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4 재수할게 (26/83)

Chapter. 24 재수할게

“…윽, 아파요.”

“알아 아픈 거.”

다리 건너편 한강 공원 근처 벤치에 앉은 정혁이 한숨을 쉬며 시헌의 팔을 걷었다. 물 옆에는 잠수부들이 입수 준비를 위해 몰려들었다. 벌써 소문을 들은 건지 기자로 생각되는 수상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다. 밤이라 당장 수색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정혁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시헌의 팔을 살피는 사이 구급차가 왔다. 구조대 안쪽에서도 장비를 챙겨 나온 구조대원이 다가왔다. 시헌의 시선은 잠수부들이 있는 한강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금방 나올 거야.”

“…….”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살아 있으면. 정혁은 애써 앞에 있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건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헌의 팔을 본 정혁이 한숨을 쉬었다.

“너 이거 언제 다친 거야?”

“됐으니까 치료나 해 줘요. 언제 다쳤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시헌이 강을 힐끗거렸다. 그 모습에 정혁은 이마를 내짚었다. 그렇긴 하지. 정혁은 구조대원을 대신해 응급 키트를 열어 적당히 부목을 댔다. 그리고는 여전히 강을 보고 있는 시헌의 이마를 툭, 하고 손끝으로 건드렸다. 강한 건 아니었지만 이미 정혁에게 이마를 맞아 본 경험이 있던 시헌이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거 그렇게 노려보지 말래도. 됐고, 너 병원 가라.”

“이거면 됐잖아요.”

“가서 X―Ray도 찍어 봐야 할 거 아냐. 인대나 다른 데 손상 안 됐는지도 보려면 초음파도 해 보고.”

정혁이 어깨를 들썩였다. 들어갈 것 같았던 시헌의 예상과 달리 문제가 생긴 모양인지 쉽게 잠수를 시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좀 걸릴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챈 시헌이 고개를 돌려 정혁을 봤다. 은소가 안에 있다.

고통스럽게 숨이 막혀 하고 있을 은소를 생각하면 밖에서 편하게 숨을 쉬고 있는 이 순간, 일 초가 미친 듯이 저주스러웠다. 그런 자신에 비해 정혁은 너무나 멀쩡해 보였다. 은소가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시헌이 정혁을 보는 사이 정혁은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수화음과 상대방의 목소리가 커 대화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 교수님! 대체 어디 계신 겁니까? 다른 교수님들 지금 난리도 아니세요!! 임 교수님 어디쯤이냐고. 아까 한북대교 건넌다고 그랬잖아요!

― 아, 그거 말인데. 하하, 일이 좀 있어서. 그보다 나 *hypothermia 환자 하나 데려갈 것 같거든? 들어가면 바로 처치할 수 있게 해 줄래? 송 교수님한테 말씀드리면 될 거야.

*hypothermia : 저체온증

― 네? *heat stroke도 아니고 hypothermia요?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지금?

*heat stroke : 일사병

― 너야말로 여름 다 갔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해? 장난칠 기분 아니니까 똑바로 해.

― 알겠습니다. 그리고 20분 내로 들어오세요! 부탁입니다. 제발요. 아니면 저 다른 교수님들한테 죽어요! 아, 맞다. 무슨 환자인데 hypothermia이에요? 설마 한강에서 *near―drowning라든지 그런 거 아니겠죠?

*near―drowning : 익수

후배―정확히는 전공의―의사의 말에 정혁은 시헌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시헌을 본 정혁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 그래. 맞으니까 좀 끊자.

정혁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하여튼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는 놈이었다. 둘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멀리 낯선 사내 한 명이 정혁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구급대원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봐도 소방 관계자였다. 시헌의 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정혁이 잠시만, 하고 양해를 구한 뒤 구급대원의 근처로 갔다. 그가 정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정혁은 자연스럽게 남자와 악수를 주고받았다.

“해양구조대 구급팀장 이은석이라고 합니다. 최초 신고자분이 의사시라고…….”

“아, 예. J대 병원 외상외과 펠로우 임정혁입니다.”

“외상……. 임상강사시군요. 병원에 가 보시지 않으셔도 괜찮은 겁니까?”

“이 짓만 5년째입니다. 어지간한 짬밥은 되니 신경 쓸 거 없습니다.”

“하아, 알겠습니다.”

가지 않겠다는 정혁의 완고한 태도에 남자가 알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자리로 돌아온 정혁은 근처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은 뒤 시헌이 있는 나무 벤치 옆에 앉았다. 정혁이 같이 뽑아 온 음료수를 내밀었다.

캔으로 된 게토레이였다. 시헌은 정혁에게 받은 게토레이를 만지작거렸다. 눈앞에 보이는 강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커피 맛이 무슨 맛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해요?”

“뭐라고?”

“교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게 있을 수 있어요?”

정혁은 다 마신 캔 커피를 손으로 구겼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제아무리 정혁이라 해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차라리 교통사고였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갔을지도 모르고, 불이 났다면 소방관에게 부탁해서라도 현장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근데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가?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일분일초에도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을 환자를 생각하면 스스로가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사실은 답답함에 속이 미어터진다. 그래도 담담하게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직업이고, 만약 환자가 살아 나왔을 때 가장 침착하게, 최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이다. 스스로를 위해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 모습이 다른 주변 사람들에게는, 어린 시헌에겐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정혁이 묻고 싶은 건 시헌이었다. 정혁은 시헌의 질문에 다시 대답으로 그 답을 대신했다.

“괜찮냐?”

“안 괜찮아요.”

“하아, 나라면 말야 친구가 눈앞에서 그런 꼴을 당했으면. 좀 더 소리를 지르고, 울고, 그럴걸?”

“다 울었어요. 그리고……. 운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이렇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스스로가 한심하다 이거냐?”

“그렇게 티 나요?”

“너 의외로 얼굴에 다 드러나니까 말야.”

정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웃을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안다. 이 상황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래도 웃는다. 그렇게 하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 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정혁이 시헌의 손에 있는 게토레이 위로 손을 올렸다. 시헌이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으로 정혁을 올려 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뭐,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우리 닮은 것 같지 않냐?”

“전 의사 안 할…….”

“아, 알았어. 그놈의 의사 타령 지겨워 죽겠다.”

정혁이 시헌의 팔을 잡아당겨 품 안에 안았다. 정혁에게 안긴 시헌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머리 위로 정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혁이 그런 시헌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도 말야.”

“…….”

“너한테는 아직 이른 고민이야.”

“저는… 그게, 그… 내가… 내가 은소를…….”

눈물로 목이 멨다. 시헌은 끝내 말을 잇지 못한 채 정혁의 품에 안겨 울었다.

* * *

“또 허탕……. 하아.”

잠수부와 대화를 하고 온 구급 대원과 이야기를 주고받은 정혁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팔 아래에 차인 시계를 내려다봤다. 아니, 내려 볼 것도 없었다.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정확한 시간을 확인했다. 6시 23분, 시헌의 말에 의하면 5시간째다.

날이 밝았으니 본격적으로 수색할 거라고는 하지만 대책이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슬슬 부모님과의 연락도 시도해 보고 있다는 것 같다. 지옥 같은 밤이었다. 이 사실을 시헌에게 전해야 하는 정혁의 마음이 무거웠다. 정혁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아씨, 밤새 울려대는 휴대폰은 지긋지긋할 지경이었다. 신경질 나서 중간에 몇 번인가 휴대폰을 꺼 버린 적도 있었다.

받을까 말까 하던 정혁은 결국 구급대원에게 양해를 구한 뒤 전화를 받았다. 근처 편의점에서 산 담배를 물며 은소가 떨어진 다리 쪽을 바라봤다. 전화를 받기 무섭게 응급의학과 4년 차 치프는 안윤성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 교수님!! 대체 어쩌자고 그러시는 겁니까!! 밤새 연락도 안 받고, 휴대폰도 꺼져 있고. 밤새 얼마나 난리였는데요! near―drowning(익수) 환자는 대체 언제 오는 건데요? 그보다 진짜 환자가 있긴 해요? 진짜 near―drowning면 지금쯤…….

― 안윤성. 너 거기서 한 마디만 더해라.

― 죄송합니다. 어, 어쨌든 유 과장님이 지금 당장 오라 그러셨어요. 임 교수님 여기서 더 사고 치시면 진짜 이번에는 징계로 안 끝날지도 몰라요. 한북대교라고 하셨죠? 과장님한테 20분 안에 오신다고 말할게요!

이게 멋대로. 정혁은 새 담배를 입에 문 뒤 불을 붙였다. 뻐긴다고 뻐겼는데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빌어먹을, 정혁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막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쿵,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정혁이 바로 옆에 있는 벤치 헤드를 붙잡았다.

― 교수님, 듣고 계세요? 오실 거죠?

휴대폰 너머 후배―윤성이 대답이 없는 정혁을 재촉했다. 잠시만. 하고 말을 하려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진인가? 놀란 정혁은 주변을 둘러 봤다. 이상함을 느낀 건 정혁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정혁은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휴대폰을 붙잡았다.

― 알았다고. 금방 간…….

― 뭐예요? 왜 말하다 말아요? 교수님?

툭, 하고 정혁의 입에 있던 담배가 떨어졌다. 놀란 정혁이 담배를 다시 주워 끈 뒤 바로 옆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어어, 다리. 다리! 아침, 한강 공원 산책을 나온 남자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정혁은 남자가 손가락질하는 방향의 다리를 바라봤다. 폭탄이 터진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나며 다리의 한편이 강 아래로 떨어졌다. 그 여파로 강 근처에 있던 물이 정혁의 뺨 근처로 튀었다. 정혁은 뺨에 닿은 강물을 멍하니 만졌다.

― …님! 교수님!! 지금 뭐 큰 소리 나지 않았어요?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윤성도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정혁이 공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자에서 일어 난 시헌과 눈이 맞았다. 정혁은 시헌에게 다가오라며 손짓했고, 시헌은 뛰어오다시피 정혁의 앞으로 다가왔다. 후, 정혁은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 다, 다리가…….

― 다리요? 다리 다친 거예요? 아, 진짜 무슨 일인데요! 괜찮은 거 맞아요?

― 한북대교 다리가 무너졌어.

― 네? 그게 왜 무너지……. 교수님 병원 오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거……. 잠깐만요! 송 교수님 바꿔 드리겠습니다!

정혁은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씹었다. 몇 번인가 라이터로 불을 붙였지만 잘 안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 너머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변이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자 정혁은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 야, 임정혁. 너 다리 근처에 있다며?

― 예? 아, 예. 다리 바로 밑에 공원입니다. 그보다 교수님, 사람 좀 보내 주세요. 제가 현장 지휘하겠습니다.

― 하여튼 무슨 말을 그렇게……. 야, 그게 뭐 쉬운 일인 줄 알아? 우리도 지금 TV 보고 있어. 당장 병원으로 돌아와 빨리!!

― 교수니……. 아, 젠장. 알겠습니다.

* * *

정혁은 자판기의 버튼을 눌렀다. 커피가 내려오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응급실 앞 자판기를 발로 찼다. 쿵, 소리와 함께 자판기 안에 있던 커피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주변이 시끄러웠다. 탁― 캔 커피를 뜯은 정혁은 그 자리에서 커피를 순식간에 비웠다. 멀리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응급실 주변은 임시로 세운 천막들로 가득했다. 군데군데 우는 소리 같은 것도 들렸다. 비어 있는 캔 커피가 정혁의 손에서 반쯤 구겨졌다. 서 있는 정혁의 옆으로 윤성이 다가왔다. 돈을 넣고 버튼을 누르자 커피가 떨어졌다. 나 할 땐 안 되더니. 자판기 옆에 몸을 기댄 정혁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팀장이라는 사람의 번호를 받긴 했지만, 도통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아직도 그겁니까? 교수님, 이 정도 시간이면 이제……. 포기하시죠.”

“안윤성. 작작 안 해?”

“하아, 형. 저도 할 말은 많거든요? 형 외과잖아요. 안 그래도 거기 터지기 직전인데 여기 남은 거, 저는 잘 이해가 안 돼요. 솔직히 우리 병원에 형만 한 의사가 어디 있다고…….”

윤성이 고개를 숙였다. 엄마의 친구의 아들로 의대 시절부터 알고 친했던 윤성은, 선후배나 의사이기 이전에 친한 형 동생 같은 사이었다. 인턴 시절 외과로 오라는 걸 그렇게 무시하고 응급의학과를 가더니 이 꼴이었다.

윤성은 오랫동안 펠로우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혁이 실력에 비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잘 알고 있었다. 후배이자, 친한 동생으로 당연히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윤성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정혁은 쉽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정혁이 윤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진짜 하지 마요. 유치하게. 그보다 이거요. 한 간호사님이 좀 봐 달라 했어요.”

윤성이 정혁에게 차트를 넘겼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었다. 대부분 환자는 수술에 들어간 상태고, 남은 건 운 좋게 살아남은 환자들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운이 좋다면 말이다. 요 한 시간 사이에 온 환자들의 절반이 빠른 사망 절차를 위해 형식적으로 들어온 환자라는 걸 생각하면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정혁은 윤성이 넘긴 차트를 넘겼다.

“사고 환자가 아닌데?”

“밤에 들어온 환잔데요. *pedestrian TA예요.”

*pedestrian TA(traffic accident) : 보행자 교통사고

“근데 아직도 *CBC 결과가 없어? 그보다 이 이름 낯이 익는데…….”

“어, 그러게요? 왜 없지?”

*CBC[complete blood cell count] : 일반 혈액 검사

정혁과 함께 차트를 본 윤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정혁은 가슴에 있는 볼펜을 꺼내 윤성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너 이 자식, 일 똑바로 안 하지? 어디서 누락됐는지 확인해 봐.”

윤성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저렇게 해도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강서진. 차트 이름을 본 정혁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익숙한, 어디서 본 것 같은 이름이었다. 고민하는 정혁을 둔 윤성이 옆에서 말을 이어 갔다.

“그게요. 그 환자 신경외과 일반병동 간호사 동생이래요. 우리 병원에. 신경외과에 병원장 아들 있잖아요. 3년 차인가 2년 차. 박기욱인가? 하여튼 그 사람이랑 사귀는 여자 남동생이래요.”

“얘가, 병원 간호사 동생이라고?”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아, 진짜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저도 오더 내려온 거라 어쩔 수 없는 거 알잖아요. 지금 응급실에 남아 있는 외과의 지금 형밖에 없어요.”

“아무 말도 안 했거든?”

“형은 말 안 해도 티 나거든요? 어쨌든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나중에 뒤탈 없게 환자 꼭 봐 주셔야 합니다! 예?”

“알았다고.”

정혁은 먼저 가는 윤성을 향해 차트를 흔들었다. 다 마신 캔 커피를 쓰레기통에 던진 뒤 천천히 새 커피를 뽑았다. 캔 커피를 입에 문 정혁은 윤성이 준 차트를 살피며 응급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어 보였다. 아직도 나오지 않은 결과가 조금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몰려드는 응급 환자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강서진, 강서윤.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는 내내 정혁은 그 두 이름을 중얼거렸다. 일하면서 온갖 환자들을 많이 봐 왔지만 이런 느낌이 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디서 많이 봤단 말야. 그런 생각을 하며 정혁은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간호사 데스크에 몸을 기댄 정혁은 휴대폰을 목에 반쯤 걸쳤다.

― 짧게 말해라, 나 바쁘다.

― 어제 저녁쯤에 들어온 pedestrian TA 환자 CBC 보낸 거 아직이야?

― 잠깐만, 아 있다. 근데 우리도 정신없어서 누락됐나 보네. 사고 환자들 검사하랴 일반 환자 검사하랴 정신이 없다. 어떻게 급해?

― 뭐, 급한 건 아닌데…….

― 뭘 그렇게 말을 흐려? 내가 *LM하면서 그런 부탁받은 게 한두 번이야? 금방 해서 보내 줄게. 바쁘다 끊어.

*LM[laboratory medicine] : 진단검사의학과(구 임상병리학과)

생각보다 흔쾌히 받아 줘서 다행이긴 하지만. 정혁은 답지 않은 짓을 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과거 기록이라도 있나? 서진의 기록을 보려 간호 데스크 앞 컴퓨터를 만진 정혁은 이내 마우스를 놓았다. 뭐, 별일 있겠어. 그렇게 생각한 정혁은 서진이 있는 침대의 커튼을 걷었다.

“…….”

마침 앉아 있던 서진과 정혁의 눈이 맞았다. 둘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정혁은 커튼을 바깥으로 친 뒤 완전히 안으로 들어왔다. 사고를 낸 사람은 일이 바빠 명함을 남긴 뒤 돌아간 모양이었다. 정혁은 서진의 상태를 살폈다. 예상대로 크게 이상한 문제는 없었다. 보호자가 오는 대로 퇴원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잠깐, 이불 좀 걷어도 될까?”

그래도 신경을 써 달라고 하니 제대로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정혁이 이불을 걷으려 하자 서진이 먼저 이불을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정혁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아까….”

“아까?”

“아까 다른 쌤 왔다 갔잖아요.”

무슨 기분인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미움을 받는 것 같았다. 정혁은 유독 저를 경계하는 서진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보통 병원에 와서 의사를 경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어린애도 아니고 말이다. 말투를 볼 때 뭔가 부족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것과는 다른 느낌? 경계 이전에 익숙한 느낌이 났다. 언젠가 병원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겪은 것 같은. 잊고 있었던 그런 느낌이었다. 정혁이 뒷목을 긁적이며 팔에 끼워진 차트를 다시 살폈다.

“알았어. 알았어. 혈액검사 결과 나오면 그때 보는 걸로 하자.”

“아까 간호사들 말로는 퇴원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던데. 퇴원할래요. 아픈 데도 없고.”

“누나가 신경외과 간호사지? 지금 병원이 좀 정신이 없어서 말야. 어쨌든 연락은 받았을 거야. 통화는 했어?”

“휴대폰 안 가지고 왔어요. 그보다 간호사가 퇴원해도 된다 그랬잖아요. 퇴원하고 싶다니까요.”

“내꺼 빌려줄 테니까 누나랑 통화할래?”

도통 대화가 되지 않았다. 서로 자기 말만 하는 꼴이 참 우스웠다. 서진은 앞으로 내민 정혁의 휴대폰을 밀어냈다. 아무렇지 않게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 걸 보니 일부러 제 말을 무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서진이 일부러 정혁과 시선을 피했다. 그런 서진을 본 정혁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퇴원은 안 돼.”

“왜요.”

서진이 정혁을 노려봤다. 그 모습에서 정혁은 짧은 순간이지만 시헌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나이가 같군. 요즘 애들은 왜 하나같이 이 모양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혁이 뒷목을 긁적였다.

“검사 결과 나올 때까지는 안 돼.”

“도대체 무슨 검사요? 다 한 거 아니었어요?”

“혈액검사.”

“피 뽑아 간 지가 한참인데 아직도 안 나왔대요?”

한마디도 지지 않는 게 참 똑같았다. 정혁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환자한테 저런 말을 들으니 할 말이 없었다.

“너도 있어 봐서 알겠지만, 오늘 병원이 좀 난리여서. 그쪽도 그쪽 나름대로 정신이 없었는지 누락됐다더라. 빨리해 달라고 했으니까 한두 시간 내로 나올 거야. 야, 우리도 사람인데 이해 좀 해 줘라.”

마지막은 왠지 푸념에 가까운 말이 됐지만 아무렴 뭐든 좋았다. 날을 꼬박 새우고 출근해 한숨도 못 잔 정혁은 정혁 나름대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무엇보다 아직도 병원에 오지 않은 시헌이 신경 쓰이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면서 번호라도 받아 가는 건데 싶었다. 여러모로 머리가 아팠다.

“검사 나오는 대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 쉬고 있어. 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불러. 당분간은 여기 있을 거니까.”

“다른 환자 보시게요?”

“그렇지.”

뜻밖에 질문을 해 오는 서진의 모습은 평범한 나잇대 남학생 같았다. 근처에 있겠다는 말이 서진을 꽤 안심을 시킨 모양이었다. 커튼을 걷고 나가려는 정혁을 서진이 불렀다. 정혁이 커튼에 몸을 반쯤 걸친 채 서진을 봤다.

“혈액검사 말인데요……. 그…….”

“그?”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래. 혹시 뭐 나오면 알려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혁이 간 후 서진은 이불을 꼭 쥐었다. 설마, 그냥 기분 탓이겠지. 그럴 리 없을 거다. 다 괜찮을 거다.

“아, 강 간호사지?”

커튼 너머로 정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계 소리로 주변이 시끄러워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혁의 말에 대답하는 서윤의 목소리도 들렸다. 커튼이 걷히며 서윤이 안으로 들어왔다.

“서진아…….”

간호사복 차림의 서윤이 침대에 앉아 있는 서진을 봤다. 서진의 모니터와 상태를 살핀 서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

“서진아, 괜찮아? 아픈 곳은 없어?”

몸을 숙인 서윤이 서진을 안으며 서진의 뺨을 만졌다. 서진을 안은 서윤의 눈가로 눈물이 고였다. 듣자 하니 맨몸으로 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은 동안 신분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후 뒤늦게 사고 소식을 들었지만 다리 사고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서진의 상태는 이미 응급실을 내려오기 한참 전에 알고 있었고, 병원 응급실에 있는 서진이 어디로 사라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CBC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사정을 알고, 심각하게 걱정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서진이 서윤의 품 안에 안겼다.

“누나, 나 숨 막혀.”

“누나가… 누나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서진아. 서진아…….”

서윤이 계속해서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조금 더 빨리 내려오고 싶었는데. 서진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모두 제 책임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화라도 한 번 더 해 볼걸, 신경이라도 좀 더 썼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고를 낸 사람과 통화는 했다. 갑자기 튀어나왔다고 했다. ‘자살을 생각했던 건 아닐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조차 들었다. 뒤늦게 기욱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서진이 학교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진이 학교에 나가지 않았던 것이 마치 자신을 탓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머리로는 서진의 상태가 괜찮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서윤에게 서진은 죽다가 살아난 사람처럼 간절했다. 마침 반대편 환자를 보고 있던 정혁과 눈이 마주쳤다. 서윤이 커튼을 완전히 걷지 않고 들어온 탓이었다. 서진은 고개를 숙였다.

이러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다. 왜 이렇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서진은 눈물이 흐르려던 걸 간신히 참은 뒤 입을 열었다. 여전히 목이 멨다.

“괜찮아. 서진아 괜찮아.”

“누나 나…….”

“어, 응. 뭐라고 말했어? 괜찮아?”

“응 괜찮아. 나, 나…… 있잖아…….”

서윤을 앞에 둔 서진이 머뭇댔다. 서윤이 천천히 말하라며 그런 서진을 달랬다. 누가 누구를 달래야 할지 참 아이러니했다.

“있잖아. 나, 나…….”

“그래. 서진아 괜찮으니까 말해.”

“그러니까……. 학교…….”

“학교가 왜? 혹시 또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이대로라면 평생 말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서진이 고개를 들어 서윤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자퇴하고 싶어.”

“서진아……. 그건…….”

“미안해.”

“아냐, 다 누나가 잘못한 탓이지. 하아, 학교는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응? 알겠지?”

서윤의 말에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너편에 있던 정혁이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헛기침한 정혁이 모르는 척 옆에 있는 의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 * *

― 지금 벌써 몇 시간째인 줄 아십니까?

― 아, 진짜. 그만 전화하시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희도 인력 풀 가동하고 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지금 다리 뜯어진 것 때문에 난리 난 거 잘 아는 사람이 대체 왜 계속 그러십니까? 안 그래도 국민 불안해한다고 구조 투입 인원들 전부 위에서 언론이랑 연락하지 말라고 지침 내려오고 그랬습니다. 부탁이니까 전화하지 말아 주세요. 걸리면 정말 곤란하단 말입니다.

― 지금 징계가 중요합니까? 저기요. 다리 붕괴되기 몇 시간 전에 학생 떨어졌다는 거 사람들은 압니까?

― 아, 의사 선생님. 이러시면 정말……. 하아. 알겠습니다. 하류 쪽으로 사람들 흘러갔을 가능성이 있어서 잠수부 투입했습니다. 뭐라도 나오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그 떨어진 학생 건은……. 아시겠죠? 네?

정혁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 와중에 언론 통제니, 징계가 중요하다는 투로 말하는 소방관을 정혁의 머리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그러니 만년 펠로우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정혁은 응급실 외벽에 몸을 기댔다. 정혁을 본 의사 한 명이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저, 임 교수님이시죠?”

“어. 왜?”

교수는 얼어 죽을 교수. 허울만 이름뿐인 명칭에 정혁은 헛웃음이 나왔다. 꼴을 보아하니 병원 사정을 잘 모르는 인턴 같았다. 그것도 다른 과에서 지원 나온. 외과 계열 인턴이나 처음부터 응급실에 근무 중인 인턴들은 이미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말끔하게 다려진 셔츠며 가운, 넥타이까지 매고 있는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아래는 난리가 났을 때 편한 과에서 근무하다 온 인턴이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 한북대교 말입니다. 환자…….”

“환자가 뭐 어쨌다고.”

“들어왔는데요.”

“상태가 어떤데? 초진 봤을 거 아니냐.”

“그게 아니라……. *DOA인데요. 사망선고요. 제가 못 하겠다고 하니까 서 간호사님이 다른 선생님들 바쁘시다면서 임 선생님 불러오라고 하셔서…….”

*DOA[dead on arrival] : 응급실 도착 시 사망

정혁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벽에서 몸을 뗐다. 인턴은 정혁보다 키가 조금 컸지만, 정혁은 진료복에 손을 넣으며 인턴을 올려다봤다.

“너 지금 인턴 들어온 지 몇 개월이 넘었는데 그거 하나 똑바로 못 해?”

“저……. 제가 주로 내과 쪽에만 있어서……. 그 외과나 응급실은 잘…….”

“…….”

평소 힘든 과에 있으면서도 웃으면서 일하자며 의사들 사이에서는 화를 많이 내지 않는 정혁이 정색을 하며 인턴을 노려봤다. 아무리 평소에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듣는 인턴이라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인턴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됐다. 가.”

입을 다물며 고개를 숙이는 인턴을 본 정혁이 공으로 손을 저었다. 말단 인턴을 상대로 화풀이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예민한 건 정혁뿐만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화를 내 주변 의료진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게 만들어봤자 좋을 것은 없다.

“됐다. 그럴 수도 있지. 답지 않은 짓을 했어. 미안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긴 뭘 괜찮아.”

정혁이 소생실 안으로 들어갔다. 보호자가 온 모양인지 입구 쪽이 시끄러웠다. 소생실 간호사를 본 정혁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거렸다.

“환자 사망 시간 오후 9:33.”

정혁의 담담한 한마디에 주변 분위기가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이 환자가 죽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일 텐데 정혁의 말의 전과 후가 너무 달랐다. 모포를 덮는 모습에 정혁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슬쩍 보니 나이가 어렸다. 당장 안쪽에 있는 서진이나 시헌과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어쩌면 시헌이 찾고 있는 은소라는 학생일지도 몰랐다.

정혁은 환자 이름이 적힌 차트를 보고 괜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죽은 애 앞에서 할 짓은 아니었지만, 정혁에겐 죽은 아이 만큼이나 은소 또한 절박했다.

사망선고를 마친 정혁은 소생실을 나왔다. 뒤쪽으로 우는 보호자를 달래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하루만 해도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른다. 이름은 바뀌지만, 그 형태는 비슷했다. 세상은 참으로 잔인했다. 정혁이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윤성이 다가왔다.

“교수님, 이거 응급으로 부탁했던 CBC(혈액검사) 결과예요.”

“아, 염증 소견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랬었지? 뭐, 대단한 건 없지?”

정혁은 반사적으로 윤성의 손에 들린 차트를 살폈다. 차트를 쭉 내려다보던 정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윤성 또한 당혹스러운 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NP *H/O 있어?”

*neuropsychiatry : 정신건강의학과

*H/O[history of] : 병력

“강서진, NP *H/O 있어요?”

윤성이 정혁의 말을 그대로 읊으며 되물었다. 정혁은 그런 윤성이 살짝 답답했다. 확실히 차트상에는 별다른 기록은 없었다. 단지, 검사 결과 하나가 묘하게 정혁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초진 네가 했다면서? 들은 거 없어? 사고는 어떻게 난 거래?”

“뭐, 본인 말로는 독서실에 갔다 오는 길에 사고가 났다고 그러는데요. 환자를 데려온 구조사 말로는 그 근처가 주택가라 독서실은 없다고 하거든요. 운전자 말로는 갑자기 튀어나왔다고 하기도 했고. 아,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긴 하네요. 그거 말고는 딱히 없어요.”

“본인은 독서실에서 오는 길이라 했는데. 주택가였다고?”

“뭐, 사고 나면서 기억에 혼란이라도 왔나 보죠. 그런 일 종종 있잖아요. 아 형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 아녜요?”

윤성이 적당히 하라며 말을 잘랐다. 확실히 윤성의 말 따라 사고 충격으로 기억에 혼란을 겪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정말 과하게 생각하는 걸까? 윤성이 간 후 정혁은 차트를 다시 살폈다. 강서진, 강서윤. 멀리 정혁에게 사망선고를 부탁했던 인턴이 정혁을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인턴. 아, 인턴을 본 정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걸 잊고 있었던 걸까. 서진에게 가려던 정혁은 간호사 데스크 앞 컴퓨터 차트를 만졌다. 윤성이 준 차트를 토대로 검색하던 정혁이 안쪽에서 작업 중인 간호사에게 말을 걸었다.

“10년 전 기록이요?”

“10년이었나. 11년인가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그즈음일 겁니다.”

“저희가 *CRM 도입한 지가 8년밖에 안 돼서. 그 이전 자료는……. 아, 사본으로 있네요. 그쪽 컴퓨터로 띄워 드릴게요. 누구 환자 찾으세요?”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 고객 관계관리/병원 전산망

정혁이 임시로 올라온 사본 차트 화면을 바라봤다. 수기(手記)차트를 본 정혁이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급한 건 아니라서. 그냥 나중에 제가 찾을게요. 감사합니다.”

“아, 네. 알겠어요.”

간호사가 다시 일에 집중했다. 차트를 이마에 가져다 댄 정혁은 혀를 찼다. 너무 많은 일에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인턴 시절에 겪었던 환자였다. 당시 그 일이 있고 난 뒤 며칠 동안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도 못했던 기억이 났다.

잊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던 것도. 병원에 있으면서 온갖 환자들을 다 만난 정혁이지만 이번만큼은 좀 예상 밖이었다. 하, 정혁이 몇 번이나 검사 결과를 살폈다. 혹시나 싶어 다시 컴퓨터로 확인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커튼 너머를 본 정혁은 결국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 야, 너 강서진 CBC 똑바로 한 거 맞아?

― 뭐? 당연하지! 야, 임정혁! 환자 누락된 건 미안하긴 한데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다? 내가 이 일 한두 번 해?

― 따지려 했던 건 아니고……. 어쨌든 미안하다.

통화를 끊은 정혁이 한숨을 쉬었다. 스스로 행동해 놓고도 왜 이러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혁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불안한 마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주변 간호사들이 그런 정혁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더 이상은 눈치가 보였던 정혁은 결국 차트를 챙기고 서진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커튼 너머가 이상하게 시끄러웠다.

“가라구요!”

“강서진, 진정하라고 했잖아.”

“부탁이니까 제발 좀…….”

서진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사람의 목소리였다. 서진의 누나인 강서윤, 신경외과 일반 병동 간호사. 그런 서윤과 사귀는 신경외과 2년 차 레지던트 박기욱.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정혁은 한숨을 쉬며 커튼을 걷었다.

서진을 진정시키려는 기욱과 그런 기욱을 싫다며 밀어내는 서진이 있었다. 정혁을 본 기욱이 고개를 약간 숙이며 인사를 했다. 기욱의 시선이 정혁의 손에 있는 차트에 닿았다. 정혁은 차트를 품 안쪽으로 슬쩍 숨겼다.

“서진이 CBC 결과입니까?”

“어.”

“저도 보여 주시죠.”

“야, 박기욱.”

“예. 교수님.”

“너 2년 차가 간도 크다? 어딜 멋대로 내려와?”

정혁의 트집에 기욱은 인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서진이는…….”

“강 간호사가 보호자지 니가 보호자야?”

“그건 아니지만…….”

“너 *NS에서 편하게 일하나 보다? 아니면 아버님한테라도 일렀냐?”

*NS[neurosurgery] : 신경외과

“교수님 저 그런 적 없습니다. 말씀이 좀 지나치신 것 같은데요.”

“하나도 안 지나쳐. 내가 깡으로 재계약하면서 병원 펠로우로 남아 있는 줄 알아? 뭐 해? 알아들었으면 당장 올라가.”

정혁이 기욱을 노려봤다. 한 번 짜증이 나기 시작한 정혁의 성격은 병원 내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어지간하면 화를 내는 타입은 아니라 정혁이 화를 내면 대부분 화를 낼 만했다고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기욱은 서진에게 나중에 오겠다는 말을 남긴 뒤 마지못해 응급실을 나와야 했다.

기욱이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한 정혁은 서진의 침대 밑 의자를 꺼내 앉았다.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정혁은 감기는 눈을 애써 뜨며 서진을 보고 웃었다.

“텃세를 부리는 건 내 성격이 아닌데 말야.”

“그렇게까지 몰아붙일 필요는 없잖아요.”

“네가 싫어했잖아.”

정혁의 한마디에 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단순하긴. 커튼 너머의 말과 알겠다며 올라가겠다고 했을 때 서진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역시 아닌 척해도 애는 애일 수밖에 없었다.

그편이 오히려 안심이지만. 정혁은 앉아 있는 서진을 바라봤다. 그때는 좀 더 어린애 같았는데. 그런 애가 벌써 성인이라니 참 세월 빠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오래 이 일을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저 언제 퇴원할 수 있어요? 검사 결과죠 그거?”

“뭐, 그렇지.”

“문제없잖아요.”

서진은 빨리 퇴원하고 싶다며 정혁을 재촉했다. 정혁은 서진이 퇴원을 서두르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혈액검사 결과를 확인한 지금 정혁은 그 이유를 확실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서진은 결과 내용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정혁이 기욱을 쫓아내고 서진의 앞에 앉은 이유이기도 했다.

“퇴원 전에 말야. 몇 개 물어봐도 될까?”

“하아, 대답 안 하면.”

“퇴원은 무리겠지.”

“알았어요. 뭔데요?”

서진이 마지못해 질문을 허락했다.

“최근에 잠을 못 자거나 하는 거로 병원 간 적 있어?”

“없는데요.”

“복용하고 있는 약이나 다른 병원 간 적은? 비급여로 먹은 약 같은 건?”

“비급여가 뭔데요? 그리고 병원 안 갔다니까요.”

“사고 나기 전에 수면 내시경 같은 거 한 적은 있어?”

“제가 그런 걸 왜 해요!”

서진은 슬슬 짜증이 난 모양인지 신경질을 냈다. 기욱이 서진의 검사 결과를 은연 중 궁금해했던 것처럼 서진 또한 검사 결과가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정혁이답지 않은 트집을 잡으며 기욱을 쫓아낸 순간부터, 물어볼 것이 있다고 말을 한 순간부터 짐작했던 걸지도 몰랐다.

인훈의 집에서 겪었던 그 경험이 결코 정상적인 상황에서 나올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짐작했다. 단지 그 와중에도 제발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서진의 신경질적인 표정을 본 정혁이 한숨을 쉬며 질문을 이어 갔다. 그리고 그 질문은 서진을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상한 걸 먹은 기억은?”

“뭐, 라구요?”

저거군. 윤성은 정혁을 예민하게 생각한다고 했지만, 정혁은 윤성의 그런 말이 틀렸다는 걸 확신했다. 윤성이 아무리 친한 동생 같은 존재라지만, 정혁과는 경험 자체가 틀렸다. 환자를 오래 보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형사들이 형사의 감을 믿듯이 의사도 의사 나름의 감은 있었다. 그리고 두 직업의 공통점은 대게 그 감이란 게 좋지 못한 상황에 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눈앞에 있는 서진의 케이스도 그랬다. 정혁은 당장에라도 서진의 몸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저런 반응에 함부로 굴었다가는 무슨 일이 날지 몰랐다. 다른 환자였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상대가 병원장 아들인 기욱과 얽혀 있으면 골치가 아팠다.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는 건 그 박기욱이, 여자 친구―서윤의 동생인 서진을 꽤 챙기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서진은 기욱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보이는 것 같았지만, 그런 개인 사정까지는 정혁이 알 길은 없었다. 서진을 진정시키기 위해 정혁은 숨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내가 중학교 때 말야. 아침에 지나가는 남자가 사탕을 주더라고. 한두 개 정도?”

“사탕요?”

“그래, 사탕. 먹어 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마침 친구를 만났거든. 그래서 그냥 나중에 먹는다고 하고 학교를 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잘된 일이지.”

정혁의 이야기에 서진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조금은 흥미가 가는 모양이었다. 서진의 반응을 본 정혁이 말을 이어 갔다.

“사실 난 사탕을 별로 안 좋아했거든. 그래서 친구한테 줬거든. 수업 시간이 좀 정도 지났을까? 그 약을 먹은 애가 갑자기 이상한 거야. 좀 미친 것같이 웃고. 원래 그럴 애가 아니거든. 선생님이 결국 양호실에 데려갔는데. 양호 쌤도 이상하다고 해서 병원엘 갔어.”

“어떻게 됐어요?”

“그 사탕에 약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땐 나이가 어려서 잘 몰라서 정확히 어떤 약물인지는 잘 몰라. 아마 항정신성 의약품으로 분류된 마약성 물질이지 않을까 싶어. 나는 헤로인이라 추측하고 있지만.”

정혁의 말에 서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본인의 약물이 헤로인이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그건 아니지만, 서진의 검사에서 나온 약물이 같은 항정신성 의약품이라는 것까지는 맞았다.

남학생이 병원에 간 건 예삿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탕을 받은 곳이 학교 밖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운이 좋은 건 맞았다. 문제는 그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벌어졌다. 정혁의 학교와 멀지 않은 학교였다. 정혁과 마찬가지로 인적이 드문 등굣길에서 남자가 학생에게 사탕을 주며 접근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후 남자가 벌인 일은 어린 학생들이 소문으로 떠들고 다니기에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강간이었거든.”

“남학생이라면서요.”

정혁은 서진의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할 필요가 없는 편이 맞았다. 몸에 닿는 것에 예민한 반응, 구급대원과 앞뒤가 맞지 않은 진술과 사고 당시 휴대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 등등을 반영할 때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응급실에 있으면서 강간 환자들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던 정혁은 서진의 모습이, 강간을 당한 피해 여성들과 묘하게 닮았다고 느꼈다.

정혁이 들고 있던 차트를 서진에게 넘겼다. 봐도 괜찮다는 정혁의 손짓에 서진의 고개가 차트 아래로 떨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서진은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알 수 없었다.

“미다졸람(Midazolam), 항정신성 의약품이야.”

“그게 뭔데요?”

서진은 정확한 단어의 뜻을 알지 못했다. 나이 또래를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의사 처방이 있어야 하는 약물, 내시경이나 가벼운 마취에 이용하는 약물이야.”

“그럼 아까 그 질문은…….”

“경로 추적을 위한 질문이었어.”

“저는 그……. 사, 사실은…….”

이불을 당긴 서진이 몸을 떨었다. 사실 서진은 이 모든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신은 왜 병원에 있는 걸까.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서진의 심박 수가 빨라지는 걸 본 정혁이 서진을 최대한 진정시켰다.

“누나, 누나요! 제발… 누나… 그리고 그 사람한테 비밀로 해 줘요.”

“그 사람?”

묘한 지칭에 정혁이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정혁의 시선을 느낀 서진이 정혁의 팔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서진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은 정혁의 심기를 사뭇 불편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바, 박기욱이요.”

정혁이 아는 박기욱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고, 정혁이 알고 서진이 아는 박기욱 또한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의사의 세계라는 게 마냥 깨끗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무엇이든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는 것처럼,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의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무게에 대해 무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역으로 죽음에 대해 기계처럼 무뎌지는 사람도 있었다.

의대생 시절부터, 의사가 되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던 녀석들을 봐 오긴 했다. 하물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자 친구의. 정혁은 기욱이 앞에 있다면 당장에라도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후우, 숨을 고른 정혁은 우선은 눈앞에 있는 서진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알았어. 비밀로 해 줄게.”

“저, 정말요?”

“그래. 어디까지 기억나?”

“네?”

정혁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서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혁은 잠시 멈칫거렸다. 미다졸람은 사람에 따라 부분적인 기억상실을 동반하는 의약품이기도 했다.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서진이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는 중요한 열쇠였다.

그런 사실까지는 굳이 서진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한발 늦게 정혁의 질문의 의미를 깨달은 서진이 약을 먹기 전 기억을 생각하려 노력했다. 아니, 그보다 약이라니?

“먹은 적이 없는데요.”

“뭐?”

“그러니까……. 독서실에서…… 친구한테 연락이 와서…. 어, 연락이 왔었나? 친구는 누구였지? 어, 어쨌든 밖에 와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왜,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생각을 했었고…….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긴 들어서 혈액검사를 할 때 누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인데…….”

“…진. 강서진! 서진아! 진정해!”

놀란 정혁이 일어나 서진의 어깨를 흔들었다. 서진의 눈이 반쯤 풀려 있는 게 역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잘못 건드린 기분도 나고. 서진을 달래는 정혁은 정신건강의학과에 아는 사람을 찾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정혁의 손을 살짝 밀어낸 서진이 머리를 붙잡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기분이 좋았고,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 났다. 처음 검사를 위해 담당 주치의가 몸을 만졌을 때 이상할 만큼 소름이 돋았다. 정혁의 손이 닿았을 땐 닿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절실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기억나지 않았다.

대체 왜. 서진은 지금 미치도록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분명한 건 있었다. 이런 사실을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고, 그걸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서진은 정혁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매달리다시피 했다. 정혁의 옷을 잡은 서진의 손이 미친 듯이 떨렸다.

“제, 제발……. 비밀로 해 줘요.”

그 말 한마디가, 목소리가, 옷자락을 붙잡은 손이 정혁을 얼어붙게 하였다.

“너는 대체…….”

“교수님, 잠깐만요.”

커튼이 멋대로 열리며 윤성이 다가왔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하는 건지 윤성은 정혁을 찾느라 응급실을 전부 뒤져야만 했다. 정혁은 이따 얘기하자며 윤성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진을 슬쩍 본 윤성이 정혁의 귓가에 뭐라 속삭였다. 그 귓속말에 정혁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 들어온다고?”

“제 친척 동생이 현장에서 보냈다고 문자 받았으니까 틀림없대요. 자세한 건 봐야 알지만, 그 추락한 버스에서 통학하는 학교 학생 교복은 아니라고 그랬어요. 교수님이 비슷한 환자 있으면 말해 달라고 하셨잖아요.”

“이거 아는 사람 있어?”

정혁의 질문에 윤성이 고개를 저었다. 서진의 일도 일이었지만 이쪽도 신경이 쓰이긴 마찬가지였다. 정혁은 서진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따 강 간호사 퇴근하고 내려오면 퇴원 절차 밟게 해 줄게. 안윤성, 그 환자 바로 소생실로 보내. 알겠지?”

“선배 포기하는 게……. 일단 알았어요.”

윤성과 정혁은 곧장 제 갈 길로 헤어졌다. 얼마 가지 않아 윤성의 말대로 구급차가 온다는 말이 병원 관계자들 사이에서 퍼졌다.

사망선고를 위해 온다는 걸 확인한 담당 교수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조금은 기적을 기대했던 그로서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정혁이 불편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교수의 옆에 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교수님은 들어가시죠.”

“아, 임 선생. 하아, 됐어. 듣자 하니 아까 인턴 대신에 한 번 했다며. 무리할 거 없어.”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교수님, 부탁드립니다.”

정혁이 정중하게 부탁하며 고개를 숙였다. 원래 그런 부탁을 잘 하지 않는 걸 알고 있던 그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뭔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었지만, 가망이 없는 환자를 앞에 두고 이제는 있을 건 없었다.

책임감에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아무리 그라도 이런 일은 미루고 싶으면 미루고 싶은 법이었다. 그는 선심을 쓰는 척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가지 않아 구급차가 도착했다. 환자를 본 정혁은 곧장 환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믿을 수 없었다. 정혁은 교복 가슴에 달린 명찰로 고개를 숙였다. 물에 젖은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멍하니 서 있는 정혁에 근처 간호사가 의아해하며 입을 열었다.

“…교수님, 임 교수님! 뭐 하세요?”

“…….”

“아, 미치겠네. 형.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하하, 잠깐만요.”

혹시나 하고 안으로 들어온 윤성이 정혁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제야 흠칫 놀란 정혁이 정신을 차렸다. 정혁은 엉망이 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윤성은 몇 번이나 포기하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믿고 그런 윤성에게 쓴소리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주눅이 드는 건 정혁이였다. 사실은 윤성보다 정혁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머리로는 가망이 없다는 걸, 이런 식으로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고 각오했지만 생각만 하는 것과 그 생각이 현실 앞에 펼쳐지는 것은 엄연히 다른 법이었다.

입에 누군가 풀칠을 한 것만 같았다. 정혁이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거렸다. 차라리 시간이 이대로 멈춰 버리면 좋을 것을. 소생실과 문틈 사이에 있는 복도에 관계자들이 모두 정혁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환자…….”

“은소, 은소야….”

침묵이 감도는 소생실 안으로 목소리가 들렸다. 시헌의 목소리였다. 시헌의 팔에는 정혁이 임시로 응급 처치해 줬던 부목이 그대로 있었다. 조금 전 구급차에 섞여 같이 병원에 온 모양이었다. 정혁은 고개를 숙여 명함을 살폈다. 기은소. 시헌과 정혁의 시선이 맞았다. 외과, 그것도 중증 외상 환자들을 수없이 다뤄 본 정혁이다. 살린 환자들도 많았지만 살리지 못한 환자들도 많았다.

수많은 경험과 사연이 있는 정혁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지옥과도 같았다. 정혁이 사망선고를 못 하겠다고 나간다 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고 규모가 이쯤 되면 아무리 의사라도 정신적으로 못 버티는 건 당연했다.

조금 소문이 돌겠지만 그게 다였다. 정혁이 자리를 뜬다 해도 병원에 있는 의사의 누군가가 할 것이고 책임을 질 것이었다. 책임의 문제가 아니었다. 살릴 수 있을 줄 알았다. 붙잡고 있는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이라는 걸 알면서도 희망을 찾았다.

줄이 끊어진 결말은 바닥이 보일 때까지 추락하는 것뿐이었다. 시헌과 은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혁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분명한 건 시헌에게 있어서 은소는 이대로 보내야만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건 정혁도 마찬가지였다. 하면 안 되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대로 보낼 수 없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한 간호사, *에피 1mg 줘요.”

*에피[에피네프린(epinephrine)] : 심정지 시 투여 약물

“네? 저기 임 교수님. 지금 무슨…….”

“아, 미치겠네. 교수님 제정신이에요?”

“*디핍 가져와!”

*DC기[디피브릴레이터(Defibrillator)] : 제세동기

윤성이 하지 말라며 정혁을 말렸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뭐라도 하지 않으면 이 죽은 이 아이를 볼 면목이 없었다. 살아만 있다면, 조금이라도 좋으니 살아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했다. 그게 아니었다.

그 조금이 그렇게 어려웠던 걸까. 간호사를 밀어낸 정혁은 멋대로 디피브릴레이터를 가져왔다. 순식간에 좁은 소생실이 난리가 났다.

“비키라고! 한 간호사 뭐 해!!”

“아, 돌겠네. 형! 제발 진정 좀 해요 네?”

“임 교수님 대체 왜 그러세요?”

정혁이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태를 파악한 근처 다른 의사들과 윤성이 그런 정혁을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눈치를 본 간호사가 정혁의 지시에 따라 약물을 투여했다. 그 모습을 본 윤성이 이마를 짚었다.

“책임은 내가 져. 나중에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눈치 보지 말고 지금 나가.”

정혁의 한마디에 눈치를 본 인턴과 레지던트가 밖으로 나갔다. 정혁의 명령을 따라 약물을 주입한 고년차 간호사가 옆에 있는 3개월 차 간호사를 팔꿈치로 건드렸다. 이제 막 일을 시작한 간호사에게 피해를 주고 싶은 기분은 없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비워지고, 소생실 안에는 간호사 한 명과 정혁, 그리고 어쩔 줄을 몰라 서 있는 윤성만이 남았다.

“너는 어떻게 할 건데.”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해요!!”

윤성이 억울하다며 소리를 질렀다. 불가능할 거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은소의 소생을 시작한 지 삼십 분 정도 지났을까? 다른 교수의 수술을 도와주러 갔던 응급실 과장이 들어와 소리를 질렀다.

“임 선생 자네 지금 미쳤나!”

“나가시죠.”

“그만 해, 이 환자. 얼마나 된 거야?”

“제가 알아서 합니다.”

돌아오지 않는 기계의 이명이 귀가 아닌 머리로 울렸다. 그 소리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답지 않은 정혁의 행동과 화가 난 응급실 과장의 실랑이가 한동안 계속됐다. 멀리서부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시헌이 입을 열었다.

“…만해요. 그만해요!”

허리 밑으로 누군가의 체온이 느껴졌다. 정혁을 붙잡은 의사나 남자 간호사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난데없이 소생실 안으로 들어온 시헌에 주변 의사들이 내쫓으려 했으나 당장 이 상황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지라 시헌과 정혁을 지켜볼 수 밖 없었다.

시헌은 한쪽 팔로 정혁의 몸을 최대한 안았다. 이런 난리를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안다. 그러니까 애써 상처를 짊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은소의 죽음은 정혁의 탓이 아니었다. 제 잘못이라고. 내가 잘못한 거라고. 정혁을 붙잡은 시헌의 몸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혁의 손에 들린 패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제세동기를 빨리 끄라며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혁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정혁은 베드 사이로 튀어나온 은소의 손을 올려봤다. 고개를 들자 정면으로 다시 디지털시계가 보였다.

그 난리를 치고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주저앉은 정혁이 바로 뒤에 서 있는 시헌을 봤다. 시헌의 시선이 또다시 소생실 바깥쪽을 향했다. 서진이었다.

“강서진…?”

“바, 박시헌 네가 왜……. 지금 누워 있는 거…….”

서진의 몸이 휘청거리며 근처에 있는 환자와 부딪혔다. 학생 괜찮아? 간호사 한 명이 놀라 그런 서진을 붙잡았다. 윤성이 정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정혁은 윤성의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세 사람이 아는 사이였다니. 참으로 독한 세상이었다.

정혁의 옆으로 따가운 과장―교수의 시선이 느껴졌다. 정혁은 주먹을 쥐었다. 서진은 여전히 누워 있는 것이 은소라는 걸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서진의 옆에 있는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오려는 서진을 붙잡아 말렸다. 신은 어린애들에게 얼마나 더 큰 짐을 지게 해야 만족할까.

그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없는 자신이 이 순간만큼은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디지털시계를 힐끗거린 정혁이 입을 열었다.

“환자 이름 기은소.”

정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옆에 있던 윤성이 자신이 하겠다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혁은 어깨 위로 올라와 있는 윤성의 손을 내리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사망 시간 오후 11시 43분.”

* * *

장례식장 안으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소와 친했던 남학생, 몇몇 여학생들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사고가 있기 몇 시간 전 떨어진 은소는 결국 사고 당시 떨어진 것으로 처리됐다. 워낙 큰 사고였던 탓에 은소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제외한 나머지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이름에 시헌은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은소의 장례식장 안쪽에서 서진이 나왔다. 운 모양인지 얼굴이 빨갰다. 서진아. 시헌의 말이 떨어지기도 무섭게 서진이 시헌의 앞으로 다가왔다. 서진이 시헌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었다. 깁스를 한 쪽 팔이 벽에 닿아 퍽, 소리가 났다.

“박시헌!! 왜, 왜…!! 왜 은소를…!!”

서진은 은소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현장에 시헌이 있다는 것도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서진은 은소를 죽게 내버려 둔 시헌이 원망스러웠다. 어쩌면 그 이전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서진의 목소리를 들은 몇몇 아이들과 어른들이 밖으로 나왔지만, 서진은 개의치 않았다.

서진은 기욱과 자신의 소문을 낸 은소를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은소에겐 그렇게 해서라도 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서진은 그걸 알았다. 그리고 은소가 원하는 건,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얻고 싶었던 건, 시헌의 멱살을 잡은 서진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은소는, 은소는 너를…….”

“알아.”

“그런데 대체 왜!! 왜 그랬어!! 박시헌!!”

시헌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서진은 시헌의 이름을 부르며 시헌을 탓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서진이 결국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왜, 왜. 뒤늦게 차를 대고 온 기욱과 그런 기욱을 마중 나갔던 서윤이 뛰어왔다. 서진의 눈물에 서윤이 놀라 서진을 안았다. 소란스러운 것도 있고, 떨어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판단한 기욱은 시헌을 데리고 장례식장 밖으로 나왔다. 기욱이 시헌의 상태를 보려던 순간 시헌은 기욱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시헌은 기욱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고개를 숙였다. 시멘트 바닥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혀, 형. 나, 내가, 내가 은소를…….”

“진정해. 박시헌.”

“나, 나. 나 말야. 형. 나, 사실은, 은소가 떨어지기 전에…….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하, 내가,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된 거야……. 그런 생각만 안 했으면…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어…….”

“시헌, 박시헌!”

시헌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린 기욱이 시헌과 시선을 맞췄다. 눈물을 흘리는 시헌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하하,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 시헌은 정상 같지 않았다. 기욱은 시헌이 이렇게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처음 봤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사정이 어떻든 기욱은 시헌을 달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건 사고였어.”

“…….”

“형 나…… 있잖아.”

“그래, 말해.”

시헌이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뗐다.

“재수할게.”

<『너를 위한 랩소디』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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