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 반항하다
시헌은 근처에 있는 메모지에 적은 종이와 간판을 번갈아 확인했다. 학원이 많은 번화가는 아니었지만 커다란 건물에 있는 간판은 제법 한눈에 들어왔다. 7층,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자 시헌과 비슷한 또래 몇 명이 같이 탔다.
시헌이 누른 층을 보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저들끼리 떠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늦게 탄 학생들이 먼저 내렸다. 학생들이 내리는 걸 본 시헌도 머뭇대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층 전체가 학원인 것 같았다.
복도에 서 있던 시헌은 적당히 교무실이라 생각되는 곳에 들어갔다. 데스크에 앉아 있던 선생님 한 명이 가만히 서 있는 시헌을 보더니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 시헌은 메모지에 적힌 종이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상담을 좀…….”
끝까지 말하진 않았지만 대충 알아들은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을 따라 안쪽에 적당히 빈방으로 들어갔다. 교실 대용 같았다. 영화 입시 학원, 시헌은 벽에 잔뜩 붙은 관련 입시 포스터들을 힐끗거렸다. 10여 분 동안 가볍게 학원에 대한 설명과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성적을 묻는 말에도 시헌은 거침이 없었다. 시헌의 성적을 급하게 가져온 노트에 적은 선생님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시헌은 뭐가 잘못되었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참 만에 선생님이 먼저 말했다.
“과고라 그랬지? 성적 좋네.”
다행히 시헌이 걱정하는 말은 아니었다. 시헌을 위아래로 훑은 선생님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조심스러웠다. 이런 성적―물론 3학년 동안 성적을 유지한다는 가정 아래에―이면 굳이 이쪽이 아니더라도 더 좋은 학과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여태껏 한 번도 영화 관련 입시 학원에 다녀 본 적이 없는 시헌이 갑자기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됐는지 살짝 궁금할 법도 했다. 경위를 궁금해하는 선생님의 표정에 시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냥요.”
“…….”
“뭔갈 하는데 매번 큰 이유가 필요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 그래. 그건 그렇지.”
선생님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사실은 이곳에 찾아온 시헌도 아직 정리가 덜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뭔가를 장황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선생님은 같이 가져온 팸플릿을 확인했다.
“네 성적 정도면 J대 정도는 노려볼 만한데. 모의고사 점수는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까?”
“1등급?”
모의고사라는 말에 시헌은 잠시 고민해야 했다. 최근에 본 건 점수도 안 나왔고, 마지막으로 본 거라고 해 봤자 3월에 본 게 다였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좀 더 구체적인 점수를 원했다.
“최근에 본 거 점수로 말해 볼래?”
“영어에서 4개 틀렸어요.”
“다른 과목은?”
“다 맞은 것 같던데.”
“아, 그래?”
선생님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J대랑 K대를 목표로 하자는 선생님의 말씀에 시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원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무렵 시헌은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그런데요. H대는 힘들어요?”
“아, H대에는 연극영화과가 없거든.”
시헌은 납득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과를 간다면 J대나 K대보다는 높은 곳을 가는 것이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좋을 것 같았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했었기 때문이었다.
학원비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생각보다 비싼 학원비에 시헌은 지갑을 살짝 열어 봤다. 있는 현금으로 될 거란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했더니 역시였다. 수업 시간까지 확인한 시헌은 결국 기욱의 카드로 결제했다.
* * *
아침, 은소와 만났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그 일이 있고 일주일 만에 서로 소원한 사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사이가 벌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서진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난번에…….”
“시험 공부 잘했어?”
“어, 응. 그럭저럭.”
“좋겠다. 아아, 나도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해 둘걸.”
은소가 곧 있을 시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진은 순간 마치 은소가 자신의 말을 자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험에 관한 대화는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서진은 몇 번이나 적당한 타이밍을 찾으려 했으나 어째서인지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결국, 비슷하게 등교를 하는 은소의 친구들을 만나면서 대화는 끊기고 말았다. 한참 친구들과 대화를 하던 은소가 고개를 숙이고 걷는 서진을 불렀다. 친구들과의 대화를 끊은 은소가 들으라는 듯 말을 했다.
“있잖아. 서진아. 지난번 그거.”
“…….”
“난 신경 안 써.”
“그, 그래. 고맙다.”
서진이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문을 모르는 친구들이 무슨 대화였냐며 물어 왔다. 은소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진짜 별일 아냐.”
대답하는 은소의 목소리에 약간의 힘이 들어가 있었다. 사실은 당장에라도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사람이란 생각보다 간사한 기질이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기말고사가 끝났다. 서진은 채점을 하고, 종례한 뒤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왔다. 은소의 교실 근처로 가자 뒷문에서 은소와 다른 반 친구들이 나왔다. 은소는 저를 기다리는 것 같은 서진과 친구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뒤쪽에서 친구들이 안 오냐며 물어 왔다. 잠시만, 이라고 대답한 은소가 서진에게 다가와 곤란하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서진아, 미안. 나 오늘 친구들이랑 어디 가기로 해서…….”
“알았어.”
“진짜 미안.”
서진은 별말 없이 등을 돌렸다. 야, 기은소! 두고 간다! 제법 목청이 큰 남학생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가. 은소의 목소리를 들은 서진은 중앙 계단 쪽으로 내려갔다. 실내화를 꺼내 신발을 갈아 신으려 할 무렵 1층 중앙 현관 쪽이 시끄러웠다. 대박, 개 잘생김. 여학생들의 대화 소리였다.
외부 사람이 온 건가? 고개를 들은 서진은 뜻밖의 인물과 눈을 마주쳤다. 기욱이였다. 기욱과 서진의 눈이 맞았다. 실내화를 한 손에 든 서진은 모르는 척 등을 돌렸다.
“강서진!”
기욱의 목소리가 넓은 중앙 현관을 울렸다. 여학생들과 몇몇 남학생들의 시선이 도망치려는 서진에게 닿았다. 서진은 마지못해 기욱을 바라봤다. 기욱의 손끝이 따라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때마침 반대편 계단에서 은소와 은소의 친구들이 내려왔다. 은소는 현관에 있는 기욱과 서진을 힐끗 바라봤다. 결국, 서진이 실내화를 주머니에 넣은 뒤 마지못해 기욱에게 다가갔다.
“대체 뭐 하자는…!”
“일단 가자.”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서진은 기욱이 어딘가 조급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날, 학교 앞에서 싸운 이후 기욱과 만난 적은 없었다. 문자로 몇 번인가 미안하다고 답장이 왔지만, 그 정도로 사과가 될 리는 없었다. 기욱의 손에 끌려가는 서진은 현관에 있는 은소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은소가 있었다. 기욱의 차는 정문 바로 앞에 있었다. 학생들이 단체로 하교하는 모습에 서진은 차 뒷문을 열었다. 뒷문이 열리지 않았다. 기욱이 조수석 쪽을 툭툭 건드렸다. 은소가 운동장에서 나오는 모습을 본 서진은 어쩔 수 없이 조수석에 탔다.
기욱이 서진의 벨트를 매 주려 몸을 기울였다. 서진은 혼자 할 수 있다며 신경질적으로 기욱의 손을 내쳤다. 서진이 벨트를 매자 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당신 미쳤어요?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요!”
“서진아. 흥분하지 말고. 진정해.”
“하, 진정하게 생기……. 왜, 왜요.”
학교 앞 신호등에 걸린 기욱이 다시 서진 쪽으로 다가왔다. 서진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기욱의 손이 서진이 맨 벨트 쪽으로 닿았다. 기욱은 꼬인 벨트를 풀어 준 뒤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운전대를 잡지 않은 다른 손이 서진의 뺨 근처를 쓰다듬었다. 사실은 머리를 만지려 했던 것을 잘못 만진 탓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뭘요.”
좀 들을 것이지. 분명 처음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기욱은 서진의 말대답이 점점 대담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런 불평 어린 말대답조차 기욱에겐 귀여운 장난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 낮게 한숨을 쉰 기욱이 우회전을 하며 대답했다.
“제대로 사과한다고.”
“그거랑 이거랑 대체 뭔 상관……. 젠장.”
서진은 짜증이 나 입을 다물었다. 서진은 기욱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기욱이 뭘 하든 서진이 알 바는 아니었다. 시험이 끝난 건 어떻게 안 거야? 서진은 기욱이 독심술에 이어 스토킹까지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혼자 구시렁구시렁하는 서진에 기욱은 혼자 입가를 올렸다. 고작 이런 일로 불평을 하는 서진을 보면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하는 사실을 느꼈다.
차로 왔기 때문일까? 서진의 집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집 근처에 적당히 차를 댔다. 기욱이 내린 서진을 향해 앞장서라며 대문을 힐끗거렸다. 서진이 대문을 열고 집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집까지 따라올 작정인지. 서진은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집 안으로 들어온 기욱은 가방을 내려놓는 서진을 보더니 자연스럽게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그 모습을 본 서진은 기가 막혔다. 팔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기욱이 활짝 열린 서진의 방문 쪽으로 말을 걸었다.
“짐 챙겨.”
“뭐라고요?”
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때마침 옷을 갈아입고 있던 서진은 기욱의 말을 반쯤 무시하고 계속해서 옷을 갈아입었다. 기욱은 집 밖으로 나가는 모양이었다. 집 밖에서 약간의 소리가 났다. 체육복으로 갈아입을까, 하던 서진은 기욱이 있는 것을 의식해 가벼운 사복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서진이 거실로 나오자 때마침 밖에 나갔다 들어온 기욱이 들어왔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캐리어를 들고 말이다. 캐리어? 캐리어가 왜 있지? 시험이 끝나기 무섭게 학교로 찾아와 일방적으로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캐리어를 들고 짐을 챙기라는 기욱. 서진은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욱은 서진에게 캐리어를 내밀었다.
서진은 캐리어를 쥐여 주는 기욱의 손을 뿌리치고 등을 돌렸다.
“서진아!”
“놔요. 누, 누나한테 전화할 거예요. 전화할 거라구요!”
서진은 못 참았다. 대체 이 무슨 난리란 말인가. 서진의 협박에 기욱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서진의 손은 이미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짧은 수화음이 이어지더니 서윤이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을 든 서진은 방으로 들어왔다.
― 누나! 지금 출근했어? 지금…, 그……. 그러니까…….
휴대폰을 붙잡은 서진은 뜻밖의 단어에서 말문이 막혔다. 기욱을 뭐라 불러야 하지? 그냥 형? 시헌이 형? 아니면 기욱이 형? 서진은 뒤늦게 단 한 번도 기욱을 제대로 된 호칭으로 부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 중요한 타이밍에. 서진은 거실에서 있는 기욱을 힐끗거렸다. 말을 더듬는 서진의 휴대폰 너머로 서윤의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 미안, 미안! 갑자기 그래서 놀랐지? 오빠가 꼭 비밀로 해 달라고 그러더라고.
― 비밀? 뭘?
― 어머, 아직 오빠가 말 안 했나 보네.
이어지는 서윤의 말에 서진은 할 말을 잃었다. 서윤과의 대화가 너무 갑작스러웠던 탓일까? 서진은 기욱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 누나, 제정신이야? 싫어. 안 가. 안 간다고!
어쩐지 최근에 서윤이 이상하게 여행 타령을 하더니만. 서진은 이 모든 게 다 기욱이 꾸민 짓이라는 걸 알고 어이가 없었다. 서윤이 그런 서진을 달랬다.
― 서진아. 그러지 말고 다녀와.
서진은 멋대로 짐을 챙기려는 기욱의 팔을 붙잡았다. 어쩐지 최근에 연락도 뜸하고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만. 서진은 기가 막혔다. 자긴 가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동시에 제대로 사과한다는 기욱의 한마디가 서진의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진짜 그거 하나 때문에? 서진의 눈에 기욱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서진은 방 안에 있는 기욱에게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 안 가. 싫어. 학교는? 나 내일 학교 가야 한단 말야.
시험이 끝났지만, 오늘은 목요일이었다. 서진은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며 학교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 누나가 선생님한테 얘기 다 했지.
― 그래도 싫어. 차라리 나중에 누나랑 갈 거야. 누나랑 가면 안 돼? 내가 왜…….
― 오빠가 너 신경 써서 그러는 건데 왜 그래. 응? 전공의가 사흘 동안 시간 빼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진짜 이럴 거야?
― 그러니까! 누가, 누가 멋대로……!!
― 강서진, 누나 생각해서라도 갔다 와. 알겠지?
― 알았어…….
― 그래, 착하다. 저녁에 전화하고. 누난 다시 일 들어갈게.
전화가 끊겼다.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기욱을 노려봤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데 안 가겠다고 발뺌할 수는 없었다. 기욱이 짐을 챙기라며 자리를 비켜 줬다. 서진은 기욱이 가져온 캐리어를 열었다. 캐리어 손잡이 근처로 아직 뜯지 않은 네임택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서진은 기욱이 참 어지간히도 지극 정성이구나 싶었다.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캐리어에 붙은 네임택을 뜯어냈다.
나흘이라고 했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확히 며칠 동안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서진은 적당히 며칠 동안 입을 옷과 잠바들을 챙겼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짐을 챙긴 서진이 거실로 나왔다. 기욱이 서진의 캐리어를 받아 들랴 하자 서진이 기욱의 손을 밀어냈다.
“할 수 있어요.”
“됐어.”
다시 서진을 옆으로 밀어낸 기욱이 캐리어를 차 안에 실었다.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오자 유리창 너머로 타라는 기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이 다시 차 안에 몸을 실었다. 서진은 일부러 유리창 쪽으로 머리를 기댔다. 차가 출발하고, 서진은 서윤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가기 싫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고속도로에 들어서는 차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기욱이 몇 번인가 말을 걸었지만, 서진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서진의 고집은 어지간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기욱도 포기한 모양인지 운전에 집중했다. 어디로 가는진 모르지만 한참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확실하게 알았다. 서진은 지난번 서윤과 떠들었을 때 했던 말을 생각하며 안색을 굳혔다. 그럴 리가 없겠지. 기욱이 서진에게 껌을 내밀었다.
“먹을래?”
“안 좋아하는데요.”
껌을 내려놓은 기욱의 손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속도를 살짝 줄인 기욱은 막대사탕을 이빨 끝으로 깐 뒤 서진에게 내밀었다. 서진은 기욱이 내민 사탕을 만지작거렸다. 껍질 정도는 혼자 깔 수 있는데 말이다.
“너 안 먹을 거잖아.”
젠장, 속마음이 걸린 서진이 신경질적으로 사탕을 입에 넣었다. 오렌지 맛이 났다. 단맛에 조금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서진이 사탕을 입에 물며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제주도.”
“제, 제주…….”
설마설마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담담하게 말하는 기욱의 말투에 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진짜 제주도? 진짜? 아니, 제주도가 통통배 타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 서진은 당황스러움을 넘어서 기가 막혔다.
아무리 서윤에게 모르고 한 말이라고 하지만, 진짜 제주도를 가려 할 줄은 몰랐다. 원래부터 제멋대로인 기질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답이 없을 줄이야. 서진은 벌써 두통이 올 것 같았다. 서진은 기욱의 내비게이션을 슬쩍 바라봤다. 왜 이 쉬운 걸 지금 봤을까. 서진은 다 먹은 사탕 막대를 씹었다.
“설마 해서 묻는 건데 그럼 지금…….”
“설마가 맞아.”
서진은 두통이 올 것 같았다. 서진이 이마를 누르며 창가에 몸을 기댔다. 약 줄까? 기욱의 말에 서진은 손을 저었다. 그 뜻이 아니라는 걸 기욱도 모를 리가 없었다. 실제로 기욱이 손을 댄 건 약이 아니라 근처에 먹다 남은 음료수였다. 기욱이 이미 식어 버린 물을 살짝 마셨다.
“휴게소 들르고 싶으면 미리 말해. 시간 맞춰야 하니까.”
“몰라요. 잘 거야.”
서진이 신경질적으로 등을 돌렸다. 벌써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기 무섭게 기욱에게 붙잡혀 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욱이 서진의 의자 옆을 손가락질했다.
“뒤로 넘겨서 자.”
“신경 꺼요.”
서진은 의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참 만에 간신히 의자를 반쯤 뒤로 넘긴 서진은 몸을 웅크렸다. 속도를 줄이고 뒷좌석으로 손을 뻗은 기욱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담요를 올려 주었다. 서진의 몸 위로 기욱이 꺼낸 담요가 툭, 하고 떨어졌다. 그러나 서진은 몸 위에 있는 담요를 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기욱이 손을 뻗으려 하자 서진이 기욱의 손을 쳐 내고 담요를 대충 덮었다. 시험 때문에 긴장이 풀렸던 탓일까? 아니면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탓일까? 서진은 피곤했고, 생각보다 쉽게 잠이 들었다.
* * *
차가 생각보다 막힌 탓인지 기욱과 서진은 아슬아슬하게 배에 오를 수 있었다. 간신히 차를 배에 싣고 온 기욱이 지친다며 한숨을 쉬었다. 밤을 꼬박 가야 하는 탓에 서진은 아직 출발하지 않은 배의 선실 침대에 앉아 있었다.
호화 크루즈라도 예약하면 어쩌나 싶었던 서진의 예상과 달리 배는 평범했다. 기욱이 차 안에서 가져온 500ml 물을 순식간에 비웠다. 기욱이 서진의 머리 위로 살짝 손을 올렸다. 서진이 그런 기욱의 손을 내쳤지만, 기욱은 개의치 않았다. 서진은 순간 기욱이 독심술을 쓰는 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이상한 기대를 하는 건지 원.
짐을 대충 구석에 박아 놓은 두 사람은 배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작지만 제법 그럴싸한 레스토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수기가 아닌 탓에 생각처럼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배의 규모와 크기를 본다면 배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의 인원이 결코 적은 인원은 아니었다.
배가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천천히 출발했다. 창가 쪽으로 자리하고 싶었던 서진의 바람과 달리 창가 쪽에는 모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창가에서 한 테이블 떨어진 자리에 앉은 서진은 계속해서 창문을 힐끗거렸다.
밤이라 그런지 바다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빛이 있는 항구가 멀어지는 건 꽤 볼만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레스토랑 안의 좁은 창문으로는 그 모습을 보는 데 한계가 있었다.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해 서둘러 내려왔던 기욱은 이럴 줄 알았다면 천천히 식사할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못한 기욱이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나가서 볼까?”
기욱의 말에 서진이 막 나온 음식을 가만히 바라봤다. 음식을 신경 쓰는 서진에 기욱은 개의치 말라며 손을 저었다.
“다시 시키면 되잖아. 어차피 비싼 것도 아니고.”
“그걸 말이라고 해요? 됐어요. 다 봤어요.”
기욱이 계속 나가자고 서진을 설득했으나 서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음식에 손을 댔다. 밥을 먹는 내내 창가를 힐끗거리는 서진이 기욱은 사뭇 불편했으나 본인이 나가지 않고 버티겠다는데 더는 별 방법이 없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갑판 위로 올라왔다. 초겨울 배의 갑판 위는 생각보다 추웠다. 서진은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난간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영락없는 어린애 같은 모습에 기욱은 입꼬리를 올렸다. 스스로 웃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기욱은 민망한 모양인지 목 너머를 살짝 긁적였다. 왜 하필 서진일까. 사과의 의미로 서윤에게까지 물어 가며 서진이 가고 싶어 했다던 제주도 여행까지 준비한 기욱은 스스로 생각하고도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다고 느꼈다. 선배와 교수에게 욕을 들어가면서까지 비운 시간이라는 걸 서진은 알 리가 없었다. 물론, 기욱도 그런 사실을 일일이 입에 올릴 이유는 없었다.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달리는 바다를 보는 서진의 모습에 기욱은 그간 있었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여자 친구와 많은 여행을 다녔던 기욱이지만 이런 기분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정체에 대한 기욱의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난간에 몸을 기댄 서진이 재채기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서진이 소매로 흐르는 콧물을 살짝 닦았다. 서진은 민망한지 기욱의 시선을 피했다. 서진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기욱은 뒤늦게 서진의 겉옷이 생각보다 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욱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서진의 어깨 위로 올렸다. 묵직한 코트의 무게에 깜짝 놀란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안 추워요.”
“거짓말 치지 말고 걸쳐. 나중에 옷 하나 사 줄 테니까.”
서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기욱의 코트는 생각보다 컸고, 따듯했다. 서진은 순식간에 파란색 셔츠 차림이 된 기욱을 힐끗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이 기욱에게 몇 번이나 코트를 내밀었다. 기욱은 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상대방의 말을 안 듣기는 기욱이나 서진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진은 기욱의 코트에 얼굴을 살짝 묻었다. 조금 전까지 기욱이 입고 있어서 그랬던 건진 모르겠으나 따듯한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배가 회전을 하는 모양인지 바다가 흔들렸다.
서진의 시선이 배 밑 바다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들어갈 생각을 하질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 좋은가 보다 싶었다. 기욱의 시선을 눈치챈 서진이 시선을 아래로 속였다.
“비웃지 마요.”
“비웃는 거 아냐.”
“누나한테 들었으면서. 내가 배 처음 탄다는 거.”
서진이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뭘 그 정도로 그러는지 원. 기욱은 서진의 몸을 살짝 옆으로 붙였다.
“그럴 수도 있어.”
기욱은 목이 말랐다. 기욱은 음료수를 사 오겠다며 선실 안 매점으로 들어갔다. 춥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음료수라니. 이제 좀 몸이 나아질 판에 기욱의 말은 서진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저 사람은 추위를 안 타는 걸까? 참 별생각이 다 들었다. 음료수를 사러 간다는 기욱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서진이 알기론 매점은 그리 멀지 않을 텐데 말이다. 슬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서진은 기욱의 잠바를 걸친 채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 근처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요. 아까 레스토랑에서 봤거든요. 조금만 얘기해요. 네?”
“그게 좀…….”
저녁을 먹을 때 기욱과 서진의 옆에 앉은 젊은 여자들이었다. 친구가 관심이 있다며 들이대는 여자에 기욱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서진이 인상을 구겼다. 배가 거칠게 흔들렸다. 균형을 잡지 못한 서진이 근처에 있는 물건을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본 기욱이 재빨리 뛰어와 서진을 부축해 주었다. 뭐 때문에 늦었나 했더니 여자라니.
서진은 그걸 거절하지 못한 기욱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진의 따가운 시선을 본 기욱도 한숨을 쉬었다. 거절하지 않은 게 아닌데. 그 사실을 말해도 쉽게 믿어 줄 것 같지 않았다. 여자와 여자의 친구가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기욱의 잠바를 입고 있는 서진을 본 여자가 손을 흔들었다. 기욱과 같이 식사를 했던 남학생이라는 걸 여자가 모를 리 없었다.
“어머, 동생이에요? 귀여운데. 중학생? 고등학생?”
“…….”
“여자 친구 동생이에요.”
서진이 입을 다물자 보다 못한 기욱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 말에 여자와 여자의 친구가 서로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아, 여친이랑 오셨구나. 저흰 또 식당에서 둘밖에 없어서 둘이 온 줄 알았어요.”
분위기가 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은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서진이 겉옷을 벗어 기욱에게 내밀었다. 기욱이 코트를 대충 걸쳤다. 서진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욱이 손을 뻗자 서진이 다시 기욱의 손을 쳐냈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기욱은 서진이 언제쯤 가만히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계속된 거절, 그것도 그거대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언젠가 한 번은 가만히 있겠지 하는 생각? 남자란 거절당하면 당할수록 승리욕을 불태우는 법이었다. 기욱은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시치미를 뗐다.
“뭘, 거짓말한 건 아니잖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배가 또다시 흔들렸다. 기욱이 서진의 넘어질 뻔한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아?”
물어오는 기욱의 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욱이 안으로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서진은 쉽게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단순히 균형을 잃은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안색이 파래지는 서진의 모습에 기욱은 설마 하며 인상을 구겼다.
“나, 나 잠깐… 우윽!”
예상했던 결과에 기욱은 이마를 짚었다. 근처 사람들이 기욱과 서진을 힐긋 보고 있었다. 몸을 살짝 숙인 뒤 서진과 시선을 맞춘 기욱이 서진의 얼굴이며 목 근처를 만졌다. 식은땀이 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열도 있고, 이런 상태에서 뱃멀미까지 있으니 당연히 그럴 만했다.
기욱은 처음 재채기를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기욱도 의사로 온 것이 아니니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서진의 몸 상태에 대해 너무 무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다 못한 기욱이 서진을 안았다. 무슨 공주님 안기처럼 된 서진이 발버둥을 쳤다.
“하윽, 내려 줘요. 걸을 수 있어요.”
“가만히 있어.”
서진이 계속해서 발버둥을 쳤지만 그럴수록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된다는 걸 깨달을 뿐이었다. 결국, 서진이 기욱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차라리 기욱이 이대로 빨리 선실로 돌아가는 편이 훨씬 나았다. 서진은 기욱에 의해 침대에 눕혀졌다. 조금 살 것 같다가도 금세 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뱃멀미뿐 아니라 몇 시간 전 식당에서 먹은 음식도 한몫했다.
빌어먹을. 배를 한 번도 안 타 봤으니 뱃멀미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있나. 기욱은 서진의 상태가 조금 안정됐을 무렵 물 건네주고 선실 밖으로 나갔다. 뭘 하러 가는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기욱을 부를 기운조차 남지 않았다. 몇 번 토하고 나니 슬슬 몸이 피곤해졌다.
서진 대신 바깥 정리를 마친 기욱이 돌아왔다. 캐리어를 뒤진 기욱은 서진에게 약을 내밀었다. 정말 혹시나 해서 급한 대로 근처 약국에서 대충 사 온 상비약들이었다. 서진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기욱이 알약을 내밀었다. 기욱의 알약을 받으려던 순간 서진의 손에 힘이 풀렸다. 기욱은 알약이 바닥으로 떨어질 뻔한 걸 간신히 붙잡았다. 기욱은 서진의 손에 있는 물을 빼앗아 한 모금 마신 뒤 알약을 입에 넣었다.
“자, 잠깐…! 으읍!”
물을 타고 서진의 목에 반강제적으로 알약이 넘어갔다. 서진이 됐다며 기욱의 몸을 밀어냈다. 난데없는 키스에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약을 먹이기 위한 짓이라 해도 기욱의 행동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기욱은 입가에 흐르는 물을 털어 냈다.
“너 기운 없잖아.”
“그래도 그렇지…….”
“어차피 선실 안이잖아. 아무도 안 봐.”
“몰라요.”
서진이 이불을 덮고 등을 돌렸다. 선실의 침대는 생각보다 좁았고, 서진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는 지금 기욱은 달리 누울 곳이 없었다. 서진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 이틀 날을 새는 것 정도는 익숙한 기욱에게 이 정도쯤이야.
아무렇지 않았다. 중간중간 서진의 상태를 살폈다. 생각보다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은 서진의 상태에 기욱은 이마를 내짚었다. 탈수 증상도 좀 있는 것 같고. 아침이 되어야 도착하니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기욱은 조용히 선실을 나갔다.
간신히 선잠이 들었던 서진은 밖으로 문이 열리는 소리와 인기척에 잠이 깼다. 기욱과 낯선 사람의 인기척이었다. 이마 위로 손을 올린 기욱이 자라며 서진의 눈을 감았지만, 방 안으로 들어온 낯선 남자에 서진은 눈을 떴다.
“그러니까 직접 오시라고 했잖아요.”
“의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신분증도 보여 줬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긴 배 안이지 댁 병원이 아니란 말입니다.”
뭔가 서진이 모르는 실랑이가 이어지는 것 같았다. 서진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기욱을 바라봤지만 기욱은 계속 신경 쓰지 말고 자라며 허공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 난리를 쳐 놓고 어떻게 자라는 건지 원. 대화로 보아 의무실 관계자 같았다. 몇 번의 대화가 더 오고 가더니 기욱이 결국 마음대로 하라며 손을 들었다.
침대에 반쯤 앉은 서진과 시선을 맞췄다. 링거를 달아 주겠다고 했다. 벽에 몸을 기대 팔짱을 끼고 있는 기욱은 남자의 행동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인지 인상을 찌푸렸다. 하긴, 국내에서 2번째로 큰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기욱의 눈에 의전원 출신에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 병원의 고작해야 인턴―수련의 출신인 남자의 행동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남자는 기욱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서진의 팔에 바늘을 꽂아 넣었다. 바늘은 생각보다 아팠다. 서진이 인상을 찌푸림과 동시에 기욱의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자가 바늘을 빼고 다시 꼽으려 하자 기욱이 남자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게, 이 아이 생각보다 혈관이 좁아서…….”
기욱은 남자가 또다시 서진의 팔에 멋대로 바늘을 넣는 짓을 하게 둘 생각은 없었다. 남자를 밀어낸 기욱은 익숙하게 서진의 혈관을 잡아냈다. 아프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눈 깜작할 사이에 바늘을 밀어 넣는 기욱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기욱의 속도는 일 분여 동안 머뭇대며 혈관을 탓하는 남자의 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서진의 혈관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상인의 범주에 들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기욱은 남자의 말이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대충 튀어나온 위쪽 벽에 수액을 건 뒤 제대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기욱은 남자가 가지고 온 쓸모없는 의료 자재들을 남자의 품에 안겼다.
“얜 실험용이 아니라고.”
* * *
배에서 내린 서진과 기욱은 곧장 예약해 두었던 호텔로 들어갔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었지만 정작 서진은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기욱의 차에서도 거의 반 죽은 사람처럼 잠만 잤던 서진은 어떻게 호텔까지 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은 채 잠이 들었다.
새것 같은 푹신한 침대는 딱딱했던 선실의 침대보다 훨씬 좋았고, 서진을 금방 잠이 들게 하기 충분했다. 아침이었지만, 당장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서진에 기욱 또한 침대에 누웠다. 서진의 간호를 하느라 날을 꼬박 새운 상태로 운전해 왔기에 기욱도 피로가 쌓인 참이었다.
길지 않은 잠이었지만 서진은 꿈을 꿨다. 서윤과 함께 집을 나온 후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늦게까지 일을 하다 돌아오는 서윤을 데리러 역 근처로 나가던 길이었던 것 같았다. 서윤은 늘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서윤을 보고 싶었던 서진은 그 시간이면 역을 향해 걷고는 했다.
번화가가 가득한 역은 낮에는 청춘들이 모이는 만남의 광장이지만 저녁 무렵엔 유흥가나 다름없는 거리로 변하고는 했다. 익숙하게 술에 취해 떠들어 대는 사람들을 피해 거리를 걷고 있던 어린 서진은 묘한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남자와 여자의 진한 정사, 꿈속의 서진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서진에겐 그 풍경이 낯이 익지 않았다. 싫다고 반항하던 누나와 덤벼드는 아빠의 모습과 그것은 유사하게 닮아 있었다. 멍하니 서 있던 서진과 남자의 눈이 맞았다. 깜짝 놀란 서진은 도망쳤고, 동시에 눈을 떴다.
커튼의 창문 사이로 늦은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바다 물소리와 바람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꿈이구나. 서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너무나 생생한 꿈에 서진은 한동안 멍하니 움직일 수 없었다. 꿈속의 남자는 몇 번이나 도망치는 서진을 불렀다. 잠깐이지만 서진은 그 사람이, 그 목소리가 기욱을 닮았다고 느꼈다.
‘그럴 리가.’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적 서윤을 데리러 자주 역에 나간 건 사실이지만 그런 일은 기억에 없었다. 아니, 뭔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에라 모르겠다. 서진은 더 이상 생각해 봤자 머리가 아프다며 고개를 저었다. 서진은 이마를 살짝 만졌다.
머리도 덜 아프고, 배에서 내린 지 시간이 좀 지난 탓인지 멀미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한숨 푹 자고 나니 개운했다. 시험의 스트레스와 뱃멀미, 이런저런 요소가 복합적으로 겹친 몸살이었던 모양이었다. 몇 시지? 방 안을 둘러보며 시계와 휴대폰을 찾던 서진은 뒤늦게 이불 안에 뭔가가 더 있다는 걸 느꼈다.
얇은 옷을 경계로 살이 맞닿는 느낌이 들었다. 이불 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기욱이었다. 서진은 눈을 감고 있는 기욱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잘생겼다. 서진은 기욱을 볼 때면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딱히 그게 기욱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여자가 예쁜 여자를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서진에게 기욱은 당장 카메라를 들이대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왜 이렇게 자신 같은 보잘것없고 평범한 학생에게 집착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서진은 기욱이 깰까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런 서진의 움직임을 눈치챘는지 기욱이 서진의 허리를 잡아 안았다.
기욱의 팔에 붙잡힌 서진은 순식간에 침대 안으로 이끌려 들어와야만 했다. 목 옆으로 기욱의 얕은 숨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 자못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놓아주…….”
“더 자.”
기욱이 서진의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트렸다. 안 그래도 씻지 못해 엉망인 머리가 기욱의 손에 의해 더욱 엉망이 되었다. 자. 괜찮아. 서진에게 말하는 건지 잠꼬대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문득 어제 일을 생각한 서진은 기욱이 자는 기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아무리 2년 차 전공의로 밤샘에 익숙해져 있다고는 하나 기욱 역시 하루 이상 잠을 자지 못하면 피곤한 건 똑같았다. 게다가 서진 또한 아직 잠이 완전히 깬 것도 아니었다.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바닷소리를 들으며 서진도 눈을 감았다.
서진이 다시 잠에서 깬 건, 물소리가 들릴 무렵이었다. 그 소리가 바닷물 소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 서진은 잠에서 깼다.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나는 욕실 쪽을 바라봤다. 마침 샤워를 마치고 나온 기욱이 가운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오후 한 시가 좀 넘어 있었다. 기욱은 욕실을 손가락질했다.
“씻어.”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이 덜 깬 서진이 휘청거리자 기욱이 재빨리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고마워요.”
“어, 그래.”
서진이 담담하게 말하며 욕실 쪽으로 들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물소리가 들렸다. 머리의 물기가 수건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욱은 뺨을 살짝 긁적였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고맙다는 서진의 말이 왠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 기욱은 서진의 그 한마디 제법 나쁘지 않다는 걸 느꼈다. 고작 의례적인 말에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두 사람은 호텔에 있는 식당에서 적당히 점심을 먹은 후 느지막이 밖으로 나왔다. 날이 쌀쌀하긴 했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햇볕 탓에 마냥 춥다고 할 만한 날씨는 아니었다. 기욱은 서진을 데리고 번화가에 있는 한 면세점에 들어갔다.
서진은 서울에도 있는 면세점을 제주도까지 와서 가는 기욱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막상 제주도에 온 서진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부터 뭘 할거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다. 서진은 당사자인 기욱이 여유로우니 그걸로 된 거로 생각했다.
면세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진은 기욱의 목적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옷을 고르라는 것이었다. 배에서 옷이 어쩌고 말을 한 것 같은 기억이 있긴 했지만, 서진은 그냥 하는 말일 거라며 흘려 넘겼다. 설마 기욱이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고 있는 줄 몰랐던 서진은 무작정 옷을 고르라는 기욱의 행동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무작정 가게 안으로 들어선 기욱은 서진이 고를 때까지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걸음을 멈춘 채 서진만을 보고 있었다.
팔짱을 끼며 여유롭게 벽에 기댄 기욱을 지나가는 여성들 몇 명이 힐끗대며 지나갔다. 기욱의 눈치가 보인 서진이 마지못해 아무 잠바나 집어 들었다. 그러나 곧 옷에 걸린 네임텍에서 보이는 가격에 다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면세점 내 겨울 메이커 잠바란 생각보다 값이 나가는 것이었다. 기욱이 머뭇대는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맘에 안 들면 다른 가게 갈까?”
“그건 아닌데 그…….”
너무나 태연하게 다른 가게에 대해 말하는 기욱에 서진은 차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기욱의 집안에 대해서는 서진도 알았다. 재벌까지는 아니더라도 의사라는 사람들이 제법 돈이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제주도로 오는 배편이며, 숙소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나왔는지조차 모르는 서진은 무작정 기욱에게 이런 걸 받기가 부담스러웠다.
기욱이 서진 대신 가게 안의 옷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중에서 서진이 계속해서 보고 있던 옷 하나를 집어 들었다. 기욱의 눈치에 못 이겨 확인했던 옷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이었지만, 가격 때문에 가장 먼저 내려놓았던 옷이었다.
서진이 기욱을 말리려 했으나 기욱이 직원을 불러 카드를 꺼내는 속도가 좀 더 빨랐다. 기욱은 순식간에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기욱은 옷에 붙어 있는 네임택을 손으로 가려 뜯은 뒤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서진이 무엇을 신경 쓰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기욱이 새 잠바를 서진의 품에 안겼다.
“돈은 벌면 되는 거야.”
“그 말이 그게…….”
이 상황에서 말대답해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서진은 말끝을 흐렸다. 기욱은 원하는 건 뭐든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의사라는 직업 탓일까? 아니면 그런 집안에서, 그런 부모님을 보고 자라서 그런 걸까? 대게 기욱이 원하는 건 물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정이야 어떻든 기욱은 타인의 감정을 원했다. 마치 뭔가가 결여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통해 그것을 채우려는 것 같은 맥락이었다. 돈이니 하는 것들은 그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제주도에 오는 것만 생각했지 기욱이라고 대단한 걸 계획한 건 아니었다. 한적한 도로에 기욱은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서진의 시선은 창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분명 다른 여자와 여러 번 왔던 곳인데도 어째서인지 느낌이 달랐다. 차로 삼십 분 정도를 달려 작은 한옥마을에 도착했다. 이것저것 하고 나니 네 시가 넘었다. 원래부터 복잡하게 관광하는 걸 싫어하는 편인 기욱은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다행히 서진은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걸음을 빨리하며 신기하다는 듯 둘러보는 서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간의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았다. 기욱은 근처 편의점에서 적당히 산 물을 마시며 멀리 있는 서진을 바라봤다. 어머, 혼자 왔어? 여행을 온 모양인지 여성 몇 명이 서진에게 다가왔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기욱은 자연스럽게 떠드는 서진이 사뭇 불편했다. 기욱이 걸음을 빨리해 서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누나가 간호사야? 대단한데?”
“처음엔 아주 힘들었다는데 지금은 괜찮대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누나랑 오고 싶…….”
“서진아. 가자.”
기욱이 서진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서진이 좀 더 있다 가자고 했으나 기욱은 서진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서진이 마지못해 고개를 숙인 뒤 기욱의 뒤를 따랐다. 기욱은 서진이 왜 이렇게 시큰둥한지 알 수 없었다. 길을 걷는 내내 기욱은 물을 홀짝일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서진은 마음대로 하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작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한복 대여점이었다. 서진은 근처에 한복을 입은 사람이 유독 많았던 게 저것 때문이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을 슬쩍 본 기욱의 걸음이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기욱의 의도를 알아차린 서진이 걸음을 멈췄다. 우연이든 우연이 아니든 별로 기분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젠장, 서진은 대체 서윤이 기욱에게 어디까지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안 갈래요.”
기욱이 싫다며 고개를 젓는 서진과 유리 너머로 가득 진열된 한복들을 번갈아 가며 힐끗 바라봤다. 기욱은 이런 일에서는 상대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편이었지만, 어째서인지 평소엔 없는 장난기가 들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유독 서진을 상대하면 가끔 성격에 없는 장난을 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기욱이 싫다는 서진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한 번만 입어 봐.”
“그러니까 싫다구요.”
“사진 찍어서 서윤이한테 보여 주면 되잖아.”
서윤의 이름이 나오자 반항하던 서진의 팔에 힘이 풀렸다. 서진의 얼굴에는 고민이 가득했다. 서진을 달래기 위해 무의식중에 꺼낸 말이었지만 기욱은 왠지 서윤을 통해 서진을 달래야 한다는 것이 사뭇 불편했다. 하, 설마 그럴 리가. 머뭇대던 서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 사진만이에요.”
“알았어.”
들어가는 내내 사진만 찍겠다는 서진의 말을 기욱은 흘려 넘겼다. 가게 안은 제법 한산했다. 개량 한복을 입은 여주인이 서진과 기욱을 반겼다. 막상 들어오니 신기하긴 한 모양인지 서진은 한복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주인과 가격에 관해 이야기하던 기욱은 서진이 구석에서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욱이 다가가자 서진이 흠칫 놀라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걸로 해.”
기욱은 서진이 말리기도 전에 여주인을 불렀다. 여주인이 재빠르게 기욱이 말한 한복을 꺼내 주었다. 면세점에서도 느꼈지만, 서진은 기욱의 행동에 거침이 없다고 느꼈다. 그 원인에는 기욱의 급한 성격도 한몫했다. 기욱은 서진에게 한복을 안기다시피 했다. 어쩔 수 없이 한복을 받은 서진이 마지못해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기욱이 사 준 겉옷이 아직은 어색하기만 했다.
겉옷을 걸어 놓은 서진은 뒤늦게 한복을 입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뭘 어떻게 입어야 하지? 겨울용이라 유독 더 많은 한복에 서진은 탈의실 천 너머를 힐끗댔다. 왠지 어설프게 입었다가는 비웃음만 당할 것 같았다. 괜찮다는 말을 하며 속으로 웃음을 참고 있을 기욱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짜증이 났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욱이 탈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좁은 탈의실은 기욱이 들어오기 무섭게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좁은 탈의실 벽에 기댄 서진의 어깨 너머로 기욱의 손이 올라와 있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서진은 금방이라도 기욱이 무슨 짓을 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기욱이 긴장하지 말라며 서진의 손에 들린 한복을 가져갔다.
“어머, 학생! 잘 어울리는데? 입기도 잘 입었고.”
서진이 커튼을 걷고 밖으로 나오자 여주인의 감탄이 이어졌다. 기욱이 여주인의 반응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녹색의 기다란 한복은 화려하지도 않으며 단아한 느낌이 들었다. 막상 입어 보니 조금 두꺼울 뿐 무게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으며 움직이는 데도 큰 불편함이 없었다.
서진이 가게를 둘러보는 기욱을 불렀다. 사진만 찍자고 했던 처음과 달리 가게 안으로 들어온 기욱의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여유가 있었다. 서진이 그런 기욱을 재촉했다.
“빨리요. 사진.”
평소에 입지 않던 옷이라 그런지 서진은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기욱이 알겠다며 서진의 옆에 섰다. 기욱이 가볍게 메고 나온 가방에서 디지털카메라가 나왔다.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기욱의 카메라에 서진은 한숨을 쉬었다. 서진은 유독 달라붙는 기욱을 살짝 옆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기욱의 손이 서진의 허리를 뒤로 안으며 강하게 잡아당겼다.
“사진 안 보이잖아.”
“그냥 저만 찍으면 되잖아요.”
“그렇게도 찍을 거야.”
서진은 이제 기욱을 말릴 기운이 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라지. 여주인은 때마침 들어오는 다른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욱은 가볍게 몇 장의 사진을 더 찍은 후에야 서진을 놓아 주었다. 서진은 기욱이 사진을 고르고 있는 틈을 타 다시 탈의실로 들어가려 했다. 어쨌든 한시라도 빨리 한복을 벗고 싶었다. 그런 서진을 본 기욱이 재빨리 팔을 낚아챘다.
“왜요?”
“가자.”
“자, 잠깐만요! 사진만 찍는다 그랬잖아요!”
기욱이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사실 기욱에겐 처음부터 서진을 사진만 찍게 하고 돌려보낼 생각 따위는 없었다. 모처럼 예쁘게 입혀 놨는데 사진만 찍고 버릴 수는 없었다.
“싫어요.”
“왜.”
“아, 싫다구요.”
기욱과 서진의 실랑이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양쪽 다 양보할 수 없는 모양인지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기욱은 생각보다 끈질긴 서진에 곤란해하는 중이었고, 서진은 끝까지 나가자는 기욱에 짜증이 나 하는 중이었다. 급기야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여주인이 끼어들었다.
“뭣하면, 총각 자네도 입어 보지 그래?”
“네?”
“거 혼자만 그렇게 입고 있으니까 그렇지. 내 싸게 해 줄게. 딱 보니 키도 훤칠하고, 인물도 좋은 게 어울리겠구먼. 학생도 그렇게 생각하지?”
기욱과 서진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입술을 살짝 내민 서진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술이라는 걸 알지만서도 서진은 여주인의 말대로 혼자만 입고 있는 게 살짝 못마땅했다. 서진은 한복이 있는 진열장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형도 입으면 생각해 볼게요.”
“…….”
예상치 못한 말에 기욱의 말문이 막혔다. 혀, 뭐라고? 기욱은 방금 들은 말을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해야 했다. 낯선 한복만큼 낯선 칭호가 불편했던 건 서진도 마찬가지였다. 서윤에게 기욱을 부르는 호칭으로 말문이 막혔던 것처럼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밖에서 보는 시선도 있고. 기욱이 황당한 얼굴로 서 있자 서진이 다시 말했다.
“싫음 말구요.”
“입어. 입을게.”
옆에 있던 여주인이 들어가서 빨리 고르라며 기욱을 재촉했다. 기욱이 마지못해 안쪽에서 적당한 한복 한 벌을 가지고 왔다. 입는다고 챙겨 탈의실로 들어오긴 했지만, 기욱은 여전히 서진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질 못했다. 형이라니. 사실 형이라는 칭호가 대단한 건 없었다. 집안에선 늘 듣는 말이기도 하고, 밖에서도 친한 동생들에게서 종종 듣는 말이기도 했다. 일상적인 지칭일 텐데 어딘가 느낌이 달랐다. 사실 기욱은 그동안 서진이 저를 뭐라 부르든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그런 평범한 연인도, 단순한 형 동생도 아닌 관계를 뭐라고 지칭할 수 없는 것도 있었고. 서진이 기욱을 뭐라 부르든 두 사람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서진의 입에서 나온 형이라는 단어는 기욱의 그런 감정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조금 틀린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의 감정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대충 혼자 할 수 있는 만큼 옷을 갈아입은 기욱이 밖으로 나왔다.
“내가 뭐랬어. 잘 어울린다고 그랬잖아!”
기욱의 모습을 본 여주인이 밖으로 나온 기욱을 반겼다. 여주인이 조금 틀어진 부분을 바로잡아 주자 그럭저럭 괜찮은 모습이 되었다. 밝은 연녹색에 평범하고 단아한 서진의 한복과 달리 기욱의 한복은 짙은 남색에 검은색에 이것저것 수가 박혀 있는 제법 화려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마음대로 하라며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막상 기욱의 화려한 한복을 보고 있자니 제가 고른 한복이 초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기욱은 진열대 옆에 놓인 삿갓을 살짝 썼다.
어차피 입을 거 조금 멋을 낸다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장신구를 생각하지 못한 서진의 인상이 다시 구겨졌다. 누가 봐도 빌려 입어 흉내만 낸 것 같은 서진의 모습과 달리 기욱은 마치 진짜 양반처럼 그 모습이 제법 어울렸다. 기욱과 비슷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남자들 또한 서진과 마찬가지로 그냥 그런 모습임을 비교할 때 서진이 이상한 게 아니라 기욱이 정상이 아닌 것에 가까웠다.
뭘 해도 되는 인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차이가 나니 서진은 어딘가 울적해졌다. 서진은 계산을 하는 기욱의 옆으로 다가갔다. 슬슬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기욱의 손이 또다시 옆 진열장에 닿았다. 서진은 이쯤 되면 신이 난 건 자신이 아니라 기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욱의 손이 제법 큼지막한 부채를 만지작거렸다. 기욱이 손목을 살짝 움직이자 부채가 정갈한 소리를 내며 그 형태를 갖추었다. 가볍게 부채를 흔드는 모습이 서진은 뭔가 익숙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울리네요.”
“어?”
서진의 중얼거림을 들은 기욱이 고개를 돌렸다. 아차,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말하고만 서진이 재빨리 사태를 수습했다.
“그게 그……. 그 의미가 아니라…….”
얼굴을 붉히는 서진에 기욱은 다시 부채를 접었다. 서진이 말하고 싶었던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서진과 기욱은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걸었다. 다행히 날이 풀린 탓에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기욱은 여주인에게 빌린 부채를 허공으로 살짝 흔들며 말했다.
“중학교 때 말야. 학교 축제 때 부채춤 했었거든.”
몇 번인가 부채를 흔들던 기욱이 다시 부채를 접었다. 생각 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서진이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거, 보통 남자가 해요?”
서진도 학교 축제에 대한 추억 정도는 있다. 사실 추억이라고 해 봤자 길어야 3~4년 전 이야기였다. 딱 봐도 돈 많은 중학교에서 돈 많은 행사를 했을 기욱과 달리 서진의 학교 축제는 기껏해야 몇몇 학생들의 춤과 끼 있는 소수 아이의 무대로 이뤄져 있었지만 말이다.
부채춤이라면 서진의 학교에도 있었다. 정식으로 관련 선생님을 모셔서 한 거라고 하기보단 여자아이들 여러 명이 모여 자기네들끼리 인터넷을 보고 연습한 거라 그랬지만. 편견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보통 여자가 하니까. 남자가 하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기욱이 그랬다고 하니 더더욱 상상이 가지 않았다. 기욱이 부채 끝을 얼굴 근처로 가져다 대며 생각했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지만, 기욱에게 학창 시절의 추억은 꽤 나쁘지 않은 기억이었다. 재미있었지. 그날은 학교에서 축제에 할 무대 행사를 정하는 날이었다. 기욱의 학교는 모든 학생이 의무적으로 한 개 이상은 참여해야 했다.
“그날 친구랑 학교 빼먹고 술 먹으러 갔거든.”
그 더운 날에 무거운 짐을 메고 무작정 지방에 있는 펜션까지 내려간 대책 없는 패기도 대단했지만, 문제는 주말을 건너고 등교한 후였다. 다음 날 기욱을 포함해 같이 놀러 간 친구들이 단체로 교무실에 내려가 선생님에게 혼이 났었다. 담임선생님이 뒤늦게 축제에 뭘 하고 싶냐고 물어 왔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미 인기가 있거나, 조금 몸이 편한 무대는 인원이 다 찬 상태였다. 어차피 원하는 걸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은 기욱은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여자 인원 부족하다고 하라던데?”
본의 아니게 기욱의 학창 시절 일탈 행위를 들은 서진은 기가 막혔다. 정상적인 학창 시절을 보내진 않았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런 예상은 무서우리만큼 잘 맞아떨어졌다. 학교의 문제아라고 하면 기욱의 이름이 빠진 적이 없었다. 중학교 2학년까지는 공부에도 손을 놓아 늘 방학 때 학교에 나와 보충 수업을 받기도 했다. 보충 수업을 받는 학생 또한 기욱처럼 늘 정해져 있어서 수업이 끝나면 근처 학교 여학생들과 다시 놀러 가고는 했었다. 그건 그거대로 학기 중과는 다른 재미가 있었다.
뭐, 대부분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연락이 끊긴 터라 그놈들도 이젠 뭘 하고 지내는지 알 수는 없었다. 서진은 그런 기욱이 지금은 수험생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아는 대학교에서 의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서진은 말은 저렇게 해도 할 때는 열심히 했다고 하니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 부채춤 말야. 생각보다 할 만했어. 남자는 나 혼자였지만.”
“쪽팔리지 않았어요? 왠지 저라면 그랬을 것 같은데.”
“별로? 바보 같은 탈 쓰면서 괴상한 연극에 어울리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솔로도 했었는데 보여 줄까? 뭐, 너무 오래돼서 다 기억은 안 나지만.”
기욱이 웃으며 서진 쪽으로 부채를 흔들렸다. 서진이 기욱의 부채가 거슬린다며 옆으로 쳐 냈다. 평범하게 학창 시절에 대해 떠들며, 대화하고 걷는 기욱의 모습은 여타 평범한 20대 후반의 청년과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무조건 나쁜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시헌과 있었던 일을 기욱에게 걸리고 난 뒤 서진은 불과 일이 주 만에 기욱과 이런 이야기를 할 거란 생각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직도 그날의 기욱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기욱은 그런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이 진짜일까. 그것만큼 어려운 답이 없었다.
기욱과 서진은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거리를 걸었다. 한복을 반납하고 바로 근처에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가벼운 한식당이었다. 룸은 없고 오픈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유리 벽면 너머로는 이런저런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제법 나쁘지 않은 풍경이었다. 종일 돌아다니느라 서로 배가 고팠던 터라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한참 밥을 먹고 있던 기욱과 서진 근처로 낯선 여자 두 명이 다가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안쪽에서 식사했다고 하지만 서진은 둘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 봤자 저에게 용무가 없을 거라는 걸 안 서진은 고개를 숙여 나물을 마저 먹었다. 머리 위로 기욱과 여자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요. 혹시 어디서 머무세요? 저희가 이 근처 호텔에 머무는데. 혹시 괜찮으면 저녁에 술 한잔해요.”
술이란 말에 기욱이 서진을 힐끗 바라봤다. 여행에 왔는데 술이 땡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여자를 끼고 논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서진에게 비칠 이미지를 생각하면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기욱이 살짝 아쉬운 듯한 억양으로 대답했다.
“이 친구가 아직 미성년자라서.”
“남동생이에요?”
“아뇨, 여친 동생이요.”
기욱이 손을 들어 물을 마셨다. 기욱의 손가락 사이로 얼마 전에 서윤과 맞춘 14k 금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마지못해 마실 생각이 있으면 연락을 하라며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봐, 내가 말했잖아. 있을 거라고 했지?”
“그래도 혹시나 했지.”
등을 돌린 여자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들이 가게에 나가기 무섭게 기욱은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있는 휴대폰을 닫았다. 서진은 기욱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봤다. 어제 배를 탈 때만 해도 저런 건 없었다.
진짜로 서윤과 맞춘 건지, 아니면 급하게 산 건지 서진이 알 길은 없었지만 어설프게 구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나았다.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무렵엔 주변도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친 서진이 물을 홀짝였다.
문득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기욱은 잘 다려진 하늘색 정장 셔츠 소매를 접어 올렸다. 올라간 셔츠 아래로 기욱의 잔근육이 진 팔이 눈에 들어왔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근육의 몸은 과연 여자들이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꿈속의 남자―서진이 기욱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도 눈앞의 기욱과 비슷한 차림이었다. 물론, 남자는 기욱처럼 정장 셔츠가 아닌 흔한 대학생들이 입는 가벼운 청남방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눈앞 기욱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꿈속 남자를 생각나게 하였다.
“있잖아요.”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해 봐.”
서진이 고개를 젓자 기욱이 말해 보라며 계속해서 재촉했다. 몇 번의 경험으로 서진은 기욱과 이런 식의 말싸움이 별다른 효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진도, 기욱도 서로 자존심이며 기가 너무 강한 탓이었다. 서진이 지고 들어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서진이 마지못해 뺨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고요.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어요? 제 말은 그. 시헌이랑 만나기 전에……. 더 예전에요.”
서진은 제가 말하고도 어딘가 민망했다. 어디서 만난 적 있냐니. TV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오래된 작업 멘트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욱이 얼마 남지 않은 밥을 먹은 후 고개를 들었다. 기욱의 침묵은 생각보다 길었고, 그것은 서진을 제법 불편하게 만들었다. 기욱은 마음 같아서 그날 일을 기억하냐고 묻고 싶었다.
두 번 다 술에 잔뜩 취한 기욱 또한 그 소년이 100% 서진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그 남학생이 서진이라는 것을 한 번에 알았지? 기욱은 의심 없이 그 남학생이 서진이라고 받아들인 것도, 서진을 보고 그 남학생이 틀림없다고 확신한 것도 신기했다.
기욱은 기억 속 남학생이 100% 서진일 거란 확신을 하지 못하면서도 눈앞에 있는 서진이 자신이 원하는 남학생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모순된 생각이란 말인가. 기욱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글쎄,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
“이 정도 인연이면 어디선가 한 번은 본 적 있지 않을까?”
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기욱의 대답에 제 질문이 드라마 같다고 생각했던 생각을 철회했다. 누가 누굴 탓하는지 원. 기욱이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았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차로 근처 번화가를 한 바퀴 돈 뒤 호텔로 돌아왔다. 뭔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지친 기분이 들었다.
테라스 쪽으로 밤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나가자 한기가 들었지만, 서진은 이 공기가 제법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윤과 같이 오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먼저 샤워를 하고 나온 기욱이 밖에 있는 서진을 불렀다. 들어가요. 유리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 응. 누나. 별일 없었어.
샤워한 뒤 서진은 서윤과 통화를 했다. 때마침 일이 끝난 서윤은 집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서진은 통화를 하는 내내 등 뒤로 안겨 오는 기욱에 몸을 뒤척였다.
서진의 허리를 안은 기욱은 서진을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팔에 힘을 주었다. 서진은 결국 기욱의 무릎 위에 앉아 마지못해 통화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등 너머로 진한 샴푸 향이 났다.
― 그런 거 아니라니까. 월요일 날은 등교할 거야. 누나는? 병원에서 아무 일 없었지?
― 나야 늘 똑같지. 아, 서진아 오빠 좀 바꿔 줄래?
― 알았어.
서진이 한숨을 쉬었다. 서윤과의 통화 내용을 전부 들은 기욱이 먼저 서진의 휴대폰을 빼앗듯 가로챘다. 서진의 휴대폰과 담배를 챙긴 뒤 테라스로 나갔다. 저녁은 추울 텐데, 막 샤워를 하고 난 뒤 가운 차림의 기욱은 추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기욱이 통화를 마친 뒤 안으로 들어왔다.
“안 추워요?”
“나 원래 추위 잘 안 타.”
서진은 기욱의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기욱이 하품을 했다. 늘 실내의 병원 생활만 해 와서 그런지 야외 활동은 기욱의 생각보다 체력을 많이 소비했다. 어차피 내일도 있고, 뭐하면 더 나가도 되지만 서진도 지친 모양인지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욱이 서진이 앉아 있는 침대 옆에 앉았다. 살짝 긴장하는 모습이 제법 볼만했다.
계속해서 일어나려는 서진과 그런 서진을 눕히려는 기욱의 행동이 반복되었다. 이런 경우 늘 지고 들어오는 건 서진이었다. 서진이 마지못해 침대에 누웠다. 방 안에는 퀸사이즈 침대 하나밖에 없었다. 기욱은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지만, 서진은 그런 구차한 변명을 애써 믿지 않았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가운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안았다. 서진은 기욱이 자길 무슨 커다란 곰 인형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욱이 잔뜩 굳은 서진의 허리를 살짝 쓸어내렸다.
“으읏!”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놀란 서진의 신음에 기욱이 서진의 몸을 돌렸다. 후, 서진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기욱의 입술이 서진의 뺨 근처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서진은 기욱의 입술이 지나간 뺨을 만지작거렸다.
평소라면 키스를 하든, 무슨 짓을 해야 했을 상황이었다. 답답한 사람이 지는 거라고 서진은 불편함을 이기지 못해 입을 열었다.
“대체 왜 이래요.”
“내가 뭘.”
서진은 이럴 때면 기욱과 시헌이 형제라는 사실을 절실히 실감했다. 먼저 태어난 건 기욱이니 시헌이 기욱을 닮았다고 해야 옳은 거겠지만. 기욱이나 시헌이나 알면서 모르는 척 구는 건 똑같았다.
“왜 안 하던 짓을 하냐구요.”
기욱이 서진의 뺨과 덜 마른 머리를 살짝 쓸어 넘겼다. 기욱은 서진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을 뿐 서진을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없었다.
“나 두 번 말하는 거 안 좋아해.”
기욱의 그 한마디가 조금 전까지 서진의 모든 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뜬금없는 제주도 여행. 사과. 차 안에서 정신없을 무렵 들었던 말이지만 기욱이 그 말을 했던 것을 서진은 분명하게 기억했다.
왜 그런 단순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서진은 근처에 있는 이불을 끌어당겨 이불 속으로 숨었다. 그래 봤자 기욱의 품 안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허리를 안은 기욱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마음에 안 들어?”
“됐어요.”
이불 속 서진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고작 사과 하나 하겠다고 서윤에게 어딜 가 보고 싶냐고 물어보게 시킨 것으로도 부족해서, 진짜 휴가를 내 제주도까지 오다니. 제정신이 아닌 것도 정도가 있었다. 연인 사이―애당초 기욱과 사귄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발상이지만―도 아닌 마당에 이렇게까지 하는 기욱을 서진의 사고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욱이 계속 이불 속으로 파고든 서진을 잡아당겼다. 기욱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오기가 생긴 서진은 더욱더 이불 안으로 얼굴을 묻었다.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기 싸움에 질린 기욱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계속 그러면 진짜 덮친다?”
“젠장!”
서진이 잔뜩 짜증 난 표정으로 이불을 걷었다. 서진의 얼굴이 드러나자 기욱이 만족스러운 모양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은 여전히 그런 기욱이 못마땅했다.
“나한테 사과하지 말고.”
“…….”
“누나한테나 잘해요.”
서진이 이불을 반쯤 덮은 뒤 눈을 감았다. 피곤하기도 했고, 기욱과 이런 말싸움으로 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서진아. 자?”
“…….”
“하아, 이런.”
기욱은 몇 번인가 서진의 이름을 더 불렀으나 서진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기욱은 어쩔 수 없이 대화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 손으로 서진의 허리를 안은 기욱은 다른 손으로 뺨을 살짝 긁적였다.
한참 사춘기인 연하의 남자는 생각보다 대하기가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