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2 기욱의 사정 (14/83)

Chapter. 12 기욱의 사정

여자들은 참으로 단순하다. 상대가 누구든 조금만 잘해 주면 쉽게 넘어온다. 여자를 꼬시는 데 필요한 건 잘 차려입은 깔끔한 옷차림, 남들보다 조금 나은 외모와 조금의 술, 그리고 적당한 분위기면 족했다. 거기에 침대나 소파가 있는 곳이라면 더욱 완벽했지만 꼭 그게 아니라도 상관은 없었다.

아니, 아닌 편이 더욱 스릴이 있어서 좋을 때도 있었다. 매번 그런 건 아니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무척이나 꼴릴 때가 있는 법이었다. 뒷감당은 아무래도 좋은 그런 날이 말이다. 서로 눈이 맞아 클럽을 나와 구석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사실 술에 진탕 취해 여자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딱 하나 기억이 나는 것이 있다면 여자 또한 나처럼 미친 듯한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는 것 정도? 그렇지 않고서야 클럽 안 그 많은 여자 중 그 여자를 택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섹스하고 싶었다. 그날은 그러니까 그랬다.

바로 위 건물과 앞 건물이 모텔이었지만 우리는 모텔에 들어갈 여유조차 없었다. 간혹 골목을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이 눈을 가리며 지나가긴 했으나 이름도, 얼굴도 모를 타인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밖에서, 여자를 안고 얼마나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한참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을 즈음 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지나간 사람들이 몇 명 있었으나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잘못 느낀 줄 알았다. 이내 그 시선이 아래쪽이라는 걸 알고 고개를 숙였다.

남자아이.

술에 취해 사고가 흐려진 탓에 몇 살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분명한 건 골목 사이에 서 있는 아이가 남자아이라는 사실이었다. 흐으, 품에 안긴 여자가 빨리하라며 재촉했다. 입안에서 술 냄새가 진득하니 풍겨 왔다.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그때마다 움찔거리며 신음을 내지르는 것이 꽤 꼴리는 느낌을 주었다. 땀이 목까지 흘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텔로 갈걸, 하고 약간 후회가 들었다. 남자아이와 눈이 맞았다. 도망칠 줄 알았던 내 예상과 달리 남자아이는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상한 꼬맹이.

역시 남자는 어쩔 수 없나 보다. 보여 주는 취미는 없지만, 왠지 오기가 생겨 보란 듯이 더욱 거칠게 섹스를 했다. 허나 하면 할수록 짙어지는 시선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뒤늦게 남자아이가 보고 있는 사람이 여자가 아닌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리를 흔들던 움직임을 멈췄다. 여자가 더 하자며 졸랐다. 여자를 살짝 밀고 옷을 대충 올려 가린 뒤 남자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동시에 남자아이가 도망갔다.

‘하하, 큭큭. 대박. 본 거야?’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여자가 술에 취해 까르륵대며 웃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이해는 할 수 없었다. 후, 목을 두른 여자가 입김을 내뱉었다. 모텔로 가서 이어 하자는 여자의 말을 무시하고 그 자리에서 계속했다. 섹스는 오히려 처음보다 더욱 거칠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꼴렸던 것이 맞다. 허나 남자아이가 가고 난 뒤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왜? 몇 살인지도 모르는 꼬맹이한테 보여 줘서 흥분한 건가? 언제부터 그런 변태적인 성적 취향이 있었던가. 아니, 없다. 확실히 남들보다 섹스를 좋아하는 편이긴 했으나 성적 취향만큼은 평범하다고 자신했다. 무엇보다 남들에 보여서 흥분하는 체질이라면 더 일찍 해야 했다.

남자아이 이전에도 우리를 보고 지나간 사람들은 많았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아이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 사실에 후회가 들었다. 뒤늦게 어떻게 생겼더라 하고 생각해 보지만 역시나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섹스를 계속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날 밤의 섹스는 뜻밖의 일로 인해 끝을 맺었다. 불빛이 시야를 가렸다. 얼굴을 비추는 손전등 불빛에 눈이 부셔 눈을 가렸다. 지직, 무전 소리가 들렸다. 경찰이었다.

“아, 씨발.”

여자가 허리를 쿡쿡 찌르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내 가슴이 드러나는 옷과 아래를 급하게 가렸다. 여자의 입에서는 끝없이 욕이 나오고 있었다. 씨발, 어떤 개좆같은 년이야? 꼴려 하는 얼굴을 볼 때부터 알았지만, 입 또한 걸레를 문 것처럼 더러웠다.

여기서 뭘 하느냐는 경찰의 목소리도, 아무것도 아니라며 반항을 하는 여자의 목소리도 나에겐 들리지 않았다. 남자아이. 같이 온 여경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숨어 있는 남자아이였다. 비틀거리며 다가가려 하자 근처에 있던 남자 경찰과 여경을 제지했다.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고. 남자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굴, 얼굴을 보고 싶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손을 뻗는 순간 남자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순간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아무렇지 않게 섹스하는 걸 보길래 괜찮은 줄 알았더니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내 여경의 옷자락을 뿌리친 남자아이가 도망쳤다. 쫓아가려 했으나 남자 경찰이 붙잡았다.

여경과 경찰관의 대화를 통해 우리를 신고한 사람이 남자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술에 취해 어떻게 경찰서로 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으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있었다. 술과 섹스, 흥분에 잔뜩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잊히지 않는 그것은 결코 꿈이나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경찰서에 앉은 순간 나는 생각했다.

신고한 그 꼬맹이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 * *

슬리퍼를 질질 끌고 경찰서 문을 열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기욱의 누나―하연이었다. 경찰서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본 하연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박기욱. 보호자 되십니까?’

‘하아, 네. 그런데요.’

‘이쪽입니다.’

하연의 옆으로 기욱을 데려온 여경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하연이 경찰관들과 대화를 했다. 대화가 어느 정도 끝날 무렵 하연은 기욱의 앞으로 다가갔다. 경찰서 소파에 앉은 기욱은 반쯤 졸고 있었다. 하연의 손이 높이 올라가더니 기욱의 머리를 퍽, 하고 쳤다.

기욱의 머리가 쾅 소리를 내며 벽에 박혔다.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여경이 적당히 하라며 하연을 말렸다. 기욱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른 채 아픈 머리를 긁적였다. 잠이 살짝 깬 기욱이 고개를 들었다.

“아, 누나.”

“누나는 씨발 무슨…….”

기욱의 뻔뻔함에 하연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옆에 앉은 여자를 위아래로 훑은 하연이 팔짱을 꼈다. 속이 보이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의 짧은 치마, 높은 구두에 진한 화장이며 가짜 명품백, 하연은 기가 막혔다. 하연과 눈이 맞은 여자가 고개를 숙였다.

“언니 죄송해요.”

“언제 봤다고 언니야.”

“그게…….”

“됐고. 박기욱 따라와.”

하연이 등을 돌렸다. 기욱이 귀찮다며 늘어지자 하연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결국, 기욱이 마지못해 일어날 채비를 했다.

“언니, 화나신 거야?”

여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기욱에게 물었다. 기욱은 여자의 허리를 안은 뒤 가볍게 뺨에 키스했다. 그 모습을 본 하연은 질린다며 손을 저었다.

“괜찮아.”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한 연인 같은 모습에 근처 형사들이 좋을 때다, 하고 중얼댔다. 기욱은 경찰서 밖으로 나왔다. 여경이 멀리 가지 말라고 언질을 주었다. 경찰서 유리벽 너머에 몸을 기댔다. 하연이 숙취 해소제를 내밀었다. 해소제를 받아먹으니 조금은 살 것 같았다.

“저년은 또 누구야?”

기욱은 경찰서 유리벽 너머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자를 힐끗거렸다.

“몰라.”

“뭐?”

“이름도 모른다고. 클럽에서 만났어.”

하연이 이마를 짚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기욱 때문에 없던 두통이 다시 생길 것 같았다.

“박기욱, 너 나이가 몇인 줄은 알아? 진짜 이럴 거야?”

“콘돔 썼어. 그리고 딱히 불법을 저지른 건 아니잖아.”

숙취 해소제를 반쯤 마신 기욱이 주머니를 뒤졌다. 구겨진 담뱃갑에서 담배가 나왔다. 담배를 입에 문 뒤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하연은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우는 기욱에 인상을 찌푸렸다. 제아무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남동생이라지만 이건 도저히 답이 없었다. 기욱이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보다 못한 하연이 말했다.

“안 꺼?”

“불붙였어.”

“끄라고.”

하연의 말에 기욱이 볼멘소리 하며 담배를 껐다. 둘 사이에서 침묵이 흘렀다. 하연은 기욱이 자다가 일어나 경찰에게 전화가 온 자기 뜻도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연은 집에 엄마랑 아빠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며 잔소리를 했다. 기욱은 네네, 하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엄마 아빠가 있어도 지금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20대 초반 남자, 술 먹고 한두 번 경찰서에 갈 수도 있지만, 경찰의 말은 뜻밖이었다. 건물 틈 사이 주차장에서 섹스하다가 신고가 들어와서 걸렸단다. 심지어 신고자는 13살밖에 안 되는 초등학생이었다.

어린아이에게 그런 장면을 보여 준 거로도 부족해, 주차장 바로 앞과 건물 위층에 모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밖에서 섹스하다 걸린 기욱을 하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욱의 말 따라 기욱은 불법을 저지른 건 아니었다. 성인, 클럽을 가서 술을 먹는 것도, 술을 먹고 섹스를 하는 것도 모두 기욱의 자유였다. 그러나.

“할 거면 최소한 방이라도 잡고 하라고.”

“누나도 저번에 내 방에서 남자랑 한 주제에 남 말은.”

“야! 너 언제 적 얘기를……. 아씨, 그건 하도 정신이 없어서. 아,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했잖아!”

기욱의 말대꾸에 하연이 재빨리 수습했다. 기욱이 그럴 줄 알았다며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이걸로 쌤쌤이네.”

“하, 난 너처럼 밖에서 그러진 않는다.”

기욱이 손안에 있는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하연의 눈치가 보여 불은 붙이지 않았다.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기욱이 담담하게 말했다.

“누나.”

“…….”

“섹스는 분위기야.”

기욱은 멋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생각한 거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만한 명언은 없었다. 그런 기욱의 변명에 하연은 한동안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이내 정신이 돌아온 하연이 말했다.

“그런 새끼가. 경찰서까지 와?”

“아, 그 꼬맹이가 멋대로 본 거라고.”

“야! 보여 준 건 자랑이고!!”

하연의 손이 다시 기욱의 머리를 때렸다. 기욱이 떨어질 뻔한 담배를 간신히 붙잡았다. 한 대 가지고는 도무지 성이 차지 않았다.

“아, 누나! 제발! 손 좀!”

“야이, 씨발년아! 넌 좀 맞아야 돼!!”

“남동생한테 씨발년이라는 누나가 어딨어?”

“여기 있다 이 씨발년아!! 내가! 너 때문에! 쪽팔려서 못 살아 진짜!!”

“아, 때리지 말라고! 악, 아파!”

하연의 손이 기욱의 머리며 등을 거침없이 때렸다. 어렸을 때부터 유도를 해 왔던 하연의 손찌검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아팠다.

기욱은 팔을 들어 하연의 손찌검을 피했으나 돌아오는 건 주먹뿐이었다. 결국 그날. 기욱은 경찰서 앞에서 하연에게 복날의 개처럼 맞아야만 했다.

* * *

의사 집안. 외증조할아버지가 미국으로 넘어가 의사를 하면서부터 시작됐다는 얘기도 있고, 혹은 친증조할머니네 집안이 대한제국 시절 황족의 주치의였다는 말도 있다. 집안 행사에 친척들끼리 모이면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는 철없는 사촌이 몇 있긴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J대 병원장 아버지, VIP의 주치의 출신 의사, 혹은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자들의 주치의, 해외에 진출할 만한 개인 병원을 가진 친척들, H대, K대 및 해외 유명 대학교 출신이자 대학 병원 교수로 일하고 있는 어른들. 그 외에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의사들이 연줄로 닿아 있었다.

J대 의과 대학 동기 출신인 부모님, 두 사람은 첫째로 아들을 원했다. 허나 아무리 두 사람이 의사라 해도 아들과 딸을 구분 짓는 것은 신의 영역이었다. 첫째이자 장녀인 박하연, 아들이 아닌 게 아쉽기는 했으나 키우는 데 차별을 두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바람은 바람일 뿐 꼭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해서 달리 대우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나, 직접적인 말은 하지 않았으나 부모님은 내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물론, 누나―하연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누나가 의사가 되었음을 바라는 건 형제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장녀로서, 나에게 바라는 건 남자로서였다.

부모님이나 집안의 바람이 어떻든 간에 이런 집안 사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어린 시절은 제법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갖고 싶은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갖는다. 하고 싶은 건 고민 없이 무조건 한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집안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생은 한 번이다. 원하지 않든, 원하든 태어나 버린 건 어쩔 수 없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태어났다면, 죽기 전까지 즐기다 가면 되는 것이다.

죽음은 불공평하다. 한 세기를 내리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 빛을 본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죽는 일도 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장 행복한 순간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모른 채 고통스럽게 홀로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죽음. 그것은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신의 영역이었다. 나도, 나를 낳아 준 부모님도, 내 주변에 누구도 죽음의 순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죽음의 순간은 불공평하지만,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그 사실만큼은 공평했다.

언젠가 죽는다. 그 언제가 언제인지 모르고, 어떻게인지 알지 못한다. 답은 간단하다. 살아 있는 그 순간을 즐기면 됐다. 단지 그뿐인 삶이었다.

집착, 독점, 소유욕.

가지고 싶다. 그것을 원하기에 집착이 생기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리고 남에게 주고 싶지 않다. 인간의 아주 당연한 욕구라고 나는 생각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년이 좀 지났을 무렵, 같은 반 남학생―병욱이 남동생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떠드는데 어째서인지 그게 반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몇몇 아이들이 밑으로 동생은 있어도, 막 태어난 아기를 보는 건 처음인 경우가 많았다. 병욱의 집에 놀러 갔다 온 아이들 몇 명이 엄청 귀엽다며 떠들었다.

나도 누나가 있지만 병욱의 모습은 그것과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동생한테 좋은 형이 돼야지. 평소에 잘못하면 이것저것 잔소리를 늘어놓는 선생님의 말투가 바뀌었다. 병욱 또한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늘 수업 시간에 졸거나 떠들던 병욱이 선생님의 그런 말 한마디면 태도가 바뀌었다. 그럼 선생님은 좋은 형이 될 거라고 말하고는 했다.

누나와는 사뭇 다른, 그것은 자부심이었다. 남동생. 부모님이 첫째로 남자아이를 원했던 것처럼 나 또한 남동생을 원했다. 새벽 무렵 잠깐 집에 들른 엄마에게 남동생을 가지고 싶다고 했다. 평소보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엄마는 자다 일어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기욱이 남동생 생기는 건 어떻게 알았대?’

그러고 보니 엄마의 배가 평소보다 좀 나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무렵 병욱을 향하던 모든 시선은 나에게로 향했다.

* * *

누나의 주변에는 늘 남자가 있었다. 집에 있는 낯선 남자, 누나와 같은 학교 학생인 경우도 있었고 아닌 때도 있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적도 있었고, 훨씬 많은 적도 있었다. 심지어 중고등학생이 아닌 적도 있었다. 누나가 데려오는 남자들은 정말 다양했다. 남자 친구라고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만 해도 그 말이 그냥 같은 반에 있는 남자 친구를 말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누나는 엄청 웃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남자는 쉽게 설명이 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여학생에게 고백을 받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누나에게 물어봤다. 방에서 숙제하고 있던 누나는 혼자 킥킥대더니 한번 사귀어 보라고 했다. 한 달을 조금 못 넘겼던 것 같다.

나에게 고백한 그 여학생도, 나도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었다.

좋아한다.

왜일까? 나에겐 그것만큼 어려운 감정이 없었다. 나에게 고백한 여학생은 두 달을 내리 주변을 맴돌았다. 그런 답답함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순간부터 나는 이미 남들과 다른 길을 걷고 있지 않았나.

중학교에 막 올라갔을 무렵의 일이었다. 또래 남자애들보다 체격과 키가 컸던 나는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흔히 말하는 좀 노는 아이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아무나 상관없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아이들과 어울리는 편이 학교생활을 편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러모로 사고를 자주 치고, 문제가 많은 놈이었으나 학교 밖 생활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로만 친하게 지냈다. 어울려 노는 아이들은 대체로 또래들보다는 성장이 빠른 축에 속했다. 물론, 빠른 건 성장뿐만은 아니었다. 여자, 성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었다.

친구 집에서 야한 잡지를 본다거나, 운이 좋으면 동영상을 보기도 했으며 어디선가 돌고 도는 누군가의 경험담들을 떠들고는 했다. 무리 중 여자 친구가 있으면 여자 친구와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느니 하는 등의 얘기는 가장 핫한 이슈 중의 하나였다. 그중 섹스는 가장 최고난도였다. 여자 친구와 섹스를 했다는 등의 말을 하면 주변에서는 마치 영웅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고, 부러워했다.

병욱이 남동생이 생겼다며 주변의 시선을 독점한 것이 거슬렸던 것처럼,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얘기를 하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예쁘고, 어른스럽다며 얘기가 나온 여학생과 친해졌다. 그 여학생과 사귄다고 말했을 땐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더블데이트니, 노래방을 갈 때도 여학생과 같이 다녔다.

한참 여자 친구와 키스를 했다는 등의 얘기를 할 무렵 그―장병욱을 다시 만났다. 같이 다니던 무리에 있는 남자애 한 명이 병욱과 친구라고 했다. 뒤늦게 서로 같은 사립 초등학교 출신이라는 걸 알았다. 병욱은 근처에 있는 평범한 중학교에 들어갔다.

남동생 이후, 병욱과 거의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뒤늦게 노래방에 들어온 병욱은 얼마 전 자기가 여자 친구와 섹스를 했다는 등의 얘기를 했다. 마치 그날 남동생에 대해 복수를 하듯.

제기랄 새끼.

나는 사귀고 있던 여자 친구와 첫 섹스를 했고, 정확히 일주일 하고 사흘 후에 헤어졌다. 그 뒤였다. 그녀는 또래 중에 유독 몸매가 뛰어날 뿐이지 그 외에 매력은 없었다. 연상의 여자, 다른 학교에 더 예쁜 여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자연스럽게 옷과 머리며 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담배와 술까지 손을 대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입학 초기, 적당히 지내자는 내 생각과 달리 뒤늦게 주변을 돌아봤을 때 나는 무리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말을 걸어오던 반 학생들도 은근슬쩍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느끼는 달라진 모습을 집안에서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폈어?”

“좀 됐어요.”

가방에 나온 담배에 걸렸을 때, 엄마는 화내지 않았다. 적당히 피우라는 말과 함께 일주일 뒤 병원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선에서만 하라는 것이었다.

집에서 연상인 여자 친구와 섹스를 한 사실을 누나에게 걸렸을 때, 누나는 한숨을 쉬며 얼굴에 콘돔을 내던졌다.

“사고만 치지 마.”

그게 어디서 났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여자, 섹스. 사랑 따위는 몰랐다. 여자에게 집착이나 미련은 없었다. 대신할 여자들은 많았고, 넘어올 여자들 또한 많았다. 예쁘거나 마음에 들면 꼬시면 그만이었다. 꼬시는 과정이 복잡하거나 어려울수록 성취감은 높았으나 결국은 그게 다였다. 어째서인지 한 번 섹스를 하고 나면 마치 마라톤의 결승선을 끊어 버린 것 같은 허무함이 들었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갈 무렵 여태껏 아무 말 않던 아빠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친척에 누가 외고에 합격했다더라. 공부해라. 그게 다였다. 이틀 후 방과 후 한두 개였던 학원이 갑자기 늘어났다. 적당히 친구들을 따라 다니던 동네 학원이 아닌 유명 학군의 입시 학원이었다.

사실 몇 번인가 사고를 쳤다. 강제 전학을 당할 뻔한 적도 있었고, 같이 사고를 친 친구 중 몇 명은 전학을 갔다. 내가 전학을 가지 않은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단 한 번도 나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입시 학원에 다니게 되면서 부모님의 행동과 아빠의 말에 대한 의미를 깨달았다.

공부해라. 그럼 사고를 치든 말든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여자를 만나는 것도 적당히 했다. 그즈음 내가 크게 사고를 치고도 전학을 가지 않고 있거나, 학부모로 엄마가 왔을 때 집안에 대해 알게 된 소문들이 학교에 퍼지면서 공부를 하겠다는 나를 건드리는 놈들은 없었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로 순식간에 교실이 어색해졌다. 처음 한 달은 불편했으나 시간이 지나니 그건 그거대로 그런대로 할 만했다. 무엇보다 공부한다고 하는 것이 놀고 있던 친구들과 인연을 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1학년, 적당히 어울리기로 생각했던 그 마음가짐이 현실이 되었을 뿐이었다.

사실 놀면서 공부를 아주 안 한 건 아니었다. 시험 일주일 전에 공부해도 늘 반에서 평균은 나오던 성적이었다. 집안의 탓인지 막상 하겠다고 앉으니 또 되긴 됐다. 물론, 처음 한 달은 힘들었지만.

아빠가 말한 외고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차선책으로 시험을 본 과학고에 입학했다. 아빠는 축하한다는 말 외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허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대부분 친구는 인근 학교에 평범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정확히는 오히려 그렇게 진학을 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K고등학교 3학년 2반, 한우성. 사망 시간 오전 02:45

사인은 교통사고로 인한 다발성 장기손상.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우성이 일부러 트럭이 지나가던 그 도로 밑으로 몸을 던졌다는 사실을.

* * *

학교에 벼락치기로 들어온 나와 달리 고등학교에는 중학교 3년 내내 전교 상위권을 놓치지 않은 아이들이 가득했다. 3학년, 기껏해야 8개월 정도를 벼락치기로 공부한 나는 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성적이 뒤처졌다.

입시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학원은 다녔다. 평균의 성적, 고등학교 친구들보다는 주로 중학교 친구들과 계속 어울렸다. 새로 친구를 사귀는 것도 귀찮을뿐더러 고등학교 녀석들은 어딘가 재미가 없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등교를 나섰다. 새벽 4시 50분쯤에 눈을 떠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그러니까 그냥 그런 날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부모님은 일이 있어서 지방에 내려가고 없었다. 교복을 대충 입고, 현관 앞에서 신발 끈을 묶던 중 뒤늦게 담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현관에는 낯선 신발이 놓여 있었다. 어제저녁에 학원에서 들어올 때만 해도 없던 신발이었다. 성인 남성의 신발, 아버지의 신발은 아니다. 어린 동생의 것들일 리도 없고, 내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누나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누나.”

“……아읏.”

“야, 박하연. 자냐?”

방문 너머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오, 아침부터. 문고리를 살짝 만졌다. 잠겨 있지는 않았다. 쾅― 하고 문을 열었다. 정면에 보이는 침대에 반쯤 옷을 벗고 있는 남자와 누나가 있었다. 막 시작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옷을 내린 누나가 남자를 밀어내고 신경질적으로 일어났다.

“박기욱 제발! 노크 좀 하고 들어와!”

“했거든? 아침부터 지랄해요. 됐고, 나 담배 좀.”

당당하게 손을 내밀자 누나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뒤늦게 옷을 정리하고 일어난 남자가 내 차림을 살폈다. 누나는 남동생이라며 짧게 소개했다. 뒤늦게 시간을 확인한 누나가 말했다.

“이게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나서 담배 타령이야. 없어! 네가 사!”

“나 못 산다고.”

“그럼 피우질 말든가.”

결국, 남자가 일어나 같이 내려가기로 했다. 누나는 사 주지 말라고 했지만. 집 근처 편의점에서 남자가 담배를 샀다. 담배를 사는 남자의 계산기 밑에 있는 초콜릿 하나를 집어 들었다. 카드를 꺼내려 하자 남자가 자기가 사 주겠다고 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편의점 밖으로 나와 남자가 담뱃갑을 던졌다. 재빨리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남자 또한 담배를 피웠다. 누나가 언제 올라오냐며 전화를 했다. 올라가 봐야 한다는 남자를 보낸 뒤 한 개비 더 물었다. 5시 50분,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일찍 나왔다. 그렇다고 다시 집에 들어가기는 뭐한. 애매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멀리 골목에서 한 남학생이 걸어왔다. 편의점을 들어가려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우리 학교 교복이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교복 차림의 남학생을 처음 보는 건 당연했다. 남학생과 눈이 맞았다. 초록색 명찰을 보니 같은 1학년이었다. 한우성. 왜인지 알 수는 없으나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기억했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았다. 또래 남학생 기준으로 보면 평균이었다. 너무 어른스럽지 않은, 그렇다고 어린애 같아 보이지 않는 그런 외모였다. 대부분 아이가 눈을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고 피하는 데 비해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가만히 바라봤다.

손에 들린 담배가 툭, 하고 발아래로 떨어졌다. 재빨리 집어 들었으나 다시 피우기는 역시 찝찝했다. 손안에서 꺼지지 않고 타들어 가는 담배만 보고 있었다. 그―우성은 나를 슬쩍 보더니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팔에 차인 시계가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머니를 뒤졌다. 담배 케이스에 초콜릿이 딸려 나왔다. 담배 대신 초콜릿을 입에 물었다. 으득, 하고 초콜릿이 입안에서 부서짐과 동시에 편의점 문이 열렸다.

우성은 편의점에서 산 초콜릿 바를 물고 있었다. 뒤늦게 그 제품이 나와 같은 초콜릿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 단걸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참 보기 드문 일이었다. 금방 갈 줄 알았던 내 예상과 달리 우성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옆으로 몸을 살짝 비켰다. 편의점 유리벽 옆에 기댄 우성의 주머니에서 담배가 나왔다. 뜻밖이었다. 초콜릿을 든 채 담배를 피우는 우성을 가만히 바라봤다. 뭔가 이상하잖아. 연기를 내뱉는 걸 반복하길 몇 번째, 우성이 고개를 돌렸다. 왠지 죄를 지은 것 같아 나 역시 아무것도 없는 골목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피했다. 우성의 시선이 느껴짐과 동시에 목소리가 들렸다.

“왜?”

“…….”

“사람 담배 피우는 거 첨 보냐.”

시비를 거는 말투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대로 된 반박 한마디 하지 못했다.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닌데. 그의 말투에 기분이 나쁘다는 생각보다 예상했던 것보다 목소리가 미성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담배를 끈 우성이 입을 다문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병신.”

내가 대답이 없자 우성은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다는 식으로 등을 돌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서 있어야만 했다.

* * *

1학년 4반, 교실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뒷좌석에 앉았다. 수업을 듣긴 했으나 사실 중간부터는 다른 생각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병신. 우성의 마지막 한마디가 잊히지 않았다. 나는 왜 거기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거지? 쪽팔리면서 동시에 자괴감이 들었다.

턱을 괴고 수업을 듣는 반 아이들을 둘러봤다. 4월, 한 달이 지났지만 사실 제대로 말을 해 본 아이들은 몇 명 없었다. 중학교 때 같이 놀던 친구들에게 소개받은 옆 반 남자애들 몇 명이 다였다. 소위 말하는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는 애들이었다. 사실상 밥을 먹거나 쉬는 시간에 종종 매점에 내려가 어울리는 게 전부였으니 반에서는 왕따에 가까웠다.

그러고 보니 반 애들을 진지하게 보는 건 처음이었다. 수업을 듣고 있는 애들 사이로 뜻밖의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멀리 대각선에 앉은 남학생, 나는 잘못 본 건 아닌가? 몇 번이나 눈을 비벼야 했다.

한우성.

같은 반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3월 한 달, 한 달 동안 같은 반, 같은 공간에 있었으면서 그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툭, 우성의 샤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의자 밑으로 떨어진 샤프를 줍던 우성의 몸이 살짝 뒤로 틀어졌다.

나와 다시 눈이 맞았다. 나도 모르게 살짝 손을 흔들었다. 수업 중이라 말은 할 수 없었지만 나름의 인사를 한 것이었다. 볼펜을 내려놓고, 칠판에서 수업 중인 선생님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우성이 한숨을 쉬었다. 이어지는 우성의 행동에 나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가운뎃손가락을 올린 것이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장면이었다. 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자 우성은 킥킥대며 고개를 돌렸다.

“…욱. 박기욱!!”

“아, 씨발.”

“뭐? 뭔 발?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아, 아니. 잘못 말했습니다.”

수학 선생님의 표정이 안 좋아졌으나, 한 번만 넘어가 주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선생님이 칠판을 툭툭 건드렸다. 나와서 풀어 보라는 뜻이었다. 무작정 교과서를 들고 칠판으로 나왔다. 아무런 문제도 적혀 있지 않은 칠판을 보며 나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뒤늦게 교과서를 뒤적거렸다.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22페이지였는데……. 선생님이 옆에서 혀를 찼다. 교탁으로 나오자 앞자리에 앉은 우성이 정면으로 보였다. 아침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생각처럼 너무 마른 체형은 아니었다.

와이셔츠의 단추가 풀려 드러나는 쇄골이 왠지 모르게 야하게 느껴졌다. 하, 남자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다니 미친 게 틀림없었다. 욕구 불만인가 보다. 그런 생각을 할 즈음 선생님은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선생님뿐이 아니었다. 반에 있는 모든 아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뒤늦게 사태 파악이 됐다. 어쩔 줄 모르는 체하는 나를 보던 우성이 또다시 큭큭댔다. 선생님의 눈치를 살핀 우성이 교과서를 살짝 들었다.

‘32페이지. 4번.’

입 모양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박기욱! 뭐해 안 풀어? 선생님이 재촉했다. 아, 풀 거라고요. 뒤늦게 페이지를 찾고 문제를 살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도 풀어져 있지 않았다. 무슨 정신으로 문제를 풀고 자리에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게 있다면 다행히 답은 맞았다는 사실이었다.

이상한 놈.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자리를 바꾼다고 했다. 제비뽑기했다. 교탁 맨 앞자리에 걸렸다. 왜일까? 앞자리에 앉은 우성이 생각났다. 북적대는 아이들 틈에서 우성을 찾았다. 책상에 짐을 뺀 우성은 맨 뒷좌석에 앉아 있는 남학생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우성이 들고 있는 종이 표를 보여 줬다. 남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짐을 챙겼다. 남학생의 자리는 얼마 가지 않아 우성의 자리가 되었다. 고개를 숙인 나는 맨 앞자리에 배정된 종이 표를 봤다. 중학교 때도 몇 번인가 제비뽑기했지만, 한 번도 자리에 대해 연연한 적은 없었다.

앞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자리를 쓰게 될 남학생이 짐을 들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때마침 옆자리에 앉을 여학생이 친구와 떠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앞에 앉고 싶었는데.”

“바꿀 사람 없어?”

“없다는데.”

여학생이 내 번호표를 힐끗거렸다. 서로 말 좀 걸어 보라며 몸을 쿡쿡 찔렀다. 나 역시 여학생의 번호표를 바라봤다. 34번. 눈이 재빨리 34번 자리를 찾았다. 우성의 옆자리였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심장이 빨라졌다. 나는 번호표를 여학생 앞으로 내밀었다.

“상관없는데. 바꿀래?”

“어, 진짜? 그래도 돼?”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뒷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잘됐다며 떠들었다. 여학생과 번호표를 바꾼 뒤 재빨리 짐을 챙겼다. 우성의 옆자리를 쓰던 여학생은 이미 짐을 챙겨 새로운 자리로 간 뒤였다. 쿵, 무거운 책들이 책상다리를 흔들었다.

“너 뭐냐?”

나는 번호표를 보여 줬다. 대부분 아이가 자리에 앉아 정리된 상태였다. 선생님이 아이들과 마지막으로 자리를 조율하고 있었다. 키가 큰 애들이라든지, 시력이 안 좋은 애들에 한해서 자리를 바꿔주겠다고 했다. 우성과 나에게 해당하는 사항은 아니었다. 책상 서랍을 정리하던 우성이 뜬금없이 손을 들었다.

“저요.”

“넌 왜?”

우성이 나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저 눈 나쁜데요. 앞에 앉고 싶어요.”

나는 우성을 가만히 바라봤다. 우성은 안경을 끼지 않았다. 정말 눈이 나쁜지 나쁘지 않은지 알 방법은 없었다. 이래선 애써 자리를 바꾼 의미가 없었다. 아쉬운 느낌이 들 무렵 선생님이 선수를 쳤다.

“한우성, 너 시력 1.4라며.”

“그런 적 없는데. 아, 눈 나쁘다고요. 안 보여요.”

“시끄러워 인마! 이게 이랬다저랬다! 그냥 앉아!”

우성이 몇 번인가 볼멘소리 했으나 선생님은 우성의 말을 더 듣지 않았다. 알고 봤더니 뒷자리에 앉고 싶어 선생님에게 조른 모양이었다. 우성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남은 짐을 마저 정리했다. 아침에도 그렇고, 수업 시간에도, 지금도 그렇고 이쯤 되면 우성이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성은 그날 이후 나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람을 무슨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묻고 싶었다. 그렇다고 먼저 물어보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문학 시간, 일부러 교과서를 가방에서 꺼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내 책상을 본 선생님이 이상하게 생각해서 물어 왔다.

“박기욱, 너 책 어딨어?”

“집에 두고 왔어요.”

“야! 쉬는 시간 놔두고 뭐 했어? 빌려 와.”

“저 친구 없는데요.”

반항적인 태도에 몇몇 학생들이 큭큭대며 웃었다. 수업이 시작되고 5분이 넘은 걸 본 선생님이 우성에게 손가락질했다.

“야야, 좀 같이 봐라.”

“제가 왜요?”

“이것들이 쌍쌍으로 미쳤나. 짝이잖아. 인마. 너네 초딩이냐? 사랑싸움해? 사귀냐?”

원래부터 입이 좀 험한 데다 막말을 잘하는 문학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농담일 텐데. 어째서인지 우성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웃음이 그칠 무렵 낯익게 수군대는 여학생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서. 대박이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성이 마지못해 책을 옆으로 밀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수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예를 들면 머리가 약간 갈색이라던지, 글씨를 굉장히 여자처럼 쓴다거나 하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책상에 팔을 괸 체 말을 걸었다.

“야.”

“닥쳐.”

“내가 너한테 뭐 잘못했냐.”

“시끄럽다고.”

“나한테 왜 이러는데?”

“씨발, 수업 안 들을 거면 좀 닥쳐!”

교실이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선생님의 분필이 뚝, 하고 부러졌다. 부러진 분필과 책을 내려놓은 선생님이 소리를 질렀다.

“나가.”

“아, 쌤. 얘가…….”

“야야, 사랑싸움할 거면 나가서 해.”

“안 그럴게요.”

“안 나가? 네가 나가나 내가 나가나 해 볼까?”

우성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퍽, 하고 내 의자 쪽으로 발길질한 뒤 뒷문으로 나갔다. 너무 심했나 싶을 무렵 교탁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기욱 넌 구경났냐?”

“네?”

“너도 나가.”

드르륵― 뒷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살짝 열린 교실 창문 틈 사이로 수업 중인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머니를 뒤졌다. 아침에 넣어 놓고 깜박한 담배와 라이터, 그리고 초콜릿 쓰레기가 나왔다. 복도 쓰레기통에 초콜릿을 버린 뒤 계단을 찾았다.

우성은 없었다. 옥상으로 올라가려던 찰나 화장실에서 나온 우성과 마주쳤다. 우성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담배에 닿았다. 내가 담배 케이스를 살짝 내밀었다.

“하나 줄까?”

주머니에 손을 넣은 우성은 나를 지나쳐 옥상이 있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야, 같이 좀 가. 우성의 뒤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왔다. 비가 내리고 난 후라 그런지 밖이 선선했다. 시멘트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댄 우성이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서로 담배를 물었다.

“존나 맛없네.”

“…….”

“벙어리 새끼.”

일방적인 모욕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셔츠에 있는 단추 하나가 뜯겨 있었다. 살짝 벌어진 틈 사이로 속살이 그대로 보였다. 셔츠 안쪽으로 낯이 익은 자국이 있었다. 붉게 올라온, 상처라고는 부를 수 없는 그것. 누군가의 키스 마크였다.

뒤늦게 내 시선을 눈치챈 우성이 재빨리 셔츠를 가렸다. 나도 몇 번인가 새겨 본 적이 있고, 흔적이 있는 여자들을 본 적이 있으나 남자에게 있는 키스 마크를 본 건 처음이었다. 보통은 반대 아닌가? 허나 한편으로는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겼다.

사실 우성의 몸에 키스 마크가 있다는 사실보다 순둥이같이 생긴 얼굴로 여자와 섹스를 했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이었다. 그래도 반반하게 생긴 건 사실이니 그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둘이서 한 갑을 다 폈다. 내가 얼마 남지 않았다며 불만을 표시해도 우성은 아무렇지 않게 내 담배를 가져갔다.

마지막 남은 담배 또한 우성의 차지였다. 우성의 손에서 타들어 가는 마지막 담배를 바라보고 있을 무렵 종이 쳤다. 동시에 아래가 시끄러웠다. 교실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우성의 휴대폰이 울렸다. 담배를 끈 우성이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나? 지금 옥상이야. 올라올 필요 없는데……. 응. 알았어.”

짧은 통화였지만, 어째서인지 말투가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우성이 나를 힐끗 보더니 꺼진 담배를 옥상 아래로 튕기듯 내던졌다.

“뭘 봐? 안 꺼져? 종 쳤으면 꺼지라고!”

결국, 쫓겨나듯 옥상을 내려왔다. 문을 열자 계단 아래가 소란스러웠다. 계단으로 내려가려던 찰나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동시에 남학생의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흰색, 2학년이거나 혹은 3학년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냐, 괜찮아.”

어깨를 툴툴 털은 선배는 나와 달리 옥상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옥상 쪽을 힐끗 바라봤다. 우성이 선배에게 뛰어왔다. 문 너머로 선배가 우성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이 보였다.

아는 선배인가 보다 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허나 선배의 손길에 얼굴을 붉히는 우성의 모습은 도무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체육 시간, 2인 1조로 농구 연습을 한다고 했다. 자유롭게 짝을 지으라고 했다. 반 아이들이 서로 친한 친구들끼리 짝을 지었다. 정신없이 짝을 짓는 와중에 나와 우성의 눈이 맞았다. 내가 다가가려 하자 우성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다른 남학생에게 다가가 같이하자고 말했으나 남학생은 이미 같이할 사람이 있는지 미안하다며 손을 저었다. 짝짓기가 어느 정도 끝날 무렵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며 남은 애들을 찾았다.

“야.”

“…….”

“내가 너한테 뭐 잘못했냐.”

“처음부터 같이했으면 됐잖아. 친구도 없는 주제에.”

“아, 공 똑바로 던지라고.”

―우리는 그렇게 같은 팀이 되었다. 그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동 수업 시간에 짝이 없거나, 화학 시간 조별 활동을 할 때면 자연스럽게 둘이 붙었다. 그때마다 우성은 작작하라며 온갖 욕을 했다.

억울했다. 여학생과 자리를 옮긴 건 일부러 한 게 맞지만, 그 외에 일들은 불가항력이었기 때문이다. 기욱은 그런 불가항력이 어째서인지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몇 번인가 자연스럽게 짝을 할 무렵, 나는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아무도 우성에게 다가오지 않는 거지? 4월이 끝나 갈 무렵 반에 있는 몇몇 아이들과 말을 튼 나와 달리 우성과 제대로 대화를 한 학생들은 본 적이 없었다.

점심시간, 다른 반 남학생 무리와 식사를 하는 나와 달리 우성은 동급생이 아닌 선배들과 어울렸다. 그 선배들 무리에 그날 본 남자 선배가 있는 건 당연했다.

자리를 바꿔 준 여학생과 제법 친해졌을 무렵 여학생이 우성에 관해서 얘기했다.

“걔 게이잖아.”

“뭐?”

“왜 그 점심시간마다 3학년 선배들이랑 다니잖아. 그 선배랑 사귄다고 소문 다 났어. 솔직히 여자애들 사이에서 한동안 너도 막 게이 아니냐고 떠들었거든. 한우성 걔 선배 말고 친구 없으니까. 대박, 근데 진짜 모르고 같이 다녔어?”

고개를 끄덕였다. 여학생이 말을 이어 갔다. 중학교 때 되게 유명했어……. 중간부터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반을 포함한 동급생들의 미묘한 시선, 뜯어진 셔츠 단추, 장난으로 떠든 선생님의 말에 얼굴을 붉히는 태도, 키스 마크, 남자 선배와 통화를 할 때면 달라지는 말투, 교실에서 쫓겨나던 날 옥상으로 들어가던 남자 선배. 모든 게 들어맞았다.

그 후에도 우리의 관계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내가 살짝 불편해한다는 걸 눈치를 채고 우성이 먼저 거리를 뒀다. 쉬는 시간, 가끔 몰래 담배를 피우러 올라가거나 몇 번인가 매점을 내려갔던 일들이 사라진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똑같았다. 아마도 게이라는 사실을 내가 눈치챘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우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는 원래부터 그런 말을 할 만큼 친밀하지 않았다.

‘이런.’

중간고사를 일주일 앞두고 교과서를 학교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일이 주말이라 지금 가져오지 않으면 일이 귀찮아질 게 틀림없었다. 교무실에서 열쇠를 빼 온 뒤 서랍에 있는 교과서를 꺼냈다. 교실 문을 닫자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철문이 삐걱거렸으나 잠기지는 않았다.

문을 열고 옥상으로 들어갔다. 붉은 노을이 예쁘게 진 저녁이었다. 내려가기 전 담배나 피우고 갈 겸 불을 붙였다. 잘 켜지지 않는 라이터에 간신히 불을 붙이느라 몇 번이나 고생해야 했는지 몰랐다. 어렵게 붙은 라이터 불을 붙일 즈음 미묘한 소리가 들렸다.

“으응, 하으읏….”

옥상 뒤편이었다. 젠장, 어떤 새끼야. 신경질적으로 담배 필터를 씹었다. 고등학생, 한창 좋을 때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이런 일로 꼴리거나 할 시기는 진작 지났다.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대 마치 음악을 감상하듯 신음을 감상했다. 으흐, 으응, 좋아. 목소리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무렵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입안을 벗어난 담배가 옥상 아래로 떨어졌다.

남자 목소리였다.

“하, 하으. 좋아? 어?”

“하응, 응, 거기… 읏, 하앙!”

섹스하는데 남자가 있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게 아니었다. 몇 번이나 잘못 들은 거라며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리 들어도 이건 남자 목소리였다.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됐다.

하,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다시 물었으나 라이터 불이 켜지지 않았다. 탁탁거리는 소리에 신음이 잠시 잦아졌다.

“으응, 누가 있는… 하읏!”

신음의 주인공은 몇 번이나 사람이 있다는 걸 강조했지만, 상대는 눈 하나 끔벅하지 않았다. 일부러 소리를 죽였다. 갔나 보지. 그가 말하기 무섭게 또다시 섹스가 이어졌다. 젠장,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이빨로 씹었다. 필터가 반쯤 튀어나왔다. 내려가야 하는데 내려갈 수가 없었다.

나도 섹스를 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아니, 나이 또래보다 경험이 많으면 많았지 절대 적지는 않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남자끼리 섹스를 한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생각한 적도 없었다. 상상할 수 없는 풍경에 당혹감이 밀려왔다.

신음에 귀가 익숙해질 무렵 나는 다시 인상을 찌푸려야만 했다. 신음의 주인공이 어디서 많이 들은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남자의 섹스가 절정에 달하고,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으으, 형…. 하앙, 응, 으으응, 흐아!”

“으응. 하읏… 우성아. 하으…!”

남자―추측건대 그날 옥상 앞 계단에서 본 선배의 목소리가 잦아졌다. 사정했다는 걸 직감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난간에 몸을 기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운동장과 학교 현관이 한눈에 보였다. 담배를 던진 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머리에서는 선배가 사정하기 전 불렀던 이름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우성아.

내가 아는 우성은 학교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 * *

“안녕하세요.”

중학교 선배의 자취방에서 그―선배를 다시 만났다. 집안 사정으로 부모님이 해외로 나가 있어 중학교 2학년 무렵 자취를 했다고 들었다. 그 선배의 집은 사실상의 아지트나 다름없었다. 내 학교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알게 된 사람이 있다며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고3인데, 한 살 많다고 했나? 어쨌든 복잡하다며 만나서 말하는 게 빠르다고 했다. 이미 서로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간 터라 아무나 상관없었다. 중학교 선배가 소개해 주겠다고 했던 선배가, 우성과 섹스를 했던 그 선배일 거라는 생각은 당연히 하지 못했다.

인사를 하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동안 얼어붙은 것처럼 서로를 바라봤다. 근처에 있던 선배가 등을 때리자 그제야 정신이 들어 인사를 했다.

“어, 그래.”

내 인사에 선배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 앉아. 앉아. 선배는 건너편 자리에 앉았고, 조금 전까지 여자 선배와 떠들며 스킨십을 하던 나는 말없이 술만 마셨다. 술을 마시고 떠드는 내내 건너편에 있는 선배가 신경 쓰였다.

남자와의 섹스는 어떻게 하는 거지? 선배에게 안기는 우성의 모습을 생각하니 술기운이 올라왔다. 새끼, 벌써 취했네. 옆에 있는 친구가 어깨를 쳤지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새벽, 자취방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북적하던 거실이 차갑게 식어 갔다. 갈 사람들은 전부 알아서 갔고, 남은 사람들은 남은 사람들끼리 구석에서 술을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선배가 오기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여자 선배와 분위기를 봐서 빠지자며 약속을 잡았으나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여자 선배는 어느새인가 사라지고 없었다. 엉망인 방 안에는 남자밖에 남지 않았다. 뒤늦게 아무 여자나 잡을걸, 하고 후회가 들었다. 역시 욕구 불만이 틀림없었다.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담배를 손에 쥐고 일어섰다. 구석에서 자는 남자 한 명이 발을 붙잡았다. 친구였다. 씨발 새끼. 괜히 친구를 발끝으로 차며 화풀이를 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병신같이 실실대는 꼴하고는. 비틀거리며 자취방 현관문을 나섰다. 1층, 복도를 나와 주차장 옆에서 담배를 물었다.

손에 쥔 담배를 확인했다. 돗대였다. 재수도 없지. 담배 케이스를 구기며 마지막 남은 담배를 입에 물려던 찰나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선배였다. 아까 여자와 나가는 것 같았는데 잘못 본 모양이다. 약간 술에 취한 채로 인사를 했다. 선배의 시선이 아직 물지 않은 담배에 닿았다. 하, 어쩔 수 없이 담배를 내밀었다.

“미안하다.”

씨발, 미안하면 피우질 말던가.

사과하면서도 선배는 결국 끝내 담배를 물었다. 신경질적으로 다리를 떨었다. 힐끗 옆을 바라보는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필래?”

“아뇨.”

“괜찮아. 펴. 다 폈으니까.”

선배의 손안에서 담배가 타들어 갔다. 담배를 돌려 피우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다시 들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선배가 담배를 피우는 내 옆으로 다가왔다. 어깨가 닿을 것 같은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술을 꽤 마신 모양인지 주차장 한쪽 벽에 머리를 기댔다.

걔 게이래. 3학년 남자 선배랑 사귄다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서 여학생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우성이 게이라면 사귀는 사람도 게이라는 뜻인데. 담배를 끄는 척하며 위아래로 선배를 살폈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았지만, 체격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고3이라 그런지 어른스러운 티가 나긴 했으나 굳이 따지자면 그냥 조금 잘생긴 대학생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잘생겼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래도 마음먹으면 여자 한두 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꼬실 만한 외모는 맞았다. 그런 사람이 왜 굳이 남자를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시선을 눈치챈 선배가 고개를 돌렸다.

“너, 이름이 뭐라고?”

“박기욱.”

“박기욱. 그래, 기욱아. 몇 반이냐?”

“4반이요.”

“전학 왔냐? 2학년?”

“아뇨, 1학년인데요.”

“어쩐지. 못 본 얼굴이더라.”

선배가 친하게 지내자며 등을 툭툭 건드렸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냥 그렇다고 하고 넘겼을 행동이 어딘가 부담스러웠다.

“그때 옥상에서 나 봤지?”

“네? 네.”

선배의 질문에, 순간 당황했으나 이내 적당히 얼버무렸다. 다행히 섹스 얘기가 아니었다. 그날, 문학 시간에 쫓겨나고 계단에서 내려오던 걸 말하는 거였다. 하긴, 그걸 대놓고 물어보는 미친놈이 어디 있겠나.

“다음부턴 만나면 인사하고.”

“예.”

“자주 보자.”

선배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는 별거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왜 여자랑 안 나갔냐? 술 얼마나 마셨냐? 생각보다 잘 마시네.’ 같은 일반적인 대화였다. 선배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고 긴장했던 첫 만남과 달리 나를 대하는 선배의 모습은 다른 선배나 형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를 두려 했던 내가 민망해질 정도였다.

선배는 그러니까, 중학교 무렵 조기유학을 갔다 왔는데, 사정이 있어 1년 정도를 꿇었다고 했다. 결론은 선배가, 법적으로는 성인이라는 뜻이었다. 집 근처에 살았던 탓에 우리는 가끔 근처 놀이터에서 단둘이 술을 마시고는 했었다. 어느 정도 친해질 무렵에는 담배를 살 때도 누나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 성인인 선배를 둔다는 건 여러모로 편했다.

자주 보자는 선배의 말이 거짓말은 아닌 듯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얼굴을 봤다. 주로 내 술자리에 선배가 끼는 형식이었지만, 거꾸로 선배가 나를 부를 때도 있었다. 조금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냥 나갔다.

고3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대학생 선배들을 많이 알았고, 대학생들의 술자리는 확실히 달랐다. 몇 번인가 나가고 나니 친구들과 모여 술을 먹는 건 재미가 없었다.

그날도 그랬다. 학원을 끝내고 10시가 좀 안 됐을 금요일 저녁에 전화가 왔다. 번화가에서 술을 마시고 있으니 오라는 전화였다. 누나에게 적당히 거짓말을 하고 교복을 갈아입은 뒤 선배가 일러준 술집에 갔다. 그냥 들어오라고 하는 평소와 달리 술집 앞에서 전화하라고 했다.

가끔 까다롭게 검사를 하는 곳이 종종 있는 터라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말을 맞추거나 할 줄 알았던 내 예상과 달리 선배는 나를 술집 근처 옆 골목으로 이끌더니 뜻밖의 제안을 했다.

“기욱아.”

“네?”

“오늘은 여자랑 가지 마라.”

선배는 대답을 재촉했다. 번화가 주변의 클럽 음악이 시끄럽게 울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선배가 있는 술자리에서 몇 번인가 대학생 누나와 나간 적은 있었으나, 그리 많은 횟수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아직 고등학생이다 보니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됐던가? 잘 이해할 수는 없으나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고 느낀 나는 분위기에 휩쓸려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선배가 들어가자고 했다. 나는 선배의 뒤를 따라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모처럼의 금요일, 외박까지 허락받은 저녁이었다. 옷차림만 봐도 작정하고 나왔음을 알 수 있었다. 약속은 약속이니 지켜야 했다. 가장 좋은 건 선배가 다른 여자와 나가는 것이었지만, 술을 마시고 지켜본 결과 다른 여자와 나가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일찍 나가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여자 대신 술을 택했다. 평소보다 배는 먹었던 것 같았다.

옆에서 적당히 마시라며 몇 번인가 떠들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다들 술에 취해 밖을 나왔다. 그게 2차였는지 3차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정신이 없는 나를 챙긴 건 선배였다. 선배와 나는 같은 아파트에 건너편에 살았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은 선배는 제법 멀쩡해 보였다. 더 마실 사람은 더 마시고, 갈 사람은 가기로 했다. 갈 사람들이 가고 거리에는 나와 선배 둘밖에 남지 않았다. 선배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술에 취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필름이 끊기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마냥 제정신은 아니었다.

“…아. 야, 박기욱.”

선배가 어디론가 통화를 했다. 집에 전화한 모양이었다. 친구네에서 잔다고 적당히 핑계를 댄 뒤 선배가 향한 곳은 골목 안쪽에 있는 모텔이었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붉은색 복도가 인상적이었다. 술에 잔뜩 취한 나를 보던 주인은 적당히 계산하고 들어가라고 했다.

그런 손님은 종종 있었고, 의심할 이유도 없었다. 침대에 눕자 조금은 살 것 같았다. 조금 더운 것만 제외하면. 새로 산 셔츠를 만지작거렸다. 단추를 풀려 했으나 생각처럼 잘은 안 되었다. 두둑, 하고 결국 손끝에서 단추가 뜯겨 나갔다.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셔츠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과 선배가 튼 에어컨 바람에 조금은 살 것 같았다. 술기운에 눈을 반쯤 감으며 여자랑 나오지 않은 걸 미친 듯이 후회했다. 아아, 진짜. 잠이 들 즈음 침대가 푹 하고 꺼졌다.

몸 위로 뭔가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뺨을 만지고 있었다. 크고, 거친 게 사실 썩 마음에 드는 손은 아니었다. 목이 타는 것 같이 말랐다. 입안을 오물거리자 정체를 알 수 없는 게 입안으로 들어왔다. 얼마 가지 않아 그게 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와 키스를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본능적으로 입안을 휘감았다.

으음, 읍. 우리는 생각보다 오래 키스를 했다. 상대의 허리를 안았다. 한쪽 팔로 안기에는 조금 큰 느낌이 들었다. 무게감도 있었다. 키가 큰 여자인가? 몸이 뒤로 눕혀졌다. 상대 쪽에서 멋대로 내 옷을 벗겼다. 언제나 그렇듯 적극적인 건 나쁘지 않았다. 술에 취한 데다 사실 귀찮았다.

바지 버클을 내리고, 손이 페니스에 닿았다. 페니스에 닿는 거친 느낌이 여전히 거슬렸으나 그렇다고 마냥 싫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좀 불편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느낌에 익숙해져 갔다. 입에다 넣은 모양인지 혀가 움직이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하으, 아슬아슬한 느낌에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 반쯤 앉았다. 답답하고 애매한 건 딱 질색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갈 뻔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벅지 사이에 있는 상대의 머리를 붙잡고 흔들었다. 생각보다 머리카락이 잘 잡히지 않아 불편했다.

여자가 단발머리인가? 상대가 불편해하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펠라를 하라고 강요한 적도 없었고, 먼저 시작한 건 그쪽이었다.

입안에 사정했다. 동시에 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사실 입안에다 했는지 밖에다가 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밑에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내 위로 올라왔다. 당연하게 엉덩이를 잡고 넣으려던 순간 인상을 찌푸리며 술이 깼다. 엉덩이 근처를 미끄러지듯 그냥 지나친 내 페니스는 엉덩이 대신 다른 남자의 페니스와 맞닿아 있었다.

페니스라고?

……나 외에 다른 남자의 물건이 있을 리가 없었다. 씨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뒤늦게 이 섹스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하아, 흐, 으으….”

내 위에서 자신의 페니스를 흔들고 있는 선배가 보였다. 금방이라도 갈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던 선배가 자신의 페니스와 내 페니스를 맞댔다. 당혹감에 욕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낯선 자극은 내 사고를 흐리게 만들었다. 페니스를 비비며 허리를 흔드는 선배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분이 묘했다.

선배와 나는 거의 동시에 사정을 했다. 선배의 정액이 목 근처까지 올라왔다. 혀를 내민 선배가 내 목에 있는 정액을 핥았다. 미친 것 같았다. 그리고 나 또한 제정신이 아니었다. 허리를 붙잡고 선배의 위로 올라타 키스를 했다. 선배의 두툼한 손이 내 뺨을 만졌다.

언제 옷을 벗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선배도 나와 마찬가지로 옷을 벗은 상태였다. 가슴 부근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아무것도 없는 평평한 가슴이 남자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했다.

진짜 느끼나? 호기심에 유두 쪽으로 입을 가져다 댔다. 여자의 가슴을 애무하듯 천천히 핥았다. 불편한 감도 있었으나 이건 이거대로의 매력이 있었다. 다른 손으로 옆 유두를 만지작거렸다. 밑으로 부풀어 오른 선배의 페니스와 내 페니스가 그대로 맞닿았다.

읏, 선배가 허리를 살짝 튕겼다. 움찔거릴 때마다 서로의 페니스가 부딪히며 쓸렸다. 익숙하지 않은 자극, 첫 섹스를 할 때와 비슷한 흥분이었다. 어쨌든 느끼긴 하는구나.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였다. 다리 사이로 두 개의 페니스가 금방이라도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다. 남자끼리의 섹스는 관심도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이에 맞지 않은 경험, 상대가 남자라 해도 결국은 사람이었다. 내 경험상 남자나 여자나 꼴리면 앞뒤 가리지 않는 건 똑같았다. 선배의 표정은, 마치 금방이라도 넣어 달라고 조르는 여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왜 거기서 그런 말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좋아요?”

아까의 키스 탓인지 선배의 입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선배의 입안으로 손을 살짝 집어넣었다. 손가락을 핥는 것이 여자와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선배를 불렀다.

“선배.”

“…아. 기욱아. 읏.”

“제가 뭘 해 주길 원해요?”

“…줘. 그거.”

사실 뭐라고 말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하, 남자를 상대로 말을 하는 나조차도 미친 짓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선배가 목 뒤로 팔을 걸었다. 나는 뭘 어떻게 하는지조차 모른 채 선배가 내 위에서 했던 것처럼 서로의 페니스를 비볐다.

부풀어 오르는 서로의 페니스를 느끼며 허리를 움직였다.

그 일이 있었던 뒤부터였다. 달라진 건 없었다. 내가 마시는 술자리에 선배가 오고, 선배가 가는 술자리에 내가 오는 게 전부였다. 단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는 이제는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여자와 밖에 나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좀 불편했으나, 선배와 패팅을 할 즈음이면 나는 언제나 술에 잔뜩 취해 있는 상태고, 남자와 패팅을 한다 해서 여자와 섹스를 하지 않는 것 또한 아니었다. 무엇보다 섹스는 역시 여자와 하는 게 가장 기분이 좋았다. 가슴을 애무하는 것도, 허리를 한 번에 안을 수 있는 것도 키가 크고 체격이 비슷한 남자보다는 작은 여자가 훨씬 편하고 좋았다. 선배와의 패팅은 그러니까 어쩌다 한 번 호기심 섞인 욕구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날도 그랬다. 술에 좀 취한 나를 데리고 선배가 집에 갔다. 우리 집은 안 되니 선배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동네에는 거의 사람이 없다시피 했다. 텅 빈 놀이터 담벼락에 잠시 쉬자며 몸을 기댔다.

그날은 몸이 좀 피곤해서 그런지 눈이 감겨 왔다. 자지 말라는 선배의 말이 들려왔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선배의 몸과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서로 입을 맞췄다.

선배의 손이 내 옷 안으로 들어왔다. 뒤늦게 야외라는 생각에 선배를 말리려 했으나 술에 취한 선배는 쉽사리 말을 듣지 않았다. 묵직한 손이 드로어즈 위로 닿았다.

“읏! 선배 적당히…!”

툭― 하고 뭔가가 떨어졌다. 무슨 봉지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동시에 나와 선배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떨어진 편의점 봉투에서 과자며 아이스크림들이 튕겨 나왔다. 굴러간 아이스크림이 내 발에 닿았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우성이었다.

우성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내밀자 우성이 고개를 들었다. 가로등 조명 아래로 눈물이 고인 우성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우는 우성을 달래기보다 섹시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제정신이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우성은 내가 내민 아이스크림을 내치고 도망갔다.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주워 든 나는 골치 아프게 됐다며 뒷목을 긁적였다. 나보다는 선배 쪽이 더 문제 같았다. 선배는 우성을 달래러 가기보다는 귀찮다 죽겠다며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되물었다. 술에 취했지만, 그 정도 정신은 있었다.

“안 쫓아가도 돼요?”

“냅 둬.”

무슨 영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 술기운이 다시 올라왔다. 선배가 집에 가서 마저 하자며 제안했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선배와 패팅을 하는 내내 울고 도망치는 우성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패팅은 결국 내가 사정을 하지 못함으로 끝을 맺었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선배의 집을 나왔다.

다음 날, 방과 후 선배에게 옥상에서 고백을 받았다. 평소보다 일찍 끝나 학생들은 대부분 집에 간 상태라 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선배의 고백이 난 좀 당황스러웠다. 아니, 많이 당황스러웠다. 우리의 관계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선배와 패팅을 할 때도 나는 늘 여자 친구가 있었다. 고백은, 그러니까 둘 사이의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섹스 파트너라는 말이 남자와 남자와의 관계에서도 통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나는 선배를 그 정도로 생각했다. 뭐, 진짜로 섹스까지 한 적은 없지마는. 적어도 나는 아직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좋았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선배의 고백에.

“전 여자가 더 좋은데요.”

하고 저도 모르게 말하고 말았다. 뒤늦게 그 말이 상대를 얼마나 상처 주는 말이었는지를 깨달았다. 허나 사실인걸.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짜증이 잔뜩 난 얼굴로 선배가 욕을 내뱉었다. 이쯤 되면 고백인지 협박인지 애매할 지경이었다.

“씨발, 박기욱. 장난해? 너도 좋아서 한 거잖아.”

“…….”

“아, 오. 씨발. 그러니까. 내가 욕하려던 게 아니라, 진짜 미안하다. 그게 아니라, 내가 좋아해서 그래.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지?”

선배는 말끝마다 씨발, 하며 욕을 내뱉었다. 씨발의 끝은 좋아한다였다. 나는 한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선배의 일방적인 말이 이어졌다. 급기야 선배의 입에서 우성이 나왔다.

“들었다. 너 반에서 우성이랑 다닌다며. 씨발, 그 좆같은 새끼 뒤지든지 말든지. 나랑 아무 상관없는 개자식이라고. 어? 기욱아. 대답 좀 해라. 형 미칠 것 같다 진짜. 너 어제 일 때문에 그래? 말만 해라. 당장 헤어질 테니까.”

분명 우성이 들었으면 상처 받을 말들을, 선배는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이쯤 되면 두 사람이 정말로 사귀었던 건지 아닌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선배의 말들은 나를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하였다. 사실 선배와의 패팅 이후 우성에게 미안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미안함보다 내 마음속을 더욱 지배했던 것은 선배와 패팅을 하면 할수록 우성이 떠올랐던 점이었다. 내 앞에서 가는 선배의 모습, ‘옥상에서 우성과 섹스를 할 때도 그렇게 갔던 걸까? 그때 우성은 어떤 표정이었을까?’ 하는 생각들을 무의식중에 하면 저도 모르게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흥분을 지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우성은 오늘 나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우성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이동 수업이나 체육 수업이 없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날이 종종 있었으나 오늘은 조금 더 했다. 수업 시간 내내 싸늘한 공기를 지울 수 없었다. 선배는 우성과 헤어진다고 했다. 그럼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답답해하는 선배를 앞에 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배.”

“…….”

“저 좋아하세요?”

“그래 , 좋아한다. 박기욱.”

침묵이 흘렀다. 순간 남자도 괜찮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선배를 밑에 깔고 패팅을 할 때 알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여자와는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선배와의 관계를 지속할 리가 없었다.

정복욕, 내가 중학교 시절 더 예쁜, 더 몸매가 좋은 여자들을 안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과 조금은 닮아 있었다. 나와 비슷한, 같은 남자를 깔고 울린다는 그 쾌락. 단순한 사정이 아닌 진짜 남자와의 섹스가 궁금해졌다. 왠지 지금이라면 그것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생각할 시간 좀 주세요.”

―사실은 지금 당장도 괜찮았지만.

사람이란 건 좀 안달이 나야 매력이 있는 법이었다. 그게 다였다. 끼익, 철문 소리가 들렸다. 문틈 사이로 누군가 있었다. 도망치듯 사라졌지만 나는 그게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우성이었다. 우성이 틀림없었다. 내가 우성을 쫓으려 하자 선배가 내 팔을 붙잡았다.

“씨발 새끼, 내가 불렀어.”

“왜 그랬…….”

좆같은 놈이, 달라붙는 것도 적당히……. 선배가 뭐라 변명을 하며 떠들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선배의 팔을 뿌리치고 옥상을 내려왔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와 복도를 둘러봤다. 복도 끝에 도망치는 우성이 있었다. 정확히는 남학생 같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친 듯이 뛰었다. 우성의 달리기는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다.

뒷모습을 보고 우성이라는 걸 알아차린 뒤 간신히 우성을 붙잡았다. 서로 빠르게 뛰던 중이라 난데없는 멈춤에 우성의 몸과 내 몸이 휘청거렸다. 퍽, 소리와 함께 나와 우성이 동시에 넘어졌다.

바닥으로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친 우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몸을 살짝 일으켰다. 내 밑으로 우성이 있었다. 우성은 아픔에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었다.

같은 남자를 안는다는 쾌감, 정복욕, 울리고 싶다.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선배가 아니었다. 내가 섹스를 하고 싶은 건, 쾌락에 안달이 나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건 우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방과 후 이른 저녁, 복도 바닥에 누워 서로를 보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웃겼다. 우성이 비키라며 발버둥을 쳤다. 나는 본능적으로 우성의 양팔을 붙잡아 눌렀다. 몇 번인가 거부했으나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안 우성이 살짝 포기했다.

“우성아.”

“…….”

“너 나 좋아하냐?”

내가 손에 힘을 풀고 있는 사이 우성은 손을 뺐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몸이 한 바퀴 돌았다. 시멘트 바닥에 부딪힌 등이 아려 왔다. 내 위로 올라탄 우성의 얇은 팔이 목을 눌러 숨이 막혀 왔다. 내가 컥컥대자 우성이 손을 뗐다.

“씨발, 뭐가 어떻게 돼…… 아윽!”

우성의 주먹이 배를 가격했다. 중학교 시절, 몇 번인가 패싸움으로 경찰서에도 가 보고 나름 주먹을 좀 쓴다고 애들 사이에서 알려진 나였지만 이건 정말로 아팠다. 저 체격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손을 턴 우성이 내 위에서 일어났다. 위에 올라탄 우성을 잠시나마 섹시하다고 느꼈던 내가 바보 같았다. 몸을 반쯤 일으켰다. 완전히 일어나지는 못했다. 우성은 손을 탈탈 털었다.

“죽어 버려.”

여전히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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