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 잘못된 관계
날이 어두웠다. 운전석 쪽에서 벨 소리가 들렸다. 시헌은 벨 소리가 끊길 무렵에야 손을 뻗어 간신히 전화를 받았다.
― 시헌아, 나 아까 기욱 오빠랑 통화했는데 둘이 펜션에 있다고 그러네. 혹시 주소 필요해?
― 아뇨. 방금 만나고 왔어요.
― 어머, 그래? 난 또 네가 오빠한테 서진이 찾았다고 해서 그랬지.
― 저… 서윤 누나.
― 응? 무슨 일이야?
― 하하, 아뇨. 아무것도 아녜요.
시헌은 서윤과 적당히 통화를 마친 뒤 휴대폰을 끊었다. 전화를 끊은 뒤에도 시헌은 한동안 휴대폰을 놓지 못했다. 이내 시헌은 휴대폰을 조수석 쪽으로 내던졌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기욱은 그 사실을 알고 그런 모습을 보여 줬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왜. 왜!!! 아아아아악!!!”
분노를 참지 못한 시헌은 거칠게 클랙슨을 울리며 소리를 질렀다.
서진에게 고백을 하고, 5년 가까이 사귀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사랑이란 뭘까라는 생각을 했다.
* * *
차 안으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기욱에게 당하고, 기절하는 것을 반복하길 여러 번 최종적으로 의식을 잃은 서진은 얼마나 잠이 들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는 해가 지지 않은 늦은 오후라는 사실만 알 뿐이었다.
하루를 잤는지, 이틀을 잤는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기욱은 그런 서진을 데리고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반강제적으로 차에 탄 서진은 말없이 기욱이 내민 담요를 몸까지 덮으며 얼굴을 묻었다. 차 안에 두꺼운 병원 담요가 있는 것은 누구의 버릇일까.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각자의 버릇인 건가?,
기욱의 버릇을 시헌이 보고 배운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파란 담요는 상처를 받고 도망치듯 떠난 시헌을 생각나게 했다. 서진은 담요에 얼굴을 묻으며 소리 없이 울었다. 사실 너무 많이 울어 이젠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기욱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서진이 담요에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볼 무렵에는 이미 서진의 집 근처에 도착한 후였다. 서윤이 없는 불이 꺼진 반지하방 근처에 기욱의 차가 멈췄다. 서진은 눈치를 보며 담요 안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내려도 되는 걸까. 담요 안 안전벨트가 풀린 것을 본 기욱이 말했다.
“연락.”
“…….”
“똑바로 받아.”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서진은 괜히 주머니 속 아직 켜지 못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기욱에게 휴대폰은 받았지만, 눈치가 보여 정작 휴대폰은 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애당초 배터리가 남아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서진의 침묵에 기욱은 한 손으로 창문을 살짝 짚었다.
“대답해.”
“아, 알았어요.”
서진은 반쯤 쉬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욱은 그런 서진을 향해 가 보라는 듯 턱 끝을 까닥였다. 끝까지 눈치를 보면서도 서진은 간신히 기욱의 차에서 내렸다. 차 문이 닫히고, 기욱의 차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서진은 골목에 멍하니 섰다.
머리 위로 비치는 햇살이, 햇빛이며 골목의 풍경이 단 이틀 만에 낯설어졌다. 언제까지 골목에 서 있을 수도 없었고, 마침 지나가는 여고생 두 명이 멍하니 서 있는 것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걸 느낀 서진은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열기 무섭게 안쪽에서 나타난 시헌이 기다렸다는 듯 서진의 앞에 나타났다.
“너, 너… 너 왜 여기에…….”
시헌이 집 앞에 숨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서진은 당황스러움을 지우지 못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뒤로 물러서는 서진에 시헌이 한 발짝 더 앞으로 다가갔다.
“강서진.”
“…….”
“너 대체 뭐야?”
기욱과의 모습을 보고, 시헌은 차마 별장으로 되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집에 가 평소처럼 생활할 수도 없었다. 서진은 그제야 시헌의 모습이 그날 봤었을 때와 똑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 상태로 대체 얼마나 이곳에 서 있었는지는 서진도 알 길이 없었다. 서진은 한숨을 쉬며 주머니에 있는 열쇠를 꺼냈다.
“지, 집에 들어가서 얘기해. 나 기운 없어.”
한숨 자고 일어났다고 하지만 얼마나 잤는지조차 감이 없는 숙면은 결코 바른 숙면이 아니었다. 서진이라고 아직 기욱과의 일의 충격에서 헤어 나온 것이 아니었다. 열쇠를 쥔 서진의 손이 여전히 바들바들 떨려 왔다.
아슬아슬하게 문을 여는가 싶더니 결국 바닥으로 열쇠를 한 번 떨어트리고 말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쇠에 걸려 있던 인형이 문 앞에 떨어진 흙에 의해 지저분해졌다. 서진은 열쇠를 집어 들어 문을 열며 시헌이 사 준 인형의 머리를 털었다.
물기가 묻어 있는지 그새 흙 얼룩이 져 버리고 말았다. 서진은 곰 인형의 먼지를 터는 것을 포기하고 열쇠를 대충 냉장고 옆 선반에 올려놓았다. 시헌은 서진이 열쇠를 두기 무섭게 성큼성큼 다가와 멱살을 잡았다.
“너 뭐야.”
“…….”
“대체 뭐냐고!! 언제부터 형이랑 그랬어!!!”
시헌에 의해 벽 끝까지 밀린 서진은 제 밑에서 흐느끼듯 우는 시헌을 봤다. 고개를 숙인 시헌의 눈가는 빨갛게 부어 있었다. 서진도, 시헌도 모든 것이 만신창이었다. 서진은 상황의 어이없음에 허탈한 듯 하, 하고 실소를 했다. 사실 말이다, 시헌을 울린다면 좀 더 좋은 일로 울리고 싶었다. 서진은 무슨 말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이젠 기욱과의 관계니, 서윤이니 하는 건 뭐든 좋았다.
“숨기려… 했던 건 아니야.”
“형이랑 사귀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대체 왜 그랬는데!! 도대체 왜!!!”
왜.
별장을 나온 시헌은 그 이유를 생각하는 것밖에 머리에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시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이유를 알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 5년간의 추억을, 서진을 좋아했던 마음을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게 말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서진은 그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되짚어 봤다. 그날 돈을 받은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 어쩌면 더 오래전 일인지도 모른다.
기욱을 처음 본 순간 서진은 기욱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고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기욱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알 수는 없었다. 서진은 마치 중학교 3학년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중학생인 자신에게 이제 와서 왜 그랬냐고 물어도 말이다.
“내가, 내가 그 자식이…… 누나를… 나, 나는… 그냥 누나가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그만큼 고생했으면 됐잖아!! 도대체 얼마나…… 얼마나 더 힘들어야 하는데!! 도대체 누, 누나, 누나가 뭘 잘못했냐고!! 흐윽…….”
다리가 풀린 서진이 바닥으로 주저앉으려 하자 시헌이 그런 서진을 붙잡았다. 서진은 시헌의 팔에 의지한 채 간신히 서 있는 상태가 되었다.
어긋난 집착, 가정폭력, 아버지에 의한 강간. 그러나 세상은 그 무엇에서도 두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다. 몇 번이나 생각했다. 도대체 전생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만 하는 걸까. 차라리 지옥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언제부터야. 형이랑 언제부터냐고!”
시헌이 그런 서진의 마음을 모르진 않는다. 시헌의 계속되는 확인에 서진은 시헌의 손을 뿌리치며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시헌의 질문이 무엇이 잘못되었냐고 묻는 것이라면 답은 간단했다.
“처음부터.”
“…….”
“흐윽, 씨발… 처음부터 다 모든 게 다!! 다 엉망이었다고!! 내, 내가 어떻게…… 너한테…… 흐윽… 미안하다. 미안해…… 시헌아… 그만, 이제 그만하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서진의 팔에는 아직 벨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손목뿐이 아니었다. 늘어진 셔츠와 몸 안쪽에는 보이지 않는 상처들이 남아 서진을 괴롭혔다.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 했다. 한순간의 감정에 휩싸여 시헌의 고백을 받아 준 것이 화근이었다. 시헌은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 안 해도 돼, 서진아. 나, 내가 해결할게. 지난번처럼 내가…….”
“뭘 어떻게.”
“그, 그러니까 어떻게든…….”
“네가, 뭔데. 네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데!!”
여전히 벽에 기댄 서진은 몸을 일으켰다. 시헌은 늘 입버릇처럼 말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실제로도 시헌은 어떻게든 일을 해결하고는 한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헌은 스스로도 어떻게든 되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기분을 종종 받았다. 대책도 없이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시헌의 인생엔 존재하지 않았다.
“누나….”
“…….”
“흐윽, 우리 불쌍한 누나 어떻게 하냐고…. 나 때문에… 흐윽… 내가… 다 내가 망친 거야…….”
서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돈을 받아서는 안 됐다. 이래서는 안 됐는데, 이젠 서진의 힘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지경까지 와 버리고 말았다. 감당이 되지 않았다. 기욱이라면 정말 자신을 서윤 앞에서 범할 것 같만 같았다. 친동생인 시헌의 앞에서도 그러지 않았나. 시헌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중얼거리는 서진의 몸을 흔들었다.
“강서진.”
“흑, 흐윽… 시헌아. 헤어지자. 제발….”
“너 대체 무슨 소리야. 이러는 건 아닌 것 같아. 강서진, 서진아, 강서진 정신 차리라고!!”
“아아악! 그만 그만해!! 부르지 마!! 잘못했어. 제발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흐윽….”
시헌의 손을 뿌리친 서진은 몸을 웅크리며 소리를 질렀다. 강서진. 기욱에게 그 이름을 얼마나 불렸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며 아무렇지 않게 폭력과 섹스를 하는 기욱이 서진은 아직도 무서웠다. 서진은 시헌이 그런 기욱을 멈출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서진은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시헌아… 흐으윽… 제발… 제발 이제 그만하자…….”
“아, 아냐. 이건 아냐. 이런 게 아니라고!!!”
시헌이 원하는 것은 이게 아니었다.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시헌은 눈앞에 있는 서진을 보며 나중에 오겠다는 말을 남긴 뒤 도망치듯 집을 나갔다. 결국, 별장과 다를 게 없었다.
* * *
샤워를 마친 서진은 욕실 밖으로 나왔다. 익숙하지 않은 복층 오피스텔 방 안에는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났다. 벽장을 열어 잠바를 걸친 서진은 옷이 거의 걸려 있지 않은 벽장 안쪽에 있는 배낭 가방을 챙겼다. 배낭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서진은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봤다.
“…….”
“…….”
서진이 샤워를 하는 동안 정장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은 기욱은 가방을 반쯤 멘 서진을 내려다봤다. 서진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니지만, 기욱 앞에만 서면 키와 상관없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기욱은 서진의 가방을 바로 메 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서진은 그런 기욱의 손을 거침없이 쳐 낸 뒤 가방을 바로 멨다.
박기욱은 철저하다. 그것은 비단 박기욱 본인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만은 아니었다. 서진은 한순간이지만 기욱의 그런 행동을 친절이라고 생각한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그건 친절이 아니었다. 보여 주기 위한 위선이지.
기욱의 병원 근처 오피스텔은 학교와는 거리가 좀 있어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강의에 지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정작 기욱은 그런 서진의 앞을 떠나지 않고 서 있었다. 또 무슨 용무가 있는 걸까? 참다못한 서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요?”
“휴대폰.”
서진의 질문에 기욱은 긴말을 하지 않았다. 애당초 이젠 긴말을 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듣는 서진도, 말을 하는 기욱도 알고 있었다. 서진은 기욱의 요구가 못마땅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지못해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기욱에게 내밀었다. 시헌의 생일인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간 기욱은 서진의 휴대폰을 대충 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휴대폰을 덮으며 제 주머니 안에 넣었다.
“잠깐, 뭐 하는 짓…!!”
기욱은 휴대폰을 돌려받으려는 서진을 밀어내며 다른 휴대폰을 내밀었다. 비교적 된 휴대폰이지만, 서진의 휴대폰에 비하면 최신형 휴대폰이었다. 서진은 그 휴대폰이 기욱의 세컨드 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리했어. 필요한 애들 번호만 옮겨.”
서진의 휴대폰을 돌려준 기욱은 근처에 있는 의자에 다리를 꼬며 앉았다.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 생각하며 몇 번이나 굳게 닫혀 있는 오피스텔 문을 바라봤지만, 서진에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서진은 마지못해 몇몇 동기들과 시헌, 서윤의 번호를 옮긴 뒤 휴대폰을 닫았다. 번호를 옮긴 것이 끝났다고 판단되기 무섭게 기욱은 서진의 휴대폰을 가져와 정장 잠바 안쪽에 구겨 넣었다. 서진은 익숙하지 않은 기욱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휴대폰… 언제까지 가지고 있을 건데요?”
“그거 써. 아니면 새 걸로 바꿔 줄게.”
“하아.”
이 이상 기욱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대답 대신 한숨으로 상황을 일관했다. 이젠 휴대폰마저 마음대로 못 쓰는 신세가 될 거라고는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기욱의 집착은 정도 이상으로 서진의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서진은 마지못해 기욱의 검은 휴대폰을 챙긴 뒤 나갈 준비를 했다.
“데려다줄게.”
“마음대로 해요.”
지금의 서진에겐 기욱과 싸울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 * *
“…….”
서진의 집 근처에 차를 댄 시헌은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유리창 너머로 반지하방의 창문이 보였지만 불은 꺼져 있었다. 혹시나 하고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는 연결될 뿐 정작 연결은 되지 않았다.
「강서진. 너 나랑 얘기 좀 해」 오전 6:10
「너 집 아니지?」 오전 6:11
「형이랑 있어? 어디야 지금?」 오전 6:14
「강의는 어떻게 할 건데?」 오전 6:16
「제발 부탁이니까 답장 좀 해줘.」 오전 6:16
…
서진은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이 이상 지체를 하면 시헌도 강의에 지각할 수도 있었다. 시헌은 마지못해 서진의 집을 벗어났다.
그날, 도망치는 게 아니었는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도망친 스스로가 한심했다.
시헌은 착잡한 마음으로 학교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댄 뒤 가방을 챙겨 나오자 로비에서 재혁을 마주쳤다. 시헌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부터 봤었던 재혁은 혼자 내리는 시헌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재혁은 시헌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인사를 했다.
“형, 서진 형은요?”
“몰라.”
“왜 몰라요?”
“나도 모른다고.”
뭔가 이상한 분위기에 재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더는 물어 오지 않았다. 강의실로 도착하자 동기들이 절반 이상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앉아 있는 동기 중 창가 쪽에 있는 서진이 눈에 띄었다. 서진과 시헌이 거의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시헌이 서진의 옆에 앉으려 했으나 서진은 마침 어디에 앉아야 할지 머뭇대고 있는 편입생 한 명을 향해 적당히 손을 까닥이며 말을 걸었다. 그녀가 서진의 옆에 앉자 시헌은 한숨을 쉬며 혼자 앉은 재혁의 옆자리에 앉았다.
딱히 혼자 앉든 둘이 앉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뒤쪽에 있던 다른 동기와 대화를 하고 있던 재혁은 제 옆에 말도 없이 앉은 시헌에 깜짝 놀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것은 비단 재혁뿐만이 아니었다.
“뭐야? 둘이 싸웠어?”
“저도 몰라요.”
재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아꼈다. 동기들의 수군거림을 들은 시헌은 한숨을 쉬며 칠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의가 시작됐지만, 강의 내용은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헌은 강의가 끝나기 무섭게 짐을 챙겨 책상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마침 계단을 내려가려는 서진의 모습이 보였다.
“강서진! 너 나랑 얘기 좀 해!”
시헌답지 않게 큰 목소리를 낸 탓에 순식간에 서진에게로 시선이 집중됐다. 동기들과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본 서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대로 대답해 봤자 싸우기밖에 더 안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리 옮기자.”
서진은 계단으로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헌도 급하게 서진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비교적 사람이 없는 건물 틈 사이로 자리를 옮겼다. 서진은 벽에 기댄 채 잠바 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문 뒤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H대 병원 부지에 속해 있는 의과대학 위치상 불가피하게 의대 역시 금연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쓰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
침묵 속에서 담배 연기만 타들어 갔다. 막상 말할 자리를 만들어 낸 것은 좋으나 말에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도 말이 없는 시헌에 서진은 한숨을 쉬며 담배와 라이터를 주머니에 구겨 넣은 뒤 두 번째 담배를 껐다.
“할 말 없으면 갈게.”
“형이랑…… 너 대체 뭐야…….”
“봤잖아.”
“씨발, 그게 할 말이야?”
“그럼 뭐라고 말하는데?”
“내 말이 그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도대체 왜!! 그런 짓까지 당하면서 형이랑…!!”
시헌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날 이후 시헌의 머릿속에서는 서진과 기욱의 모습이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서진에게 소리를 치던 중 시헌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의 생각이 스치듯 떠올랐다. 서진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기욱을 어렸을 때부터 봐 왔던 시헌은 기욱이 서윤과 사귀는 것에 대해 마음 한구석으로 늘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의문이라고 해야 할까? 서윤이 못나서가 아니라 왜 다른 사람도 아닌 서윤이어야만 하는지에 관한 궁금증이었다. 서진은 서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집착이 있었다.
시헌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기욱을 좋아하는 서윤, 서윤의 행복에 집착이 있는 서진과 그런 서진에게 집착하는 기욱. 삼박자가 마치 톱니바퀴를 끼운 것처럼 맞아 굴러 들어갔다. 상상할 수도 없는 진실에 시헌은 입을 벌렸다.
“너 설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맞아.”
“서진아, 강서진. 이건… 이건 아닌 것 같아. 네 인생이잖아. 아무리 누나 때문이라고 해도 형한테 그러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하하, 그럼 나 보고 어쩌라고…… 이제 와서. 누나보고 이혼이라도 하라고 할까? 해외에 있는데?”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든…….”
“어떻게, 어떻게…!! 도대체 네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데!! 네가, 네가 누나한테, 나한테 뭘 어떻게 해 줄 수 있냐고!!”
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리 뭐든 하는 시헌이라고 해도 기욱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시헌에게 있어서 천적이라고 한다면 기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진의 목에는 밴드가 붙여져 있었으며 소매 사이로 튀어나온 팔목에는 자국을 가리기 위해 테이핑을 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시헌은 서진의 몸 안쪽에 더 있을 상처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 왔다.
“서진아, 제발…….”
“내버려 둬.”
“…….”
“부탁이니까 그만해. 그냥, 그냥 내버려 두라고!! 너, 너. 예전부터 이렇게 끈질기게 구는 거 솔직히 말해서 진짜 짜증 났어. 알아?”
“서진아.”
“그런 식으로 이름 부르는 것도 박기욱이랑 똑같아. 미칠 것 같다고!!”
서진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게 아닌데. 시헌에게 좋은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제 잘못이다.
처음부터 시헌의 고백을 받아 주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서진은 이제 와 이런 식으로 화를 내는 스스로가 참으로 한심하고 비참했다. 서진이라고 5년의 세월을 하루아침에 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이든 좋으니 지금은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너도.”
“…….”
“박기욱이랑 똑같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상처를 받은 시헌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던 서진은 시헌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도망치듯 건물 사이를 빠져나왔다. 어디든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강서… 진!”
도망치는 서진의 뒤로 급하게 서진을 부르는 시헌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서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뛰어갔다. 마침 점심을 먹고 돌아오던 재혁과 서진이 몸을 부딪쳤다.
“뭐, 뭐예… 어? 서진 형? 울어요?”
“아니… 그… 미안.”
서진은 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피했다. 길가에서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 * *
늦은 저녁, 공원 조명 위로 뿌연 담배 연기가 쉴 새 없이 올라갔다. 정사각형 형태로 되어 있는 벤치의 기둥 한쪽에 기댄 시헌은 연신 줄담배를 피웠다. 비어 있는 벤치 옆쪽에는 소주병과 종이컵이 놓여 있었다.
안주 하나 없이 시헌은 아무렇지 않게 종이컵 가득 소주를 따라 그 자리에서 종이컵을 전부 비웠다. 건너편에 앉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시헌의 행동을 보며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진한 화장에 속이 보일 것 같은 짧은 교복 차림을 본 시헌은 실소를 머금으며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열한 시가 조금 넘었다. 본의 아니게 학생들과 맞담배를 피우게 된 시헌은 술과 함께 새로 산 담배 한 갑이 완전히 떨어질 무렵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든 됐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랬다. 어쩌면 서진의 말처럼 시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은 뭘 해도 어떻게든 된다는 것에 의지하고 있지 않았나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자신이 매달리면 서진도, 기욱도 어떻게든 해결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욱은 시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씨발!”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시헌은 길가에 굴러다니는 정체 모를 병을 발로 찼다. 시헌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쭉 기욱과 같이 살았다. 시헌에겐 가족 중에서 아빠나 엄마보다 더 가족 같은 사람이 기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 형이지만 가끔 기욱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런 기욱이 형이기 때문이었다. 설마 동생에게까지 그런 행동을 할 거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삐빅―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의 불은 꺼져 있었었다. 시헌은 비틀거리며 거실의 불을 켠 뒤 아파트를 두리번거렸다. 차라리 기욱이 없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몰랐다. 기욱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방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안쪽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눈치챘다.
“하읏… 그만…! 이제… 윽… 됐잖아요!”
“누가 됐다고 그랬어? 똑바로 안 서?”
“그러니까… 언제까지…… 아악! 그만해요! 때리지 마세요. 제발… 흐윽….”
좁은 문틈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시헌은 입술을 깨물었다. 문틈 사이로는 방 안의 풍경을 완벽하게 볼 수 없다. 그러나 상대를 향해 거침없이 몸을 움직이는 기욱의 뒷모습을 보기에는 충분했다. 어렸을 때는 몰랐다.
문틈 사이로 봤던 그 행위가,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러니 성인이 되고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 의미를 뼛속까지 알 것만 같았다. 시헌의 손이 문고리를 살짝 돌려 문을 더 열었다. 그 인기척에 서진의 안을 거침없이 탐하던 기욱의 움직임이 멈췄다.
서진은 그 틈을 타 기욱에게서 빠져나와 침대 뒤쪽으로 몸을 붙였다. 기욱은 서진이 제 품에서 빠져나간 것이 불만스러운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서진은 침대 밑에 떨어진 이불을 주워 몸을 반쯤 가렸다. 벌벌 떠는 모습이 별장에 있을 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술에 취한 시헌은 별생각을 다 했다. 이제 기욱에게 주먹을 휘두를까? 싸우면 이길까? 그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나 아직 이성이 남은 시헌은 그런 자신의 행동이 어느 쪽에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문 너머에 서 있는 시헌을 슬쩍 본 기욱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서진의 다리를 잡아당겨 아래로 이끌었다. 시헌을 의식한 서진은 기욱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몸에 힘을 줬다.
“시, 시헌아…….”
“야, 강서진.”
떨리는 서진의 목소리가 시헌을 부르고 있었다. 시헌의 이름이 입에서 나오자 기욱은 더욱 강하게 서진의 위로 올라탔다. 다리를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 올라타는 기욱은 달리 서진이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반강제적으로 벌려진 다리 사이로 기욱의 커다란 페니스가 자리했다. 시헌이 오기 전에도 이미 한 번 실신을 한 후였던 서진은 반항할 기운조차 없었다.
별장 이후였다. 단 한 번도 제집으로 부른 적이 없었던 기욱은 별장 이후 보란 듯이 서진을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시헌이 없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런 식으로 시헌이 오면 서진은 지옥을 경험하는 기분밖에 더 되지 않았다.
서진에게 기욱의 집은 별장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서진은 양팔로 손을 가리며 흐느꼈다.
“흐윽… 제발 보지 마. 제발.”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기욱은 본보기를 보여 주듯 말없이 서진의 안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아악… 으윽… 흑….”
기욱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머리며 온몸이 요동쳤다. 제 몸이 기욱에게 가차 없이 유린당한다는 사실보다 그 모습을 시헌에게 보여 줘야만 한다는 사실이 더욱 치욕스러웠다.
“윽… 하윽… 살려 줘요. 살려… 으윽… 주세요.”
만약 신이란 게 존재한다면, 아니, 어쩌면 신이 아닌 어떤 것이라도 좋다.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게만 해 준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분명한 건 서진의 목소리는 눈앞에 있는 기욱에게 절대 닿지 않았다.
* * *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 갈 무렵 병원 복도를 걷던 서진은 휴대폰 화면을 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 있었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중 서진은 동기를 먼저 보낸 뒤 전화를 받았다.
― 누구세요?
― 여기, SJ 택배인데요. 강서진 님 본인 되십니까?
택배라는 말과 택배 기사가 말하는 이름에 서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택배를 시킨 기억이 없었다. 결국, 병원 복도 한쪽에 몸을 기댄 서진이 택배 기사에게 대답했다.
― 강서진이 맞긴 하는데……. 택배를 주문한 적은 없는데요?
― 네? 이상하네요. 분명 본인 앞으로 되어 있는데요.
택배 기사가 서진을 향해 확인하라며 집 주소를 불러 줬다. 택배 기사가 운송장을 통해 읽어 준 주소는 틀림없는 서진의 반지하방 집 주소였다. 그러나 서진은 정말로 택배를 시킨 기억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건지 몰라 할 무렵 서진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말이 떠올랐다.
전자레인지 좀 사.
기욱의 말에 서진은 확인하듯 택배 기사를 향해 말했다.
― 저 혹시, 그 택배요. 어떤 건가요?
― 저희가 상자 내부는 볼 수가 없어서 말씀드리기는 곤란합니다만. 포장으로 볼 때 전자레인지 같습니다.
그의 말에 서진은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찼다. 설마 자신한테 말도 하지 않고 전자레인지를 정말로 주문할 줄이야. 그냥 흘리듯 한 말을 기욱은 진심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반송하기도 뭐했던 서진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하아, 그거 그냥 현관에 대충 놔 주세요.
― 현관 말입니까? 그건 좀 곤란한데……. 언제 들어오십니까? 혹시 주변에라도……. 누가 가져가기라도 하면…….
― 괜찮아요. 혹시 가져가도 뭐라고 안 하겠습니다. 그냥 두고 가 주세요. 제발.
서진은 이 이상 기욱이 보낸 물건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택배 기사가 현관에 두고 간 전자레인지가 실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자리에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서진의 완곡한 부탁에 그는 마지못해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혹시 모를 컴플레인 때문인지 나중에 탓하면 안 된다는 문자까지 보낸 그에 서진은 확인했다며 답장을 보내 줬다.
시헌과의 관계도, 기욱과의 관계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저주스러운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지도 몰랐다. 기욱이든, 시헌이든 당장 대학과 학업을 그만둘 수 없었던 서진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운을 입고 병원을 활보하고 있었다. 홀로 남겨진 서진은 동기들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야.”
등 뒤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수술복 차림의 우민이 다른 의사들과 함께 서 있었다. 의사들을 본 서진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래.”
손을 모으며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서진의 태도에 우민은 만족한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서진의 가운이 실습용 개인 가운이라는 것과 지금 병원에 실습생들이 돌아다닌다는 것을 생각하면 서진이 실습생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얼떨결에 서진의 인사를 받은 의사들은 서진에게 먼저 알은척을 한 우민을 슬쩍 쳐다봤다. 곁에 있는 의사들의 시선을 눈치챈 우민은 귀찮다는 듯 허공으로 손을 저었다. 다음 수술까지는 아직 여유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복도에 달랑 둘만 남겨진 불편한 상황에서 서진은 괜히 우민의 눈치를 살폈다. 터벅터벅 병원 신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다가온 우민은 서진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웃었다.
“새끼, 가운 입으니까 폼은 좀 나네.”
“병원 가운도 아닌데요. 뭘.”
“말대꾸하라고 한 말 아니다.”
“죄송해요.”
꽤 오랜만에 만나는데 성격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것은 여전했다. 기욱이 보낸 전자레인지와 이런저런 일로 정신이 없는 서진은 습관처럼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서진은 자신이 요 몇 달간 어떻게 실습을 했고, 학교에 다니고, 강의를 듣고 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진은 가운 안쪽 팔목을 붙잡았다. 우민은 생각보다 풀이 잔뜩 죽은 서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무슨 일 있냐?”
“왜요?”
퉁명스럽게 대답한 서진에 우민은 서진의 손 아래쪽을 바라봤다. 좀 되긴 했지만, 그때 봤던 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멋대로 사정을 짐작한 우민은 한숨을 내쉬며 서진을 다독였다.
“야, 괜찮아.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알아요!!”
우민의 그 말에 서진은 울컥해 소리를 질렀다. 마침 지나가던 의사 무리들은 서진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거나 흘끗댔다.
우민 또한 서진의 외침에 깜짝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진의 소리 때문인지 화기애애하게 떠들며 지나가던 관계자들은 물론이거니와 환자들 또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복도 한가운데가 침묵으로 맴돌았다. 복도에 있던 의사 중 한두 명이 우민의 얼굴을 알아봤다.
“저분, NS에 한 교수님이지?”
“아. 그 병원장 아들이랑 같은 신경외과 간판 의사? 옆에 실습생 같은데…… 사고 쳤나?”
“하, 뭐야? 내 잘못이야?”
펠로우나 조교수쯤 되어 보이는 의사들이 소곤거렸다. 그 대화를 들은 우민 또한 지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건드린 듯 서진은 우민의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서진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가운 소매로 닦았다.
“흐윽… 윽… 당신이… 당신이 뭘 아냐구요…. 흐으윽… 당신이 뭔데… 흐으으흐윽….”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화풀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우민의 그 한마디에 서진은 가슴 한쪽에서 참아 왔던 설움을 터트렸다. 그냥 날 좀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건드리는지 서진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오, 씨발. 진짜 돌아 버리겠네!”
우민은 아직도 자신이 뭘 잘못 건드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힘내라고 응원한 건데 그게 그렇게 상처였나 싶은 기분도 들었다. 무슨 사정인지 말이라도 하고 울면 좀 낫지. 서진의 말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정말 우민이 잘못한 것처럼 들렸다. 우민은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원래라면 밥을 먹으려 했지만 지금 밥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야. 너 나랑 잠깐 얘기 좀 해.”
우민은 서진을 이끌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건물과 건물 틈 사이 지상주차장 사이에 있는 건물 틈 사이에 들어간 우민은 서진의 팔을 내려놓았다. 그 사이 울음을 그친 서진은 빨갛게 변한 눈가를 가운 소매로 마저 닦았다. 너무 울어서 눈가가 쓰라렸다. 누가 보면 때린 줄 알겠다. 우민은 눈물을 그치며 딸꾹질을 하는 서진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아, 미안하다.”
“왜… 사과하세요?”
“나 때문에 기분 나빠서 운 거잖아. 미안하다고.”
“원래 그래요?”
“뭐가.”
울음을 그치더니 또 당돌해진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서진의 변화에 우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뭔 남자애가 이렇게 대하기 까다로운 건지 여러모로 특이한 녀석이 틀림없었다. 서진은 저를 끌고 내려온 우민을 약간 올려다봤다. 눈물은 그쳤지만, 서진의 기분은 아직도 우울한 상태였다.
“원래 그렇게 막, 남한테 쉽게 사과하고 다녀요?”
“야, 미쳤냐? 내가 그렇게 자존심도 없는 놈으로 보여?”
“그런데 저한테는 왜 그래요.”
서진은 눈물이 고인 채로 우민을 바라봤다. 난데없이 울음을 터트린 것은 서진의 잘못이지 우민의 잘못이 아니었다. 우민의 말이 방아쇠가 됐을 뿐 정작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서진도 그 사실을 알았고, 당사자인 우민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왜 울었는지도 모르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우민이 서진은 살짝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진의 반박에 우민은 입을 벌렸다.
“너 진짜… 아무리 맞는 말이라고 해도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않냐? 기껏 생각해서 말해 준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야?”
“그러니까 왜요.”
“아, 몰라!! 내가 그걸 알면 널 여기까지 끌고 왔겠냐고! 하, 진짜 네 말 들으니까 나도 어이가 없네. 야!! 사과 취소! 다 취소! 이게 아주 교수님 알기를 좆같이 아네. 내가 인마! 한가해서 널 데려온 줄 아냐?”
“그럼 왜 데려왔는데요?”
우민은 서진의 팔을 잡아 위로 올렸다. 난데없이 들린 손에 가운의 소매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서진이 입고 있는 셔츠도 소매가 달라붙는 옷은 아닌 터라 금방 흘러내렸다.
아래로 흘러내린 손목 사이로 테이핑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진은 우민에게 잡힌 팔목이 아픈지 인상을 찌푸렸다. 우민은 서진의 가운과 소매를 걷어 위로 올렸다.
“너 뭐냐 이거.”
“놔요.”
“손목 아파서 한 거 아니라는 거 안다.”
서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몇 개월 만에 만나는 걸 텐데,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구는 걸까. 서진은 우민의 행동에 정신이 없었다. 서진은 우민의 손을 뿌리치며 약간 거리를 벌렸다. 서진의 몸이 미세하게 떨려 오고 있었다.
후, 숨을 고른 뒤 수술모로 눌린 앞머리를 습관처럼 뒤로 쓸어 넘긴 우민은 팔짱을 꼈다. 서진의 손에 끼워진 반지와 손목의 자국뿐만이 아니었다. 서진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목 근처와 몸 안에 밴드를 붙여 놓은 것을 이미 확인하고 난 후였다.
아마 서진의 몸 안쪽에는 보이지 않는 상처들이 더 있을 것이었다. 우민은 상대가 일부러 작정하고 보이지 않는 곳을 때렸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의사라는 새끼들은 간혹 쓰레기 같은 짓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누가 그랬어?”
“…….”
“사귄다는 애지?”
“아녜요.”
“아니긴 뭘 아냐. 딱 봐도 그거구먼. 야, 내가 충고한다. 좋은 말할 때 정리해라. 너한테 좋을 거 하나 없다.”
“시헌이가…!! 시, 시헌이가 한 거 아니라구요!!”
뭔가 단단히 오해하는 것 같은 우민의 말투에 서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시헌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우민은 문맥상 서진의 남자 친구라고밖에 판단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우민은 시헌이 하지 않았다는 서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언제 폭력의 피해자가 제대로 당사자를 짚은 적이 있기나 했던가. 불신이 가득한 우민의 시선에 서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시헌이는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진짜… 하, 아니니까 제발… 그만. 그만해 달라구요!”
“이게…! 사람이 기껏 신경 써서 걱정해 줬더니…!”
“누가, 누가 나 걱정해 달래요? 당신이랑, 교수님이랑 관계없잖아요!!”
또다시 침묵이 일었다. 이번에는 병원 내 복도의 싸늘한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침묵이었다. 무작정 울었던 때와는 달랐다. 서진은 뒤늦게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머뭇댔다. 이게 아닌데.
“아니, 그게 저…….”
“그래. 관계없지. 관계도 없는 놈이 꼰대랍시고 끼어들어서 미안하다.”
소매를 걷어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우민은 등을 돌려 서진을 떠났다. 채 붙잡을 틈도 없이 사라진 우민에 서진은 벽에 등을 기대며 쪼그리고 주저앉아 머리를 싸맸다.
“하아, 아악!!”
하나부터 열까지 되는 일이 없었다. 툭, 서진의 앞에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에 서진은 고개를 들었다.
“아.”
사복 차림의 정혁이었다. 우민 다음엔 정혁이라니 참으로 뭣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정혁이 싫어서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서진은 바닥에 떨어진 음료수 캔을 집어 들었다.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던 서진은 가운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어. 응. 그래. 보려 했던 건 아닌데…….”
정혁은 안쪽 주차장을 손가락질했다. 언젠가 이런 데자뷰가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자신이 정혁의 입장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차 대고 지나가는 길이었어.”
“아… 네.”
“커피 한잔하러 갈까?”
“저 실습 들어가야 돼요.”
“그거 한 번 쨌다고 해서 지장을 줄 성적이 아닌 걸로 아는데. 실습 들어가도 집중 못할 거면 바람이라도 쐬는 게 났지 않겠어?”
정혁의 제안에 서진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너무 울어서 지치기도 했고, 정혁의 말대로 실습을 들어가도 집중을 할 자신이 없었다. 서진은 정혁과 함께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근처 프렌차이즈 카페에 들어갔다.
구내 카페를 갈 줄 알았던 서진의 예상과는 달랐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넓은 프렌차이즈 카페 2층에 자리를 잡고 있자 얼마 뒤에 정혁이 커피를 가져 왔다.
“뭐 마실지 몰라서 그냥 아메리카노 샀는데 괜찮지?”
“상관없어요.”
서진은 정혁이 준 커피를 받았다. 커피를 쥔 손이 따듯했다. 한껏 울고 난 탓인가 그 따듯함에 묘하게 위로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아메리카노를 살짝 마신 뒤 내려놓았다. 정혁과 이렇게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줄이야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못 들었는데?”
“시치미 떼지 마시고요.”
“진짜야.”
정혁은 설탕을 두 개를 넣은 뒤 커피를 반쯤 마신 뒤 말을 아꼈다. 서진은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은 태도에 됐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혁은 커피와 함께 시킨 케이크를 퍼먹었다. 출근한 줄 알았는데 카페에서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까 여유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 맞다. 나 이번에 정교수 임명됐어.”
정혁은 가볍게 브이 자를 지었다. 그동안은 외과의 한 부서에 지나지 않았던 외상외과 팀이 몇 달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등의 얘기였다. 사실 서진은 정혁이 외상외과 의사라는 것도 방금 막 알았다.
외과 의사라는 것은 어렴풋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말하고 보니 새삼 눈앞에 있는 사람이 새롭게 보였다. 선입견이란 참 무서운 것이었다. 어느 정도 대화를 마친 정혁은 커피를 거의 다 마셔 가는 서진을 바라봤다.
“왜 이렇게 시무룩해? 야, 나 이렇게 막 아무나 챙겨 주는 사람 아니다?”
“……하하.”
정혁의 농담에 서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마치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말이었다. 본심은 챙겨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 챙겨 주냐고 하소연을 하고 싶었지만. 정혁이나 우민의 행동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어색한 웃음 뒤에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진은 다 먹은 커피 컵을 만지작거렸다.
“교수님은……, 친절하시네요.”
“친절만으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진 않지.”
정혁은 남은 케이크를 먹었다. 입안으로 달달한 맛이 느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단맛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정혁이 유독 단것을 남들보다 많이 먹는 이유는 이런 걸지도 모른다. 세상의 쓴맛에서 설탕이 든 뭔가라도 먹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응급실에서 은소의 응급처치를 하던 정혁을 분명하게 기억했다. 정혁은 다른 레지던트에게 맡겨도 될 사망 진단서까지 스스로 작성했다. 그만큼 은소의 죽음은 정혁에게 있어서도, 서진과 시헌에게서도 충격이었다. 서진은 괜히 커피가 없는 빈 컵의 끝을 씹었다.
묘하게 시헌과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보이는 것들이 조금씩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동안 은소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했던 것은 아닐까 싶으며.
“뭐 어쨌든 오늘 저녁부터 병원 출근하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내 번호 알지?”
“아뇨. 모르는데요.”
“아, 그래? 그럼 알려 줄게.”
서진이 휴대폰을 열었다. 서진은 정혁과 휴대폰 번호를 주고받았다. 늦게라도 실습에 참여해야 할 것 같은 서진은 정혁과 헤어진 뒤 병원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 * *
호텔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댄 시헌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갔다. 두꺼운 철문을 밀고 들어가자 호텔의 넓은 로비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정문을 통해 로비로 들어온 하연이 시헌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시헌은 엘리베이터를 잡는 하연의 옆에 섰다.
“오랜만이네. 시헌이 잘 지냈어?”
“응. 그럭저럭.”
“국시 준비는 잘 되고 있지?”
“아직 시작 안 했어.”
“얘는 지금 제정신이야? 너 공부하라고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써 줬는데.”
“조만간 시작할 거야.”
시헌은 국시라는 말에 질린다며 하연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려넘겼다. 서진과의 일이 해결되지 않은 지금, 시헌은 국시고 실습이고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시헌은 하연과 함께 호텔의 중간층에 있는 식당에 내렸다. 직원의 안내를 받고 룸으로 들어가자 먼저 와 있었던 운오가 고개를 돌렸다.
“시헌 형 왔어?”
“어.”
운오의 인사에 시헌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사실 시헌은 가족 식사에 별로 오고 싶지 않았다. 늘 그렇듯 가기 싫다는 시헌에 하연이 무조건 나오라며 한마디 했기 때문이었다. 운오와 인사를 주고받은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부모님과 인사를 한 뒤 운오의 건너편에 앉았다.
얼마 뒤 바깥에서 병원 문제로 일찍 왔지만, 식당에 들어오지 못했던 기욱이 들어왔다. 기욱의 등장에 아무것도 모르는 하연은 자연스럽게 옆을 비켜 줬다. 시헌의 옆자리가 비었음에도 기욱은 운오의 몸을 살짝 밀어냈다.
당연히 시헌의 옆에 앉을 거로 생각했던 운오 또한 약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헌의 눈치를 살짝 본 운오는 재빨리 옆으로 비켜 앉았다.
“박기욱 웬일이냐?”
“뭐가?”
약간 가라앉은 공기에 하연이 옆에 앉은 시헌을 흘끗댔다. 기욱은 앞에 놓인 물 컵에 담겨 있는 찬 물을 반쯤 마셨다. 원래 식기도 없던 자리였지만 운오가 빠르게 기욱의 앞으로 식기를 가져왔다. 기욱은 탁, 하고 아무렇지 않게 커다란 유리 글라스에 담긴 물잔을 내려놓았다.
“멀잖아.”
기욱의 변명은 신빙성이 있었다. 문 쪽에 앉은 운오와 달리 안쪽에 앉은 시헌에게 가려면 돌아서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하연은 그런 자잘한 이유만으로 기욱이 시헌의 옆에 앉지 않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시헌을 본 하연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눈치 싸움이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자신이 있었다. 사실 기욱이 시헌의 옆이 아닌 운오의 옆에 앉은 순간부터 답은 나와 있었다. 단지 그런 사소한 일로 분위기를 흐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연은 이따 얘기하자며 시헌의 몸을 옆구리로 살짝 건드렸다.
기욱이 운오의 옆에 앉았다뿐이지 전체적인 분위기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 옆에 앉은 기욱에 운오는 평소보다 훨씬 더 신이 나 보였다. 기욱이 있는 J대 의대에 진학한 운오는 완전하진 않지만, 가족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시헌은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국시 준비를 핑계로 오지 말 걸 그랬나 싶기까지도 했다.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무렵 운오는 후식을 먹고 있는 기욱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운오는 꽤 전부터 기욱의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인다는 것을 운오를 제외하고 자리에 앉은 가족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기욱이 입가를 살짝 닦았다.
“왜?”
“기욱 형. 그게… 다음 주에 지방 내려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 어.”
운오의 말에 기욱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그렇게 됐나. 최근 정신이 없어 기욱도 잊어버리고 있던 계획이었다. 운오에게 말한 적이 있었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지방에 볼일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운오는 일정이 있다는 기욱에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같이 가도 돼?”
“너 강의는?”
“그날 공강이야!”
평소라면 생각해 볼게, 라든지 귀찮다는 식으로 말을 돌리던 기욱이었다. 저를 똑바로 보는 기욱에 운오는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기욱은 휴대폰으로 일정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정말이지? 약속한 거다?”
“알았어. 마저 먹어.”
기욱은 얼마 남지 않은 디저트를 가리키며 말을 잘랐다. 마침 과일을 집으려던 시헌과 포크가 살짝 부딪쳤다. 짧은 순간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기욱은 옆에 있는 접시를 가운데로 가져왔다. 접시에는 아직 과일이 조금 더 남아 있었다.
운오는 빠르게 포크를 돌려 접시에 있는 잘려진 딸기를 찍어 먹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시헌 또한 하나 남은 과일을 포크로 집어 입안에 넣었다.
* * *
탁탁, 라이터 불이 평소 같지 않았다. 요즘 들어서 되는 일이 없다. 조금 일찍 밖으로 나온 시헌은 호텔의 로비 바깥 유리벽에 기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이래서 싸구려란. 시헌은 손안에 있는 200원짜리 노란 편의점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라이터가 고장이 나는 건 한두 번 있었던 일은 아니다. 오히려 기간으로 따지자면 이 라이터가 다른 라이터보다 수명이 길었다. 즉, 짜증을 낼 필요도 없이 언제 고장 나도 이상하지 않을 라이터였다.
차라리 불이 안 붙을 거면 완전히 안 붙던가, 시헌은 애매하게 스파크를 내며 불빛을 보여 주는 라이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을 희망고문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시헌이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 고생하고 있을 무렵 밖으로 나온 하연은 시헌의 옆에 섰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라는 식으로 손짓한 하연은 어깨에 멘 명품 가방을 뒤적거렸다. 하연은 시헌에게 가방 안쪽에서 나온 라이터를 내밀었다.
“뭐 해? 안 받아?”
“아, 아니.”
시헌은 하연이 준 라이터를 받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았다. 담배에 불이 붙은 것을 확인한 하연은 시헌에게 라이터를 돌려달라는 식으로 팔을 뻗었다. 시헌의 라이터를 받은 하연은 제 가방 안을 다시 뒤적거렸다.
안쪽에서 몇 개비 남지 않은 담배 케이스가 나왔다. 시헌은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하연을 가만히 바라봤다.
“누나 담배 끊지 않았어?”
하연의 남편이자 시헌의 매형은 하연과 사귈 때부터 하연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연이 한참 일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담배를 피워 댈 무렵 그가 유일하게 하연에게 하지 말아 달라고 무릎을 꿇기까지 하며 부탁한 이후 하연은 담배를 끊었다.
물론 굉장히 오래전 얘기지만 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하연은 가족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하연은 아무렇지 않게 새 담배를 입에 물며 어깨를 들썩였다.
“언제 적 얘긴데.”
“매형이 아무 말 안 해?”
“둘째 안 낳기로 합의 봤어.”
“아.”
합의라니. 참 대단한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가 하연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이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역시 사귄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해야 할까. 한 사람과의 사랑이라는 건 삼자가 보기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연은 담배를 끈 뒤 커다란 유리벽에 몸을 반쯤 기댔다. 시헌은 유리벽 넘어 로비를 흘끗 보며 하연에게 말을 걸었다.
“운오는?”
“기욱이 차 안에.”
“아, 그래.”
새 담배를 문 시헌은 괜히 물어봤다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식사하는 내내 기욱은 시헌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원래부터 둘 다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지만, 단순히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은 달랐다. 기욱에게 있어 식당에서 시헌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기분을 몸소 느끼고 나니 별생각이 다 들었다. 자업자득이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기욱에 대한 분노보다 운오에 대한 안쓰러운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운오에게 계속 그 자리를 넘겨줘야 하느냐에 대한 답은 쉽게 서지 않았다. 사람이란 지독할 만큼 이기적이었다. 그 이기적인 것에 시헌 또한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야, 너네 싸웠지?”
“그런 거 아냐.”
“다른 사람은 속여도 누난 못 속여.”
하연이 벽에 기댄 몸을 일으키며 시헌과 마주했다. 힐까지 신은 하연의 키는 시헌이 올려다봐야 할 만큼 컸다. 다른 여자들은 키가 크면 힐을 낮춰 신는다고들 하지만 예전부터 하연에겐 그런 건 없었다. 참 이상했다. 형제 중, 유일하게 시헌만 키가 작았다.
중학교 때는 작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키와 함께 중학교 시절에서 몸의 시간이 멈춰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키가 크면 보이는 세상도 다른 건가? 그랬다면 그 자리를, 별장을 도망치지 않았을까? 시헌에게 해답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헌은 담배를 끄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모르겠어.”
“…….”
“그냥, 잘 모르겠다고…!”
“하아, 기욱이…… 그래도 형이잖아. 중학교 때부터 너 신경 많이 써 줬으니까, 잘못한 거 있으면 사과해.”
하연의 아닌 충고에 시헌은 고개를 숙였다. 시헌이 고개를 숙인 것은 얼굴의 표정이 하연에게 드러나지 않기 위함이었다. 사과하라고? 하하, 무엇을? 어떻게? 애당초 진짜 사과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지? 뭘 잘못한 거지? 시헌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시헌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하, 누나. 형이라고?”
“…….”
“이, 있잖아. 나도, 나도 형이라고 생각했어…!! 생각했다고!! 근데……. 근데 이건…… 진짜…….”
시헌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쯤 되면 진짜 제가 잘못한 건가 싶기까지도 했다. 기욱과의 관계를 숨기고 사귄 서진의 잘못일까?
시헌은 자신과 함께했던 서진이 거짓말로 사귀고 있었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웃음이, 관계들이 전부 거짓일 리가 없었다. 기욱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서진을 원하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길이 없었다. 시헌의 눈동자가 강하게 흔들렸다. 오늘에서야 알았다. 그날, 약간 술에 취한 기욱이 차 안에서 했던 말의 의미를 시간이 지난 후 시헌은 가슴 한구석으로 실감했다.
내 생각엔 남동생은 한 명이면 충분하거든.
“그냥, 난… 형한테 동생이 아니라 물건이 아니었나 생각해.”
“박시헌, 너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하하, 알아 미친 소린 거.”
시헌은 어설프게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미친 소리라는 걸 아는데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 기욱의 동생은 처음부터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좋았던 것은 아닐까. 기욱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필요할 때 옆에 있으면 되는 꼭두각시 같은 잘 만들어진 인형이 아닐까 싶었다. 엄마에게 연락이 온 하연은 휴대폰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무슨 일인지 말하기 힘들면 따로 전화해. 어지간하면 잘 해결하고.”
“알았어. 신경 쓰게 해서 미안.”
하연과 헤어진 시헌은 차로 돌아왔다. 멀리 기욱의 차가 호텔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시헌은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운전대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