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0 친구와 연인 사이 (32/83)

Chapter. 30 친구와 연인 사이

간신히 산에서 내려온 서진은 차 문이 열리기 무섭게 조수석에 앉았다. 정상에 올라갈 때보다 두 배는 더 힘든 것 같았다. 그러는 한편 땅으로 내려왔다는 안도감이 서진의 기분을 한층 편하게 만들었다. 휴대폰을 꺼낼 기운도, 소매를 걷어 시계를 볼 여력도 없는 서진은 운전석에 앉은 시헌을 보며 물었다.

“몇 시야?”

“여섯 시 좀 넘었어.”

시헌에게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가 새벽 네 시나 다섯 시 정도였던 걸 생각하면 빠른 시간이었다. 모처럼 주말 하루를 꼬박 예정에도 없는 등산에 보내고 말았다는 사실을 서진은 아직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먼저인 것이 있었다.

“배고파.”

“나도.”

차 시동을 켠 시헌은 서진의 의견에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도 안 먹고 산에 올라가서 먹은 거라고는 김밥 한 줄에 물이 전부니 배가 고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저녁 먹을래? 먹고 싶은 거 있어?”

“고기. 배고파 죽을 것 같아.”

원래 뭔가가 막 당기는 편은 아닌데 오늘따라 유독 고기가 먹고 싶었다. 서진은 차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멍하니 앉아 차장을 바라봤다. 한 삼십 분 정도 가자 제법 그럴싸한 번화가가 나왔다. 시헌은 주차장이 있는 고깃집에 차를 댔다. 마침 저녁 시간대라 그런지 고짓집에는 사람들이 꽤 있는 상태였다. 둘은 비교적 한가한 구석 쪽에 자리를 잡았다.

서로 배가 고파 고기가 익기 무섭게 젓가락을 들었다. 어느 정도 허기가 가실 무렵 뒤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건배사. 젊은 학생 무리. 인근에 대학교라도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술의 추가 주문 소리에 서진과 시헌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시헌은 소주 네 병을 한 손에 들고 가는 여자 알바생을 보며 침을 삼켰다.

“한 병만…….”

“안 돼.”

“딱 한 병만 하면 되잖아.”

“야, 나이가 몇인데 음주운전이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그러니까 한 병만 마시면 되잖아. 나 운전 잘해.”

“안 된다고.”

이미 반쯤 넘어간 시헌과 달리 양심을 포기하지 못한 서진은 절대 안 된다며 반대를 했다. 시헌은 물 잔을 입술 끝으로 씹으며 서진을 바라봤다.

“자기도 마시고 싶은 주제에.”

“그건…….”

“대리 부를까?”

머뭇대는 서진과 달리 시헌은 어떻게든 마시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다. 그 모습에 서진은 기가 찬다며 중얼거렸다. 30대도 아니고. 본인의 나이를 자각이라도 하고 하는 소리인가 싶었다.

“너 진짜 못 하는 말이 없다.”

“내일 주말이잖아.”

시헌이 계속해서 서진을 꼬드겼다. 입을 다무는 서진에 시헌은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2층 고깃집. 건너편에는 다른 술집들과 군데군데 붉은색 간판을 한 모텔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텔의 간판을 본 시헌은 웃으며 근처에 있는 알바생을 붙잡아 말을 걸었다.

“저기요. 여기 소주 두 병, 아니, 세 병만 주세요!”

“야! 박시헌!”

서진이 안 된다며 말리자 알바생이 당황하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술에 취하기라도 한 걸까? 시헌은 신경 쓰지 말라며 허공으로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그냥 주세요!”

서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알바생은 결국 두 사람의 테이블 위로 소주잔과 소주를 올렸다. 시헌은 서진에게 잔을 내밀고는 빠르게 소주를 따랐다. 시헌은 서진이 말릴 틈도 없이 제 잔에 소주를 따라 순식간에 비웠다.

서진은 내용물이 시헌의 목 안으로 넘어가 버린 빈 소주잔을 보더니 결국 제 잔에 있는 소주를 비웠다. 목 안으로 넘어가는 시원한 알코올 향에 기분이 좋은 시헌이 고기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새로 소주를 따른 시헌이 이번엔 서진을 향해 잔을 내밀었다. 시헌은 늘 어떻게든 됐다. 시헌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왜일까? 어떻게든 될 거라는 시헌의 말이 무책임하다고 하기보다는 위로가 됐다. 서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시헌과 잔을 부딪쳤다.

― 형님네 아파트라고?

―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미안해, 좀 더 일찍 연락 줬어야 했는데.

아쉬워하는 서윤의 목소리에 서진은 옆에 있는 물을 마셨다. 물인 줄 알고 마신 것이 술이라는 걸 눈치챈 서진은 간신히 술을 넘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시헌은 억지로 넘긴 술에 인상이 구겨지는 서진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시헌은 서진이 허공으로 주먹을 들여 보인 뒤에야 간신히 소리 없는 웃음을 그쳤다. 기욱의 아파트. 시헌의 집. 요 며칠 동안 서윤의 얼굴을 보지 못한 탓에 원래라면 서운할 법도 했지만, 서윤이 퇴근하기도 전에 밖에 나와 종일 서윤을 잊은 서진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 아냐, 나도 밖이야. 내가 연락했어야 했는데. 내일은 볼 수 있는 거지?

― 퇴근하고 저녁에 갈게. 술 마셨어? 우리 서진이 목소리가 이상한데?

― 티 안 내려고 했는데 어떻게 안 거야? 조금. 많이는 안 마셨어.

그렇게 말 한 서진은 시헌이 따라 준 소주잔을 부딪치며 소주를 목 안으로 넘겼다. 테이블의 병은 8병을 막 넘기고 있었다. 조금이라고 말하면 거짓말이었지만 이런 일로 서윤을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 집에는 들어가는 거지?

서진은 뒤늦게 시계가 11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정신없이 마시다 보니 시간이 지나가는 줄도 몰랐다. 앞자리에 앉아 얼마 남지 않은 고기를 집어 먹는 시헌을 슬쩍 본 서진은 적당히 대답했다.

― 당연하지. 들어갈 거야.

― 그래, 저녁에 보자.

서진은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잠바 주머니에 넣었다. 술을 마시지 않고 다리를 떨고 있던 시헌은 잠바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뭐가 불만인지 표정이 약간 굳어 있었다.

한 일이라고는 서윤과 통화를 한 것이 전부인 서진이 시헌이 기분 상하게 할 만한 일을 저질렀을 리가 없었다. 결국, 시헌이 입술을 뗐다.

“그냥 산 타러 왔다고 하면 안 돼?”

“누나가 걱정해서 안 돼.”

“거짓말이 들통나는 건 안 걱정하고?”

시헌의 반박에 서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조금 술을 마셨다는 것도, 집에 들어갈 거라고 했던 것도 전부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을 잘하는 건 어쩌면 시헌이 아니라 서진일지도 몰랐다. 시헌은 입을 다물고 있는 서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음대로 해라. 저기요!”

시헌은 빈 병을 흔들며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운전이며 대리는 물 건너간 후라는 걸 둘 다 모르지 않았다. 서진은 시헌이 따라 주는 소주를 목 아래로 넘겼다. 시헌도 서진도 술을 못 마시는 편이 아니라―오히려 잘 마시는 축에 속한다― 쉽게 취하지 않았다. 소주잔을 내려놓은 서진은 빈 잔을 멍하니 바라봤다. 약간 술기운이 오른 서진이 중얼거렸다.

“뭔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네가 이렇게 술을 좋아할 줄 몰랐는데.”

몰랐다고 하기보단 술을 같이 마셔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서진도, 시헌도 술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그래도 술 좋아하는 시헌이 아직도 어색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또 받아 주면서 술을 마시고 있는 자신의 모습 또한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시헌은 잔에 있는 술을 비우며 대답했다.

“……나도. 너랑 술 마시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

그때만 해도, 뭐라고 해야 할까. 성인이라는 건 평생 오지 않을 것처럼 먼 세계의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었다. 성인이라는 것도, 성인의 권리로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도, 시헌이 나이를 먹은 만큼 서진도 나이를 먹었다는 것도 이상한 건 시헌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그런 시헌의 대답에 서진은 가볍게 웃으며 술을 따랐다.

“너도 사람이긴 하구나.”

다시 잔을 부딪친 두 사람은 연달아 술을 마셨다. 얼마나 마셨는지, 마지막엔 얼마가 나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한 건 들어갔을 때 비해 나올 때 사람이 더 적었다는 사실이었다. 서진은 시헌의 카드를 받아 계산을 마친 뒤 가게 밖으로 나왔다.

시헌이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이유로 멋대로 나간 탓이었다. 서진은 가게의 골목 틈 사이에 들어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시헌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시헌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카드를 무작정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뒤늦게 저 혼자 담배를 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시헌은 피우던 담배를 서진에게 내밀었다.

“담배 피울래?”

“보통 피우던 걸 주냐.”

서진의 반박에 시헌은 손가락에서 타들어 가는 담배를 가만히 보더니 고개를 살짝 들었다.

“돗대야. 더 피우고 싶으면 사 오던가.”

시헌은 서진이 담배를 가지고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깟 담배, 새로 사면 그만이지만 술에 취한 시헌은 손안의 담배 한 개비조차 아쉬운 상황이었다. 시헌이 다시 담배를 피우려 하자 서진은 시헌의 손에 있는 담배를 빼앗아 입에 물었다.

피우기 싫다고 할 땐 언제고. 서진은 시헌의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를 아무렇지 않게 피웠다. 짧아진 담배에서 서진의 입술이 시헌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 서진은 더는 피울 수조차 없는 담배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발끝으로 껐다.

“이제 어떻게?”

“나도 몰라.”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아쉽다는 듯 쳐다본 시헌은 고개를 들었다. 골목 번화가 너머로 화려한 모텔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2차를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왜인지 술집보다는 모텔의 불빛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서로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서진이 먼저 입을 뗐다.

“방 잡고 마저 마실래?”

“상관없어.”

2차로 술집 대신 모텔을 들어가서 술을 마시는 경우는 드물긴 했지만, 없는 케이스는 아니었다. 동기들이랑도 몇 번인가 들어가 본 적 있었고. 서진은 시헌과 모텔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며 합리화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단색의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방 한가운데 있는 붉은색 계통의 침대는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온 서진은 생각보다 습한 내부에 손을 저었다. 다행히 천장에는 벽걸이형 에어컨이 있었다.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 안에는 에어컨 리모컨이 있었다.

서진은 리모컨을 집어 들어 에어컨을 틀었다. 가을 날씨에 에어컨은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습한 것보다야 나았다.

“습하다. 에어컨 좀 틀자.”

서진은 온도를 최대한 높게 설정한 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종일 등산을 한 터라 어디든 눕거나 좀 앉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헌은 침대 위에서 다리를 펴고 있는 서진을 내려다봤다.

“술 사러 갈 건데. 같이 갈래?”

“아니, 난 좀 있을래.”

“마시고 싶은 거 있어?”

“맥주? 몰라, 알아서 사 와.”

술맛이 다 거기서 거기지. 고깃집에서 계속 소주만 달려온 마당에 이제 와 다른 술을 찾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그래.”

마침 모텔 바로 건너편에 편의점이 있다는 것을 안 시헌은 금방 다녀오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발을 다시 신었다. 시헌이 나간 것을 확인한 서진은 좁은 모텔방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볼 거라고는 작은 원형 테이블 위에 놓인 손님용 상자 안에 있는 물건들이 전부였다.

상자 안에 담긴 러브젤, 콘돔과 녹차와 홍차 티백 두 개를 본 서진은 그럴 줄 알았다며 중얼거리고는 침대로 돌아왔다. 침대에 주저앉은 서진은 바닥에 닿은 발밑으로 뭔가가 있음을 느꼈다. 침대 안으로 손을 넣자 뭔가 묵직한 것이 딸려 나왔다. 청소할 때 치우지 않고 간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비치된 물건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술기운이 올라온 서진이 제 손에 있는 기다란 물건의 정체가 성인용품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려야만 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바이브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모텔에는 별의별 취향을 가진 손님들이 온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성 성기 모양을 한 바이브 끝에는 작은 버튼이 있었다. 무슨 버튼인지는 안 봐도 뻔했지만.

“거기 내 휴대폰 있지?”

“씨발!”

난데없이 열린 문에 깜짝 놀란 서진이 욕을 내뱉음과 동시에 들고 있던 바이브가 발밑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시헌은 서진을 보지 못한 모양인지 결국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휴대폰 달라니까 뭐 해?”

“어, 알았어.”

서진은 뒤늦게 주변을 둘러봤다. 언제 두고 간 걸까. 원형 테이블 위에 시헌의 휴대폰이 있었다. 서진은 팔을 뻗어 시헌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발끝에 닿는 바이브는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성인인데. 이런 일로 일일이 놀라는 것도 우스웠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반응이 없는 것도 이상하긴 했지만 말이다. 시헌은 서진에게 받은 휴대폰을 흔들어 보이며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다시 술을 사러 방을 나가려던 시헌은 할 말이 떠올랐다는 듯 멈추더니 몸을 약간 틀었다. 그런 뒤 서진의 발밑에 떨어진 바이브를 손가락질했다.

“저거, 남성용이다?”

시헌의 중얼거림에 서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씨발, 성인용품에 남자 여자 게 어디…….”

“하긴, 저런 물건에 남자 여자가 어디 있겠냐만은. 큭큭, 술 사러 갔다 올게.”

제멋대로 말을 자른 시헌은 다시 멋대로 방을 나갔다. 뭐 하자는 짓인지. 서진은 시헌이 닫고 나간 방문을 보며 뒤늦게 대답했다.

“갔다 와.”

시헌이 그 대답을 들었을 리는 당연히 없다. 정말 술에 취했나? 확실히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서진은 답답한 마음에 신경질을 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깟 바이브가 뭐라고. 혀를 찬 서진은 결국 바이브를 침대 옆 근처에 있는 서랍에 대충 집어넣었다.

조금 더 방을 둘러보던 서진은 시헌의 휴대폰이 있던 자리에 구겨진 담배 케이스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잔뜩 구겨진 것으로 봐서 아무것도 없는 빈 케이스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진은 담배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케이스 안에서 담배 한 개비가 나왔다. 서진은 케이스에서 나온 담배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개새끼 돗대라면서.”

이건 진짜 돗대지만. 주머니를 뒤지자 라이터가 나왔다. 피울까 말까. 고민하던 서진의 시선 끝으로 담배 케이스의 상표가 닿았다. 기욱과 똑같은 종류의 담배. 하필이면. 서진은 목을 긁적이며 담배를 다시 케이스 안에 집어넣었다. 고개를 돌리자 샤워실이 눈에 들어왔다.

“씻을까.”

등산 때문에 다리가 아픈 것도 있었지만, 땀을 흘린 탓에 찝찝한 것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 * *

“아오!! 씨발!!”

모텔 및 편의점에서 술을 사 올라온 시헌은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욕 소리에 깜짝 놀랐다. 손에 들린 편의점 봉투를 급하게 내려놓은 시헌은 소리가 나는 샤워실 쪽의 문을 두드렸다. 샤워실 문은 잠겨 있었다. 시헌이 문을 두드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다시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존나 놀랐네.”

안심한 듯한 목소리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시헌이 문 너머로 다시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됐어. 별거 아냐. 금방 나가.”

샤워실 안쪽에서 서진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대답했다. 샤워하는 모양인지 한동안 물소리가 들리더니 오 분도 채 되지 않아 물소리가 끊겼다. 반쯤 졸고 있던 시헌은 물소리가 끊기기 무섭게 고개를 들었다. 달각, 하고 잠가져 있던 샤워실 문이 열렸다.

깜박 잊고 수건을 챙겨 가는 것을 잊은 서진은 급하게 나와 수건 챙긴 뒤 몸을 닦았다. 팬티 차림의 서진을 본 시헌은 수건으로 몸을 닦는 서진을 홀린 듯 바라봤다. 운동을 한 건 아니지만, 예전부터 서진의 몸은 제법 좋은 편에 속했다. 너무 마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이 많은 편도 아니었다. 근육은 없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시헌의 노골적인 시선을 반쯤 무시한 서진은 바닥에 떨어진 츄리닝을 집어 든 뒤 얼굴로 가져다 댔다. 아니나 다를까 땀 냄새가 가득 났다.

“하아, 어쩔 수 없지.”

달리 다른 옷이 없었던 서진은 결국 입었던 츄리닝을 그대로 입었다. 그래도 샤워를 하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았다. 서진은 시헌이 가져온 편의점 봉투를 마구잡이로 뒤졌다. 술. 술.

“안주는?”

“아, 맞다.”

시헌은 뒤늦게 잊어버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언제 우리가 안주 챙겨 가면서 마셨다고. 안 그래?”

시헌의 자기 합리화에 서진은 기가 막힌다며 혀를 찼다. 시헌은 서진의 근처에 있던 캔 맥주를 뜯어 순식간에 반을 비웠다.

“야, 야! 혼자 마시는 게 어딨어!”

그래도 건배는 좀 했으면 싶은데. 서진은 멋대로 달리는 시헌에 한숨을 쉬며 캔 맥주를 뜯었다. 캔 맥주를 입에 가져다 댄 시헌은 술을 마시는 서진을 힐끗힐끗 바라봤다.

샤워하고 나왔을 때부터 시헌의 시선을 느꼈던 서진은 캔 맥주를 탁, 하고 내려놓았다. 서진의 시선의 끝이 제가 나왔던 샤워실에 닿았다.

“답답하면 너도 씻든가.”

서진은 단순히 시헌이 답답해서 그런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시헌은 아무렇지 않게 새 캔 맥주를 뜯는 서진을 보더니 뺨을 긁적였다.

“그럴까?”

마시던 맥주를 내려놓은 시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실 안으로 들어온 시헌은 곧장 샤워실의 하얀 벽에 쿵, 쿵 머리를 박았다. 남자끼리 방을 잡아서 술을 마시는 건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동기들과도 몇 번인가 그렇게 술을 마신 적도 있었다.

분명한 건 그때는 결코 이런 느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모르는 척하는 걸까. 아니면 진짜 눈치가 없는 걸까. 샤워하고 나온 서진을 본 순간 시헌은 얼굴의 화끈거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샤워하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지 좁은 샤워실 안에는 물기의 습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게 또 서진의 온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씻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냥 나가기도 뭐했던 시헌은 마지못해 샤워 호스의 물을 틀었다. 호스를 돌리기 무섭게 샤워기가 바깥쪽으로 돌아갔다. 깜짝 놀란 시헌이 호스를 붙잡자마자 바깥쪽에서 문이 열렸다.

“아, 맞다! 박시헌 샤워기!!”

“문 열지…!”

깜짝 놀란 시헌이 서진을 향해 소리를 쳤으나, 시헌의 손에 있던 샤워기가 뒤틀려 서진 쪽으로 튀는 것이 한발 빨랐다. 놀란 시헌은 재빨리 물을 껐으나 이미 서진은 잔뜩 젖은 뒤였다. 서진은 축축하게 젖은 제 몸을 내려다보더니 샤워실 안쪽에 있는 시헌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 씨발! 다 튀었잖아!”

“그래서 내가 열지 말라고 했잖아!”

“안 들린다고! 그거 하나 못 잡으면 어떻게!”

“뭐? 먼저 들어간 건 너잖아! 먼저 말해 줬어야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탓하며 물이 튄 원인을 떠넘겼다. 원래라면 서진도 시헌과 싸우려고 샤워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시헌에게 물이 튄 화풀이를 하고 있는 꼴밖에 더 되지 않았다. 한참 언성을 높여 싸우던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 하하하하하하!”

“풉, 큭큭. 하하하! 내가, 큭큭. 너 때문에 미치겠다. 진짜!”

도무지 재미가 없을 법한 상황인데도. 두 사람은 눈가에 눈물이 고일 때까지 웃었다. 먼저 웃음을 그친 서진은 뒤늦게 젖은 옷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짜증 나.”

“큭큭, 나 일단 씻고 나올게.”

호스를 잡으면서 물이 튄 건 시헌도 마찬가지였다. 시헌의 모습을 본 서진은 알겠다며 문을 닫고 샤워실 밖으로 나갔다.

시헌은 대충 샤워를 한 뒤 밖으로 나왔다. 서진은 샤워기 물로 축축하게 젖은 옷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옷 다 젖었네.”

“차에 여분 있으니까 빌려줄게.”

“어, 고맙다.”

시헌은 옷을 닦은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털었다. 수건이 몇 개 없는 탓이었다. 수건을 어깨에 걸친 시헌은 다시 서진의 앞에 앉아 캔 맥주에 남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꽤 많이 사 온 것 같은데. 맥주는 생각보다 금방 동났다. 술 같지 않다고 해야 하나. 이럴 줄 알았다면 소주나 잔뜩 사 올걸, 하고 후회가 들기도 했다. 서진은 술을 마시는 내내 젖은 옷이 불편한지 만지작댔다. 그건 그거대로 거슬렸던 시헌은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목으로 넘기며 말했다.

“정 그러면 목욕 가운이라도 입던가.”

“어딨지?”

“뒤에.”

캔 맥주를 입에 문 시헌은 턱을 움직이며 가리켰다. 서진이 몸을 돌려 벽 뒤에 있는 가운을 올려다봤다. 아무래도 서진이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 판단한 시헌은 서진을 대신해 가운을 집어 주려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술에 잔뜩 취한 것은 서진뿐만이 아니었다. 서진의 뒤에 있는 가운을 향해 가던 시헌은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옆에 있던 맥주가 엎어지며 바닥을 축축하게 적혔다.

“야! 뭐 하는 거야!”

서진의 외침에 깜짝 놀란 시헌이 일어나려 팔을 뻗었으나 술 때문인지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술에 취한 건 서진이 아니라 시헌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풀썩, 하고 시헌의 몸이 서진의 위로 포개졌다.

“지, 진짜 미안.”

간신히 몸을 일으킨 시헌은 벽에 있는 가운을 집어 서진에게 내밀었다. 사실 거리로 치면 서진이 훨씬 더 가까웠다. 굳이 넘어지면서까지 가운을 넘겨주는 시헌의 의도를 서진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서진은 시헌이 내민 가운을 만지작거렸다. 가운 너머로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시헌의 얼굴이 보였다. 서진의 손이 가운 대신 가운을 잡은 손목을 붙잡았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입술을 맞췄다.

“술 냄새 나.”

“너도 만만찮거든?”

서진은 시헌의 손에 있는 가운을 낚아챈 뒤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목욕 가운은 생각보다 컸다. 윗옷만 벗은 채 가운을 두른 서진은 제 밑에서 남은 맥주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시헌을 내려다봤다. 탁, 하고 시헌의 손이 빈 맥주 캔을 엎었다.

맥주가 남아 있었던 모양인지 엎어진 맥주 캔 사이로 맥주가 흘러나왔다. 시헌은 쓰러진 맥주 캔을 들어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안 그래도 없는 맥주 대부분이 바닥에 흘러내려 얼마 나오지도 않았다.

“그걸 먹고 싶냐.”

“사 오기 귀찮아.”

시헌은 빈 맥주 캔을 등 뒤로 던졌다. 보다 못한 서진은 다른 맥주를 찾는 시헌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미 새벽 두 시를 넘기고 있었다. 서진도 술에 잔뜩 취했지만, 서진이 취한 것 못지않게 시헌도 잔뜩 술에 취한 상태였다.

비틀거리던 시헌의 몸이 서진 쪽으로 확, 하고 기울어졌다. 갈 곳이 없는 서진의 몸이 침대 뒤로 넘어졌다. 남자 두 사람의 무게에 침대가 훅,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침대 위 조명에 팔로 눈을 가렸다.

“이제 좀 내려와. 무거워.”

“서진아.”

“뭐?”

“여친이랑 왜 헤어졌어?”

“야, 넌 이 상황에서 그 얘기가 나와?”

“나올 수 있지.”

서진은 제 몸을 누르는 시헌의 팔을 옆으로 밀어냈으나 꿈적도 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체격과 비교하면 힘 하나는 좋은 녀석이었으니까. 술에 취한 사람은 힘이 세지기도 하고. 시헌을 밀어내는 걸 포기한 서진은 결국 침대 위에서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냥. 안 맞아서 헤어졌어.”

침대 이불에 얼굴을 반쯤 묻은 서진이 중얼거렸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원인이 기욱 때문이라는 걸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도 아닌 시헌에게.

시헌은 서진의 몸을 다시 옆으로 돌렸다. 팔을 잡아당겨 뺨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손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손이 뜨거운 것인지, 시헌의 뺨이 뜨거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음식점에서. 번호 따였을 때.”

“…….”

“질투했었어. 빨리 나가고 싶었거든.”

“어쩐지 급하게 일어나더라.”

시헌의 고백에 서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마음에 들지 않은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시헌의 손이 엉성하게 묶은 서진의 가운 끈을 풀었다. 축 늘어지는 가운과 함께 앞이 훤히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야, 박시… 너 뭐 하냐?”

난데없이 눈을 가리는 손에 서진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가릴 거면 똑바로 가리던가. 손가락 사이로 얼굴이 다 보이는 건 또 뭐람. 서진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손안으로 눈을 떴다. 손가락 사이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시헌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내가 싫어?”

손 너머로 들려오는 시헌의 목소리에 서진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을 벌린 채 말을 하지 않았다. 아아, 하고 누군가 목 끝에서부터 숨을 막는 것 같았다. 술에 취한 시헌은 유독 직설적인 면이 있었다. 못해도 중학교 때라고 해도 스물한 살 인생의 삼분의 일 이상을 시헌과 같이 보냈다. 시헌이 그 자리에 없다 해도 박시헌이라는 이름은 서진의 인생에 한 획을 그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어색하고, 불편했던 적은 있다. 마치 자기 혼자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았다. 그런 시헌의 손을 마주 잡고, 곁에 있으면 왜인지 저도 같이 다른 세상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면 현실의 고달픔이 조금은 사라졌다. 그 평온함이 낯설었다. 낯설지만 싫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자, 잘 몰라.”

“어?”

“씨발! 잘 모르겠다고! 나도!!”

서진은 있는 힘껏 시헌을 밀어낸 뒤 침대 뒤로 몸을 내뺐다. 밑에 있는 이불을 잡아당겨 화끈거리는 얼굴을 간신히 가렸다. 당황하던 시헌은 이내 서진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서진은 저에게 내미는 시헌의 손을 쳐 냈다. 보지 않아도 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외면한 건 시헌이 아니라 저였음을. 중학교 때부터, 어쩌면 현정에게 처음 소개를 받으며 손을 내밀었던 그 순간부터 평범한 만남이 아니었다는 것을 스스로도 깨닫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시헌은 서진에게 쳐 내진 손을 만지작거렸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건지 시무룩해 있는 시헌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넌 왜, 왜 항상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나한테 오는 건데.”

“…….”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당당한데?”

“서진아. 나, 나는…….”

아, 미칠 것 같다. 왜 이런 관계여야만 하는 걸까. 조금 더 진지한 관계가 될 수는 없었던 걸까? 좀 더 일찍 인정했다면 은소가 죽는 일도, 기욱과 이렇게 되는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를 위해 과고를 진학하겠다고 열심히 공부하던 시헌도, 같이 독서실을 갔던 기억들도 전부 옛날 일이었다. 결국, 나쁜 사람은 자신이었다. 상처를 받아야 하는 것도, 힘들어해야 하는 것도 전부 자신의 몫이거늘.

“나는 너한테 상처밖에 안 줬는데…….”

“난 괜찮아.”

“뭐가 괜찮아!! 미안해해야 하는 건, 싫어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인데!!”

차라리 미워한다고. 싫다고 말하면 서진은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불을 걷어 낸 서진의 눈가로 참아 왔던 눈물들이 흘러내렸다.

“서진아.”

“도대체 왜……. 어째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내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건데…….”

어쩌면 질투를 했었던 걸지도 모른다. 질투해서, 더 불편하다고 느꼈던 걸지도 몰랐다. 서진은 퉁퉁 부은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박시헌, 어떻게 하면 너처럼 될 수 있는 거야…….”

모르는 척하지 않았더라면. 조금만 더 자존심을 버렸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가진 않았을지도 몰랐다. 서진은 다가오는 시헌의 입술을 거부하지 않았다. 제 몸을 만지는 시헌의 손길이 지나는 자리마다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후, 서로 숨을 들이쉬자 진득한 술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이젠 누구의 술 냄새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얇은 츄리닝복의 허벅지 사이로 단단히 부풀어 오른 시헌의 페니스가 느껴졌다. 민망한지 얼굴을 살짝 붉히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팔을 뻗어 목을 당긴 서진이 시헌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어렸을 땐 좀 더 어른스러운 맛이 있었는데. 진지하게 시헌의 나이는 거꾸로 먹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모텔의 어두운 조명이 비추는 침대에서 서진은 턱을 살짝 들어 보이며 웃었다.

“이제 와 내빼지 말라고.”

울었더니 마음이 개운해졌다.

* * *

“으읏, 응….”

벌어진 다리 아래로 질척한 소리가 났다. 움찔거리는 허벅지를 붙잡아 누른 시헌의 손가락이 서진의 안을 쿡쿡 찔렀다. 엉망이 된 침대 시트를 꽉 쥔 서진은 눈을 질끔 감았다. 하아, 하고 낮은 숨을 들이쉬자 뿌연 연기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아으읏! 너…!”

허리를 비틀던 서진은 참다못해 고개를 숙였다. 질척하고 안에 있던 손가락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걸 또 핥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개수를 늘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꼼꼼히 안까지 넓이는 시헌의 친절함에 서진은 죽을 맛이었다. 서진의 몸을 위로 올려 태운 시헌은 서진의 페니스를 끝에서부터 천천히 잡고 흔들었다.

“하읏, 윽, 너 죽여 버릴…… 으읍….”

제 욕을 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긴 알았던 걸까. 시헌은 재빠르게 서진의 입을 막았다. 연속으로 이어지는 키스를 하며 느낀 사실이었지만 시헌은 생각보다 키스를 잘했다. 달리 여자 친구나 사귀는 사람도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일방적이며 강압적으로 쾌락을 향해 몰아붙이는 기욱의 키스와 달리, 시헌의 키스는 느리지만, 천천히 서진의 사고를 좀 먹어 들어갔다.

한번 입술을 맞추면 거부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다른 점이 없었지만, 어느 쪽이 기분이 좋냐고 묻는다면 서진도 사람인지라 배려를 당하지 않는 쪽보다는 배려해 주는 쪽이 훨씬 나았다. 혀 안을 부드럽게 감싸 올리는 진한 키스와 동시에 사정을 한 서진의 몸이 앞쪽으로 축 늘어졌다.

“흐으, 하…….”

“서진아, 넣어도 돼?”

잔뜩 흥분한 시헌의 목소리에 서진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 언제부터 그런 걸 허락받고 하는 섹스였단 말인가. 지나친 배려는 불편하다는 것이 딱 이 격이었다. 이래선 진짜 여자랑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서진이 고개를 약간 끄덕이자 시헌은 천천히 서진의 허벅지 사이를 벌렸다. 허벅지 끝에서부터 뜨겁게 닿는 시헌의 페니스가 느껴졌다.

“자, 잠깐… 니 거 너무…! 하악!”

“아, 아팠어?”

“빼지 마. 빼지 마. 제발.”

깜짝 놀란 시헌이 몸을 뒤로 내빼려 하자 눈물을 머금은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괜히 어설프게 했다가는 정말 힘이 들 것 같았다. 서진은 제 안을 꽉 채운 시헌의 페니스에 거친 숨을 들이쉬었다. 덩치로 보나, 키로 보나 기욱의 것이 훨씬 컸지만. 억지로 밀어 넣을 때도 아프다는 생각은 해도 숨이 턱 막히거나 괴롭지는 않았다.

참으로 재수 없게도 박기욱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섹스에 능숙한 사람이라는 건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서진은 이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둘을 비교하고 있는 제 처지가 우스웠다. 여자 친구와 사귀었다고 그 난리를 쳤던 기욱인데. 시헌과 이랬다는 걸 알면……. 하하. 이젠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읏. 너 너무 조여.”

“흐, 니가 그런 소릴 하니까 그러는 거 아냐. 읏….”

“움직여도 돼? 나 못 참겠는데.”

“…….”

시헌의 말에 서진은 일부러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섹스를 사탕 달라고 조르듯 하는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서진의 침묵에 시헌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서진의 허벅지를 붙잡은 시헌의 페니스가 빠른 속도로 퍽, 하고 서진의 안을 빠져나갔다 들어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른 채 서진은 억, 하고 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아으윽! 하읏… 야!! 죽을래!!”

“대답 안 한 네가 나빠.”

변명이 더 기가 찼다. 서진은 움찔거리는 입가의 미소를 간신히 참았다.

“그… 큭. 그 정도는 알아서 판단하라고. 하하…!”

“왜 웃어?”

“씨발, …으읏… 안 웃게…… 하하… 생겼냐? 하윽! 움직이지 좀….”

몸을 뒤집은 서진은 결국 베개를 붙잡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시헌도 웃기 시작했는지 안쪽에서부터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가 그리 재미있는 것인지 웃고 있는 두 사람 다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만, 으읏…! 으으응… 으읍….”

“서진아, 움직여도 돼?”

“진짜 깊… 아읏… 마, 마음대로 해….”

시헌의 무릎에 올라탄 서진은 될 대로 되라며 시헌의 목에 팔을 걸었다.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서진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하으윽… 읏, 으윽….”

“서진아.”

“응. 으응… 왜? 하악! 왜 씨발!”

“좋아해.”

서진의 몸을 눕힌 시헌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넣어도 되냐는 등 배려하는 것 같은 발언을 실컷 한 주제에 언제 그랬냐는 듯 그런 말은 쏙 들어가 버린 지 오래였다. 울컥, 하고 안쪽에서부터 사정하는 듯 몸을 떠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깜짝 놀란 시헌이 급하게 페니스를 빼냈지만, 한발 늦은 후였다. 뒤늦게 나온 정액들이 서진의 배 위쪽으로 튀었다. 급하게 숨을 고른 서진은 허탈하게 웃었다. 시헌의 고백을 못 들은 건 아니다. 단지.

“넌 꼭 타이밍이 엉망이더라.”

“내가 뭘.”

시헌의 몸이 천천히 내려와 다시 입술을 포갰다.

* * *

“아오, 씨발.”

낮게 욕설을 지껄인 서진은 인상을 구기며 필통을 뒤졌다. 한참 필기를 하고 있을 무렵 샤프심이 떨어졌다. 혹시나 하고 남아 있던 샤프심통을 털었지만, 텅텅 비어 있었다. 샤프를 바꿔 봤지만 다른 샤프들 또한 사정은 비슷했다. 서진은 필기를 할 때 볼펜을 잘 쓰는 편은 아니었다.

지우기도 귀찮고, 여러모로 성가셨다. 급한 대로 볼펜을 쥔 서진의 팔꿈치를 누군가 쿡쿡 건드렸다. 빠르게 필기를 하는 와중에 소리 없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팔 옆으로 새 샤프심통이 닿아 있었다. 헛기침한 시헌은 모르는 척 정면으로 고개를 들었다.

시간 벌기를 하려는 모양인지 시헌이 손을 들어 교수님에게 질문했다. 일 분도 채 되지 않아 쓸데없는 질문이라며 동기들의 웃음과 함께 교수님의 비웃음을 샀다. 샤프심을 새로 갈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책상 위로 턱을 괸 시헌은 샤프심을 간 서진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 목 아파.”

강의가 끝난 시헌은 기침을 하며 목을 붙잡았다.

“시헌 형 감기 걸렸어요?”

“그런가 봐. 병원은 싫은데.”

“하하, 의대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시헌의 말을 농담이라고 치부한 동기가 가볍게 흘려 넘겼다. 마침 강의실 밖에 나갔다 들어온 서진은 시헌의 책상 위로 음료수를 올려놓은 채 자리에 앉았다. 잠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방금 한 수업의 복습을 하는 서진을 본 시헌은 책상 위에 있는 쌍화탕을 만지작거렸다.

손에서부터 따듯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가장 가까운 편의점이 나가서 5분 거리에 있다는 걸 생각하면 천리안이라도 있나 싶었다. 시헌은 서진이 사 준 쌍화탕을 목 뒤로 넘겼다.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멀리 모여 있던 동기 한 명이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손을 흔들며 언성을 높였다.

“야, 박시헌!, 강서진! 니네 오늘 올 거냐?”

아직 얘기가 안 된 사람이 둘뿐이라 둘을 같이 언급한 건데, 마치 교실에서 장난치다 걸린 것처럼 두 사람은 흠칫, 놀라며 서로를 바라봤다.

“서진이가 가면…….”

“박시헌 너 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멍하니 서로를 보는 모습에 답답한 동기가 결국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너네 둘이 코미디 찍냐? 올 거라고, 말 거라고?”

“갈게.”

서진이 먼저 손을 들어 대답했다. 그러자 시헌도 질 수 없다는 듯 빠르게 손을 들었다.

“나도 갈 거야.”

“어, 그래. 알았다. 이따 저녁에 문자할게.”

동기는 대수롭지 않은 듯 등을 돌려 자리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 * *

중앙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공부하고 있던 시헌이 기지개를 켰다. 시헌의 앞으로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며 공부를 하는 서진이 있었다. 제가 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집중력 하나만큼은 정말 대단했다.

어느새 찬 기운이 도는 창가는 안쪽에서부터 하얗게 물안개가 폈다. 벌써 겨울이구나. 저 혼자 큭큭대며 웃은 시헌은 조심스럽게 의자를 꺼내 일어났다.

“뭐 마실래?”

고개를 약간 든 서진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숙였다.

“알아서 사 와.”

“응.”

적당히 잠바를 걸치고 지갑을 챙긴 서진은 도서관 밖에 있는 자판기 앞에 섰다.

“박시헌!”

기욱의 목소리였다. 앞사람이 가고 마침 돈을 집어넣은 시헌은 그 상태로 고개를 돌렸다. 겨울 코트와 목도리를 동여맨 기욱은 실내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뒷사람의 눈치를 본 시헌은 정면에 있는 캔 커피를 뽑은 뒤 잔돈을 챙겼다.

“형, 여기서 뭐 해?”

“다음 주부터 수업 들어와.”

시헌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지 캔 커피를 든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욱의 손가락이 그런 시헌의 머리를 툭, 하고 건드렸다.

“큰아빠 추천. 시간강사라고.”

“몰랐어.”

“얘기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일이 바빠서 미리 말해 줬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시헌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지나가던 몇몇 여대생들이 사복 차림의 기욱을 힐끗대며 바라봤다. 모델 같은 기럭지에 잘생긴 외모, 깔끔한 옷차림에 준수한 외모까지 공부에 찌든 20대들이 가득한 대학교에서는 보기 드문 미남형 스타일이었다.

시헌도 어디 가서 못생겼다는 소리 듣는 편은 아니지만, 기욱 옆에 서면 예외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참 잘생겼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집안의 외모 유전자는 전부 기욱에게 넘어간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친척들을 전부 모아 놓고 봐도 기욱만 한 인물은 없었다.

“공부하고 있었어?”

“응.”

기욱은 시헌의 양손에 들린 커피를 내려다봤다.

“혼자가 아니네?”

기욱의 질문에 시헌은 저도 모르게 커피를 뒤로 숨겼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습에 기욱은 큭,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친구야.”

“그래. 집에서 보자. 오늘은 들어갈 거야.”

시헌은 등을 돌리는 기욱의 코트 자락을 붙잡았다. 덕분에 숨겼던 커피는 다시 그대로 드러났다. 몸을 약간 돌린 기욱은 무슨 일이냐는 듯 시헌을 바라봤다.

“형.”

“응?”

“아니, 병원. 그게…. 교수 일은 할 만한가 해서.”

시헌의 질문에 기욱은 어깨에 있는 힘을 풀었다. 늘 인턴이며 레지던트 일로 바쁘던 기욱이 드디어 교수가 됐다. 기욱보다 몇 년 빨리 교수가 된 하연이야 익숙했지만. 시헌은 아직 교수가 된 기욱이 조금은 어색했다.

“전문의 따고 1년도 안 된 풋내기 교수한테 뭘 바라는 게 이상하지. 일은 할 만해.”

“그렇구나.”

시헌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없다는 걸 확인한 기욱은 시헌이 나온 도서관과 시헌의 손에 있는 캔 커피를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그거, 다른 거 사 가.”

“형 그게 무슨 소리…!”

“간다.”

기욱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려 나갔다. 뒤늦게 기욱을 따라 밖으로 나왔지만 이미 계단 위로 사라진 후였다. 시헌은 양손에 있는 캔 커피와 불이 켜진 자판기를 바라봤다. 지갑에서 새 돈을 꺼낸 시헌은 버튼을 눌렀다.

* * *

탁, 하고 서진의 옆자리에 음료수를 올렸다. 시헌이 오면 좀 쉴 생각이었던 서진은 생각보다 시헌이 오지 않아 의아해하는 중이었다. 도서관이라고 해 봤자 구석 자리라 조금 한가해 어느 정도의 대화는 할 수 있었다. 서진은 의자를 뒤로 빼며 게토레이를 마셨다.

“왜 이렇게 늦었어?”

“형 만났어.”

“형님? 기욱 형님이 여기 있다고?”

서진은 뭔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다른 캔 커피를 뜯어 입에 댄 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음 주부터 우리 학교 수업 들어온대.”

“너네 형님은 J대잖아.”

“이모부가 H대 병원 이사야. *NS 출신. 큰아빠는 분원 *OS 과장님이고.”

*NS[neurosurgery] : 신경외과

*OS[orthopedics] : 정형외과

서진은 시헌의 설명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에 누가 VIP 주치의였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런가 보다 했지만 이젠 일일이 놀라는 것도 아까웠다. J대 병원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인맥을 가졌으면서 H대와 인연이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어렸을 땐 그냥 의사 집안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대단한 집안 출신이네.”

의대답게 의사 집안이나 의사 부모님이 있는 동기, 선배들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누구의 얘길 들어도 결코 시헌네 집만 한 집안은 결코 없었다. 말 그대로 의사 집안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엘리트 집안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최근 들어 절실히 실감하는 중이었다.

의대를 안 갈 거면 재수를 하라는 시헌네 부모님의 행동도 서진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작 시헌은 서진의 그런 말에 입술을 내밀었다. 하여튼 삐진 표정하고는.

“비꼬는 거 다 알아.”

“비꼰 적 없어. 그냥, 부러워한 거지.”

“너도 누나가 간호사잖아.”

“누나가 간호사지 내가 간호사인 건 아니잖아.”

“나도.”

“뭐?”

“가족이 의사지 내가 의사인 건 아니잖아.”

유치한 말싸움이라 생각된 서진이 손을 저으며 다 마신 게토레이를 내려놓았다. 시헌은 손에 있는 커피를 만지작거리며 서진의 다 마신 게토레이 병을 바라봤다. 문득 다른 걸 사 가라는 기욱의 말이 시헌의 머릿속을 스쳤다.

“캔 커피는 안 마셔?”

“어?”

“캔 커피. 싫어하냐고.”

“아, 싫어하는 건 아닌데. 시험 기간 아니면 잘 안 마셔. 질려서.”

서진의 대답에 시헌은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첫 시험부터 중앙도서관에 커피를 잔뜩 쌓아 놓고 움직이지 않는 정신 나간 녀석이 입학했다는 소문은 자자했으니까 말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시헌이라도 그렇게 마시면 질릴 법도 했다.

“근데 왜 물어봐?”

“아니. 아무것도 아냐. 공부나 하자.”

시헌은 그냥 우연이겠거니 하고 다 마신 캔 커피를 구겼다.

* * *

파란불에 신호가 걸린 시헌은 조수석으로 몸을 숙여 휴대폰을 집어 전화를 받았다.

― 어디야?

― 학교 가는 중. 운전 중이야.

― 저녁에 시간 비워.

시헌은 휴대폰을 어깨에 끼운 채 운전대를 붙잡았다. 속도를 낮춘 뒤 스피커폰으로 돌린 시헌이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

― 왜?

― 저녁 먹을 건데, 서윤이가 너 부르래.

― 서윤 누나가?

― 무리해서 안 나와도 되고.

기욱의 대답에 시헌은 흐음, 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적당히 거절했을지도 모르는 제안이었지만 전화 너머로 유독 오지 말아 달라는 기욱의 암묵적인 말투에 시헌은 묘한 구미가 당겼다.

― 갈게.

― 하아, 알았어. 이따 저녁에 보자.

아니나 다를까 기욱의 한숨이 이어졌다. 꼴좋다. 담담하게 전화를 끊은 시헌은 저 혼자 큭큭대며 차를 밟았다.

조금 일찍 강의실로 들어가자 동기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적당히 빈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은 시헌은 인사를 한 뒤 자연스럽게 동기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갔다. 예상대로 술자리 얘기를 하고 있었다. 서진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 전화라도 해 볼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중 동기 한 명이 시헌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요, 시헌 형 오늘 시간 되죠?”

“그놈의 술 지겹지도 않냐.”

옆으로 달라붙은 동기에 시헌은 깜짝 놀라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은 채 대답했다.

“에이. 예과 때는 술이 전부라면서요. 선배님들도 지금 원 없이 마시라고 하시던데요?”

“그건 니 생각이고. 본과 가면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아.”

“형은 가끔 다 아는 사람처럼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 안 해요?”

한 살 어린 동기의 말에 시헌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목소리가 제법 큰 탓에 다른 동기들의 시선도 시헌에게 집중이 되었다. 시선을 이기지 못한 시헌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뭐?”

“아, 형이 재수해서 뭐라 그러는 건 아니구요. 그러니까……. 뭔가 미리 경험한 사람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러는 시헌 형이야말로 그렇게 술 마시고 한 번도 과탑 놓친 적이 없는 게 신기하다는 소리였어요.”

혹시 시헌이 기분 상하면 어쩌나 정리되지 않은 말로 시헌을 달랬다. 여기서 화를 내 봤자 손해를 보는 건 시헌이었다. 어차피 수업도 들어온다는 마당에 더 숨길 것도 없었다. 애당초 숨긴 적도 없지만.

“형이 의사야.”

“아, 지난번 술자리에서 카드 준 친형이요? 그거 아직도 소문이 자자하던데. 대박. 의사였구나.”

“뭐, 그렇지.”

“어쨌든 올 거죠?”

“아니, 오늘 선약 있어서 힘들 것 같아.”

“그래요? 서진 형은 온대요?”

서진이라는 말에 시헌은 동기를 올려 봤다.

“서진이를 왜 나한테 물어?”

“네? 아, 뭔가 둘이 요즘 친하게 지내잖아요. 그래서 물어본 건데.”

당황한 동기가 머뭇대며 뒷목을 긁적였다. 마침 뒷문에서 서진이 들어왔다. 날이 추워 목도리며 모자까지 눌러쓴 서진은 가방도 내려놓지 못한 채 동기들에게 다가갔다.

“뭐야?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은 아니구요. 서진 형 오늘 술 마실 거예요?”

“또? 야, 그놈의 술 지겹지도 않냐.”

“뭐예요? 둘이 짰어요? 똑같은 말만 하고.”

불만이 가득한 동기의 표정에 서진은 당황하며 시헌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서진은 입을 열지 않는 시헌에 다시 동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 오늘 선약 있어서 안 돼.”

“아, 진짜. 알았어요.”

마침 오는 조교에 다들 자리로 흩어졌다. 갈 곳이 없어 맴돌던 서진은 마침 비어 있는 시헌의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필기구를 꺼내며 강의 준비를 하는 서진을 힐끗 본 시헌이 물었다.

“선약 있어?”

“응. 누나가 저녁 먹자고 K호텔로 나오래.”

“잠깐만, K호텔에서 저녁이라고?”

“어. 왜?”

시헌은 휴대폰을 열어 기욱이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K호텔 한식당.

“나도 가.”

“너도?”

“응.”

조교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님이 안으로 들어왔다. 교수님의 눈치를 보던 서진이 시헌에게 속삭였다.

“강의 끝나고 얘기하자.”

서진은 시헌의 차를 타고 K호텔로 갔다. 같은 학교인지라 같이 오는 두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네 사람이 모인 자리. 식사가 끝날 무렵 서윤은 입가에 묻은 소스를 냅킨으로 닦았다.

“이렇게 밥 먹으니까 진짜 가족 같다.”

“기욱 형이랑 결혼하면 가족이죠, 뭐.”

“박시헌 너……. 하아. 여기 묻었어.”

시헌을 나무라려던 기욱은 결국 서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덜 닦인 소스를 닦아 준 기욱은 아직 식사를 마치지 않은 서진을 힐끗 바라봤다. 담담하게 식사를 마친 서진은 듣고 있지조차 않은 것 같았다. 시헌은 의자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자리를 피한 시헌은 화장실 복도 뒤편의 야외에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들어가야지 하면서도 줄담배를 피우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중독인가. 그런 것보다는 오늘따라 유독 담배가 고팠다. 서윤과 기욱의 스킨십이 딱히 불편하거나 하진 않다.

어떤 여자를 데려오건 기욱의 애정 행각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등을 돌리면 차가운 성격이라 해도, 내 여자한테만큼은 확실한 것이 기욱의 성격이라는 걸 시헌이 모를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그냥 시선이 별로였다. 서진을 보는 그 시선이 미묘하게 시헌을 거슬리게 하였다.

커피 일도 그렇고. 아니, 어쩌면 제가 너무 예민하게 군 걸까. 하긴 제 형 여자 친구의 동생과 섹스를 한 시헌이나 그걸 알고 받아들인 서진이나 결코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뭐, 그래도 시헌은 당당했다.

서윤이 기욱과 사귀기 전부터 자신은 서진에게 마음이 있었노라, 하고 짧아진 담배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때아닌 자기 합리화를 했다. 하나만 더 피우고 갈까 하고 담배를 입에 물자 문이 열리며 서진이 들어왔다.

“담배 좀 줘.”

문을 연 서진은 담배를 물고 있는 시헌을 보더니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시헌은 제 옆에 선 서진을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봤다.

“좀 사라.”

“씨발, 너도 내 거 잘 빼앗아 피우잖아.”

시헌이 담배 케이스를 내밀자 서진은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뽑아 입에 물었다. 시헌은 제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도 잊은 채 서진의 입에서 타들어 가는 담배를 바라봤다.

“좋아해.”

“이런 타이밍에 고백하지 좀 말라고.”

“대답할 때까지 계속할 거야.”

“사귀자고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왜…….”

달각, 하고 또다시 안쪽 유리문이 열렸다. 기욱이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피우는 두 사람을 본 기욱은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담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기욱은 시헌의 손에 들려 있는 담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담배 좀.”

“아, 진짜….”

남의 담배로 뭐 하는 짓인지. 시헌은 마지못해 담배 케이스를 내밀었다. 기욱이 담배를 가져가고 시헌은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보며 한숨을 내 쉬었다. 탁탁, 기욱의 라이터에서 불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몇 번인가 라이터를 흔드는 모습에 시헌은 애써 모르는 척 기욱을 외면했다.

담배까지 빌려줬는데 라이터까지 빌려주고 싶진 않았다. 닳는 건 아니지만, 기분 나쁜 건 나쁜 거였다. 시헌의 심술에 결국 서진이 제 라이터를 내밀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노란색 싸구려 라이터였다.

“고마워.”

“전 누나한테 가 있을게요.”

“금방 피우고 갈게.”

훅, 하고 내뱉은 기욱의 담배 연기가 허공을 적셨다. 시헌은 그 옆에서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라이터를 꺼냈다. 노란 라이터. 서진과 똑같은 라이터네, 하고 생각할 무렵 한순간이지만 기욱과 시선이 맞은 느낌이 들었다. 시헌은 불을 붙인 뒤 재빨리 라이터를 주머니 안으로 구겨 넣었다.

“적당히 펴.”

“응.”

오늘은 좀 많이 피웠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시헌이 담배를 끌 때까지 기다린 기욱은 시헌과 함께 복도로 나왔다. 슬슬 갈 준비를 하는 것이 보였다.

“오빠랑 나는 이제부터 출근인데.”

병원에 가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서윤에 시헌은 테이블에 있는 제 차 키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시헌이 말하기도 전에 기욱이 먼저 선수를 쳤다.

“집에 데려다줄게.”

“나도 차 가지고 왔어. 병원이랑 반대잖아.”

“별로 안 멀어.”

“어머, 별걸 가지고 다 싸우고 그래?”

서로 서진을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서윤이 큭큭댔다. 정작 당사자들은 전혀 재미있지만은 않았다.

“싸우는 거 아냐.”

그렇게 대답한 기욱도 연신 팔에 차인 시계를 힐끗거리며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의 유치한 자존심 싸움을 보다 못한 서진이 끼어들었다.

“형님 출근하는 거 방해하고 싶진 않으니까 그냥 시헌이 차 타고 갈게요.”

“하아, 알았어.”

기욱은 서진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듯 대답했다. 사실 시간이 빡빡했던 것도 사실이고. 계산을 마친 뒤 지상주차장에서 서윤은 기욱에게 팔짱을 낀 뒤 손을 흔들었다.

“서진아 내일 보자! 시헌이도 조심해서 들어가고!”

“응. 누나도 고생해!”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인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욱의 차가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차가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한 시헌이 등을 돌렸다.

“갈까?”

앞서간 시헌은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 모습에 서진은 기가 찼지만 모르는 척 차 안에 탔다. 피곤했던 서진은 차 안에서 잠시 졸았다가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릴 무렵 차가 집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딱히 불안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서진이 깬 것을 눈치챈 시헌은 차의 속도를 낮췄다. 퇴근 시간을 조금 지난 도로는 적당히 한가했다. 시헌은 처음 보는 골목으로 들어가 적당히 차를 댔다.

“언제까지 말 안 해 줄 건데.”

“너도 은근 성격 급하다.”

“원래 급했어.”

시헌의 손가락이 초조한 듯 까닥이며 핸들을 건드리고 있었다. 이렇게 안달이 난 시헌의 모습은 서진도 처음이었다. 잠시 시헌이 한눈을 파는 것을 본 서진은 안전벨트를 푼 뒤 시헌의 앞으로 다가왔다.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는 것도 잠깐, 서진은 시헌의 몸을 잡아당겨 입술을 맞췄다.

“너… 읍….”

잠시 당황했지만, 시헌은 서진의 키스를 거부하지 않았다. 서진은 거칠게 시헌의 몸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동시에 안전벨트로 인해 시헌의 머리가 의자에 등받이에 부딪혔다.

“박시헌.”

“어, 어. 좀 놀라서.”

정신을 차린 시헌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벨트를 바로 맨 서진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차 밑에 있던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흐릿하게 서진의 얼굴이 비쳤다.

“마음대로 해.”

“뭐라고?”

때마침 들리는 소음에 듣지 못했던 시헌이 물었다. 아니, 소음 때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시헌을 노려본 서진은 주먹을 쥐며 언성을 높였다.

“씨발! 까짓거 사귀자고!!”

제가 말하고도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섹스 도중에 고백하지 않나. 담배 피우면서 언제 대답할 거냐고 조르는 거로도 부족해서 차 안에서 이 난리라니 참으로 황당한 고백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안전벨트를 푼 시헌이 서진 쪽으로 넘어와 서진의 어깨를 흔들었다.

“가, 강서진. 너 술 마신 거 아니지? 아까 뭐 잘못 먹은 거 없고?”

“먼저 재촉한 게 누군데!”

서진은 그런 시헌의 손을 쳐 내며 고개를 숙였다. 언제 대답할 거냐고 달달 볶아서 대답해 줬더니 또 이상한 사람 취급이라니. 이 얼마나 제멋대로인 사고방식이란 말인가. 서진은 서진 나름대로 제 대답에 아무런 말이 없는 시헌이 불안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이내 환한 얼굴로 밝아진 시헌이 서진의 뺨을 향해 입술을 맞추며 안겨 들었다.

“야야! 장소 구분 좀 해!”

서진은 달라붙는 시헌을 운전석 쪽으로 밀어냈다. 오뚝이처럼 밀려난 시헌은 차창에 쿵, 하고 머리를 박았다. 아플 법도 했지만, 다시 원상태로 복귀한 시헌은 별일 없다는 듯 안전벨트를 맸다.

차를 출발시켜 무작정 도로를 나오긴 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식당에 나왔을 때는 글쎄. 어딜 갈 생각이었던 걸까. 고백받기 이전의 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디 갈까? 자기야.”

“씨발, 뭐라는 거야.”

“그럼 여보야?”

“뒤지려고 환장했어? 그보다 어딜 갈지 내가 어떻게 알아?”

서진은 기가 막힌다며 중얼거렸다. 애당초 가려고 했던 집에 못 가고 멋대로 끌려온 건 다름 아닌 서진이었다. 어딜 가든 처음부터 서진의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선택은 없었다고는 하나.

“…….”

“달리 갈 곳이 없었어.”

뒤늦게 신발을 벗고 들어온 시헌이 대답했다. 서진은 좁은 모텔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지난번에 간 지방 모텔보다는 훨씬 좋다고는 하지만 도대체 왜 차로 한참을 돌고 돌아서 들어온 곳이 모텔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시헌은 방 가운데 서 있는 서진의 등을 안았다.

“뭐 하는 거야?”

“그냥. 안아 봤어. 차 안에서 한 말 아직도 헛것인 것 같아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진짜야.”

“하,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서진은 천천히 몸을 돌려 시헌에게 입술을 포갰다. 키스라고 하기보다는 가벼운 입맞춤에 가까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직도 이 모든 게 꿈이라고 착각하는 나쁜 아이에게 벌을 주는 것은 이 정도면 족했다. 서진은 축축하게 젖은 입가를 손끝으로 닦으며 웃었다.

“이래도 꿈같아?”

시헌은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저었다. 그 모습이 꽤 귀여워 서진은 저도 모르게 시헌의 머리를 헝클었다. 손을 치운 두 사람은 천천히 입술을 맞췄다.

서로의 옷을 벗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난번처럼 술에 취한 것이 아니다. 뭔가 핑계를 댈 만한 것도 없었다. 시헌의 위로 올라탄 서진은 제 밑에서 잔뜩 흥분한 시헌을 내려다봤다.

“서진아, 좋아해.”

“나도 알아.”

“좋아한다고 안 해 줄 거야?”

서진은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돌렸다. 사귀자고 말은 했는데, 이런 말을 하자니 여간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말 안 해 줄 거야?”

“조, 좋아해.”

“…….”

“씨발, 좋아한다고!”

서진의 팔을 잡아당긴 시헌은 서진의 손바닥에 혀를 가져다 댔다. 혀를 핥아 올리는 차가운 느낌은 안 그래도 옷을 반쯤 벗은 서진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손바닥 사이로 얼굴을 약간 드러낸 시헌이 웃었다.

“상남자네.”

“뭐?”

“박력 있다고.”

“하, 섹스 중에 고백한 네가 할 소리야?”

“난 원래 멋있었어.”

서진의 발을 건 시헌은 순식간에 몸을 뒤집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올라오는 시헌에 서진은 몸을 살짝 침대 뒤로 내뺐다. 시헌은 서진의 아슬아슬하게 걸친 바지와 드로어즈를 벗어 내렸다. 시헌의 손이 스친 페니스 끝이 움찔거렸다.

“너도 벗으라고.”

서진의 발이 시헌의 브리프 위에서 움직였다. 왜 이렇게 귀엽게 구는 건지. 서진의 다리를 들어 올린 시헌은 허벅지 끝에서부터 천천히 입술을 댔다. 이를 세우자 밑에서 읏,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꿈같다고 생각하는 건 시헌뿐이 아니었다. 시헌의 페니스를 본 서진은 눈을 반쯤 감았다.

작은 체격에 비해서 시헌의 페니스는 결코 작은 편은 아니었다.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근처에 있는 서랍을 열자 갖춰 둔 러브젤이 나왔다. 투둑, 하고 시헌의 손 위로 젤이 떨어졌다. 시헌의 손을 적신 젤이 서진의 안에 닿자 서진의 허벅지가 움찔거렸다.

“으읏. 차가워.”

“하, 목소리 섹시해. 녹아 버릴 것 같아.”

“으응. 아, 읏!”

서진의 허벅지를 벌린 시헌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젤 탓인지 질척거리며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사뭇 이상했다.

“으응, 으응.”

“기분 좋아? 여기?”

“아, 하악! 처, 천천히! 좋아. 좋으니까 좀!”

시헌의 손가락이 서진의 안을 꾹꾹 눌렀다. 자세의 불편함 때문인지 몸을 돌리려는 서진의 어깨를 붙잡아 눌렀다. 작은 손인데 무슨 힘이 저리 센지 서진은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시헌이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서진의 허리가 움찔거리며 튀었다.

일부로 제 전립선만 건드리고 있음이 손끝에서부터 느껴졌다. 시헌의 다른 손이 서진의 페니스를 천천히 움직였다. 안 그래도 잔뜩 예민해져 있던 서진의 페니스는 금방 딱딱하게 부풀어 올랐다.

“하응, 으으읏! 하으.”

시헌의 손안에서 사정한 서진의 몸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지금 생각하니 괜히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도 같고. 서진은 시헌이 잡아당기는 손을 따라 천천히 몸을 앞으로 당겼다. 시헌이 손바닥을 펴자 손바닥 안으로 희멀건 정액이 흘러내렸다. 손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걸 또 핥는 시헌의 모습에 서진이 깜짝 놀라 팔을 붙잡았다.

“야야, 미쳤냐!”

“뭐 어때.”

“대충 닦아.”

서진은 침대 옆에 있는 휴지를 꺼내 시헌의 손을 닦아 냈다. 바닥으로 떨어진 휴지를 아쉽다는 듯 쳐다보는 시헌에 서진은 질린다며 혀를 찼다. 문득 허벅지와 다리 사이로 한참 발기된 시헌의 페니스가 닿았다. 침대 뒤로 몸을 약간 뺀 서진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시헌을 내려다봤다.

“읏. 할 거면 빨리해. 부끄러우니까.”

“야해.”

“시끄럽… 으읍! 으읏….”

서진의 입을 막은 시헌이 서진의 안으로 천천히 밀고 들어왔다. 끝에서부터 조심스럽게 안을 메우며 들어오는 느낌을 참을 수 없는 서진의 고개가 절로 넘어갔다. 침대 헤드에 부딪힐 것만 같은 머리에 서진의 목을 들어 올린 시헌이 천천히 목 끝을 핥았다.

“하아, 으… 으응….”

“미안, 나 못 참을 것 같아.”

한계까지 내몰린 시헌은 서진의 허벅지를 잡아 앞으로 끌어당겼다. 시헌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을 깊숙이 찔렀다. 흐으, 가쁜 숨을 몰아쉰 서진은 모텔 천장으로 숨을 몰아쉰 뒤 눈을 반쯤 가렸다.

“으응, 읏! 하윽…!”

“읏. 서진아.”

서진은 눈을 아래로 깔며 허리를 움직이고 있는 시헌을 내려다봤다. 하, 누가 누구한테 야하다고 하는 건지. 적어도 시헌이 저에게 할 소리가 아님은 분명했다. 서진의 다리를 벌려 올린 시헌이 앞쪽으로 몸을 숙였다. 순식간에 시헌의 얼굴이 서진의 시야의 절반을 차지했다.

서진은 손을 뻗어 땀이 가득한 시헌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축축하게 젖은 땀이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것이 별로 좋은 감촉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런 사소한 건 아무래도 좋은 기분이었다. 한계까지 내몰린 서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뗐다.

“흐읏. 박, 시헌. 시헌아.”

“말해.”

“좋… 하, 좋아해.”

서진의 말에 시헌의 몸이 잠시 움찔하고 굳었다. 고백의 순간 한 장의 사진처럼 세상이 멈춘 기분이 들었다. 모텔 너머 들려오는 여자와 남자의 싸움 소리가 두 사람을 원래 세계로 돌아오게 했다. 정신을 차린 시헌은 목 근처에 닿아 멈춰 있는 서진의 손에 입술을 맞췄다.

“나도.”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돼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러기엔 나도, 너도 너무 많이 돌아온 것 같았다.

* * *

뚝, 하고 물소리가 끊겼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은 시헌은 모텔 방으로 나와 침대 밑에 엉망인 옷들을 바로 정리했다. 잠바 사이로 떨어진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서진은 침대 헤드에 몸을 반쯤 기댄 상태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서진이 누워 있는 침대에 걸터앉은 시헌은 어깨에 휴대폰을 걸친 채 전화를 받았다.

― 형 왜?

형이라는 말에 담배 연기를 내뱉던 서진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척했지만, 서진의 시선은 온통 옆에서 통화 중인 시헌에게 닿아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른 시헌은 서진의 손을 붙잡아 손에 있는 담배를 멋대로 빨았다. 담배 끝에서 텁텁한 맛이 났다.

― 그냥, 집에 잘 들어갔나 해서 전화한 거야.

― 응. 지금 집이야.

서진의 손을 붙잡은 시헌은 멋대로 서진의 담배를 껐다. 시헌이 몸을 누르자 안 그래도 힘이 없었던 서진의 몸이 자연스럽게 침대 아래로 흘러내려 갔다. 시헌의 손이 제 몸을 더듬는 와중에도 서진은 시헌의 통화만을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 알았어.

기욱의 대답에 시헌은 탁, 하고 휴대폰을 닫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시헌과 키스를 한 서진은 끈질기게 달라붙는 시헌을 옆으로 밀어내며 새 담배를 집어 들었다. 서진이 담배를 꺼내기 무섭게 시헌은 서진의 팔을 낚아챘다.

“내가 중요해 담배가 중요해?”

“당연히…….”

“당연히?”

“담배가 중요하지 씨발아.”

서진은 목 끝까지 다가온 시헌의 뺨을 손바닥으로 밀어낸 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재떨이 위에는 시헌이 멋대로 꺼 버린 얼마 피우지 않은 담배가 남아 있었다. 담배에 밀려난 시헌은 옆에서 으으,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담배 미워.”

“담배도 너 싫어해.”

“너무해.”

“형이야?”

“뭐가?”

“아까 전화.”

시헌은 서진이 기욱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는 척 일부로 물어보고 있다는 걸 묻는 사람도, 질문을 받는 사람도 알고 있었다. 마치 짜고 치는 질문에 시헌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담배 연기를 내뱉은 서진은 침대 근처의 작은 문을 살짝 열었다.

열지 말라고 막아 놨지만 그런 건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문틈 사이로 바깥 공기와 함께 번화가의 소란스러운 잡음이 들려왔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뭐가?”

“태연하게 거짓말 잘하더라. 너.”

시헌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는 막 한 모금 피운 담배가 끼워져 있었다. 집이라니. 모텔이 어딜 봐서 집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중학교 때도 그랬지. 어떻게 눈 하나 끔벅 안 하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기욱도 그런 걸 봐서 가족 내력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서진의 말에 시헌은 대단한 게 아니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별로 자신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식의 대답이었다.

“사람은 다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해.”

“…….”

“명분이 있으면. 거짓말은 정당화가 되거든. 돈, 명예, 지위, 명분은 제각각이지만.”

“넌 무슨 명분이 있어서 거짓말을 한 건데?”

“음. 보호?”

침대에 걸터앉던 시헌이 완전히 침대 위로 올라와 서진의 옆에 붙었다. 담배를 끈 서진은 기가 막힌다며 제 옆에 찹쌀떡처럼 붙어 있는 시헌을 내려다봤다. 보호라는 말에 서진은 내심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 시헌이 그 사실을 알 리는 없지만. 서진은 본능적으로 시헌이 기욱에게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누가 누굴 보호해 보호하긴.”

“하하, 그렇지?”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서진도, 시헌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이었다. 시헌은 괜한 의심이었다며 어색하게 뺨을 긁적였다. 시헌의 그런 의심은 인상을 찌푸리며 불쾌한 표정을 짓는 서진의 반응에 무마되었다.

“어쨌든 집이 아니라고 해서 좋을 건 없잖아?”

“그거야 그렇지.”

의심이든 아니든 시헌이 거짓말을 해 줌으로써 도움 아닌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서진의 몸을 더듬던 시헌의 손이 점점 뺨 위로 올라가더니 이내 입술을 맞췄다. 혀끝을 움직이는 진한 키스 끝에 숨을 가다듬은 시헌은 서진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며 웃었다.

“서윤 누나한테는 비밀로 할게.”

“하여튼 눈치는 빨라.”

“학교에서도 자제할게.”

서진의 허벅지 근처를 쓰다듬던 시헌의 손이 잠시 멈췄다. 선언하듯 말하는 시헌에 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할 게’가 아니라 해.”

“그건 장담 못 하겠는데.”

“뭐?

“저번에 말야, 식당에서. 너한테 관심 있었던 거 알고 있었거든.”

대놓고 말을 하지 않았지만 누굴 말하는지 짐작할 수는 있었다. 서진은 그때 시헌이 유독 식당에서 민감하게 굴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마음 한구석으로 짐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설마 진짜일 줄이야. 서진은 어이가 없다며 혀를 찼다.

“하여튼 별걸 다 질투해.”

“담배도 질투하는데 뭘 못 하겠어.”

“구구절절 맞는 소리만 하고.”

뻔뻔한 것인지 당당한 것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시헌은 천천히 서진의 위로 올라탔다. 시헌의 몸에 마르지 않은 물기들이 서진의 몸 위로 뚝뚝 떨어졌다. 시헌은 서진의 뺨을 쓸어 만졌다.

“피곤해?”

“어.”

서진은 팔을 뻗어 창문을 닫았다. 아직 나가지 않은 담배 연기가 방 안을 잔잔하게 맴돌았다. 피곤함에 눈을 반쯤 감은 서진이 못 이기는 척 말했다.

“해도 돼.”

“아니, 너 힘들까 봐.”

“정신없이 한 주제에 그런 거 신경 써?”

천천히 하라고 할 때는 듣는 척도 하지 않더니 자기 하고 싶으니까 애써 참는 척하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본인은 참는 척이 아니라 참는 거라고 하지만 서진이 보기엔 그게 그거였다. 서진의 비아냥에 시헌은 흘끗흘끗 눈치를 보더니 결국 서진에게 입술을 맞췄다. 키스하는 내내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주 좋아 죽는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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