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8 술주정
“커피라도 마시고 갈까?”
“시간 돼?”
“좀 여유 있게 들어가도 돼.”
“갈래.”
서진은 서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로비에 있는 카페는 막바지 주문을 받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주문을 마친 서진과 서윤은 근처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원 가운 입으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내 눈엔 여전히 애네.”
“동생이잖아.”
서진은 서윤을 대신해 커피를 가져왔다. 서윤과 서진은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오피스텔로 나온 이후 서윤과 얼굴을 보기는 힘들었다. 전화는 매일 하는 것 같은데. 역시 얼굴을 보는 편이 훨씬 좋았다.
“집은 지낼 만해?”
“응. 처음에는 불편했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괜찮아. 그… 누나는? 기욱 형이랑 괜찮아?”
“그럼, 괜찮지. 둘 다 병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훨씬 많은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야.”
서윤이 가볍게 웃었다. 다행히 병원 간호사인 서윤을 기욱의 부모님과 친척들은 싫어하지 않는 듯싶었다. 커피를 반쯤 마신 서윤과 서진 사이로 묘한 침묵이 일었다. 서로 각자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누나 그 기욱 형이랑은…….”
“서진아 사실은…… 아, 먼저 말해.”
“아, 아니야. 됐어. 나중에 말할게.”
“그래. 맞다, 서진아. 주말에 올 수 있지?”
“당연하지.”
서윤 또한 할 말이 있었지만,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카페 문을 닫아야 한다는 얘기에 두 사람은 남은 커피를 들고 불이 꺼진 로비로 나왔다. 다시 일을 가야 하는 서윤을 데려다준 서진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캐비닛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옷을 갈아입은 뒤 가운 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기 위해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부재중 전화 2건>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 있었다. 서윤과 있을 때 연락이 온 것 같았는데, 무음모드가 되어 있어 연락을 받지 못한 것 같았다. 누구지? 병원 관계자인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서진은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잠시 이어지더니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누구세요?
― 서진이니?
귀에 가져다 댄 휴대폰 너머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은 처음 듣는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에게 전화를 걸 만한 사람 중에서 여성은 없었다. 서진은 의아함에 입을 꾹 다물었다. 휴대폰 속 여자가 그런 서진을 향해 계속 얘기를 했다.
― 이번 주 주말에 올 거지? 서윤이랑 얘기 끝났어? 이야, 사위가 병원 교수라며?
뭐?
서진은 대화가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서진은 전화 통화를 계속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을 선택했다.
― 누구, 세요?
― 어머, 내 정신 좀 봐. 연락하는 거 오랜만이지? 잘 지내고 있다고 들어서 말야. 나야, 민정 이모.
― 이모요?
― 어렸을 때 이후로 본 적 없지? 잘 지내고 있다고 들었는데…….
뚝.
서진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하아, 계단과 계단 사이에 선 서진은 벽에 기댄 뒤 이마를 짚었다. 목이 막혀 오고 숨이 차는 느낌이 들었다. 간신히 숨을 고른 서진은 휴대폰을 꽉 쥐었다. 손에 쥔 휴대폰에서 몇 번인가 진동이 울렸지만, 연락을 확인할 자신은 없었다.
이제는 괜찮을 거로 생각해서 잊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모라고? 친척이라고? 그 인간들이 한 번이라도 피가 이어진 적이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인가
“하하, 씨발.”
도대체 이제 와 무슨 낯짝으로 이런 연락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 *
― 역에서 내렸어?
― 어, 응. 내렸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는데. 하아.
휴대폰을 붙잡은 서진은 익숙하지 않은 거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통화만 10분째였다. 같은 자리를 빙빙 맴돌고 있는 기분이 드는 서진은 멀리 있는 택시 정류장을 보며 횡단보도 앞에 섰다.
― 그럼 누나가 나갈 테니까 거기 있을래?
― 아냐, 됐어. 그냥 택시 타고 갈게. 그게 더 빠를 것 같아.
― 알았어. 도착하면 연락 줘.
― 응. 알았어.
서진은 전화를 끊은 후 횡단보도를 건너 택시 정류장 앞에 섰다. 앞에 사람이 택시에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가 왔다. 서진은 문을 열고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JK호텔 정문으로 가 주세요.”
“예.”
천천히 출발하는 택시에서 서진은 휴대폰을 붙잡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뒤늦게 며칠 전에 이모라 자칭하는 사람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
「서진아 왜 갑자기 전화 끊었니?」 오후 8:43
「이모가 미안해서 그래 일 바쁜 것 같은데 끝나고 연락 좀 줘. 부탁할게.」 오후 8:45
하, 이모라니.
서진은 이모는커녕 친척들의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제 번호는 또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서윤에게 물어봤어야 했는데, 정작 서진 또한 병원 실습이다, 국시 준비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말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호텔에 도착하는 사이 서윤에게 문자를 보내 볼까 괜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님, 손님!”
“아, 네!”
“JK호텔 앞인데요.”
“아아, 네. 죄송합니다.”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혼란스러웠다. 서진은 급하게 일어나 택시 기사에게 카드를 건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익숙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건물 1층의 로비가 서진을 반겼다. 화려한 호텔 1층 로비에 선 서진은 제 검은 잠바를 만지작거렸다.
“옷 갈아입고 올 걸 그랬나…….”
실습을 끝내고 집에 들를 틈도 없이 온 서진은 제 초라한 옷을 보며 혀를 찼다. 원래라면 집에 들렀다 올 생각으로 가볍게 입고 온 것이었지만, 일이란 게 서진 마음처럼 편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바지 뒷주머니에선 급하게 구겨 적은 메모지가 나왔다.
이런 별 볼 일 없는 메모나 나오고. 원 참. 서진은 메모지를 습관처럼 잠바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서진은 손으로 머리를 빗은 뒤 서윤이 말한 식당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마침 주머니에 넣어 뒀던 휴대폰에서 전화가 왔다. 당연히 서윤일 거로 생각한 서진은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 어. 누나. 나 지금 로비야. 택시 타고 방금 도착했어. 그게… 생각보다 차가 좀 막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괜히 로비에서 시간을 낭비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저도 모르게 뜻하지 않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스스로에 어이가 없었다. 서진의 말에도 불구하고 휴대폰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서진은 이상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누나?
― 로비라고?
휴대폰에서 서윤의 목소리 대신 묵직하게 가라앉은 기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뜻하지 않은 목소리에 서진은 발신자를 확인했다. 기욱이 서윤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받는 것이었다.
― 하아, 지금 올라가요. 누나 휴대폰으로 전화하지 마세요.
― 누구 거든 무슨 상관이야.
― 나한테는 상관있어요.
― 말대답하지 말고. 빨리 와.
― 엘리베이터 타야 하니까 끊어요.
서진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하여튼 말하는 투하고는. 인제 와서 생각하지만, 서진은 서윤이 저런 남자의 어디가 좋은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기욱이 명령에 가까운 말을 하는 사람은 서진밖에 없었다. 어느 쪽이 진짜 기욱인지 서진이 알 길은 없었다. 사람이 많았던 로비와 달리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엘리베이터를 전세 낸 것만 같은 기분을 만끽한 서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무섭게 익숙하지 않은 한식당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신경 쓴다는 건 알겠는데…….”
대리석 바닥인 로비와 달리 서진이 간 한식당은 입구부터 고급스럽게 장식한 한식당 특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기욱과 자주 가는 호텔의 한식당을 간 적은 몇 번인가 있었지만, 그곳과 여긴 급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쯤 되니 정말 집에 들러 옷이라도 갈아입고 오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서진이 두리번거리자 입구 근처의 직원이 서진에게 다가왔다.
“손님, 예약하셨나요? 몇 분이세요?”
“저 그게…….”
“강서진!”
안쪽 룸이 있는 복도에서 뛰어나온 기욱이 입구 근처에서 머뭇대는 서진을 보며 소리를 높였다. 성큼성큼 빠르게 다가온 기욱은 서진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서진의 손을 탁, 하고 붙잡았다. 기욱에게 끌려가다시피 한 서진은 저에게 다가온 여직원을 향해 어색하게 웃은 뒤 몸을 돌렸다.
“손 좀 놔요.”
“로비라며, 늦었잖아.”
“통화 끊고 얼마나 됐다고 그래요. 그보다 진짜 놔 줘요. 누나 보면 어쩌려고…….”
걸음을 멈춘 기욱이 서진의 몰골을 내려다봤다. 누가 봐도 병원에 있다 왔음은 명백해 보였다. 그에 비해 오늘의 기욱은 제법 신경을 쓴 듯한 기색이 보였다. 진하진 않지만, 향수 냄새도 나고, 옷 또한 병원에서 몇 번인가 봤던 정장과는 한눈에 봐도 달랐다.
오지 말 걸 그랬나.
서진은 병원 선배에게 사정을 말해 가면서 스케줄을 바꾼 것이 살짝 후회됐다. 그러나 결혼도 하기 전에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하게 된 원인이 저에게 있는 것을 생각하면 오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가족이 많은 기욱의 집안과 달리 서윤에게 가족이라고는 자신이 다였다. 기욱은 손을 놓으며 서진의 헝클어진 머리를 살짝 눌렀다.
“무슨 생각 하는지 다 보인다.”
“제가 무슨 생각 했는데요.”
기욱의 손에 의해 고개를 숙인 서진은 문 앞에서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기욱을 올려다봤다. 문 너머로 서윤과 시헌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목소리도 있는 것 같다만.
“오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은 하지 마.”
“젠장.”
서진은 이번에야말로 기욱이 독심술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기욱은 신발을 벗은 뒤 마루로 올라가 미닫이문을 열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너 얼굴에 다 보인다고.”
“……짜증 나.”
정말 짜증 났다. 기욱이 들어가자 안쪽에서 기욱을 반기는 소리가 들렸다. 서진의 생각보다 방은 넓었고, 어른들은 많았다. 먼저 안으로 들어간 기욱은 서진에게 빨리 들어오라며 눈치를 줬다. 서진은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은 뒤 마루를 밟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진아! 왔구나! 기다렸어!”
“어, 어? 어, 응. 누나 맞지?”
“얘는 뜬금없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못 알아볼 뻔했어.”
서진의 말에 서윤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신경을 쓴 건 기욱뿐만이 아닌 것이 확실했다. 어쩌다 보니 가장 늦게 온 서진은 앉을 자리가 애매해졌다. 서윤이 옆으로 살짝 비키려 하는 모습을 본 기욱은 허리 밑으로 손가락을 까닥였다. 병원 일을 하면서 는 건 눈치밖에 없었다. 서진은 어쩔 수 없이 한 자리 건너 기욱의 옆에 앉았다. 다행히 기욱이 서진을 잘 챙겨 주는 것을 아는지라 크게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먼저 식사를 시작한 터라 서진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요리가 한 타이밍 늦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시헌이 있을까.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내부를 훑었지만, 시헌은 없었다. 슬슬 복학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요즘 들어 종종 이런 식으로 시헌의 생각이 났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음식이 나올 때까지 홀로 앞에 놓인 물을 홀짝이는 서진에게 건너편에 앉은 중년의 여성이 말을 걸었다.
“어머, 서진이 엄청 컸네!”
“……?”
서진은 진심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건너편에 앉은 시헌의 부모님들이 아니었다면 대놓고 물어봤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서진은 낯선 여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을 깜박였다. 근데 묘하게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었지? 서진은 그에 앞서 저에게 말을 건 여자와 여자의 남편이라고 추정되는 사람이 도대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체하는 서진에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자 옆에 있던 남자가 여자를 다그치며 속삭였다. 여보,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 그의 충고에 여자는 제 실수라는 듯 웃으며 다시 말을 정정했다.
“민정 이모야, 이모. 통화했었지?”
“지금…!”
툭, 하고 마시던 물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마침 서진의 옆으로 음식을 놓던 직원이 난데없이 떨어진 물에 깜짝 놀랐다. 그 모습을 본 기욱이 급하게 근처에 있는 휴지로 서진의 바지와 옷 근처에 묻은 물을 닦았다.
“…진, 강서진. 괜찮아? 왜 그래?”
“아니, 그게…… 어제 한숨도 못 자서… 죄, 죄송합니다. 그…….”
서진은 말끝을 흐리며 방 안의 눈치를 봤다. 룸 안에는 아직 의사면허도 따지 못한 서진의 경력을 훨씬 웃도는 의사들만 셋이었다. 간호사인 서윤 또한 눈치가 없지는 않을 터였다. 서진은 최대한 의심받지 않고 이 상황을 수습하고 싶었다. 기욱의 몸에 반쯤 가려진 서윤을 본 서진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침을 삼켰다.
“누나랑 잠깐만 얘기하고 와도 될까요? 하하. 죄송합니다.”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더 이상의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방 안의 분위기가 다시 싸늘해졌다. 서진의 테이블의 물기까지 완전히 닦은 기욱이 끼어들었다.
“빨리 갔다 와.”
“얘는 참 무슨 얘길 한다고…….”
“아, 엄마. 왜 그래. 그냥 둬.”
“하아, 알았다. 알았어.”
“죄송해요. 금방 갔다 올게요.”
“아냐, 됐어. 남동생이 고생이 많은 것 같은데 천천히 갔다 와.”
드물게 편을 들어 준 기욱에 서진은 별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드물게 고마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서진은 문이 닫히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뭐야 도대체?”
“서진아, 나가서 얘기하자.”
혹시나 들릴 것을 염려한 서윤이 서둘러 방이 있는 복도를 빠져나갔다. 복도 입구 쪽으로 온 서윤과 서진 둘 사이에서 침묵이 흘렀다. 서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시간이 없다는 걸 알지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으니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실 서진도 친척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기억나지는 않았다. 너무 오래전 일이고, 서진도 친척들도 세월이 지나면서 변한 탓도 있었다. 실제로 서진은 이모라고 밝힌 그녀를 앞에 두고도 그녀가 누군지 깨닫지 못했다. 서진에게 친척들의 존재란 마치 죽은 부모님이 살아 돌아온 것만큼의 충격이었다. 집이 불타는 그 순간부터 고아원에서 서윤과 나오기 전까지도 친척들은 없는 사람이었다.
서진과 서윤이 힘들어할 때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그들이 이제 와 무슨 낯짝으로 친척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나타난단 말인가.
“누나가… 일단 그 미안해. 나도 진짜 연락할 생각은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연락의 문제가 아니잖아. 하하, 뭐야? 저 인간들이! 그날 이후 우리 한 번이라도 도와준 적 있었어? 누난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누나가 박기욱이랑 결혼한다니까 갑작스럽게 연락됐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
“…….”
“…겠어.”
서진은 몸을 숙여 서윤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가져다 댔다. 어쩌면 이모니 친척이니 하는 건 단순한 핑곗거리가 필요해서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서윤의 말대로 한참 예민할 시기인 것도 맞았다. 서진은 뭔가에 막힌 것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이럴 때 시헌이라면 무슨 말을 할까. 힘이 들수록 떠오르는 얼굴에 서진은 허탈해졌다. 서진의 눈가가 점점 촉촉해졌다.
“모르겠어.”
서진은 이 결혼이 진짜 맞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미 혼인신고를 했다고 해도, 이대로 상견례를 마치고, 결혼식을 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소매로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서윤을 바라봤다.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서윤의 옷차림에 서진은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서윤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건 기욱에 대한 서윤의 집착이 아닐지도 몰랐다. 안 울려고 했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서진은 장소를 망각한 채 끅끅거리며 울었다.
“서진아, 왜 울어 갑자기.”
“누나… 흐윽… 미안해. 진짜 내가…… 으흑… 흐으윽….”
선 채로 울기 시작한 서진은 차마 원인을 밝히지 못한 채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단 한 번,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서진은 차 안에서 절대 그 돈을 받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처음으로 저주스러웠다.
서진은 돌아오지 않는 서윤에 상황을 보러 기욱이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 울었다.
* * *
“누나!”
“어머, 서진아!”
뒤에서 들리는 서진의 목소리에 서윤이 깜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실습 가운 차림의 서진은 점심을 먹으러 가는 서윤에게 다가갔다. 서진은 서윤의 옆에 있는 동료 간호사들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서진이 인사를 한 간호사가 서윤의 후배이자, 서진과 같은 나이라는 것을 서진은 알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언니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그… 잠깐 누나랑 얘기 좀 해도 될까요?”
서진은 서윤과 점심을 먹으러 가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양해를 부탁했다.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본 서윤은 마침 지나가는 다른 간호사 무리를 보며 급하게 그녀를 보냈다. 서진과 얼마나 대화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냥 그녀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서윤과 같이 있던 간호사가 나중에 보자는 말을 끝으로 다른 간호사들과 사라졌다. 서진은 손을 살짝 덮는 가운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무작정 서윤을 찾아온 것까지는 좋으나 서윤을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좀처럼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싸움이란 게 둘 사이를 이렇게 어색하게 만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 밥 먹으러 가는 건 어떻게 안 거야?”
“오늘부터 NS라서……. 슬쩍 물어봤어.”
모든 것이 스케줄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다행히 오전 수술은 큰 오차를 내지 않고 끝낼 수 있었다. 서진은 서윤과 함께 병원 바깥을 한 바퀴 돌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을 정도의 날씨로 햇살이 무척이나 밝은 날이었다.
“누나, 내가 미안해.”
병원을 중간쯤 돌았을 무렵 걸음을 멈춘 서진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서진은 친척에 관한 것보다 서윤과 싸웠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서윤에게 사과하는 것과 친척들에 대한 것은 역시 별개의 일이었다. 서진은 이런 일로 서윤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내가 미리 말해야 했는데……. 나야말로 미안해.”
서진은 고개를 저으며 서 있는 서윤에게 안겼다.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이 그런 두 사람을 슬쩍 바라봤지만, 한두 번 보고 말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점심을 먹기에 시간이 애매해진 서진과 서윤은 병원 내 편의점에서 먹을거리를 사 병원 바깥 벤치에 앉았다.
“퇴근했다고?”
“응. 아까 아침에 퇴근했어. 몰랐구나?”
서진은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안 보이더라…….”
“요즘 들어 당직이 잦긴 한데……. 그런 건 익숙하니까.”
“누나는?”
“난 오늘 연속 근무야. 곧 있으면 신혼여행도 가고 할 텐데 아무래도 무작정 빼기에는 눈치 보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너무 엇갈리는 거 아니야?”
서진은 약간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는 없지만, 기욱이 작정하면 서윤과 시간을 엇나가게 스케줄을 짜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마 기욱이 일부러 그런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서윤은 별일이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이번 주만 그래.”
다행히 다음 주부터는 두 사람의 스케줄이 엇비슷하다고 했다. 그런 서윤의 대답에 서진은 제가 예민하게 생각한 거라며 가볍게 넘겼다. 서진과 서윤은 조금 더 대화한 뒤 헤어졌다.
* * *
실습을 마치고, 저녁을 먹지 않은 서진은 피곤함에 절은 몸을 이끌고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을 시간을 놓쳐 시간이 애매해졌을 뿐 서진은 저녁을 먹을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근처 슈퍼에서 산 계란이 담긴 봉지를 한 손에 쥔 서진은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빅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동으로 도어락이 열리자 서진은 문고리를 붙잡았다.
“…….”
문고리를 쥔 서진은 집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지. 서진은 확― 하고 문을 열었다.
“늦었네.”
복층으로 된 오피스텔의 방은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다. 문을 열자마자 정면의 테이블에 있는 기욱에 서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방에는 정장 구두며 기욱의 옷가지들이 벽 한쪽을 차지하는 2~3인용 소파 위로 굴러다녔다. 기욱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반소매 티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제 옷을 멋대로 꺼내 입었나 하고 장롱을 흘끗댔지만, 장롱이 열린 흔적은 없었다. 애당초 서진은 저런 옷은 가지고 있지 않았고, 설령 있다고 해도 체격이 너무 다른 터라 기욱에게 맞을 리가 없었다. 기욱이 평소 차 안에 가지고 다니는 옷일 거라 추측한 서진은 기욱이 앉아 있는 작은 테이블 위에 슈퍼에서 사 온 계란이 담긴 봉지를 탁, 하고 내려놓았다.
“비밀번호 좀 바꾸라고 그랬지.”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온 주제에. 신경 꺼요.”
책상 위에 배낭 가방을 올려놓은 서진은 기욱의 뻔뻔함에 짜증을 냈다. 서윤의 생일. 기욱에게 오피스텔의 비밀번호를 알려 준 적은 없었지만, 기욱이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당초 서진이 다른 번호로 설정했다면 기욱은 집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서진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한테 말도 없이 제 오피스텔의 비밀번호를 추측해 들어온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집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요.”
“어차피 오늘 서윤이 안 들어와.”
“그 말 하는 거 아니잖아요.”
“여기도 집이야.”
기욱의 말투에 서진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 서진을 슬쩍 본 기욱은 기어코 한마디 더 했다.
“너 말야, 여기 얼마짜리 집인지 알아?”
“누가 이런 데 구해 달라고 했어요? 멋대로 구해 놓고 이제 와서 생색내지 마세요. 그렇게 부담스러우면 나갈게요.”
“하여튼 한마디도 안 져.”
“답지 않은 소리 한 게 누군데요. 돈은 벌면 된다면서요.”
“뭐, 그렇긴 하지.”
서진과 말싸움을 해 봤자 이득이 없다고 생각한 기욱은 테이블 앞에 있는 봉지 안을 뒤졌다. 봉지 안에는 서진이 사 온 계란이 들어 있었다. 뭔가 먹을 걸 사 왔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기욱은 봉지 안 계란을 보고 실망한 듯 혀를 찼다. 도대체 언제부터 자신의 집 있었던 걸까? 오피스텔 안에는 이곳저곳 기욱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소파에 널브러진 기욱의 옷가지들을 한쪽으로 잘 치워 놓은 서진은 장롱에서 편한 옷을 꺼냈다.
“뭐 하는 짓이에요.”
바지를 반쯤 입다 만 서진은 등 뒤로 와 안기는 기욱에 인상을 구겼다. 아직 상의도 채 입지 않은 서진은 등 뒤로 다가온 기욱이 부담스러웠다. 기욱의 손이 자연스럽게 서진의 허리를 반쯤 안았다.
“뭐 어때.”
“술 냄새 나요. 옷 갈아입게 비켜요. 좀!”
누굴 닮아서 사람이 이렇게 끈질긴 걸까. 어쩌면 닮은 게 아닐지도 몰랐다. 기욱은 기욱이고, 시헌은 시헌이었으니까. 정말로 옷을 갈아입는 것이 불편했던 서진은 기욱을 있는 힘껏 밀어냈다. 서진에게 밀려 벽에 몸을 부딪친 기욱은 짜증을 내며 남은 옷을 빠르게 입는 서진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렇게 화낼 것까지는 없잖아.”
“남의 오피스텔에서 멋대로 술 처먹는데 기분이 좋은 사람이 있어요?”
“아, 알았어. 너도 한잔해.”
“뭐라고요?”
“너도 마시면 되잖아.”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서진은 그제야 기욱뿐 아니라 술 냄새가 온 방 안에 진동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란다의 창문을 활짝 연 뒤 거실 쪽 테이블 밑에 있는 검은색 봉지를 집어 들었다. 봉지 안에는 못해도 네 병 이상의 빈 술병이 있었다. 그 가벼운 것을 봐 확인하지 않아도 빈 술병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외에도 이미 테이블 위에 두 병의 소주가 있었다. 기욱은 소파에 털썩 앉아 엉망이 된 테이블을 정리하는 서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면 알잖아.”
기욱은 비틀거리며 테이블을 치우는 서진에게 다가갔다. 커다란 덩치가 금방이라도 근처에 있는 물건과 부딪힐 것 같은 불안함에 서진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서진은 넘어지려는 기욱에게 손을 뻗음과 동시에 후회했다. 기욱은 서진이 손을 내미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손목을 빠르게 낚아챈 기욱은 순식간에 입술을 덮쳤다.
“으읍… 잠깐 좀 놓…….”
“후, 왜 계속 그러는데.”
“…흐읍… 숨… 하윽….”
“윽…! 야, 너…!”
짜증이 날 대로 난 서진은 기욱의 입술을 씹어 버렸다. 입 근처에 묻은 피를 닦아 낸 기욱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거리를 벌린 채 서진을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덮칠 것 같은 기욱의 시선에 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누가 물러날까 보냐.
“내, 내가… 멈추라고 했잖아요. 안 멈춘 당신이 잘못한 거예요.”
미친 짓이라는 걸 안다. 이게 기욱의 성격을 건드는 행동이라는 것을 서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실제로 기욱은 서진에게 입술을 물리고 상당히 어이가 없어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성큼성큼 서진에게 다가온 기욱이 한쪽 팔을 벽에 짚으며 서진을 내려다봤다. 기욱의 입술은 피로 붉게 물들었지만, 기욱은 입술을 닦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욱은 손끝으로 천천히 서진의 턱을 들어 올렸다.
“내가 싫어?”
“싫어요.”
서진은 기욱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싫었다. 도대체 왜 그 많은 사람 중에 자신이어야만 하는 걸까. 그러나 기욱은 결코 서진에게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기욱의 속마음을 알 수만 있다면 서진은 가장 먼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기욱은 제 피가 묻은 서진의 입술 근처를 손으로 살짝 닦았다. 기욱이 입술을 겹치자 타액과 함께 피의 비릿한 향이 났다. 술 냄새와 섞인 피의 향은 다른 의미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숨을 고르는 서진에 기욱은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서진에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었던 건지. 제가 묻고도 어이가 없었다. 기욱도 제가 서진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다. 분명한 건 서진의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행동이 잘한 짓이라고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욱은 언제나 스스로의 행동에 당당했다.
좋은 일이든 싫은 일이든 선택을 하고, 실천한 것은 자신이었다. 기욱은 서진이 도망치려 한다면 그보다 더한 짓을 할 수 있었다.
강서진이라는 존재는 박기욱에게 있어 깊이가 보이지 않는 우물과도 같았다. 마시면 마실수록 포만감 대신 느껴지는 것은 끝이 없는 갈증이었다. 어쩌면 서진에게 말도 하지 않은 채 서진의 오피스텔에 찾아온 것도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손을 내려놓은 기욱은 숨을 들이쉬었다.
“술 한잔하자.”
“많이 마셨는데 뭘 더 마셔요.”
“안 취했어.”
“취했잖아요.”
“강서진.”
“……왜요.”
“나 안 취했다고. 마실 거야 말 거야?”
짜증 섞인 기욱의 말투에 서진은 바닥을 보며 눈치를 살폈다. 어차피 할 거면서. 침묵을 오래 기다리지 못하는 기욱의 성격을 아는지라 서진이 고민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서진은 마지못해 뒷목을 붙잡으며 기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카드 줘요.”
“코트에 있어.”
성큼성큼 소파로 걸어간 서진은 소파 팔걸이에 걸쳐진 기욱의 코트 주머니에 있던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서진은 밖으로 나가기 위해 잠바를 걸친 뒤 슬리퍼를 신었다. 기욱은 막 나가려는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같이 가.”
“요 앞에 가는 거잖아요.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좀 놔요.”
저렇게 술에 취해 놓고 또 무슨 술을 마시겠다고 하는지. 서진은 귀찮다는 듯 기욱에게 붙잡힌 팔을 위아래로 흔들어 댔다. 서진은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징글징글하게 구는 기욱의 행동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적어도 기욱의 차림은 밖으로 나가기에는 적합한 옷차림이 아님은 분명했다. 서진은 일말의 미련도 없이 기욱의 손을 쳐 낸 뒤 오피스텔 밖으로 나왔다.
“62,500원입니다.”
기욱의 카드를 챙겨 오피스텔 근처 편의점에 간 서진은 홧김에 술과 함께 며칠 동안 먹을 음식들을 마구잡이로 샀다. 조금 과했나 싶을 정도로 많이 산 감은 있었지만 아무렴 몇백만 원을 쓴 것도 아닌데 봐주겠거니 싶었다. 서진은 계산을 하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다.
“어…? 자, 잠시만요.”
기욱의 카드 하나만 믿고 지갑 하나만 챙겨 온 서진은 카드가 안 보이자 당황했다. 서진의 손이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바지와 잠바 주머니를 왔다 갔다 했다.
“야. 여기 있다 카드.”
“감사함…… 하하.”
뒤에서 서진을 본 우민이 바닥에 떨어진 기욱의 검은색 신용카드를 서진에게 내밀었다. 기욱의 카드가 맞다는 것을 확인한 서진은 급하게 알바생에게 카드를 건넸다. 옆 계산대에서 여유롭게 담배를 산 우민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양손 가득 흰 봉지를 든 서진이 편의점을 나오기 무섭게 편의점 건물 사이 벽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던 우민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정신 좀 차려라.”
“죄송합니다. 그… 편의점에는 언제부터…?”
조금쯤은 괜찮겠지. 서진은 봉지를 든 채 우민에게 다가갔다. 기욱은 건너편에 우민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오피스텔을 구했던 걸까? 설마. 그럴 리가 없겠지. 서진도 기욱의 병원 생활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기욱과 우민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라고 들었다.
실제로 두 사람이 있는 모습을 본 적은 없고, 의사나 간호사 등을 통해 들은 실습생의 지라시 정도 수준이지만 각자의 성격을 따져 볼 때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사복 차림의 우민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서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처음부터다 인마.”
“……윽. 죄송합니다.”
“PK가 벌써 죄송할 일이 그렇게 많아서 병원 생활 어떻게 할래?”
“출근하세요?”
“그럼 출근이지 퇴근이겠냐? 담배 한 대 피우고 갈 거야. 그러는 넌 뭔 편의점에서 장을 보고 앉았길래 사람이 있는 줄도 몰라?”
우민의 잔소리에 서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술을 잔뜩 마신 기욱이 쉽게 집에 돌아갈 것 같지는 않았다. 서진은 속으로 우민이 오늘 당직 근무라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왜인진 모르지만, 저와 기욱과의 관계를 서진은 우민에게 별로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서진은 우민이 자신을 재미있는 인턴쯤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게 그… 친구가 오피스텔에 왔거든요. 술이나 한잔하려고요.”
“하, 이 시기에? 이 친구 이거 안 되겠네! 그래. 야! 들어가라 들어가, 춥다.”
담배를 끈 뒤 주머니에 손을 구겨 넣은 우민은 다른 손을 허공에 저으며 서진을 보냈다. 더는 우민과 할 얘기가 없었던 서진은 고생하라는 의미에서 고개를 숙인 뒤 서둘러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탁― 오피스텔로 돌아온 서진은 곧장 바닥에 편의점 봉지들을 내려놓았다. 서진이 돌아오자 기욱은 기다렸다는 듯 서진이 사 온 봉지 안을 마구잡이로 뒤졌다.
“더 사 오지 그랬어.”
서진이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 오느라 늦었다고 생각한 기욱은 빈 술병을 치우고 새 술병을 깔아 놓는 서진에게 비아냥거렸다. 기욱은 서진이 모처럼 테이블에 올려놓은 술들을 챙겨 다시 소파 아래에 내려놓았다. 소파 팔걸이에 걸려 있던 옷을 테이블로 올려놓는 기욱에 서진을 혀를 찼다. 멀쩡한 테이블 두고 왜 바닥을 찾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욱은 서진을 향해 손을 까닥였고, 서진은 마지못해 바닥에 앉아 소파를 등받이처럼 이용한 기욱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많이도 사 왔네.”
“아깐 조금 사 왔다는 식으로 얘기했잖아요.”
“술 말하는 거잖아. 너 계속 그런 식으로 말장난할래?”
“말장난은 누가 먼저 했다고…….”
“야, 시끄러워. 하여튼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못 하는 말이 없어 아주. 한잔해 한잔.”
기욱은 서진의 앞에 놓인 유리컵에 소주를 따라 부었다. 흰 유리컵에 소주를 반쯤 따르자 서진이 급하게 유리컵을 빼냈다. 사람을 죽일 일 있나! 덕분에 바닥으로 소주가 조금 흘렀다. 서진은 뒤쪽에 있는 물티슈를 뽑아 바닥을 대충 닦았다. 그제야 소주잔이 아닌 일반 컵이라는 것을 눈치챈 기욱은 잔뜩 눌린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소주잔 없어?”
“그냥 조금 따랐으면 됐잖아요.”
서진은 소주가 담긴 컵을 살짝 홀짝였다. 언젠가 소주가 달면 인생이 쓰다는 뜻이라고 누군가 말한 것 같았는데. 지금이 딱 그 기분이었다. 기욱은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으려는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왜요?”
“첫 잔은 빼는 거 아니다.”
“아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서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유리컵 안을 바라봤다. 반절 넘게 담겨 있는 소주는 서진이 한 모금 마셨지만,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소주를 물 따르듯 따라 놓은 주제에 첫 잔이라니 억지도 저런 억지가 없었다. 미친 거지 진짜. 서진의 시선에 기욱은 당당하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제 유리컵에 담긴 소주를 비운 뒤 내려놓았다. 기욱의 컵에는 애당초 소주가 얼마 담겨 있지도 않았다.
“난 너 오기 전에 마셨잖아.”
“누가 마시래요? 자기가 마셔 놓고.”
“말했잖아. 난 강요는 안 해.”
울컥, 짜증이 났다. 서진은 기욱의 도발에 넘어가듯 유리잔에 있는 소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제가 오기 전에 미리 술을 마셨던 사람보다 먼저 갈 수는 없었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다행히 급하게 마신 것치고는 확 올라오는 기색은 없었다. 서진은 사이다를 따라 마시며 앞에 놓인 육포를 씹었다.
술이 먹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한동안 술 먹을 일이 없었으니까. 설마 그 술을 기욱이랑 오피스텔에세 마시게 될 줄 생각하지 못했던 것뿐인 일이다. 기욱과 술을 마시는 게 얼마 만인 걸까? 20살 무렵 이후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기분이 들었다.
애당초 기욱과 서진의 사이는 사이좋게 앉아 술을 마실 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20살 이후로 한 번도 그런 관계인 적이 없었다. 아니, 술을 마시지 못했던 시절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기욱을 앞에 둔 서진은 말없이 소주를 따라 마셨다. 술은 두 사람이 마시기엔 충분했다. 안주는 말할 것도 없었고.
“서윤이랑 싸웠어.”
“크읍… 캑캑…! 지금… 뭐라고…!!”
소주를 목으로 반쯤 넘기던 서진은 인상을 구기며 기욱을 바라봤다. 기도를 통해 들어간 소주에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서진은 목을 붙잡으며 정수기로 뛰어가 찬물을 떠 급하게 마셨다. 자리로 돌아와 기욱의 앞에 앉은 뒤에야 술을 마시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짜증이 나서 그런가? 갑자기 술기운이 확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미쳤어요?”
“…….”
“사과해요. 당장.”
“예민하게 굴지 말고 좀 들어.”
“싫어요. 누나랑 화해하기 전까지 절대로 안 들을 거예요.”
“뭐 때문에 싸웠는지 정도는 듣고 얘기해.”
“결혼 앞둔 사람이 지금 제정신이에요?”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좀 들으라고!”
“뭐 때문에 싸웠든 사과하라구요.”
“하, 씨발 진짜. 말이 안 통하네. 한잔해라.”
서로의 말을 들어 주지 않는 막무가내식의 대화에 지친 기욱이 서진의 유리컵에 소주를 따랐다. 소주는 서진의 잔을 조금 채운 뒤 나오지 않았다. 기욱은 신경질적으로 새 소주를 뜯어 제 앞에 놓인 유리잔에 따른 뒤 목 뒤로 넘겼다. 서진은 바닥을 살짝 덮을 정도로 채워진 유리잔을 바라봤다. 고개를 들자 술을 마신 기욱과 눈이 마주쳤다.
“마시라고.”
“…….”
“술 마시니까 눈에 뵈는 게 없냐? 내가 우습지? 그러니까 박시헌이랑…….”
“젠장! 마시면 되잖아요!”
눈에 뵈는 게 없는 건 피차일반인 듯싶었다. 듣고 싶지 않은 대화에 서진은 기욱의 입을 막듯 유리컵에 담긴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양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치 독주를 마신 것처럼 썼다.
“사과한다고 약속했어요.”
“빌어먹을. 사과한다고 했잖아! 이제 내 말 좀 들어.”
“……알았어요.”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는 일이 드문 기욱의 신경질에 서진은 제가 예민하게 굴었음을 뒤늦게 인정했다. 기욱은 말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지 한 손으로 이마를 붙잡으며 서진에게 양해를 구했다. 사실 서진은 기욱과 서윤이 싸운 이유에 관해 관심이 없었다. 서진이 보기에 대개의 잘못은 서윤이 아닌 기욱이 잘못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평소와 달리 싸운 이유를 들어 보라고 말하는 기욱의 태도는 어딘가 정체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아니, 기욱의 태도뿐만이 아니었다. 서진이 오피스텔로 돌아와 기욱을 만나기 전까지 병원에서 봤던 서윤의 모습에서는 기욱과 싸웠다는 그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았다.
늘 괜찮다는 말을 하고 사는 서윤이지만, 서진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럼 눈앞에서 서윤과 싸웠다며 고민하는 기욱은 대체 뭐란 말인가? 서진은 뭐가 진실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서진이 먼저 물었다.
“누나랑… 진짜 싸운 거 맞아요?”
“분명히 말하는데 싸우려고 싸운 거 아니다.”
기욱은 서윤과의 싸움을 이용해 왔었다. 그 가운데는 늘 자신이 있었다. 제 행동을 빌미로 서윤에게 트집을 잡아 서윤과 말싸움을 하거나 싸움의 거리를 만들어 왔다. 그런 기욱이 제 앞에서 일부러 서윤과 싸운 게 아니라고 변명을 하는 꼴이란 황당을 넘어 어이가 없었다.
“그럼 진짜로 싸운 거라구요?”
“말하자면 그래.”
기욱의 대답에 서진은 술 대신 옆에 있던 사이다로 목을 축였다. 서진이 아는 서윤은 쉽게 기욱과의 말싸움을 허락할 사람이 아니었다. 기욱은 서윤의 행동을 별일 아닐 거라는 식으로 넘겼다. 애당초 이번 싸움은 서진과는 상관없는,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제가 이런 실수를 할 줄은 몰랐지만. 기욱은 술을 마시는 서진을 앞에 두고 고백하듯 말했다.
“내가 그랬어.”
“뭘요?”
“너희 친척. 이모인지 하는 사람.”
“…….”
“내가 강서윤한테 친척 없냐고 물어봤다고.”
* * *
서진은 술을 목 끝까지 넘기며 기욱을 바라봤다. 늘 당당했던 기욱의 어깨가 처음으로 축 처진 것같이 보였다. 술에 취해 느껴지는 착각이겠거니 생각한 서진은 술 대신 물을 마셨다. 기욱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서진에게 변명 아닌 말을 늘어놓았다.
“꼭 불러야 된다고 압박한 건 아냐. 그냥 집안 어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한 것뿐이지. 설마 네가 그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지만…….”
그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는 서윤과 서진에 걱정된 기욱이 복도로 나가자 들렸던 서진의 목소리였다. 서윤의 앞에서 울고 있는 서진에 기욱은 차마 두 사람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제길,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기욱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술을 들이켰다. 제 의도치 않은 행동으로 인해 서진이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화가 치밀어 미칠 것만 같았다. 첫 수술 환자가 죽었을 때보다 더한 죄책감이 기욱을 압박했다. 이쯤 되니 자신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강서진이 뭐라고. 평소와 달리 말끝을 흐리는 기욱을 본 서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기욱과의 관계는 계약서를 쓴 것처럼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젠 언제까지 이 일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인제 와서 기욱과의 일을 서윤에게 고백하고 기욱과 헤어지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한번 얽히기 시작한 실타래를 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는데.
기욱의 등장도 그렇고, 이런 얘기도 그렇고. 오늘따라 참 예상치 못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서진은 씁쓸한 기분을 소주로 달래며 잠시나마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걸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저희 아버지요, 한 번도 그 사람을 똑바로 불러 본 적이 없어서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지 뭐라 불러야 할진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의 집은 어머니 쪽 집안만큼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대요.”
집에 돈이 없었을 뿐 서진의 아버지는 권위 있는 교수임과 동시에 제법 기질이 있는 사업가 스타일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 집안과 연결된 사람들을 이용해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꽤 모았다고 했다. 사고를 당한 고급 아파트도, 어머니의 명의가 아닌 아버지의 명의와 돈으로 산 집이라고 하니 분명 죽기 직전까지 무시하지 못할 재산이 있었음은 분명했다. 불이 난 아파트의 당시 시가를 알고 있는 기욱은 어느 쪽이든 서진의 집안에 돈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정치를 준비하고 계셨더라고요.”
“…너네 아버님이?”
“어렸을 때 들은 거라 확실하진 않아요. 어쨌든 정치인들과 인연이 있었던 건 분명해요.”
서진은 어깨를 들썩이며 과자를 집어 먹었다. 서진 아버지의 몇몇 재산들은 사고가 난 이후 그 가치가 폭등했다. 도시의 개발 사업이며 몇몇 법률제도가 통과될 거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것만큼은 틀림이 없었다. 실제로 사고를 당한 이후 몇몇 거물급 정치인들이 친척들을 몰래 찾아왔다고 했다.
돈. 그것만큼 추악한 것은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제가 들었거든요.”
“뭘?”
“친척들이 떠드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 죽은 형제 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돈 놀음을 하더라구요. 뭐, 애당초 부모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라 그들이 떠드는 말쯤은 아무래도 좋았어요. 저는요, 그냥…… 그냥… 우리 부모님이 쓰레기라는 것을 세상에 알려 주길 원했을 뿐이었어요…….”
머리가 어지러웠다. 술 때문이라 생각한 서진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그깟 돈 따위 얼마를 가져가든 알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애당초 정당한 방법으로 모은 돈도 아니었거니와 집안 체면을 중요시하는 어머니 쪽 친척들은 진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사실 저도 친척들의 얘기를 듣기 전까지 그 사람한테 돈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어요. 그거 알아요? 어머닌, 누나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여자이면서 동시에 누나를 꽤 사랑했어요. 물론, 그게 딸로서의 사랑인지 저는 알 수가 없지만. 뜻밖에 아버지의 재산은 전부 어머니가 관리를 했다더라구요. 나이도 어린 저한테 가는 유산이 없음은 당연한 일이지만. 누나에게는 부모님의 재산 전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엄청난 유산들이 있었어요.”
어린 시절의 서진도 그 대화를 전부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분명한 건 부모님은 서윤에게 대부분 재산을 상속했고, 그게 유산 문제로 불거진 것이었다.
“전 그냥 부모님들이 한 일을, 경찰들이 제대로 조사해 주기를 바랐어요. 아무도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자 누나에게 유산에 대한 사실을 말하겠다고 친척들을 협박했거든요.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고아원에 가 있더라구요.”
“…….”
“누나를 속여야 하는데. 이게 자칫 잘못 뒤집어쓰면 난리가 나는 일이거든요. 그걸 책임지고 누나를 맡아 주는 척할 사람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게 누군지 아세요?”
“하아…….”
기욱의 한숨에 서진은 말을 하지 않은 채 술을 마셨다. 조금씩 유리컵을 채우던 것이 점점 대담해지더니 이제는 마치 물 마시듯 소주를 마셨다. 술에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듯 소주에선 아무 맛이 나지 않았다.
“저한테는요, 누나밖에 없어요. 그리고 제 생각에 제가 간 고아원은 꽤 좋은 곳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해요. 집보다는 나았지만. 거기 가니까 알겠더라구요. 누나가 친척들을 거부하면 어떤 꼴로 살게 될지. 적어도 친척 집에선 부족한 거 없이 지낼 수 있을 테니까요.”
설마 그런 서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찾아올 거라고는 서진도 생각하지 못했다. 서윤과 함께 고아원을 나온 날, 서진은 다짐했다. 이젠 진짜로 서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서윤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고 말이다.
“난 당신이 싫어요.”
“나도…… 하, 됐다.”
기욱은 쓸데없는 말이라며 허공으로 손을 저었다. 서진이 자신을 그다지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당연하다고, 서진을 옆에 두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을 텐데. 왜일까? 기욱은 자신이 싫다고 하는 서진에 속으로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 요즘 들어 전에는 느껴지지 않던 기분들이 기욱을 혼란스럽게 했다. 낯선 기분에 없던 짜증을 내고 싶지 않았던 기욱은 새 소주를 뜯어 유리컵에 부어 마셨다.
“일을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에요. 누나를 힘들게 하면 가만 안 둘 거예요.”
“강서진.”
“…….”
“한 번만 더 그런 짓 해 봐.”
술에 취한 기욱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서진의 위로 올라탔다. 듣다 듣다 보니 누가 누구한테 가만두고 자시고를 논한단 말인가. 기욱은 애당초 처음부터 서진이 시헌과 몰래 사귀지만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올 필요도 없었다는 식이었다. 기욱의 옆에 있던 빈 소주병이 넘어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서진은 할 말은 다 했다. 그러나 아직 기욱에 관해서는 쉽게 자신이 서지 않았다. 서진은 제 뺨 위로 올라오는 기욱의 손을 옆으로 치워 냈다.
“누나랑 화해해요.”
“화해한다고 했잖아.”
“지금요.”
“너 언제부터 그렇게…… 알았어.”
서진의 행동은 기욱을 당황스럽게 할 때가 종종 있었다. 지금이 그랬다. 서진은 서윤에 관한 일이라면 급하지 않던 성격도 급해지는 버릇이 있었다. 기욱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옷 안에 있는 휴대폰을 꺼냈다. 서윤에게 올 연락이 귀찮아서 휴대폰을 일부러 꺼 놨던 기욱은 휴대폰을 켰다. 휴대폰이 켜지는 동안 서진의 시선을 느낀 기욱은 획― 하고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잠깐… 읏…!! 화해부터 하라구요!!”
기욱의 품에 안긴 서진이 발버둥을 쳤다. 반쯤 남은 술병이 옆으로 기울어지며 바닥을 적셨다. 서진이 엎은 술병뿐만이 아니었다. 치우기도 막막할 정도로 엉망이 된 방바닥에 서진은 간신히 기욱의 품에 벗어났다. 반항하는 서진에 기욱은 멀리 가지 못하도록 서진의 손을 꽉 붙잡았다.
“……뭐야?”
“뭐 문제 있어요?”
“아니. 아무것도.”
휴대폰을 켠 기욱은 문자 한 통과 부재중 외에 와 있지 않은 연락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술기운에 휴대폰 화면이 똑바로 보이지 않았다. 부재중과 문자 몇 건이 더 있었지만, 서윤에게 온 것이라고는 처음에 확인한 것이 전부였다. 서윤에게 전화를 거는 수화음을 들은 기욱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원하는 싸움이 아니라고는 하나 서윤과 싸운 것은 틀림이 없었다. 말싸움하거나 싸움을 할 때면 늘 일방적으로 매달려 오던 서윤에게서 연락이 한 통도 없는 것이 기욱은 사뭇 불편했다. 일이 바빠서 그런 건가. 성가시진 않으니까 좋은 걸지도. 멋대로 긍정적으로 생각한 기욱이 서윤과 통화를 했다.
“어. 응. 아니. 그… 하. 내가 미안해.”
기욱은 서윤과 통화를 하며 일부러 서진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얼마나 꽉 잡았는지 서진은 기욱에게 붙잡힌 손목이 저려 올 지경이었다. 통화 중간 무렵 기욱은 일부러 서진에게 들으라는 듯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돌렸다.
―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오빠가 서진이를 그렇게 신경 써 줄 줄은 나도 몰랐어.
― 네 동생이잖아. 당연한 거지.
― 그래서 아직도 밖이야?
손에 힘을 풀은 기욱은 소파 아래에 등을 기대며 눈을 깜박였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걸까. 두 사람의 전화를 듣고 있는 서진 또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서진은 기욱이 당연히 서윤에게 무슨 말이든 하고 제 오피스텔을 찾아온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 어, 그게……. 응. 어떻게 알았어?
― 아까 일 있어서 잠깐 형님이랑 통화했거든. 그때 밖이라고 그러던데. 목소리도 좀 그런데 술 마셨어?
― 조금. 후, 친구랑 있어.
― 친구? 내가 모르는 사람이야? 오빠 집에는 들어갈 수 있겠어?
뭔가 대화가 이상해짐을 눈치챈 기욱은 재빨리 스피커폰을 끈 채로 통화했다.
“하민이. 별일 아니야. 그래. 일 열심히 하고. 내일 오후에 보자.”
서윤과 간신히 전화를 마친 기욱은 컵에 놓인 소주를 전부 털어 마셨다. 둘이서 몇 병이나 마셨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중간부터 술을 마신 건 기욱이 아닌 서진이었지만 말이다. 기욱의 앞에 반강제로 끌려와 앉은 서진은 기욱이 붙잡은 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놓았다.
“누나한테 말 안 하고 왔어요?”
“강서윤, 그런 거 신경 쓰는 애 아니라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근데 누나가 밖에 있는 거 어떻게 알아요?”
“아까. 너 오기 전에 박하연이랑 일 때문에 통화했어. 그때 밖이라고 했는데 말했나 봐.”
“그게 다예요?”
“그럼 뭐가 더 있어?”
기욱은 당당했다. 빌어먹을 박하연만 빼면 말이다. 설마 서윤과 하연이 통화했을 거라고는 기욱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서진이 뒷내용을 들었는지는 미지수지만 서윤은 누구와 함께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평소와 달리 부재중 연락이 적은 휴대폰에 기욱은 설마 인상을 찌푸렸다. 하, 그럴 리가 없다. 기욱은 오직 서진을 곁에 두기 위해 서윤에게 온갖 노력을 쏟아부었다. 굳이 서진이 아니더라도 이제 와서 서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곤란했다. 조금은 식을 빨리 당겨야 할 필요성을 느낀 기욱은 이번에야말로 진짜 끝까지 하겠다며 서진의 허리를 꽉 잡아당겼다.
“왜 또?”
기욱은 제 품 안에서 꼬물대는 서진이 불만족스러운 듯 내려다봤다. 충분히 술도 먹었고, 대화도 했고, 서진이 시키는 대로 서윤과 화해도 했다. 이 이상 기욱이 서진과 할 건 없었다.
“마, 만약에요…….”
“만약에 뭔데?”
“…아뇨, 그냥 한 소리였어요.”
기욱의 시선을 느낀 서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기욱은 서진의 태도에 김이 빠진다며 손으로 천천히 서진의 턱을 들어 올렸다. 기욱과 반강제적으로 키스하는 서진은 만약에 섹스하기 싫다고 말한다면, 기욱이 들어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박기욱이라는 사람은 저만큼이나 지독하게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 * *
“강서진.”
“읏… 흐… 왜요.”
서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기욱의 말에 마지못해 대답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실 좀 자고 싶은데. 계속해서 괴롭히는 기욱에 서진은 불편한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술기운에 기욱이 만지는 손길이 무슨 느낌인지조차 무감각해졌다. 마지막으로 기욱과 술을 마신 것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 일이라는 것은 술을 마시고 기욱과 섹스를 한 적도 드물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팔 치워.”
“하윽, 씨….”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진은 입술을 깨물며 욕을 했다. 술 취한 기욱이 이렇게 까다로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서진과 기욱은 술을 꽤 마셨다. 애당초 서진이 편의점에서 사 온 술의 양은 둘이 아닌 넷이 마셔도 충분한 양이었다. 그렇게 술을 마셨으니 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양손으로 다리를 접고 허벅지를 위로 벌리며 안쪽에서부터 핥기 시작하는 기욱의 모습에 서진은 팔목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기욱과 너무, 많이 마셨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씨?”
“으읏…치, 치울게요….”
반쯤 눈동자가 흐려진 기욱에 서진은 한쪽 팔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조심스럽게 눈을 뜬 서진은 주변이 생각보다 밝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의 불이 꺼져 있었던 것이었다. 언제 끈 걸까? 꺼진 방의 불 대신 서진의 침대에 있던 무드등이 두 사람을 비췄다.
아아, 역시 기욱도 이걸 알고 있었군. 서진이 들어온 이곳은 신축 오피스텔로 지어진 지 1년이 채 안 됐다. 눈이 부시지 않을 정도로 알맞게 비추는 빛에 서진은 혀를 찼다. 기욱은 서진의 내려놓은 양팔을 붙잡아 몸을 일으켜 앉힌 뒤 입고 있던 옷을 벗겨 냈다. 팔을 위로 들어 어린애처럼 상의가 벗겨지는 것은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정작 서진이 입고 있는 옷은 단추가 있는 셔츠였다. 급한 것인지 정말 술에 취해 단추를 하나씩 푼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서진의 옷을 벗겨 낸 기욱의 한 손이 다시 서진의 허벅지 안쪽을 살살 간지럽혔다. 고개를 숙여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는가 싶던 기욱은 서진의 입술 근처를 혀로 핥았다. 키스할 거면 하고, 말 거면 말든지. 서진은 평소와 달리 에둘러 가는 기욱의 행동에 인상을 찌푸렸다.
“너…….”
“흐으…, 왜요?”
“원래 이렇게…… 아니다. 됐다.”
기욱은 말을 끝맺지 않았다. 평소 말을 흐리는 경우가 거의 없는 기욱으로서는 드문 행동이었다. 서진은 그저 기욱이 술에 취해 그랬겠거니 하고 별생각 없이 넘어갔다. 애당초 그럴 생각을 할 만한 상황 또한 아니었다.
원래 이렇게 귀여웠던가?
애끓게 신음을 흘리는 서진을 내려다본 기욱은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 술에 취해서 그런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제정신이 아니구나 싶어 말을 흐렸다. 귀엽다니. 서진을 안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기욱은 서진과 섹스를 하면서 귀엽다니 이쁘다니 하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남자와의 관계에서 그런 게 어디 있겠는가. 이는 비단 서진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뭔가를 귀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언제였는가의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서진을 보며 심장이 빨라지는 것을 느낀 기욱은 이 모든 게 술 때문이라며 혀를 찼다. 서진을 눕힌 기욱은 서진의 허벅지를 아까와 같이 옆으로 벌린 뒤 안쪽으로 손가락 끝을 살짝 밀어 넣었다.
“으읏… 읍….”
눈을 가리지 말라 했더니 이번에는 입을 막는 서진에 기욱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기욱은 조명이 은은하게 맴도는 방 안을 둘러봤다. 복층이라 약간 높다는 감각은 있지만, 소리가 새어 나간다거나 하는 걱정은 크게 들지 않았다. 기욱은 손가락을 넣음과 동시에 다른 손으로 서진의 페니스 끝을 살살 간지럽혔다.
“잠깐…!! 그냥 하… 으응….”
“가만히 있어.”
기욱의 행동에 손을 치우며 고개를 숙인 서진이 깜짝 놀라 반응을 했다. 놀라는 서진의 모습이 또 제법 볼만했던지라 기욱은 입꼬리를 올리며 서진의 페니스를 쥐고 위아래로 움직였다. 앞을 괴롭히며 동시에 안에 들어간 손가락을 움직이자 서진의 다리가 안으로 오므라들기 시작했다. 이 자세는 좀 불편하다고 느낀 기욱은 서진을 엎드리게 한 뒤 위로 올라탔다.
“그러니까 진짜 그만…! 으읍…!”
평소의 섹스와 달라도 뭔가 너무 달랐다. 단순히 술에 취하고 취하지 않고의 문제는 아닌 듯싶었다. 기욱은 반항을 하기 위해 입을 여는 서진의 입을 제 입으로 막으며 키스를 했다. 기욱의 키스는 서진이 숨이 막혀 기욱의 등을 두드리기 전까지 계속됐다. 숨을 쉬지 못하게 교묘하게 막는 것이 일부러 그랬다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윽… 으응….”
“후, 너 진짜…….”
“제발 부탁이니까… 읏 그냥….”
기욱은 서진의 말은 듣고 있지 않았다. 들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손가락이 한 개에서 두 개가 됨과 동시에 절정에 달한 서진의 몸이 움찔거리며 멋대로 움직였다.
“하응… 으읏….”
침대 시트에 머리를 묻으며 고개를 흔든 서진은 결국 기욱의 손안에서 사정했다. 기욱은 앞으로 쓰러지려는 서진의 허리를 붙잡아 똑바로 눕혔다. 고등학교 무렵, 기욱의 손에 몇 번인가 간 적은 있지만, 기욱과 본격적으로 섹스하기 시작한 이후 기욱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괴롭힌 적은 처음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손을 내려다본 기욱은 입술을 맞추며 허벅지 끝을 한쪽 팔로 눌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개수가 늘어나 있는 손가락이 서진의 안을 움직이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팔로 눈을 가리려던 서진은 급하게 시트를 잡으며 기욱을 내려다봤다.
“제길.”
팔을 뻗어 침대 옆 선반에 놓여 있는 물티슈로 손에 묻은 정액을 대충 닦아 낸 기욱은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혀를 찼다. 요즘 진짜 욕구불만인가? 기욱은 사정 직전의 서진을 보며 저 또한 흥분했음을 느꼈다. 아직 끝까지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쾌감은 기욱을 잠깐 얼어붙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귀엽다는 사실 귀여운 것만 놓고 본다면 기욱의 기억엔 고등학교 시절의 서진이 훨씬 더 귀여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하며, 괴롭혔을 때 당황하며 얼굴을 빨갛게 붉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당시엔 꽤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술을 물 마시듯 마시고, 섹스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지금은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가 이상한 건가? 아니면 서진이 이상한 건가. 서진의 사정 직전의 표정을 본 기욱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목이 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갈증과 목의 갈증이 합쳐진 기분이었다. 기욱은 손가락을 빼지 않은 채 위로 올라타 서진이 느끼는 곳을 꾹꾹 눌렀다.
기욱이 뭘 하려고 하는지 짐작이 갔던 서진은 급하게 기욱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리며 기욱을 밀어냈다. 성인 남자의 힘으로 예상하지 못한 채 서진에게 밀려난 기욱은 멍하니 앉아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은 얇은 이불 끝으로 아래를 살짝 가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기욱을 하루 이틀 봐 온 것이 아니다. 기욱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서진은 그저 빨리 섹스를 끝내고 싶은 기분뿐이었다. 사실은 지금 이대로 그만뒀으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서진은 기욱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 그냥 해요….”
섹스하기 싫다고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단지 서진은 기욱이 제 몸을 방금과 같이 멋대로 괴롭히는 것이 싫을 뿐이었다.
“하고 있잖아.”
“제… 제 말은 그러니까… 그냥, 그냥 하라구요. 아까같이 그런 거 하지 말고…….”
“강서진.”
기욱은 서진이 몸을 가린 이불을 치워 내며 서진의 위로 올라탔다. 성인 남성 두 명이 간신히 누울 수 있을 만한 침대는 처음부터 도망갈 장소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서진의 다리를 잡아 아래로 이끈 기욱은 서진의 페니스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좋았어?”
“지금… 뭐, 라고…… 그보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 알긴 하는…….”
“사정할 때. 기분 좋았냐고 묻잖아.”
뭔가 잘못됐다. 서진의 그런 감은 대개 잘 맞는 편이었다.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관계가 있었지만, 한 번도 기욱은 서진의 기분을 배려한 적이 없었다. 그런 기욱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서진을 소름 끼치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흐음, 내가 본 건 아닌 것 같았는데…….”
“그러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아직 시간 많잖아.”
기욱은 선반에 놓인 디지털시계를 흘끗댔다. 새벽 한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기욱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려 시간을 본 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오후에 출근하는 기욱과 달리 서진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다. 그러니 기욱의 말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고개를 아래로 숙인 기욱은 천천히 서진의 페니스 끝을 핥았다. 예상하지 못한 기욱의 행동에 서진은 깜짝 놀랐다.
“윽…! 강서진!”
서진이 움직인 무릎에 얼굴을 맞은 기욱이 짜증을 냈다. 기욱을 때릴 생각이 없었던 서진은 예상치 못한 사고에 어쩔 줄을 몰랐다. 서진의 심장이 급속도로 빠르게 뛰었다. 서진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더듬었다.
“그게… 때리려고 때린 게 아니라… 이런 짓… 한 적 없고…… 그래서…… 당황스러워서…….”
기욱은 서진에게 맞은 뺨을 만지작거리며 변명 아닌 말들을 늘어놓는 서진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손을 뻗은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아 앞으로 당겼다. 그날의, 악몽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마를 맞춘 기욱은 서진을 향해 낮게 입을 열었다.
“빨리할까?”
“그… 건…….”
“빨리하자며.”
“그러니까 내 말은… 이런 게 아니라…!”
서진을 거칠게 눕힌 기욱은 제 페니스를 서진의 허벅지 안쪽으로 가져다 댔다. 할 거면 진작 했어야 했다. 실컷 괴롭혀 놓고 이제 와서 막무가내로 집어넣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기욱은 반강제적으로 서진의 엉덩이를 옆으로 벌렸다. 맨살에 닿는 기욱의 부푼 페니스가 소름이 돋았다.
“시, 싫어 싫… 아.”
“…….”
“…….”
둘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그때와 같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지옥 같은 침묵의 시간이었다. 기욱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강서진.”
“……해요. 잘못했어요.”
“뭐라고?”
아아, 진짜. 최악이다.
* * *
서진은 침대 헤드 쪽에 등을 붙이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서윤이 아니더라도 이미 서진은 기욱에 대한 공포 아닌 공포로 반항에 대한 의지를 상실한 상태였다. 박기욱이라는 사람은 서진에게 있어 거부할 수 없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런 기욱에게 거절의 의사는 곧 반항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 잘못 말한 거예요.”
“…….”
“실수로…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입을 다문 기욱은 무섭다. 공포에 젖은 듯 눈동자가 떨린 서진은 기욱의 몸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천천히 기욱이 서진의 위로 올라왔다. 팔을 잡는가 싶던 기욱은 순식간에 서진의 몸을 돌려 팔을 꺾어 위로 올렸다.
“아윽…! 잠깐 아파, 아프다구요…!”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말해 봐.”
“…아파… 흐극…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때리지 마세요….”
서진과 기욱의 관계는 마치 시소게임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 시소는 기욱에게 유리하게 움직이는 시소였다. 기욱은 한 손으로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푼 뒤 제 셔츠로 서진의 팔을 뒤로 묶었다. 셔츠라 아프거나 자국이 남진 않았지만 팔을 마음처럼 움직일 수 없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흐윽… 제발… 아으윽! 허윽….”
서진의 허리를 잡아 일으킨 기욱은 예고조차 하지 않은 채 서진의 안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순간적으로 흘러나오는 비명에 기욱은 서진의 머리를 베개 쪽으로 눌렀다.
“아파… 흐윽…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지, 진짜 실수… 하윽….”
등 뒤에서부터 식은땀이 흘렀다. 비단 술 때문만은 아닌 듯싶었다. 집요하게 허리를 움직이는 기욱에 서진은 신음을 내지 않기 위해 베개 시트를 입에 물었다. 기욱은 그런 서진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서진의 목을 잡아 살짝 뒤로 꺾었다. 기욱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넘어간 서진의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싫으면.”
“…….”
“관둬도 되는데.”
“…했어요. 잘못했어요.”
서진의 눈가로 눈물이 떨어졌다. 기욱의 그만둔다는 의미가 뭘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서진이 봐 온 기욱은 마음만 먹는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시헌과 같은 일을 겪는 것은 한 사람만으로 충분했다.
“으읏… 으응… 흑….”
서진의 몸이 앞으로 꼬꾸라지자 기욱은 서진의 허리를 붙잡으며 움직였다. 기욱의 페니스가 움직일 때마다 역류하는 술에 기도가 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진의 허리를 강하게 잡아당긴 기욱이 사정했다. 안을 메우는 불쾌한 감촉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서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제 위를 올려다보는 기욱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젠 정말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흐려지는 시야에 마취라도 당한 사람처럼 천천히 눈을 감으려 하자 기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서진. 눈떠.”
“…하아, 흐….”
“지금 자면 밤새 범해 주지.”
“으읏…! 당신 진짜……!!”
순식간에 정신이 든 서진은 있는 힘껏 기욱을 밀어냈다. 밀어냈다고 해 봤자 제 입을 막으려던 기욱과 잠시 거리가 벌어진 것이 전부였다. 묶인 팔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서진은 기욱의 입술이 닿았던 입가를 팔로 가리며 기욱을 노려봤다. 잔뜩 흐트러지고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서진의 시선에 기욱은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 하… 제정신이 아니야!”
“좋은데, 그 표정. 무척 꼴려.”
“술 깰 때 됐잖아요!”
“술은 진작 깼어. 근데 그런 거 아무래도 좋잖아.”
서진의 발목을 잡아 아래로 당긴 기욱은 강제로 서진의 안을 벌렸다. 방금까지 기욱의 페니스가 들어가 있던 서진의 안쪽에는 희묽은 정액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기욱은 손가락으로 서진의 입구 근처를 살살 간지럽혔다. 기욱은 서진을 안은 뒤 팔을 묶은 셔츠를 풀어 주었다. 한동안은 계속 내버려 둘 줄 알았던 서진의 예상과 달리 쉽게 풀어 주는 기욱에 서진은 영문을 몰라 했다. 기욱은 서진을 제 위로 앉혔다. 기욱의 몸에 올라탄 상태로 벌어진 다리에 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허벅지 안쪽으로 기욱의 페니스가 닿는 것인 느껴졌다. 기욱은 서진의 팔을 허벅지 아래쪽으로 내리게 했다.
“지금 뭐 하는…!”
“해 봐.”
“뭘요?”
“시치미 떼지 말고. 직접 해 보라고. 자위해 본 적 있을 거 아냐.”
“윽…….”
확, 하고 서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서진은 기욱이 아직도 술에서 덜 깬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쓰레기 같은 인간이긴 했지만, 서진이 아는 기욱은 섹스 중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서진에 기욱은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며 몸을 살짝 일으켰다.
“설마 없어?”
“…….”
“하하, 진짜로?”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내가 왜 당신 앞에서…….”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욱하는 서진의 태도에 기욱은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서진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욱의 손길은 기분이 좋았지만, 그 끝에 나오는 말은 가슴을 찌를 만큼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해.”
두 번은 없었다. 기욱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기욱에게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서진은 자신을 빤히 보는 기욱의 시선에 멋대로 자기합리화를 했다. 그래도 그렇지 기욱 앞에서 자위라니 그런 걸 말처럼 쉽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머뭇대는 서진에 기욱의 손이 서진의 페니스 위로 올라왔다.
“읏… 잠깐….”
“딱히 네가 안 하겠다면 내가 해 줘도 상관은 없는데.”
“으읏… 응….”
“사정할 때 그거. 꽤 귀엽거든.”
“무슨 말을… 흐읏… 으응….”
글쎄. 서진의 말을 들은 기욱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서진을 귀엽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지? 어느 쪽이든 기욱은 오늘따라 눈앞에 있는 서진을 괴롭히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평소의 일방적인 섹스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욱의 손이 능숙하게 서진의 페니스를 쥐고 흔들었다. 금방이라도 사정을 할 듯 기욱의 어깨에 서진의 손톱자국이 남았다.
“소, 손… 으읏… 으응… 손 제발…….”
“후, 조금만 더.”
기욱은 서진이 사정하지 못하게끔 손톱 끝으로 서진의 귀두 근처를 막았다. 그건 그거대로 기욱을 받아들일 때와 다른 의미의 고역이었다. 기욱의 손을 밀어내는 것을 포기한 서진의 목이 뒤쪽으로 넘어갔다.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는 서진의 모습을 본 기욱은 한참 만에야 손을 놓아 주었다. 기욱이 손을 놓기 무섭게 정액이 기욱의 가슴과 배 근처로 튀었다.
“흐으… 하… 으읏….”
사정의 후폭풍인 듯 서진의 허벅지와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기욱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서진을 다시 제 허벅지 위로 앉혔다. 서진은 바람이 빠진 인형처럼 기욱의 손에 의지해 침대에 앉아 있었다.
“이제 할 수 있겠지?”
“바, 방금 걸로 됐잖아요…….”
“내가 언제?”
“그, 게….”
“말해 봐. 내가 언제 그런 말 했지?”
서진은 오늘따라 유독 집요한 기욱에 차마 싫다는 말은 못 한 채 고개를 숙이며 제 페니스와 기욱을 번갈아 바라봤다. 하기사 어차피 더한 짓도 당한 마당에 기욱 앞에서 그깟 자위 한번 못 하겠는가.
“…대신요. 이거 하면 그만해요.”
“뭘 그만해?”
“더는 하지 말자구요.”
서진은 허벅지 사이를 건드는 기욱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봤다. 아, 그제야 의미를 깨달은 기욱은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흐음.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기욱은 이내 별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좋아.”
지금은 그러니까. 다른 것보다 서진이 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기욱의 대답을 들은 서진은 천천히 제 페니스를 문질렀다. 방 안으로 뜨거운 열기가 감돌았다. 방이 뜨거운 것인지 제 몸이 뜨거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섞여 들렸다.
변태 새끼. 씨발, 개 같은. 뒤져 버려. 너 같은 거. 기욱의 앞에서 자위하는 서진은 자신을 보는 기욱을 보며 속으로 할 수 있는 온갖 욕들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기욱을 향한 욕만으로는 반응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만약 아무것도 못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서진은 기욱을 앞에 두고 서지 않는다는 것의 문제가 아닌, 그 이후의 일들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결국, 이 상황을 빠져나가게 할 뭔가가 필요했다.
‘큭큭, 하여튼 재미있는 자식.’
문득 서진의 머릿속으로 우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까 출근한다고 나갔으니 지금쯤 병원에 있겠지? 그럼 내일은 못 보는 건가? 게이라는 거 병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던데. 박기욱도 알까? 어느새 기욱을 향한 욕 대신 우민을 향한 이상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지금은 남자 친구가 있는 걸까? 왜 같은 신경외과면서 박기욱이랑은 이렇게 다를까? 여기까지 생각한 서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관심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랑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서진은 그런 우민을 생각하며 기욱의 앞에서 자위를 하는 스스로가 비참해졌다.
“으읏… 으응… 읏….”
솔직히 말하면 좀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런 소문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나, 당당한 성격이라든지. 짜증을 내긴 하지만 누구와 달리 그만큼 잘 웃어 주는 것까지. 어쩌면 서진이 바라는 의사의, 아니 이상형의 모습이었는지도 몰랐다. 후배를 찬 우민을 볼 때 기껏해야 잊혀 지나가는 실습생인 서진을 우민이 받아 줄 리는 만무했다.
“흐읏… 아응… 흐으읏!”
쓸데없는 망상이었다. 기욱의 앞에서 사정한 서진은 힘없이 앞쪽으로 쓰러졌다. 기욱의 얼굴이 평소보다 붉게 느껴졌다. 기욱은 땀에 젖은 서진의 귓가를 혀로 핥았다.
“하면서, 누구 생각했어? 응?”
혹시나 했던 질문에 서진은 급하게 기욱을 밀어냈다. 제 마음을 들킨 것만 같은 기분에 심장이 빨라졌다.
“아, 알 거 없잖아요! 인제 그만…! 잠깐 뭐 하는…!”
기욱은 서진의 양팔을 누르며 위로 올라탔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무게에 서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야, 약속했잖아요!! 안 한다고!!”
“섹스 안 한다고 약속한 적은 없는데?”
“이런 거… 이런 거 거짓말이에요! 싫어! …으읍…!”
기욱의 커다란 손이 서진의 입을 막았다. 잔뜩 흥분한 기욱은 서진의 허벅지를 옆으로 벌렸다. 강제로 벌어진 사이로 잔뜩 발기된 기욱의 페니스가 자리를 잡았다.
“아윽! 으읏… 어… 으흐흐흑… 죽으라고 너 같은 거……!!”
기욱은 발버둥을 치는 서진의 발을 잡아 위로 올린 뒤 제 페니스를 깊게 밀어 넣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서진이 누굴 생각하면서 자위를 했든 그건 제 알 바 아녔다. 가기 직전의 서진은 기욱의 눈엔 그 무엇보다 귀엽게 보였다. 서진이 발버둥을 치든, 반항하든 기욱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기욱은 서진을 힘으로 누른 채 페니스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그렇게 반항하는 것도.”
“…….”
“귀여울 지경이야.”
“죽어… 으읏… 쓰레기 자식…!!”
조금이라도 기욱에게 정상적인 것을 기대한 서진은 스스로가 참 바보 같다고 느꼈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 * *
“하윽… 하아… 윽….”
1층 벽 쪽의 창문에 있는 커튼 너머로 아침 햇빛이 스며들어 왔다. 서진의 침대 옆에 있는 디지털시계는 6시를 넘기고 있었다. 아침이 되었지만 서진은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침이라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 한구석에는 학교에 가야 하는데, 하는 생각만이 기계처럼 맴돌 뿐이었다. 기욱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는 서진의 허리를 눌렀다. 웅얼대는 듯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들렸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서진은 그제야 기욱이 통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진과 눈이 마주친 기욱은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쉿, 하고 중얼거렸다. 스피커폰은 아니지만, 방 안이 조용한 탓에 휴대폰 너머의 대화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 아프다고?
― 열이 좀 있는 모양이야. 방금 통화했거든.
서윤의 목소리였다. 태연하게 거짓말을 한 기욱은 침대에 엎드려 있는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분명 팔다리는 자유로운데, 마치 무거운 쇠사슬에 걸린 것처럼 손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 그래? 아까 내가 전화했을 때는 안 받던데…….
― 나랑 통화하고 잠든 거 아닐까? 깜박했나 보지.
― 그래? 퇴근할 때 한번 들러 봐야겠네.
― 그냥 감기래. 근처 병원 가라고 말해 놨어. 서진이도 다 컸는데 뭘 그 정도로 그래.
― 걱정돼서 그러지. 나한텐 서진이밖에 없는걸.
서윤의 말에 기욱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문득 습관처럼 하는 서진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기욱은 반항을 하는 서진의 손을 강제로 쥐었다.
― 서윤아.
― 어? 왜?
― 하아, 어제는 내가 미안했어. 그…. 술을 좀 마시기도 했고.
― 아이참!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오빠야말로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래?
― 내가 너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요. 놓으라구요.”
서진은 가까이 다가오는 기욱을 밀어냈다. 아침부터, 서윤과 통화 중에 뭐 하는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얼굴을 들이민 기욱은 한 손에 들린 휴대폰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사랑해.”
응, 나도. 일 끝나고 전화할게. 분명 그런 대답이 들렸지만, 기욱은 서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휴대폰을 옆으로 던진 기욱은 무릎으로 서진의 허벅지를 누르며 반강제로 키스했다.
“하읍… 읏… 으읍!!”
“후우, 서윤아.”
“흐흑… 으읏… 놔. 놔요. 제발 그만… 으읏….”
“내가 너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개자식!! 당신은 진짜 쓰레기…!! 하윽!!”
기욱은 마치 어딘가의 대본처럼 통화가 끝나기 전 마지막 말을 중얼거렸다. 기욱은 서진의 머리채를 뒤로 잡아당겨 강제로 시선을 맞췄다.
“사랑해.”
“으으읍…!!”
기욱은 서진의 입술을 덮으며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너를 위한 랩소디』 7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