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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1 반복되는 악몽(6권) (44/83)

Chapter. 41 반복되는 악몽

서진과 시헌은 호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갰다. 방학 기간 내내 각자 일이 바빠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얼마 만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진한 키스를 하며 침대에 누운 시헌은 서진의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바빴으니까.”

“으으, 앞으로 더 바빠질 거라는 게 싫다.”

서진의 위에서 내려온 시헌이 윗옷을 벗었다. 방학 동안 서진이 알바를 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실습을 가고, 병원에 들어가면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점점 줄어들 것이었다. 매일 봐도 부족한 마당에 거의 이 주 동안 섹스는커녕 얼굴도 못 봤으니 보고 싶을 법도 했다. 옷을 전부 벗은 시헌은 침대에서 곧장 내려와 등을 돌렸다.

“나 씻으러 갈 건데.”

“…씻고 와.”

“같이 씻자.”

“먼저 씻어.”

“아아, 서진아!”

시헌이 침대에 누워 귀찮다는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서진은 시헌이 자신을 욕실로 끌고 들어가려는 이유를 알았다. 시헌의 인내심이 한계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시헌의 앙탈에 서진은 못 이기는 척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벗었다. 서진이 옷을 벗고 욕실로 향하기 무섭게 시헌은 찹쌀떡처럼 서진의 허리를 안으며 찰싹 달라붙었다.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오랜만인데 그 정도는 해 줘.”

“알았다고.”

* * *

서진의 예상은 틀린 구석이 하나 없었다. 시헌은 욕실을 채 나가기도 전에 서진에게 달라붙었다. 물이 찬 욕실에서 서진의 신음이 벽을 타고 울렸다. 욕실이 넓은 편이라 크게 답답하진 않았지만 좁은 욕조에 남자 둘이 섞여 있기란 상당히 힘이 들었다.

“하으, 응….”

“후, 서진아. 보고 싶었어.”

“좀만 천천히. 하아, 알았으니까, 진정해.”

서진은 숨을 고르며 시헌의 목에 팔을 걸고 무릎 위로 올라왔다. 욕조에 담긴 물 때문에 크게 힘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시헌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욕조에 찬물이 철벅 올라오며 바닥으로 넘쳤다.

“으응, 하응. 아… 으읏!”

“읏…!!”

물속에서 시헌이 서진의 안에 사정했다. 시헌의 페니스가 나오기 무섭게 서진의 안에 있던 정액이 물을 타고 흘러내렸다. 몸이 뜨거운 건지 물이 뜨거운 것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서진은 사정 후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욕조 벽에 몸을 걸쳤다. 좁은 욕실에서 벌써 이렇게 해 대니 죽을 맛이었다.

“슬슬 나갈까?”

욕조 안은 뿌옇게 물안개가 잔뜩 차 있는 상태였다. 시헌도 답답함을 느꼈다. 고개를 끄덕인 서진과 시헌은 물기를 대충 닦은 뒤 곧장 침대로 돌아왔다. 머리는 말리지도 않은 터라 침대 위로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하으, 응… 읍….”

“병원 알바는……. 읏. 할 만했어?”

“아응. 읏. 그냥 별거 없었어.”

“병원에서 일하는 자기 모습 보고 싶었는데. 아까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병원이라고 해 봤자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텐데 말이다. 서진은 머뭇거리는 시헌의 위로 올라탔다. 서진이라고 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일어나려는 시헌의 가슴을 꾹 누른 서진은 엉덩이를 들어 올린 뒤 시헌의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이미 욕실에서 잔뜩 한 탓에 서진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시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우리 자기, 언제부터 이렇게 적극적이게 됐어?”

“흐으, 응… 하으응… 이게 다… 하, 너 때문이잖아.”

시헌의 위에 올라탄 서진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시헌의 페니스에 서진은 정신없이 신음을 흘렸다. 시헌은 서진이 지쳐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멋대로 하게 내버려 뒀다. 서진의 움직임이 느려진 것을 포착한 시헌은 곧장 서진의 허리를 붙잡아 눕힌 뒤 다리를 벌렸다.

“자, 잠깐만, 나 이제 힘들…….”

“멋대로 한 주제에 무슨 소리야. 난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하으으응! 으읏… 너… 일부러…!!”

시헌은 서진이 채 말을 잇기도 전에 허리를 움직였다. 방금 막 사정을 한 서진은 시헌의 페이스에 맞추느라 죽을 맛이었다. 시헌은 사정 직전에 서진의 안에서 페니스를 빼냈다.

시헌의 정액이 서진의 배 위쪽으로 튀었다. 서진이 몸을 앞으로 내밀자 시헌의 입술이 서진을 포갰다. 서진은 시헌의 몰캉거리는 혀와 입안을 이리저리 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헌은 서진이 확실히 평소와 달리 적극적이라는 것을 몸소 실감하는 중이었다.

“너, 하아. 오늘따라 왜 이래?”

“흐, 그냥. 좋아서 그래.”

서진도 왜 이러는지 도통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한 건 지금은 그냥, 시헌과 정신없이 하고 싶었다. 어쩌면 앞으로 이틀 후면 돌아올 기욱 때문에 더 시헌에게 매달리는 걸지도 몰랐다. 차라리 평생 해외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시헌과 입술을 뗀 서진은 숨을 고르며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서진의 적극적인 모습이 싫지는 않은 듯 시헌도 서진의 팔을 잡아당기며 서진의 안에 자리했다.

“하으으읏! 으응. 아응. 응… 아, 좋아.”

“그렇게 좋아?”

“흐, 응. 좋아. …하, 으, 박시헌. 미칠 것 같아….”

절정에 이르며 몸을 떠는 서진의 머릿속 한구석으로 시헌과 별장에 놀러 갔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아, 그때 진짜 좋았는데. 별이 가득한 유리 천장 너머의 풍경도. 시헌과 함께 한 박스에 가까운 술을 마시며 떠들었던 것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몸을 비비며 별장에서 뒹굴뒹굴했던 것도 다 좋았다.

시간이.

이대로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시헌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이, 기욱이 평생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과 함께 서진은 시헌의 목에 매달려 입술을 포갰다.

* * *

“하아….”

이불로 몸을 반쯤 덮은 서진은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이불 밑에서 엎드려 있던 시헌이 꼬물거리며 몸을 틀어 담배를 피우는 서진을 올려다봤다.

“뭘 그렇게 봐?”

“그냥. 담배 피우는 게 이렇게 섹시할 수도 있구나 하는 거?”

시헌의 장난에 서진은 얼굴을 붉히며 피우던 담배를 시헌에게 살짝 내밀었다. 시헌은 서진이 피우던 담배를 빼앗아 피운 뒤 후, 하고 연기를 내뱉었다. 담배 끝에서 쓴맛과 함께 서진의 타액이 그대로 느껴졌다. 시헌은 새 담배를 피우는 서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아, 곧 있으면 축제네.”

“그거, 별로 의미 없지 않아?”

“하긴, 같은 축제를 4년이나 보니 솔직히 좀 질려.”

“2년 더 남았잖아.”

“축제 때 뭐 할 거야?”

시헌의 물음에 서진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며 팔을 뻗어 재떨이에 담배를 껐다. 서진의 손이 시헌의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있었다. 요즘 들어 느낀 거지만 시헌의 머리는 뭔가 복슬복슬해서 만질 때의 촉감이 굉장히 좋았다.

“적당히 돌아다니고 중앙도서관에나 가야지. 작년이랑 똑같아. 너도 갈 거지?”

서진의 말에 시헌이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나 오전엔 좀 바빠.”

“왜?”

서진도 시헌도, 딱히 교내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서진에게 학교생활은 공부와 시헌과의 연애면 딱 충분했다. 그 이상의 것은 하고 싶지도, 하기도 싫었다. 시헌은 서진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더니 입술을 뗐다.

“이거 진짜 말하면 안 돼.”

“뭔데?”

“사실 나 고모부네 병원에서 일해. 대학병원은 아니고 개인 병원인데 작진 않아.”

서진은 그렇게 말하는 시헌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병원 알바는 예전부터 했었잖아.”

“오더리 얘기하는 거 아냐.”

“불법이잖아.”

서진의 말에 시헌은 어깨를 들썩이며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시헌이 비밀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서진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했는데?”

“방학 때부터. 좀 됐어. 다들 인턴이나 일반의 정도로만 알아. 심각한 환자들도 거의 없고 하니까. 시간 날 때만 나와 달라는데 내일 아침엔 의사가 없어서 잠깐만 봐 달래.”

“너 괜찮은 거냐?”

“아마도. 실습 들어가면 다 그만둘 거야.”

“하, 역시 집안에 의사들이 많으니 다르긴 하네.”

서진은 반쯤 비아냥대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대학병원처럼 큰 병원은 아니지만, 어딘가의 병원에서 뭔가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서진이라도 욕심이 났다.

“삐지지 마. 오후쯤에 꼭 갈게.”

“하아, 알았어.”

시헌이 서진의 허리를 안으며 입술을 맞췄다. 시헌의 키스에 호흡을 맞춘 서진의 손이 시헌의 페니스를 주물럭거렸다. 시헌의 페니스를 만지던 서진의 손이 점점 페니스 뒤쪽을 쿡쿡 건드렸다. 시헌이 불길한 느낌에 입술을 떼며 이불을 약간 말았다. 서진은 시헌이 이불로 도망치기 무섭게 이불을 걷어 침대 밑으로 내던졌다.

“윽. 서, 서진아?”

“한 번만 하자.”

이불이 사라진 시헌은 여자처럼 다리를 오므리며 침대 헤드에 등을 붙여 베개로 몸을 가렸다. 서진은 시헌의 손에 있는 베개를 잡아당겼다.

“시, 싫어.”

“야.”

“아니, 난 별로 하고 싶지 않…… 하윽, 하하하하… 으읏… 잠깐 이거 반칙… 하하하하 흐읏!”

서진의 손이 배게 꽉 쥔 시헌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서진의 힘으로는 작정하는 시헌을 좀처럼 이길 수 없었다. 유일한 시헌의 약점은 나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지럼을 잘 탄다는 것이었다. 시헌이 베개를 놓자 서진은 재빨리 베개 또한 침대 밑으로 내던졌다.

“큭읍. 하하하하하하! 나… 흐읏… 하으… 하하! 수, 숨 못 쉬겠어… 진짜… 으흐흐흐….”

“하하, 큭. 박시헌. 너 이래도 안 할 거야? 응?”

“하악! 으읏… 하하하하하! 아, 알았어. 하, 흐 할 테니까 그만, 제발 그만….”

서진의 손길에 시헌은 침대를 이리저리 구르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서진은 시헌의 하겠다는 말을 듣고 난 뒤에서야 간지럽히던 손을 멈췄다. 서진의 손이 멈췄지만, 시헌은 숨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진은 그 틈을 타 시헌의 다리 한쪽을 들어 올려 어깨 위로 올린 뒤 시헌의 안을 천천히 간지럽혔다. 안 그래도 간지럼을 태운 위라 예민해져 있던 시헌은 서진의 손이 닿을 때마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흐으… 심술쟁이.”

“하, 누가 할 소릴.”

서진은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시헌의 안을 천천히 넓혀 갔다. 손가락이 시헌의 안에 들어가자 시헌이 싫다며 몸을 뒤틀었다. 서진은 시헌의 다리를 완전히 벌린 뒤 시헌의 페니스를 입안에 머금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페니스와 안을 동시에 괴롭히는 서진에 시헌은 죽을 맛이었다.

“하읏, 으응… 하으으… 읏… 서, 서진아 내가 잘못했어. 응?”

“으읍… 읍… 시끄러….”

서진은 친척네 병원에서 일하는 시헌을 얄밉다고 생각하며 시헌의 페니스를 이리저리 괴롭혔다. 시헌의 사정 직전에 입을 뗀 서진은 일부러 시헌의 귀두 끝을 손가락으로 막았다. 사정이 막힌 시헌은 다리를 반쯤 오므리며 서진에게 매달렸다.

“으응, 바, 반칙이야, 이런 거.”

“하,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야?”

“흐, 빠, 빨리….”

“빨리?”

“하흐, 너, 넣어 줘.”

“아깐 싫다고 했던 주제에.”

“매도 빨리 맞는 게 좋다고 했잖아.”

“매는 아니지.”

“하으으윽! 야야, 제발 그… 하으으응 응…!”

서진의 손가락이 시헌의 전립선 안쪽을 쿡쿡 찔렀다. 시헌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허리를 흔들었다. 서진의 손에 사정한 시헌은 제 안으로 들어오려는 서진의 잔뜩 부푼 페니스를 보며 눈을 흘겨 떴다. 이대로는 절대 못 넘어갈 거다.

시헌은 서진이 체격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서진은 시헌의 작은 허벅지를 잡아당겨 페니스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으응, 으… 하으응….”

“힘 빼 봐. 반밖에 안 들어갔어.”

“흐, 그냥 하, 응. 해. 하윽!!”

서진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시헌의 안으로 조금씩 밀고 들어갔다. 어느 지점을 넘자 쑥 하고 들어오는 서진의 페니스에 시헌은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끝에서부터 조이는 시헌의 안에 서진은 낮은 숨을 들이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헌은 배 안쪽에서부터 물컹한 느낌이 났다.

“으, 너… 하, 야… 으읏… 빼….”

“그게…… 내가 오늘 좀 꼴려. 여러 가지 의미로.”

“무슨…… 하악!”

넣자마자 사정을 했던 서진은 시헌이 채 숨을 고르기도 전에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서진의 정신없는 움직임에 시헌 또한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신음을 흘렸다.

* * *

오전에 일이 있다는 시헌에 서진은 그나마 친한 재혁 일행과 함께 대충 학교 매장을 돌았다. 대충 다 돌아본 것 같은 서진은 회오리 감자를 먹으며 복도를 걸었다. 서진의 예상대로 예년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다른 학생들은 기껏해야 4번인 학교 행사를 의대생은 6년 동안 보니 질릴 법도 했다. 물론, 아직 6번을 다 봤다는 건 아니지만 결국 매년 그 행사가 그 행사라는 뜻이었다. 무엇보다 서진과 시헌은 시끌벅적한 교내 행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서진과 같이 회오리 감자를 먹은 재혁이 물어 왔다.

“형 행사 구경할 거죠?”

“아니. 안 볼 건데.”

“아, 진짜요? 여자 아이돌 공연 온다는데 안 볼 거예요?”

“관심 없어.”

“둬라. 쟨 예과 때부터 행사 잘 안 봤잖아.”

다른 동기의 말에 재혁은 그것도 그렇지 하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시헌 형은요?”

동아리에 들렀다가 뒤늦게 무리에 참여한 재혁은 서진의 옆에 붙어 있어야 할 시헌이 없자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시헌의 성격상 행사를 좋아하진 않지만 서진과 함께하는 데이트를 놓칠 만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사이 안 좋아요?”

“그런 거 아니야. 볼일 있대.”

“흠, 그래요?”

“뭐냐 그 표정은?”

재혁의 의심스러운 표정에 서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혁은 다 먹은 감자 막대를 부러트리며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다.

“하하, 아무것도 아녜요. 어쨌든 글 올린 거 해결됐다고 들었는데 둘이서 잘 지내는 거 보니까 다행이네요.”

“어. 나도 들었어.”

“네? 형 몰랐어요?”

“시헌이가 멋대로 했어. 나도 잘 몰라.”

무슨 경찰서에 갔다는 얘기는 대충 들었지만, 사과문이 올라온 데다 학교생활에 크게 지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서진은 게시글을 쓴 이후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원래부터 캐묻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서진도 경찰서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서진을 사이에 둔 재혁이 동기들과 시헌의 경찰서 사건에 대해 떠들었다.

“근데 들리는 말로는 법률사무소 변호사 끌고 갔다는데요. 막 거기 경찰서장 나오고 난리도 아니었대요.”

“에이. 소문이겠지. 박시헌이 아무리 그래도 로펌은 오바다.”

“아, 진짜라니까요? 내가 아는 형이 거기 경찰서 경관인데 진짜예요. 아, 서진 형한테 물어봐요!”

“나? 난 별로 들은 거 없어서. 그냥 잘 해결됐다고만 들었어. 글 내린 거랑. 원래부터 그런 거 잘 안 물어봐서 몰라.”

서진의 말에 조금 더 자세한 사정을 듣고 싶었던 재혁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시헌 얘기가 나오니까 하는 소린데.

“도대체 시헌 형 집안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시헌 형은 본인 얘길 잘 안 하니까요.”

“그건 나도 좀 궁금하긴 하다.”

“맞아, 나도. 예과 때 교수가 시헌이 형님이라 그러지 않았냐?”

“그 스펙 개쩌는 젊은 교수 맞지?”

동기들과 재혁의 말에 서진은 이쯤 되면 말해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당초 딱히 숨길 만한 얘기는 아니었다.

“박시헌네 의사 집안이야. 양쪽 다.”

“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그 예과 때 들어온 박 교수님이 시헌이 친형이고, 큰누나가 J대 정신건강의 교수고, 엄마랑 아빠가 외과 교수고. 아빠가 몇 년 전까지 J대 병원장 연임하다가 최근에 이사장 됐다고 들었어. 우리 해부학 수업 들어왔던 교수님이 시헌이 삼촌인가 그래. 친척들도 싹 다 의사고 그럴걸. H대 병원장이 시헌이 큰누나 남편네 집안 출신이고.”

“크읍… 캑캑! 뭐, 뭐라고?”

서진의 옆에서 콜라를 마시며 얘기를 듣던 동기 한 명이 사레에 걸려 기침을 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뿐만이 아니라 근처에서 듣고 있던 동기들 대부분의 표정이 굳은 상태였다. 비교적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재혁이 눈을 깜박이며 서진에게 물었다.

“이건 그냥 도는 얘긴데요, 의료계 거물 중에서 유독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의료계의 거물급이라고 불리는 집안이 하나 있다고.”

“난 처음 듣는 얘기긴 한데. 그거 따지면 아마 시헌이네 집안 맞을걸. 걔네 집 이쪽으로는 엄청 엄해서. 의료 쪽 아니면 다른 직업은 꿈도 못 꾸게 한다더라. 나도 걔네 부모님 좀 아는데 진짜 장난 없어. 걔 재수한 것도 부모님 때문이야.”

“아, 어쩐지. 애가 보통이 아니더라. 괜히 리틀 닥터라 불리는 게 아니었어.”

동기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납득한다며 한마디씩 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태생부터 틀린 녀석은 어쩔 수 없었다.

“근데 너도 참 이상한 애랑 사귀는구나.”

“하아, 이젠 뭐. 그냥 그래.”

배부른 투정을 하는 시헌을 받아 주는 것도 서진은 익숙했다. 서진의 입장에선 부럽기 그지없는 환경이지만, 곁에서 가까이 봐 온 시헌의 삶을 생각하면 마냥 행복해 보이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환경에선 그 환경 나름의 고민이 있는 것이었다.

* * *

“…윽.”

중앙도서관에 자리를 잡은 서진은 책상에 팔을 괴며 이마를 짚었다. 아침부터 몸이 좀 서늘하다고 느꼈지만 이어지는 편두통은 서진의 생각 이상이었다. 하필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상비약도 전부 동난 상태였다. 서진은 모처럼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편두통 때문에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창문을 닫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서관 바깥은 축제 공연 준비로 시끄러웠다. 서진은 두통을 견디기 위해 억지로 캔 커피를 마셨다. 두통이 커피를 마신다고 해결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뭐라도 입안에 없으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참다못한 서진은 결국 시헌에게 문자를 보내기 위해 휴대폰을 열었다.

“아, 비밀번호 이거 아니었지.”

슬슬 적응할 때도 됐건만. 워낙 오래 쓴 비밀번호라 서진은 종종 비밀번호를 틀리고는 했다. 그래 봤자 열 번에 한두 번 정도였다. 이렇게 비밀번호를 틀릴 때면 시헌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되었다. 시헌의 생일을 입력한 서진은 시헌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올 때 약 좀」 오후 5:00

문자를 보낸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세미나 제대로 듣고 있는 거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맨날 먹는 거? 다른 거 필요한 건 없고? 괜찮은 거야?」 오후 5:01

뭔 질문을 이렇게 많이 하는지. 그 와중에 정작 중요한 어디가 아픈지, 무슨 약이 필요한지 물어보지 않는 시헌도 시헌이었다. 편두통이 심한 서진은 늘 두통에 관한 상비약을 가지고 다녔다. 시헌과 서진은 그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

「괜찮아.」 오후 5:03

「ㅠㅅㅠ 울 자기 아프면 내 맘도 아픔」 오후 5:03

「편두통이야. 너 언제 오는데?」 오후 5:05

「거의 다 끝나서. 한 시간이면 갈 거야. 넘 피곤하면 좀 자고 있어.」 오후 5:05

「그럴까 봐. 학교 도착하면 연락해」 오후 5:06

「웅웅.」 오후 5:07

휴대폰을 닫은 서진은 넓은 책상에 놓인 캔 커피들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편두통 때문에 습관처럼 커피를 마신 탓에 커피는 순식간에 동이 나 있었다. 도서관을 지나가는 몇몇 학생들이 서진의 책상에 쌓인 캔 커피들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지나갔다.

그때 이후 소문이 나 더욱 노골적으로 시선이 느껴졌다. 서진은 빈 캔 커피들을 챙겨 도서관 복도 바깥 자판기가 있는 라운지로 나왔다. 커피를 뽑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린 순간 지갑을 가방에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되는 일이 없었다.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거야.”

혼잣말로 중얼거린 서진은 앞사람에게 자판기를 비켜 준 뒤 도서관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급하게 몸을 튼 서진이 낯선 남자와 몸을 부딪쳤다.

“죄송…… 씨발.”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 사과하던 서진은 몸 앞에서 나는 익숙한 목소리와 체격에 인상을 찌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빨리 졸업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서진은 진심으로 인훈과 같은 학교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진은 학교 축제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지갑을 가지러 가기 위해 도서관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 서진의 손을 인훈이 재빨리 붙잡았다.

“씨발, 놔라.”

농담이 아니라 서진은 지금 무척이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인훈을 만난 것부터 짜증인 서진은 편두통으로 상당한 저기압 상태였다. 서진의 싸늘한 시선을 느낀 인훈이 붙잡은 손을 놓으며 머뭇거렸다.

“서진아……, 그, 게시판 일 들었어. 그거 너 맞지?”

“해결됐어. 신경 꺼.”

“휴대폰, 번호 바꿨던데.”

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마침 앞사람이 음료수를 뽑고 사라진 후라 라운지에는 두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바깥에서 서성이는 남학생들이 거슬리긴 했지만, 축제니까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인훈의 친구들일 수도 있는 거고. 어쨌든 서진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서진은 문자를 보낸 사람이 인훈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언성을 높였다.

“씨발! 야! 너 진짜 작작 안 해?”

“좋아한다고 했잖아.”

“난 너 같은 새끼 안 좋아한다고.”

서진의 말에 지나가던 여자가 깜짝 놀라며 걸음을 빨리했다. 대박, 들었어? 친구들과 소곤거리는 여자의 눈치가 보인 서진은 머리를 긁적였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서진은 진심으로 소리를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스토킹이라고 해 봤자 고작해야 문자 정도가 전부인 데다 남자를 상대로 스토킹 신고를 할 수도 없으니 참으로 복잡했다.

“아, 미치겠네! 진짜!!”

“서진아, 정 그러면 다른 데서 얘기하자.”

인훈이 먼저 자리를 옮길 것을 제안했다. 서진은 인훈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들었다.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운이 좋으면 잘 이야기를 해서 풀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계속해서 이 자리에 서서 인훈과 떠들 수는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서진은 아직도 떠나지 않는 인훈의 친구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너랑 할 얘기 없다.”

말이 통하긴 개뿔.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인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서진은 못 들은 척 무시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지갑을 챙기기 위해 자리로 돌아오자 자리에는 먹다 만 캔 커피가 있었다. 캔 커피는 전부 버린 줄 알았는데. 정신이 없다 보니 남은 게 있었던 것도 잊은 모양이었다.

서진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은 채 반쯤 남은 캔 커피와 지갑을 챙겨 라운지로 나왔다. 인훈이 있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 라운지에는 인훈을 포함해 아무 사람들도 없었다. 혹시 몰라 복도를 기웃거렸지만 그나마 남아 있던 사람들도 공연이 시작된다는 말에 대부분 밖으로 나간 듯싶었다.

창문 너머로 시끄러운 마이크 소리와 음악 소리가 쿵쿵대며 건물을 울렸다. 서진은 손에 있는 커피를 전부 마신 뒤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뒤 천 원짜리 지폐를 넣고 캔 커피를 뽑기 위해 커피 밑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아, 씨.”

시야가 흔들리며 이상한 부분을 누른 서진은 눈을 찌푸렸다. 단순히 머리가 아픈 게 아닌가? 시헌의 말대로 자리로 돌아가 한숨 자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진의 손이 간신히 캔 커피 버튼을 눌렀다. 쿵쿵거리며 커피들이 쏟아지는 소리가 났지만, 서진은 몸을 숙여 커피를 꺼내기도 전에 다시 비틀거렸다. 결국, 커피를 꺼내는 것을 포기한 서진은 자판기 바로 뒤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짚었다.

‘뭔가 이상해…….’

흔들거리는 시야 속에서 서진은 눈을 감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문득 소파에 주저앉은 서진의 시선이 정수기 옆 쓰레기통에 닿았다. 반쯤 차 있는 쓰레기통 안에는 서진이 막 버린 캔 커피가 있었다. 파란색 캔 커피는 서진이 늘 마시던 브랜드의 캔 커피가 아니었다.

학교 내 자판기의 커피 캔 색은 전부 갈색이었다. 무엇보다 서진의 머릿속으로 분명하게 캔 커피를 전부 버린 것이 떠올랐다. 서진은 제 증상이 편두통이 아닌 약 때문이라는 걸 확신했다. 주머니를 뒤적거렸지만, 휴대폰은 나오지 않았다. 빌어먹을 휴대폰을 두고 온 것이었다. 일어날 기운도 없었던 서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공연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고,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인훈의 짓이 틀림없다고 판단한 서진은 몇 번이나 라운지를 둘러봤다. 인훈은커녕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인훈이 오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없는 것은 다행이라고 하기보단 불행에 가까웠다.

“하으, 미치겠네……. 대체 뭘 탄 거야…….”

당장 의식을 잃거나 기절하지 않는 걸 봤을 때 흔히 돌아다니는 마약은 아닐지도 몰랐다. 약간 피곤한 건 있지만 그게 약 때문인지 아닌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서진은 당장 기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한 후 자리에 앉아 있는 제 상태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다고 뭔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나름 의대생인데 이런 약물에 당했다는 사실이 거지 같았다.

“약물. 약…… 잠깐…….”

몸을 최대한 진정시키던 서진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예전에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미다졸람(Midazolam), 향정신성 의약품이야.’

‘그게 뭔데요?’

은소가 죽기 직전 서진은 가벼운 교통사고로 응급실에 내원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어 다음 날 무사히 퇴원했다. 그날 정신이 없던 응급실에서 서진은 미다졸람이 어쩌고 하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은소의 죽음에 의한 충격으로 본인이 응급실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냈던 사실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상한 것이 한둘이 아녔다. 교통사고라고? 사고는 어떻게 난 거지? 왜 기억이 없지? 사고가 나기 전엔 어디서 뭘 했던 거지?

‘너 말야.’

‘…….’

‘그렇게 아무 남자나 막 따라가면 못써.’

제 몸을 누르고 있는 남자의 손. 그 손은 기욱의 손도, 시헌의 손도 아니었다. 앞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서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낯선 남자들 사이에 있는 인훈의 얼굴이 보였다.

“서진아, 괜찮아?”

서진은 다가오는 인훈의 손을 있는 힘껏 쳐 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약 기운에 다시 머리를 소파 쪽으로 기댔다. 서진은 이를 악물며 정신을 잃지 않으려 버텼다. 의식을 잃지 않을 정도의 정신만을 유지한 서진이 힘겹게 입을 뗐다.

“너, 너… 나한테 뭐 했어.”

“뭘 해?”

“윽. 예전에!! 나한테 뭐 했냐고!!!”

인훈 외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지만, 서진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진은 비틀거리며 인훈의 옷자락을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나서는 안 될 기억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날 서진은 인훈의 집에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은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서진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인훈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낯이 익은 것도. 낯이 익음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인훈이 불편했던 이유를 서진은 그제야 눈치를 챘다. 서진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인훈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 그거. 역시 기억 못 하는구나.”

인훈에게 붙잡힌 서진의 팔이 아파졌다. 약 때문에 서진은 소파에 반쯤 늘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훈은 천천히 소파에 앉아 있는 서진의 위로 올라타 청바지 위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놔. 놓으라… 으읍!”

인훈의 손이 마지막까지 발악하는 서진의 입을 막았다. 그 사이 몇몇 사람들이 길을 지나갔으나 몰려 있는 인훈의 일행 탓에 별일이 아니겠지 하며 길을 서둘렀다.

“근데 서진아, 그렇게 아무 커피나 마시면 못써.”

“씨으… 읍… 너…!!”

입을 막는 인훈에 숨이 막혔다. 흥분한 탓에 약 기운이 더 빨리 올라왔는지 서진의 의식이 점점 끊겨 갔다. 이내 완전히 의식이 끊긴 서진의 몸이 소파 앞쪽으로 훅 하고 꼬꾸라졌다.

* * *

중앙도서관에 도착한 시헌은 교재는 있고 서진이 없는 자리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몰래 놀라게 해 주려고 일부러 말을 하지 않고 왔건만 정작 놀라게 하려 했던 대상인 서진이 자리에 없었다. 금방 오겠거니 하고 앉아 기다렸지만, 서진은 올 생각이 없었다.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기분에 시헌이 전화를 걸었다.

“…뭐야?”

의자에 걸려 있던 서진의 잠바 안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바 주머니에서 서진의 휴대폰을 꺼낸 시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휴대폰까지 두고 도대체 어딜 간단 말인가. 시헌은 서진을 찾기 위해 중앙도서관 복도로 나왔다.

축제가 한창인 터라 도서관 복도는 싸늘할 정도로 조용했다. 휴대폰을 두고 나간 서진을 찾으러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엇갈릴 수도 있었다. 분명한 건 도서관에서 공부하며 머리가 아프다고 했던 서진이 휴대폰까지 두고 나갈 만큼 급한 일이 있냐는 것이었다. 멀리 시헌과 동기인 재혁이 복도에서 머뭇거리는 시헌을 보고 뛰어왔다.

“시헌 형!!”

“강재혁, 무슨 일이야?”

시헌은 공연을 보러 간다던 재혁이 갑작스럽게 도서관으로 뛰어오는 이유를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다. 꽤 멀리서 온 모양인지 시헌의 앞에 선 재혁은 정신없이 숨을 골랐다.

“그, 헥헥… 그런… 것보다! 서진 형은요?”

“나도 몰라.”

“네? 형이랑 있었던 거 아녜요?”

“방금 왔어.”

시헌은 서진의 휴대폰과 서진에게 사 줄 약을 꺼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서진이 어디 있는지는 재혁이 아니라 시헌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시헌은 서진을 급하게 찾는 재혁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서진이 어딨는지 모른다는 시헌의 대답에 재혁은 곤란하게 됐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내 시헌의 눈치를 보던 재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형 진짜 화내지 마세요.”

그 말을 시작으로 재혁은 시헌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 * *

“…강재혁. 너 지금 뭐라고?”

재혁의 말을 들은 시헌이 금방이라도 때릴 것처럼 재혁의 멱살을 잡았다. 재혁은 시헌에게 붙잡힌 손을 놓으며 시헌을 달랬다. 시헌에게 붙잡힌 멱살 부근엔 아직도 손의 힘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헌이 체격에 비해서 힘이 세다는 말을 재혁은 멱살이 잡힌 이후에야 실감했다.

“아, 진짜! 형. 제발 그렇게 화내지 말고 좀 들어 봐요.”

“씨발, 내가 화 안 나게 생겼어? 똑바로 말 안 해?”

“아, 알았으니까. 나와서 얘기해요. 네?”

재혁이 자리를 옮기자며 눈치를 줬다. 기분 같아선 이 자리에서 말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재혁에게 화풀이해 좋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헌과 재혁은 도서관의 비상계단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헌이 철제문에 몸을 반쯤 기댄 뒤 재혁을 노려봤다.

“다시 설명해 봐. 천천히.”

“그러니까요. 아, 이거 진짜 말 안 하려 했는데. 사실 저도 게이거든요.”

시헌이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찼다. 시헌은 재혁이 묘하게 자신과 서진이 노는 것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진작부터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보통 남자 동기들이 장난으로 넘어가는 부분을 재혁만큼은 장난이 아닌 것 같다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가 종종 있었다. 시헌은 재혁이 딱히 서진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혁의 행동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실은 몇 달 전부터 사귀는 사람이 있어요. K대 졸업하고 N사 인턴인데. 하, 어쨌든 그…… 커뮤니티가 있거든요.”

“커뮤니티?”

“저희 대나무숲 같은 사이트요. HJK대생 연합으로 만든 게이 커뮤니티예요.”

요약하자면 명문대생 게이 커뮤니티라는 뜻인데 시헌은 그런 사이트가 있다는 것을 재혁의 말을 통해 방금 알았다. 시헌의 팔을 붙잡은 재혁은 서진의 자리로 돌아왔다. 서진의 자리에는 서진이 두고 간 노트북이 있었다. 빠르게 주소를 친 재혁은 게시글 하나를 클릭했다.

“야, 이거…….”

의과대학 게이썰. 진아의 원본 게시글은 지워졌지만 불펌된 게시글까지는 방법이 없었다. 진아의 글을 그대로 복붙한 게시글은 그대로 재혁이 말한 게이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었다.

“이게 뭐 어쨌다고?”

“그러니까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재혁은 계속해서 말을 빙빙 돌리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결국, 재혁이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며 다른 게시글을 클릭했다.

「초대 구함@@ (34)」

메인에 게이썰 떠 있는 K라는 애 옹호하는 병신 같은 글 있던데 ㅋㅋㅋ

걔 ㄹㅇ씹 걸레임

내가 같은 고등학교인데 걔 고3 때 학교에서 원조교제 하다가 걸려서 자퇴함

근데 그때 걔가 데려왔던 남친? 여튼 그 인간도 돈 존나 많고 무슨 대학병원 의사였던 걸로 기억함

막 고3 때 그 남자한테 옷이랑 이것저것 받은 것도 봄 ㅇㅇ 왜냐면 걔네 집이 누나밖에 없어서

누나랑 살아서 그런 비싼 옷 살 만한 여력이 안 됨

글고 어제까지 싸구려 입다가 하루아침에 존나 비싼 잠바랑 가방 쳐 가져온다는 게 레알 말이 안 됨

여튼 썰에 올라온 B도 집 잘산다고 그렇지 않았음?

진심 돈 밝히는 거 개쩔고 여우 같은 놈임ㅋㅋㅋ

내가 그 새끼랑 한 거 있는데 원하는 사람 보내줌

글고 이번 축제 때 나랑 따먹고 인증할 사람 구함

알아서 쪽지 주셈 ㅇㅇ

ㄴ 씨발 야동사이트냐

ㄴ 개 또라이 새끼 누가 신고 안 함? 글 내려라

ㄴ ㅋㅋㅋ위에 열폭하네 ㅋㅋㅋ 걸레라잖아 썰글도 다 뻥이네 그럼

ㄴ 존나 동정했던 내가 쓰레기네. 그 B라는 애는 걸레인 거 알고 있음?

ㄴ 모를 듯 ㅋㅋㅋㅋㅋㅋㅋㅋ개불쌍 ㅋㅋㅋㅋ

ㄴ 내가 방금 쪽지 해서 영상 받아봄 ㅋㅋㅋ 걍 노답걸렌대? 그거 숨기고 저렇게 하는 것도 신기하다 궁금한 새끼 걍 쪽지해 봐 근데 진짜 딱히 후회는 안 함ㅋ

시헌은 도무지 덧글의 내용과 본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진이 걸레고 동영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가? 시헌은 서진의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주먹을 꽉 쥐었다.

“너 설마 이런 거 믿는 거 아니지?”

“…….”

“야, 강재혁.”

시헌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무대 공연의 음악이 시끄럽게 들렸으며 중앙도서관은 텅텅 비어 있었다. 시헌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형, 내가 진짜 안 믿으려 했는데…….”

재혁이 본인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호기심에 쪽지를 보낸 뒤에 받은 영상이었다. 시헌은 재혁에게서 받은 휴대폰을 빼앗듯 낚아채 이어폰을 낀 뒤 영상을 틀었다. 두 사람의 섹스 영상을 본 시헌은 오래 보지도 않고 이어폰을 뽑아 휴대폰을 재혁에게 던졌다. 영상 속 남자는 상대 남자의 이름을 서진이라고 하고 있지만, 시헌은 영상을 본 순간부터 알았다.

“강서진 아냐.”

“아니라구요?”

영상 속 인물이 묘하게 서진과 닮았다는 것은 시헌도 인정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서진은 저런 식으로 천박하게 남자에게 앙앙대며 영상이나 찍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시헌은 진위를 의심하는 재혁의 말에 대답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영상을 조작한 건 화가 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시헌은 서진의 노트북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서진의 휴대폰은 시헌에게 있고, 서진은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시헌은 노트북으로 게시글의 날짜를 확인했다. 17일. 적어도 일주일도 전에 올라온 게시글이었다.

“씨발, 너 왜 빨리 말 안 했어?”

서진에게는 몰라도 서진과 사귀고 있는 시헌에게는 최소한 하루 전에는 말을 해 줬어야 했다. 그랬다면 세미나를 가지도, 서진을 혼자 두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시헌의 추궁에 재혁은 억울하다며 소리를 질렀다.

“말했잖아요! 강간 모의할 새끼들 모은다고 하면 보통 누가 진짜라고 믿냐구요. 그냥 미친 새낀 줄 알았단 말이에요!! 게다가 서진 형이 오후에 형 온다고 해서 시헌 형이랑 같이 있으면 괜찮겠지 했던 거죠.”

“씨발.”

“근데 혹시나 해서 서진 형한테 전화했는데 전화도 안 받지. 서진 형은 없고,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웬 이상한 남자들이랑 서진 형이 같이 갔다고 하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하냐구요!!”

서진만큼이나 오랫동안 같은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어 왔던 재혁은 시헌의 성격을 잘 알았다. 특히 시헌은 서진에 관한 일은 무척이나 민감했다.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진아의 남자 친구를 팬 것만 해도 시헌의 서진에 대한 민감도를 알 수 있었다.

재혁은 처음 사이트 얘기를 했을 때도 시헌에게 맞을 각오를 하고 말한 것이었다. 시헌은 울 것 같은 재혁을 보며 화를 삭이고 F5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새 게시글이 뜬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야, 강재혁. 너 댓글 달아.”

“…네? 뭐, 뭐라구요!!”

“너도 간다고 댓글 달아서 좆같은 새끼들 위치 찾으라고 빨리!!”

시헌이 반강제적으로 재혁을 노트북 앞으로 밀었다. 시헌을 뒤에 둔 재혁은 로그인 버튼을 눌렀다.

“아, 돌겠네. 진짜!!”

시헌의 눈치를 본 재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글을 올린 사람과 쪽지를 주고받았다. 등 뒤로 시헌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재혁은 한참 만에야 온 답장을 확인했다.

“형, 구공과대 2층 실습실이래요.”

“…씨발.”

“아, 형!!”

재혁보다 조금 더 일찍 쪽지를 읽은 시헌은 곧장 중앙도서관을 뛰어나갔다. 시헌이 뛰쳐나가는 걸 본 재혁도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구공과대는 아무리 빨리 뛰어가도 5분은 넘게 걸렸다. 심지어 바깥은 축제 분위기로 사람들이 가득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재혁은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가는 시헌의 뒤를 쫓았다.

* * *

“읍…!! 하옥!”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낯선 남자의 손에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머리의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밑에서부터 허리를 움직이던 남자의 페니스가 울컥 하며 서진의 안을 채웠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강의실의 천장이 너무나 높아 보였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다른 세계 같았다. 서진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피스톤질을 하던 남자 한 명이 반쯤 정신이 나간 서진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흐윽….”

“큭큭, 하하하! 야, 이 새끼 우는데?”

“뭘 울어, 걸레 새끼가.”

“근데 영상이랑 뭔가 다르지 않냐? 잘못 건드린 거면 좆되는 거 알지?”

“씨발, 이제 와 찔리는 척 굴지 마라.”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존나 걱정돼서 그런 거지.”

“강간범 새끼가 걱정은 지랄.”

반강제로 벌려진 다리에서 흘러내리는 정액과 눈물을 흘리는 서진을 보며 큭큭대던 남자가 다 한 모양인지 제 옷을 추슬렀다. 정체 모를 남자들이 몇 번이고 서진을 범할 때 인훈은 강의실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서진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

대충 다 돌았다고 생각할 무렵 남자들의 시선이 인훈에게 닿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인훈이 바닥에 강제적으로 눕혀져 있는 서진에게 다가왔다. 약 기운이 반쯤 가신 서진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에게 다가오는 인훈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날, 교통사고를 당하기 직전 자신은 도망치고 있었다. 인훈의 집에 가서 정체 모를 음료수를 마시고 난 이후 인훈에게 도망쳤던 것이었다.

끔찍하리만큼 지독한 기억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순간에 기억이 났다. 다른 건 몰라도 인훈에게만큼은 당하고 싶지 않았다. 서진은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며 뒤로 물러났다.

“야, 어딜 도망쳐!”

“하윽! 으읍… 놔, 놓… 으라고!!!”

“서진아.”

바지 버클을 반쯤 푼 인훈이 서진의 위로 올라탔다. 인훈의 손이 눈물로 범벅된 서진의 뺨을 쓸어내렸다. 인훈의 손이 지나갈 때마다 서진의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낯선 남자가 다가와 서진의 몸을 눌렀다. 약 기운이 가시지 않은 데다 다른 남자들과의 섹스로 지친 서진은 제대로 된 반항을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왜 그랬어.”

“……으읍… 흑… 지마… 하지 마. 하지 마. 제발 그만…!!”

“처음부터 날 좋아한다고 했으면 됐을걸.”

“제발, 하지 마, 하지…… 아으으윽!! 흐윽….”

서진의 다리를 벌린 인훈의 페니스가 거침없이 서진의 안을 범했다. 주변에 있던 남자들은 발버둥 치는 서진의 몸을 누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런 걸 원했던 건 아니었다.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누나와 함께 세상에 나와 처음 본 하늘은 파란 하늘이 아니었다.

화재의 연기로 가득한 검은 하늘이었다. 부상자들과 시끄럽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 저와 누나를 안고 사다리차를 타고 내려왔던 젊은 경관의 온몸에는 거무튀튀한 숯들이 잔뜩 묻어 있었다. 지옥을 나온 사람에게 천국은 없었다. 지옥의 바깥은―

“……뭐야?”

쾅, 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강의실에 있던 대부분의 남자가 요란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제 몸을 누르고 있는 인훈과 남자들 때문에 서진은 문 너머 소란의 주인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남학생 한 명이 몸을 틀자 그제야 강의실 문 앞에 서 있는 시헌의 발치를 볼 수 있었다.

책상을 밀어 놓은 강의실 바닥에는 그들이 멋대로 구경하다 던져 놓은 서진의 지갑이며 벗겨진 벨트, 옷가지 등이 흘러 굴러다녔다. 제법 덩치가 큰 남자 한 명이 시헌의 앞으로 다가왔다.

“씨발, 너 뭐…!”

시헌의 주먹이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가격했다. 시헌은 진심으로 화가 난 상태였다. 벌어진 일의 원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헌이 남자의 얼굴을 가격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찬 상태의 재혁이 뛰어왔다.

“시헌 형! 그러니까 같이…… 이게 무슨…….”

“씨발 새끼!!”

얼굴을 맞은 남자가 시헌을 향해 덤벼들었다. 시헌은 실습실 벽 한쪽에 놓여 있던 정체 모를 막대를 집어 옆쪽에 있는 유리 선반 쪽으로 휘둘렀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유리 선반이 깨지며 유리 파편이 이곳저곳으로 튀었다.

“저, 저런 미친 새끼가 다 있…….”

“씨발.”

“…….”

“니네 다 오늘 살아 돌아갈 생각하지 마라.”

시헌은 진심이었다.

* * *

“뭐? H대 패싸움?”

“네네. 5분 내로 구급차 온다는데 생각보다 난장판인 것 같더라구요.”

응급실 바깥에 놓인 자판기에서 캔 음료를 꺼내 마신 윤성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윤성과 함께 캔 커피 반쯤 마신 정혁은 혀를 끌끌 찼다. 오늘이 H대 축제라는 건 들었지만 패싸움이라니. 명문대생이라는 애들이 참으로 잘하는 짓이구나 싶었다.

“머리가 좋아도 결국 청춘이니까요.”

“청춘은 지랄. 근데 왜 H대 병원 안 가고 여기로 보낸대?”

“H대 사거리에서 10중 TA(교통사고) 나서 거기 비상이래요. 우리 쪽으로 보낸다는데 제가 그냥 콜했죠. 이걸로 걔넨 우리한테 빚 하나 진 거예요.”

“누가 응급실 과장 아니랄까 봐 쇼한다 아주. 그래 놓고 우리 팀한테 도와 달라 할 거잖아.”

“오늘 한가하잖아요. 두 명만 주세요.”

“야! 우리도 바빠. 나 있잖아. ICU 돌고 금방 내려올게.”

“선배가 오시면 저야 환영이죠. 그럼 이따 봬요.”

별일 없을 거로 생각한 정혁은 비상계단을 통해 중환자실로 올라갔다. 대충 환자들을 둘러보고 내려온 정혁은 로비를 통해 응급실 입구 쪽으로 들어갔다. 응급실 입구에는 여러 대의 구급차 외에도 경찰차 몇 대가 더 와 있었다. 패싸움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러니까 교수라고 했잖아요. 급하다니까.”

“야, 박기욱 너 뭐 하냐?”

응급실 안쪽 입구에서 경비와 사복을 입은 기욱이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기욱이 경비와 싸우고 있다니 별일도 다 있구나 싶었다. 정혁의 가슴에 있는 신분증과 가운을 확인한 경비가 정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이쪽 선생님이 신분증도 없이 그냥 지나가시려 해서…….”

정혁의 질문에 검은 옷을 입은 응급실 경비가 곤란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욱이 한 달간 해외 연수를 간 사이에 온 경비는 기욱의 얼굴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몇 달 전 병원에서 신분증을 위조해 가짜 의사인 척 행세를 했던 사람들이 발각되면서 병원 내 외부인과 의사들의 검문이 강화된 상태였다. 간호사에게 말해서 확인을 받아도 되지만 정혁이 보기에 기욱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어 보였다. 정혁은 기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 친구, 이렇게 보여도 교수 맞습니다. 제가 보증하죠. 급해 보이는데 들어가도 됩니까?”

“아. 예. 물론이죠.”

정혁의 말에 경비가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기욱은 문이 열리기 무섭게 정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기욱은 서둘러 응급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정혁이 들어온 것을 본 윤성이 뛰어왔다. H대생들이 온 모양인지 일반 환자들과 섞여 응급실은 정신이 없었다.

“야, 박기욱 쟤는 신분증도 안 가져오고 문 앞에서 대체 왜 저랬던 거래?”

정혁은 처치실과 응급실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중환자실에 있었던 시간도 길었고, 생각보다 환자가 많지 않아 정혁의 도움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이미 환자들의 초진을 대충 마친 윤성이 정혁을 본원과 연결된 응급실 복도로 이끌었다.

“뭐야? 왜?”

“형, 박기욱 만났어요?”

“어. 요 앞에서. 왜? 아니, 애가 멍청하게 경비랑 싸우고 있으니까 좀 도와줬지. 근데 쟤 벌써 출근이야?”

“귀국은 이틀 전에 했다는데 원래 내일부터 출근이래요. 그보다 지금 병원 뒤집히고 난리도 아냐.”

“왜?”

“H대 패싸움. 그거 박기욱 동생이 했대요.”

“시헌이가?”

“형 박기욱 동생이랑 아는 사이예요? 어쨌든 근데 박기욱 동생이랑 그 신경외과 강서윤 동생이랑 같은 H대 의대인데, 레이프래요. 그거 때문에 경찰들 오고 지금 난리도 아녜요.”

정혁은 그제야 경찰들이 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강간이라니. 뜻밖에 예상치 못한 말에 정혁은 이마를 짚었다.

* * *

“…어.”

“뭐라고?”

“씨발, 풀라고!!”

침대에 수갑이 차인 채로 묶인 시헌은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주먹을 휘두른 이후 필름이 끊긴 듯 정신이 없었다. 현장은 말 그대로 피바다였다. 사건을 접수하고 온 경찰로 감당되지 않자 차로 학교 인근을 지나고 있던 형사들이 와서 시헌에게 수갑을 채운 뒤에야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병원에선 특별한 사유나 의사의 소견이 없는 이상 환자를 묶을 수 없다는 의사들도 가해 남자들을 보자마자 곧장 다시 주먹을 휘두르는 시헌에 어쩔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시헌의 손목은 수갑에 파여 피가 흘러내렸다.

“야, 어린것이 어따 대고 씨발씨발 못 하는 말이 없…….”

“죽여 버릴 거야.”

“이게 진짜…….”

“이거 안 풀어? 니들이, 니들이 뭘 아는데? 강서진에 대해서 뭘 아냐고!! 이거 풀라고!!!”

소리를 지르는 시헌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서진이 어떤 사람인지. 시헌은 서진이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됐다. 당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됐다. 서진과 처음으로 사귈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주겠다고 다짐했다.

그건 술에 취해서 한 소리나 허세가 가득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시헌이 봐 온 서진은 늘 불안했다. 조금만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기울어질 것 같았다. 시헌의 팔에서 흐르는 피에 간호사가 깜짝 놀라 다른 의사를 불렀다. 그러나 시헌은 서진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 서진을 만나기 전까지 치료를 받을 생각 따위는 죽어도 없었다.

“강서진, 그렇게 만든 새끼들 인훈인지 하는 그 새끼 데려오라고!!”

촤륵, 하고 시헌의 침대 위에 있던 커튼이 걷혔다. 침대 너머로 급하게 뛰어온 듯한 사복 차림의 기욱이 있었다. 근처에 있던 다른 의사들에게 시헌이 난리를 치고 있다는 것을 듣고 온 것이었다. 시헌은 기욱을 보며 수갑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수갑이 닿을 때마다 손목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박시헌.”

“형…. 나 이것 좀 풀어 줘. 풀어 달라고. 강서진, 서진이가…!!”

“입 안 닥쳐?”

“형? 지금 뭐라고…… 씨발, 장난해…!”

기욱이 시헌의 뺨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시헌의 몸이 침대 뒤로 뉘어졌다. 근처에 있던 다른 간호사와 의사들이 깜짝 놀랐다.

“박 교수님!!”

“쟤, 수갑 풀어 주세요.”

“하지만…….”

“풀라고.”

기욱의 말에 옆에 있던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형사에게 눈치를 줬다. 형사가 어쩔 수 없다며 시헌의 수갑을 풀었다. 기욱은 팔을 만지작거리는 시헌을 내려다봤다.

“강서진 보고 올 테니까. 누워 있어.”

“싫…….”

“박시헌, 치료받아. 한 번만 더 침대에서 내려오면 가만 안 둬.”

기욱이 간호사와 의사들에게 눈치를 줬다. 기욱의 시선을 느낀 시헌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기욱은 서윤이 오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인훈을 마주칠 수 있었다.

당시 뒤쪽에 있던 인훈은 비교적 싸움에 덜 휘말려 상처가 많이 없었다. 기욱은 눈앞에 있는 청년이 시헌이 말한 인훈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냥, 알 수 있었다. 기욱은 인훈의 앞으로 다가갔다. 탁, 하고 그런 기욱의 팔을 멀리서 보고 있던 정혁이 붙잡았다.

“하지 마라.”

“놓으시죠.”

“갈 거면 그거 빼고 가.”

응급실에 들어온 이후 후배를 시켜 챙겨 오게 한 정장 가슴에 달린 명찰을 흘끗댔다. 기욱은 명찰을 정혁에게 내던진 뒤 인훈의 앞으로 다가갔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인훈이 다가오는 기욱과 몸을 부딪쳤다.

“씨발, 눈 어따 뜨고 다니는…!!”

기욱은 인훈을 보자마자 주먹을 휘둘렀다. 인훈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근처 선반을 쓸었다.

“너… 너 뭐야 씨발!! 미, 미친 거 아냐? 뭐 하는 짓…… 억!”

기욱은 일어나려는 인훈을 향해 발을 휘둘렀다. 영문을 모르는 의사들과 경찰들이 뛰어왔다. 기욱은 입고 있던 파란 셔츠를 접으며 바닥에 주저앉아 저를 올려다보는 인훈을 싸늘하게 보더니 전화를 걸었다.

― 어. 하민아. 나 박기욱인데, 너 오늘부터 일 좀 해야겠다.

― 야, 박기욱! 너 지금 무슨 소릴…….

기욱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뒤 뒤에 있는 규건에게 휴대폰을 던졌다. 규건에게 휴대폰을 넘긴 기욱은 인훈과 시선을 맞췄다. 인훈의 머리채를 잡아당긴 기욱은 곧장 인훈을 향해 강하게 뺨을 휘둘렀다.

“억!! 당신들… 뭐… 너 뭐냐고!! 누가 좀…!!!”

인훈의 사건에 대해 알고 있던 경찰과 병원 관계자들은 애써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인훈의 뺨을 향해 휘두르는 기욱의 손찌검 소리가 점점 커졌다.

* * *

“괜찮냐?”

“모르겠어요.”

침대에 살짝 걸터앉은 정혁의 말에 시헌은 고개를 흔들었다. 서진을 만나고 싶은데,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병원에 오기 전 시헌이 기억하는 거라고는 엉망이 된 자신을 보며 울고 있던 서진의 모습이었다.

“근데 교수가 이런 짓 해도 되는 거예요? 안 바빠요?”

“새끼, 이제야 교수라고 불러 주는 거 봐라.”

“교수를 교수라고 하지 뭐라고 그래요. 말 돌리지 말고요.”

“우리 과가 그렇지 뭐. 바쁠 땐 바쁘고 아닐 때는 아냐. 오늘은 뭐, 비교적 한가한 편이고.”

정혁이 당당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게 자랑할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시헌은 별 감각이 없는 팔을 내려다봤다.

“왜 이렇게 봉합을 잘해요?”

무의식중에 내뱉은 시헌의 말에 정혁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해 보니 중학교 시절 꼬맹이가 이제 곧 있으면 실습생이니 의사가 됐다. 시간이 빨라도 너무나 빨랐다. 본인은 의사가 되기 싫다고 그렇게 발악을 하더니 결국 재수까지 하면서 의대에 들어왔지 않는가. 정혁은 운명이라는 생각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시헌의 처치를 대충 마친 정혁은 손가락 끝으로 시헌의 이마를 꾹꾹 눌렀다.

“얌마, 밥만 먹고 이 일만 했는데 당연한 거 아니냐.”

“아닌 의사들도 많으니까 하는 소리잖아요. 제가 바본 줄 알아요?”

“바보 맞지. 의사 될 녀석이 다른 사람한테 폭력이나 휘두르고 말야. 그거 안 좋은 버릇이다.”

“모르겠어요.”

“뭐가 몰라?”

“진짜 모르겠다고요. 그냥, 어떻게 해야 했는지 모르겠었어요.”

시헌은 이불을 무릎까지 당기며 얼굴을 묻었다. 작게나마 이불 안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날, 조금만 더 서진에게 신경 썼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휴대폰 번호를 바꾸는 하지 않던 짓을 할 때부터 의심했더라면 싸우는 일이 있어도 서진에게 사정을 들었을 것이었다.

시헌은 인훈에 관해, 스토킹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이유의 절반이 자신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라는 것을 알았다. 화가 나면서도, 미안하면서도, 괜히 무력해졌다. 정혁은 헝클어진 시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헌은 일부러 이불에 눈물을 닦은 뒤 고개를 들었다.

“서진이 만나러 갈래?”

“제가, 그래도 될까요?”

“안 될 게 뭐가 있어.”

정혁이 조심스럽게 시헌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침 볼일을 보고 젊은 형사 한 명이 돌아왔다. 수갑을 채우고도 난동을 부린 시헌은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다.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주치의입니다. 같이 갔다 올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정혁이 시헌을 막는 형사를 말렸다. 형사의 시선이 정혁의 가슴에 있는 신분증에 닿았다. 외상외과 임정혁. 이런저런 사정으로 병원에 자주 들르는 형사들 사이에서 몇몇 의사들은 이름이 낯이 익었다. 정혁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몇 번인가 선배 형사들과 함께 정혁을 만난 적 있던 형사는 얼굴을 보며 적당히 길을 비켜 줬다.

시헌은 정혁과 함께 가장 구석에 있는 자리로 들어갔다. 커다란 커튼이 쳐져 있는 침대는 이상하게 다른 곳과는 묘한 위화감이 흘렀다. 정혁이 머뭇거리는 시헌을 대신해 커튼을 살짝 걷어 줬다. 커튼 너머로 마침 일어나 앉아 있던 서진과 눈이 마주쳤다.

마침 다른 환자 건으로 윤성이 다가왔다. 정혁은 윤성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하며 커튼을 쳐 줬다. 커튼 하나로 안과 바깥이 단절된 것 같았다. 시헌은 서진을 향해 팔을 뻗었다.

“서진아.”

“…….”

“강서진, 이쪽 좀 봐 봐.”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서진의 시선을 따라가도 달리 보이는 건 없었다. 시헌은 목이 메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입술을 뗐다.

“난… 괜찮으니까 이쪽 봐 봐. 서윤 누나 오기 전에 얘기 좀 하자. 응? 서진아.”

목이 반쯤 나간 시헌이 서윤을 걸고넘어졌다. 서윤이라는 말에 서진이 반응하며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서윤의 이름이 나오자 서진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시헌은 급한 대로 제 소매로 서진의 눈가에 말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서진은 그런 시헌의 손을 탁, 붙잡았다.

“미안해. …흐윽, 미안해….”

“야, 왜 니가 나한테 사과해. 괜찮아? 아픈 데는…… 없고?”

시헌은 차마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프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겠다. 서진은 시헌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흐윽… 흑… 나, 내가… 내가 미안해. …흐윽… 미리 말해야 했는데. 그냥, 괜히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말할 걸 그랬나 봐…. 흐으윽….”

끅끅대며 우는 서진을 시헌은 말없이 달랬다. 잠시 상태를 보러 왔던 정혁이 서진이 우는 모습을 보며 근처 의사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커튼 너머의 울음소리는 한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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