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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4 불길한 징조 (47/83)

Chapter. 44 불길한 징조

술에 취해 자기가 기절했는지도 모르고 자는 서진을 본 기욱은 벽에 걸린 잠바 주머니 안을 뒤졌다. 기욱은 시헌의 이니셜이 적힌 서진의 반지를 꽉 쥐었다.

서진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수 시간 후의 일이었다. 섹스를 마친 후 한숨도 자지 못한 기욱이 막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모텔로 돌아올 무렵이었다. 서진은 아직 동이 트지 않은 바깥 풍경을 보며 눈을 깜박이다 이마를 붙잡았다.

머리가 아팠다. 머리뿐만이 아니라 아래도. 기욱이 있으니 섹스를 했겠거니 싶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좀 심한 것 같았다. 땅에 발을 내디디면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발아래서부터 온몸이 저렸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진은 왜 자신이 여기 기욱과 함께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욱은 태연하게 근처 의자에 옷을 걸치며 서진의 옆에 앉았다.

“일어났어?”

“저 왜 여기 있어요?”

“전화.”

“네?”

“어제 술 취해서 나한테 전화했잖아.”

“제가요?”

기욱은 서진의 잠바에 있을 휴대폰을 손가락질했다. 일어나지 못하는 서진을 대신해 기욱은 휴대폰을 잠바째 건넸다. 서진은 휴대폰을 열어 발신 기록을 확인했다. 수 건의 발신 기록,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나온 서진이 시헌인 줄 알고 전화를 걸었던 상대는 시헌이 아닌 기욱이었던 것이었다.

“기억 안 나?”

기욱의 말에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헌과의 통화를 끊고, 술을 몇 잔 더 마시고 난 뒤 재혁이 적당히 마시라고 말렸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뒤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욱은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저야 어차피 맨날 병원에 사는 신세니 몇 시에 출근하든 상관은 없지만, 서진은 사정이 달랐다.

“강의는?”

“아직 시간 있어요.”

“데려가 줄게.”

“괜찮아요.”

잠바를 침대 밑으로 내려놓은 서진이 침대에서 발을 내디뎠다. 동시에 균형을 잡지 못한 서진이 휘청거렸다. 기욱은 넘어지려는 서진을 재빨리 붙잡아 안았다. 서진은 기욱에게 반쯤 안기다시피 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기욱에게 안긴 서진은 욕실 문 앞에서 기욱의 손을 붙잡은 채 머뭇거렸다.

“저….”

“……왜?”

“혹시 뭐 실수한 거 없죠?”

“글쎄다. 들어가.”

서진과 그 일에 대해 더는 말하고 싶지 않은 기욱은 서진의 몸을 살짝 밀었다. 기욱에게 밀린 서진은 반강제적으로 욕실에 들어와 씻을 수밖에 없었다. 따듯한 물을 맞으며 몸을 씻는 서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일이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헌과 통화할 때 적당히 마실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차 안은 침묵이 감돌았다. 평소 말이 많지 않은 편이었던 기욱인지라 침묵으로 일관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오늘은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기욱은 배터리가 없어 짜증 내며 휴대폰을 만지는 서진을 흘끗 보며 운전석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조만간.”

“……네?”

“여행 한번 가자.”

“둘이요?”

“자주 갔잖아.”

새삼스러운 얘기도 아니라는 식의 말투에 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기욱은 서진이 자신과 여행을 가는 것을 편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기욱과의 여행에서 단 한 번도 서진의 선택권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 * *

“야.”

“어?”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 식당으로 나온 시헌은 수저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서진은 시헌이 왜 이렇게 싫은 표정을 짓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 왜 요즘 집에 안 들어와?”

“집에 잘 들어가거든?”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입술을 삐죽 내민 시헌의 말에 담긴 의미를 눈치챈 서진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 일 이후 벌써 5개월이 지났다. 인훈은 아직도 구치소에 있다고 들었고, 서윤도 없는데 언제까지 기욱네 집에서 신세를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세금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만 해결되면 곧장 나갈 집이었다. 시헌은 그런 서진의 행동이 서운한 모양이었다.

“미안해서 그래.”

“걱정되잖아.”

“거의 해결됐어. 나도 그 집, 금방 나올 거야. 걱정하지 마.”

“하아, 알았어.”

서진의 말에 시헌은 마지못해 수저를 들었다.

* * *

응급 수술을 마친 기욱은 난간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두꺼운 철문이 열리며 수술실 뒷정리를 마친 규건이 다가왔다. 늘 그렇듯, 수술실 환자의 예후에 대한 간단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대충 이야기가 정리되어 갈 무렵 규건이 말했다.

“교수님, 요즘 일 너무 열심히 하시는 거 아녜요?”

일주일 전쯤 기욱은 난데없이 수술 스케줄을 전부 바꾸자는 말을 했다. 다름 아닌 수술을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수술은 최대한 빨리하자는 이야기였다. 담당 의사이자 교수인 기욱의 체력만 된다면 수술 시간을 늘리는 것쯤이야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물론, 죽어 나가는 고년차 레지던트의 목소리는 전부 규건의 몫이었다. 규건은 하루아침에 빡빡해진 스케줄보다 늘 적당히 할 수 있는 일은 적당히 하고 넘어갔던 기욱의 태도가 변한 원인이 궁금했다.

신경외과에 들어오는 응급 수술은 대부분 우민의 몫이었고, 기욱은 교수가 된 이후에도 야간 당직을 서는 것도 귀찮아했다. 규건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에게는 말해 줘야 한다며 손에 들린 커피를 홀짝였다. 규건의 의도를 알아차린 기욱은 난간에 몸을 기대며 머리를 긁적였다.

“휴가 쓸 거야.”

기대했던 말이 아니었던 규건은 살짝 실망한 투로 되물었다.

“이 시기에요?”

“그래서 스케줄 비우고 있잖아.”

“하하, 농담이시죠? 진짜 교수님 휴가 잡으시려고 저희 굴리시는 거예요?”

“왜 농담이라고 생각하는데.”

기욱은 진심이었다. 갑자기 당겨진 일정 때문에 힘들어하는 레지던트나 규건을 몰라서 하는 말은 결코 아니었지만, 기욱에게는 휴가를 포기할 수 없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약간 날이 쌀쌀한 기욱은 가운 주머니에 손을 구겨 넣었다.

“나중에.”

“나중에요?”

“그래. 휴가 갔다 와서. 애들 데리고 회식 한번 하자.”

“저희 올해 회식비 다 쓰지 않았어요?”

“내가 내면 되잖아.”

“대박. 선배님 이거 물리기 없깁니다. 진짜예요?”

규건의 말에 기욱은 알아서 생각하라며 손을 저었다. 오랜 시간 연속 수술로 지쳐 있던 규건의 표정이 회식이라는 말 한마디에 급속도로 밝아졌다. 규건은 안 그래도 지난번 외과 단체 회식과 신경외과 과 회식을 가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벌써 고생하는 애들을 달랠 건수가 잡힌 듯 규건은 절대 무르기 없기를 강조했다.

“근데 집에 무슨 일 생기셨어요? 휴가철도 아닌데? 교수님, 형수님도 해외 나가셨는데 뜬금없이 왜 그러세요?”

회식 얘기로 끝이 난 줄 알았는데 규건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기욱은 아무리 규건이라 해도 서진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줄 마음은 없었다.

“그런 게 있어.”

기욱의 시선 끝에 규건의 손에 들린 커피가 보였다. 수술실을 정리하고, 의국에 들른 규건은 제 텀블러에 커피를 타 왔다. 말을 하다 마는 기욱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커피에 닿는 것을 느낀 규건은 가운 소매로 괜히 얼마 마시지 않은 커피를 품 안에 안으며 가렸다.

“아, 이거 제가 방금 의국에서…….”

“한번 선배는.”

“영원한 선배다.”

“선배는?”

“신이다.”

저년차 시절에 배웠던 구호에 맞춰 습관처럼 나오는 대답에 규건은 인상을 찌푸렸다. 기욱은 아무렇지 않게 규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놔.”

기욱의 협박에 규건은 울며 겨자 먹기로 타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커피를 내밀었다. 기욱은 그 자리에서 규건의 텀블러에 담긴 커피를 반쯤 마셨다. 따듯한 커피를 마시니 좀 살 것 같았다.

커피가 남은 규건의 텀블러를 한 손에 쥐며―남은 커피를 돌려줄 생각 따위는 없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눈치를 보던 규건이 기욱의 가운 주머니에 튀어나와 있는 라이터를 꺼내 담뱃불을 붙여 주었다. 후, 하고 기욱이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야 너, 친척 중에 H대 다니는 애 있다고 했지?”

“재혁이요?”

“이름이 재혁이냐? 몇 학년이라고?”

“이제 본3인가 4일걸요. 선배님 동생이랑 동기라고 말한 적 없었나요?”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는 규건에 기욱은 담담하게 담배를 피웠다. 규건이 몇 번인가 말한 적은 있으나 기욱이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인 일이었다. 기욱은 제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는 지독하리만큼 관심이 없었다. 환자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기욱은 제 담당 환자를 타 과에서 멋대로 건드는 것을 싫어했다. 티는 내지 않으나 기욱은 당한 만큼 철저하게 돌려주는 스타일이었다. 몇 번인가 기욱에게 당한 적이 있던 타 과 의사들과 교수들도 기욱의 담당 환자들은 기욱을 생각해서라도 조심스럽게 대하는 편이었다. 기욱은 가운 안쪽에 있는 휴대폰의 비밀번호를 풀어 규건에게 던졌다.

“번호 찍어.”

기욱이 말하는 의도를 알아차린 규건은 기욱의 휴대폰을 쥔 채 머뭇댔다. 기욱이 먼저 번호를 달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 맞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규건이 봐 온 박기욱이라는 사람은 결코 득이 되지 않는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라 해도 기욱에겐 기욱만의 철저한 룰이 있었다.

“아. 선배님, 또 뭐 하시려구요? 누차 말씀드리지만 걔 남자거든요?”

“죽을래? 그냥 전화만 하는 거야. 번호 내놔.”

“안 돼요. 제 사촌 동생은 소중해요.”

규건은 사촌 동생―재혁의 번호를 달라고 하는 것이 기욱이 잡은 휴가와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짐작했다. 쉽게 주지 않을 것 같은 번호에 기욱은 남은 커피를 전부 마신 뒤 빈 텀블러를 규건에게 넘겼다. 올라오기 전까지만 해도 꽉 차 있던 커피는 정말 한 모금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한 모금쯤 남겨 줄 법도 한데.

“선배의 말은.”

“법보다 먼저다.”

“번호.”

기욱은 규건의 손에 있는 제 휴대폰을 손가락질했다. 거지 같은 세뇌교육. 규건은 레지던트 시절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기욱에게 재혁의 번호를 넘겼다.

* * *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요즘 들어 비가 자주 오고 있었다. 서윤이 출국하고 나서부터인가? 장마철도 아닌데. 앞으로 며칠 동안은 계속해서 전국에 비가 올 예정이라고 했다. 번화가의 대로변에서 운전대를 잡은 기욱은 차와 연결된 블루투스 스피커로 통화하고 있었다. 차에 내장된 스피커 너머로 누나―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 하여튼. 그래서 곤란해. 너 아는 후배 의사 중에 그날 시간 되는 애들 없어?

― 누나, 난 외과잖아. 바빠.

― 야! 우린 뭐 안 바쁘냐? 1년 차라도 좋으니까 한 명만 빼 줘 봐!

의사 한 명만 빌려 달라는 하연의 억지에 기욱은 기가 찼다. 과가 비슷하거나 하면 또 모를까 수술을 중심으로 하는 외과 계열과 하연의 과는 정반대라고 해도 무방했다.

― 1년 차가 얼마나 할 일이 많은데……. 그냥 시헌이 보내.

밤인 데다 비가 내려 위치를 찾기가 힘들었다. 와이퍼가 지나가기 무섭게 유리창에 빗물이 후드득 떨어져 시야를 가렸다. 기욱은 하연이 슬슬 귀찮았다. 적당히 말하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할 텐데, 하연은 자기 좋을 때는 포기를 모르는 여자였다.

― 걔 다음 주에 K대 실습이랬어.

주차장에 차를 대기 무섭게 들려오는 하연의 말에 기욱은 코웃음을 쳤다. 다음 주 월요일. 다른 때라면 그냥 넘어가 줄 법도 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건지 참으로 알맞은 타이밍이었다.

― 구라야.

― 뭐?

― K대 실습 월요일이 아니라 목요일부터라고.

― 근데 왜 월요일 날 실습 있다고 했지?

― 나도 모르지. 누나 사람 찾고 있는 거 다른 의사한테 들었나 보지. 걔 요즘 병원 다니잖아.

기욱의 대답에 짧은 침묵이 일었다. 이내 기욱의 말을 이해한 하연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중요한 건 시헌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태껏 대화를 질질 끈 기욱의 태도였다.

― 야! 왜 그걸 지금 말해!

― 딱히 상관없잖아.

― 하여튼 박시헌이나 너나, 아주 잘한다! 형제가 쌍으로 누나한테 서로 팔아먹고.

― 아, 또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언젠가 기욱은 하연에게 보낼 스케줄을 위조한 적이 있었다. 사실 한 번이 아니라 거의 매번 하지만. 재수가 없게도 그걸 본 시헌이 하연에게 고자질했다. 기욱은 시헌도 사정이 있었겠거니 하고 적당히 넘어갔다. 당시 시헌은 기욱이 봐도 지겨울 정도로 세미나며 가족 행사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 어쨌든, 관계없는 우리 과 애들 건드릴 생각 말고. 시헌이나 보내. 며칠이라고?

― 2박 3일.

― 고시 안 본 애도 상관없대?

― 사고만 안 치면? 딱히 환자 보는 거 아니니까 상관없을걸? 어쨌든 누난 시헌이랑 진지하게 얘기 좀 해야 하니까 이만 끊자.

― 어.

툭, 하연 쪽에서 먼저 전화가 끊겼다. 기욱은 블루투스를 끈 뒤 휴대폰과 조수석에 놓인 우산을 가지고 차 밖으로 나왔다.

그러기에 적당히 기어올라야지.

* * *

기욱은 룸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를 받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미리 와 있던 재혁이 깜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옷에 묻은 빗물을 털고 우산을 한쪽에 밀어 넣는 기욱을 본 재혁은 바로 옆에 알바생이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재혁의 목소리에 여자 알바생이 기욱을 괜히 힐끗 바라봤다. 기욱과 눈이 맞은 그녀가 얼굴을 약간 붉혔다.

“주문하시겠어요?”

평소보다 약간 톤이 올라간 그녀의 목소리에 기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테이블에서 가져온 메뉴판을 받았다. 일부러 서윤과 맞춘 다이아 반지가 잘 드러나게 메뉴판을 집었다. 보석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지만, 한눈에 봐도 커 보이는 다이아 반지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욱은 메뉴판을 받은 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재혁은 아직도 서 있는 상태였다. 기욱은 아무렇지 않게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2인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더 낸다는 말로 뛰어다녀도 좋을 정도의 넓은 룸을 빌린 재혁은 빠르게 달려와 기욱의 코트를 대신 받았다.

과할 정도의 행동에 기욱은 딱 봐도 규건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욱은 담배와 라이터, 휴대폰, 지갑 등을 대충 넓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턱 끝을 살짝 움직였다.

“앉아.”

“예.”

“먹고 싶은 거 시키고.”

“아뇨! 전 괜찮습니다. 교수님이 드시고 싶으신 거로…….”

“안주 시켜. 소주랑.”

“아, 넵.”

달리 할 말이 없었던 재혁은 눈치를 보며 벨을 누른 뒤 적당한 안주와 소주 몇 병을 시켰다. 기욱이 담배를 물자 재혁이 빠르게 달려와 불을 붙였다. 비록 친형제는 아니지만 하는 행동이 누가 봐도 규건의 사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닮은 구석이 있었다.

기욱은 안주보다 먼저 나온 소주를 뜯었다. 기욱을 본 재혁이 소주잔을 집어 들었으나 기욱은 잔에 소주를 따르지 않았다. 왜 안 따르지? 허공에 멈춘 술잔에 재혁은 당황하며 주변을 살폈다. 재혁의 자리 옆으로 엎어진 맥주잔이 있었다. 기욱의 눈치를 본 재혁이 맥주잔을 집어 들자 기욱이 그제야 맥주잔에 소주를 반쯤 따랐다.

“아.”

시작부터 장난 아닌 술을 본 재혁은 저도 모르게 당황한 듯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기욱이 그런 재혁의 표정과 말투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기욱은 재혁에게 한 것처럼 제 앞에 엎어진 맥주잔을 들어 소주를 따랐다. 기욱의 소주는 재혁의 맥주잔에 담긴 것보다 누가 봐도 많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단 한 번 만에 소주는 순식간에 동났다.

“규건이한테 네 얘기 많이 들었다.”

사실 거의 기억이 나진 않지만. 틈만 나면 사촌이 어쩌고 했던 것은 기억이 났다. 이제 와서 따지자면 그 얘기라는 것도 정말 별거 없는 이야기들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욱은 긴장하는 재혁을 살살 달랬다.

“네….”

“시간 날 때 술 한번 마시고 싶어서 부른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못 마시면 안 마셔도 돼.”

“아, 아닙니다. 마실 수 있습니다.”

재혁이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마침 알바생 한 명과 직원이 안주를 가지고 들어왔다. 두 사람은 기욱과 재혁의 잔에 담긴 술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욱은 한 손으로 맥주잔을 들어 재혁과 맥주잔을 부딪쳤다.

재혁은 유리잔 너머로 기욱을 슬쩍 봤다. 기욱은 그 자리에서 소주를 순식간에 전부 비웠다. 먼저 잔을 비우는 기욱에 재혁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잔을 비웠다. 원래 한 잔이 어렵다고 하던가, 술기운이 오르고 생각보다 맞춰 주는 대로 술술 받아넘기는 기욱에 재혁은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상대는 J대 병원을 휘어잡고 있다시피 하고 있다는 대학병원 내 젊은 실세 아니던가. 기욱의 밑에서 일하는 사촌 형도 형이지만, 재혁도 재혁 나름대로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줄을 잡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기욱은 그런 재혁에게 요령껏 술을 마시게 하였다. 재혁은 기욱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기욱이 주는 술을 거의 빼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게 하는 것에는 술자리만 한 것이 없었다. 그런 기욱에게 곧 후배가 될 의사의 분위기에 맞춰 주는 것쯤은 눈을 감고도 할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재혁은 이미 술에 잔뜩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교수님께서 시헌이 형 형님이라는 거 알고 솔직히 좀 많이 놀랐습니다! 이야! 박시헌, 이 형이. 예과 때 그렇게 교수님 수업을 들었으면서 말입니다. 동기들한테 한마디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

“그래! 그겁니다. 사실 그래서 좀 많이 서운합니다.”

정상적인 존댓말이 아닌, 누가 들어도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투였다. 기욱은 재혁의 잔에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따랐고, 재혁은 기욱이 술을 따라 주기 무섭게 멋대로 술을 마셨다. 이어 재혁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기욱에게 술을 따랐다. 기욱은 재혁이 따른 술을 마신 뒤 안주로 나온 과일을 입안에 넣었다.

“그래, J대 오고 싶어 한다면서?”

“저 NS 지망입니다!”

“벌써 정했어?”

“아, 예.”

“빈말이라도 좋다.”

“빈말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새끼,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기욱은 다시 재혁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재혁이 진심으로 신경외과를 지망하기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재혁 같은 예비 의사나 인턴들은 발에 차일 정도로 흔했다. 기욱은 구시대적 아부에 넘어가 주는 척 대화를 지속했다. 술에 잔뜩 취한 재혁은 신이 난 듯 입을 다무는 기욱의 앞에서 떠들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형님이, 아, 교수님. 죄송합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중 말이 헛나온 재혁이 급하게 깜짝 놀라 수습을 했다. 기욱은 고개를 숙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재혁을 달랬다.

“됐어, 아직 의사도 아니잖아.”

“아, 그럼 형님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 편하게 해. 편하게.”

그편이 기욱에게도 훨씬 좋았다. 재혁은 이미 몇 번이나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는 중이었다.

“네. 편하게 하겠습니다. 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맞아. 교수님. 아니, 형이 시헌 형 형님이라는 거 알았을 때는 진짜 놀랐습니다! 이야, 시헌 형. 뭐가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 그렇게 대단한 집안일 줄은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그래도 서진 형 사건 있을 땐 정말 놀랐습니다. 아, 술 따라 드려도 됩니까?”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대략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재혁의 입에서 서진의 이름이 처음 나왔다. 뒤 내용이 더 듣고 싶었던 기욱이지만 혹시 재혁이 눈치챌까―술에 잔뜩 취해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알지만― 재혁이 주는 술을 말없이 받아 마셨다. 털썩, 재혁은 기욱에게 술을 따르고 커다란 소파에 앉았다.

“서진 형, 시헌 형이랑 저희 다 정말 걱정 많이 했습니다. 뭐, 지금은 잘 사귀는 것 같지만요.”

“사귀어? 누가?”

이런. 예고 없이 나온 말에 놀란 기욱은 저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고 말았다. 기욱의 당황스러운 말투에 재혁은 눈을 몇 번 깜박거리더니 허공으로 손을 흔들며 말을 이어 갔다. 다행히 기욱의 태도에 별다른 의심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재혁은 기욱과 서진의 누나인 서윤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서진과 기욱의 관계는 더더욱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서진 형이랑 시헌 형 말입니다. 저희 과에 강서진 형이라고 있습니다. 재수생인데. 하여튼 예전엔 둘이 몰래 사귀었나 그랬는데. 대나무숲 사건 있고 나서부터 공개연애로 돌렸습니다. 그 뒤로 얼마나 난린지. 인형 압니까? 그것도 서진 형이 사 준 겁니다.”

“대나무숲 사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재혁에게 술을 먹이느라 본인도 조금 술을 마신 탓에 사고가 명확하지 않았다. 다행히 기욱이 의아해하고 있는 것을 눈치챈 재혁이 빠르게 대답했다.

“H대 대나무숲 말입니다. 거기에 누가 서진 형이랑 시헌 형 얘기를 올렸지 뭡니까? 근데 시헌 형이 막 로펌 변호사 데려와서 해결했다고 그럽니다.”

“…….”

기욱은 술 대신 물을 홀짝였다. 요약하자면 누군가 H대생 익명 사이트에 서진과 시헌이 사귄 내용을 올렸고, 그 뒤로 공개연애를 했다는 뜻이었다. 학교 내에 소문으로 퍼질 정도로 유명한 일이지만 정작 당사자의 가족인 기욱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이쯤 되면 시헌이 의도적으로 숨겼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으득, 하고 물 잔에 담긴 물과 함께 입안에 들어온 얼음을 씹었다. 기욱은 재혁의 이야기 중 시헌이 데려왔다는 로펌 변호사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정말이지, 로펌 변호사가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말입니다. 근데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것 같은데.”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재혁이 머뭇거렸다. 기욱은 재혁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냐, 알고 있어.”

“하하……. 알고 계셨어요? 괜히 말실수한 줄 알고 놀랐네요.”

재혁은 식은땀을 흘리며 기욱이 따라 준 술을 마셨다.

* * *

“우윽!!”

술집을 나온 재혁은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인근 전봇대에 토를 했다. 재혁과 2차까지 간 뒤 가게를 나오니 새벽 한 시가 좀 넘었다. 전봇대를 붙잡고 토를 하는 재혁을 내려다보며 기욱은 무심하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기욱이 전화를 걸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규건이 전화를 받았다.

― 규건아, 어디냐? 나와라.

기욱은 긴말하지 않았다. 오프로 집에서 쉬고 있던 규건은 기욱의 전화를 받고 10분도 채 되지 않아 사복 차림을 한 채 뛰어나왔다. 일부러 집에서 조금 떨어진, 자주 가지 않는 번화가에 나온 것도, 재혁과의 술 약속을 화요일 저녁으로 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규건은 기욱에게 인사를 하며 엉망으로 술에 취해 있는 재혁을 보고 혀를 찼다. 기욱과 술을 마실 땐 적당히 마시라고 그렇게 주의하라고 경고했건만 다 부질없는 배려였다. 기욱의 주량은 병원 내 의사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혔다. 거기에 재혁을 만나기 전 일부러 숙취해소제까지 마시고 왔던 기욱이 재혁 하나를 상대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규건은 재혁의 등을 토닥이며 욕을 내뱉었다.

“이, 미친 새끼가. 꼴에 의대생이라고 아주 주는 족족 처마셨구만. 하아, 선배 죄송합니다. 재혁이 얘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됐어. 어린 나이에 마시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조심해서 들어가라.”

“예. 감사합니다. 하아, 내가 너 때문에 못 산다 진짜!”

“형님! 조심해서 들어가십쇼!”

“형님은 얼어 죽을 형님. 이게 교수님 하늘 같은 줄 모르고 미쳤나 아주! 선배님, 하하. 들어가세요.”

규건은 재혁의 입을 막다시피 하며 차에 태웠다. 규건의 차가 떠난 것을 확인한 기욱은 제 차로 돌아왔다. 새벽 사이 잠깐 비가 그친 상태였다. 차에 탄 기욱은 한동안 시동을 걸지 않았다. 운전석에 앉아 이마를 기댄 기욱은 잠바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 자동차와 연결했다. 휴대폰 버튼을 누르자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재혁의 목소리가 나왔다.

― 근데요, 형님. 시헌 형이랑 서진 형이랑 사귀는 거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기욱은 탁, 하고 휴대폰을 닫았다. 기욱은 힘줄이 드러날 정도로 강하게 휴대폰을 쥐었다.

재혁의 말을 종합하면 결국 서진도 시헌과 다를 것은 없었다. 휴대폰을 옆으로 던진 기욱은 살짝 젖은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장난은 끝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기욱은 진심으로 다짐했다.

강서진을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 * *

좁은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있던 서진은 좁은 유리창 너머로 들리는 차 소리에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소매를 걷어 시계로 시간을 확인해 보자 새벽 4시가 좀 넘어 있었다. 새벽이지만 간혹 골목을 지나는 차가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차의 소리가 굉장히 익숙한, 아니 익숙해진 소리라는 것이었다. 시헌의 집에서 나온 지 한 달이 넘었다.

그간 기욱과는 일이 바빠 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서진은 괜한 생각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순간 바닥에서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이었다. 서진은 괜히 발신자를 확인하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한번 전화가 끊기고, 다시 전화가 왔다. 여전히 차는 그대로 서진의 집 근처에 있었다. 차의 움직임이 수상하다고 생각한 서진은 설마 하며 전화를 받았다. 예상대로 기욱이었다. 서진은 흐릿한 유리창 너머를 흘끗거렸다. 저건 아무리 봐도 기욱의 차였다.

― 새벽부터 뭐 하는 짓이에요?

― 나와.

― 지금요?

기욱은 대답이 없었다. 서진은 집 앞까지 마중 나온 기욱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공부는 다 했다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 기욱을 이렇게 급하게 만들었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사실 가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휴대폰을 붙잡은 채 머뭇거렸다.

서진이 머뭇거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문 너머로 기욱의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거실로 나온 서진은 입을 꾹 다문 채 현관문을 응시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바깥에서 열리는 문에 그럴 줄 알았다며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댄 채 문을 연 기욱의 손에는 과거 서윤에게서 받은 반지하방의 스페어키가 있었다. 기욱은 전화를 끊은 뒤 서진의 모습을 살폈다. 혼자 공부를 하고 있던 터라 서진의 모습은 도무지 밖에 나갈 만한 차림은 아니었다.

“옷 입고 나와.”

“어디 가는데요?”

“강서진.”

“…….”

“나오라고.”

전화를 들었을 때부터 기욱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깔렸었다. 성인이 된 후라고 해도 서진은 아직도 이런 식의 강압적인 태도의 기욱이 무서웠다. 기욱은 신발을 벗지 않은 채 현관문 앞에 팔짱을 끼고 섰다. 서진이 나가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잡아끌고 나갈 기세였다.

제 꼴을 살핀 서진은 이 차림으로 끌려 나가는 것은 절대 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기압인 기욱이 저를 데리고 이 시간에 갈 곳이라고는 모텔밖에 더 없었다.

“옷 갈아입을 시간은 줘요.”

“대충 입고 나와.”

“알았어요.”

서진은 적당히 옷을 갈아입고 기욱의 차에 탔다. 분명 인근 모텔을 갈 거라고 했던 서진의 예상과 달리 기욱은 집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모텔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다른 모텔로 가려는 건가 싶었지만, 운전을 하는 방향은 번화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서진은 집을 한참이나 벗어난 뒤에야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 가는데요?”

“…….”

“어디 가냐구요.”

기욱의 차가 서울을 나가는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새벽, 한적한 고속도로에 진입한 기욱은 점점 차 속도를 높였다. 서진은 기욱이 향하는 곳이 모텔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정작 운전을 하는 기욱은 어디로 가는지 말을 하지 않고 있으니 답답함과 불안함은 동시에 커질 수밖에 없었다.

무인 단속을 알리는 알림음에 기욱이 차 속도를 천천히 낮췄다. 차의 엔진 소리가 줄어들자 기욱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뗐다.

“시헌이랑.”

“…….”

“너 뭐야.”

기욱은 운전대를 잡은 상태로 고개를 틀었다. 그 행위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기욱은 서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래 고개를 틀 수 없었던 기욱은 다시 앞유리로 시선을 돌렸다. 짧은 순간이라고는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기욱의 말에 운전석에 앉은 서진의 심장 소리가 빨라졌다. 서진은 자신과 시헌의 관계를 도대체, 언제 어디서 기욱이 어떻게 눈치챈 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뭐, 뭐가 뭐예요. 아무것도 아녜요.”

“뭐냐고.”

“몰라요. 집에 보내 줘요. 내려 달라구요!”

도망쳐야 한다. 서진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대로 기욱의 차가 닿는 곳에 도착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고속도로 한복판에 들어선 서진은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서진의 손이 떨렸다.

서진은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운전을 하는 기욱의 눈치를 살핀 서진은 잠바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슬쩍 열었다. 그 희미한 불빛을 눈치챈 기욱이 재빨리 말했다.

“휴대폰 닫아.”

기욱의 차 속도가 점점 올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게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휴게소에는 차들이 거의 없었다. 새벽, 고속도로 휴게소는 도망칠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기욱의 눈치를 보던 서진은 결국 휴대폰을 닫았다. 기욱은 경고하듯 차의 속도를 높였다.

“열기만 해 봐.”

그건, 한 번만 휴대폰을 더 열었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 * *

차에서 내렸을 무렵에는 이미 아침이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도착한 곳은 서진에게도 굉장히 낯이 익은 곳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서진은 중후반부터 기욱의 도착지를 예상했다. 날이 밝고 난 이후 기욱의 운전 경로가 과거 시헌과 별장에 놀러 왔을 때와 무척 유사했다. 서진의 그런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기욱은 차 시동이 꺼지기 무섭게 건너편으로 내렸다.

“내려.”

뭐가 그리 급한 건지 기욱은 안전벨트도 풀지 않은 서진의 조수석 쪽 문 앞에 섰다. 기욱은 서진이 안전벨트를 풀기 무섭게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기욱의 손에 잡힌 팔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그런 기욱의 행동에 서진은 반항할 틈도 없이 별장 계단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서진이 도망갈까 서진의 팔을 있는 힘껏 잡은 기욱은 다른 손으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도어락이 열리자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고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서진은 기욱에게 던져지다시피 하며 현관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진을 슬쩍 내려다본 기욱은 안전고리까지 잠군 뒤 서진 쪽으로 몸을 숙였다. 기욱의 행동에 서진은 바닥에서 일어날 틈조차 없었다.

“왜, 왜요…….”

“휴대폰.”

기욱은 서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이라고 짧게 말하는 걸 봐서 휴대폰을 넘기라는 뜻이었다. 서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휴대폰을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모르는 척 잡아뗐다.

“휴, 휴대폰이 왜요.”

“내놔.”

서진의 예상이 틀리지 않는 듯 기욱은 말을 아끼지 않았다. 기욱도 서진이 알면서 잡아뗐다는 것을 모를 리는 없었다. 서진은 주머니 속 휴대폰을 꽉 쥐며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요. 미쳤어요? 제가 왜…… 잠깐…!”

서진의 의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마침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휴대폰을 쥐고 있던 터라 서진의 휴대폰이 팔과 함께 툭 하고 떨어졌다. 기욱이 휴대폰을 집으려 했으나 기욱보다 조금 가까이 있던 서진이 조금 더 빨랐다.

서진은 재빨리 휴대폰을 가져와 품에 안은 뒤 일어섰다. 벽에 기댄 서진은 온몸이 떨려 왔다. 기욱을 상대로, 미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기욱에 뒷걸음질 치는 서진은 점점 더 별장의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느새 서진은 넓은 거실 한복판에 휴대폰을 쥔 채로 기욱과 마주했다.

“강서진.”

“…….”

“좋은 말 할 때 내놔.”

“제, 제 거예요! 남의 휴대폰은 왜…!!”

짝, 하는 뺨 때리는 소리가 거실과 넓은 별장 안에 울려 퍼졌다. 난데없이 맞은 뺨에 깜짝 놀란 서진이 비틀거리며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한발 늦게 휴대폰이 떨어진 것을 눈치챈 서진이 휴대폰을 주우려 했으나 이번에는 기욱이 조금 더 빨랐다.

기욱은 허리를 숙여 서진의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그러나 정작 서진은 기욱에게 휴대폰을 빼앗겼다는 사실보다 기욱에게 맞았다는 충격이 더 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늘 강압적으로 굴고, 멋대로 굴었던 기욱이지만 정작 기욱에게 맞은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상치 못한 폭력에 서진의 다리가 후들거리며 식은땀이 흘렀다.

기욱은 떨고 있는 서진을 보며 서진의 앞에서 서진에게 빼앗은 휴대폰을 멋대로 열었다. 서진의 휴대폰 잠금 화면을 보는 기욱은 서진을 때린 것에 대한 죄책감은 없는 듯싶었다. 마치 휴대폰을 주지 않은 네가 자초한 일이라는 듯.

0514.

서진의 잠금 화면에 기욱은 당연하다는 듯 빠른 속도로 서윤의 생일번호를 입력했다. 서진의 네 자리 비밀번호는 어렸을 때부터 서윤의 생일로 한결같았기 때문이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잘못 친 줄 알고 다시 입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오류가 세 번이 넘어갈 무렵에서야 서윤의 생일이 휴대폰 비밀번호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비밀번호 뭐야.”

휴대폰을 바꾸면서 비밀번호도 바꾼 것이 틀림이 없었다. 오류가 나는 것을 지켜본 서진은 본의든 타의든 비밀번호를 바꾼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기욱에게 맞은 뺨 위로 손을 올린 서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도 기욱에게 맞은 이 상황이, 지방의 별장으로 끌려온 현실이 적응되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물며 말을 하지 않는 서진에 기욱은 서진의 다른 뺨 위로 손을 올렸다. 기욱의 손이 다가오자 서진은 뒤쪽으로 뒷걸음질 쳤으나 등 뒤는 커다란 벽이었다. 서진이 갈 곳이 없는 것을 본 기욱은 아직 때리지 않은 다른 뺨 위로 손을 올렸다. 서진이 눈을 질끈 감자 기욱은 서진의 부드러운 뺨 근처를 살살 쓸었다.

“서진아, 착하지?”

“…….”

순식간에 바뀐 나긋나긋한 말투에 서진은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사람이 어떻게 하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는 걸까? 때린 것에 대한 자각은 있는 걸까? 기욱과의 만남을 예상하지 못했던 서진의 휴대폰 안에는 시헌과의 문자들이 전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니, 애초부터 기욱은 휴대폰을 확인한 적이 없었기에 안심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설마 그게 이런 식으로 추궁을 당할 줄은 서진의 평생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서진은 휴대폰 안만큼은 절대 보여 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서진이 끝까지 입을 다물자 기욱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져 갔다.

“강서진!!”

큰 소리로 부르는 제 이름에 서진의 양어깨가 떨렸다. 서진은 몸을 움츠린 채 기욱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번호에 대해서는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서진이 이렇게 발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당당하다면 비밀번호를 불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당당하지 못한 이유가 시헌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기욱은 비밀번호를 모르는 서진의 휴대폰을 서진의 앞으로 들어 내밀었다.

“언제부터야.”

“뭐, 뭐가요.”

“말 안 해?”

“몰라요. 모른다구요!!”

“안 불어?”

기욱이 휴대폰을 서진의 몸 거의 가까이에 붙인 채 서진을 압박했다. 기욱은 일부러 교묘하게 시헌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만을 피해 하고 있었다. 서진은 알면서도 모른다는 식으로 꼬투리를 잡으며 끝까지 잡아뗐다.

계속되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없는 서진에 기욱은 서진의 휴대폰을 대충 잠바 뒷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이걸로 끝일 리가 없었다. 계속되는 서진의 침묵에 기욱은 여전히 기분이 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욱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씨발, 강서진. 끝까지 말 안 듣지.”

“이런 거, 이런 거 강간이에요!!”

서진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강간. 그 단어만으로도 서진은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아직 학교 축제 때 당했던 마음의 상처들이 낫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욱에게 이런 짓까지 당하면 정말 버티지 못할지도 몰랐다.

서진은 기욱이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기를 바랐으나, 화가 날 대로 난 기욱에겐 서진의 기분을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기욱은 서진의 팬티를 아래로 벗겨 내렸다.

“마음대로 생각해.”

“……제발….”

“비밀번호, 부를 마음이 들면 말이지.”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은 서진은 이를 악물었다.

* * *

일방적인 섹스, 기욱과 만나 왔을 때부터 늘 느꼈지만, 이번 섹스는 그것과는 정말 달랐다. 아니, 어쩌면 20살 무렵부터 맺어 온 그 어떤 섹스와도 달랐다. 서진은 기욱이 배려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멋대로 비집고 들어오는 손가락에 이어 기욱은 곧장 페니스를 반강제적으로 밀어 넣었다.

“아아악! 그만, 그만… 흐으윽!! 으으윽… 아파. 제발. 아파…!! 이런 거… 이런 거 진짜 강간이라고!! 당신, 하으윽… 미친 거야!!”

“내가 말했지.”

“하윽, 으윽… 하으으으윽… 읏….”

“날 미치게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기욱은 반항하지 못하는 서진의 묶인 팔을 들어 올리며 페니스를 안쪽까지 넣었다. 고통에 점철된 섹스에 서진은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넣기만 했는데도 이 정도면 기욱이 움직였을 때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안쪽에서 기욱의 페니스가 점점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마다 서진의 안은 기욱의 페니스를 받아들이기 위해 억지로 구멍을 넓힐 수밖에 없었다.

“흐윽, 어. 죽으라고! 너 같은 거… 확 죽어 버려…!! 죽으라고!!”

살기 위한 발악일까? 서진은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말들을 울분을 토해 내며 쏟아 냈다. 박기욱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만약 이런 일이 아니라면 평생 볼 인연도 없는 기욱이 왜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씨발 새끼, 넌… 넌 쓰레기야! 움직이지 마… 하으으윽!! 제발. 제발 움직이지 마. 씨발. 내가… 하으으윽!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거 빼 주…… 어흑!”

서진의 안에 페니스를 넣은 채 기욱이 서진의 몸을 바로 돌렸다. 눈을 뜨자 위쪽으로 기욱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기욱은 곧장 서진의 뺨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짝,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처음 맞았을 때보다 강하게 때린 것은 아니지만, 폭력이라는 굴래 앞에서 서진은 한없이 약한 사람이었다.

폭력은, 마치 과거 엄마와 있었을 때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에게 학대를 당하던 그 시절 서진은 한없이 무력했다. 서진을 제압한 기욱은 소매를 반쯤 접었던 파란색 셔츠의 단추를 뚝뚝 풀었다. 셔츠를 벗는가 싶던 기욱은 셔츠를 일직선으로 접은 뒤 서진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 입.”

“시, 싫어. 씨발, 하지마. 싫다고! 아아악!! 제발… 으읍!! 으으읍!!”

“닥쳐.”

기욱은 셔츠를 묶은 뒤 서진의 입에 물렸다. 급하게 파고들어 오는 페니스에 고통을 참지 못한 서진은 본능적으로 입 근처에 있는 셔츠를 입에 물 수밖에 없었다. 퍽. 퍽. 살이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으로 났다. 기욱이 한 번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서진의 몸이 앞쪽으로 크게 흔들렸다.

이 비정상적인 섹스에 기욱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와 있는 한편 짜증이 났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기욱은 어린애들을 상대로 흥분하는 변태는 아니다. 아닐 텐데, 서진만큼은 달랐다. 서진이든 서윤이든. 모든 것에 완벽한 기욱을 상대로 하룻밤을 원하는 사람은 발에 차이고 널렸다.

여자 친구가 바람을 피웠다면 과감히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기욱은 배신하는 녀석을 붙잡지 않았다. 헤어지거나 바람피운 상대를 붙잡으며 질척거리는 짓은 자신이 없는 패배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뭔가?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다. 기욱은 순식간에 자신을 그런 패배자들과 같은 처지로 만들어 버린 서진이 참으로 화가 났다. 이런 일을 겪고도 서진을 놓을 수 없는 스스로가 미친 것만 같았다.

이젠 서진이 아니면 안 됐다.

“하으으윽… 으읍… 으윽… 흑… 으윽…!!”

서진 외에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기욱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서진을 원했다. 목소리, 행동, 눈빛, 손짓이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자신의 옆에 두어야만 만족이 됐다. 그런 줄 알았던 서진이 다른 사람도 아닌 제 동생―시헌과 뒤통수를 쳤다는 사실이 기욱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분명한 건 기욱은 서진을 놓아줄 생각 따위는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을 그냥 넘어가겠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기욱의 거친 숨소리와 비명에 가까운 서진의 신음이 방 안에 울렸다.

“흐으, 윽. 으읏… 아흐으으… 으읏… 윽….”

“강서진.”

“하윽! 허윽… 윽. 으으응. 으흐흐흣… 으윽… 윽… 만… 그만… 흐윽… 제발 그만… 하으윽!”

시헌이 서진의 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든 기욱 또한 서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기욱은 서진이 가기 직전에 일부러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괜찮아지는가 싶으면 또다시 빠르게 허리를 움직여 서진을 압박했다. 사정도 하지 못하며, 섹스하며 제대로 가지도 못하는 행위는 섹스라고 하기보다는 고문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왜 그랬어. 강서진.”

“흐으… 하윽… 싫어. 흐윽… 으으읍…!”

기욱은 흘러내린 셔츠를 강제로 서진의 입안에 물렸다. 절정에 달하는 서진의 목소리도 좋지만, 지금 서진의 목소리는 기욱이 행위를 집중하는 데 있어 짜증 나는 요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서진의 입을 반쯤 막은 기욱은 서진의 치골을 잡아당기며 안을 거칠게 탐했다.

계속되는 뒤치기에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욱에게 맞은 뺨이 아려 왔다. 울컥 하고 기욱의 정액이 서진의 안을 메웠다. 기욱은 서진이 정액을 채 토해 낼 틈도 없이 페니스를 밀어 넣으며 허리를 흔들었다. 멈출 줄 모르는 섹스에 서진이 다리 사이로 고개를 틀자 기욱이 서진의 목을 아래로 눌렀다. 목 뒤로 잔뜩 날이 선 기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으읏… 으으으읍!! 하으….”

“고개 들어도 좋다 그랬어?”

질척거리는 소리가 나며 기욱이 또다시 서진의 안에 사정했다. 억지로 들어온 페니스와 질척거리는 사정감은 서진을 사뭇 예민하게 만들었다. 박기욱이라는 사람은 서진이 얼마나 발버둥을 치든 제 흔적을 남겼다. 서진의 목을 뒤쪽으로 살짝 들어 올린 기욱은 이빨을 세웠다.

“아악…!! 으읏… 하아으윽!!”

셔츠 안쪽으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목 아래로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기욱은 한 번도 서진에게 흔적을 남긴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살이 뜯기는 듯한 고통에 서진은 눈물을 흘렸다. 시헌과 사귀는 것이 평생 갈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걸릴 줄 알았음에도 현실은 서진의 생각 이상으로 더욱 지옥이었다. 박기욱이라는 남자는 서진이 눈을 돌리면 돌릴수록 더욱더 서진을 옭아맸다. 그 집착에 서진의 기분이나 의사는 포함되지 않았다. 강서진이라는 그 존재 자체를 원했다.

서진은 도대체 자신의 무엇이 기욱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기욱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그 기억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박기욱.

그 이름 세 글자가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자신이여야만 했던 걸까. 서윤은 왜 많은 남자 중 기욱에게 사랑을 원했던 것일까. 너는 대체 뭐고, 너를 미치게 만든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 건가.

그칠 줄 모르는 기욱과의 섹스에 서진은 반쯤 실신한 듯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미동하지 않는 서진에 기욱은 서진의 상태를 살폈다. 아무리 심해도 기욱은 서진이 실신하거나 기절하면 적당히 그만뒀다. 서진은 일부러 기절한 척 숨을 죽였다. 흐릿한 시야와 정신이 없는 와중에 기욱의 목소리가 귓가로 들렸다.

“기절 안 한 거 알아.”

“으읍… 읏… 싫어. 그만 제발. 그만… 아으으윽! 그만해요. 그만 제발!”

팔이 뒤로 묶인 서진은 벽 쪽으로 최대한 몸을 붙였다. 벌려진 다리 사이로 안을 가득 메웠던 정액이 하얗게 묻어났다. 박기욱의 다리 사이에 있는 물건이 서진의 눈에는 흉기 그 이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서진은 무릎을 최대한 오므리며 벌벌 떨었다.

폭력, 섹스, 강압적인 태도. 낯선 환경. 그것들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했다. 서진의 앞으로 다가온 기욱이 손을 뻗자 서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목 아래로 흘러내린 셔츠를 풀었다.

풀어주려 했던 건가 했던 것도 잠시뿐 기욱의 손가락이 서진의 안을 밀고 들어왔다. 기욱의 페니스만큼은 아니지만, 갑자기 들어온 기욱의 손가락에 서진은 몸을 움츠렸다.

“흐으… 윽… 할게요.”

“…….”

“흐으으윽… 마, 말할게요. 다. 다 말할게요!”

서진의 입술이 떨렸다.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진은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기욱은 서진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침대 옆 선반에 있는 서진의 휴대폰을 가져왔다.

“…….”

말하겠다고는 했지만, 막상 제 휴대폰을 보니 마음이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기욱은 휴대폰을 손에 쥔 채로 서진의 뺨을 살살 쓸어내렸다. 기욱에게 맞은 서진의 뺨은 아직도 화끈거렸다. 툭툭. 기욱이 손을 약하게 건들 때마다 서진이 깜짝깜짝 놀랐다.

“흐윽. 시, 시헌이….”

“내 앞에서 박시헌 이름 꺼내지 마.”

“그, …흐읏… 그게 아니라… 시헌이… 흐윽… 시헌이 생일이요….”

간신히 말을 이은 서진은 고개를 숙이며 흐느끼듯 울었다. 결국, 말이다. 아무리 법이 가까워도 사람이란 건 폭력 앞에서는 누구나 무기력한 존재였다. 기욱은 서진의 말을 잠시 생각했다. 시헌의 생일이라고?

설마 싶은 기욱은 시헌의 생일인 1214를 입력했다. 그러자 풀리는 잠금에 기욱은 하, 하고 어이가 없는 탄성을 내질렀다. 커플링에 생일로 된 비밀번호까지. 가면 갈수록 참으로 가관이었다. 기욱은 시헌과 한 문자함을 들어갔다. 지우지 못한 며칠간의 문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왜 그렇게 시무룩해?」 오후 7:56

「너 때문에 그런다 너 때문에!」 오후 7:57

「우리 자기. 나 보고 싶어? 오빠가 빨리 갈게.」 오후 7:57

「빨리 와. 진짜 현기증 날 것 같아.」 오후 8:00

……

갈수록 가관이었다. 오빠라는 단어가 애칭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욱은 휴대폰을 부술 것처럼 쥐었다. 손안에 있던 휴대폰에서 마침 진동이 울렸다. 기욱의 휴대폰은 아니었다. 서진은 제 휴대폰에서 문자가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기욱은 슬쩍 온 문자를 확인했다. 시헌에게서였다.

「나 집 근천데 너 어디야?」 오전 7:45

벌써 왔나? 기욱은 예상보다 시헌이 빨리 돌아왔음을 느꼈다. 서진을 생각하며 밤새 밟았을 시헌이 기욱은 참으로 우스워졌다. 이 문자에 답장할 생각은 없었다.

답장할 생각은 없었는데. 기욱을 닮은 걸까 성격이 급한 시헌이 곧장 전화를 걸었다. 그즈음 서진도 기욱이 미묘한 시선으로 휴대폰을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서진을 슬쩍 내려다본 기욱은 전화 화면을 서진에게 보여 줬다.

“시헌… 으읍….”

셔츠 대신 커다란 손이 서진의 입을 막았다. 기욱은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은 뒤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 …진아, 서진아? 너 왜 말을 안 해?

“으읍…!!”

― 야 강서진? 너 어디야?

시헌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다급해졌다. 그날의 악몽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리라. 침대 위로 통화가 연결된 휴대폰을 놓은 기욱은 서진의 팔을 묶은 벨트를 잡아당긴 뒤 강제로 다리를 벌렸다.

“흐윽… 싫어… 하지 마! 으으읍!”

통화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서진이 급하게 근처에 있는 이불을 입에 물었다. 미쳤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서진이 시헌과 사귀고 있다고 해도, 시헌은 기욱의 동생이었다.

동생과의 통화에서 제가 섹스를 하는 소리를 들려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하긴, 박기욱이 언제 상식 찾아 가며 행동한 적이 있었냐마는. 기욱의 페니스가 거침없이 서진의 안으로 들어왔다.

“아윽!!”

이불을 입에 물고 있었다고는 하나 순간의 고통 섞인 단말마는 어쩔 수 없었다. 휴대폰 너머로 시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 씨발, 강서진!! 너 어디야! 진짜 뭐냐고!! 어떤 새끼야!!

기욱은 시헌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서진을 안은 기욱은 중간 무렵 시끄럽게 떠드는 시헌이 귀찮은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기욱의 페니스가 밖으로 빠져나가자 서진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서진은 금방이라도 들어올 것 같은 페니스에 안을 조이며 기욱을 바라봤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쓰레기 자식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쓰레기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간신히 헤드에 기대앉은 서진은 기욱의 몸에 머리를 쿵쿵 부딪쳤다. 팔이 뒤틀린 듯 아팠다. 팔뿐만이 아니라 몸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차라리 시헌과 헤어지라고 한다면. 시헌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런 역할은 이제 익숙했다. 남을 위해 자신이 상처를 받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보호라는 명분 아래에서.

그 거짓말로 인해 상처를 받게 돼도, 상대를 지킬 수 있다면 그깟 상처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기욱은 서진에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서진의 기욱에 대한 원망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서진은 지금쯤 혼란스러워할 시헌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 왔다.

“왜… 흐윽… 왜!! 왜 그랬어!! 왜…….”

서진의 고개가 침대 앞쪽으로 푹 하고 쓰러졌다.

이 순간이, 시간이 흐르는 일분일초가 너무나 싫었다.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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