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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1 끈질긴 오해 (23/83)

Chapter. 21 끈질긴 오해

번화가의 독서실 대신 결국 집 근처의 평범한 독서실을 택한 서진은 계속해서 울려 대는 전화에 진절머리가 날 것 같았다. 전화의 주인은 누구라고 할 것도 없었다. 독서실이라고 답장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것은 전화를 받으라는 문자뿐이었다. 주변 눈치가 보였던 서진은 마지못해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독서실 밖 벤치에 몸을 기댄 서진의 언성이 올라갔다.

― 일방적으로 그러는 게 어디 있…!!

전화가 끊겼다.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한동안 이어지던 이상한 전화가 오지 않더니 이번엔 집이라며 당장 집에 오라고 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서진은 한창 공부 중이던 책상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서진의 손이 마지못해 책상 위 책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독서실을 나와 기욱의 오피스텔 근처로 오자 기욱의 외제차가 눈에 들어왔다.

젠장, 평생 병원에 있으면 좋을 텐데. 서진은 그나마도 기욱이 독서실까지 데리러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해야 했다. 오피스텔 유리문 앞에 선 서진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주말 낮, 서진이 알기로 시헌은 주말의 대부분을 학원과 독서실에서 보냈다. 설마 없겠지. 서진은 걱정스러운 기분을 안고 유리문 안으로 들어갔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 비밀번호 바꿨으면 말 좀 해 줘.

― 미안, 깜박했어.

시헌이 기욱에게 들은 새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 전화를 끊었다. 시헌과 은소가 문을 열고 들어감과 동시에 위층에 있던 기욱이 내려왔다. 기욱이 집에 있을 줄 몰랐던 시헌이 살짝 뺨을 긁적였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열어 주지. 기욱은 늘어진 셔츠의 쇄골 사이를 긁적였다. 자다 일어났거나 병원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은소는 기욱을 향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은소를 본 기욱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시헌의 형은 어딘가 불편하다. 중학교 시절 현정이 흘리듯이 했던 영문 모를 말을 은소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소가 신발을 벗은 뒤 현관 옆 신발장처럼 생긴 곳의 문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본 시헌이 반대편 선반을 손가락질했다.

“거기 신발장 아냐.”

“아, 미안.”

“빨리 들어와.”

시헌이 등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시헌이 손가락질한 곳의 문을 열자 신발장이 나타났다. 신발을 넣은 은소는 시헌의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시헌이 신발장이 아니라고 말한 곳에는 낯선 신발이 있었다. 시헌의 재촉과 기욱의 시선을 눈치챈 은소는 도망치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공부하겠다고 만났지만 정작 두 사람은 책을 펴 놓은 뒤 별다른 진전 없이 떠들었다. 시헌의 침대에 앉은 은소는 의자에 앉아 몸을 돌린 시헌을 향해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은소는 곧 있을 정기 검진에 관해 얘기했다. 안 그래도 마지막 검진 때 결과가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음 주쯤에 병원에 검사받으러 갈 것 같아.”

“너도 고생이 많구나.”

“뭐, 그렇지.”

“혹시 무슨 일 있을 것 같으면 아빠한테 말해 줄게.”

“하하, 고마워.”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니 어느새 주말 학원을 갈 시간이 됐다. 주말에는 서로 다른 학원을 가기 때문에 헤어져야 했다.

시헌과 역 근처에서 헤어진 은소는 뒤늦게 시헌의 집에 책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역으로 나온 은소가 시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헌은 이미 지하철을 타고 간 모양이었다.

― 형한테 연락할게.

― 알았어. 고마워.

전화를 끊은 은소는 서둘러 기욱의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은소가 벨을 누르려고 문 앞에 섰다. 막 벨을 누르려던 찰나 안쪽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집에 간다고 했잖아요! 서진의 목소리였다. 은소가 설마 하는 생각에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계단 근처에서 실랑이를 하는 기욱과 서진이 있었다. 이번만큼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서진이 은소를 향해 변명을 늘어놓았다.

“잠깐, 은소야 그게 아니라…… 으읍!”

기욱이 그런 서진의 얼굴을 돌린 채 입을 막았다. 발악하는 서진을 안은 기욱이 문이 열린 시헌의 방을 손가락질했다. 은소는 고개를 숙인 뒤 재빨리 시헌의 방으로 들어가 방 안에 있는 문제집을 가져왔다.

문제집을 품 안에 안은 은소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기욱의 오피스텔을 나왔다. 오피스텔 계단에 선 은소는 닫혀 있는 문을 힐끗거렸다. 서진과 기욱의 행동이 이제 와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은소는 한 가지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서진은 언제부터 오피스텔 안에 있었던 거지?

* * *

“젠장.”

텅 빈 신경외과 의국 내부를 둘러본 기욱은 머리가 아팠다. 엉망이 된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책에 이마를 반쯤 기댔다. 반쯤 열린 의국 문틈 사이로 환자며 간호사, 몇몇 의사들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때마침 지나가는 밥 냄새에 기욱은 죽을 맛이었다. 침침한 눈을 비비며 컴퓨터에 집중해 보지만 쉽지 않았다. 기욱은 다리를 꼬고 머리를 긁으며 자신에게 일을 시키고 간 한 선배를 씹었다.

아침에 심부름한 인턴이 사 온 커피를 밥 대신 마신 기욱은 책 밑에 깔린 차트를 빼냈다. 너무 강하게 빼낸 탓인지 차트에 끼워진 서류들이 바닥으로 흩날렸다. 순식간에 엉망이 된―안 그래도 엉망이지만―바닥을 본 기욱은 심각한 자괴감에 빠졌다. 기욱은 마지못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줍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 여기서 뭐 하나?”

소리의 정체가 교수님이라는 걸 눈치챈 기욱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기욱의 발밑 시야로 교수님을 제외한 몇몇 의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욱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교수님의 시선이 기욱이 있던 컴퓨터와 엉망이 된 책상을 보고 있었다. 교수님의 옆으로 한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우민과 기욱을 번갈아 보던 교수님이 팔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일을 시킨 우민의 눈치를 본 기욱은 교수님의 침묵에 대답을 안 하는 것도 곤란할 것 같았다.

“한영수 환자 *EDH OP, *POD 2일 차 차트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EDH OP[epidural hematoma operation] : 경막외혈종 수술

*POD[postoperative date] : 수술 후 며칠째

“한영수 환자 주치의는 자네가 아니잖아.”

“그게 저…….”

교수님의 시선이 옆에 있던 한 선배에게 닿았다. 우민이 기욱에게 이런저런 일을 떠넘기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아무리 교수라 해도 그런 자잘한 간섭까지 하기엔 체면이 있었다. 보다 못한 교수님이 한 선배에게 적당히 하라며 언질을 줬다.

교수님의 말에 한 선배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은 자신의 앞에서 교수님에게 잔소리를 듣는 한 선배를 보는 것이 마냥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저렇게 잔소리를 하고 난 후면 그 짜증을 감당하는 것은 전부 기욱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교수님이 돌아가기 무섭게 의국 내로 한 선배의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본 한 선배가 팔짱을 끼더니 마지못해 말했다.

“가서 밥 먹고 와.”

고개를 숙인 기욱은 재빨리 의국을 빠져나와 비상계단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 새벽부터 점심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인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기욱은 홀로 병원 구내식당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식당은 병원 사람들과 외부 사람들로 인해 빽빽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무엇보다 요 몇 주간 실습 기간이라 식당을 가득 메운 실습생들에 의해 평소보다 배는 혼잡했다. 간신히 주문한 돈가스 정식을 식판에 든 기욱은 때마침 단체로 일어나 생긴 빈자리에 앉았다. 정신없이 밥을 먹는 기욱의 옆으로 낯이 익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진료까지 시간이 남았던 은소는 엄마와 함께 병원 구내식당을 찾았다. 식사 중 엄마가 잠시 통화를 하러 간 사이 한꺼번에 빠진 테이블에 의사 한 명이 앉았다. 엉망인 옷차림에 가운도 걸치지 않은 그를 은소는 처음엔 못 알아볼 뻔했다.

밥을 먹는 내내 얼굴을 아는 몇몇 선배 의사와 교수님들을 향해 중간중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기욱을 보며, 은소는 아무리 잘난 기욱이라 해도 병원에선 밥 하나 눈치를 보고 먹어야 하는 전공의 신세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은소는 기욱의 가슴에 걸린 신분증을 힐끗댔다. J대학교 신경외과 전공의 박기욱. 은소는 몇 번이나 속으로 기욱의 이름을 생각했다.

오피스텔에서 보았던 그 장면이 은소는 며칠이 지난 지금도 쉽게 잊히지 않았다. 은소는 기욱이 시헌과 자신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서진을 집에 들였다는 것 외에는 생각할 길이 없었다. 이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은소는 근처에 있는 물을 마시며 기욱의 눈치를 살폈다.

“시헌이한테 말할 거예요.”

은소의 말에 얼마 남지 않은 돈가스를 입에 구겨 넣던 기욱의 손이 멈췄다. 대신 야채를 집어 먹던 기욱이 주머니를 뒤졌다. 다행히 한 선배는 아니었다. 답장을 보낸 기욱은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호출기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옆으로 느껴지는 은소의 따가운 시선에 기욱은 가볍게 혀를 찼다.

“말해.”

“그걸 말이라고…!”

“뭐, 어차피 못 할 테지만.”

기욱의 말에 은소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감 넘치는 기욱의 태도가 은소는 허세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어쩌면 은소는 기욱이 시헌이 서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짓을 한다고 느꼈다. 그 전에 정말 기욱이랑 서진이랑 좋아하는 거면? 그럼 시헌은 어떻게 되는 거지? 기욱은 할 말을 잃은 은소를 보며 남은 밥과 반찬들을 입에 넣었다.

먼저 앉은 건 은소였지만, 기욱은 이미 식사를 끝낸 후였다. 아니나 다를까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호출이 울렸다. 한숨을 쉰 기욱은 호출기와 식판을 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대로는 안 된다. 오기가 생긴 은소는 의자 밑으로 주먹을 쥐었다.

“말, 할 거예요.”

“고백할 용기도 없으면서.”

어깨를 가볍게 흔든 기욱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배식구가 있는 쪽으로 갔다. 은소야 미안. 엄마 기다렸지? 멀리서 전화를 마치고 온 엄마가 은소의 옆에 앉았다. 괜찮아. 은소는 엄마를 본 뒤 다시 배식구 쪽을 바라봤으나 기욱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 *

식사를 마친 서진은 볼일이 있다는 인훈과 헤어진 뒤 홀로 교실을 향해 걸었다. 인훈과 있을 때는 좀 덜했지만, 소문이 퍼지고 난 이후 서진은 학생들이 많은 복도를 혼자 걷는 것이 불편했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 창가에 기대 떠들고 있던 몇몇 남학생들이 서진을 보며 큭큭댔다.

저들은 서진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손가락질을 하며 떠드는 모습을 서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낯선 남자가 왔더라, 그 사람이랑 키스했다더라, 중학교 때부터 원래 좀 이상했다. 한 번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무엇이 진실이고 사실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당사자를 제외한 소문은 서진에게 달리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불과 1분도 채 걸리지 않는 교실이 평소보다 두 배는 멀게 느껴졌다. 혹시 누군가 마법을 써 제자리걸음을 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교실 근처에 도착한 서진은 때마침 교실을 나오려던 남학생 한 명과 몸을 부딪쳤다.

덩치가 있었던 탓인지 남학생의 몸에 부딪힌 서진이 교실 밖 복도로 튕겨져 나왔다.

“야, 너 뭐냐.”

다른 반 남학생이었다. 평소 인연이 없던 낯선 남학생 무리에 서진은 인상을 구겼다. 얘 걔잖아. 게이. 남학생과 같이 교실에서 나온 친구 한 명이 큭큭대며 웃었다.

“아 진짜? 얘가 걔야?”

남학생들은 교실에 들어가지 못한 서진을 앞에 두고 대놓고 떠들었다. 차라리 뒤에서 말하는 척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남학생의 대화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복도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서진은 여전히 뒷문을 막고 있는 남학생을 두고 주먹을 쥐었다.

“근데 그 남자 재벌이라면서? 그 정도면 게이 해도 되지 않냐?”

“기둥서방이나 뭐 그런 거냐 그럼?”

“세컨드 몰라 세컨드?”

“푸웁, 하하하!”

근처에 있던 남학생을 포함한 다른 학생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멀리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은소가 눈에 들어왔다. 서진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교실로 들어가야 하나? 문득 서진은 왜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하나 이해할 수 없었다.

소문처럼 기욱과 직접적인 성관계를 한 적은 없었다. 아이들은 기욱이 무슨 재벌 3세니 4세니 하고 떠들었으나 오랜 의사 집안이라 집안에 돈이 좀 많은 편일 뿐이지 기욱 자체는 다른 의사들과 다를 게 없었다. 소문이란 이렇듯 늘 과장되는 것이었다. 서진은 마치 뿌연 안개 속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옳다고 믿어 왔던 길을 걸었던 것뿐인데, 정신을 차려 보니 안개 한가운데 서 여기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돌아가는 길조차 알 수 없으며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몸밖에 없다. 왔던 길이라 추정되는 곳으로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는 장담이 들지 않았다.

“야, 뭔가 말해 봐. 벙어리냐?”

교실에서 나온 남학생 한 명이 서진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남학생에 의해 뒤로 밀린 서진은 주먹을 쥐었다. 서진의 모습을 본 남학생이 불편한 모양인지 인상을 구겼다.

“야, 뭘 야리냐? 뭘 꼬나보…!”

서진의 주먹이 정확히 남학생의 얼굴을 가격했다. 체격 차이인지, 아니면 서진의 힘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은 건지 남학생은 인상을 찌푸리며 뒷걸음질 치는 것이 전부였다. 욕설을 지껄인 남학생과 몇몇 친구들이 서진에게 덤벼들었다. 순식간에 조용했던 복도가 난장판이 되었다. 먼저 때린 건 서진이었지만, 순식간에 일방적으로 맞는 구조가 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여학생 몇 명이 교무실에 있는 선생님을 모셔 왔다. 남학생을 때리는 짧은 순간 서진의 머릿속엔 중학교 시절의 시헌이, 독서실 앞에서 남학생 여럿을 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반격하는 시헌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자 선생님이 그 정도만 하라며 소리를 질렀지만, 사태는 쉽게 수습이 되지 않았다. 결국, 다른 건장한 남학생과 아래층에서 밥을 먹고 있던 남자 선생님들이 올라와 서진과 남학생들을 갈라놓았다.

야, 있잖아. 박시헌. 넌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어?

넘어지면서 바닥에 있던 소화전에 머리를 부딪친 모양인지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입가를 적셨다. 머리의 피가 아니라 입안에서 난 피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입에 닿는 비릿한 향은 기분이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남자 선생님에게 몸을 붙잡힌 서진은 저를 때린 남학생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진은 그저 누나―서윤이 행복하길 원했을 뿐이다. 기욱과 그런 게 뭐가 나쁜데. 아무것도 모른다. 손가락질하는 아이들은, 왜 그랬냐며 물어오는 선생님조차도 평생 상상할 수 없을 것이었다.

있잖아요, 선생님. 거긴 지옥이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지옥을 나온 사람에게 천국은 없었어요.

학생들을 보는 서진의 시야가 흐릿했다. 피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이 없어서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친척들은, 사람들은 모든 게 서윤의 잘못이라며 손가락질했다. 그날 그 일에 대해서 그 누구도 서윤의 잘못이 아니라며 위로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서진에게 서윤은 빛이고 세상 전부였다. 서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서진은 입술을 뗐다. 이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분명한 건 있었다.

나는,

“나는 잘못한 거 없어.”

택시를 타고 내린 서진은 낯선 호텔 로비를 올려다봤다. J대 병원과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제법 큰 호텔이었다. 택시값을 계산한 뒤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로비 안쪽에 있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기욱이 몸을 일으켰다.

서진은 기욱의 앞에 앉았다. 소파가 생각보다 큰 탓인지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꺼졌다. 오후의 훤히 트인 호텔 로비 창가, 누군가 올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으나 서진은 섣불리 먼저 말하려 들지 않았다. 서진이 끝까지 말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눈치챈 기욱은 테이블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순식간에 비웠다. 기욱의 손끝이 건너편에 있는 카페 계산대에 닿았다.

“뭐 마실래? 여기 맛있어.”

“그냥 저……. 시원한 거로요.”

매번 기욱이 뭔가를 제안할 때마다 거절하는 것도 일이었다. 마지못해 수락한 서진의 모습에 기욱은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멋대로 주문을 했다. 기욱이 가져온 커피는 생각보다 맛이 있었다. 사실 목이 말랐기에 뭐든 괜찮았지만.

“먹을 만 해?”

이상할 정도로 눈을 반짝이는 기욱에 서진은 무슨 대답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으나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서진은 빨대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안쪽에 있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캐리어를 끈 외국 여성 두 명이 들어왔다. 기욱의 층보다 한 층 아래였다. 저들끼리 뭐라 떠들었지만, 영어는 아닌 탓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기욱이 서진의 손을 붙잡았다. 불쾌함과 어색함이 동시에 다가왔지만, 서진은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호텔 문을 열고 들어가기 무섭게 기욱은 서진을 안았다. 서진은 기욱이 평소보다 초조해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최근의 기욱은 더 그랬다. 기욱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서진을 방 현관 쪽으로 몰아붙였다. 이 자세가 불편해지기 시작한 서진이 기욱의 몸을 밀어냈다. 기욱의 몸은 장승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욱의 손이 자연스럽게 서진의 셔츠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안았다. 목 끝에서부터 핥아 올리던 기욱의 입술이 서진의 입안을 천천히 헤집었다.

“읏, 으읏.”

서진은 기욱과의 키스보다 입안 기욱의 혀가 쓸고 간 자리가 쓰라렸다. 며칠 전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서윤은 넘어졌다는 서진의 말을 믿어 줬다.

믿고 할 것도 없이 이미 병원에 들러 처지를 받은 터라 달리 방법이 없었다. 상처를 소독해 주겠다고 하는 서윤을 말리는 것 또한 일이었다. 지금이야 상처가 옅어졌으니 상관이 없었다.

눈치를 채면 어쩌나 걱정했던 서진의 우려와 달리 아직 기욱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것치고는 유독 쓰라린 부분만 핥아 대는 기욱이 서진은 영 못 미더웠다. 기욱과의 키스는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사정하고 난 후와 맞먹는 나른함이 한꺼번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특히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안 좋을 때면 지금처럼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기욱은 반쯤 쓰러지려 하는 서진의 몸을 가볍게 붙잡았다.

기욱에게 안긴 서진은 신발을 벗고 무슨 정신으로 침대에 누웠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욱은 침대에 누워 팔을 이마에 올리고 있는 서진을 내려다보며 하늘색 셔츠의 소매를 걷었다. 얼마 가지 않아 침대가 푹 꺼지는 느낌과 함께 기욱이 서진의 위로 올라왔다.

기욱의 손이 다시 옷 안으로 들어왔다. 허리 근처에서 맴돌며 꾸물거리는 기욱의 커다란 손의 느낌은 생각 이상으로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기욱은 다른 손으로 서진의 턱을 들어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 모습에 서진은 못 본 척 눈을 돌렸다. 기욱의 엄지손이 서진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키스한 것과 똑같이 기욱의 엄지가 서진의 입안에서 움직였다. 읏. 어느 지점을 닿자 서진이 인상을 구겼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은 곳이었다. 괜찮은 척하려 했던 서진도 그 순간만큼은 방법이 없었다.

기욱은 서진의 입안에서 빼낸 손가락을 혀끝으로 핥았다. 혀끝에 닿는 느낌이 어딘가 비릿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기욱은 최근 들어 저를 이상하게 만든 서진에 대해 한참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몇 번이고 서진의 외모며 몸 이곳저곳을 살펴도 또래보다 조금 팔다리가 가는 것이 전부였다. 서진은 평범한 고등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서진이 기욱은 요즘 눈에 거슬렸다.

서진이 있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없으면 없는 만큼 생각이 났다. 그럴 때면 다시 병원 일에 집중하지만, 정신을 차리거나 일이 조금만 한가해지면 서진의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많은 여자와 남자들을 만나 왔던 기욱이지만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원했던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질 나쁜 호기심을 포함한 장난이었는지도 몰랐다.

서진에게 한 행동이 제정신이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질리는 것이 빠른 만큼 금방 질릴 거라 생각한 탓도 있었다. 어째서인지 기욱은 서진에 대해 그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질리기는커녕 더욱더 서진을 원했다. 손가락이며 발가락 마디 하나하나, 눈을 돌리는 시선 하나까지 전부 가지고 싶었다. 기욱은 최근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느끼고 있었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목을 쥐었다. 서진은 여전히 기욱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었다. 서진의 시선이 닿는 침대 옆 스탠드 전등을 본 기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욱의 엄지가 서진의 목 안쪽을 눌렀다. 동시에 숨이 반쯤 막혀 온 서진이 놀라 기욱의 팔을 붙잡았다.

“뭐, 뭐 하…!”

기욱의 행동이 너무 갑작스러운 데다 숨이 막힌 서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기욱은 이런 짓을 해야만 저를 보는 서진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이었다. 기욱이 손에 있는 힘을 풀었다. 동시에 서진이 기침을 했다.

“당신 미친 거…… 으읍!”

손을 조금 더 올린 기욱이 서진의 입을 막았다. 서진이 숨이 막힌다며 발악을 했으나 기욱은 사람이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았다. 서진이 질식사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기욱은 강제로 서진의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정확히는 서진의 이마에 난 상처를 보기 위해서였다. 기욱은 서진의 입을 막은 손을 놓은 뒤, 턱을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사실은 로비에 들어온 순간부터 서진의 상태가 수상하다는 건 짐작을 했다. 서진이 기욱의 앞에 앉는 순간, 기욱은 며칠 전 서윤에게 흘리듯 한 서진이 넘어졌다는 말에 대해 생각했다. 넘어진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저건 단순하게 넘어진 상처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넘어져서 입안이 터진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어떤 새끼야.”

“넘어져서 그런 거예요.”

기욱의 반응에 서진은 그럴 줄 알았다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다 나을 때까지는 기욱을 안 보려고 했는데, 무조건 나오라는 기욱의 말을 거절하기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진은 제가 해 놓고도 너무 뻔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강서진, 나 의사야.”

비록 밤낮없이 일하고, 잠이며 밥 먹는 것도 선배며 교수들의 눈치를 보고 제대로 된 수술 집도도 몇 번 안 해 본 2년 차 전공의 신세지만 그래도 엄연한 의사였다. 기욱의 말에 서진은 한동안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서진은 기욱이라면 자신이 간 병원도 찾아낼 것 같았다. 서진이 기욱의 눈치를 살폈다.

“싸웠어요. 친구랑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요.”

“그게 다야?”

“그럼 달리 뭐가 있는데요?”

서진이 신경질적으로 기욱의 손을 쳐 냈다. 기욱이 그런 서진의 손을 잡아 위로 올렸다. 후우, 한숨을 쉰 기욱은 아직 감지 못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서진의 목덜미를 핥아 올렸다. 기욱이 눈을 살짝 위로 떴다.

“다음부터 조심해.”

“읏, 알았어요.”

* * *

3교시 쉬는 시간이 되기 무섭게 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이후 서진의 소문은 더욱 빠르고 과장되게 퍼졌다. 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한 서진은 걸음을 빨리해 은소의 반으로 들어갔다. 서진은 은소의 반 아이들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중간 자리에 앉아 친구들과 떠들고 있는 은소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서진의 방문에 당황한 은소가 친구들과 서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은소의 옆에 있던 친구 몇 명이 서진을 경계하는 듯 인상을 구겼다. 서진은 남학생들을 슬쩍 보더니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은소의 책상 위로 팔을 올렸다.

“기은소, 너 나랑 얘기 좀 해.”

“무슨 얘긴데?”

은소의 물음에 서진이 근처에 있던 은소의 친구들을 살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얘기할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서진은 은소가 알면서 일부러 그러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가서 하자.”

“왜?”

“나가자고.”

“야, 뭔데 너 은소한테 나와라 마라 하는…….”

“놔라.”

서진이 은소의 옆에 있던 남학생의 손을 쳐 냈다. 지난번 싸움에서 비록 서진이 일방적으로 맞긴 했으나 다수의 남학생을 눈앞에 두고도 꿈적하지 않는 서진의 모습은 일반 학생들 사이에서도 제법 많은 얘기가 오고 갔다.

체격으로 봤을 땐 남학생이 훨씬 컸으나 남학생에게 서진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분위기가 험악해짐을 눈치챈 은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남학생이 같이 가자고 했으나 손을 내저었다. 서진은 옥상 계단 쪽으로 올라갔다. 커다란 옥상 문은 자물쇠로 잠겨 학생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너지? 애들한테 얘기하고 다닌 거.”

“뭘.”

“그날 공원에서……!!”

서진은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공원이 아니더라도 은소에게 기욱과 있는 모습을 보인 적이 한두 번이 아녔다. 결과적으로 끝맺지 못한 말이었으나 서진은 은소가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은소가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감정의 골은 이미 너무나 깊어진 지 오래였다. 중학교 때와 달리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은소는 서진이 아니더라도 홀로 설 수 있었다. 게다가 원래부터 은소가 의지하고 있었던 것은 시헌이지 서진이 아니었다.

“난 본 걸 말한 것뿐이야. 그리고 소문 내가 낸 거 아냐.”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처음 이야기가 나온 건 친구들 사이에서였다. 은소는 어차피 자신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한 번 퍼졌을 얘기라며 자신을 합리화했다. 무엇보다 서진에 대한 소문을 직접 퍼트린 건 학생들이지 은소가 아니었다. 은소는 서진이 따져야 할 대상이 잘못됐다고 느끼며 서진의 말을 잘랐다.

“둘이 그러는 거 알아?”

언젠가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주어도 없는 문장이었지만 은소의 한마디에 서진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시헌에게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은소가 그럴 줄 알았다며 서진을 비웃었다. 시헌에게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기욱을 만나는 서진을 은소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은소는 이제는 서진에게 밀리고 싶지 않았다.

“나 시헌이 좋아해.”

“뭐, 라고…?”

은소의 말에 서진은 얼어붙은 사람처럼 꿈적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은소가 시헌에 대한 묘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은소 성격에 이렇게 직접 말을 꺼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은소의 시헌에 대한 감정은 서진의 생각 이상이었다.

중학교 시절의 은소라면 말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은소는 몇 번이고 말할 수 있었다. 시헌에 대한 감정은 결코 동경이니 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적어도 은소는 시헌이 이제는 불행해지지 않기를 원했다.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시헌이한테…….”

“말하지 마! 제발…. 시헌이는 안 돼.”

서진은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시헌에게만큼은 알려지고 싶지 않았다. 은소는 그런 서진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욱을 좋아하면 기욱과 계속 사귀면 될 일이었다. 시헌이 친구라서? 양심에 찔려서? 친구 형과 사귀는 주제에 양심이라고? 은소는 기가 막혔다.

“하, 강서진. 네가 할 소리야? 시헌이 형이랑 그런 네가 할 말이냐고!”

“시헌이랑 관계없어. 더 이상 안 만날 거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연락 끊었어. 그러니까……. 시헌이한테는 말하지 말아 줘.”

서진이 고개를 숙였다. 계단 밑으로 대화가 길어짐을 눈치챈 남학생들 몇 명이 기웃거렸다. 학원에서 시헌의 반응을 생각한 은소는 서진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은소라고 좋아서 시헌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은소 또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직 이후 있을 시헌의 반응을 감당할 자신이 나지 않았다.

“알았어. 정말로 시헌이랑 더 이상 연락 안 하는 거지?”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을 못 이기고 계단 밑에 있던 남학생 몇 명이 계단 위로 올라왔다. 은소의 친구들을 본 서진은 말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 틈 사이로 인훈이 튀어나왔다.

“강서진! 괜찮아?”

“너, 언제부터 있었어?”

“은소랑 올라갔다는데 걱정돼서……. 별일 없었지?”

서진은 소문이라는 건 참 무섭구나 싶었다. 계단 밑을 내려 볼 때 인훈을 못 본 것 같았는데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서진이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서진의 이마에 기욱이 새로 해 준 살색 밴드가 붙어 있었다. 서진이 남학생들과 싸운 사실은 이미 전교에 소문이 다 퍼진 상태였다.

“지난번엔 못 도와줘서 미안해.”

“됐어.”

“하하, 그보다 방과 후에 놀러 안 갈래? 응? 노래방 갈까?”

인훈이 서진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자연스럽게 달라붙었다. 서진은 유독 달라붙는 인훈을 귀찮다는 듯 밀어냈다. 여느 남학생처럼 시끄럽게 떠들며 복도를 걷는 서진과 인훈을 내려다본 은소는 낯선 인훈의 등장에 정체 모를 불쾌함이 들었다.

* * *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있던 서진은 주머니 속 진동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휴대폰을 살짝 열어 번호를 확인한 서진은 그럴 줄 알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기욱은 불러내는 상대가 고3이라는 건 알고 있는 건가 싶었다.

하긴, 그 정도 배려가 있는 사람이었으면 이 시간에 이렇게 막 전화를 하지도 않았겠지만. 모처럼의 주말 공부가 엉망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독서실을 나온 서진은 기욱의 전화를 받았다. 병원 근처 백화점이라고 했다.

뜬금없이 무슨 백화점이지? 서진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욱이 도무지 감당되지 않았다. 서진은 짐을 챙긴 뒤 택시를 타고 기욱이 말한 백화점에서 내렸다. 백화점을 두리번거리자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오는 기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진은 눈앞에 선 기욱의 차림에 혀를 내둘렀다.

얇은 코트 하나에 파란색 병원 진료복만 달랑 걸친 기욱의 모습은 누가 봐도 나 의사요 하고 티를 내고 있었다. 진료복 가슴에는 온갖 펜과 J대 병원 신분증이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욱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서진은 처음으로 기욱에게 다가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서진을 먼저 발견한 기욱이 서진에게 다가왔다.

어쩔 수 없이 기욱의 옆에 선 서진은 여전히 기욱의 옷을 위아래로 훑었다.

“옷이 왜 그래요?”

“바빠.”

전혀 답이 되지 않았다. 기욱은 병원복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운동화를 구겨 신고, 급하게 감고 나와 붕 뜬 머리를 긁적이며 근처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서진은 옷을 갈아입을 여유조차 없이 바쁜 사람이 왜 주말 아침부터 자신을 백화점으로 불러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병원에서 오래 일한 탓인지 아니면 정말 서두르고 있는 건지 기욱의 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순식간에 앞서가는 기욱을 보며 서진은 그동안 기욱이 얼마나 자신의 속도에 맞춰 줬는지 깨달았다. 기욱은 사람들 틈에 끼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서진의 몸이 무너질 것 같이 휘청거리며 기욱의 품 안에 반쯤 안겼다.

“조심해.”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의 차림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긴 했으나 그조차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한숨을 쉰 기욱이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앞서가는 걸음이 빠르긴 했으나 처음만큼은 아니었다. 서진은 기욱에게 이끌려 백화점 내부 매장을 돌았다. 기욱이 서진을 데리고 간 곳은 고급 학용품이니 가방들을 파는 가게였다.

가게에는 학용품 외에도 아기자기한 액세서리들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대부분 가격대가 나가는 것들뿐이었다. 미리 봐 둔 것이 있는 모양인지 기욱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기욱의 손에 들린 빨간색 플라스틱 바구니는 순식간에 이런저런 물건들로 가득 찼다. 앞선 여대생들의 귀걸이 계산이 끝나기 무섭게 들고 있던 바구니를 카운터 위로 올렸다.

알바생이 바코드를 찍을 때마다 계산대 앞 화면에 올라가는 금액이 예사롭지 않았다. 삑삑, 생각보다 계산이 길어진 기욱은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문자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56만 4천2백 원입니다. 알바생의 목소리가 들린 기욱이 휴대폰을 닫았다. 엉망인 잠바 안을 뒤지던 기욱은 한숨을 쉬며 코트 안쪽 진료복 주머니를 뒤졌다.

진료복 하의 안에서 영수증이며 카드로 가득한 가죽 지갑이 나왔다. 금액을 살짝 본 기욱은 별다른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을 마친 물건들은 옆에 있던 또 다른 알바생의 손에 의해 커다란 봉투에 담겼다. 서진은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기욱은 계산대 위에 놓인 봉투를 집어 서진의 품에 안겼다. 봉투가 컸기에 품에 안은 꼴이 된 서진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채로 기욱과 함께 가게로 나왔다.

짐꾼? 단순한 쇼핑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이상했다. 기욱이 다시 가자며 서진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기욱의 커다란 손은 서진의 팔목을 한 번에 낚아챘다. 붙잡힌 팔목 너머로 기욱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엉망이 된 진료복 차림으로 병원 밖을 나올 만큼 서두르고 있었다.

“잠시만.”

막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온 기욱이 서진의 손을 놓은 뒤 전화를 받았다. 말투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병원 관계자임이 틀림없었다. 네, 아뇨. 서진에게서 등을 돌린 채 전화를 받던 기욱이 이내 뒷목을 긁적였다.

―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 말을 끝으로 기욱이 전화를 끊었다. 서진을 본 기욱의 어깨가 살짝 늘어졌다. 긴장이 풀린 건가? 서진이 기욱을 올려다봤다. 한결 가벼워진 기욱이 쇼핑백을 안고 있는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통화 이후 기욱은 제법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서진은 조금 전 통화로 기욱이 교수님인지 하는 사람에게 자유 시간을 받았음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기욱과 백화점 지하에 있는 몇몇 브랜드 가게를 더 돌 무렵에야 서진은 기욱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얼마 되지 않은 신상 가방이라는 직원의 말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결제를 하려는 기욱의 모습에 서진은 학을 뗐다. 고가의 학용품, 가방, 기욱의 발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맞지 않을 것 같은 신발, 서진은 단순한 짐꾼을 시키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서진은 주머니 속 카드를 내밀려 하는 기욱의 팔을 붙잡았다. 알바생이 의아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서진이 하지 말라며 손을 저었으나 기욱은 서진의 손을 살짝 옆으로 밀어낸 뒤 알바생에게 카드를 건넸다. 기욱이 계산되어 카운터 위로 올라간 가방을 보며 서진을 향해 턱을 까닥였다. 가져가라는 뜻이었으나 서진은 쉽게 손을 뻗을 수 없었다.

“필요 없어요.”

“고집부리지 마.”

한숨을 쉰 기욱이 가방을 다시 서진의 품 안으로 안겼다. 서진은 바닥으로 떨어질 뻔한 가방을 간신히 주워 들었다. 서진은 양손으로 쇼핑백 안에 가득 담긴 물건과 기욱에게 받은 아직 뜯지 않은 가방을 만지작거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진은 기욱의 옆에 붙었다.

“안 받는다구요.”

“그럼 버려.”

“제정신이에요?”

“난 분명히 줬어. 어떻게 하든 네 마음이지.”

서진은 기욱과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백화점 지하를 걷는 내내 서진은 불편한 기분에 인상을 찌푸렸다. 서진의 불편함을 느낀 기욱이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

“수능, 몇 달 안 남았잖아.”

“그걸 아는 사람이 이 시간에 불러요?”

“말대답하라고 꺼낸 얘기 아냐.”

“그럼 무슨 얘긴데요.”

“선물.”

“…….”

“달리 해 줄 수 있는 게 없잖아. 시험을 대신 봐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서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선물이라는 건 중간부터 짐작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불러 대는 기욱의 입에서 고3이니 수능이니 하는 단어가 나올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도 신경은 쓰고 있는 것 같으니 퍽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도 알아요?”

“말했어. 안 그래도 가방 얘기하더라.”

가게에 들어갈 때부터 거침이 없었던 기욱은 유독 가방에만 신경을 많이 썼다. 가방 때문에 돌아다닌 매장만 세 곳이 넘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집착이 아닐 수 없었다. 슬슬 점심시간이 다 된 서진은 배가 고팠다.

기욱에게 시달린 것도 그렇고, 아침이라고는 독서실에 오기 전 마신 간단한 유우가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백화점 지하 식당가는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기욱의 뒤를 쫓던 서진이 지나가던 사람들과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고개를 든 서진은 자신들과 부딪힌 남학생에 할 말을 잃었다. 사복을 입어 순간 못 알아볼 뻔했지만 같은 학교 아이들이었다. 주말을 겸해 백화점으로 놀러 나온 것 같았다. 발밑으로 쇼핑백에서 굴러 나온 필통이 떨어졌다. 멍하니 서 있는 서진을 본 기욱이 한숨을 쉬며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뭐라 할 틈도 없이 기욱 쪽으로 서진의 몸이 기울었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기욱은 서진과 비슷한 또래 남학생들을 위아래로 훑었다. 서진이 바닥에 떨어진 필통을 주우려 하자 기욱이 서진의 손을 살짝 밀어낸 뒤 몸을 숙여 필통을 집어 들었다. 포장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낸 뒤 서진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챙기고 등을 돌렸다.

“씨발, 대박.”

“쟤 강서진 아님?”

앞서가는 기욱을 쫓는 서진은 계속해서 뒤를 힐끗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학생들의 대화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음에 의해 묻혔다. 찝찝한 기분이 들었으나 저와 싸운 남학생들에게 일일이 사정을 설명할 수 없었던 서진은 어쩔 수 없이 기욱을 따라갔다.

밥을 먹으러 올라간 곳은 지하의 식당가가 아닌 백화점 내부 고층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깔끔하게 디자인된 레스토랑은 벽면이 전부 유리로 되어 있어 내부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바깥벽에 배치된 의자에는 대기하는 손님들이 여럿 앉아 있었고, 입구 쪽에는 대기 번호가 적힌 알림판이 떠 있었다. 대기 번호를 볼 때 들어가려면 최소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서진은 굳이 이곳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당연히 다른 곳을 갈 줄 알았던 서진의 예상과 달리 기욱은 아무렇지 않게 레스토랑 입구로 다가갔다. 기욱은 멍하니 서 있는 서진을 두고 알바생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스토랑 안쪽에서 매니저가 뛰어오더니 대기 번호를 무시하고 안쪽으로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입구 앞에 선 기욱은 손가락을 까닥였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눈치가 보였지만, 이미 안으로 들어간 기욱에 서진 또한 레스토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욱과 서진은 레스토랑 안쪽의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에 앉았다. 매니저가 안내해 준 자리에는 이미 예약석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서진은 알바생이 가져다준 얼음이 담긴 물을 마시며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판을 살폈다. 큼지막한 영어와 그 밑으로 적혀 있는 한글,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테이크와 처음 보는 음식들뿐이었다.

기욱은 서진이 보고 있던 메뉴판을 빼앗아 근처에 있는 알바생에게 넘긴 뒤 익숙하게 주문을 했다. 서진이 잘 모른다는 걸 알고 있는 기욱은 애써 서진에게 무엇을 먹고 싶어 하는지 물어 오지 않았다. 기욱의 배려는, 때때로 시헌을 생각나게 하였다. 시헌이 동생이니 시헌이 기욱을 닮았다는 편이 옳은 표현에 가까웠다.

처음 보는 먹어 보는 스테이크에 서진은 어떻게 칼질을 해야 할지조차 난감해하고 있었다. 멍하니 접시만 보고 있는 서진과 달리 기욱은 익숙하게 칼질을 해 나갔다. 기욱은 잘게 썬 고기 접시를 서진 쪽으로 내밀었다. 서진은 조용히 기욱이 준 접시를 몸 앞으로 잡아당겼다.

자존심이 좀 상하긴 했으나 기욱 앞에서 괜한 자존심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간의 만남으로 깨달았다. 무엇보다 기욱은 이런 일로 무시하거나 비웃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기욱의 성격이었고, 서진은 그런 기욱의 성격을 다행이라고 느꼈다.

기욱이 잘라 준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먹은 서진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침부터 백화점을 돌아다녔다고는 하나 병원복 차림의 기욱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었다.

“바쁘면서, 왜 나왔어요?”

“의대 간다며? 목표는?”

되려 들어온 질문에 서진은 한숨을 쉬었다. 기욱은 대답할 가치가 없는 말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기욱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알면 알수록 서진은 시헌과 닮은―사실은 시헌이 기욱을 닮았지만― 기욱에 위화감이 들었다. 의대를 간다는 사실은 서윤에게 들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서윤이 기욱과 행복하면 다행이긴 하지만, 서진은 최근 들어 생각 이상으로 가까워진 두 사람에 의해 사생활이 침해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의대에 대해 발각이 된 마당에, 이제는 뭘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H대요.”

“J대는?”

J대가 시헌의 집안과 큰 인연이 있는 곳이라는 걸 서진이 모를 리 없었다. 서윤이 속해 있는 병원이기도 하고. 재벌이라. 하긴, 아버지가 국내에서 2위를 달리는 대학병원의 병원장에 친척들이 주르륵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의사들이니 사실 배경만 놓고 본다면 기욱의 집은 반재벌이라 봐도 이상할 건 없었다.

모든 학생이 가고 싶어 하는 H대, 그중 H대 의과대학은 성적만 놓고 본다면 국내에선 올라갈 곳이 없는 학과였다. J대를 거론한 기욱은 은근 서진이 J대에 오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사실 지금 성적으로 H대를 갈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고, 서진도 J대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기욱에게 그 사실을 말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서진은 대신할 변명거리를 찾았다.

“누나가 H대 의대 가고 싶어 했어요.”

“누나…. 하, 마음대로 해라.”

서진이 서윤의 핑계를 대고 있다는 걸 눈치챈 기욱이 질린다며 말을 잘랐다. 어차피 H대를 목표로 하는 이상 차선책으로 J대를 생각하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어볼 것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기욱은 서진의 입에서 한 번 정도는 J대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서진이 입학하고, 예과를 졸업할 때쯤이면 임상강사 정도는 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나름의 계획도 세워 둔 상태였다. 기욱의 그런 기대와 달리 서진은 완고했고, 고집이 있었다. 기껏해야 고등학생 남학생을 상대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인지 기욱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기욱은 서진을 놓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기욱의 눈엔 툴툴대며 자존심을 세우는 것 또한 서진의 한 매력이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 갈 무렵 기욱은 의자 옆에 있던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름도 모르는 브랜드 로고가 대문짝만하게 적힌 쇼핑백 안에는 상자가 들어 있었다. 이미 받을 만큼 받은 서진은 기욱에게 뭔가를 받고 싶지 않았다. 서진은 쇼핑백을 기욱 쪽으로 내밀었다.

“내가 산 거 아냐.”

“그럼 누가 사요?”

“너네 누나. 너 생일 못 챙길 것 같다고 전해 달라 그러더라.”

그러고 보니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지. 원래부터 생일이라는 감각이 거의 없던 서진은 뒤늦게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기욱의 선물 공세도, 어쩌면 생일 선물의 한 종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서진은 만나자마자 정신없이 구는 기욱에게 신경 쓰느라 기욱의 손에 들려 있던 작은 쇼핑백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했던 자신을 탓했다. 서윤의 선물이라는 말에 쇼핑백 안에 담긴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시계가 들어 있었다. 서진은 초침이 움직이는 시계 화면을 만지작거렸다.

“이런 거……. 직접 줘도 되는데…….”

“쑥스럽다 그러더라.”

“…….”

“좋은 누나잖아.”

“나도 알아요.”

서진은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기욱에게 받은 많은 선물이 있었지만, 서진에겐 서윤의 시계만 한 것이 없었다.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가를 비비던 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갔다 올게요.”

적어도 기욱의 앞에선 울고 싶지 않았다. 기욱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진은 도망치듯 레스토랑 건너편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칸막이 화장실에 숨은 서진은 한동안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느 정도 감정이 정리된 서진은 칸막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을 간다 해 놓고 계속 자리를 비우면 기욱에게 의심을 살 것 같아 서둘러 화장실을 나왔다. 급하게 화장실 밖으로 나오던 서진은 때마침 안으로 들어온 남자와 다시 몸을 부딪쳤다. 충격으로 서진의 손에 들린 시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진은 몸을 숙여 서윤의 시계를 주웠다. 머리 위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 서진아! 너 여기서 뭐 해?”

인훈이였다. 주말이라 그런가? 유독 아는 사람들을 많이 마주치는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인훈이 당연하게 친구들이랑 놀러 왔을 거로 생각하고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냥 좀…….”

서진은 바닥에 떨어진 시계 액정의 물기를 소매로 닦았다. 그 모습을 본 인훈이 서진의 시계를 손가락질했다.

“시계 산 거야?”

“응.”

“그거 KU거지? 비쌀 텐데.”

인훈의 말에 서진이 손안에 있는 시계를 내려다봤다. 딱 봐도 비싸 보이긴 했지만, 한 번에 알아볼 정도면 비싼 것 이상으로 유명한 것 같았다. 원래부터 명품과 인연이 없는 서진은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은소와 서운해지고 난 뒤 친해진 인훈은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다. 서진은 얼마 되지 않은 인훈에게 괜한 거로 실망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누나가 생일 선물로 사 줬어.”

“누나랑 왔어?”

인훈의 질문에 서진은 나왔던 레스토랑 너머를 힐끗거렸다. 유리 벽 너머로 창가를 보고 있는 기욱의 모습이 보였다. 서진은 분위기에 휩쓸려 고개를 끄덕였다. 인훈이 그런 서진의 등을 툭, 하고 건드렸다.

“짜식, 생일 얼마 안 남았으면 말하지 그랬어. 그래서 생일이 언젠데?”

“다음 주?”

“생일 파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됐어. 그런 거 챙기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생일 파티 얘기를 꺼내는 인훈에 서진은 손을 저었다. 농담이 아니라 서진에게 생일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날이었다.

태어난 걸 축하하는 날이라고는 하나 서진에게 삶이란 축복할 만큼 거창한 의미가 있지 않았다. 낳아 준 부모가 외면한 자식이 태어남을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진이 허락할 수 있는 것은 누나인 서윤밖에 없었다. 생일 따위 부질없는 짓이었다.

“먼저 가 볼게.”

서진은 시계를 주머니에 넣었다. 인훈이 다음 주에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서진은 기욱이 기다리는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겨진 인훈은 유리 벽 너머 기욱의 앞에 앉은 서진을 보며 손톱을 깨물었다. 2인석 테이블을 한동안 바라봤으나, 서진과 기욱 사이에 여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누나가 아니잖아.”

기욱과 서윤에 관해 얘기하고 있던 서진은 어딘가 싸한 느낌에 건너편 유리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녜요.”

유리 벽 너머에는 낯선 사람들만 가득할 뿐이었다. 기분 탓이라 느낀 서진은 테이블 앞에 놓인 탄산 에이드를 마셨다.

* * *

막 학원을 나온 시헌은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들른 뒤 밖으로 나왔다. 곧 있으면 입시 기간이라 영화 학원과 일반 학원을 병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3월 초보다 성적이 크게 떨어지긴 했으나, 아직은 영화 학원 선생님이 말한 커트라인 수준을 간신히 유지하는 중이었다.

시헌은 집에 가서 숙제로 내준 영화를 보고 잘 생각을 하며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발신자를 확인했다. 기욱이었다. 병원에 있을 기욱이 왜 전화를 하는지 살짝 의아했으나, 기욱의 통화가 새삼스러울 이유는 없었다. 시헌이 전화를 받았다.

― 형, 왜?

― 박시헌, 너 뭐 했어?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굳은 기욱의 목소리에 시헌의 걸음이 멈췄다.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원서를 넣을 때쯤이면 각오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휴대폰을 다시 붙잡은 시헌이 천천히 지하철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그냥.

― 어디야.

― 가는 중이야.

― 본가?

― 아니, 오피스텔.

― 본가로 들어가. 당장.

기욱의 말에 시헌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본가라는 말 한마디에 시헌은 생각보다 일이 커졌음을 눈치챘다. 차라리 기욱이 먼저 알았더라면 좋을걸. 이대로 그냥 기욱의 오피스텔에 들어갈까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시헌의 발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본가로 향하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한 2층 전원주택은 신도시에서도 가장 비싼 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집으로 들어오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기욱의 오피스텔에서 지낸 시헌은 새로 이사한 집이 낯설기보다는 불편했다.

벨을 누르자 요란한 소리가 나며 철문이 열렸다. 작은 정원을 지나자 안쪽에서 운오가 나와 문을 열었다. 중학교 3학년인 운오의 키는 어느새 시헌과 비슷해져 있었다. 이젠 어린아이나 그저 그런 남동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편한 체육복을 입고 있는 운오는 교복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는 시헌을 위아래로 훑었다. 1층 안쪽에 부모님이 있는 방을 힐끗거린 운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뒤늦게 시헌이 왔다는 사실을 안 하연이 2층에서 내려왔다.

“형,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박운오, 방에 들어가.”

“네네.”

운오가 건성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 계단에 몸을 기댄 하연이 시헌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하연이 방 안으로 들어가 보라며 고개를 까닥였다. 가방을 내려놓은 시헌은 부모님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앉아 있는 아빠와 엄마의 모습에 시헌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헌을 본 엄마가 한숨을 쉬며 손에 들린 영수증을 내밀었다. 기욱의 신용카드 명세서였다. 시헌은 저 영수증이 어떻게 부모님의 손에 들어가게 됐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명세서에는 학원 이름이 그대로 찍혀 있었고, 엄마는 이미 학원 선생님과 통화를 마친 후라고 했다.

그런 엄마의 말에 시헌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최근 들어 평일에 학원 몇 개를 빠진다는 말을 학원 선생님에게서 듣기는 했지만, 엄마는 시헌이 알아서 할 거라고 믿었다. 엄마의 앙칼진 목소리가 방 안에 들렸다.

“너 도대체 뭐 하고 다니는 거니?”

“아무것도 안 했어.”

“얘가 진짜…!!”

침대에 앉아 있던 엄마가 몸을 일으켰다. 영화라니, 기욱과 하연을 보고도 생각이 있는 건지 싶었다. 엄마의 언성이 올라갈 것 같은 느낌에 아빠가 그 정도만 하라며 엄마를 말렸다. 다시 침대에 걸터앉은 엄마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보다 못한 아빠가 시헌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께 얘기 들었다.”

“…….”

“영화감독이니 뭐니 하고 싶다고 그랬다면서.”

“응.”

“재수해.”

생각보다 차분하게 이어진 대화는 아빠의 한마디로 시헌을 당황하게 하였다. 엄마가 앉아 있는 침대의 옆에는 얼마 전 시험을 본 모의고사 성적표가 있었다. 생각보다 점수가 좋진 않았지만, 적어도 재수를 할 만한 성적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물론, 부모님이 바라는 유명 의대에 지원할 성적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재수를 운운하기 전에 기회라도 줘 보는 것이 맞다 생각했다.

“싫어.”

“박시헌. 아빠 말 들어. 너 입학할 때 학교에서 이상한 소리 한 거 넘어간 게 그냥 그런 줄 알아? 하연이랑 기욱이 보면서도 몰라?”

이번엔 아빠의 언성이 올라갔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말리기보다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 너머로 하연이 팔짱을 끼며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헌은 아빠가 입학할 당시 학교 관계자들에게 돈을 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차라리 그대로 떨어져 서진과 같은 학교에 들어갔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까? 아니, 진학하라는 아빠의 말을 무시하고 일반 학교로 들어가야 했을지도 몰랐다. 과학고에 진학하면서 서진과 멀어졌고, 하루하루가 힘들어졌다. 학원을 가 공부를 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삶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의사가 뭔데. 대학이 뭔데 이렇게 힘들여야만 하는 걸까. 그래도 희망을 품고 다닌 영화 입시 학원은 시헌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부모님이 다니라는 학원을 당연하다는 듯 다녀 왔지만, 시헌은 단 한 번도 뭔가를 자발적으로 한 적이 없었다. 시헌은 영화 입시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짜증을 넘어서 이 모든 게 아빠와 집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헌은 주먹을 쥐었다.

“난 해결해 달라고 한 적 없어. 그리고 형은 형이고, 누난 누나지 나랑 무슨 상관인데.”

“박시헌.”

“재수 안 해. 싫어.”

“박시헌!!”

자리에서 일어난 아빠의 손이 시헌의 얼굴 위로 올라갔다. 허공으로 올라오는 아빠의 커다란 손에 시헌은 눈을 질끈 감았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얼굴이며 뺨 전체가 아려 왔다. 휘청거리지 않으려 했지만, 시헌의 몸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무너졌다. 아빠의 손찌검은 시헌이 각오했던 것보다 아프고, 또 그만큼 억울했다. 친구들과 싸우면서 맞는 것과는 차원이 달았다. 침대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엄마가 시헌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돌렸다.

“맞을 만했네.”

“재수해.”

“싫어. 싫다고!”

“박시헌!”

“그만! 그만해요!”

아빠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시헌을 강제로 잡아 일으켰다. 말릴 틈도 없이 이어지는 두 번째 손찌검에 이번엔 정말 악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보다 못한 하연이 끼어들었다.

엄마는 내버려 두라고 했으나, 하연은 지금 이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물론, 집안의 상황을 모른 채 비밀로 학원에 다닌 시헌도 잘못했지만 말이다. 하연이 바닥에 주저앉은 시헌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나가 있어.”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헌은 뺨 위로 손을 올린 뒤 방을 뛰어나갔다. 시헌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시헌은 가방을 챙길 틈도 없이 문 쪽으로 뛰어갔다.

때마침 기욱이 병원에서 급하게 돌아오는 중이었다. 시헌과 아빠의 싸움에 거실로 나온 운오가 오랜만에 보는 기욱을 반겼다. 운오의 눈에 시헌은 없었다.

“기욱이 형…!”

시헌은 현관에서 기욱과 몸을 부딪쳤다. 시헌의 뺨을 본 기욱이 손을 뻗었으나 시헌은 그런 기욱의 손을 내치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박시헌!”

정원 계단에 선 기욱이 몇 번이나 시헌을 불렀지만, 시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뛰어갔다. 운오에게 기욱이 왔다는 말을 들은 하연이 거실로 나왔다. 하연의 모습에 기욱이 마지못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 * *

무작정 집에서 나온 시헌은 어떻게 길을 걸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찬바람에 닿는 뺨이 아팠다. 눈물이 뺨에 올린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이었다. 아픈 건 괜찮다.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되니까. 죽는 것만 아니라면 상관은 없었다. 아픈 건 울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억울해할 일 또한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거지?

분명 아픈 건 얼굴일 텐데 온몸이 불에 덴 것 마냥 뜨거웠다. 다른 손으로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지만, 눈물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정수기의 수도꼭지가 강제로 올라간 것처럼 닦으면 닦을수록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가가 쓰라렸다. 그렇게 때릴 것까진 없잖아. 하다못해 얘기라도 들어 봐 줄 수 있는 거잖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온갖 생각들이 떠올랐다.

시헌은 정신없이 사람들 틈을 지나갔다. 본가를 나와 기욱의 오피스텔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지하철역으로 두 정거장 정도 걸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는 방법도 있었지만, 시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막차를 탈 생각도 없었다. 시헌은 무작정 오피스텔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새로 이사한 집은 한강을 건너야 했다. 사실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좀 걷고 싶었다. 시헌은 한강 다리 위에 섰다. 좁은 길로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고, 다른 한쪽으로는 차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차와 사람이 다니는 인도 사이에는 제대로 된 보호막이라고는 없었다. 옆으로는 커다란 한강의 물이 그대로 보였다.

사실 말이 물이지, 밤이라 잘 보이지 않는 데다 한강의 물은 멀리서 쏘아 올리는 불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했다. 빨간색 조명이 닿으면 빨간색, 노란색이 닿으면 빛에 반사되어 노란색 물처럼 보였다.

이 얼마나 지조 없는 짓일까. 그런데도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물밑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시헌의 눈가에서는 아직도 마르지 않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좁은 인도 건너편으로 술에 취한 남자 한 명이 급하게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남자와의 체격 탓인지 시헌은 남자에게 밀려 난간에 몸을 부딪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난간에 등을 부딪친 시헌은 인상을 구겼다.

동시에 몸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불길한 기분에 재빨리 커다란 난간에서 몸을 뗐다. 시헌의 등 뒤로는 한강의 물이 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차가 빠르게 시헌을 지나쳐 갔다. 주변을 둘러본 시헌은 뒤늦게 난간 한쪽에 보수 중이라 적힌 작은 현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판 밑에는 난간이 떨어져 추락할 수 있으니 몸을 기대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작게 적혀 있었다. 시헌은 빨간 글씨로 작게 적혀 있는 그 문구를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 옆으론 매직으로 적힌 것 같은 날짜가 있었다. 문득 오늘 날짜를 확인한 시헌은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한 달도 더 된 현판이었다. 아직도 난간이 흔들리는 걸 보면 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무엇 하나! 똑바로 된 것이 없다.

한강 대교의 난간도, 시헌 자신도 그랬다.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바로잡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 사고로 누구 하나 떨어져 죽은 후에야 고치지 않을까. 그럼 죽은 사람은 무슨 죄지? 왜 뭔가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누군가 희생해야만 하는 거지?

시헌은 난간 너머 한강의 물을 내려다봤다. 확 떨어져 버릴까. 떨어지기 전에 신고한다면 어떻게든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죽으면 조금 억울하긴 하겠지만, 부모님도 사람이라면 자신들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지 않을까.

그럼 한 번 정도는 시도해 볼 만한 도박일지도 몰랐다. 시헌은 정신을 차릴 무렵 흔들리는 난간에 발을 반쯤 올리고 있었다.

“하하…, 하하하… 뭐 하는 거야 나.”

난간에 몸을 기대 고개를 숙인 시헌은 허망함에 눈물을 흘렸다.

죽는 것만 아니라면 상관없어.

시헌은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중학교 시절,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선배들 앞에서 주먹으로 유리창을 깨고, 성인 남성들에게 맞으면서도 눈물 하나 흘리지 않았다. 그건 죽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시헌의 그런 생각은 어렸을 때부터 의사인 부모님들과 주변 어른들, 친척들을 봐 와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시헌 그렇게 저주하는 의사 집안의 피가 흐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한강 다리 아래 죽음을 눈앞에 둔 시헌은 순간 떨어지는 것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죽을 수도 있으니까. 시헌이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유리창이 깨져 팔에 박힌 유리로 흉터가 남는 것도, 성인 남성들에게 맞아 다치는 것도 아니었다.

죽음.

시헌이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은 원초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그 사실을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깨달아야만 했는지. 참으로 신이 있다면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 드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설령 그 사실을 알았다 해도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시헌은 이미 부을 대로 부은 눈을 소매로 닦은 뒤 기욱의 오피스텔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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