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9 교수가 모르면 누가 알아?
― 야, 씨!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 아, 진짜. 교수가 모르면 대체 누가 알아요?
― 아 진짜? 이게 진짜 처맞으려고 환장했냐? 야! 시끄러워! 교수도 교수 나름이지!! 나한테 그런 소리 해 봐라. 나보고 어쩌라고!
― ……그거, 자랑은 아니잖아요.
― 어쨌든! 난 모르는 일이니까 내일 아침까지 알아 와!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아주! 너 그 환자 잘못되기만 해 봐. 그냥 확! 가만 안 둘 거니까! 내가 그러니까 진작 신경 좀 쓰라고 했잖아!
― 신경 쓰고 있었다니까요. 하아, 어쨌든 알겠습니다. 다른 교수님들한테 여쭤볼게요.
― 휴대폰으로 보고해 놔.
예예. 들려오는 대답에 우민은 멋대로 전화를 끊었다. 하여튼 이놈이고 저놈이고 병원에 제대로 된 놈이 없었다. 우민은 오피스텔 근처에서 담배를 물었다.
“야! 강서진!”
우민은 불이 붙은 담배를 입에서 떼어 낸 뒤 멀리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서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서진은 반소매 티에 트레이닝복 차림이었으며 멀리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꼴이 가관이었다. 우민은 아직 피우지 않은 담배를 급하게 끈 뒤 서진에게 뛰어갔다.
“얌마. 몸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아프다는 거야? 새끼. 너 친구 불러서 술 살 때부터 알아봤다!”
“…하세요.”
“어. 그래. 안녕. 너 괜찮냐?”
인사 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우민은 당황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서진은 술병과 쓰레기들을 분리수거했다. 보다 못한 우민이 서진을 밀어내며 대신 쓰레기를 버려 주었다. 소주에, 맥주에 그 좁은 방에서 거하게 술판을 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 새끼 많이도 먹었네.”
“…미워요.”
“됐어. 들어가자. 들어가. 목도 쉰 것 같은데 도대체 뭘 하면…….”
봉지를 버리고 등을 돌린 우민은 제 시선을 피하는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난데없이 붙잡힌 손에 서진은 깜짝 놀랐지만, 소리를 지를 기운조차 없었다. 말없이 저를 빤히 보는 우민의 시선에 서진은 마스크 너머로 입을 열었다.
“왜, 왜요….”
“너 맞았냐?”
“그게… 무슨…! 그럴 리가 없잖아요!”
서진은 우민의 손을 뿌리치며 급하게 티셔츠를 똑바로 했다. 셔츠가 늘어져 안이 보인다는 것을 눈치챈 탓이었다. 셔츠를 꽉 쥔 서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신경 꺼요.”
“뭐?”
우민과 서진의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밤새운 서진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우민은 곤란한 듯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사생활에 참견할 만한 사이는 아니면서도. 신경이 쓰였다.
“남자냐?”
서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집까지 쫓아와서 했다면 그건 정상적인 관계가 아닐 것이 틀림없었다. 사생활은 자유라고 할지언정 정도가 있는 것이었다.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퉁퉁 부어 꼴이 엉망인 서진을 볼 때 서진이 그런 쪽으로 즐기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우민의 질문에 서진은 고개를 숙이며 바닥을 내려다봤다. 참다못한 우민의 손이 서진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갑작스럽게 올라온 우민의 손에 서진이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자, …잘못했어요….”
“…….”
“아니, 그…… 아무것도 아녜요.”
반사적으로 기욱이라 생각한 서진은 뒤늦게 기욱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우민의 손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돌렸다. 우민은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쓸어 넘기며 서진을 내려다봤다. 우민이 서진을 처음 본 건 병원에 알바를 하러 왔을 때였다. 그때만 해도 서진의 목에는 커플링이랍시고 달아 놓은 목걸이가 있었다. 다시 만났을 때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이번 서진의 모습이 그런 것과 연관이 전혀 없어 보이진 않았다.
분명 그때 이름을 들었던 거 같은데. 정확히 무슨 이름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1년도 더 전의 일이었으니까 스치듯 들은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진이 옆집에 있는 여자처럼 오피스텔 성매매를 하지 않는 이상 집 안으로 남자를 끌어들일 만한 이유는 없었다.
인턴 시절부터 대학병원 의사로서 10년이 넘었다. 눈치라면 돗자리 깔아도 될 정도로 착하면 척인 우민의 감이 서진의 전 남자 친구라고 말하고 있었다.
“너 전 애인, 아직도 안 헤어졌어?”
“……헤어졌어요. 그거 아니라구요.”
서진은 우민이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불쾌했다. 시헌은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차마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기욱이라고 말할 수도 없으니 답답했다.
서진은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며 등을 돌렸다. 그런 서진의 손을 우민이 붙잡았다. 강하게 붙잡은 건 아니지만, 손목이 아픈 탓에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애인이냐고.”
“박시헌 아니라고 했잖아요!!”
욱하는 기분에 서진은 저도 모르게 시헌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당황한 서진이 다급하게 우민의 손을 놓으며 입을 막았다. 우민이 시헌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 어쩌지 싶은 서진의 걱정과 달리 우민은 아직 ‘박시헌’이라는 이름이 기욱의 남동생 이름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우민은 일부러 서진이 말한 이름을 머릿속에 기억했다. 전 남자 친구인 시헌이 한 짓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서진에게 이런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의심이지만 우민은 서진이 시헌을 두둔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새끼가 헤어졌는데 집까지 쫓아와?”
“신경 꺼요.”
그놈의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은 아주 습관이었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우민은 이제 관심 끄라는 서진의 말이 별로 와 닿지 않았다.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냐고. 대놓고 다 죽어 가는 얼굴로 퍽이나 신경을 끌 수가 있어야 말이다.
“신경 못 꺼. 야, 강서진. 너 지금 네 꼴 어떤지 알기나 해?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건데?”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어서…… 시헌이가 아니라…….”
목이 멨다. 우민에게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 해도 되는 걸까? 기욱의 남동생인 시헌도 해결하지 못한 일들을, 우민이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남이잖아. 서진은 이도 저도 아닌 채로 끝내 말을 흐렸다.
소리를 지르는 우민의 목소리와 반쯤 죽어 가는 표정으로 그 앞에 선 서진의 모습에 출근하기 위해 오피스텔을 나오는 사람들이 둘을 흘끗거리며 이상하게 쳐다봤다. 남들 다 출근하고 나갈 시간에 둘이 저러고 있으니 수상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제가 생각해도 언성이 조금 높았다 생각한 우민은 서진을 이끌고 오피스텔 옆 벤치로 갔다. 서진은 퉁퉁 부은 눈가를 소매로 닦았다. 옷에 쓸린 눈가가 아팠다. 더는 울 기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왜인지 우민의 얼굴을 보니 다시 눈물이 났다. 비가 내리는 건지 제 눈이 젖은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흐윽… 흐으으윽….”
언제까지라. 그런 걸 알았다면 이 지경까지 왔을까. 우민이 시헌에 대해 오해를 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말할 기운도 없었고. 우민은 서럽게 우는 서진을 안아 주었다.
* * *
“야, 집 좀…….”
“하하, 제가 치울게요.”
“됐어.”
우민은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집어 들려 하는 서진의 손을 쳐 냈다. 싫다는 걸 건넛집이라는 이유로 쫓아 들어오긴 했는데, 막상 들어온 서진의 방은 엉망이었다. 그야 기욱이 그 난리를 치고 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서진도 막 일어나 쓰레기만 챙겨 밖으로 나온 것일 뿐이었다. 우민은 안쪽 작은 소파를 손가락질했다.
“앉아 있어.”
“그래도…….”
“야, 앉을래 혼날래?”
“앉을게요.”
서진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사실 서진은 방을 치우기보다는 좀 쉬고 싶었다. 서진을 대신해 방을 치우는 우민은 엉망이 된 옷들을 품에 안았다. 옷가지들 사이로 푸른색 줄무늬 넥타이가 떨어졌다.
“하, 쓸데없이 겉멋만 들어서는.”
화장실로 들어와 옷가지들을 던진 우민은 넥타이를 둘러봤다. 외국 브랜드의 명품 넥타이로 한 장에 40만 원이 넘는 고가의 넥타이였다. 한쪽에 있는 넥타이핀에는 마찬가지로 다른 브랜드의 이름이 빤히 적혀 있었다. 우민은 빨래를 넣고 최신형 세탁기를 돌렸다.
우민도 서진의 사정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둘이 산다는 것, 그리고 서윤을 만나기 전에는 제법 힘들게 살았다는 것 정도였지만 말이다. 기욱의 집안은 다른 의사 집안보다 상당히 잘사는 축에 속했다. 애당초 의사가 아니더라도 집에 재산이 많은 듯싶었다. 원래부터 유독 자기 사람 챙기기를 집착적으로 잘하는 기욱이 자신의 아내인 서윤의 하나뿐인 가족인 서진에게 이것저것 해 줬다고 해도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역시 20대 중반 남자에게 이런 브랜드는 좀 과하다 못해 촌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기욱이 두고 간 넥타이를 서진의 것이라 착각한 우민은 넥타이를 장롱에 한쪽에 걸어 둔 뒤 밖으로 나와 방을 마저 치웠다.
“여기저기 아주 엉망이구먼.”
방문을 닫고 나온 우민은 2층 침대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고개를 돌리자 소파 쪽으로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민이 화장실에 들어가 빨래를 돌리고, 넥타이를 방에 두고 온 짧은 사이 잠이 든 듯싶었다. 우민은 불편한 자세로 자는 서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피곤했던 주제에 신경을 끄니 마니 하는 모습이 참 우스웠다.
“하아. 이러면 안 되는데…….”
남자 주제에 속눈썹은 또 더럽게 기네. 잠이 든 서진의 얼굴을 유심히 살핀 우민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우민은 사내 연애는 하지 않는다는 주의였다. 성격이 원래 이런 자신과 달리 상대가 상처 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우민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서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서진이 잠든 이상 방을 치워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렇다고 중간에 치우다가 가기는 조금 그랬던 우민은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서진의 어깨에 걸쳐 줬다. 얇은 잠바였지만 아무것도 덮지 않고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추운 날씨도 아니고 말이다.
소매를 걷은 우민은 침대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몸을 반쯤 숙이고 들어간 우민은 아래층 못지않게 엉망이 된 침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윽…! 뭐야 이게.”
침대 아래로 떨어진 이불이야 그렇다 치지만 이불을 털자 이불에 붙어 있는 콘돔이 떨어졌다. 콘돔 안에 있던 정액이 이불에 흘러내려 그대로 묻었다. 우민은 난간 쪽으로 얼굴을 내밀어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서진을 흘끗댔다. 개인의 성생활은 자유지만. 남의 비밀을 아는 것만큼 얼굴을 붉어지는 것은 달리 없었다.
시헌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와 만나는 건진 알 수 없지만. 우민은 쯧, 하고 혀를 차며 2층을 치웠다.
* * *
“너 괜찮냐? 짜식.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몸조심 좀 해라.”
“쉬고 나니까 괜찮아졌어.”
서진은 최대한 말을 아끼며 입을 다물었다. 서진이 다시 병원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이틀이 지난 후였다. 당일 저녁은 일이 끝나고 찾아온 서윤과 함께 모처럼 외식을 했다. 서윤이 오기 전까지 잠이 들어 있었던 서진은 방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정황상 우민이 치우고 갔다고 생각은 했지만. 뭔가 빚을 진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서윤과 저녁이 끝나 갈 무렵에 찾아온 기욱은 일방적으로 내일도 쉬라고 했다. 동기들과 함께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가운을 걸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강서진!”
제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서진은 모르는 척 동기와 대화를 계속했다. 기욱의 얼굴을 종일 안 볼 수는 없지만, 이런 곳에서 이렇게 대놓고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저를 무시한다는 것을 눈치챈 기욱은 옆에 있던 의사들을 보낸 뒤 서진에게 뛰어가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야.”
“아, 깜짝아….”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온 기욱에 놀란 서진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화 중이라 미처 기욱이 오는 것을 보지 못했던 동기들이 기욱을 보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됐고, 강서진 따라와.”
“바빠요.”
“잠깐이면 돼. 그리고 나랑 같이 들어가면 되잖아.”
서진은 가기 싫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주목을 받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이미 동기들과 병원 내에서는 서윤의 동생인 서진에 대한 소문이 암암리에 나 있었다. 서진의 이름을 듣고 아, 한다거나 서진이 지나갈 때마다 걔가 걔라는 식으로 얘기하고 지나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기욱이 없는 다른 과는 그나마 좀 양호했지만, 기욱이 있는 신경외과는 그 정도가 심했다.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서진에 결국 옆에 있던 다른 동기가 서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냥 갔다 와. 우린 상관없어. 아직 시간 남았잖아.”
“그게 아니라……. 제길. 미안하다.”
이 이상 신경전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눈치를 주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어딘가로 이끌었다. 다행히 기욱은 서진을 데리고 먼 곳을 가진 않았다. 서진은 기욱의 팔에 이끌려 비상계단의 층과 층 사이에 섰다.
“무슨 일인데요?”
“별거 아냐.”
“별거 아니면 갈게요.”
“그렇게 까칠하게 굴 필요 없잖아.”
서진을 벽 쪽으로 몰아붙인 기욱은 서진의 턱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들어 올렸다. 닿을 듯 말 듯 점점 다가오는 기욱에 서진은 손등을 끼워 저와 기욱 사이를 가로막았다. 다른 곳도 아닌 병원에서. 그것도 누가 지나갈지 모르는 계단에서. 원래부터 또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요즘 들어 그 정도가 더 심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서진의 행동에 뒤늦게 장소를 자각한 기욱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몸은?”
“괜찮아요.”
“넥타이.”
“넥타이요?”
“그래. 넥타이 두고 갔어. 너네 집에.”
“그래서요?”
“나중에 찾으러 간다고.”
기욱의 말에 서진은 어이가 없는지 하,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무슨 대단한 말을 하나 싶었더니 하는 말이 넥타이를 찾으러 가겠다는 말이었다. 서진은 기욱의 넥타이를 집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 그 난장판인 집을 치운 것은 자신이 아니었던 탓에 섣불리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지금의 기욱은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서진을 건드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하물며 병원에서 게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 데다 기욱과 사실상 라이벌 관계에 있는 우민이 왔다 갔다는 것을 알면 그다음은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서진은 오해라며, 별 관계가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결국 그걸 정하는 것은 서진이 아닌 기욱의 몫이었다. 어쨌든 짜증은 내야겠다.
“그 정도는 문자로 할 수 있잖아요!”
“목소리 듣고 얘기하고 싶었어.”
서진은 눈을 깜박였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설마 진심으로 하는 건가? 서진은 아침부터 난센스 퀴즈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제 목소리에 뭐 대단한 게 있다고 듣고 싶단 말인가. 무엇보다.
“그럼 전화하면 되잖아요.”
“빌어먹을!”
서진의 손을 붙잡은 기욱은 성큼성큼 서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갈 곳이 없었던 서진은 기욱에게 손이 붙잡힌 채 벽 쪽으로 몸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기욱은 다른 손으로 서진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얼굴.”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었다고. 직접.”
“왜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밤새다시피 한 기욱이 수술 모자에 잔뜩 눌린 머리를 긁적이며 짜증을 냈다. 짜증을 낼 사람이 누군데. 적반하장도 이런 게 따로 없었다. 서진의 불만이 가득한 시선을 느낀 기욱은 한숨을 내쉬며 서진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탁, 하고 서진이 재빠르게 기욱의 손을 쳐 냈다.
“왜 또.”
“미쳤어요?”
“안 미쳤어. 까다롭게 굴지 좀 마. 짜증 나려 하니까.”
“누가 누구한테…!”
서진의 말을 무시한 기욱은 몸을 숙여 서진의 목 근처 카라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제야 셔츠 카라가 서 있다는 것을 눈치챈 서진은 말없이 기욱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서진은 기욱의 손길이 지나간 카라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목 카라가 섰다는 것 정도는 말로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서진 입장에서 보기엔 참으로 쓸모없는 배려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진의 흰 실습 가운에 묻은 먼지를 털어 준 기욱은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한 사람처럼 어깨를 펴고 있었다. 기욱은 병원 비상구 천장에 달린 먼지가 가득한 마이크를 올려봤다.
“오늘 며칠이지?”
“13일이요.”
“말고. 요일.”
“하아, 금요일인데요.”
그 정도쯤은 휴대폰을 열어 확인할 수는 없는 걸까. 서진은 이를 악물며 기욱의 말에 차근차근 대답했다. 기욱은 천장에 붙어 있는―병원 관계자나 저기 마이크가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면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마이크에서 시선을 뗐다.
“내일.”
“진짜, 왜 그래요?”
“뭐가?”
“진짜 몰라서 물어요?”
“강서진. 말장난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못 알아듣겠잖아.”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구요!! 좀!!”
“…….”
참다못한 서진이 주먹을 쥐며 비상계단이 떠나갈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마침 한층 아래 출구로 나가려던 어린 여의사 한 명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난간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신경외과 인턴인 그녀는 기욱의 얼굴을 보자마자 흠칫, 놀라며 난간 사이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기욱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저어 그녀를 쫓아냈다. 서진이 고개를 돌릴 즈음에 여의사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비상계단 내부가 더운 것인지, 서진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기욱을 앞에 두고 셔츠 목덜미 사이로 손을 넣어 흔들었다. 단추를 끝까지 잠근 탓에 거의 내부는 보이지 않았지만, 기욱은 그런 서진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 마.”
“아, 또 뭘 하지 마요! 제발 부탁이니까 단어로 말하는 거 안 하면 안 돼요? 내가 당신, 제길! 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떻게 알아요!”
“내가 뭘. 셔츠 그렇게 하는 거 하지 말라고 말한 게 다잖아.”
“됐어요. 갈 거예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꽉 막힌 사람은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제가 말하고도 도대체 기욱의 어느 부분이 문제인지 딱 짚어서 말할 수 없었다. 요즘 기욱이 이런 건가 아니면 유독 저한테만 이런 건가. 어느 쪽이든 기욱이 답답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강서진. 내일.”
“…….”
그놈의 내일. 비상계단 문에 문고리에 손을 올린 서진이 입술을 깨물며 몸을 돌려 기욱을 노려봤다. 서진의 시선에 괜히 눈치가 보인 기욱이 혀를 차며 말했다.
“내일 오전에 시간 비워.”
“국시 준비하느라 바빠요.”
“서윤이가 사진 한번 찍재.”
“…….”
“데리러 갈게. 가라.”
기욱은 진이 빠진다며 턱 끝을 살짝 까닥였다. 촬영이라면 두 사람의 웨딩 촬영에 관한 것밖에 달리 없었다. 거기에 껴야 하는지까지는 의문이었지만, 서윤과 한 번도 그런 사진을 찍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싫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철컥, 서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철문을 닫고 복도를 나갔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본관 B1 복도.]
“아놔.”
머리 위로 울리는 시끄러운 방송에 철문을 열려던 기욱의 손이 잠시 멈췄다. 소매를 걷어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아침 회의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사실 심정지는 중환자의학과나 흉부외과 소속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시하기에는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결국, 기욱은 계단의 난간을 붙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정말이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뭐 하나 똑바로 되는 일이 없는 날이었다.
* * *
오전 회진을 마치고 의국으로 돌아온 기욱은 의자 한쪽에 앉아 어깨를 내밀고 있었다. 흘러내린 기욱의 어깨 위로 규건이 손바닥만 한 파스를 붙였다.
“…윽! 잘 좀 붙여!! 그거 하나 똑바로 못 해?”
“교수님이 움직이시니까 그런 거잖습니까.”
“뭐라는 거야, 썅.”
기욱은 끝이 살짝 올라온 것을 보고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끝을 살짝 다시 떼 바로 붙였다. 규건은 옷을 바로 한 기욱에게 테이블에 있는 반쯤 식은 커피를 내밀었다. 기욱은 머그잔에 담긴 블랙커피를 홀짝였다.
“야! 누가 커피 이딴 식으로 탄 거야?”
“그냥 좀 드세요. 카페인이 다 똑같은 카페인이지 뭘 그렇게 짜증을 내요?”
“내가 언제 짜증 냈어.”
“짜증 내고 계시잖아요. 아침부터 계속. 기분 나쁠 일도 없는데 애들이 교수님 눈치 보느라 바쁘다구요.”
“…….”
규건의 말에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기욱은 고개를 약간 갸웃거렸다. 기욱의 보기 드문 멍청한 표정에 규건은 기가 찬다며 입을 벌렸다. 기욱의 표정은 마치 자기는 그런 적이 없다는 듯 결백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팔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에 기욱은 어깨를 붙잡고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그러니까 지하를 왜 내려가셨어요. 전 설마 선배님이 거기 가실 줄 상상도 못 했어요. 신경외과가 흉부외과 환자 붙잡고 CPR을 왜 하고 있어요? 그러다 잘못됐으면 어쩔라고 그래요.”
“상태만 보러 갔던 거야. 도착한 게 나밖에 없을 줄 알았겠냐.”
“그럴 거면 외과 쪽을 가시던가요.”
“계속 그렇게 말대답할래? 넌 또 뭐가 문젠데?”
“문제 많죠! 그럼 담당과 애들 오면 빨리 돌아오시든가 왜 교대까지 하신 건데요. 걔들 교수님 가고 한 시간 동인했다던데요? 누구 아이디어예요. 대체?”
“환자가 젊었어. 정 교수 담당 환자였다고.”
“아, 그 젊은 교수님이요? 교수님이랑 나이 차이 크게 안 나시잖아요.”
“두 살인가 세 살. 잘 몰라 안 친해. 그래서 콜 받고 바로 왔잖아. 그보다.”
“예?”
기욱은 다 마신 커피를 엉망이 된 책상에 내려놓았다. 맛없다고 짜증 낼 때는 또 언제고, 기욱은 커피를 한 모금도 남기지 않고 마셨다.
“나 가고 나서 한 시간 동안 CPR 했다면서?”
“아, 저도 소문으로 건너 들은 거예요. 간호사들한테.”
“환자 살았어?”
“아, 거기까진…….”
규건이 아차 싶어 말을 흐렸다. 마침 입원 환자의 상태를 살피러 병동에 갔다 왔던 인턴이 돌아왔다. 명령을 내린 레지던트 선배는 없고, 의국 안에 교수 둘만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란 인턴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3시에 ER에서 어제 환자 올린다고 했잖아요. 김 선생이 보호자한테 상태 보고 오라고 시켰어요.”
“걘 어디 갔는데?”
“아마도 촬영 때문에 내려간 것 같은데요. 제가 뭐 병원 CCTV입니까? 애들 어디 있는지 말하면 알려 주게요?”
“알았어. 알았다고. 그놈의 잔소리.”
기욱은 인턴을 향해 손을 까닥이며 흉부외과에 내려갔다 올 것을 시켰다. 바쁘긴 하지만 그 정도 여유는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인턴을 보낸 기욱도 뭉그적거리며 일어났다.
“가운 안 입고 가세요?”
“어깨 아파.”
기욱은 팔을 돌려 가운을 입을 기운조차 없었다.
* * *
「머리 다 했으면 얼른 내려와.」 오전 11:34
고개를 숙여 내려다본 휴대폰에 온 문자에 서진은 눈을 살짝 감았다. 등 뒤쪽으로 서진의 머리를 마무리하는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서진의 머리를 하던 여자가 뭔가를 가지러 간 사이 서진은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
「아직 안 끝났으니까 ㅊㅘ영이나 해요.」 오전 11:36
오타가 났지만, 서진은 수정하기 귀찮은 듯 그대로 문자를 보냈다. 서진은 여자가 돌아온 뒤 오 분을 더 앉아 있고 난 뒤에야 계산대로 향할 수 있었다. 그 사이 기욱에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기욱에게 계산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서진은 카운터 앞을 서성였다. 서진을 본 다른 직원이 서진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 그게… 계산 때문에…….”
서진은 지갑을 열어 보이며 머뭇거렸다. 돈도 없는데. 어차피 기욱에게 받을 거지만 당장 돈이 나간다는 생각에 약간 불안해졌다. 서진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본 여자 직원이 목소리를 높였다.
“실장님 여기 손님…….”
“아래층에 웨딩 촬영 가시는 분. 아까 계산 끝났어!”
안쪽에 있던 실장님이라는 사람이 말했다. 가게 안에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서진에게도 그녀의 목소리가 충분히 들렸다. 굳이 다시 전달할 것도 없는 대화에 서진은 지갑을 집어넣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미용실을 나왔다.
지하와 1, 2층은 스튜디오, 3층에는 메이크업과 미용실 및 사무실로 이뤄진 작은 건물이었다. 서진은 터덜터덜 바깥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왔다. 건물 옆 주차장에 댔던 차에서 누군가 내렸다. 처음 보는 차였다.
“어.”
“…….”
그―시헌을 먼저 발견한 것은 서진이었다. 서진은 시헌이 내리기 전까지 그 차가 시헌의 차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다른 곳에서 준비하고 온 걸까? 머리만 하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서진과 달리 시헌은 지금 당장 촬영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아직도 서진을 발견하지 못한 시헌은 차에서 내린 뒤 차 앞유리에 기대 빠르게 담배를 물었다.
키 차이가 나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 모습이 영락없는 20대 시절 기욱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후, 손가락 사이로 담배 연기를 내뱉은 시헌이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서진을 발견한 듯 시헌이 담배 끝을 살짝 씹었다. 우웅―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서윤이었다.
― 어. 누나.
― 서진아! 아직도 머리 안 끝났어?
― 아, 아니야. 나 막 나왔어. 금방 갈게. 응. 끊어.
서윤의 통화에 서진은 서둘러 전화를 끊은 뒤 남은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기욱과 서윤은 지하 스튜디오에서의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사진을 찍던 중 서진을 발견한 서윤이 가볍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스튜디오에 서진도 웃으며 마저 촬영하라는 식으로 눈치를 줬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쁘잖아.
서진은 괜히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까 봐 끝말을 속으로 삼켰다. 서윤에게서 보안상 사진은 못 찍어 왔지만, 드레스가 마음에 든다는 얘기는 대충 들어서 알고 있었다. 요 며칠간 통화할 때마다 그 얘기만 했으니까 말이다.
국내외 유명 웨딩드레스 디자이너가 디자인했다는 드레스는 확실히 한눈에 봐도 다른 드레스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중에서도 서윤이 입고 있는 드레스는 이제 막 나온 신작 드레스로 아직 한 점밖에 없는 새 드레스였다. 그래서인지 다른 일반 드레스와 적게는 두 배, 많게는 세 배까지 가격 차이가 났다.
“신부님 동생분이시죠?”
“아, 네. 맞아요.”
촬영 보조를 하고 있던 여자 직원이 옷을 갈아입지 않고 서 있는 서진에게 다가왔다. 자신을 따라오라는 여자에 서진은 자세를 바꿔 사진을 찍는 서윤을 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사진 찍어도 상관없는 거죠?”
“그럼요. 안 될 거 있나요.”
서진은 곧장 휴대폰을 꺼냈다. 서진이 휴대폰 셔터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서진의 카메라를 의식한 기욱이 재빨리 서윤의 팔을 잡아당겼다. 예상치 못한 기욱의 돌발 행동에 드레스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 서윤의 비명이 들렸다.
“꺅! 오빠! 넘어질 뻔했잖아!”
“잡아 줬잖아. 안 다쳐.”
“부끄러우니까 놔줘.”
“뭘. 인제 와서.”
기욱이 실실거리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서진은 기욱이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딱 달라붙어서야 드레스를 입은 서윤의 단독 사진을 찍기 힘들었다. 사연을 모르는 사진사와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오갔다.
“그럼 그 자세로 진행할게요! 큭큭, 신랑님이 신부님한테 떨어지기 싫으신가 봐요!”
“아, 진짜 오빠.”
서윤이 얼굴을 붉히며 기욱의 품에 살짝 머리를 기대 숙였다. 기욱은 그런 서윤의 흐트러진 면사포를 바로잡아 줬다. 그 모든 장면을 휴대폰 카메라로 보고 있던 서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 찍으셨나요?”
“그게……. 아. 동영상이네. 하하, 그냥 가죠.”
사진 모드인 줄 알았는데 또 언제 동영상 상태였던 거지. 서진은 1분 남짓하게 찍힌 동영상을 정지하며 휴대폰을 닫은 뒤 여직원을 따라 안쪽 탈의실로 들어갔다.
서진은 탈의실 안쪽에서 미리 준비한 정장을 대충 걸친 뒤 밖으로 나왔다. 정장이라고는 입어 본 적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드문 서진은 끈 넥타이를 매는 것부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넥타이를 들고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넥타이를 들고 있는 서진에 여자 직원이 다가와 대신 넥타이를 매 주며 옷을 다듬어 줬다. 기욱에게서 대충 정장을 빌려 놨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정장은 마치 원래부터 서진의 옷인 것처럼 딱 들어맞았다. 치수는 또 어떻게 알고. 서진은 입고 왔던 옷가지들을 대충 배낭 가방에 구겨 넣은 뒤 두 사람이 촬영하고 있는 스튜디오로 갔다. 두 사람은 촬영장 한쪽 의자에 앉아 쉬며 화장을 다듬고 있었다. 서윤보다 먼저 서진을 발견한 기욱이 손을 살짝 들어 까닥였다.
“어머! 서진아! 잘 어울린다!”
“윽…. 누나, 왜 그래.”
“역시 기욱 오빠가 고른 옷이 괜찮네.”
“뭐?”
뜻밖의 대화에 서진이 의문을 표시했다. 화장을 다 고친 서윤은 립스틱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을 마셨다.
“서진이 네 정장을 뭐로 할까 고민하다가, 이거랑 조금 다른 디자인이 하나 더 있었거든. 난 그게 더 마음에 들었는데 오빠는 죽어도 그 옷으로 해야겠대. 그래서 마음대로 하라고 했었어. 근데 우리 서진이 보니까 이것도 괜찮네.”
“내 말이 맞잖아.”
“칫, 누가 틀렸댔어? 잘났어. 아주.”
“알았어, 알았다고.”
기욱은 다리를 꼬며 서윤의 옆 소파에 걸터앉았다. 서윤의 화장을 고쳐 주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서진에게도 다가왔다. 방금 해서 괜찮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서진을 이끌고 화장을 덧칠했다. 서진의 화장 수정이 끝나자 사진사가 촬영을 재개하자며 다가왔다.
“실내는 충분히 찍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그의 시선이 이제 막 들어온 서진에게 닿았다. 기욱은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뒤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할래?”
“뭐가요?”
“찍고 싶으면 찍어도 되고. 아니면 다른 층 가든가.”
“다른 층도 있어요?”
영문을 알지 못하는 서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서윤이 멋쩍게 웃으며 기욱 대신 말했다.
“하하, 그게……. 기욱 오빠가 다른 팀이랑 섞이는 게 싫다고 해서 전부 다 빌렸어. 2층이랑 지하에도 있는데 우리 서진이 마음에 드는 데서 사진 한번 찍자.”
“그게 무슨……. 됐어. 나야 이따 찍어도 돼. 아까 나가서 찍는다면서. 다 빌렸다면서. 몇 시까지야?”
“여섯 시 아니었어?”
“다섯 시.”
지금이 오전 11시인 것을 생각하면 한참 더 남았다는 뜻이었다. 오후에는 한복을 입고 촬영할 예정이라고 했다. 사진을 찍을 기회쯤은 언제든 있었다. 서진은 소파에서 일어나려는 서윤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기욱이 먼저 끼어들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서윤의 손을 낚아챘다. 서윤과 함께 밖으로 나가는 서진에 기욱은 마음대로 하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고 보니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시헌은 안에 안 들어오는 걸까 싶었다. 야외 촬영이 끝나고,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뒤 옷을 갈아입은 서윤과 기욱이 지하에서 촬영하는 사이 서진은 계단을 올라와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근처 담벼락에 몸을 기댄 서진은 반쯤 마시다 만 식은 게토레이를 벌컥벌컥 마시며 고개를 숙였다. 촬영까지는 두 시간가량의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스튜디오를 전부 빌린 기욱도 기욱이지만 풀타임의 촬영은 서진을 지치게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중간부터는 거의 촬영 보조나 다름없는 신세였지만, 정작 두 사람은 서진과 달리 아무렇지도 않았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확실히 둘의 체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제길. 더럽게 힘들어.”
서진은 다 마신 게토레이 페트병을 만지작거리며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옷을 갈아입는 것은 비단 두 사람만이 아니었던 듯 서진도 중간에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었다. 정작에서 깔끔한 사복 차림, 다시 디자인이 조금 다른 정장이었다. 제 옷이 아니니 주머니에 담배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문제는 그러니까 워낙 정신이 없어 담배를 어디에다 뒀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시헌의 차는 여전히 스튜디오 건너편에 있었다. 분명 아침에 본 것 같은데. 차를 두고 어디를 간 건가 싶었다. 서진은 괜히 갈증이 나 빈 게토레이를 털어 마셨다.
“담배 빌려줄까?”
“아, 씨발 깜짝아!”
“…….”
“그게……. 윽. 놀랐잖아. 왜 거기서 나타나는 거야.”
서진은 왁스로 올린 앞머리를 만지려다가 뒤늦게 손을 내려놓았다. 서진은 몇 시간 만에 보는 시헌을 위아래로 내려다봤다. 시헌의 모습은 아침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서진의 옆에 선 시헌은 담배를 입에 문 뒤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후, 하고 시헌의 입가와 담배 끝에서 올라오는 향이 서진을 자극했다. 시헌은 한 번 연기를 내뱉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뒤 담배 케이스를 서진 쪽으로 내밀었다.
“피울 거면 피우고. 아니면 말고.”
“내놔.”
서진은 탁, 하고 시헌의 담배 케이스에서 재빨리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서진이 담배를 물기 무섭게 시헌이 라이터를 내밀었다. 불을 붙여 줄 생각인지 아닌지 머뭇대는 손가락에 서진은 그냥 라이터를 빼앗아 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렇게 같이 서 담배를 피운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서진은 옷을 입고 있는 시헌의 배 근처를 흘끗댔다.
“다친 데는……. 괜찮아?”
“그럭저럭. 외래 다니고 있어.”
“재수술했다며.”
“중간에 한 번. 지금은 괜찮아.”
“생각보다 일찍 복학했네. 실습 나오긴 이르지 않아?”
“교수님한테 부탁했어. 빨리 끝내고 국시에 집중하려고.”
서진은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헌이 국시에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애당초 그만한 시험도 아니지만―은 들지 않았지만, 집안 분위기를 생각하면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달리 할 말이 없었던 서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담배를 태웠다. 같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고사하고 이렇게 대화를 해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이제 서진과 시헌의 관계는, 단순히 서로 헤어진다고 해서 떨어질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슬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담배를 다 피운 서진이 스튜디오로 몸을 돌렸다. 서진은 괜히 기욱이 저를 찾았을 때 시헌과 있는 모습을 보여 줘 기욱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다. 서진은 늘 시헌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서진이 등을 돌리자 시헌이 그런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야, 하지 마.”
“잠깐이면 돼.”
보이지 않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시헌 또한 손을 내려놓았다. 마지못해 등을 돌린 시헌은 아스팔트 바닥과 함께 서진의 얼굴 대신 구두를 바라봤다.
그날.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다. 시헌은 칼에 찔린 고통보다 서진을 지켜 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마음이 더욱 강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기욱의 그림자에서 자라 온 시헌에게 기욱은 다른 의미로 두려운 사람이었다. 서진도 그런 시헌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만약 된다면.
“예전처럼은 아니더라도.”
“…….”
“어색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
“얼굴 안 보고 살 수 있는 거 아니잖아.”
시헌의 마지막 말에 서진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헌이 기욱의 동생인 이상, 서윤과 기욱이 결혼하는 이상. 병원 생활을 계속하는 이상 시헌과 서진의 인연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서진은 뒷목을 살짝 긁으며 고개를 들지 못하는 시헌을 내려다봤다.
“그러네.”
서진의 말에 시헌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고개를 드는 시헌을 본 서진이 붉어지는 얼굴을 속으로 숨겼다. 저 표정이 귀엽다고 생각한 게 얼마 만일까. 애써 표정을 가린 서진은 말을 이어 갔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말이야.”
“하하, 그러게. 네 말이 맞네.”
“슬슬 들어가자.”
“응.”
서진과 시헌은 두 사람이 있는 지하 스튜디오로 내려갔다.
* * *
“누구세요!”
“택배예요!”
택배? 공부하고 있던 서진은 택배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택배를 시킨 기억은 없었다. 펜을 내려놓은 서진은 철문을 열었다. 초저녁, 빨간 조끼를 입은 택배 기사가 서진에게 제법 묵직한 상자를 내밀었다.
“강서진 씨 맞으시죠?”
“아, 네. 맞는데요. 택배 올 만한 게 없는데요…….”
“이름은 맞는데……. K웨딩 스튜디오에서 온 택배예요.”
“아. 그럼 일단 주세요.”
K웨딩 스튜디오라면 얼마 전에 서윤의 웨딩 촬영을 했던 곳이었다. 택배를 보낸다는 말은 들은 기억이 없지만, 낯이 익은 장소라는 것은 분명했다.
“예. 고생하세요.”
서진에게 택배를 넘겨준 기사가 유유히 엘리베이터를 통해 내려갔다. 택배 상자를 품에 안은 서진은 거실 바닥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전화해 볼까 고민하던 서진은 결국 손으로 상자를 뜯었다.
“액자?”
사실 택배를 손으로 받았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서진은 사진까지 끼워진 액자를 하나씩 살펴봤다. 작은 거 큰 거 합치면 총 4개 정도가 있었다. K웨딩에서 온 사진에는 두 사람과 서진, 시헌밖에 없었다. 네 사람이 나온 단체 사진을 본 서진은 묘한 감정이 들었다.
우웅― 서진의 책상에서 진동이 울렸다. 마지막 남은 액자의 뽁뽁이를 뜯기 위해 손을 뻗던 서진은 어쩔 수 없다며 전화를 받았다. 기욱의 전화였다.
― 왜요?
― 사진 받았어?
― 방금요.
기욱의 말에 담담하게 대답한 서진은 습관처럼 천장을 둘러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피스텔 방을 전부 뒤졌지만 사실 몰래 카메라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기욱은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건가 싶었다.
― 배달한다고 연락 왔었어.
묻지도 않았는데 술술 부는 기욱에 서진은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말해 주지 그랬어요.
― 서윤이가 비밀로 하자고 그랬어. 나중에 한마디 해.
― 형 아이디어가 아니구요?
― …….
서진은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당연히 기욱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서진은 마지막 남은 액자를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목에 건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 왜 말이 없어요?
― 아니, 그….
― 그?
뽁뽁이를 뜯지 않은 액자를 손에 쥔 서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을 잘못한 건가? 서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대화를 한 기억이 없었다.
― 형이라고 부르는 거. 자연스러웠다 싶어서.
뒤늦게 기욱의 말의 의미를 자각한 서진이 입을 살짝 벌렸다. 내가 그랬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렴 언제까지 당신이니 애매한 호칭으로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오히려 이편이 훨씬 나았다.
― 그렇다고 매형이라고 부를 생각은 절대 없어요.
― 기대 안 해.
서진은 기욱의 전화를 받으며 마지막 액자의 뽁뽁이를 걷어 냈다. 갈색 바탕의 고급스러운 액자에 담긴 사진을 본 서진은 통화를 하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사진에는 드레스를 입은 서윤과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사실 워낙 사진을 많이 찍어 이런 사진 언제 찍었나 기억도 안 나지만. 서진은 엄지손가락 끝으로 유리 안 사진 속 서윤을 만졌다.
― 강서진?
― 그게 저……. 볼일 없으면 전화 끊을게요.
― 어, 그래.
기욱도 일을 봐야 하는지라 기욱 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서진은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한동안 작은 액자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정말 설마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설령 이 모든 게 꿈이라 해도, 사진 속 서윤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서윤만 행복하다면.
서진은 정말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눈물을 훔친 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액자들을 걸 곳을 물색했다. 탁, 하고 발끝으로 빈 상자가 채였다. 상자 안쪽에서 뭔가가 나왔다.
“외장 하드?”
외장 하드에는 <강서윤&박기욱>이라는 네임택이 붙어 있었다. 하드 반대편에는 K웨딩스튜디오라고 적힌 걸 보아서 스튜디오에서 같이 보낸 것 같았다. 서진은 시계를 보더니 외장 하드를 들고 자리로 돌아와 노트북에 꽂았다.
* * *
“…….”
쿵쿵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폰을 끼고 공부를 하고 있던 서진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조용한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또다시 쿵. 소리가 났다. 문 쪽에서 나는 소리가 틀림없다 생각한 서진은 이어폰을 빼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 깜짝아.”
“자냐?”
우민이었다. 서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문틈 사이에 서 있는 우민을 바라봤다. 우민은 누가 봐도 자다 일어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잠이 덜 깬 우민은 하품하며 반강제적으로 서진의 집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교, 교수님? 무,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긴 무슨 일이야. 좆같은 옆집 일이지. 어떻게 똑같은 옆집인데 니네 집은 이렇게 조용하냐. 말이 안 돼요. 말이.”
“그쯤 되면 경찰 불러야 하는 거 아녜요?”
“하암, 조만간 부를 거야. 짜증 나 죽겠다 아주. 물 좀 마신다.”
“아, 따라 드릴게요.”
밤마다 하루가 멀다고 섹스를 하는 옆집 때문에 우민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듯싶었다. 물을 찾는 우민에 서진은 후다닥 뛰어가 컵에 물을 따라 줬다. 우민은 벽에 몸을 반쯤 기대 서진이 따라 주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근데 넌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하냐?”
“하하, 그게…….”
서진은 괜히 책상 쪽을 흘끗댔다. 책상 위에는 두꺼운 의학 서적들과 국시 관련 문제집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서진은 새벽 세 시, 조금만 더 공부하고 잘 생각이었다. 잔뜩 늘어져 몸에 딱 달라붙는 우민의 회색 티셔츠에 눈 둘 바를 모르는 서진은 괜히 고개를 돌리며 위층을 손가락질했다.
“피곤하시면 먼저 가서 주무셔도 상관없어요.”
“잠 깼어.”
“네?”
우민은 작은 테이블 쪽에 있는 의자를 서진의 책상 근처로 끌어와 멋대로 앉아서 서진이 공부하고 있던 교재들을 제멋대로 살폈다.
“이야, 완전 추억인데? 뭐 해? 와서 앉아. 모르는 거 있으면 알려 줄게.”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
“아뇨. 가, 감사합니다.”
우민의 시선에 서진은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교수가 말하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으면 된다고 했던가. 이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는 듯한 서진의 행동에 우민은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를 올리며 서진의 등을 토닥였다. 사실 늦은 오후 무렵 퇴근해 반나절을 잔 터라 크게 졸리진 않았다. 우민의 옆에 앉은 서진은 괜히 긴장됐다. 설마 우민과 이렇게 나란히 앉아 뭔가를 하게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면요…….”
진짜 물어봐도 되겠지? 서진은 머뭇거리며 책장 안쪽에 있는 노트를 꺼냈다. 몇 번을 봤는지 노트는 낡고 닳아 있었다. 제법 두툼한 노트를 품에 안은 서진은 마치 별거 없는 내용의 일기장을 품에 안고 수줍어하는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뭔데 이게?”
“모, 모르는 거요. 그냥 그때그때 적어 놨는데 꽤 많아요.”
“그럼 물어봐. 뭘 꾸물대고 그래?”
“그게, 그…….”
막상 꺼내긴 했지만, 서진도 이걸 선뜻 보여 주기는 부담이었다. 정말 궁금한 것들을 전부 적어 놓은 거라 우민이 보면 웃을지도 모르는 내용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서진의 뭉그적거리는 태도가 짜증이 났는지 우민은 서진이 들고 있는 노트를 확, 하고 낚아챘다.
“잠깐…! 마음의 준비가…….”
“마음의 준비는 얼어 죽을. 모르는 게 뭐 창피하다고 그래?”
우민은 서진의 노트를 빼앗아 다시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빼곡한 글씨와 직접 그린 그림 등으로 가득 찬 노트에 서진은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책상 아래로 숙였다.
“하, 새끼 진짜…… 다 큰 성인 남자가 그렇게…….”
“…그렇게?”
“그, 그렇게…… 아, 됐어!! 궁금한 거나 물어봐!”
빌어먹을. 책상에 한쪽 팔을 걸친 우민은 이마를 짚었다. 원래부터 좀 귀여운 구석은 있었지만, 오늘은 특히 유독 더 심한 기분이 들었다. 잠이 덜 깼나? 혼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며 물어볼 구석을 찾는 서진을 본 우민은 제 볼을 손톱 끝으로 꼬집었다.
“볼은 또 왜 꼬집고 그래요?”
“너 때문에 그런다. 너 때문에!”
“…저요?”
“너 진짜……. 됐어. 이 눈치 없는 자식아.”
“교수님 저 눈치 있습니다.”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하는 놈치고 제대로 된 놈을 내 병원 역사상 본 적이 없다!”
“도대체 무슨 눈치인데요, 그럼?”
우민의 말장난 아닌 말장난에 서진은 삐진 듯 입술을 내밀었다. 그런 서진에 우민은 이 말을 한 번 더 짚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눈치가 없는 거라고. 순수한 마음으로 공부를 알려 주겠다고 했건만 우민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 남자랑 사귀어 봤다며.”
“아.”
상황을 이해한 듯한 서진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서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우민을 올려다봤다.
“교수님은 저 그렇게 안 보고 계시잖아요.”
“당연하지 인마!! 게이라 해서 아무 남자나 막, 막 다 건드는 거 아니거든? 너랑 나랑 나이 차이가 몇 살인데! 씨발, 범죄야 범죄!!”
정말 일 초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에 대한 죄책감인지 우민은 더욱 욱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는 또 뭐냐 그렇게는. 도대체 어떻게 한다는 건데! 우민은 홧김에 욕까지 써 가며 반박했음에도 쉽게 열이 가시지 않아 손을 부채 삼아 휘저었다.
“큭큭, 하하하하!!”
“뭘 또 처웃고 지랄이야. 웃겨? 내가 웃기냐?”
“큽… 죄, 죄송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교수님이 반응이 너무 격렬하셔서…….”
우민이 기욱보다 한두 살이 많았던가? 우민과 서진의 관계가 범죄라면, 그보다 기껏해야 두 살 어린 기욱과 서진의 관계 또한 범죄나 다름이 없었다. 저 나이대 사람은 다 기욱과 비슷한 줄 알았는데 마냥 그런 것도 아닌 듯싶었다. 누구랑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웃음을 참는 서진에 짜증이 난 우민이 결국 소리를 질렀다.
“내 반응이 뭐가!!”
“찔리는 사람 같아서요.”
“아오, 이 주둥아리를 어떻게 꿰매야 잘 꿰맸다고 소문이 날까. 너 아주 병원에서도 말 그딴 식으로 해라. 내가 아니라 다른 의사한테 죽었다. 아주!”
“교수님인 거 아니까 하는 거죠.”
“야야, 남들 들으면 오해할 소리 하지 말고 물어볼거나 물어봐!”
우민은 책상에 놓인 책들을 손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하여튼 정말 못 하는 말이 없었다. 우민과의 대화 탓인지 긴장이 풀린 서진 또한 순조롭게 모르는 것들을 하나씩 짚었다. 모르는 걸 물어본다고 해도 사실상 우민의 일방적인 강의에 지나지 않았지만, 서진은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 * *
“하암, 잠깐만 담배 한 대만 피우고 하자.”
한 시간이 좀 지났을 무렵 우민은 말을 멈추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를 뒤졌다. 자다 일어났는데 담배를 가져왔을 리가 없지. 집에 가서 가져와야 하나 하고 귀찮다고 생각하던 중 서진이 제 책상 위에 있는 담배 케이스와 라이터를 내밀었다. 우민이 서진의 담배를 발견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너도 라이트 피우냐? 똑같은 거네.”
아무렴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우민은 서진이 준 라이터와 담배를 받아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여기서 피우셔도 되는데요.”
“냄새 배잖아. 베란다에서 빨리 피우고 올게. 넌 안 피냐?”
“전 생각 없어요.”
“그래.”
우민은 손가락으로 담배를 피우는 척 시늉을 하며 베란다로 나갔다. 빨리 피우겠다고 손짓을 한 모양인데 그 행동이 발랄하니 귀여웠다. 흰색 커튼 사이로 난간에 몸을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우민의 모습이 보였다. 벽 쪽에 붙어 있다시피 한 디지털시계가 새벽 4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우민이 들어오기 전까지 눈 좀 붙여야겠다 생각한 서진은 책상에 엎드렸다.
드륵, 소리가 들리며 커다란 유리문을 열고 우민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이 조용한 것을 눈치챈 우민은 책상에 서진이 엎드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식, 피곤하면 피곤하다고 말할 것이지.”
혼잣말로 중얼거린 우민은 담배와 라이터를 서진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가까이서 서진을 보니 속눈썹이 참 짙었다. 자세가 불편한지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서진의 모습에 우민은 피식, 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어둑어둑 해가 뜨는 바깥을 바라봤다.
“설마, 밤새 하진 않겠지…….”
그러면서도 쉽게 집으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진짜 경찰에 신고하든지 아는 사람을 알아보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2층으로 올라간 우민은 침대 옆 장롱을 열어 얇은 여름용 이불을 꺼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지난번에도 이런 일이 한번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우민은 말없이 이불을 서진에게 덮어 준 뒤 2층으로 돌아갔다.
뭐, 자고 가라고 했으니 자도 되겠지?
* * *
“졸려….”
서진은 아침에 일어나 어떻게 병원에 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침 의국 회의에 참여하게 된 서진은 동기들과 함께 뒤쪽을 두리번거렸다. 먼저 도착한 재혁이 서진을 발견하며 손을 흔들었다. 흐물거리는 문어처럼 재혁에게 걸어간 서진은 재혁의 옆자리에 의자를 꺼내 앉았다.
결국, 그대로 잠이 든 서진은 몇 시간 자지 못한 채 병원으로 왔다. 2층에서 우민이 자는 것을 봤지만 깨우기 뭐했던 터라 조용히 준비해 집을 나왔다. 뭐, 옆집이고 하니 두고 가도 상관은 없지 않을까 싶었다. 오프가 아닌 이상 병원에서 얼굴 한 번은 마주치겠거니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한 서진은 기다란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했다.
“서진 형?”
“시작하면 깨워 줘.”
“잠깐만… 형!”
놀란 재혁이 서진을 깨웠지만, 서진은 엎드린 채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직 회의 시작 안 했잖아.”
잠꼬대인지 혼잣말로 중얼거린 서진이 다시 잠들었다. 아직 교수님도 안 오셨는데 이렇게 자도 되는 건가? 옆에 있던 동기들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교수님.”
“어. 그래. 밤새 별일 없었지?”
아니나 다를까 말을 하기 무섭게 아침 회의 담당인 교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좁은 회의실 안에서 눈치를 보며 일어서는 의사들에 재혁이 서둘러 깨웠지만, 서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씨, 형 좀 일어나 봐.”
일어난 것도, 선 것도 아닌 재혁이 서진의 몸을 흔들었다. 그런 모습이 가만히 있는 다른 의사들과 달리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변의 의사들과 대화를 하던 중년의 신경외과 교수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재혁은 그럴 줄 알았다며 이마를 짚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실습생인가?”
그가 인사를 하는 재혁 대신 옆에 있는 규건을 흘끗 바라봤다. 재혁을 본 규건은 인상을 찌푸리며 허벅지 밑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하필이면 아침부터 사고를 쳐도 사촌 놈일 건 또 뭐란 말인가.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서진 형, 좀 일어나 봐.”
그 와중에도 재혁은 서진이 신경 쓰이는지 서진의 몸을 툭툭 건드리며 서진을 깨우려 하고 있었다. 오기 전에 수면제라도 먹은 걸까? 평소에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는 서진이 오늘따라 왜 이러는지 재혁으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강서진이라고?’
재혁의 말을 들은 규건은 갈수록 골치가 아픈 기분이 들었다. 서진과 직접 대화를 한 적은 없더라도 규건은 서진을 병원에서 본 적은 있었다. 그가 서윤의 동생이라는 것을 안 이상 일을 크게 벌일 수는 없었다.
“하하, 교수님. 저 친구가 많이 피곤했나 봅니다. 회의 시작 전엔 뭐, 일어나겠죠.”
“그런가? 뭐,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규건의 태도에 교수가 등을 돌렸다. 교수가 등을 돌리기 무섭게 규건은 재빠르게 서진이 있는 쪽을 손가락질하며 재혁에게 눈치를 줬다.
“죽었어. 니네…….”
“형, 내가 아니라…….”
재혁이 억울하다며 입을 내밀었으나 이내 분위기에 휩쓸려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재혁은 울며 겨자 먹기로 서진을 깨웠고, 서진은 회의 오 분 전에 간신히 일어났다.
* * *
“형…! 어떻게 됐어요?”
“괜찮아요?”
점심을 먹기 직전 따로 규건에게 불려 간 서진이 신경외과 병동으로 돌아왔다. 교수님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잔 서진의 이야기는 순식간에 실습생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그런 서진이 불려 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규건의 얼굴을 보고 돌아온 서진은 유독 호들갑인 애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였다.
“어?”
“어, 가 아니라요! 혼난 거 아녜요?”
“안 혼났는데? 그보다 내가 왜 혼나야 하는데?”
“그거야…….”
뻔뻔한 서진의 태도에 재혁이 말문을 닫으며 옆에 있는 동기들을 바라봤다. 서진이 불려 간 이유는 아침에 잔 것 때문은 맞았지만, 정작 가서는 다른 대화만 하다가 왔다. 서진은 규건에게 받은 마카롱을 재혁과 몇몇 동기에게 던졌다.
“헐. 이게 뭐예요?”
“받았어. 먹으라고. 난 몇 개 먹고 왔으니까 알아서 먹어.”
“근데 진짜 별 얘기 안 했어요?”
“별 얘기 안 했다고. NS 생각 있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말한 게 다야.”
식당으로 향하는 서진은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며 손을 저었다. 사실 처음부터 신경외과에 갈 생각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의대에 입학했을 때 가장 가고 싶지 않은 과이기도 했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과 보다 눈이 갔다. USB에 담긴 기욱이 레지던트 시절을 보낸 방대한 자료들은 서진의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USB를 받고 얼마 뒤 며칠 밤을 새우며 그 모든 자료를 다 봤다는 것을 기욱에게 말할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점? 야, 뜬금없이 무슨 점이야.”
서진은 국에 밥을 말아 먹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진의 맞은편에 앉은 재혁은 밥을 먹다 말고 말했다.
“저 고등학교 친구가 갔다 왔다는데 그냥 대박이래요. 저보고 꼭 한번 가 보라는데 이게 또 혼자 가긴 그렇잖아요.”
“안 가.”
“아, 형 그러지 말구요. 같이 가요.”
“싫어. 내가 그런 델 왜 가.”
“갈 수도 있는 거죠. 형은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그 친구요, 대기업 다니는데 여자 친구랑 결혼할 예정이었거든요. 그 무당이 걔한테 막 여자한테 사기당할 거라고 그런 얘길 하는 거예요. 애가 참해서 누구한테 돈 빌려주거나 투자, 주식 이런 거에 관심이 없는 애거든요. 절대 그럴 일 없다고 말하고 돌아갔는데…….”
“돌아갔는데?”
“여자 친구요, 사실은 애 하나 딸린 유부녀인데 결혼사기였대요. 결혼 이 주 전에 잠수타고 그 여자한테 피해 본 남자만 셋이라는데 뭐, 난리가 났죠. 경찰에 신고는 했는데 아직도 못 잡았을걸요? 대박이지 않아요?”
“우연이야 우연. 안 간다고.”
“그러지 말구요. 형 곧 있으면 누나 결혼식도 하고 그러는데 한 번쯤은 가 봐요.”
“누나랑 뭔 상관이야.”
서진은 다 먹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재혁은 정말로 그 점이라는 걸 보러 가고 싶은 듯 서진을 빤히 바라봤다.
“형밖에 없다구요. 같이 갈 사람이.”
“아. 너…….”
재혁의 고백에 서진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재혁이 게이라는 말을 시헌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려니 하고 흘려 넘겼지만. 재혁이 커뮤니티를 찾아내지 않았더라면 시헌이 서진을 발견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새삼스럽게 빚을 하나 진 기분이 든 서진은 컵에 담긴 물을 마시며 대답했다.
“하아, 알았어.”
“아싸! 그럼 주말에 바로 가는 거예요?”
“그게 돼?”
“사실은 미리 예약해 뒀죠!”
서진이 틀림없이 갈 거라고 생각한 재혁이 자랑스럽게 브이 자를 지었다. 서진은 가끔 재혁이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일을 벌이는지 알 수가 없을 때가 종종 있었다.
“점이라니 그런 거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서진은 테이블에 팔을 괴며 혼자 중얼거렸다.
* * *
“여기라고?”
“맞는 것 같은데요?”
“그냥 오피스텔이잖아.”
“원래 진짜는 숨어 있는 법이죠.”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미로처럼 얽혀 있는 오피스텔 복도에 선 서진은 재혁의 등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휴대폰을 보며 철문 앞에 선 재혁이 조심스럽게 벨을 눌렀다.
“우왁! 깜짝아.”
마치 두 사람이 올 걸 알았다는 듯 벨을 누르기 무섭게 열리는 문에 재혁이 놀라 뒷걸음질 쳤다. 서진은 그런 재혁의 어깨를 붙잡으며 한숨을 쉬었다.
“들어가.”
“혀, 형은요?”
“너 다 보고 들어갈게.”
“왜요. 전 상관없는데.”
재혁이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서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진의 시선이 안쪽에 서 있는 여자 무당과 눈이 맞았다. 문 앞에 선 서진은 잠깐이지만 기욱과의 관계가 탄로 날 것 같다는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재혁이 게이라고 해도 그것과 이건 별개였다. 무당이 서진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넌 나중에 들어와.”
그렇게 말한 무당은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약간 언짢긴 했지만. 서진은 재혁에게 가라며 손짓을 했다.
“아, 저 무섭다구요……. 그냥 같이 가면 안 돼요?”
“귀신의 집도 아니고 무섭긴 뭐가 무서워.”
재혁이 마지못해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삐빅, 도어락이 닫히는 벨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회색 복도에 홀로 남겨진 서진은 혀를 차며 아래층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피스텔 밖으로 나온 서진은 벽에 기대 담배를 물었다. 이른 오후, 담배 연기가 햇살을 타고 허공에 흩어졌다. 오피스텔 건너편 상가에는 작은 편의점이 있었다. 툴툴, 담배 케이스를 털어 보인 서진은 담배를 끈 뒤 편의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3,900원입니다.”
기계처럼 바코드를 찍은 알바생이 서진을 보며 말했다. 서진은 계산대 위에 있는 새 담배를 주머니에 구겨 넣은 뒤 담배와 함께 산 인스턴트커피 캔을 따 그 자리에서 반쯤 마셨다. 커피 캔을 입에 문 서진은 지갑을 펼쳤다. 문득 지갑 안쪽에 있는 검은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고민하던 서진은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검은색 신용카드를 꺼내 계산을 했다.
“영수증 필요하신가요?”
“아뇨. 괜찮아요.”
서진은 손을 흔들며 카드를 돌려받았다. 편의점에 나오기 무섭게 캔커피를 전부 비운 서진은 편의점 문 옆 쓰레기봉지 사이에 커피 캔을 구겨 넣었다. 서진은 담배를 한 대 더 물며 검은색 신용카드와 지갑을 만지작거렸다.
“…….”
지갑 한쪽에는 메이커 로고가 그대로 박혀 있었다. 확실히 비싼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기욱에게 지갑을 반강제적으로 받은 게 5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시간이라는 것이 빠르긴 빨랐다. 그때 받은 카드. 가지고 있긴 했지만 사용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용이 안 돼도 이상하지 않을 거 하나 없는 카드였다.
「형 저 끝났는데 어디예요?」 오후 2:33
재혁에게서 문자가 왔다. 서진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오피스텔 건물을 올려다보며 담배를 끈 뒤 한 손으로 익숙하게 문자를 보냈다.
「금방 올라가.」 오후 2:34
서진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택했다. 담배 연기가 배진 않았겠지? 괜히 손으로 몸을 툴툴 털며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안쪽에서 점을 보고 나온 재혁이 서진을 발견하며 손을 흔들었다.
“어디 갔다 온 거예요.”
“요 앞에. 그냥 담배 좀 피우고 왔어.”
서진은 몇 개비 남지 않은 담배 케이스를 재혁에게 건넸다. 오피스텔을 들어가기 전 서진과 피웠던 담배를 돛대라고 말했던 재혁은 이게 무슨 횡재냐며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받았다.
“형 이거 다 피워도 돼요?”
“얌마, 아주 줄담배를 해라! 피우든지. 하나 샀어.”
뜯지 않은 담배를 허공에 흔들어 보인 서진은 담담하게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살기 딱 좋은 복층형 오피스텔 1층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동상이 있었다. 서진은 무당이 앉아 있는 앞쪽 소파에 앉았다.
“생일이 뭐야?”
“어…. 8월 17일인데요.”
잠시 머뭇거리던 서진이 입을 뗐다. 태어난 날짜를 물어본다는 말은 재혁에게 들었기 때문에 새삼 놀라울 것은 없었다. 작은 테이블 위에 TV에서나 볼 법한 엽전이 굴러가며 소리를 냈다. 엽전을 손에 담은 무당과 서진의 눈이 맞았다.
“누나. 다음 달에 결혼하네.”
“…….”
서진은 누나가 있다는 말은 꺼낸 적이 없었다. 기회가 되면 서윤의 점도 봐 줄까? 하고 생각한 것이 전부인 일이었다. 누나가 있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결혼에 대한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혹시 먼저 들어간 재혁이 말한 건 아닐까. 그 녀석 입이 싸니까. 서진은 우연이겠거니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허벅지 밑으로 주먹을 쥐었다. 무당의 말이 이어졌다.
“오래 사귀었네. 남자가 너랑 누나 직장 상사야?”
“전 아닌데요.”
PA간호사인 서윤에게 기욱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서진은 적어도 아직까지 기욱이 상사라는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서진의 부정에 무당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코웃음을 쳤다.
“그만하면 상사지 뭐야.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
쓸데없이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무당이었다. 사실 재혁과 달리 반강제적으로 끌려온 서진은 무당에 대한 마음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면서 아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누나가요, 행복할까요?”
스스로 질문 해 놓고도 참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진은 늘 서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잠시 동안 이어지는 침묵에 서진은 괜한 걸 물었다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깐뿐이었다.
“너 하는 거에 따라서. 어차피 너희 둘밖에 없잖아.”
“…….”
“누나가 남편한테 사랑은 받네. 근데 그 남자는 천성이 그런 사람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기욱의 성격을 생각한 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욱과 얽히기 시작한 지 십 년이 넘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오래 엮이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동안 박기욱이라는 사람은 첫 만남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무당은 서진의 말을 반쯤 무시한 채 멋대로 말을 이어 갔다.
“사람이 쉬운 사람이라고. 집에 돈 많고, 카리스마 있고, 얼굴 꽤 잘생겼으니 사람 꼬이기 쉬운 스타일이잖아.”
무당의 말에 서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부정을 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생일 언제야?”
“예?”
“누나 남편 생일 언제냐고. 알아?”
“어. 11월 4일이요.”
처음과 마찬가지로 또 다시 엽전이 테이블 위를 왔다갔다. 물 흐르듯 흘러 기욱의 점을 대신 봐 주는 꼴이 됐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기욱에 대해 궁금한 것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가끔, 아니 자주. 기욱이 같은 사람이 맞긴 한 걸까 하는 의심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엽전을 다시 모은 무당이 서진과 손에 담긴 엽전을 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네 의사네. 누나랑 남자가 머리 쪽으로 일하고. 누난 간호산데 의사처럼 일하잖아.”
이쯤 되니 서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앞서 들어온 재혁이 나불댔다고 해도 정보의 한계가 있었다.
“너 남자랑 헤어졌지?”
“……하하, 무슨 말을.”
서진은 애써 모르는 척하며 말을 돌렸다. 자신은 한 번도 눈앞에 있는 무당에게 남자―시헌과 사귄 적이 있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아무리 찍어 맞춘다고 해도 보통 아무 남자에게나 막 게이냐는 얘기를 하진 않을 것이었다. 아닌 척 말은 하지만 서진도 내심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는 없었다.
“여자랑 헤어진 걸 잘못 말한 거 아녜요?”
“결혼하고 싶은 녀석이 그런 남자랑 만나?”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아깐 헤어진 거 물어봤으면서. 일방적으로 할 말만 내뱉는 불친절한 무당에 서진은 묘하게 짜증이 났다. 그러면서도 틀린 말 하나 없는 무당의 말에 속으로는 반박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서진은 무당이 이 복잡한 상황을 조금 더 쉽게 풀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서진과 눈을 마주친 무당은 부채를 접어 무릎 아래로 내려놓았다.
“너 결혼 못 해.”
“왜요?”
“말했잖아. 결혼하고 싶은 녀석이 그런 남자를 만나냐고. 그 남잔 네가 누구랑 있는 꼴을 못 보거든. 반항할 배짱도 없으면서 여자는 무슨. 그래도 복은 있어서 아버지 노릇은 하겠네.”
“……네?”
갈수록 가관이었다. 결혼은 못 하는데 애 아빠 노릇은 하겠다니, 나중에 애라도 입양한다는 뜻인가? 그러나 서진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입양이니 뭐니 하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갈수록 입을 벌리게 만드는 무당의 말에 서진은 어디까지 맞장구를 쳐 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아, 헤어진 지는……. 그러니까 일 년 좀 넘었어요.”
서진은 될 대로 되라며 처음 무당이 했던 질문에 대해 뒤늦게 대답을 했다. 미신 같은 건 믿지 않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욱과 서윤의 직업은 물론이거니와 과까지 맞춘 무당에 서진은 될 대로 되라며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서진은 시헌과 사귄 것을 빨간 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무당은 엽전이 반듯하게 올라간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녀가 테이블을 쿡쿡 찌를 때마다 엽전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불륜이네.”
“불륜이라니…!! 저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구요!”
늘 마음 한구석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단어를 짚어 내자 서진은 상대를 망각한 채 욱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내 눈앞의 무당의 얼굴을 마주한 서진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만에 하나라도 무당이 진짜라면 이런 얘길 할까 봐 오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전 남자랑 사귈 때도 불륜이었잖아. 이제 와서 화내면 뭐가 달라져?”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서진은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하면 돼요?”
“뭘 어떻게 해. 누나 포기할 생각도, 마음도 없는 주제에.”
“윽…….”
말문이 탁, 막혀 왔다. 시헌과 헤어지고 난 뒤부터였을까? 과거에는 단순히 기욱의 일방적인 행동에 휘말리기만 했다면 결혼까지 앞둔 지금은 기욱의 행동에도 자신의 책임이 아주 없지 않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자신과 기욱이 저지른 과오인 셈이었다.
“그래서 죽으려고?”
“네? 아니, 저 자살 같은 거 생각한 적 없는데요…….”
뜬금없는 무당의 말에 당황한 서진이 말끝을 흐렸다. 죽는다니 누가 죽는단 말인가. 물론 현실이 지옥 같은 건 사실이지만 서진은 자살 같은 걸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생각은커녕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이었다.
“몇 명이나 더 죽이고 죽으려고?”
“그러니까 저 죽을 생각 없다구요.”
죽이는 건 또 뭐야. 사람이 무슨 살인자도 아니고. 서진은 일방적으로 내뱉는 무당의 말에 기분이 불쾌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에게 할 말 안 할 말이 있는 법이었다.
“지금은 모르지.”
“……그럼 나중에 제가 자살 기도라도 한다구요?”
“근데 넌 못 죽어.”
서진은 이 상황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고, 나도 자살 기도를 하는데 또 못 죽는 건 뭐란 말인가. 서진은 기욱을 원망하고 있지만, 그 원망이 제 손으로 기욱을 죽일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애당초 서진에게 각인된 기욱의 공포는 서진에게 있어 그런 반항의 의미조차 상실할 정도로 거대했다. 기욱에게 살해를 당하면 당했지 서진은 기욱을 죽일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돼요?”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누굴 죽이고 죽는다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서진은 그런 극단적인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설령 미신이라 해도 아주 안 듣는 것보다는 낫지 않는가.
“나와.”
“어딜 나와요?”
“둘이 일하는 데서 일하지 말라고. 괜히 들어가서 말려들지 말고. 머리도 좋은 게 거기 아니더라도 알아봐 주는 데 많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서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서진과 기욱이 일하는 곳이라면 J대 병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언젠가 서윤과 같은 병원에서 일하리라는 생각에 신경외과만을 목표로 해 왔던 서진에게는 당황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의대에 입학했을 순간부터 어쩌면 더 어렸을 때부터 그것은 서진의 꿈이자 목표나 다름이 없었다. 그걸 포기하라고 하는 건 서진에게 있어서는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정 포기 못 하면 그 남자 밑은 아냐.”
“그 말은?”
“꼭 그 일만 있는 건 아니잖아.”
“아…….”
신경외과 말고 다른 과를 고려해 보라는 뜻이었다. 서진은 당장은 들은 얘기가 너무 많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슬슬 끝나 갈 분위기에 적당히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재혁에게 미리 들은 대로 돈 봉투를 올려 준 후 오피스텔 밖으로 나왔다. 복도로 나온 서진은 심란한 마음을 뒤로하고 전화를 걸었다.
― 형 끝났어요??
― 어. 내려갈게. 밥이나 먹자.
― 뭐라는데요?
― 그냥. 별 얘기 안 했어. 먹으면서 얘기해.
서진은 엘리베이터를 붙잡으며 재혁과 통화를 끊었다. 기욱에 대한 얘기를 거른다면 할 얘기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 * *
― 어레인지하고. 아니. 지금 병원 앞이니까 십 분 안에 가.
― 벌써 병원 근처야? 그러다 사고 나면 어쩌려고 그래?
― 다 왔다니까. 사고는 무슨 사고. 주차해야 되니까 끊고, 환자 상태 규건이한테 보고하면서 올려. 잘 도와줄 거야.
― 알았어.
서윤과 전화를 끊은 기욱은 휴대폰을 운전석 쪽으로 던졌다. 병원 입구에서부터 막히는 차에 기욱은 핸들을 붙잡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댈 시간은 없었다. 마침 안쪽에 자리를 발견한 기욱은 차를 대기 위해 핸들을 틀었다.
그 순간,
쾅―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병원 입구에 정체되어 있는 차들을 순식간에 정적으로 만들 정도의 요란한 소리에 기욱은 인상을 찌푸렸다. 먼저 사고를 발견한 주차요원들이 급하게 앞문을 두드렸다.
“빌어먹을.”
에어백이 제때 터진 터라 큰 부상이 없는 기욱은 머리를 붙잡으며 한 손으로 벨트를 풀었다. 상식적으로 병원 안에서 교통사고가 날 거라고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선생님!! 선생님! 안에 괜찮으십니까?”
“윽…….”
머릿속으로 이명이 울리는 것만 빼면 말이다. 멀리서 사고가 난 현장을 지켜본 의사들이 뛰어왔다. 기욱은 비틀거리는 자신을 부축하려는 주차요원의 손을 뿌리치며 상대 차 쪽으로 다가갔다. 금방 문을 열고 나온 기욱과 달리 상대 쪽 차 주인은 차 안에서 미동초자 없었다.
기욱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 틈에서 엉망으로 부서진 차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욱의 차는 거의 정차되어 있다시피 할 정도로 느린 속도로 가고 있었다. 사고가 날 만한 상황도, 장소도 아니라는 것을 고려하면 저쪽에서 작정하고 들이박았다는 것 외에는 생각할 길이 없었다. 차의 손상 정도를 봤을 때 자신이 멀쩡히 걸어 나온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선생님, 잠깐…!”
“저도 의삽니다.”
“그래도…….”
기욱은 휴대폰과 함께 차 앞좌석에서 가져온 명함을 보여 주며 상대편 차 쪽으로 다가갔다. 상대의 차 주변에도 기욱의 차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차요원들과 근처에 있던 의사들이 뛰어와 유리창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선생님! 문 좀 열어 주세요!!”
“119 언제 온대?”
“하, 아침부터 이게 무슨 난리야? 잠깐,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선생님?”
병원에 모든 의사가 기욱의 얼굴을 다 아는 것은 아닌지라 기욱은 설명하는 데도 한계를 느꼈다. 기욱의 목에 걸린 명찰을 슬쩍 본 의사 한 명이 기욱의 옆에 있는 다른 의사를 말렸다. 그의 가슴에 있는 가운에서 ‘전공의’라는 글씨가 눈에 띄었다. 심지어 내외과는 전공의도 아니었다. 멀리 응급실 사람들이 뛰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사이 기욱은 유리로 얼굴을 가까이해 차 안을 확인했다. 짙은 선팅이 되어 있어 내부를 확인하긴 어려웠지만 희미하게 의식이 없는 듯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거기 좀 비켜요!!”
“또 왜 저 인간이…….”
한발 먼저 뛰어온 정혁에 기욱은 쯧, 하며 혀를 찼다. 정혁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열리지 않는 차 문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 사이 기욱은 침착하게 자신의 차 뒷좌석에서 담요를 가져왔다. 정장 마이를 대충 벗어 차 위에 올려놓은 기욱은 소매를 걷은 뒤 담요를 손에 둘둘 말았다.
“어? 박기욱…! 너 왜 여기에…… 이 차 설마…….”
“교수님 비키시죠.”
“뭐? 야? 야!!”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기욱의 주먹이 차 유리 안쪽으로 들어갔다. 영화처럼 쨍그랑하고 깨지지는 않았지만 차 안으로 손을 넣는 데는 성공한 기욱은 몸을 차 쪽으로 붙여 차 문을 덜컥하고 열었다.
“야야, 쓰러진다 붙잡아!”
아무래도 몸이 운전석 쪽에 있었던 모양인지 차 안의 남자는 기욱이 문을 열기 무섭게 바깥쪽으로 쓰러졌다. 기욱도 그건 생각을 하지 못했던 터라 급하게 무릎을 굽혀 기울어지는 남자를 붙잡았다. 중년의 남자는 온몸이 피투성이였는데 그 상처가 가히 보통은 아닌 것 같았다. 남자를 옮기기 위해 허리와 배 근처로 손을 올린 기욱의 손이 움찔거렸다. 정혁 또한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외과 전공이 아니지만 외상에 대해서 아주 일가견이 없는 것은 아니었던 기욱이 옷 위로 출혈이 계속되는 남자의 배를 누르며 정혁을 올려다봤다.
“임 교수님 이거…….”
“박기욱, 장난해? 교통사고 아니잖아!!”
살짝 올라간 남자의 배가 반쯤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미친놈이 배에 칼을 맞은 채로 병원까지 운전해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