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 의심 그리고 불안 (2)
“어, 박시헌!”
월요일 아침, 먼저 강의실 한쪽에 자리를 잡은 서진은 시헌이 들어오는 모습에 손을 흔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들며 웃는 서진에 시헌은 비어 있는 서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는 시헌을 보며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늦었네. 차 막혔어?
“어.”
시헌은 곧장 들어오는 조교에 칠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헌이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의가 시작됐기에 서진은 더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침의 위화감은 단순한 위화감이 아니었다. 쉬는 시간에도 서진은 입을 다물고 이어폰을 낀 채 공부를 하는 시헌에 결국 다른 동기와 적당히 대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헌이 아침에 기분이 좋지 않은 적은 몇 번인가 있었다. 금방 괜찮아지겠지 싶었던 서진의 예상과 달리 시헌의 표정은 여전히 풀릴 줄을 몰랐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와 마주 앉은 서진은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야, 박시헌. 너 오늘 왜 그래?”
참다 참다 처음 하는 말이었다. 서진의 질문에 국을 떠먹던 시헌 또한 한숨을 쉬며 수저를 놓았다.
“강서진 너 토요일 날 어디에 있었어?”
“주말에?”
“토요일. 저녁에 어디 있었냐고.”
시헌은 또박또박 서진에게 말했다. 토요일 저녁. 서진이 저 말을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다. 기욱에게 한 시간만 자고 가라고 했던 서진이지만, 기욱보다 오래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기욱은 없었고, 왜인지 휴대폰은 배터리가 분리되어 있었다.
침대 옆 테이블엔 기욱의 글씨체로 적힌 메모와 택시비로 쓰라는 것 같은 뉘앙스의 돈이 있었다. 택시를 타고 나와 휴대폰을 켰을 때 시헌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했지만 차마 답장을 보낼 수 없었다. 그냥 조용히 넘어갈 줄 알았던 서진은 시헌이 이렇게까지 걸고넘어질 줄은 몰랐다.
“야,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내가 애도 아니고.”
“중요해.”
“…….”
“나한텐 중요해.”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너야말로 왜 그렇게 담담한데? 그냥 어디 있었는지 말하면 되는 거 아냐?”
“그건…….”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 이어진 침묵을 깬 것은 시헌이었다. 어려운 질문을 한 것도 아니었다. 대답할 시간을 충분히 줬음에도 불구하고 서진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시헌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이 담긴 식판을 챙겨 들었다.
“야, 박시헌!! 야!!”
“…….”
시헌은 서진이 채 말릴 틈도 없이 식판을 반납한 뒤 가게를 나갔다. 시헌을 쫓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서진은 이미 가게 밖으로 사라진 시헌에 짜증을 내며 의자에 앉았다. 얼마 먹지 않은 점심. 계란말이를 향해 젓가락질하던 서진은 뒷목을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서진은 억지로 반찬을 입안에 구겨 넣었다. 짜증이 나니 뭐라도 먹어야 할 것만 같았다. 먹으면 먹을수록 허기가 지는 느낌에 서진은 급하게 물을 마셨다. 제 잘못도 있긴 한데. 그래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가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이젠 괜히 시헌의 행동에 짜증이 났다. 잠시 식사를 중단한 서진은 바지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열었다.
「밥 먹고 있어?」 오후 12:21
잠시나마 시헌인 줄 알았던 서진이 바보였다. 기욱의 문자에 서진은 시헌이 나간 유리문 너머를 슬쩍 보더니 답장을 보냈다. 괜히 무시해 전화가 오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런데요.」 오후 12:22
서진은 문자가 간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곧장 휴대폰을 닫았다. 빨리 밥을 먹고 시헌을 찾아보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 안은 점심시간이라 학생들로 가득 찼다.
사람이 많아진 좁은 식당을 둘러보던 중 인훈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문 바로 안쪽에 있던 탓에 인훈이 서진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 서진아? 너도 여기 자주 오는구나?”
인훈의 말에 시헌은 그냥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들어온 인훈은 자리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가게 안이 만석이었다. 인훈은 비어 있는 서진의 앞자리를 흘끗댔다. 시헌이 음식이 있던 식판째 들고 가긴 했으나 검은색 테이블 위에는 다 치우고 가지 못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누구랑 같이 먹고 있었어?”
“갔어.”
“어?”
“갔다고.”
“아, 그렇구나.”
자리가 없으니 인훈이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거라고 생각했던 서진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시헌이 가고 난 자리를 노리는 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서진은 제 앞에 서성거리며 서 있는 인훈이 묘하게 거슬렸다.
이상하게, 인훈이랑 같은 장소에 있으면 가슴이 빨리 뛰고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몸이 안 좋나 생각해 봐도 전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이유 없이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앉아도 돼?”
“상관없어.”
어차피 앉으려고 물어본 주제에. 서진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인훈은 시헌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알바생이 다른 테이블의 주문을 받는 사이 인훈은 앞자리에 떨어진 음식의 흔적들과 여전히 식사하는 서진을 흘끗 바라봤다.
“근데 누군데 밥 먹다 말고 가?”
“그런 게 있어.”
“급한 일이었나 봐?”
“씨발, 그 새끼 얘기 그만 좀 하라고!!”
쾅, 하고 내려치는 주먹과 커다란 목소리에 가게 사람들이 두 사람을 쳐다봤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서진은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 결국, 밥은 입에도 대지 않은 채 서진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적였다.
“싸웠어?”
“미안하다. 좀 예민해져서.”
“아, 아냐. 내가 경솔했지.”
“밥 먹어라.”
서진은 식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이렇게 까칠한 성격이 아닌데. 아무리 시헌과 싸운―그걸 싸웠다고 할 수 있다면― 후라 해도 유독 인훈에겐 예민하게 구는 구석이 있었다. 본인도 그걸 느끼긴 느끼는데 쉽게 조절할 수 없었다. 안 마주치는 게 득이겠지, 싶은 서진은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향했다.
“계산되어 있어요.”
알바생이 서진이 온 자리를 흘끗댔다. 남아 있는 것은 시헌이 가고 난 이후에 인훈이 시킨 음식뿐이었다.
“그거 계산해드릴까요?”
“아뇨. 됐어요.”
서진은 손을 흔든 뒤 가게를 나왔다. 인훈 걸 대신 계산해 줘야 할 의무 따위는 없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자신의 몫까지 계산하고 간 시헌의 행동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기가 막혔다고 해야 하나, 역시 시헌답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 밖을 나온 서진은 골목 사이로 들어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원래라면 시헌을 데리고 이 근처를 한 바퀴 돌 생각이었다.
여유롭게 식사를 해도 다음 강의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시헌과 싸운 지금 서진은 할 일이 없었다. 좀 일찍 강의실로 돌아가거나 도서관이나 갈까 생각도 했지만, 이 기분에 공부가 머릿속에 들어올 것 같지가 않았다. 서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연신 줄담배를 피웠다.
“서진아.”
인훈의 목소리에 돛대를 입에 문 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아, 멀리 가서 피울 걸 그랬나. 생각보다 빨리 밥을 먹고 온 인훈에 서진은 뺨을 긁적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혹시 수요일 날 강의 끝나고 뭐 해?”
“왜?”
“아, 별건 아니고. 아까 애들이랑 잠깐 문자했는데. 술 마시기로 했는데 한 명이 부족해서.”
“니넨 술을 인원 따지고 먹냐?”
술 마시는 데 인원이 뭔 상관이란 말인가. 서진의 비아냥에 인훈은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알면서.”
“…….”
“여친이랑 헤어졌댔지 않아? 거기 애들 미대라 장난 아니거든. H대 의대면 애들도 무조건 오케이 할 것 같은데 올래?”
“안 가.”
“아, 그러지 말고.”
이 자식 왜 이렇게 치근덕대는 거야? 서진은 남의 과팅에 끼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다. 애당초 인훈이 그런 자리에 자신을 부르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씨발, 안 간다고 했……. 몇 시인데?”
미친 건가.
계속되는 인훈의 말에 서진은 저도 모르게 확 당기는 느낌이 들어 시간을 물어보고 말았다. 이미 엎어진 물이라 방법이 없었던 서진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인훈의 대답을 기다렸다. 뭐, 못 들은 척하고 넘어가면 넘어가는 대로 상관은 없지만.
“오는 거야?”
“시간이랑 장소.”
“우리 학교에서 별로 안 멀어. 내가 일단 문자해 줄 테니까 내일까지 관심 있으면 답장 보내 줘.”
“어, 그래.”
적당히 고개를 끄덕인 서진은 담배를 끈 뒤 꽁초를 근처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다. 아직 간다고는 안 했으니까 상관없겠지.
그리고 멋대로 간 것도 너잖아.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이었다.
* * *
식당에서 나온 시헌은 건너편 골목 편의점에 들어갔다. 사실 편의점에 들어갈 생각으로 들어간 건 아니었다. 짜증이 나서 발 이끌리는 대로 들어간 곳이 편의점이었을 뿐이었다. 한가한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 시헌은 담배 한 갑을 샀다.
계산하기 직전 계산대 밑에 있는 초콜릿바가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초콜릿을 집어 들어 계산을 해 밖으로 나왔다. 시헌은 얇은 포일을 벗겨 담배 대신 초콜릿을 입안에 구겨 넣었다.
“달아.”
초콜릿의 진한 향이 입안으로 퍼졌다. 뭔데 이렇게 달아? 시헌은 인상을 구기면서도 초콜릿을 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강서진,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초콜릿 자주 먹었었지. 요즘 들어서 먹는 모습은 못 봤지만.
그땐 참 별걸 다 먹는구나 싶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것도 나쁘진 않았다. 짜증이 나니까 그런가. 편의점 벽에 기대 담배 대신 초콜릿을 전부 입에 넣은 시헌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절반 정도 문자를 치던 시헌은 끝내 문자를 다 치지 못하고 휴대폰을 닫았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시헌은 입술을 깨물며 학교 도서관 쪽으로 향했다. 왜 기욱한테는 연락하면서 저한테는 연락을 안 했단 말인가. 도대체 자신에게도 말 못 한 일이란 게 뭐지? 까지 생각한 시헌은 목 끝까지 올라온 욕설을 간신히 참으며 도서관 입구로 들어갔다.
시헌은 중앙도서관 입구 옆에 배치된 컴퓨터에 다가갔다. 괜히 주변을 둘러본 시헌은 이내 서진의 계정을 치고 들어갔다. 예전에 몇 번인가 접속하는 걸 본 기억이 있었다. 혹시나 하고 검색했는데 로그인이 됐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시헌의 손은 이미 마우스를 향해 있었다. 주말 이틀 동안 방문 기록을 클릭한 시헌은 컴퓨터 화면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씨발 뭐냐.”
주말 동안 서진은 학교 중앙도서관에 방문한 적이 없었다.
* * *
“마실래?”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온 서진에 기욱은 작은 냉장고를 열어 병으로 된 오렌지 주스를 내밀었다. 서진이 싫다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마시겠다는 의미로 착각한 기욱은 서진에게 주스 병을 내밀었다. 강제로 찬 주스 병을 품에 안은 서진은 기욱의 오피스텔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얼마 만에 오는 거지? 그때는 제법 새로 들어온 방 같은 느낌이 강해 불편했는데, 지금은 평범한 집처럼 사람 사는 구석이 되어 있었다. 병에 있는 주스를 반쯤 비운 서진은 새로 생긴 작은 책상 위로 손을 올렸다. 책상에는 기욱의 병원 관련 서적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두꺼운 의학 서적과 자료들을 생각 없이 둘러보던 서진은 서류 사이에 끼어 있는 익숙한 물건을 집어 들었다. 이게 왜.
“강서진, 왜 그래?”
마침 화장실에서 나온 기욱은 책상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서진을 불렀다. 저를 부르는 이름에 흠칫, 놀란 서진은 몸을 반쯤 돌렸다. 어느새 기욱의 커다란 몸이 서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오렌지 주스를 책상 한쪽에 올려놓은 서진은 손에 있는 물건을 들어 기욱에게 보여 줬다.
검은색의 길쭉한 립스틱이었다. 립스틱 뚜껑을 열자 꽤 오래 사용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진은 이 립스틱은 서윤의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서윤이 거네.”
기욱도 립스틱을 보고 자연스럽게 서윤이 거라며 말했다.
“누나도 여기 알아요?”
“당연한 거 아냐?”
기욱은 뭘 그런 걸 묻냐며 어깨를 들썩였다. 립스틱을 내려놓은 서진은 오피스텔 현관 안쪽에 있는 신발장을 열었다. 신발장에서는 기욱이 신지 않을, 그리고 서진의 눈에 익은 서윤의 구두가 있었다. 기욱은 서윤의 구두를 보고 있는 서진의 목 뒤로 팔을 걸었다.
서진은 그런 기욱의 손을 밀어냈다. 하여튼 까다롭게 굴기는. 기욱은 말없이 저를 노려보는 서진에 약간 거리를 벌리며 한숨을 쉬었다. 가끔 보면 서진은 서윤보다 더 여성스러운 기질이 있었다. 사실은 원래 여자였는데 남자로 잘못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왜 또.”
“말이라고 해요?”
“뭐가 문젠데?”
“진짜 뭐가 문젠지 몰라서 물어요?”
모르겠다는 기욱의 말에 서진은 결국 울컥하며 소리를 질렀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팔을 붙잡아 벽에 붙였다. 반항은 했지만, 여전히 서진은 힘에서 기욱을 이길 수가 없었다.
힘의 문제가 아니라, 두려움의 문제였다. 박기욱이라는 존재 자체가 내려다볼 때면 서진은 마치 사슬에 묶인 것처럼 온몸을 꼼작도 할 수가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욱에게 눌린 양손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놔, 놔요.”
“전엔 잘했잖아. 이제 와 왜 그러는데?”
“개자식.”
역시 알고 있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서진은 이 오피스텔에서 서윤과 기욱이 섹스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니, 분명히 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결과론적인 행동에 고개를 저었다.
“강서진, 오해야.”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다, 다 했는데……. 그래도 이건…….”
“서진아.”
“얼마나 더 사람 비참하게 만들어야 속이 풀려요?”
서진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사실 울려고 운 건 아니다. 서윤이 오피스텔을 알고 있다는 것보다 시헌의 일 때문에 평소보다 더 예민해진 것뿐이었다. 서진은 기욱에게 아닌 화풀이를 하는 것뿐이었다. 서진이 울 줄 몰랐던 기욱은 손에서 힘을 빼며 한숨을 쉬었다.
“다시는.”
“…….”
“오피스텔에서 섹스 안 할 테니까. 화 풀어.”
“화 난 거 아녜요.”
“짜증 난 거잖아. 내가 여기서 강서윤이랑 잔 거 때문에. 너 생각 하고 한 적 없으니까 신경 꺼.”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렇게 생각하고 짜증 낸 거잖아. 됐다. 나가자.”
기욱은 바닥에 떨어진 서진의 잠바를 주워 서진에게 내밀었다. 서진은 기욱이 주는 잠바를 대충 걸쳐 입었다. 죽어도 안 하겠다는 소리는 안 하는 기욱이 서진은 미치도록 싫었다. 서진은 기욱과 함께 건너편에 있는 번화가 너머 모텔에 들어갔다.
모자를 쓰거나 움츠리고 들어간 적도 몇 번인가 있었지만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기욱은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코트를 벽에 건 뒤 침대 걸터앉았다. 다리를 꼰 기욱은 여전히 현관 근처에서 서 있는 서진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불만이야?”
슬슬 서진에게 맞춰 주는 것도 짜증이 나기 시작한 듯 기욱의 목소리가 약간 날카로워졌다. 서진은 그런 기욱에 고개를 저으며 눈치를 살핀 뒤 말했다.
“만약에요.”
“만약에?”
“그러니까 진짜 만약인데요.”
“뭔데.”
오늘따라 유독 예민하게 구는 서진에 기욱은 이상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서진은 평소 만약이라는 단어를 잘 입 밖에서 꺼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뭔가를 말하는 타입은 더더욱 아니었고. 기욱은 서진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한참 만에 서진이 말했다.
“조,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어떻게 해요?”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 * *
시헌은 잠결에 울리는 휴대폰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알람인가? 침대 옆 선반 쪽으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휴대폰 화면의 불빛에 눈이 부셨다. 눈살을 찌푸린 채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서진」
서진에게서의 전화였다. 놀란 시헌은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은 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 …….
― …….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할 말은 없었다. 서진의 휴대폰 너머로 사람들의 말소리와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이 전부였다. 밖, 그것도 대학가 정도 되는 곳 같았다. 시헌은 휴대폰을 어깨에 걸친 채 방의 불을 켰다. 문을 살짝 열어 불이 꺼진 거실을 둘러봤다.
거실 너머 묘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방의 불을 켠 시헌은 다시 침대로 돌아와 이불을 덮어썼다. 이럴 거면 불을 왜 켰나 싶지만. 여전히 휴대폰은 침묵이 흘렀다. 이불 바깥으로 얼굴을 살짝 내밀어 책상에 있는 디지털시계를 바라봤다.
새벽 2시가 좀 넘어 있었다. 휴대폰 너머로는 서진의 가뿐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숨소리가 또 제법 야해서 시헌은 이게 뭔가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결국, 반쯤 목이 잠긴 시헌이 먼저 말했다.
― 새벽에 뭐 하는 짓이야.
― 박시헌, 만나.
― …….
― 만나자고 씨발.
홱 이불을 걷은 시헌은 침대에 바로 걸터앉았다. 유난히 흥분한 말투며 목소리가 정상은 아니었다. 새벽 두 시, 번화가. 시헌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진에게 물었다.
― 야, 너 술 마셨냐?
― 그래. 마셨다. 술 마셨다고! 마셨음 어쩔 건데?
시비조인 서진의 말투에도 불구하고 시헌은 술이라는 말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급하게 장롱 문을 열었다. 아오. 이걸 진짜.
― 너 어디야. 지금 어딘데?
― 주원역 앞이야. 택시 타고……. 갈 테니까 만나.
― 얼마나 먹었는데?
― 몰라, 다섯 병? 여섯 병? 기억이 안 나지. 하여튼 많이 마셨어.
많이 마셨다는 서진의 말이 틀리진 않는 모양인지 중간중간 발음이 새거나 꼬여 있었다. 시헌은 곧장 장롱에 있는 잠바를 입은 뒤 모자를 눌러썼다.
급한 대로 지갑과 차 키를 챙겨 잠바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거실로 나가기 위해 방의 문고리를 붙잡은 시헌의 손이 멈췄다.
― 누구랑 먹었는데? 몇 명이야?
서진은 혼자서 술을 즐겨 마시는 타입이 아니었다. 특히 대여섯 병 이상을 마실 때는 누군가와 함께 있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무리해서 술을 마시진 않는다. 시헌은 서진이 혼자 그 먼 번화가까지 나가 술을 마셨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 하하, 여 다 합치면 엄청 많지. 나 혼자 그 정도 마셨다는 거야.
― 무슨 소리야?
―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술에 취한 서진은 그런 시헌의 의심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시헌은 서진이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상태로 택시를 타고 오겠다는 서진을 시헌은 믿을 수가 없었다.
― 어쨌든 너네 아파트로 갈 테니까 나와.
― 씨발, 많이도 처먹었네.
참다못한 시헌은 짜증을 내며 거칠게 문을 열었다. 서진과 싸우고 난 이후 누군 하루하루가 심란해서 죽을 것 같은데 누군 팔자 좋게 술이나 마시고 있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 아냐, 내가 갈게.
― 강서진 닥쳐. 너 거기서 기다려.
― 싫어.
― 기다리라고.
― 알아써. 화내지 마.
불이 꺼진 거실 안쪽에 있는 기욱의 방문이 열렸다.
― 이따 전화할게.
기욱의 인기척을 느낀 시헌은 곧장 전화를 끊은 뒤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시헌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흰 티셔츠를 입은 기욱이 거실로 나왔다. 기욱은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거렸다.
“새벽에 어디 가?”
“그런 게 있어.”
기욱과의 대화로 오래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던 시헌은 건성으로 대답한 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내림 버튼을 눌렀다. 1층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던 시헌은 비상계단으로 들어갔다.
역 근처에 도착한 시헌은 차를 한쪽에 대 놓은 뒤 주변을 둘러봤다. 1번 출구 근처에서 기다리라고 했건만 서진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시헌은 다시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지속되는 사이 건너편 횡단보도에 있는 서진이 시헌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파란불로 바뀌기 무섭게 서진이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시헌아.”
“…….”
시헌을 부르는 말투하며 계속해서 멋대로 웃는 서진에 시헌은 골치가 아프게 됐다며 이마를 짚었다. 많이 마셨다고 얘기는 들었지만 이건 시헌의 생각보다 심했다. 시헌은 술에 잔뜩 취한 서진보다 말도 없이 술을 잔뜩 마신 서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헌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일단 가자.”
“야, 박시헌. 시헌아아!”
“어. 왜!”
등 뒤로 귀에 딱지가 앉게 부르는 이름에 시헌은 참다못해 걸음을 멈추고 등을 돌렸다.
“얘기 좀 하자고. 근처에서.”
서진이 사람이 줄어든 도로 주변을 둘러봤다. 마침 시헌의 눈에 공원이 들어왔다. 시헌은 서진을 데리고 안쪽 공원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공원 한쪽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오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원 내 놀이기구의 디자인이나 외관은 달라졌지만, 이 자리에 공원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이곳에서 이상한 대학생들과 싸웠던 사실을 시헌은 분명히 기억했다. 막상 얘기하자며 벤치에 앉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정이 생각난다.”
“…나도 그래.”
서진의 중얼거림에 시헌도 고개를 끄덕였다. 중학생치고는 나이에 맞지 않게 화려했던 현정, 그 때문에 남자 친구랍시고 데려온 사람이 고등학생이거나 성인인 경우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집안 사정으로 중간중간 현정과 연락을 하는 시헌과 달리 서진은 중학교 졸업 이후 현정을 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공원 사건을 해결한 것은 시헌도, 서진도 아닌 기욱이었다. 기욱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시헌은 먼저 일어나 서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차에 들어가서 얘기해.”
“응.”
술에 취한 서진은 성가셨지만, 유독 말을 잘 들었다. 싸운 와중에도 이런 것만 눈에 보이는 시헌은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서진은 시헌의 어깨에 몸을 반쯤 기대 비틀거리며 공원을 나왔다.
“박시헌. 시헌아.”
“…….”
“자기야.”
“왜?”
“너 오늘 왜 그랬…… 에취!”
걸음을 멈춘 서진이 급하게 재채기를 했다. 시헌은 서진의 옷차림을 살폈다. 설마 하고 잠바 지퍼를 내려 옷 안을 살폈다. 얇은 티셔츠 차림, 심지어 잠바도 시헌의 생각처럼 두껍지 않았다. 시헌은 참 가지가지 하는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오늘…… 취! 아, 돌겠네.”
계속되는 기침에 서진이 짜증을 냈다. 시헌의 손이 서진의 이마에 살짝 닿았다. 목에 손을 대고 서진의 상태를 대충 확인한 시헌은 심한 감기 상태는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진짜 감기에 걸릴 수도 있겠지만. 시헌은 짜증을 내며 입고 있던 잠바를 벗었다.
“너 잠바 내놔.”
“왜?”
“내 거 입으라고.”
“나도 잠바 있어.”
“닥치고 입어.”
시헌은 서진의 잠바를 빼앗아 대충 걸쳤다. 서진은 작은 시헌의 잠바가 불편한 듯 팔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내 시헌이 입다 만 거라 그런지 따듯한 감촉에 잠바 소매에 얼굴을 비볐다. 서진의 잠바를 입은 시헌은 생각보다 더 얇은 서진의 잠바에 혀를 찼다.
“옷 좀 사.”
“시끄러워. 사 줄 거 아니면.”
“사 줄게.”
“됐네요.”
누굴 닮아서 그런지 말하는 것도 참 얄미웠다. 서진은 이 와중에도 기욱을 생각나게 하는 시헌이 짜증이 났다. 시헌과 기욱은 분명히 다르다. 다르면서도 같았다. 그 미묘한 같음이 서진을 좀 불편하게 만들었다. 차까지는 거리가 있던 터라 조금 더 가야 했다. 아직 남아 있던 술기운이 확 올라오던 서진은 앞서가는 시헌의 팔을 붙잡았다.
“나 차까지 못 갈 것 같아.”
다리가 풀린 서진의 몸이 시헌에게 기울어졌다. 제 품에 안긴 서진을 내려다본 시헌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 * *
모텔 안으로 들어가 방을 잡은 시헌은 테이블에 있는 티백 차를 유리컵에 타 서진에게 내밀었다. 티백의 녹차 향이 점점 퍼지며 은은하게 색이 났다. 침대에 걸터앉은 서진에 시헌은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녹차를 반쯤 마신 서진은 모텔 방 안을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차까지 가기 힘들 거라고 말한 건 서진이 맞긴 하지만.
“야, 그래도 모텔은 아니다, 모텔은.”
“…….”
모텔이든 차 안이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입을 꾹 다무는 시헌에 서진은 입고 있던 시헌의 옷을 벗어 침대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화낼 줄은 몰랐어.”
“아직도 화났어.”
“미안해.”
서진이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서진은 시헌이 자신을 보러 그렇게 무리를 하면서까지 서울에 올라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서진은 시헌이 화가 난 이유가 단순히 그런 실망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싫어.”
“야, 박시헌.”
“뭐? 강서진. 너 진짜 니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서 물어? 미안하다고? 씨발, 너 때문에 일찍 서울로 올라온 건 그렇다 쳐. 근데, 나한테 말도 없이! 다른 새끼들이랑 술 처먹고 이제 와 전화하는 니가. 미안하다는 말이 입에 나와?”
“…….”
“주말에. 뭐 했어.”
시헌은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도대체 그날 저녁. 서진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서진이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시헌은 서진의 침묵이 더 답답하기만 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사람을 이렇게 미치게 하는 걸까.
“그게…. 있잖아, 시헌아 내가…….”
“너. 뭐가 그렇게 잘났어? 대체 뭐가 그렇게 잘났길래 그렇게 매번 숨기냐고!!”
“미안해.”
“씨발, 그게 아니잖아!! 뭐라고 말 좀 해봐!”
“진짜 미안.”
“너 진짜 도서관에 있던 거 맞아?”
서진은 녹차가 담긴 유리컵을 만지작거렸다. 컵을 쥔 손바닥으로 뜨거운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도서……. 맞아.”
“나 똑바로 보고 말해. 진짜 맞냐고.”
“맞아. 맞다고.”
더 물러날 방법도 없었던 데다 몰아붙이는 시헌에 서진은 머리를 굴릴 틈조차 없었다. 시헌이 왜 도서관 얘기를 하는지 잘 알지는 못했지만, 서진은 시헌의 말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서진의 대답에 시헌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시헌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 때 머리를 긁적이거나 노골적으로 찌푸리는 버릇이 있었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제 대답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을 눈치챈 서진이 말을 덧붙였다.
“그날 학생증 두고 와서 경비한테 말하고 그냥 들어갔어.”
문득 서진은 중앙도서관 계정을 시헌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늘 사용하는 계정에 늘 사용하는 비밀번호이니 시헌이 알고 있다 해도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변명이 될지 안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야, 그걸 왜 지금 말해?”
“니가 다짜고짜 짜증부터 내니까 그런 거잖아.”
“…….”
“씨발, 너 내 아이디 들어갔지?”
시헌이 입을 다물며 괜히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시헌이 말하는 투에 확신이 있을 때부터 수상하다 생각은 했었다. 결론만 놓고 보면 시헌이 서진의 계정을 몰래 들어갔으니 화를 내야 하는 것이 맞으나, 시헌에게 거짓말을 하는 서진도 시헌의 행동에 대해 추궁할 만한 자격은 없었다. 시헌은 침대에 앉아 술에 취해 휘청거리는 서진을 바라봤다.
“술은 누구랑 마셨는데?”
“과 애들이야.”
“과 애들이 한두 명이야? 어느 과야.”
금세 추궁하듯 되묻는 시헌의 말투에 서진은 슬슬 짜증이 났다. 이번 일은 서로 잘못한 일이다. 잘못이라고 해야 할까. 오해와 거짓말, 잘못된 대처 방식으로 인해 발생한 일이었다.
“과 애들이라니까.”
“어느 과냐고. 누군데?”
생각해 보니 시헌과 사귀기 시작한 이후 서진은 시헌이 없는 자리에서 술을 마셔 본 기억이 없었다. 친구라고 해 봤자 대학 동기가 다였던지라 결국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시헌은 그렇게 끼는 술자리에서 술값은 제가 전부 결제를 했다.
시헌이 오면 술값이 굳는다는 걸 눈치챈 몇몇 동기나 지인들은 말하진 않지만 물밑에서 시헌의 등장을 반기기도 했다는 걸 서진이 모를 리 없었다. 서진을 향한 질투에 비하면 시헌에게 그런 돈 몇 푼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 어린 애도 아닌데, 술 먹는 걸 일일이 허락받아야 하나? 술 때문에 감정이 격해진 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짜증 나는 건 짜증이 나는 거였다.
“그래 씨발, 여자 끼고 마셨다! 경영학과 애들이랑 J대 미대 여자애들이랑 술 마신다는데 사람 부족해서 갔다고!!”
말이 그렇지 과 미팅이라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도 제 과가 아닌 다른 과의 미팅이었다.
“야! 강서진!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니가 경영학과 술자리에 왜 가는데?”
“왜! 왜? 왜 못 가는데? 왜! 내가 여자라도 만날까 봐 그랬냐? 씨발, 주말에 도서관 갔다고!! 사귀자며. 그럼 의심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람 말 좀 믿어야 되는 거 아냐? 그러는 너는, 너는 나한테 말이라도 한 적 있어?”
“…….”
“전부터 그랬어. 세상 다 아는 것처럼. 너 혼자 사는 것처럼! 씨발, 너 그러는 거. 예전부터 존나 재수 없었다고! 은소도……, 은소가 널 얼마나…… 대체 왜……. 내가, 내가 이런 말을 하려 하는 게 아니라고!!”
서진은 끝내 눈물을 흘렸다. 기은소. 은소가 죽은 그날 이후 그 이름은 마치 둘 사이에서 금기 단어처럼 변하고 말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 가슴에 묻어 둔 이름일 뿐이었다. 시헌의 고백을 받은 순간, 시헌과 사귀기 시작하면서 은소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모르는 척 입을 다물었다. 사람은 늘 죄를 짓고 살았다.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눈앞에 일어난 일에 별일이 없을 거라며 자기 합리화를 했다. 그 당시에도 세 사람의 관계는 엇갈렸었고, 은소가 사라졌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헌은 눈물을 흘리는 서진을 달래기 위해 침대 위로 올라왔다.
“미안.”
서진은 시헌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고개를 들 자신이 없었다. 진심으로 미안해해야 하는 사람은 시헌이 아니라 서진이었다. 시헌에게 안긴 서진의 몸이 파르르 떨려 왔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하루하루가 길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맞는 건지, 낭떠러지로 가고 있는 건지조차 모른 채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 발을 내디딜 뿐인 인생이었다. 뒤를 돌아보면 전부 가시밭길일 뿐이었다. 시헌은 서진이 마시다가 만 녹차가 담긴 컵을 내밀었다. 이미 식은 녹차를 들이마신 서진은 숨을 들이켰다. 사실 술 탓에 녹차 맛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냥 텁텁한 물일 뿐이었다.
“말하려 했는데. 네가 먼저 그렇게 짜증을 내니까. 말을 못 하겠더라고.”
“…….”
“그래서 짜증 나서 술 마신 거야.”
“도서관에 있었다고 하면 됐잖아.”
“그렇게 몰아붙이는데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서진의 반박에 시헌은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망설이는 서진의 태도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시헌은 곧장 자리를 박차고 식당을 나갔다. 어쩌면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서진이 말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때의 시헌은 그저 도서관 출입 기록에 찍혀 있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서진을 의심부터 하고 봤는지도 몰랐다.
주말에 학생증을 두고 오는 실수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시헌의 침묵에 고개를 이리저리 흔든 서진이 멋대로 말을 계속했다. 입에서 술 냄새가 풀풀 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똑바로 말을 하는 것이 참으로 대단한 정신력이 아닐 수 없었다.
“짜증 나서, 술 마신 거야. 술 마시는데, 취향인 여자애가 있더라? 걔가 번호를 묻는데. 네 생각이 딱 나더라고. 나,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
“애인이 있냐고 물어봤을 때, 대답을, 대답을 못 하겠더라.”
“서진아.”
점점 격해지는 서진의 모습에 시헌이 서진의 등을 토닥였다. 고개를 살짝 든 서진은 계속 말할 거라며 시헌을 밀어냈다.
“사실, 네, 네가 그렇게 질투할 줄은 몰랐어. 걱정할 줄도 몰랐고.”
“강서진. 진정하고 나 봐.”
흥분한 것이 틀림없었다. 시헌은 그만하라는 식으로 천천히 서진의 입술을 막았다. 술에 의해 혀가 뻣뻣하게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시헌은 입술을 뗀 뒤 서진의 어깨를 붙잡아 양손으로 눌렀다.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좋아해. 그, 그러니까. 네가, 네가 없으면 정말 미칠 것 같아.”
“…….”
“그걸 질투라고 말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그냥 다, 다 꿈만 같아. 넌 늘 멀기만 했는데.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게. 그래서 꿈에서 깨면 네가 사라질 것 같아서. 그냥 무서워.”
서진은 시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시헌 또한 서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서진에게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뭔가 달랐다. 그 다름이 시헌을 서진에게 이끌리게 하였다.
그 감정이 좋아한다는 감정이라는 걸 깨달아도 마음을 전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시헌에게 강서진이라는 사람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손을 뻗어 그 형체를 만지기 시작하면 신기루처럼 멀어지고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시헌은 서진의 뺨 위로 손을 올렸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 있다는 것 자체를 시헌은 믿을 수 없었다. 서진은 제 뺨 위에 올라오는 시헌의 손을 붙잡았다.
“난 여기 있잖아. 아무 데도 안 가.”
“네가 거짓말을 해도 좋아. 나한테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까.”
“…….”
“제발, 제발 사라지지 마. 서진아.”
“하하, 누가 보면 어디 멀리 떠나는 줄 알겠다.”
시헌의 몸을 천천히 뒤로 눕힌 서진이 먼저 시헌에게 키스를 했다. 우린 왜 늘 이런 식일까? 멀어지는 것 같아도 정신을 차리면 시헌은 곁에 있었다. 시헌과 숨이 찰 때까지 진득한 키스를 한 서진은 시헌의 가슴을 살짝 누르며 고개를 들어 모텔 방 안을 둘러봤다.
“하아, 너 모텔로 온 거.”
“…….”
“일부러 그런 거지?”
“맘대로 생각해.”
서진의 밑에 있던 시헌이 일어나 서진을 밑으로 깔았다. 시헌의 손이 빠르게 서진의 옷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손가락이 유두 근처를 스치자 서진이 입술을 약간 깨물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싸우고 난 이후여서 그런 건지 잘 알 수는 없으나 평소보다 섹스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서진은 우느라 퉁퉁 부은 눈을 뜨며 제 위에서 옷을 벗고 있는 시헌을 올려다봤다.
유전자의 탓일까? 시헌은 눈앞에 있는 시헌이 무척 섹시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머릿속 한편으로 떠오르는 기욱의 모습을 반쯤 지운 서진은 시헌을 향해 빨리 오라는 식으로 손을 뻗었다. 몸을 숙이기 무섭게 시헌의 목에 팔을 걸었다. 키스하는 시헌의 손이 서진의 벨트며 바지를 벗겨 나갔다. 후, 하고 서진의 입에서 나는 진득한 술 냄새에 시헌도 취할 것만 같았다.
“으응, 하으으… 차가.”
서진은 제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러브젤에 몸을 흔들었다. 차가운 건 잠시뿐이었지만 그 찰나의 느낌을 지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헌의 손가락이 다리를 벌리고 있는 서진의 안으로 들어갔다. 시헌은 반쯤 흥분한 상태에서 서진의 허리를 잡아 침대 헤드 쪽으로 반쯤 몸을 기대게 했다.
“으으. 읏!! 후으…….”
시헌의 손가락의 개수가 늘어나며 서진의 안에서 꿈틀거렸다. 깊은숨을 들이쉰 서진의 목이 힘없이 뒤로 기울었다. 목 근처를 천천히 핥아 올린 시헌은 서진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이 짓만 벌써 십 분째인 것 같았다.
서진은 당장에라도 제 안을 가득 메울 것처럼 발기해 온 시헌의 페니스를 내려다보며 침을 삼켰다. 젠장 죽을 것 같아. 시헌의 손가락이 움직이면서 나는 야릇한 소리는 서진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참다못한 서진은 다리 아래로 움직이는 시헌의 손을 붙잡았다.
“아파?”
“인제 그만. 됐…, 하, 잖아.”
얼마나 해야 속이 풀릴 건가. 사람이 조심스러운 데도 정도가 있었다. 이 와중에도 기욱의 빠른 섹스에 익숙해져 있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미 그런 섹스에 몸이 익숙해진 서진은 흥분을 하는 것 또한 빨랐다.
“괜찮겠어?”
“하응. 빨리.”
“너 그렇게 재촉하는 거 엄청 꼴려.”
술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섹스에 관해서 서진은 상당히 소극적이거나 수줍어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 왔다. 평소와 다른 서진의 모습에 시헌은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시헌은 서진이 사랑스럽게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시헌은 제 밑에서 허벅지를 붙잡으며 다리를 벌리고 있는 서진의 안으로 페니스 끝을 밀어 넣었다.
“아읏, 으, …아.”
“서진아.”
“…으응. 읏.”
제 안을 꽉 메우는 것 같은 느낌에 서진이 허리를 비틀었다. 분명히 똑같은 섹스일 텐데. 마음이 허락하는 섹스와 일방적인 섹스는 결코 그 느낌이 달랐다. 잔뜩 흥분한 시헌의 것이 끝까지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아직 조금밖에 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잡아먹을 듯 조이는 서진의 모습에 시헌은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빨리. 으응. 하. …박시헌.”
서진의 재촉에 시헌은 아닌 장난기가 생겼다. 장난기라고 해야 할지 요 며칠 동안 심란했던 마음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은 심리가 작용했다. 서진도 시헌 때문에 심란해서 술을 마셨다고 이야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여자를 끼고 술을 마셨다는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었다.
서진이 싫다고 하기보다는 좀 얄미웠다. 서진의 안에 살짝 걸친 시헌은 일부러 허벅지 끝을 살짝 잡고 허리를 움직였다. 안으로 밀고 들어올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끝부분에 걸쳐 아슬아슬할 정도로 움직이는 시헌의 페니스에 서진은 갈증이나 미칠 것 같았다.
“으읏, 응. 으읏….”
“나 없을 때 여자… 후우, 끼고 술 마신 벌이야.”
“하으, 으응. 응, 으읏. 흐으….”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깊이에서 움직이는 시헌의 움직임이 서진은 제법 기분이 좋은 듯싶었다. 술기운에 머리가 흔들리는지 섹스 때문에 그러는 건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서진은 정신이 없었다. 잔뜩 흥분해 제정신이 없는 것도 있지만, 서진은 평소보다 더 많은 이성이 날아간 상태였다.
빌어먹을 박기욱도, 주말에 무슨 일이 있었든 말든 그런 건 다 잊고 싶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시헌이라면 그렇게 해 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서진은 본능적으로 제 페니스를 손으로 쥐고 흔들었다. 서진은 시헌이 움직임을 멈추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페니스를 움직였다. 쾌락에 젖어 떨려 오는 서진의 몸이, 열기가 시헌에게까지 그대로 느껴졌다.
“하, 진짜 강서진.”
사람 미치게 만드는 데는 뭐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서진을 괴롭혀 줄 생각으로 끝까지 밀어 넣지 않고 있었건만. 서진은 오히려 전부 다 넣지 않고 끝을 간지럽히는 걸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후, 히터를 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몸에서는 땀이 흘렀다. 시헌은 손등으로 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은 뒤 서진의 허벅지 안쪽을 붙잡았다.
“하으윽!!”
“이런 걸 원한 거 아니었어?”
허벅지를 잡은 시헌이 서진의 몸을 잡아당김과 동시에 시헌의 페니스가 깊은 곳 안쪽까지 쭉 들어왔다. 그 상태로 시헌은 서진의 몸을 뒤로 돌렸다.
“잠깐, 나 이 자세는 좀…… 으으. 응… 으읏. 시헌… 으응.”
침대의 헤드를 붙잡은 서진은 뒤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진은 뒤에서 안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기욱과 섹스를 할 때도 대놓고 싫다고 한 적은 없지만, 왜일까. 섹스를 하는 상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계속해서 시헌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살짝 위로 올라온 시헌이 고개를 돌린 서진과 입술을 맞췄다. 서진은 엎드린 채 바닥에 늘어졌다.
“히읏, 으으읏… 하으응, 응….”
“너 미친 존나 야해.”
“…흐읏, 으응. 하응.”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릴 하고 있는 걸까. 서진은 시헌도 충분히 섹시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헌의 정신없는 움직임에 서진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분명 섹스 경험은―남자와 여자를 포함해서― 제가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시헌의 섹스는 서진의 정신을 쏙 빼놓게 할 만큼 능숙했다.
능숙하다고 해야 할지 잘해야 한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쯤 되면 섹스에 일가견이 있는 건 유전이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생각까지 들었다. 입술을 살짝 뗀 시헌이 서진을 향해 속삭였다.
“안에 해도 … 돼?”
“뭘, 하으, 조심스럽게 말하고… 난리야.”
언젠 허락받고 한 적 있었던가. 서진은 시헌이 참 이상한 데서 유독 민감하게 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꼭 한창 좋을 때. 첫 고백도 그랬지만 시헌은 눈치 없는 말로 분위기를 깨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애당초 안에 할 생각이 없었으면 콘돔이라도 끼든가. 콘돔 없이 넣어 놓고 이제 와서 그런 걸 타령하는 시헌이 참 웃겼다.
“…흐, 알아서 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진은 차라리 안에다 하는 게 훨씬 나았다. 얼굴이나 다른 곳에 튀는 것은 그건 그거대로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서진의 옆으로 몸을 누인 시헌이 서진의 한쪽 다리를 살짝 들어 올린 후 허리를 움직였다. 약간 옆으로 밀고 들어오는 페니스에 서진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자세를 바꾼 건 좋은데 그건 그거대로 어딘가 묘하게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하으응, 으응. 으읏….”
허리를 뒤틀며 움직이는 서진에 시헌은 숨을 참았다. 진짜 자다 일어나서 이게 뭘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지금은 눈앞에 있는 서진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정을 한 듯 안이 축축하게 젖는 느낌에 서진은 몸을 약간 떨었다. 금방 사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헌은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평소보다 좀 많이 거칠다는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시헌의 움직임이 잠시 멈춘 틈을 타 양손으로 시헌의 어깨를 눌렀다.
“왜, 왜?”
뭘 잘못한 걸까 하고 눈치를 보는 시헌이 한없이 귀엽기만 했다. 팔이 떨려 잘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진은 허공으로 팔을 휙휙 저었다. 아직 술이 덜 깨서 그런 건가? 시헌은 서진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내 조금 정신을 차린 서진이 몸을 일으켜 시헌의 위로 올라왔다.
“야, 그렇게 무리 안 해도…….”
“하으… 으읏….”
서진은 몸을 일으키려는 시헌을 팔로 눌렀다.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곳으로 시헌의 페니스가 어렵지 않게 들어왔다. 서진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리며 시헌의 페니스를 꽉 조였다. 몇 번인가 적당히 하라고 말을 해도 서진은 고개를 흔들 뿐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헌은 앞으로도 절대로 서진 혼자 술을 마시러 보내는 일은 없을 거라며 다짐했다. 시헌은 그대로 일어나 서진의 몸을 뒤로 눕혔다. 침대가 거꾸로 되었지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서진은 제가 다시 밑으로 내려온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네가 이렇게 밝히는 줄 몰랐어.”
“으읍… 읏….”
시헌은 서진의 대답을 기다릴 틈도 없이 입을 맞췄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키스를 하는 내내 서진의 발이 시헌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시헌은 듣지 않겠다며 서진의 다리를 옆으로 잡아 벌린 뒤 허리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