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8 오늘만 사는 너 (41/83)

Chapter. 38 오늘만 사는 너

“흐으…. 하응. 으….”

“시헌아.”

“흐응. 으으읏!”

“박시헌, 열두 시야.”

시헌의 안에 페니스를 밀어 넣은 서진은 시헌의 다리를 벌린 채 침대 옆 선반에 놓인 디지털시계를 손가락질했다. 얇은 디지털시계에 비친 시계가 12시 1분을 막 넘기고 있었다. 서진은 정신이 없어 하는 시헌의 뺨과 목 근처를 핥았다.

“생일 축하해.”

“흐응. 으… 서진아. 읏. 치, 치사해….”

“오늘은 내가 할 거야.”

서진은 오늘만큼은 시헌에게 아래를 양보할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고, 왠지 알몸이 된 시헌을 보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생일인데 이 정도는 양보해 줘도 괜찮잖아. 그렇게 생각한 서진은 밑에서부터 깊숙이 시헌의 안에 페니스를 찔러 넣었다.

서진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흔들던 시헌은 몸과 머리가 정신없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서진의 아직 풀리지 않은 단추들을 향해 계속 손을 뻗었다.

“흐응. 읏. 으으… 하응.”

“왜?”

“으, 서진아. 오. 옷… 치사해.”

“후우, 큭큭.”

입술을 내미는 시헌에 서진은 천천히 움직임을 멈췄다. 시헌은 서진의 페니스를 머금은 채로 위로 올라와 밑에 있는 서진의 셔츠의 단추를 천천히 풀었다.

* * *

“어? 형 방학 동안 시계 바꿨어요?”

시헌의 시계를 본 재혁이 제 소매를 걷으며 시계를 손가락질했다.

“저랑 똑같은 거네요. 저도 얼마 전에 바꾼 거거든요.”

재혁의 시계는 시헌과 똑같았다.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서 가격 대비 디자인도 괜찮다고 소문이 난 브랜드의 제품이었다. 대학생들이 사기에는 약간 부담스럽긴 하지만 통상의 시계 가격을 생각할 때 그 정도의 가격은 충분히 투자할 만한 적당한 중가 시계였다. 시헌은 서진에게 선물 받은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사용하지 않고 유리벽에라도 전시해 두고 싶은 기분이었다.

“근데 형 전에 썼던 게 더 비싼 거 아니었어요? 이거 형이 쓰던 거에 비하면 훨씬 싼 건데.”

“난 이게 좋아.”

시헌의 중얼거림을 재혁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침 강의실로 들어온 서진은 시헌의 테이블 위로 프랜차이즈 커피를 탁, 하고 올렸다.

“난 심부름꾼이 아니라고.”

“뭐 어때. 오는 길이었잖아.”

시헌은 서진이 사 온 커피를 홀짝였다. 서진이 학교 근처라고 하자 시헌이 오는 길에 커피를 사 달라고 문자를 남긴 것이었다. 시헌에게 커피를 준 서진은 제가 사 온 밀크티를 홀짝이며 빈자리에 앉았다. 재혁은 익숙하게 서진이 사 온 커피를 받아 마시는 시헌을 바라봤다.

“왜? 뭐 문제 있어?”

“아, 아뇨.”

재혁은 기우겠거니 하며 자리에 앉았다.

* * *

점심시간, 두 사람은 늘 가는 식당 말고 다른 식당을 찾았다. 가끔은 새로운 곳에서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책 없이 다니던 식당을 대신할 곳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참을 돌던 시헌과 서진은 결국 골목 안쪽의 한가한 24시간 감자탕 집으로 들어갔다. 대낮부터 감자탕이라니 좀 뭐하긴 하지만 다음 강의까지 시간이 빠듯해 더 돌아다닌다면 점심을 먹기 힘들게 될지도 몰랐다. 시헌은 감자탕이 나오는 동안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자동차 열쇠고리를 손가락에 끼운 채 빙빙 돌렸다.

“차 바꿀까?”

“뭐? 뭔 미친 소리야.”

물을 마시던 서진은 뜬금없는 시헌의 말에 인상을 구겼다. 자동차가 무슨 동네 붕붕카도 아니고 바꾸고 싶다고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하물며 대학생인 시헌의 입에서 나올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기욱의 차가 좀 된 건 사실이지만, 워낙 관리를 잘한 데다가 차 자체가 상당히 가격이 나가는 외제차 종류였다.

시헌은 차 키를 손가락에 끼운 채 테이블 위로 팔을 올려 턱을 괬다. 만약 기욱의 차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시헌은 더 진작 차를 바꿔야 했다. 여태까지 잘만 타고 다녀 놓고 차를 바꾸겠다고 말하는 시헌의 말을 서진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형 차도 괜찮은데, 뭐라고 해야지……. 하아, 나 방학 때 알바한 거 엄마가 아빠한테 얘기했나 봐.”

“…….”

“그래서 그 뒤로 필요한 거 없냐고 만날 때마다 계속 물어보는데, 성가셔.”

시헌은 막 나온 감자탕에 밥을 말며 중얼거렸다. 심지어 그 일이 있은 후 일부러 따로 불러 약속을 잡는 날도 꽤 늘었다. 시헌은 아빠가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구는 것이 어딘가 불편했다.

“차 한 대 뽑으면 조용해질 것 같아.”

시헌의 중얼거림을 들은 서진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서진은 본가가 있는 시헌의 집이 남들보다 조금 잘산다는 것 외에는 크게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다. 굳이 따지자면 용돈을 좀 많이 받고, 좋은 학원에 다니는 것 정도가 차이점의 다였다.

허나 대학생이 된 이후 서진은 저런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시헌이 오히려 더 부담스러웠다. 부담스럽다고 해야 할까, 격의 차이가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분명한 건 시헌의 집은 의사 집안이라는 걸 떠나 서진의 생각 이상으로 훨씬 더 잘사는 집안이라는 점이었다. 서진의 시선을 느낀 시헌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하하, 농담이야. 그치만 엄마가 카드 준 건 진짜야.”

그날 이후 시헌은 엄마에게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는 조건으로 체크카드를 받았다고 했다. 서진도 시헌이 체크카드를 받았다는 것만 알 뿐 그 체크카드에 얼마가 들었는지, 무슨 카드인지는 알지 못했다. 주머니 안을 뒤적거리던 시헌은 서진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주머니에 두툼한 물건이 들어 있어 뭔가 싶었는데 상자였다. 밥 먹다 말고 뭘 하는 건가 싶은 서진은 시헌이 내민 상자를 열었다. 상자에는 시계가 들어 있었다.

“선물.”

“나 생일 아니거든?”

“됐으니까 마음에 드나 봐 봐.”

사실 시계를 바꿔야 할 사람은 시헌이 아닌 서진이었다. 대학로의 싸구려 매장에서 3만 원을 주고 산 시계는 가죽 끝이 다 닳은 데다 바늘이 작아 시간을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시헌이 진짜 고마워했던 건 다른 것도 아닌 그런 점이었다.

서진은 시헌이 선물한 시계와 시계의 상자를 이리저리 뒤집었다. 시헌은 일부러 브랜드명이 적힌 봉투와 시계에 있는 태그들은 전부 떼 버린 상태였다. 물론, 시계 구석에 박혀 있는 브랜드명은 어쩔 수가 없긴 하지만.

서진은 딱 봐도 제가 시헌에게 선물한 것보다 훨씬 비싼 시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헌의 시계를 알아보며 시계에 대해서는 제법 많은 검색을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보는 눈이 생겼다.

“얼마 주고 샀어?”

“선물 받는 사람은 가격 물어보는 거 아니랬어.”

시헌은 팔을 걷어 서진에게 선물 받은 시계를 흔들었다. 시헌도 서진이 준 시계에 대한 가격은 끝까지 묻지 않았다. 뭐, 대충 얼마 정도인지 감은 잡고 있지만 말이다. 서진은 이런 비싼 시계는 받을 수 없다며 시계를 다시 상자에 넣은 뒤 시헌 쪽으로 밀었다.

시헌이 차를 바꾸든, 천만 원짜리 시계를 사든 본인의 선택이다. 그러나 서진은 시헌이 자신 때문에 거금을 쓰는 것을 원하진 않았다. 그것도 생일이 아닌 날에 선물이라고 박박 우기면서까지 말이다.

“당장 환불해.”

서진이 시계를 밀자 시헌이 다시 서진에게 시계를 밀었다. 서진의 말에 시헌은 큭큭대며 아무렇지 않게 물을 마셨다.

“괜찮아. 그거 사고도 나 학교 졸업할 때까지 못 쓸 만큼 받았거든.”

“도대체 얼마를 받았는데?”

“1억.”

시헌의 말에 서진은 고개를 숙여 시계가 있는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시헌은 상자를 서진 쪽으로 좀 더 밀었다. 1억이라니. 기껏해야 몇백, 몇천만 원일 거로 생각했던 서진의 상상을 훨씬 넘는 금액이었다. 그것도 체크카드로 받았다는 말은 말 그대로 시헌의 돈이나 다름이 없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시헌이 이어서 하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다 쓰면 더 준대. 근데 나 레지던트 끝날 때까지도 못 쓸 것 같은데.”

1억을 가지고 참 태평하게 말을 하는구나 싶었다. 서진은 시헌이 선물한 시계를 은근슬쩍 챙겼다. 어차피 시헌은 새로 시계를 산 데다가 집에 차 한 대 가격의 시계가 있었다. 시헌은 서진이 시계를 챙기는 것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지 때는 돈 쓸 일이 없잖아.”

“음. 그것도 그래. 어쨌든 좀 고민이야.”

시헌은 엄마에게서 받은 체크카드를 꺼내 카드 모서리로 테이블을 툭툭 건드렸다. 서진은 남은 국물을 긁어 마셨다.

“참 배부른 고민도 다 있다.”

시헌보다 조금 일찍 식사를 마친 서진은 시헌이 선물한 시계를 곧장 팔에 찬 뒤 제 싸구려 시계를 주머니에 넣었다. 어차피 선물 받은 거 고의 모셔 둘 필요는 없었다. 서진은 부산스럽게 체크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시헌의 손을 바라봤다.

“…야.”

“어?”

“맞출까?”

“뭘?”

“반지.”

모서리로 세워진 시헌의 체크카드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서진의 말에 시헌은 의자를 밀어내며 벌떡 일어났다.

“진심이야?”

시헌은 서진이 아직도 반지 얘기를 기억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시헌은 서진과 하는 거라면 반지든, 커플 옷이든 뭐든 다 맞추고 싶었다. 서진은 벌떡 일어난 시헌에 요란스럽게 굴지 말라며 손을 아래로 흔들었다. 시헌은 의자를 살짝 뒤로 뺀 상태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서로 다른 걸로 하면 되지.”

“에이, 그게 무슨 커플링이야?”

서로 다른 거로 커플링을 하자는 말에 시헌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둘만 알아보면 되잖아.”

굳이 같은 반지를 할 필요가 없이 서로만 알면 된다는 식의 서진의 말에 시헌은 서진 쪽으로 몸을 내밀어 눈을 반짝였다. 서진은 그런 시헌이 살짝 부담스러워졌다.

“그거 좋다.”

“하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해.”

서진은 가게에 사람이 없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 의자를 당겨 앉아 마저 남은 밥을 먹은 시헌은 의자 아래로 발을 동동 굴렀다.

“빨리. 빨리 강의 끝났으면 좋겠어.”

제안만 한 것뿐인데. 어째서인지 당장 맞추러 가는 것 같은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일일이 태클을 걸기도 귀찮았던 서진은 마음대로 하라며 한숨을 쉬었다. 뭐, 시헌이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이다.

“애냐 진짜.”

* * *

강의가 끝나고 인근 백화점으로 온 서진과 시헌은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붙잡았다. 무작정 백화점에 온 것까지는 좋으나.

“무슨 반지를 해야 하는 거지?”

“나도 몰라.”

시헌의 물음에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인하와 사귈 때도 커플링을 맞추기 전에 헤어졌다. 둘 다 남자라 반지에 관심도 없었다. 일단 1층에서 내린 두 사람은 반지가 있을 만한 액세서리 판매대를 생각 없이 돌았다. 시헌은 제법 괜찮은 반지들이 진열된 유리 진열대 앞에 멈췄다.

“나 반지 맞춰 본 적 없어.”

“나라도 있을 것 같아?”

진열대 안에는 화려하게 보석으로 장식된 반지와 목걸이, 귀걸이 등이 있었다. 시헌은 진열장 위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돌렸다.

“다이아라도 박을까?”

“미친 소리 하지 마.”

“나 돈 많아.”

“그 문제가 아니잖아.”

진열대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걸 눈치챈 여자 직원이 시헌과 서진에게 다가왔다. 직원을 슬쩍 본 서진은 대충 가장 무난해 보이는 반지를 손가락질했다.

“그냥 적당한 걸로 하자.”

“아. 여자 친구 선물이시면 이쪽 세트가 가장 많이 나가요.”

남자 둘이라 한쪽이 여자 친구에게 선물 하러 왔다고 오해한 직원이 커플링이 있는 반지 세트를 꺼내 위쪽으로 올렸다. 딱 봐도 대학생인 두 사람에게 추천하는 반지들은 14K 금이나 은반지 정도였다. 정작 시헌의 시선은 보석이 잔뜩 박혀 있는 화려한 반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직원은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는 시헌과 서진을 훑어보며 말했다.

“어느 쪽이 선물할 생각인가요?”

직원의 말에 화려한 반지를 구경하던 시헌과 직원이 꺼낸 무난한 반지를 보던 서진의 눈이 맞았다. 시헌이 서진에게 빨리 말하라며 눈짓으로 재촉했다. 눈치 싸움에서 진 서진은 보고 있던 반지를 내려놓았다.

“그냥 둘 다 각자 한 개씩 할 건데…….”

“아, 따로따로 한 개씩이요?”

“똑같은 거여도 상관은 없어요.”

시헌이 여자 직원과 서진의 대화에 대뜸 끼어들었다. 똑같은 것도 상관없다니. 그게 커플링이랑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녀는 꺼내 놓은 반지 중 중간에 있는 금반지 세트를 가리켰다.

“이건 남자들이 끼기에도 무난한 편이에요. 커플링인 게 티도 잘 안 나구요.”

둘 사이를 눈치챈 여직원이 친절하게 이것저것 추천을 해 줬다.

“다이아는…….”

“죽는다, 박시헌?”

“노, 농담이야. 그럼 이걸로 할게요. 아. 혹시 그……. 이름 같은 거 새길 수 있어요?”

“이니셜 정도라면 가능해요.”

여직원의 말에 시헌은 직원이 추천해 줬던 금반지에 서로의 이니셜을 새기는 걸로 합의를 봤다. 시헌은 그 자리에서 두 개 해서 80만 원에 가까운 반지를 결제했다. 각자의 이니셜을 적어 간 직원은 뒤쪽으로 간지 십여 분 만에 두 사람에게로 돌아왔고, 시헌과 서진은 금방 이니셜이 새겨진 반지를 챙겨 받을 수 있었다.

다른 쇼핑은 할 생각조차 없었던 두 사람은 반지를 받기 무섭게 차로 돌아왔다. 서진은 자동차 내부의 불을 켰다. 시헌은 서진의 품에 있는 반지 상자를 빼앗아 서진의 이니셜 K.S.J가 적힌 반지 안쪽을 불에 비춰 둘러봤다.

“좋냐?”

“응. 엄청 좋아.”

“어차피 끼면 보이지도 않을 거.”

서진도 시헌의 이니셜인 B.S.H가 새겨진 안쪽을 보며 반지를 꼈다. 처음 계획은 분명 서로 다른 반지였을 텐데. 막상 이렇게 끼니 누가 봐도 커플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뭐, 번갈아 가면서 끼면 되지 않을까?”

“그러지 뭐.”

서진은 반지를 뺀 뒤 상자에 다시 넣은 다음 벨트를 매고 조수석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졸려?”

“어. 좀.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자서.”

“도착할 때까지 좀 자.”

시헌은 뒷좌석 쪽으로 손을 뻗었다. 서진의 몸 위로 제법 두툼한 병원 담요가 올라왔다.

“하나 샀어. 병원 담요가 따듯하잖아.”

“고맙다.”

의자를 살짝 누인 서진은 담요를 덮으며 눈을 감았다.

“서진아, 강서진.”

“…….”

“안 일어나면 확 차 안에서 덮쳐 버린다?”

“…….”

서진의 집 근처 골목 한쪽에 차를 댄 시헌은 벨트를 푼 뒤 서진 쪽으로 다가갔다. 날밤을 꼬박 새웠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모양인지 서진은 시헌이 몇 번이나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은 채였다. 시헌이 다가오자 서진의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서진의 자는 척을 눈치챈 시헌은 담요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서진의 옷 안을 들췄다. 그러자 탁, 하고 서진이 시헌의 팔을 잡아당긴 뒤 이마를 맞댔다.

“누가 누굴 덮쳐? 크읍. 죽을래?”

서진은 시헌에게 병원 담요를 던진 뒤 자동차 벨트를 풀고 뒷좌석에 있는 가방을 챙겨 빠르게 차에서 내렸다. 서진은 반쯤 닫힌 차 문 안으로 얼굴을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내일 학교에서 보자.”

“어. 응.”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서진은 곧장 반지하방이 있는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서진이 집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본 시헌은 서진이 조금 전까지 덮고 있던 담요를 얼굴로 가져다 댔다. 담요에서 아직 서진의 온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 * *

“…아 이런.”

방바닥에 앉아 공부하던 서진은 몸을 틀어 바닥을 이리저리 만졌다. 서진의 손에 치인 캔들이 와르르 넘어졌다. 정작 넘어진 캔 중에서는 내부 음료가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서진은 마지막 남은 캔 커피를 입안으로 털고서 방에서 일어났다. 본과에 가고 나면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딱 이 뜻이었다. 이틀 동안 날밤을 새운 서진은 시헌의 차에서 잠깐 잔 뒤 곧장 방으로 돌아와 공부를 계속했다.

새벽 세 시. 서진은 바닥에 떨어진 캔 커피를 쓰레기통에 버린 뒤 방을 대충 치웠다. 치웠다고 해 봤자 바닥에 있는 쓰레기들을 버리고 널브러진 책과 프린트물들을 한쪽에 쌓은 것이 전부일 뿐인 정리였다. 워낙 방이 엉망이라 그것만으로도 좁은 방은 숨통이 트였다.

거실로 나온 서진은 잠바를 챙겨 입은 뒤 편의점을 가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왔다. 마침 담배도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편의점에서 서진은 담배 두 갑과 캔 커피 5개를 더 사 왔다. 편의점 밖에 나온 서진은 곧장 캔 커피를 반쯤 마신 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시험 기간이나 날밤을 새울 때면 습관처럼 캔 커피를 찾기는 찾는데, 이 정도 되면 아무리 봐도 중독 같았다. 서진은 이렇게 자잘하게 살 바에는 차라리 박스째로 구매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진은 두 번째 담배를 피우며 반쯤 남은 캔 커피를 홀짝였다.

“담배 피우면서 커피 마시면 몸에 안 좋지 않아?”

“……?”

새벽에 사람이 없었던 편의점 탓에 서진은 난데없이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틀었다. 서진과 마찬가지로 편한 츄리닝복 차림의 인훈이 서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서진은 그제야 편의점 너머 개인 주택들을 둘러봤다.

아, 집이 이 근처랬지.

이 동네에선 편의점이 이거 하나가 다라 동네 사람들은 이 편의점을 찾았다. 하필이면 새벽에 인훈을 만날 줄은 몰랐던 서진은 남은 커피를 마저 마셔 커피를 비운 뒤 캔을 구겼다. 담배 피우면서 커피를 마시면 몸에 안 좋냐고? 당연히 안 좋지. 근데 병원 의사들이 언제 제 몸 챙기면서 일한 적이 있었던가.

서진은 의사를 지망하는 사람들도 의사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루에 몇 챕터씩 넘어가는 엄청난 양을 따라가려면 잠을 줄여 공부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잖아. 공부해야 하니까.”

“평소에 커피 안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네. 그렇게 한꺼번에 마시면 나라도 질릴 것 같아.”

틀린 말은 아니었던 서진은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커피를 한 캔 다 마신 것 같은데 마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서진은 잠을 쫓기 위해 결국 세 번째 담배를 피우며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편의점에 들어가려던 인훈은 담배를 피우는 서진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흘끗댔다.

“여자 친구 생겼어?”

뜬금없는 인훈의 말투에 서진은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살짝 만졌다.

“그런 거 아냐.”

“그런 거 아닌데 왜 반지를 껴.”

서진은 편의점에 들어가지 않고 저에게 말을 걸어 대는 인훈이 짜증이 났다. 편의점에 갈 거면 가고 말 거면 말든지. 서진은 인훈이 묘하게 자기에게 관심이 많다는 느낌을 좀처럼 지울 수 없었다. 시헌과 반지까지 맞춘 마당에 더는 괜한 오해를 살 만한 일은 피하고 싶었다.

“씨발, 내가 반지를 끼든 말든 뭔 상관이야.”

더 안 피우려 했는데. 서진은 속으로 마지막이라며 담배를 물었다. 여기서 도대체 몇 개비를 피우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실 이게 이렇게까지 욕을 할 일인가도 싶었지만 잠이 부족한 서진은 평소보다 더 날이 서 있는 상태였다.

“……그런 건 아닌데.”

“야.”

서진은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머리를 긁적이며 인훈을 노려봤다.

“…….”

“내가 지금 30분밖에 못 자고 나와서 좀 정신이 없긴 한데, 까놓고 말해서 고등학교 동창이라 해도 나 별로 너랑 친하게 지낸 기억 없거든?”

서진은 눈을 반쯤 감은 채 담배 연기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안 그래도 졸린데 인훈 때문에 더 신경질이 났다. 몇 번의 마주침 후 서진도 인훈이 기억났다. 고3 무렵 은소와 싸우고 잠깐인가 인훈과 같이 다닌 기억이 있었다.

문제는 인훈과의 인연이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퇴하고, 곧장 재수하면서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전부 연락을 끊었으니 당연히 그럴 수도 있지만 인훈과의 인연은 그것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인훈과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 기억하려고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불편했다.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 서진은 만약 인훈이 정말 은소와 싸운 후 같이 다녔던 친구라면 재수와 자퇴를 결심한 후에도 이런 식으로 연락을 끊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인훈에 대해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더욱 서진을 꺼림칙하게 만들었다.

서진은 입을 다문 인훈을 향해 담배를 끈 뒤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같은 대학이라 해도 문과대학 멀고. 그거 알아? 난 너 존나 불편해.”

서진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시헌과 사귀면서 시헌의 이런 점을 묘하게 닮아 가고 있었다. 인훈도 서진의 달라진 점을 눈치챈 듯 입술을 깨물었다.

“서진아, 나는 그냥 너랑 친하게 지내려고…… 동네도 같고…….”

“별로, 너랑 친해지고 싶지 않다.”

“박시헌 때문에 그래?”

서진은 담배를 더 물지 않고서는 안 될 것 같은 상황에, 담배를 물던 중 들려오는 시헌의 이름에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발아래로 떨어트렸다. 서진은 바닥에 떨어진 담배의 먼지를 툴툴 털며 주웠다.

“야. 박시헌 얘기가 너한테 왜 나와?”

담배를 피울 맛이 사라진 서진은 담배 개비를 다시 케이스 안으로 집어넣었다. 인훈이 서진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서진은 편의점 유리창 너머를 흘끗댔다. 새벽이라 손님이 없는지 알바생은 스태프실 안으로 들어간 탓에 편의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진은 아무리 봐도 인훈이 편의점에 용무가 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서진아, 잘 생각해 봐. 너, 너 예전엔 안 그랬잖아.”

“뭐, 라고?”

“내가 잘할게. 응? 왜 그래. 너 그렇게 매몰찬 애 아니었잖아.”

서진은 인훈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원래부터 약간 불편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인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당황스러웠다.

서진의 발이 얼어붙은 것처럼 꼼작하지 않았다. 서진은 저에게 내민 인훈의 손을 옆으로 쳐 냈다. 인훈의 손을 쳐 낸 서진의 손가락에 낀 반지가 빛났다.

“이게 다 그 개자식 때문이야.”

“…그, 그게 무슨… 씨발. 야 너 뭐야? 너 나 좋아하냐? 미쳤어?”

서진은 시헌을 개자식이라 부르는 인훈에게 소름이 돋았다. 좋아한다는 말은 정말 막 던진 것뿐이었건만 인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서진을 머뭇거리게 하는 데 더없이 충분했다.

“좋아해.”

인훈이 고개를 약간 숙였다. 둘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진은 인훈의 고백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만 푹푹 쉬었다.

“미안하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

“근데 나 사귀는 사람 있다.”

“여자 친구 없잖아.”

“말 못 알아듣냐. 남자라고.”

“박시헌?”

서진은 인훈의 말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서진이 침묵을 하자 인훈은 점점 더 서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점점 뒤로 밀려 인근 개인 주택의 벽에 몸을 기댄 서진은 인상을 구겼다.

“서진아, 걔는 아니야.”

“…….”

“진짜 아니라고. 이건. 이건 아니잖아.”

“씨발, 너 계속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서진은 이상한 소리를 하는 인훈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소름이 끼치는 것도 있었고, 마침 편의점 알바생이 잠깐 카운터로 나왔다. 유리 너머에 있는 알바생은 아직도 가지 않고 서성이는 두 사람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알바생이 나온 것을 본 서진은 인훈을 옆으로 밀어냈다.

“씨발, 누구랑 사귀든. 너랑 알 바 아니잖아.”

여기에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뭔가 심각한 분위기를 느낀 알바생이 문 너머로 얼굴을 내밀자 서진은 따라오지 말라는 듯 인훈을 노려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인훈은 뭔가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골목을 돈 서진은 인훈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집을 향해 달렸다.

“하아, 하….”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집으로 들어온 서진은 빠르게 현관문을 전부 잠근 뒤 거실에 주저앉았다. 혹시 인훈이 쫓아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히 바깥은 조용했다. 새벽의 황당한 경험에 서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긴장이 풀린 건가 뒤늦게 식은땀이 흘렀다.

비틀거리면서 벽을 짚고 일어난 서진은 냉장고에 있는 찬물을 서둘러 마셨다. 물을 마시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았다. 입가에 흐르는 물을 닦아 낸 서진은 굳게 닫힌 현관문과 옆 창문을 흘끗댔다.

뭐 이런 또라이 새끼가 다 있냐며.

* * *

시헌은 학교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 서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의 서진이라면 학교에 들어서기 무섭게 안전벨트를 풀고 가방을 품에 안고 있었어야 정상이었다. 시헌은 가방은커녕 벨트조차 풀지 않은 채 이마를 짚으며 자리를 지키는 서진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그냥…….”

“그냥?”

“하아. 그냥 몸살인가 봐.”

“날 그만 새. 힘들잖아.”

“오늘은 일찍 잘 거야.”

시헌은 서진 쪽으로 다가가 서진의 벨트를 풀어 주었다. 한결 몸이 가벼워진 서진은 뒷좌석에 있는 가방을 챙겨 차 밖으로 나왔다. 강의실로 가는 내내 서진은 시헌을 흘끗댔다. 인훈과의 일을 잊기 위해 밤새 공부를 했다. 인훈과 있었던 일을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진은 시헌을 너무 노골적으로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적당히 말을 던졌다.

“너 오늘 또 세미나 간다며?”

“말도 마. 진짜 짜증 나. 그래도 실습 들어가면 더 이상 안 가기로 엄마랑 약속했어.”

확실히 실습까지 하면서 세미나를 다니는 건 좀 무리가 있었다. 시헌보다 조금 먼저 계단을 오르던 서진이 발을 헛디뎌 휘청거렸다. 밑에 있던 시헌이 재빨리 서진의 몸을 붙잡았다.

“괜찮아? 너 진짜 오늘 왜 그래?”

“잠을 좀 못 자서.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건물 계단 뒤쪽을 흘끗거렸다. 시선이, 느껴진 것 같은 기분이 든 서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처음 보는 여학생과 눈을 마주친 서진은 고개를 흔들며 강의실이 있는 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선이라니.

무슨 만화도 아니고 말이다.

* * *

“그럼 내일 보자.”

중앙도서관의 한적한 복도에 선 시헌은 슬슬 가 봐야 한다며 서진에게 머리를 기댔다. 서진은 저에게 달라붙는 시헌을 살짝 밀어냈다.

“학교에선 안 하기로 했잖아.”

“머리만 기대는 거잖아.”

시헌은 아무도 없는 중앙도서관 복도를 두리번거렸다. 안쪽에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시헌은 시간을 확인한 뒤 진짜로 갈 준비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내일 오후에 올게.”

“술 마시고 오면 가만 안 둬.”

시헌은 술을 마시고 음주운전을 한 전적(?)이 있었다. 서진의 잔소리에 시헌은 걱정하지 말라며 차 키를 흔들었다.

“자고 올 거야.”

“그래, 잘 가라.”

시헌을 보낸 서진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던 서진은 도서관 내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아니면 인훈 때문인지 좀처럼 공부에 집중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서진은 자판기의 캔 커피를 뽑아 마시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정체 모를 위화감을 이기지 못한 서진은 짐을 챙겨 중앙도서관을 나왔다.

* * *

서진은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하필이면 퇴근 시간과 겹친 탓에 지하철 안에는 사람이 가득 찼다. 앉는 것은 포기한 채 구석 벽에 몸을 기댄 서진은 전공 교재를 안으며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에서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시헌이었다.

― 왜 또 전화했어?

마침 지하철의 안내 방송이 나왔다.

― 또라니. 전화할 수도 있는 거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거 아니었어?

서진의 휴대폰 너머 안내 방송을 들은 시헌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조금 일찍 전화한 감은 있었지만, 서진이 이렇게 일찍 집에 들어가는 날은 드물었다.

― 그냥, 독서실 가서 하려고.

― 지난번 거기?

― 어. 거기.

― 그래. 알았어.

서진은 시헌과 별거 없는 통화를 마쳤다. 통화를 마친 뒤 서진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두 정거장쯤 지났을까? 주머니 속 서진의 휴대폰이 계속 윙윙거렸다. 전화의 진동은 아니었다. 시헌에게서 오는 문자겠거니 하고 적당히 무시했다.

“…아오. 씨.”

시헌은 운전하고 있는 거 아니었나? 서진은 끈질기게 오는 문자에 결국 불편한 자세로 휴대폰을 열었다.

「서진아.」 오후 6:32

「어디야?」 오후 6:32

「중앙도서관에 없던데.」 오후 6:32

「오늘은 일찍 갔나 보네?」 오후 6:33

「집에서 공부하려고?」 오후 6:33

아직도 더 울리는 문자에 서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모르는 번호. 허나 문자를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서진은 인훈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전부 지운 후 인훈을 스팸 번호에 등록했다. 지하철이 어느새 독서실이 있는 역에 도착했다. 서진은 한꺼번에 내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지하철에서 내렸다.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지하철역 나무 의자에 품에 안은 전공 서적과 가방을 내려놓은 서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윤에게 문자를 보냈다.

「누나 출근했어? 어디야?」 오후 6:34

「기욱 오빠네. 왜?」 오후 6:34

「아냐. 나 오늘 독서실에서 밤 새고 낼 아침쯤에 집에 들를게.」 오후 6:35

「응 그렇게 해.」 오후 6:35

서윤과 문자를 마친 서진은 후, 하고 숨을 내쉰 뒤 짐들을 챙겨 지하철역을 나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욱과 있다면 안심은 됐다. 서진은 이번엔 발신번호 표시 제한으로 오는 문자를 인상을 구기며 지웠다.

“씨발, 돌겠네! 진짜.”

서진은 짜증을 내며 머리를 긁었다.

* * *

― 뭐? 아직도 안 올라왔다고?

― 하아, 그게 좀 일이 생겨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세미나를 위해 지방에 내려간 시헌이 아직도 서울에 올라오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은 서진은 강의실 벽에 몸을 반쯤 기댄 채 통화를 했다.

― 야, 너 강의는 어쩌려고?

벽에 기대 통화를 하는 서진을 본 몇몇 동기들이 서진을 흘끗댔다. 평소처럼 인사를 하는 동기에 서진도 통화 중이라며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런데 왜일까? 서진의 인사를 받는 동기들의 표정이 약간 좋지 않아 보였다. 어딘가 경계를 하는 것 같은 불편한 느낌? 서진은 기우일 거라며 시헌과 통화를 계속했다.

― 일단 오늘 강의 있는 교수님들한테 말씀은 드렸어. 다들 알겠다고는 하시더라. 아, 물론 출결 인정은 안 되지만.

― 어쩔 수 없지. 너도 그게 무슨 고생이냐.

이런저런 공부를 하기 위해서 가는 세미나 때문에 정작 진짜 공부를 빠져야 하는 시헌을 서진은 한편으로는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 하아, 진짜 저녁쯤에 갈게.

― 알았어.

서진은 시헌과 통화를 끊은 뒤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앞문으로 들어온 서진을 본 동기들이 서진의 눈치를 살폈다. 서진은 창가 근처에 자리를 잡으며 떨떠름하게 앉았다. 말 못 할 이상한 분위기. 서진은 이런 분위기를 겪어 본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게이라는 소문이 났을 때 겪었던 일이었다.

서진은 입술을 깨물며 강의 준비를 했다. 서로 눈치를 보던 동기들 중 서진과 나이가 같은 동기 한 명이 결국 서진에게 다가왔다.

“야, 강서진. 너 나랑 잠깐 얘기 좀 해.”

“뭔데?”

아직 강의 시작 전까지 여유가 있었다. 그가 강의실을 둘러보고 나가자고 눈치를 줬다. 그를 따라 밖으로 나오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박시헌은?”

“시헌인 오늘 지방 세미나에서 못 올라와서 강의 못 들어온대.”

“하아, 그러냐. 차라리 그 편이 낫지.”

서진은 시헌이 오지 않는 게 다행이라는 동기의 말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원인이 아니었던 건가? 서진은 시헌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도 아무리 생각해도 동기들이 불편해할 만한 일을 떠올릴 수 없었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설마 하는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그럴 리 없다며 주먹을 꽉 쥐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무슨 일 있어?”

“일이 있다마다. 야, 잠깐만.”

그는 복도에서 기다리라며 강의실로 들어가 노트북을 가지고 나왔다. 복도 창문 사이로 튀어나온 대리석에 노트북을 살짝 기댄 그가 와 보라며 손을 까닥였다. 그는 인터넷 창을 하나 켰다. H대 익명, 대나무숲 사이트였다. 그는 가장 위쪽에 있는 게시글을 클릭해 서진에게 보여 줬다.

「제목 : 의과대학 게이 썰 (89)

편하게 음슴체 쓰겠음

일단 우리 학교 학생이라면 다들 의대랑 본캠이랑 몇 정거장 차이 안 나는 건 알 거심

의과대보다는 본캠 쪽이 훨씬 시설이 좋으니까

가끔 레알 책을 산처럼 쌓아 놓고 공부하는 의과대 애들 본 적은 한 번쯤 있을 거라고 생각함

글고 의대 애들 술 마시는 것도 개쩔고

H대생인데 5명이서 시작부터 10병씩 깔고 가면 거의 다 의대애들이잖음 특이 남자들

요까지 ㅇㅈ ㅇㅋ?

술로는 진짜 매번 새로 역사를 쓸 정도인데 최근에 지존을 찍은 애가 하나 이씀

남자애임. 걔를 B라고 하겠음

B가 약간 애들 사이에서도 신비주의?로 겁나 유명함

예과 때부터 형 차? 여튼 근데 존나 비싼 외제차 끌고 다님 막 형 카드 가져와서 그날 술값만 천만 원? 정도 찍은 적도 있다는데 그거 다 걔가 결제 때린 적도 있음

강의시간에 교수님한테 질문하는데 질문하는 클라스가 레알 ㅋㅋ 걍 의대생의 질문이 아님

교수님이랑 선배들 사이에서 리틀 닥터? 일케 불리나봄

솔까말 울 학교 의대 애들은 존나 탑오브탑이잖음? 근데 B가 재수해서 들어왔는데 B 재수 했을 때 수능이 개헬이여서 진짜 이과전국만점 딱 2명 있었음

ㅋㅋ그 한 명이 당빠 B임. 근데 2명이라 했잖음. 다른 한명은 K라고 하겠음. 얘도 B랑 같은 학번임 그 B랑 K얘기임 ㅋㅋ

다시 B 얘기하면 B가 진짜 개쩌는 게 동기들 사이에서 A킬러? 뭐 일케 불린다고 함

그게 막 공부 열심히 해서 A가 아니라 걍 진짜 강의시간에 거의 다 존다고 그럼. 근데도 막 레포트나 이런 거 보면 A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쩐다고 함.

위에도 썼다시피 B는 걍 의대생이 아님 ㅋㅋㅋ교수님이 막 수업시간에 B한테 농담으로 병원으로 가시라고 할 정도임 ㅋㅋㅋ실제로 H대 가운 입고 실습 들어온 적도 있다고 함

형이랑 나이차이가 좀 나는 모양인데 B의 형이 시간강사로 예과랑 본1때 B 수업 들어오고 그랬던 것 같음

그 형이라는 교수가 진짜 핵존잘임 걍 낫 닌겐 지금은 못 보는데 기회 되면 보면 알음 ㅋㅋㅋ이건 진짜 와 ㅋㅋㅋ할 수 밖에 없음 ㅋㅋ 근데 여친 있는지 반지 끼고 다님

개 존잘이니 여친도 여신일 거라고... 그냥 생각함....

여튼 B는 키는 좀 작은데 ... 뭐라고 해야 하지? 잘생기긴 겁나 잘생김

진짜 키 좀만 더 컸으면 무조건 연옌각임 ㅋㅋ 키 작은 거 빼고 형이랑 진짜 빼박임

……」

서진은 인상을 구기며 게시글을 천천히 읽어 갔다. 천천히라고 해야 하나 여기서 말하는 B라는 것이 시헌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거의 게시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진은 저에게 이 게시글을 보여 준 동기를 살짝 보며 스크롤을 급하게 내렸다.

「……

B말고 K얘길 하면 K는 걍 평범하게 생김.

근데 못생긴 건아님.

그냥 잘 꾸미면 괜찮은 평범한 훈남 정도? 얘는 진짜 노력파라인데 이 K도 재수생임

아까 수능 만점자 2명이 B랑 K라 그랬잖음. 그 K임.

그때 수능이 개미쳐서 문제 보면 진짜 욕나옴 ㅡㅡ 나도 그때 현역인데 현역들은 절대 만점을 맞을 수가 없는 수능이여씀

B는 선천적으로 약간? 머리가 좋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K는 걍 핵 노력파임.

의대애들 본캠 넘어와서 가끔 공부하는 거 얘기했지? 그중에 셤 기간마다 캔 커피 쌓아놓고 공부하는 애 하나 본 적 있을 거임

그냥 캔 커피 한두 개? 이게 아니라 막 진짜 열 개? 걍 산으로 쌓여 있음

그게 K임. 셤 기간마다 커피 개처마시면서 며칠 동안 잠 안 잔다고 함.

근데 이 B랑 K랑 둘이 같은 중학교 나왔다고 함 ㅋㅋㅋ 중학교 때 친했는데 B가 특목고고 K는 일반고여서 갈린 걸로 알음

개 운명처럼 만점자로 다시 만남ㅋㅋㅋㅋ

……」

서진의 손이 떨려 왔다. 곧 강의가 시작할 시간이 된 동기가 노트북을 덮었다. 서진은 입술을 깨물며 몸을 돌렸다. 그가 노트북을 챙기며 말했다.

“본2에 본캠 중앙도서관에서 시험 기간마다 캔 커피 10개씩 마시고 다니는 애 너밖에 없잖아. K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서진의 성이 강씨니까 말이다. 서진은 강의실에 있는 동기들을 흘끗거렸다. 굳이 저 게시글이 아니더라도 서진이 시험 기간만 되면 다량의 캔 커피를 쌓아 두고 마시는 건 동기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했다.

“이거 진짜 너냐?”

“아니, 나는…….”

“아, 솔직히 우리도 술 마시면서, 너랑 박시헌 얘기 안 한 건 아니거든.”

동기가 시간상 노트북을 덮은 탓에 게시글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K 외에 B라는 인물이 나온 이상 뒷내용은 안 봐도 뻔했다. 서진의 팔에는 시헌에게 선물 받은 시계가 차여져 있었다.

“뭐, 술김에 웃자고 한 소리긴 한데. 너 갑자기 비싼 시계 차고, 둘이 동시에 반지 맞추는 거 보고 설마 했지.”

서진의 손가락에는 반지가 없었다. 시헌과 서진은 거의 하루 이틀을 번갈아 가며 반지를 뺐다 꼈다 사는 상태였다. 본인들은 나름 잘 숨긴다고 한 모양이지만, 동기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의 말에 서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고등학교 때와 비슷한 패턴,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소문이 진짜라는 점이었다.

너희들만 몰랐다, 라는 식의 동기의 말에 서진은 머리로 망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들었다. 어쩌면 서진은 서진의 생각 이상으로 너무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걸지도 몰랐다. 스스로가 처한 상황도 잊을 정도로.

“누, 누가 알아?”

“우리 학번 과 애들은 거의 다 봤을걸. 나도 소문 듣고 찾아봤는데.”

지나가는 후배들을 힐끗거렸다. 그를 알아본 후배가 그에게 인사를 하며 서진을 보고 지나갔다. 한 학번 아래인 후배 복도를 지나가며 친구에게 말했다. 저 사람. 그 커피, 게시글 있잖아. 그녀의 말에 친구가 살짝 몸을 틀어 서진을 확인했다. 헐, 대박.

“어쨌든 박시헌이랑 통화 해 보고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도와……. 너 진짜 괜찮냐?”

서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것을 걱정한 동기가 서진의 몸을 흔들었다. 동기의 손이 닿자 깜짝 놀란 서진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야, 야 강서진!”

“어. 응.”

대답했지만 서진은 여전히 정신이 없어 보였다. 마침 강의실로 교수님이 들어왔다. 강의실로 들어가는 교수님을 본 동기는 일단 들어가자며 서진을 강의실로 밀었다.

“강의 끝나고 얘기하자.”

서진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오전 강의가 끝나기 무섭게 도망치듯 학교를 나왔다.

* * *

“어머? 서진아, 오늘 일찍 왔네?”

집 문이 열려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인기척을 느낀 서윤이 거실로 나왔다. 서진은 그제야 집에 들어올 타이밍을 잘못 잡았다는 것을 알았다. 서진은 서윤의 시선에 눈을 방 쪽으로 피했다.

“어, 응. 집에서 공부하려고.”

현관 쪽에 신발이 하나 더 놓여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 신발이지만 서진의 것은 아니었다. 화장실 쪽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얇은 나무 문 너머로 서진의 목소리를 들은 기욱이 서둘러 정리를 한 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일찍 왔네.”

“그냥요.”

하필이면 또 기욱이 있을 게 뭐람. 서진은 출근을 잘하라는 의미에서 고개를 숙이며 도망치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은 서진은 옷을 벗는 것도 잊은 채 문에 몸을 기댄 채 이마를 짚었다. 시헌에게는 연락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그날의 트라우마가 서진의 사고를 흐리게 만들었다. 출근할 준비를 마친 서윤이 안쪽에서 문을 약간 밀었다. 서진이 문에 기대앉은 탓에 문이 완전히 열리지 않았다. 서윤은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말했다.

“서진아, 누나 다녀올게.”

“어. 응. 잘 다녀와.”

서진은 평소처럼 서윤을 배웅할 기운조차 없었다. 못해도 현관까지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만, 이 모습을 서윤과 눈치가 빠른 기욱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욱에게 표정을 숨길 자신이 없었다. 서진은 밖으로 나간 서윤과 기욱의 차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새하얗게 질린 서진은 가방을 열어 정신없이 책들과 유인물 등을 펼쳤다. 일단 공부를 하다 보면 조금 낫지 않을까, 하고 펜을 잡았으나 착잡한 기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초저녁이 지나갈 무렵 시헌에게서 전화가 왔다.

바닥에 내려놓은 채 충전 중인 휴대폰 벨 소리가 시끄럽게 방 안을 울렸다. 휴대폰을 열어 발신자명을 확인한 서진은 휴대폰 끝을 이마에 기댔다. 받아 말아. 서진은 그렇게 세 번의 문자와 두 번의 전화를 씹은 뒤에야 간신히 전화를 받았다.

시헌은 연락을 하는 면은 기욱과 닮아 성질이 급했다. 계속 씹으면 전화가 올 것이었다. 오히려 전화를 받는 편이 더 의심을 피하기 쉬웠다. 전화를 받은 서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 …….

― …….

서진이 평소처럼 왜 전화했어, 공부 중이야, 하고 까칠하게 한마디 할 줄 알았던 시헌은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서진에게서 이상한 기류를 눈치챘다.

― 강서진.

― …어, 응.

서진은 목이 반쯤 잠긴 채로 말했다. 시헌의 목소리를 들으니 참아 왔던 눈물이 날 것 같아 목이 멨다. 거실로 활짝 열린 서윤의 큰방 창문 너머로 시헌의 차 소리가 들렸다. 통화가 이어지더니 차 소리가 끊겼다. 이내 현관 너머로 시헌의 발소리가 들렸다.

시헌은 잠그지 않은 문을 활짝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서윤과 기욱이 출근하며 문을 잠그지 않은 것 같았다.

“시, 시헌아…….”

서진을 본 시헌은 신발을 채 벗지도 않은 채 거실로 들어와 서진을 안았다. 시헌에게 안긴 서진은 간신히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거실 더러워져.”

뭔가, 다른 말을 할 거리가 필요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온 시헌은 서진과 거실에 마주 앉았다. 시헌은 그 일에 대해 할고 있는 걸까? 아직 모르는 걸까? 시헌은 서진이 말하기 전까지 말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시헌의 손에는 서진의 이니셜이 적인 금반지가 있었다.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본 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저…… 우리.”

“…….”

“헤어질까?”

서진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시헌의 눈동자가 커졌다. 시헌의 시선이 부담된 서진은 일부러 고개를 아래로 해 시선을 피했다.

“야, 강서진. 너 갑자기 무슨 소리야?”

시헌도, 서진도 누구 하나 먼저 게시글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시헌도, 기욱도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일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특히 더욱 민감한 사안이라면 말이다. 게시글에 관한 일은 시헌도 화가 났다. 화가 났지만 설마 이 정도의 일로 서진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올 줄은 아무리 시헌이라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그러니까……. 나 때문에 네가 피해를 보고 싶게 하고 싶진 않아. 반지도 빼고 한쪽에서 적당히 변명하면 자, 잘 넘어갈 수 있을 거야.

“……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달리 방법이 있어?”

서진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고등학교 시절의 일을 서진은 시헌에게 말할 수 없었다. 저를 보는 아이들의 시선, 불편한 눈빛들, 낯간지러운 척하는 표정 하나하나가 미치도록 역겨웠다. 일 자체는 해결되었다고는 하나 아이들의 시선은 서진의 가슴속에 많은 상처를 남겼다.

이미 한 번 겪은 일이다. 두 번 겪든 한 번 겪든 벌어진 일에는 변함이 없었다. 서진은 시헌도 자신과 같은 상처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런 일의 피해자는 한 명이면 충분했다.

“싫어.”

“야, 박시헌…! 나는 널 생각해서…!!”

“진짜 날 생각하는 사람이. 그게 할 말이야? 너한테는 헤어지자는 소리가 그렇게 쉽게 나오는 말이었어?”

시헌의 시선이 간지러웠다. 예전부터 그랬다. 시헌의 눈동자에는 다른 의미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기욱과는 방향이 전혀 달랐다.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는 시헌의 시선은 오히려 보는 사람의 가슴을 더욱 미어지게 했다.

진짜 그런 표정을 지어야 할 사람은, 상처를 받아야 할 사람은 시헌이 아닌 서진이었다.

시헌의 물음 아닌 물음에 서진은 고개를 약간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서진이라고 시헌과 이런 이유로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모, 모르겠어.”

“…….”

“누가…! 누가 그랬는지 나, 나도 모르겠다고. 근데 애들이 그런 시선으로 보니까…… 네가 상처를 받을까 봐……. 헤어, 헤어지고 싶지 않아. 싫다고!!”

서진의 머리로는 도무지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상황에도 시헌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서진은 이 상황에서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시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시헌은 무슨 생각으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는 걸까.

서진은 끝내 시헌의 가슴에 안기며 눈물을 흘렸다. 비단 이번 일뿐이 아니었다. 기욱과 관련된 일도 그랬다. 아아, 차라리 기욱이 아니라 처음부터 시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서진은 그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왜 하필이면 기욱과 시헌은 형제인가.

“시헌아 제발… 헤어… 읍!”

시헌은 한 손으로 서진의 허리를 안은 채 다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서진은 곧장 시헌의 손을 쳐 냈다. 짧은 순간이라고는 하나 서진의 말을 자르는 것은 충분했다. 말이 중간에서 잘린 서진은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눈 아파. 그만해.”

시헌은 서진의 손을 붙잡았다. 서진의 눈가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서진의 손을 붙잡은 시헌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어떻게든 할게.”

“그러니까 맨날, 맨날 어떻게……!! 네가 무슨 신이라도 되는 마냥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서진은 목이 막혀 왔다. 머리가 아파 죽을 것 같은데, 마음이 아파서 미칠 것 같은 상황에서 당당하게 아무렇지 않게 구는 시헌에 서진은 진절머리가 났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시헌은 발악에 가까운 서진의 어깨를 붙잡아 진정시켰다.

“강서진!”

“…흐윽.”

“진짜야.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

“한 번만 믿어 줘.”

“대체 어떻게…… 흐으윽…!”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하겠다며 필사적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시헌의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대책은 없으나 시헌은 늘 어떻게든 해 왔다. 서진은 혹시 시헌이라면, 하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서진의 머리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이 상황을, 정말 시헌이라면 어떻게든 해 줄 것만 같았다. 믿어 보고 싶었다. 믿고 싶었다. 서진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시헌에게 안겨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고등학교 때의 설움이 같이 밀려오는 것 같아 더 눈물이 났다.

* * *

“…….”

강의실은 달라진 게 없었다. 시헌이 강의에 빠지려는 서진을 억지로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하루라도 수업을 빼먹으면 따라가기 힘든 것도 있었고, 아직은 휴학에는 생각이 없었던 서진은 반억지에 어울려 울며 겨자 먹기로 강의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서진이 등장하자 강의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몇몇 동기들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지만, 인사를 하는 쪽도 받아 주는 서진도 어색한 건 마찬가지였다.

자리에 앉은 서진은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숙여 휴대폰만 만졌다. 정작 강의에 꼭 빠지지 말고 가라는 시헌은 강의 시작 10분 전에야 얼굴을 비쳤다. 차가 막혔는지 헉헉대며 뛰어온 시헌은 빠른 걸음으로 안쪽 구석에 앉은 서진에게 다가갔다. 제법 비장한 얼굴로 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 서진의 앞에 다가간 시헌은 서진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야, 박시헌…?”

“…….”

할 말이 있음에도 입을 꾹 다문 채 시헌은 서진의 팔을 이끌고 친하게 지내는 무리가 모여 있는 자리로 갔다. 재혁이 시헌과 서진을 흘끗 보더니 적당히 인사를 했다.

“형들. 어음. 안녕, 하세요?”

“우리 사겨. 사귄 지 2년 넘었어.”

“네?”

시헌은 제 잠바 소매를 아래로 걷었다. 서진의 손가락에는 아직 빼지 못한 반지가 그대로 있었으며 소매를 걷은 시헌의 손가락에도 마찬가지로 반지는 있었다. 서진은 시헌도 반지를 끼고 올 줄 몰라 눈을 크게 떴다.

단순하지만 똑같은 디자인의 금반지. 흔한 디자인이니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와 소문으로 볼 때 절대 우연은 아니었다. 시헌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서진은 깜짝 놀라 반지가 있는 손을 뒤로 가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 해결이란 게 이런 일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던 서진의 등 뒤로 땀이 흐르며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야, 너…!! 그렇게 대놓고…!!”

“내가 짝사랑했던 거야. 뒤에서 욕해도 상관없어.”

“박시헌! 너 진짜 미쳤어?”

“아, 아니. 서진 형, 지, 진정해요.”

시헌을 향해 소리를 치며 언성을 높이는 서진에 보다 못한 재혁이 일어나 서진을 말렸다. 서진의 시선을 느낀 동기들은 헛기침을 하며 한마디씩 했다.

“뭐, 사실 다들 짐작은 해서……. 이제 와서 말해도 딱히 놀랍진 않은데.”

“여자애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돌았던 얘기라.”

“것보다 너네 너무 티 나게 사귀지 않았냐?”

“아, 인정. 솔직히 가끔 적당히 했으면 좋을 때가 있긴 했었음. 근데 또 본인들이 입 다무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

동기들의 말을 믿을 수 없는 서진은 눈을 깜박였다. 그렇게 티 나게 사귀었나 싶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동기들의 배려에 입을 벌렸다.

“아, 알고 있었다고?”

“대충 지레짐작 같은 거? 게시글 올라오고 니네 반지 맞추고 나서부터는 거의 빼박이긴 했지만. 야, 솔직히 애들도 아니고 나이 먹고 이런 일로 피하고 하는 거 되게 웃기지 않냐?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지들이 좋아서 사귀겠다는데. 아, 그렇다고 내가 게이라는 건 아니다.”

동기가 손을 들자 근처에 있던 다른 동기들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야, 강서진!”

시헌의 고백과 근처에 앉은 동기들의 대화를 엿들은 다른 동기가 서진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서진을 복도로 이끌어 노트북을 보여 줬던 동기였다.

“너 어제 나 때문에 도망친 거라며?”

“아니, 그게…….”

“미안하다. 솔직히 그럴 줄 몰랐어.”

그가 도리어 서진에게 사과했다. 그는 서진이 도망친 이유가 서진에게 마음의 준비 없이 무리하게 게시글을 보여 준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난 정말 괜찮아.”

“야, 근데 그래도 일찍 좀 말해 주지 그랬냐.”

“맞아요. 차라리 일 터지기 전에 얘기했음, 좀 나았을 텐데.”

“그거 게시글 쓴 사람 잡았어요?”

“아니. 아직. 나도 게시글에 대해서는 잘…….”

서진이 말을 흐렸다. 이어 시헌과 어떻게 고백받았냐, 그때 시헌이랑 있지 않았느냐 하는 등의 질문 등을 계속 받았다. 어색하게 질문에 답변하는 서진은 말을 하면서도 제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게 해 준 동기들이 너무 고마웠다.

“야, 그래도 글 올린 애는 잡아야 하지 않겠냐?”

“유현이가 같은 고등학교였다는데?”

“뭐야? 니네 글 쓴 사람 알아?”

동기들의 대화를 들은 서진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어제 곧장 도망치듯 강의를 나온 서진은 동기들이 작성자를 알아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동기들도 시헌이 다 말했을 줄 알았는지 뜻밖이라며 말을 흐렸다. 이어 글쓴이와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여자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다가왔다.

“아씨, 그냥 같은 고등학교 나온 거지 안 친했어.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나? 미친년이 허세만 존나 쩔어서. 우리 학교도 솔직히 학원 떡칠하고 돈빨로 들어온 거지 걔 성적이었음 택도 없었어. 난 걔가 그런 글 싸지른지도 몰랐다니까? 4학년이나 됐음 취직 준비나 하든가 미친년이.”

상대적으로 남자가 많아서 그런지 남자들에 익숙해진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입이 거친 편이었다. 글쓴이와 사이가 나쁜지 그녀는 한숨을 쉬며 노골적으로 짜증을 드러냈다.

“근데 미대면 정반대 아녜요? 뭔 미대 애가 이렇게 잘 알아?”

정곡을 짚는 재혁의 말에 서진과 시헌은 서로의 얼굴을 봤다. 정작 서진은 글쓴이가 미대인 줄도 몰랐지만 말이다. 서진의 시선을 눈치챈 시헌이 한 템포 늦게 말했다.

“난 다른 과 애들 별로 안 만나.”

그렇게 말한 시헌의 눈이 살짝 서진을 의심하고 있었다. 완전한 의심은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는 게 시헌보다 서진은 상대적으로 다른 과 애들과 술자리가 잦은 편이었다. J대 미대 애들과 미팅을 가진 적도 있고, 그 바닥이란 게 좁으니 소문이 넘어갔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서진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런 말을 할 리 없잖아.”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 * *

오전 강의가 끝나고 점심시간 무렵 시헌과 서진은 곧장 미대 강의실로 향했다. 다행히 여자 동기 한 명이 글을 올린 여자애와 같은 과인 친구가 있다고 해서 강의실과 시간표를 미리 확인할 수 있었다. 신원 확인을 위해 같이 데려온 여자 동기가 뒤쪽에서 막 짐을 챙겨 강의실을 나오는 갈색 머리 여자를 슬쩍 가리켰다.

“쟤 맞아.”

글을 쓴 애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었던 터라 마지못해 끌려온 그녀는 별로 엮이고 싶지 않다는 듯 약간 뒤로 물러섰다. 시헌은 진한 화장을 한 갈색 머리 여자가 글쓴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여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화구 한쪽에 스티커로 ‘박진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시헌에게 길을 가로막힌 진아는 이상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다.

“너 뭐…….”

“지워,”

“뭐? 뭐야?”

“나 글 나온 사람인데, 지우라고.”

“하? 글?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시헌의 반말에 진아 또한 살짝 불편한지 화구며 짐들을 벽 옆으로 대충 내려놓았다. 시헌은 진아가 화구통을 내려놓기 무섭게 진아의 팔을 잡아당겨 얼굴을 가까이했다. 진아는 시헌에게 붙잡힌 팔이 아프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시헌의 이런 진지한 모습은 생전 처음 보는 서진은 여자를 상대로 조금 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나무숲에 글 올린 거 너라며. 의과대학 썰.”

“야, 박시헌. 너 너무…….”

마지못해 서진이 끼어들자 시헌은 그제야 진아의 팔을 놓았다. 주변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느낌에 진아와 같은 과 동기들이 흘끗대며 몰려들었다. 진아는 시헌에게 붙잡힌 팔을 잡으며 시헌을 바라봤다.

“아, 그거?”

그제야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진아는 시헌의 팔에 차인 시계와 반지를 바라봤다. 서진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서진의 손에도 시헌과 똑같은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아직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서진이 재빨리 팔을 뒤로 숨겼다. 시헌과 서진의 관계를 눈치챈 진아가 하,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하, 진짜네. 대박.”

“글. 좋은 말 할 때 지우라고 했다.”

시헌은 다시 진아의 팔을 붙잡아 올렸다. 체격과 비교하면 시헌의 힘은 상당히 센 편이었다. 진아의 팔을 잡은 시헌은 쉽게 힘 조절이 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헌에게 붙잡힌 손이 아려 온 진아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야!! 안 놔? 씨발 놓으라고!!”

“지우라고.”

“야, 시헌아. 그렇게 강압적으로…….”

“진아야! 무슨 일이야!!”

복도에 울려 퍼지는 진아의 비명과 모여든 사람들 틈 사이로 한 남학생이 급하게 뛰어왔다. 딱 봐도 남자 친구 같아 보이는 남자의 등장에 진아는 있는 힘껏 시헌의 손을 뿌리치고 남자 친구에게 안겼다. 정확히는 남자 친구에 시헌이 잠시 힘을 푼 것이었다. 진아는 동기이자 남자 친구인 오빠의 품에 안겨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흐윽! 쟤들 완전히 미친 것 같아!! 나보고 글 지우라고 막…… 흐으윽….”

결국, 진아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서럽게 우는 진아에 서진은 입을 벌릴 수 없었다. 시헌이 좀 강압적으로 나가긴 했지만 서럽게 울 만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남자는 급한 대로 진아의 등을 토닥여 진아를 달래며 얼굴을 붉혔다.

“씨발, 니네 뭐 하는 새끼야? 뭔데 남의 과에 와서 지랄인데?”

“꺼져.”

“뭐, 라고?”

“야. 너랑 할 얘기 없으니까 그년 데려오라고.”

시헌은 진심으로 화가 난 상태였다. 남자 친구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생판 관계도 없는 녀석과 싸울 기분이 아니었다. 시헌은 성큼성큼 다가가 남자 친구에게 안겨 우는 진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꺄악!”

“이 미친 새끼가!!”

진아의 팔을 잡아당기는 시헌에 남자가 반사적으로 시헌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덩치가 큰 편은 아니나, 키가 큰 남자는 제 주먹에 두어 걸음 물러나는 것이 전부인 시헌에 살짝 당황했다. 시헌은 손등으로 남자에게 맞은 볼을 꾹꾹 눌렀다.

무슨 모기 물린 것처럼 아무렇지 않아 하는 시헌에 남자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시헌의 얼굴을 때린 주먹이 아팠다. 분명 살살 친 건 아닐 텐데 정작 맞은 당사자는 눈 하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야, 박시헌. 그만…….”

“놔.”

시헌의 성격을 아는 서진은 시헌을 말리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다 좋은 시헌의 유일한 단점은 한번 눈이 뒤집히면 정말 보이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점점 다가오는 시헌에 위화감을 느낀 남자가 진아를 마침 근처에 있는 다른 동기들에게 보냈다.

친구의 품에 안겨 우는 진아를 흘끗 본 시헌은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시헌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에 남자가 안심한 것도 잠시뿐, 시헌은 고개를 약간 튼 상태로 진아남자 친구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예상하지 못한 시헌의 공격에 남자의 몸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시헌은 그 틈을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시헌은 앞으로 기울어지는 남자에 발로 정확히 급소를 찼다. 시헌의 공격에 남자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배를 잡고 무릎을 꿇었다. 시헌에게 급소를 맞은 남자는 말이 나오지 않는지 입을 뻐끔거렸다.

“태민 오빠! 괜찮…!”

시헌은 태민이라는 남자 친구에게 다가오려는 진아를 노려봤다. 시헌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낀 진아는 무릎을 꿇으며 헛구역질을 하는 남자 친구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시헌은 몸을 살짝 낮춰 태민과 눈을 맞췄다.

“야.”

“허윽, 으… 씨, 발….”

“더 처맞을래?”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

“니 여친.”

“…….”

“좋은 말로 할 때 글 지우라고 해라. 난 여자라고 봐주는 거 없다.”

시헌은 손가락을 튕기며 태민의 이마를 건드렸다. 시헌은 탁탁, 손을 털고 일어났다. 서진은 시헌의 그 모습에서 기욱을 떠올렸다. 할 말을 마친 시헌은 곧장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미대를 나왔다. 시헌이 가자마자 근처에 있던 미대생들이 태민에게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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