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0 한우민 (43/83)

Chapter. 40 한우민

일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검사실 대부분이 로비와 가까운 저층에 있어 환자들을 데리고 한 번 검사실을 다녀올 때면 정신이 없다는 것만 빼면 그럭저럭 할 만했다. 그것도 몇 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샛길을 외우게 되었다.

서윤의 동생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병동 간호사들은 대게 서진에게 살갑게 잘 대해 줬다. 특히 서윤의 밑에서 배웠다는 서진과 동갑내기인 1년 차 간호사와는 이틀 만에 제법 말을 편하게 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됐다. 서진은 아직 점심을 먹지 않고 간호사 스테이션에 앉아 홀로 일을 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적당히 말했다.

“나 점심 먹고 올게.”

“응. 이따 보자.”

많이 바쁜 모양인지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손을 흔들며 컴퓨터 작업에 몰두했다. 서진은 식당이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엘리베이터가 거의 닫혀 갈 무렵 갑자기 문이 열렸다. 막 수술실에서 나온 것 같은 차림을 하고 있던 우민은 안 그래도 만석이었던 엘리베이터 안을 비집고 억지로 비집고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보호자들을 향해 고개를 숙인 우민은 서진이 있는 엘리베이터 안쪽 구석으로 들어갔다. 첫날 출근 이후 얼굴을 보면 인사를 하라고 얘기는 했지만, 정작 병동의 오더리 신세에 가까운 서진이 하루 반나절을 중환자실과 수술방에서 사는 우민을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우민에게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던 서진은 우민이 자신을 보지 못했을 거로 생각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우민이 서진의 팔꿈치를 꼬집었다.

“아악!! 읍….”

엘리베이터 안으로 서진의 비명이 나자 엘리베이터 안 사람들이 서진을 바라봤다. 저에게 시선이 몰린 것을 눈치챈 서진은 우민이 한 것과 똑같이 고개를 숙이며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하하, 하고 낯간지럽게 웃었다. 서진은 우민에게 꼬집힌 팔꿈치를 만지작거렸다.

“야, 알바.”

“왜요.”

“왜요? 너 진짜 혼난다? 내가 얼굴 보면 알은척하랬지 누가 고개 돌리래?”

“…….”

“어쭈 이거 봐라.”

서진이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돌리자 우민이 기가 찬다며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엘리베이터는 1층까지만 운행하기 때문에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엘리베이터를 갈아타거나 비상계단을 이용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1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내리려는 사람과 올라가려는 사람들이 혼잡하게 섞였다. 서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우민에게 말했다.

“뭐라고 인사해야 할지 몰라서 못 했어요.”

“그걸 핑계라고 하냐?”

“그렇다고 꼬집을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서진은 우민의 말을 반쯤 무시하며 지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당돌하게 말을 하는 서진을 본 우민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서진의 말은 버릇이 없는 것과는 미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라는 것이 틀린 구석이 없었다.

제 성격을 알고 있는 병원 내 관계자들은 우민에게 절대 저런 식으로 대들지 않았다. 설령 말이라도 꺼냈다가는 상대가 누구든 병원 생활하면서 반평생 들어야 할 욕을 전부 우민에게 들을 수 있었다. 알바생을 상대로 그런 욕을 할 수도 없었던 우민은 서진이 몰라서 그러는 걸 거라며 적당히 넘어갔다.

“다음부터 인사해라.”

“네. 죄송해요.”

“죄송한 거 알면 됐다. 벌써 일 끝났냐?”

“아뇨. 밥 먹으러요.”

서진은 우민의 차림을 살짝 훑었다. 수술복 차림에 중환자실을 다녀온 탓에 입가에는 아직도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으며 서진과 지하철에서 만난 날 이후 집에 들어가지 않은 모양인지 머리는 잔뜩 눌려 있었다.

우민은 식당이 있는 지하 복도에 도착한 뒤에서야 마스크를 턱 아래로 내렸다. 기욱도 전문의가 된 이후에도 이틀에 한 번꼴로 날밤을 새우고는 했다. 교수인 기욱도 그런데 하물며 앞에 있는 우민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형은요?”

“형?”

생각 없이 꺼낸 말에 우민이 반문했다. 서진은 큰 실수라도 한 건가 싶어 뺨을 긁적였다.

“그럼 뭐라 불러요?”

“형이 뭐냐. 교수님이라고 불러, 교수님이라고.”

“교수요?”

서진은 우민의 말을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우민의 자세한 나이는 알 수가 없지만. 외관상으로 보기에 우민은 기껏해야 기욱과 비슷한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기욱도 젊은 나이에 교수직을 맡고 있으니 딱히 놀라울 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기욱이 예외이기 때문이지 흔한 일은 아니었다.

“한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점심 드시러 가시는 겁니까?”

“어.”

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저년차 레지던트 한 명이 큰 소리로 고개를 숙이며 우민에게 인사를 했다. 진짜 교수였군. 그의 인사에 우민은 서진을 슬쩍 보며 가볍게 웃었다. 진짜라고. 서진을 보는 우민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알았다고요. 서진은 무슨 잔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속으로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점심 맛있게 드십쇼.”

“그래. 이따 저녁 잘 먹어라.”

“예.”

서진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레지던트를 시선으로 좇았다. 그는 이미 서진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우민 쪽으로 고개를 돌린 서진은 두 사람의 대화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점심인데요?”

저녁 잘 먹으라니. 서진은 눈을 깜박이며 우민을 올려다봤다. 밖이 이렇게 환하고 환자들이 많은 상황에서 시간을 착각했을 리는 절대로 없었다. 우민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서진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 아아. 방금 지나간 의사 우리 과 1년 차거든. 아마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을 텐데 보통 첫 끼는 점심이 아니라 저녁이니까.”

우민은 엄청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당연하게 말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온 우민은 서진의 앞에서 계산대를 가로막았다. 서진이 뭐 하는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우민은 멋대로 입을 열었다.

“치즈 돈가스 2개 주세요.”

설마 혼자서 2개를 먹을 리는 절대로 없었다. 급하게 챙겨 온 카드로 계산한 뒤 영수증을 받은 우민은 의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익숙하게 앉아 서진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우민의 노골적인 시선에 서진은 마지못해 우민의 앞에 앉았다.

같은 자리에 앉았다 할 뿐 우민은 곧장 옆에 있는 다른 의사―조교수나 펠로우쯤 되어 보였다―들과 이야기하느라 서진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게 나름 미안했던 모양인지 아니면 의사들과 떠드느라 신경이 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민은 식사를 마친 이후에도 쉽사리 자리를 뜨지 않았다.

우민은 서진이 식사를 마친 이후에야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민이 일어나자 아직 식사를 마치지 않은 의사들까지 의자 끝에서 살짝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세요.”

“그래, 너네도 밥 맛있게 먹어라.”

우민은 손을 흔들며 서진의 뒤를 이어 식판을 반납했다. 서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민이 제 뒤를 쫓아오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식당 밖으로 나온 서진은 걸음을 멈췄다. 서진이 걸음을 멈추자 예상대로 서진의 뒤를 당연하게 쫓던 우민 또한 걸음을 멈췄다. 우민은 녹색 수술복 주머니에 손을 구겨 넣었다.

“점심, 사 주셔서 감사해요.”

“뭐, 그 정도야. 담배 피워?”

“네. 근데 병원에선 금연이잖아요.”

알바를 하면서 서진도 담배가 땡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또는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에 담배 한 대를 피우는 것이 요 며칠 피운 담배 전부였다. 의대생인 서진이나 주변 친구들도 다 담배를 피우니 딱히 현직 의사가 담배 얘길 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수술복을 입은 의사의 입에서 담배에 대한 말을 들으니 조금 어색했다.

“따라와.”

서진은 우민을 따라 암센터가 있는 구관으로 넘어갔다. 암센터라 그런지 활기를 띠는 본관과는 달리 어딘가 정체 모를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비교적 쉽게 잡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칙칙한 복도 안쪽의 문 너머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우민이 문을 열자 제법 넓은 옥상이 눈에 들어왔다. 서진의 예상대로 바닥에는 눌어붙은 담배꽁초들이 굴러다녔으며 문을 열자마자 잔뜩 배인 담배 냄새가 진득하게 났다. 우민은 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꺼내 재빨리 불을 붙였다. 우민은 뜯어져 가는 시멘트 벽에 몸을 기대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담배 있어?”

“가방에 있어요.”

“빌려줄게.”

우민의 제안에 서진은 선뜻 고개를 숙이며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뒤늦게 라이터가 제 손에 있다는 것을 눈치챈 우민은 탁탁 라이터 불을 켰다. 손 위로 올라오는 라이터의 불에 서진은 담배를 피워도 되는 건지 아닌지 약간 의심이 들었다. 감히 교수를 상대로 너무 버릇이 없는 건가 싶은 기분도 들었다.

“뭐해? 안 피워?”

“아뇨.”

정작 우민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서진은 최대한 라이터 쪽으로 손을 가리며 담뱃불을 붙였다. 서진의 담배에 불이 붙은 걸 확인한 우민은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었다. 서진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휑한 옥상을 둘러봤다. 옥상 난간 쪽에는 서진과 우민을 제외하고 누가 봐도 의사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몇 명인가 더 있었다.

그들은 옥상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슬쩍 보더니 자기네들끼리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다른 건물보다 낮은 데다 뒤쪽에 숨겨져 있는 암병동 옥상은 본관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꼭대기 층은 몇몇 교수들의 연구실을 겸하고 있으므로 일반 환자들은 올라올 이유조차 없으며 비상 발전기가 존재하는 이곳은 관계자 외에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말 그대로 오랫동안 병원에 머물며 병원 밖을 나갈 일이 거의 없는 의사들이 몰래 숨어 담배를 피우기에 적절한 환경을 갖추고 있는 장소였다.

“보통 3년 차나 되어야 알 수 있는 곳이야, 여기.”

두 번째 담배를 문 우민은 엄청난 곳이라도 데려온 사람처럼 굴었다. 실제로 일이 바쁜 저년차나 인턴들은 감히 병원에서 담배를 피울 생각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선배들도 저년차 앞에서 대놓고 담배 얘기를 하거나 피우지 않기 때문에 어지간히 선배와 친하지 않은 이상 비밀 장소를 알려 주지 않았다.

비밀 장소라고 해야 할까, 쉽게 말하면 그냥 ‘저년차가 어딜 감히!’에 가까운 텃세였다. 우민은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서진에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이 들어 뺨을 긁적였다. 우민은 서진이 의대생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우민에게 받은 담배를 다 피운 서진과 달리 아직 여유가 많은 우민은 세 번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는 우민의 시선이 서진의 가느다란 손끝에 닿았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서진의 금반지를 힐끗거렸다.

“너 남자 친구 있냐?”

무심코 던진 우민의 말에 깜짝 놀란 서진은 재빨리 손에 있는 반지를 가렸다. 남자 친구라는 말에 서진은 뒷걸음질 치며 우민을 경계했다.

“여, 여자 친구를 잘못 말한 거겠죠.”

“너 여자 친구 없잖아.”

“그냥 위장용 반지일 수도 있는 거구요.”

“어느 정신 나간 나르시스 놈이 네 나이대 위장용 반지로 14K 금반지를 끼고 다녀?”

“어떻게 알았어요?”

우민의 반박과 태연한 태도를 볼 때 서진은 우민이 넘겨짚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우민은 담배를 끄며 서진의 앞으로 터벅터벅 다가왔다.

“보통 말야, 그 좁은 지하철에서 동성이 몸을 가까이 비비면 불편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 널 만진 새끼가 치한이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사실 네 태도를 볼 때 그건 붙을 만했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남자랑 붙어 있는 게 꼭 여자랑 딱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고.”

우민의 돌직구에 서진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근처에 있는 남자와 어쩔 수 없이 딱 붙어 있던 서진의 표정은 마치 만원의 지하철에서 우연히 여자의 가슴에 몸이 닿은 남자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작 서진과 몸을 대고 있는 사람은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몸을 맞대고 있는 상대가 성적인 대상이라고 인식을 하지 않는 이상 보통은 일어나기 힘든 반응이었다. 서진은 우민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학교도 아니고, 어차피 얼마 보다 말 의사한테 남자와 사귄다는 사실을 들켰다 해서 제가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무엇보다 서진은 학교에서 있었던 게시글 사건 이후 스스로 당당해지기로 했다. 다시는 도망가지 않기로.

“그래서요? 사귀는 상대가 남자라는 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요. 멋대로 말하지 말아 주세요.”

“야, 너 피해망상 있냐? 내가 남친 있냐고 물어봤지 언제 그거 가지고 너 욕했냐?”

“…….”

정곡을 찌른 우민에 서진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남친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던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서진 본인이었다. 우민은 그런 서진을 당연하다는 듯 훈계했다.

“괜히 다른 데서 눈치 본 걸로 나한테 화풀이 하지마라. 알겠냐.”

“…….”

“야, 대답해라. 나 대답 안 하는 거 존나 싫어한다.”

“네.”

우민의 강압적인 태도에 서진은 결국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 채 다시 고개를 숙였다. 풀이 잔뜩 죽은 서진을 앞에 둔 우민은 이게 아니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만 피워야지 했는데.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 필터를 씹었다.

“내 말은 그러니까. 하아, 한창 좋을 때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거야. 따질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하다. 내가 원래 욱하는 성격이 좀 있어.”

“좋을 때라는 게 무슨 소리예요?”

“모르는 척하는 거냐, 멍청한 거냐? 나도 남자 사귄 적 있다고. 네 나이 때는 한창 연애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살기 팍팍하니까 연애고 뭐고 손 놓은 지 오래다.”

“되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시네요.”

“뭘 아무렇지 않게 말해?”

“남자랑 사귄 적 있다는 거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보통 저런 얘길 눈 하나 끔벅하지 않으며 당연하다는 듯 얘기하던가? 제가 우민이라면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사람 앞에서 시헌과 사귄다는 등의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민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난간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난간에 몸을 걸친 뒤 몸을 약간 틀었다. 서진의 고충을 이해한다는 듯 우민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우리 집이 7남매거든. 내가 셋째인데, 내 위로 누나 둘에 여동생만 넷이야. 큰누나는 세상 떠난 지 좀 돼서 어린 내 동생들은 기억도 못 하지만. 그래도 나는 남들한테 말할 때는 꼭 누나가 두 명이라고 해.”

“그 정도면 남매가 아니지 않아요?”

“하하, 그렇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집 여자들은 누나고 여동생들이고 기가 장난 아니라서, 여자 친구를 사귀어도 다들 얼굴 한 번 보기 무섭게 도망가더라. 나야 익숙해져서 상관없지만, 여자들 처지에선 지옥이지. 근데 하도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 여자들이 많다 보니까 여자들에 대한 환상? 이런 게 없더라고. 지금은 좀 나아졌는지 모르겠지만 나 의대 들어갔을 때 우리 과에서 두 명 빼고 다 남자였어. 심지어 선배 중에선 여자가 없는 학번도 있었어. 정신을 차리니까 남자를 만나고 있더라고.”

우민의 이야기를 들은 서진은 그럴 수도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꽤 어렸을 때부터 기욱과 얽혀 미묘하게 남자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진 서진과는 다른 경우였지만 말이다. 담배를 끈 우민은 난간에 팔을 걸친 뒤 완전히 몸을 돌렸다.

“스스로에게 당당하게 살아라. 삶이 두렵다면 차라리 고개를 들고 부끄럼 없이 말해라. 도망치는 것보다 수치스러운 것은 없다. 뭐, 우리 아버님이 자주 했던 말이야. 나름 좋아하는 이야기기도 하고.”

“그게 저….”

입을 떼긴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던 서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민은 단순히 독특한 것을 떠나 뭔가 달랐다.

“처음으로 남자 친구 사귀었을 때 난 그냥 누나한테 바로 말했거든. 확신은 없는데 여자보단 남자가 좋은 것 같다고. 그거 알아? 나 병원에서 게이인 거 모르는 사람 없을걸? 그래서 뭐? 난 나고, 여전히 이렇게 의사로 있잖아.”

“불이익 같은 게 있을 수 있잖아요.”

“실력으로 다물게 한다. 딱히 내가 게이라고 해서 수술 실력이 떨어지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뭔가…… 대단하네요.”

“당연하지.”

“그리고 뻔뻔해요.”

“난 스스로한테 거짓말은 안 하는 주의라서.”

우민은 병원 전용 휴대폰을 꺼냈다. 마침 콜 문자가 와 있었다. 금방 간다며 답장을 보낸 뒤 빈 담배 케이스를 주머니에 넣었다. 슬슬 점심시간이 끝나 가는 서진도 우민과 같이 옥상을 나왔다. 침묵이 감도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단둘이 선 서진은 옆에 있는 우민을 흘끗 바라봤다.

순간 옥상에서 말을 하는 우민이 굉장히 멋져 보였다. 사소한 것부터 거짓말로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며 연이은 거짓말로 줄다리기하듯 삶을 지속해 온 서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만약, 정말 될 수 있다면, 우민과 같은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닮고 싶은 의사가 하필이면 기욱과 같은 신경외과 의사라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기 무섭게 우민은 일이 있다며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서진은 응급실로 뛰어가는 우민의 뒷모습을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계속해서 바라봤다.

* * *

그날, 응급실로 뛰어가는 우민을 다시 보기란 생각보다 어려웠다. 직책이 교수인 데다가 시간 대부분을 수술실과 응급실에서 보내기 때문이었다. 사실 우민이 시간을 맞춰 점심을 먹는 날은 한 달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한정된 시간만 병원에서 일하는 서진이 우민과 마주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서진은 괜히 우민이 사 주었던 돈가스를 점심으로 먹게 됐다. 신경외과 병동에서 수술복 차림의 의사가 지나가면 저도 모르게 우민을 의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이틀 정도 시간이 더 걸렸다.

그날 했던 말이 제법 가슴에 와 닿았던 서진은 이럴 줄 알았으면 우민의 번호라도 얻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서진은 일부러 병원 밖을 나와 담배를 피웠다.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서진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모르는, 해외의 번호였다. 해외 번호로 전화를 걸 만한 사람은 안 봐도 뻔했다. 서진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서진은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한참 뒤에야 뭉그적뭉그적 전화를 받았다.

― 왜요?

― 너 우리 병원에서 알바한다며.

― 그런데요.

서진은 일부러 알바 사실을 기욱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 병원 아르바이트도 기욱이 병원에 있었다면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제안이었다. 서진의 알바 사실을 누가 말했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시헌은 이젠 그런 전달이 별로 놀랍진 않았다.

애당초 서윤에게 들으라고 기욱에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서진의 무관심한 대답과 달리 기욱은 서진을 보지 못하는 것이 제법 서운한 것 같았다.

― 휴대폰 번호 바꾼 건 왜 말 안 했어?

뜻밖의 말에 깜짝 놀란 서진은 귀에서 휴대폰을 뗀 뒤 눈을 깜박였다. 서진의 손에는 구매한 지 일주일이 좀 넘은 휴대폰이 있었다. 서진은 기욱에게 번호를 알려 준 적이 없었다. 서진은 이럴 줄 알았으면 전화를 받지 말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서진의 침묵에 기욱은 휴대폰을 앞에 두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알바야 그럴 수 있지만, 연락과 관련된 문제인 휴대폰 번호를 알려 주지 않은 것은 무척이나 기분이 상했다.

― 한국에서 보자.

― 언제 오는데요?

― 금방 가.

속으로 이를 갈고 있을 기욱이 통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귀국한 이후의 짜증을 감당하는 것 역시 다른 사람도 아닌 서진이었기 때문이었다.

― 금방이 언젠데요?

― 네가 원하면.

― …….

― 당장에라도 갈 수 있어.

기욱의 대답에 서진은 기가 찼다. 이 사람은 본인이 해외 원정을 나간 이유에 대해 자각을 하고 있기나 한 건가 싶었다. 본인이 경기도쯤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서진은 투정 부리듯 한국으로 돌아오겠다는 기욱을 달랬다.

― 일정 다 마치고 똑바로 돌아와요. 아니면 얼굴 안 볼 거예요.

― 그래. 그럴게.

반박할 거란 서진의 예상과 달리 해외 일정에 지친 기욱은 예상보다 쉽게 서진의 말을 수긍했다. 서진은 순종적인 기욱의 태도가 약간은 어색했다.

― 나중에 다시 전화할 테니까 그때는 받아.

― 일 안 바쁘면 그럴게요.

툭, 하고 기욱 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기욱과 통화를 하며 발 닿는 대로 병원 근처를 돌아다닌 서진은 제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본관의 건물이 작게 보이는 걸 볼 때 제법 멀리까지 왔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서진은 건물을 보며 돌아가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적한 건물 틈 사이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야, 그런 농담 하지도 마라.”

“언제까지 사람 애 취급 하실 겁니까? 선배 좋아하는 거 진짜입니다.”

낯선 남자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민의 목소리는 한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서진은 주차장 건물 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건물 틈 사이에는 낯선 의사와 가운 차림의 우민이 있었다.

“하아.”

후배 의사의 고백에 우민은 곤란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서진과 우민의 눈이 맞았다. 서진이 못 볼 광경을 본 것 같아 지나치려 하자 우민이 서진을 불렀다.

“강서진!”

우민의 외침에 그제야 후배 의사도 등을 돌렸다. 우민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남자의 가슴에는 흉부외과 조교수 정석빈이라 적힌 명찰이 달려 있었다. 우민과 모르는 의사. 이미 우민에게 인사 문제로 혼이 난 적이 있었던 서진은 본능적으로 두 손을 모아 깍듯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당연한 소리지만 서진의 인사는 막 병원에 들어온 인턴의 인사보다 더 어색했다. 마치 환자의 보호자에게 강제로 인사를 받은 것 같은 어색한 분위기에서 우민은 성큼성큼 서진의 앞으로 다가가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난데없는 우민의 스킨십에 서진은 몸을 흠칫 떨었다. 우민의 스킨십에 석빈이 잔뜩 경계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이가 어린 서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선배, 누굽니까 걔는?”

“어. 우리 과 병동 알바. 새로 들어온 앤데, 귀엽지?”

“잠깐, 당신……. 아니, 교수님 무슨 말을…….”

우민의 호칭에 대한 고민이 들었던 서진이 멈칫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건가. 우민은 틀림없이 서진을 향해 귀엽다고 말했다. 평범한 남자들, 평범한 상황에서의 대화라면 상관이 없지만, 이 자리는 평범하지 않았으며 자리를 채우고 있는 의사들 또한 그리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새끼, 투덜대기는. 형이 그렇게 싫냐? 잘해 주겠다니까 그러네.”

우민은 저에게 고백한 의대 후배―석빈을 반쯤 무시한 채 서진의 허리를 안으며 일방적인 스킨십을 계속했다. 그 와중에 발을 꾹꾹 밟는 것이 아무리 봐도 맞춰 달라고 신호를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이 급작스러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맞춰 달라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서진이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서진보다 배는 눈치가 빠른 석빈은 상황을 깨닫고 인상을 찌푸렸다. 석빈은 엉망이 된 머리를 긁적이며 금방이라도 상처를 입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하, 그런 거군요. 선배도, 어린 애가 좋은 거네요.”

“늙은이보다는 낫지 않겠냐.”

그 와중에도 우민은 뻔뻔하리만치 당당히 대꾸했다. 틀리지 않은 우민의 말에 석빈은 씁쓸하게 웃었다.

“시간 빼앗아서 죄송했습니다.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서진이 몸을 틀어 석빈이 사라진 곳을 바라봤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린 그는 이미 서진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석빈이 완전히 간 것을 확인한 우민은 서진의 허리를 붙잡은 손을 내려놓았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우민이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서진은 의도치 않게 자신이 누군가를 상처 주는 용도로 사용됐다는 사실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우민이 등을 돌리는 서진을 향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서진아. 잠깐만!”

“놔요!”

설명해 주겠다는 우민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서진은 우민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아…”

저도 모르게 우민의 뺨을 치고 만 서진이 잠깐 얼어붙었다. 그러려 했던 건 아닌데, 손톱이 지나간 자국으로 생채기가 남았다. 우민도 당황한 듯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손에 힘이 풀리자 서진은 곧장 왔던 방향으로 도망치듯 뛰어갔다. 사과할 여유는 없었다.

* * *

“…그런데?”

“나도 몰라.”

“헐, 대박. 누가 좀 물어봐 봐.”

“네가 물어봐.”

점심시간이 끝나고 병동으로 돌아온 우민을 보자마자 간호사 데스크에 있던 간호사들이 수군거렸다. 아직 신경외과에 익숙하지 않은 1년 차 레지던트는 우민의 뺨에 난 커다란 손자국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류 작업을 하던 중 고개를 들고 토끼처럼 저를 바라보는 인턴의 시선을 느낀 우민은 간호사 데스크 안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난데없이 얼굴을 들이미는 우민에 깜짝 놀란 인턴이 바닥에 펜을 떨어트렸다. 인턴은 바닥에 떨어진 펜을 줍는 제 모습을 바라보는 우민의 눈치를 살폈다.

“아,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인사는 아침에 했잖아. 너 왜 나 빤히 보냐?”

“아뇨. 뼈, 뺨은, 괘, 괜찮으십니까?”

인턴의 물음에 간호사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우민이 고개를 틀자 간호사들이 흠칫, 놀라며 각자의 일에 집중하는 척 몸을 틀었다. 우민은 아직도 후끈거리는 뺨을 긁적이며 어설프게 웃었다.

“네 눈엔 괜찮아 보이냐?”

잔뜩 날이 선 우민의 목소리에 인턴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신… 겁니까? 누, 누가 감히 교수님에게…….”

병원 사정을 모르는 인턴이지만 교수 하늘 같은 줄은 아는 인턴이었다. 특히 기욱과 같은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된 우민은 반인맥발 교수가 된 기욱―그렇다고 기욱의 실력이 뒤진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과 달리 정말 실력 하나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이었다. 물론 인맥이 없는 만큼 견제도 많이 받지만, 그의 실력은 여전히 병원 신경외과 의사 중 TOP. 3 안에 들 정도로 유명했다.

“차였어.”

“…네?”

“씨발, 차였다고. 너도 여자한테 차여서 뺨 맞아 본 적은 있을 거 아냐.”

“저, 저는… 뺨은 맞을 짓까지 한 적은 없…… 그게 아니고……. 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거짓말하지 마라.”

우민은 불편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는 그의 머리를 가볍게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일이나 하라며 손을 흔든 우민은 의국으로 돌아갔다.

“아오, 씨. 겁나 아프네.”

“교수님. 오셨습니…… 뺨이 왜, 그러십니까?”

마침 레지던트들을 데리고 간의 회의 중이었던 진호는 우민의 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민은 적당히 근처에 있는 의자를 꺼내 앉았다.

“차였어. 됐으니까 나 얼음 좀. 아파 뒤지겠다.”

“아, 예.”

진호는 옆에 있던 저년차 레지던트를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그가 재빨리 얼음을 가지러 의국을 뛰어나갔다. 그사이 진호는 우민의 뺨에 난 상처를 바라봤다.

우민의 뺨에는 서진의 손자국과 상처가 선명히 남았다. 다행히 흉터는 안 지겠지만 다 큰 어른의 얼굴에 난 붉은 손자국이 볼썽사나운 것은 사실이었다.

“괜찮습니까?”

“누구? 나? 아니면 내 뺨 때린 녀석?”

“둘 다요.”

“난 괜찮은데. 그 녀석은 괜찮을지 모르겠네.”

“감히 교수님 뺨을 때렸으니 괜찮을 리가요.”

“마, 맞아요! 대체 어느 과 의사입니까? 예?”

옆에 있던 다른 레지던트가 우민과 진호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화에 끼자마자 어딜 끼냐며 진호가 눈치를 줘 곧장 고개를 숙였지만 말이다. 딱히 괴롭히거나 하진 않았지만, 우민은 울면서 도망친 서진이 심히 걱정됐다.

“정말이지. 이게 뭔 꼴인지.”

의자에 앉은 우민이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우민이 뺨을 맞았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병원 내로 퍼졌다.

* * *

“아오, 씨.”

수술이 생각보다 일찍 끝난 우민은 약 20분 정도의 여유 시간이 있었다. 바로 다음에 수술이 있어서 달리 갈 곳이 없는 우민은 회복실 한쪽 스테이션 구석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쁘게 일을 보고 있는 마취과 의사들은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우민이 상당히 불편했다.

레지던트들에게는 특별히 이상이 있지 않는 이상 다음 수술까지 내버려 두라고 선포를 하고 나온 상태였다. 아침부터 8시간이나 걸리는 수술을 30분이나 단축해 끝낸 우민이니 한참 예민할 법도 했다. 환자를 둘러보고 돌아온 마취과 여의사가 전산 작업을 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뺨 맞은 건 괜찮아?”

앞은 컴퓨터를 보고 있지만 누가 봐도 높은 데스크 구석에 숨어 앉아 있는 우민을 향해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책상 밑에 숨겨진 작은 냉장고 안에서 미리 넣어 뒀던 차가운 캔 커피를 뒤쪽으로 내밀었다. 우민은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그녀가 준 캔 커피를 가져왔다. 탁, 하고 커피 캔을 따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렸다.

“나 뺨 맞은 건 어떻게 알았어?”

“너 병원에 소문 다 났어. 차여서 뺨 맞았다고. 감히 천하의 한우민의 뺨을 때린 의사가 누군지 다들 궁금해들 하더라.”

“의사 아냐.”

빠르게 전산 작업을 마친 그녀는 몸을 틀어 바닥에 주저앉은 우민을 내려다봤다. 마취과 교수인 그녀는 우민과 같은 동기였다. 의대 시절 우민이 게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눈치챈 여자로 일중독 기질이 강한 그녀는 남자보다 여자를 훨씬 더 좋아했다.

연애 대상이 아닌 친구로서 나름 죽이 잘 맞아 일 년 정도 자취를 한 적이 있었다. 우민은 그녀가 준 캔 커피 끝을 씹으며 볼을 부풀렸다. 서진에게 맞은 상처는 전부 나았지만, 아직도 맞은 뺨이 후끈거렸다.

“의사가 아니면,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나도 잘 모르겠는데.”

“너 진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아, 나도 모른다니까!! 우리 과에 새로 알바 들어온 애야. 걔한테 맞았어. 차였다는 건 그냥 핑계고.”

“NS 병동 알바?”

“엉. 강서진이라고. 말해도 모를 거다.”

우민은 순식간에 비운 캔 커피를 구겼다. 아아, 힘들다. 진이 다 빠져 밥을 먹을 기운조차 없었다. 주변에서 울리는 특유의 기계음에 우민은 머리가 아팠다.

“잠깐만. 강서진? 어디서 들어 봤는데…….”

“듣긴 어디서 들어 인마.”

“아! 생각났다! 강서진 걔, 니네 스크럽에 강 간호사 동생이잖아.”

“강 간호사?”

“왜 있잖아. 박기욱 여자 친구로 이 년 전쯤에 병동에서 수술로 넘어온 간호사. 동생이랑 둘이 사는데 종종 술자리에서 동생 얘기하고 그랬어.”

“너 이젠 간호사들 술자리까지 나가냐.”

“당연한 거 아냐?”

그녀가 어깨를 들썩였다. 그녀는 남자들이 대부분인 의사들보다 여자들이 많은 간호사를 더 좋아했다. 병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커플인 서윤은 처음부터 그녀의 관심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유명 인물이라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강 간호사 동생이라니…….”

우민은 서진을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생각했다. 딱 봤을 때부터 어딘가 얼굴이 묘하게 낯익다 했더니 확실히 얘기를 듣고 보니 서윤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성격은 전혀 안 닮았지만 말이다.

“나도 며칠 전에 들은 건데. 강 간호사 동생이 제법 수재래. 수능 만점으로 H대 의대 들어갔다고 그러더라고.”

“만점이 뭐 대단하다고. 야, 내 칭찬도 좀 해 줘라. 나도 만점이었거든? 자, 잠깐만…… 걔 의대생이야?”

“몰랐냐? 본3인가 2인가. 니가 망나니인 건 알고 있었지만. 하필 건드려도 강 간호사 동생을 건드냐 한심하게.”

그녀가 우민을 향해 쯧쯧 혀를 찼다. 서진이 남자도 괜찮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그녀는 우민이 멋대로 일반인인 서진에게 고백을 했다가 맞았다는 것으로 착각했다. 우민이 서진에게 고백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아무리 놀랐다 해도 그런 우민을 때린 서진도 서진이었다.

그녀의 오해와 달리 우민은 일이 복잡하게 됐다며 책상 서랍에 머리를 쿵쿵 찍었다. 그녀는 멀쩡한 의자를 내버려 두고 찬 바닥에 앉아 서랍에 머리를 찍는 우민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우민이 바보 같은 녀석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기에 놀라운 건 없었다.

우민의 시선이 그녀의 가운에 닿았다. 그녀는 목에 처음 보는 곰 인형을 달고 있었다.

“근데 넌 왜 목에다가 인형을 달고 다니냐.”

“아, 이거? 귀엽지? 실은 요즘 잘되는 간호사한테 선물 받았거든. 본관 지하에 인형 뽑기 기계가 새로 들어왔는데, 거기 인형들이 꽤 귀여워서 의료진들 사이에서 꽤 유행이래.”

“별 게 다 유행한다.”

우민은 어이가 없었다. 의사들 뽑으라고 가져다 놓은 기계가 아닐 텐데 말이다. 그녀는 우민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인생의 절반을 병원에서 보내는 가련한 인생들 아니겠냐. 이런 거라도 없으면 삶의 낙이 없잖아.”

“아, 그러셔.”

우민은 책상 밑에 있는 쓰레기통에 캔 커피를 집어넣으며 수술복을 털었다. 뒤늦게 수술복 가슴에 커피를 흘린 사실을 깨달았다. 수술복에 진 얼룩을 본 우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옷 갈아입고 수술 들어가야겠네.

* * *

“인형 뽑기 해 본 적 있는 사람?”

“…….”

안정적으로 진행되는 수술실 한가운데에서 뜬금없이 나온 우민의 말에 수술방에 있던 의료진들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아침부터 긴 수술을 하고 오더니 우민이 드디어 미친 건가 싶기도 했다. 다른 간호사들과 마취과 의사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진호가 대표로 대답했다.

“요즘 유행인 그거요?”

“엉. 그거. 해 봤어?”

우민은 옆에 있던 간호사를 말없이 바라봤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간호사가 수술 기구를 건네줬다.

“전 몇 번인가 해 봤어요. 재능이 없어서 포기했지만. 우리 과에서 현진이가 잘 뽑잖아요.”

“아, 진짜?”

“네. 저희 의국에 있는 거 다 저 자식이 가져다 놓은 거잖아요.”

진호가 옆에서 어시를 서는 현진이라는 의사를 흘끗댔다. 본의 아니게 칭찬을 받은 그가 하하, 하고 낮게 웃었다. 정작 진호는 칭찬이 아니라며 그런 현진을 나무랐다. 우민은 진호의 말을 자르며 4년 차 레지던트인 현진을 향해 물었다.

“야, 그거 한 판에 얼마냐?”

“천 원요. 교수님 인형 뽑기 잘하십니까?”

“해 본 적 없는데. 대충 뽑으면 되는 거 아냐?”

“에이. 당연히 아니죠. 그게 얼마나 섬세한 작업인데요.”

“새끼 나 무시하냐?”

“무시라뇨. 제가 어찌 교수님을 무시합니까? 제 말은 인형 뽑기랑 OP는 또 다르다 이겁니다.”

“아. 그래.”

우민은 뽑기를 잘한다는 4년 차 레지던트의 말을 반쯤 무시하며 수술에 집중했다. 인형 뽑기보다 더 어려운 수술도 하는데 그깟 인형을 집어 올리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며.

* * *

“…….”

툭, 하고 갈고리에 걸린 인형이 아래로 떨어졌다. 왜? 우민은 어이가 없었다.

“씨발 왜!!!”

새벽, 불이 꺼진 병원 복도 한가운데에 켜진 인형 뽑기 기계 앞에 선 우민은 믿을 수 없다며 눈을 깜박였다. 손 닿으면 만져질 것 같은 플라스틱 벽 너머에는 온갖 종류의 인형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우민은 스틱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원래부터 현금을 들고 다니는 편이 아니었던 터라 레지던트에게 빌린 3천 원을 전부 써 버리고 난 뒤였다. 3판이면 되겠지 싶었지만, 레지던트에게 빌린 3천 원이 사라지는 데는 3분의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우민은 가운 주머니에서 휴대폰으로 돈을 빌린 레지던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예. 교수님.

― 야, 위에 괜찮냐?

― 네. 아직 별일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 그럼 그 인턴한테 천 원짜리 있는 거 다 챙겨서 내려보내. 당장.

― …처, 천 원짜리요? 얼마나요?

― 씹! 몇 장 가져오라면 맞춰서 구해 올 거냐? 그냥 있는 대로 가져와!!

― 아, 알겠습니다. 도경이 내려보내겠습니다.

우민은 무슨 도박에 중독된 사람처럼 레지던트 의사를 닦달했다. 팔짱을 낀 우민의 시야로 한참 만에 지하로 내려온 의사가 보였다. 그는 숨을 채 고르기도 무섭게 우민에게 천 원짜리 지폐를 빼앗겨야만 했다. 우민은 인턴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곧장 돈을 넣으며 인형 뽑기 기계로 몸을 돌렸다.

“얼마 가져왔냐?”

“15장입니다.”

“그래.”

3판은 역시 무리였다. 우민은 그 정도면 되겠거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턴은 우민이 돈을 넣은 인형 뽑기 기계를 흘끗댔다. 요즘 의사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 건 알지만, 교수가 인형 하나 못 뽑아서 인턴을 부리는 건 약간 보기 드문 광경이긴 했다. 툭, 하고 4번째 인형이 입구 바로 앞에서 떨어졌다.

“아오!! 이게 진짜!!”

화를 이기지 못한 우민은 결국 플라스틱 벽을 쿵쿵 두드렸다. 낮에 회복실 안에서 봤던, 여자 의사가 가지고 있던 곰 인형은 생각보다 개수가 적은 인형으로 다른 인형들 사이에 숨겨져 있어 더 뽑기가 어려웠다. 그 모습을 본 인턴이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크읍. 교수님 뽑기 잘 안 되십니까?”

“보면 몰라? 뒤지고 싶지 않으면 닥쳐. 기분 개같으니까.”

“네, 죄송합니다.”

인턴은 사과하는 내내 입가의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신경외과 레지던트 의사들의 주머니를 모아 나온 천 원짜리가 동난 우민 때문에 그는 밤새 몇 번이나 병동을 왔다 갔다 하며 천 원짜리를 구하러 다녀야 했다. 우민은 인턴이 가져온 15장 외에도 30번을 넘게 시도를 한 끝에야 원하는 곰 인형을 뽑을 수 있었다.

* * *

“큭큭, 하하하! 그래서 새벽에 인턴 선생님 죽으려고 그러더라고. 어제 병원 내에 있는 천 원짜리 진짜 한 교수님이 다 털어갔을걸? 외과계 당직실이란 당직실은 다 돌았을걸? 돈 못 가져가면 자기 죽는다고 울고 막 난리 났다는데 오죽하면 당직하는 교수님들이 무슨 일이냐면서 물어보고 막 달래면서 돈 쥐여 줬대잖아.”

“대박, 새벽에 무슨 민폐야?”

“내 말이! 근데 더 대박인 건 뭔지 알아? 다들 인턴 앞에 두고 누가 그런 썩을 명령을 시켰냐고 그러는데 한 교수님이 시켰다니까 입 닫으면서 고생하라고 그러는 거 있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 교수님이 연수 간 박 교수님 다음으로 신경외과 간판 의사인 건 맞으니까.”

“그렇긴 한데……. 지난번에 얼굴에 뺨 자국 난 상태로 OP까지 들어온 거 생각하면 요즘 들어 좀 이상하지 않아? 난 솔직히 한 교수님이 뽑기에 열 올리는 것도 좀 이해가 안 되긴 했어.”

그녀의 말에 듣고 있던 간호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종일 간호사들은 틈만 나면 우민에 관해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몇 번인가 병동을 돌아다니며 일을 도왔던 서진도 간호사들이 떠드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인형은 모르겠지만, 뺨 자국의 원인이 저 때문이라는 사실을 서진은 입 밖으로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 서진아. 혹시 미안한데 지금 안 바쁘면…….”

한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서진에게 다가왔다. 일이 바빠 잠깐 흉부외과 병동에 심부름 좀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던 서진은 알겠다고 했다.

“진짜 고마워! 잠깐만 나 금방 올게!”

“하하, 천천히 해요.”

심부름 전에 다른 볼일이 있다며 간호사가 컴퓨터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를 기다리던 중 마침 병동 콜을 처리하고 건너편 병실에서 나오는 우민과 눈이 마주쳤다. 옆에 있는 의사들 먼저 보낸 우민이 서진에게 다가오려 했다. 그러나 간호사 데스크에 있던 그녀가 서진을 부르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아뇨. 괜찮아요.”

우민을 슬쩍 본 서진은 일부러 몸을 틀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우민의 뺨을 때린 건 미안했지만, 그 상태로 하루 종일 병원을 돌아다니며 차였다는 말을 입 밖에 낸 우민도 우민이었다. 서진은 실수라 할지라도 우민의 뺨을 때린 것을 사과할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결국, 일을 봐야 하는 우민은 마지못해 비상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우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서진은 간호사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 흉부외과 찾았다. 정형외과 병동 데스크에서 간호사와 이야기를 마친 서진은 신경외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 죄송합니다.”

“너…….”

몸을 부딪친 의사의 얼굴을 확인한 서진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우민이 찬, 우민에게 차인 닥터였다. 서진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한 뒤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석빈이 서진을 붙잡았다.

“바쁘냐?”

“아뇨. 아직…… 괜찮아요.”

“하아, 잠깐 얘기 좀 하자.”

석빈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시선을 비상구 쪽으로 돌렸다. 뭐라고 할 수도 없었던 서진은 알겠다며 석빈과 함께 비상계단 안으로 들어왔다. 창문이 열려 있는 비상계단은 생각보다 추웠다. 석빈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우민 선배, 뺨 때린 거 너지?”

“네. 죄송합니다.”

석빈은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찼다. 우민을 오랫동안 봐 온 석빈은 우민이 진짜 서진에게 관심이 있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서진을 보자고 한 것은 자신이 아닌 우민과 서진의 오해를 풀어 주고 싶어서였다. 오래 얘기를 할 수 없었던 터라 곧장 본론부터 말했다.

“나 말야, 어머님이 췌장암 말기시거든. 길어야 앞으로 두 달이셔. 부모님이 둘 다 완전 시골 출신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그 당시만 해도 서울 와서 열심히 하면 성공할 거라 생각했나 보지. 아빠 얼굴은 기억도 안 나는데, 나 낳기 직전에 공사장에서 사고로 사망했다고 하더라. 아무것도 없는 서울에서 나 하나 키우자고 젊은 나이에 있는 고생 없는 고생 다 한 사람이 우리 엄마야. 그런 울 엄마 소원이 뭔지 알아? 나 결혼하는 거 보는 거래.”

“그게…….”

서진은 석빈의 가정사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좀처럼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석빈은 벽에 팔짱을 끼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계속했다. 만난 거라곤 한 번밖에 되지 않는 서진에게 이런 얘길 하는 건 진심으로 우민과 서진이 서로 오해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일 때문이라고 핑계를 댔지만, 한 선배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몇 번인가 남자 사귄 적도 있고. 그래도 엄마 소원이니까 급하게 여자를 만났어. 그거 알아? 게이인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여자도 상관없더라.”

엄마 때문에 급하게 소개를 받아 만난 여자지만 석빈은 그녀가 싫지 않았다. 이 주 뒤 결혼을 앞둔 석빈은 결혼하면 진심으로 그녀에게 잘해 줄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여자와의 결혼 전에 오랫동안 몰래 짝사랑해 왔던 우민에 대한 마음을 정리할 생각으로 고백했던 것이었다.

석빈의 사정을 전부 알고 있는 우민에 받아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한 고백이었지만 서진에게 관심 있는 척하는 연기는 석빈에게도 약간 상처로 남았다. 이후 우민이 뺨을 맞고 왔다는 얘기를 듣고 내심 속이 시원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감히 한우민의 뺨을 때릴 수 있는 사람은 병원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서진 말고는 없었다. 석빈은 서진의 손에 있는 반지를 보며 말했다.

“우민 선배의 진심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알겠더라. 그 사람은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한결같다는 거.”

만약 우민이 석빈의 고백을 받았다면 석빈은 여자에 대한 마음이 흔들릴지도 몰랐다. 그러니 마침 온 서진에게 관심 있는 척 연기를 한 것이었다.

의사라는 직업 특성상 눈치가 빠른 석빈은 우민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늦게나마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우민은 그의 고백을 찬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 잘하라는 뜻에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 석빈은 제멋대로인 우민을 대신해 고개를 숙였다.

“괜히 말려들게 해서 미안하다.”

“아뇨. 괘, 괜찮아요.”

“그래도 우민 선배, 성격이 지랄 같아서 그런 거지 나쁜 사람은 아니니 너무 미워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석빈의 말에 서진은 적당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저인데 되레 사과를 들으니 제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일이 있다며 나가는 석빈과 헤어진 뒤 신경외과 병동으로 돌아왔다.

* * *

2주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서진은 마지막 알바가 끝날 때까지 우민을 볼 수 없었다.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슬슬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서진은 이런저런 일로 정신이 없었다. 막 알바가 끝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인사를 하기 위해 병동을 나오던 서진은 뜻밖에 우민을 만날 수 있었다.

서진은 여전히 초췌한 차림인 우민을 보며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석빈에게 그런 얘기를 들은 뒤라 해도 막상 우민을 마주하니 어떻게 할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야, 잠깐만 나 좀 보자.”

심각한 표정으로 근처에 있는 의사들을 보낸 우민은 기다리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곧장 당직실로 뛰어갔다. 살짝 열린 당직실 문틈 사이에서 뭐라고 구시렁대는 우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여기 뒀던 내 인형 어디 갔어?”

“네?”

“인형 어디 있냐고. 지난번에 뽑은 거.”

“아아, 그거. 저기 선반 위에요.”

“어떤 새끼가 거기다 둔 거야?”

우민은 당직의가 손가락질한 선반 위에 놓인 인형을 꺼내 먼지를 털털 털었다. 먼지가 묻어 조금 더럽긴 하지만 그래도 새 인형인 데는 변함이 없었다. 한 손에 갈색 곰 인형을 챙겨 나온 우민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비상계단으로 이끌었다.

“잠깐 뭐 하는…….”

“이거.”

서진을 계단의 벽으로 몬 우민은 서진에게 새벽에 뽑은 곰 인형을 강제로 손에 쥐여 줬다. 그리고는 마치 이성에게 고백하듯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새벽에, 병원에 있는 천 원짜리 다 털어서 뽑은 거야.”

“…….”

서진은 우민이 준 곰 인형을 내려다봤다. 눈이 동그란 곰 인형이 확실히 제법 귀여웠다.

“그……. 자세한 사정은 말 못 하는데, 연인이 있다는 걸 알면서 그런 행동 한 거,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석빈이 그 자식 찬 것도 반성하고 있어.”

“정말요?”

“당연하지. 뺨 맞은 거 존나 아프더라.”

서진이 석빈에게 사정을 들었을 거로 생각하지 못한 우민은 서진의 말에 적당히 맞춰 줬다. 그런 우민의 배려에 서진은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흑흑. 하하하!”

“야, 왜 또 웃어?”

“아뇨. 흑흑, 그러니까…… 크크 읍! 번호 좀 주세요.”

“뭐?”

“교수님 번호요. 저 H대 의대생이거든요. 미리 교수 인맥 좀 만들고 싶어서요.”

서진이 잘 부탁한다는 뜻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우민이 주머니를 뒤졌다. 하필 휴대폰을 자리에 두고 온 탓에 휴대폰이 없었다.

우민은 서진의 휴대폰에 제 번호를 찍은 뒤 대충 전화를 걸었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우민은 서진의 휴대폰을 돌려줬다. 서진의 통화 기록에는 우민의 번호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넌 비싼 번호 얻은 거야.”

“하하, 감사합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의사―교수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를 위한 랩소디』 6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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