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6 어색한 사이 (28/83)

Chapter. 26 어색한 사이

지상주차장의 빈자리에 차를 댄 시헌이 차에서 나왔다. 지방에서 여행을 온 건지, 용무가 있어서 온 건지 알 수 없는 여자 두 명이 시헌을 힐끗 보고는 지나갔다. 출시된 지 꽤 되긴 했지만 딱 봐도 앳돼 보이는 청년이 타고 다니기에 알맞은 차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나이에 맞지 않은 차를 몰고 다니는 시헌을 수상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다.

괜히 티를 내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 터라 이번 생일에 평범한 차를 한 대 사 달라 할까 생각도 했지만 몇 달 동안 익숙해진 기욱의 차를 애써 바꾸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헌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63빌딩 내 한강이 훤히 보이는 고급 레스토랑, 호텔이 아닌 곳은 또 제법 오랜만이었다. 이런 곳은 또 어떻게 알아낸 걸까 싶기도 했고. 아무렴 돈을 내는 건 시헌이 아니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기욱의 이름을 대자 여자 직원이 안쪽 룸으로 시헌을 안내해 줬다. 입식에 룸까지. 아무리 봐도 데이트 코스였다. 이쯤 되면 왜 자신을 불렀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머, 시헌이 왔어?”

문을 열자 나란히 앉아 있는 기욱과 서윤이 있었다. 금방 키스한 모양인지 기욱의 입 근처로 붉은 립스틱이 묻었다. 기욱은 근처에 있는 냅킨에 물을 묻혀 립스틱을 닦아 냈다. 의자를 당긴 시헌이 자리에 앉았다.

시헌이 기욱을 노려보자 기욱은 창밖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올래? 하고 묻는 통화에 가겠다고 한 것뿐인데. 눈치가 없었나 보다. 딱 봐도 시헌에게 전화를 걸게 시킨 건 서윤이었다.

“서진이도 부를 걸 그랬네요.”

서진이라는 말에 물을 마시던 기욱이 헛기침을 했다. 기도에 물이 걸린 모양인지 컥컥대는 모습에 급기야 서윤이 괜찮냐며 물어 왔다.

“어, 괜찮아.”

“원. 조심 좀 해. 오빤 꼭 가끔 그렇게 덜렁대더라?”

“풉, 하하.”

“박시헌, 웃지 마.”

기욱의 말에 시헌은 입을 가렸으나. 웃음이 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애당초 시헌은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을 생각은 없었다.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는 기욱이 여자 친구―서윤 앞에서 그런 소리를 듣고 있다는 상황 자체가 시헌을 웃음이 나오게 하였다.

기욱이 기침을 한 타이밍이 조금 거슬렸지만 이어지는 식사에 시헌은 우연이라며 적당히 머리 너머로 흘려 넘겼다.

“학교에서는 서진이랑 같이 다니는 거야? 원, 학교 얘기를 안 해주니까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미안해. 서진이가 합격 전까지 말하고 다니지 말라고 그러더라고. 우리 서진이 고집이 보통 고집이어야지. 시헌이 너도 H대 들어간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해줄 걸 그랬어.”

“OT에서 만났으니까 괜찮아요. 1년도 더 된 일이고.”

기욱이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아니나 다를까 식사를 하는 내내 서윤은 서진에 관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누나니까, 그럴 수 있다. 시헌은 서진의 이야기를 딱히 불편해하거나 하지 않았으나 기욱의 경우는 달랐다. 시헌은 마주 앉아 말없이 식사하는 기욱을 살폈다.

미묘하게 일그러진 표정, 아닌 척하는 모습까지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사람의 불편해하는 모습이었다. 기욱이 시헌에 대해 잘 아는 것만큼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기욱을 시헌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시헌의 감으로는 서진의 이야기 외에 기욱이 불편해할 만한 요소를 느낄 수 없었다.

왜 기욱은 서진의 이야기를 불편해하는 걸까.

자신과 서진이 친구여서? 동생 친구의 누나랑 사귀는 것 때문에? 정말 그것뿐일까? 형―기욱을 의심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의심하게 된다.

시헌은 고3 무렵 오피스텔에서 기욱과 있었던 서진을 떠올렸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시헌은 서진을 기욱의 오피스텔로 부른 기억이 없다. 서진은 대체 왜 기욱과 있었던 거지? 뒤늦게 떠오른 궁금증이 시헌을 더욱 거슬리게 하였다.

서진의 누나―서윤과 사귀는 기욱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식사를 마친 시헌은 후식으로 나온 디저트 수저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서진이.”

“…….”

“여자 친구 생겼던데.”

“어머. 시헌이도 알고 있구나? 안 그래도 그 얘기 하려고 했었는데.”

여자 친구라는 말에 서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우리 서진이가 여자도 다 만나고. 안 그래 오빠? 하며 옆에 있는 기욱을 올려다봤다. 그 모습은 여느 연인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날, 서진의 집에서 자고 간 새벽. 담배를 피우면서 했던 말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시헌은 그 일이 있고 난 뒤 한 달하고도 일주일이 지났으니 한 40일이 좀 넘지 않았을까 하고 날짜를 계산했다. 서진의 대화가 불편하다면, 만약 그렇다면 뭔가 반응이 있지 않을까. 룸 안에서 정체를 모를 기 싸움이 이어졌다.

“예뻐?”

기욱의 한마디는 시헌을 당황하게 하는 데 충분했다. 기욱은 덜 녹은 녹차 아이스크림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뭐?”

“여친. 예쁘냐고.”

하는 질문은 여자가 예쁘냐, 인데 어째서 말하는 투는 따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서진과 사귀는 여자가 안 예쁘면 어떻게 할 건데. 비단 시헌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 모양인지 서윤은 진지한 기욱의 태도에 입가를 올렸다.

“자긴 뭘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고 그래? 사람 무섭게.”

시헌과 서윤을 번갈아 보던 기욱은 물 잔에 담긴 물을 살짝 마셨다. 물기 때문인지 입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뭐라 할 틈도 없이 서윤의 허리를 당겨 안은 기욱이 서윤의 입가를 탐했다. 얕은 키스에 시헌의 눈치를 살핀 서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기욱은 서윤의 허리를 놓아 주지 않은 채 시헌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당연하지. 누구 동생인데.”

“…….”

“이상한 여자 만나면 큰일이잖아.”

테이블 위로 팔을 올린 시헌은 못 봐주겠다며 이마를 짚었다. 팔불출이 따로 없었다. 그건 정말 기우였던 걸까. 시헌은 기욱의 변화가 낯간지러웠다. 기욱이 그럴 사람이 아닐 텐데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은 변하니까, 하고 기욱의 행동에 대해 합리화를 했다. 식사가 끝나 갈 무렵 기욱이 화장실을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같이…….”

“있어. 금방 갔다 올게.”

기욱은 같이 가겠다는 서윤을 두고 혼자 룸 밖을 나왔다. 금방 다녀오겠다는 기욱의 말은 거짓말이 아님을 증명하듯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뒤 밖으로 나온 기욱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서윤은 먼저 들어간다며 차로 들어갔다. 담배를 문 기욱은 연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어느새 밤저녁이 지고 있었다.

「어디야?」 오후 7:55

답장이 오지 않았다. 기욱의 근처를 지나가는 여자 두 명이 기웃거렸다. 새 담배를 문 기욱은 앞머리를 살짝 쓸어 넘겼다. 손가락에 있는 반지가 보란 듯이 여자들을 향해 빛났다. 봐, 여친 있잖아. 아, 아깝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기욱은 다른 손으로 문자를 보냈다.

「강서진. 답장해.」 오후 8:22

대학생, 공부할 수도 있는 거고 사정상 못 볼 수도 있는 거다. 그런 사정을 기욱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머리로만 이해한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읽기는 한 걸까? 일부러 씹는 건 아닐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번에 무리해서라도 모텔로 갔어야 했나.

입 안에서 짧아지는 담배만큼 기욱의 속 또한 점점 타들어 갔다. 집에 가자마자 전화를 걸까. 아니면 서윤을 데려다주고 집에 가 봐야 하나. 하고 속으로 중얼거릴 무렵 손에서 진동이 울렸다. 기욱은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을 열었다.

「학교예요. 왜요? 용건 없으면 연락하지 마세요.」 오후 8:24

성격만큼이나 문자 또한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문자에도 불구하고 기욱은 서진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기욱은 식사를 했던 층의 외벽을 올려다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서진이.

여자 친구 생겼던데.

「너 여자랑 사귀……」

* * *

생각보다 술을 많이 마신 인하는 서진에게 팔짱을 끼며 고개를 돌릴 것을 요구했다. 서진이 마지못해 고개를 돌리자 입술을 뺨에 맞추고는 까르륵, 하고 웃었다. 뭐가 그리 좋은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서진은 입가에 묻어나는 립스틱을 근처에 있는 물티슈로 닦았다. 지성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잘 지워지지 않았다. 볼터치 한 것 같아. 또 그게 재미있는지 인하가 웃었다. 이번에는 좀 웃겼는지 시헌도 키득댔다.

“아, 웃었다.”

“웃기잖아.”

“그치? 웃기지? 봐봐. 시헌이도 웃잖아.”

한 학년 위지만 동갑인 터라 서로 말을 튼 지는 꽤 됐다. 원래 대학 생활이라는 게 그렇다. 성별, 나이 무관하고 술로 친해지는 사이라잖나. 대학이 아니어도 상관은 없나. 아무튼. 서진의 얼굴의 빨간 자국은 웃음을 자아내기엔 더없이 충분했다.

“아, 잠깐만.”

전화가 왔다. 이 시간에 전화가 올 리가 없는데. 시헌은 수신자도 확인하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약간 술에 취한 목소리로 누구세요? 하고 언성을 높였다. 시헌의 통화가 생각보다 길어지자 서진과 인하가 통화 상대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인하가 물었다.

“시헌아, 누구야?”

시헌이 입가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쉿, 하고 신호를 줬다. 그게 또 재미있는 모양인지 쉿, 하고 따라 했다. 쉿, 하고 따라 하는 소리도 제법 커서 다시 옆에 있던 서진이 조용히 하라며 인하를 말렸다. 응. 쉿. 인하의 모습을 보니 많이 마시긴 많이 마셨나 보다. 실제로 테이블 위에는 빈 소주병이 꽤 굴러다녔다. 시헌의 휴대폰 너머로 기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자랑 있어?

― 동기야.

인하를 슬쩍 본 시헌이 담담하게 말했다. 기욱과 통화를 하는 시헌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통화가 끝나 갈 무렵 시헌은 한숨을 쉬었다.

― 그걸 왜 나한테…….

― 찾아만 놔, 금방 갈 테니까. 부탁 좀 하자.

확실히 기욱의 부탁은 드문 경우였다. 이렇게까지 부탁하는 것도 없었고. 오죽했으면 싶기도 했다. 시헌이 알겠다고 대답함과 동시에 조용히 있던 인하가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서진아 있잖아, 이차로…….”

탁, 인하의 말을 끊기라도 하듯 시헌은 휴대폰을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헌의 통화 내용을 들은 서진은 시헌이 집으로 갈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새벽 한 시 반, 식당에 들어온 지 시간도 꽤 지났으니 정리하고 일어나도 큰 상관은 없었다. 시헌은 자신을 따라 일어나려는 서진을 향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됐어. 나 먼저 갈게.”

“같이 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낸 시헌은 턱 끝으로 인하를 향해 눈치를 줬다. 마신 건 비슷했지만, 인하는 술이 약한지 많이 취한 상태였다. 서진은 휘청거리는 인하의 허리를 붙잡아 반쯤 안았다.

“됐어. 내일 보자.”

시헌은 테이블 위에 뒀던 지갑을 챙겨 가게를 나왔다. 가게 밖으로 나가려던 시헌은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입구 옆 카운터로 돌아왔다. 바삐 카운터와 홀을 왔다 갔다 하던 알바생이 계산하러 온 줄 알고 시헌을 향해 테이블 번호를 물었다. 서진과 인하가 있는 테이블을 본 시헌은 한숨을 쉬며 카드를 꺼냈다.

“저쪽 테이블요. 먼저 계산해 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시헌의 카드를 받은 알바생이 빠른 속도로 계산을 마쳤다. 익숙하게 영수증을 버리려던 모습을 본 시헌이 손을 머뭇거렸다.

“영수증 주세요.”

“네.”

알바생이 버리려던 영수증을 카드와 함께 줬다. 계산을 마친 시헌은 카운터 앞에 놓인 대리기사 명함을 집어 들고는 가게를 나왔다. 멀리 단속 중인 경찰이 보였다.

생각 없이 집은 건데, 시헌은 한숨을 쉬며 전화를 걸었다. 5분 내로 도착하겠다는 연락을 받은 시헌은 바로 옆 편의점에서 담배를 계산했다. 카운터 옆에는 작은 라이터들이 줄지어 꽂혀 있었다.

“이거, 노란색은 없어요?”

“네?”

시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알바생이 되물었다. 뒷사람을 본 시헌은 괜한 소릴 했다며 손을 저었다. 단순히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린 것이라 생각한 알바생은 다시 계산에 집중했다. 계산을 마친 시헌은 편의점 유리벽에 몸을 기대 담배를 물었다. 주머니에서는 라이터와 함께 가게에서 나올 때 계산을 했던 영수증이 있었다.

보통 영수증을 챙기는 타입은 아닌데, 왜 가지고 왔나 싶었다.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시헌은 결국 영수증을 반 접어 지갑에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리기사가 왔다. 생각보다 젊은 청년에 남자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시헌이 차 키를 내밀자 별말 없이 키를 받았다.

“차, 이거예요.”

시헌이 반대편으로 가려는 기사를 향해 차를 손가락질했다. 시헌의 차를 본 남자가 또다시 묘한 표정을 지으며 시헌과 차를 번갈아 바라봤다. 남자는 차에 타 안전벨트를 매는 시헌을 보며 입을 열었다.

“차 좋은 거 타시네요. 외제차는 영 부담스러워서.”

“형 거예요. 몇 년 된 거라 사고 내도 상관없어요.”

“하하, 그게 또 막상 사고가 나면 틀리잖아요.”

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술에 취하긴 했지만, 대화를 못 할 정도로 피곤하다거나 기운이 없지는 않았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건 시헌도 마찬가지였다. 형이 심부름을 시켜서 급하게 집에 간다거나, 사실은 의대가 아니라 다른 과를 가고 싶었는데 집안이 의사라는 등. 시헌은 처음 만난 사이에 할 말이 아닌 대화들을 주고받았다.

이야기하면서도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까 싶었지만, 생판 처음 보는 남인데다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란 생각을 하니 이야기가 쉽게 나왔다. 술이 좀 들어간 것도 있었고. 덕분에 들은 것도 있다.

남자의 부인이 작년에 교통사고로 죽었고 내일이 1년째 되는 날이라든지, 중학생밖에 안 된 딸이 이주 후 제법 큰 수술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 같은 내용이었다. 그게 뇌종양 때문이라는 것과 수술을 J대 병원에서 한다는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주치의가 생각보다 젊어서 놀랐다, 솔직히 조금 걱정이 되긴 한다는 이야기에 시헌의 미간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 담당 교수님이요, 이름이?”

“이름이요? 음. 아, 박기욱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왜요? 학생이 아는 사람이에요?”

세상은 참 좁다. 기욱의 전화, 원래라면 계산할 생각이 없었던 계산을 하며 무의식중에 뽑아 든 대리운전 명함, 그리고 때마침 하는 경찰의 단속까지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하기보다는 어쩌면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한 필연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설령 한 번 보고 말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시헌은 발끝으로 차 앞을 살짝 건드렸다.

“이 차요. 형 거거든요.”

“그 말은 아까도 했잖아요.”

“아니, 형이요. J대 병원 신경외과 교수 박기욱요.”

핸들을 잡은 남자의 손이 잠깐 멈췄다. 타이밍을 놓친 차는 결국 다음 신호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하, 하고 남자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믿을 수 없는 건 시헌도 마찬가지였다.

“진짜예요.”

“그, 그렇군요.”

“잘되실 거예요.”

시헌이 아는 기욱이라면 말이다. 시헌의 말에 남자는 위로를 받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차는 기욱의 아파트 근처 골목에 도착해 있었다.

“사실은 오늘 친구들이랑 술 한잔하려고 나와서, 대리를 갈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거든요. 나오길 잘한 모양이네요.”

“따님 이름이 뭐예요?”

“한민아요.”

“형한테 얘기해 볼게요.”

“하하, 그래 주시면 저야 좋죠.”

주차하고, 시헌은 열쇠를 넘겨받았다. 아파트를 나가는 남자를 본 시헌은 등을 돌려 아파트 내부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실었다. 불을 켜고 시헌은 기욱의 방문을 열었다.

“하아…….”

어차피 집에 올 거면서 서류를 찾아 놓으라는 기욱의 말을 시헌은 기욱의 방문을 열기 전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걸리는 서류들에 시헌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오피스텔에 있을 때는 이 정도로 더럽진 않았는데, 기욱의 방은 온갖 책들이며 서류들로 정말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기욱이 말한 서랍을 여는 것도 고역이었다. 간신히 책들을 밀어내고 서랍을 연 시헌은 예상한 결과에 혀를 찼다. 서랍 밑으로 갈색 봉투가 깔려 있었다. 봉투 안에는 서류 말고도 USB와 CD가 들어 있었다. 시헌이 막 봉투를 가지고 밖으로 나오자 복도 너머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타이밍 하고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것도 시간이 아까워 벨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문을 거칠게 열었다.

“찾았어?”

기욱의 말에 시헌은 들고 있던 봉투를 허공으로 들어 보였다. 하, 혹시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모양인지 기욱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욱치고는 보기 드문 반응이었다. 시계를 슬쩍 본 기욱은 찬물을 따라 마셨다. 시헌은 거실 테이블 위로 봉투를 올렸다. 물을 마시며 기욱은 봉투 안을 확인했다.

“술 마셨어?”

“좀.”

“여자는?”

“둘이 있었던 거 아냐.”

금방 나갈 줄 알았더니. 시헌은 빨리 병원으로 가 버리라며 눈치를 줬다. 시헌의 눈치에 기욱은 모르는 척 어깨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그 모습이 좀 얄미워 서류를 괜히 찾아 줬나 싶기도 하고. 기욱은 여전히 시헌을 보고 있었다.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 상대를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건 기욱의 고질적인 습관이었다. 그 시선이 얼마나 상대를 부담스럽게 하는지 기욱은 모를 것이었다. 시헌은 지금쯤 가게를 나왔을 인하와 서진을 생각하며 못 이기는 척 입을 열었다.

“알아서 하겠지.”

“다시 갈 거면 가.”

“그냥 잘 거야.”

“그래.”

기욱이 자라며 손을 흔들었다. 방문을 연 시헌은 뭔가 할 말이 있다며 거실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다 마신 물을 내려놓고 서류를 팔 사이에 낀 기욱이 무슨 일인지 몰라 시헌을 봤다.

“형 한민아라고 알아?”

“누구야?”

“형 수술 명단에 있다는데. 다음 주.”

“아, 꼬맹이.”

꼬맹이라고 하는 기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환자의 얘기를 하는 기욱의 표정은 밝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시헌이 물었다.

“꼬맹이라니?”

“어린놈이 아주 못하는 말이 없더라. 근데 내 환자인 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뭐, 묻진 않겠지만. 쉬운 수술은 아냐.”

기욱이 들어가라며 손을 저었다. 시헌은 별 대답 없이 방문을 닫았다. 기욱은 테이블 위에 있는 디지털시계를 확인했다. 밟아서 온 만큼 병원에 가는 데는 여유가 있었다. 기욱은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

「어디야?」 오후 11:43

11시 45분, 팔짱을 낀 기욱은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1분 남짓한 수화음이 이어지더니 전화가 연결됐다.

― 여보세요? 서진이 휴대폰임당.

잔뜩 애교 섞인 여자의 목소리에 기욱의 목소리가 턱, 하고 막혔다. 여보세여? 머지? 아무런 말이 없는 휴대폰을 붙잡은 인하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술이 잔뜩 취했음을 알 수 있었다. 탁, 하고 기욱은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쥔 기욱의 손가락에는 서윤과 맞춘 반지가 있었다. 반지 끝을 만지작거린 기욱은 입술을 깨물었다.

서진이.

여자 친구 생겼던데.

“강서진…!!”

네가 감히.

* * *

기욱은 빠르게 병원 복도를 걸었다. 그런 기욱의 걸음에 맞춰 두 명의 의사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안녕하세요.”

몇몇 전공의들이 기욱을 보고 재빨리 인사를 했지만, 기욱은 그런 그들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인사를 한 의사들이 무슨 일이냐며 눈치를 주자 그들은 됐다며 손을 흔들었다.

눈치를 보기는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였다. 복도 끝에서 복도 끝으로 넘어갈 무렵 2년 차 레지던트―전공의 한 명이 다가와 기욱과 부딪쳤다. 고개를 숙인 그는 기욱을 알아보고는 인사와 동시에 말을 꺼냈다.

“박 교수님, 저 어젯밤 환자요…….”

“최 선생한테 말해.”

기욱이 옆에 있는 의사 한 명을 손가락질했다. 그가 한숨을 쉬며 질문을 한 전공의를 끌어냈다. 1년 동안 병원 생활 했으면서 눈치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후배였다.

기욱은 간호사 데스크에 있는 컴퓨터로 차트를 살폈다. 급하게 차트를 보고 있다고는 해도 어쩔 수 없이 보는 거라 눈에 하나도 들어오는 게 없었다. 기욱의 등 뒤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대요?”

“그 있잖아. 소아병동 중학생 환자. SICU에서…….”

“박 교수님이랑 제법 친했다고 그러더라. 안타깝게 됐어…….”

등 뒤로 들려오는 말에 기욱은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잘각였다. 기욱의 옆에 남아 있던 펠로우 한 명이 몸을 반쯤 돌려 눈치를 줬다. 그제야 좀 주변이 조용해졌다. 간호사 데스크 안쪽에서 사복을 입은 서윤이 나왔다. 기욱은 팔에 차인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도 안 가고 뭐 했어?”

벌써 다섯 시가 넘었다. 두 시에 퇴근하고 잔업을 했다 하더라도 너무 오래 남아 있었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오늘의 기욱은 생각 이상으로 예민했다. 무엇보다 오늘은 저녁에 신경외과 병동 회식이 있는 날이 아니던가. 아침에 출근한 옷차림 그대로인 서윤이 별일 아니라며 기욱에게 다가왔다.

“지금 하려고. 진호가 잠깐 환자 보러 가는 탓에 일이 밀린 거 있지?”

“진호?”

“한 교수님 밑으로 새로 들어온 펠로우 말야.”

“K대 임상강사 녀석?”

“응. 나랑 고등학교 동창이었거든. 의대 합격한 줄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또 반가운 거 있지?”

“흐음, 그래?”

멀리 옷을 갈아입은 남자 한 명이 뛰어왔다. 급하게 온 모양인지 목에는 아직도 병원 신분증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진호는 목에 있는 신분증을 빼 가방에 구겨 넣었다.

“미안, 늦었지?”

“아냐, 나도 이제 막 나왔는걸.”

늦어서 미안하다는 진호에 서윤은 괜찮다며 웃었다. 진호는 가운 차림의 기욱을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1살 차이, 생일이 빠른 기욱이 비록 진호보다 2년 빨리 의대에 들어왔다고는 하나 전문의가 되자마자 정교수가 된 기욱을 진호는 마냥 좋게 생각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기욱의 실력은 인정하나, 실력만으로 교수가 될 수 없는 것이 이 바닥 현실이었다.

병원장의, 교수의, 기욱의 집안이 미치는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진호는 무엇보다 그 거만한, 사람을 깔보는 것 같은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암묵적으로 서로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진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열등감을 느껴야만 했다. 왜 이런 놈이랑 서윤이 사귀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좋다는 걸 동창이라는 이유로 말릴 권한은 없었다. 진호는 기욱을 향해 적당히 고개를 숙였다.

“가자. 그럼, 박 교수님. 퇴근하겠습니다.”

“서윤아.”

진호의 인사를 적당히 들은 척한 기욱은 알겠다는 대답 대신 간호사 데스크를 나온 서윤을 불렀다. 기욱은 급하게 나와 휘청거리는 서윤의 몸을 붙잡았다. 기욱은 목 아래로 흐트러진 서윤의 머리카락을 잘 정리해 뒤로 넘겼다.

“조심 좀 해.”

“미안, 오빠.”

“너무 늦게 들어가지 말고. 아, 한 선생. 동창이라면서? 우리 서윤이가 술이 취하면 못하는 말이 없어서. 어쨌든 잘 좀 부탁할게.”

“오빠도 참! 적당히 마신다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진호가 가자며 서윤을 데리고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볼일을 보러 갔던 다른 의사들이 기욱에게 다가왔다. 기욱은 멀어지는 서윤과 진호를 보더니 등을 돌렸다. 기욱의 옆에 있던 규건이 담담하게 물어왔다. 기욱의 의대 후배이자, 기욱과 같은 뇌신경외과 1년 차 펠로우인 규건은 병원 내에서 기욱에게 편하게 말을 걸 수 있는 몇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선배, 무슨 일 있으셨어요?”

“없어.”

기욱이 간호사 데스크에서 생각 없이 가져온 차트를 휘둘렀다. 기욱이 휘두른 차트를 막아 낸 규건이 의국으로 걸음을 옮기는 기욱의 옆에 섰다.

“혹시 회식 못 가셔서 그래요? 그럼 저희끼리… 할까요?”

마침 지나가는 의사들의 눈치를 본 규건이 자연스럽게 손목을 움직여 마시는 시늉을 했다. 듣다 못한 기욱이 다시 차트를 규건 쪽으로 던졌다.

“마실 거예요, 안 마실 거예요?”

“얼마나 있는데?”

“좀 있어요. 한 교수님도 안 계시는데 오늘 같은 날 아니면 이런 기회 드물다구요!”

그놈의 한 교수. 레지던트 시절부터 지긋지긋했다. 기욱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마음대로 하라며 소리를 질렀다. 기욱의 허가가 떨어지자 뒤쪽에 있던 레지던트 의사들도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걸었다.

“최 교수님 저도 좀…….”

“저 전문의 시험 준비하느라 술 안 마신 지 오래됐단 말이에요.”

“흐음, 어떻게 할까?”

“와, 진짜 너무한다, 너무해. 교수님이 사 온 것도 아니면서, 독잽니다. 독재.”

“야! 시끄러! 먼저 찜한 사람이 임자지!”

우우, 하고 근처 전공의들이 불만을 표시했다. 담당 교수인 기욱이 젊은 탓인지 다른 교수들과 달리 벽이 얇은 편에 속했다. 그건 그거대로 몇몇 의사들에게 욕을 먹고 있긴 했지만, 기욱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결국 남아 있는 사람은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 술을 마시기로 결정이 났다.

그래 봤자 캔 맥주 몇 병에 낮에 먹다 만 간식과 병원 편의점 문이 닫히기 전 아슬아슬하게 뛰어가 급하게 사 온 과자들이 전부인 술자리였다. 술보다 과자나 음료수가 더 많은 것이 술자리라고 하기보다는 과자 파티에 가까웠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기욱은 반쯤 남은 캔 맥주를 들고 일어났다.

“어? 교수님 어디 가세요?”

“바람 쐬러.”

“그거 들고 가시면 안 되는 거 알잖아요.”

“알았어. 알았다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콜해.”

기욱이 과자 봉투 사이로 캔 맥주를 탁, 하고 올려놓았다. 마침 맥주가 부족해 서로 싸우고 있었다. 기욱이 맥주를 놓기 무섭게 서로 마시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야! 여기 나보다 높은 사람 있어? 내놔.”

“교수님 아까 혼자 한 캔 다 드셨잖아요!!”

“선배님 저 얼마 전에 결혼한 거 아시잖아요. 와이프 애 낳고 처음 마시는 술이라구요.”

“2년 차가 어딜 껴들어?”

“2년 차는 뭐 말도 못 합니까?”

“어쭈 이거 봐라? 니네 진짜 다 죽을래?”

고작 맥주 하나 마시겠다며 집에 있는 와이프며, 여자 친구, 시골에 계신 부모님까지 언급하며 떠들어 대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잘들 논다, 잘들 놀아.”

이러다간 정교수인 기욱에게 맥주를 누가 마실 것인지에 대한 결정권이 넘어갈 분위기였다. 의국에 있는 의사들이 인정하는 기욱이니 기욱이 정하는 일이라면 불만이 없을 것은 사실이지만 기욱은 괜한 일에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 서둘러 의국을 나왔다.

새벽의 복도는 썰렁했다. 규건의 말처럼 가끔은 이런 날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싶었다. 무작정 걸음을 옮긴 기욱은 1층 외래 대기실까지 내려왔다.

군데군데 켜진 비상등만이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빈 의자에 적당히 앉으려던 기욱은 의자 안쪽에서 꿈틀거리는 물체에 몸을 피했다. 하마터면 모르고 깔고 앉을 뻔했지 않나.

기욱의 움직임에 길게 늘어진 환자용 의자에 앉아 가운을 덮고 잠을 자고 있던 의사가 몸을 일으켰다. 의사의 얼굴을 덮은 가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엉망이 된 머리를 긁으며 바닥에 있는 가운을 집어 들었다.

“야, 안윤성. 일 없으면 깨우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냐. 당직의고 나발이고 좀 내버려 두면 어디가 덧나…….”

“…….”

“…….”

“여기서 뭐 하고 계신 겁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소린데.”

기욱을 알아본 정혁이 주변을 둘러봤다. 정혁은 그제야 제가 잠들고 있던 곳이 신경외과 외래 병동 환자 대기실이라는 걸 알았다. 의자에서 일어난 정혁이 진료복 위로 구겨진 가운을 걸쳤다. 엉망인 정혁의 꼴을 본 기욱이 비아냥거렸다.

“대학병원 교수가 외래 병동에서 땡땡이라니 참 대답하십니다.”

“그러는 새벽에 애들 모아서 술 마시는 건 안 대단하고?”

정혁도 지고 있지만은 않았다. 기욱이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을 짓자 정혁은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아낸 것처럼 어께를 들썩였다. 마침 정혁의 휴대폰으로 연락이 와 있었다. 하여튼 이놈의 타이밍은 매번 참 기가 막혔다. 기욱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니네 소문 다 났어 임마. 누군진 모르지만 입단속 좀 시켜라. 그럼, 난 간다. 잘 자라.”

기욱이 몰래 자러 온 걸로 착각한 정혁은 기욱의 등을 툭툭 친 뒤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정혁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기욱은 로비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정혁은 이런 불편한 데서 잘도 자는구나 싶었다. 잠을 잘 생각보다는 잠을 깰 생각으로 왔던 기욱은 휴대폰을 열었다.

* * *

기욱은 서진의 집 근처 골목에 차를 댔다. 서진의 집까지는 조금 더 가야 했다. 일부러 거리를 둔 기욱은 차의 앞 유리 너머로 반지하가 있는 개인 주택의 철문을 보고 있었다.

이른 새벽, 출근을 하는 몇몇 직장인들은 낯선 외제차를 슬쩍 바라보고는 무심하게 지나갔다. 차를 앞으로 대려던 순간 기욱의 휴대폰이 울렸다.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기욱이 전화를 받았다.

ㅡ 왜?

ㅡ 아뇨, 안 보이시길래. 벌써 퇴근하셨나 하구요.

ㅡ 끊어, 피곤해.

ㅡ 예. 저녁에 봬요.

퇴근했다는 기욱의 대답에 규건은 별다른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기욱은 반지하방 옆에 적당히 차를 댔다. 차 문을 열고 나온 기욱은 닫혀 있는 유리문 너머를 거칠게 두드렸다. 요란하게 쿵쿵대는 소리에 불이 켜진 거실 안쪽에서 사람이 나왔다. 누구세요? 문 안쪽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기욱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문을 두드리는 걸 멈춘 기욱이 입을 열었다.

“강서진, 문 열어.”

달각, 하고 잠금장치가 풀렸다. 인하가 문을 열기도 전에 기욱의 손이 먼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활짝 열리는 문에 놀란 인하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내뺐다. 무섭게 거실을 둘러보는 기욱의 모습을 경계한 인하가 문고리를 바깥으로 밀며 기욱을 경계했다.

“당신 누구예요?”

“…….”

“누구냐구요.”

반지하의 특성상 약간 아래로 꺼진 방에 기욱은 문고리를 쥐고 있는 인하를 내려다봤다. 늘어난 검은 티셔츠 사이로 붉은 브래지어 레이스가 그대로 보였다. 뒤늦게 가슴골이 드러난 걸 눈치챈 인하가 얼굴을 붉히며 옷을 여몄다.

얼굴을 붉히며 노려보는 인하에 기욱은 하, 하고 코웃음을 쳤다. 긴 생머리에 깔끔한 외모, 적당한 몸매, 현관에는 인하가 신고 온 높은 하이힐이 옆으로 뉘어져 있었다. 인하의 덜 마른 머리카락이 티셔츠 위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거실 안쪽에 있는 화장실에서 나던 물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약간 열린 문틈 사이로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누구 왔어?”

“어? 그게 그…….”

정체 모를 남자―기욱을 본 인하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머뭇댔다. 그사이 기욱은 문을 강제로 열고 멋대로 집 안까지 들어왔다. 거실로 나온 서진의 손에 들린 수건이 발밑으로 떨어졌다. 기욱의 등장에 놀란 서진이 허둥대며 떨어진 수건을 집어 들었다.

“대체 왜…….”

“서진아, 아는 사람이야?”

영문을 모르는 인하가 쪼르륵 뛰어가 서진의 옆에 붙었다. 서진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걸로도 부족해 불안한 마음에 허리를 안는 모습이 한두 번의 스킨십으로 이뤄질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서진 또한 저에게 안기는 인하를 자연스럽게 생각해 잠시 잊고 있었다. 한발 늦게 기욱이 있다는 걸 눈치챈 서진이 약간 떨어지라며 눈치를 준 뒤 인하를 밀어냈다. 서진이 기욱의 앞으로 다가갔다. 서진의 말리지 않은 머리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분명 어렸을 때는 좀 더 키 차이가 났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내려다보는 시선의 차이가 생각보다 적어졌다. 서진의 넓어진 어깨와 서진을 걱정하는 인하의 표정을 본 기욱은 점점 안색을 굳혔다.

이제 저도 남자라고.

“보내.”

“무슨 일인데요.”

“보내라고 말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잖아요.”

“내가 못 할 것 같아?”

서진을 지나친 기욱이 인하의 앞으로 다가갔다. 서진에 비해 덩치가 큰 기욱이 손을 뻗자 깜짝 놀란 인하가 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서진이 기욱의 팔을 붙잡았다. 서진의 손을 뿌리치고 인하를 쫓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해요.”

기욱은 팔에 힘을 빼며 손을 내렸다. 동시에 인하가 소리를 질렀다.

“저기요! 다,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아, 아침부터 남의 집에서……. 계속 이러면 경찰 부를 거예요!”

“강서진!!”

기욱은 경찰을 부르겠다며 협박하는 인하를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좁은 반지하방을 크게 울릴 정도의 외침에 인하는 물론, 이름을 불린 서진 또한 깜짝 놀랐다. 감정의 변화가 거의 드문 사람이었다. 화를 내더라도 이런 식으로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기욱의 등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건 인하뿐만이 아닌 서진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기욱을 이렇게 화나게 만들었는지 또한.

“젠장.”

기욱과 말싸움을 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눈치챈 서진은 입술을 잘게 깨문 뒤 인하를 큰방으로 밀어 넣었다.

“미안한데 먼저 가야겠다. 옷 빨리 갈아입어.”

“뭐? 내가 왜? 서진아, 대체 뭔데?”

“나중에 다 설명해 줄게. 그러니까 일단 먼저 가. 알겠지? 걱정하지 마.”

서진은 불안해하는 인하를 달랬다. 계속되는 서진의 재촉에 못 이긴 인하는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은 뒤 가방을 챙겨 거실로 나왔다. 인하는 집을 나가는 순간까지 서진이 걱정스러웠다.

“무슨 일인지 꼭 말해 줘야 돼. 알겠지?”

“알았어.”

서진은 인하가 나가기 무섭게 집 문을 잠갔다. 기욱은 좁은 집 안을 빠르게 훑었다. 서진의 작은 방을 멋대로 둘러본 기욱은 침대가 있는 서윤의 큰방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정리가 덜 된 방, 늘어진 침대 시트와 바닥에는 치우지 못한 옷가지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큰방으로 들어온 기욱의 발밑에는 뜯어진 콘돔 봉투 조각이 남아 있었다. 비닐 조각을 집어 든 기욱은 집 안의 거실에 있는 쓰레기통 앞으로 다가갔다. 멋대로 집 안을 뒤지고 다니는 기욱의 행동을 참지 못한 서진이 입을 열었다.

“지금 대체 뭐 하는……!!”

“섹스했어?”

“씨발. 돌았어요?”

기욱의 손가락 끝에서 어젯밤 서진이 사용한 콘돔이 나왔다. 늘어진 콘돔을 본 서진은 불쾌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연락도 없이 집에 쳐들어온 걸로도 부족해서, 정색을 하고 그런 말을 하니 화가 나는 건 당연했다.

“했어요. 근데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강서진. 씨발, 말 예쁘게 해라.”

“하, 먼저 그런 식으로 말한 게 누군데요.”

기욱이 서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같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큰 어깨가, 잘 다부져진 몸이, 평범한 20대 청년에 지나지 않는 서진을 위협했다. 서진은 지지 않겠다며 주먹을 쥐고 기욱과 눈을 마주쳤다.

차 안에서 멋도 모르고 했던 키스 하나에 놀라 잠을 이루지 못한 그 시절의 서진이 아니었다. 기욱 앞에 선 서진은 더 이상 중, 고등학교 시절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이젠 대학생이고, 성인 남성이었다. 원하면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고, 마음이 맞으면 잘 권리도 있었다. 기욱이 보기엔 21살인 서진도 어렸지만, 서진은 아직도 고등학생 보듯 보는 기욱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욱은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어쩌면 근본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며.

“사춘기야? 늦바람 났어?”

“애 취급 하지 마시고 온 용건이나 말해요. 나 강의 지각하면 안 돼요.”

“묻는 말에 대답 안 하지.”

기욱은 자신을 지나쳐 가려는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여전히 한 손에 붙잡히는 얇은 손목, 보잘것없는 힘. 이런 주제에 꼴에 남자라고 우기는 것이 기욱은 우스웠다. 서진은 엄청난 악력에 악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인상을 구겼다. 기욱은 서진을 벽으로 몰아붙인 뒤, 턱을 들어 올렸다.

“저런 게 취향이야? 좋았어? 섹스했다며. 어? 강서진, 어디가 좋았는데? 얼굴? 가슴? 허벅지? 응? 말해봐.”

도를 넘는 질문에 서진은 있는 힘을 다해 기욱의 손을 뿌리쳤다. 마침 기욱이 힘을 풀고 있었던 것도 있고, 갑자기 쏟아지는 힘을 이길 수 없었던 탓도 있었다. 서진은 기욱에게 붙잡힌 팔을 만지작거렸다. 얼마나 강하게 붙잡았는지 그사이 붉은 자국이 남았다.

이 사람은 이렇다.

중학교 시절 아무것도 모르던 저를 차 안에서 몰아붙일 때도, 예고도 없이 집을 찾아오는 지금까지도 변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변한 것 없이 제멋대로이고, 강압적이고, 이기적이었다. 기욱과의 이상한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가 서윤 때문이라 해도 참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연인도 아닌 주제에. 서진은 기욱의 태도에 현기증이 났다. 언제까지 당하고 살 수만 없다는 생각에 서진은 입을 열었다.

“사, 상관없잖아요.”

“…….”

“내가 누굴 사귀든.”

“뭐, 라고?”

서진은 선을 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결코 자기중심적인 기욱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것도,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알았다. 예상대로 기욱은 한동안 서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입을 뻐끔거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성인이라고 해도, 기욱의 앞에 서면 서진은 작아졌다.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박기욱이라는 사람은 서진을 그렇듯 비참하게 만들었다. 서진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욱의 눈치를 살폈다.

“해 달라는 대로. 다, 다 했잖아요.”

“그래서?”

“여, 여자 친구 정도는……. 맘대로 사귈 권리가 있는 거…… 잖아요.”

“…….”

“알았으면 이제 그만…!!”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고 큰방으로 들어갔다. 순간적으로 잡아당긴 팔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서진의 입에서 악,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기욱은 서진을 침대 위로 내던졌다. 정리가 되지 않은 침대는 어젯밤 정사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아무리 서윤이 회식을 갔다고 하지만 누나의 방에서 여자 친구와 섹스를 한 서진도 서진이었다. 어리면 눈에 뵈는 것이 없다더니 딱 그 격이었다. 기욱은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서진의 위로 올라탔다. 무릎 위에서부터 느껴지는 묵직한 몸무게에 서진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기욱은 서진이 더 난동을 부리기 전에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뭐 하는 짓…….”

― 기욱 오빠?

“누나…? 읍.”

서진은 재빨리 입을 막았다. 본능적으로 같이 있다는 걸 걸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서진은 끊으라며 입 모양을 움직였으나 기욱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벙어리처럼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답답했다. 기욱은 휴대폰 음량을 최대로 높였다.

― 강서윤 너 지금 어디야.

― 어? 오, 오빠 그게 지금……. 벌써 퇴근했어?

“…어요. 끊으라고요.”

서진이 목소리를 낮춰 말을 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전화를 받지 않은 기욱의 손이 자연스럽게 서진의 옷 안쪽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통화 내용을 파악하랴, 기욱의 손을 밀어내랴 밑에 있는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사이 기욱의 언성이 올라갔다.

― 밤에 전화 안 받은 건……. 하, 그래 회식이니까 그랬다 치자. 근데 아무리 술 처먹었다 해도 그런 영상은 아니지 않아?

병원에서, 기욱은 다른 의사들끼리 휴대폰을 보고 떠들고 있던 장면을 목격하고 오는 길이었다. 노래방에서 정신없이 노는 무리 중에는 서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남자의 옆에 앉아 있는 서윤은 기욱을 자못 불쾌하게 했다.

사실, 평소라면 불쾌할 일도 없지만. 서진이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이유 때문인지 짜증이 배로 나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기욱은 서윤이 얼마나 자신에게 충성적인지를 알고 있었고, 기욱의 말은 결국 트집에 지나지 않았다.

― 그건……. 진아가 멋대로 그런 거라. 나, 난 정말 몰랐어. 오, 오빠 봤어?

― 씨발, 지우면 그래도 된다 이거지? 강서윤, 너 거기 어디야. 어디냐고!

서진은 기욱이 뭘 따지는지 서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한 건 통화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비록 전화상이지만 두 사람의 싸움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서진은 일방적으로 언성을 높이는 기욱의 태도에 인상을 찌푸렸다. 둘 사이에 뭔가의 오해가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기욱이 유독 물고 늘어지고 화를 내는 이유가 마치 자신 때문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서윤의 휴대폰 너머로 잠시나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은 기욱의 집에 있는 게 아닌가? 서진 또한 서윤이 어디 있는 건지 궁금했다. 짧은 남자의 목소리, 휴대폰 너머로 딱 한마디였지만 그 목소리가 워낙 특징적이었던 탓에 기욱은 그가 누군지 단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유진호지? 너 동창이라고 했던 애. 강서윤, 너 지금 그놈이랑 같이 있어?

― 오, 오빠 오해야. 정말 아무 일도 없었……. 자, 잠깐만 진호야!

― 여보세요? 박 교수님, 저 한진호입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 서윤이랑 아무 일 없었습니다.

― 줘. 진호야.

― 좀, 있어 봐.

수화기 너머 휴대폰을 가지고 서로 싸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언성이 올라가는 두 사람에 기욱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기욱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서진은 기욱의 밑에서 빠져나와 침대 헤드 쪽으로 몸을 붙였다.

휴대폰을 빼앗을까 생각을 했는데 도무지 그럴 만한 상황 같아 보이지 않았다. 기욱은 서윤과 진호가 싸우는 틈을 타 몰래 빠져나간 서진의 다리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늘어진 침대 시트와 함께 서진의 몸이 아래로 끌려갔다.

다리를 잡힐 거란 생각을 하지 못한 서진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기욱은 빠르게 서진의 위로 올라탔다. 서진은 이 상황에도 여전히 저를 묶어 두려 하는 기욱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 하…….”

“쉿.”

기욱은 전화가 연결된 휴대폰을 들이밀며 다른 한 손으로 서진의 입을 막았다. 말이 쉿, 이었지 하는 행동은 입을 닥치라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서진을 내려다보며 전화를 거는 기욱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서윤이 전화를 다시 받았다. 밖으로 나온 모양인지 진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서윤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으로 보였다.

― 기욱 오빠? 듣고 있지? 진호는……. 정말 오해야. 진호 말로는 오빠한테 연락했다고 하는데 오빠가 전화를 안 받았다고 그랬다고…… 진짜 지금 어디야?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만나서 얘기하자.

― 하아, 강서윤. 변명하지 마.

― 변명이 아니라 진짜… 오빠…. 그게 아니라…… 제발, 진짜 내 말 좀…….

휴대폰 너머 서윤이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듣고 있던 서진의 표정 또한 구겨졌다. 여전히 기욱의 손에 반쯤 입이 막힌 서진은 엉망이 된 침대 시트를 쥐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연인 사이에 아무 일도 없을 리가 없으니까.

아무리 서진이라 해도 둘에게 일어나는 일까지 개입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만약 기욱이 일방적으로 서윤을 몰아붙이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면? 휴대폰 너머 서윤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동시에 서진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반지하방의 습기 탓인지 기욱의 이마로 땀이 고였다. 기욱은 새벽에 썼던 수술 모자에 눌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 서윤아, 강서윤!

― 오, 오빠… 왜 무섭게 소리를 지르고 그래….

― 그만하자.

― 뭐, 라고? 오빠 잠깐…!

툭, 전화가 끊겼다.

“씨발 새끼!”

전화가 끊기기 무섭게 참고 있던 서진이 소리를 질렀다. 서진은 기욱의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기욱은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침대 밑으로 내던졌다. 침대 밑에는 어젯밤 서진이 벗어 던지고 치우지 않았던 옷이 그대로 있었다.

휴대폰을 따라 침대로 내려가려는 서진을 붙잡아 누른 기욱의 다른 손이 서진의 목에 닿았다. 목을 감는 커다란 손도 손이었지만, 정확히 기도를 압박하는 기욱의 손에 서진의 몸이 비틀렸다. 기욱은 숨이 막히지 않을 정도로만 손의 힘을 풀었다. 눈가가 빨갛게 변한 서진의 다른 손이 기욱의 팔을 붙잡았다.

“…해. 자, 잘못한 거라고 해. 실수한 거라고 하라고!!”

“내가 왜?”

기욱은 서진의 명령 아닌 명령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건, 화를 누르고 있었던 것은 서진뿐만이 아니었다. 서진의 집에서 나온 인하를 보는 순간, 서진의 허리에 안겨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본 순간부터 기욱의 필름은 반쯤 끊겨 나간 상태였다. 그런데 누가 누구한테 감히 명령해. 서진에게 붙잡힌 팔에서 떨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야, 약속했잖아. 내가 참으면……. 나만 참으면, 누나한테 안 그러겠다고 약속했잖아!! 지금 당장 말해. 전부 다 실수한 거라고!”

기욱이 서진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동시에 기욱의 몸도 서진에게 다가갔기에 두 사람은 금방이라도 이마를 댈 것 같은 거리에 다가와 있었다. 기욱의 검은 눈동자가 서진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강서진이라는 사람은, 눈앞에 있는 존재는 어딘가 하나씩 거슬렸다. 생김새나 하는 행동만 보면 길거리에 차일 정도로 평범하거나, 또래 나이대와 다를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하나씩은 달랐다. 그 사소한 다름이 기욱을 미치게 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여자를 안는 것도, 남자를 가지기도 쉬웠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 모든 게 서진을 만나면서, 정확히는 모텔 주차장에서 여자와의 섹스를 신고했던 빌어먹을 꼬맹이가 눈앞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내면서부터 그랬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만큼 간단한 것도 없다. 서진이 그렇게 따르는 서윤 또한 기욱에게 있어서 다를 건 없다. 그게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단 한 사람 서진뿐이었다. 그건 기욱에게 있어서 커다란 자존심의 상처임과 동시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기욱이 낮게 잠긴 입술을 뗐다.

“넌 내 거야. 그런데 누가.”

“…….”

“멋대로 여자 같은 걸 만들어도 좋다고 했지?”

“그러니까……. 사, 사귀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당신이 여자에게 화낼 줄도 몰랐……. 자,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누나한테…….”

여자 친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기욱은 곧바로 서윤의 얘기를 꺼내며 매달리는 서진을 비웃었다. 누나―서윤을 향한 병적인 집착. 기욱은 서진의 그런 집착을 바로잡을 마음도 동정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사람은 원래 다들 그렇게 제멋대로다. 상식적인 척, 정상인인 척 두꺼운 가면을 쓰고 살아갈 뿐이었다. 그 사람이 그럴 줄은 몰랐어요. 같은 건 하등 쓸모없는 변명거리였다.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네가 그 사람을 몰랐던 것뿐인 일이다. 지금은 그래, 서진을 손안에 둘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기욱은 서진이 자신을 원망하는 것보다, 강서진이라는 존재가 제 곁을 떠나는 것이 더욱 두려웠다. 기욱은 서진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있는 힘껏 침대 위로 내던졌다. 서진의 몸이 침대 위로 떨어지며 침대가 흔들렸다. 기욱은 떨고 있는 서진을 보며 소매를 말아 올린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그딴 짓거리 하면.”

기욱은 반쯤 풀다 만 셔츠를 두고 서진의 팔을 다시 잡아당겨 이마를 맞췄다.

“다음번엔 그년 앞에서 범해 주지.”

“무, 무슨…….”

“못 할 것 같아?”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기욱이 서진을 하루 이틀 본 것이 아닌 것처럼 서진 또한 기욱을 하루 이틀 봐 온 것이 아니었다. 두 번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기욱은 보기와 달리 입 밖으로 꺼낸 말은 반드시 지키는 타입이었다. 예상치 못한 발언에 서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기욱은 남은 셔츠의 단추를 마저 풀었다.

“강서진, 옷 벗어.”

* * *

방 안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서진의 몸이 꿈틀거리며 앞으로 밀려났다. 밀려날 곳이 없는 서진의 손은 침대 헤드 너머의 벽을 짚고 있었다. 벽을 짚은 손은 금방이라도 아래로 흘러내릴 것처럼 떨려오고 있었다.

“아으윽!!”

대비도 하지 못할 고통에 서진은 비명 아닌 신음을 내질렀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괴로웠다. 기욱이 서진의 안을 찌르고 들어올 때마다 서진의 고개가 위에서 아래로 흔들렸다. 엉망이 된 시트와 이불 위에 얼굴을 묻은 서진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퍽, 하고 서진의 안을 빠르게 빠져나갔던 기욱의 페니스가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만, 제발… 그만…! 으윽…!”

서진의 허리를 붙잡아 당긴 기욱이 급격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안에서부터 흔들리는 느낌에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서진을 허벅지 위로 올린 기욱이 입술을 맞췄다. 서진의 안에 있던 페니스를 타고 흘러내린 기욱의 정액이 허벅지 아래를 축축하게 적셨다.

“여자랑 하니까 좋았어? 어?”

“씨발, 그걸… 하으윽… 말이라고…….”

“좋았냐고 묻잖아.”

“흐윽, 윽… 아. 아파…… 아흐윽!”

온몸이 짜릿하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욱이 말을 걸고 있다는 걸 인식은 했지만,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강의는 진작 늦은 뒤였다. 강의고 나발이고 학교에 갈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기욱은 들썩이는 서진의 허리를 붙잡아 눌렀다. 뿌리까지 들어오는 페니스에 목 끝에서부터 숨이 막혔다. 가슴을 지분거리던 기욱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와 서진의 페니스를 감쌌다.

“그, 그만. 하, 하지 마… 제발…… 흐읏….”

서진이 페니스를 올린 기욱의 손을 밀어내려 했으나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기욱이 허리를 크게 움직이자 서진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쳐졌다. 벌려진 입 사이로 고인 타액이 턱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기욱은 서진이 느끼는 지점을 향해 허리를 움직였다. 기욱의 손끝이 서진의 앞을 막았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았던 서진의 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강서진, 이쪽 봐. 하, 흐읏….”

“하아윽!”

기욱이 사정함과 동시에 서진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지르며 축 늘어졌다. 앞을 막은 탓에 완전히 사정하지 못한 서진은 마치 약에 취한 사람처럼 제정신이 아니었다. 꼿꼿하게 서 있는 서진의 페니스 끝에서 묽은 액이 흘러내렸다.

기욱은 본능적으로 페니스를 쥐려는 서진의 손을 쳐낸 뒤 서진을 바로 앉혔다. 서진의 몸은 바람이 빠진 인형처럼 기욱의 손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렸다. 창문 틈 사이로 보이는 밖이 너무나 밝았다. 그러나 낮인지 아침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환청 같았다. 좁은 천장의 전등이 평소보다 무척 높아 보였다. 기욱이 멍하니 서 있는 서진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기욱의 손에 의해 강제로 몸을 숙인 서진의 뺨에 정체 모를 뭔가가 닿았다.

여전히 질척한 정액이 그대로 묻어 있는 기욱의 페니스에 서진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몸을 아래로 눌렀다. 입 근처를 닿을 듯 말 듯 왔다 갔다 하는 기욱의 페니스에 서진이 눈을 살짝 위로 들었다. 기욱이 등과 어깨를 누르고 있는 탓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빨아.”

“무슨…… 읍! 당신 진짜! 미, 미쳤어요?”

서진이 입을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자도 아니고. 정신이 나간 것도 정도가 있었다. 침대 아래로 몸을 숙인 기욱은 던져두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몸을 들려는 서진의 시야에 기욱의 휴대폰 화면이 들어왔다. 부재중 전화 24건, 문자 메시지 30건, 마침 서윤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서진이 손을 뻗으려 하자 기욱은 휴대폰 배터리를 분리했다.

“개새끼…!”

“욕할 처지가 아닐 텐데. 강서윤이랑 나랑 끝장나는 꼴 눈앞에서 보고 싶어?”

기욱이 서진을 내려 봤다. 거만하고, 오만하며 제멋대로인 시선이 서진은 진절머리가 났다. 서진은 그 시선을 느끼며 기욱의 다리 사이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기욱과 섹스를 해 왔지만 이런 식으로 나선 적은 없었다. 잘 다부져진 몸과 마찬가지로 기욱의 페니스는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기욱의 페니스를 자세히 본 적은 드물었던 서진은 이게 어떻게 자신의 안에 들어갔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입에 넣는 것은 무리였고,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서진이 그런 생각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기욱은 서진의 머리채를 잡아 다리 사이로 밀어 넣었다.

억지로 밀고 들어오는 기욱의 페니스에 서진은 속 안쪽에서부터 뒤집어질 것 같은 역겨움이 느껴졌다. 서진이 계속 입을 열려 하지 않자 머리채를 잡는 기욱의 손이 거칠어졌다.

“끝까지 입 안 열지?”

참다못한 기욱이 손을 놓고 어딘가로 나갔다. 기욱은 방 안에 있는 서진의 휴대폰을 가지고 왔다.

“남의 휴대폰으로 뭐 하는…!”

“0514. 강서윤 생일.”

“…….”

“넌 예전부터 항상 이 비밀번호였지. 있네. 씨발년, 서인하? 이름이 인하야? 왜? 전화라도 걸어 줄까? 걱정 많이 하는 것 같던데.”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부탁이니까……. 하지 마.”

기욱에게서 휴대폰을 빼앗을 수 없다는 걸 안 서진이 침대 위로 무릎을 꿇었다. 기욱이 그런 서진의 턱을 들어 올리며 입술을 맞췄다. 키스를 한 기욱이 땀에 젖은 서진의 짧은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웃었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해 줄 때 잘하라고.”

“…….”

“다음엔 강서윤이야.”

기욱의 말에 서진의 심장이 점점 빨라졌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정말로 그 말을 실천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는 것을 잘하는 만큼 기욱은 상대를 바닥까지 추락시키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서진은 침대 끝으로 올라온 기욱에게 기어가다시피 하며 다가갔다. 보이지 않는 기욱의 손이 서진의 머리며 온몸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서진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숙여졌다. 눈을 질끈 감은 서진은 기욱의 커다란 페니스를 입안으로 넣었다.

“으읍… 윽….”

“똑바로 해.”

기욱이 서진의 등허리를 쓸어 올리며 다독였다. 남자인 서진이 남자의 것을 핥아 본 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혀로 끝을 핥자 묻어 있던 비릿한 정액 향이 코를 찌르며 서진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서진의 움직임에 기욱은 약간 움찔거릴 뿐 별다른 미동은 없었다. 서진은 억지로 기욱의 페니스를 입안에 머금었다. 다 들어가지 않는 페니스에 입안이 꽉 막혔다.

“흐읍… 뭐 하는…! 읍….”

기욱의 다른 손이 서진의 엉덩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미 몇 번이고 사정을 한 탓에 기욱의 손가락은 생각보다 서진의 안으로 쉽게 들어갔다. 서진이 입안에 머금은 페니스를 빼려 하자 명령에 가까운 기욱의 목소리가 머리 위로 들려왔다.

“빼기만 해 봐.”

“으읍… 윽… 하읍….”

빼면 어떻게 되는지.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말 한마디는 충분히 서진에게 위협이 되었다. 기욱의 손가락에 서진의 몸이 흔들렸고, 몸이 흔들릴 때마다 입안에 머금었던 페니스가 입안을 쿡쿡대며 찔렀다. 아무리 코로 숨을 쉰다고 하지만 반복되는 행위에 서진은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기욱이 손가락을 뺀 뒤 서진의 몸을 눕혔다. 뭐라 할 틈도 없이 빠르게 한쪽 다리를 위로 벌린 기욱이 서진의 안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예고도, 배려도 없는 섹스에 서진은 악,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기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윽, 하으윽… 윽, 흐으읏!!”

싫다. 차라리 정신을 잃는 것이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이 들었다. 기욱은 서진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서진의 몸을 돌린 기욱은 또다시 멋대로 허리를 움직였다.

철벅, 하고 살이 맞닿는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기욱이 사정할 때마다 서진의 몸 또한 움찔거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기욱의 페니스가 빠져나간 자리로 정액이 남아 있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기욱과의 섹스가 늘 힘이 들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오래간 적은 거의 없었다. 여자 친구를 사귄 것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인하를 사귈 때 일순 기욱의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 정도 자유는 있다고 생각했었다.

착각이었다. 서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고 있는 박기욱이라는 늪은 서진의 생각 이상으로 깊고, 아득했다. 개미지옥처럼 한번 들어가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기욱은 서진의 머리를 잡아당겨 다시 다리 사이로 이끌었다. 뺨 사이로 닿는 페니스에 서진은 결국 눈물을 흘리며 부탁했다.

“…어. 싫어요. 제발…… 그만해요!! 흐윽… 흑….”

“강서진.”

“잘못했어요. 자, 잘못했어요. 헤어질 테니까 여자 친구랑 헤어지든 뭐든 할 테니까 제발, 이 이상은……. 모, 못 해요. 못 하겠다구요…!”

“말 안 듣지? 먼저 시작한 건 너야.”

기욱이 서진을 잡아당겨 무릎 위로 올렸다.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페니스가 다시 서진의 안을 메우기 시작했다.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긴 뒤 허리를 움직였다. 서진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지만 기욱이 잡은 팔 때문인지 벽에 머리를 부딪치지는 않았다. 계속되는 행위에 정신이 혼미해질 것만 같았다. 섹스가 아니라 고문에 가까운 짓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서진은 기욱에게 반항할 수 없었다.

폭력에 가까운 섹스와 집착은 늘 그렇듯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서진은 바람이 빠진 풍선 인형처럼 기욱의 움직임에 이리저리 휘둘려야만 했다. 기욱은 다시 페니스를 밖으로 빼냈다. 기욱이 페니스를 빼낼 때마다 윽, 하는 소리가 났다. 서진의 안에서 나온 페니스는 처음 봤을 때보다 그 크기가 더 커진 것 같았다. 검붉은 핏줄이 서 있는 페니스는 보기만 해도 눈을 질끈 감게 만들었다. 기욱은 서진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강서진.”

이름을 부르는 기욱의 목소리에 서진이 몸을 움츠렸다. 기욱은 땀으로 눌려 있는 서진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끼었다. 짧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왔다.

“될 때까지 해.”

* * *

좁은 방 안에서 야릇한 소리가 났다. 반지하방이 아닌 집 근처에서 조금 떨어진 역 근처의 모텔이었다. 펠라를 하고, 기욱의 마음에 안 들 때마다 섹스를 반복하길 여러 번. 기욱은 지칠 대로 지친 서진을 이끌고 근처 모텔로 자리를 옮겼다.

커다란 잠바를 눌러 쓰고 허리를 안고 있는 서진의 모습을 여자라고 착각한 모텔 알바생은 두 사람의 입장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정작 서진은 어떻게 모텔까지 왔는지조차 기억에 없었다. 기욱은 모텔 방에 들어오기 무섭게 다시 옷을 벗었다.

“그만. 제발… 흐으윽… 그만해요. 헤어질게요! 헤어질 테니까… 다, 다시는 여자 같은 거 안 사귈 테니까 제발…!”

“옷 안 벗지?”

“시, 싫어요. 제발 아악!!”

기욱이 서진의 옷을 반강제적으로 벗겨 냈다. 벌어질 대로 벌어진 서진의 안으로 기욱은 또다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기욱은 근처 편의점에서 사 온 커다란 물을 거침없이 들이마셨다.

어렸을 때부터 서진을 봐 왔다. 비록 당시에 저년차 전공의 시절이라 병원 일 때문에 바빠 잘해 주진 못했어도, 못해 준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부터 유독 까다롭게 구는 구석이 있다고 느꼈기에 성인이 돼서 조금 더 그런가 보다 싶었다. 그런데 저 몰래 여자 친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욱은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남녀 관계든 남남 관계든, 아쉬운 건 늘 기욱이 아니라 상대방이었다. 뭔가가 잘못됐다. 그리고 그런 사실은 서진을 안고 있는 기욱의 심기를 무척이나 불편하게 만들었다. 기욱은 서진의 안에 사정했다. 얼마나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던 터라 기욱도 힘이 들었지만 어째서인지 불쾌한 기분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섹스하면 할수록 짜증이 났다. 이내 기욱은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하하, 하하하하하!”

“으윽, 하아… 읏….”

미친놈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정말 제대로 실성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진은 온몸이 뒤틀리는 쾌락 아닌 고통에 말을 이을 수조차 없었다. 기욱이 미치든 말든 서진은 이 지긋지긋하고도 괴로운 행위를 끝냈으면 싶었다. 기욱은 땀이 가득한 서진의 이마에 입술을 맞춘 뒤 허리를 안았다.

남자든 여자든 마음대로 사귀어도 상관없다. 상대가 누구든 전부 서진의 곁에서 떨어트리면 그만이었다. 기욱은 서진이 어떤 모습이 된다 하든 상관없었다. 기욱에게 안긴 서진이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해요… 누나한테 사과해요…. 헤어질 테니까… 제발….”

“서진아.”

“흐윽… 흐으윽…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파, 아파요.”

“아파? 그만했으면 좋겠어?”

나긋나긋한 기욱의 목소리에 서진은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은 천천히 다리를 옆으로 벌렸다. 달라진 것 없이 부풀어 오른 페니스를 본 서진은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미 몇 번을 당하고 온 터라 기욱의 페니스를 핥는 행위에 대한 불쾌함은 머리 뒤쪽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기욱의 커다란 페니스가 서진의 입안을 정신없이 움직였다. 기욱이 고개를 살짝 드는 서진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고개를 든 서진의 뺨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욱의 손가락이 흐르는 눈물을 긁어낸 뒤 서진의 입안으로 넣었다. 반쯤 넋을 잃은 서진은 입안으로 들어오는 기욱의 손가락을 쪽쪽 빨아 댔다.

진작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기욱은 잘 만들어진 인형처럼 알아서 움직이는 서진이 제법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읍… 으읍….”

“말을 잘 들었으면 됐잖아. 그러면 서윤이도, 너도 안 힘들어도 되고.”

서진을 천천히 눕힌 기욱이 다시 다리를 벌렸다. 싫다고 발악하는 서진의 허벅지를 누른 기욱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으로 들어왔다. 기욱은 그 상태로 몸을 돌려 서진을 위로 올렸다. 기욱의 위에 올라탄 서진은 배 밑에서부터 느껴지는 페니스에 허리를 비틀며 신음을 흘렸다.

“아으윽!”

“움직여, 서진아. 직접 해봐.”

기욱이 서진의 엉덩이 근처를 가볍게 쳤다. 깜짝 놀란 서진의 몸이 움찔거리며 기욱의 페니스를 조였다. 안 그래도 힘이 든 서진은 도무지 뭔가를 할 기운이 나지 않았다. 기욱은 계속해서 빠져나가려는 서진의 허리를 깊게 누른 뒤 몸을 움직였다.

“그, 그만… 아윽… 윽… 하으으윽!”

기욱의 위에서 흔들리던 서진의 몸이 뒤쪽으로 쓰러졌다. 기욱은 서진의 양팔을 잡은 뒤 허리를 움직였다. 끼끽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침대에 맞춰 서진의 몸 또한 흔들렸다.

“하, 윽, 할 테니까… 하으읏… 그, 그만… 그만…!”

“할 거야?”

“할게요. 뭐든 할게요. 으윽, 윽, 아악!”

쾌락이 아닌 고통에 가까운 섹스에 서진이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기욱이 손을 놓자 서진의 몸이 오뚝이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서진이 천천히 기욱의 가슴 쪽으로 몸을 숙였다.

서진은 기욱의 가슴 근처로 양손을 올렸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목이 닿지 않을까. 차라리 흉부를 압박해 버릴까. 짧은 순간이지만 온갖 생각들이 다 들었다. 기욱은 서진의 양팔을 잡아 몸 밑으로 눌렀다.

“한 번만 더. 그따위 생각하면.”

“…….”

“가만두지 않을 거야.”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기욱의 중얼거림에 서진은 소름이 돋았다. 기욱이 허벅지와 허리를 살짝 움직였다. 서진은 정말 악,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기욱의 위에서 몸을 흔들었다.

“하윽… 윽, 으읏. 윽…!”

서진은 기욱이 시키는 대로 허리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정말 여자가 된 것처럼 수치스러운 느낌이 없잖아 들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욱의 다른 손이 서진의 페니스를 쥐고 흔들었다. 원래부터 섹스를 길게 하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이렇게 오래 한 적은 20대 이후로는 거의 없을 정도로 드물었다. 서윤을 만나고 나서부터 서윤 외에 다른 사람과 잔 적이 없으니 더 그럴지도 몰랐다.

“읏, 서진아. 하으….”

“하으읏!”

기욱의 손에 의해 사정을 한 서진은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기욱의 몸 쪽으로 쓰러졌다. 빠지지 않은 페니스로 서진의 안을 살짝 찔러 봤으나 서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기욱은 몸을 살짝 일으켰다. 힘없이 침대 위로 쓰러지는 서진은 의식이 없었다.

서진의 상태를 살핀 기욱은 서진이 단순히 기절했다는 사실에 한숨 아닌 숨을 들이쉬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기욱의 발끝으로 서진이 급하게 입고 온 잠바가 채였다. 잠바를 집어 들자 잠바 사이로 뭔가가 또다시 떨어졌다.

갈색, 가죽 지갑이었다. 일방적으로 끌려온 상황에서 지갑을 챙겨 왔을 리 만무하니 원래부터 잠바 안에 있었다는 것이 맞았다. 서진의 지갑 안을 살핀 기욱은 피식, 하고 입가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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