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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5 네가, 감히 (48/83)

Chapter. 45 네가, 감히

의식이 끊기는 것만 같았다. 목소리가 들렸다. 진. 강서진. 빨려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에 서진은 눈을 번쩍 떴다. 땀에 가득한 기욱의 얼굴, 시선이 처음 눈을 뜬 서진을 반겼다. 눈을 뜨기 무섭게 이어지는 고통에 서진은 정신이 들었다.

“하으으으윽!!”

“후. 감히 멋대로 기절을 해?”

“어흑…! 으윽… 그만. 그만해요. 이제… 이제 됐잖아요…!!”

제 안을 거칠게 탐하는 기욱에 서진은 몸을 뒤로 빼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마나 쓰러졌는지는 모르지만 쓰러진 사이에 묶여 있던 손이 자유롭게 풀린 듯싶었다. 서진의 손목에는 붉은 벨트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여전히 손목이 아렸다. 기욱은 자국이 남은 손목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강서진.”

“어흑! 아으으윽!”

“날 이렇게 만든 건 네가 처음이야.”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될 테지. 기욱은 서진의 등 위로 올라탄 뒤 서진의 페니스를 흔들었다. 강제적인 행위에 비해 서진의 페니스를 애무하는 기욱의 손은 다정했다. 기욱의 테크닉에 반응하는 스스로의 몸이 역겨웠다. 서진의 페니스를 쥐고 흔드는 기욱은 귀두 끝을 엄지손가락 끝으로 막았다.

“아으흑… 흐윽… 제발….”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다시피 한 서진은 머리를 시트에 묻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기욱은 서진이 사정하기를 원하지 않는 듯 사정 타이밍에 맞춰 입구를 막았다. 몇 번이나 사정이 막힌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욱은 축 늘어지는 서진의 팔을 벽 쪽에 붙였다. 서진의 팔이 미끄러지자 기욱은 서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또 박시헌한테 전화해서 들려주고 싶지 않으면.”

“흐윽….”

“팔 똑바로 붙여.”

“…해요. 더 못 해요…. 제발… 못… 하겠어요…….”

축 늘어진 서진은 침대 위에서 일어선 기욱의 다리에 매달렸다. 강간이든 아니든, 서진은 더는 관계를 맺을 힘 따위는 없었다. 잔뜩 억눌린 탓일까? 기욱의 모습이 평소보다 더 크게 보였다. 이미 부서질 대로 부서진 마음은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관계를 끝낼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서진에게 기욱과의 섹스는 고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욱은 몸을 숙여 서진과 시선을 맞췄다. 훅 하고 들어오는 손찌검에 서진의 몸이 커다란 침대 위로 나뒹굴었다. 억 소리도 내지 못한 서진의 시야로 허공에 뜬 기욱의 손이 보였다. 서진은 본능적으로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떨었다.

“제발. 제발 그만… 그만. 때리지… 흐윽… 마세요….”

“서진아, 강서진.”

“네. 흐윽… 네네.”

“내가 똑바로 하라고 했어 안 했어?”

“그… 하윽… 했어요. 했는데…… 더 못 하겠어요… 제발…… 아아악!! 때리지 마세요!! 제발… 흐윽… 제발 아파. 아파요…… 제발! 아악!”

소리를 지르지 않는 기욱은 더 무서웠다. 낮게 깔린 중후한 목소리는 서진을 좀먹어 들어갔다. 서진의 머리채를 잡아당긴 기욱의 주먹이 서진의 몸을 향해 움직였다. 기욱은 일부러 옷을 입었을 때 보이지 않는 곳만을 골라서 때리고 있었다.

급소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계속되는 폭력 앞에 서진은 한없이 무기력했다. 연이은 폭력과 섹스에 지친 서진은 몸을 웅크리며 벌벌 떨었다. 기욱은 서진의 허리를 잡아당겨 다시 벽 쪽에 팔을 붙였다. 서진은 맞고 싶지 않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이를 악물며 버텼다.

기욱의 페니스가 거칠게 서진의 안을 박고 들어왔다. 기욱의 페니스가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서진의 몸이 거침없이 흔들렸다. 기욱의 낮은 신음과 함께 명령적인 말투가 들렸다.

“팔, 떨어지지 말라고 했지.”

기욱의 손이 약간 허공에 들렸다. 서진은 기욱의 움직임, 행동 하나하나에 잔뜩 예민해진 상태였다. 놀란 서진이 급하게 벽을 붙잡았다. 서진이 붙잡기 무섭게 기욱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갔다.

“흐윽… 그만… 윽….”

“입 안 다물어?”

“으, 으읍….”

양팔이 벽에 붙여진 상태의 서진은 입술을 깨물며 흘러내리는 신음을 막았다. 많이 참고 있었다는 걸 서진은 왜 모를까. 기욱은 마음 같아선 서진을 어딘가에 평생 가둬 두고 싶었다. 강서진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 자체가 기욱에게는 불쾌함 그 자체였다.

무엇이 스스로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서진의 어느 부분이 끌렸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기욱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본능적으로 서진을 원하고 또 원했다. 그 원함에 서진의 의사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눈앞에, 손이 닿는 곳에 서진이 있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보이지 않는 마음 따위 기욱은 믿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다. 그러나 기욱은 그 마음을 믿지 않는다. 손바닥 뒤집듯 가볍게 뒤집히는 마음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기욱은 상처가 난 목 근처를 핥았다. 입안으로 비릿한 피의 향이 났다. 벽에 팔을 기댄 서진의 고개가 금방이라도 침대에 닿을 듯 숙여졌다.

“한 번만 더 고개 숙이면.”

“흐윽… 윽… 어흑…!”

“강서윤한테 전화할 거야.”

“제, 제발… 그만….”

“고개 똑바로 들어. 팔 벽에 붙이고 떨어지기만 해 봐.”

서진의 치골을 잡아당긴 기욱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으로 거칠게 들어왔다. 감당할 수 없는 크기에 서진은 온몸을 비틀었다. 서진은 저를 거침없이 범하는 기욱이 악마 그 이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서진은 벽에 얼굴을 반쯤 기댄 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침대 옆 선반에 놓인 기욱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이 거슬리는지 기욱은 결국 탁, 하고 휴대폰을 열었다. 기욱이 전화를 받음과 동시에 서진의 몸이 침대 아래로 푹 쓰러졌다. 침대에 앉은 기욱은 휴대폰을 어깨에 걸친 뒤 서진의 다리를 잡아당겨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지칠 틈도 없이 들어오는 기욱의 페니스에 서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누구랑 통화하는 거지? 서진은 전화를 받는 기욱을 슬쩍 흘겼다. 서진과 시선이 마주친 기욱은 입꼬리를 올리며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시헌에게서의 통화였다.

― 형, 병원이야?

― 왜. 바빠.

퍽. 한쪽 다리를 잡아당긴 기욱이 서진의 안을 찌르고 들어왔다. 예고 없는 움직임에 서진이 움찔거렸다.

“하읍…!!”

손이 자유로워진 서진은 양팔로 입을 막았다. 전화 속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없는 지금, 섣불리 신음을 들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한 건 기욱은 서진의 신음 따위에는 눈 하나 끔벅하지 않을 것이었다. 기욱의 휴대폰 너머로 조심스러운 시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 형 혹시, 서진이 봤어?

― 모르는데. 왜?

― 하아, 아냐. 그런 게 있어.

다급한지 시헌 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기욱은 통화가 종료된 휴대폰을 침대 위로 내던졌다. 그런 뒤 몸을 숙여 서진의 뺨 위로 손을 올렸다.

“방금 신음을 안 낸 건 현명한 선택이었어.”

“그게 무슨… 읍….”

기욱의 혀가 서진의 입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도 키스를 하고 싶어 하는 기욱이 서진은 역겹기만 했다. 서진은 기욱의 혀를 있는 힘껏 깨물었다.

“윽…!”

서진의 안에 있던 페니스를 빼며 기욱은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입안에서 진한 피 맛이 났다. 순식간에 입안이 붉게 변했다. 기욱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피를 뱉어 냈다. 한 움큼 나오는 피에 기욱은 입가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 냈다.

“강서진 너…!!”

설마 혀를 깨물 줄 몰랐다는 듯 기욱이 서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기욱은 분명히 무섭다. 무섭다고는 하지만 어렸을 적 이후 누나―서윤과 함께 지옥 같은 생활을 버텨 온 서진이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의 끝이 기욱을 향하고 있었다. 손등으로 입을 가린 기욱이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기욱은 이마를 쓸어 넘기며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하하, 하하하하!! 그래! 그거야!! 그거라고!! 내가, 내가 보고 싶었던 거.”

기욱의 손이 서진의 목을 순식간에 감아 왔다. 목을 누르는 손가락에 서진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섣불리 기욱을 자극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 여자, 남자, 그 나이대에 누릴 수 있는 돈, 명예, 지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기욱이 얻을 수 없었던 것은 없었다. 세상에 딱 한 사람 강서진만 빼고 말이다. 혐오 섞인 듯한 깊고 깊은 심연의 눈동자.

서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기욱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똑같은 사람, 똑같은 패턴의 반복인 삶에서 서진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오락과도 같았다. 서진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기욱의 손바닥 안이었다. 서진은 기욱의 손에 힘이 풀린 틈을 타 있는 힘껏 주먹을 기욱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서진의 주먹에 기욱의 몸이 약간 휘청거리며 목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서진은 기침하며 여전히 기욱을 노려봤다.

“…어.”

“…….”

“너 같은 거!! 죽으라고!! 죽어 버려!!”

박기욱을 저주했다. 박기욱과 만나고 서진의 삶은 하루하루가 쇠로 달궈진 불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기욱은 퉤, 하고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 냈다. 꼴에 남자라고 반항하는 것 좀 봐. 기욱은 서진의 다리를 잡아당기며 위로 올라탔다.

“그래, 좋아.”

“…….”

“갈 데까지 가 보자 이거지.”

허공에 뜬 기욱의 손에 서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 * *

“후….”

싱크대 앞에 난 창문을 살짝 연 기욱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연기가 순식간에 거실을 가득 메웠다. 천장을 열어 물 컵을 꺼낸 뒤 정수기에서 얼음과 물을 담았다.

기욱은 얼음이 담긴 물을 순식간에 비웠다. 으득으득. 입안으로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붉은빛을 내며 돌아가던 전자레인지가 멈췄다. 죽 근처로 손을 대 보지만 죽은 여전히 차가웠다. 시간을 두 배로 늘린 기욱은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에서 오는 전화를 받았다.

― 어. 무슨 일이야?

탁탁, 새 담배에 불을 붙인 기욱은 닫혀 있는 침실 쪽을 흘끗대며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전화를 건 것은 다름 아닌 규건이었다. 의례적인 보고를 받은 뒤 기욱은 대충 싱크대 쪽으로 던져 담배를 껐다. 마침 전자레인지의 죽이 다 됐다.

― 별일 없지?

― 하하, 그럼요. 저희야 늘 똑같죠. 아아, 나도 휴가 가고 싶어라.

기욱이 사라졌을 뿐 남아 있는 규건 일행이 바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은근슬쩍 비꼬는 것을 눈치챈 기욱은 전자레인지 문을 열었다. 죽이 알맞게 익어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전자레인지 속 죽을 꺼내며 말했다.

― 그리 좋은 건 아냐.

― 무슨 일 있어요?

― 말했잖아. 놀러 가는 거 아니라고.

― 교수님, 진짜 무슨 일인지 안 알려 주실 거예요?

― 어. 쓸모없는 얘기할 시간 있으면 환자 상태나 한 번 더 보고 차트나 정리해.

기욱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뒤 휴대폰과 죽을 챙겨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선반에 휴대폰을 내려놓은 기욱은 인근 슈퍼에서 사 온 죽을 가지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침대가 푹 하고 기욱의 무게에 아래로 꺼졌다.

침대 구석에는 옷을 입지 않은 채 얇은 이불로 몸을 돌돌 말고 있는 서진이 있었다. 기욱이 다가오자 서진은 몸을 말고 있는 이불을 꽉 쥐었다. 손목 사이로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멍이 질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기욱은 잠시 죽을 내려놓은 뒤 서랍 안쪽에 있는 손수건을 들고 서진에게 다가갔다.

“흐읏….”

더 갈 곳도 없는 상황에서 서진은 몸을 더욱 벽에 밀착했다. 기욱은 구석으로 들어가 버린 서진에 한숨을 쉬었다.

“강서진, 이리 와.”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얼마나 소름이 돋던지. 불과 십여 분 전까지 주먹을 휘두르고 욕을 하며 서진을 협박했던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어쩌면 기욱은 선천적으로 연기에 재능이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삶에, 감정을 숨기는 지독한 연기에. 기욱의 본심을 알고 있는 서진은 이불을 더욱 꽉 쥐며 고개를 흔들었다. 울다 지친 듯 서진의 목이 잔뜩 쉬어 있었다.

“…지, 집에… 집에 보내 줘요. 흐윽… 제발….”

시헌과의 추억은 어느새 서진을 붙잡는 발목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별장에서, 시헌과 있었던 일이 하나하나 떠오를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과의 괴리감에 숨이 막혔다. 섹스하면 만족할 줄 알았던 기욱은 서진의 생각 이상으로 끈질겼다.

어쩌면 서진은 여태껏 박기욱을 과소평가했는지도 몰랐다. 기욱의 집착은 서진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병적이고, 고도화된 감정의 집약이었다. 곁에 두겠다는 집착과 소유욕만이 박기욱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서진은 일분일초라도 이 지옥 같은 별장을 벗어나고 싶었다.

“서진아.”

기욱은 서진의 말을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뻗었다. 서진이 반응이 없자 기욱의 손이 약간 허공에 떴다. 서진은 본능적으로 이불에 얼굴을 묻으며 벌벌 떨었다.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때, 때리지 마세요! 가, 갈 테니까… 제발… 그만….”

서진의 반응에 기욱은 허공에 뜬 제 손을 슬쩍 바라봤다. 때리려 한 건 아닌데. 아무렴 상관없나. 더 이상 기욱에게 맞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서진은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반쯤 내동댕이치며 기어가듯 기욱의 앞으로 다가갔다.

물론, 불안하긴 한 모양인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기욱은 충분히 가까이 다가온 서진 쪽으로 다가가 손수건으로 눈물로 젖은 눈가를 닦아 주었다. 기욱의 손이 닿을 때마다 서진이 움찔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떨림은 서진의 얼굴을 닦아 주는 기욱에게도 충분히 느껴질 정도의 떨림이었다.

“시헌이.”

“…….”

“어디가 좋아?”

“모, 몰라요. 그런 거 모르겠어요… 몰라요. 그냥…….”

“좋아하니까 사귄 거잖아.”

“흐윽… 모르겠어요. 잘못했어요. 집에. 집에 보내 줘요…….”

서진은 팔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후밖에 되지 않은 바깥의 풍경이, 시간이 저주스러웠다. 할 만큼 하지 않았나. 서진에겐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면 시헌은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보이지 않는 시헌보다 눈앞에서 제 목을 조여 오는 기욱이 더 무서웠다. 사람이라는 건 그런 것이었다. 기욱은 손수건을 내려놓으며 전자레인지에 있던 죽을 가지고 왔다. 눈앞에 있는 죽을 본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뭔가를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오히려 그런 짓을 하고도 이 상황에서 태연하게 죽을 수저에 떠 내미는 기욱이 서진은 더욱 무서웠다.

“먹어.”

기욱이 몇 번이나 입 근처로 수저를 가져다 댔지만, 서진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기욱이 한숨을 쉬며 수저와 죽을 선반 쪽에 올린 뒤 서진의 몸을 잡아 눌렀다. 순식간에 올라탄 기욱에 깜짝 놀란 서진이 소리쳤다.

“머, 먹을게요! 으윽… 머, 먹을 테니까…….”

서진은 애원하듯 기욱에게 매달렸다. 양 손목을 누르는 손이, 기욱의 무게가 평소보다 배는 더 무거웠다. 더는 기욱에게 당했다가는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서진의 위에서 내려온 기욱은 다시 죽을 가지고 왔다.

서진이 수저로 손을 뻗자 기욱은 서진의 손을 치워 낸 뒤 수저에 죽을 펐다. 기욱의 눈치를 본 서진은 결국 입을 벌리며 기욱이 주는 대로 죽을 받아먹었다. 새벽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데다 정신없이 당했던 서진은 기욱이 주는 죽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먹지 않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욱은 다 먹은 죽 그릇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선반 옆에는 서진의 휴대폰이 그대로 있었다. 서진을 슬쩍 본 기욱은 서진의 휴대폰을 들었다. 마침 서진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기욱은 제 휴대폰 다루듯 서진의 휴대폰으로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기욱 오빠? 어? 서진이는?

서윤의 목소리였다. 기욱은 그제야 휴대폰으로 발신자를 확인했다. 일부러 수화음을 낮춘 기욱은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서진을 내려다봤다. 침대 옆으로 올라가 일부러 서진의 옆에 걸터앉았다.

― 서진이 지금 자.

― 잔다고? 오빠 지금 어딘데?

― 그냥. 바람 좀 쐴 겸, 둘이 지방 내려왔어. 바꿔 줄까?

기욱은 땀이 말라 눅눅해진 서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서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서진은 대화의 맥락으로 기욱이 통화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 서진이 잔다고 하지 않았어?

― 뭘. 깨우면 돼.

― 아냐, 됐어. 자는 애 억지로 깨우기도 뭐하지. 그래도 오빠가 있어서 다행이네.

― 서진이,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 응. 서진이한테도 안부 전해 주고. 자야 되니까 내일 다시 전화할게.

― 그래.

기욱은 꼬았던 다리를 풀며 서윤과의 통화를 끊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대화를 하는 그 목소리는 누가 봐도 연인을 보내 아쉬워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서진은 기욱의 손에 있는 제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기욱이 그런 서진의 몸을 밀어 눌렀다. 기욱에게 몸이 눌린 서진의 눈동자가 떨려 왔다. 지방에 내려왔다고? 하, 지방은 지방이지. 내려온 게 자의가 아닌 타의라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내, 내 휴대폰으로 ……설마….”

“들었잖아. 서윤이였어.”

“누, 누나… 전화 왜 끊었어요! 누나 바꿔 줘요!! 왜 멋대로 남의 전화를 받냐구요!!!”

서진이 울음을 참으며 소리를 질렀다. 서윤의 목소리가, 서진은 절실하게 듣고 싶었다. 서진은 기욱의 팔에 매달려 애원하다시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기욱은 그런 서진을 눕힌 뒤 팔을 위로 잡아 눌렀다.

“너 지금.”

“…….”

“강서윤 신경 쓸 때가 아닐 텐데.”

기욱의 손이 서진의 무릎에 반쯤 가려진 이불을 걷어 냈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서진이 위로 눌린 팔을 흔들며 몸을 뒤틀었으나 기욱은 그런 서진을 가볍게 눌렀다. 애당초 이미 기욱에게 잔뜩 당했던 서진은 반항할 만한 기력도 없었다.

기욱의 손가락이 서진의 엉덩이 사이 안쪽을 긁었다. 허벅지와 엉덩이 근처로 마른 정액들이 긁혀 나왔다. 단순히 정액을 긁어내려 했던 것이라면 욕실에 데려가면 되는 일이었다. 기욱은 서진의 허벅지를 옆으로 크게 벌렸다.

“제발… 이제 그만해요…!!”

발버둥을 쳐 기욱에게 벗어난 서진이 침대 구석으로 숨어 들어갔다. 기욱은 서진의 다리를 잡아당겨 아래로 이끈 뒤 몸을 옆으로 틀었다. 뒤쪽으로 기욱이 가볍게 챙겨 입은 츄리닝 바지가 내려가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등 위로 올라탄 기욱의 무게와 함께 엉덩이 근처로 기욱의 부풀어 오른 페니스가 느껴졌다. 침대에 얼굴을 묻은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괴롭혀야 속이 풀릴지 서진은 알 수가 없었다.

“허윽…! 으읏… 하으으… 윽…!!”

커다란 침대의 시트가 꿀렁거리며 흔들렸다. 기욱이 서진의 안에서 크게 움직일 때마다 서진의 몸이 앞으로 흔들리며 침대 헤드에 머리를 박을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기욱은 그런 서진을 잡아당겨 몇 번이고 범했다. 기욱과 섹스를 하면서 얼마나 정신을 잃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기욱은 서진이 정신을 잃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섹스를 계속했다. 그렇게 정신이 들고, 다시 고통에 몸부림치고 정신을 잃기를 여러 번 반복한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마 죽을 먹지 않고 아침에 다른 것을 먹었더라면 전부 뱉어 냈을지도 몰랐다.

“흐윽…! 흐… 으윽… 제발… 그, 그만…!”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반항도 했다. 몇 번이나 울면서 사정도 하고, 매달리기도 했지만, 기욱은 서진의 어떤 행동에도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었다.

박기욱은 두 번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마음먹으면 무슨 짓이든 한다는 것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기욱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집요하게 독한 구석이 있었다. 잠시 섹스를 그만하는가 싶던 기욱이 서진의 치골 부위를 잡아당기며 페니스를 안쪽으로 깊게 박았다.

이젠 그 행위가 아픈지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허리를 붙잡은 기욱의 손에 의해 기계적으로 몸이 흔들린 서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방을 둘러봤다. 시헌과 있었던 침실이었다. 워낙 친척이 많아서 침실은 꽤 여러 개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 침실을 들어왔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기욱이 몸을 틀어 바로 눕히는 틈을 타 서진은 문 쪽을 흘끗거렸다. 문고리가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이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보였다. 서진이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기욱은 문 쪽으로 몸을 약간 틀었다.

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욱은 서진의 다리를 들어 올려 몸을 옆으로 한 뒤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으읏… 허으… 하읏… 흐윽….”

목이 쉰 걸까 서진은 신음조차 똑바로 나오지 않았다.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식어 가는 신음 속에서 기욱은 서진의 안에서 울컥, 사정했다. 잔뜩 핏줄이 선 흉물스러운 기욱의 페니스가 꿀렁거리는 것이 몸 안쪽에서부터 그대로 느껴졌고, 그것은 서진을 사뭇 괴롭게 만들었다.

아무리 박기욱이라도 수 시간 섹스하면 지치는 듯 서진에게 사정을 한 뒤 기욱은 숨을 고르고 있었다. 몸을 숙여 서진을 내려다보는 기욱의 시선은 서진이 기절했는지 안 했는지만 판단하는 것 같았다. 서진은 기욱이 잠시 한눈을 판 틈을 타 심호흡을 한 뒤 기욱의 몸을 힘껏 밀었다.

“너…!”

침대에서 일어난 서진은 곧장 침대 옆 선반에 있던 무드등을 옆으로 밀었다. 넘어진 무드등의 유리가 깨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기욱은 깜짝 놀라 깨진 무드등을 내려다봤다. 서진은 기욱이 무드등을 내려다보는 틈을 타 무드등 밑에 있던 열쇠를 챙긴 뒤 문 앞으로 뛰어갔다. 울어도, 화를 내도, 애원해도 안 된다면 도망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알몸 상태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아… 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사실 서 있을 기운조차 없지만 도망쳐야 한다는 신념 하나에 정신력만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달각, 하고 열쇠를 넣었던 문고리가 열렸다. 서진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던 기욱은 서진이 문을 열거란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욱은 한발 늦게 무드등 밑에 놓였던 열쇠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욱이 쫓아오면 밖으로 나간들 소용이 없었다. 서진은 문을 바깥에서 잠글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문밖으로 돌아 곧장 문을 잠갔다.

쿵. 쿵. 문이 잠긴 것을 인식한 기욱이 문을 두드렸다.

“씨발! 강서진!! 열어!!! 야!!”

“…하, 하아… 흐….”

“나가기만 해 봐!!! 씨발!! 문 열어!! 안 열어?? 열라고 씨발!!!”

설마 서진이 방의 구조와 스페어키의 위치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기욱은 잔뜩 분노한 상태였다. 서진도 기욱이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것을 처음 경험하고 있었다. 서진은 쿵쿵거리는 문에 깜짝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문 앞에 반쯤 주저앉았던 서진은 정신을 차리며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거실에는 기욱의 커다란 코트가 있었다. 옷을 입을 여유도, 제 옷이 어디 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한 건 기욱의 코트 안에는 습관처럼 차 키가 있다는 것이었다. 서진은 기욱의 코트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포기한 건가? 방 안이 조용했다. 주머니 안에서 차 키가 나왔다. 서진은 급하게 기욱의 커다란 코트를 입으며 나갈 준비를 했다.

탁, 하고 그런 서진의 팔을 뒤쪽에서 강하게 붙잡았다.

“…어, 어떻게……!!”

팔을 붙잡은 사람이 기욱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애당초 이 별장에는 기욱과 서진 외에는 없었다. 기욱은 서진의 손목을 강하게 비틀었다.

“아으윽!! 아악!”

“씨발.”

“아흑… 아파, 아프다고!!”

서진의 손에 있던 기욱의 차 키가 나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진이 차 키를 주우려 했으나 한발 빠른 기욱이 차 키를 주워 소파 쪽으로 내던졌다. 기욱은 고개를 돌린 서진의 뺨을 강하게 내려쳤다. 몸이 휘청거리며 넘어질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지만 팔을 붙잡힌 서진은 쓰러지지도, 그렇다고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한 애매한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니가!”

“어흑…!”

“아주!!”

“커흑…… 으흑… 그만….”

“미쳤지!!!”

기욱은 서진의 팔을 몸 쪽으로 잡아당긴 뒤 손을 올렸다. 뺨을 때리는 거친 소리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서진의 숨넘어가는 소리만이 거실을 한참 동안 울렸다. 기욱이 손을 놓자 서진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침대가 아닌 나무 바닥은 평소보다 더 차가웠다. 서진은 숨을 간신히 내쉬며 손목을 터는 기욱을 올려다봤다.

“하으… 억….”

“후….”

손목이 아플 정도로 서진을 때린 기욱은 욱신거리는 손목을 털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서진을 향해 크게 발길질을 했다. 기욱의 발길질에 서진의 등이 벽에 부딪히며 밀려났다. 기욱은 서진과 시선을 맞춘 뒤 서진의 앞으로 뭔가를 떨어트렸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서진이 무드등 밑에서 꺼낸 스페어키였다. 급하게 나온 탓에 안쪽에서 열쇠를 꽂은 채 나온 것이었다. 서진이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던 기욱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서진의 턱을 들어 올린 기욱이 또다시 손을 휘둘렀다.

“후우, 하하, 씨발 좆같아서 진짜.”

“…흐윽… 허윽….”

“네가 어떻게…… 하. 어이가 없네.”

기욱은 진심으로 흥분한 상태였다. 고등학교 시절 했던 패싸움 이후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분노가 기욱을 짓눌렀다.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보통 상식적으로 문이 안쪽에서 잠가져 있다면 당황하기 마련이었다.

무드등 밑의 열쇠도 그렇다. 별장에 와 본 적이 없는 서진이 무드등 밑에 스페어키가 있을 거라는 것을 안다는 것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또다시 기욱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하하.

“설마 둘이 왔냐?”

“……으윽… 아, 윽… 알거… 없… 하윽… 잖아요.”

“말 그딴 식으로 하지!”

기욱은 머리채를 잡아 서진의 머리를 벽에 누른 뒤 뺨을 마주했다.

강서진. 강서진. 강서진! 그 이름 세 글자에 기욱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기욱은 제 걸로 있는 한 못 해 준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서진이 왜 뒤에서 그런 짓을 했는지 기욱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흐윽… 내가 도대체… 흑… 당신한테 뭘 했다고 나한테… 으윽… 이래요!”

“강서윤, 행복하길 바랐잖아.”

“흐윽… 윽….”

“그게 뭐가 잘못됐는데?”

남들은 서진이 누나―서윤에게 집착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욱은 서진의 그런 서윤에 대한 집착을 충분히 이해하며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뿐인 누나가 행복하길 바라는 게 뭐가 잘못인가? 설령 거짓된 행복과 달콤한 한순간의 꿈이라 해도 깨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짜 사랑이고, 행복이 될 수 있었다.

모르는 것은 약이지 결코 독이 되지 않는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바람을 이뤄 주는 대신 강서진이라는 존재를 얻었다. 만약 그게 싫었다면 돈을 받지 않았으면 될 일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대가 없는 사랑이라고? 하, 그런 게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

기욱이 아는 사람은 뼛속까지 이기적인 존재다. 이기적이기에 사람이었다. 서로 죽을 듯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각자의 이득이 만나 맺어진 눈에 보이는 결과일 뿐이었다. 서로의 득이 맞아 하는 사랑을 비난할 마음은 없다. 각자가 원하는 것을 가지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서진과의 관계 또한 그랬다. 설령 연기라 할지라도 서진은 이래서는 안 됐다.

그러나 기욱에게 강서진은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사람은 변한다. 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이 될 수도 있다. 그럴 땐 이혼을 하거나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필요가 없는 사람과 질척거릴 이유가 없으니까. 기욱의 정상적인 사고라면 서진과의 관계는 그 정도만 하는 것이 맞았다. 허나 기욱은 서진을 포기할 수 없었다.

왜?

강서진.

술을 마신 새벽, 기욱은 그 어려운 이름 세 글자를 얼마나 또 곱씹고 곱씹었는지 모른다. 득보다는 실이 많은 관계일 텐데도 불구하고 기욱은 서진을 원했다. 강서진이라는 존재가 왜 이렇게 기욱을 미치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기욱은 서진이 없으면 안 됐다. 기욱은 목 근처에 난 상처를 혀로 핥았다.

“넌 내 거야.”

“…윽….”

“내 거라고!!”

서진의 허벅지를 잡아당긴 기욱은 서진의 안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섹스를 좋아하는 기욱이지만 누군가를 이렇게 진심으로 원해 본 적은 없었다. 기욱은 그 낯선 감정을 잊기 위해 필사적으로 서진을 안았다.

서진이 반항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서진을 곁에 두지 않으면 스스로가 통제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저 기욱이 원하는 대로, 만족할 만큼 몸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서진은 흐려 가는 의식 속에서 필사적으로 눈을 떴다.

박기욱을,

평생 저주할 것이었다.

* * *

“이런 씨발!!”

급하게 집으로 돌아온 시헌은 소리를 지르며 벽 한쪽을 쿵 하고 내리쳤다. 얼마나 강하게 쳤는지 천장에 달린 미니 샹들리에의 유리가 흔들릴 정도였다.

벽에 몸을 기댄 시헌은 손톱을 입안에 넣으며 깨물었다. 시헌의 다른 손에 들린 휴대폰은 서진에게 계속 전화를 걸고 있었지만, 서진의 휴대폰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꺼져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 일이 있었던 뒤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지켜 주겠다고 했는데, 예고치 않게 일어난 서진의 일에 시헌은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신음. 분명한 서진의 신음이었다. 혹시나 하고 우민에게 전화했지만, 서진을 강간한 인훈은 여전히 구치소에 있었다.

그날 구공과대학 강의실에 있던 남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처넣은 상태였다. 혹시 빼먹은 사람이 있는 건가? 놓친 사람이 있는 건가? 누군가 보복을 하는 건가? 서진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서진을 향한 온갖 생각들이 시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시간을 확인한 시헌은 한숨을 쉬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저 시헌인데요, 지금 바쁘세요?

― 어머, 시헌아. 무슨 일이야? 아니, 이제 한가해.

― 늦은 시간에 죄송한데……. 혹시 서진이랑 연락돼요?

소파에 다리를 꼬며 앉은 시헌은 휴대폰 속 서윤의 대답을 기다렸다. 서윤이 뭔가를 알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심정에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었다. 시헌의 말에 서윤의 높은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 아, 서진이? 아까 전화했는데. 오빠랑 같이 있다고 그랬어.

서윤의 대답은 시헌의 예상을 뛰어넘는 이야기였다. 뜻밖의 이름에 시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윤이 부르는 오빠라는 게 한 명밖에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 누, 누구랑요?

― 얘는. 기욱 오빠지 누구야? 둘이서 지방 내려간 모양인데……. 몰랐어?

― 아, 네. 일이 좀 바빠서요.

― 둘이 노느라 전화 못 받나 보네. 걱정하지 마.

― 알겠어요.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시헌은 전화를 끊은 뒤 무릎에 팔을 괴며 고개를 숙였다. 기욱은 병원에 있다고 했다. 서진에게 전화를 했을 때 들렸던 것은 분명한 서진의 신음이었고. 서윤은 서진이 기욱과 함께 지방에 내려갔다고 했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다.

누군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시헌은 기욱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기욱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어 번의 통화 끝에도 연결되지 않자 시헌은 번호를 바꿔 전화했다. 상대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 어? 시헌 형. 왜요?

― 야, 강재혁. 너 사촌 형이 J대 병원 NS 펠로우라 그랬지?

시헌에 집만큼은 아니더라도 재혁네 집도 의사 집안이었다. 시헌은 술자리에서 재혁과 친한 사촌 형 하나가 기욱이 일하는 J대 병원 신경외과라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혹시나 싶었지만 같은 과라면 기욱을 알 수도 있었다.

― 어. 네. 규건 형, 형네 형 밑에서 일하잖아요.

재혁은 규건이 기욱의 밑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재혁이 그 사실을 언제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 번호 좀 줘.

― 예?

― 씨발! 네 사촌 형 번호 좀 달라고!

답답한 마음에 올라가는 언성에 재혁이 살짝 당황했다. 시헌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도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재혁은 근처에 있던 동기들을 보낸 뒤 말했다.

―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알았어요.

통화가 끊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헌의 휴대폰으로 규건의 번호가 왔다. 일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지만, 시헌은 그런 걸 기다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시헌은 곧장 재혁에게서 받은 규건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 *

“후우….”

저녁 회진을 돌기 전 수술실을 나온 규건은 4년 차 레지던트와 함께 연구동 옥상에 담배를 피우러 나온 상태였다. 기욱이 없는 이틀 동안 남은 수술은 규건이 할 수 있는 수준의 어렵지 않은 수술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지 않은 수술이라 해도 규건은 기욱이 없는 것을 절실히 실감하는 중이었다.

옆에서 봤을 때는 되게 쉬워 보였는데 막상 해 보니 할 수는 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은? 아니, 그게 아니다. 원래 쉽지 않은 수술들을 기욱이 너무 쉽게 해 버린 것이었다. 중간에 다른 방 수술을 끝낸 우민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담배를 피울 시간조차 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밤새 수술을 달리고, 아침부터 오후까지 했던 큰 수술 시간을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끝내고 나와 남의 수술방에 수술을 도와주러 오는 우민도 우민이었다. 최근 들어 묘하게 중간에 끼인 듯한 신세가 된 규건은 그냥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연신 줄담배를 피우던 규건의 주머니에 살짝 튀어나온 휴대폰을 4년 차 레지던트가 꺼내 왔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규건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벨 소리가 울리는 규건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전화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교수님, 전화 왔습니다.”

“어, 응.”

정중한 그의 말투에 규건은 담담하게 휴대폰을 받아 발신자를 확인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 규건은 전화를 받았다.

― 예. J대 병원 신경외과 의사 최규건입니다.

― 저 박기욱 동생인데요.

― 누구 동생?

― 박기욱이요.

시헌의 목소리였다. 기욱의 동생에 대해서는 규건도 들은 것이 있었다. 문제는 그 기욱의 동생이 어떻게 자신의 번호를 알아 전화를 했느냐였다.

― 아, 박 교수님 동생? 무슨 일이야?

그사이 내려가 봐야 할 시간이 된 4년 차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규건은 그를 향해 잘 가라는 듯 손을 흔들어 주었다.

― 형 오늘 출근했어요?

― 교수님? 지방 가지 않았어? 휴가 내고.

― 휴가요? 언제부터요?

― 이틀 됐어. 너 동생이라며.

― 아, 저도 지방 갔다 방금 막 올라와서…….

― 들었다. 세미나 다닌다고. 하, 한참 꽃다운 나이에 그게 뭐냐.

―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어요?

― 음 그거까진 모르겠는데. 왜? 선배님 전화 안 받으셔?

― 그런 건 아닌데. 아,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규건은 시헌과 통화를 마친 뒤 머리를 긁적였다. 기욱은 동생―시헌이랑 같이 살았다. 집안사람들이야 그렇다 쳐도 동생한테 말도 안 하고 어딜 내려갔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뭐, 동생이라는 녀석도 다 컸으니 기욱이 일일이 보고를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뭐, 의사들 성격이 이상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신경 쓸 건 없었다.

* * *

“하아……”

규건과 통화를 마친 시헌은 고개를 숙였다. 설마 싶었는데. 모든 상황이 기욱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헌은 습관처럼 휴대폰의 앨범을 열어 서진과 찍은 사진들을 넘겨 봤다. 생각 없이 넘기던 중 서진과 별장에서 찍은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서진과 있을 거라고 추정되는 기욱. 주변 사람들은 그 기욱이 지방에 내려갔다고 했다. 시헌은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중년의 남성이 시헌의 전화를 받았다.

― 시헌아, 무슨 일이냐?

― 혹시요, 기욱 형이 별장 빌리지 않았어요?

― 어제인가 이틀 전에 전화 왔다. 내가 지금 라운딩 중이니까 끊자.

― 예.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바빠 보이는 큰아빠의 말투에 시헌은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끊었다. 잠시 입술을 깨물던 시헌은 차 키를 챙긴 뒤 집을 나섰다.

* * *

시헌은 차를 몰고 별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별장에 도착하면 도착할수록 쎄한 느낌이 들었다. 시헌의 그런 불안함은 틀린 적이 없었다. 예상대로 별장의 주차장에는 기욱의 검은 외제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시헌은 적당히 차를 주차한 뒤, 차에서 내렸다.

거실에는 커다란 커튼이 쳐져 있었으며 그 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시헌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욱의 차 문을 열어 보고 내부를 확인했다. 차 안은 텅 비어 있었으며, 문도 잠가져 있었다.

“…….”

기욱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한 시헌은 휴대폰을 닫고 별장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 하는 소리가 나며 도어락의 문이 열렸다. 문틈을 살짝 열자 불이 켜진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넓은 거실은 무서우리만큼 적막했다. 그러나 사람의 인기척은 있었다. 시헌은 조심스럽게 거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으윽… 흐으윽….”

침실 쪽이었다. 닫혀 있는 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바깥에서 열 수 있는 침실의 문은 잠가져 있는 상태였다. 시헌은 잠금장치를 푼 뒤 문을 열었다.

“아흑… 흐으윽….”

때마침 기욱에게 안겨 사정을 한 서진의 몸이 축 늘어졌다. 기욱의 섹스가, 딱히 시헌은 놀랍지 않았다. 기욱이 등을 보이는 탓에 안쪽에 있는 서진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서진의 몸이 기욱의 옆쪽으로 쓰러졌다.

기욱은 그런 서진을 안은 뒤 침대 헤드 쪽에 몸을 기대게 했다. 기욱과 섹스를 하는 사람이 서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시헌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섰다. 툭, 하고 손에 들려 있던 휴대폰이 떨어졌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서진은 시헌이 왔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제정신이 아닌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왔다는 걸 아는데, 알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혀, 형… 이게…… 어떻게 된…….”

“…….”

기욱은 시헌 쪽으로 몸을 틀었다. 시헌의 손에는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것이 서진의 이니셜이 들어간 커플링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기욱은 땀에 찬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없이 시헌을 바라봤다. 사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시헌은 제정신이 아닌 침대 위 서진을 보며 손을 떨었다.

박기욱.

시헌이 서진 다음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오히려 기욱은 서진보다 더하면 더하지 절대 덜하진 않았다. 피를 나눈 형제일 텐데, 가끔은 형제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기욱은 남동생을 원했고, 우연히 시헌이 기욱의 남동생이 됐을 뿐인 일이었다.

시헌이 기욱의 남동생으로 있는 한 기욱은 시헌이 뭘 하든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실 기욱은 남동생이라면 시헌이 아닌 누구라도 상관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기욱이지만 시헌은 이 상황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진에 대한 배신감도 들었다. 사실은 서진이 제가 아닌 기욱을 좋아했었다든지. 그럼 기욱과 혼인신고까지 하고 해외에 나가 있는 서윤은? 시헌은 고개를 저었다. 기욱이 서진을 어떻게 생각하든 저 역시 중학교 시절부터 서진을 봐 왔던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대체…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

“씨발 말 좀 해 보라고!!”

시헌은 한 번도 기욱에게 이런 식으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마치 제 어렸을 적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시헌의 외침에 기욱은 침대에서 일어나 시헌의 앞에 섰다.

시헌을 내려다보던 기욱은 한숨을 내쉬며 거실로 나갔다. 기욱은 섹스를 한 이후 꼭 찬물을 들이마시는 버릇이 있었다. 역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태연하게 거실에서 휴대폰을 만지는 기욱에 시헌은 조심스럽게 서진이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서진은 얇은 이불을 몸 반쯤 덮은 뒤 꼭 쥐며 벌벌 떨고 있었다. 하루 동안 몇 번이나 기욱에게 맞춰 섹스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기욱은 서진의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하라는 말과 함께 폭력을 휘둘렀다.

서진은 맞지 않기 위해 기욱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인형이나 다름이 없었다. 시헌의 시선이 서진의 이불을 쥔 팔목에 닿았다. 팔목에는 뭔가에 묶인 듯한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깜짝 놀란 시헌이 서진의 팔을 보기 위해 손을 들었다. 이어지는 서진의 반응은 시헌의 입을 벌리게 하였다.

“…했어….”

“뭐, 라고?”

“…잘못했어요. 흐윽… 제발… 잘못했어요! 자, 잘할게요. 아아악!! 때리지 마세요. 제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서진이 고개를 숙이며 울었다. 기욱이 아무리 보이지 않는 곳을 때렸다고 해도 시헌은 서진의 몸에 일어난 상태를 알 수 있었다. 퉁퉁 부은 눈가와 입술은 잔뜩 터 피로 얼룩져 있었으며 목 근처에는 잇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헌은 도대체 왜, 무슨 이유에서 기욱이 서진을 이렇게 때려야 했는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 맞을지도 몰랐다. 시헌은 서진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어깨에 닿는 손길에 서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었다.

“흐윽, 흑.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부탁이니까 이제… 흐윽… 이제 그만…….”

“강서진.”

“내가… 흑, 내가 잘할게요. 다 잘못했으니까…….”

“강서진!! 정신 차리라고!!”

계속되는 혼동에 시헌은 서진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서진의 흔들리던 동공이 멈추며 시헌을 마주했다. 검은 눈동자 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시헌을 알아본 듯 그제야 서진의 입술이 떨려 왔다. 목 안에서부터 콱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시, 시헌아…….”

기욱에게 당하면서 마음속으로 그 이름을 얼마나 불렀는지 모른다. 사실은 시헌이 구하러 와 줬으면 좋겠다고 마음 한구석으로 생각했다. 서진에게 있어 시헌은 늘 히어로와 같은 존재였다. 그럴 텐데. 이번만큼은 상대가 나빴다.

시헌의 시선은 서진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지만 정작 서진의 시선은 시헌이 아닌 시헌의 뒤에서 팔짱을 끼며 저를 보고 있는 기욱에게 있었다. 기욱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서진은 그 행동에 무슨 의미라도 부여한 듯 몸을 떨었다. 서진은 제 손을 붙잡는 시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 강서진! 너 진짜 괜찮아? 씨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시, 시헌아. …해.”

“뭐가?”

“내, 내가… 자, 잘못했어. 잘못했어. 미안해……. 흐윽… 미안해.”

시헌의 손을 붙잡은 서진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다. 사실은, 처음부터 이래서는 안 됐다. 기욱과의 관계도, 그 사실을 알면서도 시헌의 고백을 받아들인 자신의 선택도. 모든 것이 잘못됐다. 그저 한순간의 감정에 휩싸여 한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이젠 돌이킬 수 없을 지경까지 와 버리고 말았다.

지난 5년 동안 서진은 시헌의 마음을 가지고 논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눈치가 빠른 시헌이 서진의 이 말을 깨닫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서진의 손을 쥔 시헌의 손과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 행동에 서진이 아픈 듯 눈살을 찌푸리자 뒤늦게 힘을 푼 시헌이 몸을 틀어 기욱을 바라봤다.

사실은 서진이 말하지 않아도 시헌도 마음 한구석으로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기욱을 보는 서진의 시선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그런 불안함에 시헌은 서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굴었는지도 모른다.

기욱과 서진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은 믿을 수가 없으니까. 아무리 상대가 박기욱이라는 사람이어도 시헌에게는 형이고, 서진에겐 누나―서윤의 남자 친구―이제는 그 이상인 관계지만―인 사람이었다. 그런 기욱이 서진에게 관심을 두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기욱에겐 그런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를 상식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시헌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혀, 형 미쳤어? 도대체 왜…!! 왜 서진이를!!! 만약 그게 사실이어도 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시헌이 본 서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도대체 얼마나 괴롭혀야 한 사람이 이렇게 망가지는 걸까? 기욱의 집착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도를 넘어선 집착이었다. 도대체 기욱에게 서진이 뭐라고?

제가 없었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란 말인가. 시헌의 외침에 기욱은 팔짱을 풀며 시헌을 내려다봤다. 시헌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에, 시선에 죄책감이나 거짓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강서진.”

“…….”

“원래부터 내 거였어.”

“그, 그게 무슨…… 씨발, 그러니까 대체 언제부터…!!”

“서진아.”

시헌의 말을 반쯤 자른 기욱은 침대에 반쯤 주저앉아 있는 서진에게로 손가락을 까닥였다. 시헌의 등 너머로 보이는 기욱을 본 서진의 몸이 파르르 떨려 왔다. 서진이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을수록 기욱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당할 대로 당한 서진은 기욱의 그런 눈동자만 봐도 두려움이 일었다. 일어나야 한다.

서진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마치 무언가에 홀리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깜짝 놀란 시헌이 비틀거리는 서진의 몸을 붙잡았으나 서진의 시선은 저를 보는 기욱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일로 와.”

기욱이 더욱더 손가락을 까닥였다. 강서진. 그 이름 세 글자에 어떤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걸까? 기욱이 이름을 부를 때면 서진은 거부할 수가 없게 되어 버리고 만다. 더 가까이 오라는 기욱에 서진은 남아 있는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만약 이대로 기욱에게 가 버린다면 정말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서진은 기욱을 향해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고 있었다. 시헌은 그런 서진이 가지 못하게 서진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놔.”

“강서진 너 미쳤어?”

이불 밖에서 나온 서진의 상태는 시헌의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똑바로 걷지도 못하는 데다 허벅지 안쪽에는 정체 모를 정액들이 피와 섞여 굳어 있었다. 폭력뿐만이 아니라 섹스까지도 제멋대로 했음을 알려 주는 증거였다.

더는 기욱의 폭력과 섹스를 견딜 수 없었던 서진은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멈출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설령 그것이 시헌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되는 일이 되더라도. 맞고 싶지 않았다. 기욱에게 맞으며 강제로 섹스를 할 때의 기분은 그 어떤 것보다 치욕적이며 서진의 정신을 좀먹어 들어가게 하였다.

“놔, …놔 제발!! 놓으라고!!!”

서진은 제 팔을 붙잡은 시헌을 거부했다. 그냥 다 싫다. 제 몸에 손을 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싫었다. 아아, 시간이 멈추면 좋을 텐데. 서진의 발악에 깜짝 놀란 시헌이 뒤로 물러나는 사이 기욱이 휘청거리는 서진의 허리를 붙잡아 안았다.

“형 잠깐…!”

기욱은 시헌이 채 말릴 틈도 없이 서진의 턱을 들어 올려 키스를 했다. 서진의 혀가 딱딱하게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지만, 기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서진의 허리를 안는 기욱의 다정한 손길에 시헌은 인상을 찌푸렸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그 버릇들은 마치 호텔에서 서윤과 키스를 하던 기욱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순간 시헌은 깨달았다.

기욱은 서윤을 생각하고 서진을 안은 것이 아니었다. 서윤이야말로 기욱에겐 서진을 대신하는 대용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믿지 못할 풍경에 시헌은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소리 없이 웃었다.

서윤도, 기욱과 서진도, 그리고 그런 서진과 자신도. 참으로 지독한 관계가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욱의 키스가 멈추자 서진의 몸이 기욱 쪽으로 반쯤 늘어졌다. 기욱의 커다란 손이 서진의 뺨을 쓸어내리며 자연스럽게 목을 눌렀다.

기욱의 손에 의해 서진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지며 기욱의 다리 사이에 닿았다. 서진은 기욱이 원하는 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얼굴 뺨 근처로 닿는 기욱의 페니스에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시, 싫…….”

“시헌이 앞에서 엉망으로 당하고 싶지 않으면 해.”

협박이었다. 기욱의 무릎을 반쯤 붙잡은 서진은 저를 보고 있는 시헌을 올려다봤다. 기욱의 속삭임은 듣지 못했지만. 기욱이 서진에게 시키려 하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강서진, 하지 마.”

“…….”

“하지 말라고!”

그 꼴만큼은 절대 볼 수 없다. 다급해진 시헌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서진을 기욱에게서 반쯤 떼어 놓았다. 서진은 시헌의 앞에 섰다. 여전히 죄책감으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서진은 기욱과 시헌의 사이에서 갈등이 일었다.

아무리 시헌이라 해도 기욱을 상대로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자신과 서윤의 관계만큼이나 기욱과 시헌의 관계 또한 미묘한 애증의 관계로 얽혀 있었다. 서진은 제 손을 붙잡은 시헌의 손을 뿌리치며 기욱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욱은 서진을 향해 다시 손을 까닥였다.

“나, 나… 미안.”

“야, 야. 가, 강서진? 너 지금… 네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

시헌에게서 고개를 돌린 서진은 천천히 기욱의 앞으로 다가갔다. 무릎 아래로 몸을 숙이는 서진의 입이 천천히 기욱의 페니스를 머금었다.

이건 아니었다. 이런 결말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었던 시헌은 도망치듯 별장을 나왔다.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은 시헌은 핸들에 고개를 숙였다.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진정할 수가 없었다. 화를 내야 하는데, 황당함에 억눌려 화조차 나지 않았다. 시헌의 머리론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것조차 벅찼다.

“하아, 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자동차 유리창 너머로 별장 거실의 커다란 유리창이 보였다. 이건 잘못됐다. 시헌은 기욱에게 똑바로 말하는 것이 좋겠다며 이를 악물고 다시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별장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시헌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차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졌다. 시헌은 거실 너머에서부터 불쾌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시헌은 활짝 열린 방문 앞에 섰다.

“하으윽…! 허윽… 으윽… 하윽….”

“…….”

“윽, 흐윽… 왜… 제발… 하악!”

기욱은 서진을 거칠게 탐하고 있었다. 기욱의 커다란 손이 서진의 허리를 잡아당길 때마다 서진의 몸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서진은 눈물로 사정했지만, 기욱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중간 무렵 시헌이 왔다는 것을 안 기욱은 슬쩍 고개를 돌려 시헌을 본 뒤 아무렇지 않게 서진과의 섹스에 집중했다. 마치 시헌에게 보란 듯이 기욱은 서진을 향해 더욱 거칠게 몸을 움직였다.

강서진.

처음부터 내 것이었어.

아아, 그 말이 이런 뜻이던 걸까.

다리에 힘이 풀린 시헌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간이 멈추는 게 아니다.

차라리 다 죽어 버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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