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 재회
“…….”
삐빅, 삑, 비밀번호가 틀렸음을 알리는 소리에 시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집을 잘못 찾았나 하고 아파트에 있는 동수와 휴대폰 문자에 적힌 동수를 확인했다. 405호, 이 집이 맞았다. 그러고 보니 비밀번호를 안 물어봤다. 무의식적으로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한 시헌이 한숨을 쉬었다.
1년이나 지났는데 같은 비밀번호를 사용했을 거라는 것은 시헌의 단순한 짐작이었을까. 커다란 캐리어를 문 옆 벽에 기댄 시헌은 캐리어에 몸을 기댄 채 휴대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첫 수화음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아파트 문이 열렸다.
“어머, 시헌아.”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 여자―서윤을 알아본 시헌은 재빨리 휴대폰을 닫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서윤은 막 샤워를 하고 나온 모양인지 수건으로 머리를 올리고 있었다. 커다란 목욕 타월을 목에 걸친 서윤이 민망한 모양인지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이 집이 맞긴 맞는 거겠지. 시헌은 캐리어를 밀고 현관 안으로 들어가는 내내 현관문에 붙어 있는 현판을 힐끗거렸다.
집은 아니었지만 중·고등학교를 내리 기욱의 오피스텔에 살았던 시헌은 집만큼이나 기욱의 오피스텔이 편했다. 시헌이 기숙학원을 들어가고 몇 달 지나지 않아 기욱이 이사를 했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엄마는 집에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냐 했지만, 집 또한 낯선 곳인 건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낯선 곳이라면 그나마 익숙한 기욱의 집이 훨씬 나았다. 설마 서윤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
거실에 적당히 캐리어를 둔 시헌은 거실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들어간 서윤은 가벼운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은 뒤 거실로 나왔다. 시헌은 서윤이 나온 안쪽 방을 힐끗거렸다. 기욱의 방이라는 걸 짐작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리에 달라붙는 검은 츄리닝 바지 차림에 팔꿈치를 살짝 덮는 얇은 티셔츠를 입은 서윤은 방에 들어가지 않고 있는 시헌에게 물을 따라 줬다. 컵을 찾아 정수기에 물을 따라 내미는 모습이 참으로 자연스러웠다. 마침 목이 말랐던 시헌은 서윤이 내민 물을 마셨다. 시헌의 앞에 앉은 서윤은 목에 걸친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디지털시계가 있었다.
오후 3시 35분, 평일. 쉬는 날일 확률보다 이브닝일 확률이 더 높았다.
“기욱 오빠한테 들었어. 이맘때쯤 올 거라고. 좀 더 일찍 문 열어 줬어야 했는데 미안해.”
“괜찮아요.”
시헌은 반쯤 마신 물컵을 내려놓았다. 기욱의 방 건너편으로 반쯤 열린 방문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가구와 책상들. 전부 새것이었지만 놓인 물건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문틈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시헌이 기숙학원에서 미리 부쳐 뒀던 택배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면접은 잘 봤어?”
“그럭저럭요. 결과 기다리는 일만 남았네요.”
“잘될 거야. 시험 잘 봤잖아?”
“그랬으면 좋겠어요.”
시헌의 짤막한 대답에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시헌은 딱히 서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 대답을 한 건 아니었다. 남은 물을 마신 시헌은 서윤을 힐끗거렸다.
기욱의 새 아파트가 낯선 만큼 1년 만에 보는 서윤 또한 낯설긴 마찬가지였다. 이 와중에도 서윤의 짙은 속눈썹을 보며 서진을 떠올리는 자신에 시헌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1년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서진이는 어떻게 지내요?
대학은 갔을까? 1년 동안 어떤 생활을 했을까? 잊은 줄 알았는데, 막상 서진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서진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서윤과 앉은 시헌은 끝내 서윤에게 서진의 안부를 묻지 못했다.
고3, 은소의 장례식장에서 저를 원망하던 서진의 표정을 재수를 결심한 이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은소를 죽음에 이르게 한 시헌은 스스로 서진의 안부를 물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 물을 다 마신 시헌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짐 정리하려면 시간 좀 걸릴 것 같으니까 먼저 들어갈게요.”
“응. 아, 시헌아!”
서윤이 일어나려는 시헌을 불렀다. 잠시 머뭇대는가 싶던 서윤이 뺨을 살짝 긁적이며 웃었다. 서윤의 시선이 시헌의 방에 닿았다.
“전에 쓰던 가구가 너무 낡았더라고. 오빠랑 같이 가서 고른 건데, 가족이라고는 서진이밖에 없어서. 서진이 가구 사 준다는 생각으로 골랐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시헌은 가구를 새로 샀다는 말이니 신경 써서 골랐다는 말보다 서윤의 입에서 나온 서진이라는 이름이 더 신경 쓰였다. 서윤이 서진의 누나가 틀림없다는 사실을 시헌은 실감해야 했다.
“감사합니다.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말한 시헌은 캐리어를 밀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서윤의 눈치를 보며 방문을 닫은 시헌은 새로운 방 주변을 둘러봤다. 방바닥에는 뜯기지 않은 택배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시헌은 방 안쪽에 있는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 손을 올리자 물기가 지나간 흔적이 남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새 가구인 티가 나긴 하지만, 가구를 사면 붙어 있는 스티커나 포장 같은 것도 전부 떼어진 상태였다. 시헌은 결코 기욱의 짓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시헌의 가구를 새로 사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 것도 기욱이 아닐 수도 있었다. 시헌은 방 한쪽에 있는 침대에 반쯤 걸터앉았다. 익숙하지 않은 새 방. 서윤이 서진이에게 가구를 사 준다면 이런 가구를 사 줬을까. 누구를 위한 대리만족인가 싶었다.
“하하…….”
시헌은 고개를 무릎 쪽으로 숙이며 허탈하게 웃었다. 방 정리 같은 건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집에 와서 보니 괜찮지가 않다. 오히려 더 지독해진 느낌이 들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시헌은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강서진, 대체 나한테 뭘 한 거냐고.
* * *
시헌은 눈을 깜박였다. H대 합격 통보가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개강 전 OT를 간다고 했다. 사실은 출발 전날까지 참가하지 말까 하고 고민했었다. 그 고민에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고작해야 OT를 위해 버스를 빌려 지방까지 내려간다는 사실이 귀찮을 뿐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수학여행도 좋아하지 않았던 시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하는 거라고는 술뿐인 OT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기소개? 어차피 싫어도 앞으로 얼굴을 보고 살 사이인데. 몇 년 같이 지내다 보면 싫은 이름도 외워지는 판이다. 선배라는 사람들도 그와 다를 게 없었다. OT에 참가한 것은 단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서였다.
거기에 서진이 있을 줄은 몰랐을 뿐인 OT였다.
자기소개 하고, 선배들이 나와 떠들고, 교수님들―참고로 그중 한 명은 시헌의 친척으로, 합격 발표가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따로 밥을 먹었다―이 떠들고, 서로 앉아 이야기하는 과정들이 시헌은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같은 학번이자 시헌의 여자 학교 후배가 시헌을 봤다며 그에게 인사를 했지만, 시헌은 그조차도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웃어넘겼다. 술을 마시긴 했지만, 긴장한 탓인지, 신경이 다른 곳에 가 있던 탓에 별로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시헌의 착각이었다.
뒤늦게 술에 취해 정체를 알 수 없는 말을 해 대는 동기들을 본 시헌이 눈앞에 있는 술병을 확인했다. 시헌은 대부분의 사람이 취하고, 혼자 술을 마시고 있음을 깨달았다. 건너편에 앉은 선배가 시헌의 이름을 부르며 술을 잘 마시느니, 혼자 마시는 게 어디 있느니 하고 떠들었지만, 시헌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술이 강했더라?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빈 잔에 소주를 따른 시헌은 병이 비어 있자 한숨을 쉬었다. 거의 수직으로 들었던 소주병을 방바닥에 놓은 뒤 아직 남아 있는 소주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런 걸 보니 좀 취한 것 같기도 하지만.
“자.”
고개를 돌리는 시헌의 옆으로 서진이 반쯤 남은 소주를 내밀었다. 약간 술에 취한 시헌은 소주와 서진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서진의 손에 들린 소주를 집었다. 시헌은 바닥에 놓인 잔에 소주를 따랐다. 병을 넘겨받는 순간 서진과 닿았던 손끝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이상했다. 넘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따라진 소주를 노려본 시헌은 잔을 순식간에 비웠다.
“야, 그렇게 마시면…….”
예의상 건배라도 할까 했던 서진이 당황하며 시헌을 봤다. 윽, 순식간에 올라오는 알코올 특유의 향에 시헌이 입을 막으며 간신히 올라오려는 것을 막았다. 딱 봐도 무리하는 모습에 서진은 한숨을 쉬었다. 시헌은 다시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서진의 시선에 목 끝과 얼굴이 화끈거렸다. 시헌은 서진이 눈에서 불이라도 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술기운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재수한 줄 몰랐어.”
이런 얘기를 하려 했던 건 아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던 탓도 있다. 시헌은 한참에서야 서진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는 걸 알았다. 사실 마음 한구석으로는 시험을 보기 힘들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시헌의 질문에 서진은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사이 시헌은 홀로 술을 몇 잔인가 더 마셨다. 서진이 준 술병도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너도. 설마 같은 과일 줄은.”
서진의 뒷말에 시헌은 마지막 잔을 비웠다. 말투로 보아 재수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정작 그날 이후 기숙학원을 등록한 시헌은 서진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젠 소주가 아니라 맥주라도 마셔야 하나.
H대, 의예과.
중학교 시절부터 의사가 되겠다며 노래를 불렀던 서진과 달리 시헌은 의사가 되기 싫다며 노래를 불렀다. 시헌이야 원래 머리가 좋으니 원한다면 어느 과든, 대학이든 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재수한 시헌이 결국 부모님, 집안과 같은 의사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 의외일 뿐이었다. 서진의 중얼거림에 시헌은 결국 맥주를 따랐다. 소주랑 달라서 그런지 한꺼번에 비우지는 못했다. 시헌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에 닿아 있었다. 시헌은 문득 몇 달 전 면접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학생은 왜 우리 과를 지원했나요?
돌려 말하고 있지만 왜 의사를 하려 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옆에 있던 학생들의 대답을 건너, 시헌의 차례가 왔다. 뜸을 들인 시헌은 결국 마지못해 대답했다.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의사 집안이었거든요.
면접관으로 있던 교수들이 시헌과 눈이 맞았다. 그중 한 명은 대놓고 눈썹을 움찔거렸다. 면접관인 교수와 사적으로 얼굴을 아는 건, 딱히 불법은 아니잖아? 물론 편법은 맞을지도 몰랐지만.
어쩐지 유독 면접을 몇 주 앞두고 엄마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의학 세미나를 데려가더니. 물론, 시헌은 그때 만난 그들 중 면접관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러니 무죄라는 것이 시헌의 주장이었다. 세상은 원래 다 그런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팔은 괜찮아?”
“어? 뭐라고?”
술에 취한 시헌이 홱,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서진과 눈이 마주친 시헌은 또다시 흠칫 놀라 고개를 숙였다. 시헌의 이상한 행동에 서진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서진이 아는 시헌은 이런 식으로 소심하게 굴 사람이 아니었다. 서진은 오랜만에 봐서 그러겠거니, 술에 취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적당히 흘려 넘겼다. 서진이 바닥에 대고 있는 시헌의 팔을 손가락질했다. 시헌은 소매를 살짝 걷었다. 팔이 부러진 채로 무리했었고 그래서 수술해야 했다.
큰 수술은 아니었지만 팔에는 아직 지워지지 않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엄마는 성형수술을 하라고 했지만, 시헌은 앞으로 당분간은 성형수술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흉터를 지우게 되면 은소를 잊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헌의 흉터를 본 서진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펜션의 방을 빠져나와 밖으로 나왔다. 아직 가시지 않은 찬 공기가 뺨을 적셨다. 시헌은 잠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깊은 겨울 잠바 주머니 안에서 담배와 라이터가 나왔다.
서진이 담배를 무는 시헌을 힐끗거렸다. 1년이라는 시간은, 짧지만 서로를 변화시키기에는 더없이 충분한 시간이었다. 서진 또한 주머니를 뒤적거렸으나, 주머니에서 나온 거라고는 담배 대신 사탕과 라이터였다. 어디서 난지도 모르는 막대 사탕. 그 모습을 본 시헌이 피식, 하고 입가를 올렸다. 시헌은 서진에게 담배를 내밀었고, 서진은 시헌이 내민 담배를 받아 물었다.
후, 찬 공기에 섞여 입김인지 연기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흰 연기가 근처 가로등 조명을 타고 올라갔다.
“언제부터 폈어?”
서진의 질문에 시헌은 다 피운 담배를 발끝으로 끈 후 새 담배를 물었다. 탁탁, 라이터 불이 잘 붙여지지 않았다. 서진이 라이터 불을 켜고 내밀었다. 눈치를 본 시헌이 몸을 살짝 숙여 불을 붙였다. 두 사람은 담배가 따듯한 모닥불이라도 되는 것처럼 피웠다.
“재수하면서. 스트레스 받아서.”
기숙학원이 엄격한 건 사실이지만, 어딜 가나 편법이나 눈감아 주기는 있는 법이었다. 특히 성적으로 모든 것이 증명하는 시설이니 더하면 더하지 결코 덜하진 않았다. 성적이 좋은 상위 학생들의 경우 외박이나 휴대폰 사용도 허가해 주고 눈감아 주고는 했다. 물론, 시헌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상위 학생들처럼 몰래 외박을 하거나, 휴대폰을 사용하거나, 연애하는 것도 아닌 시헌이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담배를 피우는 것이 전부였다. 학원 측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눈감아 줬다는 걸, 시헌이 모를 리가 없었다. 어쨌든 재수 당시 시헌의 성적은 전국권에서 놀았으니 학원 측에선 붙잡고 있으면 무조건 붙는 복권이나 다름없는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시헌의 집안과 시헌이 목표하는 학과를 알면 더더욱. J대든, H대든 재수를 결심한 시헌은 다른 과에 갈 거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도 기욱과 하연이 졸업한 J대를 1지망으로 넣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입학사정관 선생님의 말씀에 H대를 부른 건. 어쩌면 잠시나마 H대를 가고 싶어 하던 누나를 대신해 H대에 들어가 의사를 하겠다는 서진이 생각나서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잊을 줄 알았다던 1년은 미련만 키우고 돌아온 셈이었다. 몸을 약간 숙인 서진이 시헌을 바라봤다. 분명 중학교 시절에는 시헌이 더 컸는데, 어째서인지 서진이 몸을 숙였음에도 시헌보다 큰 느낌이 들었다.
“아직도 형 집에서 살아?”
시헌은 서진의 질문을 이해하는 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술에 취해 머리 회전이 둔해진 걸까. 아니면 질문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걸까. 서진의 질문은 마치 기욱이 이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담배를 끈 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집보다는 나으니까.”
잠바를 입긴 했지만, 슬슬 추위에 몸이 떨렸다. 잠바를 여민 시헌은 펜션 안으로 몸을 돌렸다. 당연히 따라 들어올 줄 알았던 서진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시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돌려 서진을 불렀다.
“뭐 해? 안 들어가?”
“아니, 갈 거야.”
서진은 다 피운 담배를 끈 뒤 근처 쓰레기통에 버렸다.
* * *
시헌은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슬아슬하게 들어온 강의실은 대부분 자리가 가득 찬 상태였다. 주변을 둘러본 시헌은 서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의도해서 앉은 건 아니었지만, 앉는 순간 운이 좋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 또한 아니었다. 아니, 시헌이 서진의 옆자리에 앉은 것은 단순히 자리가 비어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팔에 차인 시계를 본 시헌은 교수님이 들어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는 걸 알았다. 아까 복도에서 시끄럽게 통화하고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조교가 교수의 개인 사정으로 10분 정도 수업이 늦어질 거라며 설명했다. 시헌은 그 틈을 타 책상 옆으로 몸을 돌렸다.
“언제부터야?”
“좀 됐어.”
질문의 의미를 눈치챈 서진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강서윤, 서진의 누나에 관한 이야기였다. 첫날은 단순히 우연이거나 어쩌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난 시헌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서진은 서윤이 기욱의 집에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몇 번인가 적당히 하라고 말하긴 했지만, 좋다고 드나드는 서윤을 말릴 방법은 없었다.
“넌?”
“나는 왜?”
“넌 아직도 거기 살아?”
그게 왜 중요한 건지 서진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질문이었다. 서진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까지 나갈 필요는 없잖아.”
좀 말이 심했나 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뜻밖에 시헌은 그것도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이 서진을 멍하게 만들었다. 원래 저렇게 능글맞았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말이 1년이지, 중학교 시절 외에 같이 수업을 들은 적은 없었다. 중학교 때도 그랬던 것 같았다. 단지, 어린 나이에 티가 나지 않았을 뿐. 시헌의 거슬리는 미소에 서진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교수님이 들어온 탓도 있었다.
오전 수업이 끝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강의실을 나왔다. 개강하고 한 달, 대학에 들어와 친구를 사귀지 못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서진도, 시헌도 각자 친구들이 있었다. 물론, 서진의 친구나 시헌의 친구나 그놈이 그놈이긴 했지만 말이다. 떨어지기도 뭐한, 두 사람은 무작정 학교를 나왔다.
학교 근처 번화가로 나온 두 사람은 골목에 있는 분식집에 들어갔다. 누구 하나 들어가자고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 분식집이냐고 한다면 이유도 없다. 정면에 보이는 게 분식집이었기 때문이었다.
자리에 앉은 둘은 오므라이스에 돈가스를 시켰다. 딱히 이상할 건 없는 점심이었다. 참으로 묘한 분위기에 서진은 속으로 기가 막히다며 중얼거렸다.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짜증을 낼 수도 없었다. 옆에 있는 시헌이 싫냐 묻는다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서진의 앞에 앉은 시헌이 물컵에 물을 따라 서진에게 내밀었다.
“마실래?”
수업이 끝나고 밖에 나와 한다는 첫마디가 물을 마실 거냐고 물어보는 말이라니. 할 말도 참 많은 사이였다. 서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헌이 테이블 위에 엎어진 컵을 세워 물을 따라 내밀었다. 마침 목이 말랐던 터라 서진은 시헌이 따라 준 물을 순식간에 비웠다. 컵에 담긴 물이라고 해 봤자 얼마나 되겠냐만은. 고작해야 목을 축일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오자 다시 대화가 끊겼다. 약간 언짢긴 했지만, 억지로 대화를 이어 가야 한다는 압박감은 없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여대생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그래서, 번호 물어보는데 당황해서. 처음에 다단계인 줄 알았다니까?”
“큭큭, 하하! 대박. 다단계는 너무했다. 진짜.”
점심시간이라 가게 내부가 시끄러운 편이었지만, 옆에 앉은 여대생들의 목소리는 특히 한층 더 시끄러웠다. 여대생의 대화에 흥미가 가기보다 대체 뭐 하는 애들이길래, 하는 호기심에 고개를 들었다. 서진의 옆에 있던 여대생을 본 시헌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긴 생머리를 한 여대생이 서진을 힐끗거리고 있는 모습을 시헌이 본 탓이었다. 뒤늦게 시헌의 시선을 눈치챈 여대생이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서진은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시헌은 깔끔하게 생긴 여대생의 외모와 서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딱 서진이 취향이네.
여자를 본 시헌은 혼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인이 된 후로 특별하게 취향이 바뀌지 않았다면 말이다. 시헌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물컵이었다. 뭘 잘못한 건지는 모르지만, 서진이 물컵을 옆으로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팔꿈치로 치기라도 한 걸까? 여자의 옷 쪽으로 컵에 있던 물이 튀었다. 놀란 서진이 일어나 급하게 냅킨을 내밀었다.
“많이 젖었어요? 죄송해요.”
“아녜요. 별로 안 젖었어요.”
“야, 뭐해.”
여자의 앞에 있던 친구가 발끝으로 그녀를 툭툭 찼다. 서진을 힐끗거릴 때부터 알아봤지만, 시헌은 저들끼리 속닥대는 말까지 들을 수는 없었다. 여자 쪽에서도 서진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다. 친구의 눈치를 본 여자는 계속해서 사과하는 서진의 사과를 받은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아, 네.”
“혹시 H대세요?”
여자의 질문에 친구는 이마를 짚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H대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으면 딱 봐도 H대잖아. 그런 여자와 여자의 친구 또한 같은 H대였다. 여자가 뭘 원하는지 눈치채지 못한 서진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H대예요. 경영학과거든요.”
“그러시구나. 물 튄 건 정말 죄송해요.”
서진의 계속된 사과에 여자가 괜찮다며 웃었다. 여자의 웃음에 시헌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서진도 식사가 끝난 상태고, 자신이야 아직 조금 더 남았지만 남겨도 상관은 없었다. 가방을 챙긴 시헌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자.”
시헌의 오므라이스는 아직 1/3 정도 남아 있었다. 다음 강의까지 시간에 여유가 있는 편이었기에 굳이 서두르면서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진은 그런 시헌을 걱정하듯 입을 열었다.
“아직 남았잖아.”
“상관없어.”
카드를 꺼내는 시헌의 반응에 서진은 마음대로 하라며 가방을 챙겼다. 좀 더 먹고 가도 된다고 시헌을 배려한 건 맞았지만, 굳이 먹기 싫은 사람을 붙잡고 먹으라고 할 이유 또한 없었다. 시헌은 한시라도 빨리 이 식당을 나가고 싶었다. 서진을 먼저 계산대 앞으로 밀어 넣으려던 찰나 등 뒤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혹시 괜찮다면 번호 좀 줄 수 있을까요?”
빌어먹을.
시헌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서진은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본 서진은 여자가 말하는 대상이 자신과 시헌이라는 걸 알았다. 서진이 계산을 하려는 시헌의 몸을 팔꿈치로 건드렸다.
“번호 달라는데?”
“나일리가 없잖아.”
멋대로 서진의 것까지 계산을 마친 시헌은 싸늘한 표정으로 서진을 올려 봤다. 싸늘한 시선에 서진이 살짝 움찔거렸다. 그게 그렇게 노려볼 이유인가. 서진은 무엇이 시헌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몸을 돌린 서진과 여자의 눈이 맞았다. 설마 하는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휴대폰을 꺼낸 서진은 여자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녀를 보고 괜찮게 생겼다고 생각은 했지만, 여자 쪽에서 관심을 가질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서진을 본 시헌은 답답함에 등을 밀었다. 놀란 서진이 몸을 돌려 시헌을 바라봤으나 시헌은 모르는 척 외면한 뒤 가게를 나왔다.
문 너머로 번호를 주고받으며 떠들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가게 유리벽 앞에 선 시헌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여자에게 관심이 있는 게 딱히 이상한 건 아니잖아. 한창 그럴 나이고.
현실을 알면서도 어째서인지 담배 맛이 썼다. 여자와 서진의 대화는 생각보다 길었다. 그래 봤자 시헌이 가게 밖으로 나온 지 2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시헌의 기분 또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잠시 뒤 대화를 마친 서진이 가게 문을 열고 나왔다. 서진을 올려 본 시헌은 담배를 껐다.
* * *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멀리 시헌을 발견한 동기가 손을 흔들었다. 집에 들러 샤워를 하고 온 시헌의 옷차림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상당히 가벼웠다. 이미 술을 어느 정도 마신 모양인지 테이블 위에는 술병이 굴러다녔다. 시헌이 온 걸 기념해―시헌은 별걸 다 기념한다고 생각했지만― 친구 한 명이 멋대로 술을 더 시켰다. 시헌의 앞에는 서진이 앉아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서진 또한 술을 제법 마신 것 같았다.
시헌이 굳이 집에 들르면서까지 술자리에 나온 이유의 절반은 서진 때문이나 다름없었다. 서진의 앞에 앉아 잔을 부딪쳤다. 서진의 앞에는 며칠 전 식당에서 봤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어두운 술집의 조명 탓에 시헌이 여자를 알아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번호를 교환한 후의 일을 묻지 않았는데.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나 보다.
“야, 박시헌. 넌 꼭 혼자 그렇게 마셔 대더라.”
연신 술을 들이마시는 시헌을 본 친구 한 명이 말을 걸었다. 맞아. 그 말을 들은 다른 친구들도 공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잔을 따라 순식간에 비운 시헌은 담담하게 말했다.
“늦게 왔잖아. 속도 따라가려면 부지런히 마셔야지.”
“새끼, 핑계는.”
어차피 웃자고 시작한 농담, 진지하게 받아들일 이유 또한 없었다. 술을 마시는 시헌의 시선은 앞에 앉은 서진과 여자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시헌의 시선을 눈치챈 여자가 약간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저기, 혹시 저한테 할 말이라도…….”
“왜 왔어요?”
시헌이 주변을 둘러봤다. 같은 H대, 처음부터 다른 과를 끼고 마시는 술이라면 상관없지만 아무리 봐도 여자가 낄 자리는 아니었다. 먼저 온 친구들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시헌의 물음에 여자의 안색이 질렸다. 조명 아래 여자의 모습을 찬찬히 살핀 시헌은 그녀가 서진의 취향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좋지 못하다는 걸 눈치챈 서진이 끼어들었다.
“내가 불렀어.”
“…….”
“다른 애들한테도 허락받았고, 문제 될 건 없잖아?”
옆에서 말을 들은 친구들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이 다 마신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네 허락 없으면 마음대로 여자도 못 데려와?
시헌은 조금 전 그 말이 마치 자신을 겨냥한 것처럼 들렸다. 시헌은 술 대신 컵에 담긴 물을 마셨다. 찬물이 목을 타고 흘러 넘어갔다.
“미안.”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어. 시헌은 할 필요 없는 뒷말을 생략했다. 시헌의 사과에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했다. 정말 괜찮아서 하는 말인지까지는 알 길이 없다. 이제는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던 여자가 시헌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서인하라고 해요,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박시헌.”
“박시헌이야.”
인하의 질문에 시헌과 서진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시헌에게 물어본 건데, 서진의 입에서 나온 시헌의 이름에 인하는 이상하다며 웃었다. 인하의 웃음에 얼굴을 붉힌 서진은 뺨을 살짝 긁적였다. 술기운에 얼굴이 빨갰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입술 또한, 입가에 그대로 묻어 있는 소주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번들거렸다. 취했군. 시헌은 또다시 술을 마셨다.
“야, 어디 가. 박시헌!”
“뭐가.”
“아 돌겠네. 내가 이 새끼 혼자 처마실 때부터 알아봤다!”
술집을 나온 친구들은 사람들 틈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시헌의 팔을 붙잡았다. 놔라. 시헌이 팔을 붙잡은 친구를 노려봤지만, 술에 취한 시헌이 진심일 것이라 생각하는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다.
“갈 거라고. 집.”
“택시 이쪽이니까 이쪽으로 좀 와! 지하철도 끊겼는데 어떻게 가려고?”
“걸어서.”
“미친 새끼. 뭐라는 거야!”
“친구야, 세상 지인짜 좁다. 그치 안냐? 어? 야, 강서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친구들에게 팔을 붙잡힌 시헌이 멀리 있는 서진을 손가락질했다. 시헌의 목소리를 들은 서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평소에도 술을 많이 마시는 시헌이지만 이렇게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한 적은 드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늘 시헌의 모습은, 정말 시헌답지 않았다. 강서진! 야! 인마. 씹냐? 등 뒤로 들리는 목소리를 무시한 서진은 몸을 돌렸다. 서진의 앞에는 갈 준비를 하는 인하가 있었다.
“집은 어디예요?”
“아, 저는 자취해서. 집이 근처예요.”
“데려다드리고 싶은데……. 하하, 친구가 좀 많이 취해서.”
서진의 시선이 시헌에게 닿았다. 강서진, 박시헌 데리고 가라. 택시를 잡은 친구들이 서진을 재촉했다.
“둘이 친해요?”
그 질문에 서진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친구 사이냐고 묻는 건지, 아니면 정말 친한 사이냐고 묻는 건지. 분명한 건 서진과 시헌은 단순한 친구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정말 친한 사이라고 하기도 모호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었다.
“그냥요.”
서진은 결국 친구라고도, 친하다고도 말하지 않은 채 대답을 회피했다.
“강서진! 빨리 와, 인마!”
“아, 알았어. 그럼 나중에 연락할게요.”
손을 흔든 서진은 택시로 다가갔다. 시헌은 택시를 타기 싫다며 우기는 중이었다. 걸어갈 수 있다니 뭐라니 하는 말을 떠드는 중이었다. 술에 취한 학생들은 많이 봤지만, 유독 우겨 대는 시헌에 택시기사 또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들을 밀어낸 서진이 시헌의 팔을 붙잡았다.
“어, 서진아.”
강서진.
설마 그 이름을 다시 부르게 될 줄은 몰랐다. 서진아. 야, 강서진. 시헌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진의 이름 석 자를 불렀다. 재수하면서 수도 없이 생각했다. 만약 과고에 합격하지 않았다면, 서진과 같은 학교에 다녔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텐데. 은소가 죽지 않았을지도, 서진이 상처를 입게 될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 초콜릿을 먹은 것으로 서진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 연이 악연인지, 인연인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 분명한 건, 이번에는.
“내가, 내가 지켜 줄게.”
“뭐라는 거야. 박시헌.”
“취한 거 아니라고.”
때마침 시헌 외에 술을 꽤 마신 친구 한 명이 소동을 부린 탓에 서진 외에 시헌의 말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 서진은 시헌을 택시 안으로 구겨 넣었다.
“취했잖아. 택시 타.”
“알았어.”
타지 않을 거라 우길 줄 알았는데. 뜻밖에 시헌은 서진이 시키는 대로 택시에 탔다. 택시를 탄 걸 확인한 친구들이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어디로 갈까요? 하고 택시기사가 물어 왔다. 기욱의 오피스텔을 생각한 서진은 저도 모르게 집 근처 역 이름을 불렀다.
“서안역 사거리……. 아니, 잠깐만요.”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 보니 기욱은 이사를 했다. 새로 지은 아파트는 아니었지만, 나름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한 건 분명했다. 서진은 종종 놀러 오라는 기욱의 말을 무시했다. 무엇보다 요 1년 동안 기욱의 아파트를 제집 드나들 듯 들락날락하는 서윤을 생각하면 기욱의 아파트는 모르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 집에서 무슨 짓을 당하려고. 자세히는 모르지만, 기존 역 근처에서 멀지 않다는 걸 알고 있던 서진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서안역 사거리로 가 주세요.”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번화가를 빠져나왔다. 가는 길에 내려 주려면 정확한 주소가 필요했다. 서진은 옆에 있는 시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파트. 어디야?”
“아파트가 아파트지 어디야.”
“집 주소 있잖아. 너네 형님 집 주소.”
말귀를 못 알아듣는 시헌에 서진은 또박또박 입술을 뗐다. 형님, 집, 주소.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단어를 중얼거리던 시헌이 이내 피식 웃었다.
“내가.”
“…….”
“그걸 어떻게 알아.”
상대의 두 눈을 보고 뻔뻔한 말을 지껄이는 모습은 마치 기욱과 똑같았다. 아니, 기욱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욱을 생각나게 하는 시헌의 말투는 서진의 기분을 사뭇 언짢게 만들었다. 차 안으로 침묵이 흘렀다. 서진의 불편한 표정은 술에 취한 시헌이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드러나 있었다. 눈치를 본 시헌이 서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서진의 계속된 무시에 시헌 또한, 지지 않겠다며 서진을 노려봤다. 결국, 참다못한 서진이 소리를 질렀다.
“왜!”
“너네 집.”
“우리 집이 어쨌다고?”
“집에 들어가기 싫어.”
참으로 어린애 같은 투정이 아닐 수 없었다. 평소에는 애늙은이같이 굴더니, 술이 들어가니 사람이 변했다. 하긴, 처음 술을 마신 고등학교 시절에야 아무것도 몰랐을 때였으니 그럴 만도 싶었다. 결국, 집에서 재워 달라는 말이었다.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서진이 입을 닫자 시헌이 끈질기게 물어 왔다.
“싫어?”
“뭐가 싫은데.”
시헌을 자신의 집에서 재우는 것이? 아니면 이렇게 술주정을 부리는 것이? 굳이 따지자면 싫기보다 귀찮았다. 그런 서진의 예상과 달리 시헌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내가 싫냐고.”
술에 취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서진이 그런 표정을 지은 건지 말을 하는 시헌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울진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으로 보였다. 서진은 시헌이 싫었던 적은 없다. 다만 어딘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시헌에 대해 알면 알수록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서진이 대답을 하지 않자 서진의 옆에 앉은 시헌이 고개를 숙였다.
“싫겠지.”
“야, 딱히 그렇다고 한 적은…….”
“은소는…….”
나 때문에 죽은 거야.
시헌의 중얼거림에 서진 또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시헌의 살짝 걷어진 소매 사이로 팔의 흉터가 보였다. 1년이라는 시간은, 누군가의 죽음을 잊어버리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 * *
택시가 서진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서진은 잠들어 있는 시헌을 깨웠다. 눈을 비빈 시헌은 택시 창문 너머를 두리번거리더니 택시에서 내렸다. 시헌이 내리자 서진이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열었다.
지갑의 현금과 미터기를 번갈아 본 서진이 당황스러운 듯 머뭇거렸다. 생각보다 택시 요금이 많이 나온 탓이었다. 닫히지 않은 택시 문을 붙잡은 시헌이 택시 앞좌석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서진을 대신해 시헌이 카드를 내밀었다. 서진의 현금과 시헌의 카드에 택시기사가 어느 걸로 계산을 하냐며 물었다.
“그냥 현금으로…….”
“카드요.”
시헌은 서진의 손을 밀어냈다. 술이 깨긴 깬 걸까, 뭐가 좋다고 웃어 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계산을 마친 시헌은 카드를 다시 지갑에 집어넣었다.
서진은 약간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역시 짜증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서진은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카드를 내밀며 저를 향해 웃는 시헌의 모습이 믿음직하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같이 택시를 탄 게 자신이 아니라 여자였다면, 한 번쯤은 반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중학교 때는 몰랐던 면모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서진이 내리고 택시가 유유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서진은 낡은 집 대문을 열고 반지하 방으로 내려갔다.
서진의 집은 오랜만이었던 시헌은 뭐가 그리 신기한지 좁은 반지하 입구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서진은 중학교를 졸업한 뒤 시헌을 집에 데려온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치면 몇 년이지? 4년? 5년 만인가? 마지막으로 온 것이 현정과 함께였을 때였다.
“현정이 생각난다.”
시헌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중얼거렸다. 중학교 땐 없으면 안달이 날 것처럼 붙어 다녔건만.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현정이 없는 삶이 당연한 삶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고등학교까지만 다니고 돌아온다던 현정의 약속 또한 제대로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H대, 의사, 남들이 보면 대단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어째서인지 두 사람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었다. H대라는 것도, 대학생이라는 것도 6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마음은 중학교 시절에서 멈춰 있는데. 어째서인지 몸만 자란 느낌이었다.
현정을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서진의 머릿속을 강타한 것은 다름 아닌 은소였다. 은소의 장례식 날 현정은 결국 오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현정에게 연락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두 사람, 그래도 제법 친했는데. 그녀는 은소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만약 모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시헌은 서진의 궁금증에 대답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얼마 전에, 한번 통화했었어.”
“현정이랑?”
“응.”
한국에 언제 돌아올 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현정도 현정 나름대로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시헌이 듣기로는.
“미국에서 대학에 들어갔나 봐.”
“그렇구나.”
“그리고 은소 얘기는…….”
시헌이 말끝을 흐리며 반지하 현관문을 바라봤다. 문 앞에서 언제까지 서 있어야 하는 거지? 뒤늦게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서진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중학교 때는 높아 보였던 천장이, 몇 년 사이에 너무나 낮은 느낌이 들었다. 좁은 거실로 들어선 시헌은 머리를 긁적이며 바닥에 앉았다.
은소 얘기는―
“나중에 하자.”
시헌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거실로 간 서진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몸을 약간 숙인 시헌이 거실을 향해 말을 걸었다.
“나도 줘.”
“와서 먹어.”
서진이 물컵을 내밀었다. 술기운에 몸이 무거운 시헌은 비틀거리며 서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야!!”
“어. 미안.”
컵을 집는다는 것이 손을 잘못 움직인 탓에 컵에 담긴 물이 서진의 옷 위로 튀었다. 다행히 서진이 컵을 붙잡은 탓에 떨어져 깨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서진은 유리컵을 싱크대 옆에 올려 둔 뒤 옷에 묻은 물을 털어냈다. 흰옷이 축축하게 젖는 게 영 불편했다.
어차피 집이니 갈아입으면 될 일이었다. 서진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에 방으로 들어갔다. 좁은 방에는 어제 자고 일어나 개지 않았던 이불이 그대로 있었다. 적당한 티를 꺼내 윗옷을 벗음과 동시에 이상한 시선이 느껴졌다.
“뭐 하냐?”
서진은 셔츠에 팔을 반쯤 걸친 애매한 상태로 시헌을 바라봤다. 눈이 풀린 시헌은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시헌이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 혼자 써도 좁은 방에 사내 둘이 들어오니 숨이 막혔다. 시헌의 손이 아직 옷을 입지 않은 가슴 위로 올라왔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따듯한 감촉에 서진이 몸을 떨었다.
“젠장, 박시헌!”
서진은 달라붙는 시헌을 있는 힘껏 밀어냈다. 시헌의 등이 퍽, 하고 좁은 벽에 부딪쳤다. 그 소리에 너무 심하게 한 건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시헌의 몸이 흔들리더니 바닥에 깔린 이불 위로 풀썩, 하고 쓰러졌다.
서진은 발밑으로 쓰러진 시헌을 내려다봤다. 설마 벽에 등을 부딪쳤다고 죽진 않았겠지? 발끝으로 시헌을 툭, 하고 건드리자 잠이 든 시헌이 몸을 옆으로 틀었다. 좁은 방 가운데 잠들어 있는 시헌을 본 서진은 옷을 바로 입은 채 쪼그리고 앉았다.
“하하, 이게 뭐 하는 짓이야.”
* * *
윙윙, 진동 소리가 들렸다. 그 상대로 깜빡 잠이 든 서진은 진동 소리에 고개를 들어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 화면의 불빛과 꺼지지 않은 방 전구의 빛이 서진의 눈을 찌푸리게 하였다.
부재중 전화 2통.
눈이 부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시헌이 자는 방의 불을 끈 뒤 거실로 나와 다시 휴대폰을 열었다. 휴대폰을 엶과 동시에 전화가 왔다. 손을 잘못 움직인 탓에 수신 버튼을 눌러 버린 서진은 통화가 된 상태로 상대방을 확인했다. 기욱이었다.
― 전화도 안 받고 뭐 해?
사실 확인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기욱의 목소리에 서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거실 벽에 걸린 시계는 새벽 3시를 넘기고 있었다. 서진은 술이 덜 깬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이 시간에 무슨 일인데요?
― 너 새벽에 잘 안 자잖아.
오늘도 잠들어 있지 않을 거라 단정하는 기욱의 말이 서진은 불편했다. 저 사람은 말을 할 때마다 무슨 자신감으로 매번 저렇게 하는 걸까. 사실 술을 마신 오늘 같은 날이 오히려 드물었다. 새벽에 잠을 자지 않은 건 딱히 불면증이나 잠이 오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이런저런 공부를 하다 보면 새벽이 지나가 있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학교에 오기 전 늘 서너 시간 정도는 자고 갔다.
― 나와.
― …….
― 집 앞이야.
툭, 하고 전화가 끊겼다. 짧은 통화 시간 동안 서진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의미를 깨달음과 동시에 반지하 방 창문 너머로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지나갔다. 처음 듣는 차 소리, 기욱이 차를 바꾼 탓에 신경을 쓰고 있지 못했던 점이었다.
서진은 여전히 방에서 잠들어 있는 시헌을 바라봤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까지 내는 것이 참 세상모르고 잠이 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자는 시헌을 보면 맥이 풀린다고 해야 할지, 진이 빠진다고 해야 할지 그런 게 있었다.
“잘도 잔다, 진짜.”
비아냥 섞인 푸념을 혼자 중얼거린 서진의 귓가로 차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기욱은 시헌이 여기 있는 건 모른다. 시헌이 기욱에게 말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등골이 싸늘해졌다. 젠장! 방으로 들어간 서진은 이불을 잡아당겼다.
“야, 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불을 잡아당기는 서진은 초조해졌다. 이불을 밑에 깔고 있는 시헌은 돌이라도 되는 것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서진은 서윤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 두꺼운 겨울 솜이불을 가져왔다.
몸 위로 떨어진 솜이불에 밑에서 억, 하는 소리가 났지만, 서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비스듬하게 누운 시헌을 발끝으로 밀어낸 서진은 간신히 문을 닫았다. 술도 덜 깬 새벽에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손을 턴 서진은 전화가 오는 휴대폰을 집었다.
― 문 열어.
서진은 전화를 받은 채 문을 열었다. 기욱은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은 문틈을 비집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성질이 급한 건 누굴 닮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시헌은 그런 건 없는데 말이다. 서진은 이 상황에서 왜 시헌과 기욱을 비교하고 있어야 하는지 싶었다.
“옷이 그게 뭐예요.”
서진은 거실 주변을 왔다 갔다 하는 기욱의 옷차림을 살폈다. 파란 진료복 안쪽 가슴에는 J대 병원의 명함과 쓰다 만 볼펜들이 그대로 꽂혀 있었고, 위에는 대충 긴 잠바 하나만 걸친 상태였다. 누가 봐도 병원에서 나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새벽에, 이래도 되는 거야?
“당직이야 15일째.”
“일 안 하고 나온 게 자랑이에요?”
신임 교수, 서진은 맨날 당직이라며 불평을 늘어놓는 기욱의 푸념을 매몰차게 외면했다. 전문의가 되자마자 대학병원 교수라니. 그것도 다른 어중간한 병원도 아닌 J대 병원이다. 자리만 있다면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의사들이 줄을 서는 곳이고, 실제로 그 자리를 원해 전문의를 따고도 병원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사람들을 앞에 두고 하는 기욱의 말은 서진이 듣기엔 배부른 불평이었다. 물론, 스트레스가 상당히 심한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술 마셨어?”
정곡을 찌르는 말에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기욱이 서진의 앞으로 다가오자 서진이 뒤로 물러섰다. 벽에 등이 닿은 서진은 갈 곳이 없다는 걸 알고 한숨을 쉬었다. 입에서 가시지 않은 술 냄새가 기욱의 코를 자극했다. 서진은 팔을 잡는 기욱의 손을 쳐냈다.
“알았으면 달라붙지 좀 마요.”
“왜?”
“술 냄새 나는 사람이 뭐가 좋다고…….”
퍽, 닫혀 있는 서진의 방문 너머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시헌이 잠결에 움직이며 뭔가를 건드린 것 같았다. 방 너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기욱은 서진의 팔을 붙잡았던 손을 내려놓았다. 바로 옆에 있는 문을 살짝 열자 두꺼운 이불에 걸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불 탓에 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사람이 자는 건 분명했다. 요상하게 이불을 덮고 자는 꼴을 봐서 여자일 가능성은 없었다.
“친구예요.”
“강서진, 변명하지 마.”
“누가 변명을…… 읍!”
기욱이 서진의 입을 막았다. 그 와중에도 서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팔을 뻗어 방문을 닫았다. 입안을 헤집고 들어오는 기욱의 키스보다 방 너머에 시헌이 있다는 것이 서진의 심장을 더욱 빨리 뛰게 하였다. 괜한 신음을 내는 것보다 기욱의 페이스에 맞춰 주는 것이 좋겠다 판단한 서진은 일부러 기욱을 밀어내지 않았다. 기욱의 혀가 서진의 입안을 꼼꼼히 핥아 내려갔다.
“반항 안 하네.”
“하, 반항하면 그만둘 거예요?”
“아니지.”
숫자 하나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19와 20은 앞자리가 바뀌는 것 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기욱과 키스를 할 때면 서진은 매번 가슴 한편이 아려 왔다. 방에서 자고 있을 시헌이나, 기욱과 사귀고 있는 누나― 서윤 때문이었다. 상대가 남자라는 걸 떠나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닌 관계였다.
기욱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서진이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옷 안으로 들어온 손이 서진의 등허리를 쓸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에 서진은 저도 모르게 잇새로 신음을 내질렀다.
“하으읏!”
“등 약하네.”
“읍… 으읏!”
“그러길래 딴생각하지 말았어야지.”
“무슨… 하읍!”
혹시 시헌이 듣지는 않았을까 조마조마한 서진은 키스를 멈춘 틈을 타 재빨리 입을 막았다. 목으로 넘어가는 신음에 고개가 절로 넘어갔다. 서진의 허리를 잡은 기욱이 옷을 살짝 올려 몸 근처로 혀를 내밀었다. 친구―그 친구가 시헌이라는 말은 안 했지만―가 있다는 말을 듣기는 한 걸까? 기욱과 뭘 하든 집을 나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가파른 숨을 가라앉힌 서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 나가서……. 나가서 해요.”
“추워서 싫어.”
“말 같지 않은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애 같은 변명에 시헌을 생각한 서진이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기욱도 서진이 화를 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서진은 시헌이 자는 방문을 힐끗댔다. 그 반응이 단순히 친구한테 보이기 싫어서인 줄 알았던 기욱은 서진의 고개를 돌렸다.
“차로 갈까?”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나가요. 좀.”
기욱은 문 쪽으로 나가려는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고작해야 밖으로 나가는 게 왜 이렇게 힘이 들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욱은 서진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기욱이 이렇게 웃을 때는 대개 좋지 않은 계획을 꾸미고 있을 때가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차로 가자던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은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기욱이 다른 손으로 입술 근처를 톡톡 건드렸다. 그 의미를 깨달은 서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연이은 당직에 시간이 없는 기욱이 이 시간을 내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한참 바쁜 서진을 불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남은 건 자신이 희생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딱히 이게 불합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얻는 것이 있으면 나쁠 건 없었다. 어느 쪽이든 기욱은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쯤 속으로 애가 닳겠지, 그런 서진의 표정을 보는 것 또한 기욱의 재미 중에 하나였다.
“두 번은 안 할 거니까요.”
마지못해 입술을 뗀 서진이 기욱의 앞으로 다가왔다. 똑같은 키스일 텐데, 왜 이렇게 느낌이 다른지 알 수 없었다.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 몸을 가까이 붙였다. 눈을 질끈 감은 서진은 기욱과 입술을 포갰다. 아직 깨지 않은 술기운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서진은 등으로 들어오려는 기욱의 손을 붙잡았다. 한 번 당하지 두 번은 안 당한다. 서진과 거리를 벌린 기욱은 아쉽다며 혀를 찼다. 시헌은 툴툴대며 집 문을 나섰다. 기욱이 나가려는 서진의 어깨에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줬다.
“밖에 추워.”
“요 앞이잖아요.”
서진은 기욱의 옷을 벗어 다시 내밀었다. 일교차가 심한 가을이긴 했지만, 바로 앞 거리도 못 나갈 정도로 추운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앞이 늘어진 진료복만 입고 나온 기욱이 할 말은 아니었다. 집 밖으로 나온 서진은 익숙하지 않은 차 앞에 섰다. 원래 있던 차도 꽤 비싼 걸 텐데.
이건 또 얼마짜리 차인가 싶었다. 서진은 역시 백으로 교수가 된 사람은 뭘 해도 틀리다며 비아냥거렸다. 기욱이 차 문을 열어주자 서진은 차 안으로 구기듯 몸을 집어넣었다.
기욱과의 섹스든 뭐든 솔직한 마음으로 그냥 좀 자고 싶었다.
“읏, 하아….”
서진은 숨을 들이쉬었다. 좁은 차 안으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조수석에 앉은 서진의 위로 올라탄 기욱의 팔꿈치가 대시보드 위에 있는 캔 맥주를 건드렸다. 구십 도로 엎어진 맥주 캔 입구에서 남은 맥주가 흘러내리며 기욱의 등 근처를 적셨다. 술을 마신 건 서진뿐이 아니었다. 서진의 목 끝을 핥아 올린 기욱의 손이 조수석 뒤로 닿았다. 등받이가 뒤로 넘어가는 것과 동시에 머리가, 서진의 머리의 피가 뒤로 쏠렸다.
“근무 중에 술이라니…….”
“좀밖에 안 마셨어. 한두 잔 정도는 다들 해.”
기욱은 당당했다. 어차피 너도 병원에 오게 되면 이해할 거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옷 안으로 손을 넣어 서진의 배와 가슴 근처를 쓸던 기욱의 손이 벨트를 건드렸다. 서진의 입술을 막은 기욱은 서진의 바지 벨트를 풀었다. 서진의 허리에 있던 벨트가 순식간에 허공으로 들렸다.
기욱은 벨트를 운전석으로 던졌다. 키스를 마친 서진은 넘어가지 않는 입안의 침을 넘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키스라고 해 봤자 기욱의 일방적인 행위일 뿐이었다. 혀를 감아올리는 촉촉한 감촉에 서진은 결코 뭔가를 하거나 하진 않았다.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달각, 아래에서 무언가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답답했던 허리가 한층 가벼워졌으나 결코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읏… 미친….”
얕게 부은 입술을 깨문 서진은 잇새로 욕을 내뱉었다. 친구의 형에게, 무례하다고 할 수도 있는 욕이었지만 기욱은 서진의 욕을 신경 쓰지 않았다.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는 서진이었지만 이럴 때만큼은 반말이 튀어나오고는 했다. 그러면 저도 모르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곧바로 존대하고는 했다. 박기욱이라는 사람은, 서진에게 뭘 하든 시헌의 형이라는 존재를 지울 수 없었다.
서윤과 잠자리를 가지면서 서진을 생각했다는 걸 서진은 알기나 할까. 15일까지 당직을 이어 가면서도 병원을 뛰쳐나온 자신을 서진은 알까 싶었다. 기욱은 서진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다리가 좁은 차의 천장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했다.
술이 덜 깨 정신이 없는 모습, 서진은 그 와중에 피곤하다며 인상을 찌푸리면서 가슴 위로 올라간 옷을 필사적으로 내리려 하고 있었다. 사선으로 올라간 옷 사이로 보이는 게 얼마나 야한지 서진은 모를 것이었다. 차라리 벗는 편이 훨씬 덜 야할지도 몰랐다.
대학생이라고, 성인이 된 이후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모습은 기욱을 더욱 안달이 나고 미치게 했다. 정확한 영문을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욱은 정신을 차리면 강서진이라는 사람을 찾았다. 오늘도 그랬다. 원래라면 술을 마실 생각도, 병원을 몰래 나올 생각도 없는 밤이었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바지를 내렸다.
내려가는 바지와 목 근처까지 올라가는 셔츠, 서진은 어느 걸 붙잡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기욱이 바지 사이로 드러나는 허벅지에 손을 올리자 서진은 읏, 하는 신음을 내며 몸을 옆으로 틀었다. 눈가에 고인 눈물이 보석이라도 되는 듯 빛이 났다. 차 내부의 조명과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가로등의 불빛을 받으며 기욱은 좁은 차 안 땀으로 가득한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적당히 해요.”
참다못한 서진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서진의 위에 올라탄 기욱은 그런 서진의 몸을 다시 눕혔다. 몸에서부터 느껴지는 손의 힘에 서진은 반강제로 누울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 각오하고 온 거잖아.”
“그건……, 방에 시… 친구…….”
“시?”
친구면 친구라고 할 것이지 ‘시’는 또 뭔가. 시라니. 도무지 잘못 말할 만한 단어로 들리진 않았다. 누군가의 이름을 생각나게 하는 첫 단어에 기욱은 눈썹을 움찔거렸다. 그런 기욱에게 반항이라도 하듯 서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씨발… 친구 있는 데서 할 순 없잖아요.”
욕이었나. 기욱은 괜히 민감하게 굴었다며 어깨의 힘을 풀었다. 아직도 그런 거에 예민하게 굴고 있을 줄은. 서진은 그런 쪽으로는 기욱과 달리 상당히 바른 쪽에 속했다. 고등학교도 아니고 6년을 다닐 학교, 서진의 이미지를 지켜 줘서 나쁠 건 없었다. 지킬 이미지라는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긴 했는가의 문제지만.
서진은 팔로 눈가를 가렸다. 차에서 나오는 불빛이 눈이 부신 탓이었다. 허벅지 밑으로 내려가는 드로어즈에 서진은 다시 입술을 얕게 깨물었다. 기욱의 커다란 손이 서진의 페니스를 기둥 끝에서부터 감싸 안았다. 기욱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쾌락에 서진은 괜스레 머리를 흔들었다. 미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몸은 거부할 수 없었고, 머리는 본능적으로 더 좋은 곳을 건드리길 원했다.
“하윽, 읏… 읍… 사, 사람! 사람!”
“신경 쓰지 마. 안 보여.”
“소, 소리…… 으흣….”
검게 코팅된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낯선 남자에 서진은 재빨리 입을 막았다. 남자는 동네에는 보기 드문 외제 차를 슬쩍 보고, 제 갈 길을 갔다. 남자가 가기 무섭게 손가락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서진의 안으로 들어왔다.
“하으윽….”
기욱과 경험이 많은 편도 아니었던 서진은 여전히 어렸을 때만큼이나 이 낯선 행위가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남자끼리의 섹스가 쾌락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배운 만큼이나 잘 알았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차에 달린 디지털시계가 3시 30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어느새 한 개에서 두 개, 두 개에서 자연스럽게 세 개가 된 손가락은 서진의 안에서 질척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기욱의 입장에서는 아프지 않도록 하는 배려라고 하지만 서진은 차라리 아픈 쪽이 훨씬 나았다. 끝을 아는 행위의 고통을 기다리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 날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서진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은 기욱이 뒷좌석으로 손을 뻗었다. 기욱의 손에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콘돔이 들려 있었다. 손끝이 미끄러운 걸까? 기욱은 콘돔을 뜯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결국, 기욱의 이빨 끝에서 콘돔의 봉지 조각이 뜯겨 나갔다.
서진과 섹스를 할 때면 기욱은 늘 긴장보다 초조한 마음이 앞섰다. 그런다고 눈앞에 있는 서진이 어디론가 도망가는 거나 사라지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기욱도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서진과의 섹스는 어렸을 적 길거리나 술집에서 흔하게 만나 몸을 섞던 여자나, 남자와는 분명하게 다르다는 점이었다. 콘돔을 씌우고 다리를 벌려 올린 기욱이 서진의 안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으읏! 마, 말하고… 넣으라고!”
“읏, 그렇게 조이지 말고. 힘 빼.”
“흐윽… 윽… 아파. 윽, 씨발.”
평소에는 거리를 두려고 안달인 녀석이, 이상하게 섹스를 할 때면 입이 험해졌다. 그 차이가, 마치 앙탈을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 기욱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좁은 차 안에서 성인 남성의 몸이 정신없이 섞였다. 기욱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서진을 눕힌 조수석이 흔들렸다.
젠장, 빌어먹을 노인네들 같으니라고. 기욱은 병원 내 사이가 좋지 않은 교수들을 씹으며 다음에는 반드시 호텔을 잡으리라 다짐했다. 카섹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별로일 뿐이었다. 기욱은 몸을 숙여 서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닿을 곳 없는 서진의 손이 차의 천장이며 유리창을 퍽퍽 건드렸다. 기욱이 움직임을 멈췄다. 콘돔 사이로 흘러나온 희멀건 정액이 카 시트 위로 흘러내렸다. 새로 산 지 얼마 안 된 차인데. 역시 좁은 차 보다는 방이라는 걸 실감했다.
“서진아, 손.”
집에서 귀여워하는 강아지를 부르는 것 같은 말투에 서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지만, 제 처지가 강아지보다 나을 게 뭔가 싶기도 했다. 철벅, 하고 기욱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을 강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그 움직임에 서진은 어쩔 수 없이 기욱의 목에 팔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기욱의 혀가 서진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진득한 타액을 핥아 가며 입술을 맞췄다. 그 행위에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사람은 미쳤다.
미치진 않았다 한들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남자와 관계를 허락하는 서진 또한 결코 올바르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서진아. 강서진.
후, 이름을 부르는 입 끝에서 나오는 뜨거운 숨결이 서진의 몸을 더욱 달아오르게 하였다.
그는, 박기욱은 서윤과 할 때도 이런 표정을 짓는 걸까.
마약 같은 사람이었다. 호기심에 다가가 한번 맛보기 시작하면 빠져나올 수 없는 강한 마약과도 같았다. 종착역이 없는 열차는 끝없이 달린다. 영원히 달릴 수도 있고, 폭주할 수도 있다. 혹은 벼랑과도 같은 끝이 존재해 레일이 끊겨 전복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행복한 결말은 없다.
서윤의 기욱을 향한 애착, 집착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서윤과 마찬가지로 기욱에게 물들 대로 물든 서진은 지금의 선택 외에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무기력한 존재. 기욱의 목에 팔을 걸고 목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신음을 흘리며 안기는 와중에 서진은 좁은 방에서 술에 잔뜩 취해 잠이 들어 있을 시헌을 생각했다. 시헌이 싫었던 적은 없다. 오히려 옆에 있으면 편하다는 것이 맞았다.
이상할 정도로 편해서, 이럴 리가 없는데. 불편했다. 시헌이랑 있으면 어떻게든 됐다. 서진은 혹시 이번에도 정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런 마법 같은 기대를 하며 목이 뒤로 넘어갔다. 기욱은 넘어간 서진의 목울대를 혀로 핥아 올렸다.
“하아, 하… 윽….”
사정 후 나른한 느낌에 서진은 몸을 뉘었다. 아직도 나가지 않은 기욱의 페니스가 기욱이 몸을 미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느껴졌다. 허벅지 사이로 닿는 축축한 느낌에 서진은 눈을 찔끔 감았다. 검은 시트 위로 튄 정액에 서진은 콘돔을 껴도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다. 안으로 넘어오는 이물감이 서진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술과 땀, 그리고 시큼한 냄새가 섞인 차 안은 있기만 해도 답답했다.
불과 십 분밖에 지나지 않았거늘. 한 시간은 족히 지난 느낌이었다. 미묘하게 느끼는 지점에 닿아 멈춰 있는 기욱의 페니스에 서진은 움직일 수도 없어 죽을 맛이었다. 이만큼 하지 않았으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할 무렵 기욱은 서진의 허리를 들어 올렸다.
“하악! 흐으읏! 그, 그만. 그만…….”
예상하지 못한 기욱의 행동에 서진은 저도 모르게 교성을 내질렀다. 제 입에서 나온 건지 의심이 될 정도로 야한 목소리에 서진의 얼굴이며 귀가 빨갛게 변했다.
“큭, 하하하하!”
“으앗, 아… 윽… 씨, 씨발…….”
변태 새끼. 개 같은 자식. 죽어 버려. 미친놈. 또라이. 서진은 웃기 시작한 기욱을 보며 속으로 할 수 있는 온갖 욕을 했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웃음이 나오냐고!
마음 같아서는 소리를 지르며 얼굴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기욱에 의해 흔들리는 몸은 그런 행위를 거절하듯 얕은 신음을 내질렀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모텔을 가는 게 훨씬 나았다. 서진은 차로 10분 거리도 되지 않은 지하철역 근처 번화가 술집 거리에 가득한 모텔 간판들을 생각했다. 어렸을 때는 비교적 덜했는데, 불과 몇 년 사이로 유독 모텔들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욱의 섹스는 서진의 생각 이상으로 끈질겼다.
“하아… 후….”
울컥, 하고 서진의 안에 있던 기욱의 페니스가 움찔거렸다. 갈아 끼지 않은 콘돔 탓에 서진은 기욱의 사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서진의 허벅지며 어깨 근처가 경련을 일으키기라도 하듯 떨렸다. 고개를 들 힘조차 없어 반쯤 감긴 눈이 턱 막힌 차의 천장을 보고 있었다.
후, 숨을 내쉰 기욱이 순식간에 서진의 시야 위로 올라왔다. 아, 이번이 몇 번째였더라. 두 번이었나 세 번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콘돔을 낀 의미조차 없다. 이럴 거면 왜 낀 걸까. 서진의 가슴 근처로 딱딱한 플라스틱이 닿았다. J대 병원 뇌신경외과. 교수 박기욱. 병원은 기욱 하나 없어도 잘 돌아갔다.
벨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휴대폰 기본음의 벨 소리였다. 귀에 거슬리는 기본 벨 소리가 구원의 소리처럼 들린 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기욱은 의자 밑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서진은 발끝으로 기욱의 가슴 부근을 건드렸다. 아직도 나가지 않은 기욱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을 좀먹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서진은 애원하듯 입을 열었다.
“빼, 빼 줘요….”
“기다려.”
서진이 대답할 틈도 없이 기욱이 전화를 받았다. 기욱의 흔들림과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서진은 읍, 하고 재빨리 입을 막았다.
― 교수님, 저 규건입니다. 어디세요?
― 밖. 어. 알았어. 아냐, 됐어. 내가 할 테니까 *scrub in 해 놔. 20분 내로 가. 끊자.
*scrub in : 수술 준비
기욱의 페니스가 빠져나옴과 동시에 서진은 윽, 하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었음에도 기욱의 휴대폰에는 문자가 울려 댔다. 기욱은 옷을 가다듬고, 차 안에 있는 물티슈로 근처 흔적을 대충 지웠다. 운전석 핸들을 쥔 기욱이 차의 시동을 걸었다. 기욱의 기다란 손끝이 핸들을 툭툭 건드렸다. 출발 전 뭔가 할 말이 있는지 고개를 돌렸다.
“조만간.”
“…….”
“밥 한번 먹자.”
하, 서진은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어차피 또 억지로 불러낼 거면서, 무슨 데이트 신청처럼 얘기하는지 기가 막혔다. 서진은 이대로 기욱의 차에 실려 병원에 갈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신발을 대충 구겨 신은 서진은 차 문을 열었다. 땅에 발을 딛는 순간 허리부터 시작해 온몸에 힘이 풀렸다. 서진은 간신히 닫히지 않은 문을 붙잡았다. 서진은 따라 내리려는 기욱을 말렸다.
“응급이잖아요. 집이 앞인데 갈 수 있어요.”
“…그래.”
서진이 차 문을 닫았다. 유유히 빠져나가는 기욱의 차를 본 서진은 집 대문 옆 담벼락에 몸을 기댔다. 한동안은 못 움직일 것 같았다. 서진은 집 근처에 쪼그리고 앉았다. 조금 춥긴 했지만, 날씨가 선선한 탓에 얼어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밝지 않은 하늘을 올려 봤다.
어렸을 적 생각이 났다. 지옥 같은 집을 나와 아르바이트며 학업으로 새벽에 들어오는 서윤을 여기 앉아 기다리고는 했다. 그러면 서윤은 멀리 골목 끝에서 서진을 발견하고는 뛰어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며, 집에 들어가자며 서진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똑같은 잔소리를 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서진은 서윤을 기다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어린 시절 조금이라도, 1분 아니 30초라도 먼저 서윤을 보고 싶었던 마음에서 나왔던 행동일 수도 있었다.
탁탁.
담배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났다. 불이 켜지지 않는지 탁탁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고개를 숙인 서진은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 안에서 200원짜리 편의점 라이터가 나왔다. 손이 서진의 손에 있던 라이터를 가지고 갔다. 탁, 한 번에 불이 붙었다. 후. 올라가지 못하고 내려온 담배 연기가 서진의 코를 자극했다.
“술주정은 집 안에서 해.”
“씨발, 바람 쐬러 나온 거거든.”
서진은 옷을 털며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자 서진이 기대고 있던 바로 옆 담벼락에 기대 담배를 물고 있는 시헌이 있었다.
“들어갈 거… 윽….”
“야, 괜찮냐?”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담배를 이 사이로 문 시헌은 휘청거리는 서진을 붙잡았다. 놓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시헌이 놓으면 정말 앞으로 꼬꾸라질 것 같아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시헌의 입술 사이에 있는 담배가 타들어 가며 진한 향기를 내뿜었다.
시헌은 퉤, 하고 짧아진 담배를 뱉은 뒤 서진을 붙잡았다. 시헌은 서진이 휘청거리는 것이 단순히 술이 덜 깨서 그런 건 줄 아는 모양인지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언제 깼어?”
“방금. 얼마 안 됐어.”
혹시 기욱의 차를 보지는 않았을까, 집에 들어가는 대신 부축을 받아 다시 담벼락에 몸을 기댄 서진은 시헌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시헌은 기욱이 왔다 간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새 담배를 손에 끼운 시헌은 담담하게 서진의 가슴 근처를 손가락질했다.
“옷 늘어졌어.”
시헌의 말에 서진이 재빨리 옷을 가다듬었다.
“원래 그런 옷이었던가?”
“뭐라고?”
“아냐. 너한테 물 엎어서 옷 갈아입은 거까지 기억은 나는데 그다음부터 기억이 안 나서.”
“씨발 새끼, 그렇게 처먹으니 기억이 안 나지.”
서진이 시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시헌은 다른 손에 있는 담배 케이스를 살폈다. 서진의 집에서 편의점까지는 거리가 좀 있다. 몇 개 남지 않은 담배를 본 시헌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라이터를 빌린 마당에 안 줄 수도 없고, 시헌은 결국 서진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당당하게 두 개비를 뽑아 가는 서진의 모습에 시헌은 다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시헌과 서진은 같은 담벼락을 등 뒤에 두고 담배를 물었다. 구름 사이로 아침 새벽하늘이 일렁이고 있었다.
야, 박시헌.
강서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시헌이 한발 물러나 마지막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나 있잖아, 며칠 전에 고백받았어. 아직 답장을 안 했는데.”
“그래서?”
“사귈까 생각 중이야.”
“강서진.”
담배를 끄고 빈 케이스를 손으로 구긴 시헌은 담담하게 몸을 돌려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서진은 목을 긁적였다. 땀이 식어서 그런지 더 찬 느낌이 났다. 서진은 왜 이런 얘기를 시헌에게 하고 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정말로 술이 덜 깨서 그런 걸까. 아니면 뭔가 다른 걸 기대한 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서진의 말에 시헌의 손이 서진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움찔, 시헌의 손에 서진이 몸을 약간 떨었다. 이내 기욱이 아니라는 사실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너 아주 나 죽이려고 했더라.”
뒤늦게 의미를 깨달은 서진이 허탈하게 웃었다. 역시 괜한 말을 했다.
“하하, 미안.”
“들어가자.”
담배의 영향인가? 아니면 좀 쉬어서 그런 건가. 처음보다는 괜찮아진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인 서진은 담배를 끈 뒤 아래로 내려가는 시헌의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