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0 교통사고
“정말이지. 거기다 대고 유리에 주먹질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침에 있었던 일은 순식간에 병원 내부로 빠르게 소문이 퍼졌다. 아마 온종일 그 얘기를 하지 않은 의사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사고 건은 병원 내 화재 중 하나였다. 교통사고인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칼에 찔린 사람이 운전해서 오던 중 기욱의 차와 박은 거라더라. 거기다 119를 기다리기 싫었던 기욱이 주먹으로 차 유리를 깼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기욱은 이마에 붙은 거즈를 만지작거리며 손목을 털었다.
“주먹으로 깬 거 아니야.”
“그럼 뭘로 깨?”
“하아, 스피커 스피커.”
“스피커?”
“차 안에 블루투스 스피커 조그마난 거 있잖아.”
최근에 나오는 차들은 대부분 방탄유리인 터라 영화처럼 주먹질 몇 번 한다고 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운전석 유리에 금이 많이 가 있었던 데다 마침 무기로 쓸 만한 스피커가 있어 담요와 함께 둘러 창문을 깬 것이 전부였다. 탁, 하고 서윤이 기욱의 이마로 손가락을 튕겼다.
“걱정하는 사람 생각도 좀 하라고. OR 올라온다고 보고받고 한참 동안 연락도 안 돼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한 선배가 대신 OP 들어갔잖아.”
“OP의 문제가 아니라 오빠 얘기하는 거잖아! 병원 앞에서 TA 난 사람이 오빠라고 했을 때 얼마나 놀랐다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서윤의 표정에 기욱은 잠시 황당한 얼굴로 서윤을 바라봤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뭐라 해야 할까? 잔소리하는 서윤의 모습에 순간 기욱의 머릿속으로 서진이 지나갔다. 자신이 교통사고가 나면 서진도 이렇게 잔소리를 하려나? 하긴, 진심으로 기욱을 좋아하는 서윤과 달리 서진은 기욱에게 정이라고는 일절 없는 사람이었다. 걱정되느니 하는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낼 리가 없었다.
기욱은 자리에 있지도 않은 서진을 두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입가를 올렸다.
“오빠 지금 웃었어? 내일모레 결혼할 사람이 웃음이 나와?”
“크읍, 서윤아.”
“왜.”
“다음부터 조심할게.”
기욱은 더 웃었다가는 서윤을 자극할 것 같다는 생각에 웃음을 참으며 손을 살짝 벌렸다. 의국 내 몇몇 의사들의 눈치를 본 서윤이 머뭇거리자 기욱이 먼저 서윤을 안았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알았으면……. 흐윽… 다음부터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울지 말고.”
기욱은 긴장이 풀려 눈물을 흘리는 서윤을 토닥였다. 서윤을 달래는 기욱은 벽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달력을 흘끗댔다.
* * *
마침 다음 날이 오프였던 기욱은 한 제약회사 세미나를 핑계로 서진을 데리고 나왔다. 예정에 없던 세미나라 다른 행사처럼 특별히 기욱의 자리가 마련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렴 서진을 데리고 나올 핑곗거리가 필요했던 터라 그런 대접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호텔로 가는 길에 잠시 들러 인근 카페에서 산 밀크티를 홀짝이던 서진이 기욱을 보며 말했다.
“그대로 죽어 버리지 그랬어요.”
기욱이 출근하고 몇 시간 후 실습을 온 서진도 기욱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소문을 전해 들었다. 처음에는 설마 진짜 기욱이겠어, 했지만 서윤과 통화를 하고 난 뒤에는 기욱이 맞다고 확신했다. 하긴, 박기욱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교통사고 얘기를 듣고 서진이 무슨 말을 할지 내심 궁금해하고 있었던 기욱은 상상 그대로의 돌직구에 하,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어쩜 자기 생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말을 하는지 그것도 그것대로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그런 말은 생각으로만 해.”
“늘 생각하고 있어요.”
“…아, 그래. 그거 안 죽어서 미안하군.”
“알면 됐네요.”
“그래도 놓아줄 생각은 없어.”
서진은 기욱의 말에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거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애당초 결혼까지 약속한 마당에 이제 와 포기하겠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 쪽이 웃기는 것이었다. 다행히 서진이 아는 기욱은 한결같은 사람이었고, 서진을 놓아줄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서진은 차 문에 삐딱하게 머리를 기댔다.
“누나한테 대충 들었어요. 제약회사 심포지엄 간다면서요? 이틀 전에 그렇게 막 통보해도 되요?”
이미 관계자와 통화를 마친 기욱의 대답이 돌아왔다.
“상관없다던데.”
“뻔뻔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심하네요.”
“하, 나 정도면 유능한 거지.”
따로 자리를 마련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까지 전해 들은 기욱은 서진이 투정하는 이유를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다. 서진은 밀크티의 뚜껑을 열어 빨대로 괜히 안을 휘저었다.
“금방 끝나. 끝나고 점심 먹자.”
“저, 들어가도 돼요?”
잠시 속도를 늦춘 기욱이 서진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서진 또한 기욱과 짧은 시간 눈이 맞았다. 고속도로였던 탓에 속도를 마냥 늦출 수 없었던 기욱이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려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생각해 보니 기욱은 서진을 데리고 의학 세미나에 간 적이 거의 없었다. PK면 한 번쯤은 데려가 줄 법도 한데 말이다. 완전 일반인도 아니고, 어느 정도야 알아먹을 테니.
“당연하지.”
“처음 가 봐요.”
“…….”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기욱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기욱의 반응을 오해한 서진이 남은 밀크티를 마셨다.
“처음 가 본다구요. 그게 이상해요?”
서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기욱을 노려봤다. 예비 의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나 학교에서 하는 세미나 및 대규모 의학 포럼은 종종 간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제약회사에서 초대를 받아 가는 행사에는 참여해 본 경험이 없었다. 시헌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끌려 다닌 모양이지만.
시헌과 서진은 사정이 달랐다. 그저 서윤에게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참가하는 행사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던 기욱은 뒤통수를 크게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욱도 시헌만 할 때는 부모님을 쫓아서 종종 참여해 당연히 서진 또한 별 의미를 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상할 건 없지.”
“그래요.”
“다음부터 가고 싶은 데 있으면 말해. 혼자라도 시간 맞으면 가게 해 줄 테니까.”
“뭐가 있는 줄 알아야 가죠.”
“팸플릿 가져다줄 테니까. 연구실에 있어.”
정확히는 연구실 쓰레기통에 처박히기 직전인 팸플릿들이었다. 차가 막혀 속도를 늦춘 기욱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는 서진을 흘끗댔다. 기욱과 눈이 맞은 서진이 획, 하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뒤 차가 속도를 냄과 동시에 서진이 입을 뗐다.
“사실은 며, 몇 군데 있어요.”
손을 조몰락거리며 기뻐하는 서진에 기욱은 옆에 있는 커피를 마셨다. 뜨거운 커피라는 것을 망각한 채 마신 터라 사레가 들린 기욱은 물티슈를 꺼내 입가에 흐르는 커피를 대충 닦았다. 기욱은 정면을 보며 일부러 서진의 시선을 외면한 채 담담한 척 말했다.
“어디든 말만 해.”
어디든. 지금의 기욱은 서진이 원하면 뭐든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뭘 그렇게 많이 썼어.”
“재밌잖아요.”
“……아. 그래?”
기욱은 깨알 같은 글씨로 적힌 서진의 메모지를 보며 혀를 찼다. 누가 신경외과 의사 아니랄까 봐 전공이랑 상관없는 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기욱도 아주 메모를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서진과 비교했을 때 열정의 차이였다. 서진과 기욱이 나오자 안쪽에 있던 제약회사 관계자들과 몇몇 의사들이 기욱에게 다가왔다.
“교수님! 미리 오셨으면 한 자리 만들어 드렸을 텐데. 죄송합니다.”
“교수님, 학생 때 K대에서 특강을 하실 때 뵀습니다. NS는 아니지만 인사드리려고…….”
“UH 호텔에서 발표하신 거 들었는데…….”
몰려든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원래 인원부터가 적은 걸 생각하면 결코 적은 인원수는 아니었다.
“아, 급하게 나오느라 난 명함을 안 가져와서…….”
“받아만 주세요.”
기욱은 한 명씩 차분히 상대하고 있었지만, 정신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원래 계획은 서진과 조용히 왔다 갈 생각이었는데 대체 어디서 소문이 퍼졌는지 알 방법은 없었다. 기욱의 뒤쪽에 서 있던 서진은 몰려드는 사람들에 자연스럽게 뒤쪽으로 빠져 간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호텔의 비싼 간식들이 복도 쪽에 그대로 진열되어 있었다. 행사가 끝났지만 먹어도 되겠지? 서진은 마카롱이 올라간 케이크와 쿠키 등을 작은 접시에 올렸다.
“강서진, 너 거기서 뭐 해?”
“놀랐잖아요.”
서진은 쿠키를 입에 넣으며 옆쪽에 올려놓은 커피를 마셨다. 반쯤 식었지만 그래도 먹을 만은 했다.
“아까 먹지 이제 와서.”
“그럴 수도 있죠.”
기욱의 곁으로 직원 몇 명이 다가왔다. 대충 들으니 이 뒤에 따로 초대받은 교수님들과 함께 점심을 하자는 얘기가 나온 듯싶었다. 다른 교수들도 딱히 반대는 하지 않았다고 하니 기욱도 거절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서진은 뒤늦게 발견한 간식거리들이 아쉬운 듯 머뭇대고 있었다. 하여튼 이런 데서 애 같은 구석이 보였다. 기욱과 같이 온 의사라는 것을 눈치챈 직원 한 명이 기욱에게 넌지시 말했다.
“좀 포장 달라고 부탁해 볼까요?”
“그렇게 해 주세요.”
기욱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직원을 불렀다. 포장에 대해 얘기를 하는 사이 기욱은 꾸역꾸역 접시에 있는 케이크를 넣는 서진을 보며 볼가를 손가락질했다.
“뺨이 왜요.”
“묻었어.”
“윽.”
서진은 손가락으로 뺨을 만지작거렸다. 옷으로 닦으려는 서진에 기욱은 옆 테이블에 있는 물티슈를 뜯어 서진의 얼굴 근처를 닦아 줬다.
“혼자 할 수 있어요.”
“가만히 있어.”
기욱은 반강제로 서진의 뺌에 묻은 크림을 닦았다. 얼마 뒤 직원이 가볍게 간식이 포장된 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간식이 담긴 상자를 손에 쥔 서진은 자신이 그렇게 애 같았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가서 애 취급 받을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막상 이렇게 기욱의 옆에 서니 그게 또 아닌 기분이 들었다. 시헌이 불편하다고 했던 것을 이제야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 안녕하세요.”
발표할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익숙한 얼굴의 교수님과 서진의 눈이 마주쳤다. 본과 시절 수업을 들었던 교수님이었다. 수업이라고 해도 몇 년 전 얘기고, 그 뒤로는 거의 본 적도 없으니 서진의 이름을 기억할 리는 만무했다.
“그 이름이…….”
“강서진입니다.”
머뭇대는 교수님에 서진은 특별히 놀라울 것도 없다며 대답했다. 서진의 이름을 들은 그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한마디 더 건넸다.
“박시헌이랑 같이 다니던 친구군. 시헌이는 잘 지내나? 원, 학교 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서진이 피해자라는 것까지는 모르는 모양인지 시헌이 칼에 찔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복학했대요. 재수술 한 번 하고 외래 다니는 모양이더라구요.”
“그래도 그만해서 다행이야. 그 학생 재미있는 녀석이었지. 나 원, 실습도 아닌데 다른 의사 가운 챙겨 입고 온 놈은 내 살다 살다 그때가 처음이었다니까. 처음엔 진짜 새로 들어온 조교인 줄 알았다네. 하하하!”
“뭐야? 무슨 얘기해?”
옛날 얘기로 한창 떠들고 있는 둘을 발견한 기욱이 다가왔다. 아는 의사가 없는 줄 알았는데. 기욱은 아직 목에 걸려 있는 교수의 명찰을 슬쩍 내려다봤다. H대라는 글씨가 눈에 띄었다. H대 교수라면 서진이 알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서진은 은근슬쩍 어깨 위로 손을 올리는 기욱의 손을 탁, 하고 내쳤다.
“그냥요. 본과 때 강의 들어오셨던 교수님이세요.”
“J대 박기욱입니다. 서진이가 신세 졌군요.”
“허허, 신세는 무슨. 그러고 보니 젊은 교수가 왔다던데 자네였군 그래. 아직 인턴도 한참인 의사를 데리고 다니는 거 보니 의욕이 좋아.”
“교수님…. 저 그런 게 아니라……. 윽. 시헌이 친형이십니다.”
본의 아니게 벌써 기욱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풍기게 되는 것이 불편했던 서진이 재빨리 말을 정정했다. 교수는 기욱의 성을 듣더니 아아, 이해가 간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교수들과 함께 점심에 초대받은 기욱은 35층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했다. 서진은 거의 말이 없었지만, 나이가 있는 교수들 사이에 낀 어린 의사를 향한 자연스러운 배려인지 특별히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명함을 주며 혹시라도 병원에 오게 되거나 하면 연락하라고 하는 것이 언제 이런 경험을 해 보나 하고 생각하고 넘겼다. 식사 후 인사를 하고 난 뒤 서진과 기욱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여기.”
“아.”
서진은 종종걸음으로 안쪽에 있는 차에 다가갔다. 조수석에 탄 뒤 안전벨트를 맸다. 교통사고가 나 앞 범퍼가 완전히 찌그러진 기욱의 차는 보험사를 통해 수리를 맡겨 놓은 상태였다. 설마 사고 이틀 만에 다른 차를 가지고 올 줄은 서진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욱의 차는 새 차 느낌과는 살짝 거리가 있었다.
“차 누구 거예요?”
“매형. 당분간 빌렸어. 차 심하게 고장 나서 고치는 데 시간 좀 걸린다더라. 가해자 쪽 보호자랑 얘기도 해 봐야 되고 복잡하게 됐어.”
차 시동을 건 기욱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누가 진짜 병원 도로에서 사고가 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사고가 난 기욱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수석에 앉은 서진은 상자에 포장된 마카롱과 케이크를 플라스틱 포크로 집어 먹었다. 기욱의 시선을 느낀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왜요?”
“아니다.”
기욱은 고개를 돌리며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아침을 대충 먹었다고 해도 밥을 그렇게 먹고 저 단게 들어가는 것이 신기했다. 서진과 안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정작 기욱은 서진에 대해 뭔가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최근 들어 깨닫고 있었다.
“어디 가요?”
기욱에게 끌려 나오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라 놀랍지는 않지만, 서진이 들은 목적지는 오전 세미나가 전부였다. 평소라면 호텔 방을 잡아도 이상하지 않을 기욱이 차로 어딘가를 운전해 가고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서진의 생각을 읽은 걸까? 기욱은 팔을 뻗어 서진의 무릎 위 상자에 놓인 쿠키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나도 몰라.”
“집에 가요.”
“그건 싫은데.”
“아, 어쩌라구요 그러면. 할 거 없잖아요.”
“할 거 만들어 줘?”
횡단보도 앞에서 기욱이 차를 멈췄다. 기욱의 차가 아닌 터라 서진은 기욱의 행동 하나하나가 조마조마했다. 특히 내부에 있는 블랙박스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기욱도 서진이 블랙박스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이내 블랙박스의 전원을 꺼 버렸다.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끝나기 무섭게 기욱은 서진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던졌다.
“영화. 보고 싶은 거 골라.”
“영화요?”
“이 시간에요?”
“시간이 무슨 상관이야.”
할 거라는 말을 듣고 무의식중에 섹스를 생각한 서진은 아무렴 반강제로 하는 섹스보다는 낫겠거니 하며 기욱의 최신 휴대폰으로 영화를 검색했다. 이제 막 스마트폰이 생기는 추세라 서진은 기욱의 새 휴대폰을 사용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한참 만에 그나마 괜찮은 영화를 찾은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이거요.”
“재밌어?”
“저도 안 봤는데 어떻게 알아요.”
기욱은 서진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가져와 화면을 대충 흘끗댔다. 서진은 한 손으로 휴대폰을 만지는 기욱을 불편하게 바라봤다.
“운전하면서 휴대폰 좀…….”
“알았어. 이거 보자.”
주변을 둘러본 기욱은 커다란 백화점 간판 한쪽에 붙어 있는 영화관을 확인했다. 호텔 근처 백화점 주차장에 차를 댄 뒤 영화관이 있는 층으로 갔다. 프리미엄 영화관이라 이름 붙은 영화관은 지하 푸드코너 옆에 있었다. 당연히 티켓을 예매하러 갈 줄 알았던 기욱은 영화관에 들어서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상한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디 가요?”
“따라와.”
일방적으로 서진의 손을 붙잡고 기욱이 향한 곳은 일반 매표소와 구분된 프리미엄 라운지였다. 한눈으로 봐도 고급스러운 라운지에 서진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런 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요?”
“서윤이랑 와 봤으니까.”
“누나랑요?”
“처음이었는데 꽤 괜찮았어. 다음에 너랑도 와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렴 기회가 되는데 그걸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서진은 그제야 기욱이 왜 뜬금없이 영화 얘기를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무렴 제가 돈을 내는 것도 아니고, 서진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운이 좋았는지 마침 서진이 고른 영화는 상영 20분 전이었다. 서진과 기욱은 음료수와 팝콘을 적당히 주문한 뒤 영화관 안으로 들어왔다.
평일 오후의 프리미엄 영화관. 안 그래도 가장 사람이 없을 시간에 평범한 사람들은 잘 오지 않는 영화관에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300~400석 이상 들어가는 대형 상영관보다야 규모는 작지만, 확실히 들어가자마자 탁 트인 느낌이 다닥다닥 의자가 붙어 있는 영화관과는 그 느낌이나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이래서야 마치 영화관 하나 전세를 낸 기분이라 좌석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자리가 적힌 표를 봐도 도통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반강제로 표를 빼앗은 기욱이 서진을 대신해 안쪽 자리를 손가락질했다.
“잠깐만요.”
“왜?”
서진은 기욱이 손가락질하는 자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프리미엄 영화관 내부에는 좌석 종류가 한눈에 봐도 꽤 다양했는데, 아래쪽에 있는 좌석들은 누가 봐도 커플석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는 좌석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심지어 두 사람이 앉을 자리는 침대형으로 두 좌석이 하나로 붙어 있는 형식의 좌석이었다. 집에 있는 침대랑 다를 게 뭔가 싶지만. 서진은 이런 좌석들이 있는 곳이라면 기욱에게 좌석 선택을 맡기지 않았을 거라며 이마를 짚었다. 마침 스크린에서 불빛이 나며 광고가 들어왔다.
“다른 데 앉아요.”
“싫어.”
“어차피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다른 좌석 앉아도 되잖아요.”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누가 부끄러워한다고……!!”
“어머, 영화관 진짜 이쁘다!”
마침 한 커플이 두 사람과 같은 영화관 안으로 들어왔다. 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서진이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하자 기욱이 급하게 서진을 품에 안았다. 그 탓에 서진의 손에 있던 팝콘 일부가 흔들려 바닥으로 후두두 떨어졌다.
“조심해.”
“놔요.”
기욱의 품에서 벗어난 서진은 결국 영수증에 적힌 자리로 갈 수밖에 없었다. 막상 누워 보니 또 푹신푹신한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본 게 몇 년 전인지 기억도 안 나는 마당에, 영화관에서 반쯤 누워 영화를 볼 거라고는 감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서진은 천장을 보고 누워 있는 기분이 새삼 신기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음료수와 짐을 내려놓은 기욱이 앉기 무섭게 침대가 훅 하고 아래로 꺼졌다.
“왜?”
“됐어요.”
그냥 평범하게 앉은 것뿐인데 불편한 표정을 짓는 서진을 기욱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원, 나이를 먹어도 서진의 까탈스러운 구석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게 서진의 매력이라면 또 매력이었지만. 기욱이라고 서진을 이렇게 미치도록 원하게 될 줄이야 알았겠는가.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하암.”
밤새 일하고, 아침부터 운전한 기욱은 말이 그렇지 피로가 잔뜩 쌓인 상태였다. 처음부터 영화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제 품에 안았다. 화면에 나오는 광고에 집중하고 있던 서진은 난데없이 끌리는 몸에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기욱에게 안겼다.
“제정신이에요?”
“뭐가.”
“놔요. 좀.”
서진이 기욱을 밀어내자 기욱은 다리를 서진의 몸 쪽으로 올려 힘을 줬다. 아무리 서진이라 해도 이런 식으로 누르는 기욱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서진은 건너편의 커플들을 의식한 것인지 계속해서 몸을 뒤척이며 기욱에게 벗어나려 애썼다.
“어차피 안 보여.”
그런 서진이 거슬렸는지 몸을 슬쩍 일으켜 커플들이 있는 쪽을 본 기욱이 다시 자리에 누웠다. 좌석마다 약간 아래쪽으로 홈이 패 있어 작정하고 일어서지 않는 이상 다른 좌석을 구경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거기에 불까지 꺼지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계속 그렇게 나불대면.”
“…….”
“확 그 입을 막아 버리는 수가 있어.”
“그게 무슨……. 윽…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아무리 그래도 영화관에서 키스는 아니었다. 기욱이라면 진짜로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서진은 급하게 팔로 입을 막으며 마음대로 하라며 스크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욱은 영화를 보러 온 건지 자러 온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서진의 예상대로 기욱은 영화에 도통 관심이 없었다. 기욱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끼는 것도 잠시뿐, 서진을 커다란 인형처럼 안고 있던 기욱은 이내 영화 소리를 자장가 소리 삼아 잠이 들었다. 스크린 속 주인공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며 총탄과 포탄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 현장에서 태연하게 잠이 오는 것도 신기했다. 우연히 고개를 돌려 기욱의 잠든 모습을 본 서진은 중요한 후반 장면에 영화에 몰입도가 훅 하고 떨어졌다.
자는 모습만 보면 그런 짓을 할 사람이라고는 생각이 안 드는데 말이다. 서진은 떨리는 팔 한쪽을 다른 손으로 붙잡으며 꾹 눌렀다. 기욱이 잠들어 있다고는 하나 기욱과 오랜 시간 붙어 있는 것은 역시 아직도 무서웠다.
“…제길.”
드라마처럼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 죽어 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기욱이 사고가 났다는 말을 들은 순간 일 초라도 그렇게 생각했던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기욱과 자신은 뭘까? 뭐여야만 할까?
지금 서진에겐 그것만큼 어려운 질문이 없었다. 아무렴 더는 영화에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잠이 들어 있는 기욱을 옆으로 밀어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정신없이 자는 기욱은 서진에 의해 좌석 끝 쪽으로 밀려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
* * *
“강서진.”
“크읍. 네?”
“죽고 싶어?”
기욱의 협박 아닌 협박에 서진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영화가 끝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기욱은 서진에 의해 일어났다. 이상한 자세로 좌석에 걸터앉아 자고 있던 기욱은 급하게 일어난 탓에 그대로 계단 쪽으로 곤두박질쳤다. 마침 뒷정리를 위해 들어온 여자 알바생이 그 현장을 목격한 것이 화근이었다. 간신히 영화관을 나온 기욱은 넘어지며 부딪힌 머리를 긁적였다.
“CT라도 찍어 볼래요?”
“뭔 CT야. 이게 진짜…….”
서진이 놀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기욱이 어이가 없는지 말끝을 흐렸다. 누구 앞에서 감히 CT라는 말을 꺼내는지 기가 막혔다. 기욱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잠이 덜 깬 채 조수석에 타려는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화는 잘 봤어?”
“같이 봤잖아요.”
“난 잤잖아.”
“그걸 자랑이라고 말해요? 그냥, 볼만했어요.”
“재미있으면 재밌었지 볼만한 건 또 뭐야?”
“재밌었어요.”
서진은 억지로 대답하는 사람처럼 마지못해 말했다. 기욱도 서진이 억지로 말한다는 것을 아는지 운전석에 앉아 차의 시동을 걸었다. 영화의 러닝타임이 짧지는 않았던 터라 이미 오후를 좀 지나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다시 차에 탄 것까지는 좋았지만, 서진은 다음 목적지를 알지 못했다. 정말 오랜만에 끌려다니는 기분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렸다. 서울을 살짝 벗어나는 느낌이 든 서진은 오늘 같은 날이라면 기욱의 마음을 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말을 하겠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서진은 얼어붙은 사람처럼 몸이 떨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모텔 근처에 와 간다 생각한 서진은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운전 중인 기욱의 팔을 붙잡았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서진에게 팔이 붙잡힌 채로 운전을 계속하던 욱이 고개를 돌렸다.
사실 기욱은 중간부터 서진이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지도 아주 예상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기욱은 서진에게 말해 보라는 듯 일부러 입을 꾹 다문 채 운전을 계속했다. 팔을 붙잡고 한참 만에 서진이 입을 열었다.
“아, 안 가면 안 돼요?”
“하아.”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서진의 말에 기욱은 괜한 허탈감이 들었다. 차라리 조금 다른 말을 했다면 다르게 봐 줄 의향은 있었다. 모텔 근처 옆 도로에 차를 댄 기욱은 안전벨트를 푼 뒤 제 팔을 붙잡은 서진의 팔을 그대로 붙잡아 조수석 쪽의 서진 위로 올라탔다. 기존 기욱의 차와 달리 선팅이 되어 있지 않은 차는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그 내부가 훤히 보이는 구조였다.
“한 달 만이야.”
“…….”
“더 이상은 못 참아.”
병원 앞 교통사고, 서윤과의 결혼 준비 등등. 기욱은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다. 서진과 같이 있는 것은 분명 재미있고, 여자와 데이트하는 것 이상으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그 모든 것을 다 합친 것이 섹스만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기욱에게 서진과의 섹스란 케이크 위에 먹지 않고 남겨 둔 과일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욱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반대로 서진의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붙잡힌 손목이 아팠다. 차라리 그냥 조용히 갈걸. 기욱을 하루 이틀 봐 온 것이 아닌 서진은 이미 자신이 그 말을 꺼낸 순간부터 기욱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 알았으니까……. 손 놔줘요. 제발…….”
애원에 가까운 서진의 목소리에 기욱은 그제야 서진의 손을 놓으며 도로변 모텔 주차장에 차를 댔다. 먼저 차에서 내린 기욱은 서진이 내리기도 전에 건너편으로 돌아 조수석 문을 벌컥 열었다. 밖에 서 있는 기욱을 본 서진은 마지못해 안전벨트를 풀어 차에서 내렸다.
서진은 기욱에게 반강제적으로 이끌리다시피 해 모텔 방 안에 내던져졌다. 침대에 몸을 반쯤 걸친 서진은 셔츠를 벗는 기욱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뗐다.
“씻고 해요.”
“…….”
“시, 시간 많잖아요.”
“하아, 빨리 씻고 와.”
너무 겁을 준 건 아닐까. 눈에 띌 정도로 떠는 서진에 기욱은 마음대로 하라며 손을 저었다. 기욱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진은 화장실로 도망치듯 뛰어갔다. 기욱은 물소리가 들리는 화장실을 흘끗 바라봤다.
“흐음.”
담배나 피울까 하고 고민하던 기욱은 거침없이 화장실 문을 열었다. 설마 기욱이 들어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서진은 난데없이 열리는 문에 깜짝 놀라 벽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기욱은 수건걸이 한쪽에 걸어 둔 서진의 옷을 밖으로 내던진 뒤 자신도 옷을 벗었다.
“지금 뭐, 뭐 해요?”
“귀찮으니까 같이 씻자고.”
“금방 씻고 나간다고 했잖아요.”
“못 기다려.”
자고 일어났더니 발정이 난 건가. 서진은 벽 쪽으로 몰아붙이며 다가오는 기욱에 어이가 없었다. 이내 기욱을 살짝 밀어낸 서진은 샤워기의 물을 다시 틀었다. 후두둑, 샤워기를 타고 떨어지는 물이 서진의 몸을 적셨다. 기욱은 서진이 물을 틀기 무섭게 서진의 등 뒤로 안겨들었다.
“잠깐…!! 씻고 있잖아요!”
“뭐가 문젠데?”
기욱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태연하게 서진의 허리를 안았다. 물은 기욱을 타고 서진에게 떨어졌다. 기욱을 무시하고 샤워를 하던 서진은 기욱의 손이 점점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읏… 나가서…….”
물 때문인지 감각이 마비된 듯한 질척한 기분에 서진은 기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물에 잔뜩 젖은 서진의 모습을 본 기욱은 서진의 입 쪽으로 손가락을 살짝 밀어 넣었다. 물과 함께 섞여 들어간 커다란 엄지손가락이 서진의 입안을 촉촉하게 적셨다.
“흐아… 읏… 제발…….”
“나가서 하나 여기서 하나 똑같잖아.”
“그게 무슨…… 으읍…!”
손가락을 빼낸 기욱은 빠르게 서진의 입술을 덮쳤다. 순식간이라고 말할 것도 없었다. 서진을 욕조 쪽으로 몰아붙인 기욱은 다른 손으로 욕조의 물을 대충 틀었다. 기욱의 계속되는 키스에 뒤로 밀린 서진이 자연스럽게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을 채우는 물에 서진은 고개를 들어 기욱을 올려다봤다.
“흐으… 왜….”
“뭐가 또 왜야.”
기욱은 욕조 밖으로 나오려는 서진의 가슴을 누르며 욕조 위로 올라왔다. 좁은 욕조 안에서 서진이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욱이 위로 올라온 탓에 서진의 몸은 물에 반쯤 잠긴 상태였다. 기욱의 페니스가 자연스럽게 서진의 페니스 근처에 닿았다.
“까탈스러운 것도 나쁘진 않지만.”
“읏….”
물에 의해 서진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진짜 눈물을 흘리는 건지 물 때문에 그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턱을 살짝 들어 올려 입술을 맞춘 기욱은 제 페니스와 서진의 페니스를 부딪치며 천천히 움직였다. 서진보다 먼저 흥분한 기욱의 페니스 끝에서 묽은 쿠퍼액이 흘러나왔다. 제 손으로는 만족이 안 되는지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페니스를 쥐게 했다.
“싫… 읍….”
“서진아.”
지난번처럼은 되고 싶지 않았던 서진이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참 잘한 행동이었다. 시헌과 사귄 것이 발각된 이후부터였다. 기욱은 서진이 거절하는 것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싫다’라는 거부권은 곧 기욱에 대한 반항과도 같았다. 기욱은 물에 젖은 손으로 서진의 이마를 쓸어 넘긴 뒤 입술을 맞췄다.
예전부터 참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었다. 아니, 기욱의 삶에서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은 강서진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기욱은 서진을 안으면 안을수록 질리기는커녕 놓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키스할 때 숨이 막힐 정도로 몰아붙이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 품에 안기는 모습이 얼마나 꼴리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기욱은 서진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며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으읏…, 후… 하읏…!”
서진보다 먼저 기욱이 사정을 했다. 손안에서 느껴지는 질척한 감촉에 서진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리는 물에 손을 씻고 싶은 기분이었다. 자연스럽게 물이 찬 허벅지 아래로 손을 내리려 하자 기욱이 팔을 잡아 서진의 얼굴 쪽으로 돌렸다.
“뭐, 하는 거예요…!”
서진의 손바닥에는 물과 함께 섞인 기욱의 희멀건 정액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핥아.”
“제가 왜, 왜…….”
서진의 눈가가 점점 빨갛게 변했다. 질색하는 서진에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아 강제로 입 근처에 가져다 댔다. 눈을 깜박이니 몸 바로 위까지 올라와 있는 기욱에 반항할 수 없었던 서진은 혀를 살짝 내밀어 자신의 손바닥을 핥았다. 물이 섞여 있어 큰 맛은 나지 않았지만 중간중간 나는 씁쓸한 맛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서진은 눈을 반쯤 질끈 감으며 무작정 손바닥을 핥았다. 고양이 같은 서진의 모습에 기욱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기욱이 손에 힘을 풀자 서진이 입을 막으며 괜히 헛기침했다.
“하아, 하…….”
욕조 물의 열기 때문인지 몸이 뜨거웠다. 숨이 가파르며 폐에 물이 차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증기가 가득 차는 샤워실 특성상 여기서 끝까지 했다가는 정말 질식사할지도 몰랐다. 서진은 기욱의 어깨에 손을 올려 몸을 지탱하며 젖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테니까.”
“…….”
“뭐든 할 테니까 나, 나가서 해요…….”
“그래.”
기욱은 서진의 입술 끝을 살짝 씹으며 말했다.
* * *
“하읏, 으응… 하윽…!”
침대에 엎드린 서진의 몸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들어올 때는 낮이었지만, 모텔의 작은 유리창은 까맣게 색이 변해 있었다. 샤워하고 물기가 마르기도 채 전에 시작된 섹스는 몇 시간을 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허윽… 윽… 하응….”
“강서진, 딴짓하지 말고 똑바로 해.”
기욱이 서진의 허벅지를 강하게 눌렀다. 반강제적으로 기욱의 위에 올라탄 서진은 죽을 맛이었다. 기욱은 유독 서진을 위로 올리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걸까? 적어도 서진의 기억상 처음부터 이런 체위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흐으. 눈물에 젖어 부은 눈을 흐릿하게 뜬 서진이 고개를 숙였다. 기욱 앞에 벌려진 다리 사이에는 굵직한 페니스가 서진을 뚫고 있었다. 기욱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몸이 반으로 갈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욱과의 섹스는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기욱과 있을 때면 서진은 늘 지옥의 끝에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읏… 으응… 흐윽… 허윽… 그만…!”
서진의 양팔을 잡아당긴 기욱이 위아래로 허리를 움직였다. 기욱이 허리를 크게 움직일 때마다 서진의 몸이 위아래로 요동쳤다. 그 반복되는 행위에 서진은 속이 뒤집힐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허윽…… 헉, 허억….”
많이 참았다는 기욱의 말은 거짓말이 아닌 듯 기욱의 섹스는 다른 때보다 훨씬 더 거칠었다. 최근 들어 이런저런 일도 많았고, 결혼식을 준비하는 서윤의 눈을 피하는 건 아무리 기욱이라 해도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울컥, 하고 사정을 한 기욱의 정액이 페니스를 타고 그대로 흘러나와 서진의 엉덩이를 엉망으로 적셨다.
“누가 누워도 좋다고 그랬어?”
“흐윽… 아파요. 흑…….”
“아파?”
“흑, 흐윽… 아악!”
잠시 기욱의 움직임이 멈추자 서진이 팔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기욱의 양손이 서진의 허리를 잡으며 위아래로 움직였다. 비명에 가까운 서진의 신음이 한동안 이어졌지만, 기욱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서진이 반실신 상태가 되어 갈 무렵 기욱은 서진을 눕힌 뒤 귓가를 혀로 핥았다. 기욱의 페니스가 빠져나온 서진의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남아 있는 쾌락에 서진은 기욱이 제 몸을 유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대로 된 반항을 할 수가 없었다.
“오늘 말야.”
“흐읏… 하으으….”
“교수님이랑 꽤 사이가 좋던데.”
기욱의 말에 소름이 돋은 서진이 깜짝 놀라며 기욱의 몸을 밀어냈다. 눈을 깜박인 서진은 기욱의 말을 다시 생각했다. 사람이 의심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나이대가 비슷한 동기까지는 봐주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정도가 심한 의심이었다.
“왜 찔려?”
“미, 미쳤어요? 그냥 오랜만에 만난 교수님이에요!!”
“알아.”
“아, 알면……. 그런 말을 하면…….”
“아는데, 화가 나네. 널 데려온 건 난데.”
아주 잠깐이었지만 기욱은 서진을 데리고 그냥 호텔로 들어가 버릴까 하는 고민까지 했다. 정말이지. 이런 기분으로 어떻게 한 달을 참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욱은 마음 같아선 어딘가 서진을 가둬 두고 싶었다. 평생, 아무도 모르는 곳에 두고 자신만 보게 하고 싶었다. 기욱의 커다란 손이 서진의 턱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무서울 것 없는 검은 눈동자가 서진을 덮쳤다.
“그러니까.”
“…….”
“나랑 있을 때 다른 놈 보지 말라고.”
서진의 허벅지를 벌린 기욱이 제 페니스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서진의 안은 기욱의 페니스를 아무런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깜짝 놀란 서진이 몸을 틀자 기욱은 그대로 서진의 머리채를 붙잡아 뒤로 당겼다.
“하으으윽!!”
“대답해.”
“으흑… 윽… 아, 알았어요….”
뭘 잘못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서진은 기욱이 시키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양팔로 침대 헤드를 붙잡은 서진의 몸이 기욱이 허리를 움직일 때에 맞춰 거칠게 움직였다. 서진의 등 뒤로 올라온 기욱의 혀가 귓불이며 목 근처를 핥아 내려갔다.
기욱에 의해 몸이 반쯤 돌아간 서진은 흔들리는 천장을 보며 신음을 참았다.
* * *
“오빠! 서진이는?”
“방금, 집에 데려다줬어.”
“그래? 일찍 왔네? 좀 더 쉬다 오지 그랬어.”
“당직이기도 하고. 서정수 환자, 중환자실에 있다고 들어서 상태 좀 보려고.”
“상대 운전자 말하는 거지? 임 교수님이 집도하셨다고 들었는데.”
“워낙 심각해서. 나도 규건이한테 전해 들은 거라 정확히는 몰라. 퇴근하려고?”
“응.”
“고생했지. 들어가서 한숨 자.”
기욱은 일부러 서윤과 함께 병원 근처 대로변까지 나왔다. 마침 역 근처에서 택시 한 대가 서 있었다. 기욱은 지하철 쪽으로 향하는 서윤의 팔을 잡아당긴 뒤 멋대로 택시 문을 열었다.
“아, 오빠. 택시비 많이 나오잖아.”
“얼마나 된다고 그래. 택시 타고 가.”
괜찮다는 서윤을 뒷좌석으로 밀어 넣은 기욱은 서윤에게 자신의 카드를 건넸다. 그걸로도 부족해 택시기사에게 집 주소까지 말하며 못을 박는 기욱의 태도에 서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못 데려다줘서 미안해.”
“뭘, 일하다 보면 그럴 수 있지. 당직 잘하고 집에 들어가서 연락할게.”
“그래.”
탁, 하고 차 문을 닫은 기욱은 곧장 병원 연구실로 들어갔다. 근무까지 아직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빠르게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기욱은 가운을 걸친 뒤 외과 ICU로 내려갔다. 마침 정혁이 상태를 보고 갔던 터라 몇몇 의사들이 환자 주위에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여긴 무슨 일로?”
기욱을 먼저 알아본 고년차 레지던트가 고개를 숙였다. 아직 기욱의 얼굴을 잘 모르는 저년차 레지던트가 한 타이밍 늦게 눈치를 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환자 상태 좀 보려고. 나랑 사고 난 환자잖아.”
“아. 그랬죠. 근데 그게…….”
레지던트의 시선이 모니터와 환자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수술실은 간신히 나왔지만, 얼핏 봤을 때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아 보였다.
“임 교수님은?”
“밖에 계십니다. 안 그래도 아까 보호자라고 하는 사람이 다녀갔는데 재수술 문제 때문에 복잡하게 된 것 같더라구요.”
“재수술이 왜?”
“저도 잘은 모르는데. 별로 원하지 않는 눈치더라구요.”
“일단 알았어.”
대충 상태를 보고받은 기욱은 중환자실 밖으로 나왔다. 중환자실 입구 밖에 배치된 자판기에서 정혁이 음료수를 뽑아 먹고 있었다. 정혁을 발견한 기욱은 거침없이 정혁에게 다가갔다.
“임 교수님.”
“아오. 씨, 넌 온다면 온다고 말 좀 해라! 매번 진짜! 왜!!”
정혁은 중환자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환자들과 살짝 떨어진 안쪽 벽에 기대 캔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대기실 벽에 있는 디지털시계는 이제 막 9시를 좀 넘기고 있었다. 오전에 상태를 보러 온 규건에게서 기욱이 당직이라는 말은 전해 들은 상태였다. 그런 것치고는 역시 일찍 출근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기욱의 성격상 환자 때문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대충 들었습니다. 재수술 거부하고 있다고.”
“그래.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곤란해. 썅, 누군 며칠째 이 환자 하나 때문에 집에도 못 기어들어 가고 있구만. 뒤늦게 미적미적 나타나서 하는 소리 하고는 진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정혁이 건너편 대기실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와 남자를 흘끗댔다.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의 옆에는 낯선 남자 두 명이 같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다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걸로 봐서는 평범한 보호자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벽에 기댄 정혁은 정면을 보고 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커피 캔을 흔드는 방향은 분명 여자 쪽을 향하고 있었다.
“환자 보호자래. 딸. 아버지 오늘내일하는데 수술 못 하겠다고 그러더라.”
“왜요?”
“뭐, 자기네들 말로는 돈 때문이라는데. 환자한테 변변찮은 직업도 없고, 여자 말로는 10년 동안 거의 연락도 안 하고 남처럼 살다가 이번에 사고 나서야 알았대. 혹시나 하고 물어봤는데 보험 하나 똑바로 든 것도 없는 것 같더라. 이 일 하면서 그런 환자 흔한 건 아니지만 말야.”
환자의 사정을 대충 들은 기욱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뭐가 또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 있지.”
“저랑 부딪힌 환자가 타고 왔던 차요. 좀 된 거긴 한데 그래도 꽤 비싸요. 저도 BMV 시리즈 쪽은 정확히 가격은 잘 모르긴 하지만.”
“노숙자라는데?”
“그 말을 믿으십니까?”
“믿진 않지.”
그러니까 더 머리가 아픈 거였다. 마침 남자 한 명이 자리를 비워 환자 대기실에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여자를 위아래로 훑은 기욱은 정혁을 보며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물론, 정혁을 향한 한숨은 아니었다. 슬슬 눈치가 보인 정혁과 기욱은 중환자실 문 너머로 자리를 옮겼다.
“아까 그 여자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팔면 병원비 절반 이상 나옵니다.”
“야 이놈아, 말 좀 이쁘게 해라. 팔긴 뭘 팔아! 장기를 파냐? 어?”
“그만큼 명품이라고 말하는 거잖습니까.”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사람을 호구로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래서 더 고민 중인 거 아냐.”
“형사 안 왔다 갔습니까?”
“경찰만 왔다 갔어. 뉴스 좀 보고 살아라.”
정혁의 핀잔에 기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야 요 며칠간 정신이 없어 대중에 떠도는 말이니 언론에 관심을 끊은 건 사실이지만, 그것도 길어야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사건이라는 게 언제 일어난다고 예고하고 일어나는 게 아니니 재수가 없으면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는 법이었다.
“너 아침에 사고 났을 때. 상덕동 18층 아파트 옥상에서 여고생 한 명이 투신했대. 운이 좋게 화단인가에 걸려서 죽진 않았나 본데 우리 병원에서 받을 거 니 사고 때문에 이건 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도저히 그런 환자 받을 상황이 아니었거든. 서정수 환자 상태도 워낙 심각했고. 마침 남성대교 지나고 있다길래 그대로 K대로 보냈어. 뭐, 워낙 출혈이 심한 데다 상태가 심각해서 *DOA였지만. 아마 우리 병원 와도 비슷했을 거야.”
*DOA[Dead On Arrival] : 도착 시 이미 사망
돌려보낸 환자 상태가 궁금해 K대 병원 관계자에게 문의해 소식을 들은 정혁은 어차피 가망이 없었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여자아이는 안됐지만, 그런 일이 형사들이 안 오는 거랑 무슨 관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정혁이 말을 이어 갔다.
“임신 4주차였대.”
“고등학생이라면서요.”
“그리고 죽기 24시간 전에 성관계 했는지 정액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더라. 너무 많아서 추정이 안 될 정도로. 걔가 죽기 전에 유서를 남겼는데, 그게 어떻게 하다 보니까 걔 친구 통해서 인터넷에 다 퍼지고 난리도 아냐. 처음에 병원 돌린 거 때문에 기자들 며칠 새 병원 찾아오고. 그 가해자들 절반 이상이 있는 여학생 학교가 그 지역에선 꽤 학군이 좋은 고등학교였나 봐. 어쨌든 그거 때문에 누가,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는 흉기 사고는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이거지.”
“환자 얼마나 더 버티는데요?”
“당장 수술 안 하면 길어야 반나절. 오늘도 몇 번이나 왔다 갔는지 내가 아주, 발을 못 떼고 있다 발을.”
운이 좋게도 이 환자를 제외하면 당장 생사가 급한 환자들이 없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기욱은 정혁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외상으로서 정혁의 실력만큼은 따라잡을 수 있는 의사가 없음은 분명하게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국내보다는 주로 해외 쪽에서 스카우트가 들어오는 정혁이 갈 곳은 많다고 말하는 건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시려구요?”
“나도 몰라. 너 아는 기자들 있냐? 불러서 기자회견이라도 할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씨발, 나도 진짜 답답하니까 그러는 거 아냐. 하아, 이런 거 걱정 안 하고 평생 수술만 하고 싶다.”
“이참에 퇴사하시고 MSF(국경없는의사회) 지원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교수님 정도 경력이시면 충분히 오케이이실 텐데.”
“말하는 본새하고는. 내가 그렇게 꼽냐? 어? 뭐가 불만인데!”
“교수님은 언제 저 좋아하신 적 있으십니까?”
“없지. 개새끼.”
정혁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적어도 기욱의 큰누나인 하연을 인턴으로 만났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인턴 나부랭이로 기욱을 처음 봤을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교수니 어쩌니 하면서 독대를 하는 걸 보면 슬슬 물러나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기욱이 비정상적으로 빠른 부분도 있지만 말이다. 마침 *ICU 안쪽에 있던 레지던트 한 명이 급하게 밖으로 나왔다. 그는 정혁이 문 안쪽에 있는 것을 보고 빠르게 걸어왔다.
*ICU[Intensive Care Unit] : 중환자실
“교수님. 잠깐…….”
“씨발 내가 미쳐.”
“왜요?”
“아, 몰라. 상태 보고 *OR 올릴 거니까 니가 좀 도와라.”
*OR[operating room] : 수술실
“교수님 미쳤습니까? 저 *NS입니다. 교수님 밑에서 일하는 의사 아닙니다.”
*NS[Neurosurgery] : 신경외과
“누가 몰라? 니네 집 의사 집안이잖아. 알아서 좀 하라고!”
정혁은 기욱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며 외과 ICU 쪽으로 뛰어들어 갔다. 밖에서까지 들리는 정신없는 기계 소리에 기욱은 이마를 짚으며 ICU 밖으로 나왔다. 정혁과 같이 들어간 기욱이 밖으로 나오자 여자와 남자들이 살짝 긴장하는 듯 몸을 떨었다. 기욱은 애써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예. 아버지 접니다. 아뇨. 아직요. 지금 올라가겠습니다.
간단하게 전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기욱은 병원 뒤쪽 의사용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내가 이래서 싫다는 거야.”
하나부터 열까지 정혁과는 맞는 구석이 없었다.
* * *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연구실 책상에 앉은 기욱은 괜히 혹이 진 머리를 긁적였다. 서진의 말처럼 진짜 CT를 찍어 볼까 생각도 했지만, 바닥에 구른 정도로 CT를 찍는 건 역시 오바스러운 감이 있었다. 규건이 들으면 또 웃을 테고.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자존심이 먼저일 때가 있는 법이었다.
무엇보다 기욱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했다. 기욱의 그런 감은 대개 잘 맞는 법이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어지는 편두통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신경외과 의사도 편두통은 막을 수 없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새 논문에 쓸 사례들을 정리하고 있던 기욱은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기욱의 책상 옆에는 병원에서 사용하는 커다란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별다른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볼 때 기욱의 연구실에 연락도 하지 않고 찾아올 사람은 규건과 퇴근한 서윤 외에 달리 없었다. 서윤은 이미 퇴근했으니 사실상 규건뿐이었다. 한참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미동도 하지 않은 문에 고개를 갸웃거린 기욱은 귀찮다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야, 안 들어오고 뭐 해?”
비밀번호를 바꾼 적도 없는데 왜 문을 못 여는 거야? 장난을 치는 건가? 다른 의미로 손이 많이 간다고 느낀 기욱이 벌컥 하고 문을 열었다.
“……아.”
“들어와?”
정혁이었다. 문 앞에 선 기욱의 중얼거림을 문틈으로 들은 정혁이 팔짱을 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정혁을 슬쩍 내려다본 기욱은 날카로운 정혁의 포스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교수로서는 연배 차이가 1~2년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의사 경력으로 친다면 정혁과 기욱의 차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내가 니보다 몇 년 차 선배인 줄 알아? 너는 진짜 아까도 그렇고 GS였으면 아주 뒤졌어.”
그리고 예상대로 이어지는 정혁의 잔소리에 기욱은 노골적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꼰대질할 거면 가시죠.”
“녹차 있냐?”
뜬금없이 녹차는 또 무슨 녹차야. 기욱은 커피포트가 있는 안쪽 선반을 흘끗대더니 다시 말했다.
“커피는 있습니다.”
“하나 타 봐.”
“하아, 들어오시죠.”
기욱은 문을 안쪽으로 완전히 열었다. 기욱의 연구실에 들어온 정혁은 제집처럼 커다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야, 연구실 좋네. 누가 이사장 아들 아니랄까 봐.”
“연구실이 뭐 다 비슷비슷하죠.”
“내 연구실은 애들이 한번 왔다 가면 질색을 하던데.”
“연구실에다가 살림을 차리면 저라도 그럴 겁니다.”
우민이 정혁의 병원 내 최고 기록을 깨기 전까지 정혁은 병원 내에서 가장 오래 생활한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기욱의 눈에 정혁이나, 우민이나 독종이긴 마찬가지였다. 어느 쪽이 싫냐고 물으면 솔직히 둘 다 싫었다. 책상 위에 내려놓은 시계가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기욱은 커피를 타 정혁의 앞에 내밀었다. 진한 커피 향과 함께 피가 섞인 냄새가 기욱의 코를 자극했다.
“꽤 걸렸네요.”
“7시간이면 짧은 축이지.”
수술을 마치고 나온 시간이 새벽이라는 점만 빼면 말이다. 정혁은 기욱이 타 준 커피를 홀짝이며 다리를 꼬았다.
“쪼잔한 새끼. 커피만 달랬더니 진짜 커피만 주냐?”
“하아.”
정혁의 말에 기욱은 마지못해 일어나 찬장을 뒤졌다. 찬장에는 이래저래 받아 놓은 과자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기욱은 그중 가장 최근에 선물로 받은 마카롱 세트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서진도 마카롱을 잘 먹더니만. 정혁은 기욱이 꺼낸 마카롱과 커피를 입에 넣었다. 단걸 먹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수술 동의서 받았다면서?”
“어떻게든 하라고 말씀하신 건 교수님이잖습니까.”
“진짜 어떻게 할 줄은 몰랐지.”
“그럼 대체 뭘 믿고 올리신 겁이니까?”
기욱은 정혁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만약 기욱이 동의서를 받지 않았다면 자칫 큰 문제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수술 비용은 전부 병원의 몫이었다. 정혁은 허공으로 손을 올려 보이며 태연하게 말했다.
“나야 뭐, 그런 일이 한두 번 있는 것도 아니니까. 네가 동의서 안 받아도 방법은 많지.”
“제길.”
그럴 줄 알았다. 기욱은 정혁의 손에서 놀아난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아무렴 정혁으로서는 기욱 덕에 일을 복잡하게 처리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좋은 게 좋은 것이었다.
“이야, 역시 이사장 아들이 좋긴 좋아.”
“그만 좀 비꼬시죠. 저도 아버지 뒤로 힘쓰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하, 야! 네 입에서 그런 말 백날 해 봐라. 누가 믿나. 원래 보이는 손보다 보이지 않는 손이 무서운 법이야. 알간?”
“어쨌든 교수님은 저한테 빚 하나 지신 겁니다. 저도 보험료는 받아야 할 거 아닙니까. 차 사고만 아니었어도 그런 짓 안 했습니다.”
“네 환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정곡을 찌르는 정혁의 말에 기욱은 말없이 마카롱을 입에 넣었다. 마카롱 특유의 진한 향에 기욱은 인상을 구기며 커피를 마셨다. 달기만 하고. 기욱에게 마카롱은 설탕을 한 수저 퍼 먹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야, 네 그 병적인 행동이 도움 될 때도 있긴 있네.”
정혁은 기욱이 말한 보험이 자신의 환자를 보호하기 위한 핑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차 수리값이 꽤 나왔다는 건 알지만, 정혁이 아는 기욱은 뜻밖에 돈에 연연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 부분 하나만큼은 정혁이 좋게 봐 주는 점이었다. 기욱은 반쯤 식은 커피를 전부 비운 뒤 정혁의 앞으로 몸을 숙였다.
“서정수 환자, 잘못되면 저도 가만히 안 있습니다.”
“야, 알았다고! 너 그것도 병이야. 니네 누나가 *NP 전문의인데 그것도 몰라? 넌 환자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거야!”
*NP[Neuropsychiatric] : 신경정신외과
“…그래서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넌 의대 다닐 때 심리학개론도 안 봤냐?”
정혁은 절반을 뜯은 마카롱을 접시 위로 올렸다. 기욱은 반쯤 부스러진 마카롱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정혁이 무슨 말을 할지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어쩌면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정혁이 그 사실을 눈치챘다는 것이 더 황당했다.
“혹시 이상한 생각하고 계신다면 거기까지만 하시죠. 제가 뭐가 아쉬워서 남 좋은 일 합니까.”
“너 그런 거 신경을 안 쓰잖아. 난 내 아들이 너처럼 될까 무서워 죽겠다.”
“여자도 없으시면서 무슨 소리십니까?”
“꼭 그렇게 후려 파야 속이 시원하냐?”
“먼저 시작한 건 임 교수님이잖습니까.”
기욱은 듣기 싫다며 정혁의 말을 반쯤 잘랐다. 기욱이 정혁을 싫어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이 너무 직설적이라는 점이었다. 기욱은 정혁의 잔이 거의 비어 가는 것을 보며 고개를 들었다.
“다 드셨으면 가시죠.”
“다 안 먹었어. 더 마실 거야.”
“아오, 씨.”
“씨?”
“됐습니다. 한 잔 더 드릴게요.”
기욱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한 잔 더 탔다. 기욱이 커피를 타는 동안 정혁은 남은 마카롱을 입에 구겨 넣으며 의자 뒤로 팔을 걸었다. 누가 보면 자기 연구실인 것처럼 편한 정혁에 기욱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커피 맛있네. 이참에 나도 커피머신 하나 들일까?”
“저거 비싼 겁니다.”
“아, 그러셔. 얼만데?”
“백이십이요.”
“푸읍…! 캑캑, 야이! 무슨 커피머신이 그래? 생긴 건 고물딱지처럼 생겨서. 더럽게 비싸네. 안 사. 됐어!”
“매형이 독일에서 사 온 건데. 관심 있으시면 하나 부탁해 볼게요.”
“최대한 싸게 부탁한다.”
정혁은 반농담으로 웃으며 말을 건넸다. 기욱이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렴 마침 커피머신을 들일까 생각은 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물어봐 주면 주는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상관은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동의서는 어떻게 받은 건데?”
“그냥 뭐. 솔직히 순순히 사인해 줄 줄은 몰라서 오히려 제 쪽이 더 당황했습니다.”
“우리 애가 갔을 땐 이런저런 핑계 대면서 안 한다고 그러던데?”
“뭐, 그냥. 그쪽으로 연이 있는 젊은 검사 하나 알거든요. 살짝 찔러 봤더니 금방 사람 보내서 알아봐 주겠다고 해서 알겠다고 하고 그 말 그대로 전한 게 답니다. 형사 오면 다시 얘기해 보자고. 근데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사인하겠다고 하니까 할 말은 없죠. 이미 교수님이 OR 올린 마당에 사실은 몰래 올렸습니다, 할 수도 없으니까요.”
“야! 그런 말 했다가는 난리 나지! 내가 뒤쪽으로 돌아가느라 죽는 줄 알았다.”
“아주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던데요.”
기욱도 무작정 수술실로 올릴 때 그 부분을 걱정했지만, 정혁은 귀신같이 환자를 데리고 빠져나간 뒤였다.
“그래서 상태는요?”
“낮보다는 훨씬 좋지. 지켜봐야 하는 건 똑같은데. 큰일 없으면 괜찮을 거다.”
정혁의 말을 믿은 기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은 슬슬 일어나려는 정혁에 한발 먼저 일어나 선반을 열었다. 선반에는 정혁이 다 먹은 마카롱 말고도 온갖 비싼 과자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기욱은 그중 대충 뜯지 않은 새 초콜릿 상자를 정혁에게 내밀었다. 주는 것은 거절하지 않는 주의인 정혁은 기욱이 준 초콜릿 상자를 말없이 받았다. 딱 봐도 꽤 비싼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넌 뭔데 먹을 게 이렇게 많냐?”
이쯤 되니 간식들의 출처가 살짝 의심됐다. 단걸 좋아하는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제약회사요. 저랑 서윤이랑 결혼한다고 소문 퍼지니까 서윤이 건드나 봐요.”
“강 간호사가 단거 좋아했었나?”
“일단 여자잖아요.”
“네가 그런 입김에 넘어갈 녀석이 아니라는 걸 걔들은 모르나 보지?”
“글쎄요.”
기욱의 성격상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서윤을 건들면 어떻게든 될 거로 생각하는 녀석들이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집안 배경 탓인지 다른 의사들과 달리 기욱은 로비에 큰 관심이 없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의사들에게 하지 말라고 말할 정도로 정의감이 강한 의사는 아니었다.
“어쨌든 그 뒤로 이래저래 안 먹어서 쌓인 겁니다.”
기욱은 선반에 있는 과자들을 짐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기욱의 안일한 생각에 정혁은 한심하다며 손을 저었다.
“얌마, 그런 거 있으면 좀 쌓아 두다가 나한테 처리하지 말고 니네 애들이나 가져다줘! 안 그래도 고생하는 애들 불쌍하지도 않냐?”
“…알았어요.”
정혁의 잔소리에 기욱은 생각보다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의 머릿속에 ‘다른 의사들에게 준다’라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없었던 모양이다. 정혁의 말을 들은 기욱도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는지 후회 중이었다. 사람은 가끔 가장 단순한 것을 망각할 때가 종종 있는 법이었다. 사람인 기욱도 아주 예외는 아니었다.
“아, 맞다 그리고.”
어느새 창밖으로 해가 뜨고 있었다. 문 쪽으로 몸을 반쯤 돌린 정혁이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뭔가를 빼 기욱에게 건넸다. 봉투 안에는 빳빳한 종이로 되어 있는 상품권 두 장이 있었다.
“결혼 축하한다.”
기욱은 정혁이 준 봉투 안을 열어 봤다. 예상대로 돈 대신 호텔의 디너 이용권이 들어 있었다.
“교수님 장난하십니까?”
“야! 여기 비싼 데라고!”
“받으신 거잖습니까.”
“난 갈 일 없잖아. 아까워서 주는 건데 뭔 말이 많아.”
“하다못해 돈이라도 넣어 주시든가요.”
“씨발, 결혼식도 안 가는데 무슨 축의금이야.”
정혁은 꿈도 꾸지 말라며 언성을 높였다. 정혁의 축의금 따위는 기대조차 안 한 기욱으로서는 정혁이 자신의 결혼식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기욱은 봉지를 품 안에 챙겼다.
“뭐, 어쨌든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중에 빚 갚을 일 있으면 얘기해라. 없는 편이 훨씬 좋지만.”
정혁이 손을 흔들며 기욱의 연구실을 나갔다. 정혁이 나간 뒤 기욱은 커피들을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따라 유독 피곤했다. 잠시 눈을 붙인 기욱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댈 기운도 없었던 기욱은 스피커폰으로 바꾼 뒤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올렸다.
― 일어났어?
― 응. 방금. 오빠는 연구실에서 날 샌 거야?
― 이래저래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서윤아.
― 어. 응? 왜?
기욱은 이마를 짚은 채 무릎 아래로 정혁이 준 식사권을 만지작거렸다.
― 오늘 일 끝나고 저녁 먹을까?
― 난 상관없는데. 오빠 퇴근 안 하려고?
― 너랑 같이 병원에 좀 더 남아 있지 뭐. 하아, 모르겠다. 일단 와서 얘기하자.
― 너무 무리하진 말고. 병원 근처 도착하면 연락할게.
― 그래.
뚝, 하고 서윤에게서 통화가 끊겼다. 서윤이 출근하려면 한 시간 정도 더 남았다. 규건에게 문자를 보내자 별일 없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에라 모르겠다. 기욱은 가운을 벗어 얼굴을 대충 가린 뒤 소파에 쪼그리며 누웠다. 두통이 심해 한 시간이라도 자고 가야 할 것 같았다.
* * *
거의 다 도착했다는 서윤의 연락에 기욱은 눈을 비비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새벽, 병원의 로비에는 이제 막 출근하는 사람들만이 입구를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오픈 준비를 하는 카페 근처로 가자 유리문 너머 서윤의 모습이 보였다. 날이 쌀쌀한지 갈색 코트를 걸친 서윤이 기욱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오느라 고생했어.”
“뭘. 별거 아니지.”
기욱을 보기 위해 여유롭게 나온 서윤이 어깨를 들썩였다. 기욱은 연구실 구석에 박혀 있던 쇼핑백에 담아 온 과자 상자를 서윤에게 내밀었다.
“응? 이게 뭐야?”
“연구실에 있던 거. 간호사들이랑 나눠 먹으라고.”
“아, 이거 이렇게 많았던가?”
큼지막한 쇼핑백 안에 정갈하게 담긴 쿠키와 초콜릿 상자를 본 서윤이 중얼거렸다. 사실 처음부터 서윤이 간호사들과 나눠 먹었다면 이렇게 쌓일 일은 없었지만. 서윤은 받은 과자를 전부 기욱의 것이라며 연구실로 가지고 들어왔다. 기욱은 아직 감지 못한 머리를 옆으로 살짝 쓸었다.
“너도 단거 안 좋아하잖아. 어차피 또 금방 쌓여.”
“아, 그럼 오빠 나 이거 한 상자만 따로 챙겨도 돼?”
“상관없는데. 누구 주려고?”
뜻밖에 초콜릿 한 상자를 꺼내 가방에 넣는 서윤의 태도에 기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욱에게 팔짱을 낀 서윤은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손을 저었다.
“아이참, 내가 이런 거 줄 사람이 우리 서진이 말고 더 있겠어?”
“단거.”
“어?”
“서진이, 단거 좋아했던가…….”
턱 근처로 손을 올린 기욱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세미나에 갔을 때도 유독 단것을 잘 먹었던 서진이었다. 평소의 서진이 커피보다는 살짝 단 밀크티를 좋아했다는 것을 깨닫고만 있어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던 사실이었다. 서진을 손에 넣기 위해 서윤이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 알고 있는 기욱이 정작 당사자인 서진이 뭘 좋아하는지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기욱의 중얼거림을 들은 서윤이 아직 색이 바래지 않은 립스틱이 발라진 입술을 뗐다. 서윤은 기욱이 하나뿐인 가족인 서진에게 관심을 두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엄청 좋아하지! 학교 다닐 때 돈만 있으면 맨날 초콜릿만 먹고 그랬으니까.”
“그래?”
그것도 몰랐던 일이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중, 고등학교 때 조금 더 챙겨 줄 걸 하는 괜한 후회가 들었다. 기욱은 서윤의 팔에 끼워진 쇼핑백에서 중간 크기의 초콜릿을 꺼내 서윤의 가방으로 옮겨 넣었다.
“한 상자 더 챙겨 둬.”
“어? 그래도 돼?”
“어차피 많잖아. 두 개 가져다줘.”
마음 같아서는 그냥 전부 서진에게 선물하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기욱은 선반에 초콜릿이 얼마나 더 남았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라커룸에 도착한 서윤이 머뭇거렸다. 아무리 기욱이라 해도 여자 라커룸까지 따라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욱은 금방 옷을 갈아입고 나오겠다는 서윤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모레 오프지?”
“아마 그럴걸?”
“그럼 오늘, 내일 일 끝나고 쇼핑이나 할까?”
“오빠도 참. 안 그래도 우리 결혼 준비한다고 돈도 많이 썼는데 쇼핑은 무슨 쇼핑이야.”
“뭐 어때. 아니면 어디 놀러나 가든지.”
“시간 괜찮아?”
“어차피 한동안 외래밖에 없고, 주말에 풀이라서 괜찮아.”
“그럼 뭐……. 나야 거절할 이유는 없지.”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의 손을 놓은 서윤이 라커룸 안으로 들어갔다. 서윤이 옷을 갈아입는 사이 벽 쪽에 기댄 기욱은 손을 이마에 올리며 눈을 감았다. 지하의 희미한 불빛이 평소보다 더욱 눈이 부셨다.
약속대로 기욱과 서윤은 1박 2일의 일정을 보냈다. 여행이라고 할 것도 없는 도심 한복판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쇼핑한 뒤 혹시 몰라 결혼식을 올리게 될 호텔을 재방문한 것이 하루 일정의 전부였다. 기욱은 집 근처 지하주차장에 주차할 곳을 찾고 있었다.
평일일 텐데, 왜인지 평소보다 자리가 없는 기분이 들었다. 마침 안쪽에 있는 차가 빠져나가자 기욱의 차가 그 뒤를 이어 들어갔다. 기욱이 주차를 하는 사이 운전석에 앉은 서윤은 서진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휴대폰 너머로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 밖이라고? 응. 알았어.
오랜 통화를 하지 않았던 서윤은 기욱의 예상보다 빨리 전화를 끊었다. 통화 내용이 궁금한 기욱이 시동을 끈 뒤 고개를 돌려 물었다.
“서진이야? 뭐래?”
“밖에 나왔대. 친구 만난다고 나중에 연락 준다고 했어.”
“그래.”
담담하게 대답한 기욱이지만 마냥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친구? 동기를 말하는 건가? 서윤이 말하는 친구가 기욱은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짐을 거실에 내려놓은 기욱은 곧장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저녁은 이미 먹고 온 터라 먹을 일은 없었다.
“어디 가?”
“잠깐, 신경 쓰이는 환자가 있어서 갔다 올게.”
“그리고 그대로 일할 계획이지?”
서윤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기욱을 올려다봤다. 기욱은 그런 서윤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허무하게 웃었다. 여성 편력이 심했던 기욱이지만 서윤을 만나고, 정확히는 서진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서윤 외에 다른 여자를 만난 적은 없었다. 그 세월이 연기든 아니든 서윤이 기욱에 대해 잘 아는 하나뿐인 여자가 된 것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욱은 병원에 가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잘 자고, 내일 병원에서 보자.”
서윤의 앞머리를 살짝 옆으로 넘긴 기욱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기욱의 허리를 안은 서윤은 기욱이 현관 근처에 도달할 즈음에야 마지못해 손을 놓아주었다.
병원에 도착한 기욱은 급한 대로 연구실 대신 당직실을 향했다. 당직실에도 가운을 박아 놓은 것이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당직실에 숨어 혼자 짜장면을 먹고 있던 규건이 난데없는 기욱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교,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일찍 하하, 오셨네요.”
규건은 입가에 묻은 짜장면 소스를 닦으며 고개를 숙였다. 규건이 알기로 기욱의 출근은 아직 두 시간 정도가 더 남았다. 요즘 들어 기욱의 출근 시간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잠깐 들른 거야. 그보다 서정수 환자 ICU에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
“예? 아아.”
규건은 옆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내려놓았다. 기욱이 너무 갑작스럽게 들어온 터라 목이 멨기 때문이었다. ICU에 환자가 없다는 건 또 누구한테 전해 들었는지. 규건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아, 그 진상 환자요?”
“진상? 무슨 소리야?”
기욱은 자신이 없었던 하루 사이에 병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이놈의 병원은 하루만 자리를 비우면 온갖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이러니 집에 가지 못하고 병원에 남아 있는 다른 의사들을 이해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그 서정수 환자요. ICU에서 상태 호전되기 무섭게 바로 1인실로 옮겨 달라고 난리를 쳤다고 그러더라구요. 근데 또 뭐, 딸 남편이 중국에서 사업 같은 거 하는 모양인지 돈이 엄청 많다고.”
“그래서?”
“당연히 임 교수님은 절대 안 된다고 반대했죠. 애당초 워드 올릴 만한 상태도 아니라니까요? 죽다 살아난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어느 의사가 허락해요. 근데 또 다른 의사 소견서 가져오면서 타 병원으로 옮기겠다고 그러고. 그거 때문에 오늘 하루 외과 분위기 완전히 살얼음판이었다니까요? 뭐, 결국 내일 아침에 H대로 옮기는 거로 합의 보고 오늘 밤만 1인실에 있는 모양이에요.”
“넌 외과도 아닌데 뭐 그렇게 자세히 알아?”
“교수님이 저보고 신경 쓰라면서요. 교수님이 타과 환자에 관심 가지신 게 한두 번입니까. 그런 상도덕 없는 것만 놓고 보면 교수님도 임 교수님 저리 가라라구요.”
좀 들으라는 규건의 잔소리에 기욱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애당초 그런 걸 신경 썼다면 환자를 보기 위해 무리를 해 가며 병원에 일찍 출근할 이유도 없었다.
“지금 GS 애들이 교대로 상황 보고 있다는데. 걔들만 죽어나는 거죠. 뭐.”
“병실 어딘데?”
“특실이요. 25층.”
언제까지 짜장면을 앞에 두고 떠들 수 없었던 규건이 자리에 앉았다. 층수를 들은 기욱은 규건의 등을 토닥이며 빠르게 당직실을 빠져나갔다.
“이따 보자.”
아무리 기욱이라 해도 16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갈 수는 없었던 터라 기욱은 일부러 한 건물을 돌아 환자와 보호자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다. 띵, 16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문이 열렸다.
대개의 경우에는 경비들이 가득한 16층이지만 특별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중요한 사람이 입원하고 있지 않은 시즌에는 오히려 다른 병동보다 싸늘한 쪽에 속했다. 생각해 보니 어느 병실로 옮겼는지 듣지 못한 기욱이 을씨년스러운 병동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하는 수 없지. 간호사 데스크로 걸음을 옮기던 중 기욱의 눈에 간호사 데스크보다 가까운 의사 한 명이 눈에 띄었다. 기욱은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가는 젊은 의사에게 말을 걸었다.
“잠깐만, 혹시 서정수 환자…….”
기욱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방적으로 기욱을 치고 지나갔다. 딱 봐도 어려 보이는 의사한테 무시를 당한 것으로도 부족해 사과조차 하지 않고 급하게 지나가는 모습은 기욱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런 것 이상으로 기욱의 신경을 건드린 것이 있었으니, 기욱과 부딪힌 남자의 가운이었다. 기욱은 인턴 시절부터 눈썰미 하나만큼은 뛰어난 사람이었다. 남자가 입고 있는 가운이 병원 가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설령 병원 가운이 아닌 개인 가운이라 해도 실습생 신분에 VIP층을 들락날락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결정적으로 실습 시즌은 진작 끝났다. 기욱은 재빨리 몸을 틀어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야. 너 어느 과야?”
“…….”
“PK야?
그럴 리가 없다면서도 기욱의 언성이 올라갔다. 앞머리가 길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덥수룩한 머리를 한 남자는 기욱에게 붙잡힌 팔에 힘을 주었다. 남자가 힘을 주자 기욱 또한 팔에 힘을 주었다. 생각보다 강한 기욱의 힘에 남자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쨍그랑. 바닥으로 요란하게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안쪽의 병동이었다. 깜짝 놀란 기욱이 고개를 돌리자 이내 병동에서 눈이 마주친 간호사가 기욱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쌤! 여기 좀 와 봐요! 빨리!!”
코드 블루. 코드 블루. 큰 소리로 외친 간호사가 병동으로 뛰어 들어감과 동시에 큰 소리로 방송이 울렸다. 건너편 환자용 휴게실에서 다른 의사들과 음료수를 마시고 있던 정혁과 의사들이 깜짝 놀라 뛰어갔다.
“야, 박기욱! 넌 또 왜 여기에…… 제길!”
스쳐 지나가듯 기욱을 본 정혁이 빠르게 병동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남자의 팔을 붙잡은 기욱은 정혁이 들어간 병동에 적힌 네임택을 확인했다. 거리가 멀어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그 환자가 기욱이 상태를 보러 들른 서정수 환자라는 것은 감으로 알 수 있었다. 기욱이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남자가 기욱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자, 잠깐. 야!! 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16층에 있는 관계자는 물론 인근 다른 층에 있던 의사들까지 합류하면서 순식간에 병동이 난장판이 되었다. 기욱은 본능적으로 남자를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기랄…!!”
기욱은 남자를 따라 비상계단으로 뛰어들어 갔다. 난간 틈 사이로 남자가 내려가는 것을 본 기욱의 걸음이 빨라졌다.
“너 뭐야! 뭐 하는 새끼냐고!!”
외과 병동이 있는 4층에 달할 무렵 계단을 뛰어가던 남자가 병동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급하게 4층까지 따라잡은 기욱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병동 건너편으로 남자가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꺅! 잠깐 뭐 하시는 거예요!”
“비키라고!”
놀란 간호사를 밀친 기욱이 코너를 돌기 무섭게 한 의사와 몸을 부딪쳤다. 몸이 반쯤 기울어진 기욱은 소매에 아무런 그림이 없는 가운만을 보며 팔을 잡아당겼다.
“윽! 형!!”
“너, 박시헌…….”
시헌의 팔을 잡고 일어난 기욱은 주변을 둘러봤다. 비상계단 쪽을 확인했지만, 남자의 인기척은 어디에도 없었다. 놓친 것이었다. 기욱은 시헌의 가운 때문에 헷갈렸다며 고개를 획, 하고 돌렸다.
“…봤어?”
“뭘 봐.”
“방금 지나갔던 의사, 아니 가운 입은 놈 못 봤냐고!”
“못 봤는데.”
“하, 미치겠네.”
기욱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쩐지 감이 이상하더니만 이렇게 기어이 사고가 나고 만 것이었다.
“형 대체 무슨 일인데?”
“나중에.”
기욱은 말을 흐리며 비상계단 쪽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정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예상대로 정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16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간 기욱이 벌컥 비상계단의 문을 열어 병동으로 돌아와 정혁을 찾았다.
“박기욱 네가 왜 여기에…… 몰골은 왜 그래?”
“그게……. 그보다 교수님 서정수 환자 상태는……. 뭐가 어떻게 된…….”
정신이 없는 기욱은 말이 똑바로 나오지 않았다. 옆에 있는 의사를 보낸 정혁이 기욱의 등을 두드리며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정혁의 팀에 소속된 한 의사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정혁에게 다가왔다.
“교수님 잠시…….”
서정수 환자 건은 아니었지만, 정혁이 주치의로 있는 다른 환자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짐작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혁에게 보고를 하러 온 의사도 이런 상황에서 좋지 못한 얘기를 하는 것이 내심 마음이 불편한 얼굴이었다. 정혁은 할 말이 남아 있는 듯 기욱의 눈치를 살폈다.
“됐습니다. 내려가시죠. 나중에 얘기해요.”
“미안하다. 가자.”
정혁은 기욱의 배려를 거절하지 않고 젊은 의사의 등을 떠밀며 서둘러 건너편 비상계단 쪽으로 내려갔다. 병원 복도에 홀로 선 기욱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적였다.
* * *
타타탁, 좁은 비상계단에는 발걸음 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교수님 안녕…….”
“…….”
기욱은 마침 지나가는 신경외과 의사를 무시한 채 지하로 연결된 철문을 열었다. 가장 아래층 발전소가 있는 곳까지 내려온 기욱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벌컥 하고 안쪽 문을 열었다.
“CCTV 있죠?”
“…예?”
벽에는 온갖 CCTV가 틀어진 화면이 가득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기욱에 소장은 깜짝 놀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빠르게 둘러본 기욱은 모니터에게 보이는 병원 내부 화면들을 손가락질했다.
“CCTV요.”
“자, 잠깐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 병원 의사이신 것 같은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일방적인 기욱의 말에 담당자가 다가왔다. 설명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러나 기욱은 남자에게 상황을 설명할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
“신경외과 교수 박기욱입니다. 오늘 날짜 CCTV 전부 복사 가능합니까?”
“그러니까 무슨 일…….”
“급해서 그럽니다.”
담당자와 몇몇 직원들 사이에서 눈빛이 오고 갔다. 기욱은 책상 한쪽에 몸을 반쯤 기대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키보드 위를 툭툭 건드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병원 교수가 꼬인 것 같은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았던 남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괜히 문제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상관은 없지만……. 파일 용량이 보통이 아니라서.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당장 마땅히 복사할 하드도 없구요.”
“어쨌든 하드가 있으면 바로 가능하다는 소리 맞습니까?”
“예. 뭐, 원래 이러면 안 되긴 하지만. 교수님이라고 하시니까. 그렇죠.”
“가져올 테니 준비해 주시죠.”
기욱은 등을 돌려 빠르게 관제실을 나갔다. 기욱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외장 하드는 차고 넘쳤다. 문제는 다 함부로 지울 수는 없는 내용이 담긴 하드라는 것이었다. 실근무시간은 아니라 밖에 나가서 사 와도 되지만, 가급적 밖에까지는 나가고 싶진 않았다.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당직실에 있었던 것 같은데…….’
기욱은 당직실에 처박아 뒀던 1테라짜리 외장 하드가 생각났다. 연구실 대신 신경외과 병동 당직실로 방향을 틀었다. 당직실 안으로 들어간 기욱은 곧장 외장 하드를 찾기 위해 주변을 뒤졌다. 분명 있을 텐데. 원래부터 온갖 짐들이 가득한 터라 그 속에서 원하는 물건들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개새끼가 양말을…….”
기욱은 땀에 절어 상자에 처박혀 있는 양말을 쓰레기통에 내던지며 인상을 구겼다. 드르륵. 하고 당직실 문이 열렸다. 잠깐 볼일이 있어 몰래 당직실로 내려온 우민은 안 그래도 난장판인 당직실을 더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기욱에 깜짝 놀랐다.
“야야, 박기욱!! 너, 너 뭐야? 왜 벌써 출근했어. 아니, 뭐 해?”
아니 병원 교수가 이 무슨 정신 나간 짓이란 말인가. 기욱이 병원에 있다는 말은 규건과 몇몇 의사로부터 전해 듣긴 했다. 종종 일찍 나오는 일도 있으니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기욱은 마침 들어온 우민을 향해 등을 돌렸다.
“선배님, 혹시 외장 하드 가지고 계십니까?”
“외장 하드?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외장 하드?”
우민은 기욱이 드디어 머리에 맛이 간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급합니다.”
사정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기욱의 모습은 확실히 평소와 달리 초조해 보였다. 그 박기욱이 초조해할 정도의 일이라는 것에 우민은 당황 이상의 신기함을 느꼈다.
“아. 나 안 쓰는 거 하나 있다. 예전에 논문 쓰고 버리는 자료들 묶어서 넣어 놓은 거 있어.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줄까?”
“덮어도 됩니까?”
“상관없어. 어차피 별 내용 없는 거라서.”
“부탁드립니다.”
기욱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평소에는 무슨 말만 하면 말대답을 하거나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던 기욱의 이런 모습에 우민은 살짝 낯이 간지러웠다. 다행히 우민이 가지고 있다는 외장 하드는 멀지 않은 다른 후배 의사의 자리에 있었다. 우민은 서랍을 열어 파일 사이에 끼워져 있는 얇은 외장 하드를 내밀었다. 외장 하드 한쪽에는 <한우민>이라고 적힌 네임텍이 붙어 있었다.
“야, 근데 무슨 일…….”
“좀 쓰겠습니다.”
기욱은 반강제적으로 우민의 외장 하드를 빼앗다시피 한 뒤 고개를 숙여 밖으로 나갔다. 뒤늦게 복도로 얼굴을 내밀었지만, 기욱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야!! 그거 비싼 거야!! 쓰고 돌려줘!!”
당연한 말이지만 사라진 기욱은 대답이 없었다. 복도에 대고 혼자 소리를 지른 기분이 든 우민은 한숨을 쉬며 당직실 안으로 돌아왔다. 당직실에 들른다던 우민이 내려오지 않자 우민을 보러 간 진호가 들어왔다.
“한 교수님! 대체 뭐 하고 계시는…….”
“…….”
진호를 본 우민이 깜짝 놀랐다. 이내 기욱이 엉망으로 해 놓고 간 당직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원래부터 엉망인 곳이긴 한데……. 도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내, 내가 한 거 아니야. 아오, 박기욱 개자식 진짜.”
우민은 억울했다.
* * *
“임 교수님.”
조명이 어둑어둑한 연구실 복도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기욱에 정혁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욱의 뜬금없는 등장은 당해도 당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연락이라도 하고 오든가. 또 연구실에 올 건 어떻게 안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너 말 좀……. 됐다. 왜?”
“들어가서 얘기하죠.”
정혁의 연구실 앞에 선 기욱은 정혁의 손이 반쯤 올라간 도어락을 흘끗거렸다. 정혁은 일부러 손을 반쯤 가리며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친 뒤 문고리를 손에 쥔 채로 섰다.
“난 널 내 연구실에 들이고 싶지 않거든? 밖에서 말해.”
“밖에서 말할 내용이었으면 이렇게 찾아뵙지도 않았습니다.”
“아, 새끼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누굴 닮아서 저러냐 진짜. 들어와.”
정혁은 그럴 줄 알았다며 연구실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기욱은 기다렸다는 듯 안으로 들어가 연구실의 문을 닫았다. 가운을 대충 걸어 놓은 정혁은 바닥과 주변에 쌓인 서류들과 쓰레기들을 대충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저분해도 뭐라 하지 마라. 난 누구랑 달라서 가정적인 남자가 아니거든?”
정혁은 같은 교수 신분에 이런 짓을 한다는 것이 우스워 적당히 치운 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차피 그런 거 신경 안 씁니다.”
기욱은 연구실 문을 닫은 뒤 문 너머에 몸을 반쯤 기댔다. 정혁은 도대체 무슨 일로 기욱이 자신을 찾아온 건가 궁금해졌다. 짧은 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문에서 몸을 뗀 기욱이 연구실 가운데로 다가왔다.
“서정수 환자 살해당할 뻔한 겁니다.”
“…….”
서정수. 수많은 환자를 관리하는 정혁이지만 그 이름은 낯이 익었다. 아니, 익을 수밖에 없었다. 기욱의 예상하지 못한 말에 정혁은 기가 막혔다. 이 자식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는 있는 거겠지? 정혁은 수술 모자로 눌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달라붙은 입술을 강제로 떼어 말했다.
“너 그 말 책임 질 수 있어?”
정혁이 아는 기욱은 이런 질 나쁜 농담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기욱은 환자에 관해서는 정혁이 손을 내저을 정도로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 설령 농담이라 해도 기욱의 말은 정도가 지나쳤다…. 기욱은 하드를 정혁의 노트북과 컴퓨터가 있는 책상에 올려놓았다.
“오늘분 CCTV입니다.”
“CCTV?”
어이가 없었다. 병원 CCTV는 또 언제 복사해 온 건지. 정혁은 그제야 서정수 환자에게 심정지가 있었을 당시 기욱이 VIP실 병원 복도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워낙 정신이 없어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정혁은 이해가 간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너 그때 병동에 있었지. 왜 온 거야?”
“환자 상태 보러 온 겁니다.”
“그래, 서정수 환자 ICU에 있을 때도 종종 왔으니까. 그건 그렇다 쳐. 이렇게 뜬금없이 남의 연구실에 찾아와서 살인이라고 단정 짓는 이유는 뭔데?”
“컴퓨터 좀 빌리겠습니다.”
멋대로 돌아간 기욱은 정혁의 노트북을 열어 외장 하드와 연결을 했다. 미리 표시해 둔 파일을 클릭한 기욱이 노트북을 정혁 쪽으로 돌렸다. 병원 복도 CCTV 영상이었다.
“제가 VIP 병동에 올라간 게 오전 5시 34분경입니다. 문제가 생긴 게 9분경이구요.”
“아침 회의 전에 한번 애들 데리고 올라와서 커피 한잔하고 있었지.”
정혁은 그 상황을 분명히 기억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못 가기는 정혁이나 정혁의 팀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회의 직전에 다 같이 상태 한번 보고 내려가자는 펠로우의 말에 찬성해 올라온 것이었다. 만약 정혁의 팀이 현장에 없었다면…….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다시 생각해 보면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욱은 스페이스 바를 눌러 화면을 정지했다.
“병원 CCTV가 생각보다 많아서 다는 못 찾았습니다만. 이게 접니다.”
“그래서?”
“여기 옆에 있는 인턴, 아니 의사요.”
기욱은 남자를 뭐라 불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CCTV는 화질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기욱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머리가 덥수룩한 청년을 손가락질했다. 멀리서는 잘 안 보였던 정혁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 앞으로 다가왔다.
“누군데 얘?”
“알아보시겠습니까?”
“내가 알아보면 물어봤겠냐?”
정혁은 기욱이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정혁의 대답에 기욱은 한숨을 쉬었다. 정혁이라면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혁에게서 돌아온 말은 회의적이었다. 정혁은 엉망이 된 책상 위에 놓인 언제 뜯었는지 모를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우리 팀 애는 아니야.”
정혁은 멈춘 화면에 집중했다.
“가운은 입었는데? 다른 과 의사 아냐?”
“병원 가운이 아닙니다.”
기욱의 설명에 정혁은 화면을 가까이 주시했다. 확실히. 팔 근처에 있어야 할 병원의 마크가 없었다. 그러나 병원에서 돌아다니는 의사들이 꼭 병원 가운을 입어야 할 의무는 없었다. 당장 병원 의사들도 가운이 없을 때는 개인 가운을 입고 다니는 경우가 허다했다. 거기에 외부에서 온 의사들까지 따지면 골치가 아프긴 매한가지였다.
“실습 시즌은 끝났잖아. 그럼 대체 누군데?”
“저도 모릅니다. 적어도 VIP 병동 관계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알아?”
“제가 봤으니까요.”
PK는 아니다. 외부 의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주변을 경계했다. 기욱도 남자의 정체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얼굴은?”
“그게……. 하아. 저도 정신이 없어서 자세히 못 봤습니다. 앞머리가 길기도 했고요.”
기욱이 추정하기에는 20대에서 30대 중반쯤이었지만, 그조차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정혁은 노트북에 연결된 충전 선을 뺀 뒤 소파로 돌아왔다. 소파 앞 테이블에 노트북을 올려놓은 정혁이 다리를 꼬며 화면을 주시했다. 눈치를 본 기욱이 정혁의 앞에 앉았다. 언제까지 서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니었다.
“넌 아는 의사야?”
“설마요.”
기욱도 정혁과 같은 반응이었다. 기욱이 아는 의사였다면, 에둘러 정혁을 찾아올 이유는 없었다. 정혁은 골치가 아프게 됐다며 테이블에 팔을 괴며 머리를 긁었다.
“뭐, 병원에 의사가 한둘이 아니니 그럴 수 있다 쳐도. 1604호 병동 왔다 갔다 하는 의사 중 내가 모르는 놈은 없을 텐데.”
“한 번 더 자세히 확인해 주세요. 진짜 모르는 의삽니까?”
“얌마, 자세히 보긴 뭘 계속 자세히 봐. 화질이 개판이잖아. 그리고 설령 내가 아는 녀석이라 해도 이것만 보고는 단정 못 지어.”
정혁은 노트북 옆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단정하게 앉은 기욱이 오늘따라 무척 얄미웠다. 이 자식 진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는 거 맞지? 정혁이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며 소파 뒤로 몸을 기댔다.
“우리 J대 병원이야. 나름 국내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병원이라고. 지금 의료사고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병원 내 살인이라니. 이거 알려지면 병원 망신으로 끝날 일이 아니야.”
“저도 압니다.”
“알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라…!! 직접 치료와 관계없는 넌 어떻게 빠져나갈지도 모르지만. 잘못 알려지면 의사 여럿 옷 벗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기욱의 대답에 정혁이 답답하다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기욱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 의사에 교수님도 포함되신다는 게 문제 아닙니까?”
“분명히 말하지만 난 규정대로 했다. 그 환자는! *Arrest 올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Arrest : 심정지
혹시 몰라 다녀간 흉부외과 의사도 정혁과 비슷한 소견이었다. 설령 심정지가 온다 해도 안정기에 접어든 상황에서 이런 일은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정혁이 기욱의 말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내부적으로 요인이 없으면, 외부에서 손을 썼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었다. 아침 대낮에 칼에 찔린 상태로 운전해 병원에서 교통사고를 낸 환자를, 누가 왜? 어떤 이유에서? 정혁과 기욱은 심증만 있을 뿐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
“뇌 손상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지금 한 교수가 다시 ICU에서 상태 보고 있어. 내가 *워드는 안 된다고 그렇게 말을 했건만…….”
*워드(Ward) : 일반 병동
“잠깐만. 한 교수요?”
“왜? 니네 과 한우민 교수. 몰라?”
빈정대는 듯한 정혁의 말투에 기욱은 눈을 깜박였다. 이내 그것도 잠시뿐 기욱은 어이가 없었다.
“교수님 장난하십니까? 그런 일이 있으셨으면 저를 불렀어야지 왜 한 교수입니까?”
“이게! 어디에다 대고 말대답이야? 네가 갑자기 사라진 걸 어쩌라고! 넌 없지. 주변은 개판이지. 우리 애들 시켜서 아무나 좀 데려오라고 했는데 한 교수가 올라온 걸 어떻게 해? 그리고 너 출근 시간도 아니었다면서!”
원래부터 뻔뻔한 녀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다. 정혁은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없던 두통도 다시 생기는 기분이었다. 허나, 당시 분명 정혁과 얼굴을 마주쳤던 기욱은 기욱대로 할 말이 있었다.
“제 번호 모르십니까?”
“씨발, 야! 너 인턴이야? PK야? 병원 생활 하루 이틀 해? 그 상황에서 전화할 수 있겠냐! 계속 그렇게 사람 짜증 나게 할래?”
“……아는데. 하아. 죄송합니다.”
“당연히 죄송해야지.”
정혁의 핀잔에 기욱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상황이 정리되지 않은 것은 정혁도, 기욱도 서로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정리를 해야 할지 갑갑하기만 했다.
“어쨌든 H대로 환자 이송하는 건 취소야. 일단, 주치의는 나긴 한데, 환자에 뇌 이상 생긴 이상 거기까진 내 권한이 아니다.”
정혁은 기욱을 슬쩍 바라봤다. 급한 대로 우민에게 맡긴 건 맞는데,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기욱에게 맡기는 게 현명한 선택임에는 부정할 수는 없었다. 어느 쪽이든 엎어진 물이었다.
“너 한 교수 상대할 수 있겠어? 걔도 한 성깔 하잖아.”
“…한 성깔만 하면 다행입니다.”
우민은, 정혁 다음으로 기욱이 학을 떼는 인물이기도 했다. 정혁은 싫다 싫다 해도 말은 통하지, 우민과 말싸움이 붙으면 답이 없었다. 무엇보다 우민은 기욱의 직속 선배이기도 했다. 아무리 기욱이라도 현역이 선배님을 거스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네 환자였다고 우겨 봐. 너 그런 상도덕 없는 짓 잘하잖아.”
“누굴 진짜……! 하, 어쨌든요. 이거 어떻게 할 겁니까?”
기욱이 정혁 쪽으로 돌아간 노트북을 슬쩍 보며 말했다. 정혁은 일부러 외장 하드와 연결된 USB를 뽑아 외장 하드를 기욱에게 돌려줬다.
“뭘 어떻게 해? 병원에서 살인미수일지도 모른다는 일이 일어났던 거? 환자 사망한 거 아니잖아. 그런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믿는 게 아니라 사실입니다.”
“야, 박기욱. 말 똑바로 해. 가운 입고 돌아다니는 놈이 한둘이야? 거기 서정수 환자 말고 다른 환자도 분명 있었어.”
“그 자식, 서정수 환자 CPR 방송 뜨자마자 도망갔다니까요? 정상이 아니었다구요.”
“뭔가 다른 사정이 있어서 그랬던 거겠지. 아니면 또 네가 겁줘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정혁은 차분히 대답했다. 그러나 기욱은 그런 정혁의 말이 일부러 사실과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정혁은 노트북을 덮어 제자리에 올려 두며 책상에 몸을 살짝 기댄 뒤 등을 돌렸다.
“어쨌든. 아직 서정수 환자 사망한 거 아니니까. 상태 지켜봐.”
“그건…….”
“나라고 좋아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닌 거 알잖아. 이거 누구누구 알아?”
“교수님이 답니다.”
“그럼 CCTV 속 의사, 의사인지도 모른댔나. 어쨌든 이 사람 신원 정확히 확인할 때까지 입 다물어. 네 밑에 의사들한테도 말하지 말고.”
“지금 묻자는 겁니까?”
“어.”
정혁은 당당했다. 이런 사실이 언론에 밝혀지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뭇매를 맞을 것이 틀림없었다. 나중에 알고도 모른척했다는 사실이 알려져도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추측만으로 일을 크게 벌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가장 좋은 것은 이 모든 것이 그저 기욱의 추측, 기우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박기욱, 기분 나쁜 건 알겠는데. 이런 일로 정의로운 척하지 말라고. 아닌 거 다 아니까.”
기욱에게 정의란 일반인들과는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적어도 분명한 건 기욱의 정의는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정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정혁은 불만이 가득한 기욱을 조금이라도 달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완전히 묻자는 게 아니라. 클리어하게 가자는 거야. 명확하게. 알아들어? 니네 결혼식 일주일도 안 남았잖아.”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
“오래 사귀었잖아.”
“…….”
“네 자존심, 그 좆같은 기분을 내가 모르는 건 아닌데.”
기욱을 보는 정혁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씨발, 그동안 기다려 준 강 간호사 생각 좀 해라.”
“…….”
“진짜 불쌍하지도 않냐.”
정혁의 말에 기욱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 그렇게 말하는 정혁의 표정이 굉장히 슬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