내려오면서 일이 좀 있어서.”

“운전 중에 여친한테 차였나 보지?”

“그건 아니고…….”

“제가 때렸는데요. 맞을 만했어요.”

서진이 대뜸 끼어들었다. 서진은 다가오는 기욱의 손을 탁, 하고 쳐 냈다.

“서윤이……. 강 간호사 동생입니다.”

“아, 강 선생. 그래, 얼른 정리하고 오게.”

교수님이 등을 토닥이며 먼저 앞서갔다. 걸음을 느리게 한 우민이 가만히 서 있는 기욱에게 돌아왔다. 그리고는 변명할 틈도 없이 기욱의 무릎을 향해 발을 휘둘렀다.

“으윽…!”

“똑바로 안 서? 너 씨…. 이런 자리만 아니었으면 뒤졌어. 누가 애새끼한테 뺨 처맞고 내려오라고 네 시간 빼 준 줄 알아? 다른 애들은 한가해? 어?”

“아닙니다.”

“잘해라.”

“거, 애 적당히 잡아라.”

“교수님 그런 거 아닙니다.”

기욱을 향해 주먹을 쥔 우민이 빠르게 교수님이 있는 쪽으로 뛰어가 회장 안에 들어갔다. 기욱은 모든 일의 원흉인 서진을 노려봤다. 서진은 기욱이 혼난 건 제 잘못이 아니라는 듯 당당했다.

“왜 그랬어요.”

“내가 너 때문에…….”

이걸 화를 낼 수도 없고, 기욱은 서진의 손을 잡고 1층 로비로 이끌었다. 문 앞에 선 기욱이 서진에게 지갑에서 신용카드 하나를 꺼내 손에 쥐여 줬다.

“저 돈 있어요. 누나가 얼마 전에 용돈 줬어요.”

“강서윤이 얼마나 줬다고 그래. 됐으니까 편하게 써. 위험하니까 택시 타고 돌아다니고.”

여기가 무슨 해외도 아니고, 과보호에 가까운 기욱의 말에 서진은 할 말이 없었다. 소매를 걷은 기욱은 시간을 대충 확인했다.

“3시까지 돌아와.”

“야!! 박기욱!! 너 미쳤냐! 빨리 안 들어와!!!”

복도 너머로 우민의 고함이 들렸다. 서진이 기욱에게 신용카드를 돌려주기도 전에 기욱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홀로 남겨진 서진은 기욱이 준 신용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차라리 호텔 방을 알려 주던가. 돈만 쥐여 주고 멋대로 나가 놀라니 그게 말인지 장난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시 기욱에게 전화를 해 보기에는 기욱이 너무 바빠 보였다. 언제까지 로비에 서 있을 수는 없었던 서진은 결국 호텔 로비 밖으로 나왔다.

“어어, 택시!”

“야! 빨리 와! 빨리!”

서진 나이 또래의 여자였다. 한 여자가 서진의 앞에 있는 택시의 문을 열었다. 사실상 서진이 먼저 다가갔지만, 이미 그녀가 문을 열어 버린 마당에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을 열고 운전석에 탄 여자의 뒤를 이어 나이가 비슷한 또래 여자들이 다급하게 택시를 탔다. 자기네들이 서진의 택시를 빼앗아 탔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여자와 서진의 눈이 맞았다. 서진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뒤이어 오는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갈까요?”

“어, 음…….”

무작정 택시에 탄 것까지는 좋으나 부산이라고는 와 본 적이 없는 서진이 제대로 된 목적지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근처에 번화가 없나요? 백화점 같은 거?”

“LK백화점이요? 새로 생겼는데, 거기가 지금 가장 커요.”

“그럼 거기로 가 주세요.”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렴 크다는데 볼 것 정도는 있겠거니 싶었다. 이 날씨에 해운대 바다를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이른 아침이라 차가 막히거나 하지는 않았다. 백화점 근처에 도착한 서진은 계산을 하기 위해 미터기를 확인했다. 택시비는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았다.

“손님?”

“네. 네.”

잠시 넋 놓고 있던 서진은 다급하게 기욱의 카드를 건넸다. 계산한 뒤 영수증을 보지도 않은 채 카드와 함께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택시 밖으로 나오자 제대로 된 겨울바람이 서진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칼바람에 놀란 서진은 다급하게 코트의 지퍼를 올린 뒤 무장을 했다. 이렇게 돌아다닐 줄 알았으면 목도리라도 가져올걸, 하고 후회가 들었다. 아무렴 기욱이 언제 제대로 된 설명이나 해 준 적이 있었던가. 백화점이라고 해서 무작정 내린 서진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고층 건물과 빌딩들에 할 말을 잃었다.

부산에 이렇게 큰 건물이 많았던가? 서울 한복판과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더한 것 같기도 하고. 한국은 한국인데 한국이 아닌 거 같은 기분도 들고, 분명 저녁까지 평소처럼 집에서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부산이라는 것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아…….”

백화점뿐 아니라 복합상가인지 뭐가 복잡했다. 건물 한 바퀴를 뱅 돈 후에야 출입구를 찾을 수 있었던 서진은 오픈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비어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생각해 보니 백화점이 이렇게 일찍 문을 열 리가 없었다. 불행 중 다행히 오픈 시간과 서진이 백화점에 도착한 시간이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10분 정도만 기다리면 될 것 같다고 판단한 서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푹신한 의자 뒤로 머리를 기댔다. 아직 개장하지 않는 터라 묘하게 난방이 덜 된 느낌이 들었다. 아무렴 서윤이 사 준 옷은 제법 따듯했기 때문에 얼어 죽을 걱정은 없었다. 오히려 실내에 들어가면 더울 지경이었다. 이 옷을 입고 있으면 왠지 밖에서도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노숙자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잠깐, 노숙자라니.

“꼭 박시헌 같잖아.”

무의식중에 혼잣말로 중얼거린 서진이 깜짝 놀랐다. 박시헌. 은소가 죽고 난 뒤, 서진은 그 길로 학교를 자퇴했다. 고등학교가 몇 개월 안 남은 게 아쉽지 않을 정도로 서진은 학교에 미련이 없었다. 수능을 치를 수 없는 애매한 상황에서 재수해서라도 수능을 치르려면 검정고시까지 합격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검정고시 자체는 문제가 안 되지만 시험은 시험이었기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공부에만 집중한 서진은 말 그대로 시헌에 대한 것을 잊고 살았다. 잊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바빴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시헌도 재수를 했다고 기욱에게 어렴풋이 들은 것 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자식 뭐 하고 있을까.

서진이 느끼는 시헌은 시베리아 한복판에 던져 놔도 눈사람 만들고 원주민이랑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낼 것 같은 사람이었다. 시헌은 뭘 하든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분명 대학도 좋은 곳에 갔을 것이었다. 그런 일만 아니었으면 재수를 할 만한 녀석은 아니었다.

요란한 방송과 함께 백화점의 커다란 유리문이 열렸다. 백화점 안은 난방이 잘되어 있었다. 서진은 지퍼를 내린 뒤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백화점을 구경했다. 백화점은 밖에서 봤던 것보다 내부가 훨씬 넓고 컸다.

이래서야 들어왔던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아무렴 밖으로만 나온다면 어떻게든 갈 수 있겠거니 싶었다. 서진은 디저트와 음식들이 가득한 식품 코너를 돌아다녔다. 달리 먹은 아침은 없지만, 그렇다고 점심을 먹기에도 모호했다.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 세트가 전시된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 박스에 무려 7만 원이나 하는 수제 초콜릿 세트였다. 진열장 앞에 선 서진은 기욱이 준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서윤을 사 주면 좋아할 것 같았지만, 동시에 서진도 먹고 싶었다.

마음대로 쓰라고 했으니 써도 되겠지. 서진은 건너편 진열장에서 머뭇대는 직원을 불렀다.

“저기요.”

“네!”

알바생인가 젊은 여자가 서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서진은 초콜릿 박스 세트를 손가락질했다.

“A 세트 하나랑요. 낱개 포장도 돼요?”

“아, 그럼요.”

박스로 된 상자 옆쪽으로 개별 진열된 초콜릿이 있었다. 이것도, 저것도 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초콜릿은 한 개에 무려 2천 원에서 3천 원이나 했다. 뭔, 초콜릿이 이렇게 비싼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날 아니면 사 먹을 기회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면 종류별로 하나씩 다 주세요.”

“잠시만요.”

직원이 초콜릿이 포장된 쇼핑백과 초콜릿을 나눠 담은 종이팩 2개를 줬다. 종이팩을 챙긴 서진은 기욱이 준 카드를 건넸다. 영수증을 보자 10만 원이 훌쩍 넘어 있었다. 깜짝 놀라 진열장을 다시 확인하자 옆에 있는 초콜릿 상자와 가격을 헷갈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려 2만 원이나 더 비싼 초콜릿을 산 것이었다.

“상관없겠지?”

이제 막 20살을 넘긴 서진은 한꺼번에 10만 원이라는 돈을 쓰는 것이 낯설었다. 아무렴 쓰라고 준 카드인 데다 서윤의 선물 정도로 이 정도는 넘어가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서진은 낱개로 포장된 초콜릿을 입안에 넣었다. 입에 넣기 무섭게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맛이 일품이었다. 심지어 무조건 달지도 않았다.

처음이 쉽다고 하던가? 한번 초콜릿 세트를 산 서진은 해외 관광객인 양 거침없이 마음에 드는 것들을 사기 시작했다. 대부분 먹을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서윤에게 달리 뭘 사 줘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 것도 한몫했다. 슬슬 들고 다니기가 버거워질 무렵 서진은 사람들이 조금씩 차기 시작한 백화점 지하 상점가를 돌아다녔다.

음료수를 마시며 백화점 내부 지리가 익숙해질 무렵 난데없이 튀어나온 여자와 서진의 몸이 부딪히며 서진의 손에 들린 쇼핑백이 떨어졌다.

“아, 죄송해요.”

“아뇨. 괜찮아요. 제가 한눈판 탓인데요.”

서진이 다급하게 쇼핑백을 주워 팔에 꼈다. 뒤를 이어 서진과 부딪힌 여자의 친구들이 뛰어왔다. 어. 한 여자와 서진의 눈이 맞았다. 자세히 보니 호텔 앞에서 본 여자들이었다. 서진 정도는 아니지만, 이것저것 쇼핑백 하나씩 들고 있는 것을 봐서 쇼핑하러 놀러 온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가, 가 볼게요.”

여자 하나가 다급하게 자리를 피하려는 서진을 불렀다.

“저기요…!”

“네?”

“그…….”

여자들끼리 서로 눈치를 주고받더니 한 여자가 서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 아까 호텔에서 뵀었죠? 호텔은 아니고……. 로비? 하하.”

“네. 택시 있는 데서요.”

“택시 빼앗아서 타서 죄송해요.”

“아뇨. 뭐. 뒤에 많았는데요.”

서진은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저었다. 여자들은 총 4명이었는데, 딱 봐도 서진 또래의 20대 대학생이었다.

“혼자 왔어요?”

“그게……. 같이 온 사람은 볼일이 있어서. 지금 호텔에 있어요. 저만 나왔거든요.”

“어디서 왔는데요?”

“서울요.”

“헐. 저희도 서울에서 왔어요!”

조사하듯 묻는 말에 대답하던 순간 서울이라는 단어에 여자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서진은 자연스럽게 백화점 상가를 돌았다. 그녀들은 서진과 나이가 같았다. 대학을 다니고 첫 겨울 방학을 맞아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놀러 온 거라고 했다.

“그러면, 재수한 거야? 아. 동갑이니까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어, 응. 뭐, 수능을 생각보다 잘 봐서 괜찮아.”

“다행이네. 그럼 지금 혼자 돌아다니고 있어?”

“그렇긴 한데……. 달리 할 일도 없고.”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갔다. 아침을 먹기에 애매해 이것저것 주워 먹었다고는 하지만, 점심까지 거를 여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서진은 슬슬 배가 고팠다. 다행히 대책 없이 내려온 서진과 달리 같이 다니는 여자들은 제법 꼼꼼히 계획을 짠 모양이었다.

“점심으로 회 먹을 건데. 괜찮지?”

“상관없어.”

서진은 어디든 데려가 준다면 뭐든 먹을 자신이 있었다. 부산에서도 꽤 맛집이라고 알려져 찾아오는 손님들이 줄을 잇는 횟집은 들어가는 데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그마저도 아직도 밖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일찍 들어온 것이었다. 식사한 뒤 계산을 하기 위해 빌지를 확인한 여자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서진은 은근슬쩍 여자가 들고 있는 빌지를 확인했다.

“왜 그래?”

“아, 생각보다 많이 나와서……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 계산 중인데.”

일행이 한 명 늘었으니 계산이 어긋나는 건 사실상 당연한 일이었다. 괜히 눈치가 보이는 것도 싫고, 귀찮았던 서진은 지갑에서 기욱의 카드를 꺼내며 말했다.

“내가 낼게.”

“어? 아니, 나눠서 내야지. 다 같이 먹었는데.”

“괜찮아. 어차피 이거 내 카드 아니거든.”

자리에서 일어난 서진은 재빨리 계산대로 가 계산을 끝냈다. 영수증을 구겨 주머니에 넣은 서진은 골목 바로 건너편 편의점을 손가락질했다.

“난 잠깐 편의점 갔다 올 테니까 천천히 하고 나와.”

사라지듯 밖으로 나온 서진은 편의점으로 뛰어들어 가 담배와 라이터를 사 왔다. 일부러 한쪽 골목에 숨은 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재수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무렵, 기욱이 집에 두고 간 담배를 몰래 피우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었다.

사실상 성인이니 담배를 피우는 건 문제가 되진 않았다. 서진의 집에 담배를 두고 갔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기욱은 서진이 담배를 피운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빠르게 담배를 한 대 피운 서진은 여자들이 나오는 가게 앞으로 뛰어갔다. 서진의 몸에서 옅은 담배 향기가 났다.

“담배 폈어?”

“그냥 좀……. 습관이어서. 많이 피우는 건 아냐.”

서진은 주머니 안에 있는 담배 케이스와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그런 서진의 옆으로 여자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서진에게 먼저 같이 다니자고 제안을 한 여자였다.

“서진아, 그 혹시 번호 좀 줄 수 있어? 아까 계산한 거 우리끼리 조금이라도 보탤게.”

“됐어. 내가 끼어든 거잖아.”

“그래도 미안하잖아. 그거 꽤 비싼데. 서울 올라가서라도 밥 한번 따로 살게.”

“그래 그럼.”

사는 곳이 비슷한 것은 아니지만, 여자들은 H대 근처에 살았다. 아직 H대 정시 합격 발표까지는 이틀이 더 남아 있었다. H대가 아니면 J대겠지. 어차피 서울권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대학을 갈 것은 분명했다. 아무렴 언제부터 대한민국이 이렇게 넓은 세상이었단 말인가. 이것도 인연일 거로 생각한 서진은 아무 생각 없이 번호를 알려 줬다.

“문자 보냈어! 확인해 줘!”

“어, 응.”

밝은 표정의 그녀에 서진은 별생각 없이 휴대폰을 꺼냈다.

“아…….”

“왜? 문자 안 왔어?”

“아니, 왔는데. 배터리가 없어서.”

배터리가 10%도 채 남지 않았다. 분명 호텔을 나올 때만 해도 50%는 넘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언제 이렇게 달았는지 모를 배터리에 서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밥을 먹고 난 뒤 1시 30분이 좀 넘었다. 3시까지 오라고 했지만, 택시로 호텔까지 별로 거리가 멀지 않아 문제가 되진 않았다.

“SR 호텔에서 머무는 거 아니냐? 우리 봤던데.”

“아마도.”

세미나가 거기서 진행될 뿐, 서진은 그 호텔에서 잠을 잔다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1박 2일인지, 당일치기인지, 아니면 며칠을 더 머무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일행이 거기 있으니 가야겠지?”

“그럼 신경 쓰지 마. 우리랑 같이 가면 되잖아.”

“3시까진 돌아가야 돼.”

“우리도 그때쯤 들어갈걸?”

그녀의 말에 서진은 별문제 없겠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횟집에서 조금 더 나온 거리에 있는 유명한 빵집에서 빵을 사고 나왔다. 이제 슬슬 정말로 호텔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시간이었다.

“케이블카?”

“응. 요 앞에 있는데 올라갔다. 내려오기만 하는 거야.”

“난 아슬아슬할 거 같은데…….”

“3시까지는 괜찮아. 기왕 온 거 같이 갔다가 가자.”

계속되는 조름에 서진은 마지못해 케이블카를 탔다. 케이블카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열었지만, 휴대폰을 이미 한참 전에 꺼진 후였다. 서진은 될 대로 되라며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일행들은 뒤를 따라오기로 했고, 서진과 서진의 번호를 얻은 여자만 먼저 케이블카에 탔다. 두 사람은 케이블카에 앉아 별거 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헐. 그럼 새벽부터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내가 운전한 건 아니고 일행이. 난 그냥 차 안에서 계속 잤어.”

“근데 왜 너한테 카드만 주고 나가 놀라 그런대?”

“아. 그 사람은 놀러 온 건 아니고. 일하러 온 거거든. 출장인가?”

“무슨 일 하는데?”

“의사야. 레지던트 3년 차인가 4년 차인가 그런데, 무슨 학회에서 세미나 같은 거 하나 봐.”

“그렇구나. 그럼 누나인가?”

“하하, 남자야 남자. 친형은 아니고. 이래저래 연이 좀 있어서…….”

뭔가 이상한 오해가 되는 것 같은 분위기에 서진이 빠르게 말을 정정했다. 그 인연이라는 게 좋은 인연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오늘 처음 만난 그녀에게 그런 사실을 전부 설명해야 할 필요성 또한 없었다.

“맞다, 나 연락해도 되지?”

“어. 응. 상관없어. 나도 재수한다고 아는 사람 하나도 없거든. 학교 다닐 때도 친구가 많은 편도 아니었고…….”

“에이, 거짓말. 너 정도면 여자한테 꽤 인기 많았을 거 같은데?”

“고백이야 몇 번 받았는데. 솔직히 다른 반 여학생들이어서. 안 친하기도 했고. 결국, 자퇴했는데 사정이 좀 복잡해.”

“아, 그……. 그럴 수 있지. 우리 그 밑에 있는 윤형이 있잖아. 걔도 말이 고등학교 친구지 1학년 때 자퇴했어. 근데 지금 검정고시 보고 쟤가 젤 좋은 대학 다녀. J대 경제학과 다니거든. 그래서 쟤만 2학년이야. 자퇴 별거 없더라구.”

위로하는 듯한 말에 서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블카를 전부 타고 내려와 곧장 오는 택시를 붙잡았다. 택시에 탄 서진은 소매를 걷어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3시였다. 차가 조금 막히자 서진은 약간 초조해졌다.

“괜찮아?”

“어, 응.”

“3시에 무슨 약속 있는 거야?”

“그런 건 아냐. 그냥 3시까지 오라고 그랬어.”

서진은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저었다. 택시가 호텔 근처에 도착하자 서진은 서둘러 짐을 챙겨 가장 먼저 택시에서 내렸다.

“그럼 먼저 갈게!”

“어, 응! 나중에 봐!”

휴대폰 배터리도 없는 상황에서 서진은 어떻게 기욱을 찾아야 하나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로비의 커다란 회전문을 넘어간 순간 로비 건너편에서 정장 차림을 한 기욱이 서진을 발견하고 다급하게 뛰어왔기 때문이었다.

“강서진!”

넥타이를 풀고, 정장 재킷을 팔에 걸치며 소매까지 걷어 편한 차림이 된 기욱은 빠르게 서진의 손을 붙잡았다. 조금 화가 난 표정이었다. 뒤를 이어 호텔로 들어온 여자들이 서진을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어, 우린 올라가 볼게. 오늘 재밌었어!”

짐을 안고 손을 흔드는 여자들에 서진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은 서진의 손에 있는 짐들을 낚아채듯 가져왔다.

“들 수 있어요.”

“됐어.”

대신 기욱의 손에 있던 검은 재킷이 서진의 품에 던져졌다. 여자들이 탄 중앙 엘리베이터를 타려 하자 기욱은 서진의 손목을 붙잡고 반대 방향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새로 붙잡았다. 바로 위층에 있었던 엘리베이터는 금방 아래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 안에 탄 기욱은 십 몇 층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전세라도 낸 것처럼 두 사람을 태우고 멈추지 않고 올라갔다. 서진은 짐을 들고 있는 기욱을 슬쩍 올려다봤다.

“일은 끝났어요?”

“할 말이 그거야?”

기욱의 말에 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짐을 든 채로 불편하게 팔을 잡고 손을 잡아당기는 걸 보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거 10분 좀 늦었다고 화를 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서진은 서진 나름대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서진을 끌고 들어간 기욱은 가장 안쪽 방의 문에 카드키를 댔다. 카드키를 꽂자 방 안으로 불이 들어왔다. 기욱은 한쪽 벽에 서진이 사 온 물건들을 대충 내려놓았다.

“죄송해요. 택시가 막혀서.”

“전화는 왜 꺼진 건데.”

“배터리가 없었어요.”

서진은 진짜라며 꺼진 휴대폰 화면을 보여 줬다. 호텔 방 문을 닫은 기욱이 성큼성큼 서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한쪽 팔로 벽을 짚으며 서진의 앞을 가로막은 기욱은 서진이 사 온 쇼핑백들을 흘끗 바라봤다. 사실 서진이 카드를 긁을 때마다 실시간으로 연락이 와 대충 뭘 샀는지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서진이 사 온 것들은 하나같이 전부 먹을 것들뿐이었다. 누가 애 아니랄까 봐. 기욱은 손끝으로 서진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

“정말 화날 뻔했어.”

“지금도 화났잖아요.”

기욱은 그런 서진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서진은 기욱의 등 뒤에 있는 방들을 훑어봤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뷰에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방은, 병원 측에서 잡아 줬다고 하기에는 너무 사치스러운 가격이었다. 무엇보다 화려한 침실을 본 서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놈의 스위트룸.”

“진짜 방이 없었어.”

“거짓말.”

“진짜라고.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왔다고.”

“다른…….”

“다른?”

“다른 의사들은요? 교수님이나 이런 사람들. 일하러 온 거 아니었어요?”

기욱은 서진의 손에 있는 자신의 재킷을 가져왔다. 기욱의 엄지손가락이 점점 위로 올라가 서진의 마른 입술 근처를 문질렀다. 살짝 혀에 닿으며 엄지에 묻은 타액이 다시 입술에 묻었다.

“서울. 기차 타고 올라갔어. 신경 쓸 거 없잖아.”

기욱은 단칼에 말을 잘랐다. 하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기욱의 동료들을 신경 써 봤자 서진에게 득이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진도 기욱의 말에 동의하는 듯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기욱의 엄지손가락이 완전히 서진의 입안을 침범했다. 서진은 제 혀를 짓밟는 기욱의 엄지가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기욱이 손가락을 빼고 입술로 서진의 입술을 살포시 덮었다.

“으읏….”

기욱과의 키스에 서진은 눈을 질끔 감았다. 도대체 기욱은 왜 이렇게 자신과 키스를 하고 싶어 하는 걸까. 이런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뭘까 싶은 생각을 종종 할 때가 있었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그저 시간이 빨리 지나가고 기욱이 만족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너….”

길게 이어질 것으로 생각했던 키스는 생각보다 금방 끝이 났다. 기욱은 입술을 뗀 뒤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이는 서진을 바라봤다. 기욱의 시선이 아직 벗지 않은 서진의 롱코트 자락에 닿았다. 기욱은 서진의 코트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지금 뭐 하는…!!”

깜짝 놀란 서진이 기욱의 손을 붙잡았지만, 기욱이 서진의 주머니 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내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기욱은 자신이 피우는 브랜드와 같은 브랜드의 담배 케이스가 서진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서진에게 담배를 맡긴 적이 없었다. 기욱은 담배 케이스를 서진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너 담배 피워?”

“줘요.”

서진은 기욱의 손에 있는 담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손을 잡아 벽으로 눌렀다.

“담배 피우냐고 묻잖아.”

“피울 수도 있는 거잖아요. 성인인데. 달라고요!”

“언제부터 폈는데?”

“재수하면서요.”

서진은 결국 기욱에게 담배를 가져오길 포기했다. 다시 입술을 가볍게 맞춘 기욱은 서진의 롱코트 안으로 담배를 넣었다. 서진은 기욱의 입술이 지나간 곳을 손등으로 닦았다.

“들어와. 계속 서 있지 말고.”

“누구 때문인데.”

타액이 묻은 손등을 코트에 쓱쓱 닦은 서진은 입고 있던 롱코트를 안쪽에 있는 장롱에 걸었다. 방의 넓이와 신혼이나 가족들이 쓸 법한 화려한 디자인에 서진은 할 말을 잃었다. 밤새 달리고, 잠이라고는 30분 정도밖에 자지 못한 데다가 교수님이며 다른 선생님들 신경 쓴다고 점심이 코로 들어갔는지 입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르는 기욱은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방을 전부 둘러보고 온 서진은 결국 기욱이 소파에 앉아 몸을 반쯤 눕히다시피 하며 쉬고 있는 거실로 나왔다.

3시를 조금 넘기든 안 넘기든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뭐 해요?”

“실컷 놀다 왔잖아.”

“…….”

서진은 그런 기욱의 말에 아무런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서진은 배터리가 없는 휴대폰을 들고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누가 비싼 방 아니랄까 봐, 방 안에는 굳이 충전기를 가져오지 않아도 충전기들이 선의 종류별로 갖춰져 있었다. 서진은 휴대폰을 충전시킨 뒤 전원을 켰다. 서진의 휴대폰으로 그사이 연락이 와 있었다.

「아까 분위기 안 좋던데 잘 들어갔어?」 오후 3:23

번호를 교환한 여자에게서 온 문자였다. 서진은 미니바에서 꺼낸 음료수를 마시는 기욱을 슬쩍 보더니 답장을 보냈다.

「그럭저럭. 지금 방 안이야.」 오후 3:48

답장을 보내기 무섭게 여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호텔?」 오후 3:49

「응. 18층. 자고 갈 건가 봐.」 오후 3:49

「저녁은? 괜찮으면 이따 같이 먹을래?」 오후 3:50

서진은 그녀의 문자에 잠시 고민을 했다. 사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지만, 기욱이 쉽게 허락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모처럼 부산까지 내려와 만난 서울 친구들을 포기하기엔 아쉬운 것 또한 사실이었다.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한참을 고민하던 서진이 문자를 보내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한번 물어볼……」

서진이 내용을 전부 치기도 전에 기욱이 한쪽 팔로 서진의 어깨를 누르며 서진의 휴대폰 화면을 노골적으로 구경했다.

“뭘 물어봐?”

“비켜요! 무겁다구요.”

깜짝 놀란 서진은 휴대폰 화면을 꺼 엎은 뒤 기욱을 밀어냈다. 서진에게 밀린 기욱은 가볍게 양손을 들어 보이며 뒤로 물러섰다. 까칠하기는.

“왜 남의 휴대폰을 몰래 보고 그래요.”

“몰래 본 적 없는데? 대놓고 봤잖아. 누구야?”

“…….”

기욱이 슬쩍 본 바로는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서진에게 그렇다 할 만한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기욱은 알고 있었다. 남자 주제에 여자같이 예민한 구석이 있으니까 말이다. 사교성도 없는 것인지 요령이 없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기욱은 서진의 휴대폰에 저장된 낯선 이름이 불쾌했다.

“아까 그 여자애들이랑 돌아다녔어?”

서진의 점심 카드 기록은 혼자서 먹기에는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다. 서진이 어딘가의 호텔에 들어가서 식사를 할 만한 배짱이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같이 먹은 사람의 음식값까지 서진이 내 줬다는 말밖에는 생각할 길이 없었다. 그깟 얼마 되지도 않은 식사비, 내 줘도 그만 안 내 줘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사이에 번호까지 교환했다는 사실은 기욱의 기분을 썩 불편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런데요.”

“그중에 한 명이겠네. 어디 사는데?”

“서울요.”

“그래?”

몸을 숙인 기욱은 충전기에 있는 서진의 휴대폰을 낚아채 가져갔다. 0514. 서진의 비밀번호는 예전부터 한결같았다. 서진의 휴대폰 비밀번호를 해제한 기욱은 서진과 여자가 주고받은 내용을 살폈다.

서진이 보기엔 단순한 연락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기욱의 경우엔 달랐다. 아무리 여행을 와 기분이 들떴다고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면 밥도 같이 먹을 이유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휴대폰 좋은 거로 사 줄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휴대폰 달라구요.”

서진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기욱에게 휴대폰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기욱은 여자의 번호를 차단한 뒤 폴더형 휴대폰을 거꾸로 꺾었다. 설마 기욱이 휴대폰을 부술 줄 몰랐던 서진은 당황스러운 듯 눈을 크게 떴다. 최근 들어 스마트폰이 한창이었지만, 재수한다는 이유로 서진은 고등학교 때부터 쓰던 휴대폰을 고집했다. 휴대폰이 액정과 키패드가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지금 미쳤어요?”

놀란 서진이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기다시피 해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웠다. 혹시나 하고 버튼을 만지작거렸지만, 완전히 맛이 간 듯 소용이 없었다.

“멀쩡한 휴대폰을 왜 부수냐구요!!”

서진은 기욱의 행동에 화가 나 소리를 질렀다. 기욱은 바닥에 주저앉은 서진의 앞으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눈높이를 맞췄다.

“3시.”

기욱의 손이 서진의 등 위로 올라가더니 서진의 몸을 앞으로 당겼다. 서진의 이마와 기욱의 이마가 아슬아슬한 거리로 닿았다.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화난 거 알면서.”

“…….”

“감히 내 앞에서 연락해?”

“사귀는 거 아니잖아요!”

“호감 있어 보이던데.”

“그건…….”

서진은 고개를 돌렸다. 애들은 바보가 아니다. 하물며 20살이나 된 애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서진 또한 정말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었다. 기욱은 한 손으로 서진의 뺨을 누른 뒤 고개를 강제로 돌렸다.

서진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서진의 표정에 기욱은 기가 찼다. 경멸에 찬 듯 핏줄이 잔뜩 선 눈빛, 하라는 건 똑바로 안 하고 매번 반항만 하는 녀석이 뭐가 이리 좋은지 알 수가 없었다.

“섹스.”

“…….”

기욱의 한마디에 서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 아직도 애인 모양이었다.

“했냐고 물어봤잖아.”

“그게 뭐 어째서요.”

“술에 떡이 돼서 기억도 안 나는 주제에.”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기며 소파 위로 이끌었다. 기욱은 다리를 벌린 채 무릎 위로 서진을 올렸다. 양팔을 뒤로 잡은 기욱이 서진의 목 근처를 핥았다.

“했어.”

“지금 뭐라고…….”

“했다고. 섹스.”

서진의 고개가 확, 하고 돌아갔다. 자세가 불편해 기욱을 완전히 볼 수는 없었지만, 기욱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진의 머릿속 한구석에 기욱과 섹스를 한 날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진짜로 했다구요? 당신이랑 끝까지…? 으읍….”

기욱은 서진의 입을 막았다. 한 손이 자유로워진 서진이 계속해서 키스하는 기욱을 밀어내려 했지만, 기욱의 힘을 이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숨이 찬 서진의 고개가 뒤로 약간 넘어갔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머리를 받쳤다. 기욱은 서진을 천천히 소파에 눕혔다. 서진은 기욱을 올려다본 뒤 숨을 골랐다.

기욱과 섹스를 했다고? 진짜로? 머리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 몸을 쓰다듬는 손길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기욱은 정말로 끝까지 할 생각이었다.

그동안 기욱과의 관계는 스킨십 정도가 전부였다. 물론, 그 스킨십도 서진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지만. 진짜 끝까지 하는 것과 직전까지 하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커다란 소파의 헤드 쪽으로 물러난 서진은 다리를 오므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땐 수능이 막 끝났을 무렵이었다. 지금보다 더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였고, 또 결과적으론 술을 잔뜩 마셨던 상태였다. 지금은 달랐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그날처럼 어두운 저녁도 아니었다. 대낮에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기욱과 섹스를 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시, 싫어요.”

“싫으면 3시에 똑바로 왔어야지.”

“싫다고 했잖아요…! 악!”

기욱은 서진의 다리를 잡아당겨 소파 아래로 이끌었다. 커다란 양팔이 서진의 어깨와 몸을 누르고 있었다. 사실상 기욱의 아래에 깔린 서진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바지에 있는 벨트를 풀어 바닥에 내던졌다.

툭, 하고 벨트가 소파 옆 유리 테이블 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서진의 한쪽 다리를 벌린 기욱의 손이 허벅지 안쪽을 주물럭거렸다. 옷을 입고 있다고 해도 옷 위로 느껴지는 움직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싫어. 싫어요…! 나, 난 동의한 적 없어요!”

“동의? 뭘?”

서진의 반항에 허벅지 사이를 주무르던 기욱의 손이 멈추며 서진을 올려다봤다. 서진은 몸에 힘을 준 채 기욱을 보며 말했다.

“다, 당신이랑 하는 거요!”

“뭘 하는데?”

“알면서 장난치지 말라구요!”

“섹스? 한 번 했잖아.”

“기억 안 나요. 기, 기억 안 난다구요!”

둘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기욱은 서진의 허벅지를 누르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나 여전히 기욱은 서진의 몸을 누른 채였다. 잠시 표정이 누그러지는가 싶던 기욱은 처음보다 더 짙은 비웃음 섞인 눈으로 서진을 내려다봤다.

“강서진.”

“…….”

“너 거짓말 많이 늘었다?”

“저, 저, 정말로 기억이 안……. 서, 설령 그때는 그랬다 해도 지금은 아녜요.”

“뭐가 아닌데?”

“섹스요! 그 말 좀 그만하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참다못한 서진이 결국 소리를 질렀다. 그놈의 섹스, 섹스! 서진은 기욱이 왜 그렇게 제가 그 말을 하는 걸 듣고 싶어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말할 수 있잖아.”

“전 당신이랑 안 할 거예요. 동의하지 않으면 그건 강간이라구요!”

“내 생각은 다른데.”

“뭐가 다르단 건데요?”

기욱은 서진의 뺨을 만졌다. 예전과 달리 오돌토돌하게 올라온 수염에 기욱이 입꼬리를 올렸다. 다른 애들에 비해 털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난 네가 동의했다고 생각하는데.”

“하, 당신이랑 섹스하는 걸요? 미쳤어요?”

“그래?”

몸을 일으킨 기욱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든 서진이 기욱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 누구한테 저, 전화하는 거예요?”

“강서윤.”

“누나한테 왜…… 설마…….”

서진의 입술이 떨렸다. 기욱이 할 일을 생각한 서진은 차마 기욱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기욱에게 연인 관계란 전화 한 통이면 끝날 정도로 가벼운 인연이었다. 휴대폰을 엎은 기욱이 소파에 앉은 서진의 몸 위로 올라왔다.

“네가 뭘 상상하든.”

“…….”

“내가 못 할 거 같아?”

기욱의 손이 서진의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만지작거리는가 싶던 기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리모컨으로 방 안의 난방을 약하게 틀었다. 따듯한 공기가 방 안을 조금씩 매웠다. 서진이 앉아 있는 소파 앞으로 다가간 기욱은 서진의 팔을 앞으로 잡아당겼다. 서진은 반강제적으로 기욱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키스를 할 것처럼 다가온 기욱이 서진의 입술 근처에서 멈추며 입을 열었다.

“말했지.”

“…….”

“선택은 자유라고.”

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서진은 이 선택에 자유가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기욱과 헤어졌을 시 서윤을 감당할 여건 또한 되지 않았다. 기욱이 서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공을 맴돌던 서진의 손이 기욱의 앞으로 움직였다. 서진의 손에 깍지를 낀 기욱이 입술을 맞추며 서진의 위에 올라탔다.

“으읍… 읏…!”

“팔 들어.”

입술을 뗀 기욱이 서진의 양팔을 들어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겼다. 기욱에게 벗은 몸을 보인 건 몇 번인가 있었지만, 서진은 여전히 이런 모습을 기욱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다. 팔을 오므리려는 손을 치워 낸 기욱이 서진의 유두를 천천히 핥았다.

“하, 읏… 으응….”

묘하게 흘러나오는 신음에 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기욱의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그런 서진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여자의 가슴도 아닌 남자의 가슴을 만져서 도대체 뭐가 좋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기욱의 손길이 지나갈 때마다 경험해 본 적 없는 짜릿한 열기가 온몸을 맴돌았다.

기욱은 자신 또한 소파에 앉은 뒤 서진을 제 다리 사이에 앉혔다. 한 손으로 유두를 집요하게 괴롭히며 키스를 해 왔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진한 키스에 서진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암막 커튼이 쳐진 탓인지 아니면 조명 탓인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입술을 뗀 기욱은 서진의 뺨에 키스했다.

방에 들어왔을 당시 서진의 입안에선 담배 향이 옅게 났다. 역겹기보다 익숙한 향기에 기욱도 모르게 반응했을 뿐인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어쩌면 처음 여자를 알기 시작한 중학교 때부터 온갖 여자란 여자들은 다 만났다. 심지어 대학에 들어온 이후부터 기욱에게 성별은 별로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았다.

후배든, 선배든, 동갑이든 그런 건 기욱이 섹스를 하는 데 걸림돌이 아니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사실 지금도 다를 건 없다. 그러나 그런 기욱이지만 무턱대고 나이가 어린 남자에게 성욕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강서진이, 기욱에게는 미치도록 특별했다.

강서진이라는 존재가 조금만 영악했다면 기욱은 서진이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서진은 성에 대해서, 특히 남자와의 관계에 대해 제법 순수한 편이었다. 사실 어느 중, 고등학생을 데려다 놔도 크게 다를 건 없을 것이었다.

아무렴 이렇게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는가. 기욱은 편의점에서 당당하게 담배까지 사서 피우는 서진을 더는 교복을 입은 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욱의 손이 버클을 푼 서진의 브리프 위를 주물럭거렸다.

“하읏, 흐읍…….”

“자위 같은 거 많이 하지 않았어? 야동이라든지 보면서 말야.”

“흐흣,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불편한 쾌락에 몸이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진의 등을 받치고 있는 것은 기욱의 튼튼한 몸이었다. 브리프 위를 주물럭거리던 기욱의 손이 서진의 브리프를 옆으로 치워 냈다.

“잠깐… 싫…….”

“그만하겠다고 해 봐.”

“으읏…….”

“지금 당장에라도 강서윤한테 전화해서 헤어지자고 해 줄 테니까.”

“읏… 하읍… 쓰레기…….”

서진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쓰레기?

“쓰레기가 뭐?”

“후으, 하…, 당신!”

서진은 눈물이 맺힌 눈으로 기욱을 노려봤다. 한발 늦게 서진의 말을 파악한 기욱이 코웃음을 쳤다. 쓰레기라고? 그것도 욕이라고 한 건가? 기욱에게 그 정도 욕은 욕이라고 하기보단 애들 장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서진의 욕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기욱은 서진의 페니스를 계속 주무르며 키스를 했다.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는 서진과의 키스는 정말이지 몇 번을 해도 질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몇 번 하다 보면 키스라고 하기보다는 입 냄새 교환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서진과의 키스에 특별한 것이 있는 건 아니었다. 강서진은 뭔가가 달랐다. 영혼의 밑에서부터 사람을 미치도록 끓어오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뭔지 알아내기 전까지 기욱은 결코 서진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줄 생각 또한 없다. 집착과 독점, 소유욕만이 이 지루한 세상에서 기욱이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기욱은 서진의 바지를 완전히 내렸다.

“하읏… 응… 싫…, 아니….”

“알몸 정도야 괜찮잖아.”

어차피 끝까지 할 거고. 기욱은 서진의 바지를 벗긴 뒤 대충 바닥에 던졌다. 허벅지 사이로 기욱이 틀었던 난방의 미지근한 바람이 지나갔다. 브리프 안 페니스를 주물럭거리던 기욱의 손이 이내 서진의 브리프 또한 걷어 냈다. 놀란 서진이 양손으로 기욱의 팔을 붙잡았다. 기욱을 올려다보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흔드는 서진은 꼭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아 무서워하는 토끼 같았다. 물론, 기욱은 서진이 운다 해도 봐줄 생각 따위는 곧 죽어도 없었다. 애당초 인간의 몸은 섹스를 좀 한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 의사인 기욱이 서진을 죽게 내버려 둘 이유 또한 없었다.

기욱은 서진의 치골 안쪽으로 난 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분명 강서진은 평범했다. 학창 시절엔 어디를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남학생이었지만, 묘하게 다른 남자와 다르게 여성스러운 구석이 있는 것 또한 분명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은 완전히 보이지 않는, 커 가면서 보이기 시작한 구석들일 수도 있었다.

“털 많이 없네.”

“윽, 그런 얘기 좀 안 하면 하으… 안 돼요?”

“야동 보고 자위했냐고 말한 거? 아니면 아래에 털이 없는 거?”

“일부러 그러고 있는 거잖아요! 나 놀리는 게 재밌어서!”

“당연하지.”

서진에게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지금 기욱의 기분은 나쁘기보다 오히려 좋아진 쪽에 가까웠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다. 그날처럼 서진이 누군가 정체 모를 남자가 준 물에 담긴 약을 먹고 온 것도 아니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가능한 상황에서 정상적인 섹스라는 것은 꽤 오랜만에 기욱을 두근거리게 하였다. 처음 여자와 섹스를 했을 때 혹은 고등학교 때 남자 선배와 섹스를 했을 때만큼이나 기분이 좋았다.

서진과의 섹스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기 시작하는 것과도 같았다. 언제나 그렇듯 선을 처음 넘을 때의 희열은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기욱은 서진이 성적인 농담으로 부끄러워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서진의 다리를 옆으로 벌린 기욱은 노골적으로 서진의 페니스를 잡고 흔들었다.

“잠… 아읏…!! 하으윽!”

어느 순간부터인지 서진의 몸이 기욱의 품 안에서 뒤틀렸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강해지며 기욱의 손안에서 서진이 사정을 했다. 서진의 몸이 축 늘어지며 기욱의 몸에 뒤로 기댔다. 기욱은 팔을 뻗어 근처 휴지로 서진의 정액이 묻은 손을 닦아 냈다.

“흐… 읏… 아읏….”

몇 번을 해도 기욱의 손에서 가는 것은 익숙하지가 않았다. 대게 이전까지 서진이 기욱과 하는 스킨십은 이 정도가 다였다. 기욱은 서진의 허리를 안은 채 제 바지를 벗어 마찬가지로 아래에 대충 던졌다. 얇은 브리프를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잔뜩 흥분한 기욱의 페니스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서진이 몸을 움찔거리며 앞으로 다가갈 때마다 양팔로 서진의 허리를 안아 몸을 당겼다. 서진의 허리는 서윤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가늘었다. 기욱은 서진의 옆구리를 조몰락거렸다.

“살 좀 쪄.”

“좋네요.”

“뭐가 좋아?”

“제가 돼지가 되면 이런 짓 안 할 테니까요.”

“강서진.”

기욱이 서진의 이름을 부르자 서진은 기욱의 시선이 닿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진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한 번도 기욱이 원하는 대로 한 번에 들어준 적이 없었다. 이런 점이 까다롭다고 하는 거라는 걸 본인만 몰랐다. 아마, 박기욱의 손을 이렇게 타게 하는 사람은 서진이 유일무이할지도 몰랐다. 토끼라고 하기보단 잔뜩 날이 선 예민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린 서진과 서진이 스스로 고개를 돌리길 바라는 마음에 가만히 보고 있는 기욱의 기 싸움이 이어졌다. 그러나 자존심 센 서진은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결국 기욱은 한숨을 쉬며 강제로 서진의 고개를 돌렸다. 서진을 내려다본 기욱은 서진의 입술을 깨물었다.

살이 찌면 섹스를 안 한다고? 사람을 뭘로 보고. 기욱은 약간 기분이 상한 상태였다.

“오만하지 마.”

“하, 오만… 읏… 한 건 누군데요!!”

“살쪄서 나한테 벗어날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말라고. 그런다고 눈 하나 끔벅할 거 같아?”

“확실히 오만이었네요.”

서진은 인정한다며 대답을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박기욱은 서진의 외모 따위로 마음이 변할 사람은 아니었다. 도대체 자신의 뭘 보고 이렇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는 서진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고 싶은 건 기욱이 아니라 서진이었다. 어느 쪽이든 박기욱이라는 사람은 지독하리만큼 한결같은 인간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소파에서 일어난 기욱은 제 브리프를 아래로 내렸다. 서진의 것과는 또 다른 검은 털이 가득한 다리 사이로 검붉은 페니스가 꼿꼿하게 서진의 앞에 서 있었다. 기욱은 손으로 서진의 고개를 페니스 쪽으로 내 돌렸다.

“빨아.”

“윽… 왜…….”

“해 본 적 있잖아. 하라고.”

기욱은 우악스럽게 서진의 머리를 붙잡아 다리 사이로 가져다 댔다. 코끝에서 나는 향기에 서진은 입을 꾹 닫았다.

“강서윤.”

“제발, 누나 좀 내버려…… 흐윽… 둬요!”

“하라고.”

박기욱은 강서진이라는 인물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서진은 서윤을 버리지 못했다. 기욱이 그 사실을 아는 한 절대로 기욱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서윤이 아니더라도, 박기욱이라는 존재는 서진에게는 감히 대항할 수조차 없는 존재였다. 서진은 눈물을 머금은 채 입을 벌렸다. 서진의 머리채를 붙잡은 기욱은 사정없이 벌어진 틈을 밀고 들어왔다.

“으급… 읍….”

“혀 써서 핥아.”

기욱의 다른 손이 서진의 페니스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럴 때마다 서진의 입안이 움찔거리며 기욱의 페니스를 조였다. 기욱은 서진의 다른 손을 제 페니스 위로 올리게 했다. 서진은 눈을 질끔 감으며 혀를 움직였다. 서진의 뺨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래서 기욱과 단둘이 오고 싶지 않았다고. 아이러니하게도 기욱은 서진에 대해 잘 아는 만큼 서윤에 대해도 잘 알아 어떻게 하면 강서진이라는 사람을 제 손안에서 움직이게 할 수 있는지도 빠삭했다.

“으읍… 읏…….”

점점 커지는 페니스에 서진은 슬슬 숨이 막혔다. 허벅지를 누른 서진이 페니스를 빼내려 하자 기욱이 서진의 머리를 눌렀다.

“윽… 어윽… 으으읍…! …만… 으읍…!”

숨이 막힌 듯 허벅지를 붙잡으며 그만하라는 신호를 줬지만, 기욱은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움직였다. 기욱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서진은 호흡이 부족해 미칠 것만 같았다. 한참에서야 기도 부근에 닿은 페니스에 서진이 헛구역질을 하며 페니스를 밀어냈다.

“우윽…! 윽… 캑캑…!”

서진의 입 근처로 기욱의 페니스 끝에서 나온 쿠퍼액들이 묻어 있었다. 기침한 서진의 몸이 소파 쪽으로 기울어졌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을 숙인 기욱이 서진의 입가에 묻은 쿠퍼액을 휴지로 닦아 줬다. 탁, 하고 서진은 기욱의 손을 치워 냈다.

“……흐윽….”

기욱을 노려보는 데까지 성공한 서진이지만, 신음 외에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스스로가 한심했다. 몸을 숙인 기욱은 서진을 안아 침대 위로 내던졌다. 아무리 그래도 서진은 키가 작은 편은 아닐 텐데, 그런 서진을 안아 옮긴 기욱은 눈 하나 끔벅도 하지 않았다. 누가 외과의 아니랄까 봐 쓸데없이 체력 하나는 좋았다. 서진을 침대에 던진 기욱 또한 침대 위로 올라왔다. 기욱이 올라오자 침대가 푹, 하고 아래로 꺼졌다. 기욱은 침대 뒤로 물러나려는 서진의 다리를 잡아 제 몸 아래로 끌었다. 한쪽 허벅지를 누른 기욱의 손이 서진의 아래를 간지럽혔다.

“뭐 하는…!! 시, 싫…… 그만…!”

“끝까지 할 거라고 했잖아. 가만히 있어.”

“그러니까…….”

소파에서 있었던 일이 정상은 아니었지만, 이미 몇 번인가 기욱에게 당한 적이 있었던 서진에게 사정과 펠라 정도는 눈을 질끔 감으면 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펠라와 삽입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팔을 뻗어 안쪽 서랍을 열자 몇몇 성인용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욱은 러브젤을 집은 뒤 서진의 몸을 뒤집었다.

“읏, 이상… 이상해… 싫어…!”

“안 아프다고.”

“그러니까……! 하지… 아으윽!”

젤을 입구 근처에 흘린 기욱은 서진의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발버둥 치는 서진의 몸을 누른 기욱은 뭔가를 찾듯 서진의 안을 움직였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쪽까지 파고든 기욱의 손가락에 서진은 정신이 없었다.

“으읏… 아악, 아파. 아파…! 흐윽, 흐극…….”

“가만히 있어.”

“흑, 흐윽… 무서워요… 하으으윽!”

기욱은 손가락의 개수를 늘려 서진의 안을 헤집었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배 안을 긁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진이 침대 헤드를 붙잡으며 몸을 앞쪽으로 당기자 기욱 또한 서진의 위로 올라왔다. 헤드를 붙잡던 손이 아래로 떨어지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허윽, 으윽… 아읏… 으으읏…!!”

기욱의 손가락이 어느 지점을 찌르자 서진의 고개가 들렸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서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머리채를 잡고 몸을 돌린 기욱이 서진에게 키스를 한 뒤 입술을 뗐다. 여전히 다리 사이에선 기욱의 커다란 손가락이 서진의 안을 괴롭히고 있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팔을 뻗었다.

“허윽, 으윽…! 빼, 빼 줘요!”

“강서진, 발버둥을 치지 마! 다쳐.”

“읏. 아응. 으읏… 아파. 아파… 어흑! 느끼… 으흑, 이상해….”

낯선 자극에 서진은 머리가 돌아 미칠 것 같았다. 기욱이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서진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도대체 뭔 짓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어 불안함은 더욱 커졌다. 서진의 몸을 돌린 기욱은 다리를 벌린 채 손가락의 개수를 늘렸다.

“흐윽… 제발… 으흐흑… 뭐든 할 테니까 제발 빼 줘요…!!”

“내가.”

“……흑, 으흐윽….”

“그럴 리 없다는 거 알잖아.”

기욱은 서진의 앞머리를 올리며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그 키스에 서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허벅지 사이로 기욱의 페니스가 스치듯 닿아 왔다. 한눈에 봐도 자신의 것과는 크기 자체가 다른 기욱의 페니스를 넣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흐으… 으읏….”

서진의 다리를 옆으로 벌린 기욱은 천천히 서진의 안에서 손가락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살이 닿는 감촉에 서진의 잇새로 더욱 신음이 흘러나왔다. 서진이 느끼는 지점을 정확히 찾아낸 기욱은 계속해서 서진을 자극했다. 남은 옷마저 전부 벗은 기욱과 서진은 완전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가 됐다. 여기까지 가 본 적이 없었던 서진은 모든 게 무섭고, 두려웠다.

도대체 이 행위에 무슨 즐거움이 있다는 건지 지금의 서진으로서는 이해할 수조차, 이해조차 가지 않았다. 발악하는 서진의 팔을 교차로 붙잡아 누른 기욱이 서진의 안을 꾹꾹 눌렀다.

“허으으읏…!”

머리가 흔들리고, 사고가 혼란스러울 정도의 진한 자극에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술을 마신 상태나 마시지 않은 상태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서진은 그저 이 시간이 조금이라도 빨리 흘러가기를 바랐다.

“흐억… 허으윽… 으윽…!

서진을 침대 위에 엎드리게 한 기욱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동시에 서진의 페니스를 쥐고 흔들었다. 앞뒤로 이어지는 자극은 아무리 서진이라도 해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서진은 또다시 기욱의 손에서 사정하며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동시에 안쪽을 움직이던 손가락이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진의 안을 나왔다.

“하아, 흐윽… 그만… 흑….”

“입 벌려.”

“싫… 으읍… 으으아응….”

방금 전까지 자신의 안을 헤집었던 손가락이 입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서진은 좀처럼 실감할 수 없었다. 빌어먹게도 기욱이 서진에게 준 자극은 그러한 사고를 전부 잊을 정도로 강력했다. 기욱은 서진의 허벅지를 벌렸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보이는 기욱의 페니스에 서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악…! 싫어. 하지 마세요. 제발, 아… 으으윽… 제발….”

“안 죽어.”

“흐흑… 으으윽… 제발요. 흑….”

서진이 기욱의 허벅지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사정을 했다.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손가락이 어떻게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저렇게 큰 게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기욱은 눈물을 흘리며 봐달라고 하는 서진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이 와중에도 서진의 뺨은 매끄러웠다.

“제발…, 그만… 윽… 흐흑….”

서진은 침대 위에 주저앉은 채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아프다. 이런 건 더는 싫었다. 기욱은 어린아이처럼 우는 서진의 등을 토닥이며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기욱의 말을 들은 서진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그… 흑,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선택해.”

“그런 거 하윽…! 선택이 아니잖아요!!”

“선택하라고.”

기욱의 압박에 허벅지를 붙잡던 서진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입술 근처로 꼿꼿하게 선 기욱의 페니스가 닿았다. 서진은 눈을 위로 치켜뜨며 기욱의 눈치를 살폈다. 기욱과 눈이 맞은 서진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달리 방법이라는 게 떠오르지 않았던 서진은 결국 기욱의 페니스 끝을 살짝 머금었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머리를 살짝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힘이 들어갈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으읍….”

역한 느낌이 들었지만, 차마 서진은 기욱의 페니스를 입안에서 빼낼 수 없었다. 점점 깊숙이 기욱의 페니스가 입안 구석구석을 찌르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서진의 펠라는 기욱이 만난 다른 사람들에 비해 한숨이 나올 정도로 어설펐지만, 기욱은 그런 어설픈 펠라가 마냥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침대 헤드 쪽에 베개를 두고 편하게 몸을 기댄 기욱은 자신의 페니스를 핥는 서진의 등을 쓰다듬으며 설명하듯 말했다.

“그래, 살살. 천천히 해도 괜찮으니까.”

어린아이 달래듯 하는 말투치고는 상당히 야한 말투가 아닐 수 없었다. 기욱 본인도 그 사실을 느꼈는지 피식, 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얼마나 더 해야 만족이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던 서진은 몇 번이나 고개를 들며 기욱과 눈을 마주쳤다. 그때마다 기욱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서진의 머리채를 붙잡고 있던 손을 아래로 눌렀다. 더 하라는 기욱의 암묵적인 압박에 서진은 한동안 기욱의 페니스를 억지로 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윽… 윽….”

숨이 차오름과 동시에 혀끝에서 느껴지는 역한 정액 냄새에 서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기욱도 한계에 달한 모양인지 서진의 입안에서 페니스를 빼냈다. 서진은 손등으로 침과 쿠퍼액이 섞인 입술을 빠르게 닦아 냈다. 목 안쪽으로 닦아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향기가 났다.

여전히 잔뜩 발기한 채로 침대에 앉은 기욱이 서진의 어깨를 밀었다. 서진의 몸이 자연스럽게 침대 쪽으로 넘어지며 기욱이 서진의 위로 올라왔다. 서진은 다급하게 양손으로 기욱의 몸을 밀었다. 있는 힘껏 밀었다고 생각했지만, 기욱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차마 기욱과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던 서진은 애써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만… 으읍…!”

기욱의 커다란 손이 서진의 입을 막으며 한쪽 허리를 벌렸다. 차마 반항할 틈도 없이 기욱의 손가락이 서진의 안까지 밀고 들어왔다. 예고 없이 들어온 손가락에 입 안쪽으로 신음을 내뱉은 서진이 반항을 했다.

“읍…! 으으읏…! 흑….”

손가락만으로도 죽을 거 같은데, 기욱의 페니스 따위가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기욱은 서진의 입을 막은 채로 꿋꿋하게 손가락의 개수를 늘려 안을 눌렀다. 손가락이 전립선 근처에 닿자 어쩔 수 없는 자극에 서진의 몸이 뒤틀렸다.

“하윽, 으응… 읏… 흑… 그만….”

이전에 느껴 보지 못한 자극에 그제야 기욱이 손을 치우자 서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참는 데 한계가 온 기욱은 서진의 다리를 잡아당겨 아래로 이끈 뒤 허벅지 근처를 맞댔다. 노골적으로 닿는 페니스에 서진이 싫다는 듯 몸을 뒤틀며 반항을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시작도 하기 전에 한 대 맞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기욱은 서진의 몸을 돌린 뒤 팔을 꺾어 올렸다.

“강서진, 가만히 있으라고…!”

“싫다고 했잖……!!”

서진과 기욱의 눈이 맞았다. 지나칠 정도로 욕구에 충실한 기욱의 눈동자에 서진의 시선이 흔들렸다. 아아, 기욱은 처음부터 그만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일말의 배려나 감정이라도 있기를 바랐던 서진은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반항하던 서진의 손은 힘이 풀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기욱은 서진이 반항을 하지 않는 것을 기회라 생각한 듯 서진의 입구 근처에 자신의 페니스를 맞췄다.

손가락과는 사뭇 다른, 끝이 살짝 닿기만 해도 굵직한 느낌에 서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 한구석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기욱이 진짜로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짓은 이런 짓이 아니었나, 하고 말이다.

학창 시절, 기욱이 정말로 정도 이상의 짓을 한 적은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서진은 기욱이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 어린 자신을 상대로 그런 상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역겨웠다. 기욱과 하는 스킨십 정도야 괜찮겠다고 넘어갔던 스스로가 참 바보 같았다.

“여기서 그만둘까? 아니면 서울로 올라가서 눈앞에서 강서윤이랑 헤어지는 거 볼래.”

귓가에 속삭였던 기욱의 말에 서진은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서진이 아는 기욱은 한다면 정말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 행동에 예외는 없었다. 이전, 기욱이 서윤에게 했던 행동으로 인해 서윤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를 생각하면 서윤과 헤어지겠다는 기욱의 말은 사실상 서진의 귀에 협박으로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강서진, 힘 빼.”

“흐… 으읏… 으으윽….”

서진이 몸을 떨자 기욱은 서진의 허리를 앞으로 잡아당겼다. 엉덩이 근처를 왔다 갔다 하던 페니스가 기어코 좁은 서진의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허으으윽…!! 아파… 하윽… 아악!”

한번 들어온 페니스는 더욱더 부풀어 오르며 서진의 안을 좀먹었다. 기욱이 뭐라 서진을 달랬지만, 서진의 귀에는 그런 기욱의 목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삽입한다는 사실을 떠나서 섹스라는 것 자체가 처음인 서진은 이 상황 자체가 너무 무서웠다. 서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기욱은 서진을 천천히 달랬다.

“…진. 강서진.”

“허윽… 으흑… 아파….”

“천천히, 숨 쉬어.”

“악!! 아프…, 흐극, 아….”

등 뒤에서 서진의 목을 잡아 올린 기욱이 뺨에 얼굴을 맞댔다. 뒤쪽으로 꺾인 팔이 올라갈 때마다 서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놓아달라고 몇 번이나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강하게 올라타는 기욱의 무게에 서진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든 기욱이 그만둘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서진의 몸에 힘이 풀리며 머리가 침대 시트 위로 떨어졌다. 서진이 반 정도 포기했다는 것을 눈치챈 기욱이 손에 힘을 풀었다.

기욱에 의해서 다시 몸이 돌려진 서진은 자신의 위로 올라탄 기욱을 올려다봤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 말만큼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얼굴을 가린 한쪽 팔을 치운 서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흑, 당신은……. 쓰레기예요!”

“네가 할 소린 아니지.”

“무슨 말을…… 진짜 그만… 아으으으윽!! 하윽… 어흑…!”

서진의 허벅지를 잡아당긴 기욱이 페니스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갑작스럽게 들어온 기욱의 페니스에 서진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엄연히 따지면 두 번째 섹스지만, 그때의 섹스는 엄연히 말하자면 약에 취한 서진도 서진이었지만, 기욱 또한 술을 꽤 마신 상태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서진에게 기억에 남는 것은 그때보다 지금일 확률이 높았다. 서진의 허벅지에 완전히 밀착한 기욱은 몸을 살짝 떨었다. 페니스를 조여 오는 느낌이며, 서진의 신음과 움직임 하나하나가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전해져 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젠가 서진과 하는 섹스는 제법 기분이 좋을 거로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기욱은 얼굴이 빨갛게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서진의 이마에 손을 올려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서진의 이마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기욱이 했던 그 어떤 섹스보다 지금이 더 기분이 좋았다. 남자와의 섹스가 오랜만인 점도 있었지만, 나이를 들어가면 갈수록 보이는 서진의 매력에 기욱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흐윽… 윽… 제발… 빼 줘요…. 허윽….”

“후우, 금방 괜찮아져.”

“금방… 아으윽… 어윽…!! 아아악!!”

숨을 쉴 때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기욱의 페니스에 서진은 미칠 것만 같았다. 괜찮다는 말을 끝으로 기욱은 허리를 거칠게 움직였다. 그날, 호텔 방에서 기욱은 그동안 참아 왔다는 듯이 서진을 마구잡이로 범했다. 두 사람의 섹스는 서진이 의식을 잃고 한참 뒤에서야 끝이 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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