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 미묘한 관계
서진은 기욱의 차를 타고 조금 일찍 강의실에 도착했다. 복도는 평소와 달리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아직 강의가 시작하려면 한 시간도 더 남았다. 아침 강의라면 밤새고 일찍 오늘 애들 한둘쯤은 늘 있었지만, 그런 것치고는 들리는 말소리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설마 밤사이 서진이 모르는 무슨 일이 생겼다든지. 동기와 막 친한 건 아니지만 심각한 아싸 정도는 아니었다. 서진은 정체 모를 소외감을 느끼며 강의실 문을 열었다.
“어, 강서진! 왔냐?”
“서진 형! 형 어제 왜 안 왔어!”
문을 열자마자 반기는 동기들에 서진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게 아닌가? 가장 먼저 반긴 동기들을 제외한 다른 동기들도 서진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했다. 강의 시작 한 시간 전부터 강의실 절반 이상이 차 있었다. 서진은 대충 비어 있는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앉았다.
뭐가 있기는 얼어 죽을. 서진은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동기와 앞 좌석에 앉아 실습용 가운을 덮고 엎드려 잠들어 있는 여자 동기들을 보며 혀를 찼다.
“니네 밤새 달렸냐?”
“당연하지! 와, 진짜 어제 너도 있어야 했는데. 소문 다 나서 본과 선배님들까지 오시고 난리도 아녔다 진짜.”
“……뭐? 본과 선배님들이 왜 와?”
서진은 동기의 말을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저들끼리 가볍게 마신다는 술자리가 서진이 사라진 단 몇 시간 안에 대형 과모임이 되어 버렸다. 서진은 한발 늦게 지난밤 동기가 저에게 했던 전화 내용을 생각해 냈다. 시헌이 쏜다고 했던 술자리에 선배들이 왔다는 뜻 같았다.
기욱이 시헌에게 카드를 준 사실을 모르는 서진은 시헌에게 무슨 돈이 있어 그런 거창한 술자리를 벌였는지 알 수 없었다. 서진은 저를 앞에 두고 어젯밤 일을 시끄럽게 떠드는 동기들을 보며 말을 걸었다.
“가볍게 한다며.”
“그러려고 했는데, 박시헌 저 새끼가 갑자기 나가더니 형 카드 가져오더라고. 우리야 뭐 사 주겠다고 하니까 마신 거 아니겠냐? 건너편에 있던 본과 선배님들이랑 합석하겠다고 우겼던 것도 시헌이가 한 거고.”
“…잠깐만! 형 카드로 긁었다고?”
“어. 쟤도 존나 마셨을걸? 존나가 뭐냐. 애들 다 죽어 있는데 선배님들한테 술 다 돌리고 대박이더라.”
다들 공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얼마를 마셨냐고 물어봐도 다들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근데 끝까지 형이 무슨 일 하는지 안 알려 주더라?”
“난 형이 있는 줄도 몰랐어.”
“씨발, 난 벌써 마통 뚫었는데. 부러운 새끼.”
“지랄. 합격하자마자 합격증 들고 가서 여친이랑 유럽 여행 갔다며.”
“걔랑 헤어진 지가 언젠데! 수능 끝나고 알바해서 번 돈이랑 모아서 간 거거든? 아, 씨발! 존나 억울하네!”
들어 줄 수 없는 대화들에 서진은 강의실을 두리번거렸다. 밤새 달리고 강의실에 왔다는 애들치고는 의외로 시헌이 없었다.
“시헌이는 집에 갔어?”
“뭐? 박시헌 저기 있잖아.”
동기 한 명이 구석에 있는 책상을 손가락질했다. 손가락을 따라 등을 돌렸지만 빈 책상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술이 덜 깬 동기의 장난이라고 생각한 서진은 짜증을 내며 물었다.
“어디?”
“책상 밑에. 큭큭, 저 새끼 조교가 문 열어 주자마자 기어 들어가더라.”
자세히 보니 책상 밑으로 검은색 잠바를 입고 있는 시헌이 있었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쪼그리고 자는 시헌을 본 서진은 기가 막혔다. 무슨 생각을 하면 저 좁은 구석에서 잘 생각을 하는 거지?
그 건너편으로 책상을 이어 어디서 났는지 모를 박스들을 깐 뒤 두꺼운 교재를 베개 삼아 자는 동기가 그나마 시헌보다는 나았다. 시헌보다 낫다는 소리지 결국 그놈이 그놈으로 결코 낫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슬슬 깨워 줘야겠네.”
“하아, 내가 깨울게.”
“어? 그럴래?”
고개를 끄덕인 서진은 시헌이 자고 있다는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뒤에서 봤을 때는 설마 했건만 앞에서 보니 시헌이 틀림없었다. 차라리 아니길 바랐건만. 서진은 책상 밑으로 손을 넣어 시헌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 박시헌.”
“…….”
“일어나.”
“어?”
서진의 목소리와 건너편에서 들리는 소란에 시헌은 눈을 떴다. 잠이 깬 시헌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쿵 소리와 함께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얼마나 강하게 박았는지 시끄럽던 강의실에 일순 침묵이 돌 정도였다. 시헌이 기어 나오다시피 하며 기어 나오자 강의실 책상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
아직도 바닥에 손을 짚은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시헌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진을 올려봤다. 분명한 건 제 앞에 있는 서진은 꿈이 아니라는 것과 머리가 망치에 맞은 것처럼 아프다는 사실이었다.
아픈데, 정신이 없어서 아프다는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시헌의 그런 모습을 내려다본 서진은 또한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시헌을 봤다. 건너편에서 시헌의 상태를 눈치챈 동기가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푸읍, 하하하하하! 내가. 큭큭, 씨발 저거 저럴 줄 알았어!!”
그가 시헌처럼 술이 덜 깬 탓도 있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잠이 깬 여자 동기들이 무슨 일이냐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시헌은 저를 향한 웃음에 고개를 돌렸다.
“씨발 뭐야!”
“뭐긴 뭐야!! 강의실이지 병신아!”
“…어?”
시헌은 쓰러진 책상을 잡고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강의실 안에는 일찍 온 동기들도 앉아 있었다. 시헌은 눈을 깜박이며 아픈 머리를 긁적였다. 그사이 서진은 바닥에 엎어진 책상과 의자를 바로 했다.
“나 언제 여기 왔냐?”
“…뭐? 너 애들이랑 문 따고 들어 왔다면서.”
“어, 음. 기억이 안 나.”
기욱에게 카드를 받고, 홧김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사람들을 부르라고 했다. 마침 건너편에 있던 선배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합석을 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이후로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진은 이젠 더 놀랄 것도 없다며 시헌의 등을 때렸다. 자리에 없었던 서진이 시헌의 기억을 대신해 줄 수는 없었다.
“몰라. 강의 시작하니까 똑바로 앉기나 앉아.”
고개를 끄덕인 시헌은 서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자고 있던 자리에 앉으면 될 것이지 굳이 서진이 있는 중간 자리까지 와서 앉는 건 또 무슨 행동인가 싶었다. 서진이 교재와 필기구를 꺼내자 시헌이 그런 서진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왜!”
“없어.”
“뭐가 없……. 너 일부러…!”
시헌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책상 아래로 다리를 꼬았다. 술에 취해 강의실에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잔 시헌이 교재나 필기구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시헌의 태도에 서진은 중학교 시절의 악몽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적어도 대학생 때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서진의 반응에 시헌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일부러 안 가져온 거 아니라고.”
책상에 팔을 괸 시헌이 고개를 돌리며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가 일부러 안 가져왔다 그랬나. 단지 옛날 일이 생각났을 뿐이었다. 두꺼운 교재와 노트, 필기구 등을 좁은 책상 위로 꺼낸 서진은 시헌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막 수업을 시작하려는 교수님의 눈치를 본 시헌은 의자와 붙어 있는 책상을 들어 서진의 옆에 붙였다.
쾅, 하고 책상이 서진의 옆에 놓이며 짧은 순간이지만 학생들의 시선이 시헌에게 집중됐다. 아직 나가지 않은 조교와 중년의 여자 교수님은 질린다며 고개를 저었다. 시헌의 학번 애들의 술 파티는 이른 아침부터 교수들 사이에서도 제법 화젯거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봤자 젊은 애들이 잘하는 짓이다, 하면서 자신들의 옛날 일들을 회상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닌 건 시헌뿐이 아니었으니. 교수는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시헌은 강의 시작 오 분 만에 곯아떨어졌다.
* * *
“야, 강서진! 박시헌이랑 같이 밥 먹으러 가자! 해장이라도 하든가.”
“시헌 형 자요?”
“어. 잠깐만.”
급하게 교재와 필기구 등을 구겨 넣은 서진은 엎드려 있는 시헌의 등을 흔들었다. 아무리 전공 수업이 아니라지만 이렇게 대놓고 자는 건 또 무슨 심보인가 싶었다. 서진의 손에 시헌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처럼 느릿느릿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머리 위에 책상이 없었다. 눈을 비빈 시헌은 강의실 끝에 있는 시계를 찡그린 눈으로 바라봤다.
잠이 덜 깨 잘 보이지 않는지 결국 소매를 걷어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동그란 아날로그시계 화면을 한참이나 보고 난 뒤에야 시헌은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것치고는 몸은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서진은 책상을 붙잡고 일어난 시헌을 붙잡았다.
발을 디디기 무섭게 휘청거렸기 때문이었다. 서진은 다리가 풀리는 시헌을 반쯤 안으며 입을 열었다. 술을 진탕 마시고 강의에 들어오는 놈들이야 주에 한두 명씩은 꼭 있었고, 사생활이니 하는 생각에 묻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정도가 좀 심했다.
“너 도대체 얼마나 처먹은 거야?”
“몰라. 윽. 머리 아파. 죽을 것 같아.”
“이래서 오후 강의는 듣겠냐?”
서진의 걱정에 시헌은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강의는 6시가 넘어야 끝이 났다. 이런 몸이라면 운전을 해 집에 가는 것도 불가능이었다. 애당초 맨몸으로 학교에 나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지만 말이다. 어디서 재워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서진에게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헌이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역.”
“갑자기 무슨 미역 타령이야?”
“말린 미역 같다고 생각했잖아 방금.”
서진에게 한쪽 팔이 붙잡힌 시헌은 다른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술에 떡이 된 데다 밤새 엉망으로 잠이 들고, 씻지도 못한 머리카락은 정말 미역처럼 눌려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말린 미역보다는 기름칠한 미역 같았다. 어느 쪽이든 제정신으로 할 소리는 아님이 분명했다.
“너 술 덜 깼지?”
“응. 어떻게 알았어?”
당연한 질문을 당연하게 주고받는 이유가 있을까. 서진은 더는 시헌과 술에 관해 이야기해서 좋아질 게 없다고 판단했다.
“아. 돌겠네! 진짜.”
미적대는 두 사람에 다른 동기들이 복도 쪽에서 언성을 높였다.
“야! 박시헌 빨리 데리고 나와!”
“하아, 일단 가자.”
뭐라도 먹으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며 서진은 시헌의 팔을 잡아당겼다. 뭐, 저 상태로 해장국이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아 보였지만. 시헌은 서진에게 질질 끌리다시피 하며 간신히 복도로 나왔다. 중학교 때는 이 정도까지 민폐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제 옷자락을 붙잡고 천천히 가라는 말을 옹알이하듯 중얼거리는 시헌의 모습은 꽤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언제까지 시헌 때문에 뒤처질 수 없다고 판단한 서진이 속도를 높이자 시헌의 몸이 또 서진을 따라 팍, 하고 이끌렸다.
“우악!”
“야, 야! 박시헌! 죄, 죄송합니다!”
멋대로 손을 놓고 낯선 사람과 부딪힌 넘어진 시헌을 대신해 서진은 앞선 사람에게 사과했다. 반동으로 반쯤 바닥에 주저앉은 시헌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
세 사람 중 누구의 말인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임정혁. 서진이 2년 전 J대 병원에서 봤던 의사라는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시헌보다 조금 빨리 정혁을 알아본 시헌은 근처의 벽을 붙잡고 일어나 먼지를 털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안녕하세요.”
미안하다고는 못 할망정. 바보처럼 90도로 고개를 숙이는 시헌에 서진은 그럴 줄 알았다며 이마를 짚었다. 농담이 아니라 시헌이 어떻게 공부를 잘했는지 심히 의심되는 대목이었다. 똑똑한 놈은 어딘가 한쪽이 비정상이라고 하던데 딱 시헌의 모습이 아닐까. 서진은 고개를 숙이고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시헌의 몸을 붙잡았다. 시헌의 인사에 정혁은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어, 안녕.”
“근데 여긴 무슨 일이세요?”
“나? 나 원래 H대 출신이잖아.”
시헌과 이야기를 하는 정혁은 같이 온 조교들에게 먼저 가라고 사인을 줬다. 시헌은 고개를 숙인 조교들이 멀어지는 것과 정혁을 번갈아 바라봤다. J대 병원에서 일하니까 J대학교 출신인 줄 알았지. H대 병원 출신이라는 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제 경력을 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시헌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렸다. 지긋이 바라보는 시헌의 시선에 정혁은 도대체 뭐가 불만인지 영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시헌과 서진을 본 정혁은 지난날을 생각하며 두 사람의 학년을 가늠했다.
J대 병원에 있을 무렵 한 다리 건너 소문으로 두 사람이 재수했다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다만 헷갈릴 뿐.
“본과는 아니고. 1학년? 2학년?”
“1학년이요.”
“아, 1학년이 맞군.”
정혁이 그럴 줄 알았다며 중얼거렸다. 건너 들은 소문이긴 하지만. 사실 재수를 안 하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었다. 옛날 일이 어렴풋 떠오른 정혁은 씁쓸함에 입맛을 다셨다.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해 온 정혁이지만 그날의 기억은 그리 쉽게 잊힐 것 같지 않았다. 1학년이면 오히려 잘된 감도 있었다.
“다음 주부터 수업 들어올 거니까 아는 척해. 전공은 아니지만.”
“그럴게요.”
“근데 쟤는 왜 저래?”
“안녕하세여.”
“아까 인사했잖아. 술 안 깼냐?”
시헌이 또다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서진이 한숨을 쉬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눈치를 채긴 했지만 가지가지 하는구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서진이 어색하게 웃자 시헌은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렸다.
“근데 다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나만 모르는 건가?”
쏟아지는 질문에 정혁은 하, 하고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방금까지 대화는 뭐로 들은 걸까? 시헌의 상태를 보면 강의 들어오기 직전까지 병나발을 불었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게. 정신 못 차려?”
“그러니까요. 여긴 병원이 아닌데 왜 여기 있냐구요.”
“얼마나 마신 거야?”
“강의 들어오기 직전까지 달렸나 봐요.”
시헌의 말을 무시한 서진과 정혁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제 말이 무시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시헌이 또다시 입을 내밀었다.
“으으. 나만 왕따 시켜.”
“왕따 아니라고. 야, 나도 예과 때는 장난 아니긴 했지만.”
정혁은 축 처진 시헌을 향해 몸을 약간 숙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딱밤의 요란한 소리가 한적한 복도를 울렸다. 서진이 붙잡은 덕에 몸이 뒤로 넘어지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정혁에게 맞은 시헌의 이마가 점점 붉게 올라오고 있었다. 과자를 빼앗긴 유치원생처럼 시헌은 눈물을 글썽이며 이마를 붙잡고 있었다.
“그래도 교수 못 알아보고 헛소리 지껄인 적은 한 번도 없다.”
“교수님?”
“그래. 교수님.”
“시간제인 거 다 알거든요. 6개월? 1년?”
정곡을 찔린 정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렸을 때부터 시헌을 봐 왔지만, 못 하는 말이 없는 꼬맹이라는 점은 여전했다. 20살이 됐다고는 하지만 키 때문인지 옷차림 탓인지 시헌의 모습은 고등학교, 혹은 성장이 빠른 중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은 키에 동안 외모라니.
“윽. 유학 가기 전까지만 하는 거야.”
“유학이요? 왜요? J대 병원에서 잘렸어요?”
“새끼 궁금한 것도 많다. 관뒀어. 그냥 이래저래 일이 있어서. 그보다 얘 점심은 먹을 수 있는 거냐?”
정혁이 다시 서진에게로 말을 돌렸다. 일단 무작정 강의실 밖으로 끌고 나오긴 했지만 서진 또한 시헌이 식사를 할 수 있을 거란 보장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침 서진의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에서 전화가 왔다. 시헌과 서진을 두고 먼저 갔던 동기의 전화였다.
― 야, 니네 어디야? 왜 안 와?
― 아. 미안. 시헌이 상태가 좀 많이 안 좋아서. 우리 알아서 먹고 가든지 할 테니까 먼저 먹어.
―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알았어.
서진은 빠르게 전화를 끊은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서진을 대신해 시헌의 팔을 잡아당겨 품에 안은 정혁은 위층이 있는 천장을 손가락질했다.
“수액이라도 맞고 가. 그럼 조금은 낫겠지.”
“실습용이잖아요. 써도 돼요?”
“어? 요즘은 안 되나? 나 땐 술 마시고 많이 그래서 교수님들이 모르는 척 넘어가 주고 그랬는데. 뭐, 내가 그랬다고 하면 되니까 상관은 없을걸.”
정혁은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시헌을 부축해 계단을 올랐다. 이 와중에 또 반쯤 잠이 들어 있는 시헌을 보니 가지가지 하는구나 싶었다.
“나니까 많이 봐주는 거야. 알지?”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고.”
정혁은 안쪽의 실습실에 잠긴 문을 열었다. 드르륵, 하며 실습실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정혁은 오래된 열쇠를 손가락에 끼우며 돌렸다.
“열쇠 좀 바꾸지 아직도 그대로냐. 우리 학교도 참 가지가지 한다니까.”
서진은 의자를 꺼내 시헌을 앉혔다. 익숙하게 안쪽으로 들어가 실습용 주삿바늘들과 수액을 챙겨 왔다.
“태평하게 앉아 졸기는.”
대충 높은 곳에 수액을 걸고 시헌의 팔을 걷은 정혁은 서진을 힐끗 바라봤다.
“해 볼래?”
“저희 아직 실습 안 들어가서……. 해 본 적도 없고.”
“앞으로 질리도록 할 건데 몇 개월 먼저 해도 괜찮지 않아? 내가 잘 봐 줄게.”
서진에게 바늘을 넘긴 정혁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J대 병원에 있을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정혁은 참으로 유쾌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당당하고, 밝고 자신감이 넘치는 정혁의 모습을 서진은 속으로 부러워했다. 정혁은 잠들어 있는 시헌의 팔을 손가락질했다.
“게다가 저거 술 잔뜩 취해서, 몇 번 정도는 찌른 줄도 모를걸.”
“실컷 찌르라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정혁의 농담에 서진은 조금 안심이 됐는지 가볍게 웃었다. 서진은 의자를 잡아당겨 시헌의 맞은편에 앉았다.
“난 실험용이 아냐.”
“술 취한 놈은 가만히 있어.”
자는 줄 알았는데. 또 자기 얘길 하는 건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정혁은 바늘을 쥔 서진의 뒤에 섰다.
“여기요?”
“아니, 좀 더 밑에. 그래 거기.”
이론은 들은 적 있었지만, 막상 해 보는 건 처음이었던 시헌은 정혁이 시키는 대로 천천히 따라 했다. 뜻밖에 차분하게 설명하는 정혁에 서진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한 번에 바늘을 넣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시헌의 수액이 잘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정혁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잘하는데? 외과 해도 되겠어.”
“교수님이 외과 출신이라 그런 건 아니구요?”
“아니야. 나 이래 봬도 병원에선 제법 하드한 편이어서. 어중간한 애들은 싫어한다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까 나중에 한번 생각해 봐.”
정혁의 제안에 서진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국시도 통과하지 않은 학생에게 전공과는 너무나 먼 얘기라는 걸 말을 하는 정혁도, 그 말을 듣고 있는 서진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슬슬 잠이 깬 시헌이 움찔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아파.”
“뭐? 진짜?”
“박시헌. 거짓말하지 마.”
“하하, 농담이야. 하나도 안 아파.”
술에 취한 와중에도 장난을 치는 시헌에 서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한번 시헌의 상태를 체크한 정혁은 슬슬 나갈 준비를 했다.
“다 들어가려면 좀 걸리니까 너도 좀 쉬어.”
“교수님은요?”
“난 다른 사람 만나러. 선약이 있거든. 아, 문은 그냥 두고 나와도 괜찮아. 그럼 다음 주에 보자.”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조심해서 가여.”
“인사할 거면 똑바로 해라.”
서진을 따라 하는 시헌의 인사에 정혁은 질린다며 가볍게 웃었다. 다른 교수님이었다면 무례하다고 할 수 있는 행동을 정혁은 아무렇지 않게 흘려 넘겼다.
실제로 시헌에게 핀잔을 늘어놓는 정혁은 황당하다는 것뿐 기분이 나쁘거나 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바늘이 꽂힌 팔과 들어가는 수액을 올려다본 시헌은 의자 뒤로 몸을 살짝 늘였다.
“밥 먹으러 가도 돼. 배고프잖아.”
“됐어. 이따 강의 전에 대충 사 먹으면 돼.”
“그래.”
넓은 실습실 안으로 침묵이 흘렀다. 날이 쌀쌀한 탓에 난방을 틀지 않아 실습실은 더 추운 감이 있었다. 날이 밝아 굳이 불을 켜지 않아도 실습실은 훤히 보였다. 바깥 햇빛을 조명 삼아 비치는 실습실 안. 문 너머 복도의 말소리가 마치 다른 세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술이 조금 깬 시헌은 건너편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서진을 향해 말을 걸었다.
“왜 집에 갔어?”
“어제 왜 먼저 갔어?”
그렇게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다. 원래부터 일을 벌이고 다니는 성격도 아니었다. 왜일까? 기욱에게 카드를 받은 자리에서 서진이 없다고 인식하기 시작한 순간부터였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자리에 없는 서진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급한 일이라는 게 대체 뭘까?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미칠 것만 같았다. 기욱을 따라 J대학교에 진학했다면, 더는 서진과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잊으려고 했지만 잊을 수 없었고, 제 인생에서 계속해서 나타나는 서진을 미워하기보다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참으로 바보 같았다. 수액이 들어가는 도관을 가만히 보고 있던 서진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
“급한 일 있다고 했잖아.”
“아아, 그거. 누나 때문에. 나이트인 거 깜박했던 것뿐이야. 내가 누나 말고 급한 일이 있겠어?”
“왜 없다고 생각하는데?”
너무나 능청스러운 대답에 사실은 저도 거짓말에 재능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거짓말로 치자면 시헌만 한 사람이 없는데 말이다. 하긴, 우린 서로 늘 거짓말을 해 오며 살아왔다. 어쩌면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이 시간도, 만남도 전부 거짓말일지도 몰랐다.
대체 뭐가 진짜인지. 서진의 말에 시헌은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중학교 때부터 그랬다. 고등학교, 3년, 그 뒤로 1년밖에 지나지 않는데 뭔가가 달라질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분명한 시기상조였다.
“넌 너보다 누나가 중요하니까.”
비꼬는 듯한 시헌의 말을 서진은 달리 부정하지 않았다. 친척이며 가족들이 많은 시헌의 집에 비해 서진에게 가족이라 부를 만한 사람은 서윤 한 사람밖에 없었다.
허울 좋은 관계라 해도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시헌은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시헌의 낮은 미소 또한 서진의 그런 생각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했고. 서진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늘 원했다면 시헌에겐 끊어도 끊어지지 않는 철창과도 같았다.
“어쩔 수 없잖아.”
“…….”
“나한텐 누나가 전부니까. 이상한 사람 취급해도 상관없어.”
“마음대로 생각해.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그래도.”
바늘이 꽂힌 팔을 책상 위로 올린 시헌은 서진이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천장에 적당히 걸어 두었던 수액이 시헌의 팔을 따라 흔들렸다. 서진이 기억하고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지켜주겠다고 했던 건 농담이 아니었어.”
시헌은 몇 번이나 서진과 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적어도 제가 같이 있었더라면. 세 사람이 같은 학교에 진학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죽은 은소도, 학교에서 그런 소문을 겪으며 자퇴를 결심해야만 했던 서진의 일도 시헌은 전부 제 책임 같았다.
설마 H대에 서진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이상 고등학교 때 같은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라는 다짐만큼은 진심이었다. 시헌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은 서진이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시헌은 늘 그랬다.
어떻게든 될 거라는 자신감. 나이를 먹으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여전한 건 시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여전함이 서진의 기분을 나쁘지 않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중학교 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일까.
“술 덜 깼네.”
“깼거든.”
시헌의 몸이 서진 쪽으로 점점 더 기울었다. 서진은 얼굴 근처까지 다가오는 시헌을 거부하지 않았다.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시헌은 서진의 옷을 잡아당겼다.
“야, 너… 으읍!”
서진의 몸이 앞으로 이끌리며 입술이 포개졌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입안을 탐했다. 술이 덜 깬 건 서진이 아니라 시헌일 텐데. 시헌을 보고 있자니 마치 서진도 술에 취한 사람처럼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자 경험도 별로 없는 주제에 키스 하나만큼은 능숙했다. 기욱을 생각하니 타고난 유전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했다. 입술을 뗀 서진은 입가에 흐르는 타액을 손등으로 닦아 내렸다.
“술 냄새 나.”
“데이트.”
“…….”
“어디로 갈지 안 정했잖아.”
지켜주겠다느니, 데이트하자느니 전부 술에 잔뜩 취해서 한 소리로 기억하는데. 이쯤 되면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집요함의 문제였다. 이상한 고집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서진은 시헌이 적당히 포기할 만한 말을 내뱉었다. 막 키스를 하고 난 뒤라 필터링이 되지 않았다는 점만 빼면.
“사귀는 것도 아닌데 얼어 죽을 데이트.”
“그럼 사귈까?”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고 뻔뻔하게 얼굴을 보는 시헌에 서진은 하, 하고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농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린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서진은 다시 다가오려는 시헌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술 냄새 나는 키스는 한 번으로 충분했다. 시헌을 밀어낸 서진은 괜히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주말.”
“주말이 왜?”
“이번 주말에 시간 돼.”
서진은 붉어지는 뺨을 손등으로 가렸다. 두 번 한다면, 정말 참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한낮, 누가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는 학교의 실습실에서 일을 치르는 것은 절대 사양이었다. 장난이 조금 심했다는 것을 깨달은 시헌은 수긍한다는 듯 대답했다.
“주말에 데리러 갈게.”
“몰라! 알아서 해! 오든지 말든지.”
툴툴대는 서진이 시헌은 너무나 귀여웠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 서진을 본 시헌은 서진과 닿았던 입술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이미 술은 다 깼지만. 왜인지 술이 깼다고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팔을 뻗은 시헌은 서진의 잠바 자락을 잡아당겼다. 어린애처럼 보채는 시헌에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시헌은 서진을 향해 바늘이 꽂힌 팔을 내밀었다.
“이거 빼 줘.”
“그 정돈 스스로 뺄 수 있잖아.”
“멋대로 남의 몸에 바늘을 꽂은 사람이 할 말이야?”
“혼자 해.”
이젠 하다 하다 별걸 다 요구하는구나 싶었다. 애당초 그렇게 술에 취해 강의실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고. 서진의 완곡한 거절에 시헌은 다시 볼을 부풀리며 인상을 썼다. 분명 중학교 때만 해도 분명 훨씬 시헌이 어른스러웠던 것 같은데.
외모만 본다면 서진 쪽이 훨씬 형 같았다. 동갑이 아니라 한두 살 어린 동생을 보는 것 같은 애교를 서진은 쉽게 이겨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참으로 재수 없게도 시헌은 그런 일에 자존심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닿지 않는 의자 테이블 밑으로 다리를 흔든 시헌은 실실대며 웃었다.
“못 하겠는데요. 의사 선생님.”
“젠장!”
서진은 결국 못 이기는 척 몸을 숙였다.
* * *
“으으. 뭐야?”
잠결에 벨 소리가 울리자 서진은 머리맡으로 손을 뻗었다. 잠에서 덜 깬 서진은 휴대폰 화면도 눈이 부셨다. 새벽 추위에 이불을 돌돌 만 서진은 뜬눈으로 전화가 오는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새벽 4시 30분. 아직 다섯 시도 채 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밖은 시커멨다. [박시헌] 진동과 벨이 함께 울리는 휴대폰에 큼지막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숨을 쉰 서진은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왜?
잠이 덜 깬 서진은 목이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면 시헌은 숨이 찬 듯한 목소리였다.
― 나 지금 가고 있으니까 편한 옷 입고 있어.
― 뭐?
― 금방 도착하니까 옷 편한 거 입고 있으라고.
시헌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서진은 결국 이불에서 나와 방의 불을 켰다. 뭘 잘못 먹었나? 서진은 보이지 않는 시헌의 얼굴 대신 전화가 끊기지 않은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 너 지금 몇신지 알고 하는 소리냐?
― 주말이잖아.
― 하아, 알았다.
황당함에 잠이 깬 서진은 전화를 끊은 뒤 거실로 나왔다. 나이트 근무를 간 서윤이 오려면 아직 몇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그전에 시헌이 먼저 도착하겠지만. 서진은 하품을 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닫히지 않은 화장실 문 너머로 익숙한 차 소리가 들렸다.
기욱의 차인 줄 알고 서진은 괜히 흠짓 놀랐다. 마침 차 시동이 꺼지는 탓에 정확히 누구 차 소리인지 감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서진은 적당히 시헌의 차겠거니 생각했다. 옷을 입고 기다리라더니 씻을 시간도 채 주지 않고 있었다. 애당초 집에 다 도착했으면 이런 식으로 전화하질 말든가. 이를 닦고 있던 서진은 급하게 입안을 행군 뒤 거실로 나갔다. 시헌이 반지하방으로 내려옴과 동시에 안쪽에서 잠근 문을 열었다.
“하아.”
약간 위쪽에 있는 시헌은 난데없이 열리는 문에 깜짝 놀랐다. 정확히는 문틈 사이로 나타난 서진 때문이었지만. 예상대로 밖은 아직도 어두컴컴했다. 새벽 4시니까 당연하겠지. 마음 같아선 빌어먹을 문을 닫고 다시 잠을 자고 싶었다.
왜 주말에 시간이 빈다느니 하는 괜한 말을 해서 이 고생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서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시헌은 문틈 안으로 손을 비집고 들어왔다.
“들어가도 돼?”
“그럼 밖에서 기다리게?”
“차에서 기다리지 뭐.”
그렇게 말하는 시헌의 몸은 이미 서진의 집안을 멋대로 반쯤 침범하고 있었다. 순순히 포기할 생각도 없으면서 말은 청산유수였다. 서진이 안쪽에서 문을 활짝 열자 시헌의 몸이 잠시 뒤로 빠졌다. 훅, 하고 들어오는 공기에 소름이 돋은 서진은 팔로 몸을 감쌌다.
“빨리 문 닫고 들어와.”
서진의 손가락질에 시헌은 빠르게 문을 닫았다. 아직 서진의 집이 어색한지 괜히 움직이지 않은 채 좁은 집 안을 둘러봤다. 예전에는 천장이 좀 더 높았던 것 같은데,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그래도 방 안을 적시는 습함은 여전했다. 시헌을 거실에 앉힌 서진은 방 안으로 들어가 장롱 안을 뒤졌다. 아직 겨울옷을 정리하지 않은 탓에 장롱 안은 옷으로 인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시헌의 브랜드 츄리닝을 본 서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예전에 사 두었던 츄리닝을 꺼내 입었다. 기분 좋게 거실에 앉아 집안을 둘러보고 있는 시헌은 방문을 닫지 않고 옷을 갈아입는 서진을 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반면 시헌의 시선을 느낀 서진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옷을 갈아입은 뒤 거실로 나왔다. 그래 봤자 아직 4시 40분이었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 와 주말에 약속이 생겼다고 말할 수도 없고. 몇 시에 오라고 말한 적도 없으니 완전히 제 무덤을 판 꼴이나 다름없었다. 몇 시간 후면 퇴근할 서윤에게 문자를 남긴 뒤 서진은 휴대폰과 지갑만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어딜 가는데 편한 옷을 입으라고 해?”
“그런 게 있어.”
목적지가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기가 찬 서진은 주머니에 있는 열쇠로 문을 잠근 뒤 열쇠를 창문 틈 사이에 숨겼다. 새벽은 생각 이상으로 추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두꺼운 잠바를 입고 올 걸 그랬나. 서진은 추위에 떨며 대문을 나와 먼저 시동을 걸고 있겠다며 사라진 시헌을 찾았다. 그리고 몇 걸음 가지 않아 시동이 켜진 차 한 대를 찾을 수 있었다.
서진은 가을 추위 때문에 당장에라도 차 안에 들어가야 했지만. 익숙한 번호판과 차 기종이 서진을 머뭇거리게 하였다. 서진은 약간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보이는 시헌에게 다가갔다. 서진의 시선이 시헌의 등 뒤로 차 안에 누군가 있지 않나 조심스럽게 살폈으나 잘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서진이 운전대를 붙잡은 시헌에게 말을 걸었다.
“형님 있어?”
“형? 형이 왜 있어?”
잠이 덜 깬 것인지 이상한 소릴 하지 말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하긴 그럴 리가 없겠지. 과민 반응이라고 생각한 서진은 옆으로 돌아 조수석 문을 열어 차 안에 탔다. 서진은 애써 담담한 척 옆에 앉은 시헌을 향해 말을 걸었다.
“차 산 줄 알았어.”
“아직. 아빠가 국시 합격하면 사래.”
“형님한테 빌린 거야?”
“내 차야. 형 차 새로 샀어.”
시헌의 대답에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바뀐 기욱의 검은 차를 서진은 알고 있었다. 알다마다 그 안에서 카섹스까지 했으니 할 말 다 한 셈이지만 말이다. 엉망이 되었을 차를 보며 한숨을 쉬는 기욱을 생각하니 뒤늦게 꼴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서진은 카섹스 같은 건 원한 적이 없었다.
시헌은 서진의 등 뒤 안전벨트를 손가락질했다. 벨트를 매라는 암묵적인 손짓이었다. 시헌은 서진이 벨트를 매기 전까지 출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진은 새벽이고, 어디까지 가는지도 모르는데 굳이 벨트를 맬 필요가 있나 싶었다.
무엇보다 시헌의 이런 행동은 기욱을 생각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였다. 기 싸움에서 진 서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벨트를 맸다. 천천히 출발하는 차를 본 서진은 유리창에 얼굴을 기댔다.
“미안. 형 때문에.”
시헌도 자신의 행동이 좀 불편하다는 걸 알긴 안 모양인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욱과 오랫동안 생활하다 보면 아무래도 이런저런 습관이 같이 몸에 밸 수밖에 없었다. 닮은 게 아니라 단순히 습관이 밴 거라면 서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사람은 형제니까. 게다가 보통 형제와는 조금 특이한 관계이기도 했고.
“그래서 어디 가는데?”
“비밀.”
역시 비밀이 맞았다.
* * *
“…….”
차에서 내린 서진은 인상을 구겼다. 날은 갰지만, 아침 안개가 스멀스멀 올라와 주변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군데군데 커다란 전세 버스와 함께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모여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온 시헌은 멍하니 서 있는 서진의 옆에 섰다.
“산이야.”
이걸 때릴까.
제 옆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시헌의 모습에 서진은 진심으로 화가 치밀었다. 그보다 시헌은 저를 무슨 장님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야, 나도 보면 알아. 내 말은 그러니까 여길 왜…….”
“올라가자고.”
“여, 여길?”
서진은 한눈에 봐도 높아 보이는 산을 올려다봤다. 산은 관심이 없는 데다 차 안에서 반쯤 졸아 여기가 정확히 무슨 산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 지리산이군.
“어디든 가겠다고 했잖아.”
제 말을 걸고넘어지는 시헌에 서진은 진심으로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건 술에 취해서…….”
“못 하겠으면 포기하고 바다에 가도 괜찮아. 너 예전부터 체육 못했으니까.”
산에 가고 싶은 주제에. 마치 선심 베풀 듯 말하는 시헌의 말투에는 묘하게 가시가 돋친 느낌이 들었다. 시헌은 소매를 걷어 시계를 바라봤다. 아직 오전 6시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 바닷가도 안 늦어.”
정말 바다를 갈 작정인지 시헌은 몸을 돌렸다. 입술을 깨문 서진은 차로 돌아가려는 시헌의 팔을 붙잡았다.
“가.”
“어?”
“올라가자고 산.”
까짓것 못 할 게 어디 있겠는가. 나이 먹고 산 하나 못 탄다는 소리를 듣고 싶진 않았다.
그깟 산 따위. 올라가 본 기억이라고는 학교 수련회 때 선생님을 따라 이름도 모르는 산에 오른 것이 전부였지만 아무렴 힘들어 봤자 얼마나 힘들겠거니 싶었다. 서진은 죽기야 하겠냐며 시헌의 뒤를 따랐다.
“야, 야! 가, 같이 가! 박시헌!”
등산 한 시간째. 벌써 아래가 까마득했지만, 그만큼 올라가야 할 곳도 까마득했다. 끈으로 연결된 난간을 붙잡은 서진은 위쪽에 있는 시헌을 보며 소리를 높였다. 벌써 이 대사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힘들어하는 서진과 달리 시헌은 무슨 다람쥐처럼 재빠르기만 했다.
원래부터 운동신경 좋은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쯤 되면 불공평 게임이나 다름이 없었다. 두 사람과 비슷한 시기에 올라가기 시작한 중년의 산악 회원 사람들은 둘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내 옆에 있던 남성이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하하, 청년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나?”
“괘, 괜찮아요.”
그렇게 대답하는 서진의 목소리는 잔뜩 떨리고 있었다. 앞서가는 시헌은 물론이거니와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 또한 아무렇지 않게 산에 올라가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아닌 오기가 생겼다. 남자가 위쪽으로 올라간 시헌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기 같이 올라가는 친구는 잘만 가는구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왜 너는 못 올라가냐는 말에 서진은 반박할 기운조차 없었다. 중년 남성과 서진의 대화 모습을 아래에서 지켜보던 시헌은 빠른 걸음으로 내려와 서진의 옆에 섰다.
“내려갈까?”
“뭐?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내려가? 가.”
이젠 스스로와의 오기, 자신에 대한 자존심의 싸움이었다. 슬슬 올라가는 것도 익숙해진 서진은 제 옆에서 속도를 맞추며 올라가고 있는 시헌을 바라봤다. 말이 익숙이지. 두꺼운 옷을 입고 온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진은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그에 비해 시헌은 무슨 동네 뒷산을 올라온 사람처럼 편해 보였다. 산 아래를 본다면 결코 동네 뒷동산과 비교가 될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말이다. 서진은 못마땅한 듯 입을 뗐다.
“왜 넌 땀 하나 안 흘리는 거야.”
“나도 모르겠는데.”
“하여튼 예전부터 넌 이런 쪽으로는 재수 없었어.”
시헌은 서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또 얄미웠던 서진은 시헌을 무시하고 정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 그래 봤자 얼마 가지 못해 따라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하아, 하… 주, 죽을 것 같아.”
정상―물론, 가장 낮은 봉우리이지만―에 올라온 서진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풀려 올라가는 것은커녕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침 안개는 어디 가고, 가을 하늘이 맑게 개 있었다. 조금 진정이 된 서진은 시헌과 함께 산 아래를 보며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대부분 사람이 집에서 싸 온 도시락으로 식사하고 있었다. 작정하고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츄리닝복과 휴대폰, 지갑만 챙겨 올라온 서진과 시헌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서진도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히 김밥을 팔고 있었고, 두 사람은 적당히 물과 김밥 한 줄씩을 사 근처에 있는 바위에 앉았다. 알루미늄 포일에 싸인 김밥을 먹은 서진은 아닌 푸념을 늘어놓았다.
“사내 둘이서 알게 뭐야. 산에 올 거라면 도시락이라도 싸 오든가 했어야지.”
“너 김밥 쌀 줄 알아?”
“뭐? 내가 어떻게 해 그런걸!”
“못 하면서 당당하게 굴지 말라고.”
“그러는 너야말로 뭐가 그렇게 당당한데?”
“내가 뭘…….”
김밥을 먹으며 대답하려던 시헌은 김밥이 목에 걸렸는지 급하게 물을 마셨다. 간신히 김밥을 안으로 넘긴 시헌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서진은 다 먹은 김밥의 포일을 손으로 구기며 시헌을 바라봤다.
“이제 됐지?”
“뭐가 돼?”
“산, 올라왔으니까 된 거 아냐. 내려가자.”
원래부터 산 취향도 아니었고. 오기 때문에 올라왔을 뿐 서진에게 산이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았다. 정상을 찍었으니 집으로 가기 위해서 내려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진의 재촉에 마지막 김밥을 먹은 시헌은 내려가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뭉그적대던 시헌이 일어난 서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벌써 내려가?”
“오래 있어서 뭐 하려고. 할 것도 없잖아.”
경치 구경은 진작―사실 서진은 높다 말고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다 했고. 경치 말고 구경할 거리라고 해 봤자 사람들밖에 없는데. 이름도 모르는 등산객들을 구경해서 뭐 하겠는가. 서진의 반박에 시헌은 내려가는 입구 반대편을 손가락질했다.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주겠다며 손수 만든 피켓으로 홍보를 하는 모습이 서진의 눈에도 들어왔다.
“사진 하나 찍고 가자.”
“싫어.”
“아, 왜.”
시헌이 이런 제안을 할 줄 알았다는 듯 서진은 빠르게 거절했다. 시헌은 그런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시헌의 모습을 내려다본 서진은 질린다며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에는 단순히 술에 취해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시헌의 이런 행동이 아직 약간 낯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래 이런 일로 떼쓰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말이다. 계속해서 사진을 찍자는 시헌의 말에 서진은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냥. 별로야.”
“기념이잖아.”
“무슨 기념인데?”
“……몰라. 안 찍으면 안 내려갈 거야.”
마땅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시헌은 어린애 같은 막무가내식의 논리로 버티기 시작했다. 서진은 시헌이 이런 유치한 짓을 하고도 용케 H대에 합격했구나 싶었다. 그런 것보다 시헌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사진에 목을 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런 데서 애같이 구는 건데.”
“…….”
삐진 것인지 대답을 할 생각이 없는 건지 어느 쪽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잔뜩 삐져나온 입술은 서진의 거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만들었다. 서진은 유치하게 구는 시헌을 이길 수 없었다. 어색한 것도 있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것도 있었다.
“아, 알았어.”
서진의 대답에 시헌의 표정이 밝아졌다. 시헌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펴며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사진을 찍으러 갔다. 마침 사람이 없었던 터라 사진을 찍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진은 계산을 하고 폴라로이드 사진을 받아 오는 시헌을 관심이 없다는 듯 바라봤다. 사진에 나온 자신의 모습에 서진은 처음부터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기분이 좋은 듯 싱글대던 시헌은 흐릿하게 드러나는 폴라로이드 한 장을 서진에게 내밀었다.
“너 가져.”
“두 장이야.”
“그럼 두 장 다 가져. 필요 없어.”
“……나 또 삐져도 돼?”
“빌어먹을.”
시헌의 협박에 서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폴라로이드 사진을 받았다. 점점 드러나는 사진을 보던 서진은 이내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사진을 끝까지 보지도 않은 채 주머니 안으로 구겨 넣었다.
도대체 시헌이 삐지는 거랑 저랑 무슨 상관인지. 서진은 단단히 이상한 약점이 잡힌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다시 마음이 바뀌기 전에 내려가야 한다며 내려가는 길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올라가는 건 힘들었지만 내려가는 건 어렵진 않겠지, 하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서진은 하산 10분 만에 그 생각을 열 번은 더 후회했다.
“가, 같이 가자고!”
거지 같은 산. 서진은 내려온 방향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그래도 내려가는 건 비슷하게 갈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시헌은 저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결국,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시헌은 내려오는 서진을 기다리며 걸음을 맞췄다. 서진은 옆에서 걷고 있는 시헌을 보며 이를 갈았다.
“산 따위 다시는 오나 봐라! 우왁!”
“천천히 내려가. 잘못 가면 다쳐.”
시헌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려는 서진의 몸을 붙잡았다. 서진은 고맙다는 인사 대신 시헌을 비아냥댔다.
“너 나 없는 사이에 등산에 취미라도 붙였냐?”
“누가 보면 몇 년 떨어진 줄 알겠다.”
“중학교 때 이후니까 몇 년은 맞지.”
이 와중에 다시 맞는 말을 하는 시헌이 서진은 무척이나 얄미웠다. 애같이 굴 때는 언제고 또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반칙도 이런 반칙이 없었다. 시헌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서진을 보며 멋대로 말했다.
“태권도.”
“태권도가 왜?”
“아직도 다니거든.”
“하, 의사가 아니라 선수 되겠다 아주.”
등산에서 왜 태권도 이야기를 꺼내는지 의도를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아직도 태권도를 다닌다는 사실을 몰랐던 서진으로는 조금 당황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야 중학교 때부터 태권도를 꾸준히 다녔고, 고등학교 때도 태권도에 가는 모습을 몇 번인가 본 기억은 있었다. 설마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다닐 줄 몰랐을 뿐. 서진의 삐딱한 대답에 시헌은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
“사실 제의도 받았었어.”
“선수 제의?”
“응. 기숙학원 들어가면서 잠깐 그만뒀었는데. 재수할 거면 체대 쪽으로 방향 잡을 생각이 없냐고 그러더라고.”
그 제안을 시헌은 그 자리에서 단칼에 거절했다. 사실 재수가 아니라 처음부터 체대로 생각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아직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재수가 확정된 마당에서까지 고집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의대에 붙고 체육관으로 돌아온 관장님은 시헌을 괴짜라고 생각하면서도 반겨 주었다. 성인이 된 이후 술을 같이 마신 적도 몇 차례인가 있었다. 시헌은 술에 취해 아쉬워하는 관장님을 생각하며 혼자 킥킥댔다.
“아주 가끔 그 얘기 하시긴 하더라. 서운하긴 했나 봐.”
“나 같아도 그러겠다. 너 태권도 잘했잖아.”
잘했다는 기준이 모호하긴 하지만. 시헌이 싸움을 하면 누군가에게 지는 모습을 서진은 본 적이 없었다. 중학교 때야 성장이 덜 된 아이들 사이에서 평균은 했던 키였지만, 고등학교에 가서는 사정이 달랐음은 분명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작은 키는 결코 시헌에게 걸림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언제까지 할 건데?”
지금이야 상관없다고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 다니기 시작하면 뭔가를 할 시간이 없음은 안 봐도 뻔했다. 시헌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몰라.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보려고.”
“그러냐.”
“게다가 의사가 체력이 없으면 안 되잖아. 누구처럼 말야.”
아직 갈 길이 먼 아래를 본 시헌은 서진을 보며 웃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시헌을 실컷 비웃었던 서진의 자존심에 다시 한번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서진은 저를 비웃는 시헌을 노려봤다.
“야, 박시헌. 니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했냐?”
“넌 너무 운동 부족이야.”
“말 씹지 말라고! 니가 이상한 거야!”
대한민국 남자 평균 체격, 평범한 대학생. 제 어디가 비정상이란 말인가. 서진은 끝까지 이상한 건 시헌이라며 우겼다. 산 정상에서 사진을 찍자며 떼를 쓰는 시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오기였다. 시헌은 졌다며 손을 들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천천히 내려가자. 아직 시간 많아.”
누가 이기든 지든 그런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애당초 대화에 승패가 있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