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2 의심 그리고 불안 (34/83)

Chapter. 32 의심 그리고 불안

“금요일?”

“응. 일찍 끝나잖아. 모처럼인데 어디 갈까 해서.”

학생식당으로 내려온 시헌과 서진은 가장 안쪽에 줄을 섰다. 다른 곳을 갈까 생각도 했지만, 이 뒤에 강의가 있어 다른 곳을 가기엔 시간이 애매했다.

앞사람의 계산을 기다리는 동안 서진과 시헌은 메뉴판을 보며 음식을 정했다. 학식의 메뉴라고 해 봤자 거기서 거기였지만 원래 가짓수가 비슷한 식당을 자주 오는 것이 메뉴를 고르기 어려운 법이었다.

“가고 싶은 곳 없어?”

“딱히 아무 데나 상관없어.”

제법 들뜬 얼굴로 물어보는 시헌과 달리 서진의 대답은 담담했다. 서진의 무관심한 대답에 불만을 가진 시헌은 계속해서 서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러지 말고. 강서진.”

“너 진짜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치근덕대? 뭐 잘못 먹었어?”

이럴 줄 알았다면 아침에 데리러 오겠다고 했을 때 순순히 오케이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찮다는 서진의 말에도 불구하고 시헌은 굴하지 않았다. 다소 목소리는 작아졌지만.

“그래도.”

“아니, 진짜 아무 데나 상관없다니까?”

“그럼 바다에 가자.”

“산 다음엔 바다냐. 뜬금없이 또 웬 바다야?”

“강원도에 별장 있거든.”

서진은 잠깐 시헌이 무슨 말을 했나 생각할 필요성을 느꼈다.

“너, 너희 집 별장도 있냐?”

“친척들이랑 같이 쓰는 거야. 1년에 한 번 정도 다 같이 모이거나 놀러 가. 큰아빠가 관리하니까 물어보면 빌려줄 거야. 가자.”

줄줄이 나오는 시헌의 말에 서진은 처음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순순히 강원도에 가자고 얘기하면 될 텐데 말이다. 뭐 이리 빙빙 돌려 말을 하는지. 시헌은 꼭 잘 나가다 한 번 답답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별장 얘기를 꺼낸 시헌은 기다렸다는 듯 신이 나 말을 이어 갔다.

“날씨도 안 추우니까 괜찮을 거야. 금요일 날 가서 주말 동안 있자.”

“…….”

대답이 없는 서진의 모습에 뒤늦게 저 혼자 너무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헌이 약간 움찔거렸다. 시헌은 너무 제 기분만 강요한 건 아닌가 조심스러웠다. 정작 서진은 그렇게 눈치를 보며 물러서는 시헌이 귀엽기만 했다.

하, 어렸을 땐 뭔가 좀 더 듬직했는데 말이다. 어느새 시헌보다 훨씬 커진 서진은 오히려 중학교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시헌이 마냥 사랑스러웠다.

“시, 싫어?”

“아니. 시, 싫다기보다 좀 당황스러워서. 근데 그래도 괜찮은 거야?”

싫다고 하면 정말로 울 것으로 보이는―어디까지나 서진의 착각― 시헌에 서진은 급하게 말을 수습했다.

“상관없어.”

“……아. 그러냐.”

“가는 걸로 안다.”

“마음대로 해.”

사실 강원도까지 내려가는 것도 일이지만, 안 간다고 했을 때 이어질 것 같은 시헌의 행동은 강원도에 가는 것보다 더 귀찮을 것 같았다. 삐진 시헌을 달래는 건 그거대로 성가셨다. 애당초 서진은 굳이 그렇게 싸우면서까지 가지 말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반대로 안가야 할 이유 또한 없었다. 앞에 있던 여학생들이 사라지고 계산대 앞에 선 서진과 시헌은 주문을 위해 앞으로 다가갔다.

“오무라이…….”

“미안, 같이 좀 시키자.”

시헌과 별장 얘기로 정신이 없었던 서진은 사람들 틈에서 갑자기 나타난 기욱에 당황했다. 아는 사이라고 해도 명백히 새치기잖아.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표시하는 서진과 달리 시헌은 기욱을 흘끗 볼 뿐 아무렇지 않게 치킨 카레 오므라이스를 시킨 뒤 서진을 향해 말했다.

“넌 뭐 먹을 거야?”

“아, 난 치즈 돈가스.”

“치킨 카레 오므라이스랑 치즈 돈가스…….”

“치즈 돈가스 두 개요. 계산 이걸로. 오므라이스랑 같이요.”

기욱이 주문을 하려는 서진 사이에 끼어들어 재빨리 카드를 내밀었다. 난데없이 끼어든 기욱의 멋대로인 주문에 알바생이 눈치를 살폈다. 알바생이 시헌의 눈치를 보고 있자 기욱은 빨리 계산하라며 그녀를 재촉했다. 영수증이 나오는 모습에 시헌은 카드를 지갑에 집어넣었다.

대기 영수증을 받아 온 세 사람은 근처에 있는 자리에 의자를 꺼내 앉았다. 시헌의 옆에 앉은 서진에 기욱은 꺼내 놓았던 옆자리 의자를 발끝으로 살짝 밀어 넣었다.

“수업 들을 만했어?”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모르는 질문에 서진은 대답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시헌이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본 서진이 마지못해 말했다.

“잘하시던데요.”

“처음이야.”

“……아. 네.”

처음치고는 기욱은 정말 능숙했다. 어지간한 수업으로는 눈 하나 끔벅하지 않는 동기들이 첫 강의가 끝나기 무섭게 대박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쉬는 시간 없는 풀타임에도 불구하고 끊기지 않는 수업, 무조건 진도만 나가는 것이 아닌 이해하기 쉬운 설명과 더불어 자기가 병원에 있었던 이야기 등을 잘 풀어내는 것이 도무지 처음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벌써 이전 교수님이 안 왔으면 좋겠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서진은 마음 한구석으로는 기욱이 조금 긴장하거나 실수하길 원했지만, 기욱은 그런 실수조차 기회로 바꿨다. 마침 식사가 나왔다. 서진과 기욱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 음식을 가져왔다. 서진과 시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공부하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새치기를 한 데는 이유가 있는 듯 기욱은 엄청난 속도로 돈가스를 먹었다. 동기들 사이에서 먹는 게 빠르다는 말을 듣는 시헌과 서진이 절반도 먹지 못했을 때 시헌은 돈가스와 같이 나온 된장국까지 비운 상태였다.

“간다. 고생해라.”

기욱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고 빠른 속도로 식당을 나갔다.

기욱이 가자 서진과 시헌은 서로 말을 하기 위해 눈치를 살폈다. 된장국을 반쯤 마신 시헌이 먼저 서진을 불렀다.

“서진… 형?”

“미안. 지갑 두고 갔다.”

나간 줄 알았던 기욱이 급하게 식당으로 돌아왔다. 기욱은 서진의 앞에 있는 지갑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평소 덜렁대는 스타일이 아닌 기욱으로서는 드문 실수였다. 이제야 가나 싶었던 기욱은 학생식당 입구 쪽으로 몸을 틀다 말고 시헌과 서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서진의 옆에 앉아 있는 시헌이었다.

“이번 주 금요일 날 시간 비워.”

“왜?”

“누나 이번 주에 세미나 있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엄마가 너 데리고 가란다.”

“싫어.”

시헌은 곧장 고개를 흔들었다. 빌어먹을 의학 세미나 같으니라고. 몇 번 경험한 것도 아니지만, 시헌은 벌써 지긋지긋했다. 하다못해 무슨 말인지라도 알아들으면 또 몰라. 가기 싫다는 시헌의 고집에 기욱은 이해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나도 학교 다닐 때 종종 그랬어.”

“그러니까 싫다고,”

“솔직히 난 상관없는데.”

“그럼 안 가.”

“박하연 화내는 거 감당은 못 해 준다.”

기욱의 선언에 얼마 남지 않은 오므라이스를 긁어 먹던 시헌의 손이 잠시 움찔거렸다. 서진도 시헌에게 큰누나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시헌에게 큰누나가 있다는 것보다 기욱의 위로 누나가 있다는 사실이 서진에겐 더욱 충격이었다.

기욱만 놓고 봐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인데, 기욱의 누나는 얼마나 더할까 싶었다. 아니, 뜻밖에 남동생이 비정상이니 누나는 정상인일지도 몰랐다. 평소 시헌이 무슨 일을 해도 아무 말 없이 넘어가 주는 기욱이 큰누나인 하연에 대해 포기 선언을 할 정도면 정상은 아닐지도. 기욱의 선언에 시헌은 끝내 수저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누나한테 간다고 말해 놓을 테니까 알아서 비워 놔.”

“*NP가…….”

순간적으로 나온 말에 서진이 잠깐 머뭇거렸다.

“*neuro psychiatry.”

*NP[neuro psychiatry] : 정신건강의학과

“아.”

시헌의 대답에 서진은 그제야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헌의 형인 기욱이 교수인데, 기욱보다 누나인 하연쯤 되면 뭔가 하나는 달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형제 두 명이 다 교수인 데다 부모님까지 교수라니. 알면 알수록 대단하다 못해 입이 벌어지는 집안이었다. 시헌은 얼마 남지 않은 오므라이스를 결국 먹지 못했다.

“지긋지긋하다 진짜.”

“어쩔 수 없잖아.”

“미안. 나중에 꼭 가자.”

정말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진심이 담긴 시헌의 말에 서진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 것이 양심에 찔렸다. 처음보다 비교적 한가해진 학생식당에 서진은 의자 밑으로 시헌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서진의 손을 눈치챈 시헌이 약간 뺨을 붉히며 손을 살짝 붙잡았다. 서진은 다른 손으로 시헌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 * *

토요일 오전, 새벽부터 출근한 서윤을 보내고 한두 시간 공부를 한 서진은 슬슬 씻어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칫솔을 입안에 넣기 무섭게 시헌에게서 전화가 왔다. 칫솔질하며 시헌의 전화를 받던 서진은 급하게 입안에 있는 거품을 내뱉었다.

― 부, 부산이라거?

거품 때문에 발음이 잘 되지 않았다. 휴대폰을 잠깐 올려놓은 서진은 곧장 입을 헹군 뒤 휴대폰을 가지고 화장실을 나왔다.

― 어. 방금 도착했어.

― 도, 도대체 거길 왜 가?

분명 어제 일찍 헤어지긴 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서울에 있던 녀석이 밤사이에 부산을 내려갔다는 사실이 서진은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그야 부산이 먼 건 아니지만.

― 세미나. 부산이었더라. 금요일이 아니라 일요일.

― 언제 올라오는데?

― 누나가 볼일 있다고 해서 볼일 보고 내일 저녁쯤에나 갈 것 같아. 근데 몇 시인지 잘 몰라.

휴대폰 너머로 답답해 보이는 시헌의 상황이 그대로 느껴졌다. 시헌이 이렇게 휘둘리는 걸 보니 누나라는 사람도 보통 성격이 아님은 틀림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헌은 계속해서 짜증을 냈다.

― 솔직히 말하면 진짜 성가셔. 누나가 며칠 전에 차 사고 냈거든.

― 차 사고?

― 응. 크게 다치진 않았는데 차가 좀 많이 부서졌어. 수리 맡겨 놓은 것도 있고, 매형이 제약회사 CEO인데 누나한테 유별나게 잘하거든.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난 누나의 어디가 좋은지 이해가 잘 안 가지만.

시헌의 말에 서진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됐다. 가족이긴 하지만 시헌이 이렇게까지 험담을 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 어쨌든 매형이 급하게 한국 왔다가 며칠 전에 다시 넘어가셨는데. 돌아와서 자기가 차 사 줄 테니까 그때까진 죽어도 운전하지 말라고. 오죽하면 부산 내려가는 것도 누나가 비행기나 기차 타고 간다니까 사람 붙여 주겠다고 할 정도였어. 차는 말할 것도 없고. 나한테 전화해서 아주 난리를 치더라.

― 너네 누님, 많이 좋아하나 보구나.

― 팔불출이야 팔불출. 연애 때부터 누나한테 뭐라 말했는 줄 알아? 자긴 결혼하고도 몇 년 동안 애 낳을 생각이 없다는 거야. 누나가 궁금해서 왜? 그랬더니 애 생기면 누나가 애기만 볼 것 같아서 싫대. 태어나지도 않은 애한테까지 질투하더라. 더 대박인 건 누난 그걸 또 오냐 좋다고. 그야 매형은 좋은 분이긴 한데. 누나한테도 잘해 주고.

― 좋은 분이면 된 거지. 너네 누님한테 하는 거 보니까 딱 너랑 똑같네, 뭘.

시헌의 한풀이를 들은 서진은 그냥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다. 서진의 말에 시헌은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전화가 끊긴 건가 싶어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자 시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게, 무슨 말이야?

― 어?

― 매형이 누나한테 하는 거랑 내가 너한테 하는 거랑 똑같다며. 무슨 뜻이야, 그거?

― 왜, 왜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

― 정색한 게 아니라 궁금해서 그런 거야.

시헌이 이렇게까지 파고들 줄 몰랐던 서진은 살짝 말을 더듬었다.

― 너도 동기들한테 질투한 적 있잖아.

― 동기들은 진짜 존재하는 사람이고 누나 애기는 아직 없잖아.

시헌의 반박에 서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 박시헌 너 계속 말꼬리 잡을래? 난 남자잖아. 너 만약에 내가 여자였으면 그냥 넘어갔을 것 같아?

시헌의 페이스에 휘말린 걸까, 말을 하는 서진도 도대체 본인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서진은 아직 감지 않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박박 긁었다. 부산에 내려갔다는 말에서 왜 이렇게 이야기가 샌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서진의 짜증에 한동안 대답이 없던 시헌이 한참 만에 말했다.

― 그건 네가 여자였으면 매형이랑 똑같은 소리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 섹스하면서 담배한테도 질투한다며. 왜 불만이야?

― 아, 아니. 기뻐서. 내가 널 사랑하는 걸 너도 알긴 아는구나 생각이 든다고 해야 하나…….

말을 흐리는 시헌의 목소리에 한발 늦게 제가 말한 의미를 알아차린 서진이 급하게 얼굴을 붉혔다. 시헌에게 휘말려 마구 내뱉은 말인데 생각해 보니 마치 ‘네가 날 사랑하는 건 당연한 거야’ 같은 식의 고백이 되어 버리고 만 셈이었다. 서진은 이게 다 아침부터 전화해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시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어, 어쨌든. 넌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잖아.

― 당연하지. 몇 년이 뭐야. 난 너만 있으면 돼.

― 부끄러운 소리 좀 하지 마. 진짜 쪽팔려.

― 좋으면서. 아, 나 누나가 부른다. 나중에 연락할게. 자기야. 주말 잘 보내!

― 야! 박시헌 씨발 너 뭐라고…!

뚝, 하고 멋대로 전화가 끊겼다. 이게 진짜 미쳤나. 다시 전화를 걸기 뭐했던 서진은 급한 대로 시헌에게 마구 문자를 보냈다.

「뒤진다.」 오전 7:23

「야 답장해라.」 오전 7:23

「너 월요일 날 봐」 오전 7:24

「읽고 있지?」 오전 7:24

「개새끼야 진짜 답장 안 하냐」 오전 7:24

「월요일 날 니 얼굴 안 볼 거임」 오전 7:25

「진짜 안 읽고 있어?」 오전 7:25

……

이쯤 되니 이게 뭐 하자는 장난인가 싶었다. 답장이 없는 시헌에 서진은 오기가 생긴 듯 마지막으로 문자를 쳤다.

「자기야」 오전 7:28

전송 버튼을 누르기까지 3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래도 답장이 안 오면 어쩌지? 서진은 전송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소파에 얼굴을 묻었다. 젠장 쪽팔려! 얼굴을 묻기 무섭게 우웅, 하고 손에 있는 휴대폰이 울렸다. 서진은 급하게 휴대폰을 열었다.

「일어났어? 통화 중이던데.」 오전 7:28

기욱이었다. 하필이면 타이밍하고는. 서진은 짜증을 내며 건성으로 답장을 보냈다.

「동기요.」 오전 7:28

「응? 왜 자기야.」 오전 7:29

한발 늦게 온 시헌의 대답에 서진은 주먹을 쥐었다.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맥이 빠지는 느낌에 서진은 한 손으로 문자를 쳤다.

「됐다 ㅅㅂ. 월요일 뒤졌어. 맛있는 거나 사 와」 오전 7:29

서진이 문자를 전송하기 무섭게 기욱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기욱에게 전화를 받음과 동시에 시헌에게 문자가 왔지만, 전화 탓에 뭐라고 답장이 왔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서진은 침묵이 흐르는 휴대폰을 붙잡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 왜 전화했어요?

― 전화하면 안 돼?

― 안 되는 건 아니지만…….

― 오후에 나와.

― 왜요?

― 너 할 일 없잖아. 싫다고 하지 말고.

― 알았어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본 서진은 기욱의 말을 순순히 수긍했다. 평소라면 한두 마디는 더 할 줄 알았던 기욱은 순순히 알겠다고 하는 서진의 행동이 좀 이상했다. 이상하다고 하기보다는 위화감이 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안 가겠다고 떼쓰는 것도 아니니 괜한 일로 서진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기욱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도서관에 가기에도 애매했던 서진은 결국 집에서 공부했다. 애당초 주말이라 자리도 없을 테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가기 귀찮았던 것도 한몫했다. 기욱과 밥을 먹는다는 말에 서진은 일부러 점심도 걸렀다. 중간중간 습관처럼 물을 마셨기에 배가 고프진 않았다.

공부를 하며 몇 번인가 문자를 주고받았지만 일이 바쁜 모양인지 시헌에게서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문자가 끊겼다. 시헌과 문자가 끊긴 서진 또한 별일 없이 공부했다. 저녁이 가까워지고, 슬슬 물만으로는 공복에 한계가 올 무렵 기욱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침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던 서진은 펜을 놓으며 전화를 받았다.

― 5분 안에 가.

서진은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출발했으면 출발했다고 말이나 하든가. 집 근처에 도착해서 통보하듯 연락을 하는 것은 시헌이나 기욱이나 그게 그거였다. 원하지 않게 닮은 두 사람의 모습을 하나씩 깨달을 때면 서진은 양심이 찔려 왔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마친 뒤 옷을 갈아입은 서진은 거실에 있는 작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

활짝 열린 큰방 넘어 환기를 위해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기욱의 차 소리가 들렸다. 차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서진은 소파에 두 발을 올린 채 재빨리 시헌과 한 문자들을 보관함에 숨겼다. 이게 또 지우긴 좀 그렇단 말야. 막 모든 문자를 보관함에 넣음과 동시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은 서진은 달각, 하고 문을 열었다. 붉은 목도리 차림에 마스크를 눌러쓴 기욱이 좁은 집 안의 서진을 내려다봤다.

“가자.”

“집 불 좀 끄구요.”

“마음대로 해.”

서진은 방의 불을 전부 끈 뒤 집을 나왔다. 서진은 기욱의 차를 타고 20분 정도 걸리는 호텔의 한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갔다. 자주 가는 호텔인 듯 기욱은 회원 카드를 내밀었다. 회원 카드를 확인한 후 여자 직원이 두 사람을 가장 안쪽으로 안내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는 사람이 많아 앉을 자리가 없었지만,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서진과 기욱은 창가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예약석’이라는 푯말이 있었다. 푯말을 치우고 직원이 가자 서진은 물을 살짝 마셨다. 레몬 때문에 떨떠름한 맛이 났다.

“언제 예약했어요?”

“아까.”

기욱의 대답에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는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 * *

“읏….”

후, 하고 숨을 들이쉬며 아래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서진은 이빨을 깨물었다. 서진의 허리를 안은 기욱은 그 모습에 서진의 입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확 씹어 버릴 수도 없고. 서진은 애매하게 혀 안을 움직이는 기욱의 손가락을 다시 혀로 밀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입안에 타액이 고이는 것이 점점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그마해여…….”

손가락 혀 때문에 발음이 잘 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건 무슨 장난인가 싶기도 하고. 계속하다가는 정말 침으로 질식―그럴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할 것 같은 기분에 서진은 있는 힘껏 기욱의 몸을 밀어냈다. 기욱의 손에서 나온 서진이 침대 앞으로 꼬꾸라졌다.

“짜증 나.”

서진은 등 뒤에서 부스럭대는 기욱을 무시한 채 입안에 흐르는 타액을 손 등으로 대충 닦았다. 침대 옆 선반에 손을 뻗은 기욱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침대 헤드에 몸을 반쯤 기댄 기욱이 담배를 무는 모습에 서진 또한 제 담배를 가져와 입에 물었다.

담배 케이스 안에선 작은 편의점 라이터가 같이 딸려 나왔다. 담배 안에 라이터를 집어넣는 것은 서진의 습관이었다. 기욱은 불이 붙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며 서진의 담배 케이스 안에서 나온 라이터를 흘끗 바라봤다. 노란색. 300원짜리 작은 편의점 라이터였다.

“라이터 좀 바꿔라.”

저번에도 저 라이터였던 같은데 말이다. 기욱의 말에 서진은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이거 산 지 얼마 안 됐거든요?”

“저번에도 저거였잖아.”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예요.”

편의점 라이터가 수명이 얼마나 된다고 저런 말을 하는지 기가 막혔다. 기욱은 서진의 손에 있는 라이터를 손가락질했다. 누가 편의점 라이터인 거 몰라서 묻나.

“저번에도 노란색이었잖아.”

“잘 기억 안 나요.”

기욱 앞에서 담배를 피운 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기욱 앞에서 언제 노란색 라이터를 사용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서진은 담배 옆에 있는 자신의 휴대폰을 힐끗거렸다. 혹시 시헌한테 문자가 오지 않았을까. 서진은 기욱의 눈치를 보느라 휴대폰을 만질 수 없었다.

평소와 달리 조마조마해 보이는 서진에 기욱은 담배를 끈 뒤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욱은 서진의 휴대폰 옆에 있는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서진은 혹시 제 휴대폰을 빼앗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에 괜히 어깨를 움찔거렸다. 기욱은 탁, 하고 휴대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왜?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

휴대폰을 던진 기욱은 이내 침대에 드러누웠다. 담배를 다 끈 서진을 보며 기욱은 옆자리에 누우라는 듯 흐트러진 침대 위를 툭툭 건드렸다. 서진은 선반 위에 세로로 놓인 기욱의 고급 시계를 힐끗거렸다. 이미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일이 끝난 후 대학 동기들을 만나고 온다는 서윤이 들어올 시간이었다. 굳이 서윤이 아니더라도 서진은 집에 들어가 봐야 했다. 기욱과 같이 하룻밤을 보낼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집에 안 가요?”

서진의 물음에 기욱은 귀찮다며 입술을 내밀었다. 한 달 만의 정시 퇴근이라는 사실을 서진이 알 리가 없었다. 아니, 알았다 해도 관심도 없고. 기욱은 베개에 얼굴을 반쯤 묻으며 말했다.

“몰라, 피곤해.”

잠에 취하기 시작한 기욱의 말투에 서진은 입술을 깨물며 기욱을 흔들었다.

“멋대로 외박하지 말라구요.”

흔들리는 침대에 엎드려 있던 기욱이 몸을 바로 돌렸다.

“서윤이?”

“당연하죠.”

그럼 달리 누가 있겠는가. 기욱은 서진의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찼다.

“갈 거야.”

“지금 가요.”

“사람 말 좀 믿어.”

기욱이 새 담배를 물으려는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기욱에 의해 침대 쪽으로 몸이 반쯤 이끌린 서진이 다시 바로 앉았다. 덕분에 서진은 침대 위에서 오뚝이처럼 몸을 흔들었다. 참다못한 기욱이 서진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뭐 하는 짓이에요?”

그만하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나타난 손가락에 서진은 인상을 구겼다. 그냥 손가락도 아니고 새끼손가락이었다. 뭐 하자는 장난이지. 기욱은 빨리하라며 손을 흔들었다.

“약속하잖아.”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그런 의미일 줄이야. 유치하다 못해 어울리지 않는 기욱의 태도에 기가 찬 서진은 기욱의 손가락을 옆으로 밀어낸 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런 서진의 모습에 기욱은 바닥에 반쯤 흘러내린 이불을 덮어 주었다. 서진은 이불을 목 위로 덮어썼다.

“한 시간만 있다 가요.”

서진도 한 시간만 있다 일어날 계획으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 * *

윙윙대는 알람 소리에 기욱은 눈을 떴다. 짧게 자는 것이 익숙한 기욱은 알람 소리에 금방 눈을 떴다. 알람은 기욱의 휴대폰이 아닌 서진의 휴대폰이었다. 서진의 휴대폰을 열어 알람을 끈 기욱은 이불을 살짝 걷었다. 옆으로 돌아누워 쪼그리고 잠이 들어 있는 서진이 있었다.

기욱이 몸을 살짝 흔들었으나 잠이 든 서진은 반응이 없었다.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기욱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 지금 끝났다고?

― 응. 오빠 일찍 퇴근했다면서? 아파트 가도 되는 거지? 어디야?

저녁부터 서윤과 연락을 하지 못한 기욱은 어디냐는 서윤의 말에 제 밑에서 잠들어 있는 서진을 흘끗 내려다봤다.

― 나 집이지.

― 그렇구나. 집에 들렀다가 금방 갈게.

― 알았어. 이따 보자.

전화를 끊은 기욱은 휴대폰을 쥐며 대략적으로 거리를 계산했다. 서윤은 차가 없으니 지하철을 타고 올 것이 틀림없었다. 뭐가 됐든 간에 일단 출발은 해야 했다. 기욱은 침대에서 일어나 급하게 옷을 입었다.

모텔도 아니고, 어차피 병원 근처에 잡아 놓은 개인 오피스텔이니 서진이 언제 일어나든 크게 상관은 없었다. 막 오피스텔을 나가려던 찰나 서진의 휴대폰에서 불빛이 났다. 아직 알람이 안 꺼진 건가? 기욱은 윙윙대는 서진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어디야?」 오후 10:43

시헌에게서 온 문자였다. 기욱이 문자를 확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헌에게 전화가 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시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야, 강서진.

― …….

시헌의 목소리를 확인한 기욱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뒤 배터리를 분리해 대충 침대 위로 내던졌다.

* * *

“뭐야?”

운전대를 붙잡은 시헌은 말도 없이 끊긴 휴대폰 화면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운전 중이라 다시 전화할 여건이 되지 않았던 시헌은 휴대폰을 비어 있는 조수석 쪽으로 내던졌다. 하윤에게 잘 얘기해 세미나를 뺀 뒤 점심을 먹고 반나절을 꼬박 다시 운전해 서울로 올라왔건만 정작 서진은 저녁부터 연락이 없었다.

“…….”

전화할까 말까 운전을 하며 조수석에 있는 휴대폰을 힐끗거린 시헌은 서진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시헌은 서진의 집 근처에 차를 댔다. 반지하방의 불은 꺼져 있었다.

[지금 거신 전화는 고객님의 사정으로 전화기가 꺼져 있어…….]

그사이 서진의 휴대폰은 또 꺼져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올라오지 말 걸 그랬나. 별일 아닐 거라는 걸 알면서도 시헌은 괜히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시헌은 서진의 집 담벼락에 기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연신 줄담배를 피워 갈 무렵 목소리가 들렸다.

“시헌아?”

“씨발.”

고개를 든 시헌은 서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욕설을 내뱉었다. 시헌은 눈앞에 있는 남학생의 이름을 기억하려 애썼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인훈이 지난번 서진과 함께 택시를 타려고 했던 남자라는 것은 알았다.

시헌은 자신이 제 이름을 말해 준 기억이 있었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름을 알고 있든 말든 딱히 상관이 없기야 한데. 한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이름을 알고 있으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시헌은 담배를 끄며 허공에 뜬 재를 손으로 털어 냈다. 인훈은 시헌의 집 벽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시헌과 건너편에 있는 시헌의 흰 차를 흘끗거렸다.

“여기서 뭐 해?”

“알 거 없잖아.”

탁탁, 라이터 불을 붙인 시헌은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연기를 내뱉은 시헌은 괜한 일로 너무 짜증을 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진짜 서진의 말처럼 제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걸지도 몰랐다. 정말 순전히 서진을 데려다주려고 했었던 것일 수도 있고. 설령 그게 진실이라 해도 시헌은 눈앞에 있는 인훈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시헌은 소매를 걷어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10시가 넘은 저녁. 다른 곳도 아니고 서진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만남인가? 시헌은 제 앞에 멀뚱멀뚱 서 있는 인훈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 아직도 시헌은 인훈의 이름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관심이 없었다. 시헌은 담배 연기를 다시 내뱉으며 물었다.

“너는?”

시헌이 한 말의 의미를 뒤늦게 깨달은 인훈은 허둥대며 건너편에 있는 골목을 손가락질했다.

“아, 나는 집이 이 근처라. 편의점 가는 길에 들렀어.”

“어. 그래.”

그런 거였냐. 시헌은 어둠에 보이지 않는 골목 너머와 인훈이 간다고 하는 편의점 골목 너머를 발치로 흘끗댔다. 시헌은 아직도 가지 않고 서성이는 인훈을 위아래로 훑었다.

“너 강서진 고등학교 동창이냐?”

“어어. 응. 같은 학교야. 어떻게 알았어?”

“친했어?”

시헌은 인훈의 질문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되물었다. 그날 그 일이 있고 시헌은 서진과 같이 술을 마신 동기 한 명을 붙잡아 서진과 같이 택시에 탄 녀석의 정체에 관해 물었다. 서진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남자는 그가 다른 동기와 아는 사이라서 술자리에 참석했다는 것, 그리고 서진과 인훈이 같은 학교라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인훈을 데려온 동기한테 물어보라고 했지만, 시헌은 굳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서진이 알면 일이 귀찮아지기도 했고. 뒤늦게 제 질문이 무시당한 인훈은 시헌의 질문에 떨떠름하게 말했다.

“어. 그럭저럭. 근데 그건 왜 물어?”

불쾌함을 표출하는 인훈의 말투에 시헌은 짧아진 담배꽁초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발끝으로 껐다. 키는 인훈이 조금 더 컸지만 인훈을 올려다보는 시헌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애당초 중학교 시절부터 성인 남성들을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꿈적하지 않았던 시헌이다. 고작해야 몇 센티 키가 큰 인훈 같은 건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알 거 없잖아.”

이쯤 되면 눈치껏 꺼져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시헌은 인훈이 일부로 서진의 집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인훈은 불이 꺼진 서진의 집 반지하방을 보며 말했다.

“서진인 집에 없나 보네.”

“뭐?”

― 야 이 씨발놈아!!!!

마침 들려오는 웬 괴성에 시헌은 인훈의 중얼거림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워낙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도 했고. 분명한 건 인훈이 서진이 어쩌고 하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씨발, 왜 저녁에 동네에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시헌은 머릿속 한구석으로 인훈의 중얼거림을 되새기며 건너편에서 들리는 욕에 인상을 구겼다.

“서진이 기다리는 거야?”

이번엔 중얼거림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물어 왔다. 시헌은 처음 들은 말이 역시 단순 중얼거림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씨발.

“뭐라고?”

열이 반쯤 뻗친 시헌은 언성을 높이며 다시 말해 보라는 식으로 짜증을 냈다.

“아, 아니. 서진이 집이잖아. 서진이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

인훈의 변명에 시헌은 담 옆으로 고개를 내밀어 불이 꺼진 반지하방을 창문을 바라봤다. 이 근처에 사는 것도 좋다 이거야. 편의점을 가려는 것도 그래 그렇다 쳐. 서진의 집인 건 어떻게 안 거지? 고등학교 동창인 데다 집 근처, 그럭저럭 친했다고 하니 알 수도 있나? ……서진의 고등학교 생활을 알 수가 없으니 원. 초등학교 때부터 지내 왔던 두 사람이지만 유일하게 접점이 없는 곳이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등학교에 관한 얘기는 입을 다물었다. 애당초 서진과 비교하면 시헌은 고등학교 생활이라고 해 봤자 정말 말할 것도 없다. 기껏 해 봐야 여자와 섹스한 얘기? 근데 그건 한참 서진과 싸웠을 때 마침 고백해 온 여자에 서진을 잊기 위해 정말 잠시 만난 것이 다인 이야기였다. 시헌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가 얼마 남지 않은 담배 케이스를 구긴 뒤 담벼락에서 몸을 떼 인훈의 앞으로 다가갔다.

“너 K대라 그랬냐?”

“어.”

“난 서진이한테 니 얘기 들은 적 없거든?”

“서진이가 왜 내 얘길 너한테 해야 하는데?”

“안 해도 알아.”

진짜 서진과 인훈이 고등학교 때 친했다면 말이다. 시헌은 아무리 봐도 인훈과 서진이 고등학교 시절 친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서진에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시헌의 감과 인훈의 태도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기욱을 닮은 탓인지 시헌은 감이 굉장히 좋았다.

“무슨 말을…….”

“씨발, 강서진. 끄라고 신경!”

시헌은 주먹을 쥐며 소리를 질렀다. 시헌의 목소리가 골목 안을 울렸다. 시헌의 짜증에 인훈도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

“야. 너 말이 좀 심한 것 같다? 네가 뭔데 서진이한테 이래라저래라…….”

“시헌아!”

멀리 골목 너머로 시헌을 발견한 서윤이 손을 흔들었다. 서윤이 왜? 시헌은 난데없는 서윤의 등장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써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시헌은 다가오는 서윤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했다.

“마중 나왔으면 마중 나왔다고 말하지 그랬어.”

서윤이 밝게 웃으며 시헌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시헌은 인훈을 향해 가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시헌의 손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제가 낄 자리가 아니라는 걸 눈치챈 인훈도 고개를 약간 숙이며 말없이 골목을 떠났다. 인훈의 모습을 본 서윤이 다시 시헌에게 물었다.

“누구야?”

“아무것도 아녜요.”

“그보다 많이 기다렸지? 일단 들어가자.”

서윤은 춥다며 시헌의 팔을 집 안으로 잡아당겼다.

“근데 웬 마중이에요?”

인훈 때문에 정신도 없었던 시헌은 서윤이 하는 말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단 무작정 들어오긴 했는데. 달각, 하고 키를 꽂아 집 안의 문을 연 서윤은 신발을 벗으며 등을 돌렸다.

“어? 기욱 오빠한테 얘기 듣고 마중 나온 거 아니었어?”

“그게……. 마, 맞아요.”

“뭐야. 깜짝 놀랐네.”

“하하, 형 아파트 가실 거죠?”

“응, 그럴 거야.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거기 앉아서 쉬고 있어.”

집 앞에서 무조건 서진을 기다렸다고 할 수도 없었던 시헌은 적당히 거실에 있는 작은 소파에 걸터앉았다. 서진의 방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고, 거실 불이 켜져 있는 탓에 문틈 사이로 방의 불이 꺼진 것이 보였다.

서진의 방을 본 시헌은 다시 서진의 휴대폰에 전화했지만. 휴대폰은 여전히 꺼진 상태였다. 시헌은 서윤이 있는 큰방 너머로 말을 걸었다.

“누나! 서진이는요?”

“글쎄, 연락 안 받아?”

“전화기 꺼져 있어요.”

“어머, 그래?”

시헌의 말에 서윤은 몰랐다며 문을 살짝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고개를 끄덕인 시헌을 본 서윤이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찬가지로 전화가 꺼져 있었다. 서윤은 통화 연결이 되지 않은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진짜네. 이 시간까지 연락이 없는 애가 아닌데.”

혼잣말로 중얼거린 서윤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서진인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통화 연결이 됐다.

“어. 오빠. 난데, 혹시 서진이랑 연락됐어? 아. 응. 알았어,”

기욱과 통화를 마친 서윤은 휴대폰을 닫은 뒤 짐을 챙겨 거실로 나왔다. 시헌은 서윤과 기욱이 무슨 통화를 했는지 궁금했다. 서윤의 말대로 연락이 없을 애가 아닌데. 왜 서윤은 멀쩡한 거지? 한편으로는 기욱이 서진이 있는 곳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형이 알 리가…….”

“서진이 학교 도서관에서 날밤 새운다고 그랬다는데?”

“네?”

서윤의 말에 시헌은 뭘 잘못 들은 줄 알고 눈을 깜박였다. 학교 도서관에서 날밤을 새우는 걸, 다른 사람도 아닌 기욱에게 말했다고? 믿을 수 없다는 시헌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서윤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 갔다.

“아까 몇 시간 전에 충전기 두고 와서 배터리 없다고 오빠랑 통화했대.”

“시험 끝난 지 얼마 안 됐는데요?”

“글쎄, 공부할 게 남은 거 아닐까?”

시헌은 서진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열심히 하는 녀석이었으니까 말이다. 단지, 대게 서진은 귀찮다는 이유로 주말에는 학교 도서관에 잘 가지 않는 편이었다. 날밤을 새운다고 하니 작정하고 갔다면 가능성이 있나.

몇 번인가 서진이 그런 적 있다는 생각에 시헌은 순순히 서윤의 말을 이해했다. 단지 뭐라고 해야 하나. 배터리가 없는 걸 왜 기욱한테 얘기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았다. 서윤이 물어본다고 해서 뭔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많이 걱정되나 보구나?”

“좀요.”

솔직히 서윤의 말에 시헌은 잠시 놀랐다. 포커페이스에는 자신이 있었다. 서윤이 눈치를 챌 정도면 어지간히 티가 났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본인이 초조해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도서관 가 보려고?”

“하아, 그냥 아파트 모셔다드릴게요.”

시헌은 서윤과 함께 집을 나왔다. 시헌의 옆자리로 서윤이 조수석에 앉았다. 잠시 운전을 하고 나가자 골목길 한쪽에 편의점이 있었다. 시헌은 차를 멈추고 벨트를 풀었다.

“저, 잠시만요.”

급하게 차에서 나간 시헌은 담배 한 갑과 캔 커피 두 개를 사 왔다. 탁, 하고 커피를 뜯은 시헌은 캔 커피를 서윤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서윤이 커피를 받은 것을 확인한 시헌은 다른 커피를 콘솔 상자에 넣은 채 차를 출발시켰다. 백미러 사이로 인훈이 보였지만 시헌은 모르는 척 무시한 뒤, 차를 밟았다.

“…….”

비밀번호를 채 끝내 누르기도 전에 인기척을 느낀 기욱이 안쪽에서 문을 열었다. 당연히 서윤일 것이라 생각했던 기욱은 눈앞에 있는 시헌에 살짝 당황했다. 이내 시헌의 뒤에 있는 서윤이 기욱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들어와. 오느라 고생했어.”

기욱은 문을 바깥쪽으로 완전히 열어 주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온 서윤은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안쪽 방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박시헌 너…….”

“기욱 오빠, 왜 그래?”

화장실에서 나온 서윤이 이상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보며 기욱에게 물었다. 기욱은 저에게 다가오는 서윤을 마다치 않고 서윤의 옆에 딱 붙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이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시헌이랑 있었어?”

기욱은 아직 누나―하연에게 시헌이 예정보다 빨리 서울로 올라온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시헌이 일찍 서울로 올라오든, 하연과 함께 늦게 올라오든 기욱은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중요한 건 시헌이 왜 서윤과 같이 왔냐는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아래층에서 만났다고 볼 수는 없었다. 기욱의 물음에 서윤은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시헌도 그런 소릴 했지.

“도대체 둘 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오빠가 시헌이 보낸 거 아니었어?”

“어, 그, 그랬었지. 자다 일어나서 정신이 없었나 봐.”

“잤어?”

“응. 좀 잤어.”

“큭큭, 머리가 엉망이네.”

서윤이 안 그래도 헝클어진 기욱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기욱은 아직도 이 상황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 시켜 먹을까?”

진짜 막 일어나 정신이 없기도 했고. 시헌도 기욱이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모습은 꽤 오랜만에 보는 중이었다. 사실 왜 자신이 서윤과 같이 오는 것이 기욱이 당황할 만한 일인가 싶기도 했고.

“치킨 먹을까? 시헌이도 먹을래?”

“아, 네.”

마침 배가 고팠던 시헌은 순순히 서윤의 제안에 응했다. 치킨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욱은 찬장에 두었던 쿠폰집들을 뒤졌다. 두 사람이 치킨을 주문하기 위해 대화를 하는 사이 시헌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일단 이 불편한 옷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방 안으로 들어온 시헌은 일부러 방문을 완전히 닫지 않았다. 열린 문틈 사이로 말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대충 옷을 갈아입은 시헌은 침대 위에 던져두었던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 들었다. 거실 너머를 흘끗 본 시헌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여자의 말소리가 채 들리기도 전에 시헌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을 꽉 쥔 시헌은 거실로 나왔다. 마침 서윤이 기욱의 휴대폰으로 치킨을 주문하고 있었다. 서윤이 거실 안쪽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는 사이 기욱은 기다렸다는 듯 방 안에서 막 나온 시헌에게 붙었다. 정확히는 시헌이 나오길 기다리며 시헌의 방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미나는?”

“누나만 부산 데려다주고 바로 올라왔어.”

“…….”

“누나가 상관없대.”

“서윤이랑은?”

“차 타고 가다 우연히 만났어.”

“만났다고?”

시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과 서진이 서로 연락을 하니 자신도 서윤과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논리로 내세워도 지장이 없었다. 기욱이 작정하고 묻는다면 금방 들통이 나겠지만.

설령 거짓말이 들통난다 해도 시헌은 일부러 서진의 집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할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다행히 기욱은 서윤과 어떻게, 어디서 만났느니 등에 대한 말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물어볼 건 많으나 서윤의 통화 시간은 짧았다.

“태워 주겠다고 한 걸 형이 보낸 걸로 착각한 거야.”

“박시헌, 너 나한테…….”

“오빠, 집에 술 없어?”

“맥주 사러 가야 돼. 같이 가자.”

마침 냉장고를 뒤지는 서윤에 기욱은 방으로 들어가 지갑을 가져왔다. 기욱이 잠바를 입고 나오자 서윤도 잠바를 챙겨 입은 뒤 기욱에게 팔짱을 꼈다. 둘이 같이 나갈 생각인 듯싶었다.

“시헌이도 갈래?”

“넌 있어.”

같이 가자는 서윤의 말을 자른 기욱이 따라오지 말라며 눈치를 줬다.

“오빠도 참 왜 애한테 그렇게 말하고 그래.”

“하아, 됐어요. 전 그냥 있을래요. 오래 운전해서 피곤하기도 하고.”

시헌은 끝까지 같이 가자는 서윤을 달래며 집 안에 남았다. 시헌은 기욱이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도 따라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이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너를 위한 랩소디』 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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