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6 너를 알다 (18/83)

Chapter. 16 너를 알다

“시헌아…. 좋아해.”

시헌은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여자가 고백했다. 점심시간, 복도 건너편 너머 여자의 친구들과 몇몇 남자들이 흥미롭게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몰래 지켜본다고 숨었던 모양이지만 티가 났다. 여자와의 고백이 문제가 아니었다.

할 말이 없는 이 상황에서 시헌은 1년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여자의 고백에 뜬금없이 왜 그런 생각이 났는지 시헌은 알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술을 마시자고 한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 뒤 시헌은 서진을 만날 수 없었다.

서진의 휴대폰 번호는 다른 사람의 번호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서진의 집을 알았으나, 쉽사리 찾아갈 수 없었던 것 또한 현실이었다. 입시를 코앞에 둔 고등학교라는 곳은 생각보다 시간이 빠른 곳이었고, 그렇게 이도 저도 아닌 채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쨌든 고백을 받은 상황에서 떠올릴 만한 기억은 절대 아니었다.

여자, 시헌은 고개를 살짝 숙여 여자를 내려다봤다. 적응하지 못했던 1학년 1학기, 후반쯤 되니 몇몇 아이들과 그럭저럭 말을 섞기 시작했고 같이 다니는 무리도 생겼다. 시헌이 속한 무리는 남자 여자끼리 서로 친한 모양이었다. 그런 탓인지 연애담도 많았다.

여학생은 시헌이 2학년이 된 후 친해진 남자를 통해 알게 되었다. 긴 생머리에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 고등학생다운 몸매와 애교 있는 말투 덕인지 다른 남자들 사이에서도 제법 인기가 많았다. 중학교 1학년 이후 과고에 들어오겠다고 남자 친구와 헤어진 뒤 연애를 한 적이 없다는 여학생이 시헌에게 먼저 고백을 했다.

“시헌아. 좋아해.”

붉은 얼굴로 무릎이 살짝 올라가는 핑크색 교복 치마를 꼭 붙잡으며 고백을 하는 여자를 시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었다. 딱히 고백을 받았다는 사실이 당황스럽진 않았다. 초등학교 때도 그렇고, 중학교 때도 고백을 해 오는 여학생들은 종종 있었다. 문제는 그래, 시헌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여학생에게 잘해 준 기억이 전혀 없었다.

몇 번인가 친구들끼리 같이 만난 적은 있었지만. 그때도 시헌의 기억 속에 여학생은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이젠 호기심으로 여자를 만날 나이는 지났다. 시헌은 연애―정확히 넘겨짚자면 여자―에 관심이 없었다.

여자의 힘겨운 고백에 시헌은 고백을 해 오는 눈앞의 여자가 서진이었다면 참 좋을 텐데 하는 이상한 생각을 하기까지 했다. 여자가 시헌의 이름을 불렀다. 뒤늦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시헌이 무슨 일이냐며 눈을 깜박였다.

“저, 그……. 곤란하면 꼭 지금 대답 안 해도 괜찮…….”

“은정아.”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성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시헌의 목소리에 은정이 살짝 놀라며 시헌을 바라봤다. 그 뒤로 무슨 말을 했는지 시헌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은정을 잘 달랬던 것, 만큼은 분명했다.

은정은 시헌의 설명에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복도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눈물을 흘리며 떠드는 모습을 보고 있던 여자아이들이 뒤늦게 은정의 뒤를 따라갔다. 안쪽에 숨어 있던 남학생들과 시헌의 눈이 맞았다. 시헌이 가볍게 손을 올려 주먹을 쥐었다.

고등학교 1학년 체육 수업시간에 유도를 오래 했다는 친구와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다. 도 대회에 나가 상까지 탔다는 남학생을 시헌은 모든 학생이 보는 앞에서 가볍게 엎었다. 두 사람은 체격 조건부터가 달랐다. 저 작은 체격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오는지 알 길이 없었다.

소문은 순식간, 그리고 과장되게 퍼졌다. 시헌이 중학교 때 고등학생들이랑 싸웠느니, 싸움을 엄청 잘하느니 하는 소문들이었다. 비록 반장난으로 주먹을 들었지만, 남학생들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시헌이 친구들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나와.”

시헌이 가볍게 웃었다. 결코, 즐거운 의미의 웃음은 아니었다. 방과 후에는 각자의 학원 길로 사라진다. 방과 후에 늘 피시방이며 게임방, 의미 없이 놀이터를 돌고는 했던 중학교 시절과는 다른 점이었다. 그런 차이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정도로 익숙해졌다.

집 근처에 다 와 갈 무렵 목이 말랐다. 편의점은 제법 멀리 있었다. 학원 시간이 아슬아슬하다는 걸 알았지만, 편의점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게토레이가 먹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편의점에서 게토레이를 사 와 그 자리에서 반쯤 비웠다.

중학교 때부터 계속 있던 이 편의점은 서진의 집과 시헌의 집 가운데에 있었다. 개발 중인 이 동네는 유독 편의점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편의점 문을 막 열고 밖으로 나온 시헌은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가는 서진을 발견했다.

1차선 도로, 급하게 무단 횡단을 해 차에 치일 뻔했다. 운전자에게 고개를 숙인 뒤 서진의 뒤를 밟았다. 하교하던 서진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시헌을 발견한 서진이 살짝 걸음을 멈추더니 이내 다시 모르는 척 집 쪽으로 걸었다. 서진의 뒷모습, 못 본 사이에 키가 많이 큰 것 같았다.

이제는 시헌보다 클지도 몰랐다. 서진의 뒤를 밟은 시헌이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여자의 고백, 문득 생각난 그날의 기억. 술에 취했지만, 서진과 키스를 할 뻔했었던 그 순간을 시헌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서진아. 강서진. 나랑 얘기 좀 해.”

“난 너랑 할 얘기 없어.”

걸음을 멈춘 서진이 몸을 돌렸다. 문제집이며, 교과서로 가득한 무거운 책가방을 꼭 쥐었다. 시헌과 술을 마신 그날, 기욱이 오고. 기욱이 서윤을 울리고. 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일이 있었던 뒤 모든 게 엉망이었다.

그나마 레지던트 초년 차인 기욱이 바빠 자주 연락을 해 오지 않는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어쩌다 한 번씩 연락이 오는 날은 정말 최악이었다. 섹스는 하지 않는다. 친구들이 웃으며 농담 삼아 떠들었던 그런 일은 없었지만, 기욱과 만날 때면 무슨 일이든 있었다.

굳이 삽입이니 섹스를 하지 않아도, 방법은 많았다. 기욱은 그런 방법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기욱의 태도가 이젠 치가 떨렸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서진은 기욱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도 그렇게 함으로써 서윤이 행복하다면 서진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허나 그런 서진의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이 있었다.

시헌이었다. 기욱과 닮은 듯 닮지 않은 시헌만큼은, 시헌은 피하고 싶었다. 키스할 뻔했던,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던 기억들이 떠오를 때면 서진은 알게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

“박시헌.”

“…….”

“다시는 보지 말자.”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서진은 차라리 시헌이 저를 완전히 잊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 수만 있다면 처음부터 몰랐던 사이로 하고 싶었다. 현정을 만나고, 현정을 통해 시헌을 소개받았을 때. 그 순간에 이름을 말하지 않고 모르는 척 등을 돌렸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우린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서로를 모르기엔 함께한 시간이 너무 많았다. 네 사람의 즐거웠던 추억들이 칼날이 되어 목을 조여 왔다.

이젠 그 시절이 아니었다. 행복했던 과거는 후회 그 이상도 아니었다. 서윤에게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시헌에게 형―박기욱이 없었더라면, 이런 어색한 관계가 되어 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를 텐데. 현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도 어린, 부족한 나이였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가만히 바라봤다. 둘을 제외하고 여러 사람이 골목을 지나쳐 갔으나 두 사람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골목에는 둘만 있었던 것처럼,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상처를 받은 얼굴을 하는 거야. 서진은 저만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등을 돌렸다. 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서, 진아….”

시헌은 목이 멘 목소리로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서진은 다시 등을 돌려 걸음을 걸었다. 바닥이 점점 빨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상처를 받아야 할 사람은 저였다. 네가 아니라고! 서진이 정신을 차렸을 무렵은 집 앞 현관문이었다.

반지하방 창문 틈 사이로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서진이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서진이 왔어? 때마침 거실에서 설거지하고 있던 서윤이 서진을 반겼다. 서진은 가방끈에 쥔 손에 힘을 풀었다.

“다녀왔어. 누나.”

그래, 누나만 있으면 됐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걸로 된 것이었다.

* * *

학원을 옮겼다. 옮겼다고 해 봤자 기존에 듣던 선생님을 따라 학원을 옮긴 거니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강의 시간이 다가올 무렵 대형 강의실에 학생들이 하나둘씩 자리로 돌아왔다. 먼저 앉아 있었던 시헌은 좁은 책상에 팔을 괴며 아무것도 없는 검은 칠판을 멍하니 바라봤다.

학생들이 가득 차 움직이기도 힘들 지경이 되었을 무렵에도 시헌의 옆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학생들 틈을 밀치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좁은 책상 사이로 시헌의 어깨에 몸이 부딪혔다. 아, 뒤늦게 의자를 옆으로 당긴 뒤 고개를 살짝 들었다. 무거운 책가방을 내려놓는 은소와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이다.”

시헌이 먼저 대답했다. 은소가 멋쩍게 웃었다. 건너편 자리에 있던 남학생 몇 명이 은소를 알아보고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처음 보는 남학생,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사귄 친구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선생님 대신 조교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쪽지시험 파일 오류로 복사에 문제가 있어 쪽지시험이 10분 정도 늦어진다는 공지를 남겼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으나 교실은 금방 조용해졌다. 가방을 발밑으로 내려놓고, 책을 꺼낸 은소가 의자를 당겨 시헌의 옆에 앉았다.

은소는 지루하게 펜을 빙빙 돌리는 시헌을 힐끗거렸다. 수업 교과서와 손에 들린 샤프와 책상 한쪽에 놓인 흰 지우개가 전부였다. 여러 학원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필통에 든 학용품들이 늘어난 은소와 달리 시헌의 학용품이라고는 샤프와 지우개가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같이 만난 것이 언제였지?

서진과 시헌의 집에서 술을 마신, 그 뒤로 기억이 없었다. 이후 몇 번인가 길에서 만나긴 했으나 기껏해야 인사를 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부모님을 조르고, 친구들의 추천을 받아 간신히 신청한 입시 현장 강의. 처음 듣는 강의라 더욱 설레는 감이 있었다.

반면 시헌은 중학교 시절부터 유명하다는 선생님들의 강의를 꾸준히 듣고는 했다. 은소는 설마 이런 식으로 시헌을 만나게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오랜만이라는 말에 은소는 한참에서야 입을 열었다.

“응. 잘 지냈어?”

“그럭저럭. 너 혹시…….”

“혹시?”

“아무것도 아니다.”

시헌이 입을 다물었다. 서진과 그 일이 있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이제 와 꺼내서 좋을 게 없었다. 프린트물을 들고 조교가 들어왔다. 쪽지시험 종이가 앞에서부터 뒤로 넘어왔다. 3시간 반짜리 수업에 2시간이 지났을 무렵 10분 정도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시헌은 볼펜도 없고, 교재 위에 샤프로 표시된 필기들을 다시 보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시헌은 은소가 저를 계속 쳐다보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를 채지 못했다. 대부분 학생이 좁은 교실에 싫증을 내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군데군데 빈자리를 타고 몇몇 남학생들이 은소의 옆으로 다가왔다. 여기까지만 할까. 귀찮다며 교재를 덮음과 동시에 말소리가 들렸다.

“편의점 갔다 올 건데. 갈래?”

“응.”

은소가 고개를 끄덕이고 교재를 덮었다. 일어나면서 시헌의 몸을 모르고 건드렸다. 다시 시헌과 눈이 맞았다. 은소는 친구들과 시헌을 번갈아 바라봤다.

“같이 갈래?”

은소가 물어 왔다. 시헌의 교복을 본 친구들이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K과고, 인근에 있는 학교들과 지역 과고들을 통틀어서 상위 TOP3 안에 들어간다는 학교였다. 교복이 워낙 특이해 학생들 사이에서 종종 얘깃거리가 되고는 했다.

평범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은소와 친구들은 특별한 일이 없다면 시헌의 학교 애들과 만날 일조차 없었다. 그런 은소와 시헌이 아는 사이라는 것이 살짝 의아한 눈치였다. 언짢아하는 친구들의 분위기에 시헌이 한숨을 쉬었다. 불편한 자리에 일부러 끼는 취미는 없었다.

“갔다 와.”

“같이 가자.”

“안 간다고.”

시헌과 은소의 눈이 마주쳤다. 은소와 눈을 제대로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왕따를 당하고, 전에 있던 중학교에서도 좋지 못한 일을 겪었던 은소는 시헌과 같이 다니는 중학교 시절 내내 늘 기가 죽어 있었다. 시헌은 그런 은소가 답답할 때가 종종 있었다.

은소는 시헌이 빤히 쳐다보고는 할 때면 늘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정작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 은소가 처음으로 시헌과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이내 배시시 웃어 보이는 모습이 사뭇 어색했다.

“알았어. 금방 갔다 올게.”

은소는 친구들과 함께 교실을 나갔다. 시헌은 등을 살짝 돌려 교실을 나가는 은소와 친구들을 바라봤다. 어제 학교에서 말야. 은소의 목소리가 복도 너머로 울렸다. 뭔가가 달라졌다. 조용해진 교실에 시헌은 이어폰을 낀 뒤 책상 위에 팔을 올려 턱을 괬다. 노래는 나오지 않았다.

소리가 나지 않는 이어폰은 귀마개 대신이었다. 쉬는 시간이 거의 끝나 가고, 학생들이 눈치껏 자리로 돌아올 즈음 은소도 돌아왔다. 음료수를 사 들고 돌아온 은소가 의자를 꺼내 시헌의 옆에 앉았다. 툭, 뭔가가 시헌의 팔꿈치에 닿았다. 이어폰을 빼고 고개를 돌렸다. 초콜릿이었다.

“사 왔는데. 먹을래?”

은소가 시헌에게 초콜릿 바를 내밀었다. 한쪽 이어폰을 뺀 시헌은 눈앞에 있는 초콜릿 바를 가만히 바라봤다. 익숙한 모양의 표지, 하.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서진과 처음 만났을 때 먹었던 그 초콜릿이었다.

“초콜릿 안 좋아했었나?”

시헌이 반응이 없자 은소가 민망하다며 뺨을 긁적였다. 은소가 초콜릿을 집어넣으려던 순간 시헌이 초콜릿을 붙잡았다. 초콜릿을 두고 은소와 시헌의 손이 닿았다.

“싫어한다고 한 적 없어.”

좋아한다고 한 적도 없지만. 그게 먹지 않겠다고 한 뜻은 아니었다. 은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은소가 조심스럽게 손을 뗐다. 시헌은 초콜릿을 책상에 올렸다. 은소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지못해 비닐을 벗기고 초콜릿을 반쯤 베어 물었다. 초콜릿은 오랜만이었다. 다시 수업을 시작하자며 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늦게 시작한 수업은 10시를 좀 넘겨서야 끝이 났다. 시헌은 학생들이 빠지길 기다리며 천천히 가방을 챙겼다. 교실을 나가는 학생들 틈 사이로 편의점을 가자고 했던 은소의 친구들이 다가왔다. 같이 가자고 하는 것 같았다. 은소가 일어나려는 시헌의 팔을 재빨리 붙잡았다.

“미안, 나 시헌이랑 같이 갈게.”

“내가 언제…….”

시헌은 당황스러웠다. 시헌의 옷자락을 붙잡은 은소의 손에 힘이 약간 들어갔다. 시헌은 결국 포기하듯 몸에 힘을 뺐다.

“아, 그래? 알았어. 낼 학교에서 보자.”

“응. 잘 가.”

은소가 손을 흔들었다. 시헌의 옷을 붙잡은 손을 쉽게 놓지 못하고 있었다. 시헌의 눈치를 본 은소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려놓았다. 교실엔 은소와 시헌 둘밖에 남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학원을 나왔다. 학원가 근처가 차들로 정신이 없었다. 두 사람은 지하철을 탔다.

동네는 지하철로 20분 정도 걸렸다. 지하철은 막바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시헌과 은소는 문 옆 노약자석 근처에 섰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역 안내를 알리는 방송만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역에서 내렸다. 3번 출구로 나오자 술집과 음식점들이 간판 불빛을 빛내고 있었다.

시헌은 무의식중에 설렁탕집 간판을 힐끗거렸다. 먹고 싶다고 생각은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은소와 시헌의 집은 역에서 정반대 방향이었다. 은소가 시헌을 불렀다.

“밥 먹을래?”

은소의 시선이 옆에 있는 설렁탕집에 닿았다. 중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11시가 좀 넘어 있었다. 기욱은 며칠째 집에 들어오고 있지 않은 중이었다. 사실 들어온다 해도 시헌이 학원에 있을 때라거나, 잠만 자고 나가는 경우가 전부였다.

“마음대로 해.”

가게 안으로 들어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늦은 시간, 대부분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떠들고 있었다. 그 가운데 교복을 입은 은소와 시헌의 존재는 어색하기만 했다. 지나가는 직원을 붙잡아 주문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설렁탕이 나왔다. 배가 고팠던 시헌은 곧장 밥을 말아 먹기 시작했다. 뜻밖에 은소는 많이 먹지는 않았다.

은소가 밥을 반쯤 먹을 무렵 시헌은 국물까지 전부 비운 후였다. 시헌은 은소의 시선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참 난감했다. 시헌이 옆에 있는 물을 들이켠 뒤 은소에게 말을 걸었다. 고등학교에 적응한 것은 비단 시헌만의 일은 아니었다. 시헌이 서진과 은소 외에 다른 친구들을 만들고, 학교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처럼 은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많이 변했다. 키도 큰 것 같고.”

시헌이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중학교 때만 해도 작은 키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후부터 자연스럽게 키가 작은 학생들 축에 들기 시작했다. 시헌은 은소도, 서진도 이제는 올려다봐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서윤과 기욱은 키가 큰데, 왜 저만 키가 크지 않는지 나름의 스트레스였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가 키가 작았다는 말이 있기도 했었다. 시헌의 그런 반응에 은소가 큭큭대며 웃었다.

“그래? 너는 중학교 때랑 똑같은 것 같은데.”

“놀리지 마.”

“진짜야. 한 번에 알아봤어.”

시헌은 달라진 것이 거의 없는 외모와 키가 스트레스였지만. 은소는 그런 시헌이 좋았다. 변하지 않는 시헌의 모습은 어딘가 은소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시헌은 은소의 앉은 모습을 훑었다. 마른 건 여전했지만, 키가 커서 그런지 맞고 다닐 만한 체격은 아니었다. 은소를 가만히 본 시헌이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

“별일은 없어?”

“응? 아, 지금은 괜찮아! 사실 과고 떨어진 건 좀 아쉽지만. 선생님들도 잘해 주고, 지금은 애들이랑도 많이 친해졌어.”

학교에 관해 묻자 은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 은소의 모습에는 더 이상 왕따니 괴롭힘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스타 강사의 강의를 듣게 된 것도 친구들 덕분이라며 말을 늘어놓았다.

한참 동안 학교에 대해 떠들던 은소는 입을 다물며 말을 듣고 있는 시헌을 슬쩍 바라봤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대는 은소의 반응에 시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별건 아닌데. 혹시 서진이랑은 아직도 연락해?”

시헌은 은소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묻고 싶은 건 오히려 은소가 아닌 저였다. 서진과 같은 학교는 시헌이 아닌 은소였다. 시헌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렇구나. 난 둘이 계속 연락하는 줄 알았어. 둘이 친했으니까…….”

은소가 말을 흐렸다. 서진과 시헌은 은소가 전학 오기 전부터 이미 서로 친해진 상태였다. 시헌은 정말 서진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었다.

“무슨 뜻이야?”

시헌이 은소를 빤히 바라봤다. 시헌의 시선을 피하던 은소가 마지못해 말을 했다.

“그게…, 별건 아닌데. 서진이 말야. 고등학교 들어오고 나서부터 공부만 하더라고. 집안 사정 때문에 과고 포기하고, 그래도 의대에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그냥 좀. 예전 같지 않다고 해야 하나? 사실 나도 같은 반이 아니라서 요즘은 잘 몰라. 혹시 시헌이 너라면 뭔가 좀 알까 해서 물어본 거야.”

시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서진에 대해 뭘 안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연락하지 말자는 서진.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혹시 그날 술을 먹고 뭔가 더 잘못을 한 건 아닐까? 온갖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시헌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다 먹은 은소의 공깃밥을 본 시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소도 가방을 챙겼다. 각자 계산을 한 뒤 가게를 나왔다. 가게를 두고 서로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은소가 등을 돌리는 시헌을 불렀다.

“시헌아.”

“…….”

“다음 주에 학원에서 보자.”

간판의 조명 때문일까? 은소의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은 그렇게 서로 헤어져 집으로 갔다.

* * *

기욱에게 전화가 왔다. 앞선 수업이 끝나고, 건너편 학원으로 옮기려던 찰나였다. 전화를 받은 시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에 있는 택시를 붙잡았다.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가 뒷좌석에 앉아 휴대폰을 하는 시헌을 사이드미러로 힐끗거렸다.

“학생, 어디로 갈 건가?”

될 수 있는 대로 거리가 먼 손님을 태우고 싶어 하는 택시기사에게 있어서 학생 손님은 마냥 반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특히나 이 시간대 번화가에서는 더욱 그랬다.

“K 호텔요.”

시헌이 부른 장소가 생각보다 거리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택시기사는 재빨리 차를 움직였다. 서울의 지리를 전부 꿰고 있는 그는 머릿속으로 호텔까지의 거리를 계산했다. 택시를 탄 지 삼십 분이 좀 지났을 무렵 택시가 K 호텔 근처에 도착했다.

정문 근처에 내린 시헌은 아무렇지 않게 카드를 꺼내 계산을 한 뒤 택시에서 내렸다. 동시에 기욱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헌은 기욱이 저를 감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 지금 도착했어.

― 그래, 빨리 와.

알겠다며 대답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시헌은 한동안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가만히 바라봤다. 신경외과 2년 차 전공의, 1년 차만큼은 아니었지만 바쁜 시기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기껏해야 1년 차 시절보다 쉴 수 있는 시간이 몇 시간, 혹은 하루 이틀 늘어난 것 정도? 늘 병원 일이 끝나거나 쉬는 시간을 받고는 하면 집에 와 죽은 듯 잠만 자고 나갔던 기욱이 오늘은 시헌을 불러냈다.

그 뒤 학원이 있다는 사실을 기욱이 모를 리 없었다. 시헌이 거절한다 해도 기욱은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이었다. 시헌은 나오라는 기욱의 말을 거절하지 않고, 그 길로 택시를 잡았다. 단순히 학원 수업이 듣기 싫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스스로 행동해 놓고도 그 영문을 알 수가 없는 게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시헌의 집은 외식을 할 때면 여러 호텔에 있는 식당, 혹은 고급 레스토랑 등을 종종 이용하고는 했지만 그중에서도 K 호텔에 있는 한식당은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외식 장소이기도 했다. 시헌 또한 K 호텔의 한정식 코스가 다른 곳에 비해 나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무 창호지가 발라진 문틈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엄마의, 그리고 다른 여자의 웃음소리였다.

“어머님도 참…….”

웃음을 참으며 떠드는 그녀의 말투에 시헌은 인상을 찌푸렸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시헌은 여자의 정체를 실감했다. 기욱이 데려온 여자는 서윤이었다. 엄마가 시헌을 보고 앉으라며 손을 흔들었다. 시헌을 본 서윤이 오랜만이라며 시헌을 반겼다.

시헌은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기욱이 엄마의 옆에 앉으라며 눈치를 줬다. 테이블 위에 술병이 있었다. 약간 취기가 돈 서윤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에이, 내가 비킬게. 어머니, 옆으로 가도 괜찮죠?”

자리를 옮기기 위해 일어선 서윤이 기욱의 옆에 놓인 술잔을 건드려 기욱 쪽으로 엎어졌다. 다행히 술이 거의 없어 크게 튀지는 않았다. 시헌의 뒤쪽으로 물러 난 서윤이 뒤늦게 옷을 털고 있는 기욱을 발견했다.

“오빠 미안.”

“됐어.”

말릴 틈도 없이 서윤이 엄마의 옆에 앉았다. 멍하니 서 있는 시헌과 기욱의 시선이 맞았다. 기욱은 시헌을 향해 빨리 앉으라며 손을 흔들었다. 서윤이 따라 준 술을 반쯤 마신 엄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서윤이 옆에 앉은 것이 엄마의 기분을 꽤 좋게 한 모양인지 목소리 톤이 하나 올라가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안 해도 되는데. 미안해서 어쩌니.”

“괜찮아요.”

“그래, 이번만큼은 양보 좀 하렴.”

아무래도 시헌의 자리는 기욱의 옆으로 확정이 난 모양이었다. 시헌은 신발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와 서윤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글쎄. 있지, 기욱이가 어떻게든 널 부르고 싶다고 그렇게! 얘길 하더라. 강 간호사 동생 이름이 뭐라고? 시헌이랑 친구였다면서?”

시헌에게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질문의 대상이 서윤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오랜 병원 생활 탓인지 엄마는 서윤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서윤을 간호사라 칭하는 것이 더욱 익숙해 보였다. 애당초 같은 병원 교수로 있는 엄마가 서윤과 기욱의 교제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시헌은 그런 자잘한 사실보다 엄마의 입에서 서진의 말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 더욱 불편했다. 엄마의 물음에 서윤이 말했다.

“서진이에요.”

“서진이가. 공부를 그렇게 잘한다면서? 벌써 의대에 들어가겠다고 그런다는 말 들으니 장하네.”

의대. 서진이. 시헌은 문득 은소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의대에 들어가겠다고 학교에서 공부만 한다는 서진이의 소식은 결코 낯선 얘기는 아니었다. 문득 옥상에서 떠들었던 그날 누나―서윤과 같이 일하기 위해서 의사가 될 거라는 서진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냥 그렇다고 하고 넘겼던 일이 서진에게는 진심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엄마가 먼저 서윤의 동생인 서진에 대한 말을 꺼냈으나 정작 시헌 본인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시는 보지 말자는 서진의 말이 시헌을 가슴을 쓰라리게 만들었다.

술을 마실 수 없어 대신 마신 사이다에서 씁쓸한 맛이 났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서윤과 엄마의 대화, 엄마는 서윤이 마음에 들어 보였다. 시헌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탄산이 가득한 사이다를 목 뒤로 넘기며 대각선에 앉은 기욱과 눈이 맞았다. 두 사람의 대화에 기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을 대신해 운전해야 하는 기욱은 술에 입을 대지는 않았다.

이 자리는 기욱이 만든 자리라고 했다. 시헌은 기욱의 행동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시헌이 아는 기욱은 절대 엄마와 이런 자리를 만들 사람이 아니었다. 하물며 한 달에 한 번밖에 없는 휴일 저녁을 사용하면서까지 말이다. 시헌은 기욱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가 소개해 준 여자들, 소개해 주지 않은 다른 여자들과 남자들까지도. 기욱은 결코 한 사람으로 만족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기욱이 대체 왜? 그것도 하필이면 서진의 누나를? 우연인가 아니면 의도된 행동인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시헌은 중간부터 대화에 끼지 않은 채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몰래 하던 휴대폰이 세 사람이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걸 눈치챈 순간부터 고개가 아래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식당에 들어올 때부터 간당간당할 것 같았던 휴대폰이 꺼졌다. 시헌이 기욱의 무릎을 쿡쿡 찍었다.

“왜?”

“형, 나 휴대폰 좀 빌려줘.”

시헌이 배터리가 꺼진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어쩐지 휴대폰을 많이 하더라만. 기욱은 어쩔 수 없이 시헌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시헌은 기욱이 준 휴대폰을 열어 문자를 보냈다. 습관처럼 기록을 지우러 통화 내용을 확인한 서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강서진.

틀림없는 그 이름이 기욱의 휴대폰에 있었다. 기욱이 서윤과 사귀니 서진의 번호를 알고 있는 건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연락의 빈도였다. 눈치를 보기 시작한 시헌이 기욱의 문자함을 다시 들어갔다. 예상대로 서진과 주고받은 문자가 있었다.

「어디야?」

「집인데요.」

「학계역 4번 출구로 나와.」

“뭐해?”

기욱이 생각보다 길게 휴대폰을 하는 시헌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시헌이 다급하게 휴대폰을 덮으며 기욱의 휴대폰을 돌려줬다. 혹시 걸리진 않았겠지? 괜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디저트를 먹는 내내 음식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기욱은 왜 서진에게 나오라고 한 걸까?

식사를 마치고 엄마와 서윤이 화장실을 갔다. 기욱은 식당을 나와 있는 외벽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후, 기욱이 내뱉은 담배 연기가 허공을 타고 올라갔다. 시헌이 기욱의 앞으로 다가왔다. 기욱은 다 타들어 간 담배를 내던진 뒤 발끝으로 껐다.

“형 나랑 얘기 좀 해.”

기욱이 시헌을 슬쩍 내려다봤다. 식당에 들어선 시헌은 서윤과 엄마 사이에서 입을 꾹 다물었다. 간혹 서진의 얘기가 나오면 시헌은 적당히 고개만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시헌은 이런 자리에 저를 부른 것도, 이런 자리를 주선했다는 것도 무엇 하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욱이 담배를 다시 입에 물자 시헌인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마지못해 손가락에 끼운 담배를 내려놓았다. 동시에 시헌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형 도대체 왜 그러는데.”

시헌의 말에 기욱이 피식, 웃었다.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시헌의 말은 쉽게 대답할 수도, 그렇다고 흘려 넘길 수도 없는 질문이었다. 기욱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기욱의 손이 시헌의 머리에 닿았다. 시헌이 기욱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기욱은 시헌에게 내쳐진 손을 보더니 다시 손을 내렸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굴 거 없잖아. 그냥 그녀가 마음에 들었을 뿐이야.”

“거짓말.”

침묵이 흘렀다. 기욱이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시헌은 끝내 기욱과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기욱은 못 미더운 형이 된 것에 대한 슬픔을 느꼈다. 뭐, 시헌의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이다. 서윤은 기욱이 여태껏 만났던 다른 여자들에 비해 더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덜하지도 않았다.

슬슬 엄마에게 제대로 된 여자 하나쯤은 소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기욱에게 서윤은 딱 좋은 상대였다. 정작 마음에 든 건 서윤이 아닌 다른 쪽이었지만. 기욱은 굳이 그 사실을 시헌에게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기욱은 피우지 못한 담배를 다시 집어넣은 뒤 시헌 쪽으로 몸을 살짝 숙였다. 중학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시헌의 키는 여전히 기욱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동생, 시헌은 틀림없는 기욱의 동생이었다. 기욱은 시헌이 무슨 짓을 하던 신경 쓰지 않는다. 설령 모든 사람이 시헌을 용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기욱은 할 수 있었다.

형이니까.

기욱은 자신의 것에 대해서는 관대한 사람이었으며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허나 아무리 그런 동생이라 해도 제 것을 탐낼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아슬아슬한 거리에 있었다. 기욱이 입을 뗐다. 낮은, 평소와 같은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낯선 위화감이 서려 있었다.

“많은 걸 알려 하면 다쳐.”

때마침 엄마와 서윤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몸을 바로 세운 기욱이 두 사람을 반겼다. 술에 취해 휘청거리는 서윤이 기욱에게 달라붙었다. 기욱이 서윤의 허리를 안으며 서윤을 부축했다. 엄마는 서윤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그런 두 사람의 행동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정하게 있는 기욱과 서윤에 시헌은 주먹을 쥐었다. 고개를 살짝 돌린 기욱이 빨리 오라며 시헌을 재촉했다. 문득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기욱이 여자 친구가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하는 남자라 해도, 시헌이 집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남자를 데려오는 짓을 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럴 리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런 기욱을 서진이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었다. 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었다. 시헌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며 마지못해 기욱의 뒤를 따랐다. 그날, 시헌은 자기 생각이 기우에 지나지 않기를 바랐다.

* * *

학원 수업에 공백이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집에 갔다 오자니 애매한 시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학원 자습실에서 공부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비좁은 자습실에서 어깨를 부딪치고 앉아 있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가방을 챙겨 학원 밖으로 나왔다.

커다란 대로변을 가득 메운 학원 간판들, 그리고 군데군데 있는 독서실 간판이 눈에 띄었다. 시헌은 대로변에 있는 독서실 대신 골목을 좀 더 들어가야 있는 작은 독서실로 들어갔다. 시설은 좀 뒤처지지만, 그만큼 가격이 싸고 주로 고시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독서실이라 조용하며 분위기가 좋다는 장점이 있었다.

우연히 발견한 이 독서실은 이렇게 애매하게 시간이 뜰 때 시헌이 종종 찾고는 하는 곳이었다. 지정석이 아니므로 계산을 한 뒤 편한 자리에 앉으면 됐다. 늘 앉는 구석진 창가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창가라는 장점은 있으나, 너무 구석진 곳인 데다 유일하게 그곳에 있는 책상들만 옛날 책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삐걱거리는 의자와 흔들리는 책상은 공부하기 적합한 자리는 아니었다. 리모델링을 하면서 왜 저 책상과 의자들을 버리지 않았는지 시헌은 그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곳은 유일하게 인기가 많은 창가 자리 중에서도 늘 비어 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길어야 한두 시간 공부하고 나가야 하는 시헌에게 있어서 창가에 앉을 수 있다면 그 정도 불편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밖에서부터 공부할 책들과 샤프를 꺼낸 뒤 품에 안고 구석 자리로 간 시헌은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 앉아 있었다. 샤프를 입 근처에 가져다 대며 공부를 하는 익숙한 옆모습은 다름 아닌 서진이었다. 시헌이 다니는 학원처럼 대형 학원들이 아니라도 이 근방은 이런저런 소규모 학원들이 난립해 있는 곳이었다.

의대를 가겠다고 공부를 하는 서진이 언제까지 동네 학원에 다닐 거라는 보장은 없었으나 이런 곳에서 볼 거란 생각 또한 한 적이 없었다. 그 많고 많은 자리 중 왜 하필 저 자리일까. 시헌은 불현듯 중학교 무렵 서진과 하나밖에 남지 않은 창가 자리를 두고 서로 싸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전혀 관계없던 현정이 앉게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창가는 좋다. 시헌도, 서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집중을 하는 서진은 시헌이 독서실에 있다는 사실도, 누군가 저를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어딘가 집중을 하면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시헌은 서진의 그런 올곧은 시선이 좋았다. 자신과 다른, 서진을 보고 있자면 저도 모르게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열심히 하게 되고는 했다. 시헌에게 있어서 서진은 그런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다시는 보지 말자고 했으나 시헌은 그럴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서진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일방적인 짝사랑에 있어 1~2년의 세월은 중요한 장벽이 되지 못했다. 어쩌면 시헌은 시헌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오래전부터 서진을 좋아했는지도 몰랐다.

꽉 안은 문제집을 들고 서진의 옆에 앉았다. 일부러 보란 듯 의자를 끌었다. 서진 대신 몇몇 사람들이 시헌을 힐끗거렸다. 서진은 시헌이 제 옆에 앉았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람이 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아무렴 상관없었다.

가장 구석에 앉은 서진과 그 옆에 앉은 시헌. 행여 서진이 움직인다면 시헌에게 반드시 움직임이 가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시헌은 문제집을 펼쳐 공부를 시작했다. 사실 칸막이 너머에 있을 서진을 생각하며 공부엔 거의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미 학원 수업 시간은 진작 지난 후였다. 서진은 끝까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헌이 마지못해 공부에 집중하고 있을 무렵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에 설마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시헌이 고개를 돌리자 서진은 재빨리 고개를 숙여 문제집에 얼굴을 묻었다. 최대한 칸막이 책상 안으로 몸을 집어넣은 서진은 당황스러웠다. 언제부터 앉아 있었던 거지?

시헌이 이 근처 대형 학원을 다닌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많고 많은 독서실 중에 왜 하필 여기에? 서진은 도무지 시헌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났다. 서진은 시헌이 금방 일어날 거라 생각했다. 하나밖에 없는 학원 수업을 마치고 저녁까지 공부를 할 목적으로 독서실에 들어온 서진과 달리 시헌의 스케줄은 방과 후부터 늦은 저녁까지 학원 수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진의 그런 예상과 달리 시헌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맞았다. 1년이 지났건만, 시헌의 얼굴은 중학교 때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차라리 못 알아볼 만큼 변했다면 좋으련만.

불과 1년 만에 두 사람은 인사를 할 수도, 그렇다고 아는 척을 할 수도 없는 애매하고도 불편한 관계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지하철의 막차가 다가올 무렵 결국 서진이 마지못해 짐을 챙겨 일어났다. 등 뒤로 부스럭거리는 시헌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무얼 하는지도 보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도망치듯 독서실을 나왔다. 그런 서진의 뒤를 시헌이 따라왔다.

서진은 등을 돌아보지 않아도 시헌이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헌과 서진의 눈에 보이는 술래잡기는 지하철을 타고, 동네에 도착할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기욱의 오피스텔과 반대되는 골목까지 쫓아오는 시헌을 본 서진이 끝내 등을 돌렸다.

“야, 박시헌.”

얼마 만에 불러 보는 이름인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익숙했던 그 이름이 이제는 불편한 단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서진은 제 입에서 나왔던 말임에도 시헌을 부르는 그 이름이 너무나 어색하다고 느꼈다. 시헌이 다가오려 하자 서진이 자연스럽게 뒷걸음쳤다.

시헌이 한 걸음 다가올 때면 서진은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마치 일부러 거리를 두려는 것 같았다. 서진의 그런 기분을 눈치챈 시헌은 서진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목소리가 들릴 만한 간격을 두고 서진을 마주했다.

“왜 계속 쫓아오는데.”

“얘기 좀 하자.”

“난 너랑 할 얘기 없어.”

서진이 다시 등을 돌려 걸음을 빨리 했다. 시헌의 걸음 또한 빨라졌다. 시헌은 도망치듯 뛰어가는 서진을 붙잡았다. 1년 사이 서진의 키가 시헌보다 커졌다고는 하나, 운동에서 시헌은 변함이 없었다. 시헌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기자 서진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놓으라며 시헌에게 붙잡힌 팔을 내려다봤다. 서진의 시선에 그제야 시헌이 서진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서진의 팔이 힘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강서진, 내가 뭘 잘못했는데.”

시헌의 그 한마디가 서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1년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상처를 받아야 하는 건, 그 말을 하고 싶은 건 네가 아니었다. 우리의 관계는 마치 비틀어진 톱니바퀴처럼 어긋나 있었다.

그 상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돌아갈 때마다 서로를 상처 입혔다. 뭘 잘못했냐고? 서진은 그 말을 그대로 기욱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간신히 이성을 지킨 서진이 입을 열었다.

“넌 잘못한 거 없어.”

당사자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잘못했단 말인가. 그 한마디에 시헌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서진의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서진은 그 한마디에 안심하는 시헌이 참으로 우스웠다. 아무리 누나―서윤을 위한 선택이었다고는 하나 기욱에 의해 타들어 가는 제 기분을 시헌이 감히 알까 싶었다.

“그런데 왜 그래?”

“뭐, 라고?”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며. 근데 나한테 왜 그러는데.”

제 잘못이 아니다. 시헌은 그렇다면 서진과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틀어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서진은 허탈하게 웃었다. 틀어진 톱니바퀴의 골은 서진의 생각 이상으로 깊었다. 어쩌면 두 사람의 톱니바퀴는 첫 만남부터 어긋나 있었는지도 몰랐다. 차라리 평생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텐데. 기욱의 동생이라는 사람을 몰랐다면 이런 감정이 들지도 않았을 텐데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친형과 친구의 불건전한 관계를 안다면 시헌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슨 상처를 받을까? 그리고 그런 시헌에게 상처를 준 서진은 시헌을 볼 수조차 없을 것이 틀림없었다. 경멸할까? 차라리 경멸한다면 더 좋을지도 몰랐다.

그날 다시는 만나지 말자며 선언을 했을 때처럼 상처를 받은 표정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 발로 들어온 지옥이었지만 서진은 제 선택으로 상처 받는 시헌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에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었지만, 앞으로의 시간에 시헌이라는 존재를 지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너 말야.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구는 거.”

“…….”

“예전부터 존나 재수 없었어.”

그게 아니었다. 시헌이라고 해도 사람이었다. 사람인 이상 누구나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기 마련이었다. 그날, 현정에게 소개를 받아 시헌을 처음 본 순간 서진은 알았다. 시헌과 자신은 닮아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고 있다는 것이. 현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이 친해질 수밖에 없는,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은소가 들어 올 수밖에 없는 것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가진 상처들은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힘든, 사실은 겪지 말아야 할 불운이었다. 3년 동안 같이 지냈지만, 서진과 시헌은 서로의 개인적인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현정도, 은소도 마찬가지였다. 네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아무렇지 않게 구는 건 아마 비단 시헌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이란 건 그래,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 힘들다고 표현을 하는 순간 일상이 무너졌다. 그건 사형선고와도 다름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구는 것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그렇게 평범한 척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처세술이었다.

“서진아. 나는……. 그게 아니라…….”

서진의 말에 시헌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어떻게 말해야 하지? 원래 말이 많은 편은 아닌지라 생각 없이 말을 꺼내는 타입 또한 아니었다. 이상했다. 생각이 앞서기도 전에 말이 먼저 나왔다. 그리고 생각 없이 나온 말들은 전부 끝을 맺지 못했다.

온몸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틀어졌을까? 서로 다른 학교에 가서? 아니면 현정이 없어서? 이럴 줄 알았으면 과고를 가지 말걸. 시헌은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시헌은 그냥 다른 학교여도, 현정이 없어도 잘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은 몰랐다. 알 수도 없었고. 말을 더듬던 시헌의 어깨가 힘없이 내려앉았다.

“미안.”

시헌은 결국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시헌에 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차라리 이걸로 된 거다. 시헌이 하루빨리 저를 잊는 편이 좋았다. 더 만나지 않고, 얽히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있어서 더 좋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이게 맞았다. 그런데 시헌을 보낸 서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무의식적으로 눈가를 비빈 서진의 손등이 촉촉했다.

“젠장.”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내리나? 멀쩡한 하늘 탓을 하며 손에 묻은 물기를 옷에 닦은 뒤 등을 돌렸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너를 위한 랩소디』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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