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2 지켜 주지 못한 미안함
“…….”
창문 너머로 새벽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서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불을 살짝 걷자 반바지 차림으로 잠이 들어 있는 서윤이 보였다. 서진은 오후에 근무할 서윤이 조금 더 잘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무 바닥이 익숙하지 않은 서진이 휘청거리며 근처에 있는 책상의 의자를 붙잡았다. 창문 밖에서 보이는 고층 풍경이 아직 낯설었다. 서진은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방을 나왔다. 넓은 거실에 환하게 켜진 불에 서진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벌써 일어난 건가?
서진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베란다로 나갔다. 베란다 안쪽 구석에는 기욱이 있었다. 구석에 숨어 있어서 기욱이 보이지 않았던 서진은 뒤늦게 기욱을 발견하며 깜짝 놀랐다.
“…….”
“……안녕하세요.”
서진이 한 템포 늦게 기욱에게 인사를 했다. 서진의 손에 들린 담배를 본 기욱은 짧아진 담배를 끈 뒤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일어났어?”
“네.”
“서윤이는?”
“누난 자요.”
“그래.”
후, 하고 기욱이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아직 고층의 풍경이 불편한 서진은 일부러 창문 쪽에 최대한 몸을 붙여 담배를 피웠다. 기욱이 일찍 일어났을 거란 생각을 못 했던 서진은 기욱과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무척 불편했다.
“자취방, 알아보는 중이에요.”
“알아봐 줄게.”
“혼자 알아볼 수 있어요. 누나야 그렇다 쳐도 저는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인훈이 그 집을 알고 있다는 말에 두 사람은 당분간 기욱의 집 신세를 지는 꼴이 되고 있었다. 사실상 기욱의 반협박이기도 했지만, 서윤도 동의하는 터라 서진은 별다른 의견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기욱의 말대로 당장 이사를 하기엔 이런저런 문제가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뭘 또 화났는데.”
“화난 거 아니거든요?”
“화났네.”
“그냥요. 짜증이 나기도 하고……. 하아,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요.”
서진은 이 복잡미묘한 감정을 도무지 한 단어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 일이 일어난 후 이 주가 넘었다. 다행히 종강과 맞물려 학교에 다니는 데 큰 지장은 없었으나 서진의 학교만으로 해결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혼인신고 한 거 왜 말 안 했어요.”
“정신없었다고 했잖아. 그 편이 일 처리 하기도 편하다고 했고. 하여튼 그래.”
담배를 다 피운 기욱이 서진 쪽으로 몸을 틀었다. 서진은 차마 그런 기욱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서진은 기욱의 시선을 느끼며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기욱은 라이터에 불을 붙이려는 서진의 손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놔, 놔요. 누나…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미쳤어요?”
서진은 기욱에게 붙잡힌 팔에 힘을 줬다. 허나 기욱의 힘이 조금 더 셌다. 무엇보다 시간이 지났다고는 하나 서진은 심적으로 아직도 지친 상태였다. 아직 기욱과 기 싸움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서윤의 핑계를 대는 서진이었지만 정작 서진의 시선은 시헌의 방 쪽에 닿아 있었다. 기욱의 다른 손이 서진의 턱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안 일어나.”
“모, 모르는 일이잖아요.”
“왜? 다른 찔리는 거 있어?”
“그런 거……. 있을 리가 없잖아요. 힘들어서 그래요. 제발…….”
서진의 눈가가 빨갛게 변하며 손에 들어갔던 힘이 풀렸다. 기욱은 제 쪽으로 기울어지는 서진을 받아 안았다.
“나 진짜…… 힘들어요.”
“알았어. 안 할게.”
기욱은 한 손으로 서진의 허리를 안으며 뒷목을 긁적였다. 시헌이 볼까 최대한 빨리 정신을 차린 서진은 베란다 안쪽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서진은 가벼운 반팔티에 추리닝복을 입고 있는 기욱을 슬쩍 훑었다.
30대 중반에 들어섰음에도 기욱의 외모는 여전히 20대 때와 큰 변함이 없었다. 물론, 분위기가 약간 달라졌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래도 박기욱이라는 인물 자체는 참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지독한 악연. 서진은 기욱과의 관계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고마… 워요.”
“…….”
기욱 앞에 선 서진은 고맙다는 말이 미치도록 어색했다. 어쩌면 고맙다는 말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 일지도 몰랐다. 일부러 기욱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튼 서진의 예상대로 기욱 또한 한동안 벙쪄 말을 잇지 못했다. 기욱은 성큼성큼 서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마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기욱은 의자에 앉은 서진에게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춘 뒤 손끝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내심 기욱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던 서진은 일부러 기욱의 손을 따라 고개를 틀었다.
“내가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
“내 거 건드는 거.”
아직 남아 있는 서진의 흉터를 확인한 기욱은 한숨을 쉬며 서진의 턱을 붙잡았던 손을 내려놓은 뒤 하나 남은 담배를 불을 붙이지 않은 채 입에 물었다. 일부러 불을 붙이고 있지 않았다.
서진은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기욱의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당시 응급실에서 사복 차림이었던 기욱은 인훈을 향해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하였다. 인훈에 대한 폭력도 폭력이지만, 서진은 의사가 자기 일하는 병원 응급실에서 사람을 때렸다는 대처법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이번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도가 지나쳤다.
“그러고도 의사면허 안 잘린 게 신기하네요.”
“정직 먹었잖아. 6개월.”
“더 패지 그랬어요. 그렇게 때리고 1년이면 할 만한 것 같은데.”
“나도 먹고살아야 하잖아. 적당히 했어.”
적당히라는 말에 서진은 코웃음을 쳤다. 일부로 급소를 다 피하고 팔다리만 다 분질러 놓은 사람이 할 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서진은 이번 일로 돈과 권력의 힘을 절실히 실감했다. 말이 6개월 정직이지, 기욱은 몇 개월 뒤에 생길 뇌혈관 센터의 센터장으로 내정된 상태였다. 승진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뿐이었다.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 쉬라는 뜻이었다.
“서윤이랑 밥 먹고 있어. 저녁에 올 테니까.”
“어디 가는데요?”
“일하러.”
“백수잖아요.”
“하아, 그러게 말이다.”
기욱이 골치가 아프다며 덜 마른 머리를 긁적였다. 병원 일에선 전부 손을 뗐을 텐데 왜 일정이 가득 차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욱과 함께 베란다로 나온 서진은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시간은 이제 새벽 5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물기를 닦은 뒤 머리를 말리고 밖으로 나오자 사복으로 갈아입은 기욱과 마주쳤다.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던 서진은 수건을 어깨에 둘러멘 채 고개를 약간 숙였다.
“다녀오세요.”
서진의 인사에 눈을 동그랗게 뜬 기욱이 서진의 앞으로 다가가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진은 그런 기욱의 손을 옆으로 살짝 밀어냈다.
“머리 아직 안 말렸어요.”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알았어, 다녀올게.”
엄지 끝으로 서진의 입술 근처를 만지던 기욱은 손을 흔들며 아파트를 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한 서진은 머리를 좀 더 말리며 건너편 방을 흘끗댔다. 정적이 도는 새벽, 익숙하지 않은 넓은 거실에 홀로 선 서진은 안쪽 방 문고리를 돌렸다.
거실의 불빛 너머로 방 안이 비쳤다. 서진은 조심스럽게 시헌이 잠들어 있는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습관인지 시헌은 거의 벽에 딱 달라붙어 잠이 들어 있었다. 저렇게 잠이 든 것도 능력이었다. 서진은 거실의 불을 끈 뒤 시헌의 방문을 닫았다.
그 뒤 시헌의 침대 위로 몸을 반쯤 올렸다. 원래부터 1인 침대보다 조금 크게 나온 침대는 성인 두 명이 편하게 눕기에는 살짝 좁았다. 서진은 이불을 돌돌 말고 잠이 들어 있는 시헌의 옆에서 쪼그리며 누웠다. 시헌의 등을 콕콕 찔러 봤지만 정작 시헌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뭐하는 짓이지…….”
제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짓이라 생각한 서진은 살짝 튀어나온 시헌의 이불 끝으로 몸을 약간 덮었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샤워까지 한 탓에 피곤했던 서진은 금방 눈을 감았다.
* * *
“…….”
습관처럼 눈을 뜬 시헌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았다. 벽에 붙어 있던 시헌은 서진이 깨지 않도록 몸을 반쯤 일으켰다. 시헌은 왜 서진이 제 침대에서 자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쪼그리고 잠이 들어 있는 서진이 뭔가 안쓰러웠다. 시헌은 제가 덮고 있던 이불을 서진에게 덮어 주었다. 동시에 서진이 눈을 떴다.
“하암, 아.”
“…….”
“미안. 깜박하고 잠들었나 봐.”
“너 내 침대에서 뭐 하는 거야?”
“그냥 얼굴이나 좀 보러 왔어.”
시헌은 태연하게 말하는 서진에 어이가 없었다. 시헌은 앉아 있는 서진의 옷차림을 살폈다. 늘어진 흰 셔츠에 반바지 차림의 서진에 시헌은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갔다. 반팔 티셔츠 안으로 들어오는 시헌의 손에 서진이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 떨림에 시헌은 재빨리 손을 내뺐다.
“미, 미안.”
“아니, 난…….”
제가 순간 몸을 떨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한 서진도 민망한지 고개를 숙였다. 그런 일을 당한 서진을 상대로 너무 급했다고 생각한 시헌은 한숨을 쉬었다. 책상에 놓인 디지털시계가 오전 7시를 넘기고 있었다. 주말이라 시간에는 여유가 있었다.
서진 탓에 잠이 깬 시헌이 씻으러 갈 겸 침대에서 일어나자 서진이 시헌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시헌이 몸을 틀어 서진을 내려다봤다. 약간의 불안함, 초조한 기색이 눈에 보였다. 시헌은 서진이 있는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좀만 더 잘까?”
“…응.”
시헌이 이불을 덮자 서진은 기다렸다는 듯 시헌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불 안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시헌은 말없이 서진을 안았다.
* * *
우웅― 진동 소리가 시끄럽게 사무실 안을 울렸다. 사무실 안 가득한 서류 틈에서 울리는 진동에 엎드려 있던 희열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퍽, 하고 책상 모서리에 팔꿈치를 부딪쳤다.
“아아아악!! 아오 씨.”
희열은 부딪힌 팔꿈치를 붙잡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웅웅 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희열은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찾기 위해 의자 뒤에 걸린 마이 주머니며 책상 서랍 등을 뒤적거렸다. 잠깐 끊겼던 진동이 또다시 울렸다. 분명 이 근처인 것 같은데 서류들이 너무 많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희열은 혹시 소파 밑에 들어간 건 아닐까 바닥을 기며 바닥에 얼굴을 댔다.
“검사님 뭐 하십니까?”
“우아악! 깜짝아!! 아, 사무장님.”
“뭐 떨구셨어요?”
중년의 남성이 바닥을 기는 희열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열은 바닥에서 일어나 셔츠에 묻은 먼지를 대충 털어 냈다.
“아뇨, 아뇨. 휴대폰요.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은데…….”
“검사님 휴대폰요? 이거요?”
한 사무장이 소파 옆 작은 냉장고 위에 있던 희열의 최신형 휴대폰을 들었다.
“어! 그거… 하아.”
사무실을 다 뒤졌건만 정작 냉장고 위에 있는 휴대폰을 찾지 못했던 희열은 허탈한 감정이 들었다. 희열은 소파에 있는 서류들을 한쪽으로 미룬 뒤 대충 앉아 전화를 받았다.
― 야! 지희열. 너 지금 어디야?
― 아, 형님. 저 이제 일어났습니다. 예. 예. 금방 가겠습니다.
희열은 전화를 끊은 뒤 한숨을 쉬었다. 그 사이 사무장은 희열이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던 서류들을 대충 정리했다. 사무장이 희열이 앉아 있는 소파 앞 테이블에 백화점 상표가 붙어 있는 쇼핑백을 올려놓았다.
“이건 또 뭐야…?”
“초콜릿요. 아침에 사모님이 사람 시켜서 1층 로비에 맡겨 두고 가셨던 모양입니다.”
“하여튼 이런 건 귀신같이 알아.”
벽 근처에 달린 CCTV를 슬쩍 본 희열은 초콜릿 상자를 열어 초콜릿을 입안에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나갈 준비를 했다.
“밥 먹고 올게요.”
희열은 엉망이 된 마이를 털어 대충 걸쳤다. 그는 사무실에서 꼬박 날밤을 새우고 출근하듯 밖으로 나가는 희열이 익숙했다. 몸을 사무실 바깥에 반쯤 걸쳤던 희열이 갑자기 사무실 안으로 돌아왔다.
“썅, 초콜릿. 겁나 맛있네.”
그는 초콜릿을 다시 주워 먹기 위해 돌아온 희열에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 자리에서 초콜릿 두 개를 집어 먹던 희열은 결국 손안에 초콜릿 몇 개를 더 털어 챙긴 뒤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희열이 차를 이끌고 도착한 곳은 사무실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한적한 골목이었다. 국밥집 건너편에 차를 댄 희열이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사복 차림의 형사가 다가왔다.
“아, 형님.”
정장 차림의 희열―정장 차림이라고는 하나 상태가 좋은 건 아니다―이 그것보다 더 몰골이 엉망인 남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장면은 역으로 묘했다. 강력계 형사 김민수. 검사인 희열이 대학 시절부터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이었다.
“근데 꼭 이렇게 아침부터 만나야 합니까?”
“점심 새끼야.”
“점심은 무슨 10시구만.”
“말대꾸 좀 하지 마라. 하여튼 어린것이 쫑알쫑알 말이 많아요.”
“내가 뭘…… 아, 몰라. 들어가요.”
민수의 잔소리에 희열은 반강제로 입을 꾹 다물었다. 희열은 민수와 함께 좁은 국밥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 시간을 조금 비켜 간 국밥집은 상대적으로 한가했다. 가장 안쪽 구석으로 들어가자 먼저 와 있는 하민과 기욱이 있었다. 희열이 도착하자 민수는 두 사람에게 정신없이 희열을 소개했다.
“이쪽이 그…….”
“선배님, 됐습니다. 중앙지검 지희열입니다. 강서진 강간 사건 담당한 검사구요.”
“야, 내가 한다니까…….”
“선배님이 제 시다바립니까? 제 소개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
민수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던 희열은 낡은 나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민수가 익숙하게 국밥을 시키는 사이 희열은 앞에 있는 두 사람을 흘끗 살폈다. 정확히는 하민의 옆에 앉아 있는 기욱을 보고 있었다.
하민과 민수가 만든 자리에서 한 대화는 별거 없었다. 의례적으로 최대한 서로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사건을 잘 처리하기 위한 자리였다. 식사가 막바지에 달할 무렵 희열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희열의 눈치를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수가 밖으로 나왔다. 희열은 민수가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담배를 입에서 떼며 말했다.
“그러니까 왜 사모님한테 소송까지 걸리셔서 일을 복잡하게 하십니까.”
“얌마, 내가 걸리고 싶어서 걸렸냐? 분명히 말하는데 연정이 양육권은 절대 못 줘. 저쪽에서 다 처리해 준다고 하니까 한 번만 속는 셈 치고 넘어가 줘라. 너 이런 거 잘하잖아.”
“잘하고 자시고. 이거 딱 봐도 형님이 건수 잡히신 거잖아요. 빌어먹을 로펌 새끼.”
“왜? 그럼 니가 변호사 비용 대 줄래?”
“형님. 사실 제가 요즘 유아한테 좀…….”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잖아.”
민수의 말에 희열은 담배를 끄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나이에 대형 로펌의 시니어 변호사라. 희열은 민수를 통해 받은 하민의 명함 끝을 만지작거렸다. 담당 형사인 민수가 검사인 희열과 친하다는 것을 알고 형사를 걸고넘어지며 작업을 치는 걸 보면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근데 너도 너다. 그 사건 원래 니 거 아니었잖아.”
“꼰대 새끼 사건 하나 빼 오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입니까. 나중에 부장님이랑 술 한번 마셔 주면 되죠, 뭐. 이 검사 걔는 이런 사건에 눈 하나 끔벅할 사람이 아니거든요.”
희열이 신경 쓰지 말라며 허공으로 손을 저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간 하민과 민수가 대화하는 사이 기욱이 밖으로 나왔다. 좁은 가게가 불편한지 기욱은 몸을 숙이며 희열의 옆에 섰다. 정장 차림의 희열은 두꺼운 패딩 잠바를 입은 기욱을 슬쩍 올려 봤다.
“인물 좋으시네. 그 얼굴로 의사하긴 아깝겠어.”
“실력 좋은 검사라길래 노친네쯤으로 생각했는데. 재주도 좋아, 검사님.”
“그쪽이야 십여 년 공부 먹고 들어가는 곳이고. 이 바닥은 그딴 거 없거든.”
묘한 경계 속에서 기욱은 희열의 옆에서 담배를 물었다. 훅, 하고 풍기는 담배 향에 희열은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일부러 한 짓으로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강서진, 예전에도 강간당한 기록 있던데.”
희열의 말을 들은 기욱의 손이 잠시 움찔거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희열은 몰랐냐는 식으로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기욱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반쯤 피운 담배를 끈 뒤 바닥에 내던졌다. 서진이 J대 병원에 방문한 건 이번으로 총 3번째다.
첫 번째는 어렸을 적 화재로 인해서, 두 번째는 고3 무렵이었다. 보안이 걸린 서진의 차트를 기욱은 똑똑히 기억했다. 서진의 몸에서 나온 똑같은 약물, 미다졸람. 기욱은 왜 그 중요한 사실을 놓쳤을까 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그 자식이 했는지 안 했는지까지는 확신을 못 하겠지만. 고등학교 때 서로 아는 사이였으니까 관련이 없진 않겠지.”
“…….”
“그쪽 나한테 빚 하나 진 겁니다.”
기욱은 잠시나마 나이가 어린 희열을 무시한 것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하는 중이었다. 희열은 지갑에서 제 명함을 꺼내 기욱에게 내밀었다. 슬슬 나올 때가 된 두 사람을 본 희열은 받으라며 기욱에게 명함을 재촉했다. 기욱은 마지못해 희열의 명함을 받았다.
“난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기욱은 희열의 명함을 지갑에 구겨 넣었다.
* * *
강의가 끝난 시헌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시헌과 비슷한 시기에 밖으로 나온 재혁이 시헌을 향해 손을 흔들며 시헌에게 다가왔다. 재혁은 시헌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재혁이 조심스럽게 서진에 관해 물었다.
“서진 형은 휴학했어요?”
“내일부터 나올 거야.”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안쪽 구석으로 들어가 담배를 물었다. 그날의 일들을 전부 목격한 재혁은 방학 내내 서진과 시헌의 걱정으로 늘 마음 한구석이 좋지 않았다. 조금 더 일찍 말해 줄걸, 하는 후회가 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시헌의 집안에서 잘 해결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개강한 이후에도 일주일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서진이 걱정됐다.
“하아, 역시 충격이 크겠죠?”
재혁은 서진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에 시헌은 말없이 재혁을 보고 있었다. 시헌의 시선을 느낀 재혁은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봐요? 저도 강간당하는 건 무섭거든요? 남자라고 뭐, 안 무서운 줄 아나.”
재혁의 중얼거림에 조금 일찍 담배를 끈 시헌이 재혁의 등을 토닥여 줬다. 방학 내내 재혁은 서진에 대해 궁금해하며 시헌에게 연락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재혁이 있었기에 이 정도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고맙다.”
“하하, 형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되게 어색한 거 알죠?”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근데요, 형 그거 들었어요? 걔 H대생 아니라고 하던데요.”
재혁의 말에 시헌이 입술을 깨물었다. 시헌은 이후에 기욱이 하민과 함께 현장에 있던 남자들에 대한 추가 고소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들은 것이 없었다. 기욱은 시헌이 나서기도 전 한발 앞서 모든 일을 해결했다.
서진은 기욱의 여자인, 서윤의 남동생인 건 맞았지만 그런 이유를 붙인다 해도 기욱이 정직을 먹어 가면서까지 나서는 이유를 시헌은 좀처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 사람을 챙기는 것이 유독 심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뭔가 서진 사건에 대한 기욱의 분노는 시헌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분명한 건 기욱은 당시 서진을 강간한 사람들과 주모자인 인훈을 결코 용서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시헌이 기욱의 일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기욱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시헌은 입을 꾹 다물며 재혁의 말을 경청했다.
“조사받으면서 그랬다잖아요. 걔가 서진 형네 집 근처 2층에 있는 개인 주택에 산다고, 근데 정작 그 집 주인은 그런 사람 모른다고 했대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시헌이 놀란 건 그 집 주인이 인훈을 모른다는 것보다 인훈이 HJK생 연합 커뮤니티라는 곳에 가입했다는 점이었다.
“커뮤니티는 어떻게 가입한 거지?”
“형이 하나 있는데 K대생이었나 봐요. 사실 이게 말이 연합이지 개인이 관리하는 거기 때문에 허점이 많을 수밖에 없어요.”
담배를 다 피운 재혁은 자연스럽게 시헌의 뒤를 따랐다. 시헌은 차 문을 반쯤 열었다.
“집에 가지? 가는 길에 태워 줄게.”
“됐어요. 서진 형한테나 가 봐요. 전 지하철 타고 갈 테니까.”
“하아, 고맙다. 다음에 밥 한번 살게.”
“네.”
재혁과 인사를 주고받은 시헌은 차를 몰고 J대 병원으로 향했다. 슬슬 서진의 외래 상담이 끝날 시간이었다. 병원 외래 복도에 도착한 시헌은 생각보다 일찍 병원에 도착했다. 일찍 나온다면 슬슬 나올 때가 됐지만, 서진이 언제 나올지는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시헌은 서진에게 문자를 남겨 놓은 후 의자에서 일어났다.
“시헌아!”
뜻밖의 목소리가 시헌의 고개를 돌리게 하였다. 수술복 차림의 서윤과 가운을 입고 있는 기욱이었다. 병원에서 일하는 두 사람 다 서진이 신경 쓰여 온 것 같았다.
시헌이 발견하지 못했을 뿐 둘은 시헌보다 조금 더 일찍 외래 복도에 있었다. 마침 서진이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미처 문자를 확인하지 못한 서진은 난데없이 모여 있는 세 사람에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나….”
“서진아, 괜찮아?”
서진을 본 서윤이 서진의 손을 잡으며 이것저것 물었다. 서윤을 달래는 모습을 본 기욱이 시헌을 뒤쪽으로 이끌었다. 시헌은 기욱에게 붙잡힌 팔에 인상을 찌푸렸다.
“팔 줘 봐.”
“괜찮아.”
괜찮다는 시헌의 말을 무시한 기욱은 시헌의 팔을 잡아 들어 소매를 걷었다. 다행히 신경에 손상은 없었지만, 시헌의 팔에는 익숙하지 않은 흉터 자국이 남았다. 기욱이 상처를 확인한 것을 본 시헌은 재빨리 손을 뿌리쳐 소매를 덮었다.
“괜찮다고 했잖아.”
“하아. 알았어.”
기욱은 괜한 짓을 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어 다시 일로 복귀를 해야 하는 두 사람을 대신해 시헌은 서진을 데리고 병원 주차장으로 향했다. 시헌은 조수석에 탄 서진을 조심스럽게 보며 하지 못했던 말을 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 일이 있고 나서 괜찮냐는 말을 얼마나 들었는지 모른다. 서진은 이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였다. 이쯤 되면 괜찮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미 많은 폐를 끼친 서진은 이제는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시헌이 시동을 켜고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채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며칠 더 쉬어.”
“개강하고 일주일째야. 더 밀리면 나 수업 못 따라가. 실습도 있고.”
“휴학하면 되잖아.”
“몰라, 생각해 보고.”
“같이 해 줄게.”
“그걸 말이라고 해.”
서진은 운전이나 하라며 시헌의 손을 뿌리쳤다. 휴학해도 시헌까지 말려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서진의 시선이 운전대를 잡는 시헌의 손에 닿았다. 시헌의 손에는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았다. 정신이 없어서 한동안 서로 신경 쓰고 있지 않은 부분이었다.
“반지는 뺀 거야?”
“어쩔 수 없었어.”
서진 사건은 시헌의 수준으로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무엇보다 기욱은 시헌이 끼어들 틈을 전혀 주지 않았다. 기욱이 해결할 수 있는 선이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다. 서진은 목 안쪽에 있는 목걸이 줄을 잡아당겼다. 목걸이 끝에는 시헌과 맞춘 커플링이 있었다. 마침 신호등이 걸린 시헌은 서진의 목걸이 줄에 걸린 반지를 바라봤다.
“저번에 병원 나오는데, 근처에 금은방 있길래 그냥 했어. 당분간 하고 다녀도 되지?”
서진은 시헌과 맞춘 반지를 될 수 있으면 떼어 놓고 싶지 않았다. 그 사건이 있고 난 이후 서진은 왠지 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시헌은 신호가 끝나기 전 재빨리 안전벨트를 푼 뒤 서진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당연하지.”
오랜만에 당하는 기습 키스에 서진은 시헌의 입술이 지나간 뺨을 만지작거렸다. 시헌은 후딱 돌아와 운전대를 붙잡았다.
“나도 할까?”
“괜한 오해 사면 어쩌려고 그래.”
“어차피 학교에 소문 다 났는데 뭘.”
“그 얘기 하는 거 아닌 거 알잖아. 간신히 숨긴 거 알아.”
정곡을 찌르는 서진의 말에 시헌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시헌은 서진 사건이 있고 난 이후 종종 기욱과 서윤의 관계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시헌이 아는 기욱은 한 사람으로 만족할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애당초 누군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만큼 깊은 관계를 맺는 인물도 아니다.
서윤을 만나면서 달라졌다고 생각은 하지만, 요즘 들어 서윤과 기욱의 관계에 위화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었다. 서진의 일에 기욱이 나서는 정도가 지나쳐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왜 하필 기욱의 진지한 상대가 서윤이어야만 할까. 시헌은 서진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서윤과 결혼 전 혼인신고까지 해 버린 기욱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서진과 사귀는 것을 생각하면 아주 정말,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심 서윤과 기욱이 헤어지기를 마음 한구석으로 바랐다. 그런 시헌의 표정을 읽은 서진이 한숨을 쉬었다. 무표정한 시헌이지만 사실 표정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진에겐 시헌만큼 속마음을 읽기 쉬운 상대는 달리 없었다.
“무슨 생각 하는지 눈에 보인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
“그렇게 티 났어?”
“조금.”
서진은 괜히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사실은.
시헌이 한 그 생각을 똑같이 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 * *
서진은 시헌과 함께 인근 독서실에서 공부했다. 새벽 한 시가 좀 넘어갈 즈음 건너편 자리에 앉은 시헌은 제집처럼 엎드려서 잠이 들어 있었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나와 휴대폰을 열자 기욱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어디야?」 오후 11:23
문자는 약 두 시간 전쯤에 와 있었다. 평소처럼 재촉하지 않는 걸 보니 문자를 보낸 후 바빴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서진은 늦게나마 답장을 보냈다.
「시헌이랑 독서실요」 오전 1:02
서진이 기욱에게 답장을 보내기 무섭게 전화가 왔다. 마침 휴대폰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서진은 손안에서 울리는 휴대폰에 괜히 답장을 보냈나 싶으면서도 기욱의 전화를 받았다. 기욱이 이렇게 급하게 전화를 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 저 지금 할 기분 아녜요.
― 안 해.
― 그럼 왜 전화했어요?
― 걱정돼서 전화한 거잖아.
기욱은 매번 섹스 목적으로 전화한다고 생각하는 서진이 약간 못마땅했다. 서진은 기욱의 못마땅한 말투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실제로 그 목적 외에 기욱은 먼저 전화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 누나는요?
― OR(수술실)에 있어. 응급 OP(수술) 중.
― 형님은 안 들어가세요?
― 한 교수가 들어갔어. 그러니까 다른 의사.
우민을 모른다고 생각한 기욱이 적당히 말을 돌려 설명했다. 한 교수, 기욱이 말한 한 교수가 우민일지 아닐지는 모르나 서진은 왜인지 모르게 수술을 하는 의사가 우민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서진의 기억 속에 우민은 여전히 기욱과 다른 이상한 의사로 남았다.
― 누나 잘 좀 챙겨 줘요.
― 알았어.
서진과 전화를 끊은 기욱은 밖으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몸을 틀자 유치장의 벽이 눈에 들어왔다. 새벽, 잠시 안쪽에 다녀왔던 하민이 기욱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기욱은 처음부터 병원에 있지 않았다. 담배를 끈 기욱은 하민을 따라 유치장 안으로 들어갔다.
“꼭 이 시간에 봐야 하냐.”
“이거 어렵게 따낸 거야. 애당초 니가 보고 싶단 소리만 안 했어도 이런 번거로운 일은 없었잖아.”
하민은 난데없이 인훈을 보고 싶다는 기욱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인훈 쪽에서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하민의 말과 달리 인훈은 기욱의 접견을 쉽게 받아들였다. 서로 맞는 시간대가 새벽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기욱과 하민은 안내를 받으며 유치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기욱이 인훈을 만나고 싶다고 한 얘기가 건너간 모양인지 담당 형사인 민수도 와 있었다. 하민은 예상치 못한 민수의 등장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태연스럽게 인사했다.
“이거 강 형사님, 이 시간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하하, 우리 일이 다 그렇죠. 같이 가시죠.”
기욱은 형사 민수의 등장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접견실 안으로 들어갔다. 기욱이 의자에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건너편 문에서 죄수복을 입은 인훈이 절뚝거리며 걸어왔다. 좁은 접견실이 북적북적했던 기욱은 한숨을 쉬었다.
나가 달라는 기욱의 시선을 느낀 하민은 민수와 근처 교도관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자연스럽게 피곤하시죠? 별 얘기 안 할 겁니다, 하며 교도관들을 바깥으로 끌어내는 솜씨가 한두 번 해 본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을 이끌고 나온 하민은 문틈 사이로 재빨리 말을 건넸다.
“오래 못 끈다.”
첩보 영화도 아니고 폼 잡는 하민에 기욱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은 의자를 당겨 인훈의 앞으로 다가갔다. 희열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기욱은 인훈을 볼 생각 따위는 마음 한구석에도 없었다. 기욱은 새벽이라 잠긴 목소리를 풀며 말했다.
“너, 강서진한테 뭐 했어.”
“언제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한 번이 아니잖아.”
기욱은 앞쪽에 살짝 튀어나온 테이블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고3 무렵 서진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서진이 교통사고가 난 곳은 사고가 날 만한 장소도 아니었다. 서진의 몸에서 나온 미다졸람 성분의 수면제와 인훈이 불면증을 핑계로 병원에서 타 낸 약의 성분을 맞췄을 때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불편한 기욱의 표정을 본 인훈은 뜬금없이 배를 잡고 웃었다.
“큭큭, 하하하하하!! 너 학교에서 그 자식이지.”
병원에서 인훈은 기욱에게 맞느라 기욱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 뒤 기욱을 볼 일이 없었으니 병원에서 맞은 이후 약 한 달 만에 얼굴을 똑바로 보는 것이었다. 고소를 진행하는 사람이 뜻밖에 시헌이 아니라 시헌의 형인 박기욱이라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훈도 어렴풋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뭐 했냐고 강서진이랑.”
“고등학교 때? 강서진이랑? 아, 그거? 하긴 뭐 해. 이거지.”
인훈이 장난치듯 한쪽 손가락을 말아 다른 손가락 구멍에 넣어 보였다. 누가 봐도 섹스를 연상하게 하는 손짓에 기욱은 입술을 깨물었다. 기욱은 신경질적으로 수술모에 눌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내가, 모르는 사람 쉽게 따라가면 못 쓴다고 했잖아. 뭐 했냐고? 강서진 처음이 그렇게 듣고 싶어? 집에 갔어. 약을 좀 탔는데, 애가 생각보다 약이 안 듣더라고.”
“씨발.”
“근데 좀 있으니까 해롱해롱 대는데, 되게 꼴리더라. 입에선 막, 싫어. 하지 마. 이러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지 제정신이 아니더라. 좋아 죽을라 하던데. 혹시 몰라 걔도 즐겼을지?”
참다못한 기욱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훈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인훈의 몸이 뒤로 넘어지는 소리에 밖에 있던 교도관들과 하민이 뛰어 들어왔다.
“야. 너…! 내가 일 치지 말라고 그렇게……!!”
“크윽, 하하하하!! 뭘 꼴아봐. 너도 똑같잖아. 이제 와서 혼자 아닌 척하지 마.”
“한 번만 더 그 입 지껄여라.”
“지껄이면 뭐 어쩔 건데? 죽이려고? 근데 너 그거 알아?”
교도관을 뿌리친 인훈이 터벅터벅 기욱의 앞에 다가왔다.
강서진.
박시헌이랑 사겨.
“씨발 진짜…!!”
인훈의 중얼거림을 참다못한 기욱이 또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사태가 심각해진 것을 눈치챈 하민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교도관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바닥에 엎드린 인훈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야, 박기욱! 그만해! 가자!”
하민이 급하게 기욱을 이끌고 접견실 밖으로 나왔다. 간신히 기욱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온 기욱은 우민이 차 안에서 가져다준 캔 커피를 마시며 숨을 골랐다.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은 기욱은 잠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주먹을 쥐었다.
강서진.
박시헌이랑 사겨.
……그건 무슨 말이었지? 한순간이지만 인훈은 분명히 그렇게 말을 했다. 잘못 들은 것일 리가 없었다. 인훈이 고3 시절 서진을 건드렸다는 것 이상으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 들었다.
“강서진.”
새벽의 찬 공기를 맞으며 담배를 피운 기욱은 서진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참 쉬운 일이다. 세상에서 딱 한 사람 강서진만 빼면 말이다. 기욱은 도대체 서진의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욱은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 * *
서진은 모처럼 주말에 쉬는 서윤과 함께 인근 번화가에서 식사하러 나왔다. 늘 두 사람의 곁에는 기욱과 시헌이 있었던 터라 둘만의 외출이 오랜만이면서도 어색했다. 원하든, 원하지 않은 결과든 익숙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다. 기욱이 서윤과 함께 가라고 추천해 준 고급 레스토랑에 가는 것도 서진은 이젠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식사가 중간을 좀 못 넘길 무렵 서진은 마시던 물 잔을 내려놓았다.
“해외 근무?”
“해외 근무까진 아니고. 아직 확정이 난 건 아니긴 한데……. 오빠가 외국 병원 쪽으로 *PA(Physician Assistant) 해외 연수받을 수 있는 곳 알아봐 준다고 그러는 것 같아.”
*PA[Physician Assistant] : 전문 간호사, 의사 보조 인력
서윤이 굉장히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사실 서진은 서윤이 PA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병동에서보다 수술실로 옮겼을 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서윤의 평가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서윤이 의대를 포기한 것도 사실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서진은 서윤이 PA를 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가운을 입고 일을 해야 했던 건 서진이 아닌 서윤이여야 맞았다. 서진은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으며 서윤을 마주했다.
“어디로 생각 중인데?”
“영국이나 미국. 아직 정해진 건 아니고. 좀 더 알아봐야 돼.”
“누나.”
“응?”
“난 누나 선택을 믿어.”
서윤을 잡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언제까지 애로서 서윤의 발목을 잡고 싶진 않았다. 자신도 그럴 나이가 지났다고 느끼고 있었다. 서진의 그런 마음이 전해진 건지 서윤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서진아…….”
“그래도 6개월 동안 누나 못 보면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아. 서류는 이미 넣은 거지?”
“…어떻게 알았어?”
“왠지 그럴 것 같았어.”
서진이 서윤을 말리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서진은 여자이기 이전에 서윤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자기 인생에 대한 애착이 강한 인간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동생 하나 보고 여기까지 참은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결과는 언제 나와?”
“일주일쯤 있다가.”
서진은 속으로 예상했던 것보다는 조금 이르다는 생각을 했다. 서윤이 떨어져서 국내에 남는 것이 서진에겐 가장 좋은 선택이지만, 최근 들어 이례적인 수술을 여러 건이나 해내 한창 젊은 의사들로 국내외 학회에서 높은 주가를 올리며 주목을 받는 J대 신경외과팀 소속 간호사인 서윤이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서윤은 그 이례적인 수술 중 절반 이상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다.
“누나가 자주 연락할게.”
“안 해도 내가 전화할 거야.”
서진은 그럴 일은 없을 거라며 남은 물을 마신 뒤 물 잔을 내려놓았다.
* * *
지하철역에서 나온 서진은 역 근처 번화가 건널목 앞에 섰다.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건널목을 기다리던 중 멀리 싸구려 액세서리 등을 파는 액세서리 전문점이 있었다. 비싸지 않은 가격에 열쇠고리부터 귀걸이, 목걸이 등을 파는 가게였다.
젊은 알바생이 조금 일찍 오픈을 준비하고 있었다. 횡단보도의 불이 파란불로 바뀌자 서진은 막 여자가 진열해 놓은 인형들이 달린 진열대 앞으로 다가갔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인형들이 달려 있었다. 싸구려라 그런지 다들 모양은 약간 어딘가 엉성했다. 서진은 귀엽게 생긴 인형 하나를 무의식중에 집어 들었다. 오픈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알바생에게 다가갔다.
“이거 하나 주세요.”
“네!”
붉은 옷을 입은 여자 알바생이 서진이 건네는 카드를 카드 리더기에 읽힌 뒤 되돌려줬다. 서진은 포장은 필요 없다는 말을 남긴 뒤 인형과 카드를 주머니에 넣은 뒤 가게를 나와 학교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이걸 왜 샀지?’
강의실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서진은 왜 이런 걸 샀나 하는 생각이 괜히 들었다. 정말 아무 생각이 없이 구매한 인형이었다. 진열된 다른 인형들보다 조금 크기가 작은 곰 인형은 묘하게 시헌을 떠올리게 하였다. 서진은 곰의 검은 눈동자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눈이 까맣고 동그란 게 딱 시헌이었다. 시헌도 당황하면 꼭 이런 식으로 눈을 크게 뜨고는 했다. 서진은 강의실 문을 열었다.
“늦었네.”
“아, 깜짝아.”
서진은 텅 빈 강의실을 둘러보며 많은 자리를 남기고 불편한 문 근처에 자리한 시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헌의 옆에 앉아 전공 교재와 가방을 내려놓은 서진은 소매를 걷어 시계를 내려다봤다. 아직 강의 시작까지 20분도 더 남아 있었다. 결코, 늦었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시간이 아니었다.
“네가 너무 빨리 온 거라고 생각 안 해?”
“응.”
“난 차가 없잖아. 지하철 중간에 멈췄어.”
서진은 시헌의 뻔뻔함도 이젠 그냥저냥 익숙해졌다. 아니, 3년을 넘게 당했는데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중학교까지 포함하면 더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서진은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리던 곰 인형 열쇠고리를 시헌의 책상 위로 툭 던졌다. 예고도 없이 툭, 던진 걸 시헌은 빠른 반사신경으로 잡아 냈다. 시헌은 손안에서 몰캉거리는 곰 인형을 주물럭거렸다.
“뭐야?”
“오는 길에. 그냥 샀어.”
“어디서?”
“어? 역 앞 횡단보도 너머 가게에서.”
서진은 생각보다 무뚝뚝한 시헌의 반응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농담이라고는 하지만 길가에 있는 쓰레기를 주워다 줘도 좋다고 한 놈이 아니었던가.
과한 반응을 기대한 것은 아니라고는 하나 시헌이 이렇게 담담하게 굴 줄은 또 몰랐다. 서진은 곰 인형이 마음에 들지 않나―3천 원짜리를 두고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따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하는 생각을 했다.
서진의 예상과 달리 한쪽 손을 잠바 주머니에 넣고 있던 시헌이 주머니에 있던 손을 빼내며 서진에게 내밀었다. 시헌의 삐져나온 손에는 서진이 사 온 곰 인형과 똑같은 인형의 머리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안 가지려고?”
“아닌데.”
시헌은 서진이 준 곰 인형과 제 손에 있는 곰 인형 두 개를 손에 하나씩 들고 흔들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정(?)이 들었던 서진은 제가 산 곰 인형과 시헌이 산 곰 인형을 구분하는 능력 정도는 있었다. 서진은 눈을 깜박였다.
“…큭큭, 하하하하!”
“우리 통했나 봐.”
“야, 그래도 그렇지……. 크읍. 가게에 인형이 몇 개인데……. 대박이다. 진짜.”
“난 너 닮은 것 같아서 사 왔어.”
“무슨 소리야! 날 닮은 게 아니라 널 닮은 거겠지. 내가 이렇게 못생겼냐?”
“헐. 못생겼다니. 그럼 못생긴 인형을 날 닮았다고 사 온 거야?”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 몰라! 하나 내놔!”
서진은 시헌의 손에 있는 곰 인형을 빼앗아 가져왔다. 비록 다른 녀석이지만 또 보게 돼서 반갑다 곰탱아. 서진은 아무리 봐도 시헌을 닮았는데 자신을 닮았다고 인형을 사 온 시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복도 너머에서부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온 동기들이 서진과 시헌의 손에 있는 곰 인형을 보며 한마디씩 했다.
“커플링에 인형까지. 야, 아주 대놓고 광고를 해라.”
“큭큭, 이미 날 대로 다 났는데 뭘 더해.”
“작작하라는 거잖아.”
“어? 뭐예요? 둘이 아침부터 또 연애질?”
“야! 시끄러워!!”
“시끄러!”
서진과 시헌이 거의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몰려 들어온 동기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소리를 지르는 둘에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를 상대로 정말 죽이 잘 맞는 걸 보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재혁이 분위기를 참지 못하며 끼어들었다.
“큭큭, 짰어요?”
“야. 진짜 적당히 안…….”
“알았어요. 그만할게요.”
재혁은 능글맞게 웃으며 다른 동기들과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슬슬 강의가 시작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시헌은 강의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시헌은 차 키에 달은 서진의 곰 인형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 * *
“영국에?”
“응. 6개월 연수라고 하는데 이것저것 따지면 한 8개월 있을 것 같아.”
시헌의 차 조수석에 탄 서진은 카페에서 산 밀크티를 마시며 대답했다. 큰 도로가 아닌 시헌은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약간 돌렸다. 그렇게 말하는 서진의 표정이 시헌의 예상보다는 담담했다.
“괜찮겠어?”
시헌은 서진이 자신에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건 시헌에겐 서진도 마찬가지였다. 서진은 시헌만큼이나 얼굴에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서진은 밀크티를 잠시 내려놓은 뒤 선탠이 된 창가에 얼굴을 약간 기댔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
“그래도 누나 인생인데. 가끔은 너무했나 싶기도 하고 그래.”
서윤이 의대를 포기했던 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윤이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만든 원인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말이다. 미안한 감정은 시헌에게서도 늘 있었다. 복합적인 미안함이었다. 호텔의 지상주차장에 차를 댄 시헌이 서진이 앉아 있는 조수석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렇지 않아.”
“뭐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말이라도 고맙다.”
서진은 안전벨트를 풀며 차에서 내렸다. 시헌이 뭔가를 더 말했지만 그리 중요한 말은 아니었다. 마침 멀리 기욱의 차에서 내린 서윤이 서진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서윤을 본 시헌은 서진의 등을 살짝 밀었다.
“먼저 올라가.”
“그래도 돼?”
“난 형 있잖아.”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윤에게 다가갔다. 기욱도 시헌과 비슷한 말을 한 듯 서진과 서윤은 두 사람을 두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병원을 갔다 온 모양인지 가벼운 사복 차림인 서윤은 서진에게 팔짱을 끼며 흐트러진 앞머리를 만져 줬다.
“우리 서진이, 별일 없었지?”
“당연하지.”
서진은 그 당연하다는 말을 이를 악물며 말했다. 서윤이 해외로 나가기로 한 이상 더 이상의 문제는 일어나서는 안 됐다.
* * *
호텔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뭔가 조금 더 먹고 싶다는 서윤의 말에 네 사람은 호텔 바로 건너편 번화가에 있는 술집을 찾았다. J대 병원은 멀지 않고, 내일 강의가 있어도 서진은 시헌의 차를 타고 학교에 가면 되기 때문에 술을 마시는 것 자체에 대한 큰 문제는 없었다. 서진은 과일 안주를 두고 조금 과하게 술을 마시는 것 같은 서윤을 급하게 말렸다.
“잠깐, 누나. 술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냐?”
“에이! 서진아! 누나 개안아!”
“아니, 안 괜찮아 보이니까 하는 말인데…….”
“진짜 개안다니까? 울 귀여운! 서진이가 누나 말을 못 믿네. 자자, 서진아 한잔 더 해.”
서윤이 서진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물 높이에 기욱이 빠르게 소주병을 쥐고 있는 서윤의 손을 잡아 들어 올렸다. 서윤은 잔 끝에 걸쳐 있는 소주를 보며 깜짝 놀랐다.
“어머. 너무 많이 따랐당. 마실 수 있겠어?”
“누나, 당연하지.”
서진은 서윤의 옆에 있는 기욱을 흘끗댔다. 기욱이 적당히 하라며 손짓으로 눈치를 줬으나 역효과였다. 오기가 생긴 서진은 잔에 남은 소주를 전부 털어 마셨다. 이전에도 서윤에게 받아먹은 술이 있었던 서진에게 술기운이 훅 하고 올라왔다. 입안의 쓴맛에 서진은 급하게 물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탁, 서진의 손이 물이 담긴 물 잔을 결국 쓰러트리고 말았다.
“어머, 서진아!”
깜짝 놀란 서윤이 벌떡 일어났다.
“하아. 진정해 진정.”
서윤의 옆에 앉은 기욱은 일어난 서윤의 팔을 잡아당겨 달랬다. 그 모습을 본 시헌은 서진에게 옆에 있던 티슈를 내밀었다. 기욱 또한 다른 손으로 서윤의 옆에 있던 티슈를 향해 손을 뻗은 상황이었다. 술에 약간 취했지만,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많이 마신 것은 아니었다.
서진이 당황하는 사이 시헌과 기욱의 눈이 맞았다. 평소라면 둘 중 한 명이 마지못해 손을 내려놓을 법도 한데 두 사람은 마치 기 싸움을 하듯 물티슈를 든 채로 팔을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기 싸움을 눈치채지 못한 서진은 본능적으로 가까이 있는 시헌의 티슈를 받아 테이블을 닦았다. 결국, 기욱이 물티슈를 든 손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아씨, 다 젖었네.”
테이블에 물만 엎은 줄 알았는데. 잠바 주머니 안쪽으로 물이 흐른 모양이었다. 서진은 잠바 안에 있는 물건들을 전부 다 꺼냈다. 주머니에 있던 것이라고는 지갑과 휴대폰이 다였다. 휴대폰에는 오늘 아침 시헌에게서 받은 인형이 달려 있었다. 휴대폰과 비슷한 인형에 기욱은 왠지 모르게 눈이 갔다. 기욱은 서진의 휴대폰에 달린 곰 인형을 손가락질했다.
“인형, 처음 보는 건데 샀어?”
“아, 이거요?”
서진은 인형이 달린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괜히 시헌의 눈치를 살폈다. 그 사이 서윤은 인형이 귀엽다느니 어쩌니 말을 하고 있었다. 서진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적당히 말했다.
“바, 받았어요.”
“받았다고?”
“받은 지 좀 됐는데. 준 사람 성의도 있고 해서 그냥 달았어요.”
“준 사람?”
“네.”
사실 시헌이 준 거지만. 순간 우민이 줬다고 핑계를 대려 했던 서진은 석빈과 우민의 일이 생각나 적당히 말만 맞췄다. 다행히 기욱도 주변 시선을 느낀 건지 그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기욱이 캐묻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 짐작 가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기욱은 시헌이 아니라 우민을 생각하고 있었다.
기욱이 해외에 나가 있을 무렵 아르바이트를 했던 서진의 얘기는 병원에 돌아오고 나서도 한동안 들을 수 있었다. 기욱과 묘한 라이벌 관계에 있는 한 교수―우민이 서진을 귀여워하며 인형을 뽑아 주기 위해 새벽에 병원 내 천 원짜리를 전부 털어 갔다는 소문도 같이 말이다. 하필이면 상대가 우민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말이다. 기욱은 이 일에 대해 캐물을 시간은 많다고 생각했다.
“흐음, 그래? 귀엽네.”
그렇게 말하는 기욱의 손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려는 서윤의 허리를 안고 있었다. 한동안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서진은 기욱이 이런 식으로 서윤을 옆에 두며 하는 스킨십이 묘하게 불편했다. 하필이면 시헌도 있는 자리에서 이런 짓을 하는 의도를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서진은 저를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기욱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테이블 밑으로 시헌의 손이 서진의 무릎 위로 살짝 올라왔다.
“오빠, 애들도 다 있는데 왜 그래!”
“내가 뭘?”
“아, 부끄럽단 말야.”
“큭큭, 하하하하! 알았어. 안 할게. 이럼 됐지?”
기욱이 양손을 허공으로 들어 보이며 웃었다. 술에 취한 서윤을 놀리며 장난을 치고, 진심으로 재미있어하는 것 같은 웃음은 결코 연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기욱에게 그런 연기를 시킨 서진조차도 기욱의 진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