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6 새로운 기억
학교 주차장에 차를 댄 시헌은 멍하니 앉아 있는 서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너 안 내려?”
“음. 그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대던 시헌은 운전대를 잡은 손을 놓으며 차에서 내리려는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재빨리 입술을 맞췄다. 혀를 안쪽까지 집어넣은 시헌은 서진이 말릴 틈도 없이 입술을 뗀 뒤 가방을 챙겨 도망치듯 차에서 내렸다.
“너…!”
“뭐해, 빨리 내려!”
시헌은 차 문틈 사이로 서진을 재촉했다.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시헌의 스킨십은 점점 노골적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학교에선 최대한 자제한다고 하는 모양이지만. 이 자동차 기습 키스만 해도 벌써 일주일 사이에 세 번이 넘게 당하는 중이었다.
서진은 시헌과 키스한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려 강의실로 가기 위해 시헌과 서진은 작은 건널목 앞에 섰다. 마침 버스와 차들이 지나가는 탓에 건널목을 건너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사이 두 사람의 옆으로 기욱이 다가왔다. 시헌보다 먼저 기욱을 알아차린 서진은 기욱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서진의 인사에 기욱을 본 시헌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형 병원은?”
“저녁에 출근할 거야.”
“우리 학교 몇 달만 오는 거 아니었어?”
“연장했어.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아서. 마침 그 시간대에 시간이 비기도 했고.”
“흐음, 그래?”
확실히 매일 보는 사이인 듯 기욱은 시헌이 인사를 하든 말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기욱은 시헌의 옆에서 가방을 메고 입을 다물고 있는 서진을 바라봤다.
“둘이 같이 왔어?”
“같은 과니까. 겸사겸사?”
기욱은 서진에게 한 말인데. 정작 대답한 건 시헌이었다. 사실 질문 자체는 누구에게 하나 크게 상관은 없었다. 시헌은 차가 지나가기 무섭게 서진의 팔을 잡고 그를 이끌었다.
“먼저 갈게.”
“야야, 잠깐 천천히 가.”
기욱의 눈치가 보였던 서진은 시헌의 손을 놓으며 걸음을 천천히 했다. 고개를 약간 돌리자 뒤쪽에서 느긋하게 걷고 있는 기욱이 입술을 뗐다.
“강서진.”
“네?”
“나중에 보자.”
기욱은 연구동이 있는 쪽으로 가야 한다며 서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통상적인 인사일 텐데. 어째서인지 서진은 기욱의 그 인사에 묘한 소름이 돋았다. 차마 무시를 할 수도 없었던 서진은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뭐해, 서진아?”
“아냐. 올라갈게.”
서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욱은 왜 시헌이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가길 원하지 않았던 걸까.
* * *
“세미나? 너 한동안 없다고 했잖아.”
“나 재시 없잖아. 집안에 소문 다 났더라.”
쉬는 시간 무렵 책상에 팔을 괸 시헌은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너네 집 의사 집안이잖아. 그 집에서도 본1 때 재시 없는 게 미친 짓이라는 걸 알긴 아는구나.”
“말도 마. 형이 나한테 괴물이라고 그랬어.”
“괴물 맞네.”
서진은 기욱이 말할 정도면 답이 없다는 걸 알았다. 가끔 보면 기욱은 노력이나 고생하는 것처럼이라도 보이는데, 시헌은 기욱과 달리 그냥 선천적으로 머리가 좋은 것이 틀림없었다.
“언제 가는데?”
“집에 들렀다가 바로 내려갈 거야.”
“너도 고생이 많구나.”
본과에 들어가고 슬슬 의학적 지식을 배우기 시작한 서진은 시헌이 다닌다는 세미나에 아주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주차장에 도착한 시헌은 차 문을 열며 말했다.
“너도 갈래?”
“뭐? 내가 거길 왜 가?”
“뭐 어때. 너도 의사 될 거잖아.”
시헌의 제안이 서진은 마음 한구석으로는 반가우면서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애당초 시헌처럼 입고 나갈 만한 정장도 없었고, 어차피 살면서 앞으로 계속 갈 텐데 어차피 할 거 사서 고생하고 싶진 않았다.
“나 재시 남아서 안 돼.”
“아아, 진짜 싫다.”
“빨리 차에 타기나 해.”
서진은 차 문을 열고 뭉그적뭉그적하는 시헌을 운전석으로 구겨 넣었다. 반강제적으로 운전석에 앉은 시헌은 차 시동을 걸지 않은 채 한숨을 푹푹 쉬었다. 누가 보면 세상이 망하는 줄 알 정도였다. 서진은 마지못해 시동을 거는 시헌을 향해 닫지 않은 차 문 안으로 손을 흔들었다.
“잘 갔다 와.”
“키스해 주면 더 잘 갔다 올 것 같은데.”
서진은 아직 벨트를 매지 않은 시헌의 등을 퍽 하고 때렸다. 시헌의 머리가 핸들을 치며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시헌은 서진에게 맞은 등을 만지작거렸다. 서진도 제가 때리고 나서 조금 강하게 때린 기분이 들었다. 아무렴 먼저 그런 말을 꺼낸 시헌이 잘못한 일이었다.
“아파.”
“태권도 유단자가 엄살은.”
“나 태권도 아직도 다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시헌은 핸들에 몸을 기대며 차 밖에 있는 서진을 올려다봤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시헌은 시간이 날 때면 종종 태권도장을 방문하고는 했다. 시헌은 서진에게 말한 기억이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
“너라면 그럴 것 같았어.”
서진의 중얼거림에 시헌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비어 있는 조수석을 가볍게 두드렸다.
“가방 챙겨서 내려오면 안 돼? 가는 길에 데려다줄게.”
“됐네요. 근처에서 저녁 먹고 공부 좀 하다가 지하철 타고 알아서 들어가겠습니다. 넌 니 갈 길이나 가시죠.”
“으으. 나도 서진이랑 저녁 먹고 싶다.”
“나 때문에 괜히 늦지 말고. 내일 학교는 나오지?”
“우리 서진이 생각하면 나와야지.”
“닭살 돋으니까 그만 좀 해. 진짜 가라.”
서진은 시헌의 차 문을 닫아 줬다. 창문을 연 시헌은 벨트를 맨 뒤 서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텅 빈 주차장을 둘러본 서진은 근처에 있는 건물 벽에 기대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담배 케이스를 열었으나 담배가 없었다. 돛대였다.
“이런.”
서진은 담배를 사기 위해 학교 바깥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쪽으로 들어간 서진은 잘 진열된 캔 커피들을 올려다봤다. 집에 가기도 귀찮은데 그냥 학교에서 날밤을 샐까? 서진은 커피를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는 여부로 학교에 남을지 집에 갈지를 결정했다.
서진은 결국 냉장고 문을 열고 캔 커피를 챙겨 카운터로 돌아왔다. 알바생이 커피를 거의 다 찍어 갈 무렵 서진은 알바생의 뒤에 있는 담배를 손가락질했다. 계산을 하기 위해 지갑을 뒤지자 한가한 편의점 안으로 인훈이 들어왔다.
“어? 서진아!”
이미 유리창 너머에서부터 인훈이 오고 있다는 것을 보고 있었던 서진은 인훈의 등장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인훈은 서진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서진에게 다가가 친한 척 굴었다.
“오랜만이야. 시험 잘 봤어?”
“그럭저럭.”
서진은 계산이 다 된 담배를 주머니에 넣으며 가방에 캔 커피들을 챙겼다. 서진이 커피를 챙기는 동안 인훈은 사람이 없는 편의점 내부를 둘러봤다.
“근데 시헌이는?”
“박시헌이 왜?”
서진은 인훈과 시헌이 아는 사이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령 아는 사이라 해도 시헌을 왜 자신에게서 찾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둘이 친하잖아.”
“……세미나 갔어.”
“넌 안 가?”
“내가 거길 왜 가는데?”
서진은 도서관까지 가는 동안 마실 캔 커피 하나를 빼놓고 남은 커피를 집어넣은 가방의 지퍼를 잠갔다.
“근데 무슨 커피를 그렇게 많이 사? 커피도 안 좋아하면서.”
인훈의 중얼거림에 캔 커피를 뜯은 서진의 손이 잠시 멈췄다.
“나 커피 싫어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서진의 경계 어린 말투에 인훈도 약간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 평소에도 애들이랑 카페 가면 넌 다른 거 시켜 먹고 그러잖아.”
“……뭐. 그러긴 하지.”
사실 인훈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커피를 반쯤 마시며 곧장 편의점을 나왔다. 편의점 밖으로 나온 서진은 인훈이 있는 편의점 유리창을 흘끗댔다. 인훈이랑 카페를 간 적이 있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 * *
안 만날 줄 알았던 인훈은 생각보다 다시 금방 만났다. 중앙도서관의 복도에서 인훈을 마주친 서진은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서진아, 집에 안 가?”
“어.”
“도서관에서 날 새려고? 시험도 끝났는데?”
서진은 계속해서 저를 따라오며 참새처럼 물어 대는 인훈이 진심으로 성가셨다. 결국, 도서관 입구 복도에서 걸음을 멈춘 서진은 인훈을 위아래로 훑으며 노려봤다.
“야.”
“어?”
“너 경영학과라 그랬냐? 내가 다른 과는 애들은 잘 모르는데, 내가 아는 다른 과 애들은, 취업 준비하느라 바쁘던데.”
“…….”
“넌 씨발 존나 한가한가 보다?”
3학년 1학기 중반이면 정신이 제대로 박힌 녀석이라면 슬슬 취업 준비에 들어가는 것이 맞았다. 약간 이른 감이 있긴 하지만 대학에 맞는 대기업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많은 경우에는 더 1, 2학년 때부터 취업 준비를 하기도 했다. 어쨌든 요점은 쫓아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 서진이 한 말의 의미를 알긴 아는 걸까? 인훈은 되레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아, 우리 집은 돈이 좀 많아서,”
그리고 서진은 진심으로 그런 인훈이 성가셨다. 지금 돈 많다고 자랑하나? 서진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인훈을 보자 인훈이 가볍게 웃었다.
“아빠가 요번에 국회의원 당선되셨거든.”
“하, 좋겠네! 그래. 어쨌든 난 재시 있어서 공부해야 돼.”
서진은 더 이상 이 잘난 집 도련님과 이야기를 엮고 싶지 않았다. 서진이 도서관 입구로 등을 돌리자 인훈 또한 서진의 옆에 달라붙었다.
“나도 오, 오늘은 공부하려고 한 거였어.”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서진은 인훈의 손에 들린 교재를 흘끗거렸다. 가방도 꽤 무거워 보이고 아무렴 닥치고 공부하겠다는 사람을 서진이 말릴 이유는 없었다.
서진은 앞쪽에 앉은 인훈을 무시하려고 일부러 최대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공부를 계속했다. 새벽 3시가 좀 넘어갈 무렵 가져온 커피를 거의 다 마신 서진은 잠시 책상에 팔을 괴며 잠이 들었다. 문득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의 진동 소리에 깜짝 놀란 서진이 정신을 차렸다. 서진은 의자 밑으로 몸을 숙여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 집 아니지?
시헌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도서관 복도로 뛰어갔다. 서진은 어두운 창밖을 보며 시헌의 말에 대답했다.
― 응. 도서관.
― 그럴 줄 알았다. 나도 학교야.
― 세미나 갔다며? 집에 안 가고 왜 학교로 와, 미쳤어?
서진은 중앙도서관 밑으로 지나가는 차를 흘긋댔다. 설마 시헌의 차일 리는 없겠지. 소매를 걷자 싸구려 시계가 나왔다. 휴대폰 대신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서진은 혀를 찼다. 새벽 네 시가 넘어 있었다.
― 너 설마 밤새 운전한 거야? 미쳤어?
― 얼굴 볼 거지? 나 10분이면 도착하니까 천천히 와.
― 하아, 알았어. 짐 챙겨서 내려갈게.
서진은 무리해서까지 온 시헌을 보고 일방적으로 집에 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반쯤 졸고 있기도 했고. 서진은 전화를 끊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자리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마침 바람을 쐬러 밖에 나갔던 인훈이 돌아와 짐을 챙기는 서진을 봤다. 하여튼 타이밍하고는.
“어디 가?”
“볼일 있어.”
“지금 새벽 4시인데?”
“그런 게 있어. 알 거 없잖아.”
“잠깐, 서진…!!”
서진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멘 뒤 급하게 중앙도서관을 나왔다. 막 도서관을 나오자 멀리 익숙한 헤드라이트를 켠 차가 다가왔다. 서진은 곧장 다가오는 시헌의 차 조수석에 탔다. 차 안에는 새벽 라디오 소리가 은은하게 났다. 재방송인 모양이었다.
서진은 가방을 뒷좌석에 던져 놓은 뒤 벨트를 맸다. 집에 가는 거겠거니 하고 말없이 앞유리 너머 도로를 보고 있던 서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잘못 봤나? 이내 서진은 몸을 약간 틀어 지나온 도로를 둘러봤다.
“너 방금…….”
비록 사람이 없긴 했지만, 신호를 어긴 시헌의 운전에 서진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새벽에는 더 위험하다며 벨트를 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안전에 대해 민감한 시헌이 신호를 어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시헌은 벨트를 매고 있지도 않았다. 설마 하는 서진의 중얼거림에 시헌은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새벽이잖아.”
“……그렇긴 한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순간 서진의 시선으로 초록색 숙취해소제가 눈에 들어왔다. 더는 차를 운전하면 한 소리를 할 예정이었지만 시헌은 얼마 가지 않아 인근 모텔에 차를 댔다. 또 모텔. 서진은 못 이기는 척 시헌과 함께 모텔의 방으로 들어왔다.
시헌은 방에 들어오기 무섭게 흐느적거리며 서진에게 안겼다. 시헌과 키스를 한 서진은 목 안쪽에서 느껴지는 진한 술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서진은 시헌을 침대 위로 앉힌 뒤 어깨를 흔들었다.
“너 술 마셨지?”
“좀. 지인짜 조금?”
“야! 박시헌! 너 미쳤어? 진짜 사고 나면 어쩌려고 그래!!”
“아아, 왜 소리 지르고 그래. 사고 안 났잖아. 새벽이었고.”
시헌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소리를 지르는 서진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숙취해소제를 본 순간부터 짐작은 했지만, 서진은 차라리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었다. 시헌의 변명이라고 할 것도 없는 변명에 서진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사고 나고, 안 나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미안해. 화났어?”
“어.”
“진짜 미안합니다.”
“…….”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시헌에 서진은 혀를 찼다. 세미나를 간다던 녀석이 왜 이렇게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셨는지 서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헌은 말을 더듬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서진아, 내가, 교수님이, 주시는데 어쩔 수가 없잖아. 그래서 좀만 마신 거야.”
“…….”
“진짜 쫌만 마셨어. 거절할 수가 없잖아. 내가, 입장이 있고.”
“…….”
“진짜 정말로 미안해요.”
머리가 침대 시트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는 시헌에 서진은 됐다며 시헌을 똑바로 일으켰다.
“다시는 그렇게 술 마시고 운전하지 마. 한 번만 더 그랬다가는 가만 안 둬.”
“넹. 그럴게요.”
대답한 시헌의 고개가 흔들리며 서진의 가슴에 닿았다. 말투도 그렇고, 서진은 조금밖에 마시지 않았다는 시헌의 말을 절대 믿지 않았다. 서진이 시헌을 눕히자 시헌이 곧장 서진의 몸을 잡아당기며 키스를 했다.
“너 역시 많이 마신 게…….”
“진짜 쪼금바께 안 마셔썽.”
“거짓말.”
“다시는 안 그럴게요. 응? 서진아?”
시헌이 서진의 목에 팔을 걸며 히히 웃었다. 웃는 녀석을 때릴 수도 없고 참으로 골치가 아팠다.
* * *
“……후우.”
모텔 안으로 진한 담배 향이 났다. 담배를 끈 서진은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창밖에서는 아침 햇살이 비췄다. 서진은 제 품에 안긴 시헌의 뺨을 잡아당기며 혀를 찼다.
“우린 왜 맨날 만나기만 하면 이러냐.”
“으음. 몰라. 강의 몇 시야?”
“이미 시작했어.”
“하하. 어쩌지?”
“2교시에 들어가야지 별수 있냐.”
모르는 거야 붙잡고 물어볼 사람은 많으니까 말이다. 시헌의 의학 지식이 본1, 2 수준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서진도 알고 있고. 재수가 없긴 하지만 기욱은 서진이 공부를 묻는 걸 제법 좋아하는 편이었다. 시헌은 제 뺨을 만지작거리는 서진의 손가락을 입안에 넣으며 핥았다. 고양이도 아니고.
“그럼 어차피 늦은 거 점심이나 먹고 갈까?”
“마음대로 하세요.”
창밖을 보니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온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 * *
“배신자 왔다.”
“야, 뭐가 배신자야?”
서진은 실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먼저 와 있던 몇몇 동기들이 오전 강의를 빠진 서진과 시한을 향해 불만을 표출했다. 그중에서도 시헌과 제법 친한 재혁은 노골적으로 언성을 높였다.
“시헌 형은 재시 한 개도 안 걸리고, 형은 한 개밖에 없잖아요. 살 만하다 이거예요? 강의도 빠지고.”
“세 개야.”
“어? 세 개예요? 하나가 아니라?”
“어. 점수 나오니까 3개더라.”
“에이, 그래도 3개면 그냥저냥 할 만하죠. 그럼 시헌 형은…?”
재혁은 아직 실습실에 들어오지 않은 시헌을 찾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시헌은 없고.”
“아아, 역시. 강의 시간에 그렇게 조는데, 이건 사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쵸? 서진 형이야. 솔직히 예과 때부터 맨날 공부하고 그랬으니까 뭐,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시헌 형은 진짜 오바예요. 역시 A 킬러. 그거 알아요? 교수님이 시헌 형한테 ‘너 사실은 학교 다시 다니는 거지?’ 하고 얘기했던 거요.”
“그거 전설이잖아.”
“한 번은, 내가 도대체 어떻게 공부하냐고 물어봤는데 뭐라 그랬는지 알아요? 그냥 본대요. 와, 나 진짜 그때 한 대 패고 싶었다니까요.”
“패지 그랬냐.”
서진은 실습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꼴이 엉망이라 화장실에 들렀다가 온다며 먼저 나간 시헌은 화장실에서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헌을 실컷 때리라는 서진의 말에 재혁이 손을 흔들었다.
“하하, 맞아 죽고 싶진 않아요. 시헌 형 학교 다닐 때 엄청 놀았다면서요? 막, 중학교 때 고딩들이랑 싸우고. 학교에서 소화기로 유리창 깨고 되게 유명했다던데.”
“야야, 무슨 소문이 그래?”
“아녜요?”
재혁의 말에 서진은 잠깐 머뭇거렸다. 확실히 시헌이 고등학생들이랑 싸운 적은 있다. 소화기로 유리창을 깬 건 아니고 정확히는 주먹으로 깼지만. 아. 그게 더 심한 건가. 사실 저게 다 상대 쪽에서 먼저 시헌을 건드려서 그렇게 된 것일 뿐 시헌이 놀거나 하는 거랑은 별개의 일이었다.
중학교 때도 시헌의 성적은 늘 TOP. 3안에 들었다. 중학교 때는 머리 좋았던 어린애가 그대로 대학에 넘어와서도 머리 좋은 대학생이 되었을 뿐이었다. 서진은 과장이라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야. 생각해 봐. 그 멍청한 얼굴에 그럴 리가 있겠냐? 교양 시간에 침 질질 흘리고 자는 녀석이 유리창은 무슨. 유리병도 못 깨겠다.”
“크읍. 시헌 형 하하, 자는 얼굴이 좀 바보 같긴 하죠. 뭐, 같은 중학교 동창인 형이 그렇게 말하면 그게 맞겠죠. 소문이라는 건 과장되기 마련이니까요.”
“누가 멍청하다고?”
서진과 재혁의 대화를 들은 시헌이 다가왔다. 왔으면 왔다고 말이라도 하든가. 머리를 정리하고 온 시헌은 서진에게 오렌지 주스를 내밀었다. 서진이 오렌지 주스를 반쯤 마시자 시헌은 자연스럽게 남은 주스를 마신 뒤 테이블 밑 쓰레기통에 버렸다.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음료수를 빠르게 나눠 마셨다.
“형 내 건요?”
“넌 니가 알아서 사 먹어.”
“와, 서진 형은 사 주고 난 안 사 줘. 차별이야.”
“차별은 무슨. 너랑 서진이랑 같냐?”
“안 같아요?”
“당연하지.”
“치사해. 근데 형 꼴이 왜 그래요?”
시헌과 아무렇지 않게 말다툼을 하던 재혁은 뒤늦게 시헌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새벽에 시헌을 만나기 전까지 학교에 있었던 서진의 복장은 어제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시헌은 서진에게 오기 전까지 세미나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서진도 재혁의 말을 들으며 시헌의 옷차림을 살폈다. 녹색 수술복 차림에 흰 가운. 그것도 실습용으로 구매한 것이 아진 진짜 H대 병원에서 사용하는 병원 가운이었다.
“빌렸어. 친척 형이 H대 내과 4년 차라.”
“와, 형 친척 형 H대 레지예요?”
“얘네 집 의사 집안이야.”
“아, 그러고 보니 큰형도 의사랬죠.”
재혁은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헌은 조금 긴 수술복을 접으며 가운을 바로 걸쳤다. 빌렸다는 말이 맞는지 가운에는 시헌의 이름이 아닌 시헌의 친척 이름이 써 있었다.
“그냥 가운만 빌리지 뭘 번거롭게 다 빌리고 그래?”
“나 그 정장 비싼 거라 안 돼.”
“그러니까 누가 새벽에 술 처먹고 찾아오래?”
“새벽에 술이 어쨌다구요?”
“어, 아냐 아무것도 아니다.”
서진은 끼어드는 재혁을 말리며 입을 다물었다. 예상대로 시헌의 뒤를 이어 들어온 동기들은 시헌의 차림을 보며 한마디씩 했다. 심지어 노골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고생하십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동기도 있었다. 씻고 오지 않아 눌린 머리 탓에 마치 이틀 잠 못 잔 레지던트 같은 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의하러 들어온 교수님 또한 시헌을 한동안 응시했다.
“야, 여기 번지수 잘못 찾은 의사가 하나 있는 것 같은데.”
교수의 말에 누굴 말하는지 알아들은 동기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정작 시헌은 제 얘기를 하는 줄도 모른 채 멍하니 서 서진을 쿡쿡 찔렀다.
“의사가 있어 우리 동기 중에?”
“너 말이야 너. 니 꼴 좀 봐라. 진짜.”
서진의 말에 시헌은 어쩔 수 없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정장 진짜 비싼 거라고.”
“알 게 뭐야.”
시헌은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 * *
강의가 거의 끝나 갈 무렵 서진은 다이어리를 펼쳤다. 서진의 다이어리 구석에는 붉은색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 있었다. 서진은 휴대폰을 열어 다른 날짜에 동그라미를 친 뒤 건너편에 앉아 있는 시헌을 바라봤다. 시헌은 프린트물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은 강의에 집중한 뒤 잠깐 쉬는 시간이 되었을 무렵 재혁과 몇몇 동기들이 서진에게 다가왔다. 서진의 책상에 살짝 걸터앉은 재혁은 시헌 쪽을 흘끗댔다.
“시헌 형 또 자네요.”
“야야, 둬라. 강의 열심히 들었잖아. 3일 동안 안 잤대.”
“뭐? 3일 동안? 시험 기간도 아닌데?”
재혁의 옆에 있던 동기가 서진의 중얼거림을 듣고 끼어들었다. 사실 서진도 오늘 막 통보하듯 들은 얘기라 별달리 할 말은 없었다.
“원래 저래.”
시험 기간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공부하지만, 시헌은 가끔가다가 삘이 받으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학구열을 보였다. 삼 일은 무슨. 시험 기간이 아님에도 한 달 동안 집에서 씻고 옷 갈아입을 때 빼고 중앙도서관에 박혀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삘이 와야 저렇게 하는 것인지 모든 스케줄이 시험에 맞춰져 있는 서진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시헌에게 시험과 공부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게 또 가끔은 정말 부러울 때가 있었다.
“하, 진짜 괴물 소리 들을 만하네.”
“괴물? 그게 무슨 소리야?”
동기의 중얼거림을 들은 다른 동기의 말에 서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서진의 물음에 동기가 허공으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어? 아, 별거 아냐. 왜 그때 수술복이랑 가운 빌려 간 이후에. 나도 잘은 모르는데, 시헌이 가운 빌려 간 친척이 병원 내에서 꽤 마당발이고 그런가 봐? 교수님들이랑 친한지 어쩐지. 어쨌든 그 뒤로 병원 의사들이랑 우리 과 선배들 사이에서 소문 다 났잖아. H대에 정신 나간 괴물이 하나 있다고.”
“…아.”
“오죽하면 졸업생 선배님들도 H대 병원 오면 자기네 과로 픽업해 가려 한다는 얘기까지 돌더라.”
“그 정도야?”
“진짜 장난 아냐. 엄청 살벌해. 뭐, 부모가 잘사니 바랄 것도 없겠지만 말이다.”
“네가 어떻게 알아?”
서진은 시헌의 집안에 대한 소문이 벌써 학교에 다 퍼졌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허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알고 자시고. 예과 때 형 카드 일만 해도 그렇고. 솔직히 그때 수술복 입고 온 것도 정장이 비싸서 그런 거라며? 야 도대체 얼마짜리 정장을 입어야 그렇게 되냐? 그리고 쟤 봐라. 입고 다니는 옷도 장난 없잖아. 저 패딩, 내가 며칠 전에 동생 옷 사 주면서 백화점에서 봐서 아는데 100만 원은 더 넘을걸.”
그가 잠들어 있는 시헌을 손가락질했다.
“…뭐, 그걸 베개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새끼를 두고 할 말은 아니긴 한데. 솔직히 박시헌 약간 신비주의 느낌 나지 않냐?”
“하하. 그건 그렇지.”
“아니, 중학교 동창인 니가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하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왜 그래?”
“아, 몰라. 교수님 왔다. 짜증 나.”
그는 귀찮다며 앞쪽에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서진은 시헌을 깨우려 했으나 시헌을 깨우기에는 어려운 자리에 있었다. 결국, 시헌은 한참에서야 조교에 의해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잠꼬대를 해 강의실에 웃음이 터진 것은 덤이었다.
서진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눈을 깜박이며 저를 보고 있는 시헌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왜일까? 서진은 동기들이 모르는 시헌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 요즘 들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부심이 들었다.
시헌이 사실은 얼마나 더 멍청하고, 단순한 녀석이고,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는지는 서진만의 비밀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헌의 모습을 혼자만 알고 있다는 것은 제법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평생 말할까 보냐.
식사를 마친 시헌은 서진을 대신해 계산했다. 보통 식사는 시헌이, 간식이나 먹을 거는 서진이 사고는 했다. 처음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점심은 자기가 계산하겠다는 시헌이 부담스러웠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오히려 돈이 많은 시헌이 점심을 사고, 상대적으로 돈이 적은 서진이 간식이니 음료수를 사니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서진은 계산을 마치고 카드를 지갑에 넣으려는 시헌의 팔을 붙잡았다. 이내 깜짝 놀란 서진이 손을 내려놓았다. 시헌은 카드를 지갑에 넣은 뒤 가게 밖으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담배를 입에 물은 채 시헌은 서진에게 붙잡힌 손을 만지작거렸다.
“내 팔에 뭐 묻었어?”
“그게 아니라……. 너 지갑. 바뀐 것 같다?”
서진의 시선이 시헌의 주머니에 있는 지갑에 닿았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시헌은 지갑을 꺼내 흔들었다.
“샀어. 며칠 전에.”
“어디서?”
“어? E백화점.”
“니가 산 거야?”
“선물 받았어. 선물 받았다고 해야 하나? 매형이 볼일이 있다고 하셔서 호텔까지 모셔다드린 적이 있거든. 마음에 든다고 하니까 다음 날에 누나 통해서 주더라.”
“그, 그렇구나.”
서진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헌 큰누나의 남편이라는 사람도 제법 돈깨나 있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백화점에서 샀다고 하는 지갑은 한눈에 봐도 이름 있는 브랜드의 지갑이었다. 시헌은 담배를 끈 뒤 소매를 걷어 시계를 툭툭 건드렸다. 시헌의 행동에 의문을 느낀 서진이 물었다.
“왜 그래?”
“아니, 요즘 들어 시계가 잘 안 들어서.”
서진은 툭툭 건드리는 시헌의 손목에 차인 시계를 바라봤다. 한동안 비싼 시계를 쓰는 것 같더니 다시 원래 시계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너 원래 쓰던 건 어쩌고?”
“아, 그거. 확실히 좋긴 한데 역시 부담스럽더라고.”
“얼마길래 니가 부담스러워해?”
“삼천.”
“차 한 대 값이네.”
“그치? 손목에 차 끌고 다니는 것 같았다니까. 어쨌든 별일 없으면 잘 안 써.”
시헌이 부담스러워할 정도면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싶었는데. 확실히 삼천이면 아무리 시헌이라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가격이었다. 시헌은 반쯤 고장 난 시계를 찬 손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한 번 고친 거긴 한데. 다음에 고장 나면 그냥 사는 게 빠르댔거든. 아아, 그래도 마음에 들었었는데.”
서진은 시헌의 팔에 차인 시계 구석에 적힌 브랜드를 눈으로 빠르게 체크했다.
* * *
“…아놔 씨.”
집에서 노트북으로 검색한 서진은 머리를 긁적였다. 시헌이 가볍게 쓰는 물건이라고 해서 가격이 쌀 거로 생각한 것 자체가 큰 오산이었다. 물론, 낮에 봤던 브랜드가 지난번 차 한 대 값에 따르는 정도의 시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학생이 사기에는 약간 부담이 있는 가격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취. 아오.”
바닥에 앉아 무릎에 담요를 말은 서진은 휴지를 뽑아 코를 풀었다. 시헌이 쓰는 브랜드 중 마음에 드는 시계를 선택한 서진은 가격을 보며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 대출해야 하나.”
의대생의 대출은 상대적으로 쉬운 편에 속했다. 아무리 대기업에 따르는 월급을 받는 서윤이라도 한 학기에 천만 원이 넘게 나오는 의대 학비를 댈 수는 없었다. 이미 받아 놓은 대출이 있으니 몇백쯤 더 땅겨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서진아!”
“우왁! 누나! 깜짝 놀랐잖아!”
난데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서윤에 놀란 서진은 급하게 노트북을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미안. 누나가 경솔했어.”
“…뭐?”
서진은 입꼬리를 올리는 서윤에 방 주변을 둘러봤다. 급하게 닫은 노트북하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휴지. 서윤의 상상에 서진은 얼굴을 붉혔다.
“그런 거 아니야!”
“서진이도 참. 그럴 수도 있지.”
“아 진짜 아니라고. 감기 걸려서 그런 거야!”
서진은 억울하다며 바닥에 떨어진 휴지들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린 뒤 엉망이 된 방을 대충 치웠다.
“근데 무슨 일이야?”
“아, 치약이 다 떨어져서. 치약 사 둔 거 혹시 있나 물어보려 했지.”
“치약 사야 돼. 나도 말하는 거 깜박했다.”
서진은 서윤과 함께 거실로 나왔다. 오늘은 모처럼 주말로, 서윤도 쉬는 날이었다.
“그래? 그럼 오후에 누나랑 사러 나갈까?”
“좋아.”
“그 전에!”
서윤은 서진을 붙잡아 바닥에 앉혔다. 뭘 하는 건가 싶던 차에 서윤은 서진의 목과 이마를 만졌다. 감기 때문인 것 같았다.
“목 부었네. 안 아파?”
“…….”
“서진아.”
“좀 아파. 아, 진짜 근데 금방 나아. 괜찮아.”
“안 돼. 아직은 의사가 아니니까 누나 말 들으세요! 알겠지? 잠깐만 기다려.”
서윤은 방으로 들어가 상비약을 가져왔다. 서윤은 약과 물을 서진에게 내밀었다. 왠지 어렸을 적 병원에 가기 싫다고 징징대던 시헌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약 먹고. 내일 꼭 병원 가 봐.”
“약 먹으면 괜찮아져.”
“강서진!”
“아, 알았어. 갈게.”
“내일 병원 갔다가 누나한테 문자해.”
서진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은 약을 넘긴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 마신 물컵을 챙겨 바닥에서 일어났다.
“옷 입고, 누나랑 나가자.”
“응.”
서진도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 * *
백화점 건물 밖으로 나온 서진은 휴대폰을 열었다. 시헌에게 부재중이 와 있었다. 서진은 시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이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헌이 전화를 받았다.
― 전화했었어?
― …….
― 야, 박시헌?
― 종일 전화도 안 받고 뭐 했어.
서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제야 휴대폰 너머에서 시헌이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딱 봐도 삐진 것 같은 말투였다.
― 그게……. 미안. 휴대폰 보는 걸 깜박했어.
― 밖이야?
서진의 휴대폰 너머의 소란스러움을 느낀 시헌이 되물었다. 마침 횡단보도를 건너는 서진은 이어폰을 꼈다.
― 응. 이제 집에 들어가려고. 근데 왜 전화했어?
― 그냥. 전화하면 안 돼?
― 안 된다고 한 적 없어. 넌 어딘데?
― 부산.
횡단보도를 건너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간 서진은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다 말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 부, 부산엘 왜 가?
― 하아, 왜겠어?
― 너네 집도 대단하다. 넌 진짜 재시 없을 만도 해.
― 재시가 없는 건 내가 잘난 거야.
― 재수 없는 자식.
― 하, 난 이제 내가 의사인지 의대생인지 헷갈려.
서진은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와 개찰구를 지났다. 마침 오는 지하철에 몸을 실은 서진은 의자 대신 지하철 한쪽 벽에 몸을 기댄 채 통화를 계속했다.
― 집에선 의사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너 교수님 사이에서 리틀 닥터라고 불리는 건 알긴 아냐?
― 그거 완전 억울해. 아직 국시도 안 봤다고 난.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시헌의 말투에 서진은 큭큭대며 웃었다. 시헌의 재시가 없다는 말에 집안에서도 거는 기대가 크긴 큰 모양인지 시헌은 방학 내내 여기저기 친척들을 쫓아다니는 처지가 되었다. 오늘은 부산, 내일은 대전. 뭐 거의 이런 식이었다.
― 내일모레 올라가는데, 너 보고 싶어.
― 내일모레 몇 시에?
― 오후 2시쯤에 서울역 도착해. KTX 타고 갈 거야.
시헌의 말에 서진은 잠시 날짜를 계산했다. 오늘이 금요일이니 내일모레는 월요일이었다.
― 나, 내일모레는 힘들 것 같은데.
― 왜?
― 그게…. 누나랑 어디 가기로 했거든. 누나 그날 모닝 근무라.
― 음. 그래? 내가 화요일은 힘들고. 수요일은 괜찮은데 수요일은 안 돼?
― 수요일은 나도 좀…….
영 시간이 맞지 않았다.
― 하아, 알았어. 그럼 너 시간 되는 날 말해 봐. 최대한 맞출게.
― 화요일 날 오후에 괜찮아.
― 알았어. 그럼 그냥 화요일 날 오후에 보자,
결국, 시헌이 서진의 시간을 맞추는 걸로 합의를 본 뒤 전화를 끊었다.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가 싶은 기분에 서진은 뺨을 긁적였다. 마침 집 근처 지하철역에 도착한 서진은 지하철에서 내렸다.
* * *
시헌은 거실을 쿵쿵거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아오. 씨, 차 키 어디 간 거야?”
서진을 보러 가야 하는 시헌은 차 키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거실에 던져 둔 것 같은데 보이지 않았다. 거실 소파와 테이블에는 기욱의 노트북과 서류들이 있었다. 기욱은 종종 거실에 나와서 작업을 하고는 했다. 거실 테이블에 어질러져 있는 물건과 노트북이 기욱의 것이라는 걸 보며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댔다.
안쪽 욕실 너머로 물소리가 들렸다. 시헌은 차 키를 찾기 위해 기욱의 노트북과 서류들이 쌓여 있는 유리 테이블을 뒤졌다. 서류 밑을 들자 시헌의 차 키가 나왔다. 차 키를 챙긴 시헌은 바닥으로 내려놓은 노트북과 서류를 제자리로 올렸다. 그 과정에서 시헌은 노트북 화면에 열린 파일을 흘겨봤다. 파일이라고 해야 할지, 근무 스케줄이라고 하는 편이 맞았다.
시헌은 오늘 날짜와 시간을 확인하며 욕실 문 너머에 있을 기욱을 바라봤다. 이 스케줄대로라면 기욱은 분명 병원에 있어야 했다. 허나 기욱은 집에 있었다. 땡땡이인가? 싶었지만 시헌이 알기로 기욱은 어제 밤새 병원에 있었다. 정작 기욱이 병원에 있었던 시간은 오프 표시가 되어 있었다. 뭔가 미묘하게 스케줄이 어긋나 있다는 걸 눈치챈 시헌은 엑셀파일명을 눈여겨봤다.
[박하연 미친 ㅡㅡ ]
집안일이나 가족 모임 스케줄은 전부 하연이 관리를 하고 있었다. 부모님도 의사인 데다 집안 특성상 개인플레이에 익숙해져 있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모일 수 있는 날이 1년에 하루도 채 안 되기 때문이었다. 요즘 들어 하연과 방학 대부분을 함께하는 시헌은 굳이 일정을 보낼 필요가 없지만, 기욱은 하연에게 일정을 보내라는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가족 식사 외에 친척 모임에 나가는 것을 귀찮아하는 기욱이 하연에게 보낼 스케줄을 조작했다는 것을 눈치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야, 박시헌 너 거기서 뭐 해?”
“어? 아. 차 키 때문에.”
언제 물소리가 끊긴 건지 시헌은 샤워를 하고 나온 기욱에 흠칫 놀랐다.
“아. 차 키. 서류 밑에 있던데 찾았어?”
“응.”
기욱도 서류 밑에서 본 모양인지 테이블 위에 있는 서류를 살짝 들춰 보였다. 시헌은 손에 있는 차 키를 흔들었다.
“나 나갈게.”
“어, 그래라.”
기욱은 볼일을 보러 나가는 시헌을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털썩, 하고 소파에 주저앉아 노트북을 만졌다.
* * *
“고생하셨습니다.”
“어. 고생했어.”
유니폼을 갈아입은 서진이 인사를 마친 뒤 가게 밖으로 나왔다. 백화점 내 대형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이었다. 마침 출근한 여학생이 서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제 막 20살이 된 대학생이라 그런지 아직 어린애티가 풋풋하게 났다. 조금 일찍 도착한 그녀가 서진에게 다가왔다.
“어! 서진 오빠! 오늘 오전조셨어요?”
“응. 지금 퇴근해. 넌 지금 출근하는 거지? 고생해.”
“아. 네. 근데 혹시 오빠 주말에 시간 돼요?”
“주말에? 주말은……. 봐야 돼.”
알바를 시작하고 난 이후 알바 스케줄과 개인 스케줄이 겹친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일정을 봐야 한다며 머뭇대는 서진에 그녀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시간 되면…….”
“아, 미안. 전화 왔다.”
서진은 잠깐 손을 들고 그녀의 말을 끊으며 휴대폰을 어깨에 걸친 채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아니. 금방 가. 거의 다 도착했어.”
“아, 오빠 저 일하러 가 봐야 돼서. 들어갈게요. 내일 봬요.”
너무 오래 밖에 있을 수 없었던 그녀가 결국 먼저 인사를 한 뒤 스태프룸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가고 가게를 나온 서진은 휴대폰을 바로잡았다.
― 박시헌? 뭐냐, 대답 안 해?
― 어어. 응. 빨리 와.
시헌과 전화를 끊은 서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백화점 아래로 내려갔다. 백화점 주차장 바로 건너편 횡단보도에 시동 중인 시헌의 차가 눈에 들어왔다.
서진은 파란불이 되자 건너편에서 무단 횡단을 한 뒤 빠르게 조수석으로 들어갔다. 이젠 안전벨트를 매는 게 습관이 된 서진은 차에 타자마자 곧장 벨트부터 맸다. 벨트를 매는 서진을 본 시헌이 서진의 머리를 손가락질했다.
“너 왁스칠 안 하고 다녔잖아.”
“아. 하하, 그냥 좀 해 볼까 해서. 이상해?”
“설마.”
서진은 어색하게 세운 머리끝을 만지작거렸다.
* * *
시헌은 방 안에 들어오기 무섭게 서진의 허리를 안으며 침대로 이끌었다. 시헌의 키스 세례에 서진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방 안을 둘러봤다.
“오늘 무슨 날이야? 호텔까지 오게?”
키스는 좀 나중에 하자며 서진은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소파 한쪽에 잘 올려 두었다. 아무리 그래도 잠바도 벗지 않고 무작정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저녁도 아니고 말이다. 서진의 말에 시헌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냐.”
“아니면 뭔데?”
“내가 인터넷에서 봤는데. 여기 전망이 장난 아니래.”
“전망? 너 세미나 가서 그런 것만 찾아보는 거 아냐?”
“아니라니까.”
시헌은 억울하다며 커튼을 걷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화려한 전망에 서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위치가 좋은 호텔이라는 건 알았지만, 창 너머 전망은 서진의 생각 이상이었다. 서진은 시헌이 커튼을 걷기 무섭게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유리벽에 얼굴을 기댔다.
“밤 되면 더 예쁘대. 나 어때?”
시헌은 칭찬을 원하는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였다. 서진은 시헌에게 키스를 하며 웃었다.
“참 잘했어요. 진짜 예뻐.”
“일주일하고 3일 만이잖아.”
“서로 바빴잖아.”
“아아, 더 바쁘면 어쩌지.”
시헌과 서진은 침대 위로 올라갔다. 본격적으로 집안 행사와 세미나, 가끔 친척의 병원 알바 대타를 나가기 시작한 시헌과 더불어 본과에 들어가고 난 이후 서진도 시헌 못지않게 개인 스케줄이 많았다. 시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가끔 스케줄이 어긋나면 정말 답이 없었다.
“더 바쁘면 어쩌지? 그땐 정말 외로워서 죽을지도 몰라.”
“앞으로 한 달은 안 외로울 정도로 하면 되지.”
“그거 좋은 생각 같아.”
시헌은 큭큭대며 서진의 옷을 천천히 벗겼다. 얼마 만의 섹스인지 서진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진과 시헌은 서로의 입술을 탐하며 서로의 페니스를 문질렀다. 아래가 부풀어 오르는 감각과 함께 점점 더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흐으… 하으. 잠깐…! 하으으읏!”
“후, 먼저 갔네.”
시헌은 먼저 사정을 한 서진을 보며 큭큭 웃었다. 시헌은 손에 묻은 정액을 서진의 안쪽으로 약간 흘렸다. 질척한 게 잘 들어가진 않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시헌은 천천히 손가락을 넣으며 서진의 안을 꼼꼼히 넓혔다. 젤이 없다는 걸 아는지 평소보다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흐읏, 하응…으응….”
시헌의 손가락이 안을 찌를 때마다 서진의 몸이 흔들리며 신음을 흘렸다. 오랜만의 섹스라 그런지 두 사람이 흥분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헌은 서진의 안에 손가락을 넣은 채 몸 구석구석을 핥아 나갔다. 쪽쪽거리는 소리가 묘하게 귀에 거슬렸다.
“으흐, 하. 너… 오늘따라 유독 심한 것 같다?”
서진이 작작하라며 시헌을 밀어냈지만, 시헌은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헌은 서진을 허리를 살짝 든 뒤 손가락을 빼냈다.
“하으. 응… 으읏…!!”
시헌은 바짝 날이 선 서진의 등을 손끝으로 쓸며 페니스 끝을 살짝 집어넣었다. 끝까지 밀어 넣지 않는 것은 서진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젠 서진이 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진은 애매할 정도로 걸친 페니스에 숨을 고르며 아래를 조였다.
“하응, 으으… 응. 시, 으읏… 헌아.”
“…하, 왜?”
“그냥… 읏 넣어. 으읍….”
서진은 다가오는 시헌과 입술을 맞췄다. 일하고 난 뒤라 몸이 피곤해서 그런 건가? 서진은 애가 닳는 섹스보다는 조금 더 격렬하게 하고 싶은 기분이 강했다.
“후, 자기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진짜… 흐…!”
“하응… 응….”
“미치지.”
서진의 치골 부위를 있는 힘껏 잡아당긴 시헌은 페니스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훅 하고 들어오는 페니스에 서진의 머리가 살짝 들렸다. 시헌은 엎드린 상태인 서진의 위로 올라탄 뒤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으응. 응….”
시헌이 안을 찌를 때마다 서진은 정신없이 신음을 흘렸다. 시헌은 서진의 몸을 옆으로 튼 뒤 한쪽 다리를 살짝 벌려 다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시헌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짐과 동시에 밑에서부터 격한 신음이 들렸다.
“하으. 하. 후우. 서진아.”
“응. 으읏… 흣… 흐으응….”
시헌은 서진의 안에 페니스를 박은 채 몸을 반쯤 일으켰다. 서진의 몸을 안은 시헌은 서진을 소파 쪽으로 내던졌다.
“하으. 왜… 흐윽!”
“모처럼 호텔이잖아.”
어차피 둘밖에 없었고, 호텔의 고층 방은 꽤 넓었다. 시헌은 서진의 다리를 소파 한쪽에 걸친 채 거침없이 안을 헤집었다. 시헌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호텔의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서로의 살이 맞닿는 소리와 누구의 신음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격한 신음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하, 읏. 서진, 서진아….”
시헌은 페니스를 밖으로 빼내며 엎드려 있는 서진의 등 위로 사정했다. 대충 테이블에 있는 휴지로 서진의 등 위를 닦은 시헌은 서진을 소파 앞에 놓인 유리 테이블에 눕힌 뒤 다리를 벌렸다.
“잠깐 이거 너무 노골… 하으… 적이잖아….”
“괜찮다니까. 그러지 말고 다리 잡아 봐.”
“내가 안 괜찮… 하으으윽!”
시헌은 서진의 양쪽 다리를 높게 올린 뒤 다시 서진의 안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테이블 위에 있던 유리에 등이 맞닿아 끼익거리는 소리가 났다. 서진은 제 안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는 시헌의 목에 팔을 살짝 걸어 이마를 맞댔다.
“이… 읏. 욕구불만 자식.”
“너도 마찬가지, 후… 잖아.”
“하응. 응….”
서진은 시헌의 말을 차마 부정하지 않았다.
* * *
시헌은 이불을 덮은 채 침대에 엎드렸다. 분명 오후였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밤이 되어 버렸다. 저녁을 먹는 것도 잊은 채 섹스를 한 건 좀 심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 옆에 있는 무드등의 불빛이 불이 꺼진 넓은 호텔 방을 제외한 침대를 비췄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시헌은 눈치를 보며 옆에 있는 서진을 힐끗댔다.
“서진아, 너 아까…….”
“…….”
“서진아?”
시헌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잠들어 있는 서진의 앞으로 이리저리 손을 흔들었다. 뭐가 그렇게 피곤했던 걸까? 서진은 색색 코까지 골며 세상모르고 잠이 들어 있었다. 서진을 바로 눕힌 시헌은 홀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서진과 통화를 했을 때, 시헌은 분명 서진과 어떤 여자가 같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과의 특성상 남자들도 연애를 안 하고 여자들도 연애를 안 한다. 혹은 CC이거나. 분명한 건 서진과 CC를 탈 기미가 보인다면 시헌이 모를 리가 없었다. 시헌도 자야 하나 고민하며 무드등 근처로 손을 뻗었다. 마침 선반 위에 있던 서진의 휴대폰에서 불빛이 났다.
“…….”
문자가 온 서진의 휴대폰을 본 시헌은 잠이 들어 있는 서진을 흘끗댔다. 시헌은 슬쩍 휴대폰을 열었다. 열자마자 보이는 잠금화면에 서진의 눈치를 본 시헌은 익숙한 번호를 쳤다.
0514.
중학교 시절부터 변하지 않은 서윤의 생일이었다. 잠금화면이 풀리자 시헌은 아직도 이 잠금번호를 사용하느냐고 중얼거리며 서진에게 온 문자를 확인했다.
「근무 스케줄 수, 목, 금」
시헌은 천천히 기다란 장문의 문자를 내려다봤다. 방학이라고는 하지만 자신과 달리 특별한 일이 없는 서진이 이렇게 바쁠 리가 없었다. 서진은 요즘 들어 바쁘다는 이유로 자세한 사정을 말하지 않고 얼버무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알바를 하고 있었군. 시헌은 그제야 말을 걸어온 여자도, 안 하던 왁스칠을 한 서진의 머리도 이해가 간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안 자?”
반쯤 잠이 들었던 서진은 휴대폰 불빛과 무드등에 눈이 부시다며 이불을 덮어썼다. 시헌은 서진의 휴대폰을 뒤로 숨긴 채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잘 거야.”
“으으, 너도 얼른 자. 잘 자. 빨리…… 자라….”
서진은 몸을 틀며 불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서진의 문자를 훔쳐본 것도 잠시, 시헌은 그런 서진의 모습이 너무 귀엽다는 생각에 제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찰칵 하고 셔터음이 났지만 잠이 든 서진은 시헌이 사진을 찍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엉망으로 잠이 든 서진의 사진을 확인한 시헌은 혼자 큭큭대며 다시 서진의 휴대폰을 열었다. 스케줄 말고도 다른 문자가 한 통 더 와 있었다.
“흠, 그렇다. 이거지?”
시헌은 익숙하게 한 손으로 문자를 쳤다.
「누나 나 이제 세미나 안 갈 거야.」 오후 9:24
「우리 시헌이 몇 대 맞을래? ^^」 오후 9:25
「내일 본가 갈 테니까 듣고 말해.」 오후 9:26
「뭔데.」 오후 9:27
「기욱 형 스케줄 거짓 보고한 거 앎?」 오후 9:28
「진짜면 박기욱 뒤졌고, 세미나 안 갈려고 누나한테 거짓말하고 기욱이 파는 거면 너도 뒤짐?」 오후 9:30
「true. 누나 병원 NS 닥터 잡고 물어봐 봐. 진짜 레알임.」 오후 9:32
「알아봄. 일단 내일 저녁에 본가 와.」 오후 9:34
시헌은 대충 알겠다며 답장을 보낸 뒤 휴대폰을 닫았다. 약간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펼쳐 놓은 기욱이 잘못한 일이었다.
* * *
알바를 마친 서진은 집에 들어왔다. 서진이 집에 들어오기 무섭게 방 안에 있던 서윤이 거실로 나왔다.
“어, 누나. 출근한 거 아니었어?”
“내일 데이로 바뀌었어. 그보다 강서진, 너 머리는 왜 그래?”
팔짱을 낀 서윤은 시헌의 차림을 훑었다. 서윤은 요즘 들어 서진이 늦게 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서윤이지만 그 정도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서진에게 관심이 없지는 않았다. 관심의 문제일까 이건 같이 사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눈치를 챌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게 저기…….”
“너 요즘 뭐 하고 다녀?”
“누, 누나. 뭐가?”
“너 공부하러 가는 거 맞아?”
그렇게 묻는 서윤의 말투에서는 이미 불신이 묻어나 있다는 것을 서진도 알았다. 서진은 서윤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서윤의 말에 서진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진의 말을 들은 서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르바이트?”
“으. 응.”
“얼마나 됐어?”
“…….”
서윤의 물음에 서진이 눈치를 살폈다. 화를 낼 거라는 서진의 예상과 달리 서윤은 오히려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아, 난 또 뭐라고.”
서윤은 다리를 꼬며 거실 한쪽에 있는 작은 소파에 걸터앉았다. 서윤은 거실에 서 있는 서진에게 와 보라며 소파 밑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서진이 서윤의 앞에 앉았다.
“알바는 언제부터 한 거야?”
“방학 시작하고 나서부터 했어.”
“하아, 정말이지. 난 또 뭐라고. 대학 가서 갑자기 이상한 애들이랑 잘못 어울리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누나 내가 애야?”
“애지. 그럼.”
서진은 차마 서윤의 그런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알바하면 알바한다고 누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화 안 내?”
“화내야지!! 다음부터 그런 건 꼭 말하고 해!”
서윤이 서진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건 화라고 하기보다는 훈계에 가까운 말투였다.
“그게 다야?”
“그럼, 뭘 더 화를 내야 되는데?”
“알바하는 거…….”
“그게 뭐 어때서? 성인이잖아. 하고 싶으면 하고 말면 마는 거지.”
“…….”
“우리 서진이도 나름 생각이 있어서 하는 걸 테니까. 누난 서진이 결정을 믿어.”
서윤은 웃으며 서진의 등을 토닥였다. 어쩌면 서진은 제가 너무 서윤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기왕이면 과외 같은 거 했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안 알아본 건 아닌데……. 뭔가 가르치는 건 잘 못하겠더라고.”
“하긴, 그럴 수 있어. 아, 대신 알바는 진짜 딱 방학 때만 하는 거다? 학비는 전부 못 대 줘도 우리 서진이 용돈만큼은 제대로 줄 테니까. 유급 같은 거 하지 말고.”
“당연하지.”
서진은 그럴 일은 절대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시험 기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죽어라 공부하는 것은 서진 스스로를 위한 일보다는 서윤을 위한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서윤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알고 있는 서진은 서윤을 위해서라도 이를 악물고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서진이 착하네.”
몸을 살짝 일으킨 서진은 서윤의 품에 안겼다.
* * *
막 출근한 서진은 홀로 나와 유니폼을 바로 했다. 본인의 위치로 가 일을 하려던 찰나 안쪽에서 매니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진이 여자 매니저를 향해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를 했다. 그녀는 서진에게 용무가 있는 듯싶었다.
“서진아, 잠깐만 이쪽으로 와 봐.”
“네? 무슨 일 있어요?”
서진은 매니저를 따라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서진은 오늘 주방 식기 담당이 아니었다. 스케줄이 바뀌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간 서진은 주방에 있는 낯이 익은 사람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낯이 익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매니저를 따라간 주방 안쪽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시헌이었다. 그녀는 깔끔하게 유니폼을 잘 차려입은 시헌을 서진에게 소개했다.
“오늘부터 같이 일하게 된 친군데, 너랑 같은 학교라고 하니까 대신 많이 좀 알려 줘.”
그녀의 말에 서진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
시헌은 모르는 척 웃으며 서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헌의 인사를 본 그녀가 시헌과 서진 두 사람을 바라봤다.
“둘이 아는 사이야?”
“친해요.”
“어머, 그래? 잘됐네. 그럼 교육받고 서진이랑 같이 일하게 해 줄게.”
“감사합니다.”
“아, 서진인 오늘 밖에 4번 홀로 가면 돼.”
더 용무가 없는 듯 나가 보라는 그녀의 말에 서진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주방을 나왔다. 분명 비밀로 했을 텐데. 대체 알바를 하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 * *
“…….”
“…….”
교육을 마치고 서진과 같은 테이블 담당이 된 서진은 시헌과 나란히 한쪽 벽에 서 있었다. 구석 자리라 그런지 아직 사람들이 완전히 차지 않아 상대적으로 할 일은 적었다. 돌아다니는 직원들의 눈치를 슬쩍 본 서진이 한숨을 쉬며 입을 뗐다.
“너 왜 여기 있냐.”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시헌이 몸을 틀어 서진을 노려봤다. 불만이 가득한 시헌의 표정에 서진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누구 때문에 서진이 알바를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시헌은 저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어떻게 말하겠는가. 시헌의 시계를 사 주기 위해 알바를 시작했다고.
“내가 말 안 했다고 너까지 따라 들어올 필요는 없잖아.”
“야, 강서진. 너 진짜…….”
“저기요.”
마침 아기를 데리고 온 엄마가 알바생을 찾으며 손을 들었다. 제법 일에 익숙해진 서진은 시헌보다 한발 앞서 문제가 있는 테이블로 뛰어갔다. 문제를 대처하는 서진의 모습을 본 시헌은 후우,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일하는 서진도 나쁘지 않을지도.
* * *
이제 막 초보인 시헌과 달리 서진은 시헌보다는 이곳저곳에서 찾는 사람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홀이 한가한 탓에 서진은 주방과 홀을 왔다 갔다 하며 일을 했다. 서진은 접시를 나르고 돌아와 쌓인 접시를 닦는 것을 도와줬다. 시헌과 마찬가지로 오늘 온 알바생이 접시를 닦는 속도가 느려 밀린 탓이었다. 옆쪽에서 컵을 닦고 있는 다른 여자 알바생이 서진을 불렀다.
“서진아.”
서진이 몸을 틀자 그녀가 천 밖의 홀을 손가락질했다.
“친구라며, 새로 온 애. 의대생이라는데 진짜?”
“응.”
그녀의 관심에 서진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이도 같은 과야.”
“야, 박시헌 너 언제 들어온 거야?”
“방금. 매니저님이 홀 바쁘다고 나오래.”
여자와 서진의 대화를 들은 걸까? 시헌은 퉁명스럽게 매니저의 말을 전달한 뒤 다시 밖으로 나갔다. 서진은 그런 시헌이 얄밉기만 했다.
“아오. 저걸 진짜.”
“둘이 같은 과였어?”
“하하. 응.”
일부러 과는 비밀로 했건만. 서진은 닦은 접시만 급하게 챙겨 홀로 나왔다.
* * *
“너 짜증 나.”
저녁 알바가 끝나고 사람이 가득한 엘리베이터 구석에 머리를 기댄 서진이 중얼거렸다. 자연스럽게 서진의 머리가 시헌의 어깨에 닿았다. 직원용 엘리베이터인 데다 시간이 늦어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내가 뭘.”
“너 첫날이잖아.”
“응, 그런데.”
“근데 왜 나보다 일을 잘하는 건데.”
서진은 몸을 틀어 시헌의 어깨 넘어 엘리베이터 벽으로 손을 댔다.
“이 자세 좋은데?”
“야, 나 농담하는 거 아니거든?”
띵 하고 난데없이 중간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다른 층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친 여자 두 명이 머뭇거리자 서진은 헛기침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시헌은 1층 대신 B2층을 눌렀다.
“차 태워 줄게.”
“빨리 버튼 눌렀으면 됐잖아.”
“음. 그것도 그렇네.”
여자 두 명이 내리고 뒤이어 엘리베이터는 B2층에서 멈췄다. 서진은 건너편에 있는 시헌의 차에 다가가 조수석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빨리 열어. 나 피곤해.”
“야. 이거 비싼 거야.”
“어쩌라고.”
누구 차인지 원. 반대편으로 돌아 운전석의 문을 연 시헌은 조수석 쪽의 문을 열었다. 서진은 문이 열리기 무섭게 조수석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익숙하게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올라가는 시헌은 서진을 흘끗거렸다.
“알바, 도대체 왜 하려는 거야?”
서진을 따라 무작정 알바를 지원하긴 했지만 정작 시헌은 서진이 왜 시간을 쪼개 가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특히 공부에 예민한 서진이기에 더더욱.
“그런 게 있어.”
“누나 생일도 아니잖아.”
“그냥 용돈 좀 벌려고 하는 거야. 누나한테 계속 용돈 받는 것도 눈치 보여서.”
“흐음, 그래? 언제까지 할 건데?”
“오래 할 건 아냐. 방학에만 잠깐 할 거야.”
“흐음, 그래.”
서진은 서윤의 얘기를 하면 시헌이 조용히 넘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헌은 집안사는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헌은 서진의 집 방향으로 차를 틀었다.
“집에 데려다줄게.”
형식적인 시헌의 말에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눈을 붙였다. 알바를 하는 백화점은 지하철로도 몇 정거장 걸리지 않은 곳이라 차로는 더 금방이었다. 집 근처의 익숙한 간판들이 눈에 보일 무렵 서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시헌의 차는 골목 한쪽에 정차된 상태였다. 핸들을 붙잡은 시헌은 고개를 살짝 돌려 서진을 바라봤다.
“그래도 나한테 말 안 한 건, 좀 서운했어.”
“…미안해.”
시헌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많이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서진은 그냥 시헌이 신경 쓸까 봐 비밀로 하고 빨리 선물을 줄 생각이었지 시헌의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절대 없었다.
“알바한다고 뭐라 하진 않잖아.”
“내가 여자랑 있을 때 인상 구겼으면서.”
일의 특성상 홀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다. 그래서 힘을 쓰는 일에는 종종 남자인 서진이 불려 가기도 했다. 몇 번인가 여자 알바생들을 도와줄 때마다 서진은 시헌의 따가운 시선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주제에 뭐가 알바를 한다고 뭐라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오늘 시헌의 행동은 방금 한 말과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사실 그런 이유로 시헌에게 말을 하기 꺼렸던 것도 있었다.
“그건 그거. 이건 이거.”
“하, 뭐가 다르다는 거야.”
“달라.”
시헌은 천천히 차를 골목 안쪽으로 댔다. 서진이 한숨을 쉬며 벨트를 푼 뒤, 차에서 내렸다. 시헌은 차에서 내린 서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연락하고.”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