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8 독서실 (20/83)

Chapter. 18 독서실

독서실 안으로 침묵이 흘렀다. 문제를 풀던 시헌이 인상을 구겼다. 샤프심이 없었다. 11층 독서실은 이럴 때가 유독 불편했다. 학원에서 독서실에 올 때 사 두지 않은 사실이 후회됐다. 샤프를 내려놓고 나갈 준비를 하던 중 서진과 눈이 마주쳤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얕은 한숨을 내쉰 서진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지우개 좀 빌려줘.”

“어, 그래.”

책상 쪽으로 몸을 숙인 시헌이 지우개를 내밀었다. 지우개를 내민 순간 서로의 손이 닿았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손에 힘이 풀려 지우개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서진이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지우개를 집어 들었다. 진한 샴푸 향이 났다. 머리카락 사이로 뒷목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시헌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손으로 괜히 입가를 가렸다. 순간 저도 모르게 그곳에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것도 모른 서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헌을 올려다봤다.

“박시헌. 어디 아프냐?”

시헌은 서진에게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중학교 때는 잘 몰랐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서진의 목 부분이 참 하얗다거나, 혹은 생각보다 속눈썹이 길다거나 하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변화들은 시헌을 제법 흥분하게 만들었다.

괜찮냐고 물어 오는 서진에 시헌은 등을 돌렸다. 지금의 시헌은 서진과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시헌은 가방을 뒤져 지갑을 챙겼다.

“어디 가?”

“샤프심.”

서진이 제 책상을 힐끗거렸다. 마침 저도 샤프심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내 것도.”

슬슬 주변 눈치가 보인 시헌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오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두근거리는 감정은 생각보다 쉽게 가시지 않았다. 마치 커피를 한 사발 들이마신 것 같은 흥분이 일었다. 흥분은 독서실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맞은 후에야 어느 정도 누그러들었다.

근처 대형 문방구에서 샤프심 몇 개와 지우개를 샀다. 서진이 지우개를 사 오란 말은 없었지만 빌려 달라고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말하지 않은 지우개를 사 왔을 때 서진의 표정을 생각하면 벌써 기분이 좋아졌다. 짝사랑이란 이렇듯 사소한 거로 기쁨을 찾는 것이었다.

독서실을 올라가려던 찰나 시헌은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사복 차림의 기욱이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모습을 보아하니 병원 관계자 같았다.

그러고 보니 시헌의 학원가에서 10분 정도를 가면 기욱이 있는 J대 병원이 있었다. 병원 근처에도 충분히 번화가가 있어서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으나, 간혹 드물게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기욱도 시헌을 알아본 모양인지 걸음을 멈췄다.

기욱의 옆에 있던 남자들이 시헌에 관해 물어 왔다.

“남동생.”

“아, 고등학생이라고 그랬지? 귀엽네.”

기욱보다 한 살이 많은 남자가 시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헌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기욱이 사람들을 먼저 보냈다. 그들은 기욱이 알아서 오겠거니 하고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기욱은 주변의 고층 건물들을 둘러봤다. 시헌이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 시간대에 마주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기욱이 시간을 확인했다. 기욱이 알고 있는 시간표대로라면 시헌은 지금 학원에 있어야 했다. 시헌이 가려는 건물 쪽으로 서진의 독서실이 있었다.

수업을 듣고 있어야 할 시헌이 밖에 있다. 기욱은 시헌이 학원을 빼먹었다는 것보다 이 상황 자체에 대한 불쾌함이 들었다. 기욱이 아는 시헌은 이유 없이 학원을 빼먹을 사람은 아니었다. 시헌이 학원을 빼먹게 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유가 기욱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기욱의 그런 생각을 모르는 시헌은 담담하게 물어 왔다.

“형은 여기서 뭐 해?”

“일주일 만에 휴식인데. 친구들이랑 술 한잔해야지 않겠어.”

시헌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방에는 학원가 못지않게 술집도 많으니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었다. 기욱도 사람인데 스트레스를 풀겠다고 나온 걸 시헌이 탓할 수는 없었다.

“고생해라.”

“응.”

시헌이 기욱을 지나쳐 갔다. 시헌의 방향이 왠지 서진의 독서실이 있는 건물 쪽으로 가는 느낌이 들었다. 기욱이 등을 돌렸다. 시헌이 지나간 길을 빠르게 다른 사람들이 메웠다. 기욱은 사람들 틈을 지나가는 시헌을 보고 있었다. 시헌의 주머니 사이로 뭔가가 떨어졌다. 익숙한 색의 파란색 카드, 기욱은 본능적으로 시헌이 떨어트리고 간 카드를 집어 들었다. 시헌의 이름이 적혀 있는 독서실 카드였다.

“박시헌!”

기욱이 멀어지는 시헌을 불렀다. 이어폰을 끼려 했던 시헌이 인기척에 등을 돌렸다. 기욱이 시헌의 독서실 카드를 허공으로 흔들었다. 주머니를 만진 시헌은 뒤늦게 카드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기욱은 앞으로 다가오는 시헌에게 독서실 카드를 내밀었다. 어쩐지 카드값이 늘었더라. 사실 그리 큰 금액이 아닌 데다, 기욱 본인도 돈을 좀 많이 써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독서실 언제 옮겼어?”

“좀 됐어.”

“하아, 가라.”

기욱이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시헌은 등을 돌려 독서실이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시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기욱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독서실 간판을 올려다봤다.

쯧, 혀를 참과 동시에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먼저 간 병원 동료들이었다. 어디냐고 재촉을 하고 있었다. 기욱은 금방 간다는 말을 남긴 뒤 전화를 끊었다. 기욱의 시선은 시헌이 들어간 독서실 간판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 * *

모든 일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이었다. 여느 날처럼 학원에 갔다, 독서실에서 막차가 끊길 무렵 아슬아슬하게 지하철을 타고 집에 들어왔다. 서진이 알고 있는 한 오늘은 저녁 근무였다. 보통 서진이 집에 올 때쯤이면 서윤의 퇴근 시간과 어렴풋이 맞고는 했다.

시간이 늦어 서로 뭘 하거나 할 수는 없었지만, 서진은 서윤과 같이 잘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서진은 이번 주 내내 제대로 얼굴도 못 본, 누나―서윤을 볼 생각에 들뜨며 낡은 개인 주택의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누나…! 나 왔…….”

집 안으로 들어선 서진은 싸한 느낌에 말을 잇지 못했다. 거실에는 서윤이 엉망으로 벗어 던진 구두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서진은 서윤의 구두를 집어 제자리에 가져다 뒀다. 집 안으로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 안의 가장 큰 방이자, 서윤의 방문 틈에서 나오는 말소리였다.

서진은 문틈 사이로 휴대폰을 붙잡고 있는 서윤을 바라봤다. 얼마나 통화에 집중하고 있는지 서윤은 서진이 왔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기, 기욱 오빠?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이 주 만인 거 알잖아. 제발…… 흐윽… 제발 전화 끊지 말고 얘기 좀 해. 응?”

“…….”

기욱이었다. 주먹을 쥔 서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서진은 요 며칠, 아니 몇 주간 무슨 일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했다. 오히려 무서울 만큼 아무 일도 없었다. 간혹 기욱이 독서실을 가지 않았냐며 몇 번인가 연락을 한 적이 있었지만, 그조차 기욱이 이해할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었을 때뿐이었다.

서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최근 자신이 기욱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서진이 아는 기욱은 이유 없이 뭔가를 행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감히? 서진은 마치 기욱에게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나.”

“오빠, 흐윽… 의심 같은 거 안 할 테니까 제발…….”

“누나!”

서진의 목소리에 서윤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뒤늦게 시간을 확인한 서윤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서진은 서윤의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우는 서윤은 서진을 좀 힘들게 만들었다. 서진은 누나가 행복하길 원했던 것이 그렇게 큰 바람인가 싶었다.

기욱의 통화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서윤은 서진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전히 휴대폰을 놓지 못한 서윤이 서진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울음을 억지로 참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이게 무슨…….”

“서진아. 누나 전화 좀 하고 올게. 진짜, 별거 아냐.”

서진은 서윤의 웃음이 억지로 짓는 웃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서진은 그런 서윤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서윤은 금방 다녀오겠다며 손까지 흔들고 등을 돌렸다. 등을 돌린 순간 들려오는 서윤의 울음에 서진은 또다시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서진은 뒤늦게 서윤을 쫓아가려고 집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서윤은 금세 사라지고 난 뒤였다. 한동안 멍하니 집 밖에서 서 있던 서진은 결국 집 안으로 들어왔다. 방에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기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 지금 뭐 하는…….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평화롭던 일상이 불과 10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무너지고 말았다. 서진이 빠르게 문자를 보냈다.

「대체 왜 그래요.」 오후 11:32

「답장 좀 해요.」 오후 11:32

「제발」 오후 11:33

「내가 뭘 잘못했는……」

마지막 문자를 치려던 순간 서진은 허무함에 휴대폰을 덮었다. 스스로 생각하고도 기욱에게 매달리고 있는 꼴이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잘못? 서진은 당당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기가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서진은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그래, 차라리 이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서진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타이밍에 시헌이 생각나는 이유를 도무지 할 수 없었다. 새벽 두 시가 넘어갈 즈음 시헌에게 문자가 왔다. 서윤이 기욱의 오피스텔에 있는 모양이었다. 기욱이 오피스텔로 들어왔는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그날 저녁 서윤은 끝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진은 사는 게 왜 이렇게까지 힘든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서진은 몇 번이나 시헌에게 연락을 해 볼까 말까 고민했다. 서윤에 관한 이야기는 문자로도, 전화로도 쉽게 꺼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점심 즈음 서윤에게 출근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밤에 있었던 일은 물어볼 수 없었다. 전화상의 서윤은 밝아 보였다.

그런 누나―서윤의 행동이 가식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서진은 잘 다녀오라는 말 외에 아무런 대답도 해 줄 수 없었다. 서진은 학원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독서실로 갔다. 시헌을 만난다 해서 뭔가 해결이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시헌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아니, 만나고 싶었다. 그 얼굴을 본다면 이 알 수 없는 기분이 조금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날, 시헌은 끝내 독서실에 오지 않았다.

* * *

서진은 몇 번이나 연락해 볼까 고민했다. 문자를 보내야 하나? 전화해 볼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사이 시헌은 단 한 번도 독서실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독서실 여직원이 시헌에게 무슨 일이 있냐며 물어 왔지만, 서진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연락이 없는 건 비단 시헌뿐만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나면 늘 그렇듯 먼저 문자나 전화가 올 거로 생각했던 기욱 또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집에 들어온 서윤과 기욱은 통화로 하루가 멀다고 싸우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서윤과 통화를 할 시간이 있는 걸 보면 아직은 할 만하다는 뜻일 텐데. 서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욱이 자신의 연락을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머리가 아팠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공부고 뭐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진은 시헌 대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힐끗거렸다. 후, 이어폰을 낀 서진은 휴대폰을 들고 독서실 밖으로 나왔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너 요즘 왜 안 와?」 오후 10:04

이 쉬운 걸 왜 일주일 동안이나 고민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문자를 보낸 서진은 마치 오래 묵은 먼지를 털어 낸 것 같은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시헌에게 답장이 안 오면 어쩌지? 그 생각이 들기 무섭게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시헌이었다.

「나 당분간 못 가」 오후 10:06

「왜?」 오후 10:06

서진은 혹시 시헌이 늦게 읽을까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 얼마 가지 않아 시헌의 답장 대신 전화가 왔다. 서진은 손안에서 윙윙대는 휴대폰을 가만히 바라봤다. 다시 저장된 이름. 박시헌, 서진은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어색하다. 우리 사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어색하게 되어 버렸는지 알 길이 없다. 시헌의 전화 너머가 시끄러웠다. 수업이 이제 막 끝난 것 같았다. 시헌아, 안 가? 시헌의 휴대폰 너머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 너머로 은소의 말소리가 들렸다.

― 먼저 가.

은소를 향한 시헌의 대답이 서진의 귓가에도 들려왔다. 알았어, 내일 보자. 은소가 가고 시헌도 밖으로 나온 모양인지 주변이 조용해졌다. 서진이 입을 열었다.

― 왜 못 오는데?

하아, 휴대폰 너머 시헌이 한숨을 쉬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서진은 그 소리가 시헌이 머리를 긁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시헌은 짜증이 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종종 머리를 긁고는 했다. 애늙은이 같은 짓을.

― 좀 복잡해. 학원 시간표가 이상해졌거든.

― 학원?

― 응. 조교 실수라고 그러는데. 좀 짜증 나. 그리고 독서실 카드도 없어지고……. 하여튼 좀 그래.

시헌은 중간에 말을 흐렸다.

― 카드? 독서실 카드 말야?

― 별거 아냐.

독서실에 못 온 건 카드 때문이 아니었다. 카드야 재발급하면 그만이고. 시헌은 저도 모르게 쓸모없는 말을 지껄였다며 한숨을 쉬었다. 시헌은 요 일주일간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았다.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조교와 얘기를 하고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두 과목도 아니다. 대체 왜 이렇게 꼬여 버린 건지, 영문을 알 길이 없는 시헌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사이 서진에게 연락을 하지 않으려 했던 것 또한 아니었다. 해야지, 오늘은 해야지, 하다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갔을 뿐이었다. 이제 와 변명을 한다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 어떻게 안 된대?

― 이미 끝났다고 안 된대. 다음 달이나 돼야 할 것 같아. 미안.

― 됐어. 수업이나 열심히 들어.

다시 침묵이 일었다. 끊어야 하는데, 누구도 먼저 끊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통화를 하는 서진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뭐지? 이어폰을 끼고 있던 서진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기욱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어디야?」 오후 10:13

「전화 받아.」 오후 10:14

동시에 이어폰 너머 시헌이 입을 뗐다.

― 있잖아. 혹시 이번 주말에…….

― 미안, 나 일이 있어서. 먼저 끊을게.

― 알았어.

서진이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뒤늦게 ‘시헌이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으나 주변의 소음 때문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서진은 별말 않았겠지 하고 넘겼다.

「지금 독서시……」

기욱의 문자에 대한 답장을 보내던 찰나 전화가 왔다. 전화의 상대가 기욱인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어폰을 낀 서진이 전화를 받았다. 기욱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서진은 일부러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주일 동안 서윤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 생각하면 먼저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은 곧 죽어도 없었다.

건너편 차선에서 익숙한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살짝 열린 차창 사이로 휴대폰을 들고 있는 기욱이 보였다. 독서실 앞 1층 로비에 서 있던 서진은 깜짝 놀라 건물 안쪽으로 숨어 들어갔다. 기욱이 보지는 않았겠지.

서진은 벽에 몸을 살짝 기대 기욱의 차를 살폈다. 다행히 기욱의 시선은 독서실과 정반대 방향에 닿아 있었다. 이어폰 너머로 기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 짐 챙겨서 내려와.

하, 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일주일 동안 연락도 없다가 일방적으로 연락해 하는 말이 내려오라니 이 사람은 어디까지 제멋대로인 걸까.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때마침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서진은 11층 버튼을 눌렀다.

이대로 독서실에서 나오지 않고 버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서진은 책상 위 풀다 만 문제집을 내려다봤다. 공부도 안 되고, 서진이라고 할 말이 전혀 없는 것 또한 아니었다. 짐을 챙긴 서진은 독서실 복도로 나와 엘리베이터의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그사이 또 1층을 내려간 엘리베이터는 올라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기욱이었다. 11층에서 내리려던 기욱은 서진을 보더니 다시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실었다. 머뭇대던 서진 또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내려가려는 학생 무리가 타는 탓에 좁은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만원이 되고 말았다. 시끄럽게 떠드는 옆 남학생의 몸과 서진의 몸이 부딪혔다. 몸을 앞으로 내민 기욱이 서진을 살짝 가렸다. 뒤늦게 서진과 부딪혔다는 것을 눈치챈 남학생이 서진 쪽으로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1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남학생들이 먼저 내리고, 곧이어 서진과 기욱이 내렸다.

그깟 몸 부딪힐 수도 있는 거지. 서진은 남학생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기욱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욱은 대체 뭘 초조해하는 걸까, 서진은 생각해야 머리만 아플 뿐이라며 기욱에 대해 생각하길 포기했다.

기욱이 주차장 쪽으로 갔다. 그사이 차를 주차장에 대 놓은 기욱이 서진은 신기할 뿐이었다. 조수석 문을 열어 주는 기욱에 서진은 차를 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기욱이 서진의 등을 살짝 밀었다. 서진은 떠밀리듯 차에 탈 수밖에 없었다. 차가 천천히 움직이며 도로로 나왔다.

집으로 가는 방향은 아니었다. 어디로 가는지, 뭘 하는지 서진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차가 사거리 초록 불에서 멈췄다. 서진은 불안한 마음에 가방끈을 꼭 쥐었다. 서진과 기욱의 눈이 맞았다. 기욱의 손이 허공으로 올라왔다. 화를 내려고 했지만, 막상 기욱을 앞에 둔 서진은 아무런 생각도, 말도 나오지 않았다. 불길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감긴 눈 너머로 기욱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벨트 매.”

차가 다시 출발했다. 눈을 다시 뜬 서진은 제 모습을 바라봤다. 뭐야.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라는 건 어렴풋이 알았지만, 서진은 여전히 기욱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벨트가 엉킨 모양인지 쉽게 매지지 않았다. 보다 못한 기욱이 차가 멈춘 사이 벨트를 바로 매 줬다. 차 안으로 늦은 새벽 라디오가 흘러나왔다. 음량이 작아 뭐라고 말하는지 잘 들리지는 않았다.

“전화 안 받던데.”

“…….”

“누구랑 통화했어?”

운전을 하는 내내 기욱이 서진을 힐끗거렸다. 기욱의 시선을 눈치챈 서진이 이내 고개를 아예 창가 쪽으로 돌려 버렸다. 어디로 온 걸까? 번화가를 나온 밤길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창문에 얼굴을 반쯤 기댄 서진이 짜증이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관없잖아요. 내가 누구랑 통화하든.”

기욱의 말 대신 차의 속도가 올라가는 느낌은 서진을 좀 불안하게 만들었다. 속도가 줄어들 무렵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운전을 하는 탓에 대단한 걸 할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서진은 강제로 기욱 쪽으로 몸이 기울고 말았다.

“서윤이한테 전화해.”

“내가 왜…!”

“오늘 못 들어간다고.”

기욱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기욱에게 붙잡힌 팔이 아려 왔다. 기욱은 차의 속도가 줄어든 틈을 타 서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서진은 기욱이 화가 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동시에 짜증이 일었다. 언제나 그렇듯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짜증을 내야 할 사람은 기욱이 아니었다.

서진은 기욱과의 관계를 계약서처럼 종이에 적은 기억은 없다. 그런데도 자신이 참으면 기욱은 늘 서윤에게 잘해 줬다. 그건 종이에 적혀 있지 않은 둘만의 불문율이었다. 기욱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은 것도 없다, 딱히 그렇다 할 반항을 한 적도 없었다.

연락을 무시하거나 제멋대로 한 적도 없었고, 마지막으로 기욱이 부른 게 한 달 전이라고는 하지만 그때도 아무런 말없이 나갔다. 서진은 할 만큼 했다고 느꼈다. 이 이상 도대체 뭘 하란 말인가.

“싫어요.”

“난 하라고 말했어.”

기욱이 서진의 팔을 놓았다. 서진의 몸이 차창 쪽으로 부딪히다시피 했다. 다시 차의 속도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차의 속도는 줄어들 줄을 몰랐다.

서진은 정말 이대로 기욱이 사고를 내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까지 느꼈다. 죽고 싶지는 않았다.

“아, 알았어요!! 전화, 전화할 테니까……. 속도 좀! 제발…….”

서진의 외침에 차의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인제 와서 않겠다고 할 수도 없는 서진은 마지못해 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을 붙잡는 내내 기욱이 이상한 짓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진은 일부러 수화음을 최대한 줄였다.

― 누나. 친구네에서 공부하려고.

― 그래? 내일 학교는 어쩌려고?

― 친구네 집이……. 학교 바로 앞이야. 바, 바로 갈게.

― 알았어.

서윤은 생각보다 쉽게 허락을 해 주었다. 서진은 휴대폰을 꽉 붙잡았다.

― 저, 누나.

― 응? 왜 그래?

― 괜찮은 거지?

어느새 차는 한적한 도로 안쪽에 멈춰져 있었다. 서진이 이쪽을 보고 있는 기욱과 눈이 맞았다. 괜찮냐는 서진의 말에 서윤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약간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 그럼, 괜찮지! 별일 없을 거야. 공부 열심히 하고. 시간 되면 학교 끝나고 집에 들렀다 가.

― 아, 알았어.

서진이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기욱의 몸이 점점 서진 쪽으로 다가왔다. 아직 안전띠를 풀지 못한 서진은 다가오는 기욱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안전벨트 버튼으로 손을 가져다 대자 기욱이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젠장, 서진은 고개를 들었다. 짜증이 난 건 기욱만이 아니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데요.”

“…….”

“제, 제가 뭘 잘못했냐구요.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요. 도대체 나한테……. 아니, 누나한테 대체 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저만 참으면 서윤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기욱이 서윤에게 이럴 거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서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욱을 거부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기욱이 아니어도 좋다. 서진은 서윤이 누군가로 인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건, 서윤의 잘못이 아니었다. 기욱의 품에 반쯤 안긴 서진이 주먹을 쥐었다. 기욱이 그런 서진의 턱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서진의 눈가에 붉은 핏줄이 서 있었다. 차라리 울면 좋을 텐데. 아무리 여자라고는 하나 유독 울음이 많고, 본인의 감정 표현이 심한 서윤과 달리 그 동생인 서진은 서윤과 반대였다.

참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는 남매였다. 그런데도 닮은 게 있다면 억지로 뭔가를 참으려 한다는 점이었다. 그런 감정은 기욱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좋아하는 애를 더 괴롭혀 울리고 싶어 하는 초등학생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애나 어른이나 결국 남자란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기욱의 손가락이 서진의 입술 근처에 닿았다. 강제로 벌리고 들어간 엄지가 서진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서진은 이 상황에서 그럴 기분이 나는 기욱이 역겹기만 했다. 안전벨트 때문인지 기욱을 밀어내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기욱의 손가락이 서진의 혀 안을 훑었다.

“하으…, 하….”

서진은 기욱의 손가락을 확 깨물어 버릴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만두기로 했다. 고작해야 손가락을 깨무는 행위 하나로 기욱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몸을 살짝 누른 기욱이 서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읏, 대체 왜……”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기욱의 손가락이 서진의 입을 빠져나왔다. 난데없이 빠지는 손가락에 서진은 헛구역질해야만 했다. 목과 입 근처를 붙잡은 서진은 기욱을 올려다봤다. 주머니를 뒤지던 기욱이 뭔가를 꺼냈다. 파란색, 독서실 카드. 서진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기욱이 서진의 눈앞에서 카드를 뒤집었다. 뒷면에는 시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기욱이 들고 있는 것은 잃어버렸다던 시헌의 카드였다. 저게 왜 기욱의 손에 있는 거지? 서진은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떴다. 저건 아무리 봐도 시헌의 카드였다. 기욱이 카드를 대시보드 위에 올렸다.

기욱이 어떻게 안 거지?

기욱이 묘하게 시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서진이 기욱이 카드를 올려놓았던 대시보드 앞으로 손을 뻗었다. 기욱이 그런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이건 그러니까……, 그게…….”

“내가 말했지.”

“…….”

“미쳐 버리기 전에 잘하라고.”

서진의 몸을 누른 기욱이 휴대폰을 만졌다. 휴대폰 화면을 본 서진이 재빨리 손을 뻗었으나 기욱이 조금 더 빨랐다. 기욱의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버튼을 누를 것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헤어지자는 기욱의 문자, 서진은 허공에 들린 기욱의 휴대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박기욱이라는 사람은 무서울 정도로 서진을 잘 알고 있었다. 서진은 누나―서윤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하는 사람이었다. 기욱과의 이별 또한 시간이 지나면 치유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서진은 당장 눈앞에 펼쳐질 서윤의 고통을 못 본 척 넘길 수가 없었다. 서진이 의자 밑으로 주먹을 쥐었다.

“자, 잘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문자, 보내지 마세요.”

“그 말, 저번에도 들은 것 같은데.”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서진은 도무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서진은 기욱이 서윤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기욱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 행동이 기욱이 원하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의 서진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안전벨트를 푼 서진이 기욱 쪽으로 몸을 숙였다. 기욱 외에 키스해 본 건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잠깐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장난삼아 한 것이 전부였다. 늘 일방적으로 당해야만 했던 서진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것이 없었다. 서진은 무작정 입술을 맞추긴 했으나 다음이 떠오르지 않았다. 키스 하나만으로도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기욱이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 느낄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안달이나 달려들었을 기욱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서진은 기욱이 일부러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짜증이 나지만 방법이 없었다. 기욱의 입안으로 어색하게 혀를 집어넣었다. 숨이 막히고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서진의 혀는 한참이나 기욱의 입안을 헤매야만 했다.

“하으, 읏….”

숨이 막힌 서진이 먼저 입술을 뗐다. 기욱은 입 근처에 묻은 서진의 타액을 살짝 닦아 냈다. 기욱의 입술이 서진의 이마에 닿았다. 서진은 기욱의 입술이 지나간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서진의 위로 올라탄 기욱이 조수석을 뒤로 눕혔다. 몸이 반쯤 눕혀지는 느낌에 서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좁은 차 안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교복 셔츠의 단추를 풀고 있었다. 서진의 와이셔츠 안에 입었던 검은 티셔츠가 그대로 드러났다. 손이 안으로 들어가자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서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이렇게 해서라도 기분이 풀린다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머리 위로 기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 말 없어?”

“그게 무슨 말…….”

서진의 몸 이곳저곳을 탐하던 기욱의 손이 뜬금없이 멈췄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기욱의 질문에 서진은 당황스러웠다. 기욱이 운전석 쪽으로 몸을 일으키려 하자 서진은 재빨리 기욱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

서진이 알고 있는 기욱은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고,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욱의 성격은 서진을 오래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해야만 한다는 그 압박감이 서진을 여러모로 힘들게 만들었다.

“아, 안 할게요.”

“뭘?”

시치미를 떼는 기욱이 서진은 밉기만 했다. 친동생일 텐데, 서진은 도대체 기욱이 시헌에게 왜 이러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하긴, 그걸 이해했으면 이 상황에 엮일 이유도 없었다. 서진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변했다. 서진은 서윤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서윤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기욱에게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뜻하기도 했다.

“시, 시헌이랑 다시는…….”

“…….”

“다시는 안 만날 테니까. 제발, 누나한테 문자만은 보내지 말아 줘요.”

기욱이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진의 머리가 살짝 뒤로 넘어갔다. 목덜미를 핥던 기욱의 입술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전과는 다른 키스에 서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서진은 본능적으로 기욱의 목에 손을 감았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착한 아이네.”

키스를 마친 기욱이 서진의 턱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좁은 차 안이라 더 그런 걸까? 눈을 떠도, 고개를 돌려도 보이는 건 기욱밖에 없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사고가 흐려지는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욱의 말이 계속해서 서진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착한 아이.

‘착한 아이가 뭐였지…….’

* * *

서진과 기욱은 차로 30분 정도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이미 서울을 벗어 난 것 같았지만, 호텔은 생각보다 컸다. 멍하니 건물을 올려봤다. 차를 대고 온 기욱이 서진의 팔을 붙잡고 로비로 들어갔다. 기욱이 프런트에 서 있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1층에 와 있던 엘리베이터는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먼저 들어간 기욱은 자연스럽게 15층을 눌렀다. 중앙 엘리베이터는 생각보다 넓었다. 기욱이 멀리 떨어져 있는 서진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새벽 호텔의 엘리베이터는 거침없이 위층을 향하고 있었다.

1분도 안 걸려 도착할 텐데, 서진은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없었다. 서진이 움직이지 않고 버티자 기욱이 먼저 다가왔다. 동시에 15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복도로 나온 기욱은 서진의 목에 팔을 둘렀다.

서진은 몇 번이나 불편하다며 뿌리쳤으나, 기욱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 상태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제법 평범해 보이는 방 구조에 서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시 지난번처럼 스위트룸이나, 핑크와 붉은색이 가득한 악취미적인 방이면 어쩌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몰랐다고 변명을 늘어놓았으나 서진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알고 한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이번엔 그런 장난은 치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온 기욱의 손이 서진의 옷 안으로 들어왔다. 거추장스러운 와이셔츠 같은 건 이미 내던져 버린 지 오래였다. 기욱이 소파에 앉았다. 여전히 기욱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서진은 어쩔 수 없이 기욱의 무릎 위로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체격 차이가 난다 하더라도 서진 또한 남자였다. 그것도 한참 성장기 때의, 좀 마르긴 했으나 시헌처럼 키가 작은 편도 아니었다. 자체적으로 나가는 몸무게를 생각하면 결코 가벼운 무게가 될 수 없었다.

그런 무게에도 불구하고 기욱은 눈 하나 끔벅하지 않고 있었다. 서진이 불편하다며 옆으로 내려오려 하자 기욱이 서진의 허리를 안았다. 기욱의 큰 팔은 서진의 허리를 한 번에 안기엔 충분했다. 서진의 옷 안으로 넣었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페니스 근처를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서진은 인상을 구겼다. 내일 입고 가야 할 교복이고, 무엇보다 이런 식의 만짐으로 흥분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이미 기욱 앞에서 여러 번 사정한 적 있었지만, 여전히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이어지는 흥분을 참으려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윽, 읏….”

목덜미를 핥는 기욱에게서 땀 냄새가 났다. 여름이라 이해하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차 안에선 에어컨이 강한 데다 정신이 없어 잘 몰랐지만, 아직 에어컨 바람이 방 안으로 퍼지지 않은 지금은 인상을 구길 정도였다.

옆으로 보이는 기욱의 머리 또한 꽤 오래 감지 못한 모양인지 잔뜩 떡이 져 있었다. 서진의 불편한 표정을 눈치챈 기욱이 서진의 허리에 감은 손의 힘을 풀었다. 서진을 슬쩍 본 기욱이 뺨을 긁적였다.

“바빠서 그랬어.”

“…….”

“미안.”

서진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사실 기욱의 일이 바쁘다는 사실도, 그리고 기욱이 오늘 하루―고작해야 늦은 저녁―를 비우기 위해서 얼마나 뛰어다녀야만 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을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는 기욱이 고작해야 땀 냄새가 좀 난다는 정도로 무안해하는 모습은 좀 의외였다. 기욱의 무릎 밑에서 내려와 소파에 앉은 서진은 욕실이라고 추측되는 문을 손가락질했다.

“씻고 와요.”

“하아, 알았어.”

별말을 한 것도 아닌데 기욱의 표정은 마치 잔소리를 들은 시누이처럼 귀찮아 보였다. 기욱은 윗옷을 벗어 소파 위에 걸쳐 놓았다. 운동선수만큼은 아니지만, 적당히 근육이 들어가 있는 기욱의 몸은 마치 거리가 먼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동성이라 해도 순수하게 한 번쯤은 부러워해 본 적 있을 법한 그런 몸매 말이다. 하물며 이성은 오죽하겠는가.

집안, 외모, 키나 몸매부터 신경외과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박기욱이라는 남자는 정말 뭐 하나 흠을 잡을 곳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물며 섹스나 여자에 있어서도 마음만 먹으면 여자 여럿 울릴 드라마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었다. 그런 기욱이 고작해야 평범한 고등학생 남자에게 안달이 나 매달리는 꼴이라니. 기욱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본다면 분명 기가 막힐 것이 틀림없었다. 드로어즈 차림이 된 기욱이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서진을 잡아 일으켰다.

멍하니 있던 서진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기욱의 가슴에 안겨야만 했다. 옷을 입었을 때도 느낀 거지만, 옷을 벗고 닿은 기욱의 가슴은 생각보다 튼튼했다. 사실 몇 번인가 옷을 벗은 채로 안긴 적이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안은 적은 드물었다. 옷을 벗었지만, 여전히 땀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서진이 기욱을 올려봤다.

“왜요.”

툭, 하고 기욱의 손가락이 서진의 이마를 쳤다. 아프진 않았지만 난데없이 뒤로 밀려나는 이마는 그리 기분이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이마를 붙잡은 서진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기욱을 노려봤다.

“그렇게 볼 것 없잖아.”

“제가 뭘요.”

기욱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는 서진이 우스웠다. 서윤과 처음 봤을 때부터 보통 기가 센 꼬맹이가 아닐 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한 번도 곱게 넘어가 준 적이 없는 서진이 질리기보다는 귀여울 지경이었다. 기욱은 서진이 만약 여자였다면 당장에라도 결혼하자는 말을 꺼냈을지도 몰랐다.

평생 손에 물 하나 묻히지 않고 지내게 해 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곧 괜한 상상이라는 걸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서진이 여자였다면 이렇게까지 안달이 나고, 초조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기욱이 서진의 검은색 티셔츠를 위로 들어 올렸다.

“씻고 오라구요.”

“어차피 너도 씻을 거잖아.”

서진의 윗옷을 벗긴 기욱이 가볍게 어깨를 털었다. 기욱이 살짝 열린 욕실 너머를 눈짓했다. 뒤늦게 의미를 깨달은 서진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싫…!”

“들어와. 강서진.”

“…….”

“나한테 먼저 씻으라고 한 건 너야.”

“그건 당신이……!!”

서진은 한숨을 쉬었다. 새벽 1시가 넘었다. 기욱의 스케줄이야 아무래도 좋았지만, 서진은 당장 내일 학교에 가야 했다. 여기서 어떻게 등교를 할지도 애매한 상황에서 기욱과의 말싸움으로 진을 빼고 싶지 않았다. 기욱이 벽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서진의 손이 마지못해 교복 바지에 있는 벨트에 닿았다.

샤워하고 나오기 무섭게 서진은 침대로 끌려오다시피 했다. 뭐가 그리 다급한지 기욱은 서진에게 몸을 닦을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방 안에는 침대가 두 개였지만, 기욱은 다른 침대 따위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서진의 위로 올라탄 기욱의 행동은 점점 노골적이 되어 갔다. 몸 위에 있는 기욱이 움직일 때마다 기욱의 가운이 허벅지 근처를 간지럽혔다. 두 번째였다.

기욱과 호텔에 온 것도, 그리고 서로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마주한 것도. 그리고 그 두 번 다 시헌이 얽혔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서진을 사뭇 불편하게 만들었다. 안고 잠만 들었던 그때와 지금은 확연히 달랐다. 기욱에겐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유두 근처를 간지럽혔다.

자연스럽게 입술을 맞추며 아래로 내려왔다. 목부터 쇄골 아래까지 천천히 핥아 내려오는 기욱의 모습은 마치 커다랗고 달콤한 사탕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욱의 손이, 혀가 움직인 자리가 마치 차가운 얼음에 덴 것처럼 욱신거렸다. 혀가 유두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여자도 아니건만 끈질기게 유두를 애무하는 기욱의 행동은 서진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었다.

기욱이 이렇게 달라붙을 때면 서진은 기욱에게 정말 먹혀 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한동안 이어지던 기욱의 손길이 멈추자 서진은 눈을 살짝 떴다. 기욱의 얼굴이 정면에 있었다. 기욱이 서진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몸이며 머리가 제대로 마르지 않은 건 서진뿐만이 아니었다. 남녀끼리 뭔가를 하기 전 샤워를 하는 건 단순히 청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서진은 그 순간 깨달았다. 기욱은 머리카락을 타고 뺨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혀끝으로 핥았다. 달리 술을 마신 것도 아닐 텐데 기욱의 몸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흥분해 있었다.

위험했다. 이미 한껏 발기해 있는 기욱의 검붉은 페니스를 본 서진은 침대 헤드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잡아냈다. 서진의 가운이 침대 아래로 흘러내렸다.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로 기욱의 페니스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시헌과 얽혔을 때부터, 서윤에게 집에 못 들어간다고 전화하라고 했을 때부터, 같이 호텔에 들어와서 샤워한 순간부터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은 들었다.

생각은 했지만, 막상 닥친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두렵기만 했다. 서진이 침대 시트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기욱이 그런 서진의 목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몸을 밀착한 기욱이 서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후, 서진아. 고개 돌려봐.”

서진이 고개 대신 시야를 돌렸다. 기욱이 답답한 모양인지 서진의 몸을 완전히 돌렸다. 기욱은 도망치려는 서진의 다리를 잡아 허벅지 사이에 끼웠다. 다리 사이로 기욱의 페니스가 눈에 들어왔다. 서진은 기욱의 페니스를 눈앞에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적어도 예전에 호텔에 있었을 때의 기욱은 속옷이라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진은 도무지 이다음에 기욱이 무슨 짓을 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설령 상상한다 해도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기욱이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두었던 휴대폰을 힐끗거렸다.

“아직.”

“…….”

“화해 안 했어.”

“그, 그건…… 읍!”

기욱이 서진의 입을 막았다. 평소라면 귀엽게 봐 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기욱이 원하는 건 쓸모없는 말대답이 아니었다. 기욱이 입을 뗌과 동시에 서진의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서진은 기욱의 손에 의해 목을 숙였다. 아슬아슬할 정도의 간격으로 기욱의 페니스가 서진의 입 근처에 있었다. 서진을 약간 내려다본 기욱이 낮게 입가를 올렸다.

남자와의 섹스, 그리고 기욱이 원하는 것. 서진도 알 건 다 알았다. 다만 그걸 뻔뻔하게 요구하는 기욱이 원망스러운 기분이었다. 가까이서 본 기욱의 페니스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입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웠고, 이런 걸 입안에 넣는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서진은 차라리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기를 원했다.

“잘한다며.”

두 번은 없다. 기욱이 어떤 식으로든 입에 담는 말이기도 했고, 기욱의 성격이기도 했다. 실제로 기욱은 상대가 뭘 하든 한 번 정도는 너그럽게 봐 주는 식이었다. 서진에게 티는 내고 있지 않으나 기욱은 매우 짜증이 난 상태였다.

성격이 급한 기욱은 그날, 당장에라도 서진을 불러내고 싶었다. 그러나 일이라는 건 기욱의 마음처럼 쉽게 되지는 않았다. 특히 병원, 아직 전공의인 기욱의 처지는 더욱 그랬다. 1년 차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2년 차 역시 저년차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원래부터 해야 할 일도 많은데 1년 차 시절에는 하지 않았던 고년차 전공의들이 뒷바라지까지 하자니 1년 차보다 더하면 더하지 절대 덜하지는 않았다. 씨발 새끼들. 일주일 동안 몇 번이나 그 개자식들을 씹었는지 생각만 하면 화가 치밀었다. 서진의 일이 아니더라도 기욱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한 상태였다. 마음 같아선 아무 여자나 꼬신 뒤 적당히 들어가고 싶었지만, 서윤을 만난 뒤부터는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한 적은 없었다.

그 이유가, 딱히 서윤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뭔가를 하려면 뒤가 밟힐 만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나온 행동일 뿐이었다. 서진에게 서윤 외에 다른 여자와 잔 사실이 발각된다면 기욱에게 더 이상은 없었다. 기욱도 그 정도는 알았고, 굳이 이름도 모르는 여자와의 하룻밤에 그런 도박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머뭇대는 서진에 기욱이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 있는 휴대폰을 가지러 가기 위해서였다.

“자, 잠깐…!”

서진이 기욱의 가운 자락을 붙잡았다. 어깨를 걸치던 기욱의 가운이 침대 시트 위로 흘러내렸다. 서진의 부름에 기욱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주먹으로 시트를 쥔 서진의 손이 떨려 왔다. 이 순간에도 기욱은 그런 서진이 우리 밖으로 내던져진 작은 햄스터 같다고 느껴졌다.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소유욕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누군 건지도 모르고 손을 대는 시헌도 시헌이었지만, 기욱의 기준으론 그런 시헌에게 휘둘린 서진이 더 나빴다. 기욱의 손이 젖은 서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할게요! 할 테니까……. 제발.”

“그러니까.”

“…….”

“해 줄 때 잘하라고 했잖아.”

기욱은 이렇게 보여도 많이 참고 있는 거라고 했다. 서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의 손에 의해 서진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 * *

“서진이? 아, 잠깐만.”

뒷문에 몸을 기댄 친구가 교실 안으로 소리를 질렀다.

“야! 강서진 오늘 안 왔냐?”

우렁찬 남학생의 목소리에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학생이 대신 대답했다.

“걔 아프다고, 병원 갔다 온대.”

“그래?”

남학생이 다시 고개를 돌려 복도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무슨 전화기처럼 여학생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걔 아프다고, 병원 갔다 온다는데?”

“아직 안 왔어?”

“응. 왜? 할 말 있음 말해. 전해 줄게.”

“아냐, 아무것도.”

은소가 손을 젓고 복도로 나왔다. 분명 이럴 일은 없는데. 복도로 나온 은소는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되지 않았다. 은소가 휴대폰을 닫았다. 요즘 들어 사이가 소원해지긴 했지만, 등교만큼은 꼭 같이하고는 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은소와 같이 온 친구가 다른 반을 돌아보자고 했다. 은소는 손을 저었다.

“됐어. 그냥 점심시간에 집에 들르지 뭐.”

“그러던가.”

친구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교실 쪽으로 등을 돌렸다. 무단결석, 병결이라고 금방 올 거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중요한 건 서진이 학교를 빼먹었다는 사실이었다. 중학교 시절 보아 왔던 서진은 결코 몸이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학교를 빼먹거나 할 사람이 아니었다.

애당초 2년 동안 같이 지내면서 서진이 몸이 아픈 적을 본 적이 없었다. 농담 삼아 떠들던 말로는 어렸을 적부터 감기 한 번 크게 걸려 본 적 없는 체질이라고. 그런 서진이 뜬금없이 아프다고? 그럴 수 있다고 느끼면서도 어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친구가 멍하니 서 있는 은소를 불렀다.

“야! 빨리 안 와?”

“응, 미안.”

친구의 부름에 은소가 마지못해 뛰어갔다. 은소는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학교를 나왔다. 책을 가지러 집에 들렀다 나온 은소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진의 집에 가 봤다. 정말 많이 아픈가? 이젠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서진이 산다는 반지하방은 불이 꺼진 채였다. 문을 두드려 봤지만 반응은 없었다. 은소는 아프다는 사람이 집에도 없고 어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병원을 갔다면 진작 다녀왔어야 할 시간이었다. 서진의 집을 나온 은소는 시간이 빠듯할 것 같다며 걸음을 빨리 했다. 학교를 빙 둘러 걷던 중 낯선 차가 눈에 들어왔다. 짙게 선탠이 된 흰색 외제차, 평범한 동네 고등학교에 있을 법한 차는 아니었다. 은소는 저 차가 어디서 낯이 많이 익다고 느꼈다. 은소는 멀리 차를 보며 걷고 있었다. 갑자기 차 문이 열리며 목소리가 들렸다.

“강서진!”

열린 차 문 너머로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서진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알 수 없었으나 그 목소리가 서진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기욱이 도망치려는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놔, 놓으라고!!”

기욱에게 팔이 붙잡힌 서진은 짜증이 났다. 학교 근처라는 걸 알면서도 서진은 더욱 발악했다. 서윤을 괴롭힌 것도, 펠라를 요구하고 밤새 놓아주지 않는 것도 다 상관없었다.

아무리 잘 자고 있었다고는 하나 학교에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 깨워 주지 않은 기욱이 싫었다. 하루쯤은 괜찮잖아. 나도 많이 빼먹었어. 담담하게 말하는 기욱이 서진은 진절머리가 났다.

“당신은 그렇게.”

“…….”

“세상을 다 자기 기준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지?”

“서진아. 그게 아니라…….”

“누나만 아니었으면 너 같은 인간…… 으읍!”

서진의 허리를 붙잡은 기욱이 입술을 맞췄다. 학교 교문을 힐끗거린 서진이 놓으라며 기욱을 밀어냈다. 생각보다 길지 않은 키스였지만, 서진을 당황스럽게 하기엔 더없이 충분했다. 점심시간, 그것도 학교 앞에서 키스라니. 미친 것도 정도가 있었다.

시계를 본 기욱은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욱도 병원에 가 봐야 하긴 마찬가지였다. 기욱이 서진의 뺨 근처로 입술을 맞췄다. 기욱은 서진이 휘두르려는 손을 붙잡아 냈다.

“나중에.”

“…….”

“제대로 사과할게.”

“무슨…!!”

기욱의 모습이 사라지자 뒤쪽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은소가 보였다. 은소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 시간에 서진이 기욱의 차에서 내린 거지? 기욱은 왜 서진에게 키스를 한 거지? 그보다 기욱은……. 은소와 서진의 눈이 맞았다.

“서, 서진아…!”

은소의 품에 있던 교과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교과서를 들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서진은 이미 교문 안쪽으로 사라지고 난 뒤였다. 때마침 몰래 밖에 나갔다 왔던 은소의 친구들이 은소에게 다가왔다.

“기은소. 너 여기 서서 뭐 하냐?”

“아, 아냐. 아무것도.”

남학생들과 은소는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몇몇 남학생들이 기욱을 힐끗거리긴 했으나 대부분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지나가는 눈치였다.

‘왜 서진이 시헌의 형이랑…….’

믿을 수 없었다.

* * *

한 달은 걸린다고 했다. 한 달이면 모든 게 정리가 될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다. 어째서인지 서진은 그날 이후 독서실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듣자 하니 나오지 않게 된 지 꽤 시간이 지났다고 했다. 여직원도 영문을 알 수 없어 하긴 마찬가지였다.

독서실을 옮겼나?

시헌은 몇 번이나 서진에게 연락을 시도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며칠 만의 통화에 서진 대신 전화를 받은 낯선 남자가 잘못 걸었다고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답답한 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짜증이 날 것만 같았다.

“…아. 시헌아? 내 말 듣고 있어?”

“어, 아니. 미안. 지금 좀.”

은소가 밝아진 건 좋은 일이었지만 지금 시헌에겐 은소의 그런 모습을 받아 줄 만한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더 왕따를 당하지 않으니 그걸로 된 거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시헌이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뭐야? 근처를 지나가던 친구들이 시헌의 심각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아냐. 요즘 들어 시헌은 그랬다. 사실 은소 또한 아닌 척 심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진과 기욱의 그 모습을 시헌은 알고 있는 걸까?

대체 둘은 무슨 사이인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파 왔다. 은소의 시선이 시헌이 앉아 있던 책상에 닿았다. 급하게 나갔던 모양인지 시헌의 책상 위에는 휴대폰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은소는 시헌이 나간 문을 힐끗거렸다. 아직 시헌은 화장실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눈치를 보던 은소가 시헌이 엎고 나간 휴대폰을 뒤집었다. 잠금 화면이 걸리지 않은, 문자 메시지들이 그대로 있었다. 은소는 가장 최근에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무슨 일 있어?」 오후 7:45

「답장 좀 해」 오후 4:45

시간도, 날짜도 제각각인 문자들이 여럿 있었다. 답장이 없는, 시헌의 일방적인 문자들이 줄을 이뤘다. 시헌이 올 것 같은 눈치가 든 은소는 재빨리 휴대폰을 제자리에 올려 두었다. 다행히 자리로 돌아온 시헌은 은소가 휴대폰을 보았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시헌은 휴대폰을 뒤집자 보이는 문자 화면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며칠 전까지는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라도 할 수 있었지만, 휴대폰 주인이 바뀐 뒤로는 그런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시헌이 은소를 힐끗거렸다. 이런 경우 대체로 시헌은 별말 없이 입을 다물고는 하는데, 어째서인지 힘들게 입을 뗐다.

“너 말야.”

“…….”

“혹시…, 서진이 번호 있어?”

서진이 얘기였다. 어?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은소는 시헌이 왜 서진이에 대한 말을 그렇게 힘들게 꺼내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별일 아닌 척하며 휴대폰을 열어 서진의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몸을 살짝 숙인 시헌이 은소의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 번호가 아니라고 했다.

“그래? 그럼 모르는데.”

은소는 서진이 언제 휴대폰을 바꿨는지 알 수 없었다. 요즘은 같이 등교만 하는 사이고, 그나마도 동네가 비슷한 다른 친구를 찾으면서 그 횟수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였다. 이젠 서로 휴대폰을 바꿨느니 번호를 바꿨느니 하고 떠들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타이밍이 너무나 잘 맞아떨어졌다. 은소는 왠지 서진이 휴대폰을 바꾼 것이 시헌의 형―기욱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기우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은소는 짜증이 났다. 서진은 다른 사람도 아닌 시헌의 형이랑 만나는데,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시헌은 서진에게 목을 매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소는 서진이 시헌을 가지고 논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선생님 대신에 조교가 대신 들어왔다. 가벼운 설문 조사를 한다고 했다. 종이를 앞에서부터 넘겨받았다. 어느 학원에서나 하는 희망 대학과 학과를 적는 설문이었다. 이미 다른 학원에서 몇 번인가 한 적이 있는 은소는 아무렇지 않게 볼펜으로 설문지를 적었다. H 대학교 의예과, 은소의 결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탁탁, 뭔가가 테이블을 치는 소리가 났다. 시헌의 볼펜 짓이었다. 대학생의 말 따라 별거 없는 설문 조사라는 은소의 생각과 달리 시헌의 볼펜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다른 생각을 하는 걸까? 그렇다면 말을 해 줘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시헌의 볼펜이 설문지에 닿았다.

쓰는 줄 알았는데, 줄만 몇 번 긋다가 말았다. 시간이 다 되었고 앞에 있던 학생들이 용지를 넘겼다. 이름만 달랑 적은 시헌은 결국 빈 용지를 넘겨야만 했다.

선생님이 들어오고, 수업이 다시 진행되었지만, 은소는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적지 않고 빈 용지로 넘긴 시헌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시헌의 집안은 유명한 의사 집안이라고 알고 있었다. 형과 누나, 친척들도 전부 의사라고 했다.

은소는 학교는 달라도 시헌이 당연히 의대에 지망할 것으로 생각했다. 고3까지 몇 달, 아무런 목표도 없이 공부를 하는 시헌의 행동은 어딘가 이상했다. 늘 그렇듯 두 사람은 지하철역 근처에서 헤어져야만 했다. 금요일, 다음 주에 보자는 시헌의 말은 어딘가 은소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은소는 등을 돌린 시헌의 팔을 붙잡았다.

“이, 있잖아.”

그리고 뒤늦게 생각 없이 나온 행동이라는 걸 알았다. 시헌이 무슨 일이냐며 은소를 가만히 바라봤다. 은소의 시야로 늦게까지 하는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밥 먹고 안 갈래?”

다행히 시헌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은 후 걸음이 근처 놀이터로 향했다. 이렇게 되면 둘 다 집을 좀 돌아가야 했지만 바람을 쐬기에는 딱 적당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같이 있는 것이 좋아 세 사람이 일부러 이런 식으로 빙 돌아 둘러 가고는 했다. 텅 빈 놀이터 그네에 앉았다. 분명 예전에는 꽤 높았던 그네가 이젠 너무나 작게만 느껴졌다.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천천히 발을 차자 그네가 올라갔다. 올라가는 속도도, 높이에 대한 감각도 중학교 때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그리고 그 다름이 이제는 중학생이 아니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란히 앉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중학교 때도 어딘가 시헌이 불편했던 건 사실이지만, 같이 있으면서 딱히 할 말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아니, 같은 침묵이라도 뭔가가 이상했다. 은소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뭔가 어렸을 적 생각난다.”

“2년밖에 안 지났어.”

풉, 그 말에 은소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애늙은이같이 말할 의도는 없었는데 말이다. 시헌의 말 따라 고작 2년이었다. 중학교 2년과 다를 게 없는 시간일 텐데, 그 시간은 세 사람의 모든 것을 바꿔 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우릴 이렇게 갈라놓은 걸까.

차라리 처음부터 사이가 소원했다면 좀 덜할 텐데 말이다. 한 번 멀어진 사이의 골을 메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녔다. 할 말이 없어진 은소는 말을 돌렸다.

“아, 맞아. 영화는 아직도 봐?”

시헌은 은소가 생각나는 말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네를 멈춘 시헌이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가끔. 시간 날 때.”

“난 말야. 영화감독도 괜찮을 거로 생각해.”

“무슨 소리야.”

뜻밖의 말에 시헌이 당황했다. 어, 음. 그러니까. 말을 흐리던 은소는 졸업 직전 시헌의 생일 파티를 기억했다. 고개를 들자 멀리 새로 들어선 아파트가 보였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공사를 시작했다고 들었다.

생일 파티를 하고, 가끔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몰래 놀러 가던 그곳은 공사가 중단된 아파트가 아닌 고급 주택 단지의 한 곳이 되어 버렸다. 차마 설문지를 몰래 훔쳐봤다는 말을 하지 못한 은소는 조금이라도 시헌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네가 그랬잖아.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시헌은 멍한 얼굴로 한동안 은소를 바라봐야만 했다.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은소는 시헌치고는 보기 드문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시헌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일이 있었다. 틀림없이. 시헌은 왜 여태껏 그 생각을 하지 못했나 하고 후회가 들었다.

사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영화감독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시간이 늦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그네에서 일어났다. 놀이터 입구 쪽에서 고등학생 무리가 담배를 피우며 떠들고 있었다. 시헌보다 조금 앞선 은소는 아무렇지 않게 그 무리를 지나쳐 갔다. 시헌은 그런 은소의 모습이 확실히 달라졌다고 느꼈다. 뭐 해? 은소가 시헌을 재촉했다. 남학생들을 힐끗거린 시헌이 결국 은소에게 다가갔다.

* * *

툭, 하고 접시 위, 달걀노른자가 터졌다. 서진은 접시 위에 엉망으로 흘러내리는 노른자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달걀을 밥으로 가져오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보다 못한 서윤이 아직 손대지 않은 멀쩡한 달걀을 서진의 밥 위로 올려 주었다. 밥 위로 흘러내리는 달걀노른자를 보며 만족한 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여행? 밥 먹다 말고 갑자기 무슨 여행?”

“그냥 궁금해서.”

김치를 집어 먹은 서진은 잠시 고민했다. 여행, 이제 막 간호사 생활에 익숙해진 서윤과 달리 서진은 입시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단 한 번도 둘이 여행을 가 본 적이 없었다. 늘 생활고에 시달렸고, 하루하루가 살기 바빴기 때문에 여행 같은 건 생각조차 할 여유가 나지 않았다. 서진이야 아직 고3까지 시간이 남았고, 하루 이틀 정도라면 상관이 없었다. 솔직한 말로 서윤과의 여행이라면 수능 하루 전날이라도 갈 자신이 있었다.

“언제 갈 건데?”

“어? 아니, 지금 당장은 아니고. 나중에. 나중에 가자.”

서윤이 나중에라며 적당히 말을 돌렸다. 그 나중에라는 말이 서진은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약간 실망한 모양인지 볼을 내민 서진이 고개를 숙여 밥 쪽으로 집중했다.

“그럼 그때 가서 말해.”

“에이, 그러지 말고. 가고 싶은 곳이라도 말해 보라니까?”

서윤이 서진 쪽으로 살이 발라진, 생선을 내밀었다. 이렇게 안 해 줘도 된다니까. 정작 본인은 손도 못 댄 생선에 서진이 한숨을 쉬었다. 유리그릇에 부딪히는 젓가락 소리와 계속해서 어딜 가고 싶냐고 물어오는 서윤의 말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서진은 언제 갈지도 모르는 여행지를 왜 벌써 정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서진에게 중요한 건 여행지가 아니었다.

“난 누나랑 가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어.”

“얘가 참. 못 하는 말이 없어.”

“진짜야. 난 누나만 있으면 돼.”

서진은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서진의 모습에 서윤이 몸을 앞으로 내밀어 볼을 잡아당겼다. 밥 먹다 말고 뭐 하는 짓이냐고. 서진이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서윤의 말이 조금 더 앞섰다.

“네네, 우리 서진이 마음 잘 알았습니다.”

장난 투로 넘기는 서윤의 말에 서진은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농담이 아니…….”

“그래서? 어디 가고 싶은데?”

또다시 여행지를 묻는 서윤의 질문에 서진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서윤이 끈질기다는 건 알았지만, 이번엔 평소보다 좀 더했다. 서진이 다 먹은 밥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서진아. 강서진.”

“…….”

“끝까지 말 안 할 거야? 응? 누나 슬슬 서운해지려 하는데.”

“…도.”

“뭐라고?”

“제주도.”

서윤의 눈치를 본 서진이 고개를 싱크대 쪽으로 돌렸다. 뜬금없는 제주도에 서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말을 하는 서진도 알고 있었다. 가 보고 싶은 곳 말하라기에 말했는데 왜 이렇게 민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서진이 고개를 돌린 채 입을 뗐다.

“제주도 가고 싶다고.”

“제주도는 갑자기 왜?”

서윤의 질문에 서진이 다시 고개를 바로 돌렸다. 등 뒤로 오래된 중고 TV가 눈에 들어왔다. 서진과 서윤 둘 다 TV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니었다.

“TV에서 봤어. 물.”

“물? 물 마시고 싶어? 물 줄까?”

서윤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주도 물이 깨끗해서. 누나랑 꼭 가 보고 싶어.”

뒤늦게 서윤도 켜지지 않은 TV를 힐끗거렸다. 서진은 언젠가 우연히 틀었던 방송에서 제주도 관광지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게 의도적인 연출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왠지 서윤과 함께 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딱히 의도하고 말한 건 아니었기에 서진 또한 잊고 있었던 사실 중 하나였다. 풉, 하고 서윤이 웃음을 터트렸다. 서진은 서윤의 웃음의 의미를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무슨 애늙은이 같은 말을 하고 있어. 또? 그럼 제주도 가서 하고 싶은 거 없어?”

애늙은이라니. 시헌도 아니고 말이다. 서진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서윤의 그 말이 시헌을 닮았다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서윤이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제주도까지 이야기했으면 됐지 또 무슨 얘기를 하란 말인지. 이미 서윤도 식사를 다 마친 상태였다.

서진의 손이 다 먹은 식기들을 치우고 있었다. 서윤이 이따 치우라며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서진은 허공에 들린 밥그릇을 다시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누나 이거 꼭 말해야 돼?”

“그럼! 당연하지!”

서윤이 꼭 듣고 말겠다며 어깨를 폈다. 쉽게 포기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 서윤의 모습에 서진은 그날 봤던 프로그램을 생각하며 대답했다. 서윤과의 여행,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가 보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정말 만약에.

“만약에 간다면.”

“…….”

“기왕이면 배 타고 가고 싶어. 그리고…….”

서진은 말을 흐렸다. 그리고 프로그램에서 어떻게 했더라? 커다란 수영장도 가고, 아쿠아리움도 가고. 처음 보는 음식들도 먹었던 것 같기도 하고. 무슨 한복 대여점 같은 곳에 들른 것 같기도 했다. 서진은 이내 얼굴을 붉히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서윤이 그런 서진을 재촉했다.

“왜? 말해 봐. 빨리. 궁금하잖아.”

서진이 무릎 밑으로 주먹을 살짝 쥐었다. 입술이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한참 만에 서진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한복.

“누나…. 한복 입은 거 보고 싶어.”

“어머, 얘 좀 봐.”

서윤도 재미있는 모양인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날, 저녁 서윤과 서진은 잠이 들기 전까지 여행에 관해 이야기했다.

* * *

모처럼의 가족 식사였지만 시헌은 생각처럼 입맛이 나지 않았다. 매번 오는 곳이라 질린 걸까. 그렇게 따지면 시헌보다 더 오래 이곳을 방문한 부모님, 기욱이나 하연도 진작 질렸어야 마땅했다. 올 때마다 질리지 않는 곳이라는 말을 시헌도 반박할 수 없었다.

아니면 저 혼자 코드가 안 맞는다거나. 그런데 이미 한두 번 온 것도 아니고, 안 맞는다면 진작 불평을 해야 했다. 뭔가가 이상했다. 사실 이상한 건, 식당뿐만이 아니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위화감, 시헌은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강제로 조종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학교에 가고, 학원에 가고, 숙제한다. 달라진 것 없는 가족 회식을 하고, 주말에는 여느 때처럼 학원 보충과 남은 공부로 시간을 보낸다. 늘 반복해 온 일상이지 않은가.

이제 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시헌은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비빔밥의 나물 향이 올라오며 입안을 적셨다.

학원 시간표가 이유 없이 바뀌고, 그날 통화를 마지막으로 서진과 이제는 연락되지 않았다. 독서실에 가도 소용이 없었다. 서진 때문인가? 아니, 이 위화감은 단순히 서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은소. 그래, 그날 밤 은소와 늦은 저녁을 먹고 놀이터 그네에 앉았던 날.

은소의 한마디가 중학교 시절 잊고 있었던 시헌의 기억을 환기했다. 서로 살기가 바빠서 그랬던 걸까? 왜 그런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지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를 다짐하는 시헌과 달리 가족들은 한참 저들끼리의 대화로 정신이 없었다.

팔을 뻗으려던 시헌은 문득 근처에 있는 고기가 너무 멀다는 걸 깨달았다. 시헌이 머뭇대고 있자 기욱이 팔을 뻗어 고기를 가져다주었다. 시헌이 옆에 앉은 기욱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뇌출혈 환자의 수술이 어쩌고 하며 떠들고 있었다. 시헌은 정말 기욱이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고기를 입에 넣은 시헌이 말했다.

“고마워.”

“별걸 다.”

기욱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본 운오가 기욱의 팔을 잡아당겼다. 운오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기욱의 몸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형, 형 나도.”

기욱이 가운데 낀 탓인지 시헌은 운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기욱이 가져다준 고기를 먹은 시헌은 생각보다 고기가 적다는 걸 깨달았다. 기욱이 때마침 옆을 지나가는 직원을 불렀다. 운오는 자신을 무시하는 기욱이 짜증 난 모양인지 기욱의 몸을 생각보다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냥 다른 거 먹을게.”

“기욱이 형!”

“운오야, 누나가 줄게!”

보다 못한 하연이 약간 언성을 높였다. 당황하는 직원, 운오를 달래는 하연, 그 가운데 낀 시헌이며 순식간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밑반찬용 접시를 건네던 순간 운오의 움직임에 의해 기욱의 몸이 흔들렸다. 밑반찬에 남아 있던 양념이 여직원의 옷 쪽으로 흘러내렸다.

“박운오! 너 일로 와. 누나랑 자리 바꿔!”

“하아, 죄송합니다.”

운오가 하연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자리를 바꿨다. 운오의 표정은 여전히 일그러진 상태였다. 기욱의 사과에 여직원은 괜찮다는 말을 남기고 방 밖으로 나갔다. 어느 정도 사태가 정리되었음을 느낀 시헌이 근처에 있던 물을 마셨다. 물티슈를 찾는 기욱에 시헌은 옆에 있던 물티슈를 기욱에게 건넸다. 기욱의 옷에도 양념이 튀었기 때문이었다. 기욱의 옆에 앉은 하연이 기욱을 팔꿈치로 툭툭 건드렸다.

“박기욱, 너 내가 잘하라고 했어, 안 했어? 내가 너 때문에 미쳐 진짜!”

“내가 뭐… 으윽!”

하연이 기욱의 등 근처를 강하게 꼬집었다. 부모님 앞이라 차마 욕도 못 하고, 허리가 틀릴 만한 고통에 기욱의 고개가 절로 테이블 앞으로 숙여졌다.

“어머, 기욱아 왜 그래?”

“아파, 아파. 존나 아프다고.”

얼굴을 살짝 옆으로 한 기욱이 항복 사인을 보냈다. 기욱의 등에 닿은 하연의 손에 다시 한번 힘이 들어갔다. 아으윽!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기욱이 인상을 찌푸렸다. 기욱의 등을 꼬집고 있는 하연의 모습을 본 엄마가 가볍게 웃었다. 엄마의 눈에는 두 사람의 행동이 조금 심한 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연이 너 또 그새 기욱이 괴롭히니? 적당히 좀 하렴. 낼 모래 결혼할 애가 아직도 동생 괴롭히면 어쩌려고 그래.”

“맞아. 매형한테 이를…… 아악! 진짜! 작작 좀 해!!”

기욱이 결국 몸을 일으켜 하연의 손을 쳐 냈다. 하연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웃었다. 하연의 시선이 운오를 슬쩍 가리켰다. 무슨 말을 할지 뻔한 하연의 잔소리에 기욱은 괜히 얼마 남지 않은 음식을 집어 먹었다.

“매형한테 다 이를 거야. 매형, 너 이러고 다니는 거 모르지?”

혼잣말로 중얼대는 기욱의 말을 하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시헌은 하연에게 꼬집힌 등을 만지작거리며 불평을 하는 기욱을 가만히 봤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났기 때문일까? 시헌이나 운오가 하연에게 맞은 적은 없었지만. 비교적 나이 차이가 덜한 기욱은 시헌이 어렸을 때부터 종종 하연에게 맞고는 했었다.

유독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웠던 기욱도 하연 앞에서는 별거 없는 남동생에 지나지 않았다. 고기반찬이 새로 왔다. 시헌은 새로 온 고기반찬을 집어 먹었다. 그사이 부모님 옆에 앉은 운오가 과고 입시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다. 시헌과 고기반찬을 집어 먹는 엄마의 눈이 맞았다.

“그러고 보니 울 시헌이 학교는 어디가 좋을까?”

예상했던, 언젠가는 한번 나올 것 같던 말이 엄마의 입에서 나왔다. 여태껏 성적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부모님이지만, 아무래도 고3이 가까워지다 보니 한두 번 정도는 각오했었다. 가볍게 던진 엄마의 말에 시헌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옆에 앉은 기욱과 하연은 반찬을 가지고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연에게 반찬을 빼앗긴 기욱이 짜증을 내며 시헌을 힐끗거렸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당사자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아빠가 입을 열었다.

“못해도 J대나 K대 정도는 나와야 하지 않겠냐.”

“자기도 참. 민경이 걔가 요번에 재수해서 U대 들어간 거 몰라? 진경 엄마 난리잖아 아주. 하긴, 뭐 지방 간호 전문대 출신에 U대면 대단한 거지. 국립은 국립이잖아?”

“그 집안 그런 게 하루 이틀은 아니잖아.”

“어머, 하루 이틀이 아니니까 문젠 거지. 그쯤 했으면 그만할 법도 되지 않았나? 원. 어쨌든 엄만, 울 시헌이가 알아서 잘할 거라 믿어. 아, 그래도 수련의는 꼭 아빠 병원에서 해야 한다? 알겠지?”

엄마가 웃으며 장난을 쳤다. 보다 못한 아빠가 거기서 거기라며 끼어들었으나 엄마의 잔소리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관심 있는 과는 있니, 예과 때는 힘들겠지만 놀지 말고 공부하렴, 기왕이면 본과 들어가기 전에 과를 정하고 공부를 하는 게 좋다, 내과 공부는 미리미리 해 두렴. 시험 보기 전에 실기는 꼭 엄마한테 검사받고. 아직 먼, 혹은 할 거란 보장도 없는 말들이 이어졌다.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 같았다. 시헌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쥐었다. 엄마도, 엄마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하는 하연이며 아빠도, 중간에 끼어들어 이것저것 물어오는 어린 운오도 그 자리에 앉은 가족 중 누구도 시헌에게 다른 길을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왜 의대에 들어가고, 의사가 되는 걸 전제로 그 말을 하는 걸까. 분명 대학교에 있는 과는 의과가 전부가 아닐 텐데 말이다. 본인의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다른 사람의 말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헌은 습관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물 컵을 홀짝였다. 그 모습을 본 기욱이 시헌의 머리 위로 손을 살짝 올렸다.

“괜찮아.”

“…….”

“나도 처음엔 그랬거든.”

어째서일까? 기욱은 시헌의 그런 말이 어딘가 불편했다. 마치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인정하게 될 것 같아 두려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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