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눈이 부셨다. 창밖으로 빛이 새어 나왔다. 이마에 손을 올리고 눈을 반쯤 가린 채 커튼을 살짝 열었다. 괜한 꿈을 꾼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확히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꿈이란 건 대개 그런 법이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몇 시지? 불과 하루, 아니 10시간도 채 되지 않은 일이건만 오늘이 언젠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10시 40분이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반나절을 꼬박 잠든 셈이었다. 휴대폰을 열어 날짜를 확인했다. 주말은 아니었다. 아, 강의 망해…. 뒤늦게 공휴일이라는 걸 알고 다행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기욱아 왜 전화 안 받아 ㅠㅠ」
「자?」
부재중 전화도 몇 통인가 와 있었다. 연상인 누나―여자 친구에게서였다. 엉망인 머리를 긁적이며 거실로 내려왔다. 물을 마시며 답장을 보냈다.
「나 지금 일어났어.」
목이 찰 만큼 찬물을 마셨다. 탁, 커다란 플라스틱 컵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답장이 왔다. 그녀의 답장은 참으로 빨랐다. 귀찮아 죽겠네. 이제 막 잠에 깬 기욱은 소파에 몸을 반쯤 걸터앉아 다리를 꼰 후 휴대폰을 만졌다. 유리 테이블 위에 담배가 있었다. 누구 거지.
「그래? 오늘 볼래? 누나가 마중 갈게♥」
하아, 만나자는 문자를 본 기욱은 답장을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이내 굳이 지금 답장을 보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덮었다. 테이블 위 담배를 연신 힐끗거렸다. 하연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초등학생인 시헌과 어린 운오의 것일 리는 더더욱 없었다.
엄만 담배를 안 피운단 말야. 아빠의…. 에라 모르겠다. 편의점까지 내려가기도 귀찮았던 기욱은 결국 담배를 입에 물었다. 딱 한 대만 피우고 씻으러 가야겠다. 불을 붙이려 베란다 쪽으로 몸을 일으키던 기욱의 팔에 뭔가가 걸려 테이블 밑으로 떨어졌다. 뭐지? 기욱은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숙여 손을 뻗었다. 처음 보는 기종의 휴대폰이었다.
누가 휴대폰을 새로 바꿨나?
휴대폰에 달린 고리를 본 기욱은 엄마의 휴대폰이 틀림없다며 웃었다. 엄마는 유독 화려한 휴대폰 고리를 좋아했다. 엄마가 휴대폰을 두고 갔나 보다. 별생각 없이 휴대폰을 열었다. 잠금은 되어 있지 않았다. 문자가 몇 통인가 와 있었다. 병원에서 온 거라는 생각에 문자 메시지 함을 열었다.
“…….”
툭―, 불을 붙이지 않은 기욱의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욱은 입안에서 담배가 떨어졌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갤러리를 들어갔다. 사진 속 여자, 그리고 같이 있는 낯선―적어도 아빠보다는 젊어 보였다―남자에 할 말을 잃었다.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깜짝 놀란 기욱은 재빨리 휴대폰을 덮었다. 뒤늦게 담배를 떨어트렸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몸을 숙임과 동시에 거실로 들어오는 아빠와 눈이 맞았다.
젠장. 기욱은 엄마의 불륜 사진이 담긴 휴대폰을 슬쩍 숨겼다. 하필이면 트레이닝복에 주머니가 없었다.
빌어먹을. 정장 차림의 아빠, 기욱은 벽에 걸린 시계를 몇 번이나 힐끗거렸다. 이 시간에 아빠가 집에 있다는 것은 제법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언제는 시간 맞춰서 나타난 적이 있었냐마는. 원장이라고는 하나 결국은 아빠도 의사였다.
회사원이 아닌 이상 이래저래 시간이 불규칙한 건 어쩔 수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다녀오셨어요. 기욱은 아빠를 향해 인사를 했다. 팔에 차인 시계와 막 일어난 기욱의 차림을 본 아빠는 테이블에 있는 담배를 집어 들었다. 담배가 하나 줄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베란다 문을 열었다. 날이 슬슬 더워졌다. 아빠가 베란다로 나간 틈에 기욱은 휴대폰을 숨길 곳을 찾았다.
아빠가 기욱을 부르는 게 좀 더 빨랐다. 어중간하게 숨겼다가는 일이 더 복잡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아, 진짜. 기욱은 결국 휴대폰을 든 채 베란다로 나왔다. 얕은 담배 연기가 났다. 베란다에 놓인 테이블 의자 대신 난간에 몸을 기댄 아빠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기욱이 조심스럽게 아빠의 옆에 기댔다.
아빠의 손에는 담배 케이스가 들려 있었으나 애써 기욱에게 담배를 건네거나 하지는 않았다. 기욱은 손에 들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가 없었다. 담배를 문 채 머뭇대고 있는 기욱에게 아빠가 라이터를 내밀었다. 기욱은 아빠의 지포 라이터를 받아 불을 붙였다.
아빠는, 모르겠다. 가끔 어딘가 불편했다. 어렸을 때부터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하연과 자주 지내 와서 그런 걸까? 그렇게 따지면 아빠와 비슷하게―어쩌면 더 많이―집에 들어오지 않는 엄마도 불편해야 맞았다.
가족끼리 있으면 또 묘하게 괜찮단 말야. 딱히 아빠와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담배를 끈 아빠가 먼저 물어 왔다.
“밥은 먹었냐?”
“아뇨. 아직.”
“나가자. 옷 입고 나와.”
“네.”
어딜 가는지, 뭘 하러 가는지 아빠는 말 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나오라고 하는 모습에 기욱은 아빠와 닮긴 닮았다고 생각하고 속으로 가볍게 웃었다. 때마침 벨 소리가 울렸다. 여자 친구였다. 엄마의 휴대폰을 숨기고 있던 기욱이 깜짝 놀랐다. 휴대폰을 연 뒤 여친의 전화를 거부했다. 전화도 받지 않은 채 휴대폰을 닫았다.
“받아.”
“안 받아도 되는 전화예요.”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문자가 왔다. 아빠가 마음대로 하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늘 소개하는 여자가 바뀐다는 사실을 아빠는 알고 있었다. 아빠가 가볍게 웃었다. 누굴 닮았는지. 아빠의 시선이 기욱의 다른 손에 있는 휴대폰에 닿았다. 화려한 휴대폰 고리, 핑크색 휴대폰, 기욱의 취향은 절대 아니었다. 아빠의 손가락이 휴대폰에 닿았다.
“그건 누구 거야?”
아, 망했다. 기욱이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엄마 거요. 두고 가신 것 같아요.”
“그래? 어차피 저녁에 병원에서 네 엄마 만나야 해.”
아빠가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기욱은 얼어붙은 채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불안해하는 기욱에 아빠가 다시 손을 흔들었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녜요.”
기욱은 마지못해 아빠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 * *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6시가 조금 지났다. 이런저런 생각에 일부러 일찍 들어온 탓도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거실에 있던 운오가 기욱을 반겼다.
“기욱이 형! 일찍 왔네?”
9살,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몇 년 안 된 운오를 보며 기욱은 한숨을 쉬었다. 형, 형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이 나한테……. 지친다며 겉옷을 벗는 기욱을 보며 운오가 이런저런 얘기를 했으나 들리지 않았다. 어, 그래. 기욱은 적당히 대답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하연이 와 보라며 손을 까닥였다. 제가 오지 좀. 금방이라도 때릴 것 같은 하연의 모습에 기욱은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밍기적 다가갔다. 기욱이 소파에 앉자 무게에 소파가 아래로 꺼졌다.
남자와 문자를 하던 하연이 휴대폰을 닫은 뒤 고개를 돌렸다. 운오가 거실에서 컵을 꺼내려 낑낑대고 있었다. 컵이 올라간 선반이 높은 탓이었다. 금방이라도 컵을 깨 먹을 것 같은 불안함이 이어졌다. 기욱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하연이 일어났다.
“박기욱, 운오한테 잘 좀 해 줘.”
“내가 뭘.”
삐딱한 기욱의 모습에 하연은 한숨을 쉬었다. 하연이 운오에게 다가갔다. 기욱을 슬쩍 본 운오는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우겼으나 하연은 말을 들으라며 멋대로 유리컵을 꺼내 운오에게 내밀었다. 하연이 준 컵을 양손에 든 운오는 기욱과 눈이 마주치더니 고개를 돌리며 정수기에 물을 따랐다.
운오가 물을 마셨다. 과하게 마신 모양인지 목 아래로 물이 흘러넘쳤다. 짜증이 나거나 더울 때면 기욱이 종종 하는 짓이었다. 배워도 나쁜 것만 보고 배운다니까. 혼자 중얼거린 하연이 물티슈를 꺼내 운오의 입가와 목에 흐른 물을 닦아 주었다. 기욱이 몸을 일으켜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누나, 밥이나 먹으러 가자.”
“형 나도.”
기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팔짱을 끼며 몸을 숙인 하연과 운오를 내려다봤다. 그런 기욱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사뭇 진지해 보였다. 뭔가가 있음을 눈치챈 하연이 물티슈를 놓고 일어났다.
176cm, 여자의 키치고는 큰 하연은 기욱과 시선의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물론, 키는 기욱이 10cm 정도 더 컸지만. 어지간한 여자들은 하연의 앞에서 어림없다는 사실을 기욱은 잘 알았다.
“할 말이 있어.”
“…….”
“중요해.”
기욱을 본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하연의 차림은 아직 사복인 채였다. 하연은 가방을 가져오겠다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운오가 자기도 데려가 달라며 하연에게 매달렸다. 하연이 양 어깨를 잡으며 운오를 달랬다.
“누나 형이랑 나갔다 올 테니까, 우리 운오 집 잘 지킬 수 있지?”
“기욱이 형이랑……. 나도 갈래. 안 돼?”
이쯤 되면 하연의 입장도 곤란해졌다. 밥을 먹으러 나가자고 하면 운오가 따라오려 한다는 사실을 기욱이 모를 리 없었다. 둘이 있을 때 말하면 모를까 하필이면 운오가 있을 때 그 말을 한 기욱이 얄미워졌다. 그냥 데려가자는 하연의 눈치에 기욱은 곧 죽어도 안 된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 운오를 달래는 하연을 보며 기욱은 팔짱을 낀 채 벽에 몸을 기댔다. 거실이 시끄러움을 눈치챈 시헌이 방문을 반쯤 열고 나왔다. 하연과 운오를 둔 채 시헌이 기욱의 앞으로 다가왔다.
“밥 먹으러 나가?”
“어.”
“맛있는 거, 사 와.”
“그렇게 말하면 몰라.”
“그냥. 아무거나.”
“지난번 초콜릿 괜찮더라.”
“그럼 그거.”
“그래, 알았어. 들어가.”
기욱이 시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기욱의 손길에 고개를 끄덕인 시헌이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운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할 거야? 팔에 차인 시계를 본 기욱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허벅지 밑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운오가 기욱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기욱이 형, 나도.”
“…….”
“나도 맛있는 거.”
“생각해 볼게.”
“진짜? 진짜로?”
“진짜라고.”
생각해 본다는 것이 꼭 사 온다고 하는 건 아니었다. 어린애를 상대로 그런 말장난의 이유를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할 의무는 없었다. 하연은 기가 막혔으나 그로 인해 운오는 더 이상 두 사람을 쫓아가겠다고 조르지 않았다.
* * *
기욱은 일부러 차로 30분 거리의 호텔을 찾았다. 아, 이런. 입구에 리모델링 중이라는 표시에 기욱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결국, 호텔 내 다른 매장으로 갔다. 식사가 어느 정도 진행될 무렵 하연은 와인을 시켜 마셨다.
“넌 꼭 운오한테만 그러더라.”
“내가 뭘.”
“또 그런 말투. 운오한테 잘 좀 해 줘. 도대체 왜 그래?”
하연은 도무지 기욱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서로 나이 차이가 나긴 했으나 운오와 시헌은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두 사람이 키웠다고 해도 이상할 게 하나 없었다. 그나마 나이 차이가 적은 기욱은 하연에게 있어서 동생이자 아빠 다음으로 의지할 수 있는 남자나 다름없었다.
언젠가는 받아야 하는 질문이었다. 기욱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고민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테이블에 팔을 살짝 올린 기욱은 하연 쪽으로 몸을 살짝 숙였다.
“뭔가 있잖아.”
“…….”
“귀찮다고 해야 하나. 말이 너무 많아.”
“동생이잖아.”
“알아, 알아. 잘해 주려 하고 있다고.”
기욱이 손을 저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운오한테 왜 그러냐고? 기욱 본인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굳이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운오한테라니. 기욱은 시헌에게도 특별히 잘해 준 기억이 없었다. 아무리 동생이라지만 하연이 너무 극성이었다.
운오의 얘긴 오늘의 주제가 아니었다. 기욱은 화제를 돌리며 아빠와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하연의 입가에서 물이 살짝 흘러내렸다. 냅킨으로 물을 닦은 하연은 기침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표정은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미친년아, 그걸 왜 줘!”
“아, 몰라. 망했어.”
기욱은 머리를 싸맸다. 그 상황은 그러니까 불가항력이었다. 손을 내미는 아빠를 두고 줄 수 없다고 하는 것도 참 웃겼다. 백번 양보해서 저도 양다리는 걸쳐 본 적이 있었다. 딱 한 번, 두 번인가. 정확히 몇 번인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사귄다는 건 어떻게 보면 말뿐인 구두 약속이고, 헤어지는 것도 자유였으며, 헤어진다 해도 양쪽 다 손해를 보는 건 없었다. 그러나 결혼은 별개의 문제였다. 심지어 자식이 넷이나 있으면 얘기가 틀렸다. 그야 엄마가 나이에 맞지 않게 젊은 건 사실이지만. 처음 며칠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닌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허무해졌다. 집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도, 아빠도 평소와 같았다. 그 평소와 같음이 기욱에게는 위화감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어?”
“너 그거 언제 얘긴데?”
“몰라. 한 이 주…? 한 달 좀 넘은 것 같은데.”
사실 그즈음 시험 기간이라 정신이 없었던 탓도 있었다. 샐러드를 집어 먹는 기욱을 둔 하연이 휴대폰을 만졌다. 하연이 휴대폰을 기욱 쪽으로 내밀었다.
“이 사람이야?”
하연이 사진을 보여 줬다. 잠깐 보던 기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쪽 입술 밑에 점을 보니 이 사람이 틀림없었다. 잠깐.
“야, 박하연. 네가 어떻게 알아?”
하연이 다시 마신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매장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이 조금 있었으나 기욱과 하연 주변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알바생이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을 지나쳐 갔다. 기욱의 병신 같은 행동은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언젠가 말은 해야 할 일이었다. 뭔데. 기욱이 하연을 재촉했다.
“운오 말야.”
“…….”
“친동생이 아냐.”
“입양이라도 했어?”
“박기욱. 말장난치지 마.”
“하, 알아. 알았다고. 그러니까 그……. 지, 지금…….”
기욱이 당황하며 하연을 손가락질했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으나 가게 안은 금연이었다. 연신 물을 벌컥 마시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몸을 반쯤 틀며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툭툭 튕겼다. 만약 입양했다면 집안 어른들과 친척들이 그 사실을 모를 이유가 없었다. 애당초 자식이 셋이나 있는 상황에서 입양한다는 것도 웃기는 얘기였다. 정작 그런 말을 하는 하연은 담담했다. 그 반응은 기욱보다 더 예전부터 진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허탈함을 넘어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하하, 누나는? 아무렇지 않아?”
“아무러면 어떻게 할 건데?”
“그건…….”
기욱은 말을 잇지 못했다. 기욱보다 더 예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하연, 적어도 더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음은 틀림없었다. 그런 하연이 모르는 척 입을 다물고 있다면 필시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의사 집안. 기욱과 하연의 집안뿐 아니라 친척들 사이에서도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는 했다. 남들은 부러워했지만, 기욱은 집안에 대해 질리다 못해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하연이 다 먹은 식기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잘 좀 해 줘. 불쌍하잖아.”
그날 저녁, 기욱은 근처 백화점을 들러 초콜릿을 산 뒤 집에 들어갔다.
* * *
샤워한 뒤 거실로 나왔다. 기욱은 물기가 떨어진 수건을 목에 건 채 물을 마셨다. 주말 아침, 오전 5시. 엄마는 당직이었고,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제저녁 엄마와 통화를 할 때 병원에서 잔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문소리가 들렸다. 하연이었다. 하연은 반나체 상태로 물을 마시고 있는 기욱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옷 좀 입어 상년아. 노출증이야? 교수님 추천해 줄까?”
“아무도 없는데 아침부터 왜 그러는데.”
“아무도? 난 여자도 아니냐?”
“누나가 여자야?”
잔소리하는 하연의 말에 기욱은 듣기 싫다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늦었다느니 어쩌니 하고 소리를 지를 여자가 이른 아침부터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욱은 하연의 차림을 살피며 입을 벌리지 못했다. 풀 화장에, 얼마 전에 샀다는 보석 귀걸이, 답지 않은 화려한 옷에 할 말을 잃었다. 하연이 기욱의 등을 퍽, 하고 때렸다. 사레가 들린 기욱이 하연을 노려봤다.
“뭘? 꼬나보면 어쩔 건데.”
하연은 등을 돌린 뒤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굽이 살짝 들어간 구두였다. 키 때문에 높은 힐을 싫어하는 평소 하연을 생각하면 기가 찰 일이었다. 잠이 덜 깼나. 샤워하고 왔으니 그럴 일은 없었다. 기욱은 참 별일도 다 있구나 싶었다. 얼마 뒤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
백화점 한복판, 매장에 선 기욱은 눈앞에 선 여자―하연을 바라봤다. 아침과 달라진 머리 모양을 보건대, 어딘가의 미용실에서 하고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연 또한 어이가 없는지 얼어붙은 채 입을 떼지 않고 있었다. 기욱의 옆에 붙어 팔짱을 낀 여자가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기욱을 올려다봤다.
“누구야?”
누구야? 낯선 여자에 약간 불쾌한 시선도 들어 있었다. 기욱은 여자의 허리를 살짝 안아 몸 가까이에 붙였다. 고개를 돌려 하연이 나온 매장 간판을 확인했다.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해외 유명 브랜드의 명품점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대학생 남자 친구를 둔 하연이 함부로 드나들 만한 가게가 아니라는 것 또한 명백했다.
매장에서 결제를 마친 낯선 남자가 나왔다. 남자가 들고 있는 매장의 쇼핑백, 크기로 보나 매장의 분위기로 보나 남자의 물건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하연의 남자 친구는 아니었다. 아빠뻘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나이가 좀 있어 보였다. 결국, 기욱의 품에 반쯤 안긴 여자 친구가 물어왔다.
“기욱아 왜 그래?”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기욱이 모르는 척 등을 돌렸다. 몇 걸음 걷고 나니 기욱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며 근처 화장실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자에게 잠시만, 하고 짧게 말한 뒤 휴대폰을 든 기욱은 왔던 길을 뛰어갔다.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점심을 먹었다. 옷이며 화장품들이 가득한 여자 친구의 쇼핑백과 달리 기욱이 들고 있는 건 하연을 만나기 전에 샀던 옷이 담긴 쇼핑백 하나가 전부였다.
분명 쇼핑을 오기 전까지만 해도 옷을 좀 사야 한다고 했었다. 기욱이 돈을 쓰지 않은 건 하연을 만나고 난 뒤부터였다. 허나 여자는 저보다 예쁜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 함부로 물어볼 수 없었다. 기욱은 휴대폰을 열고 문자를 보냈다. 기욱의 문자가 생각보다 길어지자 여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기욱아, 옷 안 사도 괜찮아?”
여자의 시선이 한 개뿐인 쇼핑백에 닿았다. 휴대폰을 닫은 기욱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 샀어요.”
여자는 기욱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식사하고, 더 있다 가라는 여자의 말에 일이 생겨 일찍 들어간다고 말을 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7시가 넘어갈 즈음 거실 너머가 시끄러웠다.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멋대로 방문이 열렸다. 기욱이 의자를 뒤로 돌렸다.
“이 씨발년아.”
“아, 나 여자 아니라고.”
동시에 기욱의 얼굴로 온갖 쇼핑백이며 물건들이 날아왔다. 기욱이 쇼핑백 안에 담긴 옷들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올해 여름옷은 다 산 거나 다름없었다. 하연이 신경질적으로 기욱의 침대에 앉았다. 새로 산 옷들이며 귀걸이가 화려하게 달려 있었다. 책을 덮은 기욱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나. 지난번 K 호텔, 한식당 오픈했다던데.”
“리모델링한다 했었던 데?”
“어. 거기. 나 아직 저녁 안 먹었거든.”
“야!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떻게 해?”
기욱은 대수롭지 않은 척 웃었다.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아슬아슬할 것 같았다. 시계를 보던 기욱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휴대폰 사진을 보자 하연이 이마를 내짚었다. 하연이 손을 뻗자 기욱은 재빨리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남친 아니라고.”
“나도 알아.”
“지워.”
“싫은데.”
“뭐 먹을 건데?”
“한정식 S 코스, 새로 나온 거더라.”
하연이 침대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기욱 또한 적당히 겉옷을 챙겨 거실로 나왔다. 기욱은 집에 오기 전 술을 좀 마셨다는 하연을 대신해 운전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고, 후식으로 나온 과일들을 먹을 즈음 기욱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얼마 썼어?”
“뭘.”
아직 식사를 덜 마친 하연이 나물을 집어 먹으며 기욱을 올려다봤다. 기욱은 하연의 새로 산 귀걸이와 옷들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시선에 하연이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몰라. 백, 이백 정도.”
“지랄.”
“하아, 사백.”
“와, 부인 없대?”
하연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기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욱이 정말 몰라서 저런 질문을 했을 리가 없었다. 남은 밥을 마저 긁어 먹은 하연은 근처에 있는 물을 벌컥 마셨다.
“어떻게 알았냐”
“누나 취향이 어디 가?”
“지랄한다. 엄마한테 여친 소개한 지 일주일 만에 다른 여자랑 데이트하는 년이, 그게 할 소리냐?”
“놈이라고. 그리고 난 아직 불륜은 아니거든.”
“씨발년.”
하연이 다시 테이블에 얼굴을 반쯤 묻었다. 기욱은 지레짐작으로 물어본 것이었다. 하연은 제 무덤을 판 거나 다름없었다. 하필이면 걸려도 저런 녀석한테 걸리다니 운도 지지리 없었다. 직원을 불러 계산을 해 달라며 카드를 내밀었다.
검은색 신용카드, 하연의 것은 아니었으나 기욱은 입을 다물었다. 카드만 챙기고 빌지는 근처 테이블에 대충 올려놓았다. 생각보다 식사가 빨리 끝났다. 테이블에 팔을 올린 기욱이 몸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하연이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기욱이 저런 행동을 할 때면 뭔가가 궁금한 게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뭐 하는 사람인데 누나한테 돈을 그렇게 써? 재벌이야?”
그냥 좀 넘어가 줬으면 좋을 법도 할 텐데. 기욱은 이런 데서 호기심이 많았다. 하연과 헤어진 뒤 기욱은 다시 돌아가 사진을 찍었다. 사진 약점이 잡힌 하연은 기욱의 심기를 거슬러 봤자 좋을 게 하나 없었다. 하연은 방의 눈치를 살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건너편 방 때문인지 복도가 잠시 시끄러웠다. 복도가 조용해지자 하연이 대답했다.
“H대 소아정형외과 부장이래.”
기욱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침에 본 남자가 그렇다고? 기욱이 알고 있는 사실과 앞뒤가 맞지 않았다. 기욱이 마시던 물을 내려놓았다.
“아, 무슨 소리야. H대는 작은 아빠잖아.”
“본원 말고 샹년아.”
“서원 H대? 남부 분원? 돈이 남아돌아?”
“나도 잘 몰라. 부인이 무슨 금고 회사 딸래미라 그랬던가?”
아, 기욱이 그제야 이해가 간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을 불러 후식을 좀 더 달라고 했다. 직원이 살짝 곤란해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직원을 슬쩍 본 하연은 아무렇지 않게 매니저를 불러 달라고 했다. 밖으로 나간 직원이 매니저를 불러왔다.
하연을 본 매니저는 오랜만이라는 말을 남기고 금방 더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전 매장 VIP였다고, 복도 너머로 직원에게 떠드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왔을 때보다 더 푸짐해진 과일에 기욱은 가볍게 혀를 찼다. 죄송해요. 괜히 사과하는 기욱과 눈이 마주친 여자 직원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작업 걸지 말라고 씨발년아.”
“하, 내가 언제.”
의외로 기욱의 것도 있었다. 하연의 것을 빼앗아 먹으려던 기욱은 앞에 놓인 오렌지를 먹었다. 과일을 다 먹어 갈 즈음 기욱이 입을 열었다.
“야, 박하연. 너 그러다가 훅 간다.”
“남이사. 안 걸리면 그만 아냐? 그리고 걸려도 내가 손해냐? 지가 손해지. 됐고, 빨리 처먹어. 나 오늘 술 땡기니까.”
“씨발, 뭐라는 거야.”
“서원로에 괜찮은 바 하나 생겼더라.”
아, 진짜. 기욱이 귀찮다며 뒷목을 긁적였다. 하연이 일어나자며 그런 기욱을 재촉했다. 정말이지 우리 집 가족들은 왜 하나같이 이 모양인지 싶었다. 결국, 기욱은 필름이 끊긴 하연을 업고 집에 들어와야만 했다.
* * *
늦은 저녁 번화가의 골목으로 들어섰다. 기욱은 시간이 있냐는 여자의 말에 가볍게 선약이 있다고 대답한 뒤 휴대폰을 확인했다. 친구가 말한 가게가 이 근처였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자 화려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군.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젊은 대학생 알바생이 살갑게 인사를 했다. 가게 안은 이미 술을 진탕 마신 사람들로 자리가 꽉 차 있었다. 매장을 메운 사람들 틈을 두리번거리자 멀리서 기욱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일행이 있다는 걸 눈치챈 알바생은 다른 테이블의 호출로 넘어갔다.
기욱은 손을 흔드는 무리 쪽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을 여럿 붙여 만든 자리, 들었던 것보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이미 포화 상태인 터라 자리가 거의 없었다. 안쪽에 있던 여성들끼리 의자를 조금 옆으로 밀어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옆에 앉은 여성이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눈웃음으로 인사를 했다. 약간 파인 옷차림에 깔끔한 외모, 앉아 있는 여자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괜찮아 보였다.
“저기요. 여기 수저랑 접시 좀 주세요.”
여자가 지나가는 알바생을 부르더니 기욱을 대신해 술잔과 앞접시 등을 부탁했다. 여자는 알바생이 가져온 앞접시를 중간에 가로챈 뒤 기욱의 앞에 내밀었다. 어쭈 저거 봐라? 약간 술에 취한 몇몇 사람들이 여자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앞접시를 세팅하던 중 여자의 팔이 근처에 놓인 소주잔을 쳤다. 기욱이 재빨리 여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다행히 여자의 옷에 물이 묻는 신세는 면했다.
“고마워요.”
“뭘요.”
기욱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의자를 살짝 여자 쪽으로 붙였다. 여자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정면에 앉은 남자, 기욱의 고등학교 친구였다. 기욱이 오기 전 어느 정도 마신 모양인지 술에 약간 취해 있었다.
“새끼, 오자마자 또 저래요. 네가 쟤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쟤가 고딩 때 장난 아니었거든? 박기욱 하면! 딱 하고 여자. 이거거든. 야, 저 새끼 중학교 때도 그랬다며? 너네 같은 중학교 아니였냐?”
친구가 옆에 앉은 남자를 건드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데다 워낙 사람이 많아 정신이 없어 늦게 발견한 탓도 있었다. 어? 휴대폰을 하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장병욱,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연락한 적도 없었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원수였던 그를 기욱은 쉽게 잊을 수 없었다.
기욱은 아직도 병욱이 동생 자랑을 하던 그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재수 없는 새끼. 병욱은 기욱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던 모양인지 뒷목을 긁적이며 그렇지. 하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은 그런 병욱을 가볍게 비웃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한참 학교에서 잘나간다고 하는 남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던 기욱을 불편해하며 피해 다니던 병욱이였다. 그런 병욱이 지금은 같이 앉아 술을 마시는 신세라니 사람 일은 참으로 알 수가 없었다. 기욱은 옆에 앉아 따라 주는 여자의 술을 살짝 마시며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
“아, 병욱이 얘 우리 과 동기. 너 안다고 하길래 불렀지. 뭐야, 둘이 안 친했어?”
“그냥 그래.”
“하하, 뭐 어때. 이러면서 또 친해지는 거지. 안 그래?”
그는 외모와 달리 사교성이 강하고 유쾌했다. 사람 따돌리는 걸 안 좋아하고, 누구에게다 똑같이 구는 모습에 평범한 여학생들에게도 호감을 샀으며 고백을 받기도 했다. 그가 둘 사이에 술을 권유했다. 병욱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술을 마셨다. 그의 소개라 해도 정작 이 이후 두 사람은 한마디의 말도 섞지 않았다. 같은 과 동기. 옆에 앉은 여자와 술을 마시는 내내 기욱은 병욱을 힐끗 바라봤다.
서로 어울려 노는 자리에서 병욱은 유독 혼자 휴대폰만 만지고 있었다. 불편해하는 건가? 뭘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같은 과 동기. 기욱이 알기로 친구는 H대 경영에 들어갔다고 했다. 병욱이? 하, 그래도 아주 실패한 건 아니네. 술 게임을 할 때도 병욱은 몇 번인가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나갔다. 통화한 것 같았다.
여러 번, 반복해서 연락을 주고받는 걸 보니 부모님이나 친구들은 아니었다. 쟤가 여자라고? 주변의 말을 들으니 병욱이 여자 친구를 불렀다고 했다. 기욱은 올 듯 말 듯 밀당을 하는 병욱의 여자 친구가 슬슬 궁금해졌다. 술 게임이 끝나가고 3차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몇몇 학생들이 먼저 가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에 취한 여자가 옆에서 따로 나가자며 귓속말로 제안해 왔다. 본래라면 바로 일어나야 했으나 기욱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병욱의 여자 친구가 이 근처까지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게의 스크린도어 문이 열리고 낯선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강서윤, 그녀였다.
술을 마시고 화장실을 가려고 서윤을 지나쳐 가던 남자 두세 명이 서윤을 힐끗 쳐다봤다. 잘 차려입은 외모며 정갈한 화장, 흰 피부에 약간 웨이브가 진 머리, 낮지도 높지도 않은 힐에 적당하게 드러난 치마의 허벅지, 얇고 붉은 입술이며 살가운 눈매는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눈여겨볼 만한 외모임은 틀림없었다. 순식간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오오, 하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안녕하세요.”
몸을 살짝 숙인 서윤이 병욱의 옆에 앉았다. H대 간호학과라고 했다. 병욱의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으득, 여자를 옆에 낀 기욱은 인상을 찌푸렸다. 서윤은 3차를 같이 가기로 했다. 빠지는 사람이 좀 있었으나 그래도 적은 인원은 아니었다.
능력잔데? 3차의 술집에서 병욱을 띄워 주는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몇 살이야? 서윤의 나이가 어리다는 걸 눈치챈 여자들이 서윤에 관심을 가지며 말을 걸었다. 기욱은 그런 그들을 보며 말없이 술을 마셨다. 여자 친구, 기욱은 지금 있는 여자 친구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눈앞에 있는 서윤에 훨씬 못 미쳤다. 같이 가겠다는 여자 친구를 두고 혼자 나온 데는 기욱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병욱을 다시 볼 거란 생각도 못 했거니와 병욱에게 저런 우월한 여자 친구가 있을 거란 예상은 더욱더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그때와는 다른 묘한 짜증이 기욱의 심기를 건드렸다. 기욱은 팔을 테이블 한쪽에 올린 채 혼자 술을 마셨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서윤을 처음 본 순간 든 생각이었다. 연예인을 닮았나? 예쁘니까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서윤을 보면 볼수록 단순히 연예인을 닮아서 드는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기욱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옆에 앉은 여자가 계속해서 나가자며 기욱을 졸랐다.
여자의 성화에 이기지 못한 기욱은 화장실을 핑계로 밖으로 나왔다. 내버려 둬. 나가는 기욱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욱은 건물 틈 사이 벽에 기대 담배를 물었다. 닮았다. 여태껏 만난 여자는 물론이거니와 남자, 알고 있는 연예인을 전부 생각해 봤지만, 쉽사리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한발 늦게 옆에 앉았던 여자가 내려왔다.
이제 막 새 담배를 문 참이었다. 얼마 피우지 않은 담배가 아까운 기욱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여자와 입술을 맞췄다. 여자 친구가 없다고 하길 잘했네. 여자와의 키스가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던 기욱은 담배를 끼운 손으로 여자의 허리를 안았다.
혼자 술을 마시던 기욱이 화장실을 간다며 사라지고 돌아오지 않는 걸 눈치챈 서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래?”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같이 가 줄까?”
“아니야. 괜찮아.”
서윤이 손을 저었다. 근처에서 화장실쯤은 혼자 가게 내버려 두라며 떠들었다. 과보호라고. 그 말에 병욱은 점잖게 웃으며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을 남겼다. 화장실을 간 뒤 손을 씻은 서윤은 남자 화장실 쪽을 힐끗거렸다.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때마침 화장실로 들어오려는 남자들에 흠칫 놀란 서윤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아래층 계단이 보였다. 설마 하는 생각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박기욱, 남자 친구인 병욱의 중학교 시절 친구라고 했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후로 기욱은 별다른 말없이 혼자 술을 마셨다.
서윤은 기욱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모른 척했지만,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욱이 사람들 틈에 끼지 못하는 것이 자신 때문은 아닌 건지 걱정이 들기도 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서윤은 혹시 자신이 기욱에게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해야만 했다. 계단을 내려와 모퉁이를 돌기 무섭게 뜻밖의 장면이 서윤의 시야에 들어왔다.
“뭔가 말야, 닮았다고.”
“읏, 으응. 뭐가? 뭐가 닮아?”
“신경 쓰지 마.”
기욱이 여자의 허리를 더욱더 붙여 안으며 입술을 맞췄다. 여자의 머리카락을 앞으로 쓸어 넘기며 목덜미를 만지던 기욱의 손이 멈췄다. 여자의 허리를 손에 안으며 손가락 사이에 끼웠던 담배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담배를 확인한 뒤 고개를 들어 인기척의 주인을 확인했다. 서윤이었다.
“자, 잠깐……!”
여자의 손이 기욱의 셔츠 안, 가슴으로 들어왔다. 여자를 살짝 밀어내고 도망치는 서윤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서윤은 이미 2층으로 올라가고 난 뒤였다. 서윤을 보지 못한 여자가 기욱의 등 뒤에 매달렸다. 기욱이 여자의 팔을 잡고 좀 더 안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서로 한창 달아오를 무렵 여자의 손이 기욱의 아래를 문지르고 있었다. 기욱이 여자를 살짝 밀어냈다. 건물 틈 건너편으로 모텔 간판이 있었다.
“들어가서 하자.”
“난 여기서도 좋은데.”
여자가 살짝 무릎을 꿇은 뒤 기욱의 바지 버클 근처로 손을 댔다. 기욱이 여자를 강제로 일으켜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여자의 입 근처에 키스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기욱이 여자의 입가에 묻은 타액을 엄지 끝으로 닦아 살짝 핥았다. 진한 립스틱에 남은 기름이 섞여 이상한 맛이 났다.
“안 돼.”
“왜?”
“누나한테 혼나.”
“푸흡, 앤데? 누나도 있어?”
어린애 취급에 기욱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농담 아냐. 누나한테 맞으면 존나 아프다고.”
“하하하, 큭큭! 알았어. 우리 기욱이. 누나 무서웠어요?”
“아, 젠장. 들어가서 봐.”
기욱이 신경질적으로 등을 돌렸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못한 여자가 뛰어와 기욱의 옆에 팔짱을 꼈다. 후, 건너편 골목으로 숨은 서윤은 여자와 기욱이 모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뒤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마 마시지 않은 술들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분명 듣기론 여자 친구가 있다고 그랬는데 저래도 되는 걸까? 둘 다 심하게 술에 취한 것 같지도 않고, 아무리 봐도 뭔가가 이상했다. 어느 쪽도 죄책감은 없어 보였다.
“너 여기서 뭐 해?”
“꺅!”
“뭐, 뭐야. 왜?”
“오빠! 놀랐잖아!”
서윤이 병욱을 툭툭 건드렸다. 병욱은 화장실을 간다던 서윤이 생각보다 늦어 내려온 참이었다. 서윤의 눈치를 슬쩍 본 병욱이 담배를 물었다. 건너편으로 모텔이 보였다. 서윤은 술집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모텔 넘어 입구 유리문 너어 기욱이 보였다. 병욱이 담배를 껐다.
“벌써 다 폈어?”
“밖에 너 혼자 있었어?”
“어? 응. 잠깐 바람 좀 쐬러 나온 거야. 오빠 알잖아, 나 술 많이 못 마시는 거.”
“그렇긴 하지. 들어가자.”
병욱이 먼저 등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서윤은 멍하니 서 기욱이 들어간 모텔을 힐끗거렸다. 계단 위로 빨리 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올라가는 서윤은 순간 병욱의 질문에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내 술기운에 일어난 기우겠지 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기욱은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 * *
“하아, 하아….”
띠리리링― 알람시계가 시끄럽게 울렸다. 기욱은 신경질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이 났다. 머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요란하게 알람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하지만 알람시계는 보이지 않았다. 침대 밑에 있는 것 같은데. 기욱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묘한 꿈, 그날 경찰서에 간 뒤부터 시선이 잊히지 않았다. 여자와 섹스를 하던 저를 보는 남자아이의 시선이 묘하게 기욱을 옭아맸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일이 최근에도 한 번 더 있었지. 기욱은 인상을 찌푸렸다. 쾅, 기욱의 방문이 일방적으로 열렸다. 하연이였다.
“씨발년아!! 알람 좀 꺼!!”
하연이 침대 바닥에 떨어진 알람시계를 끈 뒤 기욱에게로 던졌다. 이불 위에 던졌지만, 하연이 던진 알람시계는 생각보다 아팠다. 잠이 덜 깬 하연이 머리를 긁적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 하연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려듣던 기욱은 묘한 느낌에 인상을 구겼다. 설마. 이불을 살짝 들어 아래를 본 기욱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연은 기욱이 자신의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내 기욱의 이불을 잡아당겼다.
“샹년아! 너 내 말은 말 같지도 않지?”
“아, 누나! 하지 말라고!”
“뭘 하지 마야? 이게 아침부터 진짜 뒤지게 맞으려고 환장……, 크읍, 화, 환장했…….”
얇은 이불이 반쯤 침대 아래로 내려가자 보이는 광경에 하연은 이내 웃음을 참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그 위에 다른 바지만 입고 있으면 좀 덜할 텐데. 기욱은 꼭 잘 때 팬티만 입고 자는 버릇이 있었다.
내 집에서 내가 맘대로 자겠다는데 뭔 상관이냐는 기욱의 말을 반박할 수는 없었지만, 드로어즈 차림 하나에 발기한 기욱의 모습은 웃음이 나오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큭큭, 하하하하!! 미친, 박기욱! 아침부터…. 하하하하하!”
“악, 나가!! 나가!”
기욱이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이불로 몸을 가렸다. 평소에도 여자로 봐 준 적은 없었지만, 저 인간 진짜 여자 맞긴 해? 왜 아무렇지 않은 건데? 기욱은 배를 잡고 웃는 하연을 보며 쪽팔림을 지울 수 없었다. 한참을 웃던 하연이 그럴 수 있다며 기욱의 등을 토닥였다. 얼굴이 빨갛게 변한 기욱이 하연의 손을 내쳤다.
“아! 진짜!! 성추행이라고!”
“그래서? 꼬면 신고해. 큭큭, 애네 애.”
하연이 어깨를 들썩이고는 기욱의 방을 나갔다. 1층 거실에서 하연의 말소리가 들렸다.
“엄마! 있잖아!! 기욱이가 아침부터…….”
“박하연!! 너 말하면 뒤진다!!”
기욱이 문을 열고 소리를 질렀다. 기욱은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젠장, 아침부터 이런 것으로도 부족해서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닌 하연에게 보이다니 최악이었다. 기욱은 꿈이 깨기 전 마지막 장면을 생각했다.
경찰서에 가기 전, 섹스하던 그 순간 기욱을 잠에서 깨어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남자아이의 시선이었다. 아, 설마 그럴 리가. 기욱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여자와 했던 섹스가 꼴리면 꼴렸지 그건 아니었다.
남자아이는 아무리 좋게 잡아도 기욱보다 8살 이상은 더 어렸다. 아니, 그보다 1~2년도 더 된 일이 왜 이제 와 갑자기 떠오르는지 기욱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아이의 시선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서윤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제길, 도대체 뭐야.”
침대에서 이마를 짚은 기욱이 고개를 숙였다.
* * *
시헌이 중학교에 들어갔다. 준비하던 국제 중학교와 사립 중학교 입시에 전부 떨어지고, 구도시 근처에 있는 일반 중학교에 입학이 확정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쪽팔려 하는 엄마를 앞에 두고 기욱은 시헌에게 물었다.
‘왜 그랬어?’
‘그냥.’
기욱은 그런 시헌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현정과 같은 중학교에 배정되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시헌과 현정이 일부러 짜고 그랬다는 걸 눈치챘다. 그즈음 기욱은 엄마에게 자취하고 싶다고 해 집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자취라고 해 봤자 결국은 집에서 10분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지만. 학교를 핑계로 시헌과 같이 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엄마는 뜻밖에 쉽게 허락해 줬다. 시헌은 학교에서 집이 가깝다는 걸 알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그녀―서윤을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병욱과도 친한 친구가 주선한 술자리는 아니었다. 의료계 쪽은 특히 그렇다. 실습을 다니다 보면 이래저래 부딪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원래라면 나오지 않을 예정이었던 서윤은 병욱에게 허락을 받고 특별히 나왔다고 했다.
그 사실이 기욱을 못마땅하게 만들었으나 달리 말을 할 만큼 친한 사이 또한 아니었다. 그날도 기욱은 혼자 술을 많이 마셨다. 기욱에게 관심을 가지는 여자들이 몇 명인가 있었으나 기욱이 상대를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대부분 포기한 상태였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갔을 무렵 기욱은 여자들과 떠들고 있는 서윤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런 기욱이 술에 취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기요.”
“네? 왜요?”
“내가, 진짜! 이런 말 하는 타입은 아니거든? 근데, 누구 닮았단 소리 들은 적 없어요?”
“누구요?”
“그러니까! 그걸…, 하아. 그걸 모르겠다는 거야. 그걸 알면! 내가 물어봤겠어요? 그치? 안 그래?”
기욱이 서윤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근처에 취했다며 그런 기욱을 말렸다. 뒤늦게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는 걸 눈치챈 기욱이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고개를 숙인 기욱은 홀로 다시 술을 마셨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기욱은 서윤에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술에 취한 기욱이 테이블에 엎드려 반쯤 쓰러져 있었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희미하게 끊기는 필름 사이로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아, 여긴 어떻게 찾았어?”
“누나 친구한테 물어봤어. 하아, 그럴 줄 알았어.”
“에이, 누나 술 많이 마신 거 아니라니까? 진짜야!”
“알았다고.”
서진이 술에 취한 서윤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서진의 시선이 소파에 널브러진 기욱에게 닿았다. 꿈에서 본 그 시선, 그 목소리였다. 기욱이 정신을 차려 손을 뻗으려 했으나 술기운에 몸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야, 박기욱!!”
“아, 미치겠네!”
근처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누나 뭐 해?”
“……아니, 서진아….”
“가자. 신경 꺼.”
서진은 서윤의 몸을 잡아끌고 술집을 나왔다.
* * *
“…….”
“씨발년.”
“…….”
“술 처먹고 잘하는 짓이다.”
병원 응급실에 누운 기욱은 하연의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가운 차림의 하연은 어딘가 낯설었다. 병원에서 인턴을 하고 있던 하연은 뜬금없는 새벽에 동생이 실려 왔다며 내려가 보라는 말을 들어야만 했다. 새벽 4시, 링거를 맞고 술이 반쯤 깬 기욱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샹년아, 고개 안 돌리냐.”
“미안.”
“미안한 건 알지? 내가 너 때문에 쪽팔려서 어떻게 사냐 어떻게! 아오! 속 터져! 진짜!!”
기욱의 베드에 멋대로 걸터앉은 하연이 고개를 숙이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병원장 아들이,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실려 왔다는 소문이 퍼지는 데는 한두 시간이면 충분했다. 아마, 날이 새면 소문은 더 빨리 퍼질 테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술을 마셨는지 하연은 기욱을 이해하려야 이해해 줄 수 없었다. 하연이 기욱의 몸에 난 상처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악, 아파. 살살 좀 해. 내가 해도 그것보다는 잘하겠……. 아악!”
“뒤진다. 네가 아직 술이 덜 깼지? 해 줄 때 가만히 있어라.”
“아프다고.”
하연의 처치를 받는 기욱은 끝까지 인상을 찌푸렸다. 몇 시야?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술집에서 나온 지 3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완전히 필름이 끊기기 전, 한심하다는 듯 저를 보는 남학생의 시선. 못 본 사이 조금 큰 것 같았지만 그건 틀림없이 그날 그 남자아이였다.
그래, 잘못 봤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기억 속 남학생은 서윤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지부터 밝혀야 했다.
“박기욱, 너 대체 요즘 왜 이러는데?”
“나도 몰라. 알면 이러고 있겠냐고.”
기욱도 알고 싶었다. 대체 왜 이렇게 안달이 나 있는 건지. 무엇이 자신을 이리 안달 나게 하는 건지.
* * *
「만날래요?」
「지금?」
「형만 괜찮으면요. 전 상관없어요.」
기욱은 의자를 뒤로하고 휴대폰을 만졌다. 그러다 노트북을 만졌다. 방 안으로 타자 소리가 들렸다. 얼마 가지 않아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주말 오후. 1시, 시간을 본 기욱은 옷을 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번화가의 한 골목에 차를 대고 담배를 물었다. 진짜 오긴 하는 거야? 기욱은 괜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얼마 가지 않아 남학생 하나가 쭈뼛대며 다가왔다. 주변 눈치를 보던 기욱이 차 문을 먼저 열었다. 남학생이 차에 타고, 기욱도 재빨리 차에 탔다. 무작정 차를 출발시켰다. 일단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운전하는 내내 앞좌석에 앉아 휴대폰을 하는 남학생을 힐끗거렸다.
“몇 살이냐?”
“15살이요. 형은요?”
“스물넷.”
“그렇게 보여요. 근데 형 차예요?”
“어.”
“집에 돈 많나 보네요.”
“좀.”
기욱은 애써 남자아이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 나이대에 차가 있는 애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비록 아빠 차를 물려받았다고는 하나 정작 아빠는 몇 번 탄 적도 없는 데다, 일단은 외제차니 그렇게 볼 만도 했다. 어딘지 모를 골목으로 들어서 적당히 차를 댄 뒤 시동을 껐다. 남학생, 필름이 끊기기 전 본 그 남학생과 닮진 않았지만, 체격은 상당히 비슷했다.
고등학교 이후, 몇 번인가 게이바에 들어간 적도 있었고. 남자와 섹스를 한 적도 있었다. 그 시선에 관한 꿈을 꾼 뒤로는 남자를 만나는 횟수가 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기욱을 이해시킬 순 없었다.
어쩌면 단순한 남자에 관한 문제가 아닐지도 몰랐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남학생이 의자 뒤로 몸을 살짝 기댔다. 남학생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기욱이 남학생의 턱을 잡아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안 보여.”
뒤늦게 차창이 선팅되어 있다는 걸 눈치챈 남학생이 차 안으로 눈을 돌렸다.
“형, 진짜 남자랑 해 본 적 있어요?”
“난 둘 다 해.”
박기욱 미친 새끼. 거의 원조에 가까운 행위라는 걸 기욱 모를 리가 없었다. 진짜 이쪽 취향인가? 기욱의 입술이 남학생에게로 닿았다. 서툰 키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기욱은 이건 아닌 것 같다며 달라붙는 남학생을 밀어냈다.
체격 차이에 의해 조수석에 몸을 부딪친 남학생이 인상을 찌푸렸다. 남학생과 거리를 벌린 기욱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에어컨의 냉기가 거의 빠져나가고 차 안이 훅, 하고 더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땀이 났다.
“미안.”
역시 이건 아니었다. 처음 만났던 장소에 남학생을 데려다준 뒤 기욱은 근처 편의점 벽에 기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욱은 신경질을 내며 벽에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런 기욱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눈을 감았다. 남학생과 입술을 맞추던 그 순간, 어린 남학생 대신 떠오른 건 다름 아닌 그 남학생이었다. 여태껏 누군가와 접촉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떠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감정이 기욱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건 대체 뭐였을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오, 씨발!”
신경질적으로 근처에 있는 깡통을 발로 찼다.
“뭐냐고 대체.”
담배가 없었다. 담배를 산 뒤 다시 편의점으로 나왔다. 차를 가지러 돌아가려던 찰나 커다란 카페가 보였다. 벽면이 전부 유리로 되어 있었다. 카페 안에는 제법 많은 손님이 있었지만, 많은 손님보다 기욱의 시선을 끌게 한 건 유리 벽 너머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남자―뒷모습이지만 병욱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와 서윤, 그리고 남학생이었다. 수수한 차림의 남학생, 서윤의 옆에 앉은 남학생은 기욱의 기억 속 그 남학생이 틀림없었다. 행인인 척 주머니에 손을 넣고 카페를 지나갔다. 힐끗, 남학생은 기욱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부러 신호등을 건너 건너편에서 남학생의 모습을 확인했다. 틀림없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4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아씨, 모르겠다. 기욱은 눈을 질끈 감고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숍 내부는 생각보다 북적였다. 기욱은 사람들에 밀려나는 척 안쪽으로 들어갔다.
“야, 오랜만이다.”
“뭐야? 박기욱. 네가 여기 왜 있어?”
“이래저래. 지나가다가. 앉아도 되지?”
“어? 아니 그…….”
병욱이 곤란하다며 서윤과 남학생을 번갈아 봤다. 기욱과 서윤의 눈이 맞았다. 서윤이 웃으며 대답했다.
“오빠 친구라며. 난 괜찮아.”
병욱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기욱은 애써 웃으며 일방적으로 자리에 앉았다. 원래라면 불편한 자리에 일부러 끼어들어 가는 성격은 결코 아니었다.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었다. 기욱은 서윤의 옆에 단정하게 앉은 남학생을 힐끗거렸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남학생―서진이 서윤과 남매라는 사실을 알았다. 서진은 기욱이 불편한 모양인지 계속해서 시선을 돌렸다.
신고한 건 기억할까? 그날, 술집에 제가 있었다는 건 알까?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으나 그 어떤 것도 쉽게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설탕을 넣지 않은 커피를 마신 기욱은 입술 근처를 혀로 핥았다.
내가 말했지. 신고한 새끼 가만두지 않겠다고.
모든 건 지금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