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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2 존재의 의미 (24/83)

Chapter. 22 존재의 의미

주차한 기욱은 오피스텔 창문을 올려다봤다. 창문 한쪽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집에서 시헌에게 몇 번인가 전화를 걸었지만, 시헌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기욱은 하연에게 시헌을 핑계로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도어락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깜깜한 거실 현관에서 기욱의 신발 밑으로 시헌의 운동화가 차였다. 운동화를 옆으로 둔 기욱은 거실의 불을 켠 뒤 닫혀 있는 시헌의 방문 문고리를 돌렸다. 박시헌.

“문 열어.”

기욱이 몇 번이나 시헌을 부르며 문을 두드렸지만, 방 안은 조용했다. 거실에는 시계 초침 소리와 기욱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마지못해 방으로 돌아간 기욱은 서랍을 뒤졌다. 서랍 안쪽에 마스터키가 있었다. 이것저것 달린 열쇠꾸러미 중 가장 바깥쪽에 있는 열쇠를 문고리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달각,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거실에 있던 불빛이 문틈을 타고 방 안을 비췄다. 기욱은 문을 완전히 연 뒤 벽에 몸을 기댔다. 침대 위에 있던 이불이 꿈틀댔다. 기욱은 이불 속 시헌에게 말을 걸었다.

“아프냐?”

기욱의 물음에 이불이 다시 움직였다. 이불 안으로 숨어든 시헌은 아빠에게 맞은 뺨을 만지작거렸다. 아빠에게 맞은 뺨은 다른 의미로 아팠다. 그걸 아프다고 묻는다면 아픈 게 맞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반쯤 쉰 목소리가 이불 너머로 흘러나왔다.

“아파.”

시헌은 이불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랫동안 시헌과 지내 온 기욱에게 이 같은 시헌의 행동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기욱이 아는 시헌은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같이 지내 오면서도 몰랐던 부분이 있었다거나, 혹은 오죽하면 그랬겠거니 싶었다.

기욱의 한숨이 더욱 짙어졌다. 기욱은 시헌이 집을 나간 후 이야기한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영화 학원을 멋대로 끊었다고 했던 모양이었다. 휴대폰에 곧잘 넣어 보고는 했던 것을 알고 있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최근 들어서도 보는 걸 몇 번인가 본 적 있었지만,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가볍게 넘겼던 것이 화근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평소보다 빈도수가 많은 것도 수상한 점 중에 하나였다. 그런 사실을 이제 와 깨닫는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나한테 말도 안 하고.”

“…….”

“왜 그랬어.”

기욱은 어지간한 일로 시헌을 탓하거나 혼내지 않는다. 설령 시헌이 영화 학원을 끊었다 해도 기욱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었다. 다만 이런 식으로 부모님이 먼저 알게 될 거라는 건 아무리 기욱이라도 방법이 없었다.

“형은 상관없잖아.”

“상관없을 리가 없잖아. 형인데.”

다시 한동안 침묵이 일었다. 이불 속에서 꾸물대던 시헌이 이불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팔짱을 끼며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기욱의 시선은 방 안에 있는 시헌에게 닿아 있었다. 기욱은 이불 밖으로 나온 시헌의 얼굴이 엉망이라는 걸 알았다.

집을 뛰쳐나갈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눈물범벅이 된 시헌의 모습은 어딘가 애처로웠다. 그러고 보니 아직 20살도 안 됐었지. 어쩌면 기욱은 애답지 못한 시헌의 모습에 애라는 사실을 잊고 지냈었는지도 몰랐다. 기욱의 얼굴을 본 시헌의 목이 막혀 왔다. 기욱이라면 이해해 줄 거로 생각했다.

여태까지 그래 왔기에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기욱을 보니 사정을 설명하기에 앞서 눈물부터 났다. 시헌은 침대 시트를 주먹으로 쥐었다.

“형은 왜 의사 해? 하연 누나는? 왜? 부모님이 의사라서? 그럼 둘이면 됐잖아. 아니야?”

시헌의 질문에 기욱은 인상을 찌푸렸다. 시헌의 말을 반박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의사를 하느냐. 시헌의 질문은 집안에 있어서 해서는 안 되는 불문율 같은 질문이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하연은 첫째이기 때문에. 기욱은 장남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표면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하라고 해서. 부모님은 자연스럽게 의대 얘기를 했고, 하연과 마찬가지로 기욱에게 다른 선택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기욱은 단 한 번도 그 행동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기욱은 부모님의 바람대로 J대 의대에 진학했다.

자신이 그랬기에 시헌도 당연히 그럴 거라는 생각은 전제부터가 잘못되어 있었다. 시헌의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방의 불이 켜지지 않았기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울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있잖아. 형. 우린 왜 맨날 여행을 가면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는 걸까? 의사라서? 부모님이 바빠서? 사람이 죽었는데, 다들 어떻게 그렇게 담담할 수 있어? 의사라서? 병원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기 때문에? 그 사람들도 그냥 죽어 나간 숫자에 지나지 않아서?”

“박시헌. 적당히 해.”

“형은 내가, 진짜 영화감독이니 뭐니 하는 게 되고 싶어서 그런 거라 생각해? 사실은 말야, 아무래도 좋아. 아무래도 좋다고. 의사, 병원, 집안, 입시, 대학, 부모님. 그냥, 그냥 다, 다 지긋지긋하다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왜 의사여야만 하는 거지? 다른 길은 왜 생각조차 해 주지 않는 걸까. 시헌은 집에 있으면 마치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자신을 피해 다니는 서진부터 부모님이 학원을 등록한 사실을 알아챈 것까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신이 있다면 묻고 싶다. 대체 내가 뭘 잘못해서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 거냐고. 세상에 힘든 사람이 많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가장 힘든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지금의 시헌에게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기욱이 진정하라며 시헌의 팔을 잡아 올렸다.

“박시헌 진정해!”

“놔, 놓으라고!!”

소리를 지르던 시헌은 침대에 있던 베개를 기욱 쪽으로 내 던졌다. 기욱의 몸을 맞춘 베개는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기욱이 방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주웠다. 기욱을 올려본 시헌의 눈가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윽…, 날 좀 내버려 두라고.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데! 난, 그저, 그저 그냥…….”

과고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시험을 보지 말걸. 분명 현정과 처음 약속을 할 때는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 현정을 대신해 다 같이 입학하고, 의사니 뭐니 하는 걸 떠나 각자 하고 싶은 대로 대학에 가고, 대학을 가지 못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지내고 싶었다.

성인이 돼서 미국에서 돌아온 현정을 반기며, 다 같이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웃으며 떠들면 되는 일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모두 엉망이 되었다. 적어도 마지막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다 같이 고등학교까진 졸업하고 싶었어…!”

* * *

학원을 왔으나 시헌은 도무지 수업에 집중되지 않았다.

“…헌아. 시헌아!”

“어, 응.”

좁은 책상에 턱을 괸 시헌이 고개를 돌렸다. 주변 학생들이 하나둘씩 어디론가 자리를 뜨고 있는 모습을 보아 벌써 쉬는 시간이 된 것 같았다. 시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뿐이라는 걸 알지만 바람을 쐬고 싶었다. 은소가 시헌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바람을 쐬러 나온다 해도 대단한 건 없었다. 1층까지 내려갈 수는 없으니 6층에 있는 야외 휴게실로 나온 것이 전부였다. 나무 의자에는 몇몇 학생들이 앉아 떠들고 있었다. 시헌은 의자에 앉는 대신 근처의 난간에 몸을 기댔다.

“뭔데 그렇게 정신이 없어?”

시헌은 은소의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영화 학원은 이번 달로 그만두라고 했다. 재수 학원을 알아보겠다는 아빠를 말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자퇴하고 지금부터 재수 학원을 가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면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아빠에게 중요한 건 결국 의대와 대학이라는 간판이었다. 아빠에게 맞은 상처는 거의 아물었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리 쉽게 아물어지지 않았다.

“영화과 입시 준비는 잘돼?”

사정을 모르는 은소가 물어 왔다. 시헌은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 말에는 기운이 거의 없었다.

“그냥 그래.”

“넌 잘할 거야.”

은소의 말에 바닥으로 시선을 돌리던 시헌이 고개를 들었다. 은소의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해. 주변 사람들은 시헌에게 당연하다는 듯 무언가를 요구했다. 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은 현재는 그렇지 않은데 언젠가는 하게 될 거라는 기대였다. 시헌에게 요구하는 건 기대가 아닌 성공을 위한 확신이었다.

‘잘할 거야.’가 아닌 당연하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잘할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은소의 말이 시헌은 낯설게 다가왔다. 솔직히 말하면 확신이 없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시헌의 질문에 은소는 아이들이 가고 없는 텅 빈 테이블을 멍하니 바라봤다.

“난 말야, 사실 중학교에 와서도 자신이 없었어. 다시 그 녀석들을 만나면 어떻게 하지? 이상한 소문이 나면 어쩌지? 사실은 말야, 교복을 안 가져온 그날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거든.”

은소가 부끄러운 기억이라며 뺨을 긁적였다. 시헌의 머릿속에 유독 당황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은소가 떠올랐다. 은소에게 시헌은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첫 만남부터, 자신을 구해 준 순간까지 모든 것이 머릿속에 남았다.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그런 특이함이 좋았다. 시헌과 친해지고 싶었고, 가까워지고 싶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달라지려 노력한 것도 모두 시헌에게 잘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있지. 네가 딱 나타난 거야.”

“그건 그냥……. 나도 빨리 들어가고 싶었고.”

은소의 반응에 시헌은 멋쩍게 고개를 저었다. 은소를 보며 특이한 녀석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날 시헌은 정말 평소와 다르게 머리가 아팠다. 아마 머리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시헌은 은소를 끝내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설명해도 은소는 개의치 않았다.

“넌 대단해. 늘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전부 해내는 모습이 정말 멋지거든.”

“…….”

“그 많은 애들 앞에서 담담한 것도 신기해. 난 아직도 무섭거든. 그러니까 잘할 거야. 너라면 분명 잘할 수 있을 거야.”

“그건…….”

“그리고 나 말야,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사실…….”

때마침 강의실 너머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들어온 모양이다. 열린 강의실 문 너머로 선생님의 마이크 목소리에 은소의 말이 반쯤 묻혔다. 왠지 고백하는 분위기가 된 것 같은 은소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저었다.

“사실?”

“아냐, 아무것도. 어쨌든 힘내.”

들어가자. 은소가 시헌의 등을 떠밀었다. 복도에 있던 조교가 빨리 들어가라며 언질을 줬다. 은소는 학생들을 헤치고 앞서가는 시헌의 등을 바라봤다. 중학교 때보다 키가 커진 자신과 달리 시헌의 키는 큰 차이가 없었다. 학생들을 밀치고 자리에 앉는 시헌의 모습은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사실은 네가 좋아.’

은소는 그날 끝내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 * *

“와, 씨발. 강서진. 이게 얼마짜리냐? 어?”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자리에서 공부하고 있던 서진의 곁으로 몇 명의 남학생들이 다가왔다. 그중에는 백화점에서 얼굴을 마주한 학생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문이 돈 모양이었다.

남학생 한 명이 서진의 책상에 놓인 샤프와 새로 산 가방 등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어폰을 끼고 적당히 무시하려던 서진의 예상과 달리 남학생의 간섭은 생각보다 거슬렸다. 서진이 이어폰을 뺀 뒤 남학생의 손을 쳐 내며 말없이 남학생을 노려봤다.

“야, 저번에 그 남자가 사 준 거야? 어?”

“…….”

“노려보면 어쩔 건데. 존나 복도에서 그 지랄했다고 존나 나대더라 너.”

지난번에 복도에서 싸운 무리와는 다른 무리였다. 지난번 무리의 아이들이 중간에 섞여 있으니 아주 다른 무리는 아닌가. 남학생들은 서로 곧잘 섞이고는 했다. 교실로 들어온 선생님이 다른 반 남학생의 모습에 뭐 하는 짓이냐며 소리를 질렀다.

남학생 한 명이 신경질적으로 서진의 책상을 발끝으로 차고 갔다. 책상 모서리에 걸쳐 있던 서진의 샤프와 지우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학생들은 바닥에 떨어진 필기구를 집는 서진을 보며 또 다시 큭큭댔다.

지난번 복수인지, 아니면 정말 백화점 일의 호기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남학생들과의 악연은 생각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남학생들은 서진이 정문을 나오기 무섭게 말을 걸었다.

우연히 만난 걸 가장하고 있지만, 그 모습으로 보아 일부러 기다린 것이 틀림없다고 서진은 확신했다.

서진의 부탁으로 누나에게 알려지진 않았으나 복도의 싸움 이후 꽤 여럿, 징계를 먹었다고 들었다. 한 남학생이 무시하고 지나가려는 서진을 불렀다.

“강서진!”

“…….”

“우리 존나 할 말 있지 않냐? 어?”

할 말은 많았지만,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마당에 더 이상의 사고는 치고 싶지 않았다. 서진이 이어폰을 끼고 못 들은 척 지나가려 하자 또 다른 남학생이 서진의 팔을 붙잡아 귀에 있는 이어폰을 강제로 빼냈다. 억지로 이어폰이 빠진 귀가 아려 왔다. 서진도 더 이상은 못 참았다.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눈앞에 선 남학생의 손을 내쳤다.

“씨발.”

“…….”

“건들지 말라고.”

“하, 싸가지 없는 새끼 말하는 거 봐라.”

서진의 말을 들은 몇몇 남학생들이 덩달아 욕을 지껄였다. 서진은 이어폰을 돌돌 말아 주머니에 넣었다. 직감이 왔다. 복도 때처럼 곱게 끝날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서진은 한참 학생들이 하교 중인 학교를 바라봤다. 어쩌면 복도 때보다 더 재수가 없을지도 몰랐다.

* * *

“태권도 가려고?”

“응. 관장님이 도와 달래서.”

그렇구나. 은소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은소는 학원 수업 중간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난데없이 학교 친구에게 온 연락 때문이었다. 시헌은 평소와 달리 초조해하는 은소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어?”

“아, 아냐. 별일 없어. 나 오늘은 먼저 갈게.”

차마 친구들이 서진을 때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할 자신이 없었던 은소는 도망치듯 학원을 나왔다. 학원 근처에 있는 건물 사이라고 했다. 친구가 말한 장소에 가까워지자 몇몇 학생들이 질색하며 자리를 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 은소와 똑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있었다.

학생들을 더 부른 건지 그중에는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도 있었다. 아무렴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은소에게 연락을 한 친구 한 명이 은소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이게…… 무슨….”

일방적인 폭력의 현장에 은소는 할 말을 잃었다. 배를 많이 맞은 모양인지 서진은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은소는 서진의 떨려 오는 그 입술이 금방이라도 자신의 이름을 말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서진의 머리채를 붙잡은 남학생 한 명이 뺨을 향해 손을 여러 번 휘둘렀다.

저들끼리는 장난이라고 한 모양이었지만, 성인에 가까운 체격에 남학생이 휘두르는 손찌검은 생각보다 약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여학생 한 명이 그 모습을 보며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여학생의 모습은 마치 코미디 영화를 틀어 놓은 관객 같았다. 은소는 조금 전 대목의 어디가 그렇게 재미있어 웃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30만 원짜리 가방이라고? 어쩌냐 다 타버려서.”

남학생 한 명이 바닥에 떨어진 서진의 가방을 발끝으로 뭉갰다. 가방 근처에는 불로 탄 흔적들이 가득했다. 담배를 피우던 라이터로 한 짓이 틀림없었다. 퉤, 담배를 입에 물던 또 다른 남학생 한 명이 서진 쪽으로 침을 내뱉었다.

“씨발, 비명을 한번 안 지르냐. 독한 새끼.”

“야, 둬. 소리 지르면 존나 곤란한 건 우리지 쟤냐?”

“큭큭. 개 웃겨. 내가 그래서 그랬잖아. 저 새끼 첨 봤을 때부터 눈이 존나 이상한 것 같았다고.”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은소는 저만 빼고 이상한 코미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웃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화를 내야 하는 건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넘어지면서 긁힌 건지 서진의 팔이며 다리에는 이런저런 상처들이 가득했다. 은소는 서진을 때리는 남학생들을 살폈다.

아무리 중학교 때보다 체격이 좋아진 은소라지만 싸움은 자신이 없었다. 서진을 때리는 남학생 중에는 성인과 비슷한 체격을 가진 학생도 있었다.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문득 한 남학생이 재미있는 게 생각났다면서 큭큭댔다.

“…어때? 콜?”

“야, 미쳤냐?”

“아 뭔데. 나도 알려 줘!!”

“닥쳐 봐 좀. 지금 남자들끼리 존나 중요한 얘기하고 있다고.”

여학생 한두 명이 알려 달라며 달라붙었지만, 남학생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던 은소는 남학생 무리에 끼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너 남자랑 해 본 적 있냐?

여자랑 비슷할걸.

한번 해 볼까? 니네 집 부모님 없다면서.

아무렇지 않게 장소까지 물색하는 모습에 은소는 손발이 떨려 왔다. 지금 얘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저 말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적어도 은소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대부분 남학생이 한 번쯤은. 하면서 찬성하는 분위기가 될 무렵 은소는 더 이상은 안 된다는 판단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그건 좀 심한 것 같은데…….”

은소의 말에 남학생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나마 은소를 챙기는 남학생 한 명이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저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낸 남학생 하나가 은소의 앞에 섰다. 남학생의 턱이 바닥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서진을 가리켰다.

“야, 기은소. 저 새끼 게이라고 젤 먼저 말한 건 너야.”

“그건 그렇지만 방금 한 얘기는…!”

“아 씨발. 말귀 존나 못 알아먹네. 임신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한번 해 보자니까? 왜? 꼽냐? 이제 와서 혼자만 씨발, 좋은 사람인 척 발 빼겠다 이거냐?”

남학생의 손바닥이 은소의 어깨를 밀었다. 남학생의 힘에 밀려난 은소를 근처 친구들이 간신히 붙잡았다. 다들 적당히 하라며 말리는 분위기가 되었지만, 남학생의 목소리는 쉽게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너 존나 같이 놀아 줬다고 오르는 꼴이 좆같……. 아, 뭐냐?”

툭, 하고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에 남학생과 은소를 포함한 주변 학생들이 고개를 돌렸다. 남학생에게 멱살이 잡힌 은소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태권도 가방이었다.

눈을 살짝 위로 하자 건물 가득 있는 간판 사이로 태권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남학생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시헌의 시선이 한동안 벽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서진이 있는 방향이었다. 한참 만에 고개를 돌린 시헌과 은소의 눈이 맞았다.

“시헌아….”

“씨발 너 뭐 하는 새끼…!”

누가 뭐라고 말을 할 틈도 없이 시헌의 주먹이 근처에 있는 남학생의 얼굴을 때렸다. 난데없는 싸움판에 남학생 여럿이 달라붙었고, 여학생들은 소리를 지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무작정 달라붙어 주먹을 휘두르는 남학생들과 달리 시헌의 주먹과 발길질 하나하나는 남학생들의 급소만을 노렸다.

도무지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덩치가 큰 남학생 한 명이 시헌의 팔을 붙잡았다. 시헌이 남학생의 발을 걸어 넘어트렸으나 또 다른 남학생이 근처에 있던 목각을 휘둘렀다. 반사적으로 팔로 얼굴을 보호했으나 퍽,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평소라면 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도 몰랐으나 지금의 시헌에게 그런 상처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 마… 박시헌… 하지 말라고!”

왜 시헌이 여기 있는지 모르나, 뒤늦게 시헌이 있다는 걸 눈치챈 서진이 배를 움켜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남학생들의 우렁찬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생각보다 소란이 커지자 사람들이 몰려왔다. 여학생 몇 명이 남학생들을 말렸다.

누가 경찰을 불렀다는 말이 나오는 것 같았다. 더 이상의 소란은 사양이라며 남학생들이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은소의 친구가 빨리 가자며 은소를 재촉했지만, 은소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은소를 제외한 모든 남학생과 여학생이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모든 게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헌이. 은소는 이 와중에도 남학생들 여럿과 싸운 시헌부터 신경이 쓰였다. 시헌은 바닥에 반쯤 쓰러진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입안에 흐르는 피를 팔로 닦아 냄과 동시에 팔이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목각에 제대로 맞았으니 뼈가 부러지든 뭐든 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시헌의 팔은 누가 봐도 퍼렇게 붓고 있었다. 은소가 시헌에게 다가갔다. 옆으로 엉망이 돼 있는 서진이 보였다. 은소는 떨리는 몸을 간신히 누르며 시헌의 앞에 섰다.

“네가 그럴 줄 몰랐다.”

“시헌아, 이건 그게 아니라……. 쟤들이 멋대로. 그래, 저 녀석들이 멋대로 한 거라고! 내가, 내가 한 게 아니야. 내가 왔을 때는 이미 그랬어. 내 잘못이 아니야. 내, 내 잘못이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라고!”

“변명하지 마.”

“시헌아. 나 알잖아. 내가 때린 거 아니라니까? 내, 내가 사람 같은 거 때릴 리가 없잖아. 들어 봐. 이건 다 서진이가 그런 거야. 애당초 서진이가, 서진이가 네…, 네 혀….”

은소는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형이. 박기욱이 잘못한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하지 못할 거라고. 병원 식당에서 본 기욱의 그 말이 마치 저주처럼 은소의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 와중에도 진실을 안 시헌이 받을 상처가 먼저 떠올랐다. 어쩌면 기욱은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니었다. 은소는 시헌이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중학교 시절 자신을 보호해 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분명 오해라는 사실을 알아줄 거로 생각했다. 은소의 눈가로 눈물이 흘렀다. 땀인지 눈물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은소가 시헌의 다친 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기은소,”

“…….”

“다시는 보지 말자.”

시헌은 내미는 은소의 손을 쳐 냈다. 부어오른 팔 때문인지 손목이 미친 듯이 아팠다. 통증 탓에 말할 기운도 없었다. 은소의 몸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 의미가 무슨 뜻인지조차 와 닿지 않았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수능이 끝나면 여행이라도 갈 수 있지 않을까, 내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늘 자기 전마다 시헌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힘겹게 서진 쪽으로 걸어간 시헌은 서진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머뭇대던 서진이 시헌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은소의 다리가 힘없이 풀려 근처에 있는 벽에 간신히 몸을 기댔다.

자신을 구해 줬던 시헌은 존재하지 않았다.

* * *

“…헌, 읏. 박시헌!!”

골목을 나온 서진은 앞서가는 시헌을 불렀다. 몇 걸음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지금의 서진은 시헌의 걸음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이를 악문 서진이 걸음을 좀 더 빨리해 시헌의 팔을 붙잡았다. 남학생들과 싸울 때 부딪힌 팔이었다.

서진에게 팔을 붙잡힌 시헌이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 위에 있는 낡은 가로등이 두 사람을 비췄다. 빨갛게 붓다 못해 퍼렇게 질려 있는 시헌의 팔은 누가 보더라도 심각했다. 서진에게 팔을 붙잡힌 순간 시헌은 악 소리가 나오려던 걸 간신히 참은 상태였다. 조심스럽게 시헌의 팔을 본 서진이 인상을 구겼다.

“병원 가자.”

“안 가.”

시헌이 팔을 붙잡은 서진의 손을 쳐 냈다. 또다시 밀려오는 저릿한 통증에 시헌은 입술을 위아래로 깨물었다. 그놈의 병원, 특히 의사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상태가 병원을 가지 않으면 안 될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런데도 병원은 싫었다. 서진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두 사람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병원 가자고. 아니면 119라도 부를…….”

“씨발, 강서진.”

휴대폰까지 꺼내 든 서진에 시헌이 등을 돌렸다. 서진의 이마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고, 교복은 엉망이었다. 팔다리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나 있었으며 남학생들에게 연신 차인 배가 아픈 모양인지 은근슬쩍 배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시헌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고, 그 모습은 시헌의 짜증을 불러일으키기 더없이 충분했다. 저야 잘해 봐야 팔 하나 부러진 것이 전부겠지만, 서진의 쪽은 더 심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주제에 누가 누구를. 기가 막혔다. 시헌은 다치지 않은 손으로 이마에 묻은 피를 닦았다. 서진을 향하는 목소리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너, 니 꼴은 안 보여?”

“나는 아직 괜찮…….”

“그럼 나도 괜찮아.”

시헌이 서진의 말을 자르고 대답했다.

“그래도 팔이…….”

당황한 서진의 손이 다시 시헌의 팔에 닿았다. 서진의 손에 부딪힌 팔이 다시 아려 왔고, 시헌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읏,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고!! 괜찮다는데 왜 계속 그러는데!!”

시헌은 어딘가 엉켜 버린 사람처럼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괜찮아. 문제없어. 팔 하나 부러졌다고 죽는 건 아니잖아. 시헌은 이제는 서진을 마주할 수 없어 등을 돌렸다.

거미줄에 달라붙은 것처럼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제 등을 보고 있는 서진의 시선이 따갑기만 했다. 서진의 걱정에 그렇게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팔이 심각하다는 건 이미 통증으로 전부 느껴졌다. 서진이 말하지 않아도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괜찮지 않았다.

사실은 모든 게 괜찮지 않았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재수 학원을 알아보고 있는 아빠도, 친절한 말투로 재수하라며 설득하는 하연도 싫다. 이유를 물어봐 주지 않고 반항한다는 사실 하나를 두고 잔소리를 퍼붓는 엄마도 싫다.

평소와 달리 뭐가 그리 잘났는지 의기양양한 운오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학교에서 친구들은 당연하게 집안 얘기를 하며 의대에 갈 거라며 띄워 주는 것이 재수가 없었다. 진학 상담이라고 해 놓고 결국은 의대 얘기, 성적 얘기.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시헌의 생각을 물어 오는 사람은 없었다.

“미안.”

시헌의 눈치를 살핀 서진이 사과를 했다. 서진의 사과에 시헌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상처를 입은 서진의 모습을 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서진을 때린 남학생들에 대한 분노? 아니었다. 서진이 싫었다. 남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끌려와 맞을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질 때까지 참은 서진이 싫었다. 과고로 진학하지 않았더라면 좀 괜찮았을까?

같은 학교였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까? 아빠의 반대를 이기고라도 서진과 같은 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자신이 미치도록 싫었다. 괜찮냐고? 괜찮을 리가 없었다. 시헌은 서진이 한 번쯤은 그래도 한 번쯤은 의지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시헌의 침묵에 서진이 눈치를 살폈다.

“나 가 볼……. 읏!”

가 보겠다는 서진의 목소리에 시헌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어떻게 만났는데, 지금 가면 또 언제 올지 알 수가 없었다. 가까워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어느새 가까워져 있었다. 시헌에게 서진은 신기루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서진의 모습이 시헌을 미치게 했다. 다친 팔이 아팠지만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시헌은 가려는 서진을 붙잡아 벽 쪽으로 내밀었다.

당황한 서진이 시헌을 바라봤다. 키는 서진 쪽이 조금 더 컸지만, 시헌의 힘을 이겨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시헌이 남학생들과 싸울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막상 느낀 시헌의 힘은 생각 이상으로 강했다. 시헌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닿을 것만 같이 아른거렸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서진이 본능적으로 시헌의 팔을 붙잡았다. 다친 팔을 붙잡힌 시헌이 놀라 뒷걸음질 쳤다. 시헌은 욱신거리는 팔을 의미 없이 내려 봤다. 이상했다. 분명 아픈데, 아프지 않았다. 아픔조차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시헌에게 밀린 서진은 갈 곳이 없다는 걸 알았다. 어딘지 모를 골목은 지나가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안 괜찮아.”

“…….”

“괜찮을 리가 없잖아.”

“박시헌 너… 으읍!”

서진이 반항할 틈도 없이 시헌의 입술이 서진의 입 위로 포개졌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장소라지만 시헌의 행동은 서진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시헌의 눈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중에? 그렇게 서진은 늘 도망만 쳐 왔다. 이제는 그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듯 버림받는 건 싫었다.

서진은 시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시헌의 입장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은 서진이었다. 서진의 발악에도 불구하고 시헌의 혀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피에 섞인 키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릿한 맛만 남겼다. 서진이 힘겹게 시헌을 밀어냈다.

시헌은 입가에 흐르는 타액 섞인 피를 손끝으로 닦았다. 상처의 통증에 대한 아픔 또한 하나의 흥분으로 다가왔다.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중 일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시헌은 서진의 목덜미를 핥았다. 서진이 말릴 틈도 없이 시헌의 이가 서진의 목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이미 잔뜩 상처를 입어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지만 그래도 살이 찢기는 고통이 느껴졌다. 서진은 반쯤 다리가 풀려 벽에 기대 간신히 서 있는 상태였다. 일방적인 관계, 이래선 기욱과 다를 게 없다고 느꼈다. 시헌은 기욱과 다르다.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서진은 시헌이 기욱과 같은 절차를 밟지 않기를 원했다. 그만.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박시헌!!”

서진이 시헌의 몸을 있는 힘껏 밀어냈다. 서진에게 밀린 시헌은 뒤늦게 정신이 돌아왔다. 벽에 기댄 서진의 몸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하하, 시헌은 헛웃음이 나왔다. 겁을 주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억지로 뭔가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그냥, 그냥 서진이 떠나지 않기를 원했을 뿐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상황이었다. 시헌은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왜 이렇게 매번 서로 어긋나야만 하는 걸까. 몸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미안하다.”

시헌은 등을 돌려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 * *

모처럼 구내식당에 온 기욱은 여유가 있었다. 고년차 선배 의사들이 대부분 휴가차 떠났기 때문이었다. 평소보다 고년차가 적은 만큼 근무 시간은 길어졌지만, 유일하게 좋은 것이 있다면 식사였다. 한 선배와 기욱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선배들을 대신해 남은 선배들은 적어도 이상한 트집을 잡거나 하지는 않았다. 날도 더운 이 시기에 저년차들을 이 잡듯 잡아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기욱은 요 며칠간 사람 기분이 제법 좋은 상태였다. 일이 힘들어도 사람만 괜찮으면 좋다고 하는 말이 딱 맞는 순간이었다. 기욱은 근무 계획이 맞은 서윤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중이었다. 며칠 전 새롭게 주치의로 지정된 환자가 마침 서윤의 병동 담당이었기에 환자에 관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무렵 두 사람은 병원 본관 1층 로비에 있는 카페를 찾았다. 줄이 제법 긴 편이었지만, 밥을 일찍 먹은 터라 줄을 기다릴 여유 정도는 있었다. 기욱이 커피를 사는 동안 운 좋게 빈 테이블에 앉은 서윤이 통화를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하는 서윤에 기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가지 않아 나온 커피를 통화를 하는 서윤에게 내밀었다.

“왜 그래?”

“네? 서진이가요? 일단, 알겠습니다.”

서진이라는 말에 기욱의 손에 들려 있던 커피가 살짝 흔들렸다. 밖으로 튀는 것을 간신히 막은 기욱이 서윤을 봤다. 기욱이 내민 커피를 받은 서윤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변해 있었다. 서윤은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기욱을 부르는 서윤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오, 오빠… 어떡해…….”

* * *

5교시가 끝나고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우르르 복도로 나왔다. 차에서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 기욱은 몰려드는 아이들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넥타이도 차지 않은 엉망인 셔츠와 대충 걸친 마이지만 기욱의 외모 탓인지 학생들은 지나가는 기욱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기욱은 교무실이라고 적힌 푯말을 힐끗 보고는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3학년 교무실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는 여러 명의 선생님, 남학생과 서진이 앉아 있었다.

상담 선생님 옆에 앉은 서진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반대편에 앉아 있었는데 그중에는 은소도 있었다. 아이들을 훑어본 기욱은 혀를 찼다. 서진은 교무실로 들어오는 기욱에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왜 여기……!!”

“누구십니까?”

근처에 있던 남자 선생님이 먼저 물어 왔다. 기욱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여학생들이 교무실 문 쪽에 매달려 있었다. 선생님이 그런 학생들을 향해 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얼마 가지 않아 종이 쳤다.

“강서진 보호잡니다. 일단 서진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나는 당신이랑 할 말 없…….”

기욱은 선생님의 말을 기다릴 틈도 없이 서진을 잡아 교무실 밖으로 끌어냈다. 실례. 서진을 복도로 내던지다시피 한 기욱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교무실 문을 닫았다. 학생들이 들어간 교무실 밖 복도는 유독 조용했다. 기욱은 서진의 교복 소매를 멋대로 걷었다.

팔에 난 상처에는 이미 처치가 되어 있었다. 학교 폭력, 기욱도 소싯적엔 이런저런 사고를 쳐서 잘 알고 있었다. 서진은 무리를 지어 패싸움할 학생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남은 건 일방적으로 맞았다는 소리밖에 없었다. 싸웠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었는데. 남학생이니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갔던 게 화근이었던 모양이었다.

“누나는요?”

“오지 말라고 했어.”

“당신이 뭔데 멋대로…!!”

“서윤이 울고 난리 치는 거 보고 싶으면 부르던가.”

“누나……. 울었어요?”

“선생님이랑 전화 끊자마자.”

서진은 고개를 숙였다. 서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번 일도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태가 커진 터라 선생님이 멋대로 연락을 넣은 모양이었다. 서진은 기욱이 온 게 잘된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다른 편으로는 서윤보다는 기욱이 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참으로 제멋대로인 생각이었다. 서진은 기욱의 눈치를 살폈다. 시헌만큼이나 기욱은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일단 들어가자.”

서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욱이 문을 열었다. 기욱이 서진의 뒤에 섰다. 기욱을 본 남학생들은 이래저래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다. 기욱은 앉아 있는 몇몇 남학생들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백화점에서 본 적이 있는 남학생도 섞여 있었다. 시헌의 일이 좀 안정되나 싶었더니 이번엔 서진이라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 남학생이 언성을 높였다.

“아, 쌤! 진짜 억울하다구요! 우리도 맞았다니요!! 아, 억울해!! 야, 강서진. 그 새끼 친구라며. 걔 불러오라고 씨발!”

“어디서 욕질이야. 그만해!”

보다 못한 상담 선생님이 남학생들을 말렸다. 옆에 있던 남자 선생님이 남학생들의 말에 한숨을 쉬며 상황을 설명했다.

“아침부터 저 상태입니다. 경찰 말로는 애들이 서진을 때렸다고 그러는데. 애들 말은 근처 다른 남학생이 끼어들었다나 뭐라나…….”

“K과고라고요! 아, 얼굴 보면 안다니까! 키 존나 작고. 무슨 태권도 가방 들고 있는 애였다구요.”

“시끄러 임마! 얘기 중이잖아! 어쨌든 저희가 K과고에 가 보긴 했습니다만 그날 그 시간에 싸움에 낀 애들은 없었다고 하더라구요.”

기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과 친구, K과고에 태권도라면 시헌밖에 달리 없었다. 남자 선생님은 남학생들의 말을 처음부터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남학생들이 말하는 K과고 학생이라고는 한 명이다.

일반계 고등학교 특성상 돈 많은 과고 학생들이랑 엮이면 복잡해지는 건 이쪽이었다. 오랫동안 인문계 선생으로 일해 온 남자 선생님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방과 후에 *학폭위가 열릴 예정입니다. 그때 참석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실례지만 그 서진이랑은 관계가……?”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기욱이 남학생들을 홀렸다. 선생님도 서진에게 달리 남자 보호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해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 선생님은 오랜 교직 생활에 몸 담근 만큼 눈치 또한 빠른 편이었다.

“사촌 형입니다.”

“지랄! 둘이 사귀는 거 봤…….”

기욱이 남자 선생님의 뒤에 있는 남학생을 노려봤다. 서늘한 기욱의 눈동자에 남학생이 고개를 돌리며 입을 닫았다. 수업을 들어가야 하는 선생님도 있는 상황이라 나머지는 방과 후에 하기로 했다. 가해 남학생들이 먼저 교무실을 나가고, 서진도 뒤를 이어 복도로 나왔다. 서진은 복도에 서 있는 기욱과 눈이 마주쳤다.

“이따 봐.”

창가에 몸을 기댄 기욱은 별거 아니라며 손을 흔들었다. 등을 돌린 서진은 도망치듯 교실 뒷문으로 들어갔다. 서진이 가기 무섭게 기욱은 휴대폰을 꺼냈다.

[최규건]

기욱과 친한 신경외과 후배 의사의 전화였다. 다른 후배들과 달리 마음에 두는 구석이 많아 몇 번 같이 술을 마신 뒤 친해졌다. 기욱은 수신이 끊기기 직전에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을 귀에 대자 울먹이는 후배, 규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아, 선배!! 언제 오세요! 이거 다른 선생님들한테 걸리시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요. 저 좀 살려 주세요!!

일을 잘하는 후배에게 급한 대로 일을 떠넘기고 병원을 뛰쳐나온 기욱은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수업이 끝나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 일단 갈게.

― 부탁이에요, 제발 빨리 오세요.

규건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기욱이 빨리 병원으로 돌아올 것을 재촉했다. 1년 차인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건 오래 가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 알았어. 금방 갈게.

― 정말이죠? 금방 오시는거죠?

― 그래. 일단 끊어.

기욱은 규건을 적당히 달래며 전화를 끊었다. 규건은 다 좋은데 사람이 겁이 너무 많은 것이 탈이었다. 병원에서 도망친 기욱은 이후의 일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 * *

교문 밖 담벼락에서 기욱은 담배를 물었다. 얼마 가지 않아 꽤 비싼 외제 차 한 대가 기욱의 앞에 섰다. 차창이 반쯤 열리더니 정장을 입은 청년 한 명이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다. 박기욱.”

“어.”

김하민. 기욱의 고등학교 시절 동창이었다. H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사시에 합격해 변호사가 된 하민은 내로라하는 로펌의 변호사로 들어갔다. 들어간 지 몇 년이 안 돼서 얼마 전에는 최연소 시니어 변호사가 됐다던가. 꽤 굵직한 사건을 담당하며 한창 주가를 올리는 중이었다.

공대를 간다며 기욱과 전교 1, 2위를 다투던 녀석이 수능을 3개월 앞두고 돌연 법학과를 가겠다고 선언을 했을 땐 다들 미친 거로 생각했지만, 그의 행보를 본다면 마냥 미친 일은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기욱이 교내 안 벤치에 앉아 있는 사이 학교 주차장에 적당히 차를 대고 온 하민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기욱은 다 떨어진 담배 케이스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하민이 기욱에게 제 담배를 내밀었다. 체육 수업 중인 몇몇 학생들이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고등학교가 그리웠던 하민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야, 그래도 이렇게 나올 정도면 살 만한가 보다? 너 몇 년 차라고? 4년?”

“2년 차. 미쳤냐? 이거 선배님들한테 걸리면 좆돼.”

“하긴, 나도 병원 얘기 들었는데 살벌하더라 진짜. 나 공대 떨어지면 차선으로 의대 가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문과로 전향한 게 다행이야. 그래도 너 많이 변했다? 안 그래도 내 동기 여동생이 너네 병원 간호사라서. 저번에 밥 먹을 때 너 아냐고 물어봤거든. 병동에 있는 여자 간호사랑 아주 좋아 죽는다면서? 천하의 박기욱이 고작 여자 하나에 죽고 못 사는 신세라니. 그 여자도 대단해. 암. 그렇고말고.”

“하, 멋대로 생각해라.”

“그래서? 이것도 그 여자 일이야? 듣자 하니 남동생이랑 둘이 산다는데 남동생 사고 쳤냐?”

기욱이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만난 만큼 옛날 친구는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기욱은 하민의 말이 딱 절반으로 줄어들면 좀 편할 텐데 싶었다. 뭐, 저런 성격 덕인지 고등학교 시절 같이 지내면서 이런저런 재미를 본 건 사실이었다. 말이 많은 만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었기 때문이었다.

공학도가 될 거라던 놈이 하루아침에 변호사를 하는 걸 보면 답이 나왔다. 기욱도 하민을 부르는 것에는 확실한 자신이 없었다. 워낙 바쁜 녀석이라 나올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하민이 나와 준 덕에 일이 수월해진 건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담배를 끈 뒤 천천히 학교 운동장 곁을 걸었다.

“맞았냐? 때렸냐?”

“저쪽은 때렸다고 그러는데.”

“고소할 거야?”

“넌 비싸서 안 해.”

“아, 농담도. 다른 변호사들한테 일 있을지도 모른다고 핑계 대고 나왔는데 빈손으로 가라고?”

“나중에 밥 사 줄게.”

“비싼 거로 말이지?”

하민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질 나쁜 농담을 하는 것도 여전해 보였다. 기욱이 알겠다며 적당히 손을 흔들었다. 종례를 하는 모양인지 교실 너머가 시끄러웠다. 복도 창문에 몸을 기댄 하민은 앞문 사이로 보이는 젊은 여자 선생님을 보고 있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여자 밝히긴 하민도 만만찮았다.

“아, 맞다. 진단서는? 뭐, 적당히 트집 잡을 만한 거라든지 그런 거 없어?”

“나 있잖아.”

“뭐 그렇긴 하지. 근데 진짜 다른 거 없냐? 너무 막 가긴 그렇잖아.”

“조서 있대.”

“CCTV는?”

기욱이 고개를 저었다. 워낙 후미진 곳인 데다 하필이면 그 자리가 CCTV 사각지대라고 했다. 하민이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찼다. 기욱의 태도로 보아 아이들은 그 자리가 CCTV 사각지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여유롭게 목 뒤로 깍지를 낀 하민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예전부터 기욱은 그랬다. 대책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뭐든 하는 이상한 녀석. 종례가 끝나고 학생들이 뒷문이며 앞문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반도 비슷하게 끝난 모양인지 순식간에 복도가 시끄러워졌다.

학생들 틈 사이에 있던 서진은 복도 창문에 기대 있는 기욱과 낯선 남자―하민을 발견하고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기욱을 보고 눈을 돌리는 서진은 생각보다 쉽게 하민의 눈에 들어왔다. 기욱이 머뭇대는 서진을 불렀다.

“강서진!”

“오, 이름이 서진이야?”

“젠장.”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서진은 마지못해 기욱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민이 서진을 반갑게 맞아 줬다. 기욱과 사뭇 친해 보이는 하민에 서진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서진은 아직 낫지 않은 상처들에 거즈를 그대로 붙이고 있었다. 서진을 위아래로 훑던 하민의 손이 서진의 뺨에 닿았다. 놀란 서진이 뒷걸음질 쳤고, 동시에 기욱이 하민의 팔을 잡아 올렸다.

“미안. 미안, 상처 좀 보려고 했어.”

몸을 바로 세운 하민은 잘못이 없다는 듯 당당하게 어깨를 편 뒤 휘파람을 불었다. 살벌한 분위기.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들어간 곳은 말 그대로 전장의 최전선이나 다름없었다. 약육강식의 세계, 하민이라고 폼으로 몇 년째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거 그렇게 예민하게 굴 것까진 없잖아.”

“…….”

“자자, 뭐 해? 들어가자.”

괜히 신경을 긁어 봤자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하민이 능청맞게 웃으며 학폭위가 개최된다는 교실 쪽으로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다.

* * *

“…….”

교실은 변호사가 왔다는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교실로 들어가기 전 일이 있다며 통화를 하고 온 하민이 뒤늦게 신분을 밝힌 탓이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시끄럽게 떠들었던 학부모들이 변호사라는 말 한마디에 입을 다물었다.

남자 선생님도 예상치 못한 하민의 등장에 당황하고 있었다. 아, 이런. 하민은 뒷목을 긁적이며 기욱의 옆에 앉았다. 급한 전화여서 받고 왔을 뿐인데 이런 분위기가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들어와서 얼굴이라도 비치고 나갔어야 했다며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기욱! 야, 박기욱.”

하민이 휴대폰을 하는 기욱을 옆으로 쿡쿡 찔렀다. 뒤늦게 고개를 든 기욱이 주변을 둘러봤다. 기욱의 휴대폰을 슬쩍 본 하민은 고생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모든 학생과 학부모, 관계자들의 시선이 기욱에게 닿아 있었다. 아무리 하민이 변호사라고는 하지만 일을 모두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민이 작은 목소리로 기욱의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넌?”

“고3이고 하니 뭐. 좀 그렇긴 한데 나쁘지 않다고 생각은 해.”

“*Rt ligaments 손상, 후두부 *contusion 및 *trauma, 가벼운 *concussion, 차후 *hemoperitoneum 의심으로 인한 전치 3주. 급하게 서면으로 받긴 했으나 뭐, 그런 건 어찌되든 상관은 없지 않습니까?”

*Rt[right] : 오른쪽

*contusion : 타박상

*ligaments : 인대

*trauma : 외상

*concussion : 뇌진탕

*hemoperitoneum : 복강내출혈

기욱의 대답에 하민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며 기욱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기욱이 책상 옆에 있던 종이를 하민에게 넘겼다. 「오른쪽 인대 손상, 후두부 타박 및 외상 및 가벼운 뇌진탕, 차후 복강내 출혈 의심 있음.」 영문 밑에 반듯하게 한글로 적힌 걸―기욱이 읽으라고 적어 준 걸로 밖에는 안 보이지만― 읽은 하민이 쯧, 하며 혀를 차며 속삭였다.

“야!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 처먹냐! 너 이 새끼 일부러 그러는 거지?”

아니나 다를까 기욱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다들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단서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설마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나올 줄이야. 오랜만에 만났지만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모습은 여전해 보였다. 남자 선생님이 기침을 했다.

“저 실례지만 그…….”

“하하, 이 친구 직업이 의사라서요. 방금 전 그건 제가 다시 설명해 드릴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의사라는 말에 남자 선생님의 표정이 다시 구겨졌다. 변호사에 이어 의사까지. 변호사인 하민이야 기욱이 부른 외부인이라 치지만 보호자로 온 기욱이 진짜 의사라면 일이 더욱 복잡하게 되어 버린 셈이었다. 하민이 뒤늦게 사태를 수습하며 방금 전 기욱이 한 말에 대해 풀어 설명을 했다. 기욱이 그런 하민의 말을 자른 뒤 입을 열었다.

“똑같이 3주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

“하지만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그건 좀…….”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건 가해 학생뿐만이 아닐 텐데 말입니다.”

교실 내로 다시 침묵이 일었다. 하민은 될 대로 되라며 손을 저은 뒤 기욱이 요구한 3주 조건을 요구했다. 기욱이 입을 열기 전까지 정학 10일로 합의가 끝나 가던 상태라 3주 요구는 말 그대로 찬물 끼얹기에 지나지 않았다.

하민은 아무리 봐도 기욱이 작정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여자 친구도 아니고, 여자 친구 동생의 일에 이렇게까지 나서는 기욱이 하민은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한편 그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혀를 찼다.

한우성. 막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기욱은 한동안 우성과 같이 다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기욱과 우성은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어졌다. 선배가 졸업하고 난 이후에도 게이니 뭐니 하는 소문이 도는 우성을 괴롭히던 무리에는 기욱도 있었다.

태생적으로 눈치가 빠른 하민은 예전부터 기욱의 집착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몇몇 학부모들이 선처를 요구했지만 기욱은 가볍게 흘겨 볼 뿐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수시가 한창인 시즌에 근 한 달이나 되는 징계를 먹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수시를 포기하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앉아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정시보다는 수시에 비중을 두고 있는 터라 자칫 잘못하면 대학을 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분위기가 다시 어두워지자 한 남학생이 신경질적으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3주는 무슨. 밴드 붙이면 다 전치 3주냐? 멀쩡만 해 보이는데. 그리고 쌤. 제가 계속 말했잖아요. 저 인간 사촌 형 아니라니까요?”

“너 계속 이상한 소리 할래?”

“아, 진짜 돌아 버리겠네. 쌤이 아까 그랬잖아요. 객관적으로 얘기하자면서요. 그럼 객관적으로 강서진 고아고 누나랑 사는 거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근데 갑자기 사촌 형이라고 로펌 변호사 데리고 찾아오는 게 말이 돼요? 차상위 지원 받는 애가 로펌이요? 저 인간도 가짜 아니…!!”

말을 듣다 못한 학부모 한 명이 뺨을 치며 말을 잘랐다. 엄마인 모양인지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남학생이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엄마가 뭔데 사과하는데.”

“넌 애가 뭘 잘했다고 이렇게 당당해? 입 안 다물어?”

학부모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 복잡하게 됐네. 하민은 골치가 아프게 됐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문득 앉아 있는 서진과 눈이 맞았다. 기욱을 가운데 낀 하민이 서진에게 슬쩍 물어 왔다.

“괜찮냐?”

“괜찮아요.”

“너도 뭐라 말 좀 해 봐.”

“사실이잖아요.”

“야, 그래도…….”

“익숙해요. 저런 말 듣는 거. 중학교 때는 좀 덜했었지만. 딱히 나이랑 상관없잖아요.”

상황만 아니라면 저런 말을 하는 서진에게 잔뜩 잔소리를 하고 싶었던 하민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못 할 말을 함부로 하는 건 가해 학생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기도 했다. 남학생의 소란으로 인해 도무지 진행이 되지 않았다. 시간을 본 하민은 적당히 자리를 뜰 때가 됐다며 중얼댔다. 기욱이 학부모와 아이들 쪽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뭐, 애들끼리 지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죠.”

“…….”

“저도 학창 시절에 한두 번 싸우고 그랬습니다.”

“그럼 3주는…….”

“2주로 하죠.”

하민이 기욱의 책상에 있는 종이를 힐끗댔다. 종이에 적힌 글씨를 본 하민은 뺨을 긁적였다. 누가 누구에게 놀아났는지 싶었다. 2주라는 말에 학부모들은 여전히 불편해 보였지만, 처음보다는 나은 처사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분위기였다. 주변을 둘러본 기욱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혹시 괜찮으면 잠깐 애들과 따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기욱의 말에 다들 눈치를 보는 분위기였다. 대형 로펌의 젊은 변호사와 친해 보이는 기욱, 나이에 맞지 않은 처사에 학부모와 선생님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상 피해 학생의 보호자의 기분을 거슬러서 좋을 건 없었다. 10분만입니다. 학생과 기욱만 남겨 두고 나가는 게 영 찝찝했던 남자 선생님이 시간을 제한했고, 기욱은 흔쾌히 승낙했다. 기욱이 앉아 있는 서진을 건드렸다.

“너도 나가 있어.”

“제가 왜…….”

“그러지 말고 서진아 형이랑 같이 나가자. 응? 야, 너무 살벌하게 애한테 그러지 마라.”

하민이 서진을 밖으로 밀어내며 기욱에게 한마디 했다. 기욱은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였다. 선생님과 학부모가 나간 교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기욱은 급하게 하민에게 빌려 하고 나온 넥타이를 반쯤 풀었다. 의자를 뒤로 살짝 뺀 뒤 다리를 꼰 기욱이 몸을 숙여 손끝으로 책상을 툭툭 건드렸다. 낮게 가라앉은 기욱의 목소리는 남학생들로 하여금 위화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보호자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젊은 나이, 중학교 시절부터 온갖 사고를 쳐 왔던 남학생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기욱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순히 로펌 변호사를 대동한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학부모들 앞에서 한두 번 싸워 본 적이 있다는 말은 분명 허세가 아닐지도 몰랐다. 기욱은 남학생들을 반쯤 무시한 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애들끼리 지내다 보면 그럴 수도……. 그럴 수도. 그럴 수……. 없지.”

기욱의 입술이 서늘하게 올라갔다. 남학생들은 자신들의 징계며 어쩌면 대학의 입시까지 걸린 마당에 이 상황을 즐기듯 웃고 있는 기욱에 어이가 없었다. 어차피 어른들도 없겠다 남학생들 쪽에서도 할 말은 많았다.

“아, 사촌 형? 하, 어이없네. 강서진 그 새끼 사촌 없는 거 알거든요? 그리고 뭘 몰라서 그러는데. 그 개새끼가 먼저 복도에서 다른 애들한테 시비 붙였다구요. 하긴, 사촌 형도 아닌 그쪽이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요.”

“야, 말이 좀…….”

옆에 있던 남학생이 방금 전 부모에게 맞은 친구를 힐끗거렸다. 뺨을 만지던 그도 반성은 하지 못한 모양인지 사실이잖아, 하고 거들었다. 책상을 건드리던 기욱의 손이 툭, 하고 멈췄다.

“너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긴 하냐?”

“뭔 소리야. 니가 국회의원이냐? 대통령이야? 미친 새끼 혼자 드라마 찍냐? 니가 뭐 하는 인간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한 번만 더 그 씨발 소리 꺼내면.”

“…….”

“다 같이 좆되는 수가 있어.”

기욱이 인상을 찌푸렸다. 기욱의 목소리 톤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그 서늘한 목소리가 더욱더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헛기침을 한 남학생이 다시 말을 가다듬었다.

“어, 어쨌든. 당신이 뭐 하는 사람인지 우리가 어떻게 아냐구요.”

다른 남학생들도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이라고 드라마 흉내를 내려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혹시 알면 귀찮아질까 봐 미리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강서윤. J대학병원 신경외과 병동 간호사, 그리고 내가 이런 사람이거든.”

기욱은 병원을 들렀을 때 급하게 챙겨 나온 신분증을 남학생들 쪽으로 내던졌다. 병원 신분증을 본 남학생들의 표정이 굳었다. 아, 어쩐지 아까 강서진. 한 남학생이 눈치를 챈 모양인지 수근댔다.

“내가 그 여자랑 결혼까지 약속한 사인데. 그럼 이제 남은 아니네?”

“네? 지금 뭐라고…….”

기욱의 손가락 사이로 꽤나 값이 나가 보이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J대학병원, 한참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들 중 J대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학병원 전공의쯤 되면 변호사 한둘 아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뒤늦게 사태 파악이 된 남학생들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키스를 했다는 말을 듣긴 했으나 가해 남학생 중에서 그걸 직접 본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그, 학교에 막 찾아오고 강서진이랑 백화점에 간 건…….”

서윤의 남친이라면, 그것도 상대가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라고 하면 둘이 만나는 것쯤이야 있을 법한 일이었다.

기욱을 본 은소는 의자 밑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모두가 오해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기욱이 서윤과 사귀면서 서진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앞머리를 살짝 쓸어 넘긴 기욱은 남학생들에게 넘긴 신분증을 가져와 주머니에 넣었다.

“너넨.”

“…….”

“사람 잘못 건드린 거야.”

* * *

학폭위는 정학 15일로 마무리가 됐다. 서진이 교실에 두고 온 가방을 챙기러 간 사이 기욱과 하민은 주차장 근처 벽에 몸을 기댔다. 담배가 없는 기욱이 하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의사란 새끼가 작작 좀 펴라.”

“내가 뭘.”

하민은 칭얼대면서도 기욱에게 담배를 건넸다. 얼마 가지 않아 가방을 챙긴 서진이 정문으로 나왔다. 하민과 기욱을 슬쩍 본 서진이 그냥 지나쳐 가려 하고 있었다. 기욱이 그런 서진을 불렀다.

“타.”

“혼자 갈 수 있어요.”

“강서진, 말 들어.”

건너편 주차장으로 가해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숨을 쉰 서진이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기욱이 차 문을 열어 주며 들어가 있으라고 손짓했다. 서진이 들어간 차 문을 닫은 기욱은 남은 담배를 마저 물었다. 하민은 차창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서진과 기욱을 번갈아 바라봤다.

“고3이면 19살인가? 이야, 딱 3살만 더 많았으면 우리 기욱이 취향일 텐데 말야. 뭐, 19살이면 알 거 다 아는 나이긴 하지.”

“야, 김하민.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이상한 소리? 너도 알잖아. 내가 폼으로 이 일 하고 있는 거 아닌 거. 여친의 남동생이 학교 폭력을 당했다고? 하, 박기욱.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너 그런 자잘한 일에 신경 쓰는 녀석 아니잖아.”

기욱은 하민의 말에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하민이 피우고 있던 담배를 바닥으로 던진 뒤 발끝으로 껐다. 확실히 하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기욱이 이 난리를 친 것은 상대가 서윤의 남동생이어서가 아니었다. 주체가 틀렸다.

기욱이 선배들에게도 거짓말을 하고 병원을 뛰쳐나온 이유는 서윤이 아닌 서진이었다. 눈치가 빠른 하민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민의 손가락이 기욱의 뺨 근처를 왔다 갔다 했다. 기욱이 뭐 하는 짓이냐며 하민의 손을 밀어냈다.

“눈 말야. 눈. 너, 학교에 있는 내내 서진이만 보더라? 네가 쟤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알아야 하는데 말이다.”

“거기까지 해.”

“그 박기욱이니 알아서 잘하겠거니 신경은 쓰지 않는다만. 적당히 좋아해라.”

“뭐, 라고?”

하민은 당황하는 기욱을 보며 가볍게 속으로 웃었다.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인데 놀라는 걸 보니 아직 자기가 좋아한다는 자각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예전부터 어딘가 어긋난 인간이라는 생각은 종종 해 왔지만, 혹시나 했더니 역시 아니었다. 때마침 회사에서 걸려 오는 전화를 짧게 받은 하민이 허공으로 손을 흔들었다.

“나도 이런 말할 처지는 아닌데.”

“…….”

“내가 여자면 넌 원나잇 상대로 최고지만 말야.”

안쪽에 있는 자신의 차 문을 연 하민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네 사랑은 좀 무섭거든.”

* * *

차 안으로 침묵이 흘렀다. 무릎에 손을 올린 서진은 뻣뻣하게 굳은 채로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기욱은 한동안 휴대폰을 붙잡고 있었다. 응. 알았어. 서윤과의 전화를 마친 기욱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차가 천천히 운동장을 빠져나와 도로를 달렸다. 서진이 조수석의 벨트를 맸다.

“미안하다.”

뜻밖의 말에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기욱의 말에 서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뭐가 미안한 건지. 듣고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차는 기욱의 오피스텔 근처에 도착했다. 서진은 집이 아닌 기욱의 오피스텔에 도착한 것에 대해 불쾌함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애들한테 뭐 했어요?”

차 창문을 살짝 연 기욱이 다른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근처 골목에 자연스럽게 차를 댔다.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툭툭, 담배를 털었다. 담뱃재가 차창 밖으로 떨어졌다. 짧아진 담배를 밖으로 내던진 기욱은 창문을 올렸다. 기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아무것도 안 했어.”

기욱의 대답이 서진은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인지 인상을 구겼다. 기욱과 얘기를 한 후부터 가해 학생들의 태도가 달라진 건 서진은 분명하게 느꼈다. 뭔가를 했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서진은 기욱이 남학생들과 한 내용을 끝까지 말해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런 주제에 또 사과라니, 어지간히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었다.

주차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서진은 잠가져 있는 조수석의 문고리를 만지작거렸다. 운전석 밑으로 기욱이 손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좁은 차 안, 기욱의 시선이 느껴진 서진은 저도 모르게 차창 쪽으로 몸을 기댔다. 안전벨트를 푼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대시보드에 쓸린 상처에 서진이 인상을 살짝 구겼다.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한 서진은 고개를 숙였다.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기욱과 쉽게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서진의 뺨을 만지던 기욱의 손이 천천히 입술 근처에 닿았다. 그 과정에 서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기욱을 본 서진의 눈꺼풀이 떨렸다. 입술을 맞춘 기욱의 혀가 자연스럽게 서진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허리를 안으며 입안을 탐했다. 좁은 차 안에서 이제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반항하기를 포기했다. 입안을 움직이는 야릇한 느낌은 몇 번을 당해도 기분이 이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숨이 차올라 왔다. 키스할 때면 기욱은 늘 서진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그래서인지 기욱과의 키스는 여러모로 힘이 들었다.

서윤과 할 때도 이런 걸까. 이젠 별생각이 다 들었다. 허리를 안던 기욱의 손이 능숙하게 옷 뒤로 들어왔다.

서진은 숨이 막혀 정신이 없는 탓에 기욱이 제 몸을 쓰다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반항할 수가 없었다. 혀 안을 맴돌던 기욱의 행동이 갑작스레 멈췄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멈춘 기욱의 행동에 서진은 눈을 떴다. 기욱의 눈이 서진의 목 근처에 닿았다. 문득 지난밤의 일이 생각난 서진이 목 근처로 손을 올리려 했으나 기욱이 조금 더 빨랐다.

기욱은 서진의 양 팔목을 차창에 눌렀다. 좁은 차 안에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기욱의 다른 손이 서진의 목 근처 셔츠를 걷어 냈다. 그날 저녁 시헌에게 당했던 상처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 졌다. 서진이 있는 힘을 다해 기욱을 밀어냈다.

“그, 그만해요.”

서진은 재빨리 목에 있는 상처 위로 손을 가렸다. 인상을 구긴 기욱이 난데없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서진을 차 밖으로 끌어냈다. 서진은 기욱에게 끌려가다시피 오피스텔 계단을 올라야만 했다.

도어락의 문이 열리기 무섭게 기욱은 서진을 오피스텔 안으로 밀어 넣었다. 불이 꺼진 오피스텔 거실 앞에 선 서진의 등 뒤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서진은 다가오는 기욱에게 떠밀리다시피 신발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엉성하게 벗겨진 신발이 거실 현관 위에 놓였다.

“아파, 아프다구요!”

안 그래도 손목이며 몸이 아픈 서진은 기욱의 행동에 정말 아프다며 소리를 질렀다. 서진을 내려다보는 기욱의 시선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조금 전과 사뭇 다른 기욱의 모습에 서진은 소름이 끼쳤다. 기욱에게 밀린 서진은 거실에 있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기욱이 순식간에 서진의 위로 올라탔다. 서진이 기욱을 있는 힘껏 밀어냈으나 기욱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기욱의 어깨가, 몸이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무겁고 크게 느껴졌다. 기욱은 여전히 목을 가리는 서진의 손을 강제로 치워 냈다.

손끝으로 서진의 턱을 들어 올린 기욱은 목 근처를 핥아 내려갔다. 미지근한 혀의 감촉과 아직 남아 있는 상처에 닿는 느낌이 참으로 이상했다. 기욱의 등 뒤로 거실 벽에 걸린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하윽, 읏.”

“내가 말했지. 조심하라고.”

“제발, 제발 그만. 그만해요.”

시헌에 관한 일에 대해 변명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문득 하교 시간과 거실이라는 생각에 시헌이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들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옷 안 등을 쓰다듬던 기욱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 가지 못해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설마 하는 생각에 놀라 뒤로 물러난 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서진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과 문이 닫히는 도어락 소리를 눈치챈 기욱이 몸을 살짝 틀었다. 학교를 다녀온 모양인지 시헌이 교복을 입은 채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시헌을 본 기욱은 서진의 옷에 넣었던 손을 아무렇지 않게 빼냈다. 서진이 기욱을 밀어내자 기욱이 소파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형, 지금 뭐 하는…….”

“시헌아. 박시헌.”

“…….”

“시헌아, 아냐. 그게 아니라…….”

서진이 시헌의 이름을 불렀으나 시헌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학원 숙제를 두고 와 집에 들렀다. 오피스텔 근처에 주차된 기욱의 차가 살짝 의아하긴 했지만, 평소처럼 잠깐 집에 들른 것으로 생각했다. 소파에 있는 서진은 엉망이 된 옷차림을 재빨리 바로 했다. 시헌은 기욱을 가만히 바라봤다.

기욱의 표정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왜 기욱과 서진이 이 시간에 있는 거지?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시헌은 기욱이 변명을 하길 원했다. 하다못해 서진에게 떨어져 별일 아니라는 듯 굴어도 괜찮았다. 사고라고, 오해라고. 기욱을 보는 시헌이 주먹을 쥐었다. 기욱은 끝내 서진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욱을 반쯤 밀어낸 서진이 시헌에게 다가가려 하자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시헌이 도망치듯 오피스텔을 나갔다. 기욱에게 붙잡힌 서진의 팔이 툭, 하고 힘없이 쳐졌다. 시헌이 나간 것을 확인한 기욱은 서진의 목 근처에 다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어지는 기욱의 행동에 서진은 다시 악,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아직 낫지 않은 상처 위로 기욱의 이빨이 닿았다. 목 근처로 피가 흘러내리는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기욱은 그런 서진의 상처를 무슨 꿀이라도 되는 양 핥았다.

동생이잖아. 조금은 신경 써 줄 수도 있는 거잖아. 기욱의 무심함과 이해할 수 없는 시헌에 대한 사고에 서진은 극도의 불쾌함을 느꼈다. 서진은 비교적 자유로운 손으로 기욱의 얼굴을 향해 손을 들었다.

서진의 손동작을 눈치챈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 올렸다. 서진의 눈가로 눈물이 흘렀다. 오피스텔을 뛰쳐나가는 시헌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서진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시헌이 나간 문 쪽으로 계속 몸을 일으켰다.

“시헌이, 시헌이한테 말해야……. 오해, 오해라고 말해야…….”

“시헌이야?”

“무슨, 말을…….”

“시헌이가 그랬냐고.”

기욱의 손톱이 상처가 난 서진의 목 근처를 눌렀다. 짜릿한 느낌에 서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기욱의 다른 손이 서진의 머리 뒤를 가볍게 쓸어 넘겼다. 서진은 날카로운 기욱의 시선에 애써 눈을 돌렸다. 눈을 마주하면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관계없잖아요.”

서진은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시헌에게 사정을 설명할 수 없는 지금, 서진은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기욱과의 관계를 계약서처럼 종이에 적진 않았지만, 서진은 기욱이 서윤과 있어 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런 관계를 뭐라 해야 할까? 몸뿐인 관계? 서진은 기욱이 자신을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고 느꼈다.

물론, 직접적인 섹스를 한 적은 없지만. 그러니 시헌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해도, 기욱이 그렇게 오해를 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기욱이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온 시헌을 무시한 이유도 기욱이 애당초 시헌을 신경 쓰고 있지 않기 때문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서진의 착각이었다. 서진의 몸을 누른 채 주머니를 뒤진 기욱이 휴대폰을 꺼냈다. 몸을 누르는 기욱의 손이 제법 무거웠다. 몸 위로 내려오는 기욱의 목소리가 한층 더 싸늘하게 들렸다.

“관계?”

“…….”

“그럼 내가 여기서 서윤이랑 헤어진다 해도 관계없겠네.”

“무, 무슨 말을…!!”

서윤이라는 이름에 다시 서진의 심장 박동수가 급격하게 빨라졌다. 뭘 하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휴대폰이 서윤에게 전화를 걸기 위함이라는 걸 눈치챈 순간 온몸이 떨렸다. 휴대폰을 만지는 기욱의 모습에 서진의 언성이 점점 올라갔다.

“하지, 하지 마세요. 제발.”

“왜 그래? 결혼한 것도 아닌데.”

비아냥대는 기욱의 말투는 상관없다는 서진의 말을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서진이 떨리는 손을 들어 기욱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서진의 머릿속으로 선생님과 통화를 마친 후 서윤이 울었다는 기욱의 말이 생각났다. 안 그래도 힘들어하는 서윤을 더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욱이 서진의 몸을 순식간에 돌렸다. 몸이 잠깐 휘청이더니 기욱의 위로 올라탔다. 기욱에게 매달릴 수 없는 서진이 몸을 숙여 기욱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빼앗으려 했다. 기욱의 손에 꽉 쥔 휴대폰은 서진이 빼앗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자, 잘못했으니까. 제가 다 잘못했으니까…….”

“…….”

“누나한테 그러지 마세요.”

서진의 목소리에 기욱이 입가를 살짝 올렸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기욱이 서진의 허리를 바르게 세운 뒤 휴대폰을 소파 옆 유리 테이블 위로 던졌다. 기욱의 손에서 멀어진 휴대폰에 서진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몸 밑으로 기욱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벗어.”

“지금, 그게…….”

“다 말고 위에만 벗으라고. 왜 그래? 이상한 짓 하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 꼬우면 관둬.”

기욱의 손이 다시 유리 테이블 위로 닿으려 했다. 서진이 그런 기욱의 팔을 붙잡았다. 서진은 대체 어디서부터 기욱의 심기가 뒤틀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욱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 할게요. 할 테니까…… 그만해요.”

서진이 고개를 숙이자 기욱이 팔에 힘을 풀었다. 기욱의 팔이 소파 아래로 내려갔다. 기욱을 밑으로 내려다보던 서진이 셔츠를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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