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3 계속되는 의심
기욱은 계산대로 가 계산을 한 뒤 자리로 돌아왔다. 앞사람의 계산이 꼬였는지 계산을 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고 말았다. 2차가 끝난 자리로 돌아왔으나 자리는 텅텅 비어 있었다. 뒤늦게 화장실을 다녀온 서윤이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서진이는?”
“아, 시헌이랑 호텔 근처에 먼저 가서 담배 피우고 있는댔어. 전화해 볼까?”
“뭘. 금방 갈 건데.”
기욱은 전화를 걸려는 서윤을 말린 뒤 서윤과 함께 술집을 나왔다. 비틀거리는 서윤은 익숙하게 기욱의 팔에 팔짱을 끼며 걷고 있었다. 서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 기욱은 묘한 귀찮음에도 서윤이 넘어지지 않게 걸음을 맞춰 걸었다. 한참 만에 넓은 호텔 로비에 도착한 기욱은 서윤을 로비 한쪽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이쯤 되면 돌아와 있을 줄 알았는데. 로비에는 호텔 손님이라 생각되는 몇몇 외국인들과 관계자들밖에 없었다. 서윤은 기욱이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오빠도 갔다 올래? 기다릴게.”
기욱은 뜻밖의 배려를 거절하지 않았다. 지쳐 앉아 있는 서윤에게로 몸을 숙여 뺨에 입술을 맞춘 기욱은 서윤의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우리 자기, 얌전히 기다릴 수 있지?”
“당연하지! 헤헤.”
“금방 피우고 올게.”
“응. 응. 빨리 갔다 와!”
서윤이 다리와 손을 거의 동시에 흔들었다. 서윤의 배웅을 받은 기욱은 곧장 로비와 바깥을 두리번거렸다. 로비의 두꺼운 유리문 너머로 야외 테라스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기욱은 두꺼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복도 너머로 테라스와 연결이 되어 있었다. 문이 약간 열려 있어 찬바람이 들어왔다.
“인형, 선물 받았다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기욱의 손이 시헌의 목소리에 잠시 멈췄다. 기욱은 문틈이 열린 채로 안쪽 복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서진과 시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문 근처에 있는 듯 목소리는 뚜렷하게 들렸다.
“별거 아냐. 저번에 J대 병원에서 알바했을 때. 거기 교수님한테 선물 받은 거야.”
인형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기욱은 역시 우민의 짓이 틀림없다고 확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민이 무슨 의도로 서진에게 인형을 줬는지는 나중 문제였다. 기욱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주머니 안에 있는 담배를 뒤적거리며 시헌을 부르려 했다.
“박시…….”
“흐음, 질투 나.”
기욱은 재빨리 문 건너편 쪽으로 몸을 틀었다. 가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서진과 시헌은 생각보다 문 쪽에서 떨어져 있었다. 잠깐이나마 자리를 옮긴 탓에 두 사람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었다. 시헌과 서진은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았다. 기욱은 제가 들은 말에 대해 곱씹었다. 잘못 들은 건가? 차라리 잘못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 서진이 시헌의 말을 받아쳤다.
“그냥 인형이잖아. 별걸 다 질투하고 그래.”
“그게 싫은 거야.”
시헌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긴 뒤 입술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키스에도 불구하고 서진은 익숙한 듯 거부감 하나 없이 입술을 맞추는 시헌을 받아들였다. 짧은 시간의 키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서진이 먼저 시헌을 밀어냈다. 술에 취해서 그런 걸까? 야외 테라스의 조명 불빛 때문인지 서진은 굉장히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기욱 앞에선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표정이었다.
“왜?”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혹시나 하는 서진의 말에 기욱은 급하게 로비 안쪽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서진은 살짝 열린 문틈을 지그시 응시했다.
“왜 그래?”
“아니, 누가 있는 줄 알고.”
서진의 말에 시헌은 시간을 확인했다. 확실히 너무 오래 바깥에 있긴 했다. 이쯤 되면 기욱에게 전화가 올 줄 알았는데 말이다. 둘은 여전히 좋을 때라고 멋대로 생각한 시헌은 서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오 분만. 아니, 딱 삼 분만 있다가 가자.”
시헌의 애교를 이기지 못한 서진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로비로 나온 기욱은 주머니 속 담배 케이스를 구기며 야외 테라스 쪽을 흘끗댔다. 기욱은 이 상황이 좀처럼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의 대화를 엿듣고, 도망치기까지 한 자신의 행동 또한. 그리고 그 너머 펼쳐진 대화와 두 사람의 모습도 현실감이 없었다.
기욱은 술에 취하지도 않았음에도 비틀거리며 서윤이 앉아 있는 소파 옆에 털썩 앉았다. 반쯤 졸고 있던 서윤은 난데없이 푹 꺼지는 소파에 옆을 바라봤다.
“어? 오빠, 빨리 왔네?”
“…….”
“오빠, 기욱 오빠 괜찮아?”
“어. 응. 그러니까……. 괜찮아.”
“담배는 피우고 왔어?”
“아니, 그냥 물 좀.”
기욱은 저를 걱정하는 서윤의 말을 반건성으로 대답했다. 지금은 잠깐 이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기욱은 무릎에 팔꿈치를 올리며 얼굴을 묻었다. 조용한 로비 건너편으로 서진과 시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신발을 본 기욱은 재빨리 서윤의 몸을 잡아당겨 입술을 맞췄다.
기욱과 서윤의 발치 앞으로 다가왔던 서진과 시헌은 예상치 못한 기욱의 행동을 보고 깜짝 놀란 듯 머뭇거렸다. 발버둥 치는 서윤을 조심스럽게 리드한 기욱은 서윤의 목 너머 서진을 지그시 응시했다. 미친 짓이라는 걸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 * *
“응. 읏….”
강의가 끝나고 가볍게 저녁을 한 두 사람은 차 안에 들어오기 무섭게 서로 입술을 맞췄다. 인훈 사건 이후 서진을 배려했던 시헌은 한동안 서진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예전만큼은 아닐지언정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키스하던 시헌의 손이 서진의 옷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시헌의 손은 차갑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다. 비유하자면 적당히 식은 핫팩 같았다. 서진은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시헌의 몸을 밀어냈다. 시헌은 자신의 행동이 조금 일렀던 것은 아닌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봤다.
“왜 또 차에서 이래.”
“그럼 어디 갈까?”
번화가 갓길에 대어 놓은 차 안이라 차창 밖에는 온통 술집 아니면 모텔뿐이 없었다. 서진과 시헌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모텔은 지긋지긋해.”
사실 모텔이 아니라 호텔도 마찬가지였다. 텔 자 소리 나는 곳이 서진도 시헌도 질리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장소를 바꾼다 한들 결국 그 모텔, 그 호텔이라는 것을 슬슬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섹스 하나 하자고 펜션을 잡고 번거롭게 지방까지 내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시간이 안 되고, 그건 그거대로 참 우스운 광경이었다. 뭔가 하고는 싶은데 마땅히 그렇다 할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마치 대학로에 놀러 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청소년처럼 머리를 굴렸다. 마땅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던 시헌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집에나 갈래?”
“안 하고?”
“말고. 집에 가서 하자고.”
뜻밖의 제안에 서진이 입을 뻥긋거렸다. 서윤의 해외 연수 준비 때문에 서진의 오피스텔을 찾는 문제는 뒤로 미뤄진 상황이었다. 서진은 가급적 서윤이 해외에 나간 사이 기욱의 집을 나올 계획을 하고 있었다. 서윤이 없는 마당에 굳이 기욱의 집에서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서윤이 해외에 가기 전까지 얼마나 더 기욱의 집에 있어야 하는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시헌과 사귀는 시간 내내 집에서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일까? 서진의 반지하방이든 시헌의 집이든 그건 두 사람 사이의 말하지 않은 불문율이었다. 사실 텔 자 붙은 곳이 아니면 다 좋았던 서진은 시헌의 제안이 완전히 끌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기욱 형님 계시잖아.”
“형 오늘 안 들어와. 근무표 훔쳐봤어.”
“자랑이다.”
“갈 거야? 말 거야?”
시헌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모텔은 죽어도 싫었던 서진은 될 대로 되라며 시헌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갈 거야.”
서진과 시헌은 아파트 문을 열기 무섭게 신발을 벗고 키스를 했다. 커튼이 걷힌 거실의 유리창에서 비치는 야경이 현관 불에 기대 키스를 하는 두 사람을 비췄다. 이제 와서 느끼는 거지만 기욱네 집의 야경도 제법 좋은 편에 속했다.
로열층이 왜 괜히 로열층이라 불리는지 그 이유를 새삼 실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불편한, 해서는 안 되는 곳에서 하는 행위는 두 사람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키스를 한 채 시헌의 방으로 들어가 서진은 곧장 시헌의 위에 올라타 제 윗옷을 벗었다.
“자기 너무 급한 거 아냐?”
“후, 네가 할 소린 아니지.”
서진의 손이 이미 부풀어 있는 시헌의 다리 사이를 꾹꾹 눌렀다. 옷 위로 쓸리는 느낌에 시헌이 하지 말라고 큭큭대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서 한 적은 없네.”
“그러게.”
“보통 이게 정상 아냐?”
“잘 모르겠다. 우린 정상이 아닌가 보지 뭐.”
서진의 손이 시헌의 바지 벨트를 풀어냈다.
* * *
주말 이른 아침, 당직을 마친 기욱은 조금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7시. 아침 햇살을 맞으며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른 기욱은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옷장에 걸었다. 목이 말라 습관처럼 거실로 나와 정수기에 물을 따라 물을 마셨다.
탁, 하고 유리잔을 내려놓자 식탁 위로 뭔가 빛이 났다. 기욱은 식탁 위에 놓인 금반지를 집어 들었다. 금반지는 작은 체인 형식으로 된 목걸이 줄에 끼워져 있었다. 기욱의 손가락에는 인훈 사건을 처리하느라 어쩔 수 없이 혼인신고부터 해서 미안하다는 의미에서 일주일 전에 서윤과 함께 새로 바꾼 다이아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평범한 금반지 디자인. 학생 나이대에서 맞출 법한 반지이긴 하지만 기욱은 이런 반지를 낄 나이는 훨씬 지나 있었다. 반지 안쪽에는 B.S.H라는 이니셜이 적혀 있었다. 혹시 서진의 이름이 적혀 있다면…… 하는 생각을 했던 기욱은 시헌의 이니셜이 분명한 영문을 보며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의 키스에 대해선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지만 분명한 건 밤을 새우다시피 해 응급 수술을 하고 온 기욱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기욱은 시헌의 이니셜이 적힌 반지를 가지고 시헌의 방문을 열었다.
“안 잤네?”
뜻밖에 시헌은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있었다. 기욱의 목소리를 눈치챈 시헌은 의자에 앉아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왜?”
기욱은 시헌 쪽으로 반지를 던졌다. 시헌은 포물선을 그리며 정확히 날아온 반지를 받았다.
“형 이거…….”
“잘 챙겨.”
시헌은 제 손에 끼워진 반지와 기욱이 던진 목걸이 줄에 끼워진 서진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시헌은 혹시 기욱이 볼까 주먹을 쥐어 손을 아래로 내렸다. 다행히 의자 때문에 반지가 끼워진 시헌의 손은 기욱 쪽에서 보이지 않았다.
“아, 미안. 일찍 들어왔네?”
시헌은 책상에 있는 디지털시계를 흘끗댔다. 이제 막 오전 7시를 좀 넘기고 있었다. 당직이라 해도 최소 9시에는 퇴근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시헌의 물음에 기욱은 수술모에 눌린 머리를 긁적였다.
“말도 마라. *EM 진짜 개새끼들.”
*EM[Emergency Medicine] : 응급의학과
기욱은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은 채 한숨을 푹푹 쉬었다. 평소 병원에 있었던 일에 대해 말을 아끼는 기욱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것은 그만한 일이 있었다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자라.”
반쯤 정신을 놓은 기욱은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감을 잡지 못한 채 자라는 말을 남긴 뒤 문을 닫고 시헌의 방을 빠져나갔다. 기욱이 완전히 간 것을 확인한 시헌은 그제야 서진의 반지와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 * *
“…….”
조금 더 공부하려 했으나 반지 때문에 쉽게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하연의 집안과 점심 약속이 있었던 시헌은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막 잠에서 깬 서진이 부스스한 머리로 거실로 나왔다.
“어. 안녕.”
“……응. 잘 잤어?”
“하아.”
태연하게 인사를 하는 서진에 시헌은 서진이 잠이 덜 깬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시헌은 서진의 앞으로 다가가 목걸이 반지를 서진의 손에 쥐여 줬다. 잠이 조금 깬 서진은 제 손에 있는 목걸이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잘 좀 챙겨.”
“어디 있었어?”
“거실에.”
거실이라는 말에 서진의 잠이 확 달아났다. 어제, 시헌과 섹스를 하면서 중간에 물을 마시러 거실에 나왔다. 그때 답답한 마음에 목걸이를 풀어 놓고 그대로 잊어버렸던 것이었다.
“네가 찾은 거야?”
“어.”
경계하듯 묻는 서진의 태도가 약간 이상했는지 시헌은 저도 모르게 말을 맞췄다. 서진은 기욱이 보지 않았다는 생각에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서진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는 시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진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 그래.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야?”
“아니, 차, 찾아서 다행이라고.”
시헌은 서진이 뭔가를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기욱 때문인가? 하긴 기욱은 서윤과 사귀니 충분히 불편해할 수 있었다. 어제, 정상적인 연인이 아니라는 서진의 말을 시헌은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형수의 동생과 사귀다니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기욱과 서윤이 사귀기 전부터 시헌은 서진을 좋아했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논리였다.
“한 번만 더 잃어버리면.”
“잃어버리면?”
“확 다이아 반지로 바꿔 버릴 거야.”
시헌은 얼마 전 기욱과 서윤이 바꿨던 반지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기욱이 이런 일에 크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 반지는 틀렸다. 아무리 기욱이라도 서윤에게 미안했던 모양인지 시헌은 두 사람의 반지를 보자마자 기욱이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생이 아니랄까 봐, 그 반지가 서윤의 마음은 물론 옆에서 보는 시헌의 마음 또한 사로잡았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것은 약간의 질투였다. 아무리 시헌이 동기들 사이에선 앞서간다는 얘길 듣고 있어도 결국 기욱 앞에 서면 기욱의 뒤를 간신히 쫓고 있을 뿐이었다. 서진은 앞뒤가 맞지 않은 시헌의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 그래?”
“그래도 또 잃어버리면 그땐 가격만큼 몸으로 갚는 거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 안 해?”
“하, 퍽이나. 아침부터 미쳤어?”
“잃어버리지 말라고 하는 소리야.”
서진은 시헌에게 받은 반지가 있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욱하는 기분에 맞춘 반지지만 이젠 이 반지만큼 의지가 되는 것이 없었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지를 목에 걸어 옷 안에 넣었다.
* * *
“나가자.”
“…네?”
형부와 약속이 있다는 시헌을 배웅하고 서진은 막 샤워를 하고 거실로 나왔다. 방 안쪽에서 잠에서 깨 밖으로 나온 기욱이 있었다. 시간은 10시를 좀 넘기고 있었다. 시헌의 말에 의하면 7시쯤에 집에 돌아왔다고 했다. 3시간밖에 안 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기욱은 여전히 피곤한지 벽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 잘 것이지 굳이 거실로 나와 뭘 하는 건가 싶었다.
“어딜 나가요?”
“서윤이.”
거실 벽에서 소파로 옮긴 기욱은 소파에 몸을 기대 눈을 비볐다. 다리를 꼬며 건너편에 있는 TV를 틀었다.
“곧 출국하잖아.”
“그게 왜요?”
서윤은 인수인계 문제로 오전에 시헌과 함께 병원에 출근한 상태였다. 돌아오려면 저녁은 되어야 했다. 본의 아니게 집 안에 둘만 있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기욱은 소리를 끈 채 아무 의미 없이 채널을 마구 돌리며 서진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었다. 잠옷 차림이긴 했지만, 그 차림이 기욱의 마음에 든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아, 옷 좀 사 줄게.”
“누나 연수랑 제 옷이랑 뭔 상관인데요?”
울컥하는 서진에 기욱은 벌떡 일어나 서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집 안에 둘만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서진이 뒤로 약간 물러섰다. 최근 들어 기욱과 한 적이 없다는 것도 불안감을 조성하는 데 한몫했다. 기욱은 서진의 어깨에 걸친 덜 마른 수건을 빼앗았다.
“상관있지.”
기욱은 씻고 오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근처에서 적당히 점심을 먹고, 두 사람은 백화점을 한 바퀴 돌았다. 애당초 원했던 쇼핑이 아니었던 터라 서진은 기욱이 고르는 대로 알아서 하라며 내버려 뒀다.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백화점을 다 돌 무렵이 될 즈음엔 짐은 들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고 말았다. 서진은 양팔에 가득한 쇼핑백과 태연하게 지갑만을 들고 후배 의사들과 통화하는 기욱을 바라봤다. 서진은 제 옷을 사러 온 게 아니라 기욱의 쇼핑 수행비서가 된 기분이 들었다.
정작 산 건 서진의 옷이 맞는데 말이다. 전화를 끊은 기욱은 뒤처지는 서진을 보며 서진의 손에 있던 쇼핑백을 넘겨받았다. 짐의 무게가 확 주는 것이 느껴졌다. 서진은 입술을 내밀며 여유롭게 쇼핑백 더미를 드는 기욱을 노려봤다.
“진작 도와줬으면 얼마나 좋아요.”
“바빴잖아.”
“다 산 거죠? 집에 가요.”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해하지 못하는 기욱의 말투와 서진의 침묵이 동시에 일었다. 기욱은 위층의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다가갔다. 끝인 줄 알았는데 이건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서진은 에스컬레이터에 타기 무섭게 짐을 계단 한쪽에 내려놓았다.
“더 못 들어요. 하다못해 차에 한 번 두고 가면 안 돼요?”
“너한테 짐 들라고 한 적 없어.”
“그럼 여기 당신이랑 저 말고 누가 더 있다는 건데요?”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린 기욱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서진은 기욱이 뭘 하려는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여성 한 명과 서진 또래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듯한 남성 두 명이 다가왔다. 기욱은 별거 아니라는 듯 그녀에게 차 키와 짐을 넘겼다. 눈치를 보던 서진은 기욱의 옆으로 짐을 내려놓았다.
“이제 더 돌 수 있잖아.”
“뭐, 그렇긴 한데요. 이런 서비스가 있는 건 몰랐네요.”
“저번 달에 박하연 이사했잖아. 가구 여기서 바꿨는데 내 카드로 긁었어. 뭐, 긁은 만치 돈은 받았으니까 상관없는데.”
“그냥 본인 걸로 하면 되지 않아요?”
“곧 결혼할 거니까 백화점 VIP 카드 하나 가지고 있으면 편하다나.”
알아서 하라고 카드를 넘겨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에 쓴 금액이 단번에 VIP를 훨씬 뛰어넘는 금액을 썼다는 것이 사소한 문제라면 문제였다. 서진은 대형 백화점 VIP 카드보다 기욱의 입에서 나온 결혼이라는 단어가 더 신경이 쓰였다.
결혼 전 혼인신고, 기욱의 집안 특성상 결혼식을 하지 않고 넘어갈 리는 절대 없었다. 결혼식이 언제냐의 문제였지만 정작 당사자인 기욱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서진은 이미 서윤의 출국 당일 날 입을 옷을 빼고도 훨씬 많은 옷을 산 기욱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마지막 짐을 넘기고 VIP 전용 층까지 전부 돈 서진은 더 가려야 갈 곳도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제 진짜 집에 가는 건가 싶었지만 차는 집으로 향하는 방향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골목 근처 주차장에 차를 댄 기욱에 서진은 차창 너머로 건물의 간판을 올려 봤다.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동네의 미용실이었다. 서진이 내리지 않고 있자 먼저 내린 기욱이 서진의 안전벨트를 푼 뒤 팔을 잡아당겼다.
“아, 왜 또…….”
“따라와.”
서진은 될 대로 되라며 이마를 짚었다. 그새 예약까지 한 모양인지 기욱의 이름을 대자 직원들이 알아서 서진을 데리고 갔다. 서진은 기욱에 의해 강제로 머리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기욱은 머리를 하기 위해 앉아 있는 서진의 뒤에서 팔짱을 끼며 꿋꿋하게 서 있었다.
물론, 일하는 모양인지 대부분 휴대폰을 보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기욱은 다 된 서진의 머리를 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이 잠시 계산을 하러 간 사이 호기심이 강한 여직원 한 명이 서진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어머, 무슨 날 있어요?”
“누나가 해외 연수 가요. 저쪽은 그러니까……. 누나 남편요.”
별로 말하고 싶진 않았는데 달리 기욱을 소개할 말이 없었던 서진이 마지못해 말했다. 여직원들과 앉아 있던 여성들의 시선이 계산하기 위해 카드를 꺼내는 기욱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건너편에 있던 젊은 여자 역시 기욱이 결혼했다는 서진의 말을 엿듣고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나가 좋은 사람이랑 결혼했네요.”
그녀의 말에 서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박기욱이라는 인물은 확실히 뛰어난 사람이었다. 키 크고, 잘생긴 데다 능력까지 있으며 여자나 주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한없이 다정했다. 기욱과 기욱의 집안이 대체로 한 외모 하는 탓인지 덕분에 서진은 어지간한 연예인급 외모에도 눈 하나 끔벅하지 않았다. 신은 불공평하다는 것은 기욱을 보고 하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좋은 사람이죠.”
오늘 하루 기욱이 서진에게 쓴 돈만 천 단위를 넘는 걸 생각하면 말이다. 서진은 기욱만큼이나 대외 포장을 잘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며 곱씹었다. 어색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서진은 기욱과 함께 차에 탔다. 습관처럼 휴대폰을 열자 시헌에게 문자가 왔다. 타이밍하고는.
「어디야?」 오후 5:04
「집 가는 중」 오후 5:05
「밖이야?」 오후 5:05
「잠깐 나왔어.」 오후 5:06
기욱과 왔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생각하던 찰나 시헌에게서 전화가 왔다. 급작스런 시헌의 전화에 놀란 서진은 급하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벨트를 매며 주자장에서 차를 뺀 기욱은 당황하는 서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진은 빠르게 시헌에게 답장을 보냈다.
「이따 전화할게.」 오후 5:06
주차된 차를 빼느라 정신이 없는 기욱은 서진이 저 때문에 눈치를 보느라 전화를 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었다.
“전화 받아도 돼.”
기욱의 배려에 서진은 괜히 고개를 저었다.
“급한 전화 아녜요.”
서진은 괜한 의심을 피하려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시헌에게 몇 번인가 더 문자가 왔지만 일부러 휴대폰을 열지 않았다. 서진은 기욱과 함께 짐을 대충 거실로 옮겼다.
거실에 마구잡이로 놓인 신발 탓에 시헌이 집 안에 있는지 없는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마지막 짐을 옮긴 기욱은 슬슬 가 봐야겠다며 방으로 돌아가 잠바를 갈아입었다.
“병원 가요?”
“하아. 어.”
집에 와서 세 시간밖에 안 자고 낮 내내 돌아다닌 채로 출근하러 가는 기욱이 서진은 새삼 대단했다. 서진은 모처럼의 휴식 시간을 전부 저에게 쓴 기욱에게 약간 미안한 감정도 있었다. 백화점을 돌아다니는 것도 일이 아니라고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진은 기욱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조심해서 가요.”
“그래.”
서진의 인사 한마디에 기욱은 그간의 스트레스가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이깟 인사가 뭐라고. 사람의 마음이란 가끔 참으로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더러 있었다. 기욱이 가고 나자 시헌은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서진의 뒤로 다가왔다.
“우왁!”
“아아악!! 씨발!!”
“큭큭, 하하하! 놀랐어?”
“야! 박시헌! 집에 왔으면 왔다고 말해야 할 거 아냐!!”
서진은 난데없이 뒤에서 나타난 시헌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헌은 서진과 기욱보다 30분 정도 일찍 와 잠깐 잠이 들어 있었던 상태였다.
나갈까 말까 고민도 했지만, 기욱이 금방 출근할 것 같아 일부러 늦게 나온 것이었다. 시헌은 거실에 있는 엄청난 양의 쇼핑백과 서진을 바라봤다. 밖이라고 해서 어디를 갔나 했더니 기욱과 백화점에 간 모양이었다. 서진은 노골적으로 저를 보는 시헌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그렇게 봐?”
“너……. 뭔가 멋있어졌어.”
시헌의 말에 서진은 머리끝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미용실에서 기욱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 뒀기에 제 상태를 잘 모르고 있었다. 거울을 봤을 때 나쁘지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달라졌는지까지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머리를 해 준 기욱도 서진의 머리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나 곧 있으면 출국하잖아. 그래서 나갔다 왔어. 이상해?”
“아니. 멋져.”
서진의 분에 맞지 않을 정도로 과한 쇼핑백에 시헌은 기욱이 사 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당장 그게 불편하거나 하진 않았다. 기욱이 제 사람을 과할 정도로 잘 챙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헌은 서진의 허리를 안으며 입술을 맞췄다. 정작 서진에게 잘생겨졌다고 한 시헌은 조금 흐트러지긴 했어도 한껏 꾸미고 나온 상태라 훤칠하긴 마찬가지였다. 시헌은 입술을 떼며 서진에게 말했다.
“반할 것 같아.”
“넌 몇 번을 반하는 거야?”
“열 번이라도 좋아.”
시헌은 서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요즘 들어 때때로 느낀다. 시간을 멈출 수 없다면 서진과 사귀었을 당시의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이다.
* * *
― 그거 교수님이 꼭 가지러 가야 하는 건 아니지 않아요?
― 중요한 거잖아.
기욱은 지하주차장에 차를 댄 뒤 밖으로 나왔다. 꼭대기 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본 기욱은 휴대폰을 바로잡았다.
― 동생이랑 통화는 됐어요?
― 아니. 전화 안 받더라.
기욱은 시헌에게 여러 건 보낸 문자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혹시 몰라 하연에게 통화했지만, 시헌은 진작 집에 갔다는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얘기를 들을 수 없었다. 시헌에게 더 통화해 볼까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시헌이 집에 있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이상 시헌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규건은 다급해하는 기욱을 달랬다.
― 천천히 오세요. 제가 알아서 잘 케어할 테니까 별일 없을 겁니다.
― 그래, 고맙다. 나 이제 집 들어가니까 전화 끊자.
기욱은 통화를 끊은 뒤 휴대폰을 잠바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도어락을 누르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대자 문이 똑바로 닫히지 않은 것을 눈치챘다. 뭐지? 기욱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서진에게 사 줬던 쇼핑백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기욱은 그제야 서진에게 전화할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정신이 없다 보니.
“아읏… 자… 잠깐만 좀…….”
거실 안쪽으로 묘한 신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기욱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발장에 정신없이 놓인 신발들 틈 사이로 시헌의 정장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소리가 나는 곳은 시헌의 방 쪽이었다.
“으응, 읏….”
“흐, 좋아?”
“그러니까 씹! 하악! 천천히… 하아, 하라고…….”
안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약간 열린 문틈 사이에서는 야릇한 두 사람의 소리만 들려왔다. 하, 기욱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방으로 돌아가 필요한 USB를 챙겨 온 기욱은 시헌의 벽 쪽에 몸을 기대 휴대폰을 만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주변이 조용해질 무렵 기욱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떴다.
* * *
차로 돌아온 기욱은 한동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차 안에서 USB를 만지작거리며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강서진.
박시헌이랑 사겨.
미친 소린 줄 알았다. 어떻게든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어 안달이 난 미친 소리로 생각했다. 시헌과 서진의 키스 장면을 목격했을 때는 혹시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기욱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기욱은 한숨을 쉬며 규건의 전화를 받았다.
― 교수님 USB 챙기셨어요?
― 어.
― 목소리가 왜 그러세요?
― 하, 그냥 좀. 금방 갈게.
기욱은 입술을 깨물며 운전대를 잡았다.
* * *
― 뭐? 못 온다고?
서윤의 출국 준비를 도와주며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던 서진은 시헌에게서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기욱과 함께 캐리어를 가지고 나오는 서윤을 보며 서진은 거실로 나와 전화를 계속 받았다. 휴대폰 너머로 시헌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 하아, 사람이 없다고. 오후까지만 좀 도와 달래.
― 야, 그래도 그렇지. 의사도 아닌데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냐?
― 친척이잖아.
― 그건 그렇긴 한데…….
― 어쨌든 못 가서 미안하다.
― 뭘, 그런 걸 다 미안해하냐.
서진은 신경 쓰지 말라며 시헌을 달랬다. 기욱과는 이미 통화가 끝난 건가? 기욱은 서진이 시헌과 통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기욱이야 그렇다 쳐도 시헌이 서윤의 일에 이렇게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 그럼 언제 끝나는데?
― 나도 잘 모르겠어. 담당 의사 출근해 봐야 알 것 같아.
― 너 인턴이랑 다를 게 뭐냐? 하아, 일단 알았어.
기욱과 함께 서윤의 짐을 내리는 것을 도와야 했던 서진은 급한 대로 전화를 끊었다.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서윤은 서진과 시헌의 통화에 관해 물었다.
“시헌이한테 무슨 일 있어?”
“아, 그런 건 아니고. 시헌이가 일 때문에 못 온대. 누나한테 못 봬서 죄송하다고 전해 달래.”
“시헌이도 바쁜가 보다. 서운하긴 하지만 일 때문이니 어쩔 수 없지.”
“나중에 통화하겠대.”
“응. 그렇게 해.”
시헌을 뺀 세 사람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원래대로라면 시헌의 차를 타고 공항까지 갈 계획이었으나 시헌이 없는 지금 서진은 어쩔 수 없이 기욱의 차에 탔다.
* * *
공항에 도착하니 시간은 순식간이었다. 점심을 먹고 서진은 슬슬 들어가 봐야 하는 서윤을 배웅했다. 기욱의 눈치를 보던 서진은 앞으로 당분간 보지 못할 서윤을 생각하며 서윤의 품에 와락 안겼다. 어린애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역시 서진은 서윤의 앞에서 평생 애로 있고 싶었다.
“누나, 나 진짜…… 보고 싶을 거야.”
“얘도 참. 벌써 울면 어떻게 해.”
“연락 자주 하고. 몸조심해.”
“그럼, 당연하지.”
서윤이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가 있었지만, 서진은 서윤이 가지 않았으면 싶었다. 서진은 캐리어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는 서윤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서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본 기욱은 한참에서야 서진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언제 카페에 다녀온 건지. 서진은 무의식중에 기욱에게 받은 음료수를 홀짝거렸다. 뜨거운 음료수라는 것은 만졌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건 커피가 아니었다. 서진은 습관처럼 뚜껑을 열었다. 밀크티였다. 운 탓인지 따듯한 음료수가 당겼던 서진은 기욱이 준 밀크티를 공항을 나오는 내내 홀짝였다. 조수석에 탄 서진은 밀크티를 마시며 시헌에게 문자를 보냈다.
「몇 시에 올지 모르는 거야?」 오후 2:22
문자를 한 개 더 보내 볼까 고민했지만, 서진은 시헌이 일 때문에 바쁘다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돌아오는 차 안이 휑했다. 그제야 서진은 기욱이 향하고 있는 곳이 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서진은 조금 남은 밀크티를 내려놓으며 말없이 운전을 하고 있는 기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집 가는 방향이 아닌데요.”
“상관없잖아.”
“그렇긴 하죠.”
서윤이 출국했기 때문인가? 묘하게 날카로워진 기욱의 반응에 서진은 불안함이 느껴져 적당히 응수했다. 고속도로에 들어선 기욱은 비가 후두두 떨어지는 차창 너머를 보고 있는 서진을 흘끗댔다. 서진의 늘어진 셔츠 목 안쪽으로 도금된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씩 내리던 빗물이 점점 두꺼워지기 시작하며 창문을 두드렸다. 빗소리가, 하늘이 점점 까맣게 물들어 갔다.
* * *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간 기욱은 방에 들어오기 무섭게 셔츠를 벗었다. 마침 우산이 없었기에 로비까지 오는 사이 옷이 젖었기 때문이었다.
“씻고 올게.”
“그러세요.”
서진은 로비에서 받은 수건으로 소파에 앉아 옷에 묻은 물을 닦고 있었다. 다행히 휴대폰은 젖지 않았다. 옷을 반쯤 벗은 기욱은 젖은 지갑을 닦는 서진을 흘끗댔다.
“같이 씻을까?”
“싫어요.”
기욱의 제안에 서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고개를 돌렸다. 예전엔 이런 농담이라도 하면 반응이라도 보였는데 말이다. 기욱은 약간 듣는 척도 하지 않은 서진이 서운했다. 아무렴 상관없나. 기욱은 찝찝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곧장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후두두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서진은 슬쩍 소파에서 일어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풀었다. 그런 뒤 지갑 안 동전 지갑에 목걸이를 넣었다. 반지 목걸이를 숨긴 서진은 커튼을 살짝 걷었다. 여전히 비가 거침없이 내리고 있었다. 서윤의 비행기가 뜨자마자 내린 비는 마치 서윤이 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리는 것 같았다.
* * *
“읏… 하응, 응… 으읍….”
기욱은 거칠게 숨을 내쉬는 서진의 입을 막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서진이 숨이 막힌다며 기욱의 등을 두드렸지만, 기욱은 서진의 신호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기욱은 서진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서야 키스를 멈췄다. 동시에 사정을 한 듯 안쪽으로 뜨거운 느낌이 가득했다.
기욱은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물기와 함께 뒤로 쓸어 넘겼다.
“좀만, 좀만 천천히…… 아으윽!!”
기욱은 서진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린 채 페니스 끝을 밀어 넣었다. 서윤이 출국하기 무섭게 안으려 드는 기욱에 서진은 그동안 저를 안지 않은 것은 서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 틀림없다며 확신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만큼 완벽하게 연기를 하는 기욱은 그만큼 치밀하며 참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서윤이 출국을 하고 난 이후였다. 서진은 연이은 기욱의 사정에 죽을 것 같았다. 오랜만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기욱의 섹스는 평소보다 더 길고 거칠었다.
“강서진, 나 봐.”
“으읏… 으… 으으응… 하윽!”
잠시 나갔나 싶었던 기욱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을 다시 비집고 들어오며 기욱이 서진을 무릎 위로 올렸다. 기욱의 페니스가 박힌 채 서진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인지 몸을 뒤틀었다. 여기저기 꽉 막혀 미칠 것만 같았다. 기욱은 손을 뻗어 서진의 쇄골 근처를 만지작거렸다.
서진이 욕실에서 나오기 무섭게 안는 탓에 의식하지 못했지만. 어느새인가 서진의 목에 있던 목걸이가 사라지고 없었다.
강서진.
박시헌이랑…….
그날 이후, 그 장면을 목격한 이후 기욱은 인훈의 그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개 같은 새끼. 당시 상황을 몰랐던 자신을 우습게 여겼을 인훈만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치밀었다. 차라리 응급실에서 정신을 놓을 정도로 때려 줬어야 했다는 등 끝 맛만 좋지 않았다. 기욱은 서진의 몸을 침대 쪽으로 눕혔다. 이불에 얼굴을 반쯤 기댄 서진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제… 됐… 하으읏… 잖아요.”
“강서진.”
“…으읏, 왜, 왜요…….”
“좋았어?”
서진의 몸을 바로 눕힌 기욱이 낮게 웃으며 물었다. 그 낮은 웃음이 지나치게 소름 끼쳤기에 서진은 도무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기욱의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던 서진은 그저 이불 끝을 잡아 몸을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그냥 다.”
“…….”
“좋았냐고 묻잖아.”
“그러니까 대체 뭐가…… 으읍… 아으읏!!”
서진의 다리를 잡아당겨 아래로 이끈 기욱은 한 손으로 서진의 입을 막으며 페니스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뭔가 이상했다. 서윤이 출국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과는 달리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시헌과 있으면서, 서윤과 함께 있는 기욱을 보며 조금은 괜찮아진 줄 알았다. 이제는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서진에게 기욱은 여전히 중학교 시절에 느꼈던 두려움 그 자체였다. 호텔에 들어온 기욱은 실신하기 직전의 서진을 간신히 놓아줬다.
* * *
“으윽….”
서진은 이마를 짚으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옆에서 훅, 하고 담배 냄새가 났다. 기욱과 섹스가 끝나기 무섭게 서진은 반실신 상태로 곧장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의식을 잃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기욱이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걸 볼 때 오래 기절한 것 같지는 않았다. 서진이 움직이는 것을 눈치챈 기욱은 담배를 끄며 일어나려는 서진의 몸을 눌렀다.
“누워 있어.”
“독서실 갈 거예요.”
“쉬어.”
“당신이 뭔데……!!”
“누나 때문에 신경 많이 썼잖아.”
기욱도 서진이 진짜 독서실에 가고 싶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 있을 서윤을 걸고넘어지는 기욱에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잡아당겨 얼굴까지 덮었다. 짜증이 나면 이불을 덮어쓰고 입을 꾹 다무는 것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좀 이따 깨워 줘요. 꼭이에요.”
이불 안으로 서진의 당부에 가까운 말소리가 들렸다. 서진의 말에 기욱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 필터를 씹으며 대답했다.
“그래.”
기욱의 거친 섹스와 그간의 긴장이 풀렸던 탓인지 서진은 금방 잠이 들었다. 기욱은 옆에서 색색거리며 자는 서진의 이불을 살짝 내려 얼굴을 확인했다. 서진이 완전히 잠이 든 것을 확인한 기욱은 조심스럽게 침대 아래로 내려와 벽에 걸린 서진의 잠바 주머니 안을 이곳저곳 뒤졌다.
“…….”
라이터와 담배, 휴대폰 외에는 그렇다 할 만한 것이 없었다. 휴대폰에는 지난번에 본 인형이 그대로 달려 있었다. 차 안에서 서진은 분명 목걸이를 목에 하고 있었다. 기욱이 잘못 봤을 리는 없었다. 그 이후 서진과 떨어진 적이 없었으니 서진이 목걸이를 숨길 틈이라고 해 봤자 기욱이 샤워를 하고 있을 때뿐이었다.
어디에다 숨겼는지 모르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잘 숨겼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목걸이 찾기를 포기한 기욱이 침대로 돌아왔다. 침대 옆 선반에 서진의 지갑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뒤척거리는 서진이 확실하게 잠든 것을 다시 확인한 기욱은 서진의 지갑 안을 뒤졌다. 이런 곳에 목걸이를 숨겼을 리 없겠지 싶을 무렵 동전 지갑 쪽의 느낌이 뭔가 달랐다. 기욱은 동전 지갑 안을 열었다. 묵직하게 담겨 있는 동전들 사이에서 목걸이 줄에 걸린 반지가 나왔다. 지갑을 제자리에 올려놓은 기욱은 목걸이 줄에 걸린 반지를 이리저리 살폈다.
B.S.H. 반지 안쪽에는 시헌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하하, 기욱은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거였나.”
시헌의 이니셜만 보고 반지가 시헌의 것으로 생각했던 기욱의 생각이 짧은 것이었다. 오해할 만도 하지. 보통 서로의 이니셜을 새겨 반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없지는 않지만 흔한 편은 아니니까 말이다. 상대가 양쪽 다 남자라면 더더욱 그랬다. 기욱은 시헌의 이니셜이 새겨진 목걸이를 제 잠바 주머니 안에 구겨 넣었다.
* * *
10시가 넘을 무렵 근처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기욱과 서진은 집으로 돌아왔다. 시헌은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서진은 서윤이 쓰던 방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렸다. 기욱은 그런 서진을 아무 말 없이 보내 줬다. 모처럼 휴일이라 엉망이 된 방을 치우던 중 서진이 갑자기 방 밖으로 나왔다.
“…….”
“왜?”
당황하는 서진에 기욱은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서류 더미들을 방 바깥쪽에 꺼내 놓은 뒤 물었다. 서진은 기욱의 눈치를 보더니 입술을 뗐다.
“혹시… 아까 호텔에서…….”
“호텔에서?”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서진은 그럴 리가 없다며 도망치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닫힌 문 너머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서진의 움직임 소리가 들렸다. 서류들을 밖으로 빼놓은 기욱은 남은 서류들을 가지러 가기 위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기욱은 서류 대신 책상에 대충 올려놓은 잠바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잠바 주머니에서는 서진이 찾고 있는 목걸이가 있었다.
더는 인훈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 * *
― 부산이라고?
― 응.
― 언제 오는데?
동기들과 술자리에서 갑작스레 전화를 받은 서진은 당황스러웠다. 아침부터 연락이 안 되는가 싶더니 저녁쯤에 전화가 와서 부산에 있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세미나니 뭐니 하는 것들은 대충 정리가 된 것 같던데 요 근래 들어 다시 바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헌도 비슷한 생각이 든 모양인지 한숨을 쉬었다.
― 한동안 조용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 너네 집도 집이다. 진짜.
― 애들이랑 있어?
― 어. 재혁이랑 다 있어. 술 한잔하고 들어가려고.
― 적당히 마셔.
― 알았어. 아, 시헌아, 있잖아…….
서진은 끊을 것 같은 분위기에 시헌을 붙잡았다. 서진은 아직 반지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 시헌에게 말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 응?
― 아, 아니다. 아무것도. 올라오면 연락해.
― 알았어. 끊어.
서진은 전화를 끊은 뒤 휴대폰을 꽉 쥐었다. 서윤이 가고 난 이후 하루하루가 이랬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전혀 괜찮지 않았다. 빨리 기욱의 집에서 나오든지 해야지. 기욱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고 하나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사는 기분이었다.
사실 서진은 이미 시헌과 통화를 했을 때부터 술을 좀 마신 상태였다. 평소보다 술이 좀 잘 들어 취하지 않았을 뿐 그것이 술을 적게 마셨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재혁은 혼자 달리는 서진을 걱정했다.
“형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녜요? 시헌 형도 없는데.”
“야!! 박시헌이! 걔가 뭔 상관이야!”
술에 취한 서진은 근처 동기에게 술잔을 부딪칠 것을 강요하며 술을 마셨다.
“하긴, 뭐 그렇긴 하지만요…….”
서진을 말릴 수 없었던 재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뺨을 긁적였다. 재혁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이어 나온 서진은 담배를 피우며 시헌에게 전화를 거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작 시헌은 일이 바쁜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 씨. 왜 전화 안 받아.”
“형, 많이 마셨어요. 시헌 형도 바쁜 것 같은데 내버려 둬요.”
“알았어! 한 번만 더 해 보고!”
재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진은 휴대폰을 들었다. 마침 서진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술에 취한 서진은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군지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 야!!
― 야?
― 너 씨! 왜 내 전화 안 받아! 어?
― 뭐라고?
― 뭐가 뭐라고? 뭐라고는 무슨. 너 인마! 누가! 흐윽. 누가 부산 같은 데 내려가래.
서윤도 없는 데다 시헌까지 보이지 않은 서진은 휴대폰을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멋대로 떠들던 서진이 툭, 하고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옆에서 담배를 피우던 동기들이 깜짝 놀라 쓰러지려는 서진을 붙잡았다. 다른 동기들이 서진을 달래는 사이 재혁은 서진의 휴대폰을 집어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시헌 형?
― 강서진은?
당연히 시헌일 거라 생각했던 재혁은 뜻밖에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당황했다.
― 누, 누구세요?
― 서진이 아는 형.
― 아, 죄송합니다. 하하, 갑자기 서진이 형이 그래서 놀라셨죠? 하하, 다른 건 아니고 서진이 형이 술을 좀 많이 마셔서……. 죄송합니다. 저희 금방 들어갈 거예요.
재혁은 동기들이 서진이를 진정시키는 사이 휴대폰으로 서진 대신에 사과했다. 술이라는 말에 기욱이 휴대폰 너머로 쯧, 하고 혀를 찼다. 모처럼 일이 일찍 끝나 집에 갔더니 서진이 없어 전화했건만 이 사달이었다.
― 어딘데?
― 안 나오셔도 되는데……. 택시 태워서 보낼 거니 너무 걱정 마세요.
― 강서진, 너네 지금 싹 다 어디냐고.
강압적인 기욱의 말투에 재혁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 그러는 한편 서진이 아는 형이라는 말에 쉽게 대답하지도 못한 재혁은 어쩔 수 없이 술집 주소를 불렀다.
― 삼십 분 내로 가.
재혁은 멋대로 끊긴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박기욱.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인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진을 달래던 동기들이 어떻게 됐냐며 물어왔다.
“뭐래?”
“그냥. 금방 온대요.”
“시헌이가?”
“아뇨. 잘못 걸었던 모양인데 서진이 아는 형님이래요. 일단 서진 형 데리고 들어가죠. 뭐.”
아직 술을 더 마시고 싶었던 동기들은 그렇게 하자며 서진을 달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 * *
기욱은 재혁이 말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남자―기욱을 본 재혁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을 살짝 들었다. 손짓을 눈치챈 재혁이 기욱에게 다가왔다.
“서진이는?”
“아, 서진이 형 아는 형님이시라고……. 서진 형, 그만 자요.”
재혁은 제 어깨에 기대 잠이 들어 있는 서진을 깨웠다. 잠이 덜 깬 서진의 몸이 재혁의 손에 의해 흔들렸다. 기욱은 그 정도만 하라며 재혁의 손을 붙잡은 뒤 서진을 제 몸 쪽으로 잡아당겼다.
“강서진, 일어나.”
“헤ㅤㅎㅔㅎ 실은뎅.”
“일어나라고.”
“아악! 싫어. 더 마실 거야.”
“하아.”
기욱은 반강제적으로 싫다는 서진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던 서진은 결국 기욱의 품 안에 안겨 옴짝달싹도 못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기욱은 재혁에게 영수증을 내밀었다. 기욱의 포스에 눌린 재혁은 기욱이 내민 것이 뭔지도 모른 채 고개를 숙이며 받았다.
“계산했다.”
“네? 아, 감사합니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억지로 가게를 나갔다. 옆에 있던 동기 한 명이 90도에 가깝게 인사를 하는 재혁의 머리를 툭 하고 쳤다.
“아, 왜요!”
“오버하는 것 같아서 때려 봤다. 야, 근데 저래도 되는 거냐?”
“뭐가요?”
“강서진이랑 박시헌이랑 사귀잖아.”
동기 한 명은 아무리 봐도 서진을 대하는 기욱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보통 아는 형이라 해도 이렇게 막 찾아와서 술값 계산까지 해 주고 가지는 않았다. 자리에 앉은 재혁이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저었다.
“아는 형이라잖아요. 통화하고 있었고.”
“맞아. 상관없지 않냐?”
“그, 그렇겠지? 근데 저 사람 우리 예과 때 교수님 닮지 않았냐? 그…… 뭐였지…….”
“미친. 말을 똑바로 해.”
“아, 진짜 너무 빨리 가서 기억이 안 나는데 낯이 익다고 씨발!”
“그렇게 말해도, 수업 들어온 교수가 한둘이어야지.”
“그건 그렇다. 근데 계산 다 하고 갔다면서?”
동기들이 재혁의 손에 들린 영수증을 바라봤다. 꽤 많이 마셨을 텐데 그걸 다 계산하고 간 걸 보면 서진의 아는 형이라는 사람도 결코 보통은 아니었다. 아무렴 지금 앉아 있는 사람들은 돈 없는 예비 의사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 처지에서 보면 계산을 해 주고 간 기욱에 땡잡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 그럼 술 더 시켜도 되겠네?”
“저기요! 여기 소주 세 병, 아니 다섯 병이랑 안주 좀 추가하게 메뉴판 좀 주세요!”
“하여튼 뭐 하는 데는 존나 빨라.”
급하게 알바생을 부르는 재혁에 동기들이 인정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기욱은 비틀거리는 서진을 데리고 근처 모텔로 들어갔다. 서진이 잔뜩 취해 집에 가지 못해 데리고 온 걸로 착각한 알바생은 남자 둘이 들어가는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기욱은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서진을 침대에 앉혔다. 술에 잔뜩 취한 데다 방금 전까지 잠이 들어 있던 서진은 여기가 모텔인지 아닌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서진, 너 술 얼마나 마셨어?”
“몰라. 그게… 흑…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하, 그래. 중요한 건 아니지.”
기욱은 천천히 서진의 몸을 침대로 눕혔다. 처음부터 서진과 이럴 생각으로 서진의 술집에 쫓아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동기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어 있는 서진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기욱은 서진의 옷을 들어 올려 완전히 벗겨 냈다.
“술 마시고 그렇게 아무한테나 기대는 거 아니다.”
“…없잖아. 상관없잖아. 그러니까… 흐윽… 누가 부산 같은 데 가래. 너 싫어.”
멋대로 부산 얘기를 하던 서진이 발버둥을 쳤다. 기욱은 서진의 몸을 누르며 서진을 내려다봤다. 서진은 상대의 얼굴을 보기 싫다며 몸을 틀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부산. 기욱은 서진이 누군가와 자신을 착각하고 있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입술 끝을 깨문 기욱은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며 서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미안해.”
“머가. 머가 미안한데.”
“부산 내려간 거.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서진과 가까운 사이고, 부산에 내려갔다고 서진이 서운해할 사람은 기욱이 아는 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뭔가 다른 속삭임에 서진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지금 그런 사소한 의심은 아무래도 좋았다. 기욱은 천천히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손가락을 핥았다.
“갈까?”
“으응.”
“…뭐라고?”
“가지 마. 가지 마.”
서진은 몸을 벌떡 일으켜 기욱에게 안겼다. 서윤이 외국에 간 이후로 서진은 공허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시헌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시헌은 부산에 내려가고 없었다. 혼자는 싫었다. 혼자 남겨진 고아원은 하루하루가 늪이었다.
이제야 겨우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기욱은 손끝으로 서진의 턱을 들어 올려 입술을 맞췄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기욱이 아닌 시헌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 서진은 필사적으로 키스했다. 서진과 입술을 뗀 기욱의 손이 천천히 서진의 바지를 벗겨 내렸다.
* * *
“흐으, 읏! 하응. 응….”
“후, 서진아. 다리.”
“……으읏. 으… 으으읏!”
“다리 똑바로 벌려.”
기욱의 명령조에 가까운 말투에 잠시 눈을 깜박이던 서진이 정신을 차리며 허벅지 안쪽을 잡았다. 서진이 스스로 다리를 벌리기 무섭게 기욱의 페니스가 무섭게 서진의 안을 파고들었다. 살이 맞닿는 소리가 평소보다 더욱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기욱은 서진이 누굴 생각하고 섹스를 하는 건지 알고 있기에 서진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밀어붙였다. 서진과의 섹스에서 기욱은 쾌락보다는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좋긴커녕 짜증과 함께 자존심에 금이 갔다.
내 생각에 남동생은 한 명이면 족하거든.
설마 그런 시헌이 이런 식으로 통수를 치리라는 생각은 한 적도 없었다. 철없는 고등학교 때와 대학생은 달랐다. 다르다고 믿었다.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기욱은 두 사람의 고등학교 시절 서로 학교를 떼어 놓은 짓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걸 생각하면 그 행동은 후회라고 하기보단 오히려 잘한 짓이었다. 언젠가 이럴 줄 알았다고.
기욱은 반쯤 정신을 놓고 있는 서진을 무릎 위로 올린 뒤 허리를 움직였다.
“하윽! 흐으윽…!”
퍽, 하고 깊게 파고드는 기욱의 커다란 페니스에 깜짝 놀란 듯 서진이 잠을 깨며 움찔거렸다. 기욱은 흔들거리는 서진의 양팔을 앞쪽으로 붙잡았다.
“그렇게 좋으면.”
“…….”
“직접 해.”
“직접?”
“하라고.”
“하윽, 응… 하으읏… 하, 할게…. 할 테니까 천천히…….”
기욱의 아닌 재촉에 서진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기욱은 서진과 섹스를 할 때 서진이 이렇게 말 몇 번에 말을 들었던 적이 얼마나 있나 생각했다. 아마,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기욱이라고 서진을 험하게 다루고 싶은 건 아니었다.
서진은 늘 기욱이 원하는 곳에서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모두 처음부터 서진이 기욱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었다. 기욱은 서진의 팔을 붙잡은 한 손을 놓으며 서진의 페니스를 쥐고 흔들었다. 기욱의 무릎 위에서 곧 사정할 것 같은 서진이 몸을 비틀었다.
“하으응, 으, 으응… 으으… 응… 읏… 흐으읏! 소, 손… 으응… 놔줘.”
기욱의 손가락 끝이 서진의 입구를 막았다. 사정이 막힌 서진이 얼굴을 붉히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쯧, 혀를 찬 기욱이 손을 놓자 서진의 몸이 축 늘어졌다. 이미 사정을 할 타이밍은 지나가 버린 지 오래였다. 기욱은 서진의 몸을 바로 눕힌 뒤 서진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퍽, 하고 들어오는 기욱의 두꺼운 페니스에 서진의 허리가 휘며 고개가 흔들렸다.
“하으, 흐… 으응….”
“후. 강서진.”
“흐읏, 으응… 읏. 으으. 아으윽! 하아, 하….”
기욱의 사정에 서진이 침대 이불에 얼굴을 묻으며 숨을 골랐다. 기욱은 서진이 쉴 틈을 주고 싶지 않았다. 기욱은 서진의 다리를 벌린 뒤 천천히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서진의 입안을 헤집던 기욱의 손이 천천히 서진의 눈가를 가렸다.
“하윽, 으응. 으… 으읏… 으흣….”
“이름.”
“으윽… 읍… 이… 하윽,… 이름?”
“그래. 이름 불러 봐.”
기욱은 여전히 서진의 눈을 가린 채 천천히 서진에게 얼굴을 맞댔다. 거친 기욱의 숨소리가 서진의 뺨에 맞닿았다. 정신없이 안에서 움직이는 기욱의 페니스에 술에 잔뜩 취한 서진은 생각이 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하윽, 시… 시헌아.”
“…….”
“그만… 흐윽… 힘들어.”
기욱은 힘들다며 눈물을 흘리는 서진을 반쯤 무시하며 섹스를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