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 네 주변의 모든 것을 질투해
“이 시기에 여행?”
“여행은 아니구요, 1박 2일요. 친척 형이 펜션 하는데 애들 데리고 놀러 와도 된대요.”
한 살 어린 동기의 말에 시헌은 작은 책상에 팔을 괴며 동기들을 올려 봤다.
“안 가.”
“아, 왜요. 형 술 잘 마시는 거 소문 다 났거든요? 그러지 말고 가요.”
한 살 어린 동기뿐 아니라 다른 동기들도 은근슬쩍 시헌이 갔으면 좋겠다는 시선을 비치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지난번 기욱의 카드를 쓴 술자리 이후 시헌의 형이 의사라는 게 밝혀진 뒤부터 시헌의 집안이 재벌이니 뭐니 하는 온갖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시헌이 입고 다니는 옷이나 시계, 차 등에 관한 얘기가 나돌면서 소문은 더욱 과장되게 퍼졌다. 무엇이 진실이든 시헌이 돈을 쓰는 데 거리낌이 없이 다닌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동기들의 부추김을 못 이긴 시헌이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물었다.
“누구누구 가는데?”
“음. 저랑요…….”
동기가 손가락을 접으며 사람들의 이름을 말했다. 줄줄이 나오는 이름들에 시헌은 그 정도만 하라며 손을 저었다.
“많이도 가네.”
“갈 거죠?”
“아니, 안 가.”
“아! 형 제발요.”
“너 차 운전할 사람 없어서 그런 거 안다.”
동기가 말한 사람 중에 면허가 있는 사람은 시헌을 제외하고 몇 명 되지 않았다. 정곡을 찌른 시헌의 말에 동기는 할 말이 없는 듯 머뭇댔다.
“운전 안 해. 귀찮아.”
“시헌아, 진짜 안 갈 거야?”
“아, 서진 형도 간다고 그랬는데 어쩔 수 없네요.”
한 동기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서진이라는 이름을 들은 시헌은 뒤쪽에서 이어폰을 끼고 공부를 하는 서진을 보더니 동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잠깐만.”
“네?”
“너 서진이한테도 물어봤어?”
“당연하죠. 운전할 사람 필요하니까요. 서진 형한테 물어봤는데, 서진 형은 면허 없대요. 그래서 서진 형이 시헌 형한테 물어보라고 그런 건데요? 어쨌든 안 간다면 어쩔 수 없네요. 또 면허 있는 사람이…….”
“가.”
시헌은 다른 사람을 찾는 동기를 붙잡았다. 안 간다고 할 땐 언제고, 말을 바꾸는 시헌에 동기는 당황스러운 듯 목을 긁적였다.
“씨발, 간다고.”
“정말요?”
다소 욕설이 들어가긴 했지만, 동기는 가겠다고 하는 시헌을 반대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
“근데 아까까지만 해도 안 간다면서요.”
“마음 바뀌었어.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시헌은 은근슬쩍 서진을 바라봤다. 시헌의 마음이 바뀐 원인이 서진 때문이라는 걸 눈치챈 동기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말했다.
“어쨌든 알았어요! 나중에 말 바꾸면 안 돼요!”
“알았다고 알았어.”
시헌은 동기의 말에 귀찮다며 손을 저었다.
* * *
시헌과 서진은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다음 강의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탓이었다. 구석에 앉아 식사하는 서진은 먼저 식사를 마친 시헌의 빈 그릇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너 왜 그래?”
“…….”
오랫동안 시헌을 봐 온 서진이었다. 서진은 강의가 끝나고 난 이후부터 시헌이 어딘가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심기가 불편한 시헌은 입을 꾹 다무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차라리 입만 다물면 좋으련만, 시헌은 얼굴에 표정이 다 드러나 있었다.
입을 다문 채 나 불만 있어요, 하고 써 놓고 다니니 짜증이 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반쯤 무시하고 남은 식사를 마저 한 서진은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야, 박시헌. 끝까지 말 안 할 거야?”
한 번만 더 입을 다물면 짜증을 내려 했건만. 서진이 시헌에 대해 잘 아는 것만큼 시헌 또한 서진에 대해 잘 알았다. 서진의 짜증에 시헌은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펜션.”
“펜션이 왜?”
“간다고 왜 말 안 했어?”
펜션이라니. 무슨 엄청난 얘기인가 싶었던 서진은 기가 막혔다. 펜션 얘기를 하다가 운전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말에 시헌한테도 물어보라고 한 것이 전부였을 뿐인 이야기였다. 서진은 시헌이 안 간다고 짜증을 냈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아, 난 당연히 넌 갈 줄 알았지.”
“차 아니었으면 말 안 했을 거 아니냐.”
“그럴 리가.”
“질투 나.”
“야.”
“나 몰래 다른 애들이랑 술 마시러 갈 생각 하니까 짜증 났다고.”
질투라는 게 원래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거였나. 시헌의 말에 서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테이블에는 둘밖에 없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사람은 없었다. 식당에 있었던 서진의 전 여자 친구야 그렇다 치지만.
“걔들은 동기잖아. 적당히 해.”
이번만큼은 좀 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담배는 장난이라고 해도 동기한테까지 질투하는 건 정말 시헌답지 않은 일이었다. 서진의 말에 시헌은 식당 테이블에 얼굴을 묻었다.
“나도 알아. 아는데…. 잘 안 돼. 그냥, 초조해서 미칠 것 같아.”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트린 시헌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오랫동안 시헌을 봐 온 서진이지만, 서진은 시헌이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서진은 머리를 긁적이는 시헌의 팔을 붙잡았다.
“박시헌, 진정해. 난 아무 데도 안 가.”
“…….”
“대답.”
서진은 시헌의 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 시헌은 몸을 일으키며 서진과 눈을 맞췄다.
“응.”
* * *
“아아아아악! 왜!!”
술병이 굴러다니는 펜션 안에서 서진은 언성을 높이며 소리를 질렀다. 몇 병을 들이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술을 마셨다. 서진의 외침에 근처에 있던 동기들이 빈 종이컵에 소주를 가득 따라 내밀었다. 보기만 해도 토가 나올 것 같은 양에 서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큭큭, 하하하하하!!”
“아오!!! 미치겠네! 진짜!! 야!! 니네 짰지!!”
종이컵의 술을 반쯤 마시다가 만 서진이 기침을 하며 동그랗게 모여 앉은 동기들을 둘러봤다. 술에 잔뜩 취한 서진의 고개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동기들은 남은 술을 빨리 마시라며 재촉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씨발, 짜긴 뭘 짜!!”
“아, 형 다음 게임 해야 하니까 빨리 마셔요!!”
“아 진짜 니네 다음 판에 다 뒤졌어!! 한 판 더…….”
고개를 휘청거리던 서진은 옆에 앉은 시헌의 어깨 쪽으로 머리가 기울었다. 머리를 부딪힌 것을 눈치챈 서진이 미안하다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헌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종이컵을 빼앗아 마셨다.
“오오오!”
“와! 강서진 반칙!!”
“야! 내 거잖아!!”
“너 많이 마셨잖아.”
뒤늦게 사태를 깨달은 서진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술을 두리번거리면서 찾았다. 시헌은 한숨을 쉬며 손에 있는 종이컵을 구긴 뒤 뒤쪽으로 버렸다.
“아, 시헌 형 이게 뭐예요. 재미없게.”
“쟤 많이 마셨잖아. 적당히 해.”
“뭘 적당히 해! 씨발! 한 겜 더 해!! 니네 다 앉아. 일어나면 뒤졌어!”
혼자 벌칙주를 꽤 많이 마신 것이 억울한지 서진은 동기들을 손가락질하며 언성을 높였다. 적극적인 서진의 분위기에 술에 취한 몇몇 남자 동기들이 오냐, 하고 달라붙었다.
술을 많이 마신 것은 서진뿐만이 아니었다. 게임을 지속할 것 같은 분위기에 몇몇 여자들이 뒤쪽으로 물러나 자리를 피했다.
넓은 방 안은 게임을 하는 무리와 게임을 하지 않고 뒤에서 술을 마시는 두 무리로 나누어졌다. 원래부터 술게임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시헌은 자연스럽게 무리를 빠져나왔다. 마음 같아선 서진을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게임에 진 것이 많이 억울한지 서진은 시헌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게임을 하지 않은 무리에 있으면서도 시헌의 시선은 서진이 있는 게임 무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 시헌아.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돼?”
게임을 하지 않은 무리는 남자보다는 여자의 비율이 더 높았다. 주말에 시간이 되냐고 묻는 여자 동기의 손이 자연스럽게 시헌의 무릎 위 손을 붙잡았다. 서진이 조금 많이 마셨을 뿐, 방 안에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 증거로 시헌 또한 술을 꽤 마신 상태였다.
“어. 아마도.”
여자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한 시헌의 고개는 여전히 게임을 하는 서진 쪽으로 닿아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이기겠다고 난리를 쳤던 서진은 다시 게임에서 져 벌칙주를 마실 위기에 처했다. 심지어 옆에 있는 여학생과 러브샷이었다.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모습에 게임을 하고 있지 않은 무리 또한 고개를 돌리며 관심을 가졌다. 서진과 러브샷에 걸린 여자가 수줍은 듯 내뺐다.
술에 취해 게임에 이기는 것 외에는 머리에 없는 서진은 여자의 팔을 잡아당겨 빠르게 술을 마셨다. 거침없는 서진의 행동에 다들 환호를 하며 박수를 쳤다. 새 게임을 시작하려는 분위기에 시헌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술에 취한 서진은 시헌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묘한 서운함을 느낀 시헌은 제 옆에 앉은 여자의 손을 붙잡았다.
술에 취한 여자의 머리가 자연스럽게 시헌의 어깨와 가슴 근처에 닿았다. 시헌은 그런 여자를 일부러 밀어내지 않았다. 몇몇 남학생들은 담배를 피운다며 자리를 뜨고, 시헌을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여자들이 자기네들끼리 이야기를 계속했다. 입을 다물고 있는 시헌은 게임을 하지 않는 무리 중 남아 있는 유일한 남자였다.
“우리도 게임 할까?”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여자들도 심심했던 모양인지 자기네들끼리 가볍게 게임을 하기로 했다. 근처에 있는 술을 모아 와 술게임을 했다. 시헌의 옆에 있던 여자가 진 모양인지 맥주와 소주가 섞인 종이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술이 더는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헌은 여자의 손을 붙잡아 종이컵에 담긴 술을 순식간에 비웠다.
시헌은 일부러 서진이 있는 무리 쪽으로 몸을 돌려 술을 마셨다. 여자들은 그게 단순히 고개를 돌려 술을 마시는 것이라 생각했다. 서진은 대신 술을 마시며 여자의 손을 붙잡고 있는 시헌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인상을 찌푸리는 서진을 본 시헌의 목으로 남아 있던 술이 한꺼번에 넘어갔다.
맥주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소주를 더 많이 넣은 모양인지 술기운이 훅, 하고 올라왔다. 고개를 앞으로 숙이는 시헌에 깜짝 놀란 여자가 시헌의 몸을 붙잡았다. 그 모습을 서진이 전부 보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시헌아. 헌아. 괜찮아? 정신없이 흔들리는 시야에 무작정 손을 뻗자 여자의 뺨이 시헌의 손에 닿았다. 뒤늦게 그게 서진의 뺨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시헌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 피우고 올게.”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시헌의 발에 근처에 있던 소주병이 차였다. 다행히 빈 병이었다. 넘어진 병들을 본 시헌은 벽에 손을 기댔다. 여자들은 밖으로 나가려는 시헌을 걱정하고 있었다. 마침 게임이 끝나 가는 남자 몇 명이 시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같이 갈게.”
동기의 어깨를 누르며 일어난 서진은 밖으로 나간 시헌의 뒤를 쫓아 펜션을 나왔다. 정문 근처에 비틀거리며 어딘가로 향하는 시헌이 있었다. 담배는 얼어 죽을. 바다와 가까운 펜션은 밖으로 나가면 도로밖에 없었다. 몇 시인지도 모를 새벽이라 도로에는 차들이 거의 없었다. 서진은 도로가를 걷는 시헌의 뒤를 밟으며 소리를 질렀다.
“야 박시헌!!”
“…….”
“씨발!! 대답 안 하냐!”
“……”
“어디까지 가냐고!!”
펜션에서 점점 멀어지는 시헌을 보며 서진은 골치가 아프게 됐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시헌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이쯤 되니 서진도 오기가 생겼다. 서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시헌의 뒤를 쫓았다.
뒤가 조용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린 시헌은 서진이 저를 말없이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 오기가 생긴 시헌은 또다시 걸음을 빨리했다. 시헌이 걸음을 빨리한 만큼 서진도 걸음을 빨리 걸었다. 두 사람 다 술에 잔뜩 취한 터라 뛸 수는 없었다.
속도를 높이고, 쫓아가고, 멈추고, 고개를 돌리고 여전히 뒤에 있는 서진을 보고 다시 속도를 높이기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어디인지도 모를 고가도로 한복판에 나와 있었다. 지친 시헌이 걸음을 천천히 하며 마지못해 말했다.
“왜 쫓아와. 쫓아오지 마.”
“싫어.”
“도망갈 거야.”
“가든가.”
“따라오지 말라고.”
“싫다고.”
초등학생 같은 말싸움의 연속이었다. 시헌의 속도가 줄어든 것을 확인한 서진은 걸음을 빨리해 시헌의 팔을 낚아채 강제로 몸을 돌렸다. 시헌은 차마 눈을 아래로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멈췄다. 짜증을 내려 했던 것도 정말 잠시뿐, 서진은 고개를 숙인 시헌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어, 너…… 우냐?”
“…어. 안 운다고! 좋아? 좋았어?”
“뭐, 뭐가. 야 울지 마! 네가 울면 어떻게 하라고!!”
설마 시헌이 울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서진은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며 말을 더듬었다. 서진의 손을 놓은 시헌은 마치 울분을 토하듯 언성을 높였다.
여자와 러브샷뿐이 아니다. 같이 게임을 하는 남자들의 장난도 서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술게임이니까. 게임을 하는 내내, 술을 마시는 내내 참았지만 역시 참을 수가 없었다. 서진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시헌을 향해 소리쳤다.
“너도 여자랑 손잡고! 그랬잖아!!”
술기운에 정신이 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제가 한 말이지만 불난 집에 기름 붓기 이상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짜증이 났던 건 사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진의 한마디에 시헌은 폭발한 듯 눈물을 흘렸다.
“끅… 네가… 흐윽! 너, 너 때문이잖아! 네가, 네가 그러니까… 질투 나서…… 네 잘못이야!!”
“야야, 야! 잠깐만 박시헌. 너 내가 애들이랑 게임을 하는 거 때문에 질투 나서 다른 여자애랑 손잡고 놀았다고?”
두 사람 다 술에 취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술기운에 사고가 흐려진 서진이지만 최대한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정리하자면 시헌은 서진이 노는 걸 질투해 일부로 질투를 유발하기 위해 행동했다는 뜻이었다.
“하하. 하하하!!”
“웃지 마!! 웃지 말라고!!”
이 얼마나 단순하고 바보 같은 질투인가. 동기들한테 질투가 난다고 했을 때부터 눈치를 채긴 했지만 시헌의 질투가 이 정도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뒤늦게 울음을 그친 시헌은 서진의 웃음에 얼굴을 붉혔다. 시헌은 그칠 줄 모르는 서진의 웃음에 쪽팔린지 등을 돌렸다.
“나 갈 거야.”
“박시헌!”
서진은 몸을 돌린 시헌의 등을 와락 하고 안았다.
“너 너무 귀엽잖아.”
서진에게 안긴 시헌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제 어깨 위로 안긴 서진의 뺨이 시헌의 뺨에 닿았다. 시헌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도로가에 놓인 가로등이 검은 아스팔트와 두 사람의 그림자를 비췄다.
“아, 안 귀여워!”
“귀여워.”
“…가.”
“뭐라고?”
“네가 더 귀여워.”
“푸읍, 하하하하하!”
시헌의 말에 서진은 시헌을 안은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게임을 하느라 서진도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시헌 또한 답답한 마음에 마신 술의 양이 꽤 많은 편에 속했다. 서진은 시헌의 뺨 위로 손을 올리며 턱을 돌렸다. 시헌의 얼굴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 느껴졌다. 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로 서진이 시헌의 이름을 불렀다.
“시헌아.”
“왜.”
“박시헌, 나 안 볼 거야?”
“싫어.”
하여튼 고집하고는. 서진은 어렸을 때부터 시헌이 이상한 데서 고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술에 취하니 더 심해진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었다. 장난기가 발동된 서진이 시헌의 뺨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놓았다.
“흐음, 그럼 나 그냥 간… 으읍….”
“으읏….”
서진의 키를 맞추려 약간 발끝을 들어 올린 시헌은 서진의 입을 막으며 키스를 해 왔다. 술에 취해 무슨 맛이 나는지도 모를 키스를 한동안 지속한 서진은 시헌을 살짝 밀어냈다. 누굴 닮았는지. 여자 경험도 적은 녀석이 키스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헌보다 경험이 많은―그래 봤자 한두 번 차이지만―서진은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인적이 드문 3차선 도로 한복판에서 두 사람이 약간의 거리를 벌리고 서 있었다. 건너편 차선에서 차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가며 건너편 대로변 안쪽을 비췄다.
인적이 드문 도로를 지나가는 차 탓인지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차의 헤드라이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헤드라이트 끝에는 러브호텔이 있었다. 지방의 도로가에 놓인 러브호텔. 서진은 다시 어딘가로 향하려는 시헌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
“바, 박시헌.”
“…왜.”
“갈까?”
가로등 아래에 있는 서진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푸웁, 이번에는 시헌이 웃음을 참으며 서진에게 안겼다. 서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시헌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 * *
차가 없는 틈을 타 반대편 차선으로 넘어온 시헌과 서진은 모텔 안으로 들어갔다. 조명이 반쯤 고장이 나 있어 장사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의 인기척에 한참 만에 좁은 문틈 사이로 성인 남성이 얼굴을 내밀었다.
서진은 그제야 제가 지갑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시헌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행히 시헌의 잠바 주머니 안에서 지갑이 나왔다. 뭐라고 얘기를 하던 시헌은 유리창 안으로 현금을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을 흘끗 바라본 남자는 별다른 말 없이 열쇠를 올렸다.
열쇠를 든 시헌과 서진은 옆쪽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사람 하나둘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좁은 엘리베이터였다.
서진은 시헌을 대신해 4층 버튼을 눌렀고, 시헌은 문이 닫히기 무섭게 서진에게 안겨 들었다.
“야, 좁아.”
“나 싫어?”
“이게 또…… 좋아. 좋다고 씨발.”
서진은 술에 잔뜩 취한 시헌의 애교를 못 이기며 시헌의 허리를 안았다. 열쇠 문을 따고 들어가기 무섭게 둘은 입술을 맞췄다. 반쯤 열린 문틈이 신경 쓰였던 서진은 간신히 시헌을 밀어내고 문을 잠갔다. 덕분에 침대로 내던져지다시피 한 시헌은 눈을 깜박이며 서진을 올려 봤다.
서진이 시헌이 앉아 있는 침대에 앉자 침대가 푹, 하고 아래로 꺼졌다. 시헌의 위로 올라탄 서진은 곧장 윗옷을 벗었다. 급한 마음에 셔츠라는 사실도 잊은 채 티셔츠 벗듯 벗어 바닥으로 내던졌다. 셔츠와 함께 안에 있던 반팔티도 벗겨져 나갔다.
“나도 벗을 거야.”
오뚝이처럼 일어나려는 시헌의 몸을 누른 서진은 시헌의 바지 벨트와 버클을 풀어 아래로 내렸다.
“가만히 있어.”
“아, 싫…. 으응… 응.”
바지와 브리프를 반쯤 아래로 내린 서진은 시헌의 페니스를 천천히 주물렀다. 싫다고 반항하던 것도 잠시뿐 본능적인 쾌락에 시헌은 기분이 좋은지 얼굴을 붉히며 다리를 오므렸다. 서진은 점점 꼿꼿하게 서는 시헌의 페니스 천천히 입안에 머금었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시헌의 목소리가 서진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젠장, 반칙이라고.”
“흐으. 머가? 응. 하응….”
중후하면서도, 너무 여성스럽지 않은 시헌의 목소리가 서진을 자극했다. 시헌의 목소리 하나만큼은 좋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녔다. 서진의 입안은 시헌의 페니스에서 흘러나온 쿠퍼액으로 질척해져 있었다. 역시 끝까지는 무리라고 생각한 서진이 입을 떼려 하자 시헌이 서진의 머리를 눌렀다.
“야, 잠… 으읍…!”
울컥, 하고 쏟아져 나오는 희멀건 정액에 서진은 깜짝 놀라며 발버둥을 쳤다. 다행히 금방 내뺄 수 있었지만, 얼굴이며 입 근처에 튀는 신세는 면할 수 없었다. 몸을 침대 헤드 뒤쪽으로 내뺀 시헌이 큭큭대며 서진의 부풀어 오른 다리 사이를 발끝으로 찔렀다.
시헌의 발가락이 서진의 옷 안 페니스에 닿을 때마다 조금씩 움찔거렸다. 서진의 목을 감싸 안은 시헌은 서진의 입안으로 혀를 넣었다.
“나 아직 남았…….”
“괜찮아.”
서진의 입안에 있다면 뭐든 상관없다는 식의 시헌은 정액이 섞인 타액을 넘겨받다시피 해 목 안으로 넘겼다. 어지간히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하기 힘든 행동에 서진은 기가 찬다며 헛웃음을 내지었다. 바지를 마저 벗어 던진 시헌은 서진의 벨트를 풀려 몸을 숙였다.
“너까지 할 필요… 읏, 는 없잖아.”
“시룬뎅.”
“……뭐라는 거야, 씨발.”
시헌은 서진의 페니스를 입안으로 넣으며 천천히 핥아 올라갔다. 아주 자연스럽게 서진의 몸이 뒤로 넘어가며 시헌이 서진의 위로 올라탔다. 서진의 바지와 브리프를 벗겨 완전히 내던진 시헌은 그제야 제 윗옷도 벗어 침대 아래로 던졌다. 서진은 제 위에 올라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 시헌을 이해할 수 없다며 바라봤다.
“후, 또 뭐야?”
술에 취한 시헌은 참으로 까다로웠다. 평소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는 녀석이긴 했지만, 술에 취한 시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보다는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르는 녀석이라는 쪽이 더 옳았다. 어느 쪽이든 서진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는 아니었다.
“안 귀여워.”
“알았어. 알았어.”
“멋있다고 해 줘.”
“너 나보다 키도 작잖아.”
“키 작은 게 뭔 상관이야.”
“그게 귀엽다는 거야.”
서진이 혼자 실소를 터트렸다. 서진의 실소가 마음에 들지 않은지 시헌은 서진의 다리를 옆으로 내벌렸다. 당황한 서진이 발을 오므렸으나 시헌의 힘은 생각보다 강해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서진의 허벅지 근처로 차가운 뭔가가 떨어졌다.
“읏. 차가. 뭐야?”
“젤.”
“언제 꺼낸 거야?”
“아까. 난 안 멋있으니까 내 맘대로 할래.”
“아놔, 진짜야. 너 그럴…… 으읏! 차갑다고!”
서진이 발버둥을 치자 서진의 다리를 위로 올린 시헌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시헌의 힘에 몸무게까지 실린 서진은 정말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장난 좀 친 거로 진지하게 반응하기는. 저게 귀엽다는 걸 말한 건데 시헌의 귀에는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쪽에 젤을 흘린 시헌의 손가락이 서진의 안을 천천히 비집고 들어왔다.
“하윽! 으으… 야. 천천히.”
“있잖아, 나 고백 하나 해도 돼?”
“으, 응. 하, 무슨 씨발. 고백.”
“넣고 싶어.”
“죽어!”
목이 침대 뒤쪽으로 넘어가려는 서진이 넣겠다는 시헌의 말에 반응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확실히 급하긴 한 모양인지 시헌이 빠르게 손가락 개수를 늘렸다.
“그 정… 읏! 도는 참으라고! 천천히. 제발, 천 처….”
“시른뎅. 안 멋있으니까 내 맘대로 할 거야.”
“취소! 취소. 멋있어. 존나 멋있으니까 으… 하으읏! 하악! 아으으…!”
손가락이 나가기 무섭게 밀고 들어오는 시헌의 페니스에 서진은 못 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시헌은 제 페니스 끝을 머금은 서진의 안 근처로 뚝뚝 젤을 떨어트렸다. 차가운 젤이 시헌과 이어진 곳에 닿을 때마다 서진의 몸이 움찔거렸다.
시헌은 손가락으로 서진의 안쪽으로 젤을 밀어 넣었다. 시헌은 페니스를 조금 더 넣으며 서진의 몸을 침대 위쪽으로 돌렸다.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깊숙이 넣어 버린 페니스에 서진이 시헌의 목에 팔을 걸며 신음을 흘렸다.
“으으… 하….”
“너 지금 엄청 섹시해.”
“…개자식. 천천히… 하아, 하라니까…….”
“좋아? 하, 난 좋아, 서진아.”
시헌이 반쯤 들어간 페니스를 조금 더 넣었다. 시헌이 몸을 살짝 움직이자 서진의 몸이 다시 움찔하고 떨렸다.
“하읏… 거기 잠깐…! 흐아아… 박시헌, 제발… 으읍….”
시헌은 정신이 없이 신음을 흘리는 서진의 입술을 막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뿌리 끝까지 들어간 느낌에 시헌 또한 정신이 없었다.
“으읏. 하, 서진아.”
“……읏. 으응… 하….”
“서진아. 강서진.”
“하아, 왜!!”
“사랑해.”
“윽… 너….”
시헌의 고백에 서진의 등 뒤가 점점 뜨거워지며 열 기운이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여태껏 좋아한다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또 별개의 고백이었다. 시헌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에서 움직이며 정신이 없는 가운데 서진은 힘겹게 입술을 뗐다.
“으… 하읏. 나, 나도…….”
서진의 입술이 움직이는 걸 들은 시헌은 몸을 숙여 서진에게 안겨 들었다. 난데없이 몸을 숙인 시헌의 움직임에 안을 긁는 느낌이 든 서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 미안.”
“하으… 너 진짜….”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그랬어.”
시헌은 서진을 제 무릎 위로 올렸다. 꼿꼿하게 선 채로 박힌 페니스에 서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여튼 덩치도 작은 것이 무슨 힘이며 거기만 더럽게 커서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헌은 노골적으로 드러난 서진의 쇄골과 목 위를 천천히 핥았다.
“다른 사람 보지 마.”
“…….”
“바람피우면 가만 안 둘 거야.”
장난에 가까운 말투에 서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시헌의 목에 팔을 걸었다. 서진은 짧은 순간 시헌에게서 자신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던 기욱을 떠올렸다.
지칠 대로 지친 서진은 더 이상 기욱에 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오기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
씨발, 알 게 뭐야. 자기도 누나랑 섹스하는 주제에.
서진은 제 밑에 있는 시헌이 주는 쾌락에 정신없이 몸을 맡겼다.
* * *
“으으….”
요란한 휴대폰 벨 소리에 시헌은 습관처럼 머리맡으로 손을 뻗었다. 낮은 침대 헤드에 손을 부딪친 시헌은 얇은 이불을 살짝 걷어 냈다. 이불 안으로 제 품에 안겨 잠이 들어 있는 서진이 있었다. 그제야 지난밤 일이 기억난 시헌은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갑자기 이불이 들려 추운 서진은 습관처럼 시헌의 허리를 안아 얼굴을 묻었다. 베개 꼴이 된 느낌이었지만 서진이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배 근처에 닿는 뺨의 느낌이 제법 나쁘지만은 않았다.
끊기는가 싶었던 벨 소리가 다시 울렸다. 시헌은 혹시 서진이 깰까 서진의 몸을 한쪽으로 돌려 눕힌 후 소리가 나는 침대맡을 뒤졌다.
침대 안으로 손을 뻗자 시헌의 휴대폰이 먼지와 함께 나왔다. 먼지를 탈탈 턴 시헌은 벨 소리가 잠시 잦아든 틈을 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기 무섭게 휴대폰 너머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 야!! 박시헌, 강서진!!! 씨발 니네 어디야!!
― 어. 그러니까…. 잘 있어.
모텔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시헌은 동기의 잔소리를 들으며 침대에서 세상모르게 자는 서진을 바라봤다. 수화음 소리를 최대한으로 낮춘 뒤 시헌은 바닥에 떨어진 속옷과 옷가지들을 대충 주워 입었다. 찝찝하긴 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 하아, 미안해. 알았어. 금방 갈게.
화가 난 동기를 간신히 달랜 시헌은 옷을 전부 입은 뒤 잠이 들어 있는 서진의 몸을 흔들었다.
“강서진. 일어나.”
“…으윽. 여긴 어디… 아놔, 씨발.”
시헌이 통화를 할 때부터 반쯤 깨어 있던 서진은 뭉그적대던 시헌에 비해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이 짧았고, 곧장 눈을 떴다. 시헌은 서둘러 옷을 입으려는 서진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급하게 바지를 구겨 넣던 서진의 다리가 바지 안에 걸렸다. 시헌은 휘청거리며 넘어지는 서진을 품 안으로 안았다.
“천천히 해, 천천히.”
“……알겠어.”
다행히 두 사람은 펜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두 사람이 오기 무섭게 동기들이 몰려왔다.
“하아, 정말이지. 너네 둘이 사라져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야, 재민이한테 전화 좀 해라.”
“재민이는 왜?”
“왜긴 왜야 니네 찾으러 나갔지. 하여튼 미친다. 술 처먹고 바다에 빠져 죽은 건 아닌가 걱정했다.”
“상상력하고는. 미안해.”
“썅, 미안하면 나중에 둘이 술 한 번씩 쏴. 야, 됐어. 어쨌든 돌아왔으니까 됐다. 밥이나 먹자.”
동기가 들어가자며 손을 흔들었다. 시헌은 어젯밤 일을 생각하며 고개를 붉히는 서진의 등을 툭, 하고 건드렸다.
“들어가자.”
* * *
“으읏… 하아.”
익숙하지 않은 방 안에서 서진은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주말 오후, 햇살이 가득한 오피스텔 안 창문에 처진 블라인드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서진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벌어진 블라인드 너머에는 J대 병원 외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서진이 고개를 돌리자 기욱은 팔을 뻗어 블라인드를 완전히 내렸다. 기욱의 무릎 위에 앉은 서진은 제 허벅지를 쓰다듬는 기욱의 손에 몸을 뒤로 내빼 고개를 저었다. 몸 앞으로 쏠리는 서진의 무게에 기욱은 침대에 놓인 베개를 등 뒤로 댔다. 기욱은 보고 있던 서류를 잠시 옆으로 놓은 뒤 휴지를 뽑아 손에 묻은 정액을 대충 닦아 냈다. 기욱의 손이 늘어진 서진의 페니스를 툭툭 건드렸다.
“옷. 그만. 언제까지 할 거예요?”
“…뭐가 불만이야?”
“다요.”
서진은 가슴에서부터 올라오는 기욱의 손을 옆으로 밀어냈다. 모텔도 아니고, 호텔도 아니다. 도대체 병원 근처에 오피스텔은 또 언제 잡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기욱은 서진이 밀어낸 손으로 침대 위로 짚었다. 기욱의 손 밑에 있는 서류들이 침대와 손에 의해 구겨졌다.
끝까지 할 거면 하고, 말 거면 말든가. 서진은 자신의 허리 근처를 감고 있는 기욱의 다른 손을 보며 혀를 찼다. 서진이 발버둥 치자 기욱이 서진을 제 몸 쪽으로 끌어안았다.
이쯤 되면 제가 인형인지 사람인지 구별이 안 될 지경이었다. 도대체 이 남자에게 자신은 뭘까. 요염한 시선으로 서진을 보던 기욱이 키스를 하기 위해 얼굴을 가져다 댔다.
“아씨! 아파요!”
그것도 잠시뿐. 서진은 맨살에 닿는 기욱의 수염에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기욱을 밀어냈다. 서진에게 밀려난 기욱은 어이가 없다는 듯 제 턱 근처를 만지작거렸다. 손끝에서 애매한 길이의 수염이 쓸려 나갔다. 확실히 기욱의 며칠은 정신이 없었다.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결국 병원 근처에 따로 오피스텔을 잡은 것만 해도 그랬다. 참다못한 서진이 말했다.
“면도 좀 해요.”
“하. 알았어. 하면 되잖아.”
서진이 언제부터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시키는 녀석이었단 말인가. 누군가한테 명령을 듣는 걸 좋아하진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기욱도 인정하는 부분이라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결국, 기욱은 키스 대신 양손으로 서진의 허리를 더욱 꽉 안았다.
“저녁에 뭐 하려고?”
예상치 못한 기욱의 말에 서진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서진은 기욱이 저에게 CCTV를 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서진의 표정에 기욱은 못 참겠다며 서진의 뺨 근처에 입술을 맞췄다. 최대한 면도를 하지 않은 턱이 닿지 않게 키스를 했지만, 그래도 뺨 끝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하하, 농담이야. 그냥 찔러 봤어.”
기욱의 손에서 놀아났다는 생각에 서진은 하,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냥. 친구들이랑 술 약속이요.”
대학생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지 않나.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서진의 대답에 기욱은 서진의 몸을 돌려 침대 위로 눕혔다.
“전화해.”
“…뭐, 뭘요.”
“너 오늘 못 가.”
“진짜 미친 거…!”
기욱은 일어나려는 서진의 몸을 침대 아래로 눌렀다. 기욱의 손에 의해 서진은 못이 박힌 것처럼 꼼작도 할 수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기욱은 작은 의자에 걸려 있는 서진의 잠바 안을 멋대로 뒤졌다. 주머니 속에 있던 서진의 휴대폰이 침대 위로 날아왔다. 서진은 제 앞에 있는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강서진.”
“왜, 왜 그래요….”
침대 위로 올라오며 압박하는 기욱에 서진은 점점 몸을 뒤로 내뺐다. 그러나 좁은 침대 안에서 서진이 갈 곳은 없었다. 기욱에게 얇은 발목이 잡혀 아래로 내려온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대단한 술 약속은 아니었다. 안 나간다고 해도 딱히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닌, 정말 일상적인 술 약속이었다. 누구라도 주말 아침부터 약속도 없이 무작정 전화를 해 나오라고 하면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었다. 평소보다 조금 짜증을 내긴 했지만 그렇다 할 신경질을 낸 것은 아니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좋아 보이는 기욱의 심기를 어디서, 어떻게 건드렸는지 서진은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서진은 기욱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빼앗듯 가져와 전화를 걸었다.
― 미, 미안한데, 나 오늘 일이 생겨서 못 갈 것 같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하아, 알았어. 미안하다.
아쉬워하는 동기의 목소리에 눈치를 본 서진은 최대한 빨리 전화를 끊었다. 기욱은 서진의 휴대폰을 빼앗아 침대 옆 서류 더미가 있는 선반 위로 올렸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네.”
씨발 새끼.
* * *
사람이 가득한 술집 안으로 들어간 서진은 가게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서진을 발견한 동기가 이쪽이라며 손을 흔들었다. 검은 잠바를 입고 온 서진은 기다란 소파에 털썩, 하고 다리를 꼬며 주저앉았다.
“어? 서진 형 못 나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몰라. 약속 취소됐어.”
“도대체 무슨 약속인데 나온다 못 나온다 했다 그래?”
“그냥. 그런 게 있어.”
서진은 더 말하고 싶지 않다며 근처에 있는 잔을 넘겨받았다. 아무렴 거창한 술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같이 술을 마시는 친구들은 서진의 번복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볍게 잔을 부딪친 서진은 원샷을 하기 무섭게 혼자 술을 따랐다.
“야, 무리해서 마시진 마라. 박시헌도 없는데 술 취하면 나 커버 못 쳐준다?”
“적당히 마실 거야.”
걱정하는 동기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은 서진은 멋대로 잔을 비웠다. 술자리에 나가지 말라며 오후 내내 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힌 기욱의 시선이, 행동이 서진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오늘 저녁까지 오프였던 걸 생각하면 정말 기욱은 하루 종일 서진을 붙잡을 계획이었던 걸지도 몰랐다.
응급환자가 생겼다는 후배 의사의 전화가 오지 않았더라면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서진은 기욱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해 몇 번이나 자세를 바꾸고, 허리를 만지작거렸는지 모른다. 서진은 제 앞에 있는 빈 술병을 흔들었다.
마침 건너편에 알바생이 가져다준 새 술이 있었다. 뜯지 않은 술을 향해 손을 뻗음과 동시에 앞쪽에서 묘하게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누구더라.’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는 얼굴인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아는 척을 안 하는 걸 보면 모르는 사이인가 싶기도 하고. 서진은 사람 얼굴은 비교적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그런 서진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묘하게 위화감이 들었다.
술병을 집으려 몸을 앞으로 내밀었지만 팔이 닿지 않았다. 서진이 술을 가져오려는 것을 눈치챈 그가 술병을 서진에게 내밀었다. 서진은 그가 준 술병을 테이블 옆으로 내려놓았다.
“어, 고맙다.”
“뭘. 그 정도로.”
“아아, 맞다. 야. 니네 둘이 같은 고등학교였다며?”
둘의 모습을 본 동기 한 명이 그와 서진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고등학교라는 얘기에 서진은 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서진은 고등학교에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다. 자퇴한 이후 연락을 하는 친구들도 없었고.
“어. 응. 그랬지.”
“뭐야? 둘이 안 친했어? 하긴, 그럴 수 있지.”
인훈의 말에 술에 취한 동기는 자기 멋대로 대답하며 옆에 있는 친구와 대화를 이어 갔다. 각자 자기 사람들과 대화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잔을 반쯤 비운 서진은 텁텁한 맛에 결국 소주를 비우지 못한 채 잔을 내려놓았다.
“야.”
“…어?”
“너 이름이 뭐냐?”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 했으나, 가슴 한구석에서 이는 불편함에 서진은 결국 그의 이름을 물었다. 한 타이밍 늦게 그가 서진에게 말했다.
“나 기억 안 나?”
“기억나면 물어보겠냐.”
묘하게 낯이 익는 건 사실이지만 서진은 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서진의 짜증 섞인 말투에 그가 어설프게 웃더니 귀밑으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정말 기억 안 나? 인훈이야.”
“…아, 잠깐만 전화 좀.”
서진은 타이밍 좋게 울리는 휴대폰에 인훈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 어. 응. 아니, 그럴 리가.
서진은 휴대폰을 어깨에 걸친 채 술을 마시며 시헌의 전화를 받았다. 종일 정신이 없어 시헌과 연락을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 너 술 마셨어?
― 조금. 지금 애들이랑 있어.
다시 술잔을 기울인 서진은 전화를 하는 내내 저를 보고 있는 인훈을 힐끗댔다.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한 얼굴에 서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바로잡았다. 술을 마시고 있다는 서진의 말에 휴대폰 너머 시헌이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 알았어. 이따 끝나는 대로 갈게.
― 밥 먹고 있다면서. 근데 뭔 밥을 그런 데까지 가서 먹냐.
호텔 중식당이라는 말에 서진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고작해야 20대 초반인 시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만난다고 그런 곳에서 밥을 먹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엄마한테 끌려온 거야. 세미나 갔다가.
― 아, 고생이 많네.
시헌의 집안이 의대에 대해 유독 유난이 심한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 본과도 들어가지 않은 시헌을 데리고 세미나를 다닌다니 참 고생이겠구나 싶었다.
2차까지 시헌을 데리고 간 걸 본다면 목적은 세미나가 아니라 그 2차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래서 좋은 집안 애들이란. 벌써 격의 차이가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에 서진은 다시 술을 마셨다.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시헌은 슬슬 들어가 봐야 한다며 중얼거렸다.
― 술 적당히 마셔.
― 알았어.
그렇게 말하는 서진은 이미 두 번째 술잔을 비우고 난 후였다. 약간 양심에 찔린 서진은 세 번째는 술 대신 물을 마셨다. 찬물이 목을 적시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인훈과의 대화가 끊긴 서진은 앞쪽에 있는 인훈을 바라봤다.
“통화 끝났어?”
“어, 응.”
“둘이 친한가 보네.”
“좀.”
인훈의 중얼거림에 서진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어딘가, 어딘가 묘하게 불편하단 말야. 단순히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서진은 인훈과 마주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불편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동기가 서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끼어들었다.
“뭐야? 너 또 시헌이랑 통화했어? 온대?”
“못 온대.”
서진은 술에 취해 달라붙는 동기의 몸을 옆으로 밀어냈다.
“하여튼. 박시헌 걔는 자기 혼자 바빠요. 안 그르냐? 자자, 한잔해.”
시헌의 뒷담 아닌 뒷담을 한 동기가 서진의 잔에 술을 따랐다. 술을 마시기 무섭게 동기는 다시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 갔다. 술자리가 불편한 건 아닌데,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서진은 불편함을 이기고 인훈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옆에 있던 여학생들과 인훈이 주고받은 대화로 서진은 인훈이 같은 학교라는 걸 알아냈다.
“너 경영학과라고?”
“어. 응. 올해 3학년이야.”
정상적으로 학교에 들어갔다면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얘가 이렇게 공부를 잘했나 싶기도 했지만 타인의 공부까지 서진이 간섭할 이유는 없었다. 그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었던 서진은 앞에 있는 안주를 집어 먹었다.
“넌. 갑자기 자퇴해서 좀 놀랐어.”
“어? 형 자퇴했어?”
씨발.
인훈의 말을 들은 한 살 어린 동기가 호기심에 끼어들었다. 불안불안 하더니 기어코 터트리는구나 싶었던 서진은 노골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어.”
“헐, 왜요?”
“그냥. 그런 일이 있어.”
“뭐, 그럴 수 있죠. 도경 형도 중졸에서 검고 보고 들어 왔다는데요. 뭘. 괜찮아요.”
워낙 연령대가 다양하다 보니 서진처럼 사연을 가진 동기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용히 넘어가는 그의 말에 서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술자리가 어느 정도 진행될 무렵 서진은 갑갑함을 이기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기 위해 가게 밖으로 나왔다. 탁탁,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에 불을 붙였지만,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이놈의 싸구려 라이터. 몇 년째 편의점 라이터만을 고집하는 서진이지만 이럴 때만큼은 진심으로 라이터를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힘겹게 담뱃불을 붙이고 있는 서진의 모습에 인훈이 제 라이터를 내밀었다.
서진은 앞에 내밀어진 인훈의 라이터를 흘끗 보더니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마침 서진의 라이터에 불이 붙었다. 서진은 가게의 유리벽에 기대 담배를 피웠다. 인훈은 담배를 다 피운 것인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진의 근처를 머뭇거렸다.
인훈과 같이 가게를 나온 일행들은 춥다며 안으로 들어가 버린 지 오래였다. 서진은 묘하게 제 주변을 맴도는 인훈이 거슬렸다.
“여자 친구 생겼다며?”
“씨발, 헤어진 지가 언젠데.”
“아, 그래? 난 방금 통화한 게 여친인 줄 알았어. 시헌이?”
“남자야.”
“친구?”
“그럼 친구지 뭐냐?”
흔들리는 이마를 붙잡은 서진은 담배 끝 필터를 씹었다. 도대체 왜 제가 오늘 처음 봤을지도 모르는 녀석하고 이런 얘기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머리 한구석으로는 흔히 물어볼 법한 질문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안 그래도 예민한 서진은 인훈의 질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 대 더 피우려고 했는데.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서진은 담배를 끄기 무섭게 가게 쪽으로 몸을 돌렸다. 탁, 하고 인훈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는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이건 또 뭔 경우야? 서진은 인훈에게 붙잡힌 팔을 신경질적으로 노려봤다.
“있잖아, 괘, 괜찮아?”
“뭐가?”
인훈의 손을 뿌리친 서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반박했다. 서진의 눈치를 본 인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아니. 너 학교 다닐 때 그……. 괜찮은 건가 싶어서…….”
서진은 역시나,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서진이 학교에서 난리를 치고 나온 것은 꽤 유명했다. 게이니 하는 소문도 그렇고. 수능 접수를 제외하고 고3 담임 선생님과도 연락하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소문만 내지 마.”
“어, 응. 당연하지.”
인훈의 대답을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진이 인훈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인훈은 멀어지는 서진을 보더니 뺨을 긁적였다.
* * *
“아, 강서진! 내가 너 이럴 줄 알았어!”
계산한 뒤 가게 밖으로 나온 동기는 반인사불성이 된 서진의 몸을 붙잡았다. 적당히 마시라고 했는데. 동기는 혼자 달릴 때부터 알아봤다며 짜증을 냈다. 계속해서 2차를 가자는 서진을 붙잡고 있는 사이 다른 동기가 마침 오는 택시를 붙잡았다. 이미 지하철은 끊긴 지 오래였다. 몇몇 여자들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낸 뒤 다음 택시가 오기를 기다렸다.
“근데 얘 그냥 보내도 괜찮겠냐? 강서진 집 근처에 사는 애 없어?”
“어. 나. 서진이네 집 근처 살아.”
걱정된다며 중얼대는 동기들의 말을 들은 인훈이 손을 들었다. 같이 가겠다는 인훈의 말에 다들 잘됐다며 한숨을 쉬었다. 멀리서 오는 택시가 일행들의 앞에 멈췄다. 서진을 택시에 태우려던 순간 가게 안에서 시헌이 나왔다. 뒤늦게 가게에 들어갔다가 나갔다는 말을 듣고 뛰어나온 시헌이었다.
“어, 형? 오셨네요?”
“강서진은?”
술자리 다 끝났는데 뭐하러 나타났냐는 동기들의 말을 무시한 시헌은 보이지 않는 서진을 찾았다. 동기 한 명이 활짝 열려 있는 택시의 뒷문을 손가락질했다. 들어가기 싫다는 서진을 택시 안으로 구겨 넣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 지금 택시 태워 보내려구요.”
“하아. 됐어. 내가 데리고 갈게.”
그 말에 동기는 건너편에 있는 시헌의 차를 흘끗 바라봤다.
“그럴래요? 누가 데려가든 상관은 없지만, 형이라면 안심이죠.”
성큼성큼 택시 문이 열린 뒷좌석으로 간 시헌은 서진을 밀어 넣으려는 동기를 옆으로 치운 뒤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술에 취해 해롱거리는 서진의 몸이 시헌의 강한 힘으로 택시 바깥으로 꼬꾸라지듯 나왔다. 서진을 품 안에 안은 시헌은 먼저 뒷좌석에 탄 인훈을 슬쩍 봤다.
“하아, 내가 적당히 마시라고 했잖아.”
“머? 마시다 보믄 그럴 수도 있는 거자낭.”
“그래. 그래.”
시헌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서진을 어린아이 달래듯 달랬다. 서진을 차로 데리고 가려던 순간 갑자기 뒷좌석에 있던 인훈이 밖으로 나왔다. 서진을 앞으로 살짝 밀은 시헌은 말없이 몸을 틀었다.
후줄근하게 적당히 입고 나온 서진이나 주변 동기들의 옷차림과 달리 시간이 지나 흐트러지긴 했지만. 미용실에서 한 것처럼 잘 정리된 머리,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정장 차림의 시헌은 평범한 대학생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왜?”
“그게…. 택시에 지갑 흘리고 간 것 같아서.”
인훈이 뒷좌석에 흘린 서진의 지갑을 내밀었다. 시헌은 제 등 뒤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대는 서진을 보며 인훈의 손에 있는 지갑을 낚아채듯 가져왔다.
“많이 취했는데. 데리고 갈 수 있겠어요?”
“뭐?”
“아니, 난 좀 걱정돼서.”
시헌은 제 시선을 피하는 인훈을 노골적으로 노려봤다. 의대 동기 중에 저런 녀석은 없었다. 후배 같아 보이지도 않고. 술자리에 다른 과 학생이나 외부 사람들 한두 명이 끼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조차도 대부분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서진이 같이 술을 마시는 사람 중 시헌이 모르는 사람이라는 건 서진도 처음 만났을 가능성이 큰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시헌은 처음 만난 사람이 서진을 걱정하는 것이 우습기보단 불쾌했다. 시헌은 서진의 지갑을 주머니에 넣은 뒤 휘청거리는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신경 쓰지 마.”
서진을 조수석에 태운 시헌은 차 문을 닫은 뒤 운전석에 탔다. 시헌은 엉망이 된 서진의 꼴을 보며 안전벨트를 매기 위해 서진의 몸을 약간 틀었다. 그 움직임에 정신을 차린 서진이 시헌의 넥타이를 확, 하고 잡아당겼다.
난데없이 끌어당겨진 넥타이에 놀란 시헌은 간신히 서진의 이마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화려한 거리의 조명이 차 안을 희미하게 비췄다. 가늘게 눈을 뜬 서진이 당황하는 시헌의 입술을 막았다.
“야, 너… 으읍……”
시헌은 정신없이 키스하는 서진을 간신히 밀어냈다. 술을 많이 마시긴 한 모양인지 후, 하고 내뱉은 서진의 입 근처에서 진한 알코올 냄새가 났다. 시헌은 서진의 몸을 돌려 안전벨트를 마저 매 주었다. 적당히 마신다더니. 혹시나 하는 기분에 찾아오길 잘했다 싶었다. 반쯤 정신이 든 서진은 차의 시동 소리에 주변을 둘러봤다.
“…….”
“아, 진짜.”
노골적인 서진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시헌은 결국 얼마 가지 못해 갓길에 차를 세웠다. 안전벨트를 푼 시헌은 서진 쪽으로 다가왔다. 서진은 이마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술 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시헌이 못 이기는 척 물었다.
“괜찮아?”
“…….”
입을 반쯤 닫은 서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평소 말 없는 쪽 역은 서진이 아니라 시헌이었는데 말이다. 내리 고개를 흔들던 서진은 시헌이 해 준 안전벨트가 불편한지 풀려고 애를 썼다. 어디서 꼬였는지 서진이 풀려 하면 할수록 더욱 엉망이 되었다.
“놔. 내가 해 줄게.”
서진의 손을 치운 시헌이 탁, 하고 서진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몸을 조이는 벨트가 느슨해지기 무섭게 서진의 머리가 시헌의 몸 쪽으로 기울었다. 그제야 서진이 말했다.
“그냥 좀, 있잖아.”
고개를 살짝 든 서진의 모습에 시헌은 앞으로 나온 서진의 등을 안았다. 서진은 시헌의 정장에 얼굴을 반쯤 묻었다. 가슴 쪽에서 뭔가에 막히는 소리가 났다.
“요즘 꿈을 꾸거든.”
“…꿈?”
“그냥 좀 그래. 갑자기.”
무슨 꿈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뭔가가 탁, 하고 서진을 가로막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면 극도의 불안함이 느껴졌다. 꿈은 꿈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가 아니었기에, 서진은 시헌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술 때문에 예민해진 걸까? 인훈을 본 이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서진을 엄습해 왔다. 서진은 떨리는 손을 시헌의 어깨에 올렸다. 앞유리 너머 가게의 조명들이 차 안을 비췄다. 시헌은 미세하게 떨리는 서진의 손을 붙잡았다.
“지켜주겠다고 했던 거. 거짓말하는 거 아냐.”
“내가 그 소리만 벌써 세 번은 넘게 들은 것 같다.”
“사귀고 나서 말하는 건 처음이잖아.”
“하여튼 일일이 맞는 소리만 하고.”
지켜주느니 마느니, 당시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서진은 ‘너나 잘하라’며 언성을 높였다. 지금은 설령 말뿐이라고 해도 시헌에게서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서진은 제 입술을 덮는 시헌의 키스를 애써 거부하지 않았다.
타액이 흘러내릴 정도로 진한 키스 끝에 운전석에 몸을 살짝 기댄 서진은 제 몸 아래에서 덜렁거리는 시헌의 붉은 실크 넥타이를 바라봤다. 넥타이뿐이 아니었다. 시헌의 정장 차림에 익숙하지 않은 올림머리를 뒤늦게 확인한 서진은 하, 하고 웃음을 내뱉었다. 세미나니 교수님을 만나러 간다고 얘기는 듣긴 들었지만.
“정장 입은 거 어울리네.”
서진의 칭찬에 시헌은 손을 가리며 얼굴을 붉혔다. 이런 불편한 옷 따위 입고 싶지 않았다. 집에 가자마자 내던져 버릴 거라고 다짐을 했던 옷이었다. 서진의 칭찬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시헌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사복 차림으로 갈 수는 없잖아.”
“하하, 부끄러워하긴.”
시헌의 속을 눈치챈 서진은 굳게 닫힌 조수석의 유리창에 몸을 반쯤 기댔다. 시헌이 다시 그런 서진에게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 약간 술이 깬 서진은 운전대를 잡는 시헌을 보며 팔짱을 꼈다.
“예과에 벌써 의학 세미나라니 대단해.”
“비꼬지 마.”
“부러워서 그래.”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종일 엄마 시종 들고, 낯선 교수님들한테 인사 다니며 정작 세미나 때는 병풍처럼 앉아서 자리를 지켰다. 이제 끝인가 싶었더니 회식을 하러 가겠다는데 도무지 안 낄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시헌에게 오늘 하루는 최후의 최후까지 가시방석이었다. 서진의 귀에는 시헌의 그런 불평이 어딘가 배부른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해는 하지만 마냥 공감해 줄 수는 없는 모순이었다.
“큭큭, 근데 진짜 왜 간 거야?”
마침 파란불에 걸린 시헌은 운전대를 붙잡으며 얼굴을 반쯤 묻었다. 운전대 아래로 시헌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몰라.”
시헌도 엄마의 속을 알았다면 서진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시헌은 길 건너에 군데군데 보이는 모텔의 간판을 흘끗거렸다.
“근처에 봐 둔 모텔이 있기는 한데…….”
“왜 말을 흐려?”
“하아, 너 힘들면 집에 갈게.”
할 생각으로 온 건 맞지만, 시헌은 설마 서진이 이렇게 술에 취했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횡단보도의 불빛에 여유가 있는 것을 본 서진은 시헌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빨리. 서진이 입 모양을 움직였다.
차가 출발하기 전에 와 보라는 뜻이었다. 점점 줄어드는 시간 초에 초조해진 시헌은 급하게 안전벨트를 풀고 서진에게 다가갔다. 서진은 시헌의 넥타이를 몸쪽으로 잡아당겨 바로 입술을 맞췄다. 횡단보도 때문에 오랜 키스는 할 수 없었지만, 좁은 차 안에서만 두 번의 기습 키스를 당한 시헌은 당황스러웠다. 급하게 운전석으로 돌아와 운전대를 잡은 시헌은 차를 출발시켰다.
“가.”
“어?”
“모텔 가자고.”
“괜찮겠어?”
운전대를 쥔 시헌의 손이 약간 떨려 왔다. 좋아 죽으려는 주제에. 서진은 다리를 꼬며 엉망이 된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은 나도 지금 하고 싶은 기분이거든.”
* * *
“으읏. 읍… 야!! 그만해!!”
옷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시헌의 손을 붙잡은 서진은 기어코 짜증을 냈다. 평일 아침, 모처럼 데리러 오겠다던―말이 데리러지 이미 서진의 집 앞이었다. 이런 점은 도대체 누굴 닮은 건지―시헌의 말에 평소보다 조금 천천히 준비한 서진은 차에 타기 무섭게 덤벼드는 시헌에 혀를 내둘렀다. 그만하라는 서진의 말에 시헌은 아쉽다며 입 근처에 묻은 타액을 엄지 끝으로 살짝 닦았다.
“안 늦어.”
“누가 늦는다고 그랬냐? 도대체가! 아침부터 어디까지 할 생각이야!!”
서진의 잔소리에 시헌은 고개를 푹 숙였다. 다리를 꼬며 안전벨트를 맨 서진은 차의 앞쪽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출발해 출발!”
“아, 알았어.”
학교까지 운전하는 내내 시헌은 짜증이 난 듯한 서진의 눈치를 보느라 운전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서진은 서진대로 조금이라도 틈이 나기 무섭게 저를 보는 시헌의 시선이 성가셨다. 이래선 제가 잘못한 사람 같지 않나. 정작 아침부터 과도하게 달라붙은 것은 시헌인데 말이다.
“있잖아. 오늘 강의 끝나고…….”
“잠깐만 나 전화 좀.”
타이밍 좋게 오는 진동에 서진은 휴대폰 화면을 열었다. 운전을 하는 시헌도 말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서진은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시헌과 휴대폰 화면을 번갈아 바라봤다.
「시헌이 형님.」
왜 아침부터 전화하고 지랄이야. 서진은 욕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은 채 이어폰을 끼고 전화를 받았다. 운이 좋다면 누나인 척할 수도 있었다.
― 어디야?
― 학교 가는 중.
서진은 일부러 짧은 단어로 대답했다.
― 너 말이 짧다?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평소에는 신경도 안 쓰면서 이럴 때 걸고넘어지는 기욱이 참 얄미웠다. 서진은 한숨을 쉬며 짜증을 냈다.
― 정신이 없어서…… 요.
― 어딘데?
어디냐는 기욱의 말에 서진은 마침 빠르게 지나가는 지하철역 이름을 확인했다.
― 화주역인데요.
― 내려서 기다려.
―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설령 진짜로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고 해도 기욱의 요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파란불에 차가 걸린 시헌이 한동안 통화를 유지하는 서진을 불렀다.
“서진아. 강서…… 진?”
“어. 말해.”
서진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며 기욱의 전화를 끊었다.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놀란 시헌이 서진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손가락질했다.
“전화 끊어도 괜찮아?”
“상관없어.”
“누군데?”
파란불이 바뀌고 시헌의 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속도를 내지 않으며 운전을 하는 시헌에 서진은 이 상황을 어떻게 넘어가야 할지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시헌의 표정으로 봐서는 말없이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야, 박시헌. 너 나 믿냐?”
“난 늘 믿어.”
“내가, 아무 말 안 해도 믿어?”
그냥 전화를 좀 오래하길래 누구냐고 물어봤던 건데. 생각보다 진지하게 구는 서진에 시헌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서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뭔가 잘못 짚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그래서? 지금이 그거야?”
양손으로 운전대를 붙잡은 시헌의 한쪽 손에서 튀어나온 손가락이 다시 서진에 가깝게 향하고 있었다. 시헌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고 판단한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아무 말 안 하길 원해?”
“아마도.”
“하아, 알았어.”
차 안에서 좀 무리하게 서진에게 달라붙은 것도 있고, 시헌은 아침부터 이런 일로 서진과 말싸움하고 싶지 않았다. 학교 근처에 거의 도착한 것을 확인한 시헌은 차의 속도를 천천히 낮췄다.
“편의점 좀 들렀다 가자.”
뭐든 바람을 쐴 필요가 있었다. 서진도 시헌의 말에 동의했다. 시헌의 차가 편의점 근처에 멈추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진의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 소리와 함께 문자가 왔다. 어차피 기욱에게서 온 문자라 생각한 서진은 문자를 확인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뭐 해, 안 내려?”
“내릴 거야.”
서진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아, 박시헌! 너 때문이잖아!”
“내가 뭘.”
편의점을 들렀다 강의실까지 가는 내내 두 사람은 복도에 다 들릴 정도의 큰 소리로 말싸움을 계속했다. 그 쉬운 곳에서 운전을 잘못해 한 바퀴를 돌아온 서진은 시헌의 운전 실력이 영 못 미더웠다. 그런 서진에게 시헌은 늦지 않으면 된 거 아니냐며 반박을 했다. 늦은 거랑 운전 잘못한 건 별개라고 해도 시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애당초 편의점만 안 갔으면 됐잖아!”
“너도 오케이했잖아. 그리고 카드 잃어버린 건 잘못도 아니고?”
운전을 잘못한 시헌의 탓도 있지만, 카드를 잃어버린 서진의 잘못도 컸다. 체크카드는 그거 하나밖에 없는 데다 타이밍 절묘하게 현금도 떨어진 상태였다. 대신 결제해 준 시헌과 함께 차로 돌아오자 조수석 사이에서 서진의 붉은색 체크카드가 발견됐다.
어떻게 하면 카드가 거기 들어갈 수 있는 거지 싶었다. 서진은 오래되어 느슨해진 지갑 사이에서 흘러내린 거라고 했지만, 시헌은 되레 지갑 좀 바꾸라며 잔소리를 했다. 이미 끝난 줄 알았던 체크카드와 지갑 얘기를 걸고넘어지는 시헌에 서진은 했던 말을 반복하며 짜증을 냈다.
“야, 지갑 사 줄 거 아니면……!”
복도에 학생들이 많아 정신없는 와중에 시헌은 어깨를 부딪치는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시헌의 덕분에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지나가는 남자와 부딪히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하고 고개를 돌리는 남자에 서진은 괜히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조심 좀 해.”
걱정하는 시헌에 서진은 어깨에 올라와 있는 시헌의 손을 가볍게 놓았다. 하여튼 반사신경 하나만큼은 좋은 녀석이었다. 강의실이 있는 4층 계단을 올라가려던 찰나 시헌이 다시 서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화장실 들렀다 가자.”
“너 진짜……. 가지가지 한다.”
이 일로 더는 짜증을 내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마음대로 하라며 반쯤 올라왔던 계단을 내려갔다. 화장실 입구에 몸을 반쯤 밀어 넣은 시헌은 얼굴을 내밀었다.
“넌 안 들어가?”
“어. 밖에서 기다릴게.”
“왜?”
“야! 애냐? 안 간다고 했잖아. 화장실 정돈 혼자 가!”
참다못한 서진이 버럭, 하고 소리를 질렀다. 시헌은 혼이 난 강아지처럼 고개를 숙이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겠다고 생각한 서진은 시헌이 나올 동안 화장실 옆 벽에 기대 휴대폰을 확인했다.
「학교에서 보자.」 오전 7:22
뒤늦게 기욱의 문자를 확인한 서진은 학교에서 보자는 기욱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뜬금없이 역에서 기다리라고 했던 것도 좀 이상했다. H대 의과대와 J대 병원은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서진이 기욱에게 답장을 하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그러나 서진의 문자는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앞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시헌일 것이 틀림없다 생각한 서진은 문자를 치다 말고 급하게 휴대폰을 닫았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서진은 고개를 들었다. 서진의 앞에 있는 것은 화장실에서 나온 시헌이 아닌 기욱이었다.
“왜…….”
당혹스러움에 서진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타이밍 좋게 화장실에서 나온 시헌이 기욱을 발견했다.
“어. 형.”
시헌은 기욱과 서진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좁은 곳을 비집고 들어온 시헌 탓에 서진은 벽에 몸을 바싹 기댈 수밖에 없었다.
“오늘부터였어?”
“말하려 했어.”
“자, 잠깐만 둘 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의 대화에 서진은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기욱의 시선에 시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상황을 설명했다. 쉽게 말하면 지금 수업에 들어오는 교수님이 시헌의 친척 의사라는 뜻이었다.
“……야.”
늦어도 한참 늦은 시헌의 말에 서진은 시헌을 불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야, 한마디였지만 그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 교수님 수업을 들은 게 일 년이 넘었는데 어떻게 하면 눈 하나 끔벅 안 하고 쌩을 깔 수 있단 말인가. 대놓고 극도의 의사 집안인 걸 티 내고 싶어 하지 않은 시헌의 마음도 이해는 갔으나 적어도 서진에게는 말을 해 줘야 했었다.
하루 이틀 말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1년이었다. 그 교수님이 해외 연수를 간다는 소문이 돌긴 했지만, 연수 기간 누가 후임으로 올지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된 서진은 눈앞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습관처럼 긴 코트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기욱을 올려 봤다.
“설마 그…….”
“몇 달만 할 거야. 늦었으니까 올라가자.”
일주일에 두 번인 수업에 기욱을 마주 봐야 한다니 벌써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했다. 무엇보다 의사인 기욱만 봐 왔던 서진은 기욱이 수업을 한다는 것이 어색했다. 뭐, 그 박기욱이니 왠지 못할 것 같지는 않았다. 같이 올라가자며 재촉하는 기욱에 시헌은 또다시 잠깐만, 하고 멈췄다. 오늘따라 유독 더 부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나 휴대폰.”
“너 오늘 도대체 왜 그래…….”
서진은 빨리 갔다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시헌이 들어가고 짧은 시간이지만 기욱과 복도에 남겨진 서진은 불편함에 인상을 구겼다. 설마 학교에서 기욱을 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욱은 불안함에 손을 입 근처로 가져다 대는 서진의 팔을 탁, 하고 붙잡았다.
“손톱 깨물면 못써.”
제가 손톱을 깨물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서진은 축축하게 젖은 엄지손톱을 뒤로 숨겼다.
“시헌이랑 같이 왔어?”
“설마요.”
예리한 기욱의 질문에 서진은 등 뒤로 주먹을 쥐었다. 서진의 대답에 기욱은 낮게 웃으며 서진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제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에 서진은 모르는 척 고개를 숙여 발치를 내려다봤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보호라는 명분 아래에서.
이번에도 옳은 말을 하는 시헌을 서진은 이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