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4 태풍의 눈
“아오.”
중앙도서관에 있는 서진은 한숨을 쉬며 습관처럼 캔 커피를 뜯었다. 사람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도서관 구석 자리에는 두꺼운 서적들과 서진이 사 둔 캔 커피들이 쌓여 있었다. 순식간에 커피 하나를 비운 서진은 다시 손을 뻗었다.
하도 많이 먹어서 어느 커피가 마신 것인지 안 마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부 다 빈 깡통이었군. 캔 커피를 사러 가야겠다는 생각에 서진은 다 마신 빈 캔을 챙긴 뒤 복도로 나왔다. 앞사람이 자판기를 이용하는 사이 손에 있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친척의 병원 일로 당직을 서는 시헌이 전화를 할 리는 없었다. 사실 이제 예2인 시헌이 할 수 있는 거라고 해 봤자 오더리 일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 일이라도 병원에서 일하며 다른 의사들에게 조금씩 배우는 지식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시헌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일을 나가는 것도 서진은 이해가 됐다.
“친척 병원이라더니 H대 분원이잖아.”
서진은 대학병원을 무슨 동네 병원처럼 말하는 시헌이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서진은 이럴 때 시헌과 자신이 사는 세계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휴대폰을 열었다.
「뭐 하고 있어?」 오전 2:43
기욱이었다.
안 자나, 이 사람.
서진은 5천 원짜리를 집어넣은 뒤 캔 커피를 마구 뽑았다. 쿵쿵대며 떨어지는 캔 커피에 근처에 있던 학생들이 신기하다는 듯 서진을 바라봤다. 캔 커피를 가지고 돌아온 서진은 기욱에게 답장을 보냈다. 무시해도 상관은 없지만, 기욱의 문자는 대개 이쪽 상황을 알고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시험 기간이잖아.
「공부 중이에요.」 오전 2:46
서진은 새 캔 커피를 뜯은 뒤 그 자리에서 반쯤 마셨다. 마저 집중하려던 찰나 휴대폰에서 또다시 진동이 울렸다. 책상 아래로 내려다보니 역시나 기욱이었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서진은 짜증을 내며 휴대폰을 들고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 아, 왜요?
― 나와.
― 어딘데요?
― 근처야. 다 챙겨서 나와.
기욱의 말에 서진은 괜히 도서관 창밖을 바라봤다. 지나가는 차가 기욱의 차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예민하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이 되면 조금은 신경을 써 주나 싶었지만, 여전히 박기욱은 박기욱이었다.
서진은 기욱이 여전히 자신을 동등한 입장이거나 성인으로 봐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요즘 들어 실감했다. 나이 차이 때문에 더 그런가. 기욱에게 있어서 서진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어린애였다. 한숨을 내쉰 서진은 벽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 금방 내려갈게요.
시험 기간에 괜한 일로 트러블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서진은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는 이제 막 산 뜯지 않은 캔 커피들이 있었다. 서진은 캔 커피를 가방 안에 구겨 넣은 뒤 무거운 배낭 가방을 들고 중앙도서관 1층으로 나왔다.
건너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기욱이 서진을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중앙도서관에 있는 것은 어떻게 안 걸까. 서진은 기욱이 정말 저에게 CCTV라도 단 게 아닐까 싶은 기분이 들었다. 가방이 무거웠던 서진은 곧장 기욱의 차 뒷좌석에 가방을 내던졌다.
서진의 가방의 무게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시트가 가라앉았다. 사실 일부러 막 던진 것도 있다. 어이가 없어 하는 기욱의 표정을 고소하다는 듯 노려본 서진은 앞좌석에 벨트를 매고 앉았다.
* * *
“하으윽!
“읏….”
끈질겨. 바로 며칠 전에 시헌과 섹스를 한 탓인지. 아니면 한동안 기욱과 섹스를 안 한 탓인지 서진은 기욱과의 섹스가 무척이나 어색하고 불편했다. 죄를 짓는 기분도 들고. 언제나처럼 중앙도서관에 있다는 거짓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기욱과 섹스를 할 때면 쾌락 이상으로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헌이 알면 얼마나 실망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냥 스스로가 참 비참해졌다.
“강서진, 울어?”
“읏… 흐윽. 우는 거 아니거든요? 하아, 빨리해요.”
서진은 저도 모르게 흘린 눈물을 소매로 닦아 냈다. 단순히 몰아붙여 그런 건 줄 알았던 기욱은 서진의 눈물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서진의 몸을 뒤로 돌린 기욱은 서진의 안을 거칠게 박아 왔다.
기욱의 손바닥이 서진의 엉덩이를 가볍게 때렸다. 기욱의 행위에 서진은 조용히 중앙도서관을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시헌과의 섹스 때문이 아니었다. 끝이 나지 않을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는 섹스에 서진은 기욱이 평소보다 거친 것이 기분 탓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기욱은 병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면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서진을 찾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기욱 정도의 스펙과 얼굴이면 어딜 가나 하룻밤의 하룻밤을 원하는 사람은 많았다. 인형처럼 안기는 서진보다 기욱이 원한다면 진짜 연인처럼 섹스할 수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매번 한결같이 자신을 찾는, 아니 자신을 원하는 기욱을 서진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서진은 차라리 기욱이 자신에게 질려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한다면 관계를 끝낼 명목이라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기욱은 이런 방면에선 지긋지긋할 정도로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하윽, 윽, 으읏… 으윽!”
덩치 때문인지 시헌과는 달리 기욱과 섹스를 할 때면 서진의 몸은 남아나질 않았다. 기욱은 좁은 모텔 방 안에서 열 번도 넘게 자세를 바꾸며 말없이 서진을 안았다. 서진은 모텔 방에 들어오기 무섭게 섹스를 시작한 기욱에게 얼마나 안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
이불을 덮고 있는 서진은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짧은 순간이지만 기절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적어도 시헌은, 사람이 기절한 것도 모를 정도로 몰아붙이진 않았다. 서진은 팔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아침이었다. 여섯 시가 좀 넘었다.
오늘은 시험이 시작한 첫 번째 일요일이었고, 못해도 목요일까지 연속으로 시험이 줄줄이 있었다. 서진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절한 이후에 얼마나 더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건너편에서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고 있던 기욱은 침대에서 내려와 휘청거리는 서진을 보고 깜짝 놀라 서진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기욱은 서진을 다시 침대에 눕히려 했으나 서진은 싫다며 고개를 저었다.
“가서 자.”
“집에 갈 거예요.”
“주말이잖아.”
“공부할 거라고 했잖아요!!”
서진은 끝내 울컥하며 소리를 질렀다. 씨발, 사람 입장은 생각도 안 하고 멋대로 해 대기나 하고, 짜증이 극에 달한 서진은 기욱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괜한 화풀이를 했다.
“내가… 흑. 시험이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기욱은 서진의 몸을 뒤로 밀었다. 걸을 힘도 없었던 서진은 반강제로 침대에 앉았다. 서진을 침대에 앉힌 기욱은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서류 가방을 뒤졌다. 서진의 앞으로 뭔가의 종이를 내밀었다. 서진은 기욱이 내민 프린트 종이를 받아 뒤집었다.
“미쳤어요?”
종이를 본 서진은 곧바로 욕을 하며 다시 종이를 뒤집었다. 지금 기욱은 H대 시간강사로 있는 상태였다. 어느 쪽이든 시험을 주관하는 사람이자 다른 교수들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기욱이 무슨 의도로 답이 적힌 시험지를 자신에게 줬는지까지 알 수는 없지만, 서진은 이런 방식으로 부정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서진은 기욱이 내민 종이를 밀어냈다.
“못 본 것으로 하겠습니다.”
“가져갈 거면 가져가고 말 거면 말아.”
기욱은 답이 써진 종이를 서진의 휴대폰이 있는 침대 옆 선반에 올려놓았다. 이걸로 끝인가 싶었던 기욱은 서진에게 지퍼백에 담긴 물건을 던졌다. 이건 또 뭐야. 지퍼백 안에는 두세 개의 USB가 들어 있었다. 그중에 눈에 띄는 검은색 USB를 꺼냈다. 사실 답지 종이를 받은 순간부터 USB의 정체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감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팔짱을 낀 기욱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 의대 시절부터 공부했던 자료.”
“…….”
“전부 스캔 떠 놨거든. 그건 NS 레지 때 자료들이고. 시험이랑 상관은 없겠지만 궁금하면 보든가.”
USB를 뒤집자 뒤쪽에 글씨가 적힌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한 개가 아니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USB 용량을 꽉꽉 채워져 있을 것이 틀림없는 많은 양의 자료에 서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동기들 사이에서도 알음알음 정보를 공유하긴 하지만 이 정도의 양을 한꺼번에 가지고 있는 학생은 없을뿐더러 설령 가지고 있다 해도 결코 남에게 함부로 주지 않는다. 다섯 개가 넘는 USB 중에는 ‘H대 족보’라고 쓰여 있는 USB도 있었다.
“형님은 J대 출신이잖아요. H대 건 왜 필요한데요?”
“H대 졸업한 친구한테 부탁해서 백업 받은 거야.”
심지어 교수용이라고 써 있었다. 교수들 사이에서도 족보가 돈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실제로 유출돼 학생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것도 있다. 문제는 이건 그런 돌고 돈 족보가 아닌 말 그대로 진짜라는 거였다. 기욱은 ‘H대 교수용’이라고 적힌 USB를 손가락질했다. 다른 건 좀 된 자료긴 하지만.
“그건 제법 최신 거야.”
“필요 없어요.”
“받아 둬, 가지고 있어서 나쁠 건 없잖아.”
서진은 USB와 함께 기욱이 준 종이를 흘끗거렸다. 결국, 서진도 사람인지라 기욱이 준 것들을 반강제적으로 챙길 수밖에 없었다.
* * *
「자기야.」 오후 11:44
「뭐행??」 오후 11:45
「답 좀 해 줘 ㅠ_ㅠ」 오후 11:45
「시헌인 서진이가 문자를 읽고 있는 것을 알고 이찌.」 오후 11:46
탁, 하고 서진은 휴대폰을 덮었다.
이 새끼 죽일까.
아무리 사귄다고는 하지만 요즘 들어 시헌의 문자는 정도가 좀 심한 감이 있었다. 여자야? 말투는 왜 저래 대체? 서진은 계속해서 울리는 시헌의 문자를 무시하며 공부를 계속했다. 급기야 허벅지 밑으로 넣어 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이번엔 전화였다. 안 봐도 시헌이라는 게 눈에 보인 서진은 수신자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 아, 왜!!
―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랭?
― 니가 공부하는데 계속 문자 보냈잖아!!!
― 읽었음 답장 좀 해.
시헌의 뻔뻔함에 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진심으로 한 대만 치고 싶었다. 서진은 시헌을 상대로 화를 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쉬며 통화를 했다.
― 너 진짜 공부 안 하냐?
― 나 니네 집 앞이야.
시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헌의 차 소리가 들렸다. 서진은 휴대폰을 쥔 채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급하게 일어나는 탓에 모서리에 발끝을 찧고 말았다. 아윽. 서진은 아픈 발을 만지작거리며 거실로 나왔다. 아무래도 서진은 자기 혼자 시험 기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의사 집안이라도 그렇지 저러고 어떻게 과탑을 놓치지 않는 거지? 서진은 도통 시헌의 뇌 구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래부터 집 앞에 와서 통보하는 녀석이긴 했지만, 시헌을 볼 생각이 없는 서진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 집에 가라.
― 시른뎅.
―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말해라. 맞는다, 진짜.
― 집에 서윤 누나 있는 거 아는데. 나 너네 집에서 자고 가도 돼?
― 진짜 죽여 버릴 거야.
― 그러니까 얼른 나와. 독서실 가자.
독서실이라는 말에 서진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독서실이라고? 서진은 작은 책상 위에 있는 디지털시계를 확인했다. 열두 시가 다 돼 가는데 무슨 독서실 타령이란 말인가. 차라리 중앙도서관에 가자고 하는 것이 더 현실성이 있는 발언 같았다.
― 이 새벽에?
― 밤새 하는 데 알아. 빨리 나와, 기다릴게. 사랑해.
― 야, 야! 박시헌…!
시헌은 서진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서진은 엉망이 된 책상 앞에서 한숨을 쉬며 옷을 갈아입었다. 대충 책과 필기구 등을 구겨 넣은 서진은 가방을 메고 거실로 나왔다. 마침 방 안이 소란스러운 걸 느낀 서윤도 거실로 얼굴을 내밀었다. 서윤은 나갈 준비를 하는 서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시간에 어딜 가려고?”
“하아, 독서실.”
“지금?”
서윤의 반응에 서진은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시헌의 말을 들었을 때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시헌이 와 있어. 시헌이가 밤새 하는 데 안대.”
서윤의 시선이 큰방 안쪽 창문에 닿아 있었다. 기욱의 이전 차를 여러 번 타 본 서윤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가 이제는 주인이 바뀐 기욱의 차라는 걸 알았다.
“조심해서 다녀와.”
“응.”
손을 흔드는 서윤에 서진은 커다란 배낭 가방을 꽉 동여매며 머뭇거렸다.
“왜? 또 할 말 있어?”
“누나, 나 그…….”
“그?”
“안아 줘.”
“큭큭, 하하하! 우리 서진이가 요즘 들어 왜 이럴까?”
“몰라. 그냥 안아 주면 안 돼?”
서윤의 눈치를 본 서진의 목소리가 작게 기어들어 갔다. 비록 서윤보다 키가 커졌다고는 하지만 서진에게 있어서 서윤은 언제나 서윤이고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서진을 본 서윤이 팔을 앞으로 뻗었다. 서진은 머뭇거리며 서윤의 앞으로 다가갔다.
서윤은 커다란 가방을 멘 서진을 힘껏 안았다. 마찬가지로 서윤을 안은 서진은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예쁜 누나인데. 그런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참 싫었다. 서진에게 세상은 절대로 공평하지 않았다.
“누나. 행복해?”
“어?”
“내 말은……. 벼, 병원 일 말야. 병동 때도 그렇고, 수술 분야로 옮긴 것도……. 힘들어했잖아. 기욱 형 일도 그렇고…….”
“얘는 참 별걸 다 걱정해.”
“동생이잖아. 나, 나한텐 진짜 누나밖에 없는 거 알면서.”
“애네 애.”
서윤은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진은 할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고 서윤의 동생으로, 어린애로 있고 싶었다.
“병원 일도 이젠 할 만하고. 기욱 오빠랑도 괜찮아.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거지?”
서윤의 대답에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지?”
“그럼 당연하지. 그러니까 누나 걱정하지 말고. 우리 서진인 공부 열심히 하고 와. 알지? 누난 우리 서진이가 얼마나 대견한데.”
“누나 동생이니까.”
“그래,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하고 내일 시험 잘 봐.”
“응.”
서윤의 배웅을 받은 서진은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등을 돌리자 편한 복장을 한 서윤이 웃으며 서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녀올게.”
“잘 다녀와.”
서진은 밖으로 나와 곧장 시헌의 차에 다가갔다. 시헌은 차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유리창에 팔을 기대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멀리서 보면 기욱인지 시헌인지 구별이 잘 안 될 정도였다.
서진은 시헌이 나이를 들어 가면서 기욱의 20대 시절과 닮아 간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시헌을 무시한 서진은 앞좌석에 앉았다. 이어 담배를 끈 시헌 또한 운전석에 앉았다.
“울 자기 ㅤㅇㅙㄹ케 늦었썽.”
“그 말투 진짜 그만하라고.”
“크읍. 미안. 하하하하하!! 미안해! 진짜 왜 늦은 거야?”
“누나랑 얘기 좀 하느라.”
시헌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줄 알았던 서진의 예상과 달리 차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서진은 영문을 모른 채 시헌을 바라봤다. 시헌의 손가락이 서진의 옷 안쪽 벨트에 닿아 있었다.
“벨트.”
“야, 새벽이잖아.”
“원래 새벽이 더 위험해.”
하여튼 이놈의 버릇. 멀리 갈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서진은 마지못해 벨트를 맸다. 서진이 벨트를 매자 시헌은 콘솔박스에 있는 종이컵을 내밀었다. 인근 프랜차이즈 커피 컵이었다.
“나 커피는 많이 마셔서 지금은 좀 별로…….”
“커피 아냐.”
서진은 시헌에게 반강제적으로 음료수를 넘겨받았다. 차가 출발하자 서진은 시헌이 준 컵의 뚜껑을 열었다. 뚜껑을 열기 전부터 커피 향이 아닌 다른 향이 났다.
커피가 아닌 밀크티였다. 시헌은 제 커피를 홀짝이며 운전을 했다. 서진은 시헌이 준 밀크티를 마시며 운전을 하는 시헌을 빤히 바라봤다.
“나 좀 멋있지?”
“어.”
그래도 그렇지 제 입으로 꼭 말을 해야겠냐. 실제로 멋있다고 생각했던 서진은 아무 말 없이 시헌이 준 밀크티를 계속해서 홀짝였다.
* * *
“여긴…….”
차에서 내린 시헌은 건물 위층을 올려다봤다. 시헌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고등학교 시절에 자주 왔던 학원가였다. 그중에서도 이 건물은 유독 낯이 익었다. 고등학교 때 기욱에게서 연간 회원권을 받은 독서실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자연스럽게 발길을 끊은 곳이기도 했다. 그때야 기욱이 회원권을 줘서 다녔다고는 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다. 차를 대고 올라온 시헌도 차 안에 있던 가방을 챙겨 올라왔다.
“가자.”
시헌과 서진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7층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서진은 문득 드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24시간 아니지 않았어?”
서진의 기억으로는 최대 한 시인가 두 시까지 하는 곳으로 기억했다.
“얼마 전부터 24시간 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낯이 익은 유리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학에 들어가고 난 이후에도 시헌은 종종 여길 찾는 모양이었다.
“오래간만이네.”
몇 년 만이더라. 따지고 보면 오래 지난 것도 아닌데 서진은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연간 회원권이 있는 시헌과 달리 서진은 계산을 한 뒤 안쪽에 있는 자습실로 들어갔다. 새벽이라 그런지 외부 자습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아침에 같이 학교 가자.”
“그래.”
두 사람은 각자 앉아 책을 꺼냈다. 각자의 교재로 커다란 6인용 책상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시헌의 옆에 앉은 서진은 오랜만이라는 느낌을 역시 쉽게 지울 수 없었다. 시헌과 함께 공부하면 어딘가 마음이 편했다. 자리를 잡은 서진은 다시 공부에 집중했다.
재시가 끝나기 전까지 시헌에게 섹스 금지를 선언했지만, 서진은 처음부터 재시를 볼 생각 따윈 없었다. 시헌이 그렇게 노래를 불러 마지않는 펜션에 놀러 가기 위해서라도 재시는 없는 편이 나았다. 재시를 보지 않는 걸 목표로 삼은 탓인지 서진의 시험 기간은 평소보다 더 예민해진 상태였다.
“야, 박시헌 너…….”
잠깐 뭣 좀 물어보려던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서진의 옆에 있는 시헌은 교재를 베개 삼아 자고 있었다. 서진은 텅 빈 자습실을 보며 혀를 찼다.
“뭐야, 같이 공부하자 해 놓고 자기 혼자 자는 게 어디 있어.”
서진은 시헌이 준 밀크티 컵으로 뒤쪽에 있는 음료수 데스크의 커피를 따라 마셨다. 뜨거운 커피가 담긴 컵을 내려놓은 서진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시헌을 가만히 바라봤다. 서진의 손가락이 시헌의 볼을 쿡쿡 찔렀다. 으음, 거리는 시헌이 불편한지 고개를 아래로 묻었다.
“새끼 존나 잘 자네.”
대학생이 되면 좀 달라 질 줄 알았지만 결국 시헌은 시헌이었다. 시헌은 시험 기간에도 늘 자기가 피곤하면 자고는 했다. 서진은 선천적으로 머리가 좋은 녀석은 생각하는 사고방식도 남다르다는 결론을 내렸다. 딱히 서진은 그런 시헌이 부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머리 좋은 놈은 머리 좋은 놈대로 고민이 있는 모양이니까.
“…진아. 펜션… 가야 대. 안 가면… 안 대.”
잠꼬대인 것 같았다. 시헌이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같이 가고 싶었나 보다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짜 그놈의 펜션 여행이 뭐라고 참. 담배를 피우기 위해 간단한 짐을 챙긴 서진의 시선이 방금까지 앉아 있던 책상에 닿았다.
“하아.”
한숨을 쉰 서진은 책상 밑에 둔 배낭 가방 안쪽 지퍼를 열어 기욱이 준 지퍼백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 있는 컴퓨터에 USB를 하나씩 꽂은 서진은 USB 안에 있는 파일을 살폈다. 기욱에게 받은 뒤 처음 열어보는 터라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예상대로 USB 안에는 엄청난 양의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 누가 박기욱 아니랄까 봐 많은 양의 자료들은 한눈으로 봐도 깔끔할 정도로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영문으로 되어 있는, 아직 모르는 몇몇 파일들을 골라내자 예과용 기초 파일이 눈에 들어왔다.
“예과 것도 있구나.”
서진은 USB를 하나씩 확인하며 자료들을 복사했다. 양이 꽤 많아 복사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계산한 뒤 서진은 복사한 자료를 책상에 올렸다. 시헌은 아직도 잠이 들어 있었다. 책상에 앉은 서진은 가방 안을 다시 뒤졌다.
노란색 파일 안에 담긴 종이를 꺼내자 기욱이 준 답안지가 있었다. 서진은 때아닌 양심의 갈래에 섰다. 기욱의 자료들이야 솔직히 답지는 아니라고는 하니 그렇다 치지만, 기욱의 프린트물은 명백한 답지였고, 불법이었다. 정말 딱 한 과목의 부담만 줄어들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잠꼬대할 정도로 펜션에 가고 싶어 하는 시헌과, 본과에 들어가면 절대로 시간이 나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아.”
이쯤 되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시헌이 얄미웠다. 사실 시헌이 펜션이니 뭐니 얘기만 안 했어도 이런 짓은 안 하는데 말이다. 자는 시헌을 보니 덩달아 잠이 온 서진은 바람이나 쐴 겸 프린트를 두고 밖으로 나갔다.
“…….”
서진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헌이 눈을 떴다. 사실 서진이 뭔가 부스럭부스럭한다는 것을 잠결에 눈치채고 있기는 했다. 어련히 공부하겠거니 하고 있다가 유독 썰렁해진 자습실에 고개를 든 시헌은 눈을 깜박였다.
“강서진?”
의자에서 일어난 시헌은 팔 끝으로 뭔가를 툭 하고 건드렸다. 책상에 아슬아슬할 정도로 걸려 있던 얇은 프린트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떨어졌군. 시헌은 몸을 숙여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였다.
“…….”
무의식적으로 종이를 훑은 시헌의 손이 잠깐이지만 멈췄다. 바보가 아니라면 이게 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시헌은 뒤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재빨리 종이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예상대로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온 서진이었다.
서진은 시헌이 종이를 올리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프린트물과 함께 종이를 허공에서 낚아챘다. 서진의 반응에 시헌은 하품을 하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냥 주워서 올린 거야.”
“일어났으면 공부나 해.”
“알았어. 알았어. 담배 좀 피우고.”
시헌은 하품을 하며 자습실 밖으로 나갔다. 에이, 설마 서진이 그럴 리가 없었다.
시험이 시작됨과 동시에 시헌은 종이를 뒤로 엎었다. 한 장의 A4용지에 적힌 문제를 본 시헌은 인상을 찌푸렸다. 건너편 책상에는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는 서진이 있었다. 문제를 본 시헌은 한숨을 쉬며 결국 펜을 들 수밖에 없었다.
* * *
시험이 끝난 뒤 몇몇 동기들이 복도에 있는 서진에게 다가왔다.
“형 시험 잘 봤어요?”
“어.”
“와, 대박 난 완전 망했는데. 지금 잘 봤다고 하는 사람 형밖에 없는 거 알아요?”
“박시헌 있잖아.”
“에이, 시헌 형은 제외하자구요. 스펙이 틀리잖아요, 스펙이.”
대학교에 와서도 시헌은 공부 제대로 안 하고도 A 학점을 쓸어 가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게 또 불공평하냐? 하면 시헌이 내놓은 과제들은 누가 봐도 A를 받을 정도로 잘했다는 점이었다. 오죽하면 교수가 시헌을 붙잡고 의대를 다시 다니고 있는 거 아니냐고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어쨌든 시헌의 실력은 결코 예과 수준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건 인정한다.”
“그쳐? 아, 맞다. 시험 끝나고 술 마실 건데 올 거죠?”
“아니.”
“아, 또 왜 안 오는데요?”
“약속 있어.”
“무슨 약속을 종일 해요?”
“여행 가.”
“헐, 대박 형 여친 생겼어요?”
“그런 거 아냐.”
무슨 뜬금없이 여친은 여친. 서진은 인하와 헤어진 이후 소개팅이니 하는 곳에는 나가지도 않았다. 그 원인의 절반 이상이 시헌과 사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여자에는 더는 관심이 없었다. 허나 나이가 어린 동기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에이, 아니긴 뭘 아니에요. 다들 말은 안 해서 그렇지 어느 정도 눈치챘을걸요?”
“눈치를 챘다고?”
눈치라는 말에 서진은 깜짝 놀랐다. 학교에서는 최대한 자제한다고 했는데, 설마 시헌이랑 사귀고 있는 것이 동기들 사이에서 소문이 난 건가? 서진의 그런 걱정과 달리 그는 무슨 대단한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형 여친 생긴 거요. 요즘 들어 술자리도 잘 안 나가고. 뭐라 해야 하지? 사람이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
“솔직히 예전에는 좀 다가가기 힘든 그런 게 있었거든요. 근데 요즘은 사람이 많이 누그러졌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래서 저희끼리 다들 아 여친 생겼구나 하고 알고 있어요. 진짜 여친이에요?”
그런가? 그의 말에 서진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서진이 느낀 거라고는 시헌의 영향을 받아 서윤에게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약간은 닭살 돋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게 된 것밖에는 없었다. 어쩌면 서진은 시헌에게서 생각 이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도 몰랐다. 그걸 동기들은 여자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끄러, 인마.”
“강서진!”
마침 멀리서 볼일을 보고 온 시헌이 손을 흔들었다. 시헌을 본 동기에게도 다른 친구들이 다가왔다.
“아, 저흰 볼일이 있어서, 형 담에 봬요.”
“잘 가라.”
그가 자리를 뜨고 곧장 시헌이 뛰어왔다. 시험 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오지 않은 시헌은 시험이 끝나기 무섭게 화장실로 뛰어갔다 온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초등학생도 아니고 말이다. 서진의 앞에 선 시헌은 그제야 숨을 골랐다.
“잘 봤어?”
“그럭저럭.”
“잘됐네.”
“왜 나만 걱정하는 건데.”
“그러기에 평소에 공부 좀 하지 그랬어.”
시헌과 서진의 과에 있는 애들은 다들 중, 고등학교 시절 공부로는 날고 기는 애들이었다. 서진은 그런 애들을 상대로 공부하니 마니 하는 시헌이 기가 막혔다.
“우리 과에 평소에 공부 안 하는 애가 있냐?”
“그거야 나는 모르지.”
“니가 비정상이라고 말하는 거잖아.”
“난 원래부터 암기 잘해.”
암기를 못하는 니들이 잘못이라는 식의 말투에 서진은 짜증이 났다. 누군 종일 붙잡고 간신히 열 페이지 달달 외우고 있을 때 누군 반나절 만에 보자마자 절반을 외워 버리니 참으로 재수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말이라도 못하면 덜 재수가 없지. 시헌은 말도 참 얄밉게 잘하는 구석이 있었다.
“삐졌어?”
“안 삐졌어.”
서진의 말투에 시헌이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근데 왜 이쪽 안 봐.”
“야, 안 놔? 재수 없어서 그런다! 왜?”
“그게 삐진 거잖아.”
“놓으라고 썅.”
복도에서 소리를 지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지나가는 학생들이 보기에는 단순한 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실랑이를 했을까 두 사람의 실랑이는 뜻밖의 사람이 등장하며 멈춰질 수밖에 없었다.
“강서진.”
기욱이었다. 시험 기간에는 얼굴을 안 내비칠 줄 알았던 기욱의 등장에 시헌은 재빨리 서진을 붙잡은 손을 놓았다. 시헌은 기욱이 자신을 부른 게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멋대로 대답했다.
“형? 왜?”
“둘이 같이 있었네.”
기욱의 중얼거림에 서진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이 온 방향에서 본다면 기욱이 두 사람이 같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기욱은 시헌의 옆에 있는 서진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잠깐 따라와.”
“나도 갈래.”
그 손짓이 서진을 부른다는 것을 눈치챈 시헌이 기욱의 옆에 붙었다. 기욱은 그런 시헌의 몸을 옆으로 밀어냈다.
“넌 여기 있어.”
“아, 왜. 서진이가 뭐 잘못했어?”
“시험 때문에 그래. 금방 돌려줄 테니까 기다려.”
“하아, 알았어.”
기욱이 주변을 보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주변의 시선을 눈치챈 시헌은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금방 올게.”
서진은 기욱을 따라 기욱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기욱이 대타로 온 교수는 정교수로 그의 연구실은 제법 넓었다. 그 연구실을 물려받은 기욱은 당연히 다른 강사들보다 쾌적한 연구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정작 J대에서 두 번째로 좋은 연구실을 사용하고 있는 기욱은 대학교의 연구실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서진의 등을 떠밀은 기욱은 서진이 들어오기 무섭게 연구실의 문을 잠갔다. 기욱의 행동에 서진은 괜히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여태껏 기욱은 학교 내에서 서진을 건드린 적은 없었다. 사실 처음 기욱이 학교에 왔을 때 서진이 느낀 불안함은 그거였다.
“무, 무슨 일인데요?”
서진이 경계하며 뒤로 물러서자 기욱은 성큼성큼 서진의 앞으로 다가와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내 서진의 자리를 지나쳐 커다란 책상 서랍을 뒤져 서진의 시험지를 꺼냈다.
“잘했다고. 칭찬하려 했던 거야.”
기욱은 서진의 시험지를 책 위로 올리며 서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서진은 내밀어진 기욱의 손을 옆으로 밀어냈다.
“필요 없어요. 그런 칭찬.”
“…….”
“이제 가도 되죠?”
“주말에 시간 비워.”
주말이라는 말에 서진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 주말에는 시헌과 펜션에 가기로 했다. 서진의 불쾌한 표정을 눈치챈 기욱이 다시 말을 이었다.
“시험 끝났잖아. 모처럼인데 어디 가자.”
“둘이요?”
“서윤이는 바빠서 힘들어.”
“저 주말에 약속 있어요.”
이번에는 기욱 쪽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약속?”
기욱은 벽으로 몰아붙인 서진의 턱을 손가락 끝으로 들어 올렸다. 기욱이 무섭다. 무섭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 그런 게 있어요. 어쨌든 이번 주말은 안 돼요.”
“강서진.”
“…….”
“내 눈 똑바로 봐. 누구랑, 어디 가는데?”
대개의 사람은 시헌 같지 않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보고 거짓말을 하는 재능 같은 건 아무에게나 있는 재능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안 서진은 일부로 더 기욱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술을 뗐다. 시헌도 거짓말을 하는데 못 할 게 뭐가 있겠는가.
“강원도요. 과 동기들이랑 1박 2일로 놀러 가기로 했어요.”
“…….”
“여자 같은 거 아니라구요.”
서진은 가끔가다 보이는 시헌의 비정상적인 집착의 근원에 기욱이 있을 거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욱은 서진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서진이 잠시 머뭇대자 기욱은 곧장 서진의 허리를 잡아당긴 뒤 입술을 맞췄다.
숨이 막힐 때까지 하는 거친 키스, 기욱의 혀가 서진의 입안 구석구석을 핥았다. 이젠 키스에 제법 익숙해져 어느 정도 키스로는 눈 하나 끔벅하지 않은 서진이라도 이런 식의 키스는 벅찼다. 입술을 떼고 붙이기를 반복할 때마다 서진은 기욱을 밀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서진은 굳은 것처럼 제자리를 지켰다. 만족할 만큼 서진의 입술을 탐한 기욱은 책상으로 돌아가 서진의 시험지를 서랍 안에 넣었다.
“이번만 봐주는 거야.”
“…….”
“다음 달에 서윤이랑 같이 시간 낼 테니까.”
“그땐 갈게요.”
“가 봐.”
서진은 기욱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재빨리 잠긴 연구실 문을 열고 복도 밖으로 나왔다.
“뭐래?”
“아오. 씨, 깜짝아.”
서진은 복도에 나오자마자 시헌이 있을 줄 몰랐다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헌이 연구실까지 쫓아와 밖에서 기다렸다는 사실을 몰랐던 서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키스를 한 걸 들키진 않았겠지. 기욱의 연구실 문을 본 서진은 일분일초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연구동을 나가고 싶었다.
“별거 아냐.”
“그래서 뭔데?”
“이름.”
“이름이 왜?”
“이름 안 썼어.”
“……재시야?”
“한 번만 봐준대.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이야.”
시헌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을 내려가며 시헌은 서진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근데 보통 이름 쓰는 걸 까먹냐? 칠칠찮게.”
“하아. 몰라. 정신이 없어서 그랬나 봐.”
“우리 형인 걸 다행으로 알아.”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야.”
본심은 이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서진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상황이 계단을 내려가는 중이라는 걸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 시헌의 눈을 보고 거짓말을 하라고 하면 절대 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시헌보다 조금 빨리 1층으로 내려왔다. 서진의 뒤를 이어 계단을 내려온 시헌은 서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서진은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몸을 약간 틀었다. 시헌의 얼굴이 붉게 변해 있었다.
“그, 그럼, 재시 없는 거지?”
빌어먹을 박시헌.
* * *
두 사람은 방이 있는 3층 복도에 들어서기 무섭게 서로 키스를 했다. 평일 대낮부터 모텔을 찾는 손님은 없었다. 벽 끝에 있는 CCTV가 거슬리긴 했으나 그런 건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딱히 우리가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니잖아?
서진과 입술을 맞춘 시헌은 서진의 뒤쪽에 있는 문고리로 열쇠를 집어넣었다. 문을 바깥으로 연 뒤 서진을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시헌은 거칠게 방문을 닫았다.
“하아, 잠깐만. 우리 시험 끝나자마자 이건 좀 아니지 않냐?”
진정하자는 서진에 시헌의 손이 서진의 목 옆을 누르며 가까이 다가왔다. 왜 이 새낀 키도 작은 주제에 당당히 벽치기를 하는 건데! 서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많이 참았어.”
“…….”
“짜증 나서.”
“어?”
“그래서 공부하게 되더라.”
시헌은 일부로 서진의 다리 사이로 몸을 비볐다. 약간 흥분해 부풀어 오른 시헌의 페니스에 서진은 시헌을 살짝 밀어냈다. 이 자식.
“욕구 불만을 그런데 풀지 말란 말야.”
서진은 독서실에서 자는 시헌을 두고 몇 번이나 ‘시험 망해라.’ 하고 저주를 퍼부었는지 모른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서진은 시헌이 시험을 망치길 바랐다. 물론, 시헌의 반응을 볼 때 아닌 것 같지만.
“너는?”
“내가 뭘.”
“너는 시험 공부 하면서 무슨 생각 했는데?”
“……가자며.”
“어?”
“별장인가 하는 데 가자며!!”
뻔뻔하게 물어 오는 시헌에 짜증이 치민 서진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원래부터 시험은 잘 봐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서진이지만 이번 시험은 특히 더 그랬다. 별장, 별장, 그놈의 별장 노래를 부르는 시헌의 탓에 서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헌과 별장에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별장만 아니라면 서진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기욱의 프린트물을 볼 이유조차 없었다.
“너……. 크읍, 하하하하하하!!”
서진의 외침에 시헌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도무지 웃음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었던 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시헌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서진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거.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을 줄 몰랐어.”
“아니, 난 네가 가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별장 같은 건 언제든지 갈 수 있어.”
“너 진짜…!!”
시헌은 화를 내려는 서진의 입가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말을 막았다.
“이번 주말엔 시간 되는 거지?”
“하, 지난번에 파투 낸 게 누구였더라.”
“나였지. 그땐 정말 어쩔 수 없었어.”
시헌은 큭큭대며 입술을 맞춘 뒤 침대로 향했다. 서진은 시헌과의 섹스가 더 이상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시헌이 서진과의 섹스에 대한 욕구를 공부에 푼 기간만큼 서진 또한 욕구가 쌓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침대 위로 올라간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곧장 옷을 벗었다. 빠르게 서랍을 뒤진 시헌은 손가락 사이로 젤을 흘린 뒤 서진의 다리를 벌렸다.
“아, 어쩌지 나 벌써 넣고 싶어 미칠 것 같아.”
“흐. 그랬다간 죽일 거야.”
“큭큭, 천천히 할게.”
시헌의 손가락이 천천히 서진의 입구를 문질렀다. 손가락이 닿는 부분 하나하나가 열기로 가득 찼다. 서진은 시헌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느낌에 맞춰 페니스 끝을 살살 긁었다. 생각해 보니까 어차피 주말에 펜션에 가서도 또 할 텐데. 벌써 이렇게 할 필요가 있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시헌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인지 서진의 밑에서 중얼거렸다.
“뭐 어때. 많이 하면 좋은 거지.”
“읏, 혼자 뭐라는… 거야 썅.”
“큭큭. 그러게.”
시헌은 여유롭게 손가락의 개수를 늘렸다. 손가락을 늘린 채 서진의 몸을 돌려 위쪽으로 올라탔다. 서진의 한쪽 다리를 벌린 시헌은 서진의 안을 깊숙이 찔렀다.
“잠깐 거기… 하읏…!!”
“서진아.”
“……야야, 박시… 으응. 흐읏!”
“이걸로 끝까지 가는 모습 보고 싶어.”
“진짜 맞을…… 하앙! 으응…!”
시헌이 뭘 생각하는지 눈치챈 서진이 몸을 틀었으나 시헌이 서진의 팔을 붙잡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시헌은 서진이 양팔로 침대에 톡 튀어나와 있는 헤드를 붙잡게 했다.
“하으으응….”
시헌의 손가락이 깊숙한 부분을 찌를 때마다 서진의 페니스가 앞으로 톡톡 튀며 흔들렸다. 늘 적당히 하고 페니스를 넣었던 시헌인지라 서진은 이런 자극이 익숙하지가 않았다. 침대 아래로 이끌린 서진은 침대의 시트를 꽉 쥐었다. 시헌은 서진의 몸을 다시 뒤집어 계속해서 전립선을 자극했다.
“하응, 응. 아으읏…!!”
서진의 몸이 떨리며 정액이 서진의 배 위로 튀었다. 서진은 사정 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숨을 골랐다.
“흐, 죽일 거야.”
“그거 요즘 말버릇이야?”
“…윽. 뭐가?”
서진은 한쪽 발을 들어 시헌의 몸을 꾹꾹 눌렀다. 시헌은 멋대로 움직이는 서진의 발을 들어 어깨에 반쯤 걸쳤다.
“죽일 거라는 거. 너 툭하면 그러잖아.”
시헌의 말에 서진은 그랬나, 하고 뺨을 긁적였다. 확실히 요즘 들어 그런 말을 자주 사용한 감은 없잖아 있었다. 원래 습관은 본인만 모르는 법이었다. 시헌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많이 사용하긴 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서진은 손가락을 총 모양으로 만들어 시헌을 향해 겨누는 척을 했다.
“너 뭐해?”
“보면 몰라? 총이잖아.”
“…….”
“쏠 거야, 빵!!”
소리와 함께 서진이 가볍게 손목을 튕겼다. 서진의 행동과 함께 좁은 모텔 방 안으로 침묵이 흘렀다. 하도 죽이니 뭐니 얘기하길래 그냥 해 본 것뿐인데. 저쪽에서 안 맞춰 주니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아오 씨, 존나 민망하네.”
서진은 붉어지는 뺨 위로 손을 댔다.
“…….”
“…….”
“야 박시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서진은 몸을 뒤로 뺐다. 서진이 시헌의 밑에서 나오기 무섭게 시헌의 몸이 풀썩 하고 침대로 쓰러졌다.
“…어어? 야? 시헌아?”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서진은 멍하니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총에서 진짜 총알이 나갔을 리는 절대 없다. 서진은 초능력자가 아니었다. 서진은 당황하며 쓰러진 시헌의 몸을 흔들었다.
“쿨럭…! 서, 서진아…….”
“……야 씨발, 박시헌 너 진짜 괜찮냐?”
“안… 크헉… 괜찮아. 미… 미, 미안… 허억….”
서진의 총을 맞은 시헌은 피를 토하며 서진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이내 숨을 크게 들이쉰 시헌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헌의 손이 툭, 하고 몸 아래로 떨어졌다.
“…….”
“…….”
“씨발 새끼.”
“크읍….”
“숨 쉬어라. 빨리.”
서진은 시헌의 코 근처로 손가락을 가져다 댄 상태였다. 숨을 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헌이 숨을 들이쉬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크읍. 하하하하하하하!!”
“야이, 큭큭. 미친… 하하하하! 죽는다, 진짜?”
“그만 죽이라고!! 한 번 죽였음 됐잖아!!”
“또 죽어, 개자식아!”
“시스템. 시헌이는 사망했다고 한다.”
“크읍. 큭큭 그게 뭐야! 하하하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냥 시체인가 보다.”
시헌의 장난에 서진은 시헌의 몸을 발로 차며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잘 나가다 말고 무슨 짓인가 싶기도 했다.
“야. 일어나. 이제 안 죽일 테니까 일어나라고.”
서진이 빨리 일어나라며 시헌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이불에 얼굴을 묻은 시헌은 서진의 간지럼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혹시나 하는 기분에 간지럽혀 본 건데. 의외로 시헌은 간지럼을 타는구나 싶었다. 나이 먹고도 간지럼을 타는 것이 꼭 이런 데서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푸하! 하하하! 강서진 너 죽었어.”
숨을 크게 들이쉬며 일어난 시헌은 곧장 서진의 어깨를 누르며 위로 올라탔다. 시헌은 곧장 서진의 다리를 벌린 뒤 페니스 끝을 살짝 밀어 넣었다. 장난을 치면서 축 주저앉았던 시헌의 페니스가 서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으읏. 응….”
“이젠 니가 죽을 차례야.”
“흐, 너한테 안겨서 죽는 거라면… 하으, 나쁘지 않은 죽음인데?”
“난 아냐.”
“야야, 하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농담이잖아.”
“농담이라도 기분 나빠.”
“뭐라는 거야 씨발. 하윽!”
서진은 가끔 시헌의 어느 장단에 맞춰 줘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어느 때는 장난이라고 했다가 갑자기 진지해지기 때문이었다. 시헌의 페니스가 조금씩 서진의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안쪽을 깊숙이 찌르는 느낌에 서진은 후,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흐응, 응. 으읏….”
“후, 펜션.”
“하으, 읏, 으읍….”
“기대된다.”
시헌의 움직임에 정신이 없었던 서진은 시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시헌이 몸을 숙이자 서진이 시헌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 * *
“강원도? 갑자기 무슨 강원도야?”
모처럼 서윤과 마주 앉아 식사하는 서진은 주말에 있을 펜션에 대해 말을 했다.
“주말에 갈 것 같아. 일찍 못 말해 줘서 미안해.”
“시험은? 재시험은 없구?”
“한 개 걸렸어. 주말까진 괜찮을 것 같아.”
“흐음, 우리 서진이가 알아서 잘하겠지. 누구랑 가려구? 여자?”
생선을 바르며 은근슬쩍 떠보는 서윤의 모습에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요즘 들어 서윤이 노골적으로 여자 친구를 데려오기를 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 일단은 성인이고 하니 말이다. 서윤의 앞에서는 한없이 어린애인 서진은 여자를 서윤에게 소개한다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 자체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럴 리가 없잖아!”
“어머, 우리 서진이가 얼마나 멋있는데? 여자애들이 보는 눈이 없나 보구나?”
“아 진짜! 누나 그런 거 아냐! 시헌이랑 가기로 했어.”
서진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밥을 입안에 넣었다. 사실 어지간하면 서윤에겐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긴 했지만. 이렇게 막 튀어나올 줄은 서진도 몰랐다. 어쨌든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시헌이랑?”
“응. 큰아빠 별장 있다고 해서 주말에 놀러 가재.”
역시 서윤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된장국을 마신 서윤은 수저를 살짝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 갔다.
“강원도 간다고 했지? 강원도 별장 말하는 거야?”
“누나가 어떻게 알아?”
“그럼 알지. 기욱 오빠랑 몇 번인가 간 적 있거든.”
서진은 이 상황에서 기욱의 얘기가 나오는 것이 마음이 불편했다. 기욱은 서진의 생각 이상으로 서윤과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행동하는 거랑 달리 기욱은 당일치기나 바람을 쐬러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시헌의 말에 의하면 집안사람들끼리 이용하는 별장이라고 하니, 기욱이 서윤과 함께 갔다고 해서 이상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헌이랑 놀러 가는구나?”
“응. 하루 자고 올 거야.”
“그래. 몸조심하고 술은 적당히 마셔.”
“하하, 둘이서 가는데 마셔 봤자 얼마나 마신다고. 어쨌든 알았어.”
설마 서윤이 기욱에게 말하진 않겠지. 서진은 더 이상 별장에 관한 이야기를 자제하며 식사를 마저 했다.
* * *
잠결에 거실로 나온 기욱은 거실의 불빛에 인상을 찌푸렸다. 거실 불이 왜 켜져 있지? 기욱이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욕실 쪽의 물소리가 끊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샤워를 마친 시헌이 거실로 나왔다. 기욱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유리창과 시헌을 번갈아 바라봤다. 기욱은 침실로 고개를 돌려 침대 위에 있는 디지털시계를 확인했다.
“새벽부터 뭐해?”
“약속 있어.”
“……이 시간에?”
시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건으로 머리를 말렸다. 기욱은 방 안으로 들어가는 시헌의 뒤를 쫓아 문 앞에 섰다. 옷을 반쯤 갈아입던 시헌은 기욱을 슬쩍 보더니 없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준비를 계속했다.
“언제 들어올 건데?”
“일요일 저녁쯤에.”
“지금이 토요일 아침이라는 건 알고 말하는 거지?”
“당연하지.”
기욱은 시헌의 방 한쪽에 놓인 여행용 가방을 보며 혀를 찼다. 새벽부터 난리를 치더니 당당하게 일요일 저녁에 들어온다고? 기욱은 눈 하나 끔벅하지 않고 말을 하는 시헌을 보며 기가 찼다. 대체 누굴 닮은 거야?
“…….”
아, 나인가. 기욱은 시헌의 행동이 묘하게 자신과 닮은 것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시헌을 보면 기욱은 굳이 아들을 낳을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기욱은 시헌의 방문을 활짝 열고는 문 위쪽으로 손을 뻗어 몸을 걸쳤다. 시험이 끝난 시헌이 놀러 나가겠다는 걸 말릴 권한은 없긴 한데.
“재시험 걸린 거 없어?”
“없어.”
“박시헌, 농담하지 마. 한 개도?”
본1은 기욱에게 있어서도 지옥의 해였다. 원래부터 닥치면 하는 성격이었던 기욱은 예과 때는 최소한의 성적만을 유지한 채 2년이라는 시간을 술, 여자 혹은 가끔 남자와 섹스를 하며 때웠다. 아침까지 달리고 강의에 들어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본1에 들어가서 미친 듯이 후회했다.
고3 때 바짝 공부하고 2년 동안 놓은 공부를 다시 하자니 죽을 맛이었다. 하연은 꼴좋다며 그런 기욱을 실컷 비웃었다. 어느 쪽이든 기욱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었다. 예과의 공부량과 본과의 공부량은 도저히 양으로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시헌은 평소와 달리 방에 들어가지 않고 깐죽대는 기욱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없다고.”
“야, 네가 인간이냐? 나 본1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어. 이 괴물아.”
기욱은 하면 되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기욱은 시헌이 공부를 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예과 때야 그렇다 쳐도 본과에 들어가고 나서도 시헌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본인이 예과에서 본과로 넘어갔을 때를 생각하며 일부러 입을 다물고 있었던 기욱은 재시가 없다는 시헌의 말에 진심으로 입을 내벌렸다. 시헌은 옷을 다 갈아입은 뒤 캐리어를 끌고 방을 나왔다.
“하, 형이 그런 말 하니까 되게 이상한 거 알아?”
“난 진짜 의사잖아. 난 본과 때 늘 시험에 치여 살았다고.”
“형이 공부 못했던 걸 나한테 탓하지 마.”
나름 대학병원에서 교수 소리를 듣고 일하는 기욱도 시헌의 앞에서는 어림없었다. 시헌은 기욱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달리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기욱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시헌의 승리였다.
“원, 누가 의사인지.”
“갔다 올게.”
캐리어를 현관 밖으로 밀어낸 시헌은 바닥에 주저앉아 신발 끈을 묶었다. 날밤을 꼬박 새고 온 기욱은 조금 더 자야겠다며 하품을 했다. 그 순간 문득 지난번 서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주말. 1박 2일.
기욱은 문밖을 나서려는 시헌을 붙잡았다. 시헌의 표정에 귀찮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잠깐만, 너 어디로 가는데?”
“…….”
“누구랑 가냐고.”
“하아, 동기들이랑.”
기욱의 재촉에 시헌이 마지못해 말했다.
“아, 그러냐.”
“진짜 간다.”
시헌은 더는 기욱과 말을 섞고 싶지 않다며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하긴, 시헌도 서진의 동기니 이상할 건 없었다. 기욱은 과잉 반응이라며 하품을 한 뒤 방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