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3 화해 (36/83)

Chapter. 33 화해

“졸려.”

술이 어느 정도 깬 서진은 침대에 엎드린 채 다리를 움직였다. 그런 서진에 시헌은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집어 덮어 주었다. 다시 몸을 누인 서진은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어색한 모텔의 천장을 바라봤다. 빌어먹을 여기가 어디 모텔인 거야.

문득, 오늘이 평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서진이 한숨을 쉬었다. 서진에게 이불을 덮은 시헌 또한 이불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남자 둘이 편하게 덮기엔 이불은 약간 길이가 부족했다. 다른 건 양보해도 이불은 양보를 못 한다며 은근슬쩍 서로 이불을 잡아당겼다.

“큭큭, 하하하! 아, 박시헌! 이불 내놔!”

야금야금 이불을 빼앗던 시헌이 이불을 확 하고 당겨 안은 탓에 서진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분명 자기 덮으라고 덮어 준 이불일 텐데 왜 시헌이 이불을 가져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불로 몸을 반쯤 말은 시헌은 이불 끝을 살짝 들어 보이며 웃었다.

“피곤하다며.”

“너 성가셔.”

웃음을 참는 시헌을 본 서진은 꿈틀거리며 이불이 있는 시헌의 몸에 착하고 달라붙었다. 조금 남긴 했으나 시헌의 몸은 생각 이상으로 따듯했다. 서진은 본능적으로 시헌의 등 뒤를 만지작거렸다. 시헌은 이불 안으로 들어온 서진을 향해 고개를 숙이더니 서진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그게 또 부끄러운 듯 서진은 다시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숨어 버렸다.

“야. 강서진 들어가면 어떻게!”

“…에서.”

“어?”

가슴 밑 이불 안에서 눌린 목소리가 들렸다. 시헌은 이불을 살짝 들어 서진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시헌에게 얼굴을 묻은 서진은 그 상태로 말을 계속했다.

“너 밤새 술 먹고 실습실에 있었을 때.”

“…….”

기억이 났다. 그날도 시헌이 술을 마신 이유의 절반은 서진 때문이었다. 진짜 서진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확증은 아니었지만, 그냥 불편해서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났다.

“지켜 주겠다고 했잖아. 그거 아직도 기억해?”

서진이 살짝 고개를 들어 시헌을 봤다. 시헌은 그런 서진의 몸을 안으며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한테 모르모트 취급 받았던 거?”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

서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내밀었다. 시헌은 서진이 자신을 따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또 제법 어설퍼서 웃음이 나왔다. 싸우고 섹스를 한 후에는 안 하던 짓을 한다더니 진짜인 것 같았다.

“진심이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과학이며 의학이 발전한 현대에선 죽지만 않으면 정말 어떻게든 된다. 설령 정상적인 인간의 삶이 아닐지라도 남들과 똑같이 살아 있다는 근본적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시헌은 아직도 중학교 시절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봤던 하늘의 풍경을 잊고 있지 않았다.

솜사탕 같은 푸른 구름. 창문 안쪽과 바깥이 분리된 것 같은 세계. 창문 안으로 들려오는 쉬는 시간 학생들의 대화 소리. 그리고 빨리 오라며 자신을 부르는 모습들을 분명하게 기억했다. 시헌아, 하고 제 이름을 부를 때면 내가 있을 곳은 바깥이 아니라 여기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시헌의 삶은 늘 경계에 있었다. 의사 집안, 누군가 죽는 것은 특별히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람은 다 누구나 죽으니까. 그래서일까? 시헌은 필요 이상으로 사람에게 정을 주는 것이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다. 시헌이 아슬아슬할 정도로 발을 걸치고 있다면 서진은 지나치게 삶에 녹아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놀 땐 놀고, 여자 친구도 사귀고 아무 이상이 없는 평범한 남학생이었다. 평범하지만 늘 정체 모를 위화감이 있었다.

시헌은 알았다. 어떻게든 될 거라는 것과 동시에 자신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 한구석으로 확신했다. 설령 식물인간이 된다 해도 그조차도 시헌은 살아 있는 것이라 느꼈다. 허나 서진은 달랐다. 정말, 정말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분명한 건 시헌은 서진이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아, 내일 아침 강의인데.”

“…….”

서진의 중얼거림에 시헌도 잊고 있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은 꽤 진지한 표정을 짓는 시헌의 볼을 잡아당겼다.

“그렇게 인상 쓰지 마. 큭큭. 어떻게든 되겠지.”

“그거 내 대사잖아.”

“내 것 니 거가 어디 있어? 특허 낸 것도 아니면서.”

“그러게.”

“뭐, 일단 좀 잘까.”

서진은 하품하며 시헌의 허리를 안은 채 눈을 감았다. 시헌도 머리 아프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강의에 지각했다.

* * *

“오오, 시헌 형 그게 뭐예요?”

급하게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강의실로 들어온 시헌을 본 동기 한 명이 말을 걸었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정장 차림의 시헌과 동기의 목소리에 강의실에 남아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시헌에게 집중됐다. 아직 넥타이를 맨 상태도 아니었던 시헌은 팔에 마이를 대충 건 채 서진의 옆으로 다가갔다. 시헌의 인기척을 느낀 서진이 이어폰을 뺐다.

“어, 옷 갈아입고 왔네?”

“가서 갈아입을 시간 없을 것 같아서.”

“형 어디 가요?”

“어. 집안일.”

“무슨 집안일인데 이런 정장까지 챙겨 입어요? 대박. 짱 좋아 보이는데.”

시헌의 정장에 관심을 가진 동기는 마이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그런 동기를 반쯤 내버려 둔 시헌은 책상에 올려 뒀던 배낭 가방 앞을 이리저리 뒤졌다.

배낭 가방 앞주머니 안에서 처음 보는 시계가 나왔다. 끼우고 있던 시계를 벗어 정장 주머니에 대충 넣은 시헌은 배낭 가방에서 나온 시계를 대충 팔에 찼다.

“너 그거 그렇게 관리해도 되냐?”

시계를 갈아 차는 시헌의 모습을 본 서진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시헌이 시계를 바꿨다는 말은 들은 기억이 있었다. 바꿨다고 해야 할까 서진도 일방적으로 떠넘겨졌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헌의 시계가 마음에 들지 않은 엄마가 멋대로 차고 다니라며 시헌에게 주고 갔다.

원래 차고 다니던 시계도 꽤 비싼 것으로 알고 있는 서진은 새 시계가 얼마짜리인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시헌은 원래 시계가 더 편한 듯 가족 앞에서만 대충 차는 척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진의 말을 들은 시헌은 한숨을 쉬었다.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고.”

딱 봐도 불만이 가득한 표정에 서진은 큭큭대며 웃었다. 아무렴 팔자겠거니 싶었다. 마이를 계속 들고 있을 수 없었던 시헌은 대충 마이를 걸친 뒤 어깨에 배낭 가방을 멨다. 정장 차림에 커다란 배낭 가방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웃긴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간다.”

“내일 보자.”

서진은 익숙하게 강의실을 떠나는 시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헌이 가고 난 뒤 몇몇 동기들이 서진의 주변에서 떠들었다.

“무슨 집안일인데 저렇게 호들갑이야? 진짜 쟤는 알 수가 없다니까.”

“왜 지난번에 카드요. 그거 형이 주고 갔다면서요.”

“아, 그 의사 형? 근데 아무리 그래도 보통 5백씩이나 쓰라고 주냐. 야, 형 카드 아니었다는 것에 손목 건다.”

“시헌 형네 집 재벌이라는 소문도 있어요. 아까 시계 봤어요? 그거 K.K 브랜드 건데. 최저가 3백부터 시작하는 거거든요. 가방에서 막 나오잖아요. 시헌 형이 몰고 다니는 차도 좀 되긴 했는데 그거 아직도 꽤 비쌀걸요?”

동기들의 시선이 이어폰을 끼고 공부를 하는 서진에게 닿았다.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과이긴 하지만 시헌의 대인관계는 상당히 좁은 편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동기들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다들 시헌이 벽을 치고 있다는 걸 알음알음 눈치채고 있었다.

시헌이 유일하게 먼저 다가가는 상대가 서진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이어폰을 끼고 있지만 사실 귀마개 이상의 용도가 아니었던 터라 동기들의 대화 소리가 전부 들렸다. 서진은 이어폰 한쪽을 빼며 말했다.

“떠들 거면 다른 데 가서 떠들어.”

동기들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으니, 서진도 남에 대해 떠드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 * *

강의실을 나온 시헌은 건너편 중앙도서관이 있는 건물을 흘끗댔다. 아직 시간은 있었다. 갈까, 말까 고민하던 사이 시헌의 발걸음은 이미 도서관에 향하고 있었다. 시헌은 비교적 한가한 도서관 입구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장 차림의 젊은 청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걸 수상하게 생각한 경비가 다가왔다.

“무슨 일 있습니까?”

학생이냐고 하려던 경비는 시헌의 차림을 보며 말을 거뒀다. 잘 차려입으면 요즘은 학생인지 조교인지조차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마침 다가온 경비에 시헌은 잘됐다며 말을 꺼냈다.

“혹시 지난주 주말에 학생증 두고 왔다고 그냥 들어간 학생이 있었나요?”

“주말에요?”

“저녁쯤에 와서 다음 날 아침엔가 나갔다고…….”

서진이 한 말에도 확신이 없었던 시헌이 말을 흐렸다.

“아아, 아침은 아니고 한 오후쯤에 나갔을 겁니다. 주말마다 학생증 두고 왔다고 들여보내 달라는 학생들은 좀 있으니까요.”

경비는 날밤을 새우고 간 남학생이 한 명인가 있었다며 회상했다. 그날은 유독 피곤한 날이었는데, 마침 그 남학생이 오후쯤 도서관을 나갈 때 커피를 주고 갔기 때문이었다.

“혹시 무슨 과였는지 아시나요? 얼굴은?”

“허허, 얼굴까진 내 기억 못 하지. 가지고 있던 책을 본 것 같은데. 영어로 돼 있어 뭔 소린지 알아먹을 수 있어야 말이지. 헌데 그 학생이 뭐 잘못이라도 저질렀는감?”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어쨌든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슬슬 가 봐야 했던 시헌은 고개를 숙이고 중앙도서관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찬 공기가 시헌의 뺨을 적혔다. 시헌은 어깨에 있던 배낭 가방 안에서 목도리를 꺼내 대충 둘렀다. 차가 있는 곳까지는 조금 걸어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오해인가…….”

경비가 말한 학생이 서진이라는 걸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역으로 말하면 서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 또한 없다는 뜻이었다. 시헌은 차라리 이번 일이 자신의 이른 결론으로 인한 오해이기를 바랬다. 시헌이라고 서진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 * *

시헌이 가고 서진은 점심시간을 좀 지나 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심에 동기들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적당히 거절했다. 그런데 이게 또 오후가 지나니 배가 고파 밥을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의 심리란 참 아이러니할 수가 없다.

서진은 점심이라고 하기는 너무 늦은, 저녁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막 나온 음식을 먹고 있을 무렵 한가한 가게 안으로 손님이 들어왔다. 텅 빈 가게를 둘러보던 인훈은 구석에 앉아 있는 서진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

“여기 자주 오는구나?”

그렇게 말한 인훈은 비어 있는 서진의 앞자리 의자를 꺼내 앉았다. 서진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인훈은 주방 근처에 있는 알바생을 불러 주문을 끝냈다.

“앉아도 되지?”

“주문 다 하고 묻지 마.”

서진은 이미 문자가 끊긴 휴대폰 화면을 습관처럼 바라봤다. 엄마와 만났다는 문자를 마지막으로 정신이 없는 모양인지 시헌에게서는 답장이 없었다.

다른 데 간 것도 아니고, 뻔히 바쁘다는 걸 알면서 재촉하기가 마음이 불편했던 서진은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오늘은 그 친구 없네?”

“누구?”

“왜 저번 주엔가 너랑 싸웠다는 애.”

“아, 시헌이.”

시헌이 가고 난 뒤 인훈이 식당에 왔다. 그게 아니었으면 여자들과 술을 마실 일도 없었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그로 인해 시헌의 생각이 나 화해를 했으니 좋은 게 좋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진의 중얼거림에 인훈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

“시헌이였어?”

“어.”

“화해한 거야?”

“어.”

“아, 그렇구나. 근데 오늘은 시헌이랑 밥 안 먹어?”

“세미나.”

서진은 오므라이스를 입에 넣으며 건성으로 말했다. 시헌도, 서진도 서로에게 질문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서진은 계속해서 묻는 인훈이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했다. 원래부터 인훈을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도 한몫했다.

“의대생이 보통 세미나를 그렇게 많이 가?”

“걔네 집안이 의사 집안이라 그래. 부모님이랑 친척들한테 끌려서 억지로 다니나 봐.”

“아, 그렇구나.”

서진은 꼬박꼬박 인훈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인훈이 이어서 질문을 할 틈이 없게끔 대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진의 매몰찬 말투에 할 말이 떨어진 인훈은 금방 질문거리가 떨어진 듯 입을 다물었다. 인훈이 잠시 조용해지자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시헌의 문자라는 걸 눈치챈 서진이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열었다.

「짜증나 ㅠㅅㅠ 나 좀 살려줘.」 오후 4:22

「ㅋㅋㅋ힘내라」 오후 4:23

「자기 뭐함? +A+」 오후 4:23

「밥」 오후 4:24

너무 성의가 없었나. 서진은 곧장 문자가 오지 않는 시헌에 다시 문자를 보냈다.

「밥 먹고 있어.」 오후 4:25

답장이 없었다. 바쁘긴 바쁜 모양이었다. 이런 문자 패턴에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요즘 들어 시헌과 문자를 하지 않으면 불안한 기분에 서진은 일부러 휴대폰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인훈은 테이블 위에 올라온 서진의 휴대폰을 손가락질했다.

“어, 나도 이 휴대폰인데.”

“아. 그래? 난 그냥 막 써서.”

나름대로 서진과 친해지기 위해 말을 이것저것 말을 걸어 보려 시도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쯤 되면 인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서진은 인훈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다.

식사를 마친 서진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했다. 카드를 받음과 동시에 휴대폰을 테이블에 두고 일어났다는 사실에 몸을 돌렸다. 언제 온 건지 자리에서 일어난 인훈이 서진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거.”

“고맙다.”

서진은 낚아채듯 휴대폰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저녁 강의까지 남은 시간은 중앙도서관에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인훈이 가게를 나가려는 서진을 불렀다.

“아, 맞다. 서진아, 생일 축하해.”

“…….”

“다음에 보자.”

“어. 응.”

서진은 얼떨결에 가게를 나왔다. 가게 건너편의 편의점에서 담배를 문 뒤 담배 연기를 머리 위로 내뱉었다. 서진은 건너편 가게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온 인훈을 보고 말을 걸려다 말았다. 이미 인훈은 골목 안쪽으로 사라지고 난 후였다. 인훈이 사라진 골목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이 내 생일인 줄은 어떻게 알았지?

* * *

저녁 무렵 집에 돌아온 서진은 휴대폰을 어깨에 걸친 채 거실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냉장고 안에는 어제 사 놓은 캔 맥주가 있었다. 서진은 맥주를 꺼내 싱크대 위에 올렸다. 서진의 휴대폰 너머로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생일 못 챙겨 줘서 미안해.

― 괜찮아. 누나도 일 적응하느라 바쁘잖아.

이젠 제법 고년차가 된 서윤은 내부 사정으로 병동 파트에서 수술 파트로 일을 옮기게 되었다. 딱히 병원과 문제가 생겨서 옮긴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진은 전혀 다른 파트로 일을 옮긴 서윤이 걱정됐다.

신경외과 특성상 응급 수술이 많거나 수술이 길어지면 퇴근 시간보다 늦게 병원에 남아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병동에서보다 더 많은 시간을 기욱과 같이 있으니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박기욱이라는 사람은 내 사람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한 사람이었다.

가끔 그 기준을 잘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긴 하지만. 고생하는 서윤에 비하면 생일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원래부터 생일을 잘 챙기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처음부터 상처를 받을 일 같은 건 없었다.

― 누나 사랑해. 내일 보자.

― 어머, 얘도 참. 누나도 우리 서진이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 당연하지. 난 누나밖에 없어.

― 큭큭. 알았어. 누나 다시 일 들어가야 하니까 끊자. 일찍 자구.

― 응. 알았어.

서진은 탁, 하고 전화를 끊었다. 시헌의 영향인가? 원래부터 서윤을 좋아하긴 했지만―친누나로서― 이런 식으로 제 쪽에서 먼저 애정 표현을 한 적은 상당히 드물었다. 먼저 말해 놓고도 뒤늦게 쪽팔렸다. 뭐, 아무렴 어떤가.

서진은 싱크대에 올려 두었던 캔 맥주를 까 그 자리에서 반쯤 마셨다. 맥주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서윤의 방에 있던 창문 너머로 자동차 헤드라이터의 불빛이 났다. 이내 익숙한 차 소리가 서진의 귓가에 울렸다. 기욱, 아니 시헌의 차 소리였다.

“……?”

잘못 들은 건가. 서진은 불빛이 사라지고 조용해진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착각인가보다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현관문 너머에서부터 쿵쿵대는 발소리가 들렸다. 서진이 현관문 앞으로 가자 문 너머에 있던 시헌이 소리쳤다.

“강서진 너 집에 있지?”

잔뜩 억양이 올라간 시헌의 목소리에 서진은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잠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시헌은 서진의 집 안으로 빠르게 들어왔다. 시헌에 의해 거실 안으로 밀린 서진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 당황한 표정.

“박시헌…! 말도 없이 갑자기 왜…….”

“씨발, 강서진!!!”

“뭐, 뭐야? 왜 그래?”

서진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싶었다. 시헌은 신발을 벗는 것도 잊은 채 거실로 들어와 서진의 멱살을 잡았다. 잔뜩 화를 내는 시헌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너 오늘 생일이라는 거 왜 말 안 했어!!”

“……”

“……”

서진은 얼마 남지 않은 캔 맥주를 근처에 대충 올려놓았다. 시헌의 손을 뿌리친 뒤 현관문을 잠근 서진은 시헌의 발아래를 손가락질했다. 그제야 시헌은 신발을 똑바로 벗어 현관에 놓았다. 신발을 벗는 시헌은 여전히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참다못한 서진이 한마디 했다.

“너 내 생일 챙겨 준 적도 없잖아.”

“…….”

“새삼스럽게 왜 그래.”

서진은 주변 사람들에게 생일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었다. 중학교 때야 남 챙기길 좋아하는 현정 탓에 생일이 되면 요란스럽게 케이크를 사 들고 쉬는 시간에 장난을 치며 선물을 교환하고 놀긴 했지만, 그때도 시헌은 어색하게 축하한다는 그 말만 할 뿐 뭔가를 나서서 한 적은 없었다.

서진의 말에 시헌은 인상을 찌푸렸다. 원래부터 생일을 잘 챙기지 않는다는 걸 알았고, 물어봐야지 해 놓고 잊어버린 제 잘못도 있지만 이건 아니었다. 작년에 챙기지 않았다고 해서 올해도 챙길 필요가 없다는 것은 시헌의 입장에선 궤변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작년엔 안 사귀었고 올해는 사귀잖아.”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긴 한데. 딱히 난 선물이나 축하 같은 거창한 건 필요 없…….”

말을 자른 시헌이 서진의 손을 붙잡았다. 시헌은 그 상태로 서진을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옷 갈아입어.”

“뭐야? 왜?”

“가자.”

“어딜 가?”

엉망이 된 방 안에 들어온 서진은 눈을 깜박였다. 저녁 아홉 시 반, 저녁도 다 먹은 마당에 달리 갈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서진의 답답한 모습을 참다못한 시헌이 소리를 질렀다.

“어디든 가지고!!”

“야야, 시험 기간인데?”

“상관없어.”

“아, 아니.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상관있거든? 정 그러면 시험 끝나고 어디든 가 줄게.”

“생일이라며! 가자고!”

일방적으로 우기는 시헌에 서진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한숨을 쉬었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시헌도 어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자고 우기고 있다는 걸 스스로 깨닫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이미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서진은 밖에 나가기가 매우 귀찮은 상황이었다.

“도대체 어딜 가게?”

“나도 몰라.”

참으로 당당도 하다. 서진은 고개를 떨구는 시헌의 모습에 머리를 긁적였다. 딱 봐도 제가 안 가면 어쩌나 하고 머릿속으로 고민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평소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시헌이라도 서진의 일에 관해서는 한없이 단순한 사람이 됐다. 서진은 시헌에게는 못 이긴다며 시헌을 방 밖으로 쫓아냈다.

“옷 갈아입고 올게.”

* * *

호텔의 프런트에서 몸을 반쯤 내밀며 대화를 마친 시헌이 서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울에 살긴 했지만 이런 큰 호텔은 처음이었던 서진은 호텔의 화려한 로비가 낯설기만 했다. 슬슬 대화가 끝나 가는 것 같다고 판단한 서진이 시헌에게 다가갔다.

“방 있대.”

“어, 그러냐.”

빠르게 계산을 마친 시헌은 카드키를 받고는 안쪽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마침 1층에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는 시헌이 버튼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렸다. 12층. 거의 꼭대기 층에 근접한 층수를 눌렀다. 멈추지 않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12층 안쪽 방으로 들어간 시헌이 카드키를 댔다. 서진은 문고리를 열고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씨발, 박시헌 장난해?”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화려한 침실에 서진은 문을 닫고 들어오는 시헌을 노려봤다.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한 시헌은 서진의 등을 안았다. 서진은 저에게 달라붙는 시헌을 밀어냈다.

“왜 스위트룸인데!!”

“방이 여기밖에 안 남았대.”

“거짓말하지 마.”

몸을 약간 튼 서진이 시헌의 턱을 살짝 들어 보이며 눈을 맞췄다. 거짓말을 하는 시헌은 평소보다 더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방 바꿔.”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사람이라도 지긋지긋할 정도로 보면 미세한 변화를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을 간파당한 걸 눈치챈 시헌은 서진의 양쪽 팔을 붙잡으며 눈을 반짝였다.

“안 돼?”

거짓말 다음에는 애교 공세라니. 시헌은 서진이 자신의 애교에 약하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시헌이 일방적으로 매달릴 때면 서진은 늘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핑크색, 그리고 군데군데 붉은색이 노골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스위트룸을 둘러본 서진은 여전히 제 손을 붙잡고 있는 시헌을 내려다봤다.

“따, 딱히 안 되는 건 아닌데……. 별로 좋은 기억은 없는 것 같아서.”

호텔의 스위트룸은 기욱에게 다짜고짜 이끌려와 원치 않은 접촉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 섹스라는 건 정말 말로만 알고 있었고, 바른 생활의 표본이었던 서진은 자위라는 것을 해 본 적도 없었다. 생에 첫 사정을 남자의 손―기욱―으로 하게 될 줄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당시 미성년자인 데다 막 고등학생이 된 서진을, 기욱은 끝까지 건드리진 않았다. 분명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기욱은 사정이라는 걸 처음 해 보는 자신을 붙잡고 거의 한계에 달할 때까지 몰아붙였다는 점이었다.

어딘가의 좋은 호텔의 스위트룸이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기억했다. 덕분에 서진은 호텔의 스위트룸에 대한 불편한 트라우마가 생기고 말았다.

“무슨 기억인데?”

“그냥, 그런 게 있어.”

말을 더듬는 서진에 눈치를 본 시헌은 현관을 흘끗댔다. 어지간하면 다 들어주는 서진이 끝까지 불편해하는 경우 대게 열에 아홉은 그 이유가 있었다. 서진은 마땅한 이유가 없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방 바꿀까?”

“하아, 됐어.”

엎드려서 절 받기도 아니고. 서진은 시헌이 잡은 호텔이 기욱과 있었던 호텔과 그 스위트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기도 하고, 스위트룸이라는 이름의 다른 장소라며 자기 합리화를 한 서진은 불편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창가 쪽으로 나갔다.

커튼을 걷자 호텔 바깥으로 보이는 야경이 제법 장관이었다. 층수가 많은 것도 한몫했다. 시헌이 다시 서진의 등 뒤에 머리를 기댔다. 이번에는 시헌을 밀어내지 않았다. 유리벽에 몸을 반쯤 틀어 기댄 서진은 시헌과 천천히 입술을 맞췄다.

통유리 때문인지 바깥에서 키스하는 것 같은 미묘한 짜릿함이 일었다. 잠시 키스를 멈춘 서진은 시헌의 어깨를 붙잡았다.

“야.”

“응?”

“어차피 이렇게 될 거면서 왜 나가자고 한 거야?”

“뭐가 문제야?”

“문제라고 할 것까진 아닌데…….”

서진은 반짝거리는 시헌의 눈을 피해 안쪽의 침대로 시선을 돌렸다. 호텔까지 이동 시간을 따졌을 때 이미 호텔 내부 식당의 식사는 전부 끝이 난 후였다. 룸서비스가 있지만, 룸서비스로 식사나 하자고 호텔에 올 이유는 없었다. 서진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어 갔다.

“어차피 할 거면 장소 따윈 아무래도 좋잖아. 근처 모텔에 가도 될 걸 번거롭게…….”

“삼촌한테 얘기했어.”

“뭘 또 얘기해?”

“시험 끝나면 별장 빌려 달라고.”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딴소리였다. 시헌은 대답하기 싫거나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 노골적으로 말을 돌리는 재주가 있었다. 별장. 난데없이 나타난 기욱과 부산에 내려가니 마니 하는 문제 때문에 가지 못했던 그 별장을 말하는 것 같았다.

정작 서진은 잊고 있었는데, 시헌은 그날 일을 신경 쓰고 있었다. 시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진과 별장에 가고 싶어 보였다. 도대체 그놈의 별장이 뭐라고. 귀찮긴 했지만, 시헌이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니 귀찮음을 이기고 오기로라도 가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너 그거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냐?”

“당연하지. 이제 와서 안 갈 거라고 하면 진짜 삐질 거야.”

“대놓고 삐질 거라고 말하지 마. 애냐.”

“같이 가 줄 거지?”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별장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으면 역으로 시헌과 별장에 놀러 가야 할 이유 또한 없으나 다름없었다. 키스하는 시헌의 손이 점점 서진의 츄리닝 바지 안으로 들어왔다. 브리프 팬티 위를 조몰락거리는 시헌의 손에 서진은 후,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씻고 하자. 나 찝찝해.”

“그냥 하면 안 돼?”

“땀 냄새 나서 안 돼.”

“난 상관없는데.”

“내가 안 된다고!!”

서진은 시헌을 밀어내고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오른쪽 구석으로 욕실이라 추정되는 문이 있었다. 서진은 곧장 욕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옷도 벗지 않은 채 들어간 서진을 본 시헌이 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은 잠가져 있었다. 문밖에 선 시헌은 쿵쿵거리며 문을 두드렸다.

“서진아, 열어 줘.”

“시끄러워. 씻고 올 거야.”

모처럼인데 지난번처럼 씻지도 않은 채 섹스를 하고 싶진 않았다. 호텔은 호텔. 서진도 서진 나름의 분위기를 내고 싶었다. 서진은 벗은 옷을 대충 한쪽에 잘 개 둔 뒤 물을 틀었다. 확실히 고층의 스위트룸이라 그런지 욕실 또한 상당히 좋았다.

이런 걸 모텔이랑 비교했다니 스스로가 참 웃길 지경이었다. 샤워가 끝나 갈 무렵 서진은 목욕 가운을 챙겨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어차피 벗을 거 다시 츄리닝을 입고 싶진 않았다. 서진은 문을 살짝 연 뒤 시헌을 불렀다.

“야 박시헌. 나 가운 좀.”

“…….”

“뭐야?”

대충 물기를 닦은 서진은 알몸인 상태로 밖으로 나왔다. 샤워가운은 벽 근처에 걸려 있었다. 일단 가운을 걸친 서진은 스위트룸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물기를 닦았다고는 하지만 머리 아래로 흐르는 물기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스위트룸을 전부 돌아본 서진은 방 안에 시헌이 없음을 확신했다. 욕실에 있는 옷가지들을 가져온 서진은 바지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냈다. 동시에 문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헌인가? ……그런 것치고는 인기척만 느껴질 뿐 문이 열리지 않았다.

현관 옆에 걸린 카드키를 본 서진은 문을 열어 줘야 하는 건가 보다 하고 안쪽에서 문을 열었다. 복도에 있는 것은 시헌이 아닌 낯선 카트를 든 남자였다.

“룸서비스 시키신 거 맞으시죠?”

서진은 카트에 있는 와인과 음식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룸서비스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생각만 했을 뿐 시킨 적은 없었다.

“시킨 적 없는데요.”

서진의 말에 남자가 당황하며 쪽지를 확인했다.

“네? 분명 1205호라고…….”

그가 서진에게 주문이 적힌 쪽지를 내밀어 보였다. 문 너머 문패를 확인한 서진은 한숨을 쉬었다. 자리에 없는 시헌과 멋대로 온 룸서비스. 아니라고 우기기도 뭐했던 서진은 뺨을 긁적였다.

“맞네요.”

종이에 적힌 방 번호와 서진이 있는 스위트룸의 방 번호는 틀림없이 일치했다. 설마 호텔 측의 실수일 리는 없으니, 남은 건 자리에 없는 시헌이 한 일로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서진은 시헌이 오면 물어보기로 하고 음식을 받았다.

음식이 전부 세팅되고 직원이 나가자 바로 시헌이 들어왔다. 꽉 닫히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온 것 같았다. 호텔 안에 있는 편의점에 다녀온 시헌의 손에는 담배와 간단하게 먹을 과자가 들려 있었다. 시헌은 테이블에 있는 음식들을 보며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벽에 걸었다.

“어, 벌써 왔네?”

털썩, 시헌은 일부러 서진이 앉아 있는 소파와 같은 방향에 앉았다. 성인 남자 두 사람이 앉은 소파는 푹 하고 아래로 꺼졌다.

“박시헌 너 또 멋대로…….”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뭐라도 먹자.”

“그 말이 아니잖아. 그리고 저녁 먹었어.”

“그럼 야식이라고 생각해.”

뻔뻔하긴. 서진은 될 대로 되라며 손을 저었다. 사실 말이 저녁이지 후라이에 대충 간장 넣고 밥을 비벼 먹은 게 다인 저녁이었다. 시헌은 익숙하게 팔을 뻗어 와인을 따랐다. 아직도 서진은 이런 게 익숙하지 않았다. 가끔 서진은 시헌의 이런 모습이 낯설었다.

예전부터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다고 느꼈지만 이젠 둘 다 성인이 된 지금은 성인도 다 똑같은 성인이 아니라는 것을 시헌을 보며 느꼈다. 서진은 아직도 이런 와인이니, 격식이니 하는 것들이 어색하고 어설펐다. 시헌은 늘 그렇게 서진을 조금씩 앞서갔다.

시헌은 서진에게 와인 잔을 넘겼다. 서진은 시헌을 따라 와인 잔 아래를 살짝 붙잡았다. 이렇게 잡는 게 맞는 거겠지? 어색하게 와인 잔을 붙잡는 서진의 모습에 시헌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참았다. 서진에게서 바디워시의 향이 났다.

“서진아.”

“왜, 또?”

“사랑해.”

뜬금없는 시헌의 고백에 서진의 손에 있던 와인 잔이 흔들리며 서진의 얼굴이 잔에 있는 와인처럼 붉어졌다. 엎어질 것 같은 불안함에 서진을 급히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하하, 놀랐어?”

“씨발, 넌 지난번에도 그렇고 타이밍이 왜 하나같이 그 모양인 건데!”

“내가 뭘.”

“분위기 좀 읽으라고!! 이게 어딜 봐서 고백할 타이밍인데?”

“한잔해.”

시헌은 들고 있던 와인 잔을 기울이며 서진의 테이블에 놓인 와인 잔을 손가락질했다. 잔을 든 시헌이 서진에게 달라붙어 팔을 꼬았다. 이게 뭘 하는 짓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시헌을 따라 괜히 팔을 꼬아 서로의 와인을 입에 댔다.

“생일 축하해.”

“고맙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서진은 시헌의 한마디에 진심으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늘 일에 치이며 정신이 없는 누나. 많은 걸 바란 것도 아니었고, 커다란 선물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케이크에 초나 꽂고 말 한마디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엔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괜찮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어디든 가자고 소리를 지르는 시헌이 고마웠다. 서진은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시헌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 진짜……. 나 울 것 같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생일이라는 건, 산다는 건 진짜 힘들구나.

* * *

“으응, 으. 아응. 응….”

침대 위 두 사람의 열기가 넓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와인 외에도 시헌이 사 온 술을 추가로 마신 두 사람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얼마나 섹스를 했는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짧은 시간 필름이 끊긴 기분이 들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헌과 몸을 섞고 있었다.

시헌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왔다. 러브젤과 더불어 질척한 정액이 서진의 안에 들어온 시헌의 페니스를 하얗게 물들였다.

“하으, 으응. 읏… 좋아.”

“이런 거 좋아하지?”

시헌은 일부러 끝까지 페니스를 넣지 않은 채 끝을 간지럽혔다. 지난번 섹스로 알게 된 것이었지만. 시헌의 행동에 서진은 흘러내리는 침을 주체하지 못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시헌은 페니스를 쥐고 흔드는 서진의 손을 치워 낸 뒤 제 손으로 서진의 페니스를 붙잡았다.

“하응, 응.…으으응! 나 진짜… 응. 갈 것 같아….”

“가도 돼. 얼마든지.”

“하으읏!”

허리가 들리며 몸을 부르르 떤 서진이 시헌의 손에 사정했다. 손에 묻은 정액을 대충 근처의 휴지를 뽑아 닦은 시헌은 서진의 허리를 붙잡아 허벅지 위로 올렸다. 무거울 법도 한데 시헌은 서진을 무릎 위에 올리고도 눈 하나 끔벅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덩치에 비해 힘 하나는 좋은 녀석이었다. 시헌의 무릎에 올라온 탓에 페니스가 끝까지 박혀 들어왔다. 안에서부터 조이는 느낌에 시헌은 후, 하고 낮은 숨을 내쉬었다. 시헌은 서진의 엉덩이 근처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움직여 봐.”

“흐으, 응… 으읏… 하으….”

시헌이 천천히 허벅지를 움직이자 그 움직임에 맞춰 서진이 허리를 흔들었다. 서진의 애달픈 움직임을 참지 못한 시헌이 허리를 움직이며 서진의 안을 정신없이 찔렀다. 시헌과의 섹스는 하면 할수록 사람을 애달프게 만드는 게 있었다. 시헌은 페니스를 쥐려는 서진의 손을 침대 뒤쪽으로 붙였다. 시헌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침대와 함께 서진의 몸이 흔들렸다.

“하윽! 윽, 으응. 응. 흐읏… 더. 더 해 줘. 나 진짜 미칠 것 같…….”

서진의 안을 흔들던 시헌의 페니스가 난데없이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빠져나간 페니스로 직전에 끊긴 쾌락에 서진은 잠깐 몸을 떨었다. 이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하며 눈을 깜박였다. 시헌은 서진의 위로 올라탄 뒤 뺨을 가볍게 쓸었다.

“서진아.”

“…하. 하으….”

허벅지 사이로 시헌의 정액이 닿는 느낌이 그대로 났다. 서로의 페니스가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닿을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사랑한다고 해 봐.”

“흐, 윽! 박시헌…! 하으윽!”

시헌의 페니스가 푸욱 하고 서진의 안을 깊숙이 찔렀다. 예고 없이 파고들어 오는 시헌의 페니스에 서진이 몸을 뒤로 내뺐으나 시헌이 조금 더 빨랐다. 서진은 시헌이 요즘 들어 섹스하면서 저를 놀리는 데 재미가 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도대체 저와 섹스를 하면서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느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하으응… 으읏… 시… 시헌, 야… 씨… 으으읏!”

“응? 안 할 거야?”

시헌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허리를 움직여 서진을 몰아붙인 뒤 계속해서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이고 나발이고 말할 정신은 줘야 할 거 아닌가. 시헌은 계속해서 사정하기 위해 페니스에 손을 대려는 서진의 양팔을 뒤로 붙잡았다.

“하으, 나… 제발 …가게 좀…….”

“사랑한다고 하면. 후, 가게 해 줄게.”

“…하으윽!”

짧은 침묵을 이기지 못한 시헌이 다시 퍽, 하고 서진의 안을 찌르고 들어왔다. 이게 미쳤나 진짜. 서진은 시헌과의 섹스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서진이 끝까지 대답을 안 하는 것이―사실 시헌이 대답할 여유를 주지 않고 있는 탓도 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시헌은 서진의 몸을 일으켰다.

“야, 흐읏 너… 하으응….”

서진을 침대 바깥으로 이끈 시헌은 서진의 팔을 스위트룸 한쪽의 커다란 통유리에 붙였다. 서진이 팔을 떼기도 전에 시헌이 서진의 안을 정신없이 흔들었다. 유리 너머의 불빛에 의해 등 뒤에서 움직이는 시헌의 모습이 유리에 비쳤다.

“흐. 아으응….”

일부러 서진이 최대한으로 느끼기 직전에 멈춘 시헌은 서진의 고개를 돌려 키스를 했다. 서진의 입가로 흐르는 타액을 손끝으로 닦은 시헌은 여전히 서진의 안에 페니스를 넣은 채로 고개를 약간 숙였다. 다리가 반쯤 풀린 서진은 시헌에게 간신히 기대 서 있는 것이 전부였다.

“…랑해. 사랑해. 시헌아.”

“나도.”

시헌의 이런 행동이 계속되면 정말 서진은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서진은 시헌과 섹스를 하면 할수록 시헌이 섹스에 능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실감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정말 섹스를 잘하는 건 집안 내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시헌이 섹스에 능숙해지는 만큼 서진의 몸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어딜 어떻게 해야 좋아할지, 사정하기 직전에 묘하게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는 버릇이 있다는 것까지 말이다.

“잘했어.”

서진의 몸을 유리벽에 붙인 시헌은 서진을 안은 채 허리를 움직였다. 아무리 벽이 있다고 해도 그렇지 다 큰 성인을 상대로 그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진의 상태는 그런 시헌의 사정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몸이 아래로 흘러내릴 때마다 아슬아슬할 정도로 걸쳐졌다가 들어오는 시헌의 페니스에 서진은 애가 탔다. 등 뒤가 통유리라 그런지 괜히 짜릿한 느낌이 나는 것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아래층으로 돌린 서진은 주차장의 차 불빛을 흘끗댔다.

“하으. 으응. 하으….”

“서진아, 하. 으읏…!”

울컥하고 안에서부터 시헌의 정액이 꽉 차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묵직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잠시뿐 질척거리는 정액은 서 있는 시헌의 페니스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미 몇 번인가 사정을 한 상태고, 아직 원래 남아 있던 시헌의 정액도 있어 불쾌한 감은 적었다. 한참 동안 애만 태우다 사정을 한 상황이라 다른 때보다 현자타임이 길었던 서진은 시헌에게 안겨 침대로 돌아와 숨을 골랐다.

“하으, 으으….”

진한 쾌감으로 인해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서진은 더 이상의 섹스는 힘이 부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때라면 이쯤에서 시헌도 그만하겠거니 하고 눈을 반쯤 감자 시헌의 손이 서진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야, 야, 야야 박시… 하으으으응!”

“후, 미안. 서진아. 내가 하, 오늘.”

“흐응, 으응, 응… 으으… 만… 읏….”

“못 멈출 것 같아.”

“하으읏! 야… 아으… 흐응….”

미친 듯이 박아 대는 시헌에 정신이 없는 서진이 시헌을 향해 발을 뻗었다. 시헌은 엉망으로 뻗은 서진의 발목을 잡아 위로 올린 뒤 다리를 벌렸다. 시헌은 노골적으로 벌어진 서진의 안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은 뒤 움직였다. 사실 이러려고 이런 건 아닌데. 서진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흥분하게 될 줄은 시헌도 몰랐다.

“미안.”

서진의 몸을 돌린 시헌은 제 밑에서 앙앙대며 우는 서진을 반쯤 무시한 채 정신없이 몸을 움직였다. 시헌의 손에 의해 몇 번이나 강제로 자세를 바꾼 서진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지친 신음을 흘렸다.

두고 보자 박시헌!!

* * *

“으윽….”

시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서진은 시헌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발을 내딛기 무섭게 온몸에서 짜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으읍!”

혹시 시헌이 깰까? 바닥에 주저앉은 서진은 재빨리 새어 나오는 비명을 막았다. 시헌은 잠시 몸을 뒤척일 뿐 일어나지 않았다. 서진은 근처에 있는 가구를 붙잡으며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갔다. 사랑한다고 말하라느니 뭐니 하며 창가 쪽으로 데려가기 시작한 순간부터 반쯤 핀트가 나간 시헌은 밑에서 깔리는 서진을 거의 무시한 채 자기 좋을 데로 섹스를 계속했다.

오죽하면 섹스가 끝나기 직전의 서진은 거의 반실신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서진은 간신히 욕실로 들어갔다. 오늘이 토요일이길 천만다행으로 생각하라며 남아 있는 정액들을 긁어낸 서진은 뜨거운 물로 샤워했다. 샤워가 한창일 무렵 욕실 문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쿵쿵거리는 소리에 시헌이 일어난 건가? 하는 생각에 서진은 잠갔던 욕실 문을 살짝 열었다.

“우왁! 바, 박시헌?”

“서진아?”

잠에서 덜 깬 시헌이 머리를 긁적이며 한참 샤워 중인 서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물에 잔뜩 젖은 알몸. 시헌의 시선을 느낀 서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내뺐다. 좁은 욕실에 뒤로 갈 곳이라고는 커다란 욕조 외에 없었다.

“아윽!”

물러나다 물러나다 손을 잘못 뻗은 서진은 물이 없는 욕조 안으로 빠지고 말았다.

“가, 강서진! 너 괜찮아?”

“아오. 아파. 괜찮아.”

욕조는 생각 이상으로 넓었다. 욕조 안에 들어간 서진은 허리 근처를 문질렀다. 욕조도 욕조지만 아직도 섹스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시헌은 서진이 들어간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금방 나갈 거라 생각했던 서진은 욕조 안으로 들어오는 시헌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이내 서진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시헌은 일어나려는 서진의 팔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바, 박시헌? 시헌아? 우, 우리 인간적으로. 이, 이러진 말자?”

안 그래도 힘이 없었던 서진의 몸이 시헌의 힘으로 이끌리며 욕조 아래로 반쯤 들어왔다. 점점 발기하기 시작한 시헌의 페니스가 종아리와 허벅지 근처에 닿았다. 후우, 하고 숨을 들이쉬는 것에 서진은 시헌이 필시 잠이 덜 깼음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말도 안 돼. 그렇게 섹스를 하고도 또 하겠다고? 서진은 이번만큼은 싫다며 시헌을 뿌리치고 욕조 밖으로 몸을 뻗었다. 시헌이 서진을 보낼 리가 없다는 듯 서진의 다리를 잡아 누르며 서진의 위로 올라탔다.

덕분에 서진의 몸의 절반은 욕조 바깥에 허리 안쪽은 시헌이 있는 욕조에 걸쳐진 상태였다. 무슨 수건도 아니고! 시헌의 손이 벽에 붙어 있는 물을 틀었다. 욕조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이 서진의 무릎을 적셨다. 서진을 누른 시헌은 서진의 고개를 들여 보이며 입술 근처를 핥았다.

“서진아, 한 번만 하자.”

“싫… 아으으읏!”

서진의 다리를 벌린 시헌은 곧장 서진의 안으로 손가락을 비집고 들어왔다. 페니스를 밀어 넣지 않은 게 어디인가 싶기도 하지만 빠르게 손가락을 늘리는 시헌에 서진은 죽을 맛이었다. 서진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점점 차오르는 물에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으으읏! 야, 바, 박시….”

할 거면 빨리하든가! 아침부터 또 무슨 장난인지 손가락을 끝까지 밀어 넣은 시헌은 서진의 전립선을 자극했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가라앉았던 서진의 페니스가 움찔거리며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똑바로 서기 시작했다.

“하아, 주말이잖아. 괜찮아.”

“으응. 난, 하으… 안 괜…… 하악!”

손가락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시헌은 말도 하지 않은 채 서진의 안으로 퍽 하고 밀어 넣었다. 안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시헌의 페니스에 서진은 정신이 없었다. 이미 욕조 안의 물은 무릎 위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서진이 물에 가라앉지 않을 정도로만 물을 받은 시헌은 서진을 욕조에 눕힌 뒤 페니스를 움직였다.

“흐으, 응. 하으응… 하으… 하윽! 아… 침부터 이러고… 하으읏! 싶냐!”

“아침부터, 읏. 날 유혹한 건 너야.”

“으읍….”

유혹이라니 얼어 죽을. 서진은 그냥 단순히 샤워한 것뿐이었다. 멋대로 발정이 난 건 그쪽이면서! 더는 시헌을 말릴 수 없었던 서진은 될 대로 되라며 시헌과 키스를 했다. 한 번만 한다던 시헌은 욕실을 나와서도 한참이나 계속 서진을 괴롭혔다.

* * *

“야, 박시헌.”

“미안.”

호텔 스위트룸 안으로 침묵이 흘렀다. 침대에 앉은 서진은 마찬가지로 침대에 무릎을 꿇고 있는 시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사실 고민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한 서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샤워하러 들어갈 때 정확히 몇 시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지금 시각이 12시가 넘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알았다. 욕실에서 한 거로도 부족해서 침대로 끌고 나와 몸이 채 마르기도 전에 섹스를 계속하는 시헌에 서진은 이번만큼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에 시헌의 분위기에 잘 어울려 주지 않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오늘따라 유독 끈질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오늘이 중간고사 직전 마지막 주말이라는 걸 생각하면 시헌은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

서진은 시헌이 자신을 좋아해서 그렇게 된 거라는 걸 알기에 차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결국, 특단의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서진은 무릎을 꿇으며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는 시헌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시험 끝날 때까지 섹스 금지야.”

“별거 아니네.”

“재시 끝날 때까지.”

재시험이라는 말에 시헌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시험 기간에 섹스를 안 하는 건 사실 당연한 일이니 조치라고 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재시였다. 재시험은 진짜 재수가 없으면 정말 시험이 끝나고도 한동안 시달릴 수도 있었다. 한 달이 될지, 그 이상이 될지는 성적에 따라 달려 있었다.

“그, 그럼 우리 별장은?”

시헌은 섹스 금지보다 그쪽을 더 신경 쓰고 있는 듯싶었다. 서진은 팔짱을 끼며 시헌을 내려다봤다.

“너 때문에 재시험 보면 안 갈 거야.”

“안 돼. 절대 안 돼.”

“그러니까 그 꼴 나기 싫으면 건들지 마!!”

서진의 말에 시헌의 고개가 푹 아래로 숙여졌다. 눈물을 글썽이는 시헌의 모습에 서진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봐도 안 된다고!!”

시헌은 서진의 생각 이상으로 학습이 빠른 사람이었다. 계속해서 거절하는 서진의 모습에 시헌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알았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