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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8 다시 현실 (30/83)

Chapter. 28 다시 현실

차창에 몸을 기댄 기욱은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아직 꺼지지 않은 가로등 위로 연기가 올라갔다. 서윤이 오고 난 뒤 여행은 별 탈 없이 마쳤다. 그냥 그런 평범한 여행이었다. 그 아파트를 찾아갔던 이후 기욱은 서류를 방안에 묻어 둘 뿐이었다. 지난 일이기도 했고, 전문의 준비며 교수 적응 문제로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대충 담배를 끈 뒤, 차 안으로 들어가자 조수석에 쪼그리고 있는 서진이 있었다. 기욱은 조수석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주워 내밀었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몸에 닿자 깜짝 놀란 서진이 몸을 뒤로 움직였다. 좁은 차 안에는 갈 곳이 없기에 서진의 몸은 금방이라도 차 문에 바싹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담요.”

“…해요.”

“…….”

“그만, 그만해요. 제발…….”

담요를 받지 않은 서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마침 지나가는 아침 버스 소리에 그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리진 않았으나 떨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지만, 서진에게 있어서는 어느 때보다 긴 몇 시간이었다.

기욱은 마음대로 하라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서진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차로 몇 분 걸리지 않았다. 골목으로 들어선 기욱은 잠시 차를 갓길에 세워 둔 뒤 나갔다 들어왔다. 차로 돌아온 기욱은 대충 장을 본 봉투를 뒷좌석에 던진 후 전화를 걸었다.

어느새 담요로 머리까지 뒤집어쓴 서진은 담요 넘어 수화음 소리에 귀를 세웠다. 기욱이 일부러 소리를 크게 튼 탓도 있었다.

― 오빠? 오빠 지금 어디야?

― 한 시간 내로 병원 갈 거야. 퇴근했어?

― 아, 아니. 아직……. 이제 막. 오빠, 그게 아니라 내가…….

― 병원 가서 얘기하자. 알겠지?

누그러든 기욱의 목소리가 서윤을 달랬다. 전화를 끊은 기욱은 담요 넘어 서진을 응시하더니 다시 운전했다. 담요 안에서 목이 나간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예요?”

“어.”

“제대로 사과해요. 시,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요.”

기욱의 대답이 없자 서진은 담요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서진이 얼굴을 내밀기를 기다렸다는 듯 기욱은 허탈하게 말했다.

“알았어.”

차에서 내린 서진은 집 문 앞에 섰다. 등 뒤로 기욱의 인기척이 느껴진 서진은 한숨을 쉬며 주머니에 있는 열쇠로 문을 열었다. 거실부터 엉망이 된 집이 눈에 들어왔다. 오전 5시, 몸은 아팠지만, 강의가 있는지라 학교는 가야 했다. 그래도 다행이라는 건 한 시간 정도는 자고 나갈 수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서진은 바닥에 엉망인 옷가지들이며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몸을 숙일 때마다 허리가 아팠고 낮은 천장의 조명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기욱은 휘청거리는 서진의 허리와 몸을 붙잡았다.

“삼십 분 정도 자.”

“…놔요. 놔 줘요! 그만, 그만! 제발 그만…… 더, 더 이상은 못 해요….”

“강서진! 진정해.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기욱은 반쯤 바닥에 주저앉은 서진의 팔을 붙잡아 들었다. 서진의 눈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기욱은 서진을 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방을 나오려 하자 멋대로 방문을 닫았다. 몇 번인가 안쪽에서 문을 두드리던 서진은 바닥에 엉망으로 깔린 이불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서진의 방이 조용한 것을 확인한 기욱은 엉망인 서진의 집을 보며 혀를 찼다. 집이 좁아 치우는 데 오래 시간이 걸릴 것 같지는 않았다. 집 치우기가 어느 정도 끝나 갈 무렵 문틈 사이로 잠이 깬 서진이 얼굴을 내밀었다. 쓰러지듯 잠이 든 건 사실이지만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과 거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제대로 된 잠을 잘 수 없었다.

거실 쪽에서 나는 밥 냄새에 서진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아직도 감이 오지 않았다. 기욱이 방문을 활짝 열자 놀란 서진이 몸을 뒤로 내뺐다. 서진의 팔이 바닥에 있는 자명종 시계를 건드렸다. 6시, 슬슬 준비하고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강의 몇 시야?”

“9시요.”

“아직 여유 있어.”

기욱은 흘러내리는 셔츠의 소매를 걷었다. 거실로 나온 서진은 깨끗해진 거실과 서윤의 방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잠을 안 잔 건 기욱도 마찬가지일 텐데 어째서인지 기욱은 멀쩡해 보였다. 작은 테이블에 놓인 반찬을 본 서진은 마음대로 하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응. 그래. 화장실 물소리 사이로 통화하는 것 같은 기욱의 말소리가 들렸다. 서윤이라는 것을 짐작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서진은 기욱을 본 척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샤워하고 나온 사이 치워진 방을 본 서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밥 먹고 가.”

“지금 출발 안 하면 늦어요.”

“차 태워 줄 거야.”

기욱과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알아서 하라며 기욱의 앞에 앉았다. 급하게 한 반찬인 데다가 원래 있던 반찬을 데운 것이었지만 그런대로 나쁘진 않았다. 오랜 자취 탓인지 기욱의 요리 솜씨는 어지간한 여자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밤새 난리를 친 탓에 배가 고팠던 서진은 순식간에 밥그릇의 절반을 비웠다.

“별로예요.”

“그래?”

서진의 말에 기욱은 서진이 먹던 된장국을 먹었다.

“좀 짜네. 다음엔 잘해 줄게.”

“몰라요.”

서진은 모르는 척한 뒤 얼마 남지 않은 밥과 반찬을 먹었다. 짜긴. 사실은 기욱이 만든 국은 맛이 있었다. 애당초 이런 따듯한 밥을 먹어 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3교대를 하는 서윤의 직업 탓에 서진과 시간이 맞지 않은 날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학교에서 날밤을 새우는 일도 잦았고. 서진이라고 서윤과 같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삶이,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이었다. 그런 서진의 마음을 파고드는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기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서진은 급하게 학교에 갈 생각에 신발을 신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기욱은 나가려는 서진을 보더니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기욱의 살이 닿은 서진이 흠칫 놀랐다. 이젠 기욱이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왜, 왜요?”

“목.”

기욱의 말에 서진은 목 아래로 손을 올렸다. 언제 난 것인지 모를 상처가 나 있었다. 기욱은 찬장 안에 있는 구급상자에 있던 밴드를 꺼내 서진의 목에 붙여 주었다. 저기에 구급상자가 있는 것은 또 어떻게 안 걸까. 기욱은 밴드를 붙여 주며 서진의 목과 이마에 손을 댔다. 편도가 좀 부어 있었다. 그렇게 소리를 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열 좀 있네.”

기욱이 약을 내밀었다. 이게 뭘 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기욱과 실랑이를 하느라 강의에 늦는 것은 더 사양이었다. 약을 받아먹은 서진은 빨리 가자며 기욱을 재촉했다. 조수석에 탄 서진은 그제야 휴대폰을 열어봤다. 밤과 아침 사이 여자 친구―인하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서진아, 무슨 일이야? 괜찮아?」 오전 7:23

「집에는 들어갔어? 강의 들어오는 거지?」 오전 7:24

이전에 온 부재중이며 문자 메시지도 여러 통 있었다. 가장 최신 메시지만을 확인한 서진은 기욱의 눈치를 보며 답장을 보냈다.

「학교 가는 중이야. 별일 없었어.」 오전 7:34

「도착하면 얼굴 볼까?」 오전 7:35

「나 바로 강의 들어가야 돼서. 점심에 보자.」 오전 7:35

문자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사거리로 나온 기욱은 서진의 문자 화면을 힐끗 바라봤다. 문자를 하느라 기욱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기욱은 답장을 보내려는 서진의 휴대폰 위로 손을 올렸다. 아차 싶은 서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헤어져.”

“당신이 뭔데…!”

기욱의 몸이 서진 쪽으로 기울었다. 아침 출근길, 파란불이 된 횡단보도 앞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파란불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박이고 있었다. 운전대에서 손을 놓은 기욱은 서진의 목에 있는 밴드 위를 쓰다듬으며 입술을 가져다 댔다. 도로 한복판 사거리에서 뭘 하는 건가 싶었다. 서진의 불안한 기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기욱은 다른 손으로 서진의 팔을 잡아 들어 올렸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있었던 일들이 서진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이 사람이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서진을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헤어지라고.”

“아, 알았으니까. 앞에 봐요!”

참다못한 서진이 소리를 질렀다. 탁, 하고 파란불이 빨간불로 바뀜과 동시에 기욱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운전대를 잡았다. 서진은 빠르게 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운전대를 쥔 기욱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시선은 차 너머를 보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한 번만 더 걸렸다가는.”

“…….”

“그땐 정말 가만히 안 있어.”

서진은 대답을 하지 못한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손에 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지만, 서진은 휴대폰을 열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기욱의 차는 정문을 넘어 안까지 들어왔다. 중간쯤에서 차를 멈춘 것을 확인한 서진이 차 문을 열었다.

“조심해서 가.”

기욱의 말에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 문을 닫았다. 강의동으로 고개를 돌리자 건너편에 시헌이 있었다. 시헌도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것 같았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강의실이 있는 계단을 올라갔다. 기욱의 차를 본 건 아닐까? 시헌은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거지? 강의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서진은 시헌의 눈치를 봤다.

“저기 시헌아…….”

“형이랑은 오는 길에 만났어?”

“어, 응. 그게…. 태워다 주신다 그랬거든.”

“그래.”

강의실에 도착한 둘은 남은 좌석에 대충 앉았고, 얼마 가지 않아 교수님이 들어오는 탓에 더 이상의 대화를 할 수는 없었다.

* * *

“헤어지자.”

“서, 서진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갑자기 왜!”

“그런 게 있어.”

“서진아. 대체 무슨 일인데? 어?”

인하가 서진의 팔을 붙잡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점심에 보자는 문자 이후로 연락이 없었던 서진에 인하는 강의가 끝나기 무섭게 서진이 있는 의과대학으로 찾아왔다. 괜찮냐는 인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진은 아무런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헤어지자는 말을 반복했다.

그 모습이, 헤어지자고 말하는 서진이 더 상처를 받는 것 같았다. 인하는 이 상황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지? 어? 그 남자 때문에 그래? 대체 그 사람 뭔데!!”

“인하야! 제발, 제발 부탁이야….”

“서진아 너 지금…… 너, 무슨 말 하는지…….”

인하는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서진의 목소리가, 저를 보는 시선이 떨고 있었다. 공포를 느끼고 있는 사람처럼 뭔가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지난밤 일을 알 수 없는 인하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서진은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싫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미안해.”

“왜, 왜 네가 미안해해. 어? 난 이런 거 인정할 수 없어!”

다음 강의가 있는 인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인하가 떠난 복도를 가만히 서 있던 서진은 숨을 들이쉬었다.

“박시헌,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야.”

“미안, 일부러 보려던 건 아니었어.”

사실은 서진과 인하는 싸움은 제법 목소리가 큰 탓에 지나가는 학생들의 시선을 꽤 받았다. 단지, 이런 일이 자주 있었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뿐이었다. 서진과 시헌은 학생식당으로 내려갔다. 점심시간이 좀 지나 있어 식당은 한가했다. 각자 밥을 시킨 뒤 서진과 시헌은 빈자리에 대충 앉았다.

“너네 잘 사귀었잖아. 왜 헤어져.”

“…그럴 일이 있어.”

서진의 말에 시헌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철제 테이블 밑으로 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 더 물어봐 줄 법도 한데. 시헌은 서진을 배려라도 하는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어렸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배려가, 지금은 오히려 서진을 편하게 만들었다.

시헌이 이 이상 물어 왔다면 서진은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서진은 먹다 만 수저를 놓은 뒤 고개를 들었다.

“있잖아.”

“어?”

“강의 끝나고 뭐 할 거야?”

서진의 질문에 시헌은 잠시 생각했다. 의대 예과 2학년. 할 만한 일이라고는 공부 외에는 딱히 없는 팍팍한 대학이었다.

“중앙도서관이나 갈까 생각 중이야. 엄마가 예과 때는 놀지 말고 공부하라고 난리여서.”

“하,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마마보이 같잖아. 그럼 저녁엔?”

저녁이 정확히 몇 시를 말하는 건지는 알 수는 없지만 시험 기간이 아닌 이상 굳이 도서관에서 날밤을 새워야 할 필요는 없었다. 서진은 물을 마신 뒤 말을 이어 갔다.

“술 마실래?”

“너랑?”

“어.”

“둘이?”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콩트를 하는 것 같은 대답에 질린 서진이 이상하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답하지 않는 시헌의 모습에 서진은 시헌이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술 안 좋아하면 됐고. 괜한 걸 물어봤다.”

서진이 잔반을 정리하고 일어나려 하자 시헌은 그런 서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냐, 좋아.”

싫으면 싫다고 하든지 좋으면 좋다고 하든지 참으로 애매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렴 서진은 술을 마실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 마시자. 술.”

서진과 시헌은 학교 근처 곱창집에 들어갔다. 사람이 많아 웨이팅에 시간이 걸린 두 사람은 가장 안쪽의 자리를 배정받았다.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 틈에서 서진은 소주잔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젠장, 거지 같은 술!”

약간 술에 취한 서진은 술과 함께 근처에 있는 물을 마셨다. 물이 떨어진 것을 본 시헌은 지나가는 알바생을 붙잡아 새 물통을 받았다. 서진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컵에 따르지도 않은 채 물통째로 물을 마셨다. 다 마시지 못한 물이 목 아래를 타고 흘러 내려가 옷을 축축하게 적셨다.

젖은 옷 안을 닦아 내려는 서진의 태도에 시헌의 얼굴이 붉어졌다. 옷 안쪽으로 들어가 버린 물을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서진은 결국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한 듯 다시 잔에 멋대로 술을 따랐다. 이렇게 털털한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시헌의 얼굴이 붉은 것도, 서진이 옷 안에 들어간 물을 신경 쓰지 않는 것도 전부 술에 취해 그런 거라며 적당히 흘려 넘겼다.

술을 마시고 싶다는 서진의 말이 틀리진 않은 모양인지 서진은 시헌을 앞에 두고 계속해서 혼자 술을 마셨다. 보다 못한 시헌이 잔을 따라 적당히 페이스를 맞췄다. 서진은 아까 못 한 말을 저 혼자 중얼거렸다.

“어째 대학 와서 맨날 술만 먹는 것 같냐.”

“그건 그래.”

“그치? 공부. 술. 공부. 시험. 술. 젠장. 야, 한잔해.”

서진은 시헌의 잔에 술을 따랐다. 적당히 달라는 시헌의 말이 통하지 않는 듯 서진이 따라 준 잔은 금방이라도 넘칠 것처럼 아슬아슬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시헌은 잔에 입을 가져다 대 술을 조금 마셨다. 말은 저렇게 해도 서진이 먼저 술이 땡긴다고 한 적은 처음이었다. 무엇이 서진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시헌은 그 이유가 인하와 헤어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거라면 확실히 말이 됐다.

“왜 헤어지자고 한 거야?”

왜 저 말을 안 하나 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시헌의 물음에 서진은 눅눅해진 머리를 긁적이며 잔을 부딪쳤다.

“그냥, 그런 게 있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목은 왜 그래?”

“모기 물렸어.”

“여름 다 지났는데?”

“가을에 모기가 없으면 얼마나 좋겠냐.”

서진의 반박에 시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밤새 모기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한 건 시헌도 마찬가지였다. 서진은 밴드가 있는 목을 긁적였다. 목 안에 무슨 상처가 나 있는지는 서진도 기억하지 못했다. 사실은 그냥 긁힌 상처지만. 상처를 확인하기도 전에 기욱이 밴드를 붙여 줬으니 서진이 알 리는 없다.

“내 말이 그거야.”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다고 해 두자. 고개를 끄덕인 시헌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음식이 가득한 테이블 위 접시 사이로 떨어진 것은 자동차 키였다.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셨다 해도 눈앞에 있는 물건이 차 키라는 걸 모를 정도로 마시진 않았다. 서진은 눈을 깜박이며 시헌의 자동차 키를 바라봤다.

“니 거야?”

“내 거 아니었으면 왜 가지고 왔겠어.”

“하, 면허는 또 언제 땄는데?”

시헌이 차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도 없다. 하물며 면허는 말할 것도 없다. 그 이유가 그동안 차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서진은 알 리가 없었다. 면허라는 말에 시헌은 술잔을 비우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수능 끝나고, 할 일 없어서. 금방 따던데.”

시헌은 차 키를 만지작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는 서진을 눈으로 따라갔다. 서진은 시헌이 면허를 땄다는 사실이 사뭇 충격인 모양이었다. 원래부터 뭐 하고 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면허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었던 거 아닌가. 어쩌면 서진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지도 몰랐다.

“넌 들었어. 다섯 번 떨어졌다고.”

“씨발, 어떤 새끼야!”

“큭큭, 하하하하하!”

정곡을 찌르는 시헌의 말에 욱한 서진이 주먹을 쥐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서진의 외침에 일순 주변 사람들이 둘을 쳐다봤다. 사람들의 시선을 눈치챈 서진은 목소리를 낮추며 다 마신 술병을 내리고 새 술을 뜯었다.

“몰라, 운전하는데 마지막에 잘 안 돼.”

서윤은 마음을 편히 가지고 하면 된다고 했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서윤도 10번 만에 간신히 면허를 따고 그렇게 딴 면허조차 장롱이라는 사실을 서진도 모르지 않았다. 이쯤 되면 집안 유전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또 볼 거야?”

“됐어. 등록금도 간신히 내는데. 면허 따도 차도 없고.”

서진은 시헌의 집안 환경을 부러워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자동차 키를 보는 순간, 아무렇지 않게 면허를 땄다는 시헌의 태도에 일순 시헌이 부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면허를 땀과 동시에 아무렇지 않게 차를 고르자고 말하는 부모를, 시헌을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친구이기 이전에 남자이고, 남자이기 이전에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서진은 그런 상대적 박탈감을 짜증 대신 술로 달랬다. 시헌이라고 좋아서 저렇게 태어난 것도 아닐 테고, 부모를 선택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었다. 그것 또한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과 함께 신이 선물한 또 다른 평등이 아닐까 하며.

웃음을 그친 시헌은 차 키를 손가락에 끼워 흔들었다.

“나중에 같이 드라이브하자. 아직 아무도 안 태웠어.”

“데이트 신청은 여자한테나 가서 해.”

서진은 관심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시헌의 말을 단순히 술에 취한 농담으로 흘려들은 서진은 서운하다며 입술을 내밀었다.

“나 여자한테 관심 없는데.”

과회식을 하는지 때마침 들려오는 뒤 테이블의 건배 목소리에 시헌의 말소리가 묻혔다. 거기에는 시헌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댄 것도 한몫했다. 서진은 뒤쪽 테이블을 힐끗 보더니 잔에 있는 술을 비웠다. 몇 병째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별 상관은 없었다. 시헌의 중얼거림을 어렴풋이나마 들은 서진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드라이브를 가자는 말이야 술기운에 한 농담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시헌의 말은 조금 달랐다. 농담인 듯 농담 아닌 어조. 중학교, 더 나아가 초등학교 때부터 알아 왔던 관계. 시헌이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서진 또한 본능적으로 눈치를 채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뭐라 대답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며 곤란해하는 서진의 모습에 시헌은 잔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웃었다.

“농담이야. 그래도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긴 해.”

대학 이전엔 딱히 성 정체성에 대해 의심을 갖진 않았다. 정확히는 가질 필요가 없다는 편이 맞았다. 남자며, 여자를 가리지 않는 기욱의 모습. 기욱과 오피스텔에 있을 때부터 봐 왔던 여자들의 알몸이며 온갖 정사의 장면들은 시헌을 참으로 씁쓸하게 만들었다. 시헌은 거의 다 먹은 불판에 눌어붙은 채소들을 젓가락으로 긁었다.

“사람이란 말야, 가끔 정말 잘 만들어진 밀랍인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

“보통 의사가 할 소리냐 그거.”

“아직 아니잖아.”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마셔.”

서진이 술을 내밀었다. 서로 잔을 부딪치며 술을 목에 넘겼다. 먼저 술을 넘긴 서진은 잔 사이로 술을 마시는 시헌을 바라봤다. 머릿속 한구석으로 중학교 시절 아무렇지 않게 제 손으로 창문을 부수고 피투성이가 된 팔을 내려다보던 시헌이 떠올랐다. 그뿐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같이 아슬아슬하게 창가에 걸쳐 있는 모습이라든지, 성인 남성들에게 맞고도 괜찮다며 아무렇지 않게 구는 모습 등 떠오르는 기억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때는 시헌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는데. 어쩌면 시헌은 스스로의 몸조차 잘 만들어진 인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었다. 슬슬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시헌이 중얼거렸다.

“데이트.”

“뭐 어쨌다고?”

단순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집에 가야 하는데 물고 늘어지는 시헌에 서진은 짜증이 났다. 시헌은 손에 있는 차 키를 보여 주며 대답했다.

“받아 줄 거야?”

술에 취해서 그런 걸까, 서로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그랬다면 서진은 시헌과 술을 마시자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시헌과 술을 마시고 싶었을 뿐이었다.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농담조로 말하며 아무도 태우지 않았다는 차를 두고 드라이브 아닌 데이트를 신청하는 시헌이 서진은 싫지 않았다. 싫기보다는 좋았다. 서진은 시헌이 내미는 손을 붙잡아 시헌을 일으켰다.

“어디든.”

시헌을 일으킴과 동시에 술기운이 올라오는 서진이 휘청거렸다. 손을 내민 건 서진이었건만, 왜인지 서진이 시헌에게 안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시헌은 계산을 하러 가는 서진의 옆에 몸을 바싹 붙였다.

“2차 갈래?”

“뭐? 당연한 소릴 해야지! 취했냐, 너? 이 정도로 끄떡없어!”

“물론, 안 취했지. 2차는 내가 살게.”

“마음대로 해라.”

곱창집을 나온 둘은 가게를 물색하기 위해 번화가를 돌아다녔다.

* * *

“강서진!”

강의실에 먼저 도착한 시헌은 뒷문으로 들어오는 서진을 발견하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서진은 텅 빈 강의실 내에 혼자 앉아 있는 시헌을 보더니 시헌의 옆에 의자를 꺼내 앉았다. 아직 강의 시작까지는 한 시간도 더 남았다. 조교에게 열쇠를 받으러 가기 전에 문이 열려 있어 이상해서 들어와 봤건만 시헌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일찍 왔어?”

“그러는 너도 마찬가지잖아.”

시헌은 좁은 책상에 쌓이듯 놓여 있는 책을 팔 끝으로 숨겼다. 서진은 어깨에 멘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쿵, 하고 내려앉는 가방 소리에 그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고3 때보다 더 무거운 게 하루하루가 수능 가방 같았다.

서진은 시헌의 상태를 이리저리 살폈다. 서진의 기억이 바르면 2차를 가고 새벽 3시가 좀 넘었을 무렵 각자 집에 들어갔다. 이사 간 아파트는 서진의 집과 정반대였지만, 집에 들어가는 데까지 걸리는 거리는 얼추 비슷했다. 서진은 무거운 가방을 베개 삼아 엎드린 뒤 고개를 돌렸다.

“씨발, 박시헌 너 안 잤지?”

“너도 안 잤잖아. 와서 한 시간 잤어.”

“술 처먹이고 혼자 공부하니까 좋냐? 에라이, 독한 새끼야.”

“먼저 마시자고 한 건 너잖아. 너도 안 잤으면서 계속 그럴래? 안 잘 거야?”

“잘 거야!”

“큭큭, 강의 시작하면 깨워 줄게.”

고개를 끄덕인 서진은 가방에 얼굴을 묻었다. 잠바도 벗지 않고 잠이 드는 서진의 모습을 본 시헌은 가볍게 웃었다. 서진이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시헌은 창문을 열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은근하게 나는 담배 향에 책상에 얼굴을 묻은 서진이 중얼거렸다.

“강의실에서 담배 피우지 마라.”

“얼른 처자.”

* * *

서진은 사람이 가득한 술집 내부를 둘러봤다. 멀리 서진을 발견한 동기 한 명이 손을 흔들었다. 서진은 적당히 빈자리에 앉았다. 도착하기 전 이미 술을 마시고 있으면 어쩌나 했던 걱정과 달리 서진처럼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서진은 자리를 꽉꽉 채워 앉은 일행들을 둘러봤다.

“시헌이는?”

당연하게 먼저 와 있을 줄 알았던 시헌이 없었다. 서진의 질문을 들은 옆에 있던 동기 한 명이 서진에게 잔을 넘기며 대답했다.

“시헌 형 조금 늦는대요. 먼저 마시고 있으라는데요?”

“아, 그래?”

서진은 첫 잔을 부딪쳤다. 다들 신이 나 마시는 것과 달리 잠시 잔을 내려놓은 서진은 테이블 밑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시헌에게 문자를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연속으로 달릴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건너편 동기에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넣었다. 서진은 시헌이 안 온다고 했던 것도 아니니 어련히 알아서 오지 않을까 싶으며 술을 마셨다.

“…다며.”

“어? 뭐라고?”

“씨발, 온다며 박시헌.”

“근처래. 혼자 달리지 마라. 좀.”

술이 좀 들어간 서진의 중얼거림을 들은 옆 동기가 서진의 근처에 있는 사람들을 대충 모아 잔을 부딪쳤다. 시헌이 술자리에서 늦는 건 늘 있는 일이라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동기들 사이에서 시헌은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늘 바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래도 부르면 마지막쯤에는 꼭 와서 얼굴을 내비치고 가니 불만은 없었다.

마지막이라 하면 이미 앞서 사라진 사람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할 때였다. 서진과 단둘이서 잔을 부딪친 동기는 오늘따라 유독 시헌을 찾아대는 서진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너희 둘이 친하지도 않으면서. 오늘따라 왜 이렇게 찾아대?”

“뭐? 야! 친하거든? 죽을래?”

“……아. 그랬냐?”

“친해. 친하다고.”

“그, 그래? 뭔가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한 것치고는 너무 어색해 보여서 안 친했던 줄 알았지.”

민감하게 반응하는 서진의 태도에 동기가 말을 정정했다. 둘이 술을 마실 정도의 사이면 친한 거 아닌가? 점심을 같이 먹은 적도 많고. 집도 근처고. 그런데 중학교 때도 같이 점심을 먹었고, 집도 근처였고, 술은 못 마셔도 둘이 저녁을 먹으러 나간 적은 많았다.

빌어먹을. 결국, 친하다는 게 중학교 때 이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서진은 술을 마시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문자를 보내 볼까? 근데 다들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은데 저 혼자 괜히 문자를 하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때아닌 내적 갈등을 하고 있던 서진은 용기를 내 휴대폰을 열었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손안에서 진동이 왔다. 마음 한구석으로 설마, 시헌은 아닐 거야. 생각하고 있던 서진은 문자 화면을 보는 순간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시헌의 문자니 뭐니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강서진, 너 안 먹냐? 얼굴이 왜 그래?”

“미안하다. 나 갑자기 일이 생긴 것 같아.”

“뭐? 야! 무슨 일인데?”

“급한 거야. 술값 얼마 나왔는지 말하면 나중에 낼게. 미안!”

갑작스러운 서진의 행동에 다들 당황스러워했다. 동기에게 일일이 설명을 할 시간이며 여유가 없는 서진은 일이 있다는 말을 반복한 뒤 서둘러 가게를 나왔다. 술집이 가득한 번화가를 빠져나와 차가 있는 도로로 나간 서진은 역 근처에 있는 차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멀리 차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기욱이 있었다.

어딜 다녀온 건지 정장을 차려입은 기욱의 모습은 지나가는 여자들의 시선을 붙잡기에는 더없이 충분했다. 마치 그 자체로 모델이나 연예인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기욱이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이 질투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서윤을 생각할 때 기분이 좋지 않을 뿐이었다. 서진은 기욱의 앞으로 다가갔다. 서진을 발견한 기욱은 다 핀 담배를 바로 옆 담배용 쓰레기통에 버렸다. 서진은 아직 기욱의 새 차가 익숙하지 않았다.

“안 타요?”

차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서진은 약간 열린 조수석 문틈 사이로 기욱에게 말을 걸었다. 기욱은 담뱃불을 붙이며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이럴 거면 왜 불렀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형!”

문틈 사이, 사람들의 웅성거림 틈에서 들려오는 시헌의 목소리에 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동시에 기욱은 재빠르게 조수석 차 문을 닫았다.

* * *

“서진이는?”

가게 안으로 들어온 시헌은 한참 술을 마시고 있는 동기들 무리에서 서진을 찾았다. 서진에게 연락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동기를 통해 먼저 와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말은 들었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자리에 앉지 못한 시헌은 괜히 화장실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속 서 있는 것도 눈치가 보였던 시헌은 방금까지 서진이 앉아 있었던 빈자리에 앉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서진의 옆에 있던 동기가 시헌에게 술을 권하며 시헌의 중얼거림에 대답했다.

“일 있다면서 갔다는데?”

“무슨 일?”

“그거야 나도 모르지. 너 오기 바로 전에 나갔는데 못 만났나 보네.”

건너편에 있던 여자 동기도 시헌이 오기 바로 직전에 나갔다며 증언을 했다. 그 대답을 듣기 무섭게 시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밖을 뛰쳐나왔다. 사람들 틈에 당연히 서진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금 더 나오자 큰 차도가 있는 역이 보였다.

역 바로 옆에 차를 대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기욱이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건 줄 알았던 시헌은 눈을 깜박였다. 아무리 봐도 기욱이었다. 시헌이 술을 마시는 번화가에서 기욱의 병원이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이었다. 설령 시헌이 기욱을 발견한 것이 우연이라 할지라도 기욱이 이곳에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시헌은 마침 담배를 물려는 기욱에게 다가갔다.

“형!”

“…박시헌. 너 여기서 뭐 해?”

시헌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한 기욱은 담배를 입에서 뗐다. 기욱의 손이 앞 좌석 조수석 문을 급하게 닫았다. 시헌은 어깨 너머 엄지로 건너편 골목을 가리켰다.

“나야 술이지. 동기 애들이랑 술 약속 있거든. 형은?”

시헌의 시선이 기욱이 반쯤 가린 창문 안쪽으로 계속해서 닿았다. 기욱이 몸을 가린 탓에 조수석에 타고 있는 것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늦은 저녁인 탓도 있었고. 어쨌든 누군가 타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냥, 볼일이 있어서.”

“그래? 안에 누구 있어?”

“친구. 갈 거야.”

시헌의 질문에도 눈 하나 끔벅하지 않은 기욱은 담배를 끈 뒤 유리창에 기대 팔짱을 꼈다. 기욱이 운전석으로 가면 뭔가 보일 것 같은데 잘 보이지 않았다. 기욱이 누군가를 일부러 숨길 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아는 시헌은 기욱의 행동이 일부러 그러는 건지, 제가 예민하게 구는 건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시헌은 차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는 것을 반쯤 포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민한 건 기욱이 아니라 자신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욱이라면 이런 일에 당당하면 당당했지 숨길 사람은 아니겠거니 하며 시헌은 못 찾은 서진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기욱과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낸 탓에 서진을 찾는 건 무리에 가까웠다. 시헌이 누군가를 열심히 찾는 모습을 처음 본 기욱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관심을 가졌다.

“누구 찾아?”

“그냥, 친구. 말도 없이 가 버려서 혹시나 하고 나왔어.”

“같은 과야?”

“응.”

“내일 학교에서 볼 수도 있잖아. 뭘 그렇게 안달 나 하고 그래.”

틀리지 않은 말이지만. 그것과 이건 미묘하게 달랐다. 시헌은 그 사실을 기욱이 알 리가 없다며 인상을 구겼다. 기욱은 주머니를 뒤져 지갑 안에서 카드를 꺼내 시헌에게 내밀었다. 중, 고등학생도 아니고 시헌도 자기 카드 하나쯤은 있다. 시헌은 카드를 내미는 기욱의 행동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며 손을 저었다.

“필요 없어.”

“술 마실 거잖아. 신경 쓰지 마.”

시헌의 거듭된 거절에도 불구하고 기욱은 시헌에게 억지로 카드를 넘겼다. 그 와중에도 차창이 몸에 붙어 있는 탓에 유리창 넘어 조수석에 앉아 있는 사람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불편했다.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렇게까지 생각을 하는 건지. 설령 그렇다 해도 기욱의 일이다. 시헌은 기욱이 태운 사람이 자신과 관련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시헌은 반강제적으로 기욱의 카드를 손에 쥔 뒤 동기들이 있는 술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 박시헌 너 어디 갔던 거야? 야, 강서진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오늘 왜 그러냐?”

시헌을 걱정한 동기와 다른 사람들의 말에 시헌은 테이블 위로 기욱의 신용카드를 탁, 하고 올렸다. 얼마나 세게 올렸는지 근처에 있던 병들이며 접시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시헌은 마침 지나가는 알바생을 붙잡은 뒤 테이블 위에 있는 술들을 눈대중으로 살폈다. 한눈에 봐도 비어 있는 병들이 훨씬 많았다.

“저기요. 여기 소주 5병이랑. 맥주 3병 더 주시고요. 니네 먹고 싶은 거 있냐?”

“자, 잠깐만요. 야야, 우리 돈 모아서 먹는 거잖아. 돈 없는 거 몰라?”

시헌은 테이블에 두었던 기욱의 카드를 살짝 들어 보였다.

“형 거야.”

“형? 너 형 만났어? 그보다 형도 있었냐?”

“어. 부를 애들 있으면 다 불러. 아까 민혁이랑 태진이 근처라고 그랬지? 씨발, 오라 그래.”

“그럼 나 여친 불러도 되냐? 여친이 동기 애들이랑 술 먹는다고 하는데 못 믿어서 눈치 보이더라.”

“아무나 불러. 몰라, 알아서 해.”

시헌은 카드를 주머니에 넣은 뒤 근처에 있는 술을 따라 마셨다. 기욱이 카드를 준 건 한두 번 있었던 일은 아니다. 중, 고등학교 때도 몇 번인가 있었던 일이었다.

그때야 시헌의 카드가 없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는 일이나 시헌은 카드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서진은 어디 간 걸까. 이럴 생각으로 술자리에 온 건 아닌데. 여러모로 기분이 좆같았다.

* * *

서진을 태운 기욱의 차는 부드럽게 도로를 달렸다. 퇴근 시간을 넘긴 저녁이라 도로가 한가한 탓도 있었다. 기욱의 새 차에 서진은 중학교 시절 기욱의 차에 처음 탄 것 같은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반면 기욱은 새로 뽑은 차가 제법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서진은 기존에 있던 차도 꽤 비싼 외제 차였던 거로 기억했다. 지금 타고 다녀도 문제가 없는 차지만, 차를 가진 사람 마음은 또 다른 모양이었다. 아무렴 차도 없고, 심지어 면허도 5번이나 떨어져 웃음거리가 된 서진이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술이 조금 깬 서진은 조수석 유리창에 얼굴을 기댔다.

“왜 불렀어요?”

“그냥. 보고 싶어서.”

운전대를 잡으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하는 기욱의 모습에 서진은 기가 막힌다며 혀를 찼다. 연인 사이도 아닌데 보고 싶기는 무슨. 서진은 기욱의 때아닌 말투가 병원에서 있었던 일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걸 짐작했다.

“누가 죽었어요?”

차 안에 맴도는 서진의 말에 기욱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서진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운전대를 잡는 기욱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기욱은 근처 골목에 적당히 차를 댔다. 차가 멈추기 무섭게 기욱은 벨트를 푼 뒤 조수석에 있는 서진의 위로 올라왔다.

차의 앞 유리를 전부 가리는 기욱의 모습에 서진은 눈을 낮게 깔았다.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기욱의 손이 아직 떼지 않은 서진의 목 근처 밴드를 만지작거렸다.

“강서진, 괜한 말 하지 마.”

“운전이나 똑바로 해요. 사이좋게 사고 나서 죽고 싶지 않으면.”

서진은 목에 닿은 기욱의 손을 쳐냈다. 지금 비록 갓길에 차를 멈춘 상황이라 별다른 감흥은 없었지만, 기욱이라면 달리는 차 안에서도 일어날 사람이라는 걸 여러 번의 경험 끝에 잘 알고 있었다. 기욱은 서진에게 쳐 내진 손을 만지작거리며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손가락 끝으로 핸들을 툭툭 건드렸다. 각도가 틀어진 룸미러 끄트머리로 보이는 기욱의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

“괜찮아. 난 안 죽어.”

기욱의 웃음을 확인하기 무섭게 들리는 말에 서진은 기가 막혔다. 이 사람은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하며. 설령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서진은 그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자신까지 포함시키지 않았으면 싶었다. 서진은 기욱의 뒷좌석에 있는 커다란 담요를 무릎 위로 덮었다. 차가 바뀐 탓인지 담요까지 새 담요로 바뀌어 있었다. 차가 느지막이 좁은 골목을 빠져나갔다.

“난 죽어요.”

“내가 살려 줄게.”

“무슨 수로요?”

“진짜 의사잖아. 누구랑 다르게 말야.”

마침 걸린 파란불에 차를 세운 기욱은 서진을 응시했다. 한적한 도로, 아무도 다니지 않는 넓은 1차선 도로의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 기욱의 차.

파란불이 깜박일 무렵 차를 보고 뒤늦게 뛰어가는 여학생의 모습에 서진은 눈을 반쯤 감았다. 술에 취해 생기는 어지럼증과 함께 기욱을 향한 말에는 아닌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걱정하지 마시죠. 내가 NS에 가는 일은 죽어도 없을 테니까.”

*NS[neurosurgery] : 신경외과

서진은 신경외과라면 치가 떨렸다. 의대를 졸업한 뒤 모교인 H대에서 인턴, 전공의 과정을 밟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데 하물며 앞으로 5년 후의 일을 서진이 어떻게 알겠는가. 서진은 무슨 과를 하든 기욱이 있는 J대 병원만큼은 피할 생각이었다.

서진이 신경외과를 싫어하게 된 이유의 절반 이상은 기욱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직 고시도 통과하지 않은 서진이 과를 선택하는 건 이른 고민이기도 했다.

“그건 아쉽네. 기대하고 있었는데. 같이 수술하는 걸.”

정작 그러는 기욱도 서진이 아직 과를 선택하려면 멀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저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아쉽다는 말을 하는 기욱의 말은 정말 아쉬운 것 같은 말투였다. 운전대를 잡지 않은 기욱의 다른 손이 담요로 올라온 서진의 손을 잡았다.

기욱은 서진의 손을 이리저리 만졌다. 이게 뭘 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기욱의 손은 따듯했다. 평소에 하는 행동이며 사고관을 생각하면 누구보다 차가워야 할 텐데, 차가운 서진의 손을 덮고도 남을 정도의 열기기에 기욱에게 붙잡힌 서진의 손에선 땀이 날 지경이었다.

기욱이 서진의 손에 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사이 하나로 들어오는 감촉이 서진은 편하지만은 않았다. 여자도 아니고 하물며 같은 남자, 연인도 아닌 관계에는 더더욱 그랬다. 손을 뿌리치려던 서진은 기욱의 중얼거림을 들음과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서윤이도 손이 참 예쁘거든.”

“…….”

“근데 네 손은 더 예뻐. 뭐,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팔을 들어 올린 기욱은 서진의 손가락 마디를 핥았다. 기욱과 달리 안전벨트를 풀지 않은 서진이 물러날 수 있는 곳에는 한계가 있었다. 건너편 유리문 너머로 주차하고도 나오지 않는 차를 주인이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손끝부터 닿는 축축하면서도 야릇한 혀의 감촉에 서진은 입술을 약간 깨물었다.

누군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의식한 탓인지, 술기운인지 자극이 되는 건 서진도 마찬가지였다. 간신히 다른 손으로 안전벨트를 푼 서진은 기욱을 온몸으로 밀어냈다.

“하지 마요!”

“…….”

“모텔 앞에 두고……. 뭐, 뭐하는 짓이냐구요.”

서진은 차창 넘어 정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기욱도 안쪽 남자의 시선을 눈치챈 듯 혀를 차며 차 키를 뽑았다. 기욱은 내리려는 서진을 보며 뒷좌석에 있는 모자를 집어 들었다.

“모자 줄까?”

“됐어요. 어린애도 아니고.”

서진은 담담하게 잠바 지퍼를 올린 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모텔 안으로 들어갔다. 성인인 서진이 모텔에 들어가는 건 불법이 아니었다. 설령 같이 들어가는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 해도, 이런 일에 고개를 숙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경험을 하는 건 고등학교 시절로 충분했다. 3층이라는 직원의 말을 듣기 무섭게 서진은 복도에 비치된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얼마 전에 기욱이 안으로 들어왔다. 모텔 안 엘리베이터는 성인 남성 두 사람도 꽉 낄 정도로 좁았다. 시헌은 뭘 하고 있으려나. 아직도 술을 마시고 있을까. 엘리베이터가 3층까지 올라가 문이 열리는 찰나의 순간에 서진은 역에 있던 시헌을 생각했다.

“……?”

기욱보다 한발 먼저 내린 서진은 눈이 아플 정도의 붉은 조명이 가득한 복도를 둘러봤다. 3층이라는 말만 들었지 정확히 몇 호실인지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욱은 두리번거리고 있는 서진의 팔을 낚아채 철문이 있는 벽으로 몰았다. 307호. 등 뒤에 있는 방 번호와 기욱의 손에 있는 기다란 열쇠의 숫자와 일치했다.

“말로 해요. 윽.”

차 안에서부터 느꼈던 거지만 도대체 뭐가 기욱을 이렇게 초조하게 만든 걸까. 열쇠로 문을 연 기욱은 문고리를 안으로 돌렸다. 덕분에 문에 기대고 있던 서진의 몸은 방 안 뒤로 밀려났다. 기욱은 방문이 열리기 무섭게 서진의 허리를 잡아 안아 입술을 맞췄다. 서진의 손가락의 문제가 아니었다. 모텔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기욱은 서진을 안고 싶었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아무 방이나 들어가고 싶었다. 서진이 번화가에만 없었다면 이런 고생을 할 일도 없었을 텐데. 대학생이니 이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서진의 문자를 본 순간 묘하게 짜증이 일었다. 한두 명이 아닌 것 같던데, 그 자리엔 여자도 있었던 걸까. 남자라고 해도 별로 예외는 아니었다.

신발을 벗지도 못한 서진은 기욱에 의해 뒤로 밀리며 침대까지 끌려왔다. 기욱은 입술 아래로 흐르는 타액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그러나 그즈음엔 이미 기욱에 의해 잠바며 신발이며 셔츠까지 전부 강제로 벗겨진 후였다.

흥분한 기욱은 위험하다. 무섭기도 했고, 이런 날이면 기욱은 다른 의미로 서진을 힘들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욱을 달래야 했고, 서진은 기욱을 달랠 그렇다 할 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씻고 해요.”

“못 기다려.”

“읏, 그럼 천천히…….”

지익, 기욱의 손톱 끝에서 서진의 목에 있던 밴드가 뜯겨 나갔다. 누가 의사 아니랄까 기욱이 뜯은 밴드에는 흔히 밴드를 떼고 남는 끈끈이 같은 흔적도 없었다. 고작 밴드를 떼는 일에 의사니 마니를 따지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기욱은 서진의 목에 울긋하게 올라온 상처를 혀로 핥았다. 얕은 상처라 조금 부은 것뿐 빨갛게 새살이 올라와 있었다. 아마 하루 이틀이면 상처가 있었다는 것조차 보이지 않게 될 것이었다.

“흐읏, 윽… 진짜 잠깐…!”

“강서진. 날 봐.”

― 서진아! 나 다정인데! 너 지금 어디야? 아, 왜 그래. 부를 수도 있는 거지.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말리는 듯 그녀는 한동안 휴대폰을 붙잡고 실랑이를 했다. 소리만 들어도 정신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서진아? 듣고 있지? 시헌이가 오늘 쏜다는데 다른 애들도 다 와 있거든? 너 갑자기 나갔다고 들어서. 일 끝나고 올 수 있어? 뭐? 부르지 말라고? 왜?

도무지 전화를 계속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 학생들 틈으로 들리는 시헌의 목소리, 그리고 시헌이 쏜다고 했던 그녀의 말이 서진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기욱이 내민 신용카드. 시헌은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기욱은 서진의 쇄골 근처를 엄지 끝으로 가볍게 눌렀다. 정확하게는 통화를 못 이긴 기욱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었다. 대답을 강요하는 기욱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서진은 결국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

― 어, 듣고 있어. 미안한데. 나 오늘은 진짜 안 될 것 같다.

― 대답이 없길래 무슨 일 있나 했지. 그래? 알았어. 그래도 늦게라도 올 수 있으면 연락해!

툭, 하고 전화가 끊겼다. 기욱은 전화가 끊기기 무섭게 휴대폰을 침대 밑으로 내던졌다. 제 휴대폰을 함부로 하는 기욱에 놀란 서진이 휴대폰을 따라가자 기욱은 서진의 양팔을 잡아 위로 올렸다. 서진을 보는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기욱을 달래긴커녕 더 흥분하게 만든 꼴이었다.

“여자한테 인기 많네.”

“동기예요. 여친이랑 헤어졌잖아요. 뭐가 불만인데요. 으흣….”

기욱의 손이 서진의 바지 지퍼를 내리며 안쪽을 밀고 들어갔다. 조금의 틈을 주지도 않고 좁은 브리프 사이로 밀어 넣으며 제 페니스를 주물럭거리는 기욱에 깜짝 놀란 서진의 몸이 뒤틀렸다.

“글쎄, 내 경험상 술자리에서 여자가 남자를 부르는 경우는 딱 하나밖에 없거든.”

“헤어졌다고 했… 하읏… 모두가 다, 당신 같은 줄 알아요?”

목 위로 올라오는 숨을 참은 서진은 또박또박 반박했다. 아직 지난날의 악몽이 가시지 않은 서진은 여전히 작정하고 덤벼드는 기욱은 무서웠다. 머리가 괜찮다고 생각해도 몸이 반응하는지 숨이 막혀 오고 몸이 떨렸다. 이윽고 제 윗옷과 바지를 벗은 기욱은 서진의 바지 또한 아래로 벗겨 던졌다. 기욱은 서진의 상처가 있는 목 근처를 만지작거리며 서진을 무릎 위로 올렸다.

“정상은 아니지.”

“그러는 너도.”

“…….”

“정상은 아니지.”

기욱의 그 말을 서진은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기욱의 뜨거운 손이 서진의 브리프를 완전히 벗겨 내렸다. 기욱은 서진의 오므라지는 다리를 옆으로 내벌렸다. 누가 죽었냐니, 기욱은 한 번도 병원에 대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평소 얼굴에 티가 잘 나는 것도 아닌 기욱은 가끔 서진의 말이 무서울 때가 있었다. 차에서처럼 말이다. 기욱은 서진의 안으로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기욱은 서진에게 여자 친구와 헤어졌는지 아닌지를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결과라는 걸 기욱도, 서진도 스스로 너무나 잘 알았다. 초조해하고 있던 처음과 달리 기욱은 쉽게 서진의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기욱이 움직일 때마다 허벅지 안으로 닿는 기욱의 커다란 페니스에 서진은 움찔거렸다. 기욱의 다른 손이 서진의 페니스를 잡고 흔들었다.

목 끝까지 올라올 것 같은 신음을 참다못한 서진은 결국 기욱의 손안에서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축 늘어짐과 동시에 안쪽이 축축하게 젖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머릿속을 지배하는 불쾌한 쾌락에 서진은 다리를 떨며 기욱을 재촉했다.

“하으… 빨리…….”

“천천히 하자며.”

손가락을 늘린 기욱이 서진의 안에서 피스톤질을 했다. 내벽을 긁어 올라가며 움직이는 손가락에 서진은 미칠 것 같았다. 하물며 사정한 후라 더욱 정신이 없었다. 기욱은 억지로 몸을 돌리며 편한 자세를 찾는 서진을 붙잡아서 제 위로 올렸다. 갈 곳 없는 서진의 손이 침대 뒤를 짚었다.

“으읏, 하으… 으… 빨리… 윽!”

빨리 끝내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왜인지 그 뒤로 계속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래선 마치 안달이 난 사람이 기욱이 아니라 서진이었다. 기욱도 서진의 의도를 모르진 않으나, 그 미묘한 끊김으로 인해 재촉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쾌감이 나쁘지 않았다. 기욱이 일부로 서진의 말을 자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때아닌 재미가 들린 기욱은 서진의 안을 넓히며 피스톤질을 함과 동시에 다리를 흔들었다.

기욱의 기다란 손가락이 서진의 느끼는 지점을 아슬아슬하게 닿는 탓인지 서진은 죽을 맛이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서진의 시선이 제 몸을 지탱하고 있는 허벅지 사이 페니스에 닿았다. 브리프 너머의 잔뜩 발기해 있을 기욱의 페니스를 멋대로 상상한 서진은 목 아래로 넘어오는 침을 간신히 삼켰다.

차라리 빨리 넣고 끝내는 편이 기욱에게도 그리고 기욱에 의해 반강제적인 쾌락을 느껴야만 하는 서진에게도 나은 일이었다.

“하아악! 으읏!”

제 목에서 나온 소리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목소리와 함께 서진은 등을 지탱하던 팔에 힘이 풀려 몸과 목이 침대 뒤로 넘어갔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허리를 재빨리 잡아 안았다. 차 안에서 술이 전부 깬 서진의 눈가로 고여 있던 눈물이 떨어졌다.

기욱의 행위에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내줘야 하는 자신을 탓하는 눈물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정말 애가 타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서진은 기욱이 빨리 넣고 끝내 주기만을 원했다. 서진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낸 기욱은 서진을 바로 눕힌 뒤 다리를 옆으로 벌렸다. 서진의 허벅지를 한 손으로 누른 기욱은 침대 옆 작은 원형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를 확인했다.

상자 안에는 가벼운 간식이며, 콘돔과 젤 등이 있었다. 원래라면 내일 학교에 가야 할 서진을 생각해 콘돔을 쓸 의향도 있었지만. 왜인지 차 안에서 기고만장하게 구는 서진이 한편으로는 거슬렸다. 그 이유로 당장 서진이 싫어지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싫어할 생각도 없고. 귀여워하던 고양이가 뺨을 긁는다는 이유만으로 고양이를 버릴 수는 없다. 신경질을 조금 내며 다른 방 안에 집어넣거나 하는 가벼운 벌을 주고 마는 것이 전부였다. 기욱은 침대의 시트와 하나가 돼 있는 서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냥 할 건데.”

“…으읏… 하아, 하… 그냥… 해요….”

콘돔이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기욱의 손은 여전히 서진의 그곳을 꾹꾹 누르며 움직이고 있었고, 시트를 쥔 서진의 손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미 서진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어차피 멋대로 할 거면서. 알아서 하라고 말을 하며 숨을 들이쉰 서진은 머릿속 한구석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제 의견을 존중해 주는 척한 기욱이 한 번도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 준 적이 없다는 걸 서진은 너무나 잘 알았다. 자의든, 타의든, 기욱은 서진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온 걸 꽤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어차피 존중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면 조금 더 귀엽게 굴어도 될 텐데 싶었다.

그편이 좀 더 대우를 받을 거란 생각은 안 하나? 말이 그렇지 서진과 관계를 시작한 지 이제 막 일 년이 좀 넘어갈 뿐이었다. 기욱의 손가락이 서진의 안을 빠져나왔다. 오래 물에 젖어 있던 것처럼 손가락의 감촉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진은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기욱은 서진과 안의 상성이 제법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허공으로 들린 서진의 허벅지살의 떨림이 그대로 눈에 보였다.

서진의 종아리며 허벅지 근처에 입술을 맞춘 기욱은 브리프도 전부 내리지 않은 채 서진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퍽, 하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밀고 들어가는 기욱의 페니스에 서진의 몸이 흔들리며 침대 뒤쪽으로 밀려났다.

“으윽! 하으읏! 하악, 읏… 으윽….”

“서진아. 강서진. 나 봐.”

“어… 윽, 싫어. 싫어.”

뭐가 싫다는 건지, 말을 하는 서진도 그 말을 듣는 기욱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눈을 마주치는 것이 싫은 걸까? 그게 아니라면 이 섹스가 싫은 걸까? 생각하기를 그만둔 기욱은 브리프를 완전히 벗어 침대 아래로 던졌다. 기욱의 브리프는 서진의 마구 던져진 옷 위로 떨어졌다.

기욱의 행동을 방해하는 것들이 전부 사라짐과 동시에 기욱은 서진의 몸을 돌린 뒤 서진의 안을 마구 범했다. 지금은 딱히 얼굴을 봐도 안 봐도 그만이었다. 섹스라면 서진이 아닌 서윤과 해도 상관없다. 기욱이 서진의 안을 정신없이 헤집으며 허리를 흔드는 것처럼 여자와의 관계와 남자와의 관계는 엄연히 달랐다.

여자와 하는 로맨틱한 관계도 싫은 건 아니나, 어느 쪽이 더 꼴리냐고 묻는다면 기욱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남자와의 관계를 선택할 것이었다. 선배를 깔아뭉갰을 때의 그 쾌락, 정복감, 여자와의 관계에서는 맛보기 힘든 그런 감정들이 기욱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래, 죽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제 막 교수가 된 기욱은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였다. 신경외과 1년 차가 됐을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았다.

“하으윽, 윽! 하악! …만, 그만…… 하읏!”

“후우,”

앞머리를 쓸어 넘긴 기욱은 서진의 몸을 바로 눕힌 뒤 다리를 옆으로 벌렸다. 기욱의 페니스가 밖으로 나가기 무섭게 다시 서진의 안을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서진은 윽, 하며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신음을 내 흘렸다. 서진의 안이 기욱이 내뱉은 정액으로 가득 채워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채워지다 못해 밖으로 나가지 못한 정액들이 서진의 안을 물고 놓지 않는 페니스를 타고 침대 아래로 흘러내렸다.

서진의 안에서 경련하듯 몸을 떤 기욱은 도무지 페니스를 밖으로 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사정할 때마다 느껴지는 특유의 차가우면서도 억지로 몸 안으로 뭔가를 구겨 넣는 것 같은 감각이 들었으나 그것도 처음 한두 번뿐이었다. 계속되는 기욱의 사정에 더 들어갈 곳 없는 정액들이 밖으로 질질 흘러내렸다.

이젠 안이 아니라 밖으로 새는 불쾌한 감촉이 서진을 피곤하게 했다. 기욱이 평소와 같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못해야 한두 시간 안으로 끝나는 평소와 달리 오늘의 기욱은 너무나 끈질겼다. 끈질기다 못해 정신을 놓아 버릴 것 같았다.

정신적으로, 몸으로 한계를 몰고 가는 탓인지 서진의 머릿속 한구석에는 그때의 악몽이 떠올랐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기욱의 페니스가 피스톤질을 할 때마다 동시에 서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기욱은 서진의 팔을 제 목에 걸었다.

“아윽! 읏, 하아… 읏… 주, 죽을 것 같…… 그만… 그만….”

“아깐 빨리하라면서 이제 와서 그러지 마.”

“그건 읏… 하… 네가… 으읏! 뭐, 뭐 하는… 하악!”

“강서진. 허리 흔들어.”

“어… 싫. 으읏… 윽….”

“직접 해. 착하지.”

“싫어. 시러… 으읏… 하으….”

기욱은 서진이 목에 맨 손을 풀지 못하게 똑같이 서진의 팔을 누른 뒤 허벅지며 허리를 움직였다. 직선으로 뚫고 들어오는 기욱의 페니스는 정확히 서진이 느끼는 지점을 계속해서 건드렸다. 거기에 기욱의 다른 손이 서진의 귀두 끝을 자극하며 입구를 막았다. 슬슬 한계에 달했던 서진은 허리를 비틀며 온몸을 비틀었다. 기욱은 움직임을 멈추고 서진의 페니스에서 손을 뗐다.

그 탓인지 사정을 하지도 못한 애매한 상태에 놓인 서진은 기욱에게 얼굴을 내 묻으며 가쁜 숨을 쉬었다. 차라리 사정하면 했지. 이도 저도 아닌 서진의 페니스 끝으로는 묽은 쿠퍼액이 흘러내렸다. 서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욱이 일부러 그랬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기욱은 서진의 엉덩이를 가볍게 때렸다. 착, 하고 붙는 손은 강하게 때린 건 아니지만, 그 행위와 소리로 인해 서진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흠칫 놀란 서진이 기욱의 페니스를 조였다. 서진은 도무지 기욱이 뭘 원하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었다. 기욱은 서진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움직였다.

“허리 흔들어.”

“…어. 싫어요.”

정신이 든 모양인지 말투가 존댓말로 바뀌었다. 그 미세한 차이를 눈치챈 기욱은 가소롭다는 듯 서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약간 넘겼다. 머리를 잘라야 할 때가 된 모양인지 서진의 머리카락은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길어 있었다.

“내일 학교 안 가려고?”

“……윽.”

기욱의 아닌 협박에 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서진은 기욱과 이어진 페니스만으로도 죽을 맛이었다. 기욱의 내일 병원 스케줄을 모르는 서진은 기욱이라면 정말 내일 아침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누군가 실에 조종이라도 하듯 서진의 몸이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진이 허리를 움직인다는 것을 눈치챈 기욱은 서진의 몸을 앞으로 돌린 뒤 다리를 벌렸다.

“씨발, 뭐 하는…!!”

“뭐 어때. 누가 보는 거 아니잖아.”

다리를 벌리며 문 쪽을 향하는 몸에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기욱의 말대로 누가 들어올 리는 없다. 모텔이니까. 그러나 문이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서진은 금방이라도 누군가 들어올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 불안함이 마치 남이 보고 있는 시선처럼 서진을 부담스럽게 했다. 이 상황에서 기욱이 원하는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울! 거울 있다고!”

“아, 진짜네.”

진짜는 얼어 죽을. 서진이 문 안쪽 거울을 향해 눈치를 주자 그제야 기욱도 거울을 확인했다. 벽걸이 거울이었지만 거울의 크기는 제법 큰 데다 마침 침대 쪽을 향해 있었다. 기욱은 거울의 각도가 이쪽에선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차린 후 심드렁하게 고개를 내돌렸다.

“안 보이잖아. 신경 꺼.”

“으읏… 하으으….”

기욱은 벽에 있는 거울을 서진이 시간을 끌기 위해 꺼낸 말쯤으로 생각하며 허리를 몇 번 움직였다. 서진은 곧장 그런 이유로 시간을 잘 벌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서진은 거울을 힐끗거렸다. 기욱의 말대로 침대에서 각도가 틀어진 거울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얼굴 아래를 적나라하게 비추는 것이 불편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더라도, 기욱과 섹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시키는 것만 같았다. 서진은 이 이상 머뭇댔다가는 정말 다음 날 학교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학교를 인질로 잡은 것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바른 생활의 이미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학교와 강의의 문제가 아니라, 서진은 기욱에게 밤새 당하는 것만큼은 절대 사양이었다. 날밤을 새우며 당한 것은 그날 이후로 충분하다며. 반강제적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서진은 마치 누군가가 천장에서 제 몸에 실을 묶어 흔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으… 하악, 윽, 아악!”

“……하아, 으. 좀 더.”

서진의 흔들림에 기욱은 만족한다며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서진이 허리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도,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움찔거리며 조이는 것도 모두 나쁘지 않았다. 억지로 허리를 흔드는 서진은 죽을 맛이었다. 힘들기도 했고, 기욱의 페니스가 나갈 때마다 안에 있던 정액들이 밖으로 넘치는 느낌 또한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 방 안은 점점 서진의 가쁜 숨으로 가득 찼다.

서진은 기욱이 빨리 사정을 하고 나가 주길 바랐지만, 서진이 한계에 다다라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기욱은 사정하지 않았다. 기욱은 엉덩이 사이로 빠져나온 페니스를 바로 넣었다. 조금의 쉴 시간도 용서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서진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못 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해…. 못 하겠어. 못 해. 싫… 으읏… 으으읍!”

기욱은 서진의 몸을 틀어 입술을 맞췄다. 기욱이 사정하지 않은 건 단순한 이유였다. 이미 할 만큼 했기 때문에 지쳤을 뿐이었다. 그것도 불과 오 분여 전까지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키스하는 중간중간 못 하겠다며 고개를 젓는 서진을 침대 위로 바로 눕혔다. 기욱이 서진의 다리를 옆으로 벌리자 서진의 몸이 발버둥을 쳤다.

“시… 키는 대로 했잖아. 왜…!”

“못 하겠다며.”

“그, 그건… 그…… 아아악! 아파, 아파! 으읏!”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한 서진은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머뭇거렸다. 기욱은 서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겠다는 듯 서진의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서진은 결국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하며 기욱에게 당했다. 기욱은 처음부터 적당히 할 생각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 * *

탁탁, 하고 기욱은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불이 붙지 않았다. 곤란해하며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씹던 기욱은 침대 발끝에 있는 노란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기욱의 것은 아니었다. 늘어진 서진의 잠바 사이로 낯이 익은 담배 케이스가 튀어나왔다.

기욱은 제 손에 들린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마침 돗대였던 터라 하나 사러 나가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욱은 서진의 라이터로 불을 붙인 뒤 서진의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침대 위에 앉아 다리를 꼰 기욱은 서진의 담배 케이스와 이불 틈 사이로 엎드려 있는 서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성인이니 딱히 불법도 아니고. 중학교 때부터 담배를 피웠던 기욱도 할 말은 없기야 하지만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 정도는 미리 알려 줬어도 되지 않나 싶었다.

조금은 서운할지도. 창문 없는 좁은 모텔 방 안으로 담배 연기가 순식간에 가득 찼다. 기욱은 서진의 아래로 흘러내리는 이불을 바로 덮어 준 뒤 서진의 담배 케이스에서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기욱은 침대 옆 선반에 두었던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4시. 말처럼 정말 날밤을 새우고 할 생각은 아니었다.

처음 서진을 만났을 때 기분이 나빴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대게 그런 건 한두 번 하다 보면 잊혔다. 서진을 한번 안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는 쪽이 맞는 표현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진짜 기절할 때까지 할 생각이 없었던 기욱은 세 번째 담배를 물며 뺨을 긁적였다. 동시에 기욱의 옆에 있던 서진이 뒤척거렸다.

“나도 줘요.”

기욱의 옆으로 이불과 침대에 묻힌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욱은 담배를 문 채 침대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서진이 힘겹게 몸을 돌려 바로 누운 채로 기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났어?”

“기절할 때까지 몰아붙인 사람이 할 소리예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담배는 언제부터 피웠어?”

“좀 됐어요. ……학교 들어오기 전에요.”

몸을 반쯤 일으킨 서진은 기욱의 손에 있는 담배 케이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리가 아파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기욱은 담배 케이스와 라이터를 허공으로 든 채 서진을 응시했다.

“몸에 나빠.”

“하, 담배 피우는 의사가 할 소리예요?”

서진은 여전히 담배를 달라며 몸을 움직였다. 서진의 변명에 기욱은 당황했다. 이윽고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가 타들어 가는 걸 눈치채고 빠르게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서진도 기욱의 이상한 행동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담배를 달라고 한 것이 그렇게 잘못된 건가.

기욱의 손에 있는 라이터를 본 서진은 기욱의 담배가 제 담배라는 걸 눈치챘다. 침대 밑으로 기욱의 기름이 다 된 라이터와 구겨진 담배 케이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제 건데. 달라고 하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왜요?”

“아니, 별거 아니다.”

기욱은 별거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저 말을 불과 몇 달 전에 시헌에게도 들었다. 닮은 건지, 정말 남들이 보기에 담배를 피우는 의사가 잘못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 그렇다 해도 다른 사람도 아닌 의대를 다니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서진이 할 만한 말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너도 의사 될 거잖아.”

서진은 그런 기욱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됐고, 달라구요. 담배.”

서진의 재촉을 보다 못한 기욱은 짧아진 담배를 마저 피운 뒤 근처 재떨이로 담배를 껐다. 서진의 허리를 안은 뒤 입술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기욱의 키스에 놀라는 것도 잠시뿐 기욱의 입안을 타고 기도를 태우는 것 같은 뜨거운 연기에 서진은 기욱을 밀어내며 기침을 했다. 눈시울이 빨갛게 변하며 인상을 구긴 서진은 기욱을 노려봤다.

“지금…, 하아. 일부러 그랬죠?”

“하하, 안 죽어.”

기욱은 서진에게 담배와 라이터를 던졌다. 제 라이터와 담배를 돌려받은 서진은 익숙하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약간 열려 있는 작은 창문 틈 사이로 가을 새벽 찬 바람이 들어왔다. 조용해진 거리에 서진은 담배를 입에서 떼며 중얼거렸다.

“짜증 나.”

서진이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이 발밑에 있는 휴대폰에서 불빛이 났다. 제 휴대폰이라는 걸 눈치챈 기욱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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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욱은 휴대폰의 문자와 연신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서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기욱의 시선을 눈치챈 서진이 뭘 보냐는 식으로 기욱을 노려봤다. 마침 기욱의 휴대폰으로 새 문자 메시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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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헌도 대학생이니 어느 정도 쓸 거란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기욱은 서진의 손에 있는 담배를 빼앗은 뒤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씹었다. 카드를 준 건 저니 뭐라 욕을 할 수도 없고. 기욱은 시헌에게 문자를 보내려다 결국 휴대폰을 덮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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