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 드리우는 그림자
고급 호텔의 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서진은 안쪽에 있는 레스토랑을 기웃거렸다. 입구에서 기웃대는 서진을 수상하게 여긴 직원이 서진에게 다가왔다.
“찾으시는 거라도 있나요?”
“그건 아니고……. 예약되어 있다고 해서…….”
“예약자분 성함이?”
“바, 박기욱이요.”
서진이 머뭇거리며 이름을 대자 남자가 카운터 쪽에 있는 직원을 시켜 확인해 보라고 지시했다. 서진의 말을 같이 들은 직원이 컴퓨터를 두드리더니 이내 남자에게 말했다.
“4번 방이에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서진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남자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4번 방이라길래 비교적 가까운 방일 줄 알았는데 구석까지 들어가야 했다. 서진은 좌식으로 되어 있는 방 안을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방 안에는 이미 식사 중인 기욱이 있었다. 서진은 테이블에 있는 나물을 집어 먹으며 비빔밥을 먹고 있는 기욱을 흘끗거렸다.
“뭐 이런 비싼 데를 와요.”
“먹고 싶어서. 먹어.”
정작 그렇게 말한 기욱이지만 서진의 앞에는 아무런 식기도 없었다. 기욱은 비어 있는 옆자리로 손을 올렸다. 기욱의 옆자리에는 식기와 아직 비비지 않은 비빔밥이 그대로 있었다. 서진은 마지못해 기욱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욱은 서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틀었다.
“너 알바한다면서?”
예상치 못한 기욱의 말에 서진은 잠시 머뭇거렸다. 분명 비밀로 하고 시작한 알바였을 텐데, 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알음알음 서진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서진은 자신이 알바를 하고 있다는 것을 기욱에게 말할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누나가 말했어요?”
“어디서 해?”
서윤도 서진이 어디서 아르바이트를 하는지까지는 몰랐다. 기욱은 필요한 일에서는 누구보다도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다.
“알 거 없잖아요.”
“돈 부족해서 그래?”
“그런 거 아니라고요.”
서진은 기욱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돈을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맞지만, 기욱이 신경 써야 할 만한 일인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었다. 기욱은 돈이 부족해서 알바를 하는 게 아니라는 서진의 말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왜 해.”
“그런 게 있어요. 좀만 하다 관둘 거예요.”
기욱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기욱은 벽에 걸린 코트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뒤 서진에게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서진이 받기 싫다며 기욱의 카드를 밀어냈지만, 기욱은 끝까지 서진의 손에 강제로 카드를 쥐여 주었다.
“가지고만 있어.”
더 이상 실랑이를 벌여 봤자 좋아질 게 없다고 판단한 서진은 어쩔 수 없이 기욱의 신용카드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안 쓰면 그만인 일이었다. 식사를 어느 정도 한 기욱은 아직 뜯지 않은 술병과 잔들을 가져왔다.
“술 한잔할까?”
“병원 안 가요?”
“내일 저녁에.”
기욱은 서진의 잔에 술을 따른 뒤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술이 급했던 모양인지 기욱은 서진이 채 잔을 들기도 전에 멋대로 서진의 잔에 끝을 부딪친 뒤 술을 마셨다. 어깨를 들썩이는 기욱의 태도는 굳이 마시지 않아도 크게 상관이 없다는 뜻이었다.
서진은 더는 20살의 강서진이 아니었다. 온갖 술이란 술은 다 마셔 본 서진은 기욱이 자신을 애 취급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 기욱을 노려본 서진은 기욱이 한 것과 똑같이 잔을 비운 뒤 탁, 하고 내려놓았다. 기욱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큭큭댔다. 누가 애 아니랄까 봐 그런 도발에 넘어가고 말이다. 잔을 내려놓은 서진은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내가 병원 가길 바라?”
“그건 아닌데요.”
“내년부터 실습이지?”
“…네.”
벌써 그렇게 될 줄이야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서진은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만큼이나 기욱과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이 현실을 좀처럼 실감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기욱과 이렇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인연을 맺게 될 줄도 몰랐다.
“인턴, J대로 와. 자리 만들어 놓을게.”
“저 아직 국시 합격도 안 했거든요?”
서진은 기욱이 앞서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시헌의 집안이라면 또 모를까. 서진은 기욱이 자신을 집안 의사 취급하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려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너.”
“…….”
“서윤이랑 결혼하면 다 알게 돼 있어.”
결혼이라는 말에 서진의 눈동자가 떨려 왔다. 결혼, 사귄 지도 오래되었고 기욱의 나이를 생각하면 오히려 여태까지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 신기할 수준이었다. 서진은 기욱과 서윤이 결혼하면 더는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진의 턱에서 손을 놓은 기욱은 서진의 빈 잔에 술을 따른 뒤 손가락을 위쪽으로 까닥였다. 역시나 애 취급. 서진은 오기가 들어 기욱이 따라 주는 대로 전부 술을 마셨다.
사람을 애 취급하는 데도 정도가 있었다.
* * *
“흐으… 읏… 하아….”
서진은 낮은 숨을 내쉬었다. 다른 의미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기욱과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왜인지 그 뒤부터는 별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소주가 아니어서 그런가? 정체 모를 낯선 술은 생각보다 빨리 서진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서진의 다리를 벌린 기욱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왔다.
“하윽… 으응. 으읏. 응….”
“후, 강서진. 너 원래… 하, 이랬나?”
기욱은 술에 잔뜩 취한 서진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허리를 움직였다. 서진도, 기욱도 일이 바빠 최근 들어 얼굴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서진과의 마지막 섹스가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던 기욱은 묘하게 신음을 흘리는 서진을 보며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술에 취해서 그런가? 확실히 20살 무렵을 제외하고 술을 마시고 서진과 섹스를 한 적은 없었다.
“하응, 으응… 으으읏! 아, 안에… 하으….”
기욱은 뭔가 미묘하게 서진의 애교가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술에 취했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기만 정체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하ㅡ 으, 처… 응. 천천히….”
기욱의 페이스를 따라가지 못한 서진이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서진은 아무리 기욱이 거친 섹스를 해도 대부분 이를 악물며 참았다. 그런 서진이 천천히 해 달라며 매달린다니 평소의 서진으로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천천히?”
“흐으, 응. 천… 읏. 천천히… 아파. 흐읏… 흑… 아파.”
내벽을 찌르는 기욱의 페니스에 서진은 결국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난데없이 우는 서진에 깜짝 놀란 기욱이 급하게 서진의 입을 막으며 서진을 달랬다.
“미안.”
“응, 으읏… 하응 으… 으응… 천천히….”
“오빠가 천천히 할게.”
기욱은 서진의 허리를 들어 올려 무릎 위로 올렸다.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오는 기욱의 페니스에 서진의 몸이 자지러지듯 떨려 왔다. 서진은 기욱의 목소리가 머리 한구석으로 스치듯 흘려 들렸다. 허나 술에 잔뜩 취한 서진은 제가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기욱이 하는 말이 뭔지조차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술이 아니라 약에 취한 듯 서진은 기욱의 팔에 매달려 신음을 흘렸다. 분명한 건 이런 짓을 하는 스스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들 때면 서진은 아닌 죄책감을 덜기 위해 더욱더 기욱에게 매달렸다. 기욱은 다른 때와 달리 유달리 애교가 많은 서진이 제법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입꼬리를 올리며 서진을 살살 괴롭혔다.
“흐으… 으응… 응….”
“서진아.”
“으으. 응. 하으, 으….”
“오빠 거 좋아? 마음에 들었어?”
“흐. 하응, 모… 몰라…. 그냥… 흐읏!”
“천천히 해 줄까?”
“으응. 천천히. 제발 흐윽… 아픈 거 싫어…….”
섹스에 능숙한 기욱이지만 기욱의 페니스는 서진이 받아들이기에는 여전히 너무 컸다. 무엇보다 섹스할 때면 기욱은 아프다는 걸 알면서도 밀어 넣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수십 번, 서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많고 다양한 섹스를 해 봤을 기욱이 상대가 아프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가끔 용기를 내서 아프다고 말하면 기욱은 참으라는 말로 일관하게 대답했다. 감히 아프다는 대답을 할 수도 없었고, 서진은 그저 이를 악무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짜증이 나긴 하지만 아픔 뒤에 오는 쾌락은 서진의 정신을 쏙 빼놓게 할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기욱은 천천히를 외치며 애교를 부리는 서진의 허리를 안으며 엉덩이 근처를 가볍게 때렸다.
“후우, 평소에 이랬음, 얼마나 좋아. 어?”
“으… 으응….”
침대 위로 눕혀진 서진은 기욱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그냥 미칠 것 같았다. 기욱은 제 밑에서 정신없이 신음을 흘리는 서진의 입안으로 손가락을 비집고 밀어 넣었다. 입안으로 들어온 커다란 손가락에 서진은 본능적으로 기욱의 손가락을 쪽쪽 핥았다. 기욱은 다른 손으로 서진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지.”
“흐. 아흐… 응… 으응….”
“신고한 새끼 가만두지 않겠다고.”
“흐읍… 으응 하응….”
손가락을 뺀 기욱은 서진의 몸을 반강제적으로 침대에서 일으켰다. 기욱이 다리를 벌리자 다리 사이로 기욱의 커다란 페니스가 서진의 눈에 들어왔다. 기욱은 제 페니스 앞으로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몸을 숙이게 했다. 서진의 뺨에 기욱의 페니스가 닿았다. 서진이 싫다며 고개를 흔들자 기욱은 서진의 뒷머리를 살짝 잡아 들어 올렸다.
“서진아.”
“시… 시러….”
“강서진.”
기욱의 따가운 시선이 서진을 노려봤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검은 눈동자에 서진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예전부터 그랬다.
박기욱이라는 사람은 서진에게 있어서 거부할 수 없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학습된 공포와 억압의 끝에 남은 것은 복종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술에 의해 사고가 흐려진 지금은 서진은 기욱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기욱의 따가운 시선을 이기지 못한 서진은 기욱의 페니스 끝을 살짝 입안으로 머금었다.
“으으읍…!! 싫… 으읍!”
기욱은 발악하는 서진을 두고 서진의 머리를 붙잡았다. 기욱이 허리를 살짝 튕기자 기욱의 커다란 페니스가 서진의 입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기욱의 페니스를 머금은 서진이 캑캑거렸다. 서진은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혀를 움직이며 어떻게든 기욱의 페니스를 핥아 나갔다. 제법 펠라에 적응을 하며 기욱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서진에 기욱은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한 아이네.”
아아, 착한 아이가 뭐였더라.
서진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 * *
기욱은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서진은 추운 모양인지 이불을 돌돌 말았다. 기욱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서진을 향해 똑바로 이불을 덮어 주었다.
“자라.”
벌써 새벽이었다. 서진의 이불을 덮어 준 뒤 샤워라도 할까 일어선 기욱의 발치로 서진의 옷가지들이 채였다. 서진의 옷을 들자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떨어졌다. 마침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뭐지? 기욱은 휴대폰을 열었다. 발신자 표시 위쪽으로 현재 시간이 떴다. 새벽 세 시가 넘었다. 기욱은 눈을 깜박이며 전화 상대를 확인했다.
「시헌」
전화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시헌이었다. 기욱은 시헌이 왜 이 시간에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서진의 옷가지들을 잘 정리해 한쪽으로 밀어 넣은 기욱은 담배를 입에 문 뒤 서진의 휴대폰을 들고 침대에 앉았다. 다시 시헌에게 전화가 왔다. 기욱은 전화를 받지 않은 채 입 밖으로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새벽에 왜…….”
말을 끝맺지 못한 기욱은 옆쪽의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잠에서 깬 서진은 눈을 비비며 기욱을 올려다봤다. 이내 기욱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본 서진이 화들짝 놀라 휴대폰을 낚아채 품 안으로 가져왔다. 시헌에게서의 통화는 끊긴 뒤였다. 기욱이 뭘 했는지 모르는 서진의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왜 나, 남의 휴대폰을 보고 그래요!!”
“그냥 열어 본 게 다야. 뭘 그렇게 신경 쓰고 그래.”
“…….”
서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챙긴 뒤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불 안에서 꿈틀거리는 서진을 본 기욱이 서진이 덮은 이불을 잡아당겼다.
“안 졸리면 한 번 더 해도 돼?”
기욱의 말에 이불 안에서 눌린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싫어요!”
아직 술에서 덜 깬 건가 서진은 기욱이 덤벼들자 이불로 몸을 더욱 돌돌 말았다. 얼마나 돌돌 말았는지 기욱이 손을 쓸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기욱은 김밥처럼 이불을 말고 이불 속에서 휴대폰을 하는 서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고 싶어도 도무지 이불을 뚫을 수가 있어야 말이다.
“하아, 알아서 해라 알아서.”
침대에 걸터앉은 기욱은 될 대로 되라며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 * *
잠깐의 쉬는 시간, 건물 바깥 비상계단에 숨은 시헌과 서진은 서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비상계단에는 두 사람의 담배 연기가 가득 찼다.
“회식?”
“응. 다음 주에 있대.”
“난 몰랐는데.”
빠르게 새 담배를 입에 문 서진이 차가운 시멘트 벽에 몸을 기대며 시헌을 훑었다. 빌어먹은 박시헌은 짜증이 나게도 일찍 들어온 서진보다 일을 잘하는 중이었다. 서진은 알바가 아니라 직원이라도 되는 마냥 일하는 시헌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의미로 기욱보다 더 얄미웠다.
“넌 일하는 데 관심 없잖아.”
“근데 회식이 왜?”
굳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기욱을 닮아 가고 있었다. 이런 건 대답을 해 줘도 되는데 말이다. 시헌이 대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는 뜻과도 같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헌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눈치가 없는 건지 진짜 몰라서 묻는 건지.
“가도 되냐고 묻는 거잖아.”
“넌 나를 대체 뭘로 생각하는 거야?”
서진이 자기한테 허락을 받을 줄 몰랐던 시헌은 담배를 끄며 눈을 깜박였다. 서진이 새 담배를 물려 하자 시헌은 서진의 팔을 탁, 하고 붙잡았다.
“잔소리 대마왕.”
“내가 무슨 초등학생이야?”
서진의 중얼거림을 들은 시헌이 기가 막힌다며 혀를 찼다. 서진은 시헌의 손을 쳐 내고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하, 결혼해도 네 잔소리보다는 나을걸.”
“뭐야? 그럼 내가 니 와이프라는 소리네?”
“아니었어?”
서진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굴지 말라며 시헌의 앞에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그 요염한 모습에 시헌은 서진을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서진은 그런 시헌의 앞에서 눈 하나 끔벅하지 않고 담배를 뻑뻑 피워 댔다.
“너 언제부터 사람이 이렇게 요물이 됐냐.”
“지랄하네.”
“맨날 안기는 게 누군데. 어제도 막 좋다고…… 으읍!”
서진은 급하게 담배를 끄며 한 손으로 시헌의 입을 막았다. 개자식이 진짜.
“야야, 안 닥쳐? 밖에서 할 말 안 할 말이 있지!”
“먼저 시작한 건 너잖아. 큭큭, 하하. 알았어.”
얼굴을 붉히는 서진에 시헌은 배를 잡으며 거리를 벌렸다. 서진은 계단 한쪽에 쪼그리고 앉은 시헌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다시 들어가 봐야 하는데 뭘 또 주저앉나 싶었다.
“정 신경 쓰이면 너도 와.”
“나도 가도 되는 거야?”
“너도 알바하잖아. 뭐가 문젠데.”
“하긴. 남편이 바람피우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도 와이프의 역할이지.”
“적응력 빠르잖아.”
농담으로 던진 말을 빠르게 수용하는 시헌에 서진은 질린다며 혀를 찼다. 시헌은 계속해서 일어나라며 발을 차는 서진에 몸을 획, 일으켜 서진의 어깨를 잡아당긴 뒤 귓가에 속삭였다.
“바람피우면, 밤새, …해서 …한 다음 …해 버릴 거야.”
밖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체 심의를 거쳐서 말하는 시헌의 말에 서진은 가지가지 한다며 시헌을 약간 밀어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진짜야.”
“안 해. 그런 거 할 리가 없잖아.”
서진은 돌아가자며 비상계단의 문을 열었다. 사귄 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왜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노골적이 되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이쯤 사귀면 질릴 때도 됐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실 웃으며 앞서가는 시헌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저 멍청한 얼굴이 질릴 리가 없지.’
이젠 누가 누구한테 빠졌는지 말할 자격조차 없었다.
* * *
마감 알바가 끝나고 서진은 몇몇 알바와 직원들과 함께 마무리를 지은 뒤 백화점 건너편의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오전에 알바를 했거나 휴무인 직원들이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중에는 오늘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을 쉬었던 시헌이 있었다.
서진은 시헌의 주변에 앉으려 했으나 한꺼번에 들어오는 사람들과 마침 시헌의 옆을 차지한 다른 남자에 어쩔 수 없이 건너편에 앉아야만 했다. 본의 아니게 서진은 어린 여자 알바생들 사이에 혼자 끼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서진은 시헌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자리를 옮길 기회를 잡으려 했으나, 대학교 술자리가 아닌지라 다들 쉽게 자리를 움직이지 않았다. 시헌은 이상하게 친한 척 구는 남자 동생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시헌이 성가시다며 건성으로 대답해도 시헌이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계속해서 시헌에게 말을 걸었다. 요점은 시헌의 차와 시계였다.
하필이면 시헌과 같이 앉은 남자 중 차 좋아하는 녀석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시헌의 차를 본 듯 차에 대해 이런저런 견해를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그게 또 시헌이랑 코드가 맞았는지 시헌은 단답형이라고는 하지만 꼬박꼬박 그의 말에 대답하며 대화를 했다.
처음에는 불편해하던 주제에 익숙하게 근처 남자들과 술을 마시는 시헌에 서진은 정체 모를 불편함을 느껴야만 했다. 서진이 시헌을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여학생이 시헌을 빌미로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시헌 오빠는 술 잘 마셔요?”
“어? 의대잖아.”
“아, 얼마나요?”
그사이 잔을 부딪친 서진은 잔을 비우고 한 번 더 따라 두 번을 마셨다. 서진의 속도를 본 주변에서도 혀를 내둘렀다. 정작 서진은 습관처럼 마시는 거라 이게 많이 마시는 건지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시헌을 반쯤 무시하기 위해 조금 빨리 마신 것도 있긴 하지만. 몸을 약간 튼 서진은 술 대신 옆에 있는 물을 마셨다. 서진의 손가락이 주방 입구 옆에 쌓인 빈 술병이 담긴 상자들을 손가락질했다.
“우린 짝으로 마셔. 테이블 하나에 소주 깔아 놓고 다섯 명이.”
서진의 대답에 여자와 여자의 친구들이 수군댔다. 한 짝에 몇 개였지? 건너편에 있던 다른 여자가 대답했다. 업소용은 30병쯤 됐다.
“다섯 명이 그게 돼요?”
“우린 그게 기본이야.”
“그, 그래요?”
더는 할 말이 없는지 여자가 머뭇거렸다. 서진은 컵에 입을 대며 건너편에서 화기애애하게 떠들고 있는 시헌을 눈으로 따라갔다. 시헌이 재미있게 노니까 좋기도 한데, 한편으로 왠지 좀 그렇기도 했다.
“아, 오빠 여친 없어요?”
시헌의 옆쪽에 유일하게 앉은 여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여자는 원래부터 목소리가 큰 편에 속했다. 여자의 말에 방금까지 자동차가 어쩌고 얘기를 했던 남자들도 궁금한지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래서는 도무지 대답하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못 넘길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시헌은 잔에 있는 맥주를 반쯤 마신 뒤 서진을 보더니 웃었다. 멀리 시헌을 보고 있는 서진 또한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서진은 물을 마시는 척하며 시헌의 대답을 기다렸다. 테이블을 손끝으로 툭툭 건드린 시헌이 입을 뗐다.
“있어.”
“푸읍…! 켁켁….”
“서진 오빠, 괜찮아요?”
난데없이 물을 뿜는 서진에 놀란 여자가 서진에게로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사레가 들렸다며 적당히 손을 저었다. 시선은 여전히 시헌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시헌은 사레가 들린 서진을 보며 입꼬리를 올린 뒤 남은 맥주를 전부 마셨다. 여친이 있다는 말에 여자는 살짝 서운해했지만, 옆에 있던 남자들은 신이 난 듯 질문을 했다.
“헐, 진짜요? 예뻐요?”
“귀여워. 공부도 잘하고, 착하고.”
“얼마나 사귄 건데요?”
“음. 좀 됐지? 삼 년?”
유리잔 끝을 만지작거린 시헌은 서진을 보며 웃었다. 아무리 봐도 여자 친구가 아니라 서진의 얘기를 하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술 마시면 애교가 많아서 좋아. 특히 밤에.”
“야야, 박시헌. 너 애들 상대로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인마!”
시헌의 얘기를 흥미롭게 듣던 직원 형 하나가 시헌의 옆에 앉은 어린 여자를 밀어내고 둘 사이에 끼어 앉았다. 20대 후반으로 결혼을 앞둔 그의 말에 시헌은 옆쪽에 앉은 이제 막 20살이 된 동생들을 보며 큭큭댔다.
“에이 스무 살이면 다 컸죠.”
“마, 맞아요! 형 짱이다.”
“그만해라 그만해. 야야, 서진아. 박시헌 얘 맨날 이러냐?”
“하하. 술 들어가면요.”
차마 자기 얘길 하는 거라고 말할 수 없었던 서진은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술자리가 거의 끝나 갈 무렵 서진은 다른 직원 몇 명과 함께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탁탁, 서진의 라이터의 불이 생각처럼 잘 켜지지 않았다. 기름이 없는 건가? 서진은 라이터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하긴 싸구려 라이터치고는 오래 쓴 편이었다.
서진이 밖으로 나간 것을 본 시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잠바를 걸치며 밖으로 나왔다. 시헌은 라이터에 대해 투덜대고 있는 서진을 향해 주머니 속에 있던 라이터를 던졌다. 시헌의 라이터를 받은 서진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서진이 딱 담배를 피우자 시헌도 불을 붙여야 할 타이밍이었다.
서진은 일부러 불을 끄지 않은 채 라이터를 시헌에게 가져다 댔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척척 맞담배를 피우는 두 사람을 본 직원이 한마디 했다.
“너네 친하다더니 죽이 잘 맞는구나?”
“뭐가요?”
정작 서진과 시헌은 무슨 문제가 있는지 이해를 잘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평소처럼 굴었을 뿐인데 말이다. 서진이 시헌을 보자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연기를 내뱉은 시헌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직원의 손이 시헌의 주머니 사이에 살짝 튀어나와 있는 라이터에 닿았다.
“라이터. 확인하지도 않고 바로 줬잖아.”
“하하. 아까 시헌이가 제 라이터 빌려 써서. 불이 안 들어오는 거 알고 있어서 그래요.”
“아아, 그러냐?”
서진의 말에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나머지 직원들이 들어가자 밖에는 순식간에 시헌과 서진 두 사람만 남았다. 시헌은 짧아진 담배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 니 라이터 빌려준 적 없는데.”
“그냥 그렇다고 쳐.”
“거짓말쟁이.”
“시끄러, 잔소리 대마왕.”
“으으. 싫다.”
끝날 분위기가 다 됐는지 사람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왔다. 시헌은 서진의 옆에서 새 담배를 물었다. 통금시간이 있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가 2차를 갈 생각인 것 같았다. 비교적 자유로워 보이는 두 사람에 알바 경력이 제일 오래된 형 하나가 말을 걸었다.
“너넨 2차 갈 거야?”
“그게…. 공부해야 돼요.”
서진은 시헌을 슬쩍 보며 말했다. 공부라는 말에 말을 건 형은 물론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다 질색을 했다. 두 사람이 술을 안 마셨다면 모를까 시헌과 서진은 거의 모든 직원이 주는 술을 족족 받아 마신 상태였다. 약간 술에 취한 남자 직원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야, 너넨 씨발! 술 먹고 공부가 되냐?”
“우리 학교 와 보세요. 더한 짓 하고도 공부해요. 그거에 비하면 술 마시고 공부는 별거 없죠.”
“그래, 잘났다 잘나. 택시 타고 갈 거냐?”
“아, 시헌이 차 있어요. 대리 불렀거든요.”
서진은 택시를 잡아 주겠다는 그의 말에 손을 저었다. 서진의 뒤에서 연신 말없이 줄담배를 피운 시헌은 눈을 깜박였다.
그런 적 없는데?
사람들이 전부 가고 홀로 남겨진 시헌은 담배 대신 가게에서 가지고 나온 색소가 들어간 사탕을 입안에 구겨 넣었다. 술기운이 올라와 사탕 맛인지 설탕 맛인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헌은 마지막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내고 손을 흔드는 서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 대리 부른 적 없는데?”
“아까 부른다며.”
“내가 언제?”
시헌은 사탕을 으득으득 씹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리는 번호를 알아야 부르지. 시헌은 일부러 차를 가져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냥 서진이 대리가 어쩌고 하고 얘길 하길래 고개를 끄덕인 것이 전부였다. 시헌이 당연히 차를 가져왔을 것이라 생각하고 얘기를 한 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차 안 가져왔어?”
“당연하지.”
“씨발 그럼 아까 말했어야지.”
“말했는데?”
이번엔 서진이 입을 다물었다. 엇갈린 대화에 두 사람은 실없이 웃었다.
“야, 박시헌. 너 술 취했어?”
“안 취했는데. 너는?”
“별로 안 마셨잖아.”
“2차 갈까?”
“둘이?”
“그럼 누가 있어?”
시헌은 괜히 사람을 찾는 척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시헌의 그런 모션에 서진은 됐다며 시헌의 등을 떠밀었다. 두 사람은 고깃집 건너편에 있는 술집에 들어가 마른안주에 소주 세 병 정도를 더 시켰다. 말없이 마시기 시작한 술이 한 병 반이 넘어갈 무렵 시헌이 테이블 한쪽에 팔을 괴며 말했다.
“반지 맞출까?”
“술 마시다 말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잔을 비우며 안주를 씹은 서진은 시헌이 정말 정신이 나간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헌은 그게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그치만. 아까 나한테 여친 없냐고 물어봤잖아.”
“물어볼 수도 있는 거잖아.”
서진은 그게 뭐 그리 큰 문제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보통 남자에게 남자 친구 있냐고 묻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시헌은 서진의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입술을 내밀었다.
“너한테 관심 있어서 그랬나 보지 뭐.”
“난 너 말고 필요 없어. 너만 있으면 돼.”
“어련하시겠어.”
“질투 안 해?”
“나만 있으면 된다면서. 질투를 왜 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람이란 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뻔뻔해진다더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3병의 술을 거의 다 마셔 갈 무렵 약간 술에 취한 시헌이 서진 쪽으로 몸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서진을 따라 아르바이트를 같이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시헌에겐 여전히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있었다.
“알바비 모아서 뭐 할지는 안 알려 줄 거야?”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시헌의 시선에 서진은 마시던 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서진은 아직도 고치지 않은 시계를 손가락질했다. 시헌은 시계가 또 고장 났나 싶어 소매를 걷었다.
“너 생일 얼마 안 남았잖아.”
“…….”
“시계 사 주려고 그랬어.”
“푸읍! 자, 잠깐만! 강서진! 너, 너…!”
생각 없이 물을 마시던 잔을 내려놓으며 소리를 질렀다. 아주 짧은 시간, 시헌의 외침으로 인해 가게 안으로 침묵이 일었다. 믿을 수 없다는 시헌의 표정에 서진은 얼마 남지 않은 소주를 긁어 마시며 시선을 피했다.
“내가 계속 묻지 말라고 했잖아.”
“노, 농담이지? 너, 너 이러는 게 내 시계 때문이라고?”
시헌은 서진이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고 있었다. 늘 적당히 공부해도 서진보다 성적이 높은 시헌은 서진의 노력에 대해 결코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건 시헌이 할 수 있는 서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그런 서진이 방학 기간 내내 잠과 시간을 줄여 가면서 틈틈이 아르바이트하는 이유가 자신―그것도 고작해야 시계― 때문이라는 것을 좀처럼 의심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치근덕대는 시헌에 짜증이 난 서진은 결국 다 마신 소주잔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그럼 내가 장난으로 그랬겠냐?”
약간 짜증이 난 서진의 말투에 시헌은 소매를 걷어 팔에 있는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시계 같은 거 길거리에 만 원짜리 사 줘도 되잖아.”
“하, 너 같으면 퍽이나 그런 거 사 주고 싶겠다!!”
“난 네가 사 주는 거라면 천 원짜리든 백 원짜리든 괜찮아.”
“야. 너 그 시계도 250만짜리더라. 차 한 대 값짜리 시계 차고 다니는 애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시헌이 돈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서진은 그것도 있는 애들이나 할 소리라며 혀를 찼다. 제가 흥분했다는 걸 눈치챈 서진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계산 좀 하고 일어나자.”
“알았어.”
카운터로 간 서진이 계산을 하려 하자 시헌이 재빨리 서진을 밀어내고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마치 가게에 쫓겨난 사람처럼 멍하니 섰다. 일단 나온 건 좋은데 어딜 갈지 정해지지 않았다.
“에취…!”
“…취.”
거의 동시에 재채기를 한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시헌은 소매로 흐르는 콧물을 살짝 닦으며 번화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일단 어디 좀 들어가자.”
“그러자.”
날이 추웠다.
* * *
“왜 또 모텔인 건데.”
모텔 방 안으로 들어간 서진은 붉은색 시트가 깔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옷을 벽에 건 시헌은 리모컨을 찾아 천장에 있는 히터를 켰다. 마침 서진의 아래로 바람이 내려왔다. 서진은 이불을 무릎까지 덮었다. 시헌 또한 침대에 몸을 걸터앉았다.
“나랑 얘기 좀 해.”
“또 무슨 얘길 해.”
“아까 말했던 거. 진짜 내 시계 때문에 알바하는 거야?”
“아 진짜!! 그렇다고 몇 번을 말해!!!”
서진은 끈질기게 물어오는 시헌이 성가셨다. 원래라면 알바도, 시계 선물도 생일까지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캐묻듯 까발려져서는 이젠 비밀이고 뭐고 없었다. 서진은 재채기하며 이불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히터가 돌아가는 소리만 나며 모텔 방 안으로 침묵이 흘렀다. 조금 따듯해진 기분이 든 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서진은 혼자만 이불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 좀 미안했는지 이불을 살짝 들었다. 들어오라고 한 건데 시헌은 엄청난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꿈적도 하지 않았다.
“야, 너 괜찮냐?”
“아니, 그…….”
시헌은 이불 안으로 몸을 구겨 넣으며 서진의 허리 근처를 안았다. 이게 갑자기 무슨 어린애 같은 앙탈인가 싶었다.
“너, 너 진짜 취했어?”
서진도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 중이라 시헌이 취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불 속 안에서 서진에게 매달린 시헌이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기뻐.”
안에서 눌린 목소리에 서진은 이불을 살짝 들어 시헌을 바라봤다. 시헌의 손이 서진의 바지 버클과 벨트를 풀며 서진의 안을 주물럭거렸다.
“읏, 뭐?”
“그럼 알바비 하나도 안 쓰고 다 모은 거야?”
“한 달 치밖에 안 모았어. 비싼 건 못 사 줘.”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는 시헌은 서진의 옷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배와 가슴 근처에 입술을 맞췄다. 서진의 위로 올라탄 시헌의 손이 옷 안 유두 근처를 살살 지분거렸다.
“난 네가 선물하는 거라면.”
“…….”
“길가에 쓰레기를 주워다 줘도 좋아.”
“미친 새끼 취했네.”
“진짜 좋아. 말만 들어도 좋아.”
“아, 알았어. 알았다고.”
서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헌은 계속해서 서진의 배에 머리를 비볐다. 배 근처에 머리가 닿자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 * *
“야, 박기욱!”
멀리 간호사 데스크에 몸을 반쯤 기댄 그가 오라며 손을 까닥였다. 기욱이 그에게 다가가자 근처에 있던 다른 레지던트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같은 교수인 기욱은 그를 향해 예의상 가볍게 고개만 숙였다. 눈을 살짝 아래로 하자 그의 가운에 적힌 이름을 읽을 수 있었다.
신경외과 교수 한우민.
기욱의 전공의 시절 선배로, 기욱은 제발 우민이 원래 출신 대학인 H대로 돌아가길 바랐으나 우민은 결국 J대에 교수로 남는 것을 선택했다. 지금은 같은 동급이라고는 하지만 전문의 시절 선배였던 우민이 기욱보다 우위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경력 부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우민은 근처에 있는 의사들을 향해 가 보라는 듯 눈치를 줬다. 우민의 옆에 있던 펠로우가 다른 레지던트들을 전부 데리고 자리를 떴다. 우민은 차트를 보며 안쪽의 간호사와 어제저녁쯤에 수술한 환자의 예후에 대해서 가볍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럴 거면 왜 자신을 불렀는지 약간 기분이 상한 기욱이 되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별건 아니고. ER 내려갔다 오는 길인데, 유 교수님이 너 찾으신다.”
“유 교수님?”
“너네 어머님.”
기욱은 가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뭇거렸다. 어제저녁에 출근하긴 했지만, 이런저런 일이 쌓인 상태라 쉽게 퇴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민은 들고 있던 차트를 세워 기욱의 어깨 한쪽을 툭툭 건드렸다.
“어깨에 힘 빼. 환자들 다 도망가겠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얼어 죽을. 같은 교수 처지에. 야, 가라 가.”
“예?”
우민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기욱이 우민을 가만히 바라봤다. 우민은 그런 기욱의 모습에 차트를 허공으로 들어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본 간호사가 깜짝 놀라자 우민은 장난이라며 실실 웃었다. 전공의 시절 정말 우민에게 많이 맞은 기욱의 어깨에 살짝 움츠러들었다.
기욱과 달리 우민의 퇴근 시간은 한참 지났다. 재수가 없게도 전공의 시절부터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 우민은 스텝이 된 이후에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우민이 기욱의 스케줄을 대신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나 기분 바뀌기 전에 가.”
“하아, 감사합니다. 다음에 술 한번 살게요.”
“그래.”
기분이 좋은 듯 우민은 손 대신 차트를 흔들며 기욱을 보냈다. 무슨 일 있나? 기욱은 당직실로 들어가는 우민을 흘끗댔다. 아니나 다를까 당직실 앞에서 건너편 병동을 바라본 우민은 안쪽에서 막 나오는 인턴을 향해 와 보라는 듯 손을 까닥였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는 듯 반쯤 짜증이 난 얼굴로 인턴의 어깨에 손을 올린 우민은 인턴을 데리고 조용히 당직실 안으로 들어갔다. 기분이 좋긴 얼어 죽을. 우민은 우민이었다.
기욱은 층마다 멈추는 엘리베이터를 무시하고 비상계단을 통해 1층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에 있는 기욱의 엄마는 퇴근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의사와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기욱을 본 전공의가 깜짝 놀라 인사를 했다. 기욱이 온 것을 본 엄마는 전공의에게 고생하라며 등을 떠밀어 그를 보냈다.
“어, 기욱아. 강 간호사는?”
“서윤이 나이트라서 퇴근했어요.”
“어머, 그래? 밤새 고생한 애를 부를 수는 없지.”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 지금부터 먹으러 갈까 생각 중이야. 오랜만에 아들이랑 밥이나 먹으러 가려고.”
엄마와 기욱은 자연스럽게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기욱은 한발 앞서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기욱은 천천히 병원의 지하주차장을 나왔다.
“가고 싶은 곳은 있나요?”
“아니. 없어. 우리 아들이 가고 싶은 데 가.”
“흐음, 그럼 그렇게 할게요.”
병원 밖을 빠져나온 기욱은 앞유리 위쪽의 간판을 보더니 천천히 차를 돌렸다.
* * *
사람이 가득한 백화점 안, 기욱은 몸을 살짝 앞으로 해 길을 비켜 줬다. 기욱의 앞으로 엄마가 먼저 들어가고 그 뒤로 기욱이 엘리베이터 안에 몸을 실었다.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만원이 되었다. 기욱이 가려는 9층은 굳이 누르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미 눌린 상태였다.
“여기에 패밀리 레스토랑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생긴 지 얼마 안 됐어요.”
“엄만 패밀리 레스토랑은 별로더라.”
아는 사람이 있어 차 안에서 예약한 기욱은 엄마와 함께 빠르게 패밀리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있는 자리를 안내받은 엄마는 입고 있던 잠바를 기욱에게 내밀었다. 옷을 잘 정리한 기욱은 테이블에 있는 메뉴판을 엄마 쪽으로 내밀었다.
“스테이크 드실래요?”
“알아서 시켜.”
엄마가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기욱은 근처에 있는 알바생에게 메뉴판을 건네주며 간단하게 주문을 했다.
“엄만 화장실 좀 다녀올게.”
“예.”
엄마와 주문을 받은 알바생이 가자 기욱은 괜히 주변을 둘러봤다. 기욱은 서윤에게 기어코 서진이 일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의 이름을 알아냈다. 사람이 많은 만큼 돌아다니는 직원이며 알바생도 많아 그중에 있을 서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혹은 시간이 어긋났을 수도 있었다.
기욱이 혹시나 하고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려 하자 마침 화장실에 다녀온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는 통화하려다 만 기욱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 일 봐.”
“급한 건 아니니 괜찮아요.”
기욱은 휴대폰을 닫으며 주머니에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미친!”
기욱과 엄마가 있는 바로 건너편 룸에서 일하고 있었던 시헌은 음식을 가지러 가는 두 사람을 보며 재빨리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시헌이 있는 곳은 두 사람이 있는 곳과는 달리 칸막이가 쳐져 있어 발견하지 못한 듯싶었다.
중간중간 푸드코너 안쪽을 지나 주방을 들러야 하는 시헌은 두 사람이 식사를 끝마칠 때까지 걸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을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시헌은 이제 막 출근했고, 두 사람 또한 아무리 봐도 이제 막 식사를 하러 들어온 상황이었다.
기욱이야 논외로 쳐도 엄마는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시헌은 도대체 왜 기욱과 엄마가 이곳에 왔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든 시헌이 알바를 하고 있다는 것은 하연만 아는 비밀이었다. 시헌은 마침 지나가는 매니저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어, 시헌아? 무슨 일이야?”
“매니저님, 저 오늘 파트 좀 바꿔 주시면 안 될까요?”
“왜?”
“그게 저…….”
시헌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기욱과 엄마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일이 좀 있어서요.”
“뭐, 알았어. 잠깐만.”
주방에 남자가 있으면 훨씬 더 편하기도 했고.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을 한 그녀는 주방에 있는 다른 알바생과 무전을 주고받았다. 이내 알겠다는 대답이 들리자 그녀는 주방 안쪽을 손가락질했다.
“그럼 안에 들어가.”
“하아, 감사합니다.”
시헌은 혹시 얼굴이 보일까 최대한 고개를 숙이며 주방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 * *
시헌보다 한 시간 늦게 출근한 서진은 옷을 갈아입은 뒤 홀로 나왔다. 서진이 오자 혼자 테이블을 보고 있던 여자가 웃으며 인사를 했다.
“오빠, 안녕하세요.”
“어. 응. 근데 너 오늘 홀 아니지 않았어?”
“어, 안에서 핸들링하고 있는데 시헌 오빠가 매니저님한테 바꿔 달라고 했대요.”
“갑자기 왜?”
“음. 그거까진 모르겠어요. 전 홀도 상관없어서.”
무슨 일이지? 서진은 주방에 있는 시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서진과 여자가 있는 곳은 안쪽 룸으로 사람이 이제 막 식사를 하러 들어와 상대적으로 할 일이 없었다. 귀에 낀 서진의 무전기가 지직거리며 소리가 들렸다. 서진은 며칠 전부터 무전기를 차기 시작했다.
― 지금 한가한 사람?
― 저희 한가해요.
서진이 매니저가 있는 쪽을 보며 손을 살짝 들었다. 매니저가 다시 무전을 쳤다.
― 그럼 서진아, 미연이 두고 니가 음식 리필 좀 돌아.
무전기가 없는 미연이 서진과 매니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 뭐래요?”
“어? 별거 아냐. 리필 좀 보고 올게. 바쁘면 바로 말해.”
“아, 알겠어요.”
생각보다 많이 빠진 음식에 서진은 시헌을 생각할 틈도 없이 푸드코너를 돌았다. 한동안 푸드코너에 붙어 있으며 음식을 체크하던 중 시헌이 주방에서 접시를 가지고 나왔다. 아슬아슬할 것 같은 높이에 서진이 재빨리 시헌의 접시의 절반을 넘겨받았다.
“야. 박시헌 너 왜 안에 들어간 거야?”
“형 왔어. 엄마랑.”
안쪽으로 몸을 숙인 시헌은 기욱과 엄마가 있는 입구 쪽을 흘끗댔다. 서진이 시선을 돌리자 엄마와 대화를 하며 식사 중인 기욱이 눈에 들어왔다. 서진은 기욱에게 알바 장소를 말한 적이 없었다. 마침 서진에게 무전이 왔다.
― 리필 확인했어?
― 네, 대충 다 돌았어요.
― 확인.
서진은 무전기의 이어폰을 빼며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확실히 기욱과 시헌의 엄마가 매장에 방문한 건 좀 의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헌이 숨어야 하는 이유를 서진은 좀처럼 납득할 수 없었다.
“야, 너 알바하는 거 집에서 몰라?”
“알면 씨발, 이러고 있겠냐. 나 진짜 엄마한테 걸리면 장난 없어.”
기욱이야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엄마는 시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서진은 콜드파트를 한 번 더 돌아보고 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서둘러 주방으로 돌아가던 시헌의 옆으로 여자가 지나갔다.
“꺅!”
“죄송합니다.”
여자와 몸을 부딪친 시헌이 깜짝 놀라 급하게 사과를 했다. 다행히 여자의 손에 있는 접시는 떨어지지 않았지만, 접시에 있던 음식 하나가 여자의 옷 근처로 약간 튀었다.
“아, 옷에 다 묻었네. 진짜.”
“저…….”
“자기야, 왜 그래?”
“아, 오빠 이거 봐. 저기요, 지금 미쳤어요?”
뭔가 소란스러운 느낌에 서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을 느낀 서진이 재빨리 무전을 쳤다.
― 매니저 누나. 푸드코트 오셔야 할 것 같아요.
― 지영아 푸드코트 가 봐라.
입구 쪽에서 손님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는 점장도 문제를 인식한 듯 무전을 했다. 하아. 서진은 대충 리필을 확인한 뒤 매니저의 뒤를 이어 시헌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어쩐지 정신이 없어 보인다 했더니 이 꼴이었다.
지영이라 불리는 여자 매니저가 시헌을 살짝 밀어내고 여자 손님에게 다가갔다.
“손님, 괜찮으세요?”
“저기요, 매니저예요? 이게 괜찮아 보여요?”
그녀가 옷 한쪽에 묻은 소스를 보이며 노골적으로 짜증을 냈다. 소스라고 해 봤자 흰 부분에 정말 살짝 튄 것이 전부였다. 딱 봐도 진상 손님이라고 생각한 매니저는 입술을 깨물며 한숨을 쉬었다.
“시헌아, 일단 사과해.”
“하아, 죄송합니다.”
여자보다 더한 사람들을 많이 봐 와 어지간한 명품은 원하지 않아도 이름을 외울 지경인 시헌은 여자의 옷과 신발, 액세서리 등의 견적을 눈으로 대충 훑었다. 시헌은 아무리 봐도 그녀가 호들갑을 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시헌의 시선과 사과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여자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지금 그게 사과예요? 죄송하면 다냐구요!! 알바 관리 똑바로 안 해요? 하,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시헌은 그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소란으로 아직 식사를 끝내지 않은 엄마와 기욱이 눈치를 채면 어쩌나 하는 걱정뿐이었다. 여자고 나발이고 빨리 주방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손님, 일단 자리로 가셔서, 옷은 저희가…….”
“박시헌! 너 지금 여기서 뭐 하니?”
“…….”
“…….”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온 엄마가 시헌을 노려봤다. 시헌과 매니저의 뒤쪽에서 무전을 하는 서진을 본 기욱은 이마를 짚었다. 서진이 알바를 하고 있다고 해서 온 건데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어, 엄마….”
시헌은 엄마의 따가운 시선을 반쯤 무시한 채 기욱을 바라봤다. 시헌과 눈이 맞은 기욱은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망했다.
* * *
“…….”
방 안으로 침묵이 흘렀다. 시헌은 얼마나 무릎을 꿇고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소파 위라 무릎이 아프거나 하진 않았지만, 오랫동안 무릎을 꿇은 탓에 다리가 저렸다.
“언제부터 했어?”
“한 달 좀 넘었어.”
“당장 그만둬.”
“아, 엄마 그게 아니라…….”
툭, 하고 엄마는 뭔가를 던졌다. 엄마가 던진 물건이 시헌의 옆에 있는 유리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엄마의 눈치를 본 시헌은 몸을 옆으로 약간 틀어 유리 테이블 위에 놓인 핑크색 카드를 집어 들었다.
“체크카드야. 1억 들었어.”
“…….”
“다 쓰고 부족하면 더 줄 테니까 그때 얘기해.”
“엄마, 나 진짜 돈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엄마의 언성이 점점 올라갔다. 기욱은 마침 학교를 마치고 들어온 운오에게 방으로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기욱은 건너편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엄마는 시헌의 말을 듣기 싫다며 잘랐다.
“박시헌, 엄만 다른 건 모르겠고, 너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 적은 없다.”
“…….”
“너 지금 본2야. 공부만 해도 부족할 판에 알바까지 하면 감당이 될 것 같아? 그리고 엄만 너 그렇게 고개 숙이고 다니는 꼴 못 보니까 당장 그만둬.”
“그러니까 내 말은…….”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하다가 걸리면 엄마 쪽 친척한테 얘기해서 너 미국 보내 버릴 줄 알아. 이럴 줄 알았으면 재수한다고 했을 때 미국으로 보냈어야 했어.”
시헌의 내신 성적은 제법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재수할 바에는 차라리 미국에 있는 대학을 가라는 문제로 시헌은 엄마와 싸운 적이 있었다. 아빠가 시헌의 편을 들어 준 탓에 시헌은 재수를 할 수 있었지만, 엄마는 아직도 시헌과 만나면 종종 미국 얘기를 하고는 했다.
한다면 한다. 시헌은 그 말이 결코 기욱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기욱의 그런 성향은 엄마에게서 온 거기도 했다. 엄마는 기욱만큼이나―다른 의미로 기욱보다 더― 한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시헌을 재촉했다.
“대답은?”
“잘못했습니다.”
“후우, 알면 됐어. 박기욱, 너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한집에서 살면서 네 동생이 알바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병원에서 네 일도 중요하지만, 시헌한테도 똑바로 신경 써.”
“신경 쓸게요.”
엄마의 잔소리에 기욱이 주의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기욱의 차를 따라 집으로 돌아온 시헌은 기욱과 함께 지하주차장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본 기욱은 풀이 잔뜩 죽은 시헌을 내려다봤다.
서진이 그곳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거기에 시헌이 있을 줄은 기욱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요즘 들어 유독 자주 밖에 나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성인이고 하니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하고 내버려 둔 것이 화근이었다.
알바를 하면 한다고 말하면 될 걸 기욱은 그 사실을 숨긴 시헌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기욱은 딱히 시헌을 잡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박시헌.”
“…….”
“왜 그랬어?”
“미안.”
“다시는 그러지 마라.”
기욱은 시헌의 등을 밀며 엘리베이터 안에 탔다.
* * *
가게에 조금 일찍 도착한 서진은 먼저 술을 시켜 마셨다. 주차장을 찾느라 조금 늦은 시헌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너 알바는?”
“그런 일 있었는데 어떻게 계속하냐? 저번 주까지만 하고 관뒀어.”
어렸을 적 몇 번인가 시헌의 엄마를 봤던 서진은 시헌의 엄마가 한 성격 할 거라는 걸 어림잡아 짐작은 했었다. 도저히 30대 아들과 딸이 있는 나이로 보이지 않은 그녀는 지난번 식당에서 기껏해야 하연보다 한두 살 어려 보이던 여자를 거의 훈계하듯 잡았다.
사실 시헌의 엄마가 한 말은 틀린 말이 없고, 오히려 속이 시원한 구석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손님들끼리의 싸움이 되어 버려 점장까지 온 것을 생각하면 큰 소란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시헌에게 진상을 부린 손님의 직업이 간호사라는 걸 알고 난 이후부터 시헌 엄마의 말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칠어졌다.
“너네 어머님 대박이더라.”
“…장난 아니야 진짜. 하아, 나 때문에 미안하다.”
“됐어. 어차피 방학도 끝나 가고 나도 슬슬 다시 공부해야 돼서 오래 할 생각은 없었어. 야야, 생일이잖아. 풀 죽지 말고 기분 좀 풀어.”
서진은 고기를 불판에 올리며 시헌에게 술을 따랐다.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술을 마신 서진은 잠바 밑에 있는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서프라이즈라고 할 것도 없는 선물이었다.
“원랜 더 좋은 거 사려 했는데……. 미안.”
“말했잖아. 네가 주는 거라면 쓰레기라도 좋다니까.”
“시계 잘 골랐는지 모르겠다.”
시헌은 봉투 안으로 손을 넣어 상자 안에 담긴 시계를 꺼낸 뒤 팔에 찼다. 이전 시계보다 훨씬 가벼운 것이 나쁘지 않았다.
“괜찮아. 마음에 들어.”
시헌은 시계를 보며 웃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서진이 선물한 시계라는 데에 의의가 있었다. 서진은 만족해하는 시헌에 집게로 고기를 집었다.
* * *
샤워하고 나온 시헌은 수건을 목에 걸친 채 욕실 밖으로 나왔다. 바닥으로 물기를 뚝뚝 떨어트린 시헌은 호텔 방 안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마침 호텔 방 문이 열리며 밖에서 서진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잠바 차림의 서진을 본 시헌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라진 줄 알고 놀랐어.”
“내가 왜 사라져.”
“어디 갔다 온 거야?”
서진의 몸에서 찬 냉기가 났다. 서진은 잠바를 벗은 채 케이크 상자를 들어 보였다. 마침 호텔의 1층에 빵집이 있었다. 서진은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뛰어가 딱 하나 남은 케이크를 사 올 수 있었다. 케이크를 본 시헌은 가운 끈을 묶은 뒤 소파에 털썩 앉았다.
“돈도 없는 주제에.”
“시끄러워.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케이크를 상자 위로 올린 서진은 대충 케이크에 초를 꽂았다.
“좀 이르지 않아?”
시헌의 말에 서진은 아차 싶어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시헌의 생일까지 아직 두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생일 당일 저녁은 가족들과 보낸다는 말에 미리 앞당겨 전날에 생일 파티를 하기로 한 것이었다.
저렇게 제멋대로인 집안이라도 가족의 행사는 제대로 챙기는 듯싶었다. 아니, 그런 형식적인 행사가 실질적으로 시헌의 가족을 이어 주는 울타리 역할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실 일찍 해도 상관은 없지만. 시헌은 당근 케이크 끝의 생크림을 손가락 끝으로 퍼 먹으며 호텔의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호텔에서 생일 파티 하는 거 되게 웃긴 거 알아?”
“달리 갈 데가 없잖아. 모텔이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해.”
서진의 말을 시헌은 반박할 수 없었다. 아직 시간이 이른 걸 본 서진이 불을 붙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눈치를 살폈다.
“그냥 붙여. 솔직히 상관없어.”
시헌은 어찌 되든 괜찮다고 어깨를 들썩이며 불이 붙지 않은 초를 불이 붙은 초에 가져다 댔다. 그사이 서진은 호텔 방의 불을 껐다. 초를 전부 켠 서진이 시헌의 옆에 앉았다. 시헌은 타들어 가는 촛불 근처로 손을 가져다 댔다. 미세하지만 따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렇게 초 꽂아 놓으니까.”
“…….”
“중학교 때 생각난다.”
시헌이 낮게 웃었다. 서진도 마침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중학교 때 철거가 되지 않은 아파트 단지 위에 멋대로 올라가 시헌의 생일 파티를 했던 것은 아직도 두 사람의 머릿속에 추억처럼 남아 있었다.
“그 아파트 철거한대.”
“아직도 안 했어?”
“이제 한대.”
서진은 며칠 전 아파트 단지를 지나다 보이는 철거 현수막을 떠올렸다. 현수막만 붙여 놓은 거라 철거를 할지 안 할지 확실하진 않지만 말이다. 서진은 녹아내리는 초를 보며 말했다.
“됐으니까 불이나 꺼.”
“노래 안 불러 줄 거야?”
“나 노래는 좀…….”
서진은 괜히 얼굴을 붉혔다. 시헌은 노래를 불러 주기 전까지 촛불을 끌 생각이 없어 보였다. 머뭇대던 서진은 시헌의 허리를 잡아당겨 입술을 맞췄다. 서진의 혀가 가만히 있는 시헌의 입안 구석구석을 핥았다. 입가에 흐르는 타액을 닦은 서진이 거리를 살짝 벌리며 짤막해진 초를 흘끗댔다.
“이걸로 봐줘.”
“백 점짜리 노래였어.”
시헌은 후 하고 촛불을 전부 껐다. 시헌이 촛불을 끄자 서진은 방의 불을 밝혔다. 촛불을 빼 옆으로 밀어 넣은 시헌은 플라스틱 포크로 케이크를 집어 입에 넣었다. 비록 남은 케이크라고는 하지만 생각보다 달지 않은 케이크는 시헌의 입맛에 딱 맞았다. 시헌은 다시 한번 포크로 케이크를 집은 뒤 팔을 뻗었다.
“난 배불러.”
“그러지 말고 먹어 봐. 이거 맛있어.”
“하아, 알았어.”
서진은 시헌의 옆에 앉아 입을 벌렸다. 시헌은 어설프게 아, 하고 입을 벌리는 서진과 포크에 찍힌 케이크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내 시헌은 케이크를 입안에 살짝 걸쳐 넣은 뒤 그대로 서진의 입을 막았다. 시헌의 입을 통해 서진의 입안으로 케이크 조각이 넘어왔다.
“으읍… 너….”
“큭큭, 어때? 괜찮지?”
시헌은 케이크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케이스를 계속해서 먹었다. 시헌이 케이크를 잘 먹으니 서진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시헌이 말한 대로 케이크가 덜 단 것도 있었다. 서진은 케이크를 먹는 시헌의 몸을 천천히 눌렀다. 시헌의 몸이 자연스럽게 소파에 누웠다. 케이크를 먹다 만 시헌은 포크가 찍혀 있는 케이크를 서진의 입가로 밀었다.
“빨리. 자기야, 아.”
“하아. 아.”
서진은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시헌의 손에 있는 포크를 빼앗은 서진은 케이크를 입에 넣은 뒤 플라스틱 포크를 옆으로 내던졌다. 시헌은 테이블 밑으로 떨어진 포크와 아직 얼마 먹지 않은 케이크를 아쉽다는 듯 바라봤다. 하여튼 이런 데서는 유독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런 순수하게 어린애 같은 면이 시헌의 다른 매력이기도 했다. 서진은 시헌의 가운 끈을 풀어헤쳤다. 서진의 밑에서 알몸이 된 시헌은 서진의 손이 닿은 곳이 간지러운지 몸을 뒤틀었다.
“큭큭, 우리 여보가 오늘 왜 이렇게 흥분했을까.”
“아깐 자기라며.”
“아무거나 상관없잖아.”
“그야 그렇지.”
시헌은 서진의 목에 팔을 건 뒤 귓가에 속삭였다. 서진은 그 상태로 시헌을 안고 침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서진에게 안긴 적은 처음이었던 시헌은 이런 경험이 약간 낯설었다.
“안 힘들어?”
“크윽, 힘들어, 하.”
체격이 좀 작다고 해도 결국 시헌도 남자였다. 여자들에 비교할 바가 되지 않았다. 시헌은 제법 근육이 있어 무게가 꽤 나가는 편이었다. 시헌은 왁스칠을 해 세운 서진의 앞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아르바이트는 그만둬도 그동안 습관이 된 모양이었다. 시헌은 서진의 앞으로 다가가 서진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서진은 단추를 반쯤 푼 시헌의 손을 붙잡으며 시헌의 위로 올라탔다.
“어, 어라? 서진아?”
시헌의 팔을 붙잡아 누른 서진은 제 밑에 깔린 시헌을 내려다봤다. 샤워하고 나온 시헌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브리프 한 장만 걸치고 있는 시헌과 달리 서진은 단추가 반쯤 풀어진 것을 제외하면 옷을 전부 입고 있었다.
“시헌아 쫌만 있으면 네 생일이잖아.”
“어. 응. 그, 그렇긴 하지.”
“좋게 해 줄게.”
“아니, 난 괜찮은…….”
서진도 남자였다. 혼자만 옷을 입고 있는 상황이 서진을 미치도록 흥분하게 만들었다. 시헌은 이게 아니라며 침대에서 발버둥을 쳤다. 서진은 그런 시헌의 다리를 위쪽으로 들어 올린 뒤 엉덩이 근처에 입술을 맞췄다.
이게 아닌데!
뭔가 단단히 잘못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