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7 욕심과 질투(3권) (19/83)

Chapter. 17 욕심과 질투

점심시간, 수업이 끝난 서진은 곧장 이어폰을 낀 뒤 공부를 했다. 이어폰 너머로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서진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이어폰을 빼고 고개를 들었다. 은소였다. 은소의 뒤로 밥을 같이 먹는 몇몇 친구들이 있었다.

뒷문에 몸을 반쯤 기대 떠드느라 정신이 없는 남학생 중에서 서진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서진에게 다가간 은소를 보고 빨리 오라며 남학생 한 명이 재촉했다. 금방 간다고 말한 은소는 서진을 불렀다.

“서진아. 밥 안 먹어?”

서진은 창문 너머 건너편 건물에 있는 급식실로 향하는 아이들과 뒷문 근처에서 떠들고 있는 남학생들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어제 그 일로 한숨도 잠을 못 잤다. 단순히 잠만 자지 못하면 상관은 없었다. 1년 차보다 조금이지만 여유 시간이 생긴 기욱은 서진의 생각 이상으로 성가셨다.

찾아오거나 일방적으로 부르는 일은 없지만, 틈만 나면 문자를 하거나 전화를 걸고는 했다. 마치 연인과도 같은 말투에 서진은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몰랐다. 심지어 서윤이 옆에 있을 땐 더더욱 그랬다. 서진이 기욱의 문자를 무시하고는 하면 오래 가지 않아 같이 있는 서윤에게 연락이 왔다.

그건 대개 좋은 연락이 아니었다. 공부도 공부지만 하루하루가 스트레스였다. 서진에게 공부는, 서윤이나 주변 사람들의 말처럼 의대에 가기 위해서 뿐만은 아니었다. 서진에게 공부란 도피처에 가까웠다. 공부할 때만큼은 다른 것에 마음을 쓸 필요가 없었다. 서진이 결국 손을 흔들었다.

“됐어. 안 먹어.”

“어? 너 벌써 이거 풀어?”

서진의 그런 말을 듣기나 한 건지 서진의 문제집을 본 은소가 놀란 표정으로 서진을 봤다. 중학교 때는 몰랐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본 서진은 참 대단했다. 학원이라고는 수학 학원 한 개밖에 다니지 않는다. 그것도 유명한 학원도 아니었다. 서진은 대부분 학교 수업과 자습으로 진도를 나갔다.

비록 과고는 아니지만, 서진과 은소가 진학한 학교도 인근 학교 중에서는 나름 학생 수도 많고 문제의 난이도도 어려운 편이었다. 그런 학교에서 서진은 2학년까지 올라오면서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1년에 2번 행해지는 모의고사에서도 전 과목 합쳐 많아야 3개를 틀렸다. 은소는 서진을 볼 때면 선천적으로 머리가 좋은 사람은 뭘 해도 된다는 걸 새롭게 느꼈다.

물론, 그런 감정은 중학교 시절 시헌에게 이미 한 번 느낀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서진이 왜 과고 입시를 도중에 포기했는지 은소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비슷하다고 느꼈던 서진이 요즘 들어 무척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서진의 그런 달라짐이 하필이면 중학교 시절 시헌을 생각나게 하였다. 미묘하게 시헌과 닮아 가는 서진이 은소는 최근 들어 약간 불편해졌다. 은소의 계속된 관심에 서진이 문제집을 덮었다. 그리고는 등 뒤에 있는 은소의 친구들을 향해 눈치를 줬다.

1년 동안 같이 밥을 먹긴 했으나, 그들은 은소의 친구들이지 서진의 친구들이 아니었다. 서진은 은소가 중학교 때와 달리 밝아진 것에 다행이라는 기분을 느꼈을 뿐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방해할 거면 가라.”

서진이 다시 이어폰을 끼려던 찰나 은소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있잖아. 나 저번 주에 시헌이 만났는데.”

“…….”

“지난번 친구가 추천해 준 선생님 강의 들으러 간다고 했잖아. 시헌이도 듣고 있더라고. 잘 지내는 것 같던데.”

서진이 입을 꾹 다문 채 은소의 말을 들었다. 뒷문에서 은소의 친구들이 빨리 오라며 은소를 재촉했다. 잠시만. 친구들을 향해 대답한 은소가 다시 서진 쪽으로 등을 돌렸다. 밥을 안 먹겠다고 하는 서진을 굳이 억지로 데려가야 할 의무는 없었다. 은소가 약간 머뭇대더니 입을 열었다.

“시헌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기회 되면 셋이 만나는 것도 좋을 것…….”

“씨발, 기은소.”

“…….”

“내 앞에서 그 새끼 얘기 하지 마라.”

뜻밖의 욕설에 은소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은소가 결국 마지못해 등을 돌렸다. 순간 분위기가 험악해졌다는 걸 눈치챈 아이들이 무슨 일이냐며 물어 왔다. 은소는 별일 아니라며 적당히 대답했다. 친구들 틈에 낀 은소는 급식실을 내려오는 내내 손톱을 깨물었다.

세 사람이 술을 마신 그날, 술기운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은소는 시헌이 서진에게 키스를 하려고 했던 그 순간을 분명하게 기억했다. 은소는 얼결에 본 그 장면은 결코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중학교 시절 현정과 시헌보다 서진은 평범했고, 다가가기 쉬운 존재였다. 고등학교에 들어와 어딘가 달라진 서진. 그리고 은소는 그런 서진을 볼 때마다 시헌이 생각났다.

서진만 없다면.

* * *

“읏, 아파.”

“아파?”

등 뒤로 물어 오는 기욱의 목소리에 서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말 안 하려 했는데. 저도 모르게 꺼내고 말았다. 기욱은 서진의 목 근처에서 뜯어낸 밴드를 만지작거렸다. 밴드가 붙여진 목 근처에는 붉게 올라온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기욱과 만난 지 2주 전, 서진은 생각처럼 사라지지 않는 자국에 몇 번이나 밴드를 바꿔야 했다.

서진의 허리를 안은 기욱이 또다시 목을 물어 왔다. 이래서는 도무지 상처가 나을 수가 없었다. 기욱의 이빨이 지난번 희미하게 남은 자국을 짓눌렀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아팠다. 이런 짓이 뭐가 그리 좋은지 서진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욱은 서진의 목에 난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다시 며칠간 밴드를 붙이고 다녀야 할 서진을 생각하니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기욱은 원래 이런 자잘한 흔적을 남기는 취미는 없었다. 서진은 달랐다. 서진은 그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기욱은 그날 저를 보던 서진의 시선을, 서진을 분명하게 기억했다. 서진을 향한 채워지지 않은 갈증이 기욱을 더욱 안달 나게 하였다.

한쪽 팔에 전부 들어오는 서진의 몸을 등 뒤에서 안은 기욱이 몇 번이나 서진과의 섹스를 상상했는지 모른다. 참고 있는 거라고. 누누이 말하지만, 서진은 그조차도 불쾌한 모양이었다. 서진의 몸을 구석구석 만지던 기욱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초조한 듯 움찔대는 그 모습조차 기욱의 눈엔 귀여워 보였다. 침대 시트에 묻어 있는 정액을 본 서진이 마지못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기욱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닿을 것만 같은 거리였다. 서진은 이 자세로 기욱과 몇 번이나 키스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서진은 기욱과의 키스로 인해 축축해진 입술을 뗐다.

“그만해요.”

“왜?”

“하아…….”

뻔뻔하게 물어 오는 기욱의 태도에 서진은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왜냐니. 몰라서 묻는 것도 아닐 테고 기가 막혔다. 기욱은 서진의 몸을 천천히 침대로 눕혔다. 맨 허벅지에 기욱의 정장 바지가 그대로 닿았다. 기욱은 옷을 입고 있지만 한눈에 봐도 참고 있음이 훤히 보였다.

서진은 기욱의 손에 의해 강제로 사정을 당한 것보다, 저 혼자 옷을 입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욱 수치스러웠다. 시헌은 기욱이 옷을 끝까지 벗는 날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기욱이 서진의 뺨을 쓸었다. 커다란 손이 뺨에 닿을 때면 어딘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뭘 그런 눈으로 보고 그래.”

뺨에서 손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서진의 속눈썹이 기욱의 손가락에 맞닿았다. 남자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긴 속눈썹, 서윤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수많은 여자와 남자들을 만난 기욱이지만 이런 사소한 부분에 끌리기는 또 처음이었다.

기욱은 서진이라는 존재 자체가 마치 신이 자신을 위해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객관적으로 놓고 본다면 서진은 평범한 남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기욱은 서진의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만들어 놨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길 포기한 기욱의 시선이 점점 서진의 아래로 내려갔다. 허벅지를 들어 올려 입을 맞추는 행위가 야하기 그지없었다.

서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욱의 시선도, 이런 행동도 당사자인 서진에게 있어서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두 사람의 관계는 시작부터 어긋나 있었다. 기욱의 서진을 향한 비틀린 애정, 그리고 누나인 서윤을 향한 서진의 어긋난 감정이 맞물린 결과였다.

“읏…, 으응….”

“후… 서진아….”

“하윽, 으… 으응… 하으응….”

서진은 팔로 눈을 가렸다. 그때마다 기욱이 눈을 뜨라며 나긋한 목소리로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다시 기욱의 손에서 몇 번의 사정을 반복했다. 기욱은 서진의 정신이 몽롱해질 무렵에야 서진을 놓아 주었다. 서진의 뺨에 입술을 맞춘 기욱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서진은 침대에 몸을 뒤로 붙이며 기욱의 움직임을 살폈다. 기욱은 현관 근처 벽에 걸린 옷걸이 앞으로 다가갔다. 기욱의 손이 정장 주머니를 뒤졌다. 서진은 기욱이 도무지 뭘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손에 뭔가를 쥔 기욱이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사정 후의 나른함과 공허함에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서진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핀 기욱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려놓았다. 동시에 뭔가가 서진의 시야를 가렸다. 서진은 그 정체가 파란색 카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체크카드나 신용카드는 아니었다. 기욱은 허공에 들린 카드를 받으라며 흔들었다. 머뭇대던 서진이 카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카드의 뒷면을 뒤집었다. 독서실의 이름, 그리고 구석에는 기욱의 필체로 적힌 서진의 이름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서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욱과 카드를 번갈아 바라봤다. 기욱이 침대 옆으로 몸을 걸터앉았다. 서진은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주워 올려 아래를 가렸다. 다행히 기욱은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기욱이 서진의 손에 들린 카드를 손가락질했다.

“서윤이가 그러더라. 너 요즘 학원 끝나고 독서실 다닌다고.”

“…….”

“학원 근처 독서실이야. 1년 치 끊었어.”

“이런 거 필요 없…….”

“받아.”

방 안으로 침묵이 흘렀다. 서진은 카드 뒷면의 독서실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은영독서실, 서진이 다니고 있는 독서실 바로 건너편에 커다란 상가 11층에 있는 새로 생긴 독서실이었다. 1인 독서실로, 한 달 요금이 30만 원을 웃도는 독서실은 서진이 다니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서진은 기욱의 이런 행동이 호의인지, 아니면 대가성 행위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이미 멋대로 결제를 끝냈다는 기욱의 말에 서진은 쉽사리 거절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욱은 서진이 카드를 버리거나, 독서실을 가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독서실 카드를 건넨 순간 선택은 기욱이 아닌 서진의 몫이었다.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서진이 반항할 틈도 없었다. 기욱은 서진을 무릎 위로 올려 안았다. 기욱의 숨소리가, 인기척과 온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서진은 저를 안고 있는 기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정말 궁금했다. 커다란 인형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서진은 쉽게 기욱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서진은 블라인드가 처진 모텔의 커튼 창가를 하릴없이 응시했다. 등 뒤로 기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부 열심히 한다며.”

“당신이랑 상관없잖아요.”

기욱의 손이 서진의 어깨 너머로 올라왔다. 휴대폰, 서진은 기욱의 손에 들린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바라봤다. 문자 메시지 화면이었다.

「강서진 학생의 안심 문자가 등록되었습니다.」

날짜로 봤을 때 사흘 전쯤, 독서실을 등록할 때 온 문자 같았다. 당혹감에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기욱 또한 얼굴을 내민 탓에 두 사람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말도 없이 1년 치 독서실을 등록한 기욱이 그냥 넘어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거란 예상 또한 하지 못했다.

“이게 뭔…!”

서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서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욱이 다시 서진의 몸을 눕혔다. 채 반항 전에 기욱의 손이 서진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여자처럼 한쪽 다리가 드러난 모습에 서진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이런 수치심은 몇 번을 당하든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으읏….”

서진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은 기욱의 혀가 허벅지를 천천히 핥았다. 아무리 기욱이 싫어도, 남자인 이상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자극이 서진을 지배했다. 서진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입을 꾹 다물며 신음을 참는 것이 전부였다. 기욱은 눈을 위로 해 그런 서진의 모습을 살폈다.

서진은 남자치고는 털이 없는 편이었다. 서윤도 여자치고는 털이 없는 걸 생각할 때 유전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농후하게 서진의 허벅지와 주변을 이곳저곳 핥던 기욱의 움직임이 점점 안쪽으로 향했다. 서진의 손이 기욱의 머리를 눌렀다.

기욱의 애무에 서진은 쉽게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서진 나름의 반항이었지만 기욱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잠시 입술을 뗀 기욱은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기욱은 서진이 제게 마법의 약이라도 사용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진을 볼 때면 기욱은 이성보다 늘 감정이 앞섰다.

병원 일만 아니라면, 서진의 나이가 한두 살만 더 많았더라면. 온갖 생각들이 기욱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 모든 조건이 충족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욱은 서진을 가지고 싶었다. 기욱이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서진의 타액이 기욱의 입술 끝에 남아 있었다.

“마음 같아선 정말 확 묶어 버리고 싶은데 말야. 아무한테도 못 보여 주게.”

기욱은 남들보다 유독 섹스를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이상한 쪽으로 취미가 있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런 기욱의 행동은 오직 서진에게만 한정되는 행위였다. 기욱의 말에 서진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미친 새끼. 서진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기욱에 대한 경멸이 사라지는 것 또한 아니었다.

“하, 미친 거 아녜요?”

“그래. 미쳤지.”

기욱이 강제로 서진에게 입술을 맞췄다. 입을 꾹 다문 서진이 싫다며 고개를 저었으나 아래를 강하게 쥐고 흔드는 기욱의 손길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벌어진 입안 사이로 기욱의 혀가 기다렸다는 듯 침범해 들어왔다.

미쳤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머릿속은 기욱이 주는 쾌감에 정신이 없었다. 미쳤다. 서진과 이렇게 되기 전 기욱은 몇 번이나 서진 나이와 비슷한 남학생들을 만나려 해 봤다. 나이가 비슷한 남학생뿐만이 아니다.

성인 남자를 만난다 해도 똑같았다. 끝까지 삽입하지 않는 서진과 달리 격렬한 섹스를 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서진이 숨이 막힌 모양인지 인상을 찌푸렸다. 기욱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를 간신히 내려 깐 기욱이 말했다.

“잘해.”

“…….”

“내가 더 미쳐 버리기 전에.”

기욱이 서진의 팔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서진의 손에 들린 독서실 카드까지 같이 딸려 올라왔다. 기욱의 다른 손이 서진의 손에 들린 카드를 살짝 건드렸다.

“괜한 짓 하지 말고 다녀.”

눈을 살짝 뜬 서진이 제 이름이 적힌 독서실 카드를 가만히 바라봤다. 카드를 쥔 서진의 손이 침대 위로 천천히 내려왔다. 서진은 짙은 한숨을 쉬었다. 모텔 너머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아, 알았어요.”

“그래,”

서진의 대답에 기욱이 만족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의 손이 다시 서진의 아래로 내려갔다. 자발적으로 들어온 지옥이라고는 하나 처음부터 서진에겐 그 어떤 선택권도 존재하지 않았다.

* * *

“아, 씨발.”

점심시간, 점심을 먹고 복도를 지나는 아이들과 어딘가로 향하던 서진이 몸을 부딪쳤다.

남학생과의 충돌에 서진의 몸이 흔들리며 품 안에 있던 프린트물이며 문제집과 교과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복도를 지나가는 아이들의 시선이 서진과 남학생에게 닿았다. 노는 무리에 속한다는 남학생은 몇 번인가 큰 사고를 쳐 정학을 당한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그럭저럭 평범한 편이었지만, 욱하는 성격과 자기중심적인 성격 등이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친구들은 서진과 부딪힌 어깨를 털며 신경질적으로 욕을 하는 남학생을 말리고 있었다. 뜻밖에 무리 중에는 은소도 있었다.

남학생을 본 서진은 한숨을 쉬며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프린트물과 문제집 등을 줍기 시작했다. 프린트물을 향해 손을 뻗자 용지 위로 올라와 있는 삼선슬리퍼가 보였다. 남학생의 짓이었다. 머리 위로 큭큭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야.”

“뭐 씨발. 가져가. 씨발, 사람이 먼저 부딪혔으면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냐.”

말끝마다 씨발을 붙이는 남학생은 서진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서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지나가는 여학생과 눈이 맞았다. 아예 노골적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학생들도 있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서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리에 낀 은소는 서진과 남학생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다른 반 아이들과 친해졌다고 하더니 남학생의 무리인 것 같았다. 아무렴 서진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서진은 은소가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학생은 물론이거니와 남학생의 친구들은 중학교 시절부터 사고를 많이 쳐 온 아이들이었다.

남학생 말고도 교내에서 싸움으로 문제를 일으킨 아이들도 있었다. 은소는 서진과 중학교 시절을 같이 지냈지만, 서진이 주먹질을 하는 것은 본 적이 없거니와 잘할 거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은소와 마주친 서진의 눈은 괜찮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 서진의 그런 행동은 중학교 시절 시헌을 생각나게 하였다. 서진은 시헌이 아니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헌과 점점 닮아 가는 서진이 은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시헌과 달리 서진은 무척이나 평범했다.

그런 서진이 시헌과 비슷해지려 하고 있다.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거리감, 은소는 마치 저를 두고 두 사람이 앞으로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함께 있을 서진과 시헌을 생각하니 절로 불편해졌다. 서진은 은소의 그런 감정을 짐작하고 있지도,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남학생의 슬리퍼 끝에 걸린 프린트물을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씨발, 꼬나보면 어찌할 건데. 사과 안 하……!”

서진이 남학생의 몸을 살짝 밀었다. 서진이 크게 힘을 준 것도 아니고, 원래라면 서진에게 밀릴 만한 체격도 아니었으나 서진의 행동은 워낙 급작스러웠다. 놀란 남학생이 뒷걸음질 침과 동시에 프린트물에 있던 슬리퍼가 떨어졌다.

서진은 기다렸다는 듯 얇은 프린트물을 집어 들었다. 씨발, 또다시 남학생의 입에서 욕설이 나왔다. 프린트물을 파일에 다시 집어넣은 서진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들썩였다.

“어, 미안.”

서진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공부하려면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런 자잘한 일로 시간을 지체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서진은 남학생을 지나쳐 도서관이 있는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미친 거 아니냐? 야! 등 뒤로 서진을 부르는 남학생과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서진은 끝내 등을 돌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 누군가 걱정을 하고는 하면 시헌이 늘 습관처럼 해 왔던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마치 마법처럼 어떻게든 됐다. 예고 없이 남학생의 몸을 밀은 서진. 비록 남학생은 불쾌해 보였지만 친구들의 만류에 신경질적으로 등을 돌렸다. 정말 어떻게든 됐다. 그러나 서진은 시헌이 아니었다. 속에서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 * *

하나밖에 없는 학원 수업을 마친 서진은 독서실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왔다. 기존에 다니던 독서실과 건너편 빌라에 10층 위에 있는 독서실 간판을 번갈아 본 서진은 한숨을 쉬었다. 자리에 없는 기욱의 집착은 서진을 여러모로 힘들게 만들었다. 특히 독서실 카드를 준 후부터 더 그랬다.

독서실을 가지 않고는 하는 날이면 곧장 연락이 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 왔다.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거나, 전화를 받지 않는 날이면 얼마 가지 않아 서윤과 한 번씩 싸우고는 했다. 주로 퇴근을 한 서윤이 집에 있을 시간에 전화로 싸우는데, 그건 말이 싸움이지 대게 기욱의 잘못이었다. 그런데도 사과를 하는 쪽은 늘 서윤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과를 하는 서윤을 보는 건 서진 나름의 고역이었다. 서진은 기욱이 자신과 연락을 할 때 사용하는 휴대폰과 서윤과 연락을 하는 휴대폰이 다르다는 걸 알았다. 서윤도 기욱의 다른 휴대폰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서윤이 오랫동안 전화를 하고는 할 때면 서진이 마지못해 문자로 대신 사과를 하고는 했었다. 그럼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건넌방 너머 서윤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기욱의 집착은 그렇듯 서진을 여러모로 피곤하게 만들었다.

기욱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진은 왠지 독서실 카드를 준 것이 시헌 때문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우연치고는 잘 맞는 것이 어딘가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내 괜한 걱정이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병원에 있을 기욱이 그런 일까지 알 수는 없었다. 기욱이 준 독서실로 짐을 옮기는지도 2주가 넘었다. 중간에 몇 번인가 시헌이 오기는 했지만, 학원 수업이 있을 즈음이면 짐을 챙겨서 다시 나갔다. 시헌은 몇 번인가 서진을 힐끗대기는 했으나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서진은 시헌과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서진보다 훨씬 오랫동안 이 근처에서 학원에 다닌 시헌을 두고 오지 말라 가라 할 권한은 없었다. 무엇보다 서진은 시헌과 그런 말조차 섞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서진은 제 몸 하나, 그리고 저에게 치근덕대는 기욱을 감당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성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서진도 사람인지라 저도 모르게 기존에 다니던 독서실로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서진은 막차가 끊길 무렵 독서실에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후문으로 나오자 주차장 옆으로 담배 연기가 훅, 하고 올라왔다. 교복을 입은 인근 고등학교 남학생들, 그중에는 아침에 서진과 시비가 붙은 남학생도 있었다. 벽에 기대 친구들과 떠들던 남학생이 서진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저들끼리 그런 서진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떠들었다.

사람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까운 거리에서 대놓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건 아무리 서진이라 해도 불쾌했다. 서진의 표정이 구겨졌다. 보다 못해 담배를 끈 남학생이 서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학교에서처럼 쉽게 당하지 않겠다는 듯 어깨에 힘을 주고 서진을 내려다봤다.

남학생의 커다란 손이 서진의 어깨를 밀었다. 서진이 아무리 힘을 준다 해도 힘과 체격 차이에 의해 몸이 뒤로 밀려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학교 밖 친구들은 그런 남학생을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떠들었다. 저를 지지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남학생은 더욱 기가 살아 서진을 건드렸다.

“씨발, 노려보면 어찌할 건데.”

남학생의 손이 다시 서진의 어깨 근처로 닿았다.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지 않는 건 서진도 마찬가지였다. 남학생이 서진의 어깨를 밀기 전 서진이 먼저 남학생의 손을 옆으로 쳐냈다. 그 모습을 본 근처 친구들이 오오,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결코, 좋은 의미의 환호성은 아니었다. 서진이 저를 무시한다고 생각한 남학생은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인지 친구들을 향해 시끄럽다며 소리를 질렀다. 남학생은 한껏 세우고 왁스칠이 된 머리를 긁적였다.

“눈 깔아 씨발. 꼬나보지 말고. 좆같으니까.”

“야.”

“뭐 씨발.”

“말끝마다 씨발, 씨발 지겹지도 않냐? 학교에서 내가 먼저 부딪혔냐? 먼저 튀어나온 놈이 누군데. 근데 너 프린트 일부러 밟은 건 왜 사과 안 하냐?”

서진의 반박에 친구들이 다시 큭큭댔다. 그러나 아까 같은 분위기는 농담 섞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좀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안쪽에 있던 다른 친구 한 명이 남학생의 옆에 같이 섰다. 키가 큰 두 사람이 서진의 앞에 서자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서진은 그런 남학생의 친구와 남학생을 가볍게 비웃었다. 남학생은 서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지 한동안 얼이 나간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점심시간에 도서관으로 가고 있던 서진에게 갑자기 튀어나와 먼저 부딪친 건 남학생이었다. 그 자리에서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남학생이 아니라 서진이었다.

설령 그 모든 게 사실이라 해도 남학생은 한마디 지지 않고 반박하는 서진이 어이가 없었다. 남학생은 나름 학교에서 잘나간다고 알려져 있었다. 남학생이 말하는 게 곧 법이었고, 설령 남학생의 행동이 부당하다고 느껴도 불평 한마디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남학생은 그런 아이들의 시선을 즐겼다. 서진은 그런 남학생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중학생도 아니고 말이다. 담배를 피우건, 술을 마시건 호기심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단지 남들보다 키 크고, 싸움을 좀 잘하거나, 아는 형들이 많다고 해서 다른 학생들을 무시하고 다녀야 한다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심심하면 수업을 빠지고, 마음에 안 든다며 멋대로 조퇴를 한다. 학교에 잠을 자러 온 건가 싶을 정도로 종일 잠만 자고, 체육복을 입기 귀찮다며 체육 선생님에게 반항한다. 수행평가라며 열심히 하라고 해도 기분이 내킬 때만 한다.

아침에 현정과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걸리고, 형의 술을 멋대로 꺼내 마신다. 선배와 싸워 깬 창문의 유리 금액이 100만 원이 넘고, 맞은 학생 부모가 병원비를 요구하고는 해도 부모님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돈을 낸다.

또래보다 키가 좀 작긴 하지만 싸움으로 누군가에게 지는 걸 본 기억은 없다. 집에 돈이 많고, 싸움을 잘하고, 일탈과 반항을 일삼는 시헌이지만, 시헌은 결코 다른 학생들을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았다. 저를 무시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선 남학생들과 서진은 분명한 차이가 났으나 어째서인지 서진은 금방이라도 때릴 듯 주먹을 쥐는 남학생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이 순간에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닌 시헌이 생각나는 걸 보면, 시헌 때문인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서진은 이젠 다시는 볼 일이 없는 녀석에 대해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참으로 우스웠다. 어쩌면 시헌이 아닌 기욱 때문일지도 몰랐다. 눈을 마주하면 잡아먹을 것 같은 시선, 강압적인 말투,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는 서진을 늘 긴장 상태에 있게 만들었다. 그런 기욱에 비하면 눈앞에 있는 남학생의 시선이나 행동쯤이야 아무렇지 않았다.

“하, 뭐라는 거야 씨발. 처맞고 싶어서 환장했냐? 때리고 사과하면 되냐?”

남학생의 주먹이 서진의 얼굴 근처에 닿았다가 멀어졌다. 일이 복잡하게 될 것 같았다. 눈앞에 남학생이 무섭진 않으나, 그렇다고 이 상황을 타개할 마땅한 대책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서진은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윤에게 금방 간다며 연락을 한 상태였다.

집에서 서진을 기다리고 있을 서윤, 서진은 아무리 그래도 간호사인 서윤에게 맞은 사실을 쉽게 숨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서윤을 걱정시키긴 더더욱 싫었다. 경찰에다 연락이라도 할까? 슬슬 어떤 식으로든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건너편 독서실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왔다.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서진은 독서실에서 나온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시헌이라는 걸 알았다.

시헌 또한 남학생들 틈 사이에 있는 서진을 발견한 것 같았다. 역과는 반대되는 방향이라는 걸 알면서도 시헌은 서진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냥 지나가는 학생쯤으로 생각했던 남학생들은 시헌이 오는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시헌의 걸음이 남학생들이 있는 곳에서 멈췄다. 뒤늦게 시헌을 발견한 한 학생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헌은 분위기를 살폈다. 남학생의 어깨가 다시 서진을 밀었다. 다가오는 시헌을 신경 쓰느라 정신을 놓고 있던 서진의 몸이 뒤로 밀려나며 벽에 부딪혔다. 시헌의 인상이 구겨졌다.

“서진아.”

시헌의 목소리에 남학생과 그 친구들의 시선이 시헌에게 집중되었다. 시헌은 서진을 밀어낸 남학생을 지나쳐 벽에 기대고 있는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뭐 해, 가자.”

“어. 어, 그래.”

시헌의 행동에 서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헌과 엮이고 싶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 또한 현실이었다. 서진의 팔을 잡아당긴 시헌은 아무렇지 않게 남학생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등 뒤로 어이가 없다는 듯 기가 찬 웃음소리가 들렸다. 남학생의 손이 시헌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남학생의 손에 시헌이 마지못해 등을 돌렸다.

“하, 씨발. 이것들이 쌍으로 씨발 장난하나!”

남학생의 주먹이 시헌의 얼굴을 때렸다. 어딘가 아무렇지 않은 서진의 거슬리는 시선, 그리고 친구라고 그런 서진과 비슷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헌은 남학생의 심기를 거스르기에는 더없이 충분했다. 친구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시헌이 맞자 서진은 뒷목을 긁적이며 곤란하게 되었음을 느꼈다.

대책이 없는 건 사실이었지만 시헌과 이런 일이 일어날 거란 생각 또한 하지 못했다. 제법 있는 힘껏 쳤을 텐데 시헌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고개가 돌아가긴 했으나 위치는 그대로였다. 서진의 손을 놓은 시헌은 남학생에게 맞은 뺨을 만졌다. 뺨이 얼얼했다. 입안에서 비린내가 났다.

손을 넣자 피가 묻어났다. 남학생에게 맞을 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탓이었다. 서진을 살짝 밀어낸 시헌은 등 뒤에 매고 있던 가방을 발밑으로 내려놓았다.

시헌이 바닥에 고인 피를 뱉어 냈다. 손등으로 피가 묻은 입가를 닦아 냈다. 이빨이 좀 시려 왔지만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학생은 눈 하나 끔벅하지 않는 시헌에 당황하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제가 약하게 때린 건가?

남학생은 시헌을 때린 주먹을 만지작거렸다. 주먹이 아려 오는 것으로 봐서 결코 약하게 때리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걸 알았다. 서진보다 체구가 작은 시헌은 남학생이 신경 쓰거나 무서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단순히 서진과 닮은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때렸을 뿐이었다. 남학생은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꼬나보면 어쩔…… 으윽!”

시헌의 팔꿈치가 정확히 남학생의 배를 가격했다. 급소를 맞은 남학생의 몸이 휘청거리며 시헌의 앞으로 기울었다. 몸이 기울어진 남학생과 키가 맞는 걸 확인한 시헌은 기다렸다는 듯 남학생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몇 걸음인가 뒤로 물러나던 남학생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뒤쪽에 있던 친구가 놀라 쓰러지려는 남학생을 간신히 붙잡았다. 남학생의 옆, 시헌의 근처에 있던 또 다른 남학생이 놀라 시헌에게 덤벼들었다.

움직임을 눈치챈 시헌은 몸을 살짝 아래로 숙여 발밑에 있는 책가방을 잡아 위로 올렸다. 주먹이 시헌 대신 책가방을 맞췄다. 무거운 책에 주먹이 닿자 아픈 모양인지 인상을 찌푸렸다. 책가방이 무거웠던 탓에 시헌은 오래 들지 못하고 거칠게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퍽, 요란한 소리를 내며 책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남학생이 다시 주먹을 쥐며 주변을 둘러봤다. 시헌이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남학생이 다시 정신을 차리자 밑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헌과 남학생은 금방이라도 몸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 있었다.

시헌이 키가 큰 남학생을 위로 올려다봤다. 손바닥을 펼친 시헌이 남학생을 밀어냈다. 별다른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학생은 뒤로 밀려나 벽에 몸을 기댔다. 벽이 없었다면 바로 넘어졌을지도 몰랐다. 몸을 반쯤 틀은 시헌은 밀어낸 남학생과 처음 저를 때린 남학생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물론, 둘 외에도 그 자리에 있는 남학생들은 많았다. 시헌은 바닥에 엉망으로 떨어진 책가방을 들어 한쪽 어깨에 멨다. 그 상황을 서진은 이도 저도 못 한 채 지켜보고 있었다. 시헌이 남학생들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네 다 덤벼도.”

“…….”

“나 못 이겨.”

“씨발, 뭐라는 거야.”

처음 시헌을 때린 남학생이 간신히 입을 떼 반박을 했다. 시헌은 남학생에게 맞은 뺨을 만지작거렸다. 뺨을 만진 손끝이 살짝 뜨거웠다. 시헌의 시선은 구석에 있는 또 다른 남학생에게 닿았다.

시헌과 눈이 마주친 남학생이 눈을 살짝 아래로 숙였다. 두 사람은 서로 말은 해 본 적이 없으나, 그 얼굴을 분명하게 아는 사이였다. 서진도 그 남학생을 알았다. 같은 중학교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아빠가 의산데.”

“…….”

“정당방위라고 알지?”

같은 중학교를 졸업했던 남학생의 표정이 구겨졌다. 결국, 그가 마지못해 다가와 친구들을 말렸다. 남학생과 친구들은 그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특별하게 키가 크거나 체격이 좋은 것도 아니다. 중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체격의 남학생에게 두 명이나 순식간에 당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저들끼리 언성이 올라갔다.

“닥치고 가자고.”

“아, 씨발! 왜 그러는데!”

영문을 알 수 없는 친구들의 신경질에 그는 시헌의 눈치를 살피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 미치겠네. 지난번에 말했잖아.”

“뭘?”

“나 중학교 때 입학하자마자 3학년이랑 싸워서 창문 부순 미친 새끼.”

대놓고 말해도 괜찮은 건가 싶었지만, 다행히 시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한 행동이었지만, 그건 정말 제정신이 아닌 짓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눈을 살짝 움직이며 눈치를 줬다.

“쟤가 걔야.”

그 한마디에 남학생들이 인상을 구겼다. 시헌에 관한 얘기는 몇 번인가 들었다. 그땐 키도 작은 애가 그렇게 싸우고 다녔다는 걸 믿을 수 없었고, 진짜라 해도 그냥 그렇다고 하고 넘겼다. 예상치 못한 일로 마주한 이야기 속 인물로 그의 말이 틀린 것이 하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무엇보다 남학생들은 같은 중학교 출신인 그에게 시헌의 집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J 대학병원, 대한민국 살면서 그것도 고등학생 중 H대와 J대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가 그곳 병원장, 의사 집안. 무리 중 가장 잘나가는 부모님이 고작해야 N사 대기업 출신인 걸 생각하면 얽혀 봤자 좋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남학생들은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남학생들이 떠나고, 주변이 조용해졌다. 시헌은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막차가 아슬아슬했다. 왜지? 조금 전까지 많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거리는 침묵이 흘렀다. 시헌은 휴대폰 너머로 쉽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시헌은 남학생들에게 다 덤벼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선언을 했다. 사실 남학생들이 진심으로 덤비면 어떻게 될지 시헌도 모른다. 해 봐야 아는 일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구는 거.

재수 없다고.

다른 아이들이라면 무서워하고, 걱정부터 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시헌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몰랐는데, 아무렇지 않은 일이 아닌데 정말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고 뒤늦게 깨달았다. 시헌은 서진이 싫어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

서진이 싫어할 일을 하고, 저를 피하는 서진을 시헌은 이제는 볼 수 없었다. 서진에게 원망은 없었다. 왜 이렇게 자신을 피하는지조차 모른다. 그러나 싫다는 서진을 억지로 붙잡고 싶지는 않았다. 시헌은 그저 그냥 잘해 보고 싶었을 뿐이지 서진을 상처 주고 싶은 건 아니었다.

서진이 싫다면 시헌은 어쩔 수 없었다. 시헌은 도망치듯 등을 돌렸다. 골목을 돌려 할 무렵 등 뒤로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서진이라는 걸 알았다.

“야.”

“…….”

“야, 박시헌!”

시헌은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등을 돌릴 수는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별일 없다는 듯 등을 돌려 대답을 해야 할 텐데. 서진에게 그런 말을 들어서일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 수가 없었다.

왜? 그 짧은 대답, 한마디가 시헌을 그렇게 힘들게 했다. 목이 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울 것 같았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람인데. 담담한 척, 괜찮은 척 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주먹을 쥔 시헌이 간신히 입을 뗐다. 여전히 서진을 마주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왜…?”

“미안해.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어.”

시헌이 재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짜증이 나거나 시헌이라는 존재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시헌에게서 도망쳐야 할 이유도 없었다. 사실은 부러웠던 걸지도 몰랐다. 교과서적인, 늘 바르게 살아온 서진은 시헌처럼 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시헌이 질투가 났을 뿐이었다.

독서실을 나온 시헌은 서진을 지나쳐 가도 됐다. 서진은 시헌이 자신을 모르는 척해도 시헌을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시헌은 다가왔다. 시헌은 그런 사람이었고, 서진은 그런 시헌을 도무지 밀어낼 수가 없었다. 약간의 각오가 필요했다. 시헌은 기욱과 달랐다.

두 사람은 닮은 듯 너무나 달랐다. 기욱은 시헌이 아니었고, 시헌은 기욱이 아니었다. 기욱에게서 시헌을 겹쳐 봐야 할 이유도, 그 반대의 경우도 없었다. 서진이 경멸하는 건 시헌이 아님은 분명했다. 고개를 들자 건너편으로 새로 옮긴 독서실 간판이 보였다. 후, 숨을 들이쉬자 밤 내려앉은 공기가 폐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나 말야. 독서실 옮겼어.”

눈치를 본 시헌이 천천히 등을 돌려 서진의 시선 끝을 따라갔다. 건너편 건물 위층에 독서실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독서실을 옮겼다는 서진의 말에 시헌은 최근 들어 서진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미안하다는 서진의 말에 시헌은 조금은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서진이 대체 저를 왜 피하는지, 저에게 무엇을 보고 있는지 시헌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있었다.

서진은 저를 통해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서진을 힘들게 하는 건지, 아니면 그 사람과 닮은 제가 서진을 힘들게 하는 건지도 알 수 없다. 그래도 시헌은 이 말만큼은 해 주고 싶었다.

“난 나야.”

시헌의 한마디에 서진은 살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기욱과의 사이를 시헌이 눈치챈 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으나 더 이상의 말이 없는 시헌을 보고 그런 것으로 보이지는 않다는 걸 확신했다. 서진은 괜한 의심을 했다며 어깨에 있는 힘을 뺐다. 시헌의 말에 여태까지 했던 고민이 전부 허사가 된 느낌이 들었다. 시헌이 기욱과 같다는 건 서진의 일방적인 오해에 불과했다.

“독서실.”

“…….”

“올 거면 와.”

시헌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가는 방향이 같음에도 서진은 먼저 지하철 쪽으로 걸음을 뗐다. 몇 번인가 등을 돌려 시헌을 바라봤다. 시헌은 서진의 시선이 닿은 독서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진과 시헌의 눈이 맞았다. 시헌이 교복 바지에 손을 넣으며 멀어지는 서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시헌은 서진을 따라가지 않았다. 시헌의 시선이 나중에 독서실에서 보자고 말하는 것 같았다.

* * *

짐을 챙긴 시헌이 독서실 건물을 봤다. 시헌의 옆으로 지난번 남학생들이 지나갔다. 등 뒤로 욕설이 들려왔지만, 지난번처럼 시비를 걸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시헌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다음 수업까지 여유 시간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이럴 땐 대게 학원에 있는 자습실에 가 있고는 했다. 번거롭게 독서실을 왔다 갔다 할 이유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그럴 이유가 생겼다. 독서실이 있는 엘리베이터 11층 버튼을 눌렀다. 건물 한 층을 전부 쓰는 독서실은 입구부터 전에 있던 독서실과는 달랐다. 깔끔하게 디자인된 독서실 복도와 내부들,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희미하게 남아 있는 페인트 냄새가 시헌의 코를 자극했다. 안쪽으로 들어가 카운터 앞으로 다가갔다.

다른 용무를 보고 온 젊은 여자 직원이 먼저 앉으라며 손짓했다. 시헌은 조심스럽게 의자를 꺼내 앉았다. 유리 벽 안쪽 너머를 힐끗거렸지만, 방이 많아서 그런지 서진을 찾기는 힘들어 보였다. 상담을 받고 싶다는 시헌의 말에 그녀는 팸플릿을 꺼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서진이 진짜 있기는 한 걸까? 온다고 연락이라도 해 봐야 했었나? 그녀의 설명을 듣는 내내 시헌은 다른 생각으로 정신이 없었다. 학생? 시헌의 반응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대며 물었다. 그제야 시헌은 듣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인 뒤 테이블 위에 놓인 팸플릿을 내려다봤다.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시헌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계산을 안 할 수도 없고, 한숨을 쉰 시헌은 결국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두 개의 카드가 시헌의 손을 머뭇거리게 하였다. 엄마의 카드, 그리고 기욱의 카드였다.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지만, 엄마의 카드는 사용할 때마다 문자가 간다는 것이 시헌을 자못 불쾌하게 만들었다.

기욱 또한 사정은 비슷했지만, 기욱은 시헌에게 단 한 번도 돈의 사용에 관해 물은 적이 없었다.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긴 했으나 시헌은 병원에 있을 기욱이 뭔가를 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시헌은 결국 기욱의 검은색 카드를 내밀었다. 내부는 자유석이었다.

가방을 챙긴 시헌은 독서실 이곳저곳을 빠르게 둘러봤다. 안쪽에 있는 방 세 번째 칸 즈음 서진이 있었다. 다행히 서진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시헌은 누가 앉을세라 재빨리 책상 위로 가방을 올려놓았다. 툭, 하는 가방 소리에 서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안녕.”

시헌이 먼저 어색하게 인사했다. 서진에게 들릴 만한 거리의 작은 목소리였다. 방 안에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을 확인한 서진이 머리를 살짝 긁으며 마지못해 입을 뗐다.

“어.”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독서실이라는 환경상, 대화를 오래 할 수 있는 공간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헌은 그걸로 충분했다. 자유석인 독서실이었지만, 서진의 자리는 한결같았다. 시헌은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독서실로 향했다. 학원 수업과는 상관없었다. 서진의 옆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앉는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업 공백이 생길 때는 종종 자리로 돌아와 공부하고 갔다.

서진은 고작 10분 정도 앉아 있다가 사라지는 시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좋아서 오겠다는 시헌을 말릴 이유 또한 없었다. 옆에 앉아 공부만 하다 사라지는 사이란 애써 그럴 말을 주고받을 만큼 친한 관계 또한 아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 안 가?”

“어, 미안.”

수업 마지막 부분에서 잠깐 졸았던 시헌이 눈을 비비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방과 교재들을 챙긴 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선생님의 개인 사정으로 수업이 일찍 시작한 탓인지 생각보다 수업이 일찍 끝났다. 은소가 친구들과 내일 학교에서 보자며 인사를 했다.

은소가 멍하니 서 있는 시헌의 팔을 붙잡았다. 시헌이 그런 은소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 시헌과 은소는 저녁까지 수업이 있고는 하는 날이면 종종 같이 집에 가고는 했다. 수업이 좀 일찍 끝나긴 했지만, 집으로 간다는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야 할 터였다. 평소와 다른 시헌의 반응에 은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소가 시헌에게 그 이유를 물어 왔다.

“왜 그래?”

후, 따듯한 저녁 바람이 시헌의 뺨을 적셨다. 시헌은 고개를 들어 서진이 있는 독서실 쪽 건물을 바라봤다. 은소 또한 시헌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건물에 가득한 학원과 독서실 간판에 시헌이 보고 있는 곳이 정확히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었다. 시헌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과 함께 독서실 출입 카드의 감촉이 느껴졌다. 손으로 괜히 카드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독서실 갔다가 가게.”

“아, 그래?”

은소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소도 뒤늦게 시간을 확인했다. 평소보다 2시간 정도는 수업이 일찍 끝났다. 남은 시간을 집에 들어가지 않고 공부를 한다는 것이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학원에 있는 자습실을 가면 될 걸, 은소는 번거롭게 독서실을 찾는 시헌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머뭇대며 불편해하는 은소를 눈치챈 시헌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먼저 가.”

“아냐. 같이 가자. 나도 갈래.”

시헌이 가라고 했으나 은소는 고개를 저었다. 시헌은 애써 가지 않는 은소를 말리지 않았다. 서진과 은소는 같은 학교니 크게 상관도 없었다. 일찍 끝난 수업, 시헌은 운이 좋다면 서진과 같이 집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사실이 막 졸다 잠에서 깬 시헌의 기분을 사뭇 기쁘게 만들었다. 독서실로 들어갔다.

익숙하게 카드를 찍고 들어간 시헌과 달리 시헌이 다니던 독서실이 처음인 은소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은소가 복도로 들어가는 시헌을 향해 도와 달라며 눈빛을 보냈다. 그런 은소를 본, 여직원이 은소에게 다가왔다. 시헌을 상담해 주었던 여자 직원이었다. 그녀를 확인한 시헌은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독서실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헌이 들어간 걸 본 은소는 일단 여직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은소를 홀로 둔 시헌은 늘 서진이 앉는 자리를 확인했다. 평소와 달리 서진의 자리에 불이 꺼져 있었다. 서진이 없었다. 시헌은 혹시 어딘가 나갔다 온 건 아닐까 하며 서진의 책상 위를 기웃거렸으나 누군가 왔다 간 흔적은 없었다. 뒤늦게 은소가 시헌의 방으로 들어왔다. 일일 결제권을 끊은 모양이었다. 은소가 시헌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제 와 집에 가기도 뭐했던 시헌도 결국 자리에 앉았다. 시헌은 서진이 없는 빈자리를 계속해서 힐끗거렸다. 시헌의 그런 시선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가지 않아 들어온 남학생이 서진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시헌의 옆에 앉은 은소는 쉽게 집중이 되지 않았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던 마음도 없었거니와 독서실에 온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못해 앉은 자리는 은소를 사뭇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건 옆에 앉은 시헌도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은소는 시헌이 빈자리를 힐끗거리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자리에 앉고 싶은 거라면 앉으면 그만이었다. 도대체 저 자리가 누구 자리기에 저러는 걸까? 은소는 시헌의 행동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시헌의 옆자리로 처음 보는 남학생 하나가 앉았다. 남학생이 앉고 나서야 시헌은 공부에 집중했고, 이내 별일 없다는 듯 행동하는 시헌의 모습에 은소 또한 고개를 숙였다.

은소는 짧은 시간이지만 시헌을 잊고 공부에 집중했다. 삼십 분이 좀 지났을 무렵 은소는 시헌이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시헌의 문제집과 가방은 그대로 있었다. 은소는 조심스럽게 의자를 밀어낸 뒤 복도를 나왔다. 독서실 엘리베이터 근처 복도에 시헌이 있었다. 정장과 비슷한 옷을 입은 여직원과 함께 있었다. 은소의 입실을 상담해 준 여직원이었다.

“아, 그 남학생? 한 7시쯤에 나가던데?”

남학생? 나갔다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은소는 시헌을 부르려던 걸 머뭇댔다. 이내 몸을 살짝 옆으로 숨겼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약간 열린 유리 문틈 사이로 여직원과 시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7시쯤에요?”

“응. 맨날 늦게까지 하잖아. 나가는 길에 마주쳐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까 누나랑 저녁 먹는다고 그러더라. 둘이 친한 거 아니었어? 몰랐구나?”

친하다는 여직원의 말에 시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직원이 일이 있다며 상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은소가 다시 몸을 내밀어 시헌에게 다가갔다. 시헌도 그런 은소를 발견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은소가 시간을 확인했다.

“시헌아, 슬슬 집에…….”

“잠깐만.”

시헌이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휴대폰을 어깨에 걸친 시헌이 엘리베이터 안쪽 철문을 열고 계단으로 들어갔다.

은소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 시헌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따라 들어갈까? 급해 보이던데. 온갖 생각들이 은소의 머릿속을 정신없이 흔들었다. 시헌의 전화가 생각보다 길어지자 은소는 결국 문을 열었다. 문을 열기 무섭게 계단 한쪽에 몸을 기대 통화를 하는 시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 뭘, 별거 아냐. 응. 고맙다.

은소를 본 시헌이 금방 끊겠다며 손을 올렸다. 그렇게 행동하는 시헌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시헌의 목소리는 전화를 끊는 걸 아쉬워하고 있었다. 혹시 현정은 아닐까? 집안끼리 아는 사이인 현정이라면 시헌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끊자는 상대의 목소리에 시헌은 잠시 말을 흐렸다. 드디어 전화가 끊기나 싶었던 은소 또한 시헌의 입에서 나오는 뜻밖의 목소리에 인상을 구겨야 했다.

― 서진아. 강서진.

살짝 열린 창문 너머로 차 소리가 강하게 들려왔다. 계단 너머로 침묵이 일었다. 시헌이 가볍게 어깨를 털며 웃었다.

― 그래. 내일 보자.

탁, 휴대폰을 닫은 시헌이 은소의 앞으로 다가왔다. 시헌이 은소를 살짝 건드리자 은소가 깜짝 놀라 시헌을 봤다.

“가자.”

아슬아슬하게 막차에 몸을 실었다. 텅 빈 지하철 칸에서 은소와 시헌은 나란히 앉았다. 시헌은 피곤한 모양인지 하품을 하고 있었다. 역까지 두 정거장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은소는 독서실에서 한 통화에 관해 물어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시헌의 고개가 점점 쳐지더니 은소의 어깨 위로 고개가 닿았다. 뭔가에 닿은 감촉에 흠칫 놀란 시헌이 다시 정신을 차렸다. 시헌은 눈을 비빈 후 얼마 남지 않은 역을 확인했다. 은소는 그 순간 집이 조금 더 멀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기회가 없다고 판단한 은소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아까 그 독서실에서 누구랑 통화한 거야?”

안전문의 문이 열렸다. 내리는 사람은 있으나 타는 사람은 없었다. 역내의 막차 방송이 지하철 안까지 흘러들어 왔다. 시헌은 하품으로 인해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아 냈다. 분명 그곳에서 서진이라는 이름을 은소가 듣지 못했을 이유가 없었다.

시헌은 알고 있는 사실을 애써 물어 오는 은소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은소의 대답에 대답해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시헌은 은소와 눈이 맞았다. 무릎 아래로 내린 은소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뭘 그렇게 진지하게 구는 것인지. 결국, 시헌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강서진.”

은소도 예상은 했다. 아니, 알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았다. 시헌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 세 글자는 은소에게 있어선 제법 큰 충격이었다. 알고 있음에도 추측을 하는 것과 본인의 입에서 듣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최근 들어 묘하게 시헌을 생각나는 행동들을 하는 서진, 그리고 다시 연락하는 두 사람. 타이밍이 너무나 잘 맞았다. 은소의 어깨가 살짝 아래로 쳐졌다.

“서진이랑 연락…, 하는구나.”

“얼마 안 됐어.”

“왜?”

“뭐라고?”

지하철을 내려 개찰구로 올라가던 중이었다. 은소의 질문에 시헌은 걸음을 멈췄다. 걸음을 멈춘 은소 또한 뒤늦게 말을 잘못 꺼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냥 웃어넘겨야 하나? 실수였다고 해야 하나? 차라리 시헌이 못 들은 척 넘어가 주기를 원했다.

시헌과 은소가 내린 지하철에서도 막차 방송이 나왔다. 방송을 들은 시헌과 은소가 다시 개찰구를 지나 출구로 올라왔다. 시헌은 지하철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등을 돌렸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은소는 시헌을 이렇게 보낼 수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헌의 팔을 붙잡았다. 시헌이 걸음을 멈추고 은소에게 붙잡은 팔을 가만히 내려 봤다.

“그, 그러니까……. 내 말은 왜, 왜 갑자기 서진이랑 연락하는지 궁금해서……. 둘이 어떻게 다시 알게 됐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은소는 제가 왜 시헌과 서진의 사이에 대해 변명을 해야만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헌은 은소에게 붙잡힌 팔을 조심스럽게 떼어 놓았다. 은소가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시헌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

“그런 게 있어.”

“그렇구나…….”

은소는 말을 할 수 없었고,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헤어져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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