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 잔인한 진실
이불 밑으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이불 안에서 뒤척거리던 서진이 이불 밑에 깔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받지 않은 채 발신자를 확인했다. 서윤이었다. 서진은 통화를 하지 않은 채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얼마 가지 않아 진동이 끊겼다. 그러나 그조차 오래가지 않았다.
다시 울리는 휴대폰의 진동에 서진이 한숨을 쉰 뒤 전화를 받았다. 서윤이었다. 휴대폰 수화기 너머 병원 구내식당의 소음과 함께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서진아, 너 학교 안 갔다며? 선생님한테 전화 왔는데 괜찮아?
울 것 같았다. 몸을 반쯤 일으킨 서진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머뭇댔다.
―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서.
휴대폰 너머로 서윤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기욱이 남학생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겠거니와 이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내 편은 없다고 인식한 순간 아이들의 불쾌한 시선을 견딜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피스텔을 뛰쳐나가는 시헌의 시선이 밤새 머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서윤은 서진이 변명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통화의 시간만 하릴없이 흐르고 있었다.
― 누나, 나 있잖아. 학교……. 아냐, 아무것도.
― 서진아.
― 응.
― 저녁에 가서 얘기하자.
― 알았어.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된 서진이 전화를 끊었다. 서진은 휴대폰을 바닥에 놓은 뒤 다시 이불로 숨어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을 열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기욱이었다. 서윤의 옆에 있으면서 따로 전화를 걸어오는 기욱이 참으로 우스웠다.
서진은 기욱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기욱의 통화는 생각보다 끈질겼다.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이불에서 나와 휴대폰을 허공으로 들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기욱에게 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건 있었다. 배터리를 분리하려던 찰나 기욱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서진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 전화하지 마요.
― 학교는 왜 안 갔어?
― 몸 아프다고 했잖아요. 누나랑 통화한 거 못 들었어요?
― 내일은 학교 가.
대화가 되지 않았다. 끈질기게 전화를 한 이유가 고작 학교에 나가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니 참 기가 막혔다. 서진은 한시라도 빨리 기욱의 점심시간이 끝나기를 원했다.
― 강서진. 학교 가. 언제까지 안 갈 건데?
언제까지라는 기욱의 말에 서진은 달리 변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서진은 기욱이 마치 자신을 며칠 동안 지켜보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폭위 이후 서진은 등교를 하는 척하고는 적당히 다른 곳으로 샜다. 선생님에겐 적당히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일이 일이었던 만큼 이해해 주는 분위기였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서윤이 아침 일찍 출근하고 집에 남겨진 서진은 이대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학교에 나가지 않은 것이 걸릴 거란 생각은 했지만 가장 먼저 걸린 대상이 기욱이라니 참으로 웃긴 일이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서진을 무디게 만들었다.
― 싫어요.
― 내가 책임질 테니까 학교 가.
― 하하, 책임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누구 때문에…!!
서진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애당초 기욱이 학교에 찾아와 그런 짓만 벌이지 않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커질 이유도 없었다. 기욱은 그 사실을 자각이나 하는 걸까? 아니, 죄책감은 느끼는 걸까? 서진은 기욱이 뭐가 그렇게 당당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 강서진, 서윤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한 건 너야.
― …….
― 지금 강서윤 무슨 꼴로 있는지 알려 줄까?
쏘아붙이는 기욱의 말에 서진은 주먹을 쥐었다. 학교를 빼먹을 때마다 서윤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어지는 말은 결국 서진의 고개를 숙이게 했다.
― 너 일부러 핑계 대면서 학교 빠진 거. 서윤이가 몰랐을 줄 알아?
서진은 지난 일주일 동안 거짓말로 학교를 나가는 자신을 반겨 주던 서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학교를 나간 후 힘들어했을 서윤에 서진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서진은 목이 메는 것을 간신히 참은 후 입술을 뗐다.
― 누나, 많이 힘들어해요?
― 그래.
― 나, 나 때문에요?
― 그러니까 내일은 학교 가.
기욱은 서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기욱은 학교에 가라는 말만 반복했다. 소매로 눈물을 닦은 서윤이 휴대폰을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요.
― 저녁에 전화할게.
― 저기, 그……. 누나한테……. 미안하다고 전해 줘요.
― 알았어.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서진은 한동안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칠 것 같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매로 닦았지만, 눈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남학생들과 싸웠을 때도 나지 않던 눈물이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흘렀다.
“흐윽…, 윽… 흐으윽….”
이불 위에 주저앉은 서진은 홀로 끅끅대다시피 하며 눈물을 흘렸다. 대체 행복이라는 게 뭘까. 산다는 건 왜 이렇게 마음이 아파야만 하는 걸까. 감당하기 힘든 감정들이 서진을 괴롭혔다.
* * *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울음이 그칠 무렵 정신을 차린 서진은 가방을 챙겨 독서실로 갔다. 뭐든 공부를 하는 편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공부에 집중하고 한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서진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기욱은 아니었다.
모르는 번호,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서진은 독서실 복도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전화의 상대는 다름 아닌 인훈이였다.
― 야, 강서진! 너 괜찮은 거야?
― 어, 어.
― 학폭위 있고 쌤한테 물어봐도 무슨 일인지 안 알려 주고. 너 번호 아는 애도 없어서 얼마나 걱정했던 줄 알아?
그랬나? 인훈의 말에 서진은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문득 그런 걱정까지 할 정도로 친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일이 있고 한 달 동안 같이 점심을 먹었던 사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느꼈다.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기분이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서진은 휴대폰을 바로 잡았다.
― 괜찮아. 내일 학교 갈 거야.
― 잠깐만, 너 독서실 주원역 근처라고 했지? 내가 지금 거기 근처거든? 볼래?
인훈이 뜻밖의 제안을 해 왔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본 서진은 인훈의 제안이 이상할 정도로 끌렸다. 공부한다고 해도 억지로 하는 터라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도 없었다. 서진도 모르게 도피를 할 만한 것을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 알았어.
― 금방 갈게. 밑에서 보자.
서진은 인훈과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짐을 챙기던 중 서진은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인훈에게 독서실이 주원역 근처라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서진은 평소 자기가 말하고 잊어버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요즘 들어 정신이 없어서 까먹었나, 하고 흘려 넘길 즈음 자신이 독서실에 있는 건 어떻게 안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울고 난 탓인지 평소보다 예민해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과민 반응이다. 그렇게 생각한 서진은 짐을 챙겨 독서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1층 계단 앞에 있던 인훈이 서진을 반겼다.
“여기야.”
인훈이 손을 흔들며 서진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길을 걸으며 자연스럽게 거리를 걸었다. 저녁의 번화가, 술집을 제외하고도 군데군데 노래방이니 피시방, 카페 등이 있었지만 모두 둘이서 가기에는 어딘가 어색한 곳들이었다.
남자 둘이 카페에 들어가는 것도 웃겼고. 결국, 서진과 인훈은 자연스럽게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서진은 인훈과 둘이 있는 것이 어딘가 불편했다. 머뭇대는 서진을 본 인훈이 가볍게 웃었다.
“어디 갈까?”
“나도 잘 모르겠어.”
갈 곳 없이 방황하는 모습에 서진은 옛날 일이 생각났다. 그때도 세 사람이서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았는지. 설마 이렇게 뿔뿔이 흩어질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사람 일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집 안 갈래?”
“뭐?”
“너네 집에서 안 멀어. 그보다 우리 달리 갈 데도 없잖아.”
인훈이 큭큭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렇긴 하지. 서진은 아홉 시가 넘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모님은?”
“우리 부모님 저번 주에 해외 출장 갔거든. 다음 주까지 없어.”
서진이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훈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지 인훈의 집은 서진의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신도시에서 살짝 벗어난 곳이지만 인훈이 머물고 있는 곳은 꽤 좋아 보이는 2층 주택이었다. 지은 지 좀 되긴 했지만, 2층 주택이라는 것 자체로 집 자체는 나쁘지 않은 편에 속했다.
아무도 없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지 집 안은 썰렁했다. 거실을 둘러보는 서진에 인훈이 문이 반쯤 열린 안쪽 방을 손가락질했다. 인훈의 방 같았다. 서진은 인훈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인훈이 방 안으로 들어온 건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뭘 하는 건가 궁금하긴 했지만, 싱크대 근처를 왔다 갔다 하는 인훈에 서진은 알아서 들어오겠거니 하고 내버려 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콜릿이며 과자에 음료수를 가져온 인훈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런 거 안 가져와도 되는데.”
“집에 있던 거야. 신경 쓰지 말고 먹어.”
서진은 바닥에 앉은 인훈의 앞에 앉았다. 서진은 접시에 담긴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생각보다 맛이 있어서 그런지 계속 손이 갔다.
“맛있지? 저번에 아빠가 사 온 거야.”
“응. 생각보다.”
“생각보다는 뭐야. 생각보다는!”
인훈이 언성을 높이며 웃었다. 서진과 인훈은 방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대부분 인훈의 일방적인 이야기였지만, 원래부터 뭔가 얘기를 하는데 서툰 서진은 그저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과자가 거의 떨어져 갈 무렵 서진은 인훈이 가져온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과자를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려 방에 들어온 이후 음료수에 입을 대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목도 말랐던 터라 서진은 잔에 담긴 음료수를 순식간에 반쯤 비웠다. 주스를 마시던 서진은 인훈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그렇게 빤히 봐?”
“그냥. 입술이 참 예쁘구나 싶어서.”
“입술? 갑자기 무슨 소리…….”
“왜 그래? 괜찮아?”
“어, 응. 그냥 좀.”
시야가 흔들린 서진이 머리를 붙잡았다. 너무 울어서 그런가? 확실히 피곤하다는 감은 있었지만 뭔가 틀렸다. 서진이 옆에 있는 벽에 몸을 기댔다. 몸이 나른한 것이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서진은 슬슬 집에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서진의 몸이 앞쪽으로 휘청거렸다. 그런 서진을 인훈이 붙잡았다.
“너 정말 괜찮은 거야?”
“괜찮……. 아니, 안 괜찮은 걸지도.”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든 서진이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날 기운이 없었다. 뭔가 심장 박동도 묘하게 빨라진 느낌이 들고. 서진은 잠시 앉아 있으면 괜찮겠거니 싶었다. 인훈이 서진이 마시다 만 음료수를 내밀었다.
“남은 거 마시고 좀 진정해.”
“고마워.”
서진이 남은 음료수를 전부 비웠다. 인훈이 빈 유리잔을 옆으로 밀어냈다. 금방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점점 더 말을 듣지 않았다.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역시 집에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게 판단한 서진이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다.
“나 그만 가 볼…… 윽…!”
인훈이 일어나려는 서진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안 그래도 힘이 없었던 서진은 인훈의 팔에 바닥으로 넘어졌다. 인훈이 서진의 위로 올라탔다. 순식간에 묘한 자세가 된 서진이 인훈의 몸을 밀어내려 했으나 밀어내는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서진을 내려다본 인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있잖아. 지난번에 학교에서 찾아온 사람 말야. 진짜 둘이 사귀는 거야?”
“무, 무슨 말을…….”
“그치만 애들이 그러던데. 둘이 사귄다고.”
안 그래도 머리가 어지러웠던 서진은 인훈의 말이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에 찾아온 사람, 소문, 사귀니 어쩌니 하는 걸 보니 기욱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서진이 발버둥을 치려 하자 인훈이 서진의 팔을 눌렀다. 얼굴이 금방이라도 뺨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사, 사귀는 거 아냐. 그런 놈이랑 사귈 리 없잖아. 알아들었으면… 읏. 비켜!”
“하하,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그 나이 차에 그런 스펙은 사기잖아? 아, 그럼 그 남학생은?”
“뭐, 라고?”
“남학생 있잖아. 너한테 막 키스했던 남학생. 아, 잠깐만.”
서진을 누른 인훈이 멋대로 휴대폰을 뒤졌다. 미친 새끼. 또라이 새끼. 서진은 인훈이 휴대폰을 만지는 틈을 타 인훈을 밀어낸 뒤 방문으로 향했다. 뒤늦게 문이 잠겨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서진이 고리를 만졌다.
“왜, 왜 안 열리는 거야!”
서진이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 탓에 문고리가 두 개, 세 개로 보였다. 서진이 문을 못 여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인훈이 그런 서진의 몸을 붙잡아 침대 위로 내끌었다. 침대 위에 던져지다시피 한 서진은 무작정 뒤로 물러났다. 좁은 침대에 얼마 가지 않아 등이 벽에 닿고 말았다. 여전히 휴대폰을 보던 인훈의 표정이 밝아졌다. 찾았다. 혼잣말로 중얼거린 인훈이 서진을 향해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보이는 사진에 서진은 할 말을 잃었다. 학원 근처 골목, 가로등 및 교복은 틀림없는 시헌과 자신이었다. 도대체 언제 찍은 거지? 서진은 사진이 있는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지워! 씨발… 윽. 지우라고!! 미친 새끼…… 하윽….”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모처럼 잘 나온 사진인데.”
휴대폰을 근처 책상 위로 던진 인훈이 서진의 머리를 눌렀다. 인훈의 손에 의해 시야가 가려진 서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인훈의 다른 손이 서진의 옷 안으로 들어왔다. 등을 쓰다듬는 그 손에 소름이 끼친 서진이 몸을 떨었다.
“그날 백화점에서 누나 없었지?”
“너… 너 뭐 하는…….”
서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인훈에게 거짓말을 한 건 사실이지만 서진은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 거지 그 이상의 이유는 없었다.
인훈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상한 점뿐이었다. 은소가 떨어지자마자 자연스럽게 접근한 것도, 말한 적도 없는 독서실과 집 주소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그리고 시헌과의 사진까지.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인훈의 손이 떨어지자 서진은 인훈을 슬쩍 올려 봤다. 서진을 내려다보던 인훈이 바지의 벨트를 풀고 있었다. 서진은 불쾌하리만큼 노골적인 이런 시선을 알고 있었다. 분명한 건 아직 일정 이상으로 손을 대지 않은 기욱과 인훈은 달랐다. 서진은 어떻게든 인훈을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인훈의 시선을 피한 서진의 눈에 바닥에 놓인 빈 유리잔에 닿았다.
“너, 너… 나한테 뭘 한 거야!!”
확실히 피곤하긴 했지만 이건 피곤한 것과 달랐다. 시야가 흔들린 서진이 침대 헤드에 머리를 살짝 박았다. 서진의 말에 인훈은 대답 대신 입가를 올렸다. 바지를 반쯤 내린 인훈의 드로어즈 위로 부풀어 오른 페니스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정말로 위험했다. 인훈이 도망치려는 서진의 머리를 침대에 눌렀다.
“솔직히 조금 놀랐어. 설마 네가 게이라는 소문이 날 줄은. 나 꽤 예전부터 널 보고 있었으니까. 아, 넌 날 몰랐겠지만.”
서진의 몸을 강제로 돌린 인훈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드로어즈 위로 가져다 댔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질척한 느낌에 서진이 인상을 구겼다. 반항하고 싶어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술을 잔뜩 먹으면 이런 느낌일까? 누가 강제로 계속해서 머리를 잡고 흔드는 것 같았다. 이젠 머리 위로 들려오는 인훈의 말이 무슨 말인지조차 인식을 할 수 없었다. 인훈이 그런 서진의 뺨을 쓰다듬었다.
“너 말야, 입 다물고 그러고 있는 거 되게 꼴려.”
“하윽… 윽….”
“있잖아, 해 본 적 있어? 응? 그 남자랑은 했어? 돈 받았어? 얼마?”
“……지 마. 하지 말라… 고!”
“아니면 남학생? 우리 학교에 온 적 있지? K과고면 돈 많은 애가 다니는 곳이잖아. 아, 혹시 서진이 너 돈 많은 남자가 취향이야?”
서진을 밑에 둔 인훈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눈이 반쯤 풀린 것이 제정신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화고 뭐고 통할 것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 도망쳐야 한다. 서진이 침대 밑으로 내려가려 하자 인훈이 서진의 몸을 더욱 꾹 눌렀다. 점점 아래로 내려간 인훈의 손이 서진의 바지 근처의 버클을 풀었다.
“씨… 발, 하지 말라고!!”
서진이 있는 힘껏 인훈을 밀어냈다. 침대 뒤로 약간 밀려난 인훈이 서진을 보며 큭큭댔다. 서진은 떨리는 손을 붙잡고 인훈과의 거리를 벌렸다.
“너, 너 뭐 하는 놈이야. 나, 나한테 뭘 한 거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서진은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상황을 뭐라 정의 지어야 할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인훈이 그런 서진의 팔을 붙잡아 눌렀다. 서진의 목 근처를 쓰다듬던 인훈이 서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 말야.”
“…….”
“그렇게 아무 남자나 막 따라가면 못써.”
“…지 마, 하지 마, 제발 부탁이니까…….”
“그럼. 한 번만 하자.”
“뭐, 라고?”
“두 번 하자고는 안 하잖아. 한 번만 하자. 어려울 거 없잖아.”
인훈의 웃음에 서진은 소름이 끼쳤다. 한 번이고 두 번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훈의 손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도망쳐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서진은 필름이 끊긴 것처럼 몸이 멋대로 쓰러졌다.
* * *
― 지금 거신 전화는 고객님의 사정으로 받을 수 없어…….
시헌이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닫았다. 학원 입구 옆, 학생들이며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유리문 옆 벽에 기댄 시헌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하늘에는 달 대신 빽빽한 건물들이 정신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마를 가린 손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소매를 걷었다. 팔이 시퍼렇게 부어 있었다. 부은 팔 위로 다른 손을 대 보았다. 윽,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통증을 참고 팔목을 움직여 봤다. 뼈가 맞닿는 느낌이 났다.
부러졌군.
의사 집안의 감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내 몸이니까 그 정도쯤은 알 수 있다고 해야 하나.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급한 대로 약국에서 타이레놀을 사 먹긴 했지만, 그게 효과가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렴 뼈가 부러진 거니 오죽하겠냐만은.
부목 대신 대충 감은 붕대만으로 얼마나 버틸지도 알 수는 없었다. 높게 올라온 건물 외벽에는 온갖 종류의 병원 간판들이 있었다.
재수해라.
그날 이후 시헌과 아빠는 더 이상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간혹 만나면 재수 학원이나 고등학교 졸업 이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대화엔 시헌이 다른 과로 대학을 간다는 것 자체가 전제에 없었다. 시헌이 다시 기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학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를 건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도 안 받는 건가 싶을 무렵 수화음이 끊겼다. 여러 번 전화를 한 만큼 시헌의 인내심 또한 바닥에 달해 있는 상태였다.
― 형 대체 서진이랑…!!
― 바빠. 끊어.
기욱은 시헌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하하, 시헌은 아픈 팔로 이마를 짚었다. 기욱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 번 정도 전화를 받은 것은 그만 좀 전화하라는 뜻을 전하기 위했던 것이었다. 시헌은 기욱이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아예 일에 지장이 갈 정도로 전화를 걸어 볼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이내답지 않은 짓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휴대폰을 꺼 버리면 의미가 없고, 무엇보다 시간도 늦었다. 시헌은 슬슬 집에 돌아가야겠다며 벽에서 몸을 뗐다. 주말을 보낸 뒤 팔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학원 주변은 뒤늦게 학원을 나온 아이들로 정신이 없었다. 아이 중에는 은소도 포함되어 있었다. 은소를 슬쩍 본 시헌이 이어폰을 끼고 등을 돌렸다.
“…아. 시헌아!”
역 근처에 다가올 무렵 시헌을 따라잡은 은소가 시헌을 불렀다. 일부러 역 하나를 걸어간 걸 생각하면 쫓아왔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은소의 손이 시헌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시헌이 올라온 은소의 손을 쳐 냈다. 무의식적으로 다친 손을 움직인 시헌이 인상을 구겼다.
“읏….”
“괜찮아?”
“신경 꺼.”
은소의 위로에 시헌은 냉담하게 대답했다. 그 일이 있었던 뒤 우연히 만난 서진의 학교 친구들에게 들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서진이 학교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대략 알 수 있었다. 은소가 같이 있으면 괜찮을 거라 믿었던 자신이 한시나마 바보같이 느껴졌다. 서진을 때리던 아이들 틈에 있던 은소. 배신감이 들었다. 누구도 믿는 게 아니었다. 시헌은 이 이상 은소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시헌은 등을 돌려 무작정 걸었다. 시헌아, 시헌아. 노래가 나오지 않는 이어폰 너머로 은소가 시헌의 이름을 불렀으나 시헌은 결코 뒤를 돌아보는 일 없이 걸었다. 이미 막차가 끊긴 데다 지하철을 탈 기분 또한 아니었다. 시헌은 기욱의 오피스텔이 있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대교의 계단을 올랐다.
간 줄 알았는데. 계단 밑으로 뒤를 따르는 은소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더 쫓아와야 성이 풀리는 걸까. 높디높은 다리 한쪽에는 여전히 보수하기로 된 날짜가 훨씬 지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현수막 가운데서 시헌이 결국 걸음을 멈췄다.
차들이 빠르게 두 사람을 지나치고 지나갔다. 멀리 아파트 불빛과 빠르게 지나가는 차의 헤드라이트만이 두 사람을 정신없이 비췄다. 시헌이 등을 돌리자 은소 또한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시헌아. 내, 내가 아니야.”
“…….”
“들어 봐. 시헌아.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애들이 멋대로……. 나, 난 전화를 받고 나갔는데…….”
시헌은 변명만 늘어놓는 은소가 짜증이 났다. 은소 또한 그 사실이 변명에 지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없었다. 시헌이 다가가자 은소는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은소의 몸이 현수막이 쳐져 있는 난간에 닿았다. 등 뒤로 검은 한강의 물이 흐르고 있었다.
부모님은 만날 때마다 재수하라고 하고, 왕따를 숨겼던 서진은 그날 이후 어떻게 됐는지 알 수조차 없다. 왜 서진과 기욱은 같은 오피스텔에 있었을까? 둘은 뭘 하려고 했던 거지? 그 답을 알고 있는 기욱은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으며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그런 데다 사건을 일으킨 은소는 저를 앞에 두고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는다.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팔이 아닌 마음의 상처에 의한 고통같이 느껴졌다. 왜 다들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아서 안달인 걸까.
시헌을 앞에 둔 은소는 돌아오지 않을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박시헌. 참으로 어려운 세 글자였다.
“제, 제발 믿어…….”
“왜 그랬어.”
“뭐, 뭘…?”
“왜 그랬냐고!! 대체 왜!!”
은소의 멱살을 잡은 시헌이 몸을 흔들었다. 목 근처에 닿은 시헌의 주먹이 금방이라도 은소의 얼굴로 올라올 것만 같았다. 강의 난간이 없다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 충격으로 난간이 흔들렸다. 밑으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다리 밑에서 뭔가의 공사를 하는 모양인지 시끄러운 기계음이 났다. 시헌은 그제야 저와 은소가 서 있는 바닥이 임시로 철판을 댄 공간이라는 걸 알았다. 차들의 소리, 시끄러운 공사 소리와 불빛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은소는 조심스럽게 시헌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시, 시헌아 나…, 나 사실…….”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시헌은 은소의 멱살을 잡은 손이 다친 손이라는 걸 알았다. 손이 미친 듯이 저려 왔다. 시헌의 떨리는 손을 본 은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은 게 있어.”
“그게 무슨 상관…….”
“나 말야, 실은 다음 달에 수술해. 교수님이 뭐라 그러셨는지 알아? 이번엔 진짜 죽을 수도 있대.”
이게 아닌데. 이런 말을 하려 했던 것이 아닌데. 은소의 입은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은소의 고백에 시헌은 손 밑에 있는 은소의 가슴 부근을 바라봤다. 저 어디엔가 흉터가 있었지. 아직도 병원에 다니고 있었던 줄은 몰랐다. 시헌이 은소의 몸에서 손을 뗐다. 시헌은 다치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발.”
“…….”
“씨발! 그런 걸 지금 말하면 어쩌라는 건데!!”
다른 일로 감정이 욱해져 있던 상태였던 시헌은 이 상황을 좀처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금 더 일찍 말할 수는 없던 걸까?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는 사람 치고 은소의 표정은 너무나 담담해 보였다. 시헌은 늘 부모님, 친척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죽음 앞에서 무뎌지지 않을 거라고. 그렇기에 제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은소가 미치도록 짜증이 났다. 하다못해 서진의 일이 일어나기 전, 조금 더 일찍 말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시헌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은소가 멋쩍게 뒷목을 긁적였다.
“걱정, 해 주는구나…….”
“…….”
“사실은 나. 하하, 완전히 버림받은 줄 알고…….”
시헌은 은소의 중얼거림에 애써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서진과 은소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알지 못하는 시헌은 은소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제아무리 시헌이라 해도 중학교 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를 하루아침에 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척할 뿐이었다.
“서진이 일은…….”
“…….”
“미안해.”
“하아, 알았어. 똑바로 서진이한테 사과해.”
“응.”
시헌은 시간이 필요했다. 은소와의 일에도, 부모님이며 서진의 일에도. 할 수만 있다면 어디 먼 곳으로 여행이라도 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시헌은 절박했다. 대화를 마친 시헌이 등을 돌렸다. 은소는 여기서 시헌을 놓치면 다음은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 굳은 것처럼 선 은소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시, 시헌아.”
쿵,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공사하고 있던 현장에서 난 건가? 땅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근처에 있던 난간을 붙잡으며 쓰러지는 걸 간신히 면한 시헌은 동시에 이곳이 땅이 아니라 다리 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헌은 난간 밑을 슬쩍 내려다봤다.
이상함을 느낀 건 시헌뿐이 아닌지 공사 중이던 몇몇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헌은 마찬가지로 천막이 엉킨 난간을 붙잡고 있는 은소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어, 응. 괜찮…….”
은소가 다시 난간을 붙잡았다. 시헌 쪽에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데. 뭔가 이상한 것 같았다. 시헌의 시선이 은소가 서 있는 상판에 닿았다. 사람이 다니는 도보의 일부가 임시로 덧대어진 철판같이 되어 있었다.
그 철판이 눈에 보일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철판과 더불어 붙어 있던 난간과 현수막 또한 흔들렸다. 쿵, 하고 또다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난간에 팔을 부딪친 시헌이 악,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번엔 정말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은소가 팔을 붙잡고 주저앉은 시헌을 바라봤다. 영문을 모르는 차들만 빠르게 대교 위를 지나갔다. 시간이 늦어 대교를 지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진처럼 몸이 흔들렸다. 조금 전처럼 요란한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불길한 징조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시헌은 한쪽 팔로 난간과 다친 팔을 간신히 붙잡았다.
“시, 시헌아. 괜찮아?”
“…려.”
“뭐라고?”
“달리라고!! 기은소!!”
세 번째 소리가 났다. 이번만큼은 공사하던 사람들도 위험하다 판단했는지 정신없이 소리를 질렀다. 끼익거리는 요란한 철판 소리가 났다. 시헌의 외침에 놀란 은소가 시헌 쪽으로 몸을 틀었다. 시헌이 그런 은소를 향해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손이 서로를 붙잡았다. 됐다고 판단한 순간 은소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시헌의 팔이 은소를 따라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시헌의 다친 팔이 다른 난간을 간신히 붙잡았다. 어느 쪽이든 오래 못 버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한쪽 팔을 쓰지도 못하는 난간에 붙잡고 있는 것보다 은소를 붙잡는 데 힘을 쓰는 것이 훨씬 나았다.
시헌이 난간에서 손을 뗐다. 풍덩, 하고 은소의 발밑에 있던 임시 난간의 철판이 물 아래로 떨어졌다. 시헌이 팔 아래에 간신히 있는 은소를 내려다봤다.
“아윽! 기은소…, 야!”
“시, 시헌아… 너 팔…!”
은소가 옷이 올라간 시헌의 팔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헌의 팔은 퍼렇다 못해 까맣게 부어 있었다. 그런 은소의 반응에 시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은소의 몸이 아직 뜯어지지 않는 철판과 함께 흔들렸다. 제발, 시헌은 사람들이 와 주기를 바라며 주변을 봤다.
도보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사이 몇몇 차들이 지나가긴 했으나 속도 때문에 쉽게 멈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한쪽 팔이 아니라면 잡아당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시헌은 은소가 가방을 메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이었다.
“가방! 가방 버려 빨리!! 아으윽!”
어깨에 얽힌 가방을 한쪽 팔만으로 벗어 던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방을 벗는 걸 포기한 은소의 손이 시헌의 다른 손을 붙잡았다. 아윽! 다친 손이라는 걸 안 은소가 깜짝 놀랐다.
“시헌아 너 팔…!”
“씨발, 팔이 중요하냐고!! 으으윽!”
시헌이 인상을 찌푸리며 은소를 잡아당겼지만 생각보다 쉽게 올라오지 않았다. 시헌이 서 있던 곳 또한 임시로 철판을 댄 곳은 마찬가지였다. 시헌이 있던 철판 또한 금방이라도 뜯어질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시헌만큼 힘이 강하지 않은 은소 또한 팔이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은소는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봤다.
까만, 깊이가 보이지 않은 강물이 멀리서 비치는 불빛에 그 흔들림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둘 다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며 19년 동안 살아온 자신과 시헌은 달랐다. 멀리 뒤늦게 사정을 눈치챈 차 한 대가 급하게 멈췄다.
차에서 사람이 내리는 걸 본 은소가 속으로 다행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시헌의 팔을 잡던 은소의 힘이 점점 약해졌다. 정말 힘이 달려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반쯤 마음을 다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놀란 시헌이 은소를 달랬지만 소용없었다. 이럴 때 왜 눈물이 나는 건지. 은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 정말이지 손이 이러니 눈물을 닦을 수도 없고. 추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네. 은소는 목이 메려는 것을 간신히 참은 뒤 입을 열었다. 몇 번을 불렀을 그 이름을 다시 한번 불렀다.
“시헌아.”
“기은소, 뭐 하는 거야!!”
“나, 나 있잖아, 사실은…….”
은소의 말을 들은 시헌의 눈동자가 커졌다. 동시에 은소는 팔에 힘을 풀었다. 참지 못한 시헌이 힘을 써 은소를 끌어올리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풀리는 시헌의 힘과 동시에 은소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사실은…….
“좋아해. 시헌아.”
“하윽… 윽….”
* * *
인훈의 밑에 있는 서진은 인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번만? 이런 관계를 과연 한 번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약 기운 때문에 몽롱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머릿속은 인훈과 섹스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몸은 그리 쉽게 따라 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난생처음 겪는 고통과 쾌락에 서진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인훈과의, 남자와의 섹스는 기욱이 했던 행위의 불편함쯤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였다. 중간부터 약 기운에서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서진은 이를 악물며 참았다. 도망쳐야 한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도망쳐야만 했다.
“후우, 있잖아. 나 꼭 한 번쯤 남자랑 해 보고 싶었거든.”
“으읍! 읍….”
“소리 내도 괜찮아. 좋잖아. 응? 흐으, 그래도 기왕 할 거면 괜찮게 생긴 애랑 하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 서진인 생긴 거랑 다르게 꽤 여자다운 구석이 있으니까.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 봐, 하아, 너도 좋지?”
“으으읍… 윽….”
눈을 질끈 감은 서진은 타이밍을 살폈다. 인훈의 뒤로 잠긴 문을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른다. 하으읏. 윽, 사정할 것 같은 느낌에 인훈이 서진의 안에서 페니스를 빼냈다. 동시에 서진은 몸을 일으켰다. 아직 약 기운이 남아 휘청거리긴 했지만 처음 정도는 아니었다. 허벅지에 걸친 바지를 빠르게 올린 서진은 재빨리 방문을 열었다.
“이게…!”
순간 삐끗해 넘어질 뻔한 서진이 거실로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정신을 차린 인훈이 곧장 서진의 뒤를 쫓아 나왔다. 인훈과 서진이 거실에서 서로를 대치했다. 이대로 붙잡히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서진은 TV 옆에 있는 주인 모를 골프 클럽을 집어 허공으로 휘둘렀다. 난데없는 무기에 당황한 인훈이 서진과 거리를 벌렸다.
“서진아. 왜, 왜 그래. 그렇게까지 할 거 없잖아.”
인훈이 서진을 달래려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이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는 그 말들이 서진은 더욱 소름 끼치게 하였다. 얼마나 더 미친놈인 걸까.
간신히 바지를 똑바로 올린 서진은 인훈을 본 채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서진은 커튼 너머 개인 정원을 바라봤다. 인훈이 옷을 입고 있지 않으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서진은 들고 있던 골프채를 인훈 쪽으로 힘껏 내던진 뒤 문을 열고 집을 뛰쳐나갔다.
“씨발, 씨발!! 강서진!”
등 뒤로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인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이 이 근처임에도 불구하고 서진은 쉽게 집으로 갈 수 없었다. 집을 알면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인훈의 집을 나온 서진은 무작정 골목을 나왔다. 근처 아파트 단지 1차선 도로를 뛰어가던 서진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끼이익, 요란한 자동차 스키드마크 소리가 났다.
* * *
“…생, 학생!! 괜찮아? 아니, 네가 왜 여기…… 젠장!”
차에서 내려온 남자가 같이 뛰어내리려는 시헌을 붙잡아 재빨리 임시 철판 바깥쪽으로 끌어냈다. 남자는 소매가 올라간 시헌의 팔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시헌의 팔이 철판이 뜯어진 것 때문에 그런 줄 안 남자는 다른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 119 소방대원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 여기, 한북대교 위인데요. 그 사람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 선생님, 다리 위인데 사람이 떨어졌다고요?
― 네! 남자아이 하나가 떨어진 것 같은데 어떻게 좀 해 봐요!
― 일단 진정하시구요. 선생님,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다리가 어떻게 무너졌다고요? 좀 더 정확히 말씀을…….
― 씨발! 야! 사람이 떨어졌다고!! 사람이!! 이름? J대 병원 외상 외과 펠로우 임정혁입니다. 지금 당신이랑 전화하는 사이 다리 밑에 환자! 이렇게 전화하는 사이에도 상태 안 좋아진다고!! 만약 이 전화로 인해 저 환자! 죽었다는 소리 들으면 당신부터 찾아갈 겁니다!! 유족에게! 환자 앞에 두고 이름이나 묻는 소방대원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당장 전화 끊고 출발하시죠!!
정혁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원 신고했더니 이름을 묻는 게 말이나 되나. 정혁은 땀이 찬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시헌을 바라봤다. 1분, 1초가 급했지만, 정혁의 생각처럼 시간은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사태를 눈치챈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했다. 시헌은 성인 하나 크기보다 조금 크게 구멍이 난 대교 밑을 보고 있었다.
사실은…….
내가 좋아했던 건 너야.
시헌의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떨어지기 직전 보여 준 은소의 그 억지웃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시헌이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구멍이 난 곳으로 다가가려 하자 정혁이 그런 시헌을 붙잡았다.
“어이, 정신 차려! 너 괜찮냐?”
“놔요. 은소, 은소가 밑에…… 은소가 밑에 있다고!”
“야야, 뭐 하는 거야!! 박시헌! 너 미쳤어?”
“씨발, 놔, 놓으라고! 은소, 은소가… 은소가…… 아아아아아악!!”
시헌은 은소가 떨어진 강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