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1 끝없는 집착 (54/83)

Chapter. 51 끝없는 집착

번화가의 한 술집. 이른 시간부터 테이블 구석에는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모처럼 주말에 시간을 내 동기들끼리 모인 것이었다. 가장 구석 자리에 앉은 서진은 소주잔에 소주를 채우기 무섭게 들이켰다.

“……윽.”

“야야, 강서진 혼자 달리지 좀 마라.”

계속해서 혼자 마시는 서진에 옆에 있던 동기가 잔소리했지만, 서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술을 마셨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기욱이랑 마셨을 때인가. 서진은 그건 제외하자며 멋대로 고개를 흔들었다. 자고로 술이란 마음 편히 마셔야 술이었다. 그리고 그런 서진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기들은 결국 혼자 달리는 서진을 내버려 뒀다. 서진이 저런 식으로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이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하, 진짜 대박이더라 아주.”

술이 들어가기 시작한 동기들의 말수와 언성이 점점 올라갔다. 서진은 그 가운데 껴 말없이 술을 마셨다. 5시가 좀 넘어 시작한 술자리는 소주 몇 병 비우고 나니 8시가 훌쩍 넘어갔다. 슬슬 2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무렵 서진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진.”

“…….”

“야, 강서진! 전화 왔다.”

소주병 사이에 있던 휴대폰을 못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서진에 술을 적게 마신 동기가 서진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혼자 술을 꽤 마신 서진이 화면에 몇 번 헛손질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뒤늦게 전화의 상대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후회가 들었지만, 아무렴 이미 수화기에 귀를 가져다 댄 후였다.

― 강서진.

― …….

― 너 어디야.

마침 술 게임을 시작한 동기 한 명이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전화를 받은 서진도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왜 그래?”

“잠깐……. 나, 나갔다 올게…….”

서진은 비틀거리며 테이블 모서리를 붙잡은 뒤 가게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바깥이 어두워져 있었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와 클럽의 음악 소리들이 시끄럽게 울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상 안이나 밖이나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서진은 심호흡을 하며 최대한 술에 취하지 않은 척 말했다.

― 왜, 왜요?

― 어디냐고.

― 밖이요.

― 밖 어디.

― 학교 근처……. 동기들이랑 술 마시러 나왔어요. 무슨 일인데요?

― 하, 3번 출구 앞에서 기다려.

기욱은 제 할 말만 하고 멋대로 전화를 끊었다. 술기운에 시야가 흔들린 서진은 눈을 비비며 휴대폰을 바라봤다. 머릿속 한구석으로는 이대로 잠적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이성이 뒷감당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서윤과의 결혼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마당에 기욱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것은 없었다. 서진은 가게로 돌아가 급하게 두고 간 지갑을 챙겼다.

“뭐야? 강서진 너 어디 가?”

“미안. 나 일이 좀 생겨서. 나중에 술값 불러 줘. 계좌로 쏠게!”

서진을 부르는 동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서진은 도망치듯 가게를 나왔다. 3번 출구 앞에서 10분 정도 기다리자 낯선 차가 서진의 근처로 다가왔다. 창문이 열리자 운전석 쪽으로 기욱의 얼굴이 보였다. 서진은 눈치를 보더니 차 문을 열어 조수석에 탔다.

“…….”

서진은 안전벨트를 매며 아직 투명 종이가 전부 뜯어지지 않은 차 내부를 둘러봤다. 차 안은 세차의 분위기가 물씬 났다.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수리를 하니 마니 하더니 결국 새 차를 뽑은 것 같았다. 자세한 사정을 물어볼 수 없었던 서진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혼자 생각할 뿐이었다. 천천히 번화가를 빠져나온 기욱은 마시다가 만 500ml짜리 편의점 물병을 내밀었다.

“마셔.”

혹시 술 냄새가 날까 대답 대신 입을 틀어막은 서진이 기욱이 준 물을 마셨다. 사실 무슨 맛인지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무렴 물이라도 좀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서진은 가슴을 조이는 안전벨트를 꽉 쥐며 기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 누나는요?”

“병원. 얼굴 보고 오는 길이야.”

앞유리에 시선을 고정한 기욱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기욱의 차가 어디로 가는지 서진은 알 수가 없었다. 번화가를 나와 집이 아닌 점점 외진 곳으로 내려갔다. 30분을 좀 달렸을까 길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빌라들이 모텔의 간판을 달고 서 있었다. 모텔 근처에 차를 댄 기욱은 거침없이 건너편으로 돌아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기욱은 안전벨트도 풀고 있지 않은 서진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

“뭐 해? 내려.”

한두 번 하는 거 아니잖아.

기욱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술기운이 가시긴커녕 역으로 술기운이 더 올라온 서진은 몇 번이나 헛손질했다. 도대체 얼마나 마시면 이렇게 되는 건지. 실은 서진도 자신이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 세 병 마셨나. 그것보다는 덜 마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술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죽자고 마실 계획을 하고 있었던 서진은 솔직히 기욱과의 지금 이 상황을 나중에 기억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하아.”

노골적으로 술 냄새가 나는 서진에 기욱은 한숨을 쉬며 안전벨트를 풀어 줬다. 기욱이 안전벨트를 풀기 무섭게 제 몸을 못 가누는 서진이 기욱 쪽으로 쓰러졌다. 서진을 밖으로 끌어낸 기욱은 성큼성큼 모텔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하게 현금으로 계산하고, 열쇠를 받았다. 기욱은 이상한 곳으로 가려는 서진의 팔을 강제로 붙잡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채 벗지도 못한 서진이 모텔 방의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서진의 위로 올라탄 기욱은 서진의 다리를 들어 신발을 벗겨 낸 뒤 침대 너머로 던졌다. 서진이 마신 술 냄새가 진동했다.

“강서진.”

“…네?”

“너 술 얼마나 마셨어?”

“마셨어요.”

“누구랑 먹었냐고.”

“많이요.”

술에 취한 서진이 정체 모를 소리를 하고 있었다. 기욱이 답답하다는 듯 서진을 침대 헤드 쪽으로 몰아붙였다.

“누가, 마셔도 좋다고 그랬어?”

“상관없잖아요.”

“뭐?”

“내가 마시든 말든!! 흐윽… 흐으윽… 당신이랑 상관없잖아요!! 내가, 히끅… 술 마시는 거까지 허락받으면서 마셔야 해요? 당신이 뭔데…… 흐으윽… 나한테 뭔데요!”

“씨발. 너 미쳤냐?”

“그래요. 미쳤어요! 누구 때문인데…… 으읍…!!”

기욱은 양손으로 서진의 옷을 잡아당기며 강제로 입술을 덮쳤다. 원하지 않은 알코올의 향기가 진득하게 났지만, 기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서진의 그 입을 막아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반강제로 입안을 헤집는 기욱의 진한 키스에 숨이 막힌 서진이 기욱을 있는 힘껏 밀어냈다.

“으윽… 지 마요. 제가, 제가 잘못했으니까 이러지 마세요.”

“…….”

“잘할 테니까……. 잘할게요. 잘해… 했잖아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무엇이 서진을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기욱은 지금의 서진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쯧, 하고 혀를 찬 기욱은 셔츠의 단추들을 하나씩 풀어 젖혔다.

강 간호사.

불쌍하지도 않냐.

임정혁 씨발 새끼.

다 아는 듯이 지껄이고.

기욱은 정혁이 싫었다. 처음 봤을 때도 싫었고, 같은 교수로서 마주 앉은 지금도 정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짜증이 날 때면 기욱은 갈증이 난 사람처럼 서진을 찾았다. 서진의 생각이 나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찾은 서진의 꼴이 저 모양이라니. 인생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기욱은 바지의 벨트를 풀어 대충 근처로 내던졌다.

“강서진 옷 벗어.”

“아, 안 할래요.”

“닥치고 벗으라고.”

이불로 몸을 돌돌 말은 서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순식간에 바지를 벗어 던진 기욱이 서진의 몸을 반쯤 가린 이불을 잡아당겼다. 한동안 이불을 놓지 않으려는 서진과 기욱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아악!! 시… 싫어요. 싫다고 했잖…… 으읍…!”

“이게 진짜…!”

비명에 가까운 서진의 소리에 기욱이 서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니다. 이쯤 되면 학습할 때도 되지 않았나? 기욱은 서진의 반항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셔츠를 주워 들어 서진의 입에 대충 구겨 넣은 뒤 서진의 어깨를 눌렀다.

“으읍… 으윽…!!”

“강서진 가만히 안 있…… 윽…!”

발버둥을 치던 서진의 주먹이 기욱의 얼굴을 쳤다. 제아무리 기욱이라고 해도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성인 남자를 완전히 제압하기란 힘들었다. 그 대상이 술을 마셨다면 더더욱. 기욱은 욱신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살짝 누른 뒤 한 발 물러나 서진을 바라봤다.

“하. 너 그렇게 굴겠다 이거지.”

침대 아래로 내려간 기욱은 바닥에 떨어진 벨트를 주워 들었다.

* * *

“으윽…… 하으으윽, 어흑… 하응, 흐윽….”

어두운 모텔의 방 안으로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기욱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을 깊숙이 찔렀다. 기욱의 손길이 지나가는 곳 하나하나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기욱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서진의 몸이 앞으로 뒤틀리듯 빠져나갔고, 기욱의 손은 그런 서진의 허리를 다시 잡아당겼다.

“허윽… 으으… 으으윽…!! 그만 제발, 제발 그만…….”

“니가 아주.”

“했어요…. 아응, 으읏… 하으으윽! 으으윽!”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철벅, 하고 두꺼운 페니스가 서진의 안을 거침없이 관통했다. 살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은 쾌락에 서진은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서진은 도대체 기욱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그런 걸 생각할 사고 능력조차 되지 않았다. 몇 번을 사정한 걸까? 서진의 안을 매운 기욱의 정액은 안을 가득 채우다 못해 페니스를 타고 침대 시트 아래로 흘러내렸다. 기욱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화가 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것만 해도 정신이 없는데 서진까지 스트레스를 주니 짜증이 불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환자가, 사건을 묻자는 정혁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안개 속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기욱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기욱은 서진을 더욱 거칠게 탐했다.

“흐윽… 흣… 으읏… 허윽… 만….”

“만?”

“…흐으으윽… 그만해 줘요….”

잔뜩 목이 쉰 서진이 기욱의 몸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다시피 하며 눈물을 흘렸다. 시계를 찾을 수 없는 모텔에서 얼마나 섹스를 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당했다. 기욱은 서진이 실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진의 몸을 탐했다. 깨어나고, 기절하는 것을 반복하길 서너 번. 그러나 아직 밤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이래선 펜션에서와 다를 것이 없었다. 기욱은 페니스를 넣은 서진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서진을 허벅지 위쪽으로 올렸다. 깊숙이 안을 찌르는 페니스에 서진이 다시 한번 괴로워했지만, 기욱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서진아.”

“……흐윽… 허윽, 윽….”

“강서진?”

조금은 화가 풀린 걸까? 기욱은 정신이 없는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거친 섹스에 술이 깨고, 조금은 정신이 든 서진이 조심스럽게 눈을 아래로 내렸다. 기욱은 등 뒤로 묶인 서진의 팔을 잡고 그대로 서진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핥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짠맛이 났다. 기욱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서진을 붙잡고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누워 있을 때와 달리 수직으로 들어오는 페니스에 서진은 죽을 맛이었다.

“허윽…… 으윽… 하응… 으읏… 하윽….”

“후윽… 읏!”

몇 시간을 한 거지? 사정한 기욱도 슬슬 숨이 찼다. 기욱은 서진을 침대 쪽으로 눕혔다. 서진의 한쪽 다리를 벌려 올린 뒤 허벅지 근처를 살살 쓸었다. 같은 남자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진이 기욱을 발로 차려 하자 기욱이 빠르게 허벅지를 접어 눌렀다.

“으윽… 윽….”

기욱은 손으로 서진의 페니스를 주물럭거렸다. 손톱 끝으로 입구를 살살 긁자 서진이 입술을 얕게 깨물었다. 생리학적 현상은, 아무리 서진이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기욱의 엄지가 서진의 입안을 강제로 벌렸다. 기욱에게 당할 만큼 당한 서진은 입안으로 들어온 기욱의 손가락을 씹을 힘조차 없었다.

“흐으… 했어요…. 으, 윽…!”

허리가 살짝 튄 서진이 기욱의 손안에서 사정했다. 기욱은 축 늘어지는 서진의 어깨를 붙잡은 뒤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서진의 안은 기욱의 정액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막 사정을 한 터라 깜짝 놀란 서진이 기욱의 페니스를 강하게 조였다.

“하윽…!! 흐윽…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흔드는 서진에 기욱은 서진의 허벅지를 옆으로 벌렸다. 이렇게 야하게 다리를 벌리고 눈물을 흘리는 서진을 보고 있자니 좀 짜릿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기욱은 늘 서진의 생각이 가장 먼저 났다.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기욱은 자신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럴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재미를 자신이 아닌 남들에 알려 줄 생각은 절대 없었다.

아아, 정말이지 기욱은 서진이 여자가 아닌 것을 요즘 들어 아쉬워하고 있었다. 물론, 서진의 친누나인 서윤이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욱이 보기에 서진과 서윤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상대적으로 순종적인 서윤과 달리 남자답지 못하고 하나하나가 예민한 서진은 기욱에게 있어 마르지 않은 샘물과도 같았다. 오늘처럼, 혹은 지난날처럼 정도를 엇나가는 일이 종종 발생하긴 하지만 그런 부분이 서진의 매력이라면 또 매력이었다.

원래 가질 수 없는 것일수록 더욱 가지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만약 서진이 서윤처럼 고분고분한 타입이었다면 어쩌면 기욱은 생각보다 금방 서진에게 질렸을지도 몰랐다.

“으윽… 끄윽… 네….”

“뭘?”

“흐흐으윽… 다. 다요. 그냥 다…….”

서진은 베개에 머리를 대며 고개를 흔들었다. 팔이 빠질 것만 같았다.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고, 커튼 너머로 살짝 보이는 바깥은 해가 뜨고 있는 것 같았다. 기욱은 땀에 젖은 서진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뺨에 입술을 맞췄다.

“이따.”

“…….”

“술 같이 마신 애들 이름이랑 번호, 그리고 뭐 하는 놈들인지 전부 적어서 나한테 보내.”

“그, 그걸 어떻게…… 하윽…! 하, 할게요….”

기욱의 페니스는 여전히 서진의 안에 있었다. 밤샘 섹스로 인해 서진은 더는 뭔가를 할 기운이 없었다. 더 기절하지 않고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완전히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리 서진을 괴롭힐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던 기욱은 서진의 안에서 페니스를 빼냈다. 정액으로 덮인 페니스와 함께 서진의 안에서 기욱의 정액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몇 시간 만에 나가는 걸까? 몸을 뜨겁게 달구며 괴롭히던 것이 사라지자 서진은 다급하게 숨을 골랐다.

페니스는 빠져나갔지만, 언제 또 기욱이 섹스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서진의 등 뒤로 팔을 한 기욱이 셔츠와 함께 서진의 팔을 묶은 벨트를 풀었다. 팔이 묶인 것만 생각하고 있었던 서진은 벨트 위에 셔츠를 덧댔다는 사실조차 지금에서야 눈치를 챘다.

그 때문일까? 뜻밖에 벨트를 꽉 조였음에도 불구하고 서진의 팔에는 희미한 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학습한다는 것이 서진은 소름이 끼쳤다. 기욱은 팔을 잡아당겨 서진을 품에 안았다. 기욱을 밀어낼 수도 있었지만, 당할 만큼 당한 서진이 기욱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기욱은 정액이 묻은 페니스를 대충 휴지로 닦아 내며 품에 안긴 서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기욱의 페니스는 반쯤 서 있었다.

“서윤이랑 해외 나가는 거 알고 있지? 이 주 동안.”

“……네.”

서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갈 데까지 간 관계라고는 하나, 어쩜 사람이 죄책감 하나 없이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욱의 뇌는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기욱의 손가락이 서진의 입안을 살살 헤집었다. 침이 손가락을 적실 때마다 말 잘 듣는 새끼 강아지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흐으… 으….”

“해외 나가 있는 동안.”

“읏….”

“8시간 단위로 뭐 했는지 전부 보고해.”

“무슨 말을…….”

“하루라도, 한 번이라도 빠지면 돌아와서 가만 안 있어. 경고했어.”

서진을 내려다보는 기욱의 시선이 싸늘했다. 기욱이 언제 이렇게 대놓고 경고라는 말을 한 적이 있던가.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었던 서진은 기욱의 협박이 뭘 말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짓을 하고 싶다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사실 기욱이 말을 하는 순간부터 서진에게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대답해.”

“아, 알았어요….”

서진이 입안에 여전히 머무는 기욱의 엄지 끝을 약간 씹으며 대답했다. 기욱은 서진의 머리채를 붙잡고 몸을 아래쪽으로 숙이게 했다.

“윽…!”

예상치 못한 기욱의 행동에 깜짝 놀란 서진이 정신을 차리며 눈을 떴다. 서진의 입술 근처로 약간 부풀어 오른 기욱의 페니스 끝이 닿았다.

“그 정도만 하는 거 아닌…….”

“누가.”

“…….”

“그만한다 그랬어?”

“그게….”

“다시 말해 봐. 강서진, 누가 그만한다고 그랬어?”

기욱의 시선에 서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서진이 고개를 돌리려 하자 기욱의 커다란 손이 다시 서진의 머리를 눌렀다. 반강제적으로 입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페니스를 서진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 *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서윤과 기욱의 결혼식 당일, 서진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하객에 죽을 맛이었다. 사실 그중 팔 할 이상이 신랑 측 하객이었지만, 기욱과 서윤의 직장이 똑같은 것을 고려한다면 누구 하객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이야기기도 했다. 아니면 신랑 측과 신부 측이 특별히 나뉘어 있지 않은 것은 기욱의 배려던가. 아무렴 아침부터 서윤에게 붙어 있는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머, 얘 진짜 이쁘다. 장난 아닌데?”

“이야. 우리 강 선생이 인물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화보네 화보.”

“하하, 왜 그러세요.”

화기애애하게 떠드는 분위기에 서진 또한 가볍게 웃었다. 행복해 보이는 서윤의 모습에 무조건 기분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싫은 것도 아니었다. 사랑. 집착. 그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이따 보자.”

“네. 이따 봬요! 식사 맛있게 하시구요.”

혹시라도 드레스가 흐트러질까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는 서윤을 옆에 있던 서진이 대신해 붙잡았다.

“누나, 조심해.”

“아. 응. 고마워.”

올 사람은 거의 다 온 것 같은 분위기에 서진은 한숨 돌리라며 안쪽 테이블에 대충 올려 뒀던 물을 가져와 서윤에게 내밀었다. 서윤이 립스틱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을 마시는 사이 복도 쪽이 시끄러웠다. 뭐지? 싶어 고개를 든 서진이 깜짝 놀랐다.

“무슨…….”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말을 하기도 전에 들이닥쳤다는 것이 맞았다. 서진이 어머니 쪽 친척들을 뵌 것은 오래전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얼굴들을 쉽게 잊을 수는 없었다. 민정 이모만 해도 그랬다.

정확히 누가 누구인지까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그들이 서진의 기억 속에 있는 친척들이란 것은 분명했다. 중년의 한 여성이 드레스를 입은 서윤을 보더니 허둥지둥 다가왔다. 서윤 또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서윤아, 한참을 찾았잖니. 얘는 어쩜 결혼하면 한다고 연락도 안 하고 그러니? 서운하게. 너 민정 이모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저기 그게…….”

의자에 앉은 서윤이 당황하며 입을 열지 못했다. 서진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규모가 큰 결혼일 때부터 설마설마하는 생각은 했다. 서진과 눈이 맞은 민정 이모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사전에 연락했어야 하는데 미안하다. 알잖니. 우리도 다들 바쁜 거. 아, 얘가 재훈이야. 기억하나 모르겠다. 많이 컸지?”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 하나가 서윤을 보고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재훈이? 하, 기억이고 자시고 그런 자식 놈이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인생이었다. 애당초 관심도 없었고. 분위기를 흐트러트릴 수 없었던 서윤은 진땀을 빼며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서진은 그런 서윤의 손을 뒤쪽으로 꽉 쥐었다. 정신없이 떠드는 여자들을 두고 서진의 앞으로 같이 온 남자들이 다가왔다.

“네가 서진이냐? 많이 컸구나.”

“…….”

서진은 그를 기억했다. 너무 어렸을 적이라 그가 정확히 어머니네 집안과 어떤 관계인지까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친척 모임 때 얼굴을 비치던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진이 소아 병동에 입원했던 날 이제 막 1년 차가 된 정혁에게 담당 교수를 데려오라고 소리를 질렀던 남자였다.

“그래, 올해 졸업한다고? 서윤이 신랑이 의사 쪽에 집안이 좋은 모양이던데. K대는 관심 없나? H대에 아는 의사가 있어 물어보니 차석이라고 하던데.”

“…….”

“어쨌든 말야, 의사란 직업이 다 그런 거거든. 너 지금 사는 오피스텔도 서윤이 남편이 내주고 있다면서? 빚도 좀 있다 들었고. 너희 사정은 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눈치 보여서 살겠어? 그러지 말고 내 밑으로 와라. 강 교수 말야, 그 친구가 사람은 그랬어도 머리는 좋았어. 봐 자식 둘 이렇게 똑똑하잖아.”

“그래서요?”

“허허, 그래서가 아니라. 너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으면 알잖아.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건데? 서윤이가 아니라 너도 마음에 드는 여자 하나쯤은 있…….”

“신경 꺼요.”

“…….”

“씨발, 신경 끄라구요!”

이 상황을 참을 수가 없었던 서진이 언성을 높였다. 깜짝 놀란 서윤이 서진을 바라봤지만, 서진은 그런 서윤을 슬쩍 본 뒤 고개를 들었다.

“자네 지금 뭐라고…….”

“신경, 끄라구요. 누나가 언제 당신들 부른 적 있어요? 뭔데 남의 결혼식에 와서 병원이 어쩌고, 아버지… 아니. 그 인간이 어쩌고 소리를 해요? 그 사람이!! 누나한테…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서진아, 그만해.”

서윤이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서진은 서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화가 풀리지 않았다. 이 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서진은 더 이상 병동에 앉아 있는 무기력한 아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게 진짜…! 사람이 기껏 신경 써서 찾아와 줬더니 말하는 싸가지가…!!”

“남의 결혼식에 와서 깽판 치는데 화가 안 나게 생겼어요?”

“야! 우리가 남이야? 어? 하, 이거 봐라! 민정이네 집 아니면 우리도 안 왔어! 알아?”

“오지 말지 그랬어요!! 차라리 평생 얼굴 안 보고 살 거. 하, 그쪽들요, 누나가 아니라 기욱 형네 집안 보고 온 거잖아요. 그것도 모를 줄 알아요?”

서진은 그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인지 알고 있었다. 한때 집안의 수치로 여겼던, 치부로 여기며 입을 다물고 있던 자식의 딸이 하필이면 의학계에서 손꼽히는 카르텔 집안의 장남과 결혼한다니 말도 안 되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서윤의, 서진의 친척이라 피라 불리는 자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서진은 적어도 자신은, 서윤을 그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서윤과 친척들의 언성이 극에 달할 무렵 다른 하객을 통해 소란을 접한 기욱이 뛰어왔다.

“지금.”

“…….”

“뭐 하시는 겁니까!”

난장판이었다. 차마 머리를 만지지 못한 기욱이 입술을 깨물며 서윤에게 다가왔다. 기욱을 본 서윤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기욱은 급하게 서윤을 품에 안았다.

“오빠… 흐윽….”

“울지 마. 강서윤.”

“그게….”

“화장 지워지잖아.”

기욱은 이 이상 결혼식이 엉망으로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객 문제로 화를 낼 이유가 없는 서진이 싸우고 있다고 한다면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서진의 아킬레스건은 서윤임과 동시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친척들이었다.

기욱이 서진을 가지는 데 필요한 건 서윤이지, 서윤의 친척들이 아니었다. 서진이 친척들을 싫어한다면 기욱 또한 그들을 좋아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기욱은 제 사람 외에는 관계에 대해 매정한 편이었다. 기욱은 안쪽에 있는 젊은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향해 손을 까닥였다. 상황을 본 그녀가 서윤을 데리고 화장을 고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강서진.”

“왜요.”

“하아, 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와. 서윤인 내가 볼 테니까.”

“싫……. 알았어요.”

기욱의 눈치를 본 서진이 신부대기실을 나갔다. 사실 서진에게 담배 같은 건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기욱과 서윤의 친척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기욱이 결코 좋은 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쌤통이다.

신부대기실을 나온 서진은 그 생각뿐이었다. 마침 넓은 홀 안쪽에서 시헌이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든 시헌과 서진의 눈이 맞았다. 휴대폰을 집어넣고, 벽에서 몸을 뗀 시헌이 담배 케이스를 꺼내며 안쪽을 손가락질했다. 서진은 거침없이 시헌이 나간 곳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시헌이 먼저 피운 담배 연기가 올라왔다. 서진은 연기를 손으로 걷어 내며 시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후, 하고 연기를 내뱉은 시헌이 라이터가 담긴 담배 케이스를 서진에게 내밀었다. 서진은 시헌이 준 담배를 입에 물고 빠르게 불을 붙였다. 담배를 피우니 좀 살 것 같았다. 먼저 담배를 끈 시헌은 아직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서진을 흘끗 바라봤다.

“괜찮냐?”

“좀 짜증 났었는데, 그냥 그래. 하, 잘 모르겠다. 쓰레기 같은 자식들.”

서진은 짧아진 담배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구둣발로 밟아 껐다. 마음 같아서는 담배를 한 대 더 피우고 싶었지만, 담배 냄새가 밸까 더 그러지는 못하고 있었다.

말이 없는 시헌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때 도대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했던 적도 있긴 했지만, 결국 어딜 보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시헌도 마찬가지였다. 인생이란 망망대해에 홀로 버려진 낡은 돛단배와도 같았다. 고층 빌딩이 가득한 강남 한복판에서는 올려다볼 하늘도 없었다.

“사실은 말야.”

“…어?”

“아주 잠깐. 하, 진짜 잠깐이지만.”

친척들과의 싸움으로 열을 내던 중 기욱을 본 순간. 서진은 마음 한구석으로 안심했다. 그리고 자신을 건든 친척들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정말 짧은 순간이지만, 박기욱이라는 사람에게 의지했던 것이었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기욱이 좋아할 리가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서진이 기욱에게 거스르지 않는 한 강서진이라는 존재는 박기욱에게 속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 펜션에서 시헌이 기욱에게 반항을 하지 못한 이유를 서진은 조금 알 것 같았다.

기욱의 사람으로 있으면서 받아 왔던 암묵적인 혜택들은 결코 시헌의 인생에, 서진의 인생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진은 그런 감정을, 마음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친척들과 대화가 끝난 기욱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도 말을 하지 못했다. 문을 살짝 열고 얼굴을 내민 기욱이 두 사람을 보더니 짧게 말했다.

“들어와.”

“알았어요.”

서진의 대답에 시헌 또한 옷에 묻은 먼지를 대충 털며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알아.”

“…….”

“말 안 해도.”

시헌은 서진을 지나쳐 먼저 결혼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박기욱은 제 형이지만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서진이 기욱을 거스를 수 없듯, 시헌 또한 기욱을 거스를 수 없었다.

* * *

잠시 친척들 문제로 소동이 있긴 했지만, 결혼식은 별다른 무리 없이 끝이 났다. 사실 식이 시작된 다음부터는 어떻게 진행됐는지도 모를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전날 미리 인사를 한 기욱의 가족들은 오지 않았다. 사실 기욱도 딱히 기대는 하지 않았던 터라 별 상관은 없었다. 슬슬 들어가 봐야 한다는 기욱에 서윤이 서진에게 다가갔다.

“서진아 연락할게.”

“응. 누나 조심해서 갔다 와.”

서진이 서윤에게 포옹을 하며 인사를 했다. 서윤과의 포옹을 마친 서진은 기욱을 노려봤다. 서윤과 기욱의 연수와 이번 신혼여행은 상황이 틀렸다. 기욱과 서윤이 동시에 나가는 일은 처음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기욱은 잔뜩 날이 선 서진에 한숨을 쉬었다.

“서윤아.”

“응?”

“서진이랑 잠깐 얘기 좀 할게. 금방 해.”

“어머, 둘이 무슨 얘길 하려고?”

“남자들끼리 할 말이 있는 거지.”

“서진인 내 동생인데?”

“이젠 내 동생이기도 하잖아.”

기욱이 캐리어가 있는 방향을 손가락질했다. 종종걸음으로 간 서윤이 금방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서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졌을 무렵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입을 열었다.

“연락 잘해.”

“누나한테 잘해요.”

“…제길.”

“윽.”

기욱과 서진이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빨리 오라는 서윤의 재촉에 서진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누나한테 잘해요.”

“그래.”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 기욱은 서진의 등을 토닥이며 서윤에게 뛰어갔다. 서윤에게 가는 내내 기욱은 도리어 서진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마지막까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서윤과 기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본 서진은 공항에서 발걸음을 뗐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택시를 탈까. 서진은 지갑에 있는 기욱의 카드가 떠올랐다. 택시비 좀 나와도 뭐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서진이 택시를 타려고 마음을 먹기 무섭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전화였다.

― 어디야?

시헌의 목소리였다. 비행기 시간표를 확인한 서진은 전화를 받으며 곧장 몸을 돌렸다. 시헌과 통화를 하는 서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 방금 막 들어갔어.

― B4층이야. 내려와서 전화해.

― 응.

서진은 전화를 끊으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시헌이 문자로 알려 준 곳으로 가자 마침 기둥 근처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시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진을 발견한 시헌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서진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시헌의 차에 탔다. 보조석에서 안전벨트를 맨 서진은 의자를 약간 뒤로 젖혔다. 사실 택시를 고민한 것도, 이래저래 지쳤기 때문이었다.

“담요 줄까?”

“있으면.”

서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헌이 뒷좌석에 있던 담요를 앞으로 내던졌다. 잘 접힌 파란색 병원 담요가 푹 하고 서진의 배 위로 올라왔다. 좀 펴서 던져 줄 것이지. 아무렴 상관없나. 담요를 받은 김에 아예 눕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서진은 의자를 끝까지 젖힌 뒤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담요 너머로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라면 왠지 올 것 같았어.”

“미안.”

“됐어. 새삼스럽게.”

그동안 지쳤던 걸까? 서진은 담요를 덮기 무섭게 잠이 들었다.

* * *

반지하방의 창문 너머로 햇빛이 들어왔다.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골목의 자동차 소리가 간신히 섞여 들려왔다. 며칠 전 H대 의대 합격 통보를 받은 서진은 며칠 동안 죽은 사람처럼 잠만 잤다. 합격은 거의 확정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고 면접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동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를 받은 듯싶었다. 짹짹거리는 참새 소리에 몇 시간이나 잤는지 모를 서진이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한참 만에 눈을 떴다.

“…….”

두꺼운 이불을 무릎까지 덮은 채 멍하니 앉아 눈을 비빈 서진이 고개를 들어 창가를 바라봤다. 분명 어두워지기 전에 잠이 든 것 같았는데, 다시 아침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진은 하품을 했고, 졸렸다.

거의 16시간 이상을 자다 일어난 서진은 긴 꿈을 꾼 기분이 들었다.

현실감이 너무 넘친 꿈 같았는데 어째서인지 눈을 뜬 순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요즘 들어 그런 일이 잦았다. 이게 꿈인지, 아니면 꿈이 현실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었다.

“일어났어?”

집 안에서 들릴 이유가 없는 남자의 목소리에 서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거실에 있던 기욱이 그런 서진을 보더니 성큼성큼 큰방으로 들어왔다. 기욱이 있는 줄 알았으면 일어나지 말 걸 하고 후회가 들었다. 너무 오래 자서 목이 잠긴 서진이 한참 만에 기욱의 뒤에 있는 작은 거실을 흘끗거리며 말했다.

“결혼식은 어떻게 됐어요?”

“……뭐?”

기욱은 팔짱을 낀 채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은 아직도 꿈에서 덜 깼는지 허공을 보며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어, 그……. 그러게요.”

서진은 그제야 약간 정신을 차렸다. 기욱의 손가락에는 꿈에서 봤던―그게 꿈인지 아닌지조차 이젠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굵은 다이아 반지 대신 얇은 은색 커플링이 끼워져 있었다. 그 꿈의 내용도 잠시 기억을 하는가 싶더니, 마치 누군가 지우개로 지우듯 빠르게 서진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막 일어난 20살의 서진은 오후의 나른함에 하품을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누나는요?”

“잠깐 나갔어. 너, 지금 몇 시라고 생각하는 거야?”

한숨 섞인 기욱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린 서진이 눈을 깜박였다. 몇 시라니. 아침이 아니었단 말인가? 정말 모른다는 서진의 표정에 기욱이 소매를 걷어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한 시야.”

“아, 저 그렇게 많이 잤어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병원에 있었던 기욱은 서윤을 데리고 이제 막 집에 들어왔다. 서진이 몇 시에 잤는지, 언제부터 잤는지 기욱이 알 리가 없었다. 말을 꺼낸 서진 또한 괜한 사실을 물어본 것 같아 후회가 들었다. 큰방 가운데서 이불을 펼치고 앉아 있는 서진은 거실로 나가려는 기욱의 옷자락을 살짝 붙잡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거라 생각한 기욱이 몸을 숙여 서진을 바라봤다.

“지, 지난번에요. 그러니까 여행 갔을 때. 저 했어요?”

21살 서진의 기억 속에 그날은 기욱과 첫 섹스를 한 날이었다. 지방에 내려가서, 기욱과 술을 마셨고, 그 뒤로는 기억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서윤이 내려오지 않는 것에 서운해 술을 많이 마신 건 사실이지만 서진은 기욱과 정말 했는지 안 했는지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가르쳐 주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 옷을 붙잡는 손을 살포시 아래로 내려놓은 기욱이 서진이 앉아 있는 바닥으로 무릎을 반쯤 꿇었다.

“으읍…!! 미쳤…!”

양손으로 서진의 턱을 들어 올린 기욱이 거침없이 서진의 입을 막았다. 그깟 섹스, 할 수도 있는 거고 안 할 수도 있는 건데 말이다. 순간적으로 어찌할 줄을 몰라 당황하는 서진이 기욱은 제법 귀여웠다. 서윤이 올 거라는 생각에 식은땀이 흐른 서진이 다급하게 기욱을 밀어내며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미, 미쳤어요?”

“서윤이 금방 안 와.”

서진에게 밀려난 기욱이 현관문을 보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서진은 서윤이 어딜 갔는지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다시 서진에게 다가간 기욱은 자신의 이마를 서진에게 맞춘 뒤 눈을 살짝 아래로 깔았다.

그날, 서진은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서진의 행동은 단순히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욱은 서진이 모르는 사람이 주는 약이 담긴 물을 받아 마셨다는 것도 사실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다. 물론,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서진에게 설명해 줄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네가 먼저 한 거야.”

“진짜… 당신이랑 그…….”

서진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21살, 성인이 된 지 1년이 됐지만, 아직도 서진은 섹스라는 단어가 얼굴을 붉힐 만큼 어색했다. 제 주량도 모르고 술을 마신 그날은 좀 이상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정말 술 때문인가 싶은 기분도 들었으나, 서진은 기욱이 그 일에 대한 진상을 전부 알려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밖에 나갔다던 서윤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구두를 벗은 서윤이 서진이 자고 있었던 큰방으로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어머, 서진아! 일어났어?”

서진은 멍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입술 근처가 번지르르하다는 것을 눈치챈 서진이 빠르게 입술을 닦았다. 바닥에서 일어난 기욱이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진은 기욱의 손을 치워 냈다. 치워진 손 너머로 자신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기욱이 서진의 몸을 덮고 있었던 얇은 이불을 멋대로 걷어 냈다.

“뭐 하는 짓…!”

서진이 이불을 달라며 손을 뻗었으나 기욱이 이불을 개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기욱은 장롱 문을 열고 서진이 덮고 있던 두꺼운 이불을 던져 넣었다. 퍽 소리가 나며 커다란 이불이 장롱 안에 처박혔다.

“일어나, 점심 먹으러 가자.”

“오빠도 참. 그렇게 멋대로 이불을 개 버리면 어떻게 해?”

방으로 들어온 서윤이 기욱에게 핀잔했다. 기욱은 그런 서윤의 말을 듣고도 가볍게 어깨만 들썩였다.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찬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팔짱을 끼는 서윤을 살짝 밀어낸 기욱은 반지하방의 커다란 창문을 확 열어 버렸다. 창문을 타고 찬 바람이 솔솔 들어와 서진의 얇은 셔츠 안을 간지럽혔다. 재채기할 것 같았다.

“환기 좀 시켜. 답답하게.”

“못 살아 진짜……. 그냥 자게 두지. 왜 그러는 거야?”

“점심은 먹어야지.”

그렇게 말한 기욱은 은근슬쩍 서윤의 허리를 안으며 서진을 향해 턱 끝을 거실 쪽으로 까닥였다. 그 행동이 씻고 오라는 암묵적인 뜻이라는 것을 서진이 모를 리 없었다. 기욱은 온갖 방법을 써서 서진을 밖으로 데리고 나갈 것이 틀림없었다. 이미 기욱 때문에 잠이 다 깨 버린 서진은 덮을 이불도 없이 찬 바람을 맞으며 눕고 싶진 않았다.

“하아, 씻고 올게요.”

서진이 씻기 위해 거실로 나가기 무섭게 기욱은 바닥에 있던 이불 또한 빠르게 치워 장롱에 넣어 버렸다. 서진은 적당히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수용 한계를 훨씬 넘은 낡은 장롱 문을 열자 여름옷이며 겨울옷들이 정신없이 구겨 넣어져 있었다.

“이거 입어.”

“아, 놀랐잖아요!”

기욱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담배를 피우고 집 안으로 들어온 기욱이 작은 방으로 들어가는 서진을 뒤늦게 따라 들어왔다. 기욱은 전에는 보지 못했던 커다란 쇼핑백을 서진의 앞으로 툭, 하고 던졌다. 흰색 쇼핑백 틈 사이로 잘 포장된 옷가지들이 보였다. 서진은 기욱이 가져온 쇼핑백을 들어 벽 한쪽으로 대충 밀었다.

“입으라니까.”

“됐어요.”

누가 이런 거 사 달랐나. 서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장롱 안에 있는 옷을 뒤졌다. 하아, 숨을 내쉬는 기욱의 입김이 차가웠다. 기욱이 환기를 시킨다는 이유로 집에 있는 문이란 문은 전부 열어 둔 탓에 집 안이 추웠다.

“서윤이가 고른 거야.”

“그런 거짓말에 속을 줄 알아요?”

“진짜라고. 내가 산 거 아냐.”

서진과 기욱의 보이지 않는 눈싸움이 계속됐다. 서진은 기욱의 거짓말을 간파할 방법은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왠지 그 말이 거짓말 같지 않았다. 기욱은 쇼핑백 안에 있는 티셔츠와 바지를 꺼내 서진에게 내던졌다. 품 안에 있는 포장된 옷을 본 서진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포장을 뜯었다. 윗옷을 반쯤 벗은 서진은 기욱의 시선에 신경이 쓰였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나가요.”

“알았어.”

서진과 싸우기 싫었던 기욱은 어쩔 수 없이 거실로 나왔다. 쾅, 하고 문을 닫은 서진은 기욱이 골라 준 옷 대신 다른 새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뭐든 기욱이 고른 것보다야 나을 것이었다. 옷을 갈아입은 서진이 밖으로 나왔다. 서진의 차림을 본 기욱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하여튼 말이라고는 더럽게 안 들었다. 21살의 강서진은 유독 더 까칠한 구석이 있었다.

기욱의 뒷좌석에 탄 서진은 또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기욱의 차는 히터가 잘돼 집보다 훨씬 따듯했으며 서윤이 수능을 잘 보라며 사 준 롱코트는 푹신푹신한 게 모자를 눌러쓰고 있으면 이불보다 훨씬 더 기분이 좋았다. 뒤늦게 긴장이 풀린 건지 할 일 없는 서진은 요즘 하루하루가 피곤했다. 털이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지퍼를 올린 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자는 서진의 모습은 검은 눈사람 같았다. 아니, 겨울잠을 자는 작은 동물이라고 해도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잘도 자네.”

“그렇지? 요즘 맨날 저렇게 자더라고. 어쨌든 뭐라도 먹여야지.”

“그래.”

기욱은 서진이 재수를 하면서 못 잔 잠을 자는 거라고 적당히 생각했다. 그렇다고 서진의 잠에 별다른 의학적 문제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서진은 두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때도 선잠을 자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 일식당에 도착한 기욱은 주차장에 차를 댔다. 차 속도가 느려진 것을 눈치챈 서진 또한 뒤늦게 정신을 차려 창밖으로 여기가 어딘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결국, 끝내 어딘지 알지 못한 서진이 운전석 쪽에 앉아 있는 서윤에게 말을 걸었다.

“누나, 여기 어디야?”

“일식당.”

“아.”

어딘가의 식당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점심을 먹으러 이렇게 거창한 곳에 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서진은 약간 당황했다. 차에서 내린 뒤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말이 점심이지,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라 가게 안은 한가했다.

“어서 오세요.”

“예약했는데요. 박기욱이요.”

서윤이 기욱의 이름을 대며 여자 직원에게 설명했다. 세 사람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일식당은 처음이었던 서진은 모든 게 낯설었다. 그에 비해 서윤은 기욱과 몇 번인가 온 모양인지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굉장히 자연스러운 모양이었다. 기욱은 앞서가는 서윤을 두고 뒤처지는 서진의 등을 떠밀며 방향을 바로잡아 줬다. 그쪽이 아니라는 뜻에 서진이 깜짝 놀라며 방향을 틀었다.

“서윤이가 고른 거야. 너랑 같이 오고 싶다고 했어.”

“누나 좀 그만 팔아요.”

“사람 말 좀 믿어.”

당연한 의심이라 해도 기욱은 이쯤 되니 억울했다. 어린애를 상대로 싸울 수도 없고 말이다. 잘 알지 못하는 서진은 서윤과 기욱이 시키는 대로 주문을 했다. 말이 주문이지 직원이 오고 워낙 순식간에 이뤄진 일이라 서진은 메뉴판을 제대로 볼 틈도 없었다. 단지 슬쩍 훔쳐본 메뉴판에서 보이는 숫자의 수가 꽤 높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과하게 무리를 하는 건 아닌가 싶은 서진의 기색을 눈치챈 기욱이 메뉴판을 빠르게 덮어 직원에게 건넨 뒤 한마디 했다.

“수능 만점 맞았잖아. 사치 한번 한다고 생각해.”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지. 서진은 기욱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물을 마시고 있던 서진의 목 근처로 물이 흘렀다. 깜짝 놀란 서윤이 몸을 앞으로 당겨 냅킨으로 서진이 흘린 물을 닦아 줬다.

“누나, 불편하게. 내가 할 수 있어.”

“얘는 참. 칠칠찮게 왜 그래.”

“하아, 미안. 잠이 덜 깼나 봐.”

기욱의 시선이 묘하게 불편한 서진은 대충 물기를 닦으며 남은 물을 전부 마셨다. 늦은 점심은 특별할 건 없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비싼 게 틀리긴 했는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은 서진을 가운데 두고 저들끼리 대화를 했다. 그 모습이 마치 진짜 연인 같았다.

서진도 기욱의 진심을 아직 잘 모르겠다. 기욱이 서윤에게 하는 행동은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나오기 힘든 것들이 많았다. 단순 연기라고 한다면 굳이 서진이 모르는 행동을 하면서까지 서윤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녔다. 철저한 연기자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감정을 거짓으로 속이는 데 탁월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그럼에도 눈앞에 보이는 서윤의 행복한 모습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기욱이 서윤을 좋아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 것과 동시에 기욱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이유 또한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박기욱이라는 사람은 무슨 생각일까. 만약 누군가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서진은 가장 먼저 기욱의 생각을 파악하고 싶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리는 없지만 말이다. 식사하며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한 서진이 제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는 일이라며 입가를 올렸다.

“내일 부산 갈 거야.”

뜬금없이 나오는 말에 디저트를 먹던 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방 안으로 침묵이 흘렀다. 분위기가 서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진은 수저를 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요?”

“하아, 아까 계속 얘기했잖아.”

“아. 음…….”

서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중간부터 전혀 듣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병원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 말이다. 나름 영어 공부를 잘한 서진이지만 그것과 이건 엄연히 달랐고, 설령 알아듣는다 해도 의대 입학을 앞둔 서진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을 할 리가 없었다. 어쨌든 어느 순간부터 부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을 눈치챈 서진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

“누나도 가?”

“아니, 누난 그때 일 있어서. 기욱 오빠랑 둘이 가서 놀다 와.”

“그럼 싫어.”

수저를 완전히 내려놓은 서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그래도 지난번 여행에서 마지막 기억이 좋지 않았던 서진은 기욱과 더 이상 서울 밖을 벗어나는 것은 절대 사양이었다. 특이 여행이라면 서윤이 같이 가도 생각해 볼까 말까 하는 상황에서 단둘이 부산에 내려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진은 아직도 술을 마시고 기욱과 섹스를 했던 날의 기억이 명확하지 않았다. 했다고 추측만 할 뿐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불안함이 있었다.

“서진아, 왜 그래. 면접도 끝났는데 편하게 놀다 와.”

“그냥 집에 있을래.”

“너 집에서 맨날 잠밖에 안 자잖아.”

“아, 싫어.”

“강서진. 오빠도 시간 남아돌아서 너랑 가자고 그러는 거 아닌 거 알면서, 누나 생각해서라도 갔다 와. 어?”

서윤이 계속해서 서진을 달랬다. 이쯤 되면 서진은 자신이 없을 때 서윤에게 무슨 말을 했길래 서윤이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서윤이 서진을 계속해서 설득하는 와중에도 기욱은 디저트를 먹을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일부러 서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서진은 불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기욱은 서진이 서윤의 부탁을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독하리만큼 잘 알고 있었다. 따듯한 물을 홀짝인 서진은 입술을 깨물며 마지못해 말했다.

“하아, 알았어.”

서진의 대답에 디저트를 먹고 있는 기욱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마, 계속 거절을 했다면 기욱이 나섰을지도 몰랐다. 서진은 기욱이 끼어들어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걸 보고 싶진 않았다. 그저 눈빛으로 만족하냐는 듯 마음 한구석으로 기욱을 노려보며 불만을 표시할 뿐이었다. 다 먹은 디저트 숟가락을 내려놓는 기욱이 그 의미를 알아들었을지는 서진도 알지 못했다.

* * *

새벽이었다. 이불을 김밥처럼 말고 보일러를 잔뜩 튼 서진은 바닥에 몸이 달라붙다시피 하며 잠을 자고 있었다. 덥긴 했지만, 추운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서진은 이불 속에서 찐 만두가 되어 가고 있지만 나름 만족하며 잠을 자고 있었다.

잘 자고 있던 서진의 잠을 방해한 것은 난데없이 켜진 방의 불빛이었다. 서진은 안 그래도 몸을 돌돌 만 이불을 더욱 얼굴까지 덮으며 눈을 감았다. 목소리는 잠이 덜 깨 반쯤 잠긴 상태였다.

“…누… 야? 나이트…… 으으브….”

잠이 덜 깬 서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렸다. 이게 말인지 잠꼬대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기욱은 이불을 돌돌 만 서진을 보며 혀를 내찼다. 저렇게 자는 건 도대체 무슨 버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들고 가도 모를 것 같을 정도로 온몸을 이불로 돌돌 만 서진의 기술에 기욱은 혀를 내둘렀다. 다시 잠에 빠진 서진을 본 기욱은 이불 끝을 잡아 확 당겼다. 이불이 풀리면서 서진의 몸이 바닥 위로 한 바퀴 굴렀다.

“으걱…!”

이상한 신음을 낸 서진은 코를 이불 위에 퍽 하고 박았다.

“강서진, 일어나.”

“으어… 누나… 잘… 그야….”

“일어나라고.”

“…….”

기욱이 서진의 몸을 완전히 돌리며 시야를 가리려는 팔을 치웠다. 서진은 눈을 찌푸리며 잠에서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욱이 아는 서진은 이렇게 잠이 많지 않았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 그렇게 따지면 한참 잘 자고 있을 새벽 2시에 다짜고짜 집에 쳐들어와 불을 켠 기욱도 잘못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기욱은 제 품에 안긴 채로도 정신을 못 차리는 서진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말린 오징어처럼 축 늘어진 서진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입술을 덮었다.

“으으브븝….”

입안과 혀를 순서대로 감아올리는 기욱의 키스에 서진은 시간이 지날수록 숨이 막혀 왔다.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기욱의 등을 두드린 서진이 눈을 번쩍 떴다.

“으읍…!”

“후….”

“미쳐…!!”

정신이 든 서진이 확, 하고 기욱의 몸을 밀어냈다. 정말로 잠이 달아나 버린 서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른 채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기욱의 발밑에 있는 이불을 목 위로 덮은 서진이 이불 위쪽에 있는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2시 10분. 창밖은 캄캄했으며 고요할 정도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입가에 묻은 타액을 손등으로 닦아 낸 서진이 이불 위에 주저앉은 채 기욱을 노려봤다. 기욱은 서진이 덮고 있던 이불을 개 장롱 안에 던져 넣었다. 왜 기욱은 매번 이렇게 자신의 잠을 방해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래선 지난번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시간이 새벽 2시라는 점만 빼면 말이다.

“대충 씻고 옷 갈아입어.”

“…….”

“하, 이 시간에. 미쳤어요?”

서진이 기가 막힌다며 기욱이 장롱 안에 집어넣은 이불을 다시 끄집어냈다. 다른 시간에 왔다고 해도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판국에 새벽 2시에 옷을 갈아입으라니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었다. 서진의 짜증에도 불구하고 기욱은 눈 하나 끔벅하지 않았다. 몸을 숙인 기욱이 서진이 끄집어낸 이불을 다시 집어넣으려 했다. 서진 또한, 지지 않고 이불을 붙잡았다. 이불을 사이에 두고 묘한 실랑이가 이어졌다. 서진의 고집에 못 이긴 기욱이 한숨을 쉬었다.

“아직 못 들었어?”

또다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러니까 뭐가! 서진은 기욱과 대화를 할 때면 짜증이 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기욱은 앞부분을 자른 뒤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해 듣는 사람의 속을 뒤집게 만드는 버릇이 있었다. 아니, 저건 습관이 아니다. 자신이 생략한 말이 무엇인지쯤은 스스로 생각하라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참으로 얄미운 행동이었다. 그런 서진의 머릿속으로 기욱과 부산에 내려가기로 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서윤과 했던 대화 중 하나가 떠올랐다,

‘새벽에 기욱 오빠가 갈 거야.’

언제 저런 말을 했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하게 들은 기억이 있는 말이었다. 당시 서진은 그런 서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설마 진짜 새벽에 쳐들어오겠어, 하고 생각했던 것도 한몫했다. 어쨌든 기욱의 물음이 없는 말은 아니라 판단한 서진은 오히려 더 뻔뻔하게 기욱을 노려봤다.

“들었는데요.”

“그럼 씻고 나와.”

“와. 진짜로 부산 가요?”

기욱도 만만하진 않았다. 기욱에 의해 팔이 잡혀 반강제로 일어난 서진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기욱을 바라봤다. 종일 일을 하다 새벽에서야 간신히 병원을 나올 수 있었던 기욱은 피곤은 아니더라도 몸이 꽤 지친 상태였다. 서진을 떠민 기욱이 소매를 걷어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부터 가야 아침에 도착해. 씻고, 차 안에서 자.”

“안 가면……. 됐어요.”

서진 또한 새벽에 기욱과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어질 서윤의 잔소리도 귀찮았다. 정말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쩌다 보니 그날 세 사람이 밥을 먹었을 때와 똑같은 옷에 똑같은 잠바, 신발을 신게 됐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현관 바로 위쪽에 있는 선반에 놓인 열쇠를 챙겨 든 서진이 불을 끈 뒤 밖으로 나왔다.

새벽 공기가 무척 찼던 서진은 잠바의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시동을 걸어 둔 차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던 기욱이 서진을 보더니 담배를 껐다. 얼마 피우지도 않은 것 같은데, 서진이 피우고 들어오라고 하기도 전에 기욱이 담배를 끄는 속도가 더 빨랐다. 뒷좌석에 타기 위해 차 문을 열려 하는 순간 기욱이 먼저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하아.”

서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마지못해 조수석에 앉았다. 잠시 뒤 운전석 쪽으로 들어온 기욱은 서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왜, 왜요?”

“가만히 있어.”

혹시 기욱이 무슨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서진은 두툼한 소매로 입술 근처를 가렸다. 기욱은 그런 서진을 가볍게 비웃으며 좌석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서진의 몸이 뒤쪽으로 확 하고 눕혀졌다.

“잠바 덮고 한숨 자.”

차 시동을 끄지 않았기 때문에 차 안은 집보다 훨씬 따듯했다. 서진은 잠바를 벗어 덮었다. 습관처럼 잠바를 뒤집어써 얼굴을 집어넣은 서진은 기욱의 차가 출발하기 무섭게 잠이 들었다.

새벽 무렵 서진은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히터가 꺼져 있는 차 안은 약간 스산한 공기가 맴돌았다. 서진은 잠바 사이로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머리 위 창문에서 새벽 특유의 이슬 향이 났다. 어둠과 밤이 공존하는 이른 새벽, 기욱의 차에서 잠이 든 것도 모르고 자고 있었던 서진은 롱코트를 몸에 두른 채 조수석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딘가의 휴게소.

운전석에 있어야 할 기욱은 없었다. 서진은 기욱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꺼냈다. 동시에 철컥, 하고 운전석 문이 열렸다. 선팅이 된 창문 너머 기욱이 문을 열고 운전석으로 들어왔다. 훅, 하고 들어오는 찬 바람과 함께 진한 담배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기욱의 몸에서 나는 담배 향은 한동안 차 안을 맴돌았다. 기욱은 멀뚱히 앉아 자신을 보고 있는 서진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휴게소 안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의 커피 컵이었다. 기욱은 뚜껑을 연 채로 딱 봐도 진한 아메리카노를 홀짝이고 있었다. 뜨겁지도 않은가 싶으면서도, 자신이 자는 사이 밤새 운전을 했으니 커피 한두 잔쯤은 당연하겠구나 하며 납득이 갔다. 서진은 기욱이 마시라는 듯 내민 커피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기욱은 서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멋대로 대답했다.

“커피 아냐.”

박기욱은 참으로 이상했다. 커피가 싫다는 말은 한 번도 안 했는데 말이다. 서진은 조금만 주위를 살펴보면 본인이 알기 쉽다는 생각을 못 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렴 그런 서진의 반응이 재미있는 기욱은 서진에게 그런 사실을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말해 준다 한들 서진의 자존심에 인정하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커피가 아니라는 말에 서진은 기욱이 내민 컵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따듯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커피 향 대신 진한 밀크티의 향기가 올라왔다. 안전벨트를 매고 슬슬 차를 출발시킨 기욱이 밀크티를 흘리지 않게 홀짝이는 서진을 배려하듯 속도를 낮췄다. 밤새 밟은 탓에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 여유가 있었고, 새벽의 고속도로는 한가했다.

한가하다고 해야 할지? 마치 고속도를 전세 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고속도로 끝자락에 다 와 갈 무렵 기욱은 갓길에 차를 댔다. 자세히 보니 일부러 차를 대라고 만들어 놓은 공간이었다. 휴대폰 거치대에 있는 휴대폰으로 30분 정도 알람을 맞춰 놓은 기욱은 운전석의 의자를 뒤로 눕혔다. 한숨 자고 갈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럴 거면 커피는 왜 마신 건가? 서진은 기욱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시동은 껐지만, 차 안에 히터 온기가 가득해 춥지는 않았다. 찬 공기가 들어오자 서진은 본능적으로 롱코트로 몸을 돌돌 만 뒤 코트 안으로 숨어버렸다. 밀크티는 다 마신 데다 잠은 오지 않았다. 그저 코트 안에 숨어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을 뿐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욱의 손이 코트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머리를 쓰다듬는 버릇. 도대체 어디서 나온 버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서진은 기욱이 자신의 머리를 만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싫다고 말하기엔 머리를 쓰다듬으며 목을 꾹꾹 누르는 커다란 손이 묘하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싫은데, 막상 당하고 나면 무조건 싫은 것도 아니었다. 모순이었다.

나름 자칭 성인이라 자부하는 서진이 그 정도 사실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어른이라는 건 20살, 21살이 된다고 해서 한 번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코트 안에서 서진이 기욱의 손을 쳐 내자 갈 곳을 잃은 기욱의 손이 서진의 가슴 위쪽으로 툭 떨어졌다. 확 쫓아내 버리고 싶은데.

“뭐 하는……!!”

서진이 기욱의 손을 밀어내려 하자 기욱의 손은 기다렸다는 듯 그런 서진의 손을 낚아채 붙잡았다. 자신은 제 손을 붙잡는 기욱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당황하는 서진 앞으로 훅, 하고 롱코트가 걷히며 기욱이 서진의 위로 올라왔다. 서진은 여전히 제 손을 붙잡고 있는 기욱의 손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꼼지락거렸다.

이래서 기욱과 가기 싫었던 것이었다. 기욱과 단둘이 있으면, 무슨 일을 당하게 될까 무서웠다. 어느 방면에서는 어린 시절 자신이 자초한 일이기도 했지만, 당시 중학교 3학년밖에 되지 않았던 서진이 돈을 받는다는 행위가 어떤 사실을 의미하는지 알고 했을 리가 없었다. 그 돈이라는 것도 심리적 압박으로 받았다는 것을 기욱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한들 기욱은 눈 하나 끔벅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알았다.

기욱의 커다란 손은 가느다란 서진의 목을 감기엔 충분했다. 기욱의 손이 목 근처를 지나갈 때면 서진은 소름이 돋았다. 그럴 린 없지만, 박기욱이 언젠가 정말로 자신의 목을 조를 것 같다는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 서진의 이번 불안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키스를 할 것처럼 가까이 다가오던 기욱의 몸이 서진의 몸 앞으로 푹, 하고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서진이 덮고 있는 코트 위로 엎어졌다.

“뭐야…….”

잠꼬대? 아니면 정신을 잃을 정도로 피곤했나? 아무렴 갑자기 잠이 든 기욱을 깨울 필요는 없었다. 안내판을 보니 부산은 거의 다 온 모양이었다. 밤새 일을 하고, 서진이 잠이 든 사이 계속해서 운전한 기욱이 졸리지 않을 리는 없었다.

가끔 인간이 아닌 건가 싶을 생각을 할 때도 종종 있지만, 그 역시 사람은 사람이었다. 기욱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 올 방법이 없었던 서진은 제 위에서 잠이 들어 있는 기욱을 무시하고 자동차의 천장을 보며 넋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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