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0 거짓말 (22/83)

Chapter. 20 거짓말

월요일 아침 은소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서진의 집 근처로 도착했다. 시험이 끝난 다음 날 서진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무슨 영문인지 반 아이들도 잘 모른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이 아무 말을 하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 다양한 아이들과 친해진 은소와 달리 학교 시간의 전부를 공부하는 데 썼다고 봐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서진은 중학교 동창인 은소 외에 그렇다 할 친구가 없었다. 은소는 그날 서진을 데려간 기욱과 서진의 결석이 뭔가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서진의 집 근처가 있는 골목에 다다를 무렵 은소는 낯익은 차에 다시 인상을 구겼다. 골목 한쪽에 주차된 차는 그날 본 기욱의 차였다. 우연히 똑같은 차라고 하긴 동네가 초라했다. 외제차 같은 건 드물 뿐더러 금방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좁은 대문 앞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의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혼자 갈 수 있다구요!”

“병원 가는 길이잖아. 데려다줄게.”

“싫다고 말했잖아요!”

서진이 기욱의 손을 쳐 냈다. 뒤늦게 골목에 들어선 은소와 서진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왜 매번 은소한테만. 애매하게 해결된 지난번 일도 그렇고. 서진은 기욱과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서진이 쫓아오는 기욱을 피해 걸음을 빨리했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은소가 먼저 인사를 했다.

“아, 안녕?”

“어. 응.”

“강서진!”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힘을 준 탓인지 기욱에 의해 서진의 몸이 반쯤 돌아가 넘어질 뻔했다. 한발 늦게 서진을 넘어트릴 뻔했다는 사실을 안 기욱이 서진의 팔을 붙잡은 손을 놓았다. 옆에 선 은소가 기욱을 슬쩍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기욱의 시선에 은소는 없는 모양인지 기욱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타고 가.”

기욱 말에 서진은 머릿속의 인내심이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이 모양이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서진은 기욱이 잘해 주려는 건지 아니면 정말 사람 성질을 긁으려 일부러 그러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연애를 많이 해 봤다는 사람이 이런 사소한 배려도 없이 어떻게 연애를 했다는 거지? 서진은 무조건 데려다주겠다는 기욱이 답답했다.

“부모예요?”

“뭐, 라고?”

“왜 계속 남의 학교에 들락날락하려고 그러냐구요.”

“서진아, 그게 아니라…….”

“나도 발 있거든요? 병원 출근해야 한다면서요. 그러니까 그냥 가요. 제발.”

마지막은 정말 진심을 담아서 한 말이었다. 서진은 부탁이니 기욱이 이대로 돌아가길 원했다. 한발 늦게 은소의 시선을 의식한 기욱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표정에는 아쉬운 기색이 가득했다.

“연락할게.”

서진은 기욱의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기욱의 차가 서진의 근처를 천천히 지나는 것 같더니 이내 먼저 골목을 빠져나갔다. 잠깐의 소란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평소와 같은 등굣길이었다. 멀어지는 기욱의 차를 본 은소는 잔뜩 짜증이 난 표정으로 걷고 있는 서진에게로 등을 돌렸다. 낯익은, 처음 보는 잠바가 은소의 눈에 들어왔다.

디자인은 조금 오래되긴 했지만, 브랜드 자체는 요즘 유행하는 브랜드의 잠바였다. 늘 비슷한 것만 걸치는 서진에게 있어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은소가 알기론 꽤 가벼운 옷도 꽤 값이 나갔던 거로 기억했다. 서진을 데리러 왔던 기욱, 다음 날 결석한 서진과 바뀌어 있는 옷차림은 아무리 봐도 단순한 사이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럴 리가. 은소는 다른 사람도 아닌 시헌의 형이랑 서진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있잖아. 시험 끝나고 주말에 뭐 했어?”

나는 친구랑 놀러 갔는데. 은소는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펜션을 잡고 1박 2일로 놀러 갔던 얘기를 하며 서진의 주말에 관해 물었다. 서진은 멀어지기 무섭게 오는 기욱의 문자에 정신이 없어 은소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꿋꿋하게 이야기를 마친 은소가 다시 서진의 주말에 대해 다시 말을 꺼냈다. 은소는 서진의 휴대폰 화면을 힐끗거렸다. 걷는 중인 데다 거리가 약간 있어 화면이 보이지 않았지만, 문자의 대상이 기욱이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휴대폰을 닫은 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응? 뭐라고?”

“아, 금요일 날 학교 안 나오길래. 무슨 일이 있었나 하고…….”

금요일. 서진은 기욱과의 여행으로 금요일 하루를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주말인 줄 알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차마 기욱과 여행 갔다고 말을 할 수 없었던 서진은 적당히 말을 돌렸다.

“그냥. 별일 없었어.”

“그렇구나. 그, 있잖아…….”

“아, 미안. 나 전화 좀.”

주머니 속 진동에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기욱이면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하고 통화를 건 상대를 확인했다. 서윤이었다. 서진아. 어디야? 서윤의 한마디에 서진의 기욱에 대한 스트레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 누나. 나 지금 등교하는 중이야.

― 그래? 기욱 오빠가 걱정해서 혹시나 하고 전화했지.

하, 기욱의 이름에 서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먼 것도 아니고, 그 짧은 시간을 참지 못하는 기욱이 참으로 답답했다. 성격이 급한 것도 정도가 있지. 기욱의 집착 아닌 집착은 서진을 여러모로 힘들게 만들었다. 서윤과 통화를 하던 서진은 뜻밖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 여행? 누나 또 거짓말 치는 거지?

― 원, 속고만 살았어? 너 방학하고. 한번 시간 내 볼 테니까. 제주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디든 한번 가자.

은소는 서진의 휴대폰 너머로 흘려 들리는 대화를 엿들었다.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제주도라는 단어가 은소의 의심을 더욱 키웠다. 서진의 휴대폰 고리로 낯익은 돌하르방이 달려 있었다. 제주도까지 갔다고?

― 하아, 알았어. 그때 가서 얘기해.

서진이 적당히 전화를 끊었다. 은소가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것 같은데 정신이 없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은소와 서진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시, 시헌이 형이랑은……. 친해?”

어느 정도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할 텐데, 아침부터 기욱에게 시달린 서진은 박기욱이라는 이름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서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별로. 그런 인간.”

제멋대로에 뭐든지 하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짜증이 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며 상대방에 대한 마음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 따위의 일은 서진에게 알 바가 아니었다.

서진에게 기욱이란 존재는 서윤만 아니었다면 평생 인연이 없을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서진의 대답에 은소는 살짝 당황했다.

“그래도 지난번 학교 찾아온 것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게 데려다주신다고 그러는데. 좀 그렇지 않나 해서.”

서진은 은소를 바라봤다. 한두 번도 아니니 오해할 만도 싶었다. 그날 키스 장면을 은소가 봤는지는 서진도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기욱과 밖에서 그럴 일은 없으니 이번만 잘 넘기면 됐다. 서진이 마지 못에 입을 뗐다.

“누나가, 그 사람이랑 사귀어.”

“누나라면 그 간호사이신 분?”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소는 그제야 궁금했던 부분의 일부가 해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 해도 누나의 연애 상대가 친구의 형이라는 것과 여전히 그날의 키스에 대해서는 해결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은소는 이 상황이 너무나 복잡하게 다가왔다. 서진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난.”

“…….”

“이기적인 사람 싫어해.”

“그렇구나.”

서진은 진짜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교문을 지나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서진의 누나―서윤이 기욱과 사귄다는 서진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은소는 알 수가 없다.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은소가 보아 왔던 기욱의 서진을 향한 친절은 단순히 여자 친구의 동생이기에 잘해 주는 것 이상의 과도한 친절이었다. 시헌은 서진을 좋아한다. 그런데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시헌의 형이랑 놀아나는 서진이 은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는 시헌의 옆에서 그렇게 노력하는데, 서진의 모습은 오히려 그런 시헌의 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은소는 먼저 계단을 올라가는 서진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기적인 게 누군데.

* * *

“그래서 어제 걔가…….”

하교하며 친구들과 운동장을 걷던 은소의 걸음이 멈췄다. 활짝 열린 교문 옆으로 낯익은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 한 명이 서 있었다. 개교 이래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칙칙하다 못해 어두운 회색 교복 마이와 달리 몇 년 전 최신 디자인으로 바꾼 교복은 누가 봐도 세련되어 보이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적당한 밝기의 남색 마이와 체크무늬의 교복 바지. 이 근방에서 저런 교복을 입는 곳은 딱 한 곳밖에 없었다. 은소네 학교와 연고가 별로 없는 과고 학생이 도대체 무슨 용건이지? 지나가는 학생들은 한 번쯤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했다. 정작 본인은 그런 학생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인지 교문 한쪽 벽에 몸을 기댄 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학생은 다름 아닌 시헌이었다.

멀리서 봤을 땐 설마 했지만, 중학교 이후로 거의 크지 않은 키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습관을 지닌 사람을 두고 시헌 외에 달리 말할 사람은 없었다. 시헌이 무슨 용무로 학교를 찾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학원 밖에서 보는 시헌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은소는 자신의 말이 시헌에게 들릴 정도의 거리가 되기를 기다렸다. 휴대폰에 정신이 팔렸던 시헌은 은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시헌아. 여기서 뭐 하…….”

“강서진!”

은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든 시헌이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서진의 이름에 은소는 걸어온 운동장 쪽으로 등을 돌렸다. 청소당번이라며 청소를 마치고 나온 서진이 걸어오고 있었다. 은소를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지나쳐 간 시헌이 운동장 가운데 있는 서진에게 다가갔다.

“얘기 좀 해.”

“싫어.”

“잠깐이면 돼.”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등 뒤로 시끄럽게 떠드는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은소의 무안한 반응을 본 친구가 괜찮냐고 물어 왔다. 은소는 적당히 손을 저었다.

“못 봤나 보지 뭐. 가자.”

책가방을 바로 한 은소는 마지못해 교문을 나섰다. 시헌과 서진의 실랑이는 은소가 교문을 나가고 난 뒤에도 얼마간 계속되었다. 멀리서 이상함을 눈치챈 선생님이 다가오는 것 같은 분위기에 서진이 마지못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학교 인근에 있는 놀이터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옮기기 무섭게 시헌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너 도대체 왜 그래.”

잔뜩 참아 왔음을 알 수 있는 시헌의 한마디에 서진은 허탈하게 웃었다. 차라리 다른 말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시헌은 늘 이런 식이었다. 직설적인 것 같으면서도 배려가 묻어나는 시헌의 말투는 서진을 여러모로 머리가 아프게 만들었다.

기욱과 여행을 다녀온 이후 서진은 시헌에게 오는 모든 연락을 무시했다. 독서실도 옮겼다. 사실상 그날의 통화가 마지막 연락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설마 시헌이 학교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그조차도 이미 기욱에게 선수를 쳐진 상황이었다.

차라리 조금 더 일찍 찾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시헌은 뭘 하든 기욱보다 앞에 설 수 없었다. 의도하지 않았다는 걸 알지만 그런 시헌의 모습을 볼 때면 서진은 자연스럽게 기욱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다시 정체를 알 수 없는 혐오로 이어졌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시헌의 질문에 서진이 대답했다.

“대학 갈 거야.”

그 한마디가 답이 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시헌 또한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거랑 뭔 상관…….”

“우리 집은 말야, 누나랑 나 하나밖에 없어. 재수 같은 거 할 형편도 못 되고. 어쨌든 좀 그래.”

“그러니까 그게…….”

“방해된다고.”

제대로 된 대화가 이뤄지고 있지 않았다. 서진도 알고 있었지만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진의 말은 밀어내기 위한 일방적인 억지 주장에 지나지 않았다. 말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이는 서진에 시헌은 결국 질문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주말에, 독서실은 왜 안 나왔어?”

“생각해 봤는데, 비싼 것 같아서 다른 데 다니기로 했어. 이제 안 나가.”

“다른 데 어디?”

시헌이 추궁하듯 물어 왔다. 방금 한 말이 대책 없는 거짓말이라는 걸 눈치챈 걸까? 서진은 그런 시헌의 질문에 점점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초조함은 곧 시헌에 대한 짜증으로 바뀌었다.

“야, 박시헌.”

“…….”

“내가 어딜 다니든 너랑 상관없잖아.”

“서진아.”

제 이름을 부르는 말에 서진은 못 들은 척 외면했다. 이어질 시헌의 말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무서웠다. 강서진. 시헌이 몇 번이나 서진을 불렀지만, 서진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걸 눈치챈 시헌의 어깨가 살짝 늘어졌다.

“미안해. 내가 경솔했어.”

시헌의 사과에 서진은 정말 할 말을 잃었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긴 알까. 독서실 카드를 잃어버린 것? 기욱에게 카드가 넘어간 것? 그렇게 따지면 시헌에게 독서실을 알려 준 서진도 잘못이 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알려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서진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서진의 눈치를 살핀 시헌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평소의 시헌으로는 보기 드문 행동이었다.

“독서실이 힘들면……. 연락이라도 계속하면 안 될까?”

미련이 남는 것 같은 시헌의 말에 서진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시헌에겐 날벼락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일지도 몰랐다. 미안하기도 했고. 연락 정도라면 아무리 기욱이라도 뭐라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연락이라도 하자는 시헌의 모습이 너무 간절해 보였기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아, 알았어.”

서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시헌의 표정도 처음보다는 밝아진 상태였다. 둘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놀이터 건너편에서 학생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 말이 없었다. 침묵이 불편했다. 분명 중학교 땐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우리의 관계는 거꾸로 가야만 하는 걸까. 차라리 친하지 않다면 친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변명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기엔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나 잘 알았다. 답답함을 못 이긴 서진이 결국 먼저 말을 꺼냈다.

“더 할 말 없으면 먼저 가도 되냐?”

“어, 응. 잘 가.”

어색하긴 시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한 시헌이 멀어지는 서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서진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헌은 무슨 말이라도 할걸, 하고 후회했다. 시헌이 놀이터 밖으로 나왔다. 친구들과 편의점을 들러 라면을 먹고 나온 은소와 때마침 길을 지나가는 시헌의 눈이 맞았다.

“시헌아…….”

은소가 시헌의 이름을 불렀으나 시헌은 이미 그런 은소를 지나쳐 간 후였다. 짜증이 날 것 같았다.

* * *

새벽 늦은 시간, 3인 1실을 쓰는 전공의 숙소 안에서 느닷없이 진동 소리가 들렸다. 흉부외과 3년 차로 개인 침대를 사용하는 의사는 새벽에 들어와 잠이든 지 30분 만에 들리는 진동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불로 귀를 막아도 미묘한 거슬림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 익숙해진 눈으로 소리가 나는 2층 침대를 훑어봤다. 침대 사이로 미세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더 자세히 보니 벽에 붙어 세상모르고 자는 기욱의 그림자가 보였다.

“하아, 이래서 GS들이랑 같은 방을 쓰면 안 된다니까.”

그것도 외과 저년차는 더더욱. 잠이 부족한 건 자신이나 기욱이나 마찬가지지만, 같은 방에 있어도 허구한 날 불러 대니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기욱이 자는 침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2층 침대의 펜스를 자신의 휴대폰으로 툭툭 건드렸다. 탁탁, 잠시 진동이 끊긴 틈을 타 귀가 울리는 철 소리가 들리자 기욱이 잠결에 몸을 돌렸다.

“…….”

어둠 속에서 눈을 뜬 기욱은 난간을 짚으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침대가 높아 하마터면 머리를 천장에 찧을 뻔했다. 그가 2층 침대 매트 사이로 튀어나와 있는 기욱의 휴대폰을 손가락질했다. 그사이 잠시 진동을 멈췄던 기욱의 휴대폰에서 다시 불빛이 일었다.

“전화 받아라.”

“하아, 네.”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기욱이 깨워줘서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눌러쓰는 그를 무시한 기욱이 계단에 몸을 반쯤 걸쳤다.

새벽 세 시 반, 불과 삼십 분 전에 들어온 그와 마찬가지로 기욱도 기숙사로 들어와 쓰러지듯 잠을 잠에 빠진 지 한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언뜻 본 번호로는 1년 차 여자 동기의 번호였다. 술에 취한 것처럼 제정신이 아닌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 어, 민아. 하아, 왜.

― 씨발, 박기욱 너 어디냐?

여자 동기 대신 들려오는 선배의 목소리에 기욱은 거의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쾅, 소리와 함께 좁은 위층 침대에 머리를 박고 만 기욱이 인상을 구겼다. 나가서 전화해라! 소란에 잠이 덜 깬 다른 과 전공의 선배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자는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된 사과조차 못 한 기욱은 고개를 숙이며 재빨리 숙소 복도로 나왔다. 네. 네. 아뇨. 문과 벽 사이에 몸을 기댄 기욱이 저자세로 전화를 받았다. 때마침 기욱과 비슷하게 전화를 받고 나온 전공의 의사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과인지는 모르지만, 이 시간에 전화를 받고 나가는 과라면 외과 계열 외에는 없었다. 진짜 외과일 수도 있고. 꽤 급한 모양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이름도, 과도 모르는 의사지만 서로 고생한다는 걸 아는 터라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남자가 복도 너머로 사라진 후에도 기욱은 계속해서 전화를 받았다.

― 네, 아뇨. 금방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한숨을 쉰 기욱은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자고 있던 침대 이불 사이로 가운이 그대로 있었다. 대충 가운을 챙긴 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숙소를 나왔다.

신경외과로 가기 위해 복도로 나온 기욱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분주하게 일을 하는 몇몇 의사들과 더 마주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막 자다 일어난 기욱의 차림을 비슷한 처지의 전공의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 박기욱. 너 자러 간 거 아녔냐?”

건너편 복도에서 걸어오던 전공의 한 명이 기욱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K대 의대 출신으로 기욱과 같은 신경외과 2년 차 동기였다. 당직인 그는 이런저런 일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욱과 그가 자연스럽게 복도를 걸었다. 기욱은 감지 못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적였다.

“몰라, 한 선배님이 병동 당직실로 오래. 선배, 오늘 오프 아니셨냐?”

“그럴걸? 나도 잘 몰라.”

“곱게 집에 처들어가서 공부나 할 것이지 왜 와서 지랄이야.”

“그 선배님 그러신 게 한두 번이 아니잖아. 이해해라.”

“이해는 얼어 죽을.”

그는 기욱의 욕설을 못 들은 척 넘겼다. 아무리 아버지가 병원장이어도, 2년 차 전공의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선배들이 일부러 기욱을 더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몇몇 교수님들이 눈치를 보며 적당히 하라고 기욱의 편을 들어 주긴 했지만 아무리 교수라 해도 모든 일을 알 수는 없는 법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괴롭힘은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교수가 그렇게 편을 들어 줄수록 젊은 의사들 사이의 기욱의 평만 안 좋아질 뿐이었다.

이틀 동안 잠도 못 자고 일한 사람을 자러 들어간 지 한 시간 만에 불러내는 짓은 막 병원에 들어온 1년 차에도 하지 않는 짓이었다. 그것도 상대가 곧 전문의 시험을 치르고 병원을 뜰 예정인 4년 차라는 걸 생각하면 치졸하기 그지없는 괴롭힘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고생하라며 기욱의 등을 토닥였다. 기욱과 그는 별다른 말 없이 헤어졌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 없는 그는 비상계단 쪽으로 몸을 옮겼다. 후, 기욱은 병동 당직실 문 앞에 섰다. 근처에 있는 간호사들이 무슨 일인지 몰라 기욱을 힐끗거렸다. 가볍게 문을 두드린 뒤 미닫이문을 옆으로 밀고 당직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 당직실 안 분위기가 싸했다. 기욱이 전화를 걸었던 선배 앞으로 다가갔다.

옆으로 몇몇 1년 차 전공의들이 기욱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다리를 꼰 선배가 엉망이 된 책상 서류 사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야, 박기욱. 너 내가 오성수 환자 *SDH OP 정리하고 비슷한 기록 있으면 가져오라고 했냐, 안 했냐?”

*SDH OP[subdural hematoma operation] : 경막하 혈종 수술

기욱이 건너편 컴퓨터로 차트를 보고 있는 다른 동기 한 명을 힐끗거렸다. 기욱과 눈이 마주친 그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기욱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자 마지못해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시선이 팔짱을 끼고 신경질적으로 앉아 있는 선배에게 닿아 있었다. 대답을 지체할 수 없었던 기욱이 대답했다.

“했습니다.”

“근데 너 어디서 전화 받았냐.”

아는 걸 일부러 물어 오는 선배에 기욱이 인상을 구겼다. 아무리 봐도 시비를 거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기욱은 숙소라는 대답 대신 사과를 했다. 선배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의자를 기욱 쪽으로 돌려 앉았다. 졸지에 선배를 내려다보는 꼴이 되었지만, 선배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 낮에 있을 때 내가 한 말 들었어, 안 들었어?”

“들었습니다.”

“씨발, 너 민성이 안 보이냐? 쟤 지금 이틀 동안 풀 근무하고 저러고 있는 거 안 보이냐고.”

기욱이 방금 눈을 마주친 동기―민성을 힐끗거렸다. 말이 그렇지 붙잡혀서 억지로 하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 넌 뭔데 자냐. 빙빙 돌려 잔소리를 늘어놓는 선배에 기욱은 슬슬 짜증이 날 것 같았다. 분명 낮에 선배가 말하는 걸 들은 기억은 있다. 그러나 기욱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건.

“민성이한테 시키신 거잖아요.”

“오성수 환자 주치의 너 아냐? 씨발, 누구한테 시키고 자시고가 어딨어. 너 SDH 환자 기록철만 병원에 몇 개 있는지 알아?”

“죄송합니다.”

이어지는 트집에 기욱은 할 말이 없었다. 그야, 처음 들을 때부터 혼자 하기에는 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래저래 짜증이 나는 새벽이었다. 선배가 근처에 있는 서류를 돌돌 말아 기욱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해. 지금부터 하라고.”

선배의 말에 기욱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벌써 세 시가 다 돼 갔다. 기상 시간이 5시 30분인 걸 생각하면 앞으로 길어야 두 시간 반이었다. 풀 근무? 기욱은 앉아서 작업을 하는 동기와 자신의 스케줄이 같다는 생각은 하고 꺼낸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달리 반항을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던 기욱은 침묵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기욱의 침묵에 선배가 멋대로 말을 이어 갔다.

“나 땐 씨발, 삼 일 나흘도 안 자고 일했어 인마. 박기욱. 야, 박기욱!”

“예.”

“2년 차 되니까 좋지? 살 만하지 어? 휴가? 이 시즌에? 너 다른 애들 지난달 동안 집에 한 번도 못 들어가고 일한 건 아냐? 유민인 3월에 결혼했어. 와이프 임신해서 며칠 전에 병원 왔다 갔다. 근데 휴가를 내? 씨발, 너 지금 위아래도 없이 막 나가자 이거냐?”

제주도를 다녀온 이후부터 계속 이 지경이었다. 원래부터 보이지 않는 괴롭힘이 있긴 했지만 대놓고 말을 하기 시작한 건 정확히 제주도를 다녀온다고 휴가를 쓴 이후부터였다. 잠이 덜 깬 기욱은 이제 선배의 잔소리가 기분이 나쁜 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기욱은 다시 돌아가 숙소에서 잠만 자게 해 준다면 무슨 욕이든 감안할 자신이 있었다. 잔소리를 들으며 졸고 있는 기욱에 인상을 구긴 선배가 빈 컴퓨터와 책상 쪽을 손가락질했다.

“하고 가. 씨발, 두 시간이든 두 시간 반이 됐든 일하라고!”

선배는 그런 기욱의 상태를 너무 잘 알고 있었고, 당연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 * *

기욱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날 그 일뿐만이 아니었다. 4년 차인 선배는 틈만 나면 기욱에게 이런저런 잡일들을 시켰다. 편하게 외래나 보고 시험 공부를 해야 할 선배가 새벽에 와서 그 난리를 치니 도무지 답이 없었다. 기욱은 선배의 말에 한마디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H대 의대를 졸업하고, H대 병원에서 수련의―인턴을 한 후 아는 사람이 있다는 J대 병원으로 넘어와 3년 차부터 4년 차까지. 2년 연속 신경외과 치프를 담당하고 있는 선배는 누가 봐도 보통 사람과는 어딘가 틀렸다. 일반 외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년차 시절 365일 중 360일을 보낸 병원 내 전설의 기록―선배가 오기 전까지 최고 기록은 355일이었다고 한다―을 가지고 있는 선배는 일이면 일, 관리면 관리부터 해서 뭐 하나 흠잡을 곳이 없이 완벽했다.

성격이 안 좋은 것만 빼면 말이다. 간신히 오전 내 회진을 마치고 선배가 시킨 일을 마친 기욱은 신경질적으로 의자에 일어나 복도로 나왔다. 분명 마지막으로 시계를 본 것이 오전 6시였던 것 같은데 벌써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기욱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기는 식사하러 내려간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기욱이 복도로 나오자 식사를 마치고 올라온 동기와 1년 차 전공의―레지던트들과 마주쳤다. 1년 차들을 보낸 동기 한 명이 아직도 밥을 먹으러 가지 않은 기욱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아직도 밥 안 먹었냐?”

“하아, 환자 상태 보러 가야 돼.”

“뭐? 지금? 야, 점심시간 얼마나 남았다고 지금 가? 줘. 내가 가 줄 테니까.”

동기가 기욱의 손에 들린 호출기를 빼앗듯 가져왔다. 간단하게 설명을 마친 기욱이 잘 부탁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막 교대를 하고 식당으로 내려가려던 찰나 선배가 기욱과 동기의 앞으로 다가왔다. 선배가 인사를 하고 지나가려는 기욱을 불렀다.

“박기욱! 너 어디 가?”

“밥 먹으러요.”

“여태까지 뭐 했어?”

“죄송합니다.”

선배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기욱은 사과로 선배의 말을 잘랐다. 정말이지 일을 하면서 는 건 사과밖에 없는 것 같았다. 원래 저년차가 다 그렇긴 하지만, 기욱의 경우엔 유독 심했다. 기욱은 제가 사과의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원인의 절반이 선배 때문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이제 몇 달 남지 않았다. 기욱은 제발 잘난 선배가 모교인 H대 병원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빌어먹을 친척이 J대 교순지 뭔지 하는 사람 때문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란 말인가. 전문의가 되면 J대 병원 뇌신경외과 임상강사―펠로우를 지원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긴 했지만, 기욱은 그 사실이 진심으로 소문에 그치길 원했다. 선배로서 마주하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펠로우라니,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없었다.

선배가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채 20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안 그래도 늦은 시간이라 기욱에겐 일분일초가 급했다. 아침이라고는 지난밤에 먹다 만 빵과 이틀 지난 오렌지주스 하나와 일을 하면서 주워 먹은 초콜릿 몇 개가 전부였다.

그런 건 전부 간식이지 밥이 아니었다. 딱히 허기가 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욱은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싶었다. 서둘러 내려가려는 기욱을 향해 선배의 예상치 못한 명령이 들려왔다.

“*ER 내려가.”

*ER[emergency room] : 응급실

“네? 지금요?”

“정 교수님 환자 보고 계신다니까 내려가. 사람 없어.”

기욱이 선배의 옆에 있는 3년 차 선배를 힐끗 바라봤다. 선배와 식사를 하고 온 모양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보다는 3년 차 선배를 내려 보내는 게 맞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선배의 결정에 번복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기욱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선배에 기욱은 점심은 글렀겠구나 싶었다. 뒤늦게 동기가 기욱의 일을 대신해 주기로 한 사실을 눈치챈 선배가 비아냥대며 입을 열었다.

“잘됐네. 오늘 *consultant 오면 박기욱 네가 다 내려가서 보고해.”

*consultant : 타과 협진/협력진료

“그건 제 일이 아닌…….”

“말대답하지 마. 왜? 병원에서 간호사랑 연애할 시간은 있고 일할 시간은 없어?”

“아닙니다.”

“그럼 해. 짜증 나게 굴지 말고.”

의국 안으로 들어가는 선배에 기욱은 한숨을 쉬었다. 동기가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지만, 기욱은 애써 손을 저었다. 도와주겠다고 한 행동일 텐데 졸지에 기욱의 일까지 떠맡게 된 동기도 좋은 심정은 아닐 것이 틀림없었다. 되는 일이 없었다. 응급실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뒤늦게 저녁 회진 준비를 했다.

최근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탓인지 회진 중 식사를 하는 환자들에 밥이 먹고 싶기보다는 헛구역질부터 나왔다. 이쯤 되면 누가 누구 건강을 챙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녁 시간을 완전히 놓친 기욱은 선배가 퇴근한 후에야 간신히 시간을 좀 낼 수가 있었다. 그래 봤자 퇴근하기 전 멋대로 스케줄을 바꿔 버린 탓에 밤새 당직 신세가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삼십 분이라도 쉴 수 있는 게 어디냐며 위로한 기욱은 옥상 난간에 기대 담배를 물었다. 빈속에 줄 담배만 피워 대니 속이 뒤집혀 미칠 것 같았다. 기욱은 다 마신 캔 커피를 근처 쓰레기통에 버렸다. 텅 빈 쓰레기통에서 요란한 캔 소리가 났다. 하루에 커피만 열 잔, 번 돈의 절반 이상을 커피 회사에 바치는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담배를 피운 기욱은 오래된 나무 의자에 몸을 기댔다.

“내가 흐윽…….”

“야, 울지 마, 울지 마. 너 울면 나까지 흑, 서럽잖아….”

옆으로 인턴인지 1년 차―기욱은 1년 차가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요즘은 인턴에게 저렇게 굴진 않는다― 아마 인지하는 의사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한 명은 서럽게 우는 동기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병원 내 관계자 외 출입 금지 스티커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구병동 옥상은 이렇듯 병원 내의 온갖 설움이 몰려드는 장소이기도 했다. 건너편으로는 임상강사쯤 되는 사내 한 명이 신경질적으로 통화하고 있었다.

― 씨발, 6개월 먼저 들어와서 교수 직급 달면 다냐고!

누군지 모를 상대에게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닦는 모습이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남자의 손에는 병원 밖 편의점에서 산 술이 들려 있었다.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옥상 이곳저곳에는 마시다 만 빈병이나 온갖 담배꽁초들이 가득했다. 환자한테는 병원 내 금연이라고 벽에 온갖 딱지들을 붙여 놓고 정작 저들끼리 몰래 숨어 이러고 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밤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두꺼운 옥상 철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구두 소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는 물체가 이마를 가리고 있는 기욱의 뺨에 닿았다. 기욱이 천천히 눈을 떴다.

“오빠 괜찮아?”

서윤이었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인 기욱은 서윤이 사 온 햄버거 세트를 받아 들었다. 봉투 안으로 손을 넣은 기욱은 햄버거를 꺼내기 무섭게 순식간에 해치웠다. 뒤늦게 사레가 들린 기욱이 서윤이 내민 콜라를 마셨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사라진 햄버거에 서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출근하기 전 자신에게 배가 고프단 말은 했었지만, 이 정도가 너무 심했다.

아예 빨대와 뚜껑을 뺀 기욱은 탄산이 가득한 콜라를 그 자리에서 반쯤 비웠다. 물 마시듯 넘기는 콜라에 서윤은 기가 막혔다. 그나마 오늘 먹은 것 중 가장 나은 식사에 기욱이 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서윤이 그런 기욱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이거 가지고 해결되겠어? 차라리 잠깐이라도 시간 내서 병원 근처로 나가는 게 좋지 않아?”

“됐어. 너도 일해야 하잖아.”

“당직이 오빠 혼자가 아니잖아.”

“걸리면 골치 아파.”

“와, 해도 해도 너무한다 진짜. 사람이 밥은 먹게 해 주고 일은 시켜야 할 거 아냐. 또 한 선생님이지? 기가 막혀. 자기 저년차 시절 때는 생각 안 하고.”

“…….”

“오빠, 들어가서 자.”

“들어가면 더 지옥이다. 서윤아, 오빠 힘들다. 건들지 마라.”

이번만큼은 진심이었다. 눈을 감은 채 대답한 기욱의 모습을 본 서윤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도 슬슬 일하러 들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정말이지, 내일은 내가 도시락이라도 싸 오든지 할게. 그리고 이거 담배.”

서윤이 근처 편의점에서 산 담배를 기욱에게 내밀었다. 담배를 사 오라고 부탁한 적은 없는데. 기욱의 표정에 서윤이 어쩔 수 없다며 혀를 찼다.

“오빠 성격이면 벌써 다 폈을 거로 생각했어. 별로 안 좋아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때마침 떨어진 담배에 1층 편의점까지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던 기욱에겐 잘된 일이었다. 서윤의 배려에 기욱이 멋쩍게 대답했다.

“고맙다.”

“뭘, 쉬고 내려가서 보자.”

기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은 남은 콜라를 전부 마신 뒤 봉투와 함께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린 후 담배를 물었다. 역시나 밤바람이 찼다. 슬슬 진짜 겨울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10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에 기욱은 습관적으로 휴대폰만을 확인했다. 이 순간만큼은 차라리 시간이 멈추면 좋을 텐데 싶기도 했다. 휴대폰을 만지던 기욱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 만의 수화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 …….

휴대폰을 붙잡은 기욱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기욱의 통화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휴대폰 너머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것이 전부였다. 짜증이 났던 모양인지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왜요.

혹시 휴대폰 속 목소리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떻게 하지? 다행히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서진의 목소리에 기욱은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 그냥.

용건을 묻는 서진의 말에 기욱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정말로 용건이 있어서 전화를 건 것이 아니라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사이 몇 번인가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전부였다. 기욱은 서윤이 사 준 담배를 물었다.

“이해한다. 이해해. 너네 *CS라고? 형이 *EM인데 그 새끼들 만나면 내가 가만 안 둘 테니까 그만 울어.”

*CS[chest surgery] : 흉부외과

*EM[emergency medicine] : 응급의학과

형이라니. 그사이 서로 친해진 모양이었다. 뒷담은 나이와 과를 초월하는 신비로운 힘이 있었다.

“형은 무슨 일이셨어요?”

근처에 있던 전공의가 펠로우에게 물었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였다.

“와, 너무했네요. 진짜!”

기욱은 그런 그들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휴대폰 너머로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 몇 번째인 줄 알아요?

― 뭐가.

― 전화요! 전화! 매번 밤마다 이유도 없이 전화하잖아요! 받아 주는 사람 입장도 좀 생각하면 안 돼요?

뜻밖의 말에 기욱은 뭐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매번 전화했다고? 기욱은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는 앵무새처럼 서진이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해 물었다.

― 내가, 밤마다 너한테 전화했다고?

― 그날 이후로 계속요.

그날이 서진과 제주도를 다녀온 날이라는 걸 모르진 않았다. 기욱은 잔뜩 토라진 서진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의 기욱에겐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조차 자각이 없었다.

― 서진아, 내가 그게 아니라…….

― 됐어요. 일 없으면 끊을게요. 앞으로 용건 없으면 전화하지 마세요.

이미 기욱에게 질릴 대로 질린 서진은 이 이상 기욱과의 통화를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설명을 한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뒤늦게 통화가 끊겼다는 사실을 눈치챈 기욱은 휴대폰을 가만히 바라봤다. 다시 전화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기에는 아무리 기욱이라 해도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감지 못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매정하네! 진짜.”

휴대폰을 닫지 않은 기욱은 서진과의 통화 대신 지난날의 통화 기록을 살폈다. 휴대폰에 그대로 남아 있는 통화 기록은 서진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화를 건 시간대도 다양했다. 아침부터, 새벽, 서진이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시간에도 전화를 건 흔적들이 가득했다. 깨닫지 못한 행동에 기욱은 곤혹스러웠다.

서진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한 것도 선배들의 노골적인 눈치와 잔소리에 일이 힘들어지기 시작한 시점부터였다. 관련이 없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타이밍이 너무나 잘 맞아떨어졌다. 담배를 끈 기욱은 목 너머를 긁적였다. 서진을 만나고 나서부터 모든 게 이상해졌다. 당장 서진이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좋다고 따라올 남자나 여자 한둘쯤 꼬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대신할 사람은 많았다. 누군가에게 매달리는 건 그 녀석이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 제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서진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고? 기욱은 이 상황을 좀처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 한둘이 아녔다. 제주도 여행도 그렇고, 형이라는 단어도 그렇고. 기욱은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휴식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기욱의 표정이 약간 심각해졌다.

강서진. 나한테 뭘 한 거야.

* * *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점심시간, 서로 다른 반 아이들이 남은 시간을 즐기며 떠들고 있었다. 일찍 식사를 마치고 은소와 헤어진 서진은 화장실을 갔다 교실로 돌아가는 중이였다.

“큭큭, 하하하하! 야! 그걸 말이라고 하는……! 아, 씨발!”

남학생 하나가 몸을 움직이면서 지나가는 서진과 어깨를 부딪쳤다. 먼저 나온 건 남학생이었기에 서진은 남학생을 힐끗 쳐다보며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서진의 모습에 남학생은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들으라는 듯 소리를 질렀다.

“씨발, 부딪혔으면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냐!”

서진은 그런 남학생의 말을 못 들은 척 교실로 들어갔다. 남학생은 지난번 서진과 복도에서 부딪혀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다. 서진과 같이 있던 이상한 녀석은 만날 수 없었지만, 남학생은 여전히 서진이 못마땅했다. 남학생의 신경질적인 욕설에 근처에 있던 은소가 남학생을 말렸다. 그러나 그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존나 쟤 좀 이상한 거 같지 않냐?”

남학생이 무의식중에 중얼거린 말에 근처에 있던 여학생 하나가 가볍게 박수를 치며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떠들었다.

“맞다. 나 지난번에 하교할 때 걔 봤다. 되게 잘생긴 남자랑 같이 차 타던데.”

“남자? 웬 남자?”

“몰라, 형인가? 안 닮았던데. 싸우는 것 같기도 했는데……. 나도 잘 몰라.”

여학생은 거기까지밖에 모른다고 했다. 몇몇 남학생들이 서진이 들어간 교실 뒷문을 힐끗거렸다. 몇몇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며 떠들었지만 정작 서진에 대해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한 남학생이 가만히 듣고 있던 은소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깜짝 놀란 은소가 고개를 돌렸다.

“너 쟤랑 같은 학교라 그러지 않았냐?”

“어, 응.”

“원래 저래?”

“그냥, 좀 그래.”

은소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원래 저러냐는 친구의 말을 은소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서진은, 그러니까 은소가 봐 온 서진은 중학교 때부터 저런 성격이었다. 달라진 건 서진이 아니라 주변의 시선이었다.

시헌과 학원을 같이 다니지만, 시헌은 늘 서진의 얘기뿐이었다. 근처를 지나가는 여학생 두 명이 들러붙었다. 강서진? 아, 그 이상한 애? 여학생이 생각 없이 중얼거린 말에 주변 학생들이 관심을 가졌다. 곤란하다며 말을 자제하던 여학생이 주변의 독촉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 이거 진짜 말하면 안 되는데……. 저번에 민윤이가 하교할 때 이상한 남자랑 있는 거 봤다고 했거든.”

“어? 그 키 되게 크고 잘생긴 남자 아냐? 앞머리 살짝 올리고! 모델같이 생긴.”

“알아? 어쨌든 근데 그 남자랑 강서진이랑…….”

대박, 여학생의 말을 들은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여학생은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입 밖으로 꺼낸 순간부터 비밀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고 보니 좀 그렇게 생기긴 했지? 한 번 시작된 색안경은 아이들의 시선을 바꾸기에는 충분했다.

은소는 아이들이 말하는 서진과 같이 있었던 남자가 누군지 한 번에 알아차렸다. 기욱이었다. 주변 친구들의 눈치를 보던 은소가 입을 뗐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은소의 등 뒤로 약간의 식은땀이 흘렀다. 모든 아이의 시선이 집중됐다.

“사실은 말야…….”

그날, 은소는 그 말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생각하지 못했다.

* * *

평소보다 조금 늦게 학원에 도착했다. 서둘러 강의실로 들어간 은소는 학생들이 가득 찬 강의실을 빠르게 둘러봤다. 중간쯤에 혼자 앉아 있는 시헌을 발견한 은소는 같이 온 친구들을 제치고 시헌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시헌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을 하고 있던 시헌은 은소의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안녕? 주말 잘 보냈어?”

“어, 응.”

은소는 시헌의 손에 들린 휴대폰 화면을 힐끗거렸다. 서진과의 문자라는 걸 눈치챈 은소는 모르는 척 담담하게 시헌의 옆자리에 앉았다. 답장이 오지 않는 휴대폰을 본 시헌은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교재를 꺼내던 은소는 근처 편의점에서 사 온 초콜릿을 시헌에게 내밀었다.

은소는 괜찮다는 시헌에게 일방적으로 초콜릿을 내밀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시헌은 은소가 주는 초콜릿을 그 자리에서 전부 먹었다. 시헌은 은소가 사 온 초콜릿을 먹을 때면 서진이 생각났다. 그 사실을 은소가 알 리가 없었다.

평소처럼 그 자리에서 초콜릿을 뜯을 거란 은소의 예상과 달리 시헌은 은소가 준 초콜릿을 책상 옆 한쪽으로 올려놓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은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으려 했으나 시헌이 조금 더 빨랐다.

“나 말야, 영화 학원 끊었어.”

뜻밖의 말이 들렸다. 아직 누구한테도 말한 적 없는 얘기에 시헌은 뒷목을 살짝 긁적였다. 그날 이후 나름대로 생각을 해 봤는데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은소는 저번 주 목요일 날 시헌이 학원에 나오지 않았던 사실을 기억했다. 시헌은 스케줄이 일부 겹치는 탓이라고 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여태껏 다른 뭔가를 해 본 적이 없는 시헌이 뭔가를 하려고 한 건 은소의 영향이기도 했다. 시헌은 선생님이 오기 전 미리 초콜릿을 뜯었다.

“열심히 해 볼까 생각 중이야.”

“잘됐잖아!”

시헌의 한마디에 은소의 표정이 밝아졌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밝아진 은소는 어딘가 부담스러웠지만, 지금만큼은 그런 은소가 마냥 싫지는 않았다. 선생님이 들어오고 평소처럼 수업이 시작됐다.

수업이 끝나고 평소처럼 집에 가는 길은 제법 즐거웠다. 열심히 해 보겠다는 시헌의 말은 은소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헌과 헤어지는 것이 영 서운했던 은소는 애써 근처에 있는 편의점을 들르자고 했다. 시헌은 그런 은소에게 먼저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같이 들어가고 싶었던 은소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별다른 용건이 없었던 은소는 편의점 내부에 들어와서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시헌을 힐끗거렸다. 시간이 지체될 것 같은 느낌에 결국 껌 하나를 계산한 뒤 밖으로 나왔다. 1차선 도로를 건넌 시헌이 있는 곳으로 가려던 찰나 시헌이 갑자기 반대편 방향으로 뛰어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시헌의 행동에 은소는 시헌이 뛰어가는 방향을 바라봤다. 시헌이 뛰어가는 곳은 사거리 신호등이 있는 방향이었다. 시헌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은소 또한 걸음을 빨리했다. 초록 불인 신호등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이 깜박대고 있었다.

횡단보도 앞으로 다가가려던 시헌은 빨간불로 바뀌는 신호등에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은 은소는 횡단보도 건너편에 서 있는 서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횡단보도를 두고 서진과 시헌, 그리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은소가 서 있었다. 차들이 빠르게 횡단보도를 스쳐 지나갔다.

정신을 차려 다시 건너편을 봤을 때 서진은 없었다. 은소는 멍하니 서 있는 시헌의 옆으로 다가왔다. 시헌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끊어질 줄 모르는 신호음이 은소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1분여 동안 휴대폰을 붙잡던 시헌은 한숨을 쉬며 등을 돌렸다. 집에 오는 길까지 은소와 시헌에게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길을 걸으며 은소는 옆에 선 시헌을 의식했다. 분명 옆에 있는데, 같은 길을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곳을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헌의 시선은 늘 서진에게 닿아 있었다. 형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알면 시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모든 걸 다 가져간 서진이 밉다.

은소는 길을 걸으며 몇 번이나 빌었다. 제발, 부탁이니까 한 번만 바라봐 달라고.

― 그러나 그날 시헌은 끝내 은소에게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 * *

4교시가 끝나고 서진은 평소처럼 은소가 있는 교실 쪽으로 가기 위해 복도로 나왔다. 복도로 나온 서진은 묘한 시선에 인상을 구겼다. 쟤야? 대박. 저를 두고 떠드는 것 같은 불쾌함에 서진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진과 눈이 마주친 여학생들이 시선을 피하며 자리를 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류에 서진은 인상을 구기며 은소가 있는 교실의 뒷문으로 나갔다.

서진이 때마침 뒷문을 나오는 여학생 하나를 불렀다. 서진의 부름에 여학생이 깜짝 놀라 서진을 봤다. 서진은 여학생이 서 있는 뒷문 너머 텅 빈 교실을 힐끗거렸다.

“기은소 어딨어?”

“어? 은소? 아까 친구들이랑 나가던데.”

여학생이 잘 모른다며 고개를 저은 뒤 나갔다. 복도 뒤쪽 화장실로 은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소와 몇몇 남학생들이 화장실 밖으로 나온 서진을 바라봤다. 평소에 밥을 먹는 무리와는 어딘가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그중에는 지난번 서진과 독서실 근처에서 싸움이 붙은 남학생도 있었다.

서진을 위아래로 훑은 남학생 한 명이 가자며 은소의 등을 건드렸다. 은소가 남학생들과 서진의 눈치를 살폈으나 은소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안, 나 오늘 쟤네들이랑 밥 먹어야 할 것 같아.”

“하아, 알았어.”

예의상 미안하다고 말하는 은소의 말을 서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흘려 넘겼다. 은소는 서진의 그런 모습에 다시 인상을 구겼다. 여태껏 같이 먹었던 친구들도 서진의 친구들이라고 하기보다는 은소의 친구들에 가까웠다. 이제 와 다른 애들이랑 먹겠다고 하는 은소의 그 한마디가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서진이 모를 리 없었다. 이유를 물어 올 법도 한데.

서진은 은소가 하는 행동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마치 자신만 잘못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은소는 차라리 서진이 화를 내면 덜 억울할 텐데 싶었다. 친구들이 멍하니 서 있는 은소를 불렀다. 친구들의 부름에 은소는 마지못해 서진에게서 등을 돌렸다.

씨발, 저 게이 새끼 진짜. 은소의 친구들 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한 분위기의 정체를 눈치챈 건 너무 늦은 후였다. 은소와 친구들은 이미 급식실이 있는 계단 쪽으로 내려가고 없었다.

― 응, 누나. 별일 없었지.

― 그래? 점심시간이지? 밥은 먹었고?

― 아까 먹었어. 누나는?

― 지금 내려가려고. 우리 서진이 공부 열심히 하는데 누나도 힘내야지. 끊고, 저녁에 보자.

― 알았어.

서윤과의 전화를 끊은 서진이 한숨을 쉬었다. 텅 빈 교실에 엎드린 서진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교재를 꺼낸 뒤 이어폰을 꼈다. 멀리 일찍 밥을 먹고 온 아이들이 복도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으나 대부분 학생들이 식사하고 내려갔던 터라 소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잦아들었다.

막상 문제집을 펼치긴 했으나 풀리지 않는 문제에 서진은 결국 책상에 엎드렸다. 쉬는 시간에 매점에서 사 온 빵을 먹어 딱히 배가 고픈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점심시간, 교실에 혼자 앉아 있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고역이었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신경질적으로 뒷목을 긁적인 서진은 결국 문제집과 교과서들을 챙긴 뒤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날 이후 서진은 점심시간이 되면 홀로 독서실에 있는 빈자리에 앉아 공부했다. 똑같이 비어 있긴 마찬가지였지만 독서실이라는 공간 자체가 미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공립 고등학교라 그런지 독서실을 찾는 아이들도 거의 없었고, 사서 선생님은 공부하는 서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처럼 공부하고 있던 서진의 앞으로 낯선 남학생 한 명이 의자를 꺼내 앉았다.

남학생을 슬쩍 올려다본 서진은 다시 교재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간혹 드물지만, 책을 읽으러 오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 남학생이 그 많은 빈자리를 두고 서진의 앞에 앉은 건 의외지만, 서진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묵묵히 문제를 풀던 서진은 이어지는 남학생의 시선에 인상을 구겼다. 서진의 앞에 앉은 남학생은 홀로 독서실에 온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책을 고르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서진처럼 공부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저에게 용건이 있는 것 같은 모습에 서진은 마지못해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야, 너 뭐야?”

“아, 드디어 말했다!”

남학생의 이상한 반응에 서진은 한숨을 쉬었다. 건너편 의자에 있는 남학생은 서진이 처음 보는 학생이었다. 서진은 남학생의 가슴에 있는 이름표를 확인했다. 조인훈, 그것이 남학생의 이름이었다.

그날 이후 인훈은 종종 서진이 있는 도서관으로 찾아가고는 했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던 인훈의 시선도 시간이 지나니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게다가 맨날 찾아오는 것도 아니었고. 달리 별다른 말을 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여느 날처럼 공부하고 있던 서진의 앞으로 인훈이 앉았다. 인훈은 딱딱한 테이블에 턱을 괴며 서진이 풀고 있는 고3 문제집을 힐끗거렸다.

“근데 넌 왜 밥 안 먹냐?”

직설적인 인훈의 말에 문제를 풀고 있던 서진의 샤프심이 뚝, 하고 끊어졌다. 몇 번인가 샤프를 달각거렸지만, 샤프심이 없는 모양인지 심이 나오지 않았다. 샤프심을 넣은 서진이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일이 있어.”

“흠, 그럼 같이 먹을래?”

서진은 어쩌면 무리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인훈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소문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진의 걱정과 달리 인훈은 아무것도 물어 오지 않았다. 다른 반인 친구가 뜬금없이 이러는 것도 이상했지만, 서진은 인훈의 제안이 마냥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서진에 인훈이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현석이? 걔네랑 같이 먹지 않았냐? 걔들 말야, 원래 질이 좀 별로거든. 아, 나랑 같이 먹는 애들은 다 착해.”

“됐어.”

“그러지 말고 같이 먹자니까? 너 누나가 그러고 있는 거 알면 싫어할걸?”

누나의 말에 서진이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인훈과 많은 얘기를 한 기억은 없었다. 서윤에 대한 사실은 더더욱 그랬다. 뒤늦게 서진의 표정을 눈치챈 인훈이 말실수를 했다며 뺨을 긁적였다.

“지난번에 복도에서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 미안해, 엿들으려 했던 건 아니었어.”

인훈의 사과에 서진은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훈의 말 따라 언제까지 밥을 안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반 내에서는 점심시간이면 사라지는 서진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아이들이 는 상태였다. 서진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한번 물어봐 줘.”

“당연하지!”

인훈이 맡겨만 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은 평소처럼 은소와 만나는 골목 한쪽에 섰다. 이쯤 되면 나올 때가 됐는데. 평소보다 조금 일찍 나오긴 했지만 이렇게 오래 기다린 적은 별로 없었다.

은소가 늦나? 서진은 휴대폰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 이상 늦어지면 정말 지각할 것 같았다. 한숨을 쉰 서진이 은소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수화음 끝에 은소와 통화 연결이 됐다. 은소의 휴대폰 너머로 다른 남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래, 알았어.

1분이 안 되는 짧은 통화를 마친 서진은 홀로 등을 돌렸다. 은소는 이미 학교라고 했다. 같은 공간에 있다고 언제까지 같이 있을 거란 생각은 서진만의 착각이었는지도 몰랐다. 학교라는 공간은 좁으면서도, 넓었다. 서진은 학교가 있는 방향의 횡단보도 앞에 섰다.

이어폰을 끼려던 서진의 등을 누군가 툭, 하고 건드렸다. 하마터면 횡단보도 아래로 넘어질 뻔한 위험한 장난이었다. 서진이 놀라 등을 돌렸다. 인훈이였다. 인훈은 넘어질 것 같은 서진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인훈이 웃으며 물었다.

“너도 이쪽 살았어?”

“어, 응.”

서진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헐, 대박. 어디 사는데? 서진이 근처 편의점의 이름을 댔다. 6624 다니는 곳? 뜻밖에 인훈과 서진의 집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인훈이 당연하다는 듯 서진에게 어깨를 걸쳤다.

“잘됐다! 안 그래도 그 근처 사는 애들이 없어서 맨날 혼자 등교했거든.”

“그래?”

“너도 혼자 등교하지? 앞으로 같이 갈래?”

인훈의 말에 서진은 잠시 고민했다. 은소의 반응을 보아 앞으로도 따로 등교하게 될 것 같았다. 딱히 인훈처럼 혼자 등교하는 게 외롭거나 하진 않았지만, 집 근처가 같다는 인훈을 마다할 마땅한 이유 또한 없었다. 인훈과 서진은 자연스럽게 복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서진은 계속해서 달라붙는 인훈을 밀어냈다.

“달라붙지 말라니까 좀.”

“뭐 어때서 그래?”

“어, 서진아…?”

화장실을 가려 서진의 교실 근처로 오던 은소가 그런 인훈과 서진을 발견했다. 서진은 일부러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인훈은 그런 서진의 팔을 붙잡더니 서진을 교실 뒷문으로 밀어 넣었다. 반강제적으로 교실에 들여보내진 서진이 당황하며 인훈을 올려다봤다.

“나중에 보자.”

인훈이 웃으며 손을 흔든 뒤 뒷문을 나갔다. 등을 돌리며 자기 교실로 돌아가는 인훈의 모습을 본 은소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 애는 누구지?

* * *

시헌의 옆에 앉은 은소는 지난번 학교에서 친구와 여행을 간 이야기를 했다. 그렇구나. 몇 번인가 호응해 주던 시헌은 이내 곧 입을 다물었다. 시헌의 반응이 시큰둥해지자 은소의 이야기 또한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왜지? 요즘은 늘 이런 식이었다. 마치 자기만 이야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은소는 시헌에게 말을 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석이가…….”

“서진이는 잘 지내?”

시헌이의 질문에 말이 잘린 은소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서진에 대한 말이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은소는 자신이 열심히 말한 것들이 시헌의 머리에 들어오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눈앞에 있는 상대의 얘기를 제대로 듣지 않을 정도로 시헌에겐 서진이 중요한 걸까? 은소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서진은 이제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지? 자신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게 학교생활을 계속하는 서진을 보니 짜증이 났다. 심지어 그 남학생은 은소도 말을 몇 번 나눠 본 적 없는 학생이었다. 은소는 웃으며 시헌의 말을 가볍게 흘려 넘겼다.

“그럼, 잘 지내지. 요즘 대학 간다고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던데?”

“그래?”

은소는 시헌이 서진의 이야기를 할 때면 표정이 밝아진다는 걸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도대체 서진의 무엇이 시헌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은소는 학교 친구들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내일은 주말이었다. 학원 스케줄을 생각한 은소가 시헌을 불렀다.

“혹시 내일 너네 집 가도 돼?”

“우리 집?”

은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소와 비슷하게 시간표를 확인한 시헌이 상관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중학교 시절엔 셋이 종종 공부하기도 했었고, 나쁠 건 없었다. 내일은 은소와 같은 학원 보충이 있는 날이었다.

“내일 학원 끝나고 시간 비어. 넌?”

“나도!”

은소가 잘됐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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