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7 잔인한 기억 (29/83)

Chapter. 27 잔인한 기억

병원 근처 번화가의 식당에서 밥을 먹던 기욱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서진의 지갑을 손가락질했다.

“지갑 좀 사. 지갑이 그게 뭐야.”

서진의 지갑은 문방구에서 파는 것 같은 겉모양에 낡아 있었다. 기욱의 시선에 서진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지갑을 주머니에 넣은 뒤 김치를 집어 먹었다.

병원 진료복 차림에 겨울 잠바만 걸친 기욱을 본 서진은 한숨을 쉬었다. 잠바 가슴에는 병원 신분증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번화가의 대로변에 있는 24시간 감자탕집, 점심시간을 겸해 사람들이 가득한 가게에는 기욱을 제외하고도 몇 명인가 진료복을 입고 나타난 사람들이 있었다. 서진은 왜, 자신이 기욱과 한겨울 대낮에 병원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너 어차피 한가하잖아. 시험 끝난 지 얼마 안 됐고.”

“면접 준비해야 하거든요?”

서진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반박했다. 날밤을 새우고, 새벽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기욱은 순식간에 국물을 반쯤 비워 냈다. 서진이 아직 채 반도 먹지 못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식사를 시작한 옆 테이블의 남자들이 여전히 식사하는 걸 보면 기욱이 빨리 먹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궁금한 거 있어?”

“뭘 궁금해해요.”

“면접. 의사잖아. 이럴 때 안 써먹으면 뭐에다 써먹게?”

“누나 있거든요. 필요 없어요.”

기욱의 당당함에 서진은 기가 찼다. 식사를 마친 기욱은 휴대폰을 보더니 쯧, 하고 혀를 찼다. 기욱을 흘끗 본 서진 또한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하는 분위기였다. 기욱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서진 쪽으로 내밀었다.

“하아, 또 사고를……. 미안하다. 먼저 갈게.”

기욱은 나중에 보자며 손을 흔들고 도망치듯 가게를 나갔다. 서진은 멀어지는 기욱을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남은 밥을 먹는 것에 집중했다.

* * *

“네? 지갑이요?”

“지갑이 뭐?”

“선배님, 방금 지갑이 어쩌고 하셨잖아요.”

옥상으로 올라간 규건이 담배를 물었다. 가운 주머니에는 담배가 없었다. 기욱이 손을 내밀자 규건이 담배 케이스를 내밀었다. 두 사람은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나란히 병원 옥상 철조망에 몸을 기댔다.

전망이 확 트이는 고층 병원 옥상 건너편으로 서진과 점심을 먹었던 번화가의 거리가 보였다. 낮이었던 것이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기욱이 반쯤 타들어 간 담배를 손에 끼우고 말을 했다.

“아아, 지갑. 너 얼마 전에 지갑 바꾸지 않았냐?”

“그랬죠. 근데 그거 기억하시네요.”

우연히 의국에서 책상 위에 둔 지갑이 누구 거냐 물었을 때 규건이 손을 들었다. 꽤 좋은 지갑이어서 샀느냐고 물어본 것이 전부인 내용이었다. 기욱도 원래라면 그런 사소한 일을 기억할 생각은 없었다. 규건에게서 자연스럽게 담배를 빼앗아 피우는 기욱의 머릿속에는 낮에 식당에서 봤던 서진의 낡은 지갑이 떠올랐다. 기욱은 병원의 전망을 관람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20대 남자가 좋아할 만한 지갑이 뭐가 있지?”

“예?”

규건의 되물음에 담배를 끈 기욱은 고개를 돌렸다. 그냥 한 소린데, 그걸 또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기욱의 질문에 규건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며 뒷목을 긁적였다.

“아뇨, 좀 의외여서요. 근데 20대 여자가 아니구요?”

규건의 반응에 기욱은 한발 늦게 제가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근처 의사들을 슬쩍 본 규건이 기욱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목소리를 낮췄다.

“선배님, 누구 주시려구요? 에이, 그러지 말고 말 좀 해 주세요. 네? 누구예요?”

“씨발, 너 뭔 소릴 하는 거야. 죽을래?”

“아, 진짜 모르는 척하시는 겁니까? 선배님, 학창 시절에 장난 아니셨다면서요? 남자 여자 가릴 것 없고 아주…….”

기욱이 규건을 강하게 노려봤다. 대학병원 부속이라는 것이, 확실히 그 대학교 출신 의사들이 가장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긴 하지만 꼭 다 그런 것 또한 아니었다. 각자의 사정이라는 것도 있고. 학교가 좋아도 학교 내 성적은 또 달랐기 때문이었다.

의대를 졸업하고 병원 인턴으로 들어간 뒤, 서윤을 만난 이후부터는 나름 자기 관리를 잘한 편에 속했다. 그래도 뒤에서 도는 소문은 어쩔 수 없었지만 생판 관계없는 규건이 어떻게 저기까지 알고 있는 건가? 신기하기는 했다. 규건이 졌다며 양손을 들어 보였다.

“실은요. 유 간호사랑 저랑 한참 잘 나가는 중이거든요.”

“그 4년 차 간호사?”

“네네, 저번에 같이 밥 먹으러 갔는데, 그 뭐냐. 친척이 오더라구요. 이야, 처음엔 친척인 줄 모르고 엄청 경계했거든요. 어쨌든 그 사람이 K&J로펌 변호사인가 그런데 우리 병원에 자주 온다고 그러더라구요. 왜요, 그 공사장에서 떨어진 환자 케이스도 담당했다면서. 잘 부탁한다면서 명함 받고, 마음 맞아서 몇 번인가 술 마시다 보니까. 이야, 그분이 박 선배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면서요?”

“김하민이냐?”

“어! 역시. 아시는군요.”

“K&J로펌에서 날리는 놈은 그놈밖에 없으니까. 꽤 친했어.”

K&J로펌이라는 말을 들을 때부터 기욱은 짐작했다. 그러고 보니 서진의 문제 때문에 학교에 불렀을 때 누구 친척이 신경외과 간호사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뭐,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기욱은 슬슬 내려가 봐야 한다며 시계를 봤다. 두 사람은 비상계단을 내려가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17층, 신경외과 병동이 있는 4층까지 끝없는 계단의 행렬이 이어졌지만 둘은 익숙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지갑은 언제 알려 줄 건데?”

“어? 진심이었어요? 그냥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 누구 주려고 그래요?”

“서윤이 남동생.”

“재수해서 다 맞았다는 애요? 사실 제 친척 동생도 올해 수능 봤다는데. 걔는 공부를 못해서 뭐 글렀지만. 이야, 올해 수능이 그렇게 어려웠다면서요? 전국에 이과 계열 만점자가 둘밖에 없대요. 근데 설마 형수님 동생일 줄이야.”

“씨발, 누가 멋대로 형수님이라 부르래.”

“근데 진짜 다른 한 명이 누군지 궁금하긴 하네요.”

“어, 내 동생.”

7층 계단을 막 내려가던 규건이 잠시 멈칫했다. 규건보다 한발 먼저 내려간 기욱이 빨리 오라며 재촉했다. 기욱은 가끔 보면 말을 막 던지는 경향이 있었다.

“대박, 진짜요?”

“아마도.”

4층에 가깝게 도착하자 속도를 낸 규건이 먼저 내려가 문을 열었다. 기욱이 밖으로 나가자 규건은 자연스럽게 비상계단 철문을 닫은 뒤 병원 복도로 나왔다.

“알았어요. 이따 퇴근하실 때 몇 군데 알려 드릴게요. 어디 백화점 갈 건데요?”

“일단 알려나 줘 봐.”

* * *

“…진, 강서진!”

대로변에 차를 세운 기욱은 조수석에 앉은 서진을 불렀다. 기욱의 목소리에 창밖을 보고 있던 서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옅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욱은 통화 중인 휴대폰을 내밀었다.

“서윤이가 바꿔 달래.”

서진이 전화를 받았다. 주변이 조용한 터라 차 안으로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댄 서진은 창가 쪽으로 몸을 붙였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기욱이 납치라도 한 것 같았다.

― 누나, 진짜 금방 오는 거지?

― 그럼! 금방 갈 테니까 오빠랑 놀고 있어.

서윤이 곧 가겠다며 서진을 달랬다. 어린아이처럼 입을 삐죽 내민 서진은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거짓말. 그래 놓고 또 안 올 거잖아.

고등학교 때 다짜고짜 여행을 가고 싶은 곳이 없냐고 물어 왔던 서윤을 서진은 아직도 기억했다. 한 번은 당했지만 두 번은 당하지 않았다. 그 증거로 같이 간다던 서윤은 아직도 병원에 있질 않은가. 서진은 기욱과 또다시 여행하는 건 죽어도 싫었다.

― 얘는, 속고만 살았어? 일 끝나는 대로 KTX 타고 내려갈게. 걱정하지 마. 알겠지?

서윤이 그런 서진을 나무랐다. 계속되는 서윤의 잔소리에 서진은 결국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 ……알았어.

서진은 통화가 종료된 기욱의 휴대폰을 돌려줬다. 평일 출근 시간을 훨씬 지난 탓인지 도로는 한가했다. 기욱은 서울을 내려가기 전 적당한 역 근처에 차를 세웠다. 서진은 부산까지 내려가는 동안 잠이라도 청할까 봐 벨트를 맸다. 편의점에라도 다녀오는 줄 알았던 서진의 예상과 달리 차에서 내린 기욱은 조수석 문을 열었다.

“내려.”

“출발 안 해요?”

“시간 많잖아. 뭐라도 마시고 가자.”

기욱이 건너편에 있는 프렌차이즈 카페를 손가락질했다. 서진은 막 맨 안전벨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안전벨트가 꼬여 잘 풀리지 않았다. 조수석 안으로 몸을 숙인 기욱이 서진의 안전벨트를 풀어 주었다. 12월이지만 햇볕이 잘 드는 탓에 춥지는 않았다.

기욱은 지퍼를 여미고 있는 서진의 모습을 살폈다. 어디서 많이 본 잠바. 작년, 이맘때쯤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지만, 제주도에서 기욱이 사 주었던 잠바였다. 아직도 입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기욱은 모자 근처로 흐트러진 잠바를 바로잡아 줬다.

“제가 할 수 있어요.”

“안 추워?”

“안에 많이 입었어요. 신경 꺼요. ……그리고 어차피 카페 들어갈 거라면서요.”

서진은 재수를 하느라 옷차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원래부터 옷에 신경을 많이 쓰는 성격도 아니었고. 기욱의 말마따나 겨울 잠바라고 하기엔 얇은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기욱 앞에서 겨울 잠바가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뭐든 입을 수 있으니까 입고 온 것뿐이었다. 서진과 기욱은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로 간 기욱이 먹고 싶은 것을 물었다. 머리 위에 있는 복잡한 메뉴판을 본 서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냥, 아무거나요.”

“아메리카노 2잔…….”

“커피 말고.”

“하아, 얼그레이 밀크티 한 잔이랑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주세요.”

음료는 생각보다 금방 나왔다. 기욱은 커피와 밀크티를 들고 서진이 앉은 자리로 갔다. 실내로 들어왔지만, 난방 온도가 높지 않은 탓에 마냥 따듯하지만은 않았다. 기욱과 서진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커피의 뚜껑을 열었다.

서진은 기욱과 습관이 비슷하다는 걸 눈치채고 미간을 찌푸렸다. 서진의 묽은 밀크티를 본 기욱은 손에 있는 커피를 순식간에 반쯤 비웠다. 순식간에 검은 커피가 반 토막 나는 모습을 본 서진이 신기하다며 눈을 크게 떴다. 혹시나 하고 밀크티에 입을 댔지만, 뜨거워서 한 모금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안 뜨거워요?”

“뜨거워.”

“그게 들어가네요.”

“병원에서 일하면 다 그렇게 되더라.”

자리에서 일어난 기욱은 중앙 스테이션에 놓인 냅킨을 가지고 왔다. 뭘 하는 건가 싶었던 기욱이 몸을 숙여 냅킨으로 서진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서진의 입 근처로 밀크티 거품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뭘 계속 묻혀.”

“묻을 수도 있는 거죠.”

서진은 기욱의 냅킨을 빼앗아 입가를 닦았다. 기욱은 남은 커피를 마시며 그쪽이 아니라며 볼 근처를 쿡쿡 찔렀다. 계속 엉뚱한 방향을 닦는 서진에 기욱은 입꼬리를 올렸다. 뒤늦게 웃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기욱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마음 편하게 누군가와 카페를 와 웃어 본 게 얼마 만이지.

“…어요. 전화 왔어요.”

“어, 아. 그래.”

서진의 목소리에 제정신으로 돌아온 기욱은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병원 특유의 천장 울림이 가득한 소리가 들렸다.

― 선배님, 저 규건인데요. 내려가셨어요?

― 어. 아직. 왜?

기욱은 휴대폰을 어깨에 걸친 뒤 몇 모금 남지 않은 커피를 전부 비웠다. 밀크티를 반쯤 마신 서진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로 일어났다. 같이 가 주려 했지만, 서진이 테이블을 치우고 있는 근처 알바생에게 화장실의 위치를 묻는 것이 더 빨랐다. 화장실을 가는 서진을 본 기욱은 다시 휴대폰을 붙잡았다.

― 다른 쌤들한테 들었어요. 부산 가신다면서요. 아, 근데 혹시 예약하신 곳이 K호텔 아녜요? 한진만 해수욕장에 있는 거요.

― 하아, 어떻게 알았냐? 맞아. 왜?

병원 바닥이 좁다는 건 알았지만, 장소까지 알려지고 나니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 아, 별건 아니구요. 제 친척 형이 형사거든요. 얼마 전에 사건 때문에 서울 올라와서 술 한번 마셨는데. 부산 본청 소속인데 그 해수욕장이 친척 관할이라고 그러더라구요. 근데 거기서 얼마 전까지 마약 단속하고 그랬다네요.

― 뜬금없이 무슨 마약?

― 그 근처가 최근 몇 년 사이에 클럽이랑 모텔이 되게 많이 들어와서. 골치가 아픈 모양이더라구요. 뭐였더라? 음료수인가 물인가에서 *로히프놀이랑 졸피뎀 성분이 나왔다고 하더라구요.

*졸피뎀(Zolpidem), 로히프놀(Rohypnol) : 수면제 성분으로, 항정신성 의약품 및 실제 데이트 강간 약물

― 뭐?

― 요즘 젊은 애들 사이에서 데이트 강간 약물로 유명하대요.

기욱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툭툭 건드렸다. 대충 전화를 받는 기욱은 서진이 들어간 화장실에서 눈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약물이고 나발이고 기욱의 머릿속에는 화장실을 간다고 해 놓고 나오지 않는 서진밖에 없었다. 일어나 볼까 생각할 무렵 서진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기욱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린 뒤 전화를 받는 척했다.

― 어쨌거든요. 다 선배님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 지랄하네! 지랄해. 하늘 같은 선배님을 애 취급하는 새끼는 너밖에 없을 거다.

― 하늘이 뭐예요. 저 병원 막 들어와서 가장 먼저 들은 말이 선배는 신이랬어요.

― 씨발. 그런 걸, 아는 새끼가 그런 말을 해? 그보다 너 한가한가 보다? 일 좀 줄까?

― 아닙니다! 아, 맞다. 그거 때문에 전화한 건 아니구요. 선배님이 어제 퇴근하시면서 말씀하신 강서진 환자요. 저 지금 차트 보고 있거든요.

― 야, 잠깐만.

서진이라는 말에 기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욱은 아직도 뜨거운 밀크티를 후후 불며 마시고 있는 서진을 보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기욱은 카페 내에 비치된 흡연실로 들어왔다. 기욱은 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대충 꺼내 물은 뒤 몸을 돌렸다. 기욱이 담배를 피우러 간 줄 안 서진은 별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 어, 말해. 서진이가 왜?

기욱은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 그거요. 차트에 보안 걸려 있는데요?

― 뭔 소리야. 병원 차트에 왜 락이 걸려 있어. 야, 최규건. 너 진짜 똑바로 하고 있는 거 맞아? 계정은?

― 아, 선배는 신이라면서요. 진짜라니까요? 계정이요? 제 거요.

― 내 걸로 다시 해 봐.

― 알았어요.

― 일단 끊어.

전화를 끊은 기욱은 피우지 않은 담배를 근처 쓰레기통에 버린 뒤 밖으로 나왔다. 서진은 슬슬 가자며 기욱을 재촉했다. 서진의 손에는 얼마 남지 않은 밀크티가 담긴 종이컵이 그대로 있었다. 기욱은 카운터로 시선을 돌렸다.

“가는 길에 마실 거면 하나 더 사.”

“그래도 돼요?”

“사이즈 큰 거로 해서 사.”

기욱이 지갑에 있는 카드를 내밀었다. 밀크티가, 생각보다 맛이 있었던 서진은 기욱의 카드를 받아 들고 곧장 카운터로 쪼르륵 달려갔다. 기욱은 새 밀크티를 받아 온 뒤 카드를 내민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얼굴로 20살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서진은 기욱의 손을 옆으로 밀어냈다.

“애 아니거든요.”

“알았다. 알았어.”

툴툴대는 서진의 모습에 기욱은 졌다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마침 기욱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와 있었다. 서진에게 받은 카드를 지갑에 넣은 기욱은 차 키를 주며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손짓했다. 병원 일이라는 걸 충분히 이해한 서진은 차 키를 들고 카페를 나갔다. 탁, 기욱은 휴대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치프 계정으로도 안 됩니다.」 오전 10:43

“이게 진짜.”

혼잣말을 중얼거린 기욱은 규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채 울리기도 전에 전화 연결이 됐다. 기욱은 카페의 빈자리에 의자를 꺼내 적당히 앉았다.

― 야! 최규건, 너 진짜 나랑 장난 까?

― 왜 화를 내시고 그래요? 강서진 환자요, 작년에 *Pedestrian TA로 *ER에 내원한 건 맞는데요, *GS 보안 걸려 있어서 건드리질 못해요.

*Pedestrian TA(traffic accident) : 보행자 교통사고

*ER[emergency room] : 응급실

*GS[general surgery] : 일반 외과

외과 보안이라는 말에 기욱은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재작년 이맘때쯤 일어난 다리 붕괴 사고와 얽힌 서진의 교통사고. 그땐 무너진 다리 때문에 들어온 환자로 정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 너 응급의학과에 김 교수님 알지?

― 응급실 과장님이요? 제가 그분 계정은 잘 몰라서……. 치프는 아세요?

―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려가서 물어봐.

― 치프 이름 대면 되는 거죠?

― 어. 아버지랑 친하니까 내가 알려 달라 그러면 그냥 알려 주실 거야.

― 알겠어요, 아, 저 *rounding하고 해도 되는 거죠?

― 마음대로 해.

― 네, 끝나고 연락드릴게요.

*rounding : 회진

전화를 끊은 기욱은 서진과 똑같은 밀크티를 시킨 뒤, 차로 돌아왔다. 시동을 건 뒤 히터를 강하게 튼 후 뒷좌석으로 손을 뻗었다. 기욱은 뒷좌석에 있는 담요를 서진의 몸 위로 던졌다.

기욱이 던진 담요는 이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두꺼웠다. 안 그래도 좀 추웠는데, 서진은 안전벨트를 맨 뒤 담요로 몸을 돌돌 말았다. 차의 시동을 건 뒤 서진이 마신 것과 똑같은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다.

입안으로 퍼지는 텁텁한 맛에 기욱은 밀크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서진은 그사이 새로 산 밀크티를 반을 넘게 마셨다. 어린애 입맛. 그런 주제에 애 취급하지 말라니 기가 막혔다. 차는 천천히 도로를 달렸다. 밀크티 안에 들어 있는 카페인 탓인지 서진은 잠이 오지 않았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담요를 말고 다리를 오므리며 이리저리 뒤척이던 서진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병원 일 많이 바쁜가 봐요.”

카페에서 했던 통화를 말하는 것 같았다. 운전대를 붙잡으며 속도를 높이던 기욱은 얼마 남지 않은 밀크티를 끝까지 마셨다. 취향은 아니었지만, 달리 마실 것이 없어서 계속 손이 갔다.

“그냥 그래.”

둘 사이로 다시 침묵이 흘렀다. 운전대를 붙잡는 기욱은 유독 차 안의 침묵이 불편했다. 기욱은 원래부터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말을 자주 했다. 기욱과 대화를 하는 사람들은 할 말이 없어도 억지로라도 말을 걸어왔다.

서진의 대답에 습관처럼 그렇게 대답한 것뿐이었지만 이내 자신의 말이 모처럼 먼저 말을 건 서진의 말문을 막히게 하였다는 걸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다른 말을 할걸,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서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 기욱은 운전을 하는 내내 휴대폰을 만지는 서진을 힐끗댔다.

“금방 올 거야.”

“어떻게 알아요?”

“알아.”

“둘이 짜고 거짓말하는 게 취미예요?”

서윤에게 답장이 오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서진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서진은 진작 다 마신 빈 컵을 입술 끝으로 씹었다. 서윤이 오지 않을까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기욱은 차의 속도를 높였다.

“안 오면 아빠한테 말해 줄게.”

“그런다고 올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병원장이잖아.”

기욱은 자신의 휴대폰을 서진에게 던졌다.

“안 오면 네가 전화해.”

“민폐잖아요.”

“상관없어.”

기욱의 태도에 서진은 허탈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돌려줬다. 기욱은 서진에게 껌을 내밀었다. 서진은 기욱에게 받은 껌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오는 거 기다릴래요.”

“그래.”

* * *

끼익, 끽, 소리가 서진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눈을 뜨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몸이 흔들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목 끝에서부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손이 뺨을 만지며 손가락이 입안을 희롱했다. 좋아? 응? 멀어지는 시야로 목소리가 들렸지만, 알아볼 수 없었다. 시야를 지배하고 있던 남자의 몸이 옆으로 틀어짐과 동시에 천장에 있던 조명이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하아, 윽!”

서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익숙하지 않은 이불,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에 서진은 빠르게 뛰는 가슴을 쓸어 넘겼다. 그건 꿈이었나? 꿈 치고는 너무나 생생했다. 심호흡한 뒤 호텔 방 안을 둘러봤다. 화장실을 막 나온 기욱이 서진에게 다가왔다.

서진의 안색이 파란 것을 눈치챈 기욱의 손이 서진의 뺨에 닿았다. 꿈속, 남자의 손길이 생각난 서진이 기욱의 손을 탁― 하고 쳐냈다. 그 소리가 제법 컸던 터라 예상하지 못한 기욱의 눈동자가 커졌다.

“괜찮아?”

“죄송해요. 좀… 안 좋은 꿈을 꿔서.”

기욱은 침대에서 내려와 휘청거리는 서진을 붙잡았다. 꿈속,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서진의 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섹스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아무리 기욱과 얽히고설킨 서진이었지만 아직 제대로 된 섹스를 한 적은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이 기욱의 배려인지 단순히 참고 있는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분명한 건 기억 속 남자는 기욱이 아니었다. 좀 더, 나이대가 비슷한 남자였다.

작년. 이맘때. 문득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는 서진은 아닐 거라면서 애써 부정했다. 그래, 그럴 리가 없다.

“아, 좀! 달라붙지 마세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요!”

기욱을 따라 호텔 내 수영장을 온 서진은 유독 끈질기게 달라붙는 기욱을 밀쳐 냈다. 왜 한겨울에 수영장이며 해수욕장이 있는 호텔을 놀러 와야 하는지.

서진의 수능이 끝나고 남는 날이 한겨울밖에 없다는 것과 병원에서 일하는 두 사람이 여름에 휴가를 가지 못했다는 상황이 겹쳤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장소 선정을 단단히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뭐 어때. 둘밖에 없잖아.”

몸을 밀어낸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등 뒤로 접근한 기욱은 다시 서진의 목을 팔로 감싸 안았다. 기욱의 장난 아닌 장난에 서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결국, 반쯤 포기한 서진은 기욱의 말대로 텅 빈 수영장 내부를 둘러봤다.

“사람 있거든요?”

“관리자잖아. 신경 꺼.”

가벼운 옷차림의 직원은 수영장 안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보더니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 서진의 손을 잡은 기욱은 물 안으로 들어갔다.

레일이 있는 호텔 실내 수영장은 생각보다 물이 얕지 않았다. 서진은 기욱의 목 아래까지 오는 물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기욱은 머뭇거리는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수영장 안쪽으로 기울어진 서진은 기욱에게 반쯤 안긴 꼴이 되어 버렸다.

“놔 줘요.”

“알았어.”

“자, 잠깐! 그렇게 막 놓으면 어떻게 해요!”

코와 목으로 넘어 들어오는 물에 깜짝 놀란 서진은 재빨리 벽 쪽으로 붙었다. 뭔 수영장을 이렇게 깊게 만들어 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올라갈래요.”

“왜?”

“추워요.”

“물 따듯한데 무슨 소리야.”

수영장 물은 서진의 생각 이상으로 따듯했다. 무슨 온천수처럼 따듯한 온도에 빠르게 물 밖이 더 추워지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서진은 입을 다물고 몸을 반쯤 담갔다. 애매하게 닿는 발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진은 최대한 벽에 몸을 기대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물의 깊이가 얕아졌다. 이럴 줄 알았다. 서진은 허리 위로 올라오는 물을 만지작거렸다. 마지막으로 수영장을 와 본 것이 얼마 만이더라.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기욱과 만난 뒤로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뿐이었다. 제주도 여행도 그렇고, 부산의 수영장이니 고급 호텔이니 하는 것들도 그렇다. 물론 겨울이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서진은 수영 선수처럼 잘 다부진 기욱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아무리 나이 차이가 난다고는 하지만 어딘가 반칙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서진은 물 안으로 살이 거의 없는 팔을 살짝 꼬집었다. 입학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운동이나 해야 하나 하는 괜한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이 상한 서진은 결국 물에서 나왔다.

“어디 가?”

“화장실요.”

“같이 가 줄게.”

“어린애 아니거든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서진은 물 위로 올라오려는 기욱을 본 척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홀로 넓은 수영장 안에 남겨진 기욱은 물안경을 썼다.

“대박, 완전 쩔어.”

“아까 얼굴 봤어? 잘생겼는데.”

“내려와 보자고 했잖아. 가서 말 걸어 봐.”

화장실에서 돌아오자 수영장에는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호텔 투숙객으로 추정되는 두 여성이 있었다. 몸매가 드러나는 수영복을 입은 두 여성은 물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저들끼리 풀 쪽을 보며 떠들었다. 서진은 물 안에서 보이지 않는 기욱을 찾았다.

수영장의 가장 안쪽, 물을 튀기며 빠르게 수영을 하는 남성 하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자들이 오기 전까지 수영장에는 기욱과 서진밖에 없었으니 수영을 하는 남자는 기욱이 틀림없었다. 기욱은 깔끔한 자세로 수영하며 끝에서 끝까지 왔다 갔다 하길 반복했다.

뒤늦게 서진이 왔다는 걸 눈치챈 모양인지 수영을 멈춘 뒤 서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근처에 있던 여성들이 자신을 보는 줄 알고 저들끼리 수군댔다. 그러나 그런 오해는 오래가지 못했다.

“강서진!”

서진은 본의 아니게 여자들 틈에 섞여 있는―그래 봤자 생판 모르는 남이지만― 꼴을 보여 준 셈이었다. 기욱은 서진을 향해 오라며 손을 까딱였다. 제 발로 걸어오면 안 되는 걸까. 내심 기욱이 물에서 나와 먼저 다가와 주길 바랐던 서진은 자석에 이끌리듯 기욱에게 다가갔다.

서진은 다시 물 안으로 들어왔다. 물이 따듯해서 그런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젖어 있는 기욱을 본 서진은 입술을 내밀었다. 서진의 표정을 눈치챈 기욱이 물었다.

“왜 또 화났어?”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예요?”

“딱히? 모르겠는데.”

기욱의 수영 장면을 본 탓인지 서진은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코스프레를 한 것처럼 어색했던 서진과 달리 기욱의 한복은 제 옷처럼 잘 어울렸다. 부채춤, 수영에, 대학병원 의사. 뛰어난 의사 집안. 남부러울 것 없는 외모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는 성격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신은 참 불공평하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이든 만날 수 있는 기욱이 왜 자신 같은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재수 없어요.”

“어? 그래, 미안.”

서진의 중얼거림을 들은 기욱이 대답했다. 너무나 당연하게 나온 사과의 말에 대답한 기욱도, 서진도 한동안 뭘 들었는지 몰라 서로를 가만히 바라봐야만 했다.

“당신, 바보예요? 사과할 일이 아니잖아요.”

“나도 모르게 그만. 하하, 그래도 명색에 의산데 바보는 좀 심했다. 바보는.”

기욱이 바보라는 서진의 말을 강조하며 웃었다. 그게 또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 서진은 주먹을 꽉 쥐며 기욱을 노려봤다. 몸에 닿은 물기 탓인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멍청이.”

“하아, 그래. 그만하자. 수영할 줄 알아?”

기욱은 더 얘기하고 싶지 않다며 말을 돌렸다. 이미 더 심한 말도 잔뜩 들은 마당에 바보니 멍청이니 하는 말은 욕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수영할 줄 아느냐는 기욱의 말에 서진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못 해?”

“모, 모, 못 할 수도 있는 거죠!! 모든 사람이 다, 당신 같다고 생각하지 말라구요!!”

서진은 주먹을 쥐며 언성을 높였다. 물에 들어와 본 기억조차 없는데 수영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기욱이 그런 서진의 팔을 붙잡아 올렸다. 성인 남자의 팔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얇은 팔이 기욱의 손에 의해 힘없이 들렸다. 기욱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말했지.”

“뭘요.”

“그럴 수도 있는 거야.”

혹시 무슨 이상한 짓을 할까 걱정했던 서진은 기욱의 말에 긴장이 풀렸다. 제주도 여행 때도 그랬지만 서진은 기욱이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 도무지 감이 서지 않았다. 박기욱이라는 사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진의 손을 놓은 기욱은 물 밖으로 나갔다. 관계자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던 기욱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란 보드를 들고 왔다.

“그걸로 뭐하려구요?”

“모처럼인데 알려 줄게.”

“싫어요.”

수영을 알려 주겠다는 기욱의 제안을 서진은 단칼에 거절했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호텔 수영장에 와서 노란 보드라니 웃기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서진의 거절에 기욱은 잠깐 어쩔 줄 몰라 머뭇거렸다. 기욱은 서진이 이렇게 대놓고 싫은 티를 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연하 남자라는 건, 여자보다 더 까다로운 구석이 있었다. 기욱은 서진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서진아.”

“…….”

“강서진.”

연인을 부르는 것 같은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넓은 수영장 안으로 울려 퍼졌다. 가까이서 들려오는 기욱의 목소리가, 애원하는 것 같은 눈빛이 서진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이 사람은 왜 항상 이런 식으로 사람을 옭아매는 걸까. 마치 거절한 제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서진은 기욱의 손에 들린 노란 보드를 신경질적으로 낚아챘다. 기욱이 시키는 대로 보드를 붙잡고 앞으로 나가 보려고 하지만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붕 뜨는 보드 때문인지 팔만 뜨고 몸은 가라앉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어설프게 발버둥을 치는 서진을 보던 기욱이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큭읍, 하하하하하하!”

“아, 진짜! 웃지 마세요! 알려 준다면서요!”

물 안으로 손을 넣은 기욱이 서진의 배 근처를 살짝 들어 올렸다. 기욱의 손이 받쳐 주고 나서야 서진의 몸이 물 위로 떴다.

“힘 빼. 천천히.”

기욱이 몇 번이나 힘을 빼라고 말을 했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와 귓가를 속삭이듯 말하는 기욱의 목소리 탓인지 서진은 도무지 수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슬슬 지친다고 생각할 무렵 건너편에서 놀고 있던 여자들이 다가왔다.

“저기요. 혹시 다른 일행 있어요?”

“놀러 오신 거죠? 괜찮으면 저희랑 식사 안 하실래요?”

물 안에 있는 탓인지 몸을 숙인 여자들의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무리 봐도 어려 보이는 서진을 노린 것 같지는 않았다. 서진은 기욱에게 보드를 넘겼다. 발이 닿지 않아 휘청거리는 서진을 기욱이 붙잡아 주었다. 기욱에게 허리를 들린 서진은 물 위로 올라왔다.

“저기요.”

“아, 네?”

“기욱 형 여친 있거든요? 그런 식으로 찝쩍대지 마세요.”

“누가 찝쩍댔다고……!”

“야, 됐어. 내가 그러니까 말하지 말랬잖아. 가자.”

옆에 있던 여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친구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뒤늦게 물 위로 올라온 기욱은 서진의 뒤를 따라갔다. 원래라면 기욱이 해야 할 말이었다. 저 대신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는 서진을 본 순간 기욱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수영장 바깥을 걷던 서진은 대뜸 걸음을 멈춘 뒤 등을 돌렸다. 갑작스레 멈춘 서진에 기욱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착각하지 마세요.”

“…….”

“누나 때문에 그런 것뿐이에요.”

기욱이 무슨 생각을 하든, 서진은 그럴 일이 없다며 못을 박았다. 질투, 일지도 모른다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기욱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기욱은 물기 때문에 넘어지려는 서진의 몸을 붙잡았다.

“조심 좀 해. 머리 부딪치면 큰일 나.”

“죄송해요.”

정말 위험하다 생각했던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은 수영모를 벗은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끝에 머리에 남아 있던 물기가 묻어났다.

* * *

“온다고 그랬잖아!!”

수영장을 나와 다른 일로 전화를 하고 돌아온 기욱은 방 안에서 들리는 서진의 외침에 깜짝 놀랐다. 1층 로비에서 적당히 사 온 커피를 근처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통화를 하는 서진에게 다가갔다. 통화 음량이 커서 그런지 휴대폰 너머로 곤란해하는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서진아, 그게 아니라 누나가 아직 일을 다 못 끝내서……. 진짜 오늘 안에 갈게.

―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지금이 몇 신 줄 알고…… 잠깐! 폰 줘요!

서진의 어깨를 누른 기욱은 통화 중인 서진의 휴대폰을 멋대로 빼앗았다. 서진이 휴대폰을 달라며 손을 뻗었지만, 기욱은 휴대폰을 귓가로 가져간 채 등을 돌렸다.

― 오빠? 기욱 오빠야?

― 어. 서윤아.

“휴대폰 줘요!”

“기다려 좀.”

계속되는 서진의 재촉에 기욱은 담배와 라이터를 챙긴 뒤 난간으로 나갔다. 기욱은 따라 들어오려는 서진을 향해 들어오지 말라는 식으로 손짓했다. 기욱은 한 손으로 익숙하게 담배를 문 뒤 불을 붙였다. 서진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서윤과 통화하고 있는 기욱을 바라봤다.

오 분이 좀 지날 무렵 통화를 마치고 담배를 끈 기욱이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기욱은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서진에게 던졌다. 서진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뭐래요?”

“새벽차 타고 내일 아침에 일찍 오기로 했어. 강서진, 어디 가?”

“집에 갈 거예요. 놔요. 어차피 또 거짓말이잖아요.”

“여기까지 와서 혼자 어딜 간다고 그래? 애처럼 굴지 마.”

“그럼 나 보고 어쩌라구요!!”

서진은 기욱의 손을 뿌리쳤다. 매번 말은 올 거라고, 갈 거라고 하면서 한 번도 제대로 지킨 적이 없었다. 비단 기욱과 있는 이번 여행뿐만이 아니었다. 생일이며, 사소한 약속에도 그랬다.

둘밖에 없으니까 당연한 거라고, 고려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좀 다를 줄 알았다. 서진은 본의 아니게 애꿎은 기욱에게 화풀이를 하는 셈이 되어 버렸다. 어른인 것처럼 굴어도 아직은 어린애였다.

“요 앞에 해수욕장 갈래?”

“미쳤어요? 이 추운 날에?”

안 그래도 서진은 장소 선정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물이라면 조금 전까지 실컷 만지고 왔다. 늦은 밤에 물에 들어갈 이유도 없으니 기욱의 말은 미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술 마실 줄 알지?”

서진의 욕을 가볍게 무시한 기욱이 겉옷을 챙겨 입었다. 주머니에 지갑을 넣고 나갈 준비를 하는 기욱의 모습에 서진은 기가 찼다. 재수를 하겠다고 1년에 가까운 시간을 덧없이 보냈지만 그래도 성인은 성인이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기욱의 오피스텔에서 몰래 술을 먹던 것과 달리 문제가 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왜 당신이랑 술을 마셔야 하는데요?”

서윤이 오늘 오지 못한다고 한 지금, 서진의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기욱과 단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짜증이 나는데 술까지 어울려 줘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서진이 처음부터 곱게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던 기욱은 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근처 테이블로 내려놓는 척했다.

“싫으면 말고. 강요는 안 해.”

사실 기욱이라고 술이 당기는 건 아니었다. 술을 마셔야 할 이유가 있는 건 기욱이 아니라 서진이었고, 모처럼 성인이 된 이후의 자유 시간이었다. 기욱은 서진이 나름 성인의 권리를 즐겼으면 하는 생각에서 제안한 것뿐이었다. 아직 그런 걸 깨닫기에는 너무 어렸던 걸지도 몰랐다.

다시 잠바를 벗는 기욱의 모습에 서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차피 성인이고, 그래도 기욱이 있으니까 조금이면 괜찮지 않을까. 서진은 반쯤 벗은 기욱의 잠바의 끝을 잡아당겼다.

“조, 조금이라면 마실 줄 알아요.”

사실은 한 번도 마셔 본 적 없지만. 기욱은 서진의 손을 놓으며 도로 잠바를 입었다. 그래도 완전히 애는 아니었나 보네.

* * *

“딱히 짜증이 나서 그랬던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요, 당신도 알다시피 저랑 누나는 친척도 없고.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들 얘긴 하지도 마요. 어쨌든 좀 그래서 그랬어요. 화풀이하려고 그랬던 건 아닌데……. 솔직히 화풀이 좀 하면 어때요?”

“강서진.”

“머리로는 아는데, 이해하는데, 사람 맘이란 게 그렇지 않잖아요. 당신처럼 부모님이 다 의사에 잘난 사람은 이해 못 할…… 네?”

“하아,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건데?”

“뭘 그렇게 불러요?”

기욱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서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기운이 돈 탓인지 사실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는 상태였다. 술 마신 사람의 앞뒤 안 맞는 말을 들어 주는 건 익숙했던 기욱이라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지만, 서진은 제법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다. 아직 주량이라는 것도 없다 보니 같이 마시는 기욱도 곤란하긴 마찬가지였다.

말을 조금 두서없이 지껄이는 걸 제외하면 멀쩡해 보이기에 내버려 두고 있는 것뿐이었다. 기욱은 소주잔에 술을 따랐다. 그 모습에 서진이 저도 달라며 잔을 내밀었다. 서진의 옆에는 기욱이 따라 준 맥주가 그대로 있었다.

“그거 마셔.”

“싫은데요.”

“왜?”

“뭘 마시던 제 맘이잖아요. 저도 줘요. 소주.”

술을 마시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까다로운 건 여전해 보였다. 서진은 기욱이 따르는 소주병이 비어 있자 팔을 뻗어 기욱의 소주잔을 멋대로 빼앗았다.

기욱이 채 손을 뻗기도 전에 서진은 잔을 비워 버렸다. 기욱은 손등에 튄 소주를 털어 내며 마지못해 한 병을 더 시켰다. 기욱은 서진의 빈 소주잔을 가져와 새 소주를 따랐다.

“멋대로 빼앗아 먹지 말라고.”

“그러니까 달라고 했잖아요.”

“뭘 잘했다고 그렇게 당당해?”

“당당한 건 제가 아니라 그쪽 아녜요?”

“말을 말자.”

요즘 남자애들은 다 이런 걸까? 혼잣말로 중얼거린 기욱이 소주를 마시려 하자 서진이 다시 빈 잔을 내밀었다. 술이 들어간 탓인지, 소주 때문인지 서진의 입술이 평소보다 더 빛나 보였다. 마지못해 서진에게 소주를 따른 기욱은 괜스레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서진은 기욱이 술을 따라 주자 좋다며 웃어 댔다. 비록 술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보기 드문 서진의 웃음에 보고 있던 기욱 또한 멋쩍어졌다. 서진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었다. 그것의 정체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평범한 또래 남자애들과 서진을 다르게 만들어 주는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건데?”

“뭘요?”

“당신, 하고 버릇없이 구는 거. 이래 봬도 병원에서 선생님 소리 듣고 일하는데. 당신은 좀 아니지 않아?”

“그런 거 신경 안 썼잖아요. 이제 와 신경 쓰는 척하지 마세요.”

서진이 탁, 하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기욱이 서진에 대해 아는 만큼, 서진 또한 기욱을 알았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시간이라는 건 억지로라도 서로에 대해 알아 가는 과정이었다. 서진은 방금 한 말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인지 마시지 않고 있던 맥주를 마시며 회를 집어 먹었다.

서진에게 의도치 않게 한 방 먹은 기욱은 머릿속으로 적절한 대답을 생각했다. 기욱을 이렇게 생각하게 하는 사람은 눈앞에 있는 서진밖에 없을 것이었다. 서진의 태도를 걸고넘어져야 한다면 방금 한 말 또한 결코 예의 있는 말투는 아니었다.

10살에 가까운 나이 차이였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정의를 지을 수 없는 애매한 지점에 있었다. 그래도 역시 어린애한테 말로 진다는 것은 역시 자존심이 상했다. 술에 취해서 더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오늘부터 간섭 좀 하려고.”

서진은 뭔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술에 취해 흔들거리는 시야로 기욱을 똑바로 보려고 노력했다. 내심 기욱이 잘못 말했다며 철회해 주길 원했지만, 기욱은 그럴 일이 없다며 재차 말했다.

“알아들었으면 똑바로 불러.”

“…르고 싶어도요.”

“뭐라고?”

“부르고 싶어도.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나라고 뭐 안 불편한 줄 알아요?”

서진의 뜻밖의 투정에 기욱은 다시 할 말을 잃었다. 말이 나와 서진에게 불릴 만한 호칭을 찾았지만, 생각처럼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기욱은 더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말하는데 매형이라고는 죽어도 안 부를 거예요.”

“기대도 안 해. 그냥 형이라고 해. 당신보다는 낫잖아.”

“그래도 돼요?”

“왜? 반말이라도 하려고?”

“박기욱?”

“이게 진짜…! 죽을래?”

“아, 하지 마요! 장난이잖아요! 악!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만해요, 형!”

서진은 다가오는 기욱의 손을 밀어내며 소리를 질렀다. 장난삼아 가볍게 손을 뻗은 기욱은 서진의 반응이 과장되었다고밖에 느낄 수 없었다. 서진의 형이라는 외침에, 기욱은 몸을 움찔거렸다. 발끝으로 의자를 쳤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욱은 쓰러진 의자를 바로 세워 앉았다.

“묻히지 좀 마라.”

서진의 입가에 묻은 붉은 고추장에 기욱은 반쯤 체념한 듯 근처의 물티슈를 집어 서진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평소였다면 자기가 하겠다며 신경질을 냈을 서진이 지금 따라 얌전했다.

젠장, 입가를 닦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올려다보는 서진의 시선에 기욱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서진을 만나고 나서부터 모든 것이 이상해졌다. 같이 술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인식하고 있는 탓인가? 오늘따라 서진을 안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왜 그래요?”

“아니, 담배 좀.”

차마 서진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기욱은 고개를 돌린 뒤 무작정 가게를 나왔다. 도망치듯 가게 밖으로 나온 기욱은 뒤늦게 담배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편의점까지는 거리가 좀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혼자 앉아 있는 서진을 본 기욱은 별일 없겠지 하며 자리를 떴다.

“그나저나 최규건 그 자식은 왜 전화도 안 주는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기욱은 편의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나름 번화가라는 것이 거짓말은 아닌 모양인지 클럽이며 술집으로 시끄러웠다. 어느새 새벽 한 시가 좀 넘어 있었다.

술을 마시면 늘 있는 일이라 놀랍진 않았지만 역시 혼자 있는 서진이 걱정되기는 했다. 기욱은 편의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친척 형이 형산데요… 마약 단속하고 그랬다고…….’

하, 그럴 리가. 기욱은 그저 술에 취해 드는 잡생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 * *

“안 오네.”

남은 회를 마저 먹은 서진은 오지 않는 기욱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담배를 피우러 간다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치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오래 기다린 감이 없잖아 있었다. 서진은 가게 유리 너머로 몸을 내밀었다. 기욱 대신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낯선 남자와 서진의 눈이 마주쳤다. 그 자리에 기욱은 없었다.

담배 피우러 대체 어디까지 나간 거야?

이해할 수 없는 기욱의 행동에 서진은 한동안 음식점 주변을 기웃거렸지만, 기욱은커녕 기욱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원래 가게로 돌아온 서진은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가게 내부에 화장실은 없었다. 서진은 마침 지나가는 알바생을 붙잡았다.

“저, 화장실이…?”

“화장실은 건물 나가셔서 계단 올라가시면 돼요.”

으레 그렇듯 여자 알바생은 화장실이라는 단어 한마디에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린 서진은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들어올 땐 몰랐는데 1층 식당 건물은 생각보다 컸다.

도대체 어디로 돌아서 가면 되는 거지? 술에 취한 서진은 정체 모를 건물을 빙빙 돌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화장실은커녕 음침한 곳으로 가고 있었다. 이상한 사람도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길을 잘못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목말라.”

화장실도 가고 싶고, 술만 마셔 대서 그런지 목이 탔다. 일단 다시 가게로 돌아가야겠다며 등을 돌리자 낯선 남자가 서진의 눈에 들어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한쪽 손에는 반쯤 마시다 만 페트병 물이 담겨 있었다. 그는 서진의 시선에 닿는 물이 담긴 페트병을 살짝 흔들었다.

“마실래요?”

“마시던 거잖아요.”

“물인데 뭐 어때요. 목마르다면서요.”

모르는 사람, 서진은 남자와 남자의 손에 들린 물을 번갈아 바라봤다. 남자는 아예 뚜껑을 열어 물을 내밀었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먹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지만, 술기운에 판단력이 흐려진 서진은 남자가 주는 물을 받아 마셨다. 목이 말랐던 터라 순식간에 있던 물의 반을 넘게 마셨다. 서진은 물병을 남자에게 돌려준 뒤 왔던 길로 등을 돌렸다.

“갈 거예요.”

“어디 가려고?”

걸음을 살짝 멈춘 서진은 남자를 올려봤다. 근데 아까 전부터 뭔데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는 걸까?

“알 거 없잖아.”

“그렇게 까칠하게 굴지 말고. 모처럼인데 일행 있어?”

“강서진!”

마침 담배를 사고 가게로 돌아가던 기욱은 골목 사이에 있는 서진을 발견하고 뛰어왔다. 기욱은 낯선 남자와 있는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어딘가 불안하다 싶었건만 예상은 어긋나질 않았다. 술에 취해 돌아다니는 서진도 그렇고, 낯선 남자도 그렇고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놔 줘요. 숨 막혀요.”

기욱의 품에 안긴 서진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발버둥 쳤다. 기욱은 그런 서진을 놓을 생각이 없다는 듯 팔에 힘을 준 뒤 남자를 노려봤다. 다부진 체격에 남다른 외모, 기욱의 날카로운 눈빛을 본 남자는 졌다는 듯 혀를 찼다. 그래도 나름 바닥 물 먹은 남자는 서진을 안은 기욱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짐작했다.

남자를 보는 기욱의 눈빛은 위험하다 못해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서진은 간신히 기욱을 밀어낸 뒤 푸하, 하고 숨을 쉬었다. 기욱이 서진의 뺨 위로 손을 올리며 서진의 상태를 확인했다.

“괜찮아?”

서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말을 하려 했는데,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순간적인 기분 탓이라 느낀 서진은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기욱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그놈의 옷자락, 기욱은 허공으로 뜬 서진의 팔을 잡았다. 서진은 기욱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며 가게로 돌아왔다. 기욱은 서진을 자리에 앉힌 뒤 계산을 마쳤다. 기욱은 술병을 향해 손을 뻗는―그래 봤자 빈 술병이었지만― 서진의 손을 쳐 냈다.

“그만 마셔.”

“생각해 볼게요.”

“더 마시고 싶으면 이따 편의점에서 맥주라도 사 줄 테니까 일단 돌아가자.”

“음, 그것도 생각해 볼래요. 그런데요, 세모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뭐? 강서진, 너 지금 뭐라 그랬어?”

“그러니까요. 세모가 불쌍하다니까요? 왜 네모는 세모랑 안 놀아 줘요? 우리 세모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

“너 취했어?”

“전 그냥 동그라미랑 친하게 지낼래요.”

“이 씨발 뭐라는 거야? 아, 진짜 돌겠네. 일단 일어나.”

기욱은 서진의 손을 잡아당겨 강제로 일으켰다. 억지로 일어난 탓에 테이블 위에 있던 소주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지만, 기욱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깨진 병을 슬쩍 본 기욱은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가게를 나왔다. 서진은 호텔에 오는 내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듣다 못한 기욱은 서진의 입을 막으며 호텔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입 막지 마요! 네모가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아세요?”

“강서진. 너 뭐 했어.”

서진이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기욱이 자리를 뜨기 전까지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테이블의 술은 기욱이 편의점에 간 이후 그대로였다. 설령 짧은 시간 안에 한꺼번에 술을 마셔도 이런 식으로 정신이 나간 소리를 지껄일 수는 없다. 서진과 있던 낯선 남자, 기욱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들이 그를 더욱 정신없게 만들었다. 기욱은 침대 위로 서진을 올린 뒤 서진의 어깨를 꾹 눌렀다.

“뭐 했냐고!! 너 아까 그 새끼한테 뭐 받아먹었어?”

“애 취급 하지 마요.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지켜요. 근데 음, 기분이.”

“기분이 뭐?”

“헤헤. 그냥 기분이 좀 좋아요. 있잖아요,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은? 근데 우리 날고 있어요? ㅤㅇㅙㄹ케 붕 뜬 것 같징. 우리 어디 가요?”

“아오! 씨발! 내가 미쳐. 너 뭐 먹었어? 나 없을 때 뭐 처먹었냐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기욱이 언성을 높였다.

음료수인가 물에서 로히프놀이랑 졸피뎀이 나왔대요.

데이트 강간 약물로 유명하다는데요?

별생각 없이 넘긴 말이건만, 이 순간 미친 듯이 기욱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기욱은 땀으로 가득한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기욱은 어렴풋이 서진과 있던 남자의 손에 페트병이 들려 있던 것을 생각했다. 기욱은 주먹을 꽉 쥐었다. 사람을 때리고 싶다는 기분이 드는 건 오랜만이었다.

눈앞에 서진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그 좆같은 새끼를 찾아내 반 죽기 직전까지 패고 싶었다. 감히 약을 하게 한 거로도 부족해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같이 화를 참는 기욱의 눈치를 살핀 서진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 진짜 안 먹었다니까요? 그냥, 그냥 그 뭐지? 물 마셨어요. 그렇게 사람을 의심하니까 좋아요? 어차피 내 몸밖에 관심 없는 주제에.”

“너 뭐라고……. 방금 한 말 다시 해 봐.”

“왜?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맞잖아요. 그러니까 막, 막 차 안에서 나한테 키스하고. 덮치고. 그랬던 거잖아요. 그래서 나, 과고도 못 가게 하고. 나쁜 사람. 당신, 형은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본인이 나쁜 놈이란 자각은 있어요? 근데 있잖아요, 나요.”

서진이 기욱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기욱의 머릿속은 서진이 무슨 약을 했는지에 대해 짐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충 뭔지 짐작은 갔지만. 제아무리 기욱이라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하는 건 당연했다. 멍하니 있는 기욱에 서진이 결국 기욱의 팔을 잡아당겼다. 서진의 손을 이기지 못한 기욱이 말해 보라며 몸을 숙였다. 기욱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댄 서진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근데 나 있잖아요.”

“…….”

“한 적 있다?”

“강서진, 대체 무슨 말을…….”

서진을 살짝 밀어낸 기욱은 서진을 손가락질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약에 취한 게 서진이 아니라 자신이 아닐까? 기욱은 도통 서진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약에 취해서 헛소리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거짓말 아니라니까? 내가 꿈을 꿨는데, 그게 너무 진짜 같아서. 사실 오늘 종일 생각해 봤거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 아닌 것 같은 거야.”

“씨발, 처돌았어? 니가 누구랑 뭘 해. 그런 거 아니니까 다시는 그딴 소리 지껄이지 마.”

“왜 못 믿어?”

“누구랑 했는데.”

“기억이 안 나. 아무리,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있잖아. 기억이 안 나. 그 애는 누구였지?”

“내가 그런 거 아니라 그랬지? 미친 소리 그만해. 그 이상은 나도 못 참아.”

“못 참으면 어쩔 건데? 응? 못 참으면 어떻게, 어떻게 할 건데요!!”

“야. 작작 안 해?”

“확인해 볼래?”

기욱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약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는 걸까. 무언가에 씐 사람이라 해도 믿을 수 있었다. 의사로서 그런 것이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기욱은 멋대로 침대 위에 올라가 다리를 벌리려는 서진의 몸을 눌렀다.

“강서진!! 그만해. 그만하라고!”

“이제와 그런 척 굴지 마. 하고 싶었잖아. 씨발, 그러니까 나한테 맨날 그런 거 아냐! 있잖아, 자기보다 10살 가까이 어린 놈 보고 욕정하는 거. 그거 변태 같다고 생각 안 해?”

“씨발, 아주 못 하는 말이 없지?”

“그래. 못 하는 말이 없다! 하하,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니까? 안 무섭다고 너.”

“…….”

“박기욱, 그러니까 누나한테 왜 그랬어.”

평소와 다른, 보통 때였다면 절대 할 수 없는 말들이 기욱의 가슴에 못을 박기 시작했다. 왜 그랬냐는 서진의 말에 기욱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지옥 같은 연극을,

시작한 건 다른 사람도 아닌 기욱이었다.

돌이킬 수도 없고,

돌아올 방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진은 기욱의 목에 손을 감았다. 서진의 몸무게에 기욱의 몸이 서진 쪽으로 기울어졌다.

“말했잖아, 하자고.”

“…….”

“겁나? 그럴 거면 처음부터 하질 말았어야지.”

“강서진, 난 분명히 말하는데 후회하지 마. 먼저 도발한 건 너야. 나중에 기억 안 난다 해도 후회하지 마.”

“내가 누군지 기억이 안 난다고 아까부터 말했잖아. 으읍….”

기욱은 서진이 더 이상 지껄이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기욱의 키스에 서진 또한 혀를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무척이나 헤펐지만, 가만히 있던 때와 비교하면 다르다고 할 만한 변화였다.

그게 미친 짓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렇게라도 너를 곁에 두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고 싶었다.

어떤 결말이 될지 알 수는 없었지만,

늘 그렇듯 후회할 생각도, 마음도 없다.

기욱은 빠르게 셔츠를 벗어 침대 바닥으로 내던졌다. 기욱을 따라 옷을 벗으려는 서진은 잘 안 되는 모양인지 팔에 반쯤 걸린 옷에 낑낑거리고 있었다. 기욱이 서진의 팔을 들어 올리자 손을 따라 옷이 벗겨졌다. 서진의 유두 근처를 지분거리던 기욱의 손이 거침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서진의 바지를 벗겨 내고, 저조차 빠르게 바지를 벗었다. 나체 상태가 된 서진은 기욱의 발기한 페니스를 멍하니 바라봤다. 서진의 다리를 벌린 기욱은 손가락으로 서진의 안을 지분거렸다.

아직 손가락을 넣지 않은 상태여서 그런지 서진은 간지럽다며 킥킥댔다. 약 기운에 서진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오늘 이 순간을 서진이 기억하고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웠고, 약에 취한 사람을 상대로 정신이 나간 짓이라는 것 또한 알았다.

해 본 적이 있다는 서진의 말이 기욱의 귓가를 계속해서 맴돌았다. 서진을 안고 싶다고, 끝까지 하고 싶다면서도 참아 온 것이 몇 년인가. 그런데 감히 누가 손을 대? 기욱은 그럴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정체 모를 짜증이 기욱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하으, 읏… 이상해…….”

“젠장.”

기욱은 앞머리를 쓸어 넘긴 뒤 오므리려는 서진의 다리를 옆으로 벌렸다. 참았던 술기운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기욱이 천천히 서진의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으읏, 하고 서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것 같아. 역시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아니라니까요.”

기욱은 정체를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서진의 턱을 들어 올리며 천천히 핥아 갔다. 약 때문인지 서진의 몸은 평소보다 더 예민해져 있었다. 분위기 탓인지, 제정신이 아닌 서진 때문인지 기욱 또한 약에 취한 사람처럼 정신을 반쯤 놓았다. 뒷일 같은 건 알 바가 아니었다. 기욱이 손가락을 늘려 서진의 안을 헤집었다.

“으응, 응, 하으, 거, 거기……. 이상해.”

서진이 느끼는 지점을 찾은 기욱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서진의 허리가 들리며 목이 뒤로 넘어갔다. 상황이 상황이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안고 싶다고 얼마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기욱은 손가락을 뺄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앙탈 부리지 마.”

“씨… 읏, 응, 으읏, 하, 나쁜 새끼. 당신은 진짜 나쁜 놈이야. 나쁜 사람이라고!”

“윽, 이게 진짜!”

기욱은 발버둥을 치는 서진의 팔을 잡아 눌렀다. 아직 기욱의 덩치가 더 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서진 또한 어린애가 아니었다. 서진의 몸을 누르는 데 힘이 든다는 걸 눈치챈 기욱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잠깐 머 하는…! 아윽….”

양팔을 앞으로 누른 기욱은 서진의 몸을 뒤로 돌렸다. 엉덩이 근처로 닿는 기욱의 페니스에 깜짝 놀란 서진이 몸을 앞으로 내뺐지만 갈 곳이라고는 침대 헤드가 있는 벽이 전부였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주룩, 시트와 함께 뒤로 몸이 끌리기 무섭게 기욱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으로 들어왔다.

“으윽, …아. 아파… 아악!!”

“윽, 발버둥 치지 마.”

기욱이 서진의 몸을 눌렀다. 이제 와 그만두라고? 누가 그만둘까 보냐. 기욱은 서진의 몸을 돌려 허리를 붙잡은 뒤 페니스를 안쪽 끝까지 밀어 넣었다. 침대에 있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서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으응… 읏….”

서진은 잇새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느라 정신이 없었다. 온몸을 관통하는 것 같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약 때문인지 아프다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불편하다고 생각은 할 뿐. 어느 쪽이든 편한 기분은 아니었다. 상황을 판단할 사고력조차 사라진 기분이었다. 기욱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서진의 몸이 흔들리며 침대 뒤쪽으로 끌려 나왔다. 그 와중에도 분명한 건 있었다.

기욱과 섹스를 하고 있다는 것. 불과 일이 분 전까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 서진은 기욱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정확하게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맞았다. 약에 취한 서진 못지않게 술이 들어간 기욱의 힘 또한 장난이 아니게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만, 그만해여. 아파. ……으윽! 아악!”

“먼저 하자고 한 건… 하아. 너야, 서진아.”

한쪽 손으로 서진의 허벅지를 누른 기욱은 다른 손으로 땀이 찬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기욱이 처음 여자와 섹스를 한 건 중학교 때. 친구들과의 대화와 호기심에 못 이겨서였다. 남자와의 섹스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건 고등학교 무렵. 성인이 된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남자보다 보여주기 쉬운 여자 친구를 사귀며 여자와 섹스를 했지만, 그래도 여자 친구가 있음에도 종종 섹스파트너랍시고 만나는 남자들도 있었다.

남자는 편했다. 몇 번인가 임신했다거나―다행히 사기극이었지만― 하는 문제로 일을 치렀던 것과 달리 뒤처리가 깔끔했다. 기욱은 여친이 있으면서 남자와 섹스를 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전부 서진을 만나기 전까지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날. 서윤을 만나고, 서진이 서윤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한 이후 의도적으로 서윤에게 접근했다. 서윤과 사귀고 난 뒤부터 모든 것이 틀어졌다. 톱니바퀴는 틀어진 채로 돌아갔고, 한번 틀어지기 시작한 바퀴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만 만들어 낼 뿐이었다.

얼마나 더 돌지, 얼마나 버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늘까지일 수도 있고, 1년 후일 수도 있고 십 년이 될 수도 있었다. 시한폭탄 같은 삶이었다. 기욱은 서진의 입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억지로 깨물려고 이를 세웠지만, 기욱의 거친 움직임에 손가락을 깨물기는커녕 핥아 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손가락을 빼내고 서진의 허리를 든 기욱은 못 참겠다며 서진의 입안을 탐했다.

서윤과 사귄 이후 기욱은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탐한 적이 없었다. 사실은 그게 정상이지만, 상대와의 관계에서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기욱에게 있어선 이런 경우가 거의 드물었다.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하지 않은 것이 서윤을 진심으로 사랑해서였을까?

기욱은 서윤을 볼 때마다 자리에 없는 서진을 생각했다. 사실은 누구보다도 서진을 가지고 싶어 했던 사람은 기욱이었다. 서진은 숨이 막힌다며 기욱의 등을 두드렸다. 간신히 입술을 뗀 기욱은 손끝에 남아 있던 서진의 타액을 핥았다. 술 때문인지 혀의 감각이 마비된 탓인지 다른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윽.”

“이상해. 흐윽… 이상해. 느낌이… 이상해.”

기욱이 결국 참지 못하고 서진의 안에서 사정했다. 기욱의 페니스가 움찔거릴 때마다 서진의 허리가 조금씩 들리며 몸이 움직였다. 서진은 기욱의 몸을 밀며 빼 달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몇 번의 섹스 탓인지 술기운이 좀 가시며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약 기운은 도리가 없었다.

몸을 누운 기욱은 서진을 잡아 위로 올렸다. 기욱의 위에 올라타기 무섭게 서진의 안으로 페니스가 들어왔다. 기욱은 도망치려는 서진의 등을 잡아 몸을 당겼다. 서진의 뺨이 깜박 잊고 면도를 하지 않은 기욱의 턱 근처에 닿았다. 서진의 목 근처를 핥아 이를 세운 기욱은 서윤을 생각하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 괜히 자국을 내서 좋을 건 없었다. 기욱은 제 위에 있는 서진을 나지막이 부르며 올려다봤다.

“강서진. 서진아.”

“하윽! 아앗, 읏… 으응….”

“대답해.”

“응. 으읏… 으응….”

신음인지 아니면 대답을 하는 건지 도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아무렴 상관은 없다. 기욱은 서진의 붉게 물든 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약에 취했든, 누나―서윤밖에 모르는 시스콤이든 서진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기욱은 서진이 필요했고, 서진을 원했다. 이유가 뭐든 서진이 없으면 초조하고 미칠 것만 같았다. 그 과정에 서진의 의사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넌 내 거야. 다른 놈한테 절대 못 줘.”

―서진을 곁에 둘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 * *

남자는 문 앞에 선 기욱을 가만히 바라봤다. 의무실 문을 연 그는 팔에 차인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1층 로비에서 보이는 유리창은 아직 가시지 않은 어둠이 남아 있었다. 새벽 5시, 남자는 아침부터 찾아온 기욱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딜 가나 환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긴 하지만. 호텔에서 근무하는 의사인 그는 호텔 투숙객인 기욱의 일행이 체했거나 열이 좀 있었겠거니 멋대로 생각했다. 여행을 오면 무리를 하는 사람 한둘 정도를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의무실 안으로 들어간 남자는 벽에 걸어 두었던 가운을 대충 걸쳤다. 기껏해야 열이 난다는 등의 얘기를 할 줄 알았던 남자의 예상과 달리 기욱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채혈 도구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네? 저 손님,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좀 곤란한데요.”

한발 늦게 기욱의 말을 깨달은 남자는 안 된다며 단칼에 잘랐다. 호텔 손님 중 진상은 늘 있지만, 새벽부터 의무실에 와서 난리를 피우는 경우는 또 드물었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채혈 도구라니 도무지 일반인이 쓸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피를 뽑고 싶어 하는 모양인데 설령 빌려 간다 해도 일반인이 정맥 주사를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참 별사람이 다 있구나 싶었다.

남자가 어떻게 기욱을 돌려보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기욱은 주머니에서 병원 신분증을 꺼냈다. 남자는 눈앞에 달랑거리는 기욱의 신분증을 바라봤다, J대 병원 신경외과 전공의 박기욱. 불과 일이 분 전까지만 해도 속으로 채혈 도구를 빌려 달라는 기욱을 비웃었던 남자는 할 말을 잃었다. 남자에게 분명하게 신분증을 확인시킨 기욱은 멋대로 선반을 뒤졌다.

“하아, 마음대로 하세요.”

남자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J대에 신경외과 정도면 알아서 하겠거니 싶었다. 무엇보다 괜히 컴플레인 걸리면 귀찮아졌고. 기욱은 채혈 도구를 챙긴 뒤 방으로 돌아왔다.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한 뒤 엉망이 된 방을 치웠다. 커튼을 걷자 날이 샌 것이 훤히 보였다. 겨울 해수욕장의 전망과 테라스로 들어오는 햇빛을 본 기욱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 남아 있는 술기운에 약간 머리가 아팠다. 본의 아니게 날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기욱은 서진이 잠들어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가 푹 꺼지면서 알몸인 서진은 잠결에 이불을 돌돌 말았다. 김밥처럼 돌돌 말린 이불을 본 기욱은 얕은 한숨을 내쉰 뒤 이불 안에 있는 서진의 팔을 꺼냈다. 익숙하게 잠든 서진에게서 피를 빼낸 기욱은 바늘 자리에 밴드를 붙인 후 소파에 앉았다.

병에 가득 찬 피를 본 기욱은 엉망이 된 머리를 긁적거렸다. 혹시 몰라 채혈하긴 했는데 그 뒤는 생각해 둔 것이 없었다. 병을 만지작거린 기욱은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몇 번 울리기 무섭게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기욱과 마찬가지로 병원에서 날을 꼬박 새운 것 같은 목소리의 규건이 말했다.

― 아, 치프.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어요.

― 안 그래도? 넌 회진을 밤새 돌지?

― 하하, 일하다 보니까 정신이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전혀 진심 같아 보이지 않는 규건의 사과에 기욱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어쩌다가 저런 녀석을 후배라고 데리고 있게 된 건지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차트는 어떻게 됐어?

― 아, 그게. 그거 말이에요. 아무래도 외과 락 걸려 있는 것 같더라고요. 과장님 걸로도 안 되던데요?

― 응급실로 내원했는데 외과 보안이 왜 걸려 있어?

―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치프, 혹시 그 환자 VIP예요?

기욱은 전화를 바로잡은 뒤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테라스로 나갔다. 난간에 기대 담배를 문 기욱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정말이지 되는 일이 없다.

― 이런 케이스가 흔한가요? 어떻게 하죠? 외과에 요청해 볼까요?

― 너 일반 외과에 아는 교수님 있어?

― 하하, 설마요.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기욱은 병원에 있는 교수님들을 쭉 생각했다. 보안을 풀어 줄 외과 교수님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좁은 병원에서 소문을 내지 않고 조용히 일을 처리할 교수님을 찾는 것이었다. 문득 기욱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 잠깐. 주치의가 의사가 임 교수님이랬지?

― 아, 네. 이게 되게 오래전 기록까지 있는데 그때가 임 교수님 1년 차인가 그랬더라고요. 그때 주치의로 임명되면서 아직도 병원에 남아 계시니까 자연스럽게 넘어간 것 같아요. 저년차 때 환자를 교수가 돼서 다시 만나는 건 뭐, 드문 경운 아닌 게 가끔 있긴 하죠.

― 최규건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 예? 선배님이 말씀하신 강서진 환자요. 첫 방문이 9년 전인가 그래요.

― 9년 전 주치의가 임 교수님이었다고? 그 이상은?

― 간호사 데스크에서 본 거라. 그 이상은 저도 몰라요.

이건 또 무슨 말이지? 기욱은 테라스 넘어 침대에 잠들어 있는 서진을 바라봤다. 짧게 끝날 줄 알았던 전화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9년 전에 J대 병원을 온 적이 있었다니. 왜? 무슨 일 때문에? 별일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대학병원이라는 곳이 별일이 아닌 일로 오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젠장. 기욱은 결국 담배를 새로 물었다.

― 너 펜 있냐?

― 네, 말씀하세요.

휴대폰 너머 규건이 근처 의사를 건드려 종이를 얻어 냈다. 기욱은 규건에게 계정 하나를 불렀다.

― 적었어? 지금 칠 수 있지?

― 그럼요. 아, 됐다. 대박. 이거 누구 계정이에요?

― 우리 아빠.

― 치프 아버님이면 병원장……. 그래도 되는 거예요? 저 괜히 이상한 일에 휘말리는 거 아니죠?

― 됐고 차트나 봐.

이상한 일은 무슨. 기욱은 신경 쓰지 말라며 규건을 달랬다. 기욱은 그사이 연달아 줄담배를 피웠다. 마우스를 달각거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이내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통화 시간이 지나가는 휴대폰을 본 기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저 치프, 그 강서진 환자요.

― 어. 왜? 무슨 문제 있어?

― 그게 저……. *rape 환자예요?

*rape : 강간

기욱은 급하게 담배를 껐다. 잠을 못 자서 정신이 없는 건가? 아니면 뭔가 잘못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 알아듣게 설명해 봐.

― 교통사고 환자는 맞는데요. *CBC 결과에서 *Midazolam 나와 있어요.

*CBC[complete blood cell count] : 일반 혈액 검사

*Midazolam : 항정신성 의약품

― *H/o는?

*H/O[history of] : 병력

― 딱히, H/O는 안 보이는데요? *PSY 쪽도 깨끗하고. 근데 어쨌든 소견이 그래요. 사실이면 경찰 조사감인데. 보안 걸려 있는 것도 이해가 되네요. 외과 측에서 묻은 걸까요?

*PSY[Psychiatry] : 정신과

― 그리고 말씀하신 10년 전 기록은……. 어? 치프, 강서진 환자가 강 간호사 동생…….

― 최규건. 너 그만 봐. 씨발, 그거 당장 꺼!

― 알겠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먼저 전화하셨어요?

규건의 말에 기욱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기욱의 일이니 더 이상 볼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기욱은 여전히 잠들어 있는 서진을 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 너 저번에 형사인가 하는 친척 있었다며.

― 예, 그랬죠.

― 그 사람 번호 좀 줘 봐.

― 대박, 치프 사고 쳤어요?

― 씨발, 나 아냐.

기욱은 재떨이를 끌어당겨 담배를 껐다. 입이 방정이라고 저 말이 왜 안 나오나 싶었다. 다리를 꼰 기욱은 골치가 아프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 그리고 동기 중에 K대 인턴인 놈 있다고 했냐?

― 아, 그랬었죠. 그거 아직도 기억하시네요?

― 아직도 인턴 하냐?

― 그럴걸요? 지금 신경외과 돌고 있다는데 다음 달에 *진검 간대요.

*진검 : 진단검사 의학과

― 걔 번호도 같이 줘 봐.

― 치프, 진짜 사고 친 거 아니죠? 걔 K대 분원이잖아요. 선배님 계신 데서 차로 이십 분 거리.

하여튼 눈치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동기 얘기를 할 때부터 예상은 했던 일이었다. 기욱은 새 담배를 물으며 휴대폰을 어깨에 걸쳤다.

― 더 물을 거냐?

― 아뇨,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기욱은 전화를 끊었고, 얼마 가지 않아 휴대폰으로 규건이 말한 번호들이 넘어왔다. 옷을 갈아입은 뒤 이어폰을 끼고 호텔 밖을 나섰다.

* * *

“…….”

잠에서 깬 서진은 주변을 돌아봤다. 벗겨진 옷, 엉망인 침대 하며 벗고 있는 모습에 인상을 구겼다. 벽에 걸린 시계는 오전 11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하하, 이게 뭐야.”

간신히 근처에 있는 가구를 붙잡고 일어난 서진은 황당한 듯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중간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호텔에 어떻게 왔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기욱과 섹스를 한 장면만큼은 머릿속에 남았다.

정신이 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는지도 몰랐다. 기욱과 그런 날이 올 거란 생각은 했지만, 너무나 갑작스러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술에 취해 기억을 잃은 것까지는 주량을 모르고 먹어 댄 스스로 잘못이라고 치자. 그래도 정신이 든 이후에는 분명 싫다는 의사 표현을 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이래선 강간이랑 다를 게 뭔가.

침대로 돌아온 서진은 휴대폰을 가져온 뒤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간밤에 술을 먹고 기욱과 섹스를 했다는 사실보다 아침 일찍 온다던 서윤이 오지 않은 것이 더 서운했다. 휴대폰을 열어 볼 용기조차 나지 않는 상황에서 손에 들린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서윤인가? 하고 휴대폰을 열자 기욱의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옷 입고 있어.」 오전 11:12

문자에서도 느껴지는 명령조의 말투, 기욱의 당당함에 기가 찼다. 기욱이 오든 안 오든 언제까지 알몸인 상태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서진은 바닥에 개어져 있는 옷을 급하게 챙겨 입었다. 다행히 다른 건 기욱이 먼저 정리를 한 모양이었다. 호텔의 방 안에는 기욱이 없었다. 말도 안 하고 어딜 간 거지?

“이게 뭐야?”

옷을 입던 서진은 자신의 팔 근처에 붙여진 밴드를 확인했다. 도무지 밴드를 붙인 기억이 없었다. 술 먹고 다쳤을 때 기욱이 붙여 줬나? 밴드를 떼려던 서진은 이내 별거 아니겠지 하고 말았다. 딱히 아프지도 않았고, 밴드를 붙일 정도의 상처라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진은 소파에 멍하니 앉았다. 말로만 듣던 숙취인가? 두통은 없는데 이상하게 나른하고 기운이 잘 나지 않았다. 본인이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 자각조차 하지 못할 무렵 호텔 방 문 너머로 인기척이 들렸다. 기욱이라고 생각한 서진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서진아!”

“어? 누나…….”

급하게 온 모양인지 출근할 때 봤던 옷차림이 그대로였다. 신발을 벗어 던진 서윤은 곧장 소파로 가 서진에게 안겼다.

“미안, 누나가 많이 늦었지? 미안해.”

“아냐. 괜찮아.”

“오빠랑 술 마셨다면서? 숙취는 없고?”

“적당히 마셨어.”

“그래. 좀 쉬다가 어디 밖에 놀러 가자? 응?”

서진은 서윤의 몸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일까, 고작 하루 만인데 서윤을 보는 것이 몇 년 같았다. 하루가 하루 같지 않아서였을까?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냥. 이 향기가,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어쩌면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평소보다 오래 안기는 서진의 모습에 서윤은 살짝 의아해하고 있었다.

“진짜 어디 가면 안 돼?”

“우리 서진이 두고 누나가 어딜 간다고 그래?”

“응.”

서진에게 남은 것은 서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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