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다시 박시헌
새로운 교복, 새로운 교실,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 설렘이 가득해야 할 고등학교 생활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시헌은 무감각하기만 했다. 서로 낯설게 떠드는 아이들이, 교실이 시헌은 답답했다. 초등학교 무렵 시헌을 알아본 몇몇 남학생들이 말을 걸어왔다.
같이 밥을 먹거나 매점을 내려가는 것은 중학교 때와 다를 게 없었으나 어딘가 달랐다. 그들은 서진이나 은소가, 현정도 아니었다. PPT를 틀며 수업 중간에 재미있는 영상을 보여 줘 아이들의 관심을 끌거나, 이상한 조별 활동이라며 책상을 옮기거나, 짜증이 난다며 수업 대신 개인적인 얘기를 하는 선생님은 없었다.
칠판 가득한 판서들, 수업 시간에 떠들거나 다른 말을 꺼내며 조금이라도 수업을 줄여 보려는 아이들 또한 없었다. 학교의 아이들은 수업의 일 분, 일 초가 아까웠다. 이미 입시를 하겠다며 작년 겨울방학에 배웠던 내용을 보며 시헌은 그런 게 있었었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다.
재미가 없다.
하루하루가 같은 날의, 의미 없는 날들의 반복이었다. 유일한 낙이 있다면 이동 수업이 없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밥을 빨리 먹고 저녁에 휴대폰으로 내려받아 놓은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전부였다. 서진에게 연락을 해 보지 않으려 했던 건 아니었다.
몇 번인가 문자를 보내려 했으나 달리 할 말이 없어 지우고 쓰기를 며칠, 시헌은 끝내 서진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다. 서진의 소식을 들은 건 기욱의 집에 찾아온 서윤의 덕이었다. 시헌은 그날 두 사람이 사귄 지 몇 달 됐다는 걸 알았다.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이 너무나 잘 맞아떨어져 묘한 느낌이 들었다.
몇 달? 형이?
일주일, 길어야 한 달이면 여자 친구가 바뀌고는 하는 기욱에게 제대로 된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 결혼해야지. 그 한마디가 시헌을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다. 기욱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 대상이 하필이면 서진의 누나라는 게 시헌을 언짢게 만들었다.
아무렴 둘이 좋다고 하는데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로 서윤을 만난 뒤 시헌은 기욱이 집에 다른 여자들을 끌어들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 봤자 뒤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은 했으나 서윤을 만나고부터 기욱의 행동에 변화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도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서진이 학교에서 잘 지낸다는 말에 시헌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더 얘기하고 싶었으나 서윤은 기욱과 함께 금방 집을 나갔다. 기욱이 다시 병원을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학원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그날 유일하게 있는 수업이 선생님의 개인 사정으로 휴강했다. 종례도 평소보다 일찍 끝났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수업이 끝나면 각자의 학원으로 사라진다. 놀러 가자 혹은 내일 보자 대신 학원에서 보자, 하는 말을 인사처럼 주고받았다. 참으로 묘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는 시헌은 일부러 다른 길을 택해 한참이나 돌아 집에 들어왔다. 집 근처에 가까워지자 서진의 학교가 있는 골목 쪽으로 들어갔다. 집에 도착할 즈음은 하교 시간을 훨씬 지난 후라 아이들이 거의 없었다.
서진의 학교 교복을 입은 남학생 두 명이 골목을 돌긴 했으나 뒤늦게 두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시헌은 실망해야만 했다. 방에 앉자 어제저녁에 다녀왔던 태권도 가방이 발끝에 채였다. 도복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시간을 본 시헌은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도복이 담긴 가방만을 어깨에 챙겼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주 3회였던 수업이 학원으로 인해 주 1회로 줄었다.
수업이 줄어든 것은 학원 때문만은 아니었다. 3단, 고등학교 입시가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승급 시험이 있었다. 이런저런 스트레스에 태권도만 한 탓인지 시헌은 힘들지도 모른다는 관장님의 말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승급을 했다. 나이가 차기 전까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비록 주 1회 수업이었지만, 시간이 나면 편할 때 도와주러 와도 된다고 했었다.
학원 수업이 없는 날이라 방과 후부터 거의 저녁까지 태권도에 있었다. 마지막 수업 직전에 시헌은 태권도장을 나왔다. 체력보다는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이젠 좀 자고 싶은 것도 있었고. 가방을 챙기고 터덜터덜 집에 오는 골목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구도시의 골목, 네 사람이 함께 종종 걷고는 했었던 길이었다. 골목 너머로 말소리가 들렸다. 바닥을 보던 시헌이 고개를 들었다.
“…….”
“어, 시헌아!”
서진, 그리고 은소였다.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먼저 말을 꺼낸 건 은소였다. 뒤늦게 서진도 입을 열었다.
“박시헌, 잘 지내냐?”
저 이름을 얼마 만에 듣는 걸까? 시간으로 치면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았으나 시헌의 체감은 몇 년도 더 된 것 같았다. 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지만 조금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옆에 섰다. 집은 정반대 방향이었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고등학교는? 누나가 잘 지낸다던데.”
“그냥 그래.”
“힘들게 들어갔는데 그러지 마라.”
서진의 위로에 시헌이 두 사람을 바라봤다. 입시를 포기한 서진, 열심히 시험을 봤으나 생각만큼 되지 않았던 은소, 홀로 붙은 시헌은 서진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시헌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세 사람은 목적지도 없이 같은 곳을 맴돌았다. 집을 지나친 건 서진도, 은소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골목을 세 번쯤 돌 무렵 결국 은소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어디 좀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딜 가는데?”
은소가 서진을 봤다. 서진이 뺨을 살짝 긁적였다. 시헌을 만나기 전까지 집에 가던 중이었다. 시헌을 만남과 동시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집을 지나쳤고, 지금은 갈 곳이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화살이 넘어온 서진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나도 몰라.”
“그냥 우리 집 갈래?”
골목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시헌의 집이 가까워졌다. 시헌이 자연스럽게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돼?”
“어차피 형 맨날 병원에 있어서 집에 아무도 없을걸. 삼 일째 집에 안 들어왔어.”
나흘인가? 뒤늦게 일수가 틀렸다는 걸 알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은소는 형이라는 말에 시헌이 그제야 형이랑 같이 살았다는 걸 기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의 오피스텔에 가까워질 무렵 서진이 걸음을 멈췄다.
“난 좀……. 그런데.”
“왜?”
서진은 어딘가 떨떠름해 보였다. 시헌은 뭐가 문제냐는 듯 서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은소가 물어 왔다. 시헌은 서진이 기욱이 불편해서 그런 걸 거로 생각했다. 현정도 그랬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내 방에 있음 되잖아.”
“그게……. 하아, 알았어.”
서진이 마지못해 허락했다. 기욱의 오피스텔 앞, 먼저 들어간 은소와 달리 서진은 입구 앞에서 한참이나 머뭇대야만 했다. 결국, 시헌이 계단에서 몸을 살짝 내밀었다. 시헌의 눈치를 본 서진이 마지못해 계단을 올랐다. 시헌이 집 문을 열었다. 은소가 가장 먼저 들어갔다. 시헌이 서진의 등을 밀었다. 서진은 시헌에게 떠밀리듯 집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서진은 쉽게 거실 안쪽으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집 안에는 세 사람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완전히 깨닫고 난 뒤에야 서진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시헌의 방에 들어가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늘 만났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몇 달 만에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은소와 서진이 다른 반이 된 것, 은소가 왕따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 시헌이 태권도 승급을 한 것에 대한 말들이 오고 갔다.
시헌의 침대를 자리해 앉은 은소, 그 밑으로 앉은 서진과 시헌은 끝까지 가장 중요한 말은 할 수 없었다. 기욱, 그리고 서윤에 관한 얘기였다. 둘에 대한 화제는 말하고 싶으나 말할 수 없는 금기어처럼 느껴졌다. 얘기가 과거로 흘러갈 무렵 서진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현정이는?”
현정이. 그렇구나. 서진의 궁금증에 시헌은 고개를 적당히 끄덕였다. 미국으로 간 뒤 연락을 한다는 현정의 말과 달리 현정과의 연락은 쉽지 않았다. 그나마 현정의 부모님이 엄마와 아는 사이라 시헌도 다시 연락이 된 게 불과 몇 주 전의 이야기였다.
“잘 지낸대. 고등학교 들어갔다고. 번호 알려 줬으니까 조만간 연락 올지도 몰라.”
“그래? 거기서 사고나 안 치면 좋을 텐데.”
서진이 큭큭대며 웃었다. 다시 생각해도 현정은 또래 여자애들과 달랐다. 그래서일까? 유독 현정은 여자애들과 다툼이 잦았다. 그 또한 이제는 지나간 추억들에 불과했다. 이야기가 한창일 무렵 시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은소의 말을 반쯤 무시한 시헌은 거실로 나갔다.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뿐, 방으로 돌아온 시헌은 뭔가를 내려놓았다. 캔 맥주, 그리고 소주. 술이었다. 서진이 어디서 났냐 채 묻기도 전에 시헌은 캔 맥주를 뜯어 반쯤 마셨다. 당황한 서진이 시헌의 앞으로 손을 뻗었다.
“너, 뭐냐? 이거 어디서 났어?”
“형 거. 한두 병 정도는 괜찮아.”
기욱은 주량이 센 편이었다. 자취하고, 집에 여자를 데려올 때부터 종종 술을 사 놓고는 했었다. 편의점에 가기 귀찮다는 게 이유였다. 유독 이 근처에는 편의점이 없었다. 병원에 들어가고 난 다음부터는 더욱 그랬다. 쉬기도 바빠 죽겠는데 술을 사러 나갈 여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시헌은 그런 사실을 원래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간 무렵 호기심에 손을 댔다. 요즘은 이래저래 짜증이 날 때면 종종 몰래 꺼내 먹고는 했다. 기욱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않기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기욱도 시헌이 적당히만 먹으면 그 정도의 일탈 정도야 아무렇지 않았다. 시헌이 가져온 맥주를 서진과 은소 쪽으로 살짝 밀었다. 서진은 아닌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뜻밖에 은소가 시헌이 내민 맥주를 집어 들었다.
“나, 난 조금만.”
“야! 너까지…….”
“그게…. 나 사실 술 한번 마셔 보고 싶었어.”
며칠 전 친구들과 술에 대한 말이 나왔다.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다는 은소의 말에 친구들은 되려 뭘 했는데 먹어 본 적이 없냐며 웃었다. 장난이었지만, 기분이 언짢았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시헌이 술을 먹자고 제안할 줄은 몰랐지만, 은소는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캔 음료수 까듯 탁, 하고 맥주를 땄다. 익숙하지 않은 시큼한 향이 코를 적셨다. 맥주를 살짝 마신 은소가 이내 인상을 구겼다. 달지도, 쓰지도 않은 묘한 맛이 났다. 조금은 씁쓸한 탄산음료 같기도 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맛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리는 은소의 모습에 시헌이 웃었다.
“큭큭, 처음엔 다 그래.”
종이컵에 소주를 반쯤 따른 시헌이 팔을 살짝 내밀었다. 그동안 기욱의 술을 몰래 훔쳐 먹은 건 기분이 나쁠 때가 주였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은소도 들고 있던 맥주를 살짝 내밀었다. 시헌이 서진에게 눈치를 주었다. 서진이 아직 뜯지 않은 맥주 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냉장고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캔 표면에 물방울이 고였다. 서진의 시선이 살짝 열린 시헌의 방문 너머 거실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강서진.”
시헌이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흠칫, 놀란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정말 조금 취기가 오른 시헌이 서진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뭘 무서워해.”
집 얘기가 나올 때도 그랬다. 집에 왔을 때도 서진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위화감이 들었으나 시헌은 그게 단순히 기욱이 서윤과 사귀어서 불편해한다고 생각했다. 술을 앞에 두고는 단순히 술 때문에 긴장이 된다고 느꼈다. 시헌의 눈치를 본 서진은 마지못해 맥주 캔을 뜯었다.
기욱이 집에 두고 간 술은 생각보다 많았다. 한번 술이 들어간 둘은 계속해서 술에 손을 댔다. 서진이 적당히 마시라고 했지만, 어차피 마신 거 두 사람은 서진의 말을 흘려듣다시피 했다. 술기운이 어느 정도 올라올 무렵 시헌은 옆으로 몸을 기댄 은소를 툭툭 건드렸다.
“야, 자냐?”
“으응…. 졸려.”
은소가 눈을 비볐다. 시헌이 은소의 몸을 옆으로 밀어내자 침대 밑으로 은소의 몸이 무너졌다. 시헌이 멋대로 남은 소주를 종이컵에 따랐다. 술기운에 얼마를 따랐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은소는 반쯤 잠이 들었다. 서진이 혼자 술을 마시려는 시헌의 팔을 붙잡았다.
“시헌아. 너 취했어.”
“뭐? 내버려 둬.”
시헌이 손을 저었다. 잠꼬대하는 모양인지 은소가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에 시헌이 또다시 큭큭댔다. 서진은 도대체 무엇이 시헌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도 몰라.”
“…….”
“그냥, 그냥 좋아. 지금이.”
“알았으니까 적당히……. 아, 박시헌!”
“딱 한 잔만. 서진아. 왜 그래. 응? 그러지 마.”
서진이 시헌의 종이컵을 빼앗았다. 술이 서진의 옷 쪽으로 튀었다. 술이 담긴 종이컵을 따라 시헌의 몸이 움직였다. 두 사람의 실랑이가 한동안 이어지더니 이내 바닥에 있는 술병과 맥주병이 무너졌다. 그 와중에도 시헌은 서진이 높이 올린 종이컵에 손을 대려 하고 있었다.
결국, 종이컵에 있던 술이 서진의 몸에 쏟아졌다. 시헌이 텅 빈 종이컵과 서진을 번갈아 보았다. 서진이 옷에 묻은 술을 털어 냈다. 서진은 그제야 시헌의 몸의 절반이 제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들어 있는 은소, 미묘한 분위기에 서진이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서진이 몸을 뒤로 내뺀 만큼 시헌이 다가왔다. 종이컵을 바닥에 내던진 시헌은 서진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시헌만큼은 아니었지만, 서진도 술기운이 올라오는 중이었다. 술기운이 있는 서진, 몸에서 나는 술 냄새와 분위기가 시헌을 자극했다. 뭐가 좋냐고? 그냥. 이렇게 있는 것이 좋았다. 술 때문인지 지금이라면 무슨 말이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시헌, 입술. 제 이름을 부르는 앵두 같은 붉은 입술이 탐났다. 예전처럼 초콜릿을 먹어도 이제는 더 이상 그 향기며 감촉을 느낄 수 없었다. 어떤 걸 먹든 마찬가지였다. 제정신이 아니라고는 생각했다. 허나 딱 한 번만 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이 있고 난 뒤 일어난 일에 대한 뒷감당의 두려움보다 당장 유혹이 시헌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밀어내는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난 뒤 시헌보다 키가 조금 더 커진 서진이었지만, 오랫동안 운동을 해 온 데다 술까지 마신 시헌의 힘을 이기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시헌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서진의 입에 닿을 듯 말 듯 다가왔다. 동시에 방문이 열렸다. 얼굴을 돌리자 보이는 커다란 발에 시헌은 몸을 살짝 일으켰다. 기욱이었다.
“어, 형.”
병원에 있어야 할 기욱이 왜 여기 있는지 시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욱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과 방 안 가득한 술 냄새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은소는 침대 밑에서 잠이 들어 있었으며, 시헌은 누가 봐도 얼굴이 빨갛게 변해 술에 취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투부터가 정상이 아니었다. 기욱이 정신이 없어 하는 시헌을 두고 발끝으로 서진을 건드렸다. 놀란 서진이 기욱을 올려다봤다. 방문을 반쯤 잡은 기욱은 거실을 손가락질했다.
“저, 저기 이건 그러니까…….”
뒤늦게 서진이 변명하려 했으나 기욱은 듣고 있지 않았다.
“나가 있어.”
벽을 반쯤 기다시피 한 서진이 결국 방 밖으로 나갔다. 서진이 방을 나가기 무섭게 기욱은 방문을 닫았다. 시헌의 팔을 잡아 몸을 일으켰다. 이내 순식간에 반항하려는 시헌을 침대 위로 내던졌다.
“아, 형 왜 그래.”
기욱이 오뚝이처럼 일어나려는 시헌의 위로 올라탔다. 딱, 하고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기욱의 손가락이 시헌의 이마를 튕겼다. 시헌의 이마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시헌은 이마를 붙잡으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기욱을 바라봤다. 그러나 원망의 눈초리는 아니었다.
“아파.”
“자라.”
“서진이는?”
“집에 갔어.”
시헌이 방 안을 둘러봤다. 방 안에 서진은 없었다. 침대 헤드에 몸을 반쯤 기댄 시헌이 약간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구나……. 갔구나.”
“자.”
“응.”
바닥에서 자는 은소가 조금 거슬렸으나 기욱은 이내 아무렇지 않게 불을 껐다. 꺼진 불 너머로 시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욱은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싸늘한 분위기가 거실에 맴돌았다.
탁,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났다. 불은 붙지 않았다. 몇 번인가의 시도 끝에 간신히 담배 끝에 불이 붙었다. 거실 안으로 옅은 연기가 났다. 형아. 닫힌 방문에서 시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욱은 손등으로 문을 가볍게 때렸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반쯤 주저앉아 있는 서진은 고개를 바닥으로 숙였다.
거실 나무 바닥에 나 있는 선이 평소보다 눈 안에 크게 들어왔다. 기욱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기욱은 거실 개수대에 담배를 내던졌다. 개수대에 남아 있던 물에 의해 담뱃불이 꺼졌다. 서진의 앞에 몸을 숙였다.
“고개 돌려.”
명령적인 말투, 서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목 끝을 살짝 돌렸다. 시선은 여전히 바닥을 쫓고 있었다. 제 얼굴을 빤히 보는 기욱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시헌과 은소 정도는 아니지만, 서진도 제법 술을 마신 상태였다.
난생처음 마신 술기운이 역하게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서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동시에 기욱의 손이 서진의 턱을 들어 강제로 고개를 돌렸다. 서진이 억지로 고개를 돌리려 하자 이번에는 뺨 위로 손이 올라왔다. 술 때문에 뺨이 뜨거워져서인지는 모르나 생각보다 찬 기욱의 손에 서진이 살짝 떨었다.
거실의 시계 초침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1분이, 1초가 한 시간 같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못 한 변명의 연속이었다.
“이건, 그 시헌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화가 난 것 같았다. 술에 대한 말을 하고 있지만, 기욱이 화를 내는 부분이 술 때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반쯤 정신이 나간 시헌, 입가에는 금방이라도 닿을 것만 같았던 그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술에 취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미묘하게 그 느낌이 싫지는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모든 게 일방적인 기욱은 키스를 할 때도 일방적이며, 거칠었다. 기욱이 말하는 배려라는 것 또한 상대를 한계까지 몰아넣고,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사람을 두고 하는 행위의 일종에 지나지 않았다. 그건 배려가 아니었다. 그런 기욱에 비해 시헌은 일방적인 면은 있으나 강요하거나, 강제적으로 뭔가를 취한다는 느낌은 적었다. 아마 그 순간 기욱이 오지 않았더라면……. 시헌과의 키스는 어땠을까? 닮은 듯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모습에 서진은 괴리감을 느껴야만 했다.
하, 시간을 확인한 기욱이 한숨을 쉬었다. 자세히 보니 기욱은 병원복 차림에 잠바만 그대로 입고 온 상태였다. 자세한 용무는 서진도 알 수 없었으나 기욱이 오래 집에 머물지 않을 거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얼마나 마셨어?”
“바, 반병 정도…….”
정확히는 맥주 한 병에 소주 반병이었다. 그런 사실은 기욱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슬슬 목이 아파 왔다. 서진이 기욱의 팔 위로 손을 올렸다. 잔근육이 진 데다 체격이 좋은 기욱의 팔 위로 올라온 서진의 손은 여자 손처럼 가냘프기만 했다. 서진이 놓아 달라며 기욱의 팔을 붙잡았다. 예상은 했지만, 서진의 힘에도 불구하고 기욱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놓아줘요.”
끝내 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욱이 손을 내려놓았다. 몸을 일으킨 기욱은 어딘가로 문자를 보냈다. 혹시 서윤이 아닌지 힐끗 기욱의 휴대폰을 바라봤으나 말투로 보아 서윤은 아니었다. 상대가 누구든 서윤만 아니면 일단 안심이었다. 문자를 마친 기욱이 2층 계단 방을 손가락질했다. 기욱의 방이었다.
“내 방에 가서 자.”
그 말에 서진은 그제야 시계를 봤다. 11시가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내일은 주말이었다. 기욱은 거실에 있는 서랍을 뒤졌다. 뭔가를 찾은 모양인지 주머니에 챙긴 뒤 겉옷을 바로 했다. 그사이 서진은 기욱의 방을 힐끗거렸다.
차라리 집에 가거나 거실에서 자면 잤지, 기욱의 방은 어딘가 꺼림칙했다. 서진이 휴대폰을 만졌다. 오늘 서윤이 집에 왔던가? 대학병원 간호사, 직업 탓에 서윤의 근무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분명 아침에 집에 있었으니 낮 근무였다면 지금쯤 퇴근했어야 맞았다. 하지만 서진은 서윤에서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서진은 닫혀 있는 방문 너머에서 자고 있을 시헌과 은소를 생각했다.
“저 그냥 집에 갈게요.”
서진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겉옷이 시헌의 방 안에 있다는 걸 알았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서진은 한시라도 빨리 이 답답한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겉옷도 입지 않은 채 나가려는 서진이 도망가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욱이 모를 리 없었다.
기욱이 서진의 팔을 낚아챘다. 팔이 꺾이며 기욱에게 잡힌 팔목이 아파졌다. 서진의 팔목을 잡은 기욱이 순식간에 계단 앞으로 다가왔다. 계단을 올려다보던 기욱이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반항할 틈도 없이 서진은 기욱에게 이끌려 계단을 올라야만 했다.
기욱은 닫힌 방문을 열고 불을 켰다. 일이 바빠 청소하지 못해 엉망인 방 안쪽으로 침대가 있었다. 등을 떠민 기욱이 서진을 침대 위로 내던졌다. 시헌의 침대와 비교하면 비교적 낮은 침대 매트리스가 살짝 아래로 꺼졌다. 반동에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책들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서진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기욱이 서진의 위로 올라타는 속도가 좀 더 빨랐다.
기욱이 서진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약간 늘어진 셔츠, 목 아래로 보이는 쇄골, 흰 피부, 병원 근처에 고등학교가 있어 간혹 고등학생들을 보지만 기욱은 결코 지나가는 고등학생들을 보고 충동을 느끼거나 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여자와의 첫 섹스는 중학교 무렵이었지만 남자와 섹스를 처음 한 건 서진의 나이와 비슷할 무렵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짓이었다. 일어나려는 서진의 몸을 눌렀다. 어깨에 닿은 손에서 서진이 떨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서진아.”
“집에, 집에 갈 거예요. 놔, 놓…… 으읍! 읍….”
기욱이 서진의 팔과 몸을 누른 뒤 강제로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입을 열지 않고 반항했으나 기욱의 힘은 평범한 고등학생 체격인 서진이 쉽게 이길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혀와 거친 애무, 술 냄새, 숨이 막혀 옴과 동시에 온몸이 늘어져 반항하기를 포기했다.
기욱과의 키스는 억지로 입안에 넣어 버린 사탕과도 같은 맛이 났다. 입에 넣을 때는 강제로 시작했으나, 한번 그 맛을 보면 쉽게 뿌리칠 수 없는 마약과도 같았다. 허리를 안은 기욱의 손이 자연스럽게 서진의 셔츠 안으로 들어갔다.
뒤로 들어온 손이 등을 쓸어내리자 야릇한 느낌에 서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기욱의 손이 점점 앞으로 다가가더니 이내 뭔가가 걸린 모양인지 멈췄다. 동시에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입맞춤 또한 끝이 났다. 서진이 뺨을 만지려는 기욱의 손을 쳐 냈다.
몸을 살짝 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눈물이 고인 채로 기욱을 쏘아봤다. 아무리 기욱의 방이라고 해도, 아래층에 시헌이 있다는 사실은 자각이나 하는 걸까.
“흐으, 하, 하아…, 나쁜 놈!”
어린 서진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욕을 했다. 나쁜, 하하. 서진의 욕이라고 할 것도 없는 욕은 기욱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기욱이 서진의 다리를 잡아 벌렸다.
“뭐, 뭐 하는…! 노, 놓아줘요!”
놀란 서진이 발악을 했다. 비록 옷을 입고 있다고는 하나 기욱의 행동은 서진의 예상을 벗어난 행동임은 틀림없었다. 기욱이 서진의 허벅지를 눌렀다. 청바지 위로 기욱의 힘이 느껴졌다. 날씨에 맞지 않은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있는 기욱의 몸이 서진의 다리 사이로 다가왔다.
서진의 작은 다리는 기욱의 몸을 전부 감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기욱이 서진을 내려다봤다. 옷을 입고 있지만, 서로의 부위가 닿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기욱이 몸을 살짝 틀었다. 제법 두꺼운 청바지를 입은 서진과 달리 기욱의 수술복은 얇았다.
서진도 남자이기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기욱이 며칠 동안 감지 못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원래라면 대충이라도 머리를 감고 나갈 예정이었다. 계획에 없는 일들, 그리고 방 안에서 보았던 서진과 시헌의 행동들이 기욱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기욱은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내가 많이 참는 거야.”
“…….”
“후우, 난 내 거 누가 건드는 걸 제일 싫어하거든.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기욱이 서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기욱의 말을 들은 서진의 다리가 힘없이 풀렸다.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잘못 들은 건 결코 아니었다. 시계를 본 기욱이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방을 나가기 전 몸을 돌린 기욱이 서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자. 집에 가지 말고.”
서진은 한동안 침대에 누워 일어날 수 없었다. 얇은 바지가 아니라 완전히 느낌이 나지는 않았으나, 살에 맞닿은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하하, 서진이 팔로 눈을 가렸다. 술기운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이 흐를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서러운 기분이 사라지는 것 또한 아니었다.
‘단순히 범하는 걸로는 안 끝나.’
범하는 걸로.
그 한마디만 해도 서진을 충분히 떨게 하였다. 서진도 알 건 다 알았다. 우연히 같은 반 남학생들이 옷을 갈아입으며 떠드는 말을 들으며, 남자끼리의 섹스가 어떤 식인지 알고는 있었다. 그게 전부였지 상상은 가지 않았다. 옷 너머에 있을 자신 외에 다른 남자의 페니스도, 그걸 넣는다는 것도 무엇 하나 상상할 수 없었다.
단순히. 단순히라는 건 무슨 뜻이지? 평범한 섹스가 아니라면 대체 무슨 짓을 하겠다는 거지? 기욱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거기까지 느낀 서진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와 방 안, 책상을 가득 메워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한 두꺼운 책들이 기욱의 방 안에 가득했다.
책 냄새와 약간 퀴퀴한 냄새가 서진의 코를 찔렀다. 방 안의 냄새도, 흔적들도, 전부 자리에 없는 기욱의 것이었다. 벗어나야 한다.
서진은 성큼성큼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1층, 시헌의 방문을 열었다. 불을 켜자 방바닥에서 자는 은소와 침대에서 거꾸로 잠들어 있는 시헌이 있었다. 시헌은 불빛에 눈이 부신지 인상을 구겼다. 잠꼬대였다. 서진은 은소의 밑에 깔린 겉옷을 챙긴 뒤 다시 불을 껐다. 거실로 나와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12시가 넘었다. 겉옷을 입은 서진은 주먹을 쥔 뒤 오피스텔을 나왔다.
누가 그따위 말을 순순히 들을 줄 알고!
서진은 곧장 집으로 들어갔다. 서진의 예상이라면 켜져 있어야 할 반지하방의 불이 꺼져 있었다. 자는 건가? 잘 들어가지 않는 열쇠를 구겨 넣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불을 켬과 동시에 좁은 집 안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윤이 집에 없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불이 꺼진 서윤의 방을 살짝 엿본 서진은 거실로 나와 물을 마셨다. 얼마 마시지 않은 술이지만 술기운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방에 앉았다. 서윤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었다. 서진이 결국 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서윤이 전화를 받았다.
― 누나, 병원이야?
― 어머, 내가 말 안 했었나.
서진이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환자를 보고 있지는 않아 보였다. 대신 옆 데스크에 앉은 간호사의 말소리가 섞여 들렸다.
― 그런 것 같아.
― 집이야?
― 응.
― 미안. 요즘 정신이 없어서. 내일 학교 갔다 오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 알았어. 누나, 그 혹시 옆에 아무도 없지?
전화가 끊길 무렵 눈치를 본 서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데스크에 앉은 서윤이 주변을 둘러봤다. 몸을 살짝 숙인 서윤이 풉, 하고 미소를 지었다.
― 있긴 누가 있어. 왜 그래?
― 아니, 아무것도 아냐.
서진이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서윤과의 전화를 끊은 서진은 벽에 몸을 기댔다. 그래, 별일 없겠지. 피곤함이 몰려왔던 서진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데스크에 앉아 갑작스레 끊어진 전화를 본 서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전화를 걸어 볼까 생각도 했으나 시간이 늦었다는 걸 알고 그만두기로 했다. 데스크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복도를 지나던 기욱의 몸이 불쑥 데스크 위로 올라왔다.
“꺅, 놀랐잖아!”
서윤이 낮은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기욱은 주변 간호사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3개월 차 인턴, 신경외과를 돌고 있는 기욱을 다들 안쓰럽게 보고 있었다. 눈치를 본 서윤이 몸을 일으켰다. 데스크 밑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응? 별거 아냐. 방금 서진이랑 통화했거든.”
“집이래?”
“어? 그렇지.”
흐음, 기욱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낮은 미소를 지었다. 간호사 데스크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이 넘어 있었다. 자라고 했건만 어지간히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서윤이 환자를 확인하러 가야 한다며 일어났다. 데스크를 나오던 서윤의 발이 걸려 휘청거렸다.
기욱이 그런 서윤의 팔을 재빨리 잡아냈다. 어머, 근처에 앉아 그 모습을 보던 간호사가 부러운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기욱의 품에 반쯤 안긴 서윤이 놓아 달라며 몸을 뒤척였다. 기욱이 조심스럽게 서윤의 팔을 잡은 손을 놓았다.
“조심해.”
서윤은 홍조가 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은 평소와 같이 지나갔다.
* * *
병원에 묘한 소문이 돌았다. 새롭게 인턴으로 들어온 병원장 아들, 그런 기욱과 병원 내 신경외과 병동 간호사인 서윤이 사귄다는 소문은 병원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동생을 혼자 키운다는 서윤, 평범하다 못해 힘들게 사는 서윤이 어떻게 기욱을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뒷말이 많았다.
기욱이 서윤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서 사귀어 주는 거라는 등, 혹은 죽은 서윤의 부모님과 기욱의 집안에 연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등의 뒷얘기는 병원 내에서 도는 흔한 말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병원 인턴을 하며 서윤과 시간이 맞을 때마다 틈틈이 신경외과 병동을 찾아오는 기욱의 정성은 간호사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부러움이 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요 며칠 사이로 끝이었다.
비록 다른 과로 넘어갔다고는 하나 잠깐이라도 얼굴을 내비치고 사라지는 기욱은 단 한 번도 서윤에게 찾아온 적이 없었다. 성형외과, 기욱이 신경외과 다음으로 넘어간 과에서 묘한 소문이 돌았다. 성형외과 간호사와 있는 기욱을 봤다는 소문이었다. 단순히 그녀와 기욱이 같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소문이 돌 이유는 없었다.
점심시간에 둘만 나가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느니, 비상계단 안쪽에서 둘만 있는 모습을 봤다거나 키스를 했다는 등의 소문들이 순식간에 퍼졌다. 상대는 서윤보다 한참 경력이 높은 간호사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울상이 된 얼굴로 앉아 있는 서윤을 위로했다.
“별일 없을 거야. 최 간호사가 원래 그런 끼가 좀 있잖아.”
“맞아. 그런 게 소문난 의사들이 한둘이어야지. 지난번에도 왜 그 마취과 선생님이랑…….”
간호사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서윤을 위로하기 위해 꺼낸 그 말에 정작 서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했다. 무얼 잘못했는지. 평소와 같이 병원에서 떠들고, 평소와 같은 전화 통화를 한 것이 전부였다. 도무지 어디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점심시간, 실습 기간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식당이 붐볐다.
길을 비키지 않는 실습생들을 밀어내고 서윤과 간호사들은 간신히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저런 말소리로 소란스러운 식당 한구석에 미묘한 기류가 느껴졌다. 그때까지도 기욱에게 연락하며 휴대폰을 놓지 못한 서윤이 근처 간호사의 말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헐, 대박. 진짜 둘이 사귐?”
“뭐야? 강 간호사 불쌍해서 어떻게 해.”
“박 선생, 그렇게 안 봤는데 좀 그렇다.”
서윤의 옆에 있던 간호사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쉿, 하고 손을 올렸다. 서윤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몇몇 의사와 간호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한번 떠들기 시작한 말들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서로 음식을 고르며 떠들고 있는 기욱과 소문의 주범인 간호사가 있었다. 뭘 하는 건지,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 서로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몸을 살짝 돌린 기욱과 서윤의 눈이 맞았다. 동시에 서윤도 고개를 돌렸다. 본 걸까? 보지 않은 걸까?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실습생 무리가 서윤의 앞을 지나갔다. 서윤을 보지 못한 모양인지 둘은 여전히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들리는 거라면 기욱의 말에 의한 여자의 웃음소리였다. 기욱의 손이 자연스럽게 여자의 어깨에 올라갔다. 서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틀렸다. 저 자리는, 여자가 아닌 서윤의 자리여야만 했다. 여자의 어깨에 올라간 기욱의 손도, 모든 것이 그랬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점심은 먹어야 했다. 서윤과 간호사들은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최대한 기욱과 여자에게서 멀리 떨어진다고 앉았으나 기욱은 작정이라도 한 듯 서윤의 근처에 앉았다.
근처라고 해도 중간에 서너 테이블이 껴 있어 말소리가 들려올 정도는 아니었다. 서윤은 무슨 정신으로 밥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밥을 먹으라는 동료 간호사의 말에 수저를 펐다.
몇 숟갈 먹고 고개를 드니 기욱과 여자는 사라지고 난 뒤였다. 주변을 둘러봤으나 식당을 가득 메운 실습생들만 눈에 띌 뿐 두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의 자리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의사 두 명이 앉았다.
* * *
점심시간이 조금 남은 서윤은 화장실을 갔다 온다는 핑계로 동료들을 먼저 보냈다. 다들 눈치를 채고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서윤을 보내 주는 분위기였다. 홀로 남겨진 서윤은 복도 근처 비상계단으로 들어갔다. 혼자 있기에는 비상계단만 한 곳이 없었다. 비상계단의 칙칙한 시멘트 벽에 기대 휴대폰을 열었다. 발신 30건, 일방적으로 보낸 문자만 100건이 넘었다. 기욱에게 답장은 없었다.
전화를 몇 번인가 더 하고, 문자를 보냈다. 기욱이 답장을 보내지 않을 거라는 걸 안 서윤이 한숨을 쉬었다. 점심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아 벽에서 몸을 뗌과 동시에 아래층에서 철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너한테 뭐래?”
“뭐긴. 자기 이번 주에 시간 있으니까 만나자고 하던데? 그래 봤자 인턴이라 병원 근처지만.”
“야, 말이 인턴이지. 솔직히 박 선생 인턴으로 보는 사람이 누가 있어? 다른 인턴들 다 죽어 날 때 혼자만 대놓고 휴가 쓰고 그랬다며. 근데, 이런 말 하긴 뭐한데. 박 선생, 여자 친구 있잖아. 근데 너한테 밥 먹으러 가자고 하는 것도 웃긴다. 그야 박 선생이 인물 좋고, 집안 좋은 건 인정하지만.”
“얘는 참, 헤어질 거야.”
좁은 비상계단, 유독 목소리가 울리는 탓에 대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반쯤 열었던 서윤은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서윤이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문소리에 대화가 잠시 끊겼으나 잘못 연 거라 착각한 두 사람은 계속해서 떠들어 댔다.
아래층이었다. 난간 틈새로 고개를 숙여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사실 목소리만 들어도 두 사람 중 한 명이 식당에서 기욱과 있던 최 간호사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대박, 박 선생이 그랬어?”
“아니, 그렇게까진 말 않던데. 여자의 감이란 거 있잖아. 같은 간호사 아냐? 얼굴? 큭큭, 걔 얼굴 보면 몰라? 딱 봐도 견적 나오잖아.”
여자의 말을 참다못한 서윤이 계단을 내려갔다. 서윤을 못 알아본 두 사람이 살짝 당황하더니 이내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윤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여자의 몸을 살짝 건드렸다. 여자도 당황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화를 주체하지 못한 서윤의 얼굴이 붉어졌다.
기욱이 여자와 약속을 잡은 날은, 서윤의 휴무로. 기욱과 근처 호텔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던 날이었다. 성큼성큼 다가간 서윤이 여자의 뺨을 내쳤다. 여자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놀란 간호사가 두 사람을 말렸으나 소용없었다.
“씨발년.”
성큼성큼 다가간 서윤이 코웃음을 치며 여자의 뺨을 크게 내리쳤다. 찰싹, 살끼리 부딪치는 강한 타격음이 복도에 크게 울려 퍼졌지만, 여자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제 뺨을 감싼 여자가 놀란 듯 크게 부릅뜬 눈으로 이내 서윤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너, 너 뭐야? 어쨌다고 무턱대고 사람을 쳐? 이거 완전 미친년 아냐?”
“미친년? 기욱 오빤, 오빤 내 거야! 너 같은 년이 함부로 만나고 다녀도 될 사람이 아니라고!!”
“애초에 애인 간수 못 한 게 누군데 지금 화풀이야? 이러니까 남자가 질려서 나가떨어지지! 어린 년이, 너 몇 년 차야? 선배 간호사한테 위아래도 없어?”
“2년 차다! 그러는 넌? 그 나이 처먹을 때까지 남자 하나 없으면서. 남의 남자 빼앗으니 좋냐? 좋냐고!”
병원 비상계단을 시끄럽게 울리는 앙칼진 목소리와 욕설은 결국 응급실 콜을 마치고 병동 의국으로 복귀하던 외상외과 의사들의 개입으로 진정이 되었다.
서윤과 여자가 싸운 이야기는 병원 내에 순식간에 퍼졌다. 박기욱, 병원 내에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여자 친구가 신경외과 병동 간호사라는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울고 있는 여자와 잘못한 게 없다며 우기고 있는 서윤을 두고 싸움을 말린 의사는 답답하다는 눈치였다. 연락을 들은 기욱이 뒤늦게 뛰어왔다. 서윤과 여자가 거의 동시에 기욱을 반겼다.
“기욱아!”
“오빠!”
먼저 있던 서윤이 기욱에게 다가갔다. 기욱은 달라붙는 서윤을 밀어냈다. 밀어냈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기욱이 서윤을 지나쳐 간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의사들이 불편한 모양인지 인상을 찌푸렸으나, 사건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괜찮아요?”
“기욱아, 흐윽…….”
서른 살의 나이, 한 달 전 남자 친구에게 차이고 며칠 전 가장 친했던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결혼식에 모인 중학교 동창들은 대부분 요 몇 년 사이에 결혼했거나, 결혼을 준비 중인 예비 신랑·신부였다.
병원 일이 바빠서라고 적당히 핑계를 댔지만, 유명 대기업을 다니는 남자와 결혼한 그녀의 친구가 H 대학교 외과 간호사라는 걸 생각하면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고, 기욱은 그런 그녀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았다. 기욱은 보란 듯이 품에 안기는 그녀를 달랬다. 여자의 울음소리가 잦아들 무렵 기욱은 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을 건넸다.
“울지 말고요. 제가 해결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를 본 여자가 등을 돌려 비상계단으로 나갔다. 본원과 어린이 병동을 잇는 복도에는 지나가는 환자를 제외하고 서윤과 기욱, 그리고 상황을 좀 더 지켜보겠다고 남은 의사 한 명이 전부였다. 근처에 있던 의사들은 그런 그를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대부분 그보다 직급이 낮은 사람들이라 그의 의견에 반대를 표하지는 못했다.
기욱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의사가 있다는 걸 알았으나 그가 별다른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그에 대한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서윤은 어깨를 만졌다. 어깨에 저를 밀고 간 기욱의 손길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좋지 못한 꼴이었지만, 서윤은 며칠 만에 기욱과 몸이 닿았다는 사실 하나가 더욱 기뻤다. 기욱이 먼저 서윤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서윤이 기욱의 품에 안겼다. 기욱이 밀어내려고 했으나 서윤의 팔이 기욱의 허리를 두르는 것이 좀 더 빨랐다. 마음만 먹으면 그런 서윤을 밀어낼 수 있었으나 기욱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서윤이 고개를 들어 기욱을 올려다봤다.
“기욱 오빠, 내가… 흑…… 내가 잘할게… 흐으윽…….”
이내 서윤도 울음을 터트렸다. 지나가던 환자들, 그리고 몇몇 의사들이 서윤과 기욱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대낮의 대학 병원 연결 통로는 확실히 눈에 띄었다. 기욱은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하고 싶었으나 건너편에서 저를 빤히 지켜보고 있는 의사의 시선이 거슬렸다.
쯧, 혀를 찬 기욱이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서윤의 뺨 아래로 눈물이 흘렀다. 손을 살짝 내밀어 서윤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이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내가 말했지.”
“기, 기욱 오빠?”
“해 줄 때 잘하라고.”
콜이 왔다. 사실 급한 건 아니었지만 기욱은 호출을 핑계로 서윤과 거리를 벌렸다. 이건, 서윤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 서진에 대한 경고였다. 서윤을 이렇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서진이었다.
기욱이 등을 돌려 걸음을 걸었다. 복도 한쪽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J 대학교 병원 외과 전문의, 외상외과 세부 전공 펠로우인 정혁이 며칠 동안 감지 못한 머리를 긁적였다.
“야, 인턴.”
정혁이 기욱을 불렀다. 대답해 말아? 잠시 고민하던 기욱은 정혁의 가슴에 있는 명찰을 흘끗 봤다. 외과, 성형외과 다음 순서가 일반외과인 것을 생각하면 외과 전문의인 정혁에게 밉보여 좋을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소속 과가 없는, 기러기라 불리는 인턴은 병원 내 모든 의사 중 가장 계급이 낮은 하층민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병원장 아들이라 해도 인턴의 이름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교수님.”
기욱이 교수님이라는 말을 유독 강조했다. 물론, 대학병원 특성상 10년 차 펠로우도 있고, 교수가 되지 못한 의사들도 더러 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아니었다. 빌어먹을, 이게 다 세부 전공으로 외상 같은 걸 선택하니까 이렇게 된 거였다.
펠로우, 그래도 예의상 교수라고 불리기는 하나 이런 식으로 대놓고 불리는 건 정혁을 놀리는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인턴이라는 직급이 얼마나 기욱의 성격을 죽여 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적당히 해. 누굴 닮아서 그런 건지 원.”
“병원에 관계자가 너무 많아서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엄마? 아빠? 아니면 정신의학과에 있는 누나? 혹은 친척들? 기욱은 정혁의 말을 단순히 비꼬려 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정혁은 끝내 기욱이 닮은 대상을 말해 주지 않았다. 정혁이 귀찮다며 손을 저었다.
“됐다. 말대답하는 것도 똑같네. 야, 가라 가. 바쁘신 인턴님 일하셔야지.”
“그게 무슨…….”
정혁의 눈치를 본 기욱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적당히 고개를 숙인 기욱은 비상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 * *
은소와 헤어진 서진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붉은 갈색 벽돌식의 3층짜리 개인 주택 반지하방, 정면에 있는 건물 뒤쪽으로 돌아서자 페인트가 다 뜯어진 낡은 철문이 있었다. 군데군데 초록색 페인트가 붙어 있는 철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끽 하는 마찰음이 약간 소름이 끼치기까지 했다.
문을 열기 위해 주머니와 가방을 뒤졌다. 가방 구석에서 목걸이 줄에 연결된 열쇠가 나왔다. 열쇠를 문고리에 끼운 서진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열쇠를 치우고 문을 잡아당겼다. 문이 그대로 열렸다. 동시에 엉망이 된 방들이 서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강도? 도둑? 불안한 느낌이 든 서진이 쿵쿵거리며 반쯤 닫혀 있는 서윤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누나!!”
서진의 외침에 책상 한쪽에서 울고 있던 서윤이 고개를 돌렸다. 거실과 마찬가지로 서윤의 방은 정신이 없었다. 서진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서윤의 두꺼운 의학 서적을 집어 들었다. 엉망이 된 거실도, 방도 전부 서윤의 소행이었다. 아빠가 다른 여자와 만나거나,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면 엄마는 서진을 때렸다. 짜증이 나는 일이 있거나, 기분이 나쁠 때도 종종 그랬다.
서진과 서윤의 엄마는 손버릇이 좋지 못했다. 화가 나면 손부터 나가고,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집어 던지는 서윤의 모습은 서진을 때리던 그날의 엄마와 무척 닮은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서진에게 이젠 그런 사소한 건 아무래도 좋았다. 방이야 치우면 그만이었다. 서진은 서윤에게 별일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런 안도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흑… 으흑… 서진아… 왔어?”
서윤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진은 서윤의 책상에 붙여진 근무 스케줄 표를 힐끗거렸다. 뒤늦게 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가 들었다. 오늘, 서진이 알고 있는 서윤의 퇴근 시간은 10시였다.
집에 오고 하면 11시가 조금 넘어야 맞았다. 방과 후의 지금은 끽해야 5시를 넘기지 못했다. 서윤이 병원에서 조퇴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서윤이 뒤늦게 엉망이 된 거실을 바라봤다.
“거실 치워 줄게.”
“누나. 무슨 일이야?”
서진이 저를 지나쳐 거실로 가려는 서윤의 팔을 붙잡았다. 가까이서 보니 눈물로 범벅된 서윤의 얼굴이 한눈에 보였다. 화장도 번져 있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며 얼굴이 빨갰다. 남자, 엄마를 닮은 서윤을 울릴 사람은 남자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대게 남자와 헤어지거나 트러블이 있었을 때였다.
서윤과 살기 시작하면서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서윤의 눈물이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서윤을 울린 대상, 남자였다.
박기욱, 서윤이 여러 남자를 만난 건 사실이지만, 서윤이 만난 그 많은 남자 중에서도 기욱은 틀림없는 서윤의 취향이었다. 다른 남자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았던 기욱을 향한 일방적인 서윤의 집착이 그 증거였다. 그리고 기욱은 그런 서윤을 무서우리만큼 잘 알았다. 서윤뿐만이 아니었다. 서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서진의 바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윤의 눈물, 서진은 기욱이 자신을 향해 복수하고 있다는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서윤을 통한 암묵적 협박, 자신을 거스른다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겠다며 대담하게 누나―서윤을 가지고 노는 기욱이 서진은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서윤이 기욱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씨발 새끼.
서윤을 붙잡지 않은 다른 손이 아직 내려놓지 않은 책가방을 꼭 쥐었다.
“흑, 아무것도 아냐. 괜찮아.”
“무슨 일이냐고.”
“서진아, 누나 진짜 괜찮아. 걱정할 필요 없어.”
괜찮다. 서진을 홀로 키우다시피 한 서윤은 서진의 앞에서 늘 괜찮다고 했다.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서진의 앞에서는 늘 웃으려 노력했다. 행복하길 바랄 뿐인데.
억지로 짓는 거짓 웃음이 아닌, 남들처럼 행복하길 바랐는데.
왜 주변에선 누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 걸까.
누나는 대체 전생에 무슨 잘못을 지은 걸까.
만약 이 모든 게 전생의 죄에서 비롯된 거라면, 서진은 할 수만 있다면 그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서윤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싼값이었다.
“그 자식 때문에 그래?”
“서진아…? 너 지금 뭐라고…….”
“박기욱, 그 인간이 누나한테 뭐 했냐고!”
서윤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서윤이 남자 문제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걸 서진도 모르진 않았다. 서진은 서윤의 남자 문제에 대해 결코 말을 꺼내지도, 개입하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달랐다. 박기욱, 보란 듯이 서윤을 가지고 노는 그를 서진은 용서할 수 없었다. 서진이 서윤의 몸을 돌렸다.
168cm, 비록 큰 키는 아니었지만, 어린애라고 할 수 있을 만한 키 또한 아니었다. 서윤과 서진의 켜는 불과 1~2cm 차이에 지나지 않았다. 서진이 서윤을 팔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부탁을, 서진은 처음으로 했다.
“그만해.”
“서진아. 누나 괜찮아. 누나가 잘 해결할게……. 네가, 흐윽… 잘 몰라서 그래. 누나가…… 흐으윽… 누나가 잘못한 거니까…….”
“누나가 뭘 잘못했는데? 누나가, 누나가 뭘 잘못했냐고!”
“서진아…. 오빠 얘긴 하지 말자.”
“그 자식, 그 개자식이 잘못한 거잖아. 대체 왜! 왜! 누나가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누나, 제발. 제발 그만하…!!”
서윤의 손이 서진의 뺨을 쳤다. 서진의 고개가 반쯤 돌아가다가 멈췄다. 순간 시야가 흐릿해졌다. 낮은 천장의 형광등 조명이 눈부시게 비췄다. 반사적으로 나간 손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서윤이 보였다. 다시 보니 머리도 엉망이었고, 팔과 얼굴에도 자잘한 상처들이 나 있었다.
병원에서 대체 뭘 한 건가 싶었다. 서진은 엄마와 비슷하게 손버릇이 좋지 않은 성격이었지만, 서윤은 서진을 때리거나 한 적은 없었다. 서진이 서윤을 생각하는 것만큼, 서윤에게 있어서 서진 또한 하나뿐인 동생이자 피붙이였다. 서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서윤에게 맞은 뺨보다, 누나에게 처음으로 맞은 이유가 남자―그것도 그 대상이 기욱 때문이라는 것에 더욱 화가 났다. 서윤의 손이 서진의 뺨 근처를 만질 듯 말 듯 허공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서진아…, 이건 그러니까…… 네가 오빠를…… 누나가….”
중간중간 말이 끊겨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던 서윤이 고개를 돌려 서진을 바라봤다.
“네가 잘못했어.”
서진의 눈치를 본 서윤이 등을 돌리더니 방 안으로 들어갔다. 틈이 있는 나무 문 너머로 서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서진은 다리가 풀리기 전 간신히 건너편 방으로 들어왔다. 개지 않아 그냥 깔려 있던 이불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윤에 서진은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그 존재 자체로 서윤이 책임지고, 안고 가야 하는 짐과도 같았다.
이제 막 사회에 나온 여자 홀로 남동생을 책임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스트레스 또한 마냥 웃으며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 서진을 키울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압박감들이 서윤의 남자를 향한, 기욱을 향한 집착을 더욱 심화시켰다. 서윤에는 늘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다. 서진은 서윤이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서진을 멈춘 것은 주머니 속 휴대폰의 진동이었다. 이 타이밍에 누구지? 딱히 연락 올 사람이 없었던 터라 서진은 기껏해야 은소나 시헌쯤으로 생각했다. 휴대폰을 여는 순간 서진의 손이 떨려 왔다. 기욱이었다.
「6시, 사거리 공원.」 오후 5:48
기욱이었다. 서진은 시간을 확인했다. 사거리 공원이라면 여기서 못해도 10분은 걸렸다. 애매하게 남은 시간에 서진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집을 나서기 전 방문 너머로 기욱을 찾는 서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기욱을 보러 간다고 말할 수도 없었던 서진은 결국 등을 돌려 집을 나왔다.
무슨 정신으로 공원까지 달려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공원 한가운데 도착했을 무렵은 6시 2분 전이었다. 서진은 혹시 기욱을 놓쳤을까 공원에 있는 학생들 무리와 사람들을 눈여겨봤다. 공원 펜스 건너편에 익숙한 차가 보였다. 펜스 한쪽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기욱이 있었다.
서진이 머뭇거리며 기욱에게 다가가자 기욱도 그런 서진을 눈치챈 모양인지 담배를 껐다. 서진은 주먹을 쥐었다. 때릴까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니었다. 뜻밖에 기욱은 담배를 피우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서진을 내려다보며 휴대폰을 목에 건 기욱은 담담하게 통화를 하고 있었다.
“대체 누나한테 뭘 한 거……!”
기욱의 손이 입술 가운데로 올라갔다. 잡음에 가까운 휴대폰 너머의 음성에 서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으나 서윤의 울음소리, 목소리였다. 뒤쪽으로 공놀이하는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지나갔다. 탁, 한 아이가 찬 공이 허공으로 올라가 환성을 지름과 동시에 기욱이 휴대폰을 닫았다. 기욱이 차 문을 살짝 열었다.
차를 탈 생각은 없었다. 멀리서 서진의 학교와 비슷한 교복을 입은 남학생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이로 은소가 보였다. 분명 헤어지고 집에 간 것으로 기억하는데. 은소가 이 시간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낯선 남학생들과 뭘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은소는 서진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괜히 알려지면 복잡해질 것 같은 기분에 서진은 결국 기욱의 차 안으로 들어갔다. 서진이 차에 탄 걸 확인한 기욱이 차 앞으로 돌아갔다. 아이들과 떠들던 은소와 눈이 맞았다. 걸음을 멈추고 머뭇거리던 은소가 이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 안녕하세요.”
“그래.”
기욱이 적당히 은소의 인사를 받아 줬다. 은소와 남학생 무리는 차 안으로 들어간 서진의 옆을 지나쳐 갔다. 안은 보이지 않았다. 차에서 거리가 조금 멀어지자 떠드는 은소와 남학생들의 희미한 대화가 들렸다.
“헐, 쩐다. 누구냐?”
“그냥. 중학교 친구 형이야.”
은소는 신경이 쓰이는지 이야기를 하는 내내도 뒤를 계속 힐끗거렸다. 기욱과 눈이 마주친 은소는 이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기욱이 차 안에 탔다. 서진이 고개를 돌려 기욱을 노려봤다. 서윤에게 한 짓을 서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당신 대체…….”
기욱이 전화를 받았다. 기욱의 통화에 서진은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기욱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휴대폰 스피커폰 너머로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욱을 부르는 서윤의 목소리는 반쯤 쉬어 있었다.
― 기욱… 오빠, 어디야? 응? 뭐라 말 좀 해 봐. 오빠… 흐윽….
서윤의 일방적인 대화에도 불구하고 기욱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탁, 하고 감정 없이 휴대폰이 닫히며 전화가 끊겼다. 전화가 끊기기 무섭게 기욱은 휴대폰을 뒷좌석으로 던졌다. 조수석에서 몸을 돌린 서진이 뒷좌석 위에 놓인 기욱의 휴대폰을 힐끗거렸다. 소파에 부딪히는 진동 소리가 서진을 거슬리게 하였다.
서진이 다시 말을 하기도 전에 차가 빠르게 출발했다. 난데없는 급출발에 서진은 놀라 좌석을 붙잡았다. 신호도 무시한 채 빠르게 속도를 내는 기욱의 차에 서진은 불안감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아 안전벨트를 맸다. 시간이 지나자 빠른 차에도 익숙해졌지만, 불안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주변을 가득 메웠던 건물들과 차들은 거의 사라진 뒤였다.
기욱이 멈춘 곳은 서울에서 조금 벗어난 국도의 한가운데였다. 차 앞으로 보이는 붉은색 조명의 건물에 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모텔이었다. 기욱은 휴대폰을 챙긴 뒤 뒷좌석 밑을 뒤졌다. 서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따금 차들이 한두 대 지나가는 것이 전부였으며, 모텔과 건너편 작은 고깃집을 제외하면 그 주변은 허허벌판이라 해도 이상할 게 하나 없었다.
좌석을 뒤지던 기욱이 서진에게 모자와 옷가지를 던져 주었다. 기욱이 입던 후드였다. 기욱이 차 문을 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서진이 기욱을 올려봤다.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차 밖으로 끌어냈다. 서진은 몸이 휘청거리며 기욱의 품에 안기는 신세를 자세를 바로잡아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서진이 기욱에게서 받은 모자와 조금 큰 남색 집업을 만지작거렸다.
“입어.”
모텔 간판을 본 서진이 어쩔 수 없이 모자를 쓴 뒤 집업을 입었다. 기욱은 모텔 정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색 타일 바닥에, 핑크색이 맴도는 묘한 조명들이 서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모텔 같은 건 와 본 적도, 와 볼 일도 없는 사람이었다. 기욱이 계산을 하려 카운터 앞으로 다가갔다.
작은 창문 틈 사이로 나이가 있는 아저씨 하나가 앉아 있었다. 혹시 걸리면 어쩌지? 불안한 서진이 저도 모르는 사이 기욱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저씨가 기욱과 서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남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걱정은 기욱이 지갑에서 꺼낸 뭉칫돈에 입을 싹 닫을 수밖에 없었다. 열쇠를 받은 기욱이 재빨리 카운터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1층에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바로 열렸고, 기욱은 재빨리 서진을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서진은 기욱에게 떠밀리듯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6층, 모텔의 가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간 기욱은 서진의 팔을 잡고 열쇠에 표시된 방문을 열었다.
“자, 잠깐…!”
기욱은 서진을 모텔 안으로 집어넣었다. 철컥, 모텔의 철문을 잠그는 소리가 소름이 끼쳤다. 불길한 느낌은 대게 맞아떨어지는 법이었다.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침대 위로 내던졌다. 서진이 반사적으로 일어났으나 기욱이 서진의 위에 올라타는 속도가 좀 더 빨랐다.
머리를 부딪친 서진이 침대 시트에 목을 기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몸을 뒤로 물렸으나 이내 침대 헤드에 갈 곳을 잃고 말았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턱을 강제로 돌렸다. 매혹적인 눈빛,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시선이 서진을 향했다.
“누나한테…….”
“말했잖아. 나 선수 치는 거 안 좋아한다고.”
“그게 무슨…….”
기욱이 서진의 턱을 내려놓았다. 침대에 몸을 반쯤 뉘인 서진이 올라탄 기욱을 올려봤다. 잘 다려진 셔츠의 소매를 접는 기욱은 진심이라고 봐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었다. 기욱의 기다란 손이 서진의 뺨을 만졌다. 서진이 손을 밀어냈으나 별다른 소용은 없었다.
강서진, 너를 만나기 전까지 무슨 꼴을 당해야만 했는가. 너를 가지려고 얼마나 노력을 해야만 했는가. 그저 한두 번 만나고 잊힐 다른 여자들과 서진은 달랐다. 비교될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기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를 원했다. 중학교 때는 제법 앳된 티가 남아 있었으나, 인턴 때문에 꽤 오래 얼굴을 못 본 탓인지 그새 키가 좀 큰 것 같기도 했다.
남자다워졌다고 해야 하나. 병원에 돌아온 내내 기욱은 방에서 본 그 장면을 쉽사리 잊지 못했다. 시헌이 술을 마신 건 관계가 없다. 시헌의 행동도, 서진을 향한 감정도 기욱이 알바는 아니었다. 단 한 가지 기욱을 화나게 한 것이 있다면 그건 서진의 행동이었다. 기욱이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서진아. 강서진.”
“…….”
“시헌이랑 뭐 했어? 응?”
기욱이 서진의 위로 올라타 팔을 눌렀다. 기욱의 힘은, 같은 남자지만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기욱의 앞에 서면 마치 여자가 된 것 같은 수치심이 들었다. 서진이 강하게 눌린 팔을 움직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러니까 사고였다. 술을 많이 마신 시헌, 그리고 조금이지만 술을 마신 서진과 둘 사이에 있었던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만약 기욱이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서진은 시헌과 끝까지 키스하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정말 그랬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아,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서진은 고장이 난 태엽 기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서윤의 일 때문에 따지려고 했다. 강압적인 기욱의 태도에 서진은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욱의 입술이 뺨과 목덜미에 닿을 무렵 기욱의 주머니 안쪽에서 진동이 울렸다. 서진의 몸과 맞닿은 진동이 유난히 거슬렸다.
한동안 안 오더니. 서윤이라는 걸 확인한 기욱이 인상을 찌푸리며 전화를 끊으려 했다. 서진이 몸을 반쯤 일으켜 그런 기욱의 팔을 잡아당겼다. 서진의 손에 기욱의 셔츠가 살짝 늘어났다.
“바, 받아 줘요.”
“내가 왜?”
기욱이 서진 쪽으로 휴대폰을 돌렸다. 서윤의 이름이, 번호가 적힌 휴대폰이 시끄럽게 진동하고 있었다. 기욱의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종료 버튼을 누를 것 같았다. 휴대폰을 잡고 오열할 서윤의 모습을 생각하면 서진은 금방이라도 어쩔 줄 몰라 했다.
기욱의 키스, 연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과도한 스킨십과 접촉. 둘 중 한 명이 여자였다면 상관이 없었으나 기욱도, 서진도 누가 봐도 틀림없는 남자였다. 기욱이 왜 서윤이 아닌 동생인 저를 택했는지 서진은 알 수 없었다.
기욱의 그 의도만큼은 분명했다. 기욱은 서진을 성적인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휴대폰의 진동이 금방이라도 끊길 것같이 애처롭게 윙윙대고 있었다.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뭐, 뭐든…….”
“…….”
“뭐든지 할 테니까 제발…….”
서진의 고개가 아래로 숙였다. 휴대폰이 시야에서 멀어졌다. 머리 위로 기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병원은 아냐. 이따 들어갈 거야. 나중에 얘기하자, 전화 다시 줄게. 담담하게 대화를 주고받은 기욱이 휴대폰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렸다. 그리고는 만족하냐는 듯 서진을 내려다봤다.
서진은 차마 기욱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기욱이 서진의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커다란 손이 유두 끝을 만지작거리는 게 느껴졌다. 기분이 나쁜 느낌에 서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서진의 셔츠 안을 만지던 기욱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벨트가 없는 서진의 바지는 생각보다 쉽게 허벅지 아래로 내려갔다.
“자, 잠깐 싫…!”
“서진아.”
“…….”
“뭐든지 하겠다고 한 건 너야.”
“그건…….”
서진은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불과 몇 초 전까지 뭐든지 하겠다며 매달렸다. 여기서 자신이 잘못 보인다면 기욱이 서윤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 숨을 들이쉰 기욱이 몸을 숙여 서진의 쇄골과 목덜미를 핥았다. 혀끝의 움직임에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기욱이 서진의 턱을 천천히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내가.”
“…….”
“잘하라고 했잖아.”
반항, 기욱은 멋대로 집을 빠져나간 원인이 시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시헌이 아무리 서진을 좋아하든, 그 이상의 감정이 있든 기욱과는 상관이 없었다. 서진은 결코 시헌과 이어질 수 없었다. 기욱은 서진의 드로어즈 위를 만지작거렸다. 커다란 손이 서진의 작은 페니스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기욱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드로어즈의 천에 페니스가 닿아 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딱 잘라 싫다고, 그렇다고 좋다고도 할 수 없는 낯선 감각에 눈물을 머금은 서진이 입을 열었다.
“하윽, 윽, 당신은 개자식이야. …읏.”
“나쁜 놈에서 개자식이 된 건가?”
“하, 말… 읏. 장난 하지…….”
서진은 팔로 눈을 가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드로어즈 위의 페니스를 주물럭거리는 기욱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서진의 몸 또한 위아래로 흔들렸다. 기욱이 눈을 가리려는 서진의 팔을 옆으로 치웠다. 모텔 방의 칙칙한 조명이 서진의 얼굴 아래로 쏟아졌다. 기욱이 서진의 드로어즈를 완전히 내렸다.
놀란 서진이 다리를 오므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허벅지를 눌렀다. 치부가 그대로 드러난 모습에 서진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서진의 손이 다리 사이를 가렸다. 양손이 허벅지를 누르고 있어서 도리가 없었다. 결국, 서진의 몸을 옆으로 살짝 돌린 기욱이 한 손으로 서진의 손을 밀어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페니스가 움찔대는 모습이 제법 볼만했다. 홍조가 진 얼굴로 당황하는 서진도 귀여웠다. 단순 외모로 친다면 누나인 서윤 쪽이 훨씬 미인이었고, 서진의 외모는 평범한 남학생에 가까웠으나 서윤과 달리 서진은 남자를 유혹하는 매력이 있었다.
물론,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끝까지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대로 그만둘 생각 또한 없었다.
“읍, 으읍…!!”
허리를 안은 기욱은 거침없이 서진의 입안을 헤집었다.
* * *
기욱의 차가 서진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기욱이 차에서 내렸다. 눈치를 보던 서진이 따라 내렸다. 집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대문이 열리며 서윤이 뛰어나왔다. 발이 맞지 않는 슬리퍼 차림이었다. 이미 시간은 10시가 넘은 후였다.
“오빠! 서진아!”
서윤은 기욱을 알아보고, 뒤늦게야 서진을 알아봤다. 서윤이 기욱의 품에 안겼다. 서진을 흘끗 보던 기욱이 마지못해 서윤을 안아 줬다. 기욱의 손길에 서윤이 눈물을 흘렸다.
“오빠 제발. 잘못했어. 흐윽… 제발. 흐으윽…….”
“알았어. 울지 말고, 들어가자.”
후, 얕은 한숨을 쉰 기욱이 우는 서윤을 달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