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7 아무 일도 없었다
점심이 조금 지난 시헌은 인천공항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올라갔다. 비행기 시간표를 확인하고 출국장 근처로 가자 마침 점심을 먹고 내려온 기욱과 서진이 있었다. 서진은 시헌의 등장에 깜짝 놀란 듯 기욱을 바라봤다. 병원 일로 문자를 하며 시헌을 보지 않고 있던 기욱은 시헌의 인기척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불렀어.”
“왜…….”
서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문자로 감당이 안 됐는지 기욱은 잠시 통화를 하고 오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기욱의 연락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시헌은 이틀 전쯤 기욱에게 어지간하면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게 뭘 말하는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두 사람의 연기를 아무렇지 않게 볼 자신이 없었던 시헌은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서진을 생각하니 고민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헌이 나오지 않을 거라 예상한 서진은 시헌의 등장이 약간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시헌은 출국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
“…….”
서진은 말없이 시헌의 팔을 내려다봤다. 언제부터 이렇게 우리 사이가 소원해진 걸까. 시헌은 조심스럽게 서진의 팔을 내려놓았다.
“나중에.”
“…….”
“나랑 얘기 좀 하자.”
“할 얘기 없……. 하아, 알았어.”
마침 돌아오는 기욱에 서진은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은 기욱은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 애써 묻지 않았다. 얼마 뒤 커다란 캐리어를 이끈 서윤이 밖으로 나왔다. 서윤을 알아본 서진이 손을 흔들었다. 기욱은 시헌의 발끝을 살짝 건드렸다. 기욱에게 아닌 눈치를 받은 시헌은 서윤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그…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건가? 아니면 둘의, 셋의 비밀을 알고 있어서 그런 걸까? 시헌은 오랜만에 보는 서윤이 낯설었다.
“누나!”
다행히 그런 낯섦은 오래 가지 않았다. 시헌이 서윤과 빠르게 인사를 하기 무섭게 서진이 서윤에게 뛰어와 안겼기 때문이었다. 서윤에게 안긴 서진이 애 같았다고 생각한 것은 시헌뿐만이 아닐 것이 틀림없었다. 그간 얼굴이 약간 탄 듯한 서윤은 품에 안긴 서진을 다독였다.
“보고 싶었어…….”
“얘도 참.”
서진은 고개를 약간 올려 서윤을 바라봤다. 등 뒤로 기욱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서진의 말에 서윤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살짝 닦았다. 시헌은 약간 떨어져 그 모습을 지켜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세 사람의 관계 속에서 시헌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일이 있다며 먼저 헤어진 시헌은 초저녁이 조금 지났을 무렵 서진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시헌과 마찬가지로 서진 또한 일이 있다며 저녁을 먹지 않고 자리를 뜬 상태였다.
해가 져 갈 무렵 집 근처에서 보자는 말을 이후로 더는 연락을 하지 않았던 시헌은 반지하방 건너편 골목에 차를 댔다.
서진의 집 근처 골목에는 차가 꽉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 밖으로 나온 시헌은 옆 유리에 몸을 기대 담배를 피웠다. 후. 담배 연기가 허공을 갈랐다. 문득, 습관처럼 담배 연기를 쫓아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하.”
시헌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차 유리에 기대 담배를 피우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시헌이 자주 봐 왔던 기욱의 습관 중 하나였다. 제 사소한 행동들이 기욱과 닮았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너무 많이 돌아왔다. 날이 평소보다 쌀쌀했다.
여덟 시까지 집에 도착할 거라고 했지만, 시간은 아직 7시 반밖에 지나지 않았다. 연신 줄담배를 피우던 시헌은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끈 뒤 담배를 발끝으로 지졌다. 담뱃불이 완전히 꺼진 것을 확인한 뒤 터덜터덜 서진의 집 근처 골목으로 다가갔다.
시헌은 낡은 담벼락에 몸을 살짝 기댔다. 담벼락 이곳저곳이 헤지고 돌의 군데군데가 갈라져 있었다. 어렸을 때는, 아니.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막 지은 것처럼 높아 보였던 담벼락이 이제는 너무나 낮게 느껴졌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낯설어졌다. 시헌은 조심스럽게 서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집 앞이야. 기다리고 있어.」 오후 7:43
답장은 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던 시헌은 조금만 더 기다리자는 생각에 휴대폰을 덮었다. 언제부터 서진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 이렇게 불편했던 걸까. 시헌은 불이 붙지 않은 담배 끝을 입술로 물었다.
부스럭.
막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던 시헌은 정체 모를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진이 왔나 싶어 대문 안쪽 반지하방을 바라봤지만, 안쪽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시헌은 다시 담배를 피우기 위해 몸을 틀었다.
“씨발, 뭐야?”
훅 하고 나타나는 인물에 시헌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뒤로 물러났다. 지퍼형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시헌의 앞에 서 있었다. 시헌은 담배를 입에서 떼며 남자와 약간 거리를 벌렸다. 미친놈인가? 시헌은 괜히 반지하방 쪽을 흘끗댔다.
하필이면 미친놈을 만나도 이런 데서 만나나 싶기도 하고. 둘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이야. …때문이라고…!!”
중얼대는 남자의 목소리에 시헌은 담배를 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제야 후드 안쪽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후드를 눌러쓴 사람은 다름 아닌 인훈이었다. 시헌은 습관처럼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잘못 본 건가 하고 몇 번을 바라봤지만, 인훈이 틀림없었다. 구치소에 있어야 할 녀석이 왜 여기 있는지 시헌은 알 길이 없었다. 기욱에게 일이 넘어간 이후 시헌은 인훈에게는 관심을 껐다. 그런 탓에 인훈이 가석방이 되었다는 것을 시헌이 알 리가 없었다.
“씨발, 또 쳐맞고 싶냐?”
“…때문이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으면…!!”
인훈은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인훈의 검은색 지퍼형 후드 안쪽으로 날이 선 물체가 보였다. 품 안에 있는 것이 칼이라는 것을 눈치챈 시헌은 골치가 아프게 됐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 * *
「집 앞이야. 기다리고 있어.」 오후 7:43
시헌의 문자를 확인한 서진은 걸음을 서둘렀다. 얼굴을 보자는 말을 듣긴 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갑자기 문자를 받을 줄은 서진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야 8시까지 집에 들어오긴 할 거라고 얘기하긴 했고, 사귈 때부터 멋대로 찾아오는 버릇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역에서 내린 서진은 기다리고 있을 시헌을 향해 집으로 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집 근처 골목에 도착해 뒤늦게 전화를 걸려던 서진은 집 앞쪽에서 실랑이하는 두 남자에 인상을 찌푸렸다.
“저게 뭐야?”
“강, 서진…!! 야!!”
“바, 박시헌?”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있는 시헌의 머리 위로 커다란 칼날이 올라와 있었다. 시헌에게 칼을 휘두르고 있던 인훈의 후드 모자가 흘러내려 가며 얼굴이 드러났다. 칼을 든 인훈과 금방이라도 찔릴 것같이 아슬아슬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시헌에 서진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인훈은 아직 서진이 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간신히 인훈의 팔을 붙잡은 시헌은 오지 말라는 식으로 눈치를 줬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
시헌의 시선을 눈치챈 서진이 재빨리 입을 다물었으나 인훈은 코앞까지 다가온 서진을 향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인훈의 몸과 함께 손에 들려 있던 칼이 빠르게 서진 쪽으로 돌아갔다.
“이런 씨발…!!”
서진의 이름을 부를 틈도 없이 시헌은 인훈의 몸을 잡아당겨 제 쪽으로 이끌어 안았다. 서진을 향하던 회칼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시헌의 몸을 관통했다.
“허억….”
투툭, 하고 시멘트 바닥 아래로 검붉은 피가 거침없이 쏟아졌다. 시헌은 있는 힘껏 인훈의 몸을 밀어냈다. 반쯤 주저앉는가 싶던 인훈이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하하하, 씨발!! 꼴좋다!!! 너… 너 때문이라고!!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시헌을 찌르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인훈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 안에서는 회칼 다음 예비로 가져온 또 다른 칼이 있었다. 서진은 칼에 찔린 시헌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헌은 비틀거리며 서진의 앞으로 다가가려는 인훈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인훈의 손에 있던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제야 인훈이 다른 칼로 자신을 찌르려 했다는 것을 눈치챈 서진은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인훈이 떨어트린 칼을 주워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칼을 빼앗는 것에 한발 늦은 인훈이 서진과의 거리를 벌렸다.
“씨, 씨발… 뭐, 뭐가 어떻게 된…….”
“큭큭, 하하하! 서진아, 그러니까 왜 그랬어. 어?”
“너… 대체 어떻게 나온…… 꺼지라고 씨발!!!”
“네가, 네가 다 잘못한 거야. 나, 난 아무 잘못이 없다고!! 내가 하하, 내가 한 게 아니야!!”
인훈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웃더니 이내 주변 시선을 눈치채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도망쳤다. 서진은 인훈을 쫓을 기운조차 없었다. 양손에 쥔 칼이 바들바들 떨리며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칼과 함께 뒤쪽에서 간신히 서 있던 시헌의 몸 또한 풀썩 하고 쓰러졌다. 서진은 그제야 시헌의 몸에 있는 커다란 회칼이 눈에 들어왔다.
“야! 바, 박시헌!! 너 괜찮아?”
“허윽… 윽… 그냥… 윽… 그래….”
“자, 잠깐만… 이걸… 씨발 대체 어떻게……!!”
서진은 급한 대로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지혈했다. 셔츠를 입고 있는 탓에 상처 부위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서진의 잠바 아래에서 휴대폰이 떨어졌다. 서진은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
― 여, 여보세요? 119 마, 맞죠?
* * *
서진은 의사가 되고자 했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저 서윤과 함께 일을 하고 싶었다. 서윤이 이루지 못한 의사로서의 길을 자신이 대신 이뤄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서윤에게 한 번이라도 물어볼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누나는 왜 그토록 의사가 되고 싶었냐고. 학교에서는 차석을 놓친 적이 없지만 눈앞에 있는 환자는 서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구급차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서진은 시헌과 함께 구급차 안에 탔다. 지직거리는 무전기 소리가 잡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뭐든, 어떻게든 해야 했다. 머릿속이 백지가 된 기분이었다.
“박시헌! 정신 차려…!!”
“윽….”
멀어지는 시헌의 목소리에 서진은 미칠 것 같았다. 생각하자. 그 말만 몇 번을 되뇌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여태껏 배워 왔던 것은 대체 뭐지? 마치 누군가가 강제로 지우개질한 것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서진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인물이 떠올랐다. 서진은 피투성이가 된 휴대폰을 만지며 간신히 정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아라. 받아. 서진은 휴대폰을 꽉 쥐며 정혁이 전화를 받기만을 기도했다. 달각, 소리와 함께 휴대폰 너머로 정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임정혁입니다. 서진이야?
― 교, 교수님… 저…!!
시헌의 상태를 본 서진은 생각이 나는 말을 무작정 내뱉었다. 점점 내려가는 모니터의 심박수에 거꾸로 서진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진의 두서없는 말을 빠르게 들은 정혁은 휴대폰을 바로잡으며 근처에 있는 의사들을 쫓아냈다.
상황 파악을 하는 데는 한 줄이면 충분했다. 할 수 있는 말을 마친 서진은 휴대폰을 붙잡고 금방이라도 울 것같이 울먹였다. 하필이면 앞쪽에 다른 사고가 난 탓인지 교통 체증이 강하게 걸린 상태였다.
― 흐윽… 교수님 제발… 시헌이 어떻게 해요……!!
― …진, 강서진. 진정하고 심호흡하고 내 말 잘 들어.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정혁은 침착하게 서진을 달래며 명령을 내렸다. 시헌의 상태를 보며 휴대폰을 바로잡은 서진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
― 그, 그런 거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 강서진, 서진아. 진정하고! 내 말 들었지? 지금 ER(응급실) 내려가고 있으니까 처치만 잘해. 어?
― 모, 못 해요! 제가 어떻게…!! 교, 교수님 제발…….
― 도와 달라고 전화한 건 너야. 차 막힌다며. 그 거리면 병원까지 최소 15분이야. 내가 순간이동이라도 할 수 있지 않는 한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베스트야.
정혁의 독려에 서진은 시헌을 내려다봤다. 삐 하는 소리가 서진의 귀와 머리를 자극했다. 이대로라면 시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 * *
응급실은 난장판이었다. 수술실 밖으로 침묵이 흘렀다. 뒤늦게 다른 수술을 마친 기욱과 서윤이 수술실 안쪽에서 시헌의 상태를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수술실 문 너머로 나오는 서윤에 서진은 기다렸다는 듯 의자에서 일어났다.
“누, 누나…!!”
“서진아, 너 옷이….”
“시헌이는?”
“아직. 좀 더 지켜봐야 돼.”
서진을 안은 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상 오래 있을 수 없어 서윤과 기욱도 테이블에 있는 시헌을 슬쩍 보고 나온 것이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는 시헌의 상태를 짐작하기란 어려웠다. 시헌이 칼을 맞았다는 소식에 기욱 또한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하아….”
피로 엉망이 된 서진의 옷을 본 기욱은 서진의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서진에게 다가갔다. 서진은 기욱의 손이 몸에 닿기 무섭게 반사적으로 쳐 냈다. 탁, 하는 요란한 소리가 조용한 수술실 바깥 복도를 크게 울렸다. 서진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기욱을 올려다봤다. 두 눈으로 기욱을 담은 서진은 참아 왔던 말을 내뱉었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에요.”
“서진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
“오빠, 미안해. 서진이가 많이 놀라서 그런 거야. 이해해 줘.”
서윤은 서진의 등을 토닥이며 기욱과 살짝 떨어트렸다. 서윤에 의해서 반강제적으로 기욱과 거리를 벌린 서진은 기욱의 시선에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린 뒤 주먹을 쥐었다.
박기욱이.
미치도록 싫었다.
* * *
침대에 반쯤 걸터앉은 시헌은 멍하니 창문을 바라봤다. 넓은 1인실의 병실은 쾌적했지만 그만큼 썰렁하기도 했다. 닫혀 있는 유리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시헌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들어와.”
시헌의 말에 미닫이문이 열리며 서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진은 옆쪽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살짝 걸터앉았다. 그제야 시헌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나 온 건 어떻게 안 거야.”
“그냥, 알아.”
“수술한 데는 괜찮고?”
서진의 시선이 시헌의 배 쪽에 닿았다. 다행히 서진의 응급처치와 응급실에 도착한 이후 빠르게 수술실에 들어가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팔을 뻗어 창문을 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서진이 일어나 시헌을 대신해 창문을 열어 줬다. 완전히 열리지 않은 창문 틈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괜찮아. 내일모레 퇴원해. 그 자식은?”
“검찰에. 이따 오후에 재판 있어.”
“그렇구나.”
이번만큼은 가석방으로 풀려나기는 어려울 것이 틀림없었다. 둘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서진에 시헌은 한숨을 쉬었다.
“나 휴학하려고.”
“…….”
“조금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엄마랑 아빠도 무리하지 말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고마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만약 시헌이 인훈의 몸을 틀지 않았다면 찔리는 것은 시헌이 아니라 틀림없이 서진이었다. 시헌이 제가 찔릴 거라는 걸 모르고 한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었다. 그건, 찔릴 걸 알면서도 한 행동이었다. 예전부터 겁이 없는 녀석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대담한 녀석일 줄은 서진도 처음 알았다.
“네가 아니었으면…… 찔리는 건 나였을 거야……. 나, 가 볼게.”
비록 시헌이 죽진 않았지만, 서진의 마음 한구석에는 죄책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지막까지 시헌에게 상처만 주고 떠나는 것만 같았다. 시헌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침대에서 몸이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거리로 붙잡힌 서진은 시헌을 침대로 돌려놓은 뒤 등을 돌렸다.
“경멸해도 좋아.”
“그게 무슨 말이야?”
“한심해 보이지? 처음부터 너 가지고 논 거였잖아. 하하.”
서진은 이마를 누르며 눈물을 숨겼다. 시헌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진짜 시헌을 생각했다면, 사귀지 말았어야 했다. 서진에게 있어서도 그동안의 추억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걸 한순간 만에 거짓으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런 거 아냐.”
등 뒤로 들리는 시헌의 대답에 서진은 슬쩍 몸을 돌렸다. 예전부터 시헌은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시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남들이 보기엔 무표정도 사실은 무표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서진이지만 딱 하나 서진도 감당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괜찮다,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는 입과 달리 시헌의 검은 눈동자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넌 꼭 날 그런 눈으로 보더라.”
“…….”
“그거 말야, 되게 상처 받아.”
서진은 진짜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일어섰다. 시헌은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서진의 등 뒤로 와락 안겼다. 아직 똑바로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쓰러지다시피 등 뒤로 안기는 시헌에 서진은 정승처럼 가만히 섰다. 시헌은 서진의 등 뒤에 안긴 채 말을 했다.
“서윤 누나.”
“…….”
“내가 지켜 줄게.”
“…….”
“그러니까 서진아, 혼자 그러지 마.”
서진은 시헌의 허리를 안으며 몸을 돌렸다. 눈가가 시뻘겋게 변했다. 참아 왔던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소매로 눈물을 아무리 닦아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흐윽… 윽… 시헌아…….”
“…….”
“끄윽… 흑… 나 진짜… 으흑…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헤어지자, 흑, 으흐으으윽… 미안해….”
서진은 제 어깨를 붙잡는 시헌의 발끝을 보며 울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시헌은 제 앞에서 우는 서진을 안아 말없이 등을 토닥였다. 한참 만에 울음을 그친 서진은 슬슬 가 봐야 한다며 소매를 걷어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소매에는 시헌이 선물해 준 시계가 그대로 있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진은 시헌을 부축해 침대에 앉혀 줬다.
“배웅… 안 나와도 괜찮아.”
사실 서 있느라 무리했던 시헌은 서진의 마지막 배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휴학 끝나고 병원에서 보자.”
차마 시헌을 끝까지 볼 수 없었던 서진은 도망치듯 병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는 마침 회진을 돌고 내려온 기욱이 있었다. 서진은 혹시 울었던 것을 들킬까 기욱을 보기 무섭게 인사를 핑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서진을 지나가는 기욱은 울었던 모습을 보여 줄 필요 없다는 듯 머리를 살짝 누르며 다른 손으로 시헌의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노크도 없이 들어온 기욱이지만 시헌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시헌은 침대에 앉아 서진이 병실을 나가기 전 건네줬던 반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시헌은 목걸이를 무릎 위로 올려놓으며 고개를 들어 기욱을 마주했다.
“있잖아, 형은… 사랑이 뭔지 알아?”
시헌은 목걸이를 손에 쥔 채 가슴을 움켜쥐었다. 딱히 가슴을 다치거나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숨이 탁, 막혀 왔다. 시헌의 질문에 기욱은 문 한쪽 벽에 몸을 반쯤 기댄 채 말없이 시헌을 바라봤다. 시헌도 딱히 기욱의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만나 왔던 기욱을 어렸을 때부터 봐 왔던 시헌은 가족 중 누구보다도 기욱을 잘 알고 있었다. 기욱은 사랑이 뭔지 모른다. 그리고 시헌은 그것이 언젠가 기욱에게 큰 걸림돌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제 머리글자가 있는 반지를 꽉 쥔 시헌은 마치 저주라도 퍼붓듯 기욱을 노려보며 말했다.
사랑을 모르는 박기욱은―
“후회할 거야 분명.”
“할 말은 그게 다야?”
기욱은 시헌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오래 있을 수 없다는 기욱의 태도에 시헌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한 가지 할 말이 더 남았다. 시헌은 목걸이 반지를 선반 쪽으로 내려놓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오랜 학습은 사람을 쉽게 바꿀 수 없다. 시헌이 특별해서 기욱의 동생인 게 아니다. 운오가 못나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기욱이 선택한 사람이 어쩌다 보니 시헌이었을 뿐인 일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기욱의 동생으로 지내 왔던 시헌은 그 자리를 운오에게 내어 주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박기욱이라는 사람은 어떤 식이든 내 사람에게는 철저했다.
“내가 잘못했어.”
기욱은 벽에서 등을 떼고 팔짱을 풀며 시헌의 앞으로 다가갔다.
“저녁에 올게.”
기욱이 병실을 나가고, 시헌은 침대 옆 선반에 놓인 반지 목걸이를 입을 다문 채 바라봤다.
시헌에게 잘못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시헌에게 한 가지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넘봐서는 안 될 사람을 넘본 죄였다.
* * *
“윽…!”
신경외과 당직실 구석 2층 침대의 1층에 걸터앉은 기욱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이를 악문 기욱에 규건은 한숨을 쉬며 할 일을 계속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전공의들은 질린다며 고개를 저었다. 가운을 걸친 기욱은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침대 안쪽 벽에 뒷머리를 쿵쿵 찍었다.
“아윽! 야, 진짜 살살 좀 해라. 아프다.”
“교수님, 그냥 침대에 누워 계시는 게 낫지 않아요? 입원 수속 다시 해 드릴게요. ICU 나온 지 하루 만에 이렇게 돌아다니시면 안 된다는 거 알잖아요.”
“야, 닥치고 드레싱이나 똑바로 해. 인턴이 해도 이것보단 잘하겠다.”
“전 신경외과라구요.”
“우리는 외과 아니냐?”
“그거, 교수님이 할 소리예요? 진짜 이런 거 몇 년 만이라구요.”
“자랑이다.”
처치가 끝난 기욱의 비아냥에 규건은 컵에 물을 따라 건넸다. 커피가 아닌 것이 아쉬웠지만 여기서 커피까지 마시고 싶다고 했다가는 정말 규건에게 한 소리를 들을 것만 같던 기욱은 조용히 규건이 준 물을 마셨다. 기욱은 여전히 상처 부위가 아픈지 인상을 찌푸렸다.
“외과 쌤 부를까요?”
“됐어. 후, 금방 괜찮아져.”
“다른 데는 괜찮구요?”
“어.”
“근데 임 교수님이 퇴원해도 된대요?”
규건은 2층 침대의 난간에 몸을 반쯤 기대며 기욱을 내려다봤다. 외상 과라 그런가? 본인이 집도한 환자에 대해서는 병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의미로 까다로운 정혁이 기욱의 퇴원을 허락해 줬다는 것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기욱의 상태는 외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규건이 봐도 퇴원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는 식으로 혹시나 하고 물은 말이었지만 돌아오는 기욱의 대답은 역시나는 아니었다.
“퇴원 안 했어.”
“네?”
당연히 정혁 몰래 퇴원 절차를 밟고 도망쳤을 거라는 규건의 예상은 완전히 어긋나 있었다. 기욱의 공백으로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한 규건은 감지 못해 떡이 진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자, 잠깐만요…. 그럼 지금 교수님…… 아, 진짜 미쳤어요?”
규건은 난간에서 몸을 떼며 언성을 높였다. 어지간하면 넘어가 주려 했던 규건도 이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퇴원 수속을 밟았다면 모를까 이건 그냥 대놓고 튄 거나 다름이 없었다. 사실 어느 쪽이든 튄 건 똑같지만 말이다.
기욱은 듣기 싫다는 식으로 괜히 귀를 막았다. 안 그래도 숨쉬기 힘든데 규건 때문에 더 짜증이 나는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병동 복도에서부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야!! 박기욱!! 박기욱 어딨어!!”
살짝 열린 당직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규건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정혁의 목소리를 들은 기욱은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규건은 안색이 안 좋아진 기욱을 재빨리 부축했다. 규건에게 반쯤 부축을 받아 당직실과 연결된 창고의 문을 열고 몸을 반쯤 숨겼다.
“아, 선배… 진짜….”
“나 없는 거다.”
“그러니까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닌…… 아씨!”
기욱은 규건을 밀어내며 멋대로 미닫이문을 닫았다. 문 앞에 선 규건은 당직실 안으로 쳐들어오는 정혁에 깜짝 놀라 몸을 틀었다. 얼마나 요란하게 들어왔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평소보다 인원이 많은 당직실을 둘러본 정혁은 한쪽 구석에 있는 규건과 눈을 마주쳤다. 규건이 기욱의 밑에서 일하는 의사라는 걸 모르는 의사들은 없었다. 규건은 성큼성큼 앞까지 다가오는 정혁을 향해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임 교수님.”
“박기욱은?”
정혁은 잔뜩 긴장된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규건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기욱을 찾는 그 목소리에서 화가 잔뜩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기욱 어딨냐고.”
정혁은 팔짱을 끼며 규건을 올려다봤다. 정혁은 상대적으로 규건보다 키나 덩치가 작은 편이었으나 그 포스만큼은 규건을 압도하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규건도 나름대로 교수 소리 듣는 의사로서 어지간한 경험은 다 해 본 의사지만, 정혁의 앞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전공의나 다를 것이 없었다. 잔뜩 긴장한 규건은 정혁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오랜 병원 생활상 의사들은 긴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모른다는 규건의 말에 정혁은 곧장 뒤쪽에 있는 의사들로 시선을 돌렸다. 규건은 정혁이 고개를 돌린 틈을 타 입술을 움직였다.
조교수인 규건이 말하지 않았는데 밑에 의사들이 입을 열 리가 없었다. 정혁도 바보는 아니었다. 의사들을 쭉 둘러본 정혁은 다시 규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정혁의 손가락이 규건의 커다란 어깨를 툭툭 찔렀다.
“진짜 몰라?”
“진짜 모릅니다.”
“만약 네가 박기욱 숨겨 줬다는 거 나중에라도 내 귀에 들어오면.”
“…….”
“늬들 NS는 단체로 나한테 뒤지는 거야. 너 지금 외과에 선전포고한 거 다 알지?”
“선전포고라니…… 교, 교수님. 진짜 그런 의도는 아닌…….”
“감히 남의 과 환자를 빼돌려? 나 여기 병원 아니어도 부르는 데 많아. 이참에 막장으로 가 보자고 아주.”
정혁에 의해 벽 끝까지 몰린 규건은 속으로 인상을 구겼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아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정혁이 한숨을 쉬며 같이 데려온 의사들과 함께 잠시 대화를 하는 사이 근처에 있던 펠로우가 슬쩍 규건의 옆으로 다가왔다.
“교수님, 이거 괜찮은 겁니까?”
“씨발, 괜찮을 리가 없잖아.”
두 사람의 소곤거림을 눈치챈 정혁이 몸을 틀었다. 정혁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낀 규건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안쪽 문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문 근처에 있던 다른 외과 의사가 미닫이문을 옆으로 밀었다. 미닫이문 너머에서 짜증 섞인 기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놔, 씨발. 최규건!”
대놓고 들려오는 이름에 규건은 이마를 짚었다. 그럼 어쩌라고. 기욱 하나 숨겨 주자고 진짜 외과 애들이랑 싸울 수도 없고. 애당초 기욱이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빌어먹을 중간 관리자의 고충이었다. 정혁은 미닫이문을 연 의사를 밀어내며 창고 안쪽에 서 있는 기욱을 노려봤다.
“야, 박기욱.”
“왜요?”
“왜요는 얼어 죽을. 다 죽어 가는 꼴로 병원 기어들어 와서 사람이 애써 살려 줬건만 멋대로 도망쳐? *SICU 나오니까 살 만하다 이거냐?”
“잠깐 바람 좀 쐬러 나온 겁니다. 퇴원 안 했잖아요.”
*SICU[surgical intensive care unit] : 외과 집중 치료실
기욱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어린애 같은 변명을 하며 다가와 부축하려는 의사들을 밀어냈다. 기욱의 안색은 처음 당직실에 들어왔을 때보다 창백해져 있었다. 정혁은 수술복과 가운을 걸치고 있는 기욱을 보며 혀를 찼다.
“너 환자 봤다며.”
“……본 건 아니고 좀…… 신경 쓰여서…….”
창고 밖으로 나온 기욱은 규건을 슬쩍 노려봤다. 정혁의 말대로 기욱은 정혁이 오기 몇 시간 전 몇몇 환자에 대해서 규건과 조용히 회진을 돌고 왔다. 그걸 또 누가 말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기욱의 시선에 규건은 제가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혁은 배를 움켜쥐는 기욱의 앞으로 다가갔다. 의사로서 기욱의 심정도 이해는 한다. 무엇보다 기욱은 병원에서 제 환자들을 잘 챙기기로는 자신 못지않게 유명했다. 저야 과가 과다 보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치지만, 기욱의 환자에는 중환자와 일반 환자를 가리지 않았다. 의사로서 좋은 자세라는 걸 알면서도 기욱의 상태를 보면 그게 진짜 옳은 건지 아닌지 알 길이 없었다.
“새끼야, 나도 젊었을 땐 며칠 밤새 가면서 환자 보고, 한 시간 자고 수술방 들어가는 미친 짓도 많이 했지만, 총 맞고 중환자실 나온 지 하루 만에 일어나 돌아다니면서 환자 보는 너 같은 독종은 살다 살다 처음이다.”
정혁은 근처에 있는 의사를 향해 손을 까닥였다. 정혁의 손짓에 그가 주머니에 넣어 뒀던 종이를 정혁에게 건넸다. 정혁은 그 종이를 받아 다시 기욱에게 내밀었다.
기욱은 눈을 비비며 종이를 천천히 살폈다. 정혁의 말대로 상태가 좋지 않은 기욱은 종이의 작은 글씨를 읽는 데도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러나 기욱은 그런 자신의 상태를 결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기욱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결재 서류의 한 페이지였다.
“이게 뭡니까?”
“무급휴가.”
“전 이런 거 낸 기억이 없습니다만.”
“내가 받아 왔어.”
“아, 진짜…….”
기욱이 환자를 볼 거라는 건 정혁도 아주 짐작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정혁은 의사로서 사람들을 다루는 데에는 도가 터 있었다. 의사인 환자 또한 예외는 없었다. 그 환자가 같은 병원 의사라면 더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진짜 한 번만 더 환자 보면. 박 교수님 불러서 팔다리 다 묶어 버릴 줄 알아. 아마 허락해 줄걸?”
하연을 언급하자 기욱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구겨졌다. 하연이라면 이미 기욱이 병동을 빠져나온 순간부터 그렇게 했을지도 몰랐다. 저 말이 사실이 되는 길은 멀지 않았다. 정혁은 기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운 벗어.”
“…….”
“가운 벗고 신분증 내놔. 당장.”
“아니 내가 왜 당신한테…….”
기욱은 싫다며 고개를 저었으나 정혁의 손짓을 본 의사들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다가왔다. 기욱은 짜증을 내며 가운과 신분증을 벗었다. 정혁은 기욱의 가운과 신분증을 규건에게 휙, 하고 내던졌다.
“야, 누가 휠체어 좀 가져와라!”
“걸어갈 수 있습니다.”
“뒤진다?”
급하게 따라온 의사가 밖으로 나가 복도에서 휠체어를 가져왔다. 모여 있는 의사들 가운데에 놓인 휠체어에 기욱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무슨 망신인가 싶었다. 정혁은 기욱의 팔을 잡아당겨 반강제적으로 휠체어에 앉혔다.
“크크 읍… 박 교수님…… 큭큭.”
“아오 씨…… 웃음이 나와?”
기욱은 웃음을 참는 규건을 노려봤다. 설마 그 박기욱이 휠체어에 실려 가는 꼴이 될 줄은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기욱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인지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혁은 기욱의 휠체어의 손잡이를 밀었다. 막 기욱을 데리고 나가려던 찰나 옆에 있던 다른 의사가 심각하게 전화를 받더니 정혁에게 전화를 건넸다.
“아씨, 또 뭐야….”
정혁이 등 뒤에서 전화를 받는 탓에 기욱에게 전화의 내용이 흐릿하게 들렸다. 서진에 관한 내용이었다. 기욱을 슬쩍 내려다본 정혁은 골치가 아프다며 입술을 깨물며 옆에 있던 의사를 건드렸다.
“박기욱 원상복귀 시켜 놔.”
“같이 가죠.”
급하게 나가려는 정혁을 본 기욱은 정혁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휠체어에서 일어났다. 서진은 지금 기욱과 마찬가지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였다. 기욱은 서진이 뭔가 잘못됐음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급하게 휠체어에서 일어난 기욱은 한 걸음도 밖으로 내딛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난데없이 쓰러진 기욱에 깜짝 놀란 정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근처에 있는 의사들을 밀어냈다. 좁은 당직실에 의사만 몇 명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야, 이 자식 옷 좀 걷어 빨리.”
“아, 네!”
정혁의 말을 들은 의사 한 명이 기욱의 옷을 배 위쪽으로 걷었다. 기욱의 상처를 본 정혁은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찼다.
“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도대체 이 미친 새끼는 의대에서 뭘 쳐 배워 온 거야!! 좀 눕혀! 스크레쳐 가져와 당장!!”
기욱의 시야 위로 정혁과 의사들이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그 와중에도 기욱은 일어나려고 계속해서 발버둥을 쳤다.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교수님, 괜찮아요? 교수님?”
기욱은 의식을 붙잡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맥없이 쓰러지는 기욱에 정혁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응급조치를 했다.
“빌어먹을! 박기욱…!!”
깨어난다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정혁은 이를 악물었다.
* * *
털석, 서진은 오피스텔 건물 바깥에 있는 쓰레기 더미 위로 쓸모없는 짐들과 포장 테이프들이 마구 엉켜 담겨 있는 상자를 내려놓았다. 등 뒤로 익숙하지 않은 높은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8층, 서진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제 오피스텔 창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습을 다녀오고, 학교에 잠시 볼일이 있어 거의 막차를 타고 들어와 12시부터 시작한 짐 정리는 2시가 좀 넘어서야 끝이 났다.
막바지 짐 정리라 30분이면 정리하고 잘 줄 알았는데, 막상 시작하니 이것저것 잔물건이 많은 탓에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고 말았다. 쓸모없는 짐이 담긴 상자를 옆으로 밀어낸 서진은 모자를 눌러쓰며 오피스텔로 돌아가기 위해 유리문 앞에 섰다.
“…….”
전자 도어락을 사용해본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서진은 일주일이 넘은 지금도 도어락을 사용하는 것에 약간 어색함이 있었다. 머뭇거리며 비밀번호를 누르는 서진의 옆으로 낯선 남자 한 명이 문 앞에 섰다. 제 나이와 비슷한, 조금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서진은 그가 제가 문을 여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착각하며 서둘러 문을 열었다. 우웅― 두꺼운 유리문이 열리며 서진과 남자는 거의 동시에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계단 쪽을 머뭇거리더니 서진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것을 보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서진은 한 타이밍 늦게 제집인 8층 버튼을 눌렀다. 남자는 서진이 누른 버튼을 보며 다시 휴대폰으로 고개를 숙였다. 같은 층에 사는 사람인가?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서진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문을 열었다.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철컥 하고 문이 열렸다. 복도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서진의 옆집의 벨을 눌렀다. 약간 수상쩍긴 했지만, 별일이 아닐 거로 생각한 서진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의 도어락만큼이나 서진은 낯선 집이 어색했다. 언젠가 혼자 나와서 살게 될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여러모로 갑작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서진은 유리로 되어 있는 벽면의 커튼을 친 뒤 혼자 앉기에는 조금 큰 소파에 앉았다. 무릎 밑으로 휴대폰이 닿았다. 문자가 와 있었다.
「끝났어?」 오전 2:07
이 시간에 문자를 보낼 사람은 기욱 외에 달리 없었다.
‘자?’도 아니고 ‘끝났어?’라니. 제가 뭘 하는 줄 알고. 서진은 괜한 트집에 기분이 나쁘다며 문자 화면을 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서진이 답장을 무시하려 하기 무섭게 기욱에게 전화가 왔다. 버튼을 잘못 눌러 통화를 받아 버린 서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 …….
― 왜요.
침묵이 이는 것도 불편한 서진은 휴대폰을 귀에 대고 피곤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 쓰레기 버리고 왔나 보네.
― 당신, 진짜…….
― 진짜?
― 됐어요.
서진은 거실 주변 천장을 두리번거렸다. 제집에 CCTV라도 달았나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천장에 의심스러운 물건은 없었다. 서진의 그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욱은 서진을 약 올리듯 말했다.
― 내가 말했잖아. 그거 삼십 분 안에 정리 못 한다니까.
― 도와줄 거 아니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 도와줬잖아. 짐 정리 정도는 스스로 해.
― 윽. 몰라요. 씻고 잘 거니까 전화 끊어요.
기욱은 지금 병원에 있었다. 서진이 병원을 나오기 전 기욱이 출근하는 모습을 봤으니까 지금쯤 병원에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일 아침 일찍 또 병원에 가야 했던 서진은 무척이나 피곤한 상태였다.
― 피곤해?
― 피곤한 거 알면 전화 끊어요.
― 큭큭, 알았어. 잘 자.
― …….
― 왜 또? 잘 자라고 한 거잖아.
― 아뇨, 그냥. 기분이 좋은가 보다 해서요.
― 좀 그래. 어쨌든 잘 자라.
서진은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봤다. 눈이 침침해 화면이 똑바로 보이지 않았다. 모자와 잠바를 벗어 대충 소파에 던져 놓은 서진은 휴대폰 충전기와 휴대폰만을 챙겨 터덜터덜 2층으로 올라갔다. 복층형 오피스텔로 안쪽에는 혼자 쓰기에는 살짝 큰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에 누운 서진은 그제야 아래층의 불을 끄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빛이 강하지 않은 데다, 내려가기도 귀찮았던 서진은 2층의 불만을 끈 채 이불을 덮었다. 피곤했던 터라 금방 잠이 들었다.
“…씨, 작작 좀 처하라고!!”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서진은 문 너머에서 들리는 외침에 인상을 찌푸렸다. 쿵쿵거리는 요란한 소리에 짜증이 날 대로 난 서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를 긁적이며 아래로 내려갔다.
한 십 분 잔 걸까? 흰 벽에 걸린 시계는 여전히 2와 3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진은 현관으로 가 집 문을 안쪽에서 열었다.
“아오!!! 내가 저것들 때문에 돌아 버리겠네!!”
“…….”
“매일 밤 아주 지랄을 해라 지랄을!!”
복도에는 낯선 남자가 서진의 옆집을 문을 쾅쾅 두드렸다. 서진은 문을 두드리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복도의 희미한 불빛을 통해 문을 두드리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진은 잠이 덜 깬 건가? 눈을 비비며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어… 그, 다… 당신 설마….”
“뭐야, 강서진이냐?”
“아, 안녕하세요.”
우민이 맞았다. 서진은 저도 모르게 공손하게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어색한 인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곧이어 복도 너머로 낯 뜨거운 신음이 잔뜩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우민은 한두 번 일이 아닌 듯 문을 쾅 하고 주먹으로 내쳤다.
“아오, 씨. 돌겠네! 진짜!”
우민의 짜증에 서진은 엘리베이터에서 탄 남자를 생각했다. 그 남자랑 하는 건가 싶었지만, 딱히 그게 중요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우민 또한 서진처럼 피곤함에 잔뜩 쩔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서진은 여전히 사복 차림의 우민을 보는 것이 약간 어색했다. 우민은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서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니네 집은 조용하냐?”
“아, 네…. 전 그… 교수님 소리 때문에 놀라서 나온 거였어요.”
서진은 문을 열기 전까지 옆집에서 그 짓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우민은 옆집의 문을 노려보며 서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하, 같은 옆집인데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좆같은 새끼들.”
“……하하.”
“니네 집 좀 빌리자.”
반바지에 늘어진 셔츠 차림의 우민은 아무렇지 않게 서진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원래 이렇게 털털한 사람이었던가. 복도의 찬 기운에 조금 정신이 든 서진은 재빨리 몸을 살짝 틀었다.
“저… 그게…….”
“왜? 불편해? 그럼 니가 우리 집에서 잘래?”
서진이 집 안을 숨기려는 것을 눈치챈 우민이 팔짱을 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서진은 우민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며 손을 저었다.
“그게 아니라,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집이 엉망이에요.”
“큭큭, 하하! 괜찮아. 다리 뻗고 누울 수만 있다면 쓰레기장에서도 잘 수 있어.”
“아무리 그래도 쓰레기장은 좀…….”
“자 본 적 있다?”
“예?”
단순히 장난이라고 생각했던 서진의 말과 달리 우민은 가볍게 웃으며 멋대로 서진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쓰레기를 치우고, 방을 닦지 않아 방바닥에는 먼지들이 가득했다. 우민은 생각했던 것보다 깨끗하지 않냐며 한쪽에 있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1년 차 때. 위에 선배가 하도 지랄 맞게 굴어서 울면서 도망쳤거든. 근데 그때 내가 3일인가 잠을 못 잤어. 새벽에 막 엉엉 울면서 반시체 상태로 돌아다니다가 정신 차리고 나니까 병원 뒤편 쓰레기처리장에서 술 취한 사람처럼 잤더라고.”
“하하.”
우민의 일화에 서진은 뺨을 긁적였다. 사실 우민이 쓰레기장에서 잤던 것보다 저 우민이 선배한테 혼나서 울었다는 사실이 더 믿을 수 없었다.
“큭큭, 진짜 미친 거지. 그 뒤로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하는 게 인간이라는 걸 실감했지.”
우민은 1층 안쪽 큰방의 벽면 내부 벽장을 익숙하게 옆으로 밀었다. 처음 집에 방문한 서진조차 기욱이 알려 주기 전까지 저기에 옷장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오피스텔이 다 그렇듯 방 구조가 비슷비슷했다. 혼자 쓰기에는 큰 벽장 안에는 얼마 없는 서진의 옷가지들과 짐이 상자째로 들어가 있었다.
“이불 없어?”
“아직, 한 개밖에 없어요.”
방에서 얼굴을 내미는 우민에 서진은 침대가 있는 계단 2층 쪽을 흘끗댔다. 서진과 같은 방 구조에서 사는 우민이 2층에 침대가 있을 거라는 사실을 모를 리는 없다. 거실로 나온 우민은 소파 쪽에 몸을 눕혔다.
“그럼 뭐, 소파에서 자야겠네.”
“괜찮으면 올라와서 주무세요.”
“됐어. 그냥 잘게.”
“그래도 교수님이신데……. 맨바닥에서 주무시게 할 수는 없잖아요.”
“PK 주제에. 새끼 하는 말 하고는.”
계속되는 서진의 요구에 우민은 못 이기는 척 소파에서 일어났다. 사실 서진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인턴쯤만 됐어도 침대 내놔, 라고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민은 계단 안쪽에 숨겨진 1층의 불을 껐다. 눈치를 본 서진은 2층에 올라가 침대에 누웠다. 안쪽으로 들어가는 서진에 우민은 침대 위로 털썩 올라왔다. 이불은 혼자 덮기엔 살짝 커 문제가 없었지만, 베개는 하나뿐이었다. 우민은 아무렇지 않게 제 팔로 베개를 만들었다.
“나 때문에 미안하다.”
“아뇨. 괜찮아요.”
“지금 어디 돌아?”
“내과요.”
“외과는 언제부턴데?”
“다음 주였나……. 확인해 봐야 돼요.”
“우리 과 오면 잘해 줄게.”
계속 벽을 보고 얘기할 수 없었던 서진은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틀었다. 침대 헤드 쪽에서 은은한 불빛이 나오고 있었다. 사실 서진은 침대에 이런 기능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우민의 머리 위쪽으로 붉은 스위치가 나 있었다. 우민이 켠 모양이었다.
“내가 이래 봬도 병원에서 한 성깔 하거든. 내가 잘 봐준다면 잘 봐주는 거야.”
“하하. 네.”
서진은 베개를 벤 체 고개를 약간 숙였다. 나름의 인사 표시였다.
“새끼 귀엽기는. 팔은 아직도 그러냐?”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서진은 팔을 뒤로 숨겼다. 슬쩍 이불 안으로 넣은 팔을 내려다봤다. 팔에는 아무런 자국이 없었다. 서진은 그제야 우민이 찌르려고 말을 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서진은 그 당시 우민이 저와 서진의 관계에 대해 오해를 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서진은 우민에게 복잡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요. 헤어졌어요.”
“잘했어. 오래 끌어 봤자 좋을 거 없어.”
“……네.”
서진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불을 덮었다. 우민이 옆에 있다고 긴장한 것도 잠시뿐 피곤했던 서진은 이번에야말로 진짜 잠이 들었다.
* * *
차르륵,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이 몸을 타고 좁은 욕실 바닥으로 흘러 내렸다. 욕실 안은 물소리와 천장에 있는 환풍구가 돌아가는 소리로 정신이 없었다. 이른 새벽의 샤워가 끝나 갈 무렵 문 너머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제집처럼 샤워기를 끈 우민은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은 뒤 수건걸이에 걸어 뒀던 옷을 대충 챙겨 입었다. 불투명한 통유리 문을 살짝 열자 막 잠에서 깬 서진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목에 수건을 두른 채 물기를 닦으며 밖으로 나온 우민은 소파 밑 서진의 휴대폰 충전기에 꽂아 두었던 제 휴대폰을 살짝 열었다. 배터리가 얼마 없는 휴대폰의 시계는 새벽 다섯 시 반을 좀 넘기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
“하암…, 교수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서진 또한 책상에 있는 디지털시계를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서진은 안쪽으로 가 블라인드를 살짝 걷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최근 들어 해가 짧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푸르스름한 어둠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서진은 잠에서 덜 깼는지 여전히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잠이라고 해 봤자 두 시간 남짓이었기 때문이었다. 반쯤 죽어 가는 눈으로 제정신을 못 차리는 서진과 달리 샤워까지 마치고 나온 우민은 쌩쌩해 보였다. 서진은 진짜 우민과 자신이 같은 시간을 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민은 멍하니 서서 새벽닭처럼 꾸벅꾸벅 하는 서진의 등을 퍽 하고 때렸다.
“짜식, 졸지 말고 씻어!”
“윽! 아, 알았어요….”
서진은 우민에게 맞은 등을 만지작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우민이 씻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욕실 안은 물기의 온기들과 우민의 잔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품하며 잠을 깨기 위해 찬물로 세수한 서진은 손으로 물기가 진 거울을 닦은 뒤 눈을 깜박였다.
잠깐만 씻어가 아니잖아!
“왜 여기서 씻는 건데?”
서진은 유리문의 고리를 살짝 만지작거렸다. 문 너머에는 여전히 부산하게 움직이는 우민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새벽, 아닌 옆집의 횡포로 인해 우연히 건넛집이었던 우민이 제 오피스텔 방으로 피난을 온 것까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서진은 아직 우민이 건넛집에 산다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작 우민은 마치 서진이 건너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서진은 바로 옆옆 자기 집 두고 굳이 여기서 씻은 우민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한 서진은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 여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옷을 벗은 뒤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샤워하고 밖으로 나온 서진은 묘한 풍경에 당황했다. 사실 샤워가 거의 끝나 갈 무렵부터 우민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긴 했지만 말이다. 서진은 불 앞에 서 있는 우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언제 또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걸까, 늘어진 츄리닝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수건을 목에 두른 서진은 계란후라이를 하는 우민에게 다가갔다. 어느 쪽이든 교수인 우민이 요리하고 있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제가 하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다가간 서진은 그제야 제집에 계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데다 한동안 집에서 밥을 해 먹을 일이 없었던 서진의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계란… 설마 사 왔어요?”
“어. 바로 앞 마트에서. 야, 아무리 혼자 살아도 그렇지 냉장고에 계란 정도는 넣어 둬라. 아주 거미줄 치겠다.”
“하하,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요.”
우민의 잔소리에 서진은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었다. 익숙하게 계란을 뒤집은 우민은 계란을 식탁에 놓인 접시 위에 올렸다. 계란뿐만이 아니었다. 작은 식탁 위에는 밀폐용기에 담긴 반찬과 밥이 있었다. 서진은 콘센트째 뽑혀 나가져 있는 밥통을 슬쩍 흘끗댔다.
“너희 몇 시까지지?”
“일곱 시 반이요.”
아직 6시도 채 되지 않은 데다 새로 이사한 오피스텔은 병원에서 지하철로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멋대로 테이블에 앉은 우민은 집에서 가져온 반찬을 퍼먹으며 손을 까닥였다.
“뭐해? 밥 먹어.”
“아뇨, 그게 저… 아침은 잘 안 먹어서…….”
“어쭈? 지금 내가 해준 밥이 먹기 싫다 이거야? 뼈다귀처럼 마른 놈이 감히 누구 앞에서 아침이 어쨌다고?”
“저 마른 편 아닌데요.”
“내가 보기엔 그래. 야, 식는다. 먹어라. 먹어.”
서진은 마지못해 우민의 앞에 앉아 밥을 먹었다. 설마 오피스텔에 이사를 오고 우민과 같이 앉아 밥을 먹게 될 날이 생길 거라는 것은 상상은 한 적도 없었다. 애당초 서진은 오피스텔에 우민이 사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밥을 반쯤 먹은 서진은 물을 마시고 있는 우민을 흘끗대며 입을 열었다.
“마트에서 얼마 나왔어요? 돈 드릴게요.”
“뭐? 달걀 두 개?”
“……그래도요.”
서진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제가 한 말치고는 좀 어이가 없긴 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오해를 했든, 그저 빚을 지고 싶지 않다는 뜻에서 한 말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우민은 그런 서진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 하하하! 됐다. 됐어! 이게 누구 앞에서 허세야 허세는!”
“그, 그런 건 아니고……. 죄송합니다.”
“야! 죄송한 거 알면 밥이나 먹어. 의사들이야 하루 12시간 이상씩 일하고 선배가 아무리 안 좋아도 돈 받고 일하는 거지만, 니넨 무급이잖아. 선배나 다른 의사가 뭐 해 주면 꼴에 가운 입었다고 체면 차리지 말고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 한번 하고 받으면 되는 거야. 알았어?”
우민의 잔소리에 서진은 입술을 약간 삐죽 내밀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또 돌아올 우민의 잔소리에 서진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서진이 말을 고민하는 사이 침묵이 맴돌았다.
“대답해라. 나 대답 안 하는 거 싫어한다.”
“네. 알겠습니다.”
우민의 재촉에 서진은 더는 생각하기 귀찮다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적당히 대답했다. 말마다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것이 제 나쁜 버릇 중에 하나라는 것을 서진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기욱이 그런 서진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봐준 것일 수도 있었다. 우민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마지못해 대답하는 서진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우민의 손이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새끼 귀엽기는. 야, 빨리 먹어라. 차 태워다 줄게.”
“괜찮아…….”
“쓰읍! 내가 아까 뭐라 그랬어?”
“…아, 알았어요.”
정말이지 무슨 말을 못 하게 만들었다. 식사를 마친 서진은 옷을 갈아입고 우민과 함께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우민의 차는 비교적 평범한 차였다. 서진은 조수석에 앉기 무섭게 안전벨트를 맸다. 배낭 가방을 무릎 위로 올려놓은 서진은 처음 타 보는 우민의 차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차 유리 쪽에는 어린 여자아이의 사진이 담긴 작은 열쇠고리가 걸려 있었다. 막 오피스텔을 나와 도로로 빠진 우민은 서진의 시선이 열쇠고리에 닿은 것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귀엽지?”
“하하, 네. 여동생이에요?”
“밑으로 5명 있어.”
“다, 다섯 명이요?”
“큰누나도 두 명 있고.”
뜻밖의 대답에 서진은 살짝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우민에게 누나와 여동생이 많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아래로 5명에 위로 2명은 좀 심한 감이 있었다. 우민은 거울 한쪽에 끼워진 흑백사진을 손가락질했다. 사진은 딱 봐도 오래된 것으로 상당히 바래 있었다. 사진 속에는 1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찍혀 있었다.
“누나인데. 작은 누나는 나 대학교 때 자살했어.”
“아, 죄송합니다.”
“됐어. 오래돼서. 솔직히 사진 아니면 기억도 잘 안 나.”
우민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사진이라는 것도 거의 바래다시피 해 얼굴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유품 정리를 할 때 나온 사진이었는데, 계속해서 지갑에 넣어 둘 바에는 조금이라도 오래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거울 사이에 끼워 둔 것이었다.
서진은 우민의 죽은 누나에 관한 얘기가 마냥 남 일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언제까지 서윤과 붙어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렸을 적에는 서윤과 떨어지면 정말 죽을 것만 같았는데. 나이를 먹는다는 게 이런 건지 막상 서윤과 떨어진 서진은 아무렇지 않았다. 실습생이고, 한참 국시 준비를 앞둔 서진에겐 서윤을 찾는 것보다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저도……. 저도, 누나 있어요. 누나가 죽으면…….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그래, 좋은 누나였지. 그러니까 너도 누나한테 잘해.”
서진은 입술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서윤과 떨어져 있지만, 그것이 서윤에게 마음을 내려놓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멀리서 커다란 병원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우민은 난데없이 차를 갓길에 댔다. 서진은 신호도 아니고, 잘 가던 차를 갓길에 대는 우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
운전대에서 손을 놓은 우민은 안전벨트를 푼 후 차에서 내렸다. 차의 앞 유리 너머에는 손수레에 폐지를 줍고 있는 할머니가 있었다. 눈치를 본 서진은 우민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밖으로 나가자 할머니를 향해 소리를 치는 우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로 한쪽에는 손수레에서 흘러내린 폐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아슬아슬하게 건너편 차선으로 넘어가 버린 폐지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폐지를 싣고 가다가 균형을 잡지 못해 찻길 쪽으로 흘린 것이 틀림없었다.
“할머니! 위험하잖아요! 어허! 이러면 안 된다니까 진짜. 나와 계세요!”
진짜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우민의 언성이 올라갔다. 우민과 바닥에 떨어진 폐지를 주우려는 할머니의 실랑이는 한동안 계속됐다. 출근길 지하철역으로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중 그런 우민과 할머니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서진 또한 출근하다 말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민은 차에서 나온 서진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야, 너 편의점 좀 갔다 와라.”
“편의점요?”
간신히 할머니를 말린 뒤 한쪽에 앉힌 우민은 길 안쪽 편의점을 손가락질했다. 우민은 영문을 몰라 하는 서진을 향해 답답하다며 소리를 질렀다.
“아무거나 좀 사 오라고! 따듯한 걸로.”
“아, 네.”
우민의 호통에 서진은 서둘러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갔다. 카운터 쪽 핫박스에 담긴 꿀물차를 카드로 결제하는 내내 서진은 편의점 유리창을 통해 박스를 치우는 우민을 바라봤다.
결제를 마친 서진은 꿀물차를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바닥에 흩어진 상자 정리는 거의 끝난 상태였다. 상자가 떨어지지 않게 고정을 하는 우민의 눈치를 본 서진은 한쪽에 앉아 있는 할머니에게 건넸다.
“얌마, 따 드려야지. 이게 진짜.”
마침 꿀물차를 건네주는 서진을 목격한 우민이 답답하다며 다가왔다. 우민은 병을 따 다시 할머니에게 건넸다.
“어이구, 젊은이 고마워유.”
“뭘요. 이거 드시고. 다음부터는 이렇게 갓길에 흘리시면 안 돼요. 알겠죠? 그리고 이거 제 명함. 아까 보니까 허리도 안 좋은 거 같은데 혹시 병원 오게 되면 연락 한번 해요. 개업의는 아니지만, 신경 써 드릴게요.”
우민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할머니의 손에 쥐여 줬다. 서진은 소매를 걷어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이곳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하고 말았다. 지금 차를 탄다 해도 병원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 해도, 교수인 우민과 달리 실습생인 서진은 시간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어이구, 의사 선생이셨수? 참하기도 하제.”
“예. 뭐, 덕분에 고생 좀 하고 있죠. 하하.”
우민은 뒷목을 살짝 붙잡으며 웃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내색 하나 하지 않는 우민에 서진은 괜히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제가 나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의 시선이 우민의 옆에 있는 서진을 향했다.
“그쪽은 조수여?”
“아뇨, 전 그게……. 윽!”
우민은 머뭇대는 서진의 발을 꾹 밟았다. 난데없이 밟힌 발에 서진은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우민을 노려봤다.
“좋은 선생한테 배우는구먼, 자네도 훌륭한 의사가 될 거야.”
“가, 악. 감사합니다.”
아랫입술을 깨문 서진은 반강제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뒤, 차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뒤 밖에서 할머니와 짧은 대화를 더 나누고 안전하게 바래다준 우민이 차 안으로 돌아왔다. 우민은 발을 만지작거리는 서진을 노려봤다.
“아프냐?”
“…….”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기분이 상한 서진은 인상을 구기며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민은 그런 서진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새끼 그깟 발 좀 밟았다고 삐지기는. 야, 너 그런 성격으로 어떻게 병원생활 할래?”
“교수님이 신경 쓸 일이 아니잖아요.”
“미안하다. 미안해. 까칠하게 굴기는. 발 밟은 걸로 넘어간 걸 다행이라 생각해 인마! 짜식, 너 NS닥터였으면 나한테 아주 뒤지게 맞았어. 어?”
“그게 맞을 만한 일이에요?”
말대답하는 저도 잘한 일은 없지만, 서진은 도리어 화를 내는 우민도 참 뻔뻔하다는 생각을 했다. 벨트를 매고, 신호에 걸린 우민은 운전대를 잡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병원 출근은 지각한 지 오래였고, 서진에게는 몇 건의 연락들이 와 있었다. 우민은 서진의 발을 밟았던 상황에 관해 이야기했다.
“당연하지. 넌 그 상황에서 눈치도 없이 아니라고 말할래?”
“거짓말이잖아요. 전 아직 의사도 아니고, 교수님 스텝도 아닌데…….”
“그렇다고 다른 과 닥터도 아니지.”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요.”
서진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머뭇거렸다. 우민은 한쪽 팔로 그런 서진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건드렸다.
“정 그러면 PK 끝나고 우리 과로 오면 되겠네.”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데요?”
서진은 은근슬쩍 신경외과 얘기를 하는 우민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신경외과가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교수인 기욱과 서윤을 생각하면 아직은 이른 결정이었다.
“너 모르냐? 대학병원 교수들은 신입 인턴이랑 PK 앞에선 다 영업쟁이라고.”
“그래서 저한테 작업 거시는 거예요? 신경외과 오라고?”
“보면 몰라?”
“저 비싸요.”
“난 비싸게 구는 녀석 좋아하거든. 자기 스스로 싸구려라고 생각하는 놈보다는 낫잖아? 뭐, 솔직히 농담으로 한 말이긴 한데……. 나도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니까 관심 있으면 언제든 말해.”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린 우민은 서진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서진은 제 앞으로 내밀어진 우민의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나도 싼 놈 아냐. 그런 내가 먼저 번호 달라는데 안 줄 거냐?”
“교수님이 번호를 물어보면 휴대폰을 만들어서라도 드려야죠.”
우민의 휴대폰을 받은 서진은 제 번호를 찍었다. 서진을 휴대폰에 저장한 우민은 가볍게 입가를 올렸다.
“하여튼 재미있는 자식.”
우민은 한마디도 지지 않는 서진의 행동이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재미있었다.
* * *
“큭큭, 그게 말이 되냐?”
“아놔, 진짜라고! 짜증 나니까 말 걸지 마.”
“삐졌네! 새끼.”
같이 실습을 온 친구가 가운을 입은 서진을 건드렸다. 서진은 그런 친구를 귀찮다며 옆으로 밀어냈다. 점심시간, 북적북적한 병원 내 구내식당에서 서진과 동기들은 식판을 든 채 빈자리를 찾고 있었다. 탁, 하고 서진의 어깨가 지나가는 의사와 부딪혔다. 식판에 있던 국이 살짝 흔들리며 식판 바깥으로 튀었다. 서진은 급하게 식판을 몸 쪽으로 당기며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
“어.”
서진과 시헌은 거의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서로를 바라봤다. 시헌은 서진과 똑같이 가운을 입고 있었다. 슬슬 휴학한 시헌이 복학할 때가 되긴 했다. 서진은 다른 동기들과 가려는 시헌을 붙잡아 말을 걸었다.
“너 언제 복학했어?”
“좀 됐어.”
“아. 그래. 점심 맛있게 먹어라.”
마침 멀리서 동기가 부르는 탓에 서진은 식판을 들고 동기에게로 뛰어갔다. 자리를 잡겠다고 식당 이곳저곳을 뒤진 그는 간신히 잡은 자리를 빼앗길까 봐 빨리 들어오라고 안달이었다.
서진은 사람들을 피해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한 테이블이 전부 일어난 모양인지 네 사람이 앉고도 자리는 반 정도가 남았다. 예상대로 서진 일행이 테이블에 앉기 무섭게 다른 의사 무리가 다가왔다. 식사하기 위해 수저를 들기 무섭게 옆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걸 말이라고 해?”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기욱과 규건의 목소리였다. 규건의 목소리는 아직 낯이 익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규건을 귀찮다는 듯 밀어내는 기욱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서진에게 와 닿았다. 서진을 제외하고 눈치를 본 몇몇 일행들이 교수 무리인 것으로 보이는 기욱 무리에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
“아씨, 누구야. 여기 앉자고 한 녀석?”
네 사람은 고개를 모아 속삭였다. 다른 의사도 아니고, 교수 무리 옆에서 식사하는 것은 아무리 모르는 교수들이라도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옆에 교수들이 앉을 줄 몰랐다는 듯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처음에는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다행히 서진과 가장 먼 쪽에 앉은 기욱은 다른 의사들과 대화를 하느라 서진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먼저 식사를 마친 서진과 동기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 안은 여전히 사람들이 가득했다.
“야, 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아놔, 강서진 너 내 말 못 믿냐? 진짜라니까? 나 확 고백해 버릴까?”
“김칫국도 작작 마셔라. 네가 뭐가 좋다고… 아, 야!”
같은 병원 실습을 하고 있던 동기의 식판이 흔들리며 식판에 남아 있던 국물이 서진의 가운 쪽으로 튀었다. 빨간 국물은 순식간에 흰 가운에 커다란 자국을 남겼다.
뒤늦게 식판을 내려놓고 국물을 털어 냈지만 소용없었다. 이래선 화장실을 간들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실습생들의 소란에 건너편에 앉아 있던 의사들이 시선을 돌렸다. 그 사이에 앉은 기욱의 시선을 느낀 서진은 급하게 얼룩이 묻은 가운을 손으로 가렸다.
“야, 진짜 미안하다.”
“하아, 됐어. 그럴 수도 있지 뭐,”
서진은 아래로 고개를 숙여 얼룩의 상태를 확인했다. 가운에만 묻은 줄 알았는데. 모처럼 입고 온 흰 셔츠에도 국물 자국이 남았다. 식판을 정리한 서진은 근처 화장실로 가 대충 가운과 셔츠에 물을 묻혀 닦아 보았다. 그러나 자국만 더 번질 뿐이었다. 닦는 것을 반쯤 포기한 서진은 한숨을 쉬며 손을 씻은 뒤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뭐야? 어디 갔어?”
밖으로 나온 서진은 그새 사라진 동기들에 인상을 찌푸렸다.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은 탓에 자리에서 사라진 동기들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화장실 근처에서 두리번거리던 서진을 발견한 기욱이 다가왔다.
“강서진.”
“…아, 놀랐잖아요.”
서진은 난데없이 어깨에 올라오는 손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서진이 나왔을 때 기욱 일행들도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무렵이었으니까 슬슬 기욱이 복도로 나왔다 해도 이상한 일은 없었다.
여전히 서진의 어깨에서 손을 내려놓지 않은 기욱은 서진의 가운과 붉게 물든 셔츠를 흘끗거렸다. 기욱이 봐도 서진의 얼룩은 답이 없었다. 기욱은 서진의 어깨에 올려놓았던 손으로 그대로 서진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 왜…!!”
“따라와.”
서진은 기욱에게 반강제적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야! 강서진…?”
“아, 진짜….”
마침 지나치는 동기에 서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동기들은 서진을 끌고 가는 의사―기욱을 보며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진은 기욱에게 이끌려 비교적 인적이 드문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너편 건물로 넘어갔다.
환자들이 거의 없고, 군데군데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문구가 붙어 있는 모습에 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욱이 서진을 이끌고 온 곳은 연구동이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있는 방문에 붙어 있는 명패는 기욱의 연구실임에 틀림이 없었다. 다른 손으로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친 뒤 문을 연 기욱은 서진을 반쯤 연구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도대체 왜 그러냐구요…!”
서진은 처음 들어오는 낯선 연구실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서진이라 해도 기욱의 연구실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서진을 반쯤 무시한 기욱은 옷장 안을 뒤졌다. 이내 풀썩 하고 서진의 앞으로 가운과 수술복 한 벌이 날아들었다. 서진은 제 손에 들린 옷가지들을 내려다봤다.
“입어 봐.”
“됐어요.”
“그냥 입어.”
서진과 기욱의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잠시 이어졌다. 이내 서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로 기욱과 기 싸움을 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서진은 마지못해 제 실습용 가운을 벗어 한쪽 소파에 내려놓았다.
셔츠를 벗은 서진은 기욱이 준 수술복으로 갈아입기 위해서는 바지까지 벗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작해야 옷에 묻은 얼룩 때문에 바지까지 갈아입어야 한다는 사실이 서진을 무척 귀찮게 했다. 바지의 벨트를 반쯤 푼 서진은 손을 멈추며 획― 하고 고개를 돌렸다.
“보지 마요.”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뭣하면 입혀 줄까?”
성큼성큼 기욱이 서진의 등 뒤로 다가왔다. 기욱의 몸이 등 근처까지 닿은 서진은 소름이 돋았다. 허리 안쪽으로 들어오는 손에 서진은 급하게 아직 입지 않은 수술복으로 몸을 가리며 거리를 벌렸다.
“미쳤어요? 진짜? 됐으니까 고개 돌리…… 윽.”
서진은 기욱의 연구실 안쪽으로 다른 방이 있는 것을 눈치챘다. 조금만 주의 깊게 주변을 둘러보면 알 수 있는 것을. 반쯤 열린 방을 발견한 서진은 급하게 옷가지와 가운을 챙겨 방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혹시 기욱이 쫓아오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바깥에 있는 기욱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침묵이 불안하긴 했지만, 기욱이 방 안으로 쳐들어오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서진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기욱이 준 수술복은 그럭저럭 서진에게 잘 맞았다. 물론 기욱이 준 가운은 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서진은 가운을 대충 걸친 뒤 문밖으로 나왔다.
“…….”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서진은 기욱의 커다란 책상 위에 놓인 디지털시계를 흘끗댔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욱은 서진에게 갈색 봉투를 내밀었다. 옷은 또 언제 담은 건지, 봉투 안에는 서진의 얼룩이 묻은 옷이 담겨 있었다. 서진의 앞으로 다가온 기욱은 소매가 긴 가운 소매 끝을 살짝 접어 주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묻을 수도 있는 거죠.”
긴 가운 소매를 접어 주던 기욱이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난데없이 들린 팔에 서진은 무슨 짓이냐며 기욱을 노려봤다. 기욱에게 받은 수술복은 입을 만하다는 것이지, 서진의 사이즈에 딱 맞다는 뜻은 아니었다. 늘어진 수술복 상의로 인해 서진의 쇄골이 그대로 드러났다.
기욱은 다른 손으로 서진의 턱을 들어 올리며 입술을 덮쳤다. 예고치 못한 키스에 서진은 깜짝 놀라 기욱을 밀어냈지만, 기욱은 쉽게 밀리지 않았다.
조용한 복도 너머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기욱은 서진의 혀 안을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핥아 내려갔다. 서진이 숨이 반쯤 막혀 갈 무렵에서야 기욱은 키스를 멈추며 입술을 뗐다. 서진은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타액을 닦아 내며 기욱의 손을 탁― 하고 쳐 냈다. 서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기욱을 노려봤다.
“윽, 미쳤어요?”
서진은 그런 기욱을 필사적으로 밀어냈다. 자유시간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근무 중이고, 연구실이라 해도 병원 내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 장소에서 흥분하는 기욱이 서진은 좀 많이 미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욱은 서진의 입가에 묻은 타액을 손가락으로 닦아 냈다.
손가락에 묻은 타액은 다시금 기욱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아무 맛도 안 나는걸. 젠장. 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신은 참 불공평하다. 서진은 그윽하게 저를 내려다보는 기욱을 보며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른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기욱의 외모는 20대 학생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변함이 없었다. 만약 이런 지긋지긋한 관계가 아니었다면, 만약 여자였다면 진즉 기욱에게 넘어가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서윤이 기욱에게 못 죽어 안달이 나는 것도 이 지경까지 몰리고 나니 알 것만도 같았다. 그렇게 뭐든 완벽한 남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안달이 나 있는 모습이라니. 이쯤 되니 제 존재 자체가 기욱에게 커다란 약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서진은 그럴 리가 없다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서진은 자신을 무기로 기욱을 감당할 만한 자신이 없었다. 서진을 벽으로 몰아붙인 기욱의 손이 늘어진 서진의 파란색 수술복 상의 안으로 들어왔다. 안에 티를 입었지만, 생각보다 상의가 커 늘어지는 게 보여 티를 벗은 것이 화근이었다. 맨살에 그대로 닿는 기욱의 손에 서진은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니까… 읏, 저 가 봐야…….”
“박 교수님, 계십니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너머로 규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규건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서진은 깜짝 놀랐다. 문을 몇 번인가 두드리던 규건은 안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과 문이 잠겨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문고리를 밀었다.
난데없이 열린 문에 서진은 급하게 기욱을 밀어냈다. 마침 기욱의 시선도 문을 열고 들어온 규건에게 닿아 있던 상황이었다. 서진에게 밀린 기욱은 비틀거리며 책상 모서리에 몸을 부딪쳤다.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무슨…….”
“윽….”
“너는…….”
뒤늦게 서진을 발견한 규건은 책상 모서리에 몸을 부딪친 기욱에게 다가갔다. 서진은 규건의 얼굴을 확인할 틈도 없이 고개를 숙이며 옷이 담긴 쇼핑백 봉투를 가지고 도망치듯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잠깐…! 너…!”
“하아, 냅둬. 그보다 무슨 일이야?”
“아. 연락을 안 받으셔서…… 그게….”
기욱은 서진을 쫓으려는 규건을 말리며 똑바로 섰다. 하여튼 까다롭기는.
* * *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서진은 전화를 걸기 무섭게 끊는 동기에 혀를 찼다. 기욱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아무래도 중간에 일정이 바뀐 듯싶었다. 뭘 하는 건지 제대로 연락을 받는 사람은 없었다. 한숨을 쉬며 간호사 데스크에 물어봤지만,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곤란해하는 서진을 두고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까 윤쌤이랑 안에 들어가지 않았어?”
“인턴 같은데 당직실 가서 한번 물어보세요. 아직 있을 거예요.”
“당직실이 어디…….”
서진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병동을 두리번거렸다. 서진에게 말을 걸었던 그녀는 병실 사이에 있는 당직실을 손가락질했다. 고개를 약간 숙인 뒤 서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당직실의 미닫이문을 두드렸다. 얼마 안 가 뒷문 근처에서 소리를 들은 의사 한 명이 문을 열었다.
“뭐야?”
그의 손에 들린 텀블러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올라왔다. 호의적이지 않은 듯한 시선의 의사는 서진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으며 이내 한숨을 쉬었다. 다른 과 인턴 같아 보이는데, 명찰도 똑바로 안 하고. 무슨 일이냐는 안쪽 의사의 말에 그는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손을 저으며 텀블러에 담긴 커피를 홀짝였다.
“왜? 용건 있으면 빨리 말해.”
“저 그게…….”
모든 의사가 호의적일 거로 생각하진 않았지만, 서진은 이런 식의 태도에 어쩔 줄을 몰랐다. 보란 듯이 한숨을 푹푹 쉬는 전공의―레지던트를 두고 인턴이 아니라 무리에서 떨어진 실습생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진이 사정을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병원 로고가 그대로 박힌 가운과 늘어진 수술복까지 챙겨 입은 서진을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뭐, 아무렴 상관없나. 잠시 알아봐 주겠다고 하며 안으로 들어간 그는 일 분이 채 되지 않아 문을 열고 나왔다.
“삼십 분 있다가 올 거래.”
“삼십 분이요? 뭐 하는데요?”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내가 어떻게 알아? 들어와서 기다려.”
그가 서진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계속해서 바보처럼 복도에 서 있는 서진은 누가 보더라도 이상해 보였다. 서진은 그가 예민할 뿐 싫어서 그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서진이 근처에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동기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충 읽어 보니 아무리 봐도 중간에 끼어들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다들 제 일을 하며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혼자 앉은 서진은 정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 서진을 보는 게 답답하기는 같이 있는 의사들도 엇비슷했다. 결국, 서진에게 들어오라고 했던 의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할 거 없지?”
“그, 그런데요.”
“하아, PK한테 괜히 쓸데없는 일 시켰다 잘못 걸려서 한 소리 듣는 것도 싫고……. 할 거 없으면 가서 커피나 좀 사다 줘라.”
그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서진에게 내밀었다. 카드를 받은 서진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이 카드를 받자 그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나왔다. 돈을 받고 일을 하는 인턴이라면 모를까, 그의 말대로 실습생을 잘못 건드려서 좋을 건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시선은 서진이 입고 있는 가운 가슴 부근에 닿았다. 실습생이라는 서진의 설명을 들으며 확인한 건데, 서진의 가슴 부근에는 박기욱이라는 이름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박기욱, 병원생활을 하며 몇 번인가 오르락내리락 들은 적 있었던 그 이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입고 있던 가운에 음료수를 엎었다고 본인 가운을 빌려줄 정도의 사이라면 친척이거나 그 이상의 관계로밖에 짐작할 수 없었다. 아무렴 상관없는 일이지만.
“저 근데 커피는 어떤 거로…….”
“그냥 아메리카노로 대충 사 와.”
“난 라떼 아이스로. 시럽 많이 넣어서.”
“씨! 야! 그냥 사 주는 대로 처먹어!”
“어차피 사 줄 거면서 생색은.”
안쪽에서 작업하던 여의사가 그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는 한숨을 쉬며 서진 쪽으로 몸을 틀며 허공에 손을 저었다.
“몰라, 몰라. 라떼 사 오든지 아니면 아메리카노로 통일하든지 알아서 해 알아서.”
“하하, 네.”
서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카드를 챙긴 뒤 의국을 나왔다. 옷만 늘어지는 줄 알았는데, 가운 소매가 생각보다 끌렸다. 남자에게 받은 체크카드를 가슴에 있는 주머니에 집어넣은 서진은 가운 소매를 접으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 *
“어! 교수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조금 이른 오후 비교적 한가한 본관 지하 구석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를 지나가던 진호는 유리문 안쪽에 서 있는 우민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침 바쁘진 않았던 터라 같이 가는 레지던트를 먼저 보낸 뒤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수술복 차림인 우민이 몸을 틀며 손을 흔들었다.
“너야말로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해?”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럼 그냥 지나가 새끼야.”
“교수님은 뭐 하고 계십니까? 그…….”
한가하다고 해도 바쁠 때 비해 손님이 적다는 뜻이지 베이커리 가게 안에 손님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우민의 손에는 빠른 계산 준비를 위한 체크카드와 포장지에 포장된 단팥빵이 들려 있었다. 우민은 말을 흐리는 진호의 뜻을 이해한 듯 대답했다.
“오전 수술 다 끝났어. 야, 나도 밥 좀 먹자 밥 좀.”
우민은 손에 있는 단팥빵을 흔들었다. 정확히는 밥이라고 하기보다는 빵이지만. 아무렴 우민은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상관없었다.
“벌써요?”
“뭐? 너 워드 갔다 내려온 거 아니었냐?”
지금쯤 환자가 병동에 도착했을 거라 생각한 우민은 이상한 데서 놀라 하는 진호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아, 네. 저 ER에서 협진 요청해서 갔다가…… 근데 진짜 벌써 끝났어요?”
“어시 최 선생이잖아. 잘하더라. 아메리카노 라지요.”
바코드에 빵이 찍히기 무섭게 포장을 뜯은 우민은 계산을 마치기 무섭게 그 자리에서 빵을 입안에 반쯤 구겨 넣었다.
“…식, 너도 …소에 좀 똑바로… 하라고 샹.”
“교수님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잘 못 알아듣겠습니다.”
“몰라 씹. 하아, 걔 너 레지던트 동기 아니었냐? 후배보다 못하면 어쩌자는 거야.”
“딱히 최 선생보다 못한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요. 걔 전공의 때부터 손 빠르기로 유명한 녀석이었다고요.”
“박기욱은 더 빨라.”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니잖아요. 인간이랑 비교해요.”
진호는 기욱은 논외라며 손을 저었다. 커피가 나올 무렵에 우민의 손에는 빈 포장 봉투밖에 남지 않았다. 진호가 우민을 대신해 커피를 받아 왔다. 진호의 손에 들린 커피를 받은 우민은 진호를 옆으로 밀어냈다.
“야야, 방해된다. 비켜라.”
“감사합…… 어.”
“어, 너….”
막 가게 안으로 들어온 서진은 대화를 하는 의사가 우민인지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뒤늦게 우민을 발견한 서진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뒤 주문을 했다. 로비에 있는 카페를 제외하고 지하 베이커리 가게는 처음인 듯 서진은 커피를 주문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어야 했다.
“총 18,500원입니다.”
“아, 네!”
여자 직원의 말에 서진은 가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나 병동을 나오기 전 받았던 카드가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에서는 카드 대신 기욱이 넣어 두고 잊어버린 이상한 메모지만 잔뜩 나왔다.
“자, 잠깐만요…… 카드가 어디 갔지…….”
정신이 없어 보였다. 뒤에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는 생각에 서진의 손이 더욱 다급해졌다. 결국 가운 주머니에 걸려 있던 서진의 휴대폰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우민은 커피를 진호에게 맡기며 떨어진 서진의 휴대폰을 줍기 위해 몸을 숙였다.
동시에 서진 또한 휴대폰을 주우려 몸을 숙였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에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순간 서진의 가슴 주머니에 있던 카드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우민은 휴대폰에서 손을 뗀 뒤 몸을 일으켰다. 휴대폰과 카드를 동시에 쥔 서진은 어설프게 웃었다.
“너…….”
“아하하. 하하하….”
* * *
뒷사람이 기다리는 것을 본 서진은 카드를 서둘러 점원에게 건넸다. 다음 사람의 주문을 위해 옆으로 비킨 뒤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마침 동기들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아메리카노 4잔이랑 라떼 하신 분!”
“네네!”
정신이 없어 보였다. 서진은 휴대폰을 가운에 집어넣으며 커피를 받았다. 그 사이 우민은 진호가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일 때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오긴 했었다. 양손에 커피를 든 서진은 가볍게 목을 숙인 뒤 유리문 앞으로 다가갔다. 서진의 양손에 들려 있는 커피에 우민은 앞서가 자동문의 버튼을 눌러 줬다.
“가,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가라.”
“네.”
서진은 인사를 한 뒤 서둘러 베이커리 카페를 나갔다. 유리문 너머로 멀어지는 서진을 보며 커피를 홀짝이는 우민의 곁으로 진호가 다가왔다.
“교수님 별일이네요.”
“뭐가?”
“교수님이 PK한테 관심 가지는 거 처음 봐요.”
“새끼, 사람이면 관심 가질 수도 있는 거지.”
“언제는 4년 차 이하는 사람도 아니라고 그러셨잖습니까.”
“너……. 그거 아직도 맘에 담아 두고 있었냐?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야?”
우민은 진호를 살짝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진호는 얼음이 가득 담긴 커피를 마시며 우민의 옆에 섰다. 커피를 챙기고 가게 밖으로 나온 우민과 진호는 본관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서진이는 특별하잖아.”
“푸웁, 네?”
뜬금없는 우민의 말에 진호는 목에 걸린 커피를 뱉어 내기 위해 기침을 했다. 특별이라고? 막 병원에 들어온 박기욱을 앞에 두고 인턴 나부랭이가 기어 봤자 인턴이라는 등 다른 교수들조차 눈치를 보는 의사들에게 막말을 던져 왔던 우민의 입에서 ‘특별’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진호는 그러는 한편으로 우민의 말을 아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뭐, 강서윤 친동생이니까요.”
강서진이 누구던가. 그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박기욱이 못 죽어 안달이 나는 여자의 동생이지 않나. 제 사람들을 지독하리만큼 잘 챙기는 기욱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서진이 대우를 받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별일 없겠지. 단순히 기우라고 생각한 진호는 다 마신 커피를 근처의 쓰레기통에 버린 뒤 우민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 *
하암, 하품한 서진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봤다. 언제 밤이 된 걸까. 밖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진은 피곤한 눈을 비비며 터벅터벅 복도를 걸었다.
“서진아!”
“어? 누나?”
서윤의 목소리에 서진은 깜짝 놀라 몸을 틀었다. 파란 수술복 차림의 서윤이 다급하게 서진에게 뛰어왔다. 아직 수술실에 갈 일이 없었던 서진은 같은 건물에 있다고 해도 서윤과 만날 일이 드물었다. 그런 의미에서 서윤의 등장은 서진에게 놀라움 그 차제였다.
“누, 누나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수가 있지. 집에 가기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 했어. 집에 가려고?”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