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9 싸움
“윽. 아파.”
“너 어쩌자고 그랬어!!”
다음 강의를 위해 의과대학으로 돌아온 서진은 학생회인 동기에게 구급상자를 빌려 1층 로비 벤치에 앉아 시헌의 상처를 살폈다. 입안에 솜을 가져다 대자 피가 묻어 나왔다. 입안이 터져 피가 나는 상황에서 눈 하나 끔벅하지 않는 시헌에 서진은 할 말을 잃었다. 예전부터 배짱 하나는 남다른 시헌이었다. 시헌은 입안을 소독하는 서진의 팔을 붙잡아 얼굴을 마주했다.
“화나서 그랬어.”
“그래 보이더라.”
서진은 시헌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화를 낸다고 해야 할까? 진아를 마주한 시헌은 화가 났다고 하기보다는 초조해 보였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짜증이었다. 서진은 일을 키운 시헌보다 진아가 쓴 게시글이 더 걱정이었다. 남자 친구까지 때리고, 오히려 화를 자극한 건 아닌가 싶었다.
“게시글, 지울까? 안 지우면 어쩌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시헌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손가락에 낀 반지에 입술을 맞췄다. 뒤늦게 밖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서진은 얼굴을 붉히며 시헌을 약간 밀어냈다.
“나, 나중에 해, 이런 건.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어. 응. 알았어.”
시헌은 부끄러워하는 서진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 * *
[의과대학 게이썰 쓴 냔이다 고소할거임 ㅡㅡ (103)]
제곧내.
다 필요 없고 알 사람들은 알 거라 생가함.
덕분에 소문 다 나고 존나 고맙다 ^^
남친 아는 친척이 변호사라고 해서 만나고 오는 중
오늘 진단서 뗐음
의대생이면 다임 ㅋㅋㅋ??
지들이 게이짓 하고 걸렸다고 이제와서 ㅂㄷㅂㄷ하는 꼴 존나 어이 털림
너네 같이 사람 패고 다니는 애들이 의사된다고 생각하면 와 개 끔찍하다
진단서 다 뗐고 합의 볼 생각 없으니까 알아서 자퇴하든지 해라
ㅅㅂ그리고 의대썰 내릴 생각 1도 없으니까 니네끼리 알아서 부둥부둥 하세요 ^^
ㄴ 무슨 일인지 설명해 줄 사람??
ㄴ 지난번 게이 썰 의대 당사자들이 와서 미대에서 깽판치고 감 고소한다고 난리인 듯 들리는 말로는 일방적으로 맞았다는데?
ㄴ 솔까말 남친이 됐든 글쓴이가 됐든 맞을 만했다... 난 게이는 아니지만 저런 거 떠벌리고 다니면 ㄹㅇ개패고 싶을 듯
ㄴ ㅋㅋㅋㅋㅋㅋ뭐라는 거 ㅋㅋㅋㅋ게이라서 찔려서 덧글 단거 아님??ㅋㅋㅋ연애할 거면 티내고 다니고 하질 말든가 걸렸다고 패는 건 또 무슨 개논리
ㄴ 썰 읽고 왔는데 글쓴이 말대로면 게이인 애 금수저 각인데? 남친도 금수저임? 역관광 당하고 사과글 올라오면 꿀잼일 듯... 글고 내 좀 알아보니까 그쪽 남친이 먼저 때린 모양인데 그거 복잡하다. 사시 패스자로서 형이 한마디 한다 지랄하지 말고 글삭이나 하고 사려라...
“…….”
“아. 마우스 뺏지 마.”
시헌은 서진이 허공으로 든 마우스를 따라 손을 뻗었다. 마우스를 가져오는 것을 포기한 시헌은 결국 노트북 화살표 키로 덧글을 내리며 읽고 있었다. 시헌이 이런 성격이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도 이렇게 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헌과 서진의 뒤쪽으로 같이 게시글을 읽은 동기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글을 내리게 하겠다고 미대까지 쳐들어갔을 때부터 일이 커질 거라는 짐작은 했지만 고소라니.
“야, 니네 도대체 뭔 짓을 하고 온 거야?”
“나도 맞았거든?”
시헌은 부기가 가라앉지 않은 뺨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거즈 솜까지 대고 있는 시헌에 동기는 웃기지 말라며 시헌의 등을 퍽 하고 때렸다.
“엄살은.”
“하, 근데 이 연놈들 진짜 골 때리네. 이참에 너네도 무슨 글 좀 올려봐. 고소한다는 것 같은데.”
“음. 그렇네.”
“…그렇네가 아니잖아.”
“귀찮아. 강의 끝나고 생각하지 뭐.”
대충 덧글을 다 읽은 시헌은 마침 들어오는 조교에 노트북을 탁, 하고 덮은 뒤 대충 가방에 구겨 넣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강의를 준비하는 시헌에 동기는 옆자리에 앉은 서진을 흘끗댔다. 사귄다고 하니까 하는 소리지만.
“하아, 강서진 너 힘들었겠다.”
“원래 저래.”
* * *
서진의 집 근처에서 차를 멈춘 시헌은 내리려는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서진의 손에는 반지가 없었다. 게시글 사건이 안정될 때까지 한동안 끼고 다닐 의사가 없다는 것을 점심 무렵에 밝혔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이 더 커져 기욱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일주일만 기다려.”
“무슨 일주일…….”
시헌이 또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라 생각했던 서진은 제법 진지한 시헌의 표정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 말투가 기욱을 닮았다는 것을 본인은 알기나 알까. 서진은 속는 셈 넘어가 주기로 했다.
“하아, 알아서 해.”
서진은 내일 보자는 말을 남기며 차에서 내렸다. 서진이 집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시헌은 차를 댄 뒤 아파트로 돌아왔다. 아직 이른 저녁이라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실의 불을 켠 시헌은 반쯤 열린 기욱의 방문을 흘끗댔다.
“제길.”
입술을 약간 깨문 시헌은 기욱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서재인지 방인지 기욱의 방은 서류며 책들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엉망이 되어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기욱의 커다란 책상에 놓인 서류들 틈 사이에서는 어제저녁에 먹은 걸로 추정되는 다 먹은 컵라면이 놓여 있었으며, 컵라면 안에는 마구잡이로 구겨 넣은 쓰레기들이 있었다.
쓰레기통까지 한 걸음도 안 될 텐데 좀 가져다 두지. 시헌은 쓰레기가 담긴 컵라면을 거실의 쓰레기통에 내다 버린 뒤 방으로 돌아왔다. 정신없는 기욱의 방은 시헌의 한숨을 절로 나오게 했다. 하긴 이 정도 양쯤 되면 정리가 힘든 것도 사실이지. 시헌은 딱히 기욱이 정리를 못 해서 이 지경이 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유명 대학병원의 교수라는 직을 맞고 있다는 것은 기욱 개인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시헌은 책과 서류 파일로 가득한 책장 위쪽으로 팔을 뻗었다. 기욱의 집 안에서 유일하게 천장이 다른 방보다 조금 높았다.
그 높은 천장까지 책장이 닿아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근처에 있는 두꺼운 의학 서적들을 밟고 올라간 시헌은 천장 바로 밑 책장 틈 사이에 있는 파란색 파일을 꺼냈다. 시헌은 파일을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저도 바닥으로 내려왔다.
[ K&J로펌. 김하민 ]
있었다. 시헌은 기욱의 고등학교 동창 중 한 명이 꽤 잘나가는 로펌 변호사라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기욱과 달리 학창 시절 별로 공부를 하지 않았던 기욱의 동창들은 대부분 고만고만하게 살고 있었다. 그중에서 하민은 기욱이 병원에 들어간 이후에도 제법 꾸준히 연락하는 친구였다.
시헌도 몇 번인가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시헌은 하민의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저녁 시간 직전이었다. 의외로 통화를 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았다.
― K&J로펌 변호사 김하민입니다. 누구세요?
― 아, 어. 저 박기욱 동생인데요.
― …박기욱 동생? 아, 그 지한인가 시한이?
― 시헌인데요.
― 하하, 미안. 너무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기욱이한테 뭔 일 생겼어?
― 다른 건 아닌데요, 혹시 바쁘세요?
― 아직 한가해. 통화는 오 분 정도 돼. 재수했다고 들었는데 의대 갔다고 그랬지? J대?
― H대 다니고 있어요. 그럼, 혹시 괜찮으면요…….
시헌은 명함을 다시 캘린더에 꽂은 뒤 휴대폰을 붙잡고 기욱의 방을 나와 한동안 통화를 계속했다.
* * *
경찰서에 도착한 시헌은 차에서 내렸다. 시헌보다 조금 먼저 도착한 하민은 경찰서 주차장에 대놓은 차 옆에 몸을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시헌이 내린 것을 본 하민이 다 피워 가는 담배를 약간 뗐다.
“혼자 오신 거예요?”
“애들 싸움에 데려올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서. 번거롭기도 하고.”
담배를 끈 하민은 어깨를 가볍게 들썩였다. 나름 이쪽은 심각하지만, 변호사인 하민이 보기엔 발전한 것이 없는 유치원 수준의 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두 번째 담배를 다 피운 하민은 들어가기 전 시헌에게 할 말을 일러뒀다.
“뭐, 어려울 거 없어. 그냥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돼.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그냥 일 다 끝나고 물어보면 되고. 박기욱처럼 나서지 않으면 퍼펙트. 그 녀석 보기와 달리 한 성깔 하거든. 욱하는 것도 심하고. 근데 우린 그런 손님들이 제일 까다롭거든. 기욱이야 친구니까 그러려니 넘어가지만 말야.”
“신경 쓸게요.”
“신경은 무슨. 너 듣자 하니 학교에서 벌써 유명하더라? 차세대 유명 닥터랑 친해져서 나 건 없지. 아, 나 의료 소송 쪽으로도 제법 한 가닥 하니까 나중에 무슨 일 있음 연락해라. 그때는 유료지만.”
“큭큭. 알았어요.”
누가 변호사 아니랄까 봐. 시헌은 쉴 틈 없이 말을 내뱉는 하민이 재미있었다. 기욱이 왜 다른 사람도 아닌 하민과 오랫동안 연락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잘나가는 변호사답게 독특한 캐릭터, 덤으로 옆에 있으면 재미없지는 않을 것 같은 타입이었다.
시헌과 하민은 문을 열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경관의 안내를 받고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와 있는 진아와 태민이 있었다. 시헌은 진아의 앞에 의자를 꺼내 앉았다. 태민의 옆에 있는 낯선 남자가 시헌을 향해 명함을 내밀었다.
“아, 명함 나 줘.”
잠깐 경관들과 얘기하고 있던 하민의 목소리에 시헌은 테이블에 있는 명함의 이름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태민에게 건넸다. 명함을 대충 훑은 태민은 남자가 준 명함을 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제 명함을 내밀었다.
“아뇨,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만.”
“에이. 같은 일 하는 사람끼리 왜 그러세요.”
저보다 10살은 더 많아 보이는 사내 앞에서 태민은 눈 하나 꿈벅하지 않고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을 손가락 사이에 살짝 끼워 일부러 로펌의 이름이 잘 드러나게 했다. 명함 끝에 걸친 익숙한 로펌의 이름을 본 그가 흠칫 놀라며 하민이 준 명함을 받았다.
명함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은 채 주머니에 넣은 하민과 달리 진아가 데려온 변호사 쪽은 하민의 명함을 앞뒤로 꼼꼼히 살폈다. 작정하고 온 듯 한껏 차려 입은 진아는 다리를 꼬며 날카롭게 말했다.
“씨발, 그 개 같은 년은 왜 안 데리고 오냐?”
“야.”
“…뭐, 뭐?”
“말조심해라.”
시헌은 진아의 옆에 앉은 남자 친구를 흘끗댔다. 시헌에게 맞은 경험이 있는 태민이 결국 진아를 대신 달랬다. 하민은 의자에 앉은 채 몸을 살짝 튼 뒤 근처에 있는 경관 한 명을 향해 살짝 손을 까닥였다. 좁은 경찰서 안 하민이 로펌 변호사라는 소문이 난 경관은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 하민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시죠?”
“얘기 들어가기 전에, 김 서장님 좀 뵙고 싶은데요.”
“서장님이요?”
서장의 성까지 정확히 짚어서 말하는 하민에 경관 한 명이 노골적으로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약속은 하고 오신 겁니까?”
“아닌데요. 개인적으로 하는 일이 있어서 아마 말씀드리면 아실 겁니다.”
“하아, 일단 말씀은 드려 보겠습니다.”
“바쁘신 중에 죄송합니다.”
하민은 예의상 고개를 숙여 보였다. 순찰을 나간 곳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담당하는 경찰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잠시만 기다리라며 여경이 음료수를 두고 갔다.
“당신 뭐예요?”
변호사와 남자 친구―태민의 대화를 엿듣고 하민이 유명 로펌 출신이라는 걸 안 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진아가 데려온 변호사도 이 바닥에선 제법 굵직굵직한 사건을 담당하기로 유명한 변호사였으나 현직 로펌 출신 변호사를 상대하는 것은 여러모로 성가시다는 것이 상대 변호사의 의견이었다. 대놓고 경찰청장에 관한 얘기를 하는 하민의 말을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왜? 너도 명함 필요해?”
“크흠, 김 변호사님 잠깐 자리 좀.”
하민의 도발에 상대 변호사가 경찰서 유리문 너머를 엄지 끝으로 손가락질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민은 금방 다녀오겠다며 시헌의 어깨를 두드리며 상대 변호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
상대 변호사와 밖에 나간 하민이 돌아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들어가기 전과 후의 차이라면 돌아온 사람이 하민뿐이라는 점이었다. 하민이 의자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민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울렸다. 문자를 본 태민은 짜증을 내며 잠깐만, 하고 급하게 경찰서 밖으로 나갔다.
“잠깐 오빠…! 도대체 무슨…….”
영문을 모르는 진아는 태민을 붙잡았으나 태민은 이미 경찰서 바깥으로 변호사를 쫓아 나가 버린 지 오래였다. 세 사람 다 자리를 비울 수 없었던 진아는 마지못해 철제 의자에 앉았다. 하민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학생, 이거 고소 취하할 거야.”
“하, 미쳤어요?”
“아 참, 그리고 학생이 올린 글은 명예 훼손으로 고소할 건데.”
“…고소요?”
또 다른 고소라는 말에 진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고소의 죄목을 들은 진아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팔짱을 꼈다.
“그쪽에서 말하는 작성자가 난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쟤가 멋대로 와서 때린 거거든요?”
두 번째 게시글에 적힌 것처럼 진아는 게시글을 지우지 않았다. 지우지 않았을 뿐 수정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다행히 시헌은 혹시 몰라 캡쳐해 뒀다는 여자 동기 덕에 원본을 하민에게 보여 줄 수 있었다.
어느 쪽이든 사이트 자체가 익명이기 때문에 진아가 글을 썼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시헌이 걱정한 부분이기도 했다. 진아의 뻔뻔한 말을 들은 시헌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옆에 앉은 하민을 슬쩍 바라봤다. 시헌의 시선을 느낀 하민은 걱정하지 말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건 니들이 판단할 게 아니고. 혹시 사이버 명예훼손죄라고 알고 있어?”
“사, 사이버 뭐요?”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허위 사실을 적시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 정지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도록 한다. 뭐, 요약하자면 이런 건데.”
“하, 그런 거 들어 본 적도 없거든요?”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걸 판단하는 건 네 몫이 아니야. 꼭 뭣도 모르는 것들이 변호사만 끌고 들어오면 사건 다 해결될 것처럼 구는데, 우린 법조인이지 해결사가 아니라고. 착각하지 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진아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남자 친구와 같이 데려온 변호사만을 찾으며 입술을 내밀었다. 하민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쪽으로 낯선 남자가 다가왔다.
“이거, 김 변호사님! 말씀 좀 하고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하하, 오랜만입니다. 서장님.”
중년 남성의 등장에 하민은 의자에서 일어나 고개를 약간 숙였다. 하민의 깍듯한 인사에 오히려 경찰서장이 부담스러운 듯 손을 내저었다. 서장은 이쪽 일만 20년 넘게 해 왔다. 그가 하민의 옆에 앉은 시헌과 건너편에 있는 진아를 흘끗댔다. 내려오는 와중에 대충 상황을 들었다.
“서장님도 잘 지내셨는지요?”
“하하, 저는 김 변호사님 덕분에 잘 지내지요. 아, 그러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 어떠십니까?”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몸을 약간 튼 서장은 하민과 눈치를 주고받았다. 뒤늦게 하민을 찾아온 사람이 서장이라는 걸 눈치챈 진아는 혀를 찼다. 서장을 불러내는 하민보다 그런 하민을 아무렇지 않게 데려온 시헌이 더욱 기가 막혔다. 하민은 서장의 제안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엘리베이터 잡고 기다리겠습니다.”
서장이 같이 온 경찰과 함께 엘리베이터 근처로 가는 사이 하민도 몸을 일으켰다. 하민은 시헌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할 말이 있을 때면 말없이 어깨를 건드려 시선을 유도하는 것이 하민의 습관이었다. 서장의 등장에도 눈 하나 끔벅하지 않은 시헌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시헌아 미안. 형 금방 갔다 올게.”
“네. 다녀오세요.”
부산하게 자리를 뜨는 하민은 손가락 끝으로 시헌의 어깨를 다시 두 번 건드린 뒤 가볍게 엄지를 들었다. 따로 이야기를 들은 건 없지만, 그 역시 암호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서장의 등장과 웃는 하민의 표정을 볼 때 걱정하지 말라는 뜻에 가까웠다.
시헌은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과 함께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민이 가고 난 뒤 시헌은 몸을 약간 숙여 진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얼굴을 들이미는 시헌에 진아는 의자를 약간 뒤로 하며 움찔거렸다. 진아의 시선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진과 다정하게 이야기 중인 하민에게 닿아 있었다.
“뭐, 뭐야 저게…….”
엘리베이터 쪽을 흘끗댄 시헌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테이블 끝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철제 테이블이라 탁탁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너넨.”
“…….”
“사람 잘못 건든 거야.”
“그런 게 어디 있…….”
“글 지워.”
시헌은 긴말을 하지 않았다. 시헌의 강압적인 말투는 위화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 * *
“후우.”
진아는 뒤늦게 사건을 처리하러 온 경찰에게 기어가는 목소리로 게시글을 지우고 합의를 보겠다는 식으로 말을 바꿨다. 돌아온 남자 친구의 변호사가 사건을 담당하지 않겠다며 급하게 자리를 피했다는 사실도 진아의 합의에 한몫을 더했다.
경찰이야 조용히 넘어갈 수 있으니 진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경찰이 시키는 대로 서류를 빠르게 작성한 시헌은 허락을 받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웠다. 마침 외부 출동을 나갔다가 돌아온 형사들은 시헌을 참 신기하다는 듯 흘끗댔다.
벽에 기대 담배를 피우는 시헌의 행동에는 일말의 불편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적응력이 좋은 건지 뻔뻔한 건지. 서장과 대화를 마치고 로비로 내려온 하민은 시헌을 찾아 밖으로 나왔다. 하민을 본 시헌은 담배를 손에서 살짝 뗀 뒤 고개를 약간 숙였다. 하민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시헌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담배 좀 줘.”
“돈도 많이 버는 사람이 학생한테 담배 얻어 피우면 못써요.”
“하, 어린것이 못하는 말이 없어. 야! 나 비싼 사람이야! 담배 한 대 정도는 줘도 되잖아!”
하민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시헌은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냈다. 하민이 담배를 물자 시헌은 곧장 불을 붙여 주었다. 담배를 주기 싫다고 투정해 대는 시헌도, 그에 반박하는 하민도 정말로 기분이 상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애당초 두 사람에겐 기분이 상해야 할 이유조차 없었다. 하민보다 먼저 담배를 피운 시헌은 새 담배를 물지 않은 채 짧아진 담배 끝을 만지작거렸다.
“얼마면 돼요?”
“됐어. 기욱이 동생이고, 고소도 안 했는데 돈 받기 뭐하다.”
하민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연기를 내뱉으며 손을 흔들었다. 담배 연기 사이로 시헌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누가 박기욱 동생 아니랄까 봐 능글맞기가 참으로 기욱과 똑같았다. 아니, 기욱의 친구라는 것만 믿고 연락하는 시헌의 패기를 볼 때 기욱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시헌은 예의상 입을 뗐다.
“어차피 처음부터 돈 받을 생각 없었잖아요.”
“처음부터 고소 안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너한테 듣고 싶진 않다.”
하민은 시헌을 만난 순간 직감했다. 시헌이 원하는 건 맞고소가 아니었다. 대형 로펌 출신의 변호사라는 하민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시헌의 의도를 눈치챈 하민은 모르는 척 어울리며 겸사겸사 밑반찬을 조금 더 깔았을 뿐인 일이었다. 굳이 하민이 하지 않아도 시헌은 결국 진아가 물러나게 할 것이었다.
“어쨌든 감사해요.”
시헌은 담배를 끈 하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 속내를 알고 속아 준 것도, 아무리 겸사겸사라고 해도 일부러 시간을 내준 하민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민은 그런 시헌의 등을 손바닥으로 퍽 하고 때렸다. 소리가 크게 나긴 했지만, 옷이 두꺼운 탓에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시헌은 하민에게 맞은 등을 만지작거렸다. 하민은 영문을 몰라 토끼처럼 눈을 뜨는 시헌을 내려 봤다.
“동생이라고 하니 뭐……. 닮긴 닮았구나. 너 차 가져왔지?”
“네.”
“그래, 조심해서 가고.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또 연락해라.”
하민은 지갑에서 제 명함을 꺼내 시헌에게 내밀었다. 시헌이 기욱의 명함 캘린더에서 찾아낸 명함은 삼 년도 더 된 옛날 명함이었다. 번호를 바꾸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시헌은 명함을 주머니에 넣으며 차에 타는 하민을 배웅했다.
“감사했습니다.”
“그래.”
막 하민의 차가 출발하고 시헌의 뒤를 이어 서류를 다 쓴 진아와 남자 친구가 경찰서 밖으로 나왔다. 시헌은 집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오는 여자를 흘끗댔다.
“좋은 말 할 때 지워.”
“지울 거라고!!”
잔뜩 짜증이 난 진아가 시헌을 향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진아는 남자 친구를 무시하며 경찰서 정문 밖을 나갔다. 보아하니 경찰서 안에서 좀 싸운 모양이었다.
* * *
중엉도서관 근처에 도착한 서진은 도서관에 들어가기 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시헌에게 물었다. 일주일만 기다리라는 시헌의 말이 거짓말처럼 사실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진아는 게시글을 삭제한 거로도 부족해 찔리는 것이 있는지 사과문까지 올려놓은 뒤 잠수를 탔다.
시헌은 진아가 사과문을 게시한 후에야 하민이 진아에게 통화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사과문이 빚이라는 것을 시헌은 본능적으로 실감했다.
“진짜 고소했어?”
“아니, 잘 해결됐어. 나 내려가서 음료수 좀 뽑아 올게.”
“내 것도. 자리 잡아 놓을게.”
“그래, 알았어.”
시헌은 손을 흔들며 휴게실이 있는 계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처음에 게시글이 올라갔을 때 잔뜩 긴장했던 서진이지만 예전과 다름없이 학교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게시글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시헌은 지폐를 넣은 뒤 캔 커피를 마구잡이로 뽑았다.
한 네 개 정도 뽑았으니 괜찮겠지. 시헌은 자판기 안에 있는 캔 커피들을 꺼내 품에 안았다. 등을 돌리자 여자 동기가 있었다. 그녀가 있는 줄 몰랐던 시헌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커피를 품에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커피를 안은 채 도서관으로 돌아가려는 시헌을 불렀다.
“왜?”
“그……. 다른 게 아니라. 지난번 게시글 말이야.”
주변 학생들의 눈치를 본 그녀는 다른 쪽에서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다고 제안해 왔다. 시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휴게실 밖 복도로 나와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녀의 말은 뜻밖이었다.
“들은 거라고?”
“응. 같이 술 마시면서 들은 얘기래. 친구들한테 그렇게 얘기하고 다니는 모양이야. 누가 말했는지까지는 모르지만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알았어. 알려 줘서 고마워.”
시헌은 슬슬 가 봐야 한다며 커피들을 챙겨 도서관으로 올라갔다. 확실히 시헌과 서진은 진아가 있는 미대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런 말을 한다면 두 사람과 가까운 사람이어야 할 텐데. 시헌은 도통 그런 얘기를 떠벌리고 다닐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헌은 넓은 창가 테이블에 앉아 교재를 펼치는 서진의 앞으로 캔 커피를 내려놓았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앞에 사람이 많아서. 별거 아냐.”
“내일 강의 끝나고 나랑 어디 좀 가자.”
“어디 가는데?”
“휴대폰. 새로 개통했거든.”
시헌은 서진의 앞에 의자를 꺼내 앉았다. 서진은 정지된 폴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날 이후 인훈과 만난 적은 없었지만, 끊임없이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계속해서 오고 있었다. 누구의 짓인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적당히 무시할 생각이었던 서진은 이번 게시글 사건을 겪고 휴대폰 번호를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휴대폰을 왜?”
“그냥 바꾸고 싶어서. 마침 오래되기도 했고. 가지러 가기만 하면 돼.”
서진의 말을 들은 시헌은 서진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침부터 당연하다는 듯 만나고 있어 서진에게 연락할 여유가 없었던 시헌은 귀에 가져 댄 휴대폰 너머에서 정지가 되어 있다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진짜 정지됐네.”
“오늘 오후부터 정지된다 그랬어.”
“미리 말 좀 해 주지 그랬어.”
“그래서 같이 가자고 했잖아.”
“번호도 바꾼 거야?”
“어.”
“왜?”
시헌의 날카로운 질문에 서진은 잠시 움찔거렸다. 서진의 번호는 중학교 시절부터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애당초 대인 관계가 넓지 않은 서진이었기 때문에 휴대폰 번호를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전 번호가 제법 마음에 들었던 것도 한몫했다. 서진은 시헌이 의심하지 않게 최대한 돌려 말했다.
“그냥 기분 전환 삼아서 한번 바꿔 봤어.”
서진은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 서진은 언제부터 이렇게 거짓말에 능숙해지게 된 걸까 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는 시헌의 말이 틀린 구석이 하나 없었다. 시헌은 십 년 가까이 같은 번호를 쓴 서진을 보며 그럴 수도 있다며 서진의 말을 납득했다.
“바뀐 번호 알려 줄 거지?”
“당연하지.”
더 이상의 대화는 눈치가 보였던 서진은 나중에 얘기하자며 말을 아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각자의 공부를 했다.
* * *
서진과 함께 휴대폰 매장에 방문한 시헌은 새로 개통이 된 서진의 휴대폰을 보며 제 휴대폰을 꺼냈다. 거의 1년에 한 번씩 휴대폰을 바꾸는 시헌과 달리 서진은 대학에 들어올 때 이후 처음으로 휴대폰을 바꿨다.
“휴대폰 좋은 걸로 바꾸지 그랬어.”
“그냥 쓸 수만 있으면 돼.”
시헌은 서진의 번호를 받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서진의 휴대폰은 재작년에 출시된 중저가 휴대폰이었다. 시헌은 어차피 저가 휴대폰을 쓸 거면서 휴대폰을 바꾼 서진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서진과 함께 차에 탄 시헌은 운전석에 앉았다. 서진은 새 휴대폰의 내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비밀번호.”
“비밀번호가 왜?”
“너 맨날 누나 생일이잖아. 0514.”
“그게 뭐?”
서진은 뜬금없이 비밀번호 타령을 하는 시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헌은 괜히 창밖을 보는 척 고개를 돌려 서진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다른 걸로 좀 해. 그게 무슨 비밀번호야.”
시헌은 은근슬쩍 헛기침을 하며 서진에게 눈치를 줬지만, 서진은 시헌의 신호를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했다. 민망해진 시헌은 어쩔 수 없다며 안전벨트를 맸다. 차가 천천히 출발하고 서진 또한 시헌을 따라 안전벨트를 맨 뒤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서진의 비밀번호는 서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확실히 비밀의 의미가 없는 번호라는 시헌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서진은 이제 와서 달리 다른 번호를 하자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다른 거 할 게 없어.”
“내 생일은?”
횡단보도에서 멈춘 시헌은 핸들을 안으며 서진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야, 그건 좀 그렇지 않냐?”
“난 진작 네 생일이 비밀번호였어.”
“누가 멋대로…!!”
“빨리 바꿔.”
차를 출발하며 앞을 보는 시헌은 틈틈이 옆에 앉은 서진을 흘끗거렸다. 운전을 하랴, 서진의 눈치를 보랴 시헌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입술을 내밀며 운전을 하는 시헌에 서진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바꿨어.”
“나 뭐라고 저장했어?”
비밀번호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는 듯 운전대를 잡은 시헌이 말을 계속했다. 뭔가 엄청난 것을 기대하는 시헌의 표정에 서진은 기대하지 말라는 듯 매정하게 대답했다.
“그냥 박시헌이지 뭐야.”
“너무해. 자기라고 저장해 줘. 안 돼?”
“야, 미쳤냐?”
“그럼 여보는?”
“너 뭐 잘못 먹었어? 오늘 왜 이래?”
학교에서야 이미 날 대로 난 소문이지만 아직 두 사람의 연애는 가족에게 들어간 것이 없었다. 기욱에게도, 서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서진의 짜증에 시헌은 차를 갓길에 댄 뒤 안전벨트를 풀어 서진의 이마에 재빨리 입술을 맞춘 후 자리로 돌아왔다. 빠르게 벨트를 맨 시헌은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어린애 같은 기습 키스에 당한 서진은 시헌의 입술이 지나간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그럼 하트라도 붙여 줘.”
“알았어. 알았다고.”
서진은 운전하는 시헌의 눈치를 보며 하트 대신 별을 붙여 줬다. 대학교에서 소문이 다 났기 때문일까? 서진은 요즘 들어 시헌이 점점 대담해지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시헌에게 맞춰 주고 있는 서진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 같았다. 대충 전화번호부를 정리한 서진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더 들었다.
“근데 넌 나 뭐라고 저장했는데?”
“나? 우리 서진이.”
운전하며 대답하는 시헌의 말에 서진은 괜한 걸 물어봤다며 이마를 짚었다.
* * *
“병원에서 알바?”
서진은 컵에 담긴 찬물을 목으로 넘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뜻밖의 말에 서윤은 정말 미안하게 됐다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병동 환자들 검사받는 거 도와주기만 하면 돼. 어려운 일은 아닌데……. 꽤 오래 일했던 알바 애가 하나 있는데 해외여행 간다고 한 달 동안 일을 못 나온대. 근데 방학철이라 환자가 많은가 봐.”
“알바 새로 뽑으면 되지 않아?”
“잡일이라고 해도 병원 일이라. 교육하고 하기에는 너무 늦나 봐.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이쪽에 지식이 있는 애로 찾고 있는 것 같아. 뭐, 지식이라고 해 봤자 기본적인 용어만 알면 되니까. 그러다가 네 얘기가 나온 거야.”
이런 일에 진짜 의사를 쓸 수도 없고, 조무사를 쓰기에도 애매한 일이니 실습 직전의 의대생인 서진은 아르바이트 대상으로 딱 적격인 인물이었다. 다만 주로 고가의 과외를 하거나 돈에 대해 눈이 높은 애를 상대로 많이 쳐 줘 봤자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높은 일을 시켜도 될지 말지에 대해서는 찬반이 오고 갔던 모양이었다.
사실 서진은 돈보다 서윤이 자신에게 부탁한다는 것에 더 의의가 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서윤이 부탁한다면 서진은 알바가 아닌 병원 봉사도 할 의향이 있었다. 서진은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하며 대답했다.
“한 달 다 채우는 건 힘들고, 한 2주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응. 누나 부탁인데 당연히 해야지.”
“서진아 진짜 고마워!!”
서진의 허락에 서윤의 표정이 밝아졌다. 슬슬 본과의 빡빡한 수업에도 익숙해진 상태고, 시헌과 같이 있으면서 제법 공부를 많이 해 둬 여유가 있었다. 실습 들어가고 난 이후에는 세미나를 안 간다는 조건이었던 시헌은 실습 전 마지막 방학이라는 것을 핑계 삼아 이리저리 끌려다닐 예정이라고 들었다.
실습 때도 보겠지만, 서진은 서윤이 일하는 병원을 한 번쯤 둘러보고 싶었다. 아르바이트하기 전 서진은 딱 한 가지 신경이 쓰이는 것이 있었다. 서진은 입안에 있는 음식물을 전부 씹은 뒤 말했다.
“근데……. 기욱 형님은 언제 와?”
“기욱 오빠?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 너 방학 끝날 때쯤에 올 거야.”
서윤은 달력을 봐야 한다며 말을 흐렸다. 서진의 방학 타이밍과 맞춰 기욱은 한 달 정도 해외 연수에 나간 상태였다. 서진은 자칫 잘못하면 기욱이 돌아오는 것과 아르바이트 타이밍이 맞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가급적 기욱과 병원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일단 알았어.”
서진은 별일 없겠거니 하며 다 먹은 밥그릇을 싱크대에 넣었다. 서윤은 먼저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서진을 불렀다.
“서진아.”
“응?”
서윤의 부름에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서윤은 서진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가만히 바라봤다.
“너 누나 몰래 여자 친구 만들었어?”
서윤의 말에 서진은 손끝에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집에서는 보통 빼고 있는데, 빼는 것을 깜박했다. 서윤을 본 서진은 잠시 변명할 거리를 만들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샀어.”
“샀다고? 비싸 보이는데?”
“그냥 도금이야. 사실은 며칠 전에 여자에게 고백받았거든.”
“어머. 우리 서진이 인기 많구나.”
“어머가 아니라. 당분간 연애할 생각이 없어서 그래. 공부하는 데 방해되는 게 싫어서.”
서진은 서윤을 보며 적당히 말했다. 학교에서야 시헌과 사귄다는 소문이 다 나서 상관없지만, 실제로 시헌과 맞춘 커플링은 꽤 도움이 됐다. 보통 반지를 끼고 있는 남자를 보면 여자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지 남자 친구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얘도 참.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국시 떨어지면 안 되잖아. 연애 같은 건 언제든 할 수 있고. 어쨌든 정말 별거 없어.”
“하아, 알았어.”
서진의 단호한 태도에 서윤은 더는 반지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서윤은 서진이 이런저런 여자들을 만나 봤으면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한참 예민한 서진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마음은 없었다.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서진은 방문 앞에서 몸을 틀었다.
“아르바이트는……. 날짜랑 시간 알려 줘.”
“알았어. 그렇게 할게.”
“응.”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 * *
이른 아침 출근 시간,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철 안에 탄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서진의 집에서 J대 병원을 가는 지하철역은 서진의 생각 이상으로 상당한 역세권이었다. 환승역을 지나쳐 서진은 사람이 가득한 지하철에 간신히 몸을 구겨 넣었다. 열차의 연결 칸 쪽 벽에 몸을 기댄 서진은 사람들에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덜컹거리며 지하철이 흔들렸다.
‘뭐지?’
발 디딜 틈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람들 틈에서 서진의 허벅지 안쪽으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검은색 바지 위를 쓰다듬고 들어오는 손에 서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들에 꽉 껴 있는 상태여서 뭘 어떻게 할 수도 없었던 서진은 불쾌함에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서진은 옆 벽에 기대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사람들이 가득한 지하철 안에서 당당하게 팔짱을 끼며 잘 접은 신문을 보고 있었다. 설마 지하철 안에서 치한을 만날 줄 몰랐던 서진은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지하철이 다시 흔들리며 신문을 보고 있던 사내의 몸이 서진 쪽으로 기울었다. 남자가 일부러 기운 건지는 모르지만, 치한과 함께 지나치게 달라붙은 남자는 홍당무처럼 붉어진 서진을 보며 슬쩍 웃더니 서진의 옆쪽에 딱 달라붙어 있는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꺄악! 아! 아저씨 미쳤어요? 어딜 만져요?”
출근 시간 혼란으로 인해 지하철이 역 틈에서 잠시 멈추자 남자는 빠르게 서진의 허리를 안아 몸을 돌렸다. 서진은 졸지에 치한에서 정체 모를 남자에게 안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 틈에 빽빽하게 자리한 여자는 서진을 추행한 남자가 제 허벅지를 만진 줄 알고 투덜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아, 뭐 저딴 사람이 다 있어!! 아침부터 짜증 나게!!”
여자는 언성을 높였고, 그는 결국 사람들을 비집고 안쪽으로 도망쳤다. 서진은 재출발하는 지하철에서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반쯤 안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많은 터라 안기지 않으려 해도 도통 방법이 없었다.
그는 이 출근 지옥이 익숙해 보였다. 한쪽 팔을 벽에 짚은 남자는 뒤쪽에 있는 사람들을 밀어 틈을 만들었다. 그 덕분에 서진은 아까보다는 한결 여유롭게 서 있을 수 있었다. 서진은 그 배려에 고개를 숙였다. 비단 그의 배려뿐만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서진의 인사에 그는 말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말할 수 없는 얘기라는 것을 그도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서진을 내려다보던 그는 팔을 뻗어 신문을 노약자석 위쪽에 올려놓았다. 병원 근처가 익숙하지 않았던 서진은 남자의 뒤쪽에 있는 전광판을 계속해서 살폈다.
“어디 역으로 가?”
“현주역이요.”
“아, 진짜? 나도 현주역 가는데.”
“그래요?”
서진은 눈앞에 있는 사내를 위아래로 훑었다. 평범한 셔츠에 잠바 차림, 잔뜩 머리를 세우고 나름 깔끔하게 차려입은 서진과 달리 그는 마치 동네에 외출을 나오는 것 같은 가벼운 차림이었다. 지하철에 탄 대부분의 사람이 직장인이고, 출근 시간대 지하철인 걸 생각하면 그의 차림은 오히려 위화감이 있었다. 그는 서진의 생각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현주역은 왜?”
“아르바이트하러요.”
“어디로?”
서진은 눈을 치켜뜨며 그를 살짝 올려다봤다. 이걸 대답해 말아. 잠깐 고민하던 서진은 역으로 여자에게 치한이라는 오해를 살 뻔한 도박을 감수하며 저를 구해준 남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J대 병원에요.”
“…….”
서진의 대답에 그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할 말이 없어진 건가?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의 반응에 서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참 만에야 그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J대 병원에 알바하러 간다고?”
“아, 네.”
“우연이네! 나도 J대 병원 가. 의사거든.”
그가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아, 서진은 그제야 어딘가 초췌해 보이는 그의 차림을 이해했다. 다만 생각보다 젊은 얼굴로 인해 그의 직급을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기욱과 비슷하거나, 혹은 한두 살 어리거나 싶은 얼굴이었다.
“병원 어디서 알바하는데?”
“오늘 첫날이에요. 아마, 신경외과 병동이었던 것 같은데……. 저도 잘은 몰라요.”
대학병원 특성상 상당히 많은 과가 존재했다. 서진은 눈앞에 있는 의사가 무슨 의사인지 모르기 때문에 말을 해도 알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했다. 서진의 계산 착오였다. 그는 한 번 더 말을 잃더니 뒷목을 긁적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신경외과로 배정이 날지 안 날지도 모른다.
“나도.”
“네?”
“NS 전문의거든.”
“전공의가 아니라요?”
“뭐? 내 나이가 몇인데 전공의야? 나 6년 차거든? 근데 너 이름이 뭐냐?”
그가 울컥하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아직 J대 병원이 있는 현주역까지는 몇 정거장이 더 남은 상태였다. 지하철역 안에 사람들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 좁은 지하철 많은 사람 안에서 치한에게서 저를 구해 줬던 사람이 하필이면 J대 병원 신경외과 의사라니 인연도 이런 인연이 없었다. 인연인지 악연인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강서진요.”
마지못해 이름을 대답한 서진은 일부러 눈을 깜박였다. 서진의 노골적인 시선을 느낀 그가 그제야 제 이름을 말했다.
“한우민이다. 알바라고 해 봤자 뭐, 병동 알바 같으니까 얼굴 보면 인사해.”
우민의 말에 서진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과 같은 신경외과, 그런데 뭘까,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